17. 에스파다 도 오르덴
김인수는 다시 최재철의 모습을 취하고 인롱의 팔찌로 분리해 둔 공간을 닫았다. 만약을 위해 반지 운반자의 팔찌로 존재감을 없앤 그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다른 인적이 없는 장소까지 나와서 서서히 존재감을 되돌린 그는 어벤저 네트워크의 접속 단말기를 겸한 휴대폰을 꺼내어 들었다.
“여보세요.”
-아, 선생님. 봐, 내가 이겼잖아.
분위기를 보니 이지희와 오연화가 서로 누구한테 먼저 전화가 올지 내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최재철이 오연화에게 전화를 걺으로써 오연화가 이긴 걸 테고.
‘별생각 없이 건 건데.’
최재철은 픽 웃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일은 잘 처리된 거 같네요.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오연화의 말을 듣자하니 차원 진동기가 일으키는 강렬한 차원 진동을 전자 상가에서부터 감지하고 있었고, 최재철이 상황을 정리하면서 진동이 사라진 것까지 캐치해 낸 것이리라.
그녀의 감지 능력은 꽤 뛰어난 편이었으니,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래. 그쪽이야말로 노트북은 잘 샀어? 바가지는 안 썼고?”
최재철의 기준으로 용산, 하면 바가지였다. 그 이미지는 10년 전의 것이라 지금은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아… 안 썼어요. 뭐, 정확히는 원래 쓸 뻔했죠. 바가지.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원래 노트북 한 대에 500만 원이라고 주인아저씨가 그랬는데, 어벤저 라이센스를 꺼내니까 갑자기 220만 원이 됐어요.
“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벤저 라이센스는 애초에 왜 꺼냈어?”
-그야 면세 받으려고요. 면세 받으려면 어벤저 라이센스 꺼내서 보여줘야죠.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식으로 대답한 오연화는 곧 뒤늦게 눈치챘다는 듯 부연 설명을 했다.
-아, 선생님은 오늘 A급 됐었죠. A급 이상은 부가가치세가 면제예요. B급은 반이고요.
“뭐야, 부가가치세가 몇%인데?”
최재철의 기억으로는 부가가치세는 10%였다. 하지만 오연화의 입에서 나온 숫자는 달랐다.
-30%요.
닫힌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미친……. 10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가 서울에서, 한국에서, 지구에서 떠나 있던 동안 차원 균열이 열렸고, 차원 균열에서 튀어나온 어보미네이션에 대항하기 위해 정부는 높은 수준의 증세를 해야 했다. 당장 나라가 망할 위기였다. 아무도 불만 같은 걸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상황이 안정화되고 어보미네이션이 통제할 수 없는 몬스터에서 무궁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자원이 되었지만, 올라간 세금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올라가서 아직까지 떨어지지 않은 세금 항목 중에는 부가가치세도 있었다.
그런 이야기였다.
“부가가치세가 30%인데, 왜 노트북 값이 절반 미만으로 떨어져?”
-저희가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들이잖아요.
굳이 반박할 이유가 없는 이야기였기에 최재철은 잠자코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다. 오연화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주인아저씨가 얕보고 바가지를 좀 세게 씌웠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저희가 둘이 동시에 A급 라이센스를 꺼내드니까…….
“졸아서 씌웠던 바가지를 도로 벗겨줬다, 이 말이로군?”
-네. 원래 받으려던 면세 혜택도 받았고요.
한심한 이야기였다. 평소에 두 배 가까이 바가지를 씌워가면서도 안 망하고 장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이야기였고.
하기야 점주 입장에서도 황당하긴 할 터였다. 손님이 둘 찾아왔는데 하나는 10대 초반 여성, 또 하나는 20대 초반 여성이라서 한번 거하게 벗겨먹을 생각을 했더니 어디서 보기도 힘든 A급 라이센스가 두 개나 튀어나오니, 기겁할 노릇이었겠지. 그 장면을 상상해 보니 좀 웃기긴 했다.
