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B급과 C급의 차이
현오준 팀은 어제 예정했던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으므로, 오늘 할 훈련은 원래 어제 했어야 할 훈련이었다. 즉, 다른 팀과의 공조 훈련이다.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최재철 씨.”
그리고 오늘 공조 훈련을 하게 될 팀은 유구언의 팀이었다. 팀장이라는 위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비굴해 보일 정도로 예의 바른 유구언의 태도가 인상적이다.
유구언은 최재철과 이틀 전에 얼굴을 마주하고 자기소개를 교환했던 팀장이다. 우주환과 더불어 최재철을 꽤나 탐나했던 팀장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영입은 실패하고 최재철은 이렇게 현오준 팀에 배속되었지만 말이다.
“우주환 선배의 일은 유감이네요. 그 자리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저도…….”
“사실 전 유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요. 우하하! 자, 보세요! 여의주입니다!!”
구깃구깃했던 표정을 확 펴며, 유구언 팀장은 본래 우주환의 팀에 배속되어 있던 최재철의 입사 동기, 여의주를 소개했다.
“그 선배가 연공서열을 내세워서 유능한 인재를 몇이나 꿀떡꿀떡 삼켰는지 몰라요. 덕분에 저희 팀은 항상 인재 부족에 시달렸습니다만, 이번 일을 계기로 여의주를 손에 넣었죠!”
아무래도 우주환이 죽고 난 후 우주환 팀은 해체 수순을 밟은 모양이었고, 유구언은 그 틈을 타 여의주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스무 명이나 되는 대형 팀의 해체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오준 팀에는 신입이 들어오지 않은 게 좀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그건 그가 지금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여의주씨가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로군요.”
“이대로 일곱 개를 모으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이름이잖아요? 당연하죠!”
뭔가 이상한 논리였지만, 아마 농담일 터였다.
여의주는 최재철을 보고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최재철 씨. 이렇게 사흘 연속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 아, 아무튼 살아남아서 다행입니다.”
유구언 팀장의 태도를 따라가기라도 하는 건지, 하루 사이에 많이 비굴해진 모습의 여의주였다. 어쨌든 그도 여의주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사람 중 하나로서, 그의 생존은 기뻐할 만했다. 그런 여의주의 어깨를 두드리며, 유구언은 힘을 주어 말했다.
“여의주씨를 영입함으로써 저희 팀은 투명체 감지 능력도 손에 넣게 되었죠. 이 귀한 인재를 우주환 팀장처럼 아무렇게나 굴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저, 디코이 안 해도 되는 건가요?”
여의주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리며 그렇게 묻자, 유구언은 유감이라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의 디코이는 당신입니다, 여의주 씨.”
“엑? 하지만 방금…….”
“이 차원 균열에서 변색 도마뱀이 나온다는 게 바로 어제 밝혀졌는데, 당신이 안 나서면 누가 나섭니까? 다시 말하지만 저희 팀에 투명체 감지 능력을 지닌 건 당신뿐이에요.”
그랬다.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바로 어제 우주환이 죽어나간 북한산 차원 균열이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바로 다음 날 그 자리에서 업무를 재개한다는 건 다른 업계에서 보기에 이상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어벤저 업계에서는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으…….”
어제의 나쁜 기억 탓인지, 여의주는 진저리를 쳤다. 그런 여의주의 어깨를 따뜻하게 안으며, 유구언이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뭐,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C급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서포터를 붙여드리죠. 당신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바로 당신을 구할 겁니다. 현오준 팀장이랑 같이 면접 봐서 알고 있죠?”
면접시험 때, 그는 꽤 우수한 성적을 보이기는 했지만 다소 무리한 행동으로 목숨이 위험해질 뻔도 했다. 현오준의 적절한 조치가 없었더라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유구언이 지금 현오준의 이름을 꺼낸 건 여의주로 하여금 그 서포터가 현오준처럼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 예.”
