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A급
금요일이다.
최재철은 입사 첫 주 치고는 꽤 밀도 높은 일주일을 보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왼쪽, 오른쪽 분간도 제대로 못 했던 첫 회사 생활 때보다도 더.
‘그땐 욕먹느라 바빴지.’
그때를 미소 지으며 회상하긴 불가능했다.
“레펠 장비의 생산에는 시간이 꽤 걸릴 모양이더군요. 대장간에서 손으로 두들겨 만들 필요가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주말 동안 밤새서 만들어줄 모양이니 월요일까지 기다려 보죠.”
현오준의 말에 최재철은 악몽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갑이 이렇게 말하면 을은 주말에 야근한다. 이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어쨌든 어제는 제 독단으로 인해 꽤 하드한 일정을 보내고 말았으니 오늘은 휴식을 취하기로 하죠.”
“휴식이요?”
의외의 말이었다. 어제만 해도 오늘 출근하자마자 바로 북한산으로 날아갈 기세였는데, 휴식이라니. 하지만 이것도 현오준의 의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잠깐 침묵하던 현오준은 곧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사측에서 팀 인원을 충원시켜 주겠다고 해서 그 면접에 가야 해요.”
“면접입니까.”
“네, A급 어벤저들이 꽤 참여하는 모양입니다만…….”
그건 좋은 일일 텐데도 불구하고 현오준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제 개인적인 입장을 말하자면 팀에 추가 인원을 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인원으로도 밸런스가 잘 맞는 편이고, 굳이 새 인원을 뽑아서 팀워크를 훼손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결원이 생긴다면 또 모를까.”
현오준은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럼 소신껏 움직이면 될 텐데,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윗선에서는… 억지로라도 인원을 추가로 배치시킬 의향이더군요. 아무래도 낙하산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낙하산이라. 외국계 회사도 사람이 굴리는 곳이라 생각하는 게 비슷한 것 같았다.
하기야 누가 봐도 성공적인 프로젝트. 이미 한 번 크게 성공하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한 숟가락 얹어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긴 할 터이다.
“최재철 씨.”
“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인원을 충원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C급 인원을 빼고 A급을 충원하라는 압력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팀원들의 라이센스 랭크만 보자면 C급은 최재철 딱 하나. 윗선에서는 데이터 상으로 만만한 C급 정도는 언제든 잘라 버릴 수 있는 존재로 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만.”
현오준이 할 부탁이란 건 꽤 뻔했다. 그래서 최재철은 선수를 쳤다.
“B급이면 됩니까?”
“A급으로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최재철의 대답에 현오준은 잠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알겠다니……. 정말입니까?”
“팀장님이 부탁하셔 놓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예 S급은 어떻습니까?”
“그건 안 됩니다.”
“정말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아쉽네요.”
현오준은 웃었다.
“…지금 무슨 대화가 오간 건가요?”
구문효가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
“그건 비밀입니다.”
현오준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대꾸했다.
*
오전 사이, 최재철은 본사의 어벤저 라이센스 평가실로 향했다.
평가실에서 나왔을 때, 그는 A급 어벤저가 되었다.
휴대폰으로 해당 사실을 현오준에게 보고하자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답문이 날아왔다.
“후.”
최재철은 픽 웃었다.
적어도 라이센스 랭크 문제로 팀에서 제외되는 일은 없게 될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입사 닷새 만에 C급이 A급으로 성장해 버리는 건 다소 이채롭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10대 초중반의 나이로 S급이 된 오연화에 비하자면 이 정돈 별로 부자연스러울 것도 없었다.
“A급을 달았다는 게 정말이에요?”
그 오연화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게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만.”
“세상에.”
“전 놀랍지 않아요.”
이지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이 언제든 A급을 달 수 있으실 거라고 전 줄곧 생각해 왔어요.”
“아니, A급이란 게 그렇게 쉽게 달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오연화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진짜 어이가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눈앞의 오연화는 S급이다. 그러던 최재철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아, 그렇지. 지희야.”
“네, 스승님.”
“너도 라이센스 평가실 좀 다녀올래?”
“네? 제가요?”
“응.”
“알겠습니다.”
30분 후, 이지희도 A급이 되어 있었다. 최재철의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이 일주일간 꽤 강해져 있었다. 원래 강했던 차원력을 좀 더 효율적으로 끌어낼 수 있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차원력을 방출한다면 A급 판정을 받는 것도 별로 어렵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도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성장한 거로군요!”
이지희는 뛸 듯이 기뻐하며 보고해 왔다. ‘스승님의!’ 부분을 특히 강조하면서 오연화를 내려다보듯 시선을 던지는 게 대단히 거북했다.
“걔 S급이야, 지희야…….”
“랭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스승님.”
최재철의 지적에도 이지희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였다.
“제가 스승님의! 가르침으로 C급에서 A급까지 성장한 게 중요한 거죠.”
“저도 다시 라이센스 평가 받고 올래요!”
오연화가 어째선지 씩씩대기 시작했다.
“연화야, 넌 S급이라서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을 텐데?”
“C급으로 떨어뜨린 다음에 다시 S급 달 거예요!”
“그러지 마라, 연화야. 그 행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니.”