“좋아, 그럼 합류하지. 너희 지금 어디 있어?”
-U파크몰 정문이요.
“그쪽으로 갈게.”
-기다릴게요.
최재철은 전화를 끊었다. 여기서 U파크몰 정문이면 걸어서도 충분히 갈 만한 거리였다. 굳이 택시를 부를 필요도 없었기에 그는 그냥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최재철도 이제 A급 어벤저니 어벤저 스킬을 쓴다고 사람들이 별로 이상하게 보진 않겠군.’
귀찮아진 나머지 그는 탕 하고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그는 U파크몰 정문 앞에 착지했다. 사람은 많았고, 그들의 시선이 최재철에게 꽂혔다.
“와, 지금 봤어? 사람이 날아왔어.”
“어벤저야. 어벤저 스킬이구나, 저게.”
최재철은 별생각 없이 쓴 능력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이것도 신기해 보였는지 수군거림이 그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아, 선생님!”
오연화와 이지희가 최재철을 알아보고 그의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웅성거림이 한층 커졌다.
“와, 역시 어벤저쯤 되니까 클라스가…….”
“여자 둘 끼고 다니는 거 봐. 눈꼴시지 않냐?”
“쉿! 듣겠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듣고서 오연화가 킥킥거렸다.
“여기서 기다리는 동안 저희가 무슨 말 들었는지 알아요? 연예인 아니녜요, 연예인.”
“봐, 나 외모 나쁘지 않다니까. 왜 못 떴지?”
이지희가 툴툴거렸다. 최재철은 그들의 말에 픽 웃었다.
“어벤저가 연예인이라는 소리 듣고 좋아하니?”
“평범한 어벤저보다는 연예인이 더 잘 벌지 않아요?”
오연화가 눈을 땡그랗게 떴다. 물론 그녀는 평범한 어벤저가 아니다. 이지희마저도 그녀의 말을 듣고 픽 웃었다.
“아서라, 평범한 연예인보다는 평범한 어벤저가 더 잘 벌어.”
“그래?”
이지희를 올려다보며 놀란 듯 말하는 오연화를 끌고, 이지희는 최재철에게 말했다.
“가요, 스승님. 사람들 시선이 귀찮아요.”
“연예인처럼 말하네.”
“이런 말,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이지희가 혀를 쏙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노트북을 사다주는 발품을 너희가 팔았으니, 밥을 내가 사야겠군.”
“안 돼요, 스승님.”
“뭐가 안 돼?”
“벌써 예약했거든요, 밥집. 제 이름으로!”
이지희가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엥? 그래? 돈가스라도 먹으러 가는 건가?”
“돈가스도 괜찮지만 기왕 금요일 저녁인데. 저도 어제부로 돈 좀 벌었고.”
“그 돈 나도 번 돈인데.”
“에이, 아무튼 가요.”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일행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
이지희가 예약한 밥집이란 최재철과 그녀가 한 번 간 적이 있었던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와, 이런 좋은 곳에 둘이서만? 치사하게?”
오연화가 툴툴거렸다.
“연화가 여기 오자고 했어요. 쏘는 건 제가 쏘는 걸로.”
“좋은 추억은 공유해야죠. 그렇죠, 선생님?”
“별로 좋은 추억이랄 것까진 없었는데. 뭐, 맛은 있었지만.”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 식당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처음 먹었을 때보다는 조금이라도 익숙해진 느낌으로 최재철은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연화는 고기 정말로 안 먹는구나.”
이지희가 말했다. 메인 디쉬가 거의 고기 요리인데, 오연화는 대부분 다른 요리를 선택했다. 주로 샐러드와 스프, 그리고 생선 요리 위주로.
“아… 그게.”
오연화는 좀 말하기 꺼려지는 듯 대답을 망설였다.
“뭐 상관없으려나.”
그러나 그녀는 곧 피식 웃으며 입을 다시 열었다.