여의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구언의 설득이 효과적인 모양이었는지, 질색하던 표정도 다소 풀려 있었다. 유구언은 웃으면서 여의주의 등을 세게 두들겼다.
“알았다면 좋습니다. 자아, 임무에 임하십시오. 당신의 가치를 증명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여의주가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쨌든 유구언이 우주환보다는 자신을 잘 굴려줄 거란 건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
여의주가 어제보다는 확실히 당당한 걸음걸이로 차원 균열을 향해 걷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어느 정도 차원 균열에 접근하자, 그의 발소리를 들은 최하급 어보미네이션, 리자드독이 킁킁거리며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이제는 목가적으로 보일 정도로 익숙해진 광경이었지만, 여의주는 긴장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과연, 어제보다는 확실히 적절한 대응이다. 뒤를 돌아 도망칠 때 과도하게 힘을 주는 바람에 돌 깨지는 소리가 난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리자드독은 여의주가 부주의하게 낸 소음에 즉각 반응했다. 바로 여의주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여의주와 리자드독 사이에, 다른 사람도 아닌 유구언이 직접 끼어들었다.
“잘했습니다. 처음치고는 대단히 훌륭하군요!”
“아니, 저, 오늘 세 번째…….”
유구언은 직접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리자드독을 세 번 죽였다. 여의주의 반박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여의주 씨.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의주는 손을 내저었다.
“그래요? 뭐, 아무튼 좋습니다. 이대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네!”
여의주는 군기가 바짝 든 자세로 대답했다.
‘과연, 이번에는 좋은 팀장과 만난 것 같군.’
최재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유구언이 방금 보여준 능력은 어떻게 보면 최재철과 유사한 능력이었다. 다만 최재철이 절단 능력이라면, 유구언은 파괴 능력이라는 차이가 있다. 최재철이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차원력 커터를 뽑아서 쓴다면, 유구언은 차원력 해머를 뽑아서 쓰는 거라고 할 수 있었다.
우주환이 쓰던 단순무식한 신체 강화 능력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신체 부담이 덜 가고 차원력을 적게 쓰면서 괜찮은 효과를 보이는 효율 위주의 능력이다. 그만큼 체력 소모도 적고 오랫동안 싸울 수 있으리라.
그리고 유구언 또한 A급 어벤저. 선배라던 우주환보다도 효과적으로 뚝딱뚝딱 어보미네이션을 처치하는 그 모습은 더없이 듬직했다.
‘이미 완성형인 인재로군. 내가 손댈 곳도 더 없겠어.’
최재철의 입장에서 보기에 아쉬운 점이라곤 그 정도였다.
유구언 팀은 순조롭게 차원 균열까지의 경로를 확보했다. 큰 소음을 내지 않는 이상, 차원 균열로의 진입은 큰 문제가 없으리라.
그리고 실제로 현오준 팀이 차원 균열에 접촉함으로써 오늘의 훈련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
“오늘은 회식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로군요.”
현오준이 기분 좋은 듯 말했다.
“오, 좋은 아이디어로군요! 회식!! 좋죠!!”
유구언이 한 마디 거들었다.
두 팀의 팀장들은 오늘 훈련으로 인해 모두 흡족한 결과를 얻었다.
현오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합동작전을 유연하게 받아줄 새로운 팀을 찾았으니 흡족했고, 유구언의 입장에서는 S급 랭커인 오연화 덕에 작전의 리스크를 최소한도로 줄인 채로 어보미네이션을 적극적으로 사냥해 큰 이득을 얻었으니 흡족했다.
둘 중에 누가 더 이득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유구언 팀 쪽이었지만, 현오준의 입장에서도 다른 팀과의 공조는 반드시 필요하니만큼 본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큰 산 하나를 넘었다는 면에서 나쁠 게 없었다.
그러니 두 팀장 모두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회식을 입에 올릴 정도로 말이다.
