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진입
오늘의 현오준 팀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차원 균열에 접촉한 후 입구에 돌입, 내부 1층의 어보미네이션을 섬멸한다.
즉, 오늘 드디어 현오준 팀의 1차 목표인 차원 균열로의 돌입이 달성된다. 그 때문인지 오늘 작전 목표를 브리핑하는 현오준은 상당히 들뜬 상태였다.
“본사 측에서 지원받은 차원 균열 돌입 전용 장비를 오늘 배포하겠습니다. 사전에 말씀드렸듯, 차원 균열 내부에서는 평범한 장비품은 전부 파손되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확히는 일정 기술 수준 이상의 장비가 파손되는 거지만, 현대인이 몸에 두르고 있는 건 대부분 그런 것들이니 현오준의 말에 딱히 틀린 점은 없었다.
어쨌든 최재철의 입장에서도 지구에서 만들어진 차원 균열 돌입 전용 장비라는 물건에는 흥미가 돋았다.
“탈의실에 가셔서 사이즈가 맞는지 확인해 보시고, 일단 전부 착용한 상태로 돌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현오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최재철은 구문효와 함께 남자 탈의실로 향했다.
종이 박스 안에 든 보급품들을 목록과 함께 체크했다.
면으로 만든 셔츠에 양가죽으로 만든 속 갑옷, 겉에는 사슬 갑옷. 철판을 두들겨 만든 목 보호대인 고지트, 그리고 소가죽으로 만든 멜빵과 장갑, 부츠.
그리고 쇼트 소드. 접쇠를 두들겨 만든 것으로, 패턴 웰디드 스틸 특유의 물결무늬가 아름답다. 대장간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게 확실해 보였다.
그중 절정은 물통이다. 염소 위장으로 만든 것이, 생긴 것만 보면 안에 우유를 넣고 흔들면 버터가 될 것 같다. 실제로는 신품 보급품이니만큼 당연히 세척을 했을 테고, 그러니 버터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호오.’
최재철은 속으로 감탄했다. TA는 차원 균열 내부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미군으로부터 협조 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장비를 만든 것으로 아는데, 그런 것치고는 꽤 제대로 된 물건이 나왔다.
사실 차원 균열 안에서 쓰기에는 어중간한 철제 장비보다는 제대로 단련한 청동제 장비가 더 나은 면이 있지만, 어중간한 기술력으로는 그냥 철로 만드는 게 낫다. 차원 균열이 열린지 8년밖에 안 된 지구 입장에서는 아직 청동 기술자 육성이 제대로 됐을 리가 없다. 청동제만 천년 이상 써서 머스킷 총열도 청동으로 만드는 이계와는 다르다.
“칼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사격 능력자인 구문효가 그런 말을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입에 올릴 만이기는 하다. 애초에 근접전을 벌일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기 위한 훈련을 해왔고, 그런 능력을 쌓아왔다. 그런데 칼을 들라니, 납득이 안 갈 만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재철이 말했다.
“그래도 가져가. 능력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마.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잖아? 게다가 쇼트 소드는 이래저래 쓸 일이 많아.”
장검이라면 너무 길어서 거치적거리는 경우가 많아 전투용으로밖에 쓸모가 없겠지만, 쇼트 소드는 도구로라도 쓸모가 있다. 땅을 파거나, 나무를 패거나, 정글도 대용으로도 쓰는 등 쓰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전투용이 아닌 다용도 도구만 생각하자면 삽을 가져가면 해결되는 일이긴 하지만, 삽은 또 전투용으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티타늄이나 현대 기술로 만든 강철이라면 문제없겠지만, 쇠를 접어 두들겨 만든 재래식 철로 만든 삽을 전투용으로 썼다간 몇 번 후려치지도 못하고 다 갈라져서 못 쓰게 되고 말 것이다.
“과연. 알겠어요, 형.”
구문효는 최재철의 설명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꽤 무겁네요.”
천연 소재라는 게 현대의 소재에 비해 나은 점이 딱히 없다. 무게는 무겁고 강도는 떨어지고 가격은 비싸고. 차원 균열 전용 장비를 입고 있노라면 현대 소재 공학을 찬양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쩌랴, 차원 균열 안에서는 현대 과학의 산물은 전부 부서져 버리는데. 싫어도 중세시대 이전의 기술로 만들어진 장비를 입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미 차원 균열에 대해 연구를 상당히 진행시켜 온 이계의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틈새 차원 유아론’이다.
아직 틈새 차원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차원인지라 기존의 늙은 차원에서 발달한 과학기술을 구현하지 못한다는 설이다. 발매된 지 오래된 게임에서 점프와 비행을 구현하지 못하는 이유와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지구에서는 헬필드라 일컫는 지역에서 머스킷을 비롯한 총포가 통하지 않는 이유도, 그 지역의 공간을 틈새 차원에서 흘러나온 차원력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적어도 ‘틈새 차원의 신이 싫어하니까!’ 같은 논리적 사고라는 걸 포기한 방식의 설보다는 훨씬 낫다. 이 ‘틈새 차원의 신의설(神意說)’이 틈새 차원 유아론(幼兒論)이 대세를 얻기 전에는 거의 진리로 떠받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최재철은 새삼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슨 생각해요, 형?”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생각보다 오래 잡념을 떠올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구문효는 이미 장비를 모두 착용한 뒤였다. 몇 분 전에 착용을 완료한 최재철과 달리, 구문효는 사슬 갑옷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인지 꽤 낑낑거리고 있었는데 그새 적응한 것 같았다.