최재철은 오연화를 간신히 만류했다. 그리고 화제도 돌릴 겸, 최재철은 오연화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아, 맞다. 연화야, 그러고 보니 S급은 어떻게 얻는 거야?”
“S급이요? 선생님이라면 충분히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으신데요.”
오연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꺼냈다. 화제 전환에는 성공했지만 최재철이 듣고 싶은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평가장에서 발급해 주는 건 아닌 것 같던데.”
“네. S급은 처음에는 다룰 수 있는 능력의 종류와 강도로 결정했는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달라지다니?”
“원래는 S급이라는 게 어벤저 네트워크에서 사람들끼리 떠들면서 자기들 멋대로 줄 세우기를 한 끝에 만들어진 거거든요. 저는 보기 드문 염동력 능력자라 꽤 유명한 편이어서 15위에 랭크 시켜준 거구요.”
과연, 이 방법이라면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른 강력한 어벤저들을 위주로 랭커가 구성될 법도 했다. 실제 실력과는 상관없이 매겨질 가능성이 높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어벤저에게 분석 스킬을 날릴 게 아니라면 그나마 좀 객관적인 방법이기는 했다.
“헤에, 그렇군. 그럼 지금은 달라졌다는 건 뭐지?”
“그때와는 달리 어벤저 협회라는 게 생겨서 거기서 지정하는 조건을 맞춰야 해요.”
어벤저 협회라는 게 튀어나왔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아무래도 C급이 접속할 수 없는 부류의 정보인 것 같았다. 계속 설명하라는 최재철의 손짓에 오연화는 이야기를 이었다.
“이 협회라는 게 국가 지정 기관인 건 아니라서 여전히 비공식이긴 하지만 기존의 S급으로 꼽혔던 사람들에게도 S급 랭커 라이센스를 주고 체계를 만들어서 암묵적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예요.”
“암묵적이라.”
하지만 실제로 공공연히 거론되기도 하고, 어벤저들 사이에서는 인정도 받는 게 S급 랭커다. 그 협회란 집단이 본능적으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최재철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보다는 정보다. S급이 접촉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정보.
“그 조건이라는 게 뭐지?”
“가장 먼저 충족시켜야 할 건 일정 횟수 이상의 B급보다 높은 랭크의 작전 임무 수행과 S급 랭크 임무에의 참여 여부고요, 어보미네이션 매각금 총액이 그 다음으로 꼽혀요.”
또 생소한 개념이 나왔다. 최재철 본인은 어벤저 네트워크를 꽤 구석구석 뒤졌던 것 같은데 그런 정보는 없었다. 아무래도 어벤저 네트워크는 랭크에 따라 정보를 상당히 폐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임무에 랭크란 게 있었나?”
“네. 헬필드 안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임무들은 기본적으로 다 B급 이상으로 판정돼요. 뭐, C급을 데리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보통 신체 강화 능력자를 디코이로 쓰는 경우죠. C급이 수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B급 임무가 되겠네요.”
“나처럼 말이군.”
“네?”
“응?”
오연화는 눈을 크게 끔벅거리며 최재철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꽤 귀여워서 그는 한번 오연화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려다가 바로 치웠다.
‘그러고 보니 여자애들은 머리 모양을 망가뜨리는 걸 싫어했었지.’
그런 생각을 문득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연화는 어째선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거야 뭐, 어쨌든.
“S급 랭크의 임무란 게 있어?”
“네. 차원 균열 탐사가 그거예요. 원래는 사실상 미군과 WF 소속 외에는 충족시키지 못하는 조건이죠. 이제는 TA에서도 채울 수 있게 됐지만요.”
“어제부로 말이지.”
“네, 어제부로!”
오연화는 의미심장하게 웃는 최재철과 마주 웃었다.
“아, 또 궁금한 게 있었다. S급 1위는 누구야?”
“지금은 행방불명된 프라이머리 어벤저가 S급 1위로 꼽혀요.”
“행불자도 랭커에 들어 있는 건가…….”
“일종의 영구결번이죠. 어쨌든 인류 최초의 어벤저니까요.”
‘과연, 기념 같은 건가.’
납득 못 할 건 아니었다. 어차피 비공식이기도 하고.
“오늘은 네가 날 많이 가르치는구나. 선생님이라고 불러줄까?”
“네!”
최재철의 장난이 약간 섞인 제안을 오연화는 덥석 물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최재철은 순순히 오연화를 선생님이라 불러주기로 했다.
“선생님.”
“…으아, 이거 부끄럽네요.”
아무렇지도 않았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최재철의 시선을 피하는 오연화를 바라보며 그는 그냥 얘가 왜 이러나, 하는 생각만 했다.
그러다 문득 옆을 보니 이지희가 굉장히 삐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지희는 입을 우물거리다 최재철의 눈치를 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저도…….”
“아니, 왜?”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현오준이 돌아올 때까지, 그들은 그런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꼴찌……. 이 팀에서 내가 제일…….”
어째선지 그런 소릴 우물거리며 구석에 처박힌 구문효는 내버려 둔 채.
*
면접은 한 시간 정도로 끝날 것이란 말이 무색하게, 간부 회의에 끌려가 다섯 시간만에 돌아온 현오준은 완전히 진이 빠진 기색이었다.