“아, 전 오늘 그냥 퇴근할게요. 회식에는 참여 안 할래요.”
그러나 그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S급 랭커, 오연화였다.
“그리고 선생님, 그러니까 최재철 님도 오늘은 회식에 참여 안 할 거예요.”
“어? 내가 왜?”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최재철의 반응에, 오연화는 이지희에게 슬쩍 눈웃음을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제 차례니까요!”
그런 오연화의 말에 이지희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어제 본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녀가 오늘은 내 차례니 뭐니, 확실히 그런 소릴 했었다는 것을 최재철은 뒤늦게 떠올렸다.
“아뇨, 연화 양, 그렇지 않아요.”
의외의 인물이 끼어들어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제 차례니까요! 그쵸, 형!!”
구문효였다.
“네? 그쪽이 뭔데 끼어들죠?”
오연화가 도끼눈을 뜨며 물었지만, 이번만큼은 구문효도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같은 팀원입니다, 연화 양. 그리고 첫날은 연화 양이 우리 형을, 둘째 날은 지희 양이 우리 형을 차지하셨으니 셋째 날은 당연히 제 차례죠!”
구문효의 논리에 빈틈은 없었다.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누가 우리 형이냐고 반론하고 싶어지는 것만 제외하면.
오연화는 구문효의 말에 반론하지 못하고 이를 득득 갈다가, ‘흥!’ 하고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무슨 속셈이지? 나랑 데이트라도 할 건가?”
“으익, 제가 그럴 리가요.”
최재철의 물음에 구문효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 회식이나 하러 가죠.”
“적절한 선택이로군.”
최재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그럼 저도.”
이지희는 자신과 똑같은 소리를 한 사람 쪽을 쳐다보았다. 물론 오연화였다. 그녀는 이지희의 시선을 모른 척하고 엉뚱한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저희 회식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참가하게 된 건 처음 있는 일이로군요. 보통 구문효 씨와 저 둘이서 마시게 됐었는데.”
현오준이 감격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구문효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대꾸했다.
“야근 수당 받아가면서 말이죠.”
“그거야 저도 받는 거니까요. 아, 물론 회식 참가자에게는 전부 나올 겁니다. 팀워크 향상도 업무의 연장이니까요. 물론 회식비도 법인 카드로 결제될 테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미 한 번 설명을 받은 바 있지만 다시 들어도 대단하다. 최재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회식은 몇 번을 해도 좋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라면. 그렇게 덧붙이긴 했지만.
참고로 그가 10년 전에 다니던 회사는 회식비는 월급에서 까여 나가고 야근 수당은 당연히 주어지지 않은 데다 강제 참가였다. 말도 안 되지만 지구상에는 그런 곳도 있었다.
“그럼 회식하기로 결정 난 겁니까? 현오준 팀장님.”
한 걸음 떨어져서 이야기가 돌아가는 걸 지켜보고 있던 유구언이 결론이 났다 싶었는지 끼어들었다.
“예, 유구언 팀장님. 같이 가실 거죠?”
“저야, 물론. 저희 팀원들에게도 물어보겠습니다.”
그렇게 양 팀의 조인트 회식이 결정되었다.
*
회식이라고는 해도 술집을 가지는 않는다.
그야 당연하다. 이 자리에는 미성년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것도 그 미성년이 S급 랭커, 팀의 중추라면 더욱 그렇다. 그녀의 입장을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회식의 메뉴를 정한 것도 그녀였다.
“일식 먹으러 가요.”
오연화가 말했다.
“그러죠.”
현오준이 대답했다.
그걸로 회식 장소마저 결정 나고 말았다.
게다가 그 회식 장소라는 게 현오준이 사비를 털어 최재철을 대접했던 바로 그 일식집이었다.
“여기, 돈가스 같은 거 나올까요?”