“사슬이라서 걸을 때마다 잘박잘박 소리가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네요.”
그 자리에서 몇 번 점프를 해보며 구문효가 말했다. 밑에 받쳐 입은 속 갑옷에 사슬이 단단히 붙어 정숙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속 갑옷과 사슬 갑옷의 사이즈가 제대로 맞았다는 증거였다.
“제대로 입었다는 증거야. 장비는 몸에 잘 맞아 보이네.”
“네, 형. 괜히 귀찮게 전신 스캔 같은 걸 한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나마 현대 기술이 활약할 여지가 있었던 게 바로 이 전신 스캔이었다. 줄자로 이리저리 재는 것보다야 훨씬 낫고 신뢰성도 높다. 최재철의 장비도 그의 몸에 딱 맞게 조절되어 나왔다.
“다행이네. 그럼 가자.”
두 사람은 탈의실에서 나와 사무실로 돌아왔다.
*
“오늘은 차원 균열의 돌입만을 달성하고 얼른 다시 빠져나올 겁니다. 1층에 있는 대량의 어보미네이션을 끌어내 오고 유구언 팀과 함께 격멸하는 것이 오늘의 궁극적인 작전 목표입니다.”
모두가 보급된 장비를 착용한 후 다시 집결지에 모이자, 현오준은 다시 한 번 브리핑을 실행했다.
“사실 WF에서는 이미 실행하고 있는 작전이고, 이 작전 때문에 WF는 우리 회사보다 7배에 달하는 어보미네이션 생산량을 달성하고 있지요. 상층부에서는 이 사실에 상당히 속이 타는 모양입니다. 뭐, 그래서 저희 팀이 존속되고 유지되어 올 수 있는 거긴 하지만요.”
“그래서 저도 이 팀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거구요.”
오연화가 장난스런 목소리로 끼어들자, 현오준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아무리 각 팀원의 자기 결정권을 중시한다지만, 아직 제대로 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 저희 팀에 S급 인재인 오연화 씨를 상층부에서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오연화 씨의 의견을 존중한 것이나 다름없죠.”
현오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달리 말하면 오늘 작전은 저희 팀의 존속이 걸려 있는 작전이기도 합니다.”
“그런 위기 앞에서도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팀장님이시구요.”
구문효가 놀리듯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현오준이 아무리 진지한 척을 하려고 해도, 그의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야 오늘 작전은 제게도 평생의 숙원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게 달성될 수도 있는 겁니다.”
“후.”
최재철은 짧게 웃었다. 자신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차원 균열 돌입을 이벤트나 다름없이 받아들이는 현오준의 모습에서도 그는 딱히 불쾌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느끼고 있는 것은 유쾌함이었다. 그도 진가규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오늘 일을 이벤트로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태도에서 여유가 느껴지는군요, 최재철 씨. 지나치게 긴장하는 것보다는 낫죠. 아니, 오히려 믿음이 가는군요.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이 입사한 지 닷새도 안 된 일개 팀원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현오준이라는 남자는 이런 말도 쉽게 해버리니, 이게 오히려 무서웠다.
“저야말로.”
“좋습니다. 그럼 출발하죠!”
빌딩 숲 사이를 걷기에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도 모르는 중세 이전 시대의 전사 복장으로, 그들은 사옥 옥상 헬기 탑승장으로 향했다.
*
“오, 무슨 영화 촬영하는 것 같군요.”
해당 장비를 입은 입장인 현오준 팀의 팀원들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그 말을, 부외자인 유구언이 너무나도 쉽게 말했다.
“TA에서는 처음 아닌가요? 차원 균열 돌입.”
“저희가 처음 맞습니다.”
“하긴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게 당신뿐이죠, 누가 또 있겠습니까? 현오준 팀장님.”
유구언은 시비라도 걸듯 말했지만, 현오준의 표정에는 구름 한 점 끼지 않았다.
“그거야 뭐, 어쨌든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당신에게는 이빨도 잘 안 들어가는군요.”
현오준의 반응에 실망한 듯 유구언은 귓불을 만졌다.
“그래요, 뭐. 평생의 숙원이라는 걸 이루는 인간을 보면 발목을 한번 걸어줘 보고 싶은 성격이긴 합니다만 오늘만큼은 협조해 드리죠.”
거기까지 말한 유구언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며 외쳤다.
“여의주 씨!”
“네, 팀장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여의주가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어제와 달리 든든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야 어제는 실제로 별로 죽을 위기 같은 것도 안 겪었던 데다, 통장에는 이제까지 본 숫자들과는 자릿수가 다른 금액이 찍혔을 테니 저렇게 의욕에 넘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무리는 마십시오. 제가 힘들어지니까. 저 힘들게 만들면 제가 공헌도 더 많이 먹을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 여의주의 지나치게 부푼 의욕을 슬쩍 꺾어놓는 걸 보면, 유구언도 꽤나 팀장으로서 잔뼈가 굵어 보였다.
“자, 준비하시죠!”
유구언이 손뼉을 짝짝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슬쩍 보니 오늘 참가 인원 중 어제 여의주를 화장실에 데려갔던 선배 둘이 보이지 않았다.