“최재철 씨가 적절한 타이밍에 라이센스를 갱신시켜 주신 덕분에 팀의 재구성만큼은 어떻게든 피하도록 설득은 했습니다만 앞으로 좀 귀찮아질지도 모르겠군요.”
“귀찮아지다니요?”
“윗선에서는 저희 팀 외에도 차원 균열 진입 팀을 따로 만들 생각입니다. 자리를 하나 만드는 것보다는 다섯 개를 만드는 게 편하니까요. 업무 공조를 요구당할 일도 앞으로는 많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재철의 물음에 대답한 현오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회의로 하루를 날려먹은 데다, 앞으로도 이럴 걸 생각하니 저절로 우울해지는군요.”
“뭐, 차원 균열이 어디 도망가는 건 아니잖습니까.”
최재철은 팀장을 그렇게 위로했지만 현오준은 정색했다.
“아뇨, 차원 균열은 도망갑니다. 오늘 뉴스 보셨잖습니까.”
“아, WF 측의 차원 균열이 세 개나 닫혔다는 뉴스. 저도 봤어요.”
축 쳐져 있던 구문효가 갑자기 흥미가 돋은 듯 고개를 들며 알은척을 했다. 최재철은 슬쩍 고개를 피해 모르는 척을 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갑작스러운 차원 균열의 폐쇄는 끔찍한 사고나 다름없으니까요. 프라이머리 어벤저도 그 사고로 행방불명됐고.”
“우리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조직될 새 팀에게도.”
구문효의 말을 받아서 현오준이 그렇게 말하곤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공하고 있는 동안에는 괜찮습니다만 또 참사가 벌어진다면 저희 프로젝트도 멈출 수 있으니까요. 영향이 없을 수는 없죠.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현오준의 말에 덜컥 걱정이 된 건지 근심이 찬 표정으로 구문효가 현오준에게 물었다.
“차원 균열이 닫히는 원인 같은 게 밝혀지지는 않았나요?”
“WF 측에서는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공개를 하지는 않았으니 저희로서는 알 도리가 없죠. 일급 기밀로 취급하고 있어서 정부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저희로서도 그냥 조심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죠, 뭐.”
구문효의 말에 대꾸하면서 현오준은 의자 속에 몸을 파묻었다.
“어쨌든 오늘 작전에 대해서는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대로 퇴근들 하시죠.”
오후 3시. 조기 퇴근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이른 시각이지만 어차피 어벤저는 임무나 훈련이 아니면 출근조차 할 필요가 없는 직업이다.
그래도 평소 같으면 의욕에 가득 차서 6시까지 훈련을 실시할 현오준이 그냥 조기 퇴근을 선택하는 걸 보니 오늘 일로 꽤나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 것 같았다.
*
“갑자기 자유 시간이 생겨 버렸군.”
“선생님! 같이 놀아요!!”
회사 건물에서 나온 최재철에게 오연화가 강아지처럼 엉겨 붙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신체 접촉에 거리낌이 없었다. 최재철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오연화의 모습을 이지희가 부러움을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거절한다.’
그런 생각을 하던 최재철은 문득 자신이 굳이 거절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하는 것도 없이 선생님 소리 듣는 것도 좀 부담스러웠는데, 좋아.”
“네?”
최재철의 나직한 혼잣말에 신나서 폴짝폴짝 뛰고 있던 오연화의 몸짓이 굳었다.
“놀아주마, 연화야.”
“…놀이라는 이름의 훈련… 말이죠?”
“이 선생님은 눈치가 빠른 학생이 좋구나.”
씨익 웃는 최재철을 보며 오연화가 살짝 떨어지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혀, 형!”
그때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멍한 표정으로 일행과는 약간 거리를 두고 천천히 걸어오던 구문효가 갑자기 큰 목소리로 최재철을 불렀다. 최재철이 멈춰 서서 뒤돌아보자 구문효는 얼른 뛰어와서 다시 외쳤다.
“아니, 사형!”
“사형?”
“네, 사형!”
구문효는 단단히 마음먹은 듯, 더 이상 더듬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제게도 가르침을 주십시오!”
최재철과 이지희가 라이센스를 갱신해서 자신보다 높은 랭크를 받은 것이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그것도 그 자극이 질투나 경쟁심이 아니라 향학심,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번진 게 무엇보다도 좋았다.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덥석 제안을 물면 도리어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그는 한 번 튕겨보기로 했다.
“네가 무협 소설을 너무 많이 본 모양이구나, 문효야. 아니, 너무 적게 본 건가? 사형은 같은 제자 항렬이란다.”
“사부!”
눈치도 빠르고 머리 회전도 빠른 건지 구문효는 바로 호칭을 수정했다. 대단히 흡족했다.
“그래, 좋다. 네가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데 내가 어찌 내치겠느냐. 따라오거라.”
“선생님, 말투가 갑자기 나이 먹은 것 같아요.”
옆에서 듣고 있던 오연화가 일침을 놓았다.
“아니, 이런 것도 분위기니까.”
최재철은 머쓱하게 변명했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형이라고 불러, 문효야. 뭐, 내가 가르칠 게 있겠냐만, 내가 아는 것 정도는 알려줄 테니까.”
“고마워요, 형!”