이지희가 일식집의 간판을 올려다보며 그런 속삭임을 던졌다. 그 소리에 최재철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도 여기 처음 왔을 때 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팀장님 오늘 세게 쏘시네요.”
유구언이 현오준에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왜 제가 쏘는 것처럼 말씀하시죠?”
현오준이 정색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유구언이 정말 의외라는 듯 놀랐다.
“설마 반씩 나눠 내야 됩니까?”
“인원수가 차이 나는데 왜 반씩입니까?”
“……?”
“……?”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음표를 띄우는 두 팀장의 모습은 오늘 회식의 의의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됐어요. 제가 낼 테니까 들어들 가요. 제가 오자고 했으니까.”
“아니, 그럴 수는…….”
“그럴 수 없죠. 네, 그럴 수 없고말고요.”
오연화가 끼어들자마자 두 팀장이 동시에 손을 내저으며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몇 초 후, 둘이 동시에 헛기침을 하는 걸 보니 물밑 교섭은 잘 끝난 모양이었다.
“들어들 가시죠.”
현오준이 일식집의 문을 열면서 팀원들을 먼저 들여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유구언이 커흠, 커흠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먼저 쏙 들어가 버렸다.
“사이 좋아 보이네요.”
“일단은 입사 동기라서……. 하하하, 하하하하!”
최재철의 감상에 현오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
현오준 팀이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최재철 왼쪽에는 구문효가, 오른쪽에는 현오준이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여성진 둘이 앉았다.
아니, 어째서.
최재철은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도 남자다. 양옆에 시커먼 남자가 앉는 것보다는 화사한 여성이 앉는 쪽이 조금은 더 기분이 좋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죠?”
오연화가 의문을 직접적으로 입으로 표현했다.
“그야 오늘은 제 차례니까.”
구문효가 대답했다.
“팀장 권한입니다.”
현오준이 대답했다.
할 말이 없어진 오연화는 구문효를 노려보다가 흥! 하고 시선을 팩 돌렸다.
“자, 최재철 씨. 한 잔 받으시죠.”
현오준이 최재철의 잔을 채웠다. 그 잔이란 물 잔이었다.
“술이 필요하시면 시키셔도 좋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오연화 씨가 계셔서 조금 저어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집에 좋은 사케가 있어서요.”
현오준은 오연화의 눈치를 슬쩍슬쩍 보아가며 그런 말을 건넸다. 팀장의 그런 말이 최재철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오연화는 당신 말이라면 들을 테니 제발 시켜줘! 라고.
“아뇨, 역시 미성년자 앞에서 술을 마시는 건 좀…….”
최재철은 그런 현오준의 기대를 멋지게 배신했다.
“아뇨, 선생님이 드시고 싶으시다면 전 괜찮아요.”
그리고 오연화는 최재철의 기대를 배신했다.
“아, 괜찮습니까? 그렇다면…….”
현오준은 반색하며 술을 시켰다.
‘술 먹기 싫은데.’
과거 그가 비정규직으로 몸담고 있었던 회사에서 술을 어찌나 먹여대던지. 거기에 술값까지 내게 만드니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난 회식에서 술을 강권하지 않는 상사가 되어야지, 하고 마음먹은 바 있었다.
“최재철 씨, 이 술은 정말로 좋은 겁니다. 정말 좋은 술이라 구문효 씨한테는 안 줄 겁니다.”
최재철의 술잔에 현오준이 따른 맑은 술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아, 왜요! 저도 좀 줘요!!”
“사실 저 사람 술버릇이 별로 안 좋아서요. 둘이서 회식할 때도 술은 안 마셨습니다. 저 사람한텐 콜라주고 저만 마셨죠.”
“……….”
구문효가 입을 다물자, 현오준이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최재철은 마지못해 현오준의 건배를 받았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
술을 마신 후, 최재철은 뒤늦게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주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 같은 건 한 적이 없었다.