“아, 그 둘이요? 자택 대기 시켰습니다. 유급휴가죠. 당분간 아주 그냥 푹 쉬게 만들 겁니다. 아하하하하!”
두리번거리는 최재철에게 유구언이 접근해서 그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유급휴가라면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연봉보다 임무에서 공헌도로 받는 돈이 훨씬 많은 어벤저의 입장에서는 별로 좋은 게 아니다. 대기조로라도 임무에 참가해서 생명수당이라도 받는 게 이득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왜? 최재철은 어제 화장실에서 분명히 투명화를 썼었고, 유구언은 여의주에게 우리 팀엔 투명화 간파 능력자가 없으니 디코이는 당신이 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굳이 최재철에게 접근까지 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역시 어제…….”
유구언은 투명화 간파 능력은 당연히 갖고 있고, 그 능력으로 최재철의 존재도 파악했으며, 자신이 화장실에서 떠난 후의 일도 파악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최재철은 그렇게 유구언을 추궁해 보려고 했지만, 유구언이 표정을 바꾸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걸 본 최재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군요. 눈치가 빠른 사람은 좋아해요.”
유구언이 싱긋 웃었다. 역시 이 남자, 날로는 못 삼켜 먹을 부류의 인간인 것 같았다.
*
북한산 차원 균열은 사흘에 걸친 작전으로 이제 거의 어보미네이션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리자드독 몇 마리와 크로코리언 몇 마리를 잡은 것으로 오늘의 실적을 마무리해야 하는 유구언 팀장은 입맛을 다셨지만, 북한산 주변의 시민들에게는 다행한 일이다.
“자, 돌입들 하시죠.”
“예, 유구언 팀장. 감사합니다.”
작전권을 이양 받은 현오준 팀이 헬필드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차원 균열 바로 앞까지 도달한 후, 현오준이 뒤를 돌아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수화로 대화를 대신해야 했다.
‘돌입합니다.’
팀원 전원의 입감 완료 수화를 받은 현오준이 가장 먼저 차원 균열 안으로 뛰어들었다. 구문효가 바로 옆에서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들겨 준 후, 최재철이 팀장의 뒤를 따랐다. 구문효는 가장 마지막 차례였다.
차원 균열 안에 들어서자, 최재철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신물이 날 정도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그가 던전 로비라고 이름 붙인 차원 균열의 출입구 상태만 보고도 던전의 난이도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이 정도면 이 다섯 명으로도 충분히 클리어 할 수 있겠군.’
여기서 클리어란 의미는 던전 안의 모든 어보미네이션을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이 던전이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김인수로서의 지식을 활용해서 던전의 공략 방법을 숙지할 때의 이야기니. 전력상으로 볼 때 불가능하지 않다는 뜻일 뿐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전력상으로 가능하다고 정말로 이 던전의 모든 어보미네이션을 처치하면 안 된다. 그러면 차원 균열이 닫혀 버리고, 그들 모두가 10년 전의 그와 마찬가지로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고 만다. 굳이 클리어하려면 던전 보스를 로비까지 끌어와서 처치한 후 차원 균열이 닫히기 전에 즉시 빠져나가는 방법을 써야 한다.
‘뭐,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
최재철은 던전 로비 너머의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 어둠 속에서는 날카로운 안광이 번뜩이고 있다. 그 안광의 주인은 어보미네이션들이다. 즉, 적이다.
이 로비 앞에 잔뜩 모여 있는 어보미네이션들이 차원 균열에 진입한 이들이 넘어야 하는 첫 관문이었다. 지능은 낮지만 적의 강약을 판단하는 눈치만은 빠른 저것들은 상대가 약할수록 적극적으로 덤벼든다.
지구에서는 이 현상을 어보미네이션 웨이브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잘 알려진 기록에 의하면 정글도를 들고 진입한 미군들을 전멸시킨 현상이기도 했다.
‘나도 저것들 때문에 죽을 뻔했지.’
최재철은 추억담이라도 떠올리듯 생각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최하급 계약마와의 계약이 늦어서 적의 인식을 교란시키는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손에 넣는데 실패했다면 그 또한 전신을 뜯어 먹혀 살해당했을 것이다.
현오준 팀의 다섯 명 모두가 차원 균열에 들어오자, 이쪽을 향해 안광을 번뜩이고 있던 하급 어보미네이션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S급 랭커인 오연화의 존재가 그들이 즉시 달려드는 걸 막고 있었다.
그러나 한 놈이 나서면 다른 놈들도 뒤따라 들이닥칠 것이다. 차원 균열 바깥의 인기척을 듣고도 두려워서 나오지 못한 형편없는 놈들이긴 하지만 숫자가 모이면 위협적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취해야 할 행동은?
선제공격이다.
현오준이 구문효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구문효는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굵직한 빛의 화살 한 발이 소리 없이 던전 로비의 어둠을 갈랐다.
“컹!”
빛의 화살을 맞고 리자드독 한 놈이 즉사했다. 어차피 곧 되살아날 테지만, 겁 많은 놈들의 공포를 자극하는 데는 유효했다. 놈들 중 절반 정도는 몸을 사리느라 나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에게는 그것이 전투 개시의 신호로 보였을 것이다. 파박, 하는 발소리와 함께 다수의 안광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현오준과 최재철이 쇼트 소드를 빼어 들어 일행의 전면에 섰다.