“저도 어릴 땐 고기를 좋아하고 고기만 먹었는데, 그것 때문에 엄마가 타박을 해서요. 매일 반찬 투정이냐, 생선도 좀 먹어라, 채소도 먹어라, 그렇게요. 지금이야 돌아가신 후지만, 이제 와서라도 엄마 말을 따르는 거죠.”
오연화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며 생선 살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지희는 고기 한 조각을 썰며 말했다.
“음… 그랬구나. 그래도 지금 너 먹는 거 보시면 고기도 좀 먹어라, 하시지 않을까?”
“그럴까요?”
“뭐, 나도 모르지만.”
“그게 뭐예요.”
“그야 모르지. 나도 철들기 전에 고아가 됐으니까.”
이지희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연화는 아니었던 듯 식기를 움직이는 손이 잠깐 멈췄다.
“먹어볼래? 고기.”
이지희는 마치 오연화를 위해 썰었다는 듯 그녀의 작은 입 크기에 맞춰 잘라낸 고기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내밀었다.
“…네.”
오연화는 입을 벌렸고 이지희는 그녀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었다.
“맛있네요.”
한참을 오물오물 씹던 오연화는 그런 감상을 남겼다. 그녀의 그런 반응에 이지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역시 고기는 최고지?”
“아뇨, 이 생선 요리가 더 맛있긴 해요.”
“뭐라?”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
B22
식사를 마친 후, 최재철은 그녀들과 헤어졌다.
이제부터는 김인수의 시간이었다.
“복수의 시간이지.”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추경준의 증언에 의하면 WFF는 모든 병력을 수도권으로 집결시켜서 엄중 방어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강철 가면의 괴한’이 논산에서 수도권으로 올라오는 경로로 이동하면서 3개의 차원 균열을 닫았기에, 다음 목표는 서울과 파주라고 생각한 배치인 것 같았다.
물론 그 예측은 그리 틀리지는 않았다. 실제로 김인수는 차원 균열을 닫은 후 서울로 향했으니까. 최재철은 다음 날 출근을 위해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지 않고, 그냥 이동 경로에 맞춰서 도중에 있는 WF의 차원 균열을 닫았다.
하지만 WFF는 김인수, 강철 가면의 괴한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김인수에게는 좋은 일이다. 덕분에 김인수는 WFF의 허점을 찌를 수 있었으니까.
그는 경북 지역의 WF 소유 차원 균열을 다섯 개 닫았다.
추경준의 증언대로 논산 이남의 차원 균열에는 어벤저가 전혀 배치되지 않았다. 경비 부대가 나름 방어에 나섰지만, 그 훈련도와 장비 수준은 논산의 경비 부대에 크게 못 미쳤다.
그래서 그는 별문제 없이 아침이 오기 전에 차원 균열 다섯 개를 다 닫아버리고 초시공의 팔찌를 이용해 유유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섯 군데의 CCTV에 강철 가면을 쓴 모습을 다 찍어둔 건 물론이다. 관리 회사인 WFF에게 책임을 물려야 하기에 한 짓이었다.
위험한 짓이었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있었다. 어제와 달리 뉴스는 하나도 뜨지 않았지만 당장 WF의 주가가 급락으로 시작했고, 주식 관련 뉴스에 왜 유연학은 바로 퇴임했는데 진가충은 퇴임 안 하냐는 댓글마저 달렸다. 뉴스가 안 떠도 소문이 도는 것이다.
“언론 통제도 한두 번이지, 빈도수가 너무 잦으면 이런 부작용도 생겨야지.”
흡족하게 인터넷 뉴스 댓글란을 확인하며, 최재철은 혼잣말을 했다.
사람들이 뉴스와 신문을 믿지 않는다. 소문을 더 믿어버린다.