“오, 이런 좋은 술을……. 현오준 팀장님, 너무하지 않습니까? 좋은 술은 나눠 마셔야죠.”
옆 테이블에서 유구언 팀장이 건너와서 말했다. 그런 유구언에 대한 현오준의 태도는 의외로 차가웠다.
“싫습니다. 반반씩 나누는 대신 이쪽이 더 비싼 걸 먹겠다고 이야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 짧은 눈빛 교환에 그런 복잡한 협의가 오갔을 줄이야.
최재철은 너무 의외라서 이들이 다른 사람들 몰래 텔레파시라도 교환한 게 아닐까 의심했다.
물론 최재철의 본래 능력에는 크게 못 미치는 이 두 사람이다, 최재철의 눈을 속이고 텔레파시 같은 걸 활용할 리는 없었다. 그것도 고작 이런 사소하기 짝이 없는 협의를 위해서라니, 가능성은 그냥 제로였다.
그냥 그만큼 이 두 사람이 악연으로 맺어진 것에 불과하리라. 그 증거로 유구언은 현오준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서 자신의 잔을 채우고 말았다.
“자아, 건배. 건배하시죠, 현오준 팀장님.”
“하… 이 어이없는 유구언 팀장님.”
악연으로 맺어졌다고 하기엔 옆에서 듣기에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서로 기괴하게 일그러진 존댓말을 쓰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자, 최재철 씨도. 잔이 찬 사람들은 모두 건배합시다!”
“저희 세 명뿐입니다, 유구언 팀장님.”
“그럼 셋이서, 건배!”
약간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던 첫 인상과는 달리, 유구언은 현오준의 태클도 아랑곳 않고 잔을 들어 올리는 뻔뻔함이 있었다.
그 뻔뻔함에 마지못해 현오준도 잔을 들었고, 그래서 최재철도 잔을 마주쳤다.
“건배!”
셋은 동시에 술잔을 비웠다.
“자, 됐죠? 유구언 팀장님. 이제 자기 팀 관리하러 가시죠.”
“싫습니다. 이 병은 다 비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뻔뻔한……!”
현오준은 이를 득득 갈면서도 유구언의 술잔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런 유구언의 등 뒤에서, 최재철의 눈에는 세 남자가 소리 없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여의주, 다른 두 명은 우주환 팀 소속이었다가 이번에 유구언 팀에 새로 배속된 인원들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아무래도 여의주가 억지로 끌려 나가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있었다. 물론 여의주가 자기 발로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분위기가 별로 안 좋다 보니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우주환 팀에서 여의주가 막내였으니, 다른 두 명은 그의 선배에 해당한다.
‘쓸데없는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지만.’
최재철은 현오준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술병은 잠시 잠가두겠습니다.”
현오준은 정말로 술병의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그래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 왜…….”
또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한 두 팀장을 뒤에 남겨두고, 최재철은 여의주 일행을 뒤쫓았다.
*
공교롭게도 여의주 일행이 향한 곳도 화장실이었다. 최재철은 바람의 방벽을 다루어 모습을 숨기고 화장실로 향했다.
“야, 니가 왜 공헌도 1위냐?”
남자 화장실에서 들려온 말은 그거였다.
“아니, 저, 선배, 공헌도 계산은 제가 하는 게 아니라…….”
“어디서 말대꾸야!”
소리가 크지 않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으르렁거림. 저들은 짐승이다. 오늘 집어먹은 고기 부위가 맘에 안 들었던 짐승이, 지가 늦게 온 건 생각도 안 하고 자기보다 약한 개체가 먼저 고깃덩이를 물어뜯었다는 이유로 화풀이를 하려하고 있었다.
“야, 너 팀장한테 가서 공헌도 체크 다시 해달라고 해.”
조용히 있던 다른 놈이 문득 그런 개소릴 지껄였다. 옆 놈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넌 막내니까 조금만 받고, 네 몫을 선배들한테 양보하겠다고 말해. 얼마나 좋냐. 자기 몫을 선배한테 양보하는 후배의 모습. 아름다운 미풍양속 아니냐?”