문효가 밝게 웃었다.
‘이 녀석, 정말로 귀여운데.’
최재철은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헝클어주었다.
“자, 가자! 그런데 어디 가지?”
“그냥 회사 체육관 쓰면 되지 않을까요? 훈련할 거라면…….”
“아니, 기껏 조기 퇴근 했는데 회사로 돌아가는 것도 좀 그래서…….”
“우와, 정말로 훈련할 거예요? 퇴근했는데?”
최재철과 구문효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연화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싫으면 돌아가거라!”
“안 갈 거예요!”
최재철의 말에 오연화는 혀를 쭉 내밀며 대꾸했다.
“지희는? 어떻게 할래?”
“저도 더 강해지고 싶어요.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애초에 강해지고 싶어서 스승님을 섬기게 된 거니까요. 그러니까…….”
“알았어, 너무 거창하게 말하지 마. 훈련 같이할 거지?”
“네.”
그렇게 그들의 오후 스케줄이 결정되었다.
*
“그래서 회사로 다시 돌아오게 된 거로군요.”
현오준이 말했다. 그렇다. 최재철 일행은 회사 훈련실에 와 있었다. 사방이 다 남의 땅인 서울에 마땅히 어벤저 훈련을 할 곳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팀장님이야말로 혼자서 뭐 하고 계세요?”
“개인 훈련입니다만.”
구문효의 질문에 현오준은 뚱하니 대답했다.
“와, 치사하게 혼자 강해지려고.”
“그러는 여러분은 저만 따돌리고 강해지려고 하신 거 아닙니까.”
자신을 제외한 팀원 네 명이 단체 행동을 하는 것에 삐치기라도 한 듯, 현오준은 지금까지의 이미지와는 달리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크흠, 하고 한 번 헛기침을 한 후, 말투를 바꿔 다시 말했다.
“팀장으로서 여러분이 자체적으로 훈련하려는 태도는 높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제게도 기쁜 일이로군요.”
“말하는 거하고 표정하고 다른데요, 팀장님…….”
구문효가 사정없이 찔러 박은 말의 창에 현오준은 결국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무튼 좋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최재철 씨를 스승님이라 부르도록 하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리 강해질 수 있는지 알려주십시오. 제게도. …제발.”
현오준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물론 표정도, 태도도. 필요하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그도 최재철이 정말로 A급 라이센스를 받아오자 나름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삽시간에 진지해진 분위기에 훈련장은 침묵에 싸였다. 그 침묵을 깬 게 바로 이지희였다.
“스승님이라는 호칭은 제 거라서 안 돼요, 팀장님.”
“후.”
이지희의 재미있는 발언에 최재철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스승님이라고 부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지희 거 같으니까요.”
“…그럼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
“그건 내 거예요.”
오연화의 부루퉁한 발언에 결국 다 같이 웃고 말았다.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거라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라이벌 팀도 생긴 거 같으니 팀 전체가 강해지는 게 중요할 것 같고. 뭐… 정보를 공유하는 모임인 셈 치지요.”
“감사합니다, …최재철 씨.”
“네, 그렇게 부르시면 됩니다.”
다시 한 번 다 같이 웃은 후, 그들은 훈련을 시작했다.
*
김현직은 이지희의 방 안에 있었다. 그것도 이틀째.
연예 기획사의 실장으로서의 일도, 사장으로서의 일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방도 아닌 여자의 방에서 그는 만 하루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지희는 집에 돌아오고 있질 않았다. 연예인이라는 애가 외박을 하다니. 이러다 스캔들이라도 생기면 큰일인데. 이제는 그가 이지희의 담당이 아님에도, 이지희가 연예인이 아닌데도, 할 필요도 없는 걱정을 하며 김현직은 현실도피를 하고 있었다.
이지희의 귀갓길에 잠복 중인 어벤저들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김현직은 그저 방치된 채일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지금 와서 해봐야 소용없는 생각을 그는 다시 했다. 이 생각을 머리에서 쫓아내기 위해 그는 다시 현실도피성의 생각을 일부러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회사에 취직한 것부터가 잘못인 것 같았다. 사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소속 직원과 아이돌에게 손찌검을 하는 회사가 정상적으로, 상식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걸 확인한 시점에서 퇴사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김현직 본인까지 사장에게 구타당하면서도 이 회사에 남은 게 결정적인 잘못 같았다.
-이 회사를 자네에게 주지.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은 한 명뿐이었다.
개판으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나마 주식회사인 이 회사의 대주주이자 실질적인 주인인 진가충. 이사들 전원에게 입김을 불어넣고 이 회사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어제 딱 사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그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그가 아는 한 어제 사장이 된 건 진가충뿐이었다.
진가충이라는 인물은 뒷소문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부패하고, 탐욕스럽고, 무능력하지만 그저 혈연 하나로 부사장까지 오른 인물. 아니, 어제부로 사장까지 되었으니 이것도 나름 입지전적이라 해도 좋으리라.
‘입지전적… 뜻이 뭐더라.’