달려들어 오는 놈들에게 구문효가 빛의 화살을 한 대씩 쏴붙였다. 단 한 발씩. 리자드독의 목숨을 한 번 빼앗는 데는 정련된 한 발로 충분했다. 그는 최재철의 조언을 받아들여 지나치지 않은 위력으로 급소에다 치명적인 일격을 꽂는 법을 터득한 낌새였다.
어보미네이션의 목숨은 셋. 구문효에 의해 한 번 죽은 놈들에게 이지희의 번개가 떨어졌다. 목숨이 하나밖에 남지 않아 심장이 오그라 붙어 도망치려는 놈들을 오연화의 염동력 손아귀가 붙잡았다. 이빨이 닿는 곳까지 어찌어찌 접근한 놈들은 현오준과 최재철이 용서 없이 베어 넘겼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시체의 산이 로비에 쌓였다. 덤벼든 놈들은 전부 죽었고, 도망을 선택한 놈들은 이미 로비에서 멀어져 있었다. 로비는 조용해졌다. 거친 숨소리는 지구인들의 것이었다.
“이제 말해도 되는 거죠?”
구문효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만, 가능하다면 첫 번째 발언권은 제게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현오준이 아쉬운 듯 대답했다. 아무래도 차원 균열에서 처음 말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갖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간파한 구문효가 놀리듯 말했다.
“그것도 집착이에요.”
“뭐, 하긴, 차원 균열 안에서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이미 미군일 테니까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만. 어쨌든 공개된 탐사 기록과 별 차이 없는 모습이로군요.”
“프라이머리 어벤저의 기록 말입니까?”
“예, 불귀의 객이 된 그.”
프라이머리 어벤저란 기록상으로 처음으로 어벤저가 된 미군 병사를 가리킨다. 공식적으로는 인류 최초로 어벤저 스킬을 얻은 그는 몇 차례 차원 균열을 드나들며 기록을 남겼지만, 마지막에는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제 이 시체들을 가지고 나가면 오늘의 작전은 성공리에 끝낸 셈이 됩니다만, 저로서는 기왕 들어온 김에 조금 더 탐사해 보고 싶습니다.”
사실 차원 균열에 처음 들어온 인간은 대량의 어보미네이션에게 습격을 당하는 터라 바로 도망 나와야 하고, 그것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팀이 처치하는 것이 매뉴얼이다. 하지만 첫 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반격까지 해치운 현오준 팀은 이미 매뉴얼을 넘어선 셈이었다.
현오준에게 욕심이 생긴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구문효는 생각 외로 멀쩡하지만, 이지희는 거친 숨을 내몰아 쉬고 있었다. 물어보면 분명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올 테지만, 그래서 더욱 안 된다.
그러므로 그는 말했다.
“점심 먹고 다시 오죠.”
*
금강산도 식후경부터.
사실 틀릴 때가 더 많은 숙어다.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게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이번만큼은 맞았다. 차원 균열 안에서는 현대의 식량조차 파손되니까.
인류가 밥을 언제부터 먹었다고 생각하는가? 빵은 언제부터 먹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고대 시대 때부터 먹기는 했다. 하지만 현대의 맛있는 밥과 빵은 인류가 조금이라도 끼니를 맛있게 먹기 위해 요리법을 개선하고 품종을 개량하는 등의 노력을 수천 년 동안 해온 결과물이고, 그 발전 속도는 세계화가 이룩된 19세기 이후부터나 급속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틈새 차원이라는 이 어린 차원은 그 맛있는 밥과 빵, 그 외의 모든 요리들의 맛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 아무리 맛있는 걸 가져와도 구현이 안 되니 그냥 모래 씹는 맛이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심만큼은 반드시 밖에서 먹어야 했다.
한 끼는 먹고 들어간다.
이건 차원 균열 탐사자의 상식이었다.
그전에 산처럼 쌓인 어보미네이션 시체를 차원 균열에서 끄집어내 후방으로 옮기는 작업도 미리 해치워야 했다. 로비에 그냥 두고 갔다간 다른 어보미네이션들이 와서 뜯어먹을 테니까. 그냥 놔두고 전진했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어쨌든 시체를 옮겨다 둘 시간은 필요했다.
이 시체들만 보고도 바깥의 유구언은 환호를 올렸다. 당연하다. 이걸로 이미 작전은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오준의 다시 돌입한다는 말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유구언의 당신들 미쳤냐는 폭언에 현오준은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도시락을 먹었다.
*
오후.
현오준 팀은 다시 던전 로비에 섰다.
“다시 덤벼오지는 않는군요.”
이번에는 현오준이 가장 먼저 말했다. 눈치를 보던 어둠 속의 안광들이 상대가 현오준 팀인 걸 알게 되자마자 내뺀 것이다. 다시 한 번 시체의 산을 쌓을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군요. 어느 쪽으로 먼저 갈까요?”
로비는 두 개의 통로로 이어져 있었다. 오른쪽은 자연 동굴, 왼쪽은 인위적으로 파낸 동굴처럼 보인다. 괜히 던전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미로일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나아가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바람을 한번 던져보기로 하죠.”
최재철은 그렇게 말하며 나섰다. 그리고 실제로 바람을 한 줄기씩 각각의 통로에 던졌다.
“왼쪽에서는 바람이 벽에 부딪혀 돌아왔습니다. 왼쪽은 막다른 길, 오른쪽으로 가야겠군요.”