“그래, 그래. 애초에 유구언 팀장이 이상하다니까. 연공서열을 무시하다니. 아무리 외국계 회사라지만 여긴 한국이잖아. 개념이 없어도 좀 없어야지.”
‘지금 네놈들이 하는 언행이 연공서열을 무시하고 있는 언행 같은데.’
팀장한테 대고 개념이 없느니, 이상하다느니 하면서 입에 올린 단어가 연공서열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아니, 저들이 개인가. 그런데 저들은 별로 웃을 마음은 아닌 듯했다.
“알아들었으면 가. 팀장한테 가. 가서 말해. 알았지? 알아들었어, 몰랐어?!”
짐승들이 화장실 안의 공간을 살기로 가득 메웠다. 그들의 위협에 울상이 된 여의주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
“아뇨, 아닙니다.”
여의주의 대답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끊겼다.
“이거야, 원. 그래도 옥석을 가려서 데려올 참이었는데 제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군요. 저도 아직 멀었어요. 더 단련해야지, 원.”
그 누군가란 유구언이었다. 짐승들이 이성을 되찾기라도 한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니, 그냥 겁먹은 짐승이 된 건가.
“당신들에게 더해줄 공헌도 따윈 1원도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앞으로 당신들은 작전에 참여시키지 않을 테니까요.”
“티, 팀장님!”
유구언은 이빨을 드러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정의의 사도도 뭣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들이 제게 폭언을 한 것에 대해 화가 났을 뿐입니다. 팀장이 부릴 수 있는 꼬장이 어떤 건지 당신들에게 톡톡히 맛보여드리도록 하죠.”
“죄송합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아, 오늘은 그냥 집에 돌아가십시오. 당신들에게 줄 야근 수당도, 맛 보여줄 요리도 없습니다.”
무릎을 꿇으려 드는 구 우주환 팀의 팀원들을 본 체 만 체 하고 유구언은 돌아섰다.
“아, 여의주 씨는 얼른 오세요. 현오준 팀장님이 주문한 술이 아주 맛있더라고요. 다 떨어지기 전에 와서 맛보세요.”
그런 말을 남기고, 유구언은 화장실에서 나가 버렸다. 화장실에 남겨진 여의주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선배들을 남기고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흠, 내가 끼어들 것도 없었군.’
최재철은 뒷머리를 긁다가, 바람의 방벽을 치웠다. 구 우주환 팀의 팀원들 눈에는 그가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일 터였다.
“뭐, 뭐야?! 넌?”
“얘, 걔야. 그 최재철이라는…….”
“예, 선배들. 제가 그 최재철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재철은 싱긋 웃었다. 그에 반해 선배들의 표정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너 이 새끼… 우리한테 시비 거는 거냐?”
“그럴 리가……. 전 그냥 소변이나 보러 왔다가 유쾌하지 못한 광경을 보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반사적으로 모습을 숨기긴 했지만, 조악한 술수라 선배들의 눈에는 보였겠죠?”
두 선배의 얼굴이 붉어졌다. 애초에 여의주가 그들보다 높은 공헌도를 인정받은 원동력이 투명체 간파 능력에 있다는 것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이 C급 새끼가!!”
그리고 그들은 수치심을 분노로 치환하는 속성의 종자였는지, 바로 노호성을 토해내면서 최재철을 향해 덤벼들었다. 최재철이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절 C급 새끼라고 부르시는 걸 보니 선배들은 B급인가 보죠?”
대단히 수월하게 그들의 공격을 피해내며, 최재철은 이죽거렸다.
“그런데 왜 B급 둘이서 C급 하나 제압 못하는 걸까요?”
“새끼가!!”
최재철은 분에 차 휘두른 선배의 주먹을 툭 