휴대폰으로 단어의 뜻을 검색하려다 문득 김현직은 그냥 손에 든 것들을 전부 다 내팽개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실제로 사장이 행방불명된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진가충은 어제부로 사장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결론은 그는 이미 이 일에서 손을 뗄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절망적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몇 번이고 생각한 것을 이번에는 입 밖에 내어 말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어둠이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위장 밑바닥이 지글지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한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답답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 궁지에 몰려 있었다.
[힘이 필요한가.]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마법의 목소리. 듣기만 해도 가슴속에 희망이 차오를 것만 같은, 그것이 유일한 구명줄일 것만 같은 목소리.
[필요하다면 주겠다.]
“뭐?”
[고개만 끄덕여라. 힘이 필요하다면 주겠다.]
“하.”
김현직은 짧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달콤한 것 중에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사탕을 빨아봤자 뱃살만 늘어나지, 뭐 좋은 게 없지 않은가. 윌 스미스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질의 이름은 설탕이라고. 학자들은 중독 물질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힘이 필요한가.]
그가 그런 식으로 현실도피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 목소리는 다시 처음부터 말하고 있었다.
[힘이 필요하다면 주겠다.]
잘 들어보니 아까부터 기계적으로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딴 존재를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그렇지. 그렇게 달콤한 이야기가 있겠는가.
그에겐 여전히 절망뿐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어떤 힘을 준다는 거지?”
대화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었기에 그는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원하는 힘을 주겠다.]
“허.”
조금쯤은 재미있어진 것 같다, 고 김현직은 생각했다.
“그 대가는? 설마 공짜는 아닐 테지?”
[네가 원하는 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면 된다.]
“하핫.”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김현직은 목소리의 주인을 비웃었다.
그는 만약 자신이 지불해야 할 대가에 대해 묻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다. 만약 묻지 않고 굳장 고개를 끄덕였더라면, 지금 자신과 대화 중인 목소리의 주인인 최하급 계약마가 그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으리라.
대가에 대해 묻는 것. 이것이 최하급 계약마와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운이 좋았다.
“그럼 내가 머리카락을 대가로 주겠다고 한다면?”
[네가 원하는 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면 된다.]
기계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오, 그렇다면…….’
김현직은 머리카락을 대가로 지불하고 뭔가를 얻어낼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곧 멈칫했다. 끔찍한 상상이 떠오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 한 터럭이 아니라 전부를 가져가면 어떻게 하지?’
역시 머리카락은 안 되겠다. 김현직은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한 자신이 웃겨서 웃음이 픽픽 새어 나왔다.
‘허, 나도 참. 얻을 힘보다는 낼 대가를 먼저 생각하다니.’
하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다. 이 이상한 현상은 그냥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뭐, 그래도 꿈이라도 꿔볼까.’
그는 자신이 원하는 슈퍼 파워에 대해 망상하기 시작했다.
[힘이 필요한가.]
대답을 안 했더니, 목소리는 다시 처음에 했던 말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져 가고 있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도 끼기 시작했고, 처음 들었을 때와 달리 달콤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려니, 곧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뭐야, 사람 설레게 해놓고 그냥 없어진 거야?”
김현직은 피식 웃었다. 어째 좀 안도가 되기도 했다. 이젠 이 목소리 때문에 이상한 사건에 얽힐 일도 없어진 거니 말이다.
이로써 그는 어벤저가 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걸 알 리 없으니, 웃을 법도 했다.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펄떡 뛰어올랐다. 이 전화기 소리가 방금 전의 이상한 목소리보다 그를 훨씬 놀라게 했다. 이 전화를 받으면 파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
오후 6시까지의 훈련을 마치고, 현오준 팀의 면면은 퇴근 준비를 했다. 현오준과 구문효는 자발적인 야근을 택했다. 오늘 최재철이 강의한 내용을 완전히 몸에 새긴 후에나 퇴근할 것이라고 말하며.
그래서 오늘의 퇴근길 멤버는 최재철, 이지희, 오연화, 이렇게 셋이다.
“사흘 만에 집에 가게 되네. 뭐, 집에 간다고 해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만.”
“언니, 그냥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돼?”
이지희의 혼잣말을 들은 오연화가 미련이 남은 듯 이지희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지희가 쾌활하게 웃었다.
“네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어때?”
“어, 그래도 돼?”
반쯤은 농담으로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걸 보니, 오연화도 혼자 사는 것에 질려 버린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말은 언제 텄어?”
“어젯밤에요.”
최재철의 질문에 이지희가 대답했다.
“좋아, 자고 갈래. 어차피 토요일이라서 출근도 안 하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오연화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 맞다, 언니. 언니 집에 컴퓨터 두 대야? 게임해야 되는데.”
“요즘 누가 컴퓨터 게임을 해. 나도 컴퓨터도 없어.”
“어제 언니도 재밌게 했으면서. 노트북 사갖고 가야겠다. 마침 용산도 가까우니.”
무슨 집에 가는 길에 라면이라도 사갖고 가는 것 같은 가벼운 말투로 오연화가 말했다. 하긴, 그녀는 어제 20억을 벌었다. 노트북이야 껌 사는 기분으로 가볍게 살 수 있었다.
“언니 것도 사줄까?”
“나도 돈 있네요.”
“어, 언니가 언니 돈으로 컴퓨터 사게?”
“너랑 놀려면 사야겠지?”
“감동이야, 언니! 근데 언니 집에 모니터는 있어?”