“편리하군요. 좋습니다, 오른쪽으로 가죠.”
현오준이 그렇게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일행은 모두 움직일 준비를 했다.
오른쪽은 자연 동굴, 왼쪽은 인위적으로 파낸 동굴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양쪽 모두 인위적으로 파낸 동굴이다. 오른쪽이 오래되었고, 왼쪽이 새로 파낸 동굴이라는 점에서 겉보기에 차이가 났다. 그럼 이런 동굴을 파낸 게 누구냐는 질문이 돌아올 법도 한데, 최재철은 그 답을 안다.
틈새의 눈. 지구에서는 빅 마우스라 부르는 어보미네이션이다. 최재철과 오연화가 함께 처치한 적이 있는 어보미네이션이자 이 던전의 보스이기도 하다. 그리고 틈새의 눈은 왼쪽 통로의 끝에 있다. 이유는 당연히 왼쪽 통로가 파낸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최재철이 오른쪽을 가리킨 이유도 틈새의 눈 때문이다. 틈새의 눈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반대다. 함부로 처치해 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틈새의 눈을 찾아다 처치하면 이 차원 균열은 닫힌다. 그리고 이들 일행은 이 틈새 차원에 갇히게 될 거고.
‘반대쪽이라고 곤란한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우선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것이 낫다. 최재철은 그렇게 판단했다.
통로는 원통형으로, 사람이 걸으라고 판 통로는 아닌지라 바닥도 편평하진 않아서 걷기 조금 불편했지만 크게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 3m 정도의 폭인 통로를 2열종대로 걸었다.
사전에 정해둔 바대로, 최재철이 선두에 서고 이지희와 오연화가 본대, 구문효와 현오준이 후방에 섰다.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어요.”
어느 정도 걷던 중, 이지희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최하급 어보미네이션들이 그들의 뒤를 충분히 거리를 둔 채 따라오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 이미 겁을 먹을 대로 먹어서 먼저 덤벼오지는 않을 테니까.”
최재철이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런데 왜 따라오는 거죠?”
“우리가 더 강한 적을 만나 죽으면 시체 한 점이라도 뜯으려고 저러는 거야.”
“그럼 이 앞에는 더 강한 적이 있다는 뜻이네요?”
“그야 그렇겠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던 최재철이 갑자기 멈췄다. 주먹을 들어 올려 정지 신호를 보내자 이지희도 입을 닫았다. 스르렁. 칼을 뽑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칼집을 개조해서 소리가 안 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최재철은 정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억, 하고 고기 잘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뭔가 묵직한 것이 날았다.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투명체 간파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이들의 눈에는.
“빅 카멜레온이로군요.”
오연화가 길가에 꽃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응. 두 번 더 죽여줄래? 앞에 더 없나 보게.”
“네.”
오연화의 염동력 손아귀에 붙잡혀 도망칠 기회도 잃고 그대로 두 개의 생명을 더 낭비한 변색 도마뱀, 빅 카멜레온은 이미 최재철의 안중에 없었다. 정면에 두 마리가 더 있었으니까.
챠샤샤샷 하는 지면을 발톱으로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앞에 있던 동료가 너무나 손쉽게 살해당하자 다른 빅 카멜레온이 두 마리가 놀라 도망치는 소리였다.
“긴장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 쉬운데요.”
구문효가 싱겁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최재철이 피식 웃었다.
“오연화가 너무 대단해서 그래. 이 한 놈 처리하는데 애 먹었다면 다른 두 놈도 우리한테 덤벼들었을걸.”
“두 놈이요? 둘이 더 있었어요? 하나인 줄 알았는데.”
구문효의 놀란 목소리에 최재철은 그에게도 언젠가 투명체 간파 능력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요? 팀장님. 이 시체는…….”
“버려두고 계속 전진하죠.”
“알겠습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건 진짜로 버린다는 것이다. 죽어서 변색 능력을 잃은 빅 카멜레온의 시체는 뒤따라온 어보미네이션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시체를 짊어지고 계속 이동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일행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았던 통로는 드디어 끝이 나고, 다음 공동이 나타났다. 새 통로를 파고 나갈 때까지 빅 마우스가 둥지로 쓰고 있었을 구 형태의 공간이다. 이 공간을 최재철은 ‘던전 홀’이라고 불렀다.
최재철은 섣불리 홀에 진입하지 않고 한 번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멈추자 뒤따라오던 일행도 함께 긴장했다.
최재철은 바닥에서 작은 돌 하나를 집어 올려, 공동 안쪽에 집어던졌다. 그러자 돌은 바닥이 아니라, 황당하게도 좌측 벽면을 향해 떨어졌다. 물론 그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어느 정도 지구의 영향을 받던 구간에서 벗어나, 중력이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구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진입했더라면 그들 일행은 좌측을 향해 추락했을 터였다. 이 정도 높이로 죽지야 않겠지만,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다. 특히나 신체 강화 능력이 없는 구문효가 위험했다.
게다가 이 공동에는 다른 위험 요소도 존재했다. 맞은편 통로의 어둠 속에서 안광을 번득이고 있는 존재들. 원래 이 공동의 주인인 빅 마우스가 떠난 뒤 여길 점령한 빅 카멜레온의 무리였다.
