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공격
김현직 실장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틀 전, 그는 이지희의 확보에 실패했다. 어벤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지희를 확보하기 위해서 다섯 명의 어벤저와 함께 작전에 돌입했지만, 이지희는 C급 어벤저인 오만구를 비롯한 모든 어벤저들을 박살내 버렸다.
사타구니가 시원해진 채 도망 온 그는 비참한 기분에 그날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사장에게는 연락도 없이, 사실상 사표를 던질 생각을 굳힌 채 잠수를 탔다.
그러나 다음 날, 이 결과를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망설이며 사무실에 도착한 그가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사무실의 문은 박살나 있었고, 사장은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는 일단 일을 했다. 가장 윗선인 사장이 없어졌을 뿐, 해야 할 일이 변한 건 아니다. 물론 이 회사의 ‘진짜 일’, 그러니까 유력자에게 여자애들을 대는 일은 사장이 전적으로 담당했으므로 그쪽은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창 일을 하던 중, 김현직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광고든 피싱이든 직업상 모르는 번호라도 전화를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자네가 김현직인가?”
냅다 반말부터 하는 상대에게 반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그가 느낀 건 오히려 겁이었다. 왜 더럭 겁부터 먹었냐면, 어떤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누군지는 비밀이네만, 이렇게는 말해두겠네. 자네 회사는 원래 이틀 전에 내게 이지희를 데려왔어야 했네.”
김현직은 자신의 예감이 맞아들었음에 탄식했다. 사장이 하던 역할을 아마도 자신이 이어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 이런 예감만 맞아드는 건 운명의 장난일까, 악마의 수작일까.
“죄송합니다만 사장님, 저희 회사 사장님은…….”
김현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맞은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실례했네. 내가 말일세 오늘 부로 사장이 됐거든. 자네야 버릇처럼 한 말이겠네만 말일세. 자네는 운이 좋은 남자로군. 마음에 들었어. 그 회사를 자네에게 넘겨주지.”
달콤한 소리다. 위험할 정도로. 만약 이게 헛소리일지라도 그 소리를 들은 김현직의 입장에서는 목에 칼이 들어온 것 같은 위협감을 느꼈다. 그의 입이 바싹 말랐다.
“하, 하지만 이 회사 사장님은…….”
“그는 없네. 어제 없어졌지.”
김현직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슨 뜻일까. 추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어떤 상상이 그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자네들이 이지희를 보내주질 않아서 여태 지난번에 보내준 아이로 즐기고 있네. 이 아이도 물론 마음에 드네만, 이대로라면 마약중독으로 폐인이 되어버릴 걸세.”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김현직은 문득 어떤 얼굴을 떠올렸다.
“…승이 말입니까?”
여승이.
그가 처음으로 처음부터 키워 데뷔시킨 솔로 가수였다. 물론 그가 키웠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매니저로서 일정 관리를 한 정도였지만, 그래도 애착이 가는 얼굴일 수밖에 없었다.
그 얼굴이 누군가와 점점 닮아가는 것처럼 느낀 건 언제일까. 그녀의 화장법, 패션, 몸매 관리, 그리고 성형에는 사장이 직접 손을 대었다.
‘그래, 이지희.’
김현직은 뒤늦게 떠올렸다. 데뷔 직전의 ‘완성’된 여승이의 외모는 이지희와 흡사했다.
사장의 일이란 게 그런 거였다. 최고의 고객에게 최고의 여자를. 그러나 최고의 여자가 어디서 뚝 떨어지지는 않는다. 만들어내는 거였다. 고객의 취향에 맞도록 얼굴부터 몸매까지 뜯어고쳐 가는 거였다.
“이름이 그렇게 됐던가?”
그러나 그 결과가 이거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 주인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췄을 터인 여자. 그녀의 이름을 그 주인은 기억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아까부터 말하고 있다.
이지희, 이지희… 라고.
“이 아이의 이름부터 대는 걸 보니 그녀도 자네가 키운 모양이로군. 애착이 있는 모양이야.”
전화기 너머 목소리의 주인은 악마가 틀림없다. 김현직은 확신했다.
“어쨌든 나도 마음에 든 장난감이 망가지는 건 그리 원하지 않네. 그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
아니나 다를까, 동요한 그의 내심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전화기 너머의 악마는 그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C급 어벤저로 실패했단 소리는 들었네. B급 어벤저들을 준비해 주지. 자네 말을 듣도록 명령해 두었네. 지금쯤 도착했을 텐데…….”
그와 동시에 사무실 문이 열렸다. 노크 소리는 물론, 발소리도, 인기척조차 없었다.
“김현직 사장님이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에게서 대뜸 그런 질문이 날아들어 왔다. 그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전화기 너머의 악마가 말했다.
“도착한 모양이로군. 좋아, 그럼 착수하게. 사흘 주겠네.”
여기서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면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악마의 제안을 거부했다가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는 이미 사장의 최후를 상상하고 말았다.
“사장으로서의 첫 일, 잘 해내길 바라네. 자네의 앞길에 무궁한 영광만이 있길.”
실패하면 파멸뿐일 테니.
김현직에게는 그런, 실제로는 덧붙이지도 않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
최재철은 오늘도 오연화의 집에 와 있었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었느냐를 떠올리자면, 사무실에서의 마지막 대화를 되새겨야 했다.
“농담입니다. 최재철 씨가 절 집까지 데려다줬다간 그것도 야근이 될 테니까요. 팀장이라는 것도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로군요.”
현오준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자기 차례라며 나섰을 때는 소름이 돋았지만 농담이라 다행이었다. 웃을 마음은 별로 들지 않는 농담이었지만 분노보다는 안도 쪽이 컸다.
“그럼 제 차례 맞죠! 그렇죠? 언니!”
“으, 응.”
오연화의 말에 이지희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최재철이 끼어들었다.
“아니지,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지?”
“네?”
“다음은 당연히 내 차례……. 아니, 이게 아니라. 내 맘이지!”
최재철이 누구와 함께 움직이냐는 당연히 그 자신이 선택해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연화는 마치 배신당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최재철을 바라보았다.
“와, 재미있어졌네요. 그럼 이제부터 형이 결정하는 건가요? 당연히 절 선택하시겠죠?”
왜 우리 팀 사람들은 이런 농담을 좋아하는 걸까. 최재철은 그런 소릴 한 구문효에게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좀 나은 반응 축에 속했다. 오연화와 이지희는 아예 구문효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최재철은 원래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지희가 연화를 집까지 데려다줘.”
“네, 그렇게 할게요.”
“아니, 그게 뭐에요?!”
최재철의 제안에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돌아왔다. 격앙된 얼굴로 반발하는 오연화를 위해, 최재철은 한 가지 더 제안했다.
“그럼 내가 지희를 연화네까지 데려다주지.”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셋은 같이 오연화네 집까지 왔다.
“오늘도 그냥 제 집에서 자고 가요, 언니! 아, 선생님도요!”
“지희는 그렇게 해. 날도 늦었고 차도 끊겼으니.”
오연화의 고마운 제안에 최재철은 이렇게 말했다.
“엥? 그럼 선생님은요?”
“나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이 새벽에 무슨 볼일이 있는데요?”
“그런 게 있어.”
오연화의 추궁과 이지희의 시선에서 벗어나, 최재철은 잰걸음으로 오연화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잡아둬야 소용없다는 걸 안 건지, 이번에는 잠금장치는 잠겨 있지 않은 채였다.
*
조상평은 머리를 긁었다.
그는 B급 어벤저다. 특별한 존재라고까지 하기엔 조금 뭐하지만, 어디에나 널려 있을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괜히 이렇게 대기업에까지 입사한 게 아닐 정도는 됐다.
‘인생 폈다고 생각했었지.’
길드에서 기업이나 국가의 하청이나 받아가며 살아가던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지갑에 들어오는 돈도 단위가 다르다.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된 것 같았다.
국내 최고의, 아니, 세계의 어벤저 산업을 선도하는 기업 WF. WF의 일원이 되자마자 주변에서, 특히나 가족부터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출세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뭐지?’