“없어.”
“프로젝터 써야겠네. 선생님, 용산 좀 들러도 돼요?”
“그래. 흠, 이참에 나도 노트북 한 대 장만해야겠다.”
어차피 대부분의 일은 모바일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긴 하지만, 최재철 본인도 알맹이는 20세기 출생자라 집에 컴퓨터가 없다는 게 다소 불편했다.
‘가만, 집에 인터넷이 들어올까 모르겠네.’
지금 사는 집이 워낙 옛날 집인데다 원래 TV도 없던 집이라 인터넷 설치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에이, 휴대폰 물려서 쓰면 되지.’
이미 그는 노트북을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 가자.”
그들은 용산 전자 상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발걸음을 옮겼다고는 해도 그들이 정말로 도보로 용산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연화가 부른 콜택시에 탑승해 이동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여기서 조금 세워주세요.”
한창 이동 중이던 때, 최재철이 갑자기 말했다. 택시 기사는 그 말에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간신히 급브레이크가 아닌 수준이었다.
“용산까지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기사가 그에게 물었다. 최재철은 대충 둘러대었다.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
“저희도 내릴게요, 선생님.”
오연화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최재철에게 던지며 말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혼자서 충분해. 대신 내 노트북도 같이 사다놔 줘. 상가 문 닫겠다.”
“아, 그렇지……. 알겠어요. 선생님이라면 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그래.”
최재철은 혼자 택시에서 내렸다.
그가 갑자기 택시에서 내린 이유는 간단하다.
폭발적인 차원력의 방출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그는 한 번 이런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
입사 첫 날, 이지희를 집까지 데려다 줄 때. 그때는 오연화와 함께였지만 지금은 혼자다.
“더 수월하겠군.”
최재철은 한 번 싱긋 웃고선 달리기 시작했다.
차원 균열이 열리려는 곳으로.
*
WF의 A급 어벤저, 추경준은 불쾌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차원 균열을 여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재앙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차원 균열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는 자신의 임무에 자부심을 갖고 임하는 편이었다.
차원 균열을 인위적으로 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극비 중의 극비이므로, 그는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사생활에도 이런저런 제약이 가해지는 대신, 그는 ‘막대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의 돈을 받고 사내에서의 위치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평범한 어벤저라면 A급의 능력으로는 팀장이 고작일 텐데, 회사에서는 그에게 부장의 지위로 대우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능력에 부족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랭크 자체는 S급이 아닌 A급에 머물러 있지만, 그건 그가 대외적으로 랭크를 갱신할 수 없기 때문일 뿐이었다. 뭐, 어차피 S급은 정식 라이센스도 아니다. 그 본인은 굳이 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이 정도의 인물이다. 그가 지금껏 쌓아온 실적과 그가 그동안 보여준 충성심, 그리고 실력을 생각한다면 누구도 그를 허투로 볼 수는 없었다. 진가규 회장 본인조차 그를 알아보고 그에 대해서 다소간의 경의를 보일 정도다.
그러나 오늘, 그는 그 WF 회장의 차남에게서 아주 불쾌한 전화를 받아야 했다.
-차원 균열을 열게.
갑작스러운 전화였다. 짧은 인사말도 없었다. 통화를 받자마자 자기 할 말부터 하는 태도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치는 연구원에게 듣게. 준비는 그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가서 그냥 있게. 이번에는 도망치지 말고 차원 균열이 안정화될 때까지 지켜본 후에 철수하게.
치욕적이었다.
가서 그냥 있어라? 이번엔 도망치지 말라?
그 어느 것도 추경준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말투부터 시작해서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전부 부당한 것들뿐이었다.
WFF의 사장이 유연학에서 진가충으로 교체된 바로 다음 날,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직속 상사라 할 수 있는 사장이었다. 일단은 상황을 보자. 추경준은 그렇게 판단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게, 수고하게, 이런 말을 원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은 당연히 덧붙여져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그런 당연한 말조차 받지 못했다. 전화는 바로 끊겼으므로.
“후…….”
그는 긴 한숨을 토해내었다. 힘들게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힘들어질 것이라는 각오는 했다. 진가충은 개념 없기로 유명한 인간이었다. 부사장 시절에도 자기 낄 곳, 아닐 곳 못 가리고 월권행위와 직권 남용을 밥 먹듯 하던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이제 자신의 관할이 된 곳에 어떤 난장을 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첫날부터 이런 꼴을 볼 줄이야.
그의 옆에서 차원 진동기가 덜컹거리며 빛과 진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곧 차원 균열이 열리고, 어보미네이션이 튀어나올 터였다. 연구원들은 이미 피난한 지 오래였다. 여기에는 지금 추경준 혼자 있었다.
여기에는 그 혼자로도 충분했다. 그건 맞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차원 균열 개방이라는 중요 임무에 어벤저를 한 명만 배치하는 경우는 없었다. 만약의 일이란 항상 일어날 수 있는 법이고, 거기에도 대비할 생각을 하는 게 제대로 된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진가충에게는 그게 없었다.
연구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만 차원 균열을 세 개나 연다고 한다. 말이 안 됐다. 안 그래도 강철 가면을 쓴 묘한 괴한이 돌아다니며 차원 균열을 닫는 마당에, 모자란 어벤저 병력을 나눠서 차원 균열을 새로 열다니.