돈과 권력이 있는 이라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정보통을 돌릴 것이고, 어지간한 주식 투자자들은 한 발 먼저 입수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WF의 주식을 미리 빼버렸다. 그리고 개미 투자자들이 놀라서 함께 주식을 빼니 뉴스 하나 없이도 이렇게 대폭락이 일어나는 것이다.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 WF가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지도 가늠이 안 되고, 게다가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악재가 연달아 일어나니 실제로 입은 피해액보다도 더 많은 주가가 빠졌다.
어제까지는 완벽히 통제가 가능했던 강철 가면의 괴한에 대한 정보에 대해서도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WF에 원한을 가진 S급 랭커가 일부러 WF 소유의 차원 균열만 노려서 닫고 다닌다는 이야기다.
WF는 어보미네이션 산업으로 커진 회사다. 물론 그전에도 대기업이기는 했지만 세계 급 기업으로 성장한 계기는 역시 차원 균열 덕이다.
그런데 이대로 모든 차원 균열을 잃게 된다면 아예 WF가 내일 망할지도 모른다는 악성 루머까지 유포되는 마당이니, 투자자들이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WF 측에서도 정보 통제를 포기하고 제대로 된 정보를 흘려서야 겨우 상황이 진정기미에 이르렀다. WFF 사장 진가충이 직접 TV에까지 출연해 기자회견을 가졌다.
[경북 지역의 차원 균열은 중요도가 낮아 어벤저를 배치하지 않았던 탓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투자해 주시는 분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보미네이션의 생산성이 높은 수도권에는 중점적으로 병력 배치가 되었으니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김인수는 새로 산 노트북으로 그 인터뷰를 직접 들었다.
“저자가 진가충인가.”
사진으로는 얼굴을 본 적이 있지만, 움직이는 것을 본 것과 목소리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가충이 이런 식으로 언론의 전면에 나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후.”
목소리를 들었다고 바뀔 건 없었다. 그의 진씨 가문에 대한 복수심은 한결같았다.
진가충에 대한 여론은 싸늘했지만 주식은 반등에 성공,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지라 WF가 시장의 신뢰를 어느 정도 회복했음을 알려주었다.
김인수의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울 수는 있는 결과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작살을 내놨으면 감히 어벤저를 다른 곳으로 빼돌려 새 차원 균열을 열거나 여자를 납치해 오라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제자를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결실을 맺은 셈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추가로 차원 균열을 닫아서 진가충의 인터뷰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면 더욱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터였고, 그는 그걸 위한 계책을 하나 마련해 둔 터였다.
진가충을 돌아올 수 없는 나락으로 빠뜨리기 위한 계책.
“우선은 진가충을 잘라낸다.”
진가규나 진현우와는 달리 얼굴 한번 직접 맞댄 적 없는 진가충이지만, 그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어내리는 데는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
조상평.
본래 이지희를 납치하기 위해 진가충에 의해 파견된 B급 어벤저 집단의 막내. 하지만 그는, 그리고 그의 일행은 일부러 태업을 하고 있었다. 이지희의 행동반경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 차 안에서 빈둥거리던 그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임무 종료를 알리는 전화였다. 강철 가면의 괴한이 예상했던 것보다 심하게 날뛰는 바람에 이런 사소한 작전에 투입할 여유도 없어진 모양이었다.
태업이 들키면 명령 거부도 불사할 생각이었던 조상평 일당에게 있어서는 듣던 중 다행인 이야기였다.
“철수하시랍니다, 선배.”
“어, 어어.”
조상평의 말에 최고참 선배가 어디 좀 불편한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최고참 선배만의 일은 아니었다. 다른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불편함이라는 게 묘했다. 마치 상사를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여야 하는 하사관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건 이상했다. 그런 종류의 불편함은 후배이자 막내인 조상평 본인이 느껴야 하는 것일 텐데.
어쨌든 다행이었다. 어차피 더 이상 임무 속행은 불가능했다. ‘그분’을 진가충 같은 속물적인 인간에게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 계속하라고 하면 사표를 던져줄 생각이었지만 뒤늦게라도 뜻을 되돌렸으니 굳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김현직 사장님.”
“아, 네!”