길드에서처럼 어보미네이션의 시체나 실어 나르는, 그런 이름만 어벤저지 사실상 일용직 노동자가 다름없는 삶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히어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일선에 나서 어보미네이션을 처치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인류 평화에 기여한다. 드디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야, 여자애 하나 납치해 와라.”
그의 상사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납치 말입니까?”
“그래. 가능한 한 다치지 않게 잘 데려와야 된다. 아, 걔도 어벤저라니까 조심하고.”
“…미등록 어벤저입니까?”
미등록 어벤저. 일부러 어벤저 면허 시험을 보지 않고 일반인 사이에 섞여서 어벤저 스킬로 범죄를 저지르는 부류. 물론 모든 미등록 어벤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사람들 입에 미등록 어벤저라는 여섯 글자가 오르내릴 때는 보통 이런 경우다.
그러나 그의 상사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걔가 보스 마음에 들었대. 높으신 분이 될지도 모르니까 예쁘게 모셔오라고.”
애첩. 그런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그러니까 그가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은 어쩌다 예쁘장하게 태어난 죄를 지은 여자애를 납치해서 보스에게 데려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보스는 걔를 오로지 노리개로 쓰기 위해서 이런 명령을 내리는 거고.
‘아니, 그냥 내 상상일 뿐이야.’
그는 고개를 저었지만 영 찜찜한 상상은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패를 쉽게 집어던질 수 없었다. 흔한 길드 소속이 아닌 대기업의, 그것도 WF 소속의 어벤저. 일류 중의 일류. 잘못하면 백수, 심하면 범죄자 취급마저 받는 길드 소속 어벤저 신세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
지금 조상평은 차 안에 앉아 있다. 차 안에는 다섯 명의 어벤저가 앉아 있다. 네 명이 자신의 선배다. 즉, 그는 여기서 막내였다. 대놓고 한숨을 내쉬거나 미간을 찌푸릴 수도 없었다.
“막내야, 그 여자 오냐?”
뒷자리에 다리를 쫙 펴고 앉은 최고참 선배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져왔다. 다른 둘은 그 덕에 좁은 자리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그나마 그는 운전을 맡은지라 운전석에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되나.’
배어나오는 쓴웃음을 억지로 삼키며 그는 질문에 대답했다.
“아뇨, 선배님. 아직 안 보입니다.”
“언제 온대냐?”
‘아니, 씨발.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조상평은 속으로는 욕하면서 겉으로는 싹싹하게 대꾸했다.
“김현직 실장한테 전화해 볼까요?”
“됐다. 으휴, 어쩌다가 이런 임무를…….”
최고참 선배도 이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요, 선배.”
조수석에 앉은 선배도 한 마디 거들었다.
“저희 원래 도련님 죽인 놈 찾는 게 임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자기 아들보단 자기 좆이 더 중요한가 보지, 우리 보스는.”
최고참의 말에 차 안에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소리 내서 웃지 마, 멍청이들아. 우리 지금 잠복 중인 거 잊었어?”
최고참이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아,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우리가 조폭이냐? 우리 대기업 어벤저여.”
“알겠습니다, 선배.”
조수석의 선배와 최고참 선배는 같은 길드 출신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길드란 게 말만 길드지, 사실상 조폭이나 다름없었을 거란 건 두 사람의 태도나 행실에서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너무 이상주의자인 거려나.’
조상평은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길드 시절부터 그랬다. 어벤저란 건 조폭이랑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도는 현실에 분개했다.
그때는 여기가 밑바닥이라 그런 거라고 자위했지만, 지금 그는 어벤저계의 첨단에 서 있었다. 모두가 동경하는 직업, 대기업 어벤저. 그것도 그 대기업도 보통 대기업이 아니라 업계 1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WF.
하지만 하는 일은 길드 시절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아니, 어떤 면에선 더 더러울지도 모른다. 적어도 길드 시절에는 배는 고파도 자기가 할 일을 고를 수는 있었으니까. 당시의 그라면 여자애를 잡아다가 높으신 분께 바치는 의뢰는 깨끗하게 거절했을 터였다.
‘으.’
멈추지 않는 자기혐오와 자괴감의 연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보았다.
이지희.
굉장한 미녀였다. 사진사의 실력을 의심할 정도로. 그가 받아든 사진에는 실제 그녀의 매력이 반도 채 담겨 있지 않았다.
‘아이돌로 데뷔했다면 팬이 되었겠는데?’
조상평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다른 소릴 했다.
“선배, 왔습니다.”
지금 와서 길드 시절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더러운 일이든 뭐든 시키는 건 뭐든지. 두툼한 지갑과 으스댈 수 있는 명패를 위해서라면 자본가의 개가 되든, 뭐든 되어 보이리라.
그는 이미 마음을 먹었다.
*
이지희의 집으로 가는 골목. 잠복이랍시고 차원력을 풀풀 피워 올리며 차 안에 숨어 있는 어벤저들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눈에 보인 것은 창에 썬 코팅을 진하게 한 차 한 대뿐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다 보였다.
‘어제는 허탕이었는데 오늘은 있군.’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아니면 귀찮다고 여겨야 하나. 이지희의 모습을 한 그는 픽 웃었다. 시선을 좀 더 날카롭게 다듬어 주시한 그의 눈에는 차 안의 어벤저 숫자와 랭크까지 순식간에 간파했다.
‘다섯 명이로군. 저 정도면 B급인가.’
이지희의 모습을 한 그는 혀를 찼다. 생각했던 것보다 비싼 몸들이 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몰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지희도 B급이다. 그렇다는 건 이지희인 상태로 대놓고 다섯 명을 다 작살낼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다른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그는 적당히 거리를 좁혔다. 그러자 차 안에서도 기척이 느껴졌다. 이지희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증거였다. 약간 더 가까이 갔다. 차원 균열에서 어보미네이션을 끌어내는 느낌으로.
아니나 다를까, 차의 문이 열렸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소리가 하이힐 탓에 또각, 또각, 또각거리는 건 약간 거슬렸지만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좋아, 따라오는군.’
당황해서 그를 쫓는 다섯 명의 어벤저를 곁눈질로 확인한 그는 사전에 계획한 장소로 그들을 끌고 갔다. 사전에 계획했다고는 해도 불과 몇 분 전에 머릿속으로 계획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장소가 계획을 실행하기에 좋은 장소인 건 이미 확인한 바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지희 본인이 오만구를 비롯한 다섯 명의 어벤저를 혼자서 물리친 바로 그 공터였으므로.
다섯 명 모두가 공터로 따라 들어오자 그의 능력이 발동했다.
그의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는 진홍왕의 유물이라는 아티팩트다. 그 능력은 일정 범위 안에서 효과 지속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반지를 낀 자를 제외하고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이 공터가 바로 그 범위였다.
그의 오른팔을 장식한 팔찌 중 가장 아래에 낀 것은 인롱의 팔찌라는 아티팩트다. 그 능력은 일정 범위를 다른 공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것. 이것으로 이 공터는 사람도 드나들 수 없으며, 이제 통신도 두절되었고,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깥에서 목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완전범죄 공간을 만드는 데 그는 상당한 차원력을 투자해야 했다. 하기야, 제자를 위한 투자다. 아까워할 것은 없었다.
“호오.”
공터에 들어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다섯 어벤저를 바라보며 그는 웃었다.
“B급 정도 되니까 ‘뭔가 이상하다’ 정도는 느낄 수 있는 모양이로군. 하지만 뭐가 이상한 건지는 아직 모르는 눈치야.”
이지희의 목소리로 한 그의 말에 다섯 어벤저는 명백히 당황했다.
“뭐야, 너 뭐 하는 년이야?”
“이지희입니다, 선배.”
“나도 알아, 이 새끼야!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그들을 보며 그는 코웃음 쳤다.
“시간 아깝다. 한꺼번에 덤벼.”
그런 광오한 발언에 그들의 당황이 분노로 바뀌었다.
“뭐? 이 잡년이……. 우리가 WF 소속 어벤저인 건 알고 개기는 거냐?!”
“선배, 그런 거 말하면 안 돼요.”
“넌 좀 닥쳐!!”