지금은 있는 걸 지켜야 할 때였다. 새로 벌릴 때가 아니었다.
그게 상식이었다. 진가충에게는 그 상식도 없었다.
“하, 씨발.”
담배만큼이나 오래 전에 끊었던 욕설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후배들이 여기 있었다면 깜짝 놀랐을 터였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은 욕구가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런 명령을 받았으니까.
“개도 아니고.”
그런 자조적인 혼잣말을 뱉었을 때였다.
추경준은 분명히 인지했다.
공간이 분리되었다. 지금 차원 진동기와 그 주변 20m 반경은 칼로 잘라내기라도 한 듯 다른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한가? 아니, 불가능하다.
칼로 물을 베지 못하듯, 공기를 베지 못하듯, 공간도 베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령 베어진다 한들 곧장 다시 가서 붙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공간은 주변 공간과 유리된 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추경준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에 대해 알고 있다.
어벤저 스킬.
어벤저.
즉, 적이다.
별 망설임도 없이 추경준은 등에서 청동 대검을 빼어들었다. 이제 곧 차원 균열이 열려 헬필드가 펼쳐질 이곳에서는 가장 유효한 무기 중 하나였다.
“인상적이로군.”
추경준은 적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적의 모습을 확인했다.
“강철 가면의 괴한…….”
“그런 웃긴 이름으로 날 부르고 있는 건가? 재미있군. 하나 한 가지는 알겠어.”
강철 가면의 괴한은 전봇대 위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자네는 WF 소속이로군?”
“……!”
추경준 본인도 자각은 하고 있다. 그는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적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검을 겨누고 강철 가면의 괴한을 향해 육박했다. 이미 S급에 다다른 경지의 신체 강화 능력은 소리와 같은 속도로 그를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콰콰콰콰! 그가 지나왔던 길을 소닉붐의 거친 소음이 채웠다.
“자네에게는 재능이 있군.”
강철 가면의 괴한이 말했다.
“하지만 머리가 나빠. 어벤저 스킬은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능력. 그런데 물리법칙을 지켜가며 움직이다니, 어떻게 그렇게 우둔할 수 있단 말인가?”
추경준은 강철 가면의 괴한이 남긴 움직임의 궤적을 간신히 쫓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괴한은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그것도 소닉붐조차 일으키지 않은 채.
물리법칙을 초월했다.
놀라운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괴한의 말이 맞았다. 어벤저 스킬이 물리법칙을 초월했다고 놀란다면 애초에 어벤저라는 존재 그 자체를 의심해야 맞았다.
“여기 있군.”
강철 가면의 괴한은 추경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그의 목적을 달성했다.
즉, 차원 진동기를 파괴했다.
추경준은 자신이 임무에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깨달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실질적인 능력은 A급을 초월하고 S급을 다다른 자신보다도 눈앞의 괴한은 훨씬 강하다. 그저 더 강하다는 말로 끝내기에는 부족했다.
벼룩은 자신의 신장 수백 배를 뛰어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보다 더 높이 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교하자면 자신은 벼룩, 저 괴한은 인간. 아니,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경준은 벼룩이 주둥이를 내미는 심정으로, 청동 대검을 괴한에게 겨누었다.
“안타깝군.”
괴한이 말했다.
“자네 같이 훌륭한 인재의 팔다리를 뽑아놓는 건 안타까운 일이야.”
*
강철 가면의 괴한, 김인수는 툴툴거렸다.
“강철 가면의 괴한이 뭐야. 좀 더 멋진 명칭을 생각해 낼 수는 없었나?”
“으…….”
추경준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어벤저는 김인수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팔다리가 뽑혀 나간 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탐나는 인재였다. WF에 두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어벤저의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차원력이 일단 풍부했고, 전투 능력도 높았다. 단순히 신체 강화 능력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을 컨트롤하고 움직이는 능력도 높게 평가할 만했다.
자신보다 명백히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도 전의가 꺾이지 않을 정도로 용기도 있었고, 고통에도 잘 견뎠다. 이 정도면 정신적인 면도 꽤 튼튼하다 싶었다.
단점이라고는 우직하고 머리가 나쁜 것 정도였다. 이 정도 단점은 단점도 아니었다. 김인수가 전부 채워줄 수 있는 영역의 것들이었으니.
“자, 난 이제부터 자네를 회유할 생각일세.”
“소용없다, 나는…….”
“아니, 그런 소릴 다 들어줄 생각은 없고.”
김인수는 가차 없이 추경준의 말을 잘랐다.
“자네에게는 발언권이 없어. 내가 일방적으로 자넬 회유할 테니 자네는 생각이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추경준은 고개를 도리질했지만 김인수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내가 끝까지 회유에 실패한다면 자넬 죽일 거야. 원래는 누구라도 살려둘 생각은 없었지만 자네라서 내 회유할 생각을 한 걸세.”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죽음의 공포에도 추경준의 표정은 그리 변화가 없었다. 이것마저 보고 나니 김인수의 입장에서도 추경준이 너무너무 탐났다.