김현직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조상평은 미리 그를 이지희의 집에서 빼서 자신들의 차에 합류시켰다. 별다른 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고분고분 자신들의 지시에 따랐으니까.
이 사람도 사장일 텐데, 어벤저를 상대로 지나치게 겁을 먹는 경향이 있었다. 조상평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지만, 덕분에 일을 진행하기 편하니 ‘굳이 그러실 필요 없다’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희는 이대로 철수하겠습니다. 추후 저희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이 건은 당분간 없었던 걸로 생각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네…….”
김현직 사장은 명백히 안도하는 낯빛이었다. 다행이었다. 감히 ‘그분’을 납치한다는 말도 안 되는 불경한 짓거리를 내켜서 한다면 이 자리에서 그를 죽여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조상평이라고 범죄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 사장님, 혹시 이 일이 다시 진행되거든 제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조상평은 나중에 생각났다는 듯 그런 말을 흘리며 은근슬쩍 김현직과 전화번호를 교환해두었다. 만약 진가충이 또 이 일을 추진하는 불경한 짓거리를 한다면 죽여 버릴 셈이었다.
일을 진행하게 될 새 어벤저도, 진가충 사장도, 그리고 김현직, 이 사람도.
*
보고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 그가 사장실에 들어가서 해야 할 보고는 그의 목숨을 끊어놓을 수도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왜 이 보고를 내가 해야 하지?’
그 의문을 이미 수십 번 떠올렸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사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게.”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문을 열었다.
의외로 사장은 멀쩡했다. 늘 그렇듯 여자를 배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흔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오늘은 그렇지도 않았다. 멀쩡하게 보인다는 의미에서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사장님, 진현우 도련님께서 행방불명되셨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보고부터 했다.
“그건 큰일이로군.”
보고자의 말에 사장, 진가충은 별 흥미 없는 듯 대꾸했다.
“미안하네만 그딴 일에 투입할 인력은 없네. 관련 자료는 폐기하고 없던 일로 돌려. 현우는 행방불명된 걸로 처리하도록.”
진가충의 말에 보고자는 할 말을 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진현우를 살리는 데 얼마가 들었는데! 관련 업무를 진행하던 직원도 많았고, 채무자도 다섯 명이나 희생시켰다. 그 금액과 업무 기록을 전부 폐기하라는 건 그냥 단순히 손해로 끝나지 않는다.
‘진현우를 살리려다 실패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마이너스 처리해 넘어갈 수 있다면 쉽겠지만, 세상일이란 게 그렇게 돌아가던가. 이 기록을 지우기 위해서는 결국 빈 금액과 업무 기록을 다른 데서 메꿔야 한다. 이 책임은 누가 질 건가! 진가충이 지지 않을 건 확실했다.
그러나 여기서 쓸데없는 소릴 했다가는 자신도 전임자처럼 공장으로 보내질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일단 여기서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목숨은 건졌다. 이게 중요한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불행히도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한 가지 보고를 더 해야 했다.
“그리고… 용산에 차원 균열을 새로 여는 데 실패했습니다.”
“뭐라?”
진가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고자의 눈앞도 캄캄해졌다. 그러나 그는 해야 할 일을 계속 해야 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영상 데이터가 남아 있습니다.”
“재생하게.”
대형 프로젝터에 영상을 재생시키자마자, 강철 가면이 커다랗게 떴다.
[이걸로 첫 인사를 하게 되는군.]
강철 가면의 괴한의 목소리가 사장실에 울려 퍼졌다.
[내 이름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 차원 균형을 수호하는 칼날이다.]
“뭔가, 저건?”
진가충이 물었지만, 보고자는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영상은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자네들은 중대한 차원 범죄를 저질렀다. 인위적으로 차원 균열을 열어 차원 질서를 어지럽힌 자네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기에 개입했다.]
팔다리가 다 잘린 참혹한 모습의 추경준이 화면에 비쳤다.