방금 전에 최재철과 오연화가 살해한 변색 도마뱀은 아마도 정찰대일 것이다. 리자드독이나 크로코리언과 달리 빅 카멜레온은 그럭저럭 지능이 있는 편이니까.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10마리 정도인가.’
투명체 간파가 가능한 인원이 셋이나 있으니 상대하기 그리 버겁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체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팀장님, 빅 카멜레온입니다.”
최재철은 후방의 현오준에게 속삭여 보고했다.
“몇 마리나 되죠?”
“10마리가 넘습니다.”
“많군요. 어떻게 할까요?”
현오준은 최재철에게 되물었다.
“계속 나아가실 거라면…….”
“나아갈 겁니다.”
현오준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럼 해야 할 일도 정해졌다. 최재철이 말했다.
“그럼 다 죽이는 것보다는 그냥 쫓아내는 것이 좋겠군요.”
“그렇게 하죠.”
그렇게 결정이 내려졌다. 최재철은 구문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문효야, 이리 와봐.”
“네, 형.”
가장 후방에 서 있던 구문효가 최재철의 부름에 뛰어왔다.
“저쪽 통로에 빅 카멜레온이 10마리 정도 있어.”
구문효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쏴라, 제일 센 걸로.”
다른 설명이 뭐 더 필요하겠는가. 최재철의 지시에 구문효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았다.
“하아아압!”
구문효의 기합성과 동시에 빛의 칼날이 변색 도마뱀들을 향해 날았다. 변색 도마뱀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건지 그대로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이미 동족 한 마리가 이 일행에게 걸려 반격할 새도 없이 죽어나간 건 알고 있을 테니, 반격할 마음도 품지 않은 것일 터였다. 만약 이 공동의 중력 방향을 모르고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달려들었을 테지만, 선제공격을 당해 버려서야 그런 시도를 하는 것조차 위험하니 도망치는 수밖에 답이 없다.
사실 차원 균열을 닫을 생각으로 들어왔다면 다 잡아다 죽이는 게 좋지만, 지금 팀의 목적은 그게 아니니 할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
“잘했다, 문효야.”
“네, 형!”
칭찬을 받은 구문효가 환하게 웃었다.
‘이 녀석, 귀여운데?’
그 표정을 본 최재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어쨌든 적들을 물리쳤으므로 최재철은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발밑의 중력이 조금씩 약해져서 부주의하게 발을 잘못 디디면 옆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최재철에게는 익숙한 곳이라 그냥 걸어가도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테지만, 그는 일부러 조심스러움을 연기했다. 그의 뒤를 따라 일행들도 주의 깊게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웁, 어지러워요.”
“비행기라도 탄 것 같군요.”
이지희의 말에 현오준이 흥미로운 듯 대꾸했다. 중력의 방향이 바뀌면서 평형감각에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일이니 현오준의 말은 꽤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일행 모두가 중력 방향이 바뀌는 구간을 통과하자, 최재철은 다시 뒤를 돌아 의견을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홀에 뚫린 통로는 총 4군데. 그들이 통과해 온 통로와 진행 방향 맞은편의 통로. 그리고 좌측으로 난 통로와 아래로 떨어지는 통로가 있었다.
“바람을 던져볼 수는 없나요?”
“던져보도록 하죠.”
현오준의 요청에 최재철은 각각의 통로에 바람을 던졌다.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유감스럽게도 아래로 떨어지는 통로였고, 진행 방향 맞은편의 통로는 빅 카멜레온들이 도망쳐 들어간 곳이었다.
“바깥? 바깥이 어디죠?”
보고 사항을 다 들은 현오준은 최재철에게 그렇게 물었다. 최재철에게는 곤란한 질문이었다. 알고 있는 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그건 모릅니다만, 어쨌든 바깥으로 이어집니다.”
“호기심이 돋는 이야기로군요.”
사실 정말로 가치 있는 것들은 이른바 ‘초급 던전’인 여기가 아니라 바깥에 있으니 최재철의 입장에서도 바깥으로 가는 게 나았다. 문제는 중력 방향 때문에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가려면 추락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상부에 레펠 장비를 요청해 보도록 하죠. 하루 오고 말 곳은 아니니. ‘바깥’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은 좌측으로 한번 진행해 봅시다.”
고민 끝에 현오준은 그렇게 결정했다.
신체 강화 능력으로 시야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이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통로를 향해 낙하한다는 건 너무 위험했으니 적절한 선택이었다. 다만 그냥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역시 고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최재철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하기 전에 구문효가 돌아가는 길을 석회암 조각으로 표시했다. 중력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방향감각이 교란될 가능성이 충분했으므로 현명한 조치였다.
좌측 통로에서는 별다른 어보미네이션을 비롯한 위험 요소와 조우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이 본 것은 막다른 길에 엄청나게 쌓인 해골들이었다.
“리자드독의 해골이로군요.”
현오준이 바로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여기를 둥지로 삼고 있던 거대한 어보미네이션이 리자드독을 잡아먹고 소화하지 못한 뼈를 토해놓은 것 같습니다. 지구에서도 간혹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렇게 대량으로 한데 모아두는 경우는 없습니다.”
현오준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최재철은 말은 안 했지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를 둥지로 삼고 있던 거대한 어보미네이션이란 빅 마우스다.