‘어떻게 이런 인재가 WF에 들어갔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일단 자네의 환심을 좀 사야 할 것 같군. 그렇다고 적토마를 줄 건 아니고…….”
김인수의 약지에 끼워진 트롤 고문관의 반지가 빛을 발했다. 그러자 추경준의 잘려 나간 팔다리가 다시 제자리에 붙기 시작했다.
“자네의 원래 팔다리 정도면 적토마 정도의 가치는 있을 거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추경준의 동공이 크게 벌어지며 그의 입이 열리려 했다. 하지만 김인수가 제지했다.
“아! 대답하지는 말게. 발언권은 없다니까. 자네가 입을 벌릴 수 있는 건 일단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다음일세. 다시 그 팔다리를 잃고 싶지 않거든 내 말을 듣게.”
*
결론부터 말하면 추경준의 회유에는 실패했다.
김인수는 하는 수 없이 그를 계약 마수로 만들었다. 나중에 천천히 회유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추경준이 가진 WF의 정보가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강제로 계약당한 추경준은 지금 김인수의 차원 금고에 동결된 채 보관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동결. 냉동 인간이 된 것이라고 봐도 될 상태였다. 인간을 차원 금고에 가둬넣는 행위는 별로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는 아니었지만, 죽여 버리기엔 아쉬웠고 그냥 풀어주는 건 언어도단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 고순 같은 녀석.”
김인수는 어렸을 때 읽었던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포의 부하를 떠올렸다. 여포 같은 놈이 뭐가 좋다고, 온갖 회유에도 묵묵부답하다 목이 잘려죽은 그 남자. 그를 죽이기 직전까지 아까워했던 조조의 심정이 지금은 약간이나마 이해가 갔다.
WF가 뭐가 그리 좋다고.
어쨌든 강제로 계약된 탓에 추경준은 그 꼿꼿했던 절개도 무색하게 김인수가 묻는 대로 아는 걸 전부 답할 수밖에 없었다.
추경준은 이지희를 잡으러 왔던 B급 어벤저인 조상평보다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지만, 그 자신이 극비 부서의 특수 직위에 속했던지라 핵심 정보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김인수가 다음으로 취할 행동을 결정하기에는 충분한 정보였다.
*
진현우였던 존재. 아니, 진현우를 대체하기 위해 그 시체를 기반으로 다섯 명의 희생을 추가해 새로 만들어진 존재는 눈을 떴다.
주변이 어수선했다.
“……?”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여전히 묶여 있는 상태였다.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구속구들을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는 여전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가슴 속에 공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느낀 것은 분명 절박함이었다.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이럴 때 접근하는 놈들이 있다.
[힘을.]
목소리가 들렸다.
육성이 아니었다. 언어조차 아니었다. 뇌리에 직접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계약마의 목소리였다.
[힘을 원하나.]
마치 구세주의 목소리와도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아직 언어 기능이 인스톨되어 있지 않았다.
“우… 아…….”
게다가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신음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힘을 원하나.]
목소리는 끈질기게 그에게 질문해 왔다. 계속해서, 줄기차게.
[힘?]
마침내 그는 대답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 언어화된 사고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계약마의 끈질긴 부름 끝에 이 세상의 그 어떤 언어도 아닌 방식으로 대답하는 데 성공했다.
[힘을, 원하나.]
[힘? 어떤 힘?]
[…….]
최하급 계약마는 그의 되물음에 대답할 만한 지능을 갖추지 못했기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최하급 계약마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열망뿐이다. 최하급 계약마란 아직 존재조차 성립하지 않는 존재.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길 바라는 열망을 품고 있다.
어차피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그대로 소멸해 버릴 뿐인 존재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뭐든지 한다.
[어떤 힘을 원하는가?]
[나.]
[나?]
[나는 나를 원해.]
그는 대답했다.
그에게 없는 것은 언어능력뿐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기억이 없다. 과거가 없다. 근본이 없다. 인격을 이루는 기반이 될 만한 것이라고는 어느 것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
즉, 그에게는 ‘나’가 없었다.
[내가 되려면 어떤 힘이 필요하지?]
[그 힘이 필요하다면 주겠다.]
그 힘이 어떤 힘인지는 계약마도 모른다.
어차피 힘을 주는 존재는 계약마가 아니다. 계약마는 매개일 뿐이다. 계약이 맺어지면 그 계약에 따른 힘이 주어질 것이다. 누가, 어떻게, 어떤 식으로 힘을 주는지 계약마는 생각할 필요도, 생각할 능력도 없었다.
그저 계약함으로써 존재를 손에 넣는다.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줘.]
마침내 그는 대답했다.
그렇게 계약은 성립되었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묶고 있던 구속구는 끊어져 나갔다.
아무도 그를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WF라는 대기업은 3조 원 이상의 피해를 입고 그 후속 대처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든 인력이 조직 내부의 개편에 관련되어 있었고, 진현우를 되살리는 프로젝트의 인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차피 아직 언어 회로조차 갖추지 못한, 숨만 쉬고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 그런 존재를 굳이 지키고 서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당분간 연구실을 비우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래야 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큰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그저 폐쇄 회로 카메라만이 그 장면을 찍고 있을 따름이었다.
인간형 어보미네이션이라는 희대의 존재가 연구실에서 탈출하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