[이건 경고다. 경고에 불과하다. 다시 이런 짓을 벌인다면 다음은 이 영상을 보고 있는 자네들이 이렇게 될 것이다. 내 경고를 허투로 받아들이지 않길 바라기도 하네만, 사실 허투로 받아들이길 내심 기대하도록 하지. 자네들의 팔다리를 끊어놓을 날을 고대하고 있겠다.]
영상은 여기까지.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꺼졌다.
“이게 뭔가?”
“이 괴한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영상을 남겼는지 모르겠지만 안심하십시오, 사장님. 이미 연구소에서 음성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내로 주민등록번호부터 시작해서 전화번호에, 주소에, 이름까지 전부 보고로 올라갈 것입니다.”
보고자는 최대한 빨리,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꿈틀꿈틀. 진가충의 입꼬리와 눈썹이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분노는 그를 향해 터지지는 않았다.
“사흘 내로 보고 올리게.”
“알겠습니다.”
그는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서둘러 사장실에서 나왔다. 사장실의 문을 닫고 그 층을 완전히 벗어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나서야 보고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사표 내고 싶다…….”
그러나 그는 이미 WF의 기밀에 접촉하고 말았다.
기밀에 접촉한 인간이 이 조직에서 빠져나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닐 터였다. 만약 평범하게 사표를 낸다면 인사부는 그의 사표를 수리하고 그의 목을 날리러 오겠지. 물리적인 의미로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을 묻어 버린다는 건 결코 녹록한 일은 아닐 테지만 이 회사는 정말로 그 일을 한다는 걸 기밀을 통해 알고 있었다. 차원 균열과 어보미네이션의 존재가 그런 작업을 더욱 쉽게 만든 면도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 한숨은 한탄의 한숨이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보이지 않았다.
*
보고자가 사장실을 나서자 사장실에는 진가충 혼자 남았다. 그는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긴 한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은 불과 하루만에 5년은 늙은 것 같아 보였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사태는 심각했다.
아버지는 이미 자신에게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욕설을 들어본 게 얼마 만일까.
“어리석은 것들! 무능력한 것들!”
진가충은 발작적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그렇게 외치고 나서야 그는 그게 몇 시간 전 아버지에게 들었던 욕설임을 떠올렸다.
“크… 윽!”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던 그는 책상을 쾅 걷어찼다. 이제는 구하기도 힘든 브라질산 원목으로 만들어진 최고급 책상이 그 자리에서 반으로 쪼개졌다. 그 잔해가 뒤집어져 공중을 비행하다 와장창 부서졌다. 나뭇조각들이 캐비닛이 두두둑 박혔다. 그 탓에 캐비닛이 찌그러지고 구멍이 났다. 캐비닛에 난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 돼!”
진가충은 놀라서 캐비닛을 열었다. 캐비닛 안에 잠들어 있던 승인지 숭인지 하는 여자의 몸에 큰 구멍이 뚫린 게 보였다. 그것도 심장 부위에.
“하… 일이 안 풀리려니 이렇게도 되는군.”
신경질적으로 캐비닛을 닫은 진가충은 이를 으득으득 소리가 나도록 갈았다.
“이게 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그놈 때문이야…….”
그는 나무 파편을 발로 밟아 부수었다.
“누굴 바보로 아나! 뭐? 질서의 검? 지랄하네! 미친 새끼! 어떤 미친 새끼야?”
다시 한 번 발작적으로 외친 그는 캐비닛에 발을 박아 넣었다. 와지끈! 단 일격에 티타늄 합금으로 만든 가볍고 튼튼한 캐비닛이 세 조각으로 쪼개지며 박살났다. 캐비닛에 들어 있던 시체가 충격에 의해 해체되며 그의 얼굴에 피와 살점이 확 튀었다.
“죽여 버리겠어! 그 가면을 벗기고 얼굴을 확인한 후에, 내 친히 그 목을 쳐주지!!”
그의 분노에 찬 눈동자에서 어벤저 오라가 푸른 불꽃처럼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