자기들끼리 싸우는 거야 상관없지만 무시할 수 없는 단어가 하나 들렸다.
“WF?”
이지희의 아름다운 미간이 꾸깃거렸다. 김현직이라면 그게 그녀가 가장 화가 났을 때 보이는 표정인 걸 간파했겠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에 김현직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표정을 보고 이지희가 졸았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래, 지금 와서 빌어봐야 늦었어.”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이지희의 반응은 그들에게는 의외의 것이었으리라.
“아하하하, 하……. 제자를 위해 힘 좀 써보려고 할 셈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되는군. 이것마저 나를 위한 일이 될 줄이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덤벼라, 라고 하지 않겠다. 자아, 받아라.”
공격이 시작되었다.
*
차원이 다르다.
조상평이 느낀 감상은 그 한 문장으로 축약할 수 있었다.
“미안하군. 자네들은 그저 고용되어 명령을 받고 하는 일일 텐데, 나의 복수심을 위한 제물이 되려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하지만 내 분노는 식을 줄 모르고 타오를 뿐이고, 자네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이성은 작동하질 않는군. 자아, 저항하게. 안 그러면 죽게 될 테니.”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감히, 어떻게 저 존재에게 그런 말을 뱉을 수 있겠는가. 이지희? 저건 이지희가 아니다. 저런 존재가 어떻게 이지희일 수 있겠는가. 저 존재를 직접 마주한다면 누구도 감히 이름을 부를 수는 없으리라. 조상평에게 저 존재의 이름을 붙이라고 한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분노한 마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벽에 처박힌 채 조상평은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줌은 지린 지 이미 몇 분은 지났다. 오로지 살려 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자네는 삶에 대한 미련이 큰 것 같군.”
그 목소리가 마신에게 들린 것인지 마신이 그를 향해 와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조상평은 다시 한 번 뜨거운 소변이 사타구니를 타고 흐르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압도적인 공포 앞에 살려 달라는 말조차 잊고 입을 헤 벌릴 뿐이었다.
“그렇다면 살려주지. 다만 조건이 있네. 세상에 대가 없는 건 없는 법이지.”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자네들 보스가 누군가?”
“진가충입니다.”
조직에 대한 충성? 배신에 대한 죄악감? 그딴 건 없었다. 있는 거라곤 그저 삶에 대한 강한 열망, 덤으로 절대자에 대한 외경뿐이었다. 조상평에게 눈앞의 존재는 이미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는 이미 눈앞의 존재가 말하는 대로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진가충?”
“진가규 회장의 차남이자 WFF의 부사장입니다. 저희에게 당신, 아니, 아가씨, 아니, 귀하를 모셔오라고 시켰습니다. 목적은… 목적은 저 같은 아랫놈에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소문은 파다합니다. 노리개로 쓸 거라고… 감히,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입에서는 눈앞의 존재가 묻지 않은 것조차 술술 흘러나왔다. 무엇을 감추겠는가! 이미 그의 마음은 활짝 열려 있었다.
“자네가 대가를 지불했으니 나는 약속대로 자네에게 생명을 선물하지.”
온몸을 짓누르던 정체불명의 힘에서 해방되어 그는 자유를 되찾았다. 그 자유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는 할 수 있는 것 대신 해야 할 것을 떠올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땅에 박아 눈앞의 존재에게 복종과 경외를 바쳤다.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선배들의 시선 또한 그를 비난하는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선배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받으며 그는 마치 종교적 고위직에 오른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조상평이 풀려나는 것을 본 다른 이들도 일제히 울부짖기 시작했다. 기이한 열기가 자리를 지배했다. 그것은 마치 종교적 제의를 방불케 했다.
저들은 평신도, 나는 제사장이다!
선배들이 울부짖는 광경을 본 조상평의 마음에는 기묘한 우월감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
조상평은 눈을 떴다.
온몸이 아팠다. 그리고 양 뺨과 사타구니가 축축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히 이지희를 발견하고, 이지희도 그들을 발견했고, 이지희가 도망갔고, 그들을 쫓아갔고…….
이 공터에 도착했다.
눈앞에는 이지희가 있었다.
‘잡아야지.’
그것이 그의 일이었다. 이지희를 납치해서 그의 보스에게 데려가는 것. 그런 명령을 받았다.
자신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무릎을 꿇은 대상이 이지희였다는 것도… 그리고 이지희 앞에서 고개가 올라가지 않는 것도.
다른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지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뭐지? 이게 저 여자의 어벤저 스킬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었다. 어벤저 스킬을 사용하거나 받을 때 느껴지는 기이한 압박감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이지희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심이었다.
‘뭐?’
복종심이라니! 그런 건 WF의 회장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평생 종교라는 걸 가져보지 않은 그는 신에 대한 경외가 뭔지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이지희에게 그런 경외를 느끼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됐네.”
이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돌아들 가게. 그리고 다시는 날 찾지 말게.”
그 말에 조상평은 절망감을 느꼈다.
‘다시는 찾지 말라니,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런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감히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고 또한 생각했다.
비논리적이었고, 비이성적이었지만 그는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내 이름도 입에 올리지 말고 내 존재도 잊게. 모든 것은 끝났네. 자아, 이제 가게!”
“알겠습니다.”
그 대답이 겹쳐졌다. 선배들 또한 같은 대답을 했음을 그는 나중에 깨달았다.
그들은 뒤로 기어 공터에서 나왔다.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그들은 이지희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감히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저들이 이지희에게 저토록 종교적 열정과 비견할 만한 일방적이고도 무조건적인 복종심을 보이는 이유는 김인수가 저들에게 어떤 아티팩트나 어벤저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벤저 스킬을 앞에 두고도 무신론자인 채로 있을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다. 어벤저 스킬에 각성한 인간은 그간 인식해 왔던 세계가 완전히 달라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벤저 스킬은 알기 쉬운 이능력이다. 처음으로 어벤저 스킬을 사용했을 때, 즉 물리 법칙을 초월한 말도 안 되는 일을 자신의 뜻대로 일으켰을 때,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의식한다.
물론 신만 떠올리는 건 아니다. 악마, 영혼, 귀신 등. 그러나 그건 초월적인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를 뿐, 그 본질은 같다.
그리고 그 떠올리는 방식 또한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
내가 신이 되었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한 이는 다른 어벤저의 존재를 떠올리고 곧 그 생각을 접는다. 신이 내게 이 힘을 주었다고 생각한 이는 언젠가는 능력을 악용하는 어벤저를 만나고 그 생각을 접는다. 아니면 그 신이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역시 신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마다 떠올리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 생각의 귀결은 비슷하다.
잊는다.
사람은 자주 보는 것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어벤저 스킬마저도 자신의 세계관에 포함시킨 어벤저들은 평상시의 세계를 되찾는다. 신에 대해 잊고, 악마에 대해 잊고, 모든 것에 무덤덤해진다. 어중간하게 강력한 능력을 보더라도 저것도 어벤저 스킬이려니 하고 넘어가게 된다.
B급 어벤저.
어느 정도 능력에도 익숙해졌고 길드에서부터 뒹굴어 경험도 쌓은 이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벤저 스킬에 대해서도 지식으로나마 알고 있게 되는 수준에 도달한 이들. 자신이 특별한 존재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어벤저의 세계를 알아먹었다고 생각하는 이들.
오늘 이지희 앞을 가로막은 B급 어벤저들은 그런 이들이었다.
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이들. 젓가락질을 어떻게 하는 건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 이들. 어벤저 스킬마저도 당연히 존재하고,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되어버린 이들.
그러나 그런 이들이 완전히 상식 외의 차원이 다른 능력을 목도한 때.
즉, 처음 어벤저 스킬을 사용했을 때의 그 충격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경험을 맛봤을 때 그들은 잊고 있었던 신의 존재 또한 다시 떠올리게 된다.