“이 해골들은 토해낸 지 오래된 것 같군요. 이미 다 부패가 끝나 악취도 나지 않고, 소화액도 다 날아간 건지 완전히 건조된 상태입니다. 보아하니 이 주변에 그 거대한 어보미네이션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리를 옮긴 지 오래된 것 같으니, 긴장을 푸셔도 좋습니다.”
이지희와 구문효가 현오준의 말을 듣고 겨우 긴장을 풀었다. 그 둘은 현오준의 거대한 어보미네이션이라는 언급에 여태까지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여기 살던 어보미네이션에게 이곳은 화장실에 가까웠을 겁니다만, 저희에게는 보물 창고나 다름없군요. 이 해골들은 잘 말려서 다 처리를 마친 어보미네이션 연료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무게에 비해 훨씬 가치가 높죠.”
“그럼 저희 대박 터진 건가요?”
구문효가 표정을 확 밝히며 말했다. 현오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와!”
“소리는 지르지 마시구요.”
환호성을 내지르려던 구문효가 현오준의 일침에 급히 자기 입을 막았다. 환호성을 듣고 멀리서 적들이 몰려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 일침은 당연한 것이었다.
“참……. 차원 균열 안에 이런 게 있으니 WF가 당사대비 7배의 어보미네이션 산출량을 자랑할 수 있는 거라고 봐도 좋겠죠. 문제는 이걸 어떻게 옮기느냐 정도로군요.”
“저희가 직접 옮길 수밖에 없겠죠. 차를 끌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최재철의 말에 현오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오늘 탐사는 여기까지 할 수밖에 없겠군요. 아쉽지만 어차피 장비도 확충해야 할 걸 생각하면 딱 괜찮은 타이밍 같기도 합니다.”
다섯 명이서 리넨으로 만든 포대에 각자 해골 더미를 채워 넣어 적당히 한 짐씩 꾸린 그들은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그들 각자가 갖고 돌아간 해골의 가치만도 5억 원이 넘었다. 입구에서 잡은 리자드독 무리들의 시체까지 합치면 연봉의 세 배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결국 그들은 야근을 하고 말았다. 같은 길을 두 번 더 왕복함으로써 ‘화장실’의 해골들을 전부 꺼내온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일반인이라면 인생이 바뀌고, 인생관마저 바뀔 정도의 금액을 자신들의 고용주, TA로부터 받아내었다.
대박이 터졌다는 구문효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셈이다.
*
TA는 해골의 값으로 100억 원을 훨씬 넘는 금액을 현오준 팀에게 지급해야 했지만, 그 몇 배나 되는 이익을 벌어들였다.
첫째로, TA의 차원 균열 탐사 팀이 올린 거대한 성과는 즉각 주식시장에 반영되었다.
유동성이 있는 주식시장에서의 회사 가치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장 TA가 WF로부터 사들인 ‘낡은 차원 관문’의 가치는 단 하루 사이에 다섯 배로 뛰어올랐다.
이만큼의 이득을 보았다. TA는 당연히 차원 균열 탐사 팀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더불어 인원 충원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어지간하면 자신의 팀을 꾸려 팀장으로 활동할 A급 어벤저들마저도 지원서를 낼 정도였으니,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만했다.
현오준 팀은 천덕꾸러기에서 귀하신 몸으로 일약했다. 그야말로 신데렐라 스토리를 썼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이 차원 균열 오래된 거 아니던가요?”
이지희의 말에 현오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열린 차원 균열이죠.”
“그리고 WF로부터 사들인 거구요.”
“네.”
현오준의 대답에 이지희는 한층 더 높은 각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지 않나요?”
“이상하죠.”
현오준은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WF는 차원 균열 돌입에 대한 노하우가 충분하고, 또 그럴 만한 어벤저 전력도 갖추고 있었죠. 하지만 저희는 불과 갈림길 두 번 돈 곳에서 이 보물의 산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죠.”
WF는 이 차원 균열의 내부 탐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차원 균열의 안이 위험한 만큼 보상도 크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뭐, 추측이야 여러모로 해볼 수 있겠습니다만 다 소용없습니다. 저희는 TA의 직원이지, WF의 관계자가 아니니까요. 타사의 내부 사정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현오준은 그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자, 밤이 너무 늦어지고 말았군요. 그만 퇴근들 하시죠.”
그의 말대로였다. 시각은 이미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원 균열 안은 촬영도 안 되고 녹음도 안 된다. 오로지 직접 가본 사람의 증언만이 유효했다. 그렇기에 아직 기억이 생생할 때 최대한 자세한 기록을 받아두라는 상부의 요청 때문에 현오준 팀은 이 시각까지 회사에 잡혀 있었다.
사실 이 보고서 기록이야 말로 그들 팀의 진정한 임무였다. 오늘 20억 넘게 벌었다고 나 몰라라 할 정도로 책임감이 없는 인간은 이 자리에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한 명, 오연화마저도 자리에 남아 있었다.
“선생님, 밤이 무서워요. 저 집까지 데려다주세요.”
그녀가 지금껏 남아 있던 목적이 보고서가 아니었다는 점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뭐, 이 정도면 귀여운 축에 속한다.
“아뇨, 오연화 씨. 오늘은 제 차례입니다.”
현오준에 비하면 말이다.
*
WFF 부사장실.
진가충.
그는 굳은 얼굴로 오늘 새로 산 노트북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인터넷 뉴스로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는 내용.