어벤저로서의 세계관을 확고히 구축한 그들은 오늘, 그가 김인수로서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 세계관이 다시 깨져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상대가 B급 어벤저이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잘 모르는 D급 어벤저라면 김인수가 B급 어벤저와 비슷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너무 모르기에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어벤저 스킬의 매커니즘을 이해한 B급 어벤저에게는 김인수가 일으킨 이적이 신의 손길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짓을 해버리는 김인수를 보고 그를 신으로 인식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들이 오늘 경험한 일들에 대한 기억은 없다. 진홍왕의 유물이 발휘한 힘에 의해 그들은 공터에서 경험한 모든 일들에 대해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러나 감정은, 그리고 신앙심은 지식이나, 기억, 경험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자신이 신을 믿게 된 계기를 잊어버린 종교인이 그럼에도 불과하고 자신의 신앙을 배신하지 못하고 무작정 신을 믿듯. 장성해 이미 자신이 늙은 주인보다 더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주인에게 순순히 배를 내보이는 사냥개처럼.
기억을 잃은 그들도 무작정 눈앞의 이지희를 신앙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몰이성적인 복종심을 이지희에게 보인 것이다.
“후.”
물론 김인수는 이 현상을 노리고 일으키기는 했다. 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조상평이라는 남자를 굳이 골라서 가장 먼저 생존을 보장시키고 반대로 다른 이들에게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가함으로써 심리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사실 그다지 선량하다고 할 수는 없는 행위지만 특별히 죄악감은 느끼지 못했다. 상대는 WF 소속인데다, 여자를 납치하려고 했다. 상사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게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팔다리를 잘라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인수 입장에서는 선처했다고 말해도 별로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덕에 그들에게서 WF에 대한 정보를 듬뿍 얻어낼 수 있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고문까지 할 생각이었던 걸 감안하면 이번 일은 양쪽 모두에게 이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대는 B급에 말단 실무자여서 핵심 정보까지 캐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심에 기반해서 열정적으로 떠들어댄 그 정보들은 가짜일 수는 있어도 거짓이지는 않을 터였다.
“진가충, WFF의 보스이자 진가규의 차남……. 이지희를 노리는 게 그놈이었다니.”
그리고 이번에 얻은 핵심 정보는 이것이었다.
진씨 일가의 차남이라. 돈과 권력은 충분할 터. 이번에는 B급 어벤저를 보냈지만 다음에는 A급 어벤저를 보내고도 남을 놈이다. A급을 막고 나면 그 다음에 S급 어벤저가 올 수도 있었다.
그걸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것도 나름 흥이 나는 일이겠지만 김인수의 성미에는 맞지 않았다.
“근본을 쳐야겠어.”
그의 입가에 히죽, 미소가 걸렸다.
*
“최재철은 당연히 안 되고 김인수의 모습도 좀 애매하지.”
이제부터 그가 할 행위는 사실 지구를 위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재철의 모습으로 하기엔 조금 애매했다.
“박기범……. 박기범도 좀 아닌 것 같고.”
조상평의 정보로 WF가 박기범을 더 이상 쫓지 않는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그건 좀 의외였다. 진가규는 자신의 손자를 상당히 아끼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손자의 원수를 갚는 걸 포기하다니.
그렇다고 굳이 박기범의 모습으로 어그로를 끌어댈 이유도 그에게는 따로 없었다. 박기범은 더 괜찮은 활용 방법이 있으리라.
“그럼 우주환의 모습으로 가볼까?”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빙글빙글 돌리던 그는 픽 웃었다.
“꼭 누구의 모습을 할 필요는 없지.”
아무도 아닌 게 가장 좋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냥 가면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결정을 했으므로 그는 자신의 가운데 손가락에 낀 반지에 차원력을 흘려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이 반지의 이름은 사자문의 열쇠. 이 아티팩트는 김인수 개인 소유의 차원 금고를 활성화시킬 뿐만 아니라 금고를 열고 원하는 물건을 찾아내어 그에게 건네주는 역할 또한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차원 금고에서 가면을 꺼내들었다.
장식 따위는 없는 그냥 가면. 눈구멍이나 숨구멍 같은 것도 없었다. 얼굴 전면을 그냥 덮고 있을 뿐인 강철의 가면이었다.
이 가면의 기능은 ‘쓰지 않은 것 같다’, 그게 전부였다.
말 그대로 눈앞이 보이고 숨도 마음대로 쉴 수 있다. 무게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얼굴을 가리는 가면 본연의 기능에 더해 강철제 방어구로써도 기능한다.
기능은 그게 뭐냐는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소소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물리적인 법칙을 거스르는, 생각보다 대단한 가면이다.
가면을 쓰고 난 그는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이용해 자신의 체형을 바꾸었다. 아예 여자 체형으로 바꿀까 하다가 대충 근육질의 남자로. 그리고 목소리도 바꾸었다.
“아, 아. 흠, 좋아.”
자신의 목소리를 점검하며 이 정도면 됐겠지, 라고 생각한 그는 반지 운반자의 팔찌 본래의 기능을 이용해 모습을 숨기고 집에서 나왔다.
이제부터 그가 할 일은 다음과 같다.
WF가 소유한 차원 균열을 하나 닫는다.
그것이었다.
진현우를 죽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지나치게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분명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조상평으로부터 얻은 정보가 그것이었다.
WF 소유의 차원 균열을 닫으면 그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은 전부터 해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병력이 어떤 방식으로 지키고 있는지는 기밀에 속해서 어벤저 네트워크를 통해서도 알아낼 수 없었는데 조상평이 이걸 불어준 것이다.
시각은 이미 새벽이었지만 그의 지글거리도록 불타고 있는 복수심은 그가 바로 잠들 수는 없게 만들고 있었다. 알게 된 이상,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움직였다.
강철 가면의 모습으로.
*
“잘 생각해 보니 차를 살 필요는 역시 없겠군.”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그가 차보다 빠르니까.
차라리 자전거를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목적지로 삼은 장소는 논산이었다.
구 논산 훈련소. 지금은 폐쇄되어 버린 이 훈련소 안에도 차원 균열이 존재한다. 그것도 WF 소유의 차원 균열이다. 물론 이 차원 균열이 이 훈련소를 폐쇄시켜 버린 원인이기도 했다.
규모 자체는 WF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파주 차원 균열에 비하면 절반 미만 정도지만 나름 수도권에서 가깝기도 한 지리적 측면도 반영되어 중요도가 그리 낮지는 않은 지역이다.
“시험 삼아 닫아보기엔 딱인 곳이란 말이지.”
그는 폐쇄된 문을 휙 뛰어넘었다. 그러자 바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오, 이런.”
그는 살짝 탄식한 후,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
타타타타!
대한민국의 제식소총인 K-2가 불을 뿜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민간 기업이 소총 부대를 운용하고 있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TA도 운용하고 있는 화력지원 부대다. WF라고 소총 부대를 운용 안 할 리는 없었다. 어보미네이션이라는 괴물을 상대로 일반인에게 맨손으로 싸우라고 그냥 보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소총을 비롯한 현대 화기가 헬필드 안에서는 무용지물이라지만 일단 헬필드 바깥으로 빠져나온 어보미네이션들에게 총은 상당히 효과적인 무기이니 총포 소지 허가를 내준 국가의 결정을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인간을 향해 발사될 것이라고는 그다지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인간이란 물론 그 자신이다.
“아, 짜증나.”
그는 혀를 찼다.
그냥 짜증이 났다. 모습을 숨겨 버리면 총알이 날아오지 못할 것임은 그도 안다. 하지만 WF가 자사의 차원 균열을 무단 침입해 온 어벤저를 어떻게 막을지 궁금해서 일부러 가면까지 쓰고 모습을 드러낸 채 달리고 있었다.
그 답이 총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차원 능력자라고 해도 그렇지, 그냥 총부터 갈기고 보다니.’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차면서도 그의 다리만은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아직 총에 맞지는 않았다.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응용한 능력으로 그의 실제 위치와 눈에 보이는 위치는 5m 정도 어긋나 있었다. 즉, 소총수들이 아무리 그를 향해 총을 쏴도 총알은 허공을 스칠 뿐이다.
아직까지는 조준 사격을 가해오는지라 한 대도 안 맞을 수 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탄막을 쳐서 마구 쏴대면 눈 먼 총탄에 맞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총을 맞아도 멀쩡할 수 있는 보험이 있다지만 쓸데없이 그 보험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헬필드 안에 들어왔다.
“자, 이제 총은 소용없다. 어떻게 할 거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았다.
컹컹, 컹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서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경비 부대 측에서 개를 푼 것이었다.
상대는 어보미네이션도 잡는 어벤저다. 그런 상대를 개를 풀어 잡을 생각은 아닐 터였다. 문제는 개라는 생물 자체의 성질이었다. 충성심이 강하고 훈련을 통해 조건반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개를 이용해서 경비 부대가 하려는 짓은 바로…….
“샤아아아악!”
차원 균열 쪽에서 리자드독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저들이 선택한 방법은 개를 이용해 어보미네이션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하, 침입자를 어보미네이션의 힘을 빌어서 처치하려고 하다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머리를 잘 썼다고 해야 하나?”
개들은 최하급 어보미네이션, 리자드독의 출현에 겁을 먹었는지 헬필드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면서 계속 짖고 있었다. 그렇게 하도록 훈련을 받았을 터였다. 그 개 짖는 소리에 차원 균열에서는 리자드독들이 계속 기어 나오고 있었다.
5마리, 10마리, 20마리.
이게 개를 디코이로 이용하지 않는 이유다. 물론 훈련 여하에 따라 다를지도 모르지만 개를 이용해서 어보미네이션을 원하는 만큼만 끌어내는 건 굉장히 힘들 터였다.
평범한 생물에게 있어서 어보미네이션은 근본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존재이고, 그 모습을 눈앞에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이성 따위는 간단히 날려 버릴 수 있다.
인간을 상대로도 그런데, 하물며 개가 어보미네이션 앞에서 공포를 억누르고 본능을 죽이고 훈련받은 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그것도 차원력이 뿜어져 나오는 차원 균열 앞에서?
평범한 인간에게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몸 안에 차원력을 지닌 어벤저들은 차원력의 압박과 어보미네이션의 공포에 어느 정도의 내성을 갖추는 게 가능하다. 괜히 비싼 연봉을 쥐어줘 가며 어벤저를 디코이로 쓰는 게 아니다.
어쨌든 경비 부대에서 개를 푼 결과, 어느 정도 우수한 어벤저조차 부담스러워 할 숫자의 어보미네이션이 차원 균열에서 몰려나오고 있었다.
“진퇴양난이네.”
그가 평범한 어벤저였다면 그랬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어벤저가 아니었다.
‘저 리자드독을 잡아봤자 그 시체를 WF 측에서 돈 내고 사줄 것 같지는 않군.’
헬필드 바깥쪽에서는 경비 부대가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만약 그가 리자드독들에게 겁을 먹고 헬필드에서 나오면 바로 총을 쏴버리겠다는 태세였다.
그러니 굳이 리자드독을 잡아 죽이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모습이 훅, 촛불이라도 꺼지듯 사라졌다. 물론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응용한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리자드독들은 순간적으로 목표물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다가 가장 가까운 사냥감으로 목표물을 변경했다.
개들이었다.
‘불쌍한 개들.’
개를 공격하기 위해 헬필드 바깥으로 나간 어보미네이션들을 향해 소총이 불을 뿜었다. 물론 그 사이에 끼인 불쌍한 개들은 자신들이 충성하던 대상의 총격을 적들과 함께 받아야 했다. 그저 주인을 잘못 만난 죄로.
‘도저히 웃을 마음은 들지 않는군.’
그는 그 끔찍한 광경에서 눈을 돌리고 원래 가려고 한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차원 균열을 향해.
원래 오늘 그가 하려던 일을 하러.
*
차원 균열의 안쪽은 그의 입장에서는 익숙했다.
어둠 속의 공간.
이 공간에 들어올 때마다 그는 불쾌함을 느낀다. 처음 그가 진가규에 의해 차원 균열 속에 던져졌던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미 이 공간에 수백 번을 들어와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쾌함은 없어지지 않았다.
“역시 진가규, 그놈을 족칠 때까지는 두 발을 뻗고 잘 수가 없어.”
새삼 이를 갈면서 그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동굴이었다. 좁고, 습하고, 어두컴컴한 동굴의 가장 안쪽. 여기가 바로 이 틈새 차원의 가장 밑바닥이다. 차원 균열을 통해 들어온 존재가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광경이기도 하다.
그 동굴 속에서 여러 안광이 보였다. 날카롭고 살기에 찬 안광들이다. 어보미네이션 웨이브라 불리는, 차원 균열 탐사가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현상이 지금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최재철이 현오준 팀과 갔던 ‘초보자용 던전’과는 달리, C급은 물론이고 B급 어보미네이션도 포함된 위협적인 웨이브였지만 그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오히려 차원력을 숨겼다. 거의 일반인과 다름없는 수준까지 차원력을 줄이자 모습을 숨기고 있던 변색 도마뱀과 투명 마수가 실체를 드러내었다. 변색이나 투명화에 차원력을 쓰는 것도 아깝다는 듯, 욕망으로 가득 찬 미소와 함께 어보미네이션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다음 순간, 그는 정면에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어보미네이션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좋아, 아주 좋아!”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뻗은 손바닥 위에서 작은 공이 나타났다. 그 공은 검은색이었다. 그냥 검은색은 아니었다. 마치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한, 아마도 블랙홀을 육안으로 보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색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게 블랙홀이었다.
달려들던 어보미네이션들이 그의 손아귀 위에 놓인 미니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리자드독이 가장 먼저 빨려 들고 크로코리언이 그 뒤를 따랐다. 변색 도마뱀이라고 운명이 다르진 않았다. 도중에 이상함을 느끼고 달려들길 멈춘 거대한 투명 마수도 블랙홀은 아랑곳 않고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빠직, 우직, 와직. 가죽이 찢어지고, 살이 쪼개지고, 근육이 짜개지고, 뼈가 빠개지며,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미니 블랙홀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미니 블랙홀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어보미네이션을 빨아들이자 그는 능력의 발동을 멈췄다. 그의 손바닥 위에 주먹만 한 검은 보석이 떨어졌다.
최근 연구에서는 이전과 다른 이론도 나온 모양이지만 기존의 이론에 따르면 석유는 고대 생물들의 시체가 지중의 고온, 고압으로 인해 변질되어 생겨난 물질이라고 한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석유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이 검은 보석은 그런 존재이다. 미니 블랙홀의 압도적인 중력 속에서 삽시간에 세 개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시체가 된 어보미네이션들이 압축되어 생성된 결과물.
그가 가볍게 쥐어 올리고 있지만, 사실 이 검은 보석의 무게는 100톤이 넘는다. 물리법칙대로라면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물질. 존재 그 자체로 물리법칙을 비웃는 검은 물질을 그는 자신의 차원 금고 속에 던져 넣었다.
“이걸로 반은 했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가볍게 손을 털어 손가락을 풀며 그는 이어 말했다.
“자, 그럼 나머지 절반.”
차원 균열이 생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을 터인 차원과 차원 사이의 틈새에 각 차원의 잉여 차원력이 모여들어서 틈새 차원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생긴다. 잉여 차원력은 계속해서 그곳에 모여들고, 틈새 차원도 그 차원력을 통해 팽창한다.
문제는 이 틈새 차원이 원래대로라면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차원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차원과 차원 사이의 틈새에서 생성된 차원이니만큼 그 팽창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틈새 차원은 팽창하다 못해 지나치게 모여든 차원력을 다른 차원에 균열을 열고 쏟아내고 만다.
이 과정에서 열리는 것이 차원 균열이다.
그렇다면 이 차원 균열을 닫는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이 틈새 차원에 모여든 잉여 차원력을 줄이면 된다.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심플한 방법은 역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차원력을 뿜어내는 차원 마수를 처치하는 것이다.
설명은 길어졌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이 던전의 보스를 처치하라.”
그것이었다.
“흠, 이 던전의 보스는 ‘눈 사냥꾼’인가.”
눈 사냥꾼은 틈새의 눈, 즉 지구에서 말하는 빅 마우스를 사냥해 먹는 거대한 동물이다. 아니, 사실 어보미네이션들은 동물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존재이지만 뭐, 움직이는 생물이긴 하다.
이 눈 사냥꾼의 존재가 빅 마우스로 하여금 틈새 차원의 지면을 통해 파고들어 ‘던전’을 생성하고 다른 차원에다 차원 균열을 열어대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사냥감으로 천적인 눈 사냥꾼을 피해 오는 것이다.
틈새의 눈의 노력도 허망하게 눈 사냥꾼은 이런 던전까지 파고들어 와 틈새의 눈을 찾아서 잡아먹고 대신 여길 둥지로 삼는다. 이렇게 던전의 주인이 바뀐다.
새로이 던전의 주인이 된 눈 사냥꾼은 던전에 머물고 있는 다른 어보미네이션을 잡아먹거나 특유의 페로몬을 이용해 틈새의 눈을 끌어들인다.
뭐, 그런 눈 사냥꾼의 생태는 지금의 그에게는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그는 차원 금고에서 한 가지 물건을 찾아내 꺼내 들었다. 그 물건의 이름은 스타벅의 작살. 오로지 눈 사냥꾼만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아티팩트이다.
“좋군.”
한 마디 흘린 그는 아무렇게나 스타벅의 작살을 던졌다. 작살은 멋대로 날아갔다. 작살 끝에 매달린 작은 은색 실이 작살의 궤적을 알려주고 있었다. 곧 작살은 멈췄다. 목표물에 박힌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나를 이스마엘이라 부르라.”
은빛 실을 타고 전달된 막대한 차원력이 작살에 전달되었다. 동굴 저 너머의 막다른 곳에서 폭음이 들렸다. 눈 사냥꾼이 한 번 죽은 것이다.
그는 은빛 실을 당겨 작살을 회수했다. 그리고 첫 번째 목숨을 잃고 분노한 눈 사냥꾼의 포효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통로는 눈 사냥꾼이 통과하기에는 너무 작았고, 그렇기에 눈 사냥꾼은 숫제 새로운 통로를 파듯 날뛰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죽으러 오고 있었다.
그 생물은 고래와도 같았다. 50m에 달하는 거대한 몸체의 일부만을 본다면 고래처럼도 보일 터였다.
하지만 고래는 아니었다. 고래가 어디 허공을 날든가? 더욱이 입 주변에 촘촘히 난 촉수는 그것 각각 하나씩 투명 마수의 촉수를 능가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 수십 개의 촉수를 휘두른 눈 사냥꾼은 동굴 벽을 때려 부수고 여기까지 왔다.
그의 존재를 확인한 눈 사냥꾼은 거대한 입을 쩌억 벌렸다. 다섯 겹으로 난 백상아리와도 같은 날카로운 이빨이 이 생물의 본질은 프레데터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벌린 입으로 눈 사냥꾼은 포효했다.
크구거거거거거.
공기는 물론이고 차원마저 흔들린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포효였다. 그러나 그는 눈 사냥꾼이 가한 위협을 가볍게 무시하며 다시 한 번 작살을 던졌다.
수면 아래의 작은 물고기라도 잡듯 가볍게 던진 작살은 다이아몬드보다 딱딱하고 티타늄 합금보다 단단한 눈 사냥꾼의 거죽을 손쉽게 파고들어 용암보다도 뜨거운 살가죽을 헤치고 맹독으로 가득 찬 심장까지 꿰뚫었다.
콰앙.
차원력에 의한 폭발과 함께 눈 사냥꾼은 두 번째의 목숨을 잃었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뒤늦게 깨달은 듯 눈 사냥꾼은 몸을 뒤틀었다. 도망치려는 것이다.
“후후후.”
그는 즐거운 듯 웃었다.
이미 늦었다. 처음 작살로 심장을 꿰뚫렸을 때 도망쳤어야 했다. 세 번째로 던져진 작살이 또다시 눈 사냥꾼의 심장을 꿰뚫었다.
콰앙!
결국 눈 사냥꾼의 거체는 곧 생명력을 잃고 그 자리에 나자빠지고 말았다.
“귀찮지만 재미있군.”
그는 간단한 감상을 남겼다.
이렇게 심장만을 파괴하는 식의 귀찮은 방법을 사용해 눈 사냥꾼을 처치해야 하는 이유는 이놈의 시체가 대단히 가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태워서 연료로 쓰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울 정도로. 괜히 이놈만을 잡기 위한 전용 아티팩트가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놈의 피부 아래에 자리 잡은 향기로운 기름부터 시작해서 내장 속의 똥마저도 가치를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고가에 거래된다.
하지만 이놈을 여기서 해체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던전의 보스가 죽었으니 이 차원 균열은 곧 닫힐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차원 금고 속에 눈 사냥꾼의 시체를 던져 넣었다.
“다 끝났군.”
던전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익숙한 소리였다.
그는 차원 균열을 통해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
*
본래 차원력을 주변에 뿜어내며 헬필드를 흩뿌리던 차원 균열이 닫힐 때는 반대로 차원력을 빨아들이며 헬필드까지 없애 버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것은 이변의 종말이자, 일상의 회복을 고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김인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WF측의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차원 균열이 있었어야 할 자리를 사색이 된 채 바라보고 있는 저들의 내심은 무엇일까? 상부로부터 받을 질책에 대한 공포일까? 그런 건 그가 염려해줄 것도 아니었다.
모습을 숨긴 채 저들의 반응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곧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저들 중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하나만으론 좀 부족하지 않나? 하나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이지!”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지금 그가 하려고 하는 짓은 위험한 짓거리였다.
자신들 소유의 차원 균열이 닫힌 걸 안 WF가 전력을 다해서 반격을 한다면? 그 WF의 전력이 어느 수준인지 모르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게 그를 넘어서는 전력이라면 그의 복수는 여기서 끝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아직은 정보가 부족하고 확신은 없었다. 조상평은 B급이긴 하나, 반대로 말하면 불과 B급. 그 정보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늘 밤 내로 차원 균열을 두 개나 더 닫을 결심을 하게 된 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모습을 숨긴 그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어벤저를 호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는 아직 전력을 다할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야.’
발목을 물어도 움직임이 없다. 그렇다면 아직 파고들 틈이 있다. 거인의 허벅지 살 두 점 정도는 떼어낼 정도의 틈이. 틈이 있는데 잡아 뜯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어벤저의 연봉이 왜 이렇게 높은가.
김인수가 이계에 다녀온 10년 동안 딱히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일어난 것은 오히려 디플레이션이었고, 현재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태다. 대한민국의 인건비는 어벤저의 연봉 빼고는 다 저점을 찍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디플레이션 자체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차원 균열이 열린 대한민국은 미국과 함께 어보미네이션 산업에서 큰 이득을 벌어들였다.
이 이득은 국가 전체로 퍼지며 경기를 호황으로 만들어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윤택해졌어야 했다.
어보미네이션 시체에서 얻어낼 수 있는 막대한 열에너지가 공공의 이득을 위해 사용되었다면 난방비는 당연히 무료여야 했고, 전기도 거의 무료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었을 터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런 전제가 깔린 점에서 이미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간에 발전소 설립 허가가 나오면서 민간 기업이 일반인에게 전기를 팔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법을 통과시킨 정치가들은 자율 시장경쟁으로 인해 더욱 저렴하게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사기업에서 전기를 사다 쓰든 공기업에서 전기를 사다 쓰든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은 누진세와 누진 요금을 물어야 하는 건 똑같았다.
오히려 담합으로 인해 전기 요금이 더 오르기도 했으며, WF와 TA는 매년 막대한 액수의 과징금을 정부에 내고 있다. 이는 담합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남아도는 막대한 열과 전기는 사람들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대신, 강철과 알루미늄과 티타늄을 생산하는 데 쓰였다. 기존 원가에 연료 가격이 상당히 붙어 있던 이들 강재를 대한민국은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세계에다 뿌릴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가치가 없는 거나 다름없는, 불순물이 많은 원재료로도 질이 높은 강재를 생산할 수 있으니 아무리 싸게 팔아도 남는 장사였다.
물론 제강 산업은 대표적인 일례일 뿐이다. 에너지는 온갖 산업에 사용되었다. 제조, 물류, 유통, 건설, 통신……. 말 그대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빼고는 전부 다.
다른 기업들도 WF와 TA의 에너지를 사지 않고서는 기업 운영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고, 두 대기업은 다른 기업에 에너지를 돈 받고 팔면서 자사에서는 공짜나 다름없이 쓸 수 있으니. 어보미네이션 산업에 몸을 담근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경쟁이 성립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기업들도 어보미네이션 산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이 어보미네이션 산업에 필수인 것이 1차적으로는 어보미네이션 시체. 어보미네이션 시체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으로는 헬필드 안에서도 생존이 가능한 B급 이상의 어벤저의 존재.
WF와 TA의 입장에서 다른 것은 담합이 가능해도 어벤저 확보만큼은 담합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WF와 TA는 말도 안 되는 돈을 주고서 어벤저 확보에 나섰다. 다른 기업에 취직한 어벤저들마저 적극적으로 헤드헌팅에 나서니 연봉에 말도 안 되는 거품이 끼는 것도 당연지사.
이런 환경 속에서 불과 C급인 최재철의 억대 연봉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물론 C급 중에서도 엄선된 실전 면접을 통과한 그이기에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이 어벤저의 연봉이 왜 이렇게 높은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보미네이션으로 얻어내는 막대한 이득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합법적이고 비합법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한 끝에 만들어낸 이 환경 속에서 어보미네이션 산업으로 인해 발생된 이득은 아주 소수의 인간들만 나눠먹게 되었다. 말 그대로 어보미네이션 산업의 관련자들만. 딱 거기까지다.
그러니 김인수가 WF의 차원 균열을 닫아서 손해를 볼 인간들도 딱 거기까지다.
WF와 그 관련자들.
거기까지.
*
아침에 일어나서 인터넷 뉴스를 보니 김인수가 간밤에 저지른 일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논산의 차원 균열을 포함해서 김인수는 WF가 소유하고 있는 차원 균열 세 개를 닫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구에서 이제까지 닫힌 차원 균열의 숫자는 아홉 개. 그가 닫은 세 개를 합하면 열두 개가 되는 셈이다.
미군들이 큰 희생을 치르며 닫은 것이 일곱 개, WF가 닫은 것이 두 개다. 국가 규모로는 차원 균열을 닫을 수 있는 세력은 미국뿐이며, 민간 기업 중에서는 차원 균열을 닫을 수 있는 기업은 WF뿐이다.
그것도 WF가 닫은 두 개 중 하나는 업계에서 독점적 지위를 얻기 위해 과시적으로 닫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고로 닫힌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차원 균열이 닫히는 건지, 안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난 건지도 외부에는 밝혀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차원 균열을 닫은 미군들은 차원 균열 안에서 모조리 행방불명되었고, 차원 균열을 닫고도 돌아온 이들은 WF의 첫 프로젝트 팀뿐이다. 그리고 그 첫 프로젝트 팀은 어떻게 차원 균열을 닫은 건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지금의 지구인들의 인식으로 차원 균열은 위험하지만 자원의 보고인 곳이다. 그런 만큼 통제만 가능하다면 일부러 닫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대세이다.
가끔 기어 나오는 어보미네이션은 헬필드 바깥에서 사살하면 되고, 그 시체는 신시대의 고부가가치 상품이니까.
위험하다고 해도 일선의 병사들이나 위험할 것이고, 자기 집에서 일상생활을 보내는 일반인에게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그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WF가 거액을 들여 홍보한 결과로 이뤄진 인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차원 균열이 세 개나 한꺼번에 닫혔다.
위험한 게 사라져서 다행이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보다는 국가의 자산이 증발했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 인식은 곧 이 사태에 대해 분노와 질책으로 이어졌다.
몇 년 전 일이기는 하지만 이미 하나를 실수로 닫아버린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만큼, WF의 차원 균열 관리 능력에 의문을 표하는 기사가 나올 법도 했다.
이로 인해 WF가 입은 손실은 금액으로 환산해서 3조 원 이상. 주식도 개장과 동시에 매도가 몰려 주가의 20%가 빠지는 대폭락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김인수는 왜 여태까지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WF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 결과에 흡족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흐뭇하게 뉴스 기사를 둘러보고 있던 그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WFF 유연학 사장 퇴임!]
차원 균열 관리 기업 WFF의 유연학 사장이 차원 균열 소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WFF 진가충 부사장이 사장 직위를 이어받았다.
진가충 부사장은 WF그룹의 회장인 진가규의 차남으로 이로써 WFF도 진씨 일가의 친정이 이어지게 되었다. 진가충 신임 사장은 WFF는 물론 WF그룹 차원의 총력을 기울여 이 같은 사태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할 것을 약속했다.
“하…….”
김인수는 쓰게 웃었다. 그 기사가 뭘 뜻하는지는 그도 알아챘다.
그냥 보자면 유연학이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를 이은 게 진가충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WF그룹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태마저도 사내 정치에 이용하는 수완은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당연하지만 기업은 회장의 소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에 가깝게 만들 방법은 있고, 진가규는 진가충이라는 자신의 아들을 이용해서 그 방법을 실행한 것이다.
WFF의 사장 자리에 진가충을 앉힌다. 비록 자회사 하나라지만 자기 혈족에게 WF의 자산을 물려주는 데 성공한 것은 맞다.
보통이라면 주주들이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배당금을 많이 나눠먹으려면 WFF가 잘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그 대표로 유능한 이가 앉아 있는 게 낫다.
유연학은 지금껏 잘해왔다. 그런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잘해왔기에 진가충은 부사장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사태가 일어났고, 책임질 사람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긴급히 대신 채우는 게 부사장.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흘러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결과적으로는 WF그룹 전체의 타격을 진씨 일가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성공적으로 활용한 셈이다.
“이건 좀 씁쓸하군.”
진짜 복수 대상이 어디까지나 진씨 일가인 김인수 입장에서는 입맛이 썼다. 물론 WF의 타격은 진씨 일가에게도 타격일 테니 아주 무의미한 일격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신경 쓰이는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그 어떤 뉴스도 ‘강철 가면’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가 논산 차원 균열에 침입할 때, 그는 분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 가면을 쓰고 체격과 목소리를 변조한 모습이긴 했지만 그 모습을 목격한 이는 많을 터였다. 반지 운반자의 팔찌의 부가된 능력인 인식 장애도 일부러 꺼놨으니 아마 CCTV에도 그 모습이 찍혀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강철 가면의 괴한이 등장하고 얼마 후, 차원 균열이 닫혔다.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이라면 강철 가면의 괴한 출현과 갑작스러운 차원 균열의 소멸에 대한 인과관계를 의심할 수 있으리라. 그 논리가 틀렸든 아니든 최소한 가설은 떠올릴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 가설은 충분히 기삿거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기사에서도 ‘강철 가면의 괴한’에 대해 다루지 않고 있었다.
본 사람이 그렇게 많고 기록까지 남았는데도!
“엠바고를 걸었나 보군.”
WF와 진씨 일가가 언론을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건 그 스스로가 이미 체험한 바 있었다. 그러니 그런 결론을 내는 건 간단했다. 문제는 왜 굳이 엠바고를 걸었냐는 것.
“…직접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걸 테군.”
소총을 든 경비 부대와 경비견만으로는 강철 가면의 괴한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저들은 이미 학습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더 강력한 경비 수단을 배치할 것이라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강력한 경비 수단이란 어벤저일 터였다.
“후.”
그는 짧게 웃었다. WF가 준비한 어벤저라. 그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상대해 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다.
“일주일 정도는 바짝 긴장하게 그냥 놔둬야겠군.”
그럼에도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상대를 기다리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강철 가면의 괴한을 잡아오게.”
진가충은 그렇게 명령을 내렸다.
“아, 진짜요?”
웃는 얼굴의 어벤저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자신이 소속된 회사가 3조 원이 넘는 타격을 입은 대참사를 목도하고서도 그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CCTV로 남은 영상은 한정적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기술을 동원해서도 헬필드 안의 모습을 촬영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기에 강철 가면의 괴한이 헬필드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오늘부로 해고당한 경비 부대의 증언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사람이 맨몸으로 총알을 피해댄다고 하던데, 그런 걸 제가 잡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가?”
“혼자서는요.”
웃는 얼굴의 어벤저는 자존심을 자극해 오는 진가충의 말에도 별 흥분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쫓으면 그놈은 도망칠 테니 포위망을 구성할 인원이 필요합니다.”
“몇 명이나?”
“얘 하나면 되죠.”
웃는 얼굴의 어벤저는 자신의 후임으로 붙은 굳은 얼굴의 어벤저를 가리켰다.
“S급 둘이라.”
“뭐, S급이 비싸서 못 쓰시겠다면야 A급들을 풀면 되겠죠.”
진가충은 표정을 굳혔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둘이 가게.”
“어디로요?”
“파주로.”
“파주요?”
진가충의 말에 웃는 얼굴의 어벤저는 놀란 듯 되물었다. 그 와중에도 그 얼굴에 웃음은 그치지 않은 채였다.
“파주에는 어차피 WF의 정예 어벤저들이 포진해 있지 않습니까? 24시간, 3교대로 어보미네이션 생산에 여념이 없다고 들었는데요.”
“정보가 늦군. 아, 내가 늦게 준 건가? 파주는 지금 헬필드의 축소가 관측되었네. 이 이상 기존 생산량대로 어보미네이션을 생산했다간 차원 균열이 닫힐 가능성이 있어.”
사실 인류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대재해라고까지 불린 8년 전의 참사를 일으킨 차원 균열이다. 만약 정말로 닫힌다면 그것만큼 경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진가충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 심각함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웃는 얼굴의 어벤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그래, 이른바 휴지기라 할 수 있지. 어보미네이션 생산은 중지되었네. 어벤저들도 철수했지. 본사의 지휘 아래 다른 차원 균열에 배치되었을 거야. 그래서 지금은 파주 차원 균열의 책임이 우리 관리 회사로 넘어온 걸세.”
“그럼 만약 파주가 공략당하면 부사장님, 아, 실례. 사장님도 위험하시겠군요.”
공식적으로는 세계 최초로 열린 차원 균열이자, 어보미네이션 생산량 또한 최고를 자랑하는 WF의 보물. 여길 공략당한다면 아무리 진가규의 친자식인 진가충이라 한들 경질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진가충은 자신의 호위로 고용된 최고 수준의 어벤저 둘을 동시에 파주로 투입할 결심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강철 가면의 괴한이 과연 파주로 올까요?”
웃는 얼굴의 어벤저가 말한 의문은 지당했다. 실제로 강철 가면의 괴한이 파주로 올 가능성은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가충이 S급 어벤저 둘을 파주로 보내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모습을 숨길 수 있음에도 일부러 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춘 놈일세. 공명심이 높은 타입일 테지. 그런데 논산을 비롯해 세 개의 차원 균열을 자신이 닫았음에도 기사가 하나도 뜨지 않은 것에 화가 났을 걸세. 그렇다면 다음에 노릴 차원 균열은 자연히…….”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지닌 차원 균열, 파주가 되겠군요.”
“가능성이 제로라고 하지는 못하지. 하지만 우린 그걸 제로로 만들 필요가 있네.”
요는 리스크 관리의 의미였다. 가장 닫히면 안 되는 차원 균열에 가장 강한 전력을 투입한다. 알기 쉬운 정공법이지만 허허실실을 취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니 어쩔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명 받들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웃는 얼굴의 어벤저와 굳은 얼굴의 어벤저는 사장실에서 나갔다.
진가충은 그들이 나간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 같으면 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캐비닛에 비치해 둔 여자를 이용했을 테지만 지금은 영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어떤 놈이지? 우리 회사에 원한이라도 있는 놈인가?”
조금만 생각해도 WF에 원한이 있는 놈은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 강철 가면을 쓰고 차원 균열을 닫으러 다닐 만한 인간은 영 떠오르지 않았다.
먼저 원한을 갖게 된 후에 어벤저 스킬에 각성했을 가능성을 떠올릴 순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면 경우의 수가 한도 끝도 없이 불어난다. 생각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뭐, 그거야 어쨌든.”
진가충은 혼잣말로 생각의 방향성을 전환했다.
그래도 밤새 일어난 일 덕분에 그가 TA에 팔아치운 북한산 차원 균열 건이 은근슬쩍 무마된 건 전화위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를 추궁해야 했던 유연학 사장이 책임을 지고 퇴임하는 바람에 진가충 본인은 이렇게 사장 자리까지 손에 넣었으니 결코 나쁜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차원 균열에 대한 관리 책임은 온전히 진가충의 것이 되었다. 그 점은 다소 불안 요소이기는 했다. 가장 중요한 파주에 S급 랭커 둘을 파견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완벽한 조치가 되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더불어 논산의 차원 균열은 비록 낡은 탓에 어보미네이션 생산을 중지해 둔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중요도가 꽤 높은 곳이었다. 다른 두 곳은 상대적으로 중요도도 떨어져서 큰 타격이 아니었지만 그게 위안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그는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상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 사장님.
“거기 인원 비나?”
-비우려면 얼마든지 비울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도련님의 건에 다소 일정 연기가 불가피해집니다.
“도련님? 아, 그렇군. 내가 그쪽에 현우를 되살리라고 했었지. 지금까지 잊고 있었어. 일정 연기가 가능한가? 아니, 가능한 거니까 내게 말했겠군. 연기하게. 그보다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알겠습니다, 사장님. 말씀하시죠.
전화 너머 상대의 대답이 1초 정도 늦긴 했지만 진가충은 굳이 성을 내지는 않았다.
“차원 진동기는 몇 기나 남았나?”
-지금 가용 가능한 차원 진동기는 3기입니다. 동결해 둔 2기도 간단한 메인터넌스를 마치면 바로 추가로 투입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대답에 진가충은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6대 아니었나?”
-지난번에 회수한 1기는 완전히 회생 불가로 폐기 처분했습니다.
“아, 맞다. 그랬지……. 기어 나온 빅 마우스가 파괴했다고 했던가.”
그는 간신히 지난번의 보고 내용을 떠올렸다. 상세한 내용은 잘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바로 상대편에서 설명해 주었다.
-예, 용산에 배치했던 1기가 파괴되고, 열렸던 차원 균열은 닫혔습니다. 기어 나온 빅 마우스는 오연화라는 TA 소속의 S급 랭커 어벤저가 처치했다고 합니다.
“차원 균열이 닫힌 건… 안정화되기 전에 그 S급이 빅 마우스를 처치했기 때문이겠군.”
-그렇습니다.
쯧, 하고 진가충은 혀를 찼다. 아무리 독점법을 피해가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고는 하지만 TA가 자꾸 걸림돌이 되는 게 거슬리긴 했다.
“가동 가능한 기체들을 옮길 준비를 해주게. 어벤저들을 파견해 주지. 그리고 연구원들은 동결된 차원 진동기를 해동시키는 데 투입하게.”
-알겠습니다.
진가충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몇 군데 전화를 더 넣어 차원 진동기를 설치할 곳을 지정한 그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떠올린 해결책이라는 건 몇 군데 추가로 차원 균열을 여는 것이었다. 만약 그 강철 가면을 쓴 웃긴 놈이 날뛰더라도 새 차원 균열을 확보했다며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더불어 지난번에 열지 못한 용산 차원 균열을 열어서 주변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그 지역 부동산을 저렴하게 매입할 계산도 깔려 있었다. 21세기도 사분지 일이나 지나갔는데 전자 제품 직매장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존재인 전자 상가를 싹 밀어버릴 수 있다면 WF의 유통망은 한층 더 그 입지를 단단히 굳힐 수 있을 것이다.
“일석삼조란 이런 것이지.”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한결 걱정을 덜었더니 또 다른 생각이 났다.
“개가 똥을 끊지.”
결국 그는 오늘도 캐비닛으로 향했다. 그가 직접 파견한 B급 어벤저들이 이지희를 빨리 잡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