[TA, 차원 균열 탐사에 성공.]
[북한산 차원 균열, 대박.]
[탐사 첫날 100억 원 규모의 어보미네이션 자원 확보… 장밋빛 미래]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다.
지금까지 기업 단위로 차원 균열 탐사에 성공한 건 WF가 유일하다. 국가 단위로도 미국밖에 없다. 한국 정부조차 불가능한 차원 균열 탐사에 성공했다. WF는 그야말로 유일무이의 성공 신화를 이룩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걸 최대의 라이벌 기업인 TA에게 따라잡힌 것이다. 그것도 WF가 소유한 차원 균열이 속속 닫히는 악재 속에서.
물론 아직까지도 최초라는 타이틀은 WF가 갖고 있다. 타격이야 있지만 치명적이랄 것까지는 아니었다. 이런 걸로 WF가 망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가충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늘 TA가 탐사에 성공했다던 이 북한산 차원 균열은 WF가 매각한 것이다.
그것도 이 매각 건은 진가충이 총괄한 건이었다.
매각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북한산 차원 균열의 헬필드 축소가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어보미네이션 생산량이 줄어들 것이라고 사내 전문가들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매각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보고서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진가충은 무시했다.
헬필드 축소 관측 등의 이슈는 이미 TA 측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내부 탐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덕분에 차원 균열의 가치를 조금쯤 보전시킬 수 있었다. 애초에 내부 탐사까지 끝낸 차원 균열이었다면 훨씬 헐값에 팔았어야 했을 것이다.
진가충은 이 차원 균열을 어느 정도 가치의 이상으로 팔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 매각 건을 성립시킴으로써 자신의 사내 위치를 안정화시키고 덤으로 약간의 비자금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그는 아직 부사장으로, 사장인 유연학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아무리 회장 일가라 한들 회사 돈을 마음대로 쓸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 액수가 되는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이런 이슈가 필요했다.
그래서 팔았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애초에 TA가 북한산 차원 균열을 비싼 값에 사들인 이유는 차원 균열 탐사 팀을 운용하기 위해서라는 건 그도 알고는 있었다. 어보미네이션 출현이 줄어든 ‘늙은’ 북한산 차원 균열은 초보 탐사 팀을 들여보내는 데 제격이었다.
어보미네이션들이 단어 그대로 미쳐 날뛰는 ‘젊은’ 차원 균열에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 아직 탐사 경험이 없는 TA에게는 딱 좋은 매물이었다.
그래도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벤저들 사이에서 차원 균열 탐사는 돈도 안 되고 위험하기만 한 짓이라고 이미 평판이 자자했다. WF 측에서 흘린 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차원 균열이 집어삼킨 인명이 몇인가. 러시아와 중국이 괜히 차원 균열 탐사를 포기한 게 아니다. 미국조차도 최근에는 자제하고 있다.
TA는 지원자를 받아 팀을 꾸린다고 했으니, 탐사 팀 조직 자체가 어려울 거라고 봤다. 아니면 간신히 조직해서 의욕만 가득 찬 어설픈 놈들을 들여보내 참사를 보고, 당분간 탐사 프로젝트 자체가 동결될 터였다.
원래는 그래야 했다.
그런데 1년 만에 탐사 팀이 조직되어 버리고, 그 팀이 탐사 첫 날 이렇게 큰 성과를 낼 줄이야.
거기다 이 탐사 팀의 멤버의 명단에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이지희.
진가충의 꽉 깨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그가 비자금을 조성하려고 마음먹은 게 그녀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돈으로 사기 위해서는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돈을 바른다고 그 사람이 뜨나? 그렇지 않다. 하지만 뜨지 못하게 하는 건 가능하다.
방송가나 기자들에게 돈을 발라 그녀가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사람이 꿈을 계속 꾸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달성감이라도 필요하다. 진가충은 그것마저 막은 것이다. 그래도 기사 한 줄 떴어, 작은 일이라도 들어왔어, 이런 것조차 못 느끼도록.
그렇게 좌절한 소녀에게 접근해서, 스폰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뜨게 해주겠다고.
이 방법으로 진가충은 연예인을 꿈꾸는 미성년 여자애를 몇 명이고 먹어치울 수 있었다.
진가충은 이지희에게도 이 방법을 썼다. 이런 짓을 회사 돈으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침 조성해 둔 비자금이 떨어져 북한산 차원 균열을 팔아야 하긴 했지만, 이지희를 먹을 수 있다면 별로 아깝지도 않았다.
지금껏 그녀에게 ‘작업’하느라 쓴 돈도 그의 기준으로는 푼돈이었다. 아직 비자금은 잔뜩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지희는 오늘 20억 원을 먹었다.
멍청한 TA. 자사 어벤저들에게 돈을 ‘퍼주는’ 걸로 유명한 TA라면 20억을 그대로 넘겨주고도 남았다.
즉, 오늘 부로 이지희를 돈 주고 사는 건 불가능해졌다.
“하……!”
진가충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사내 위치가 꽤 위험해질 이 이슈에도, 자신이 충격을 받은 이유가 이지희 때문이라니.
“미쳤군.”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돈으로 안 된다면 힘으로 하면 되겠지.”
진가충은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그가 하려는 일은 범죄의 영역에 속했다. 하지만 그게 하루 이틀 일인가. 얼마든지 무마시킬 수 있으리라.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돈과 권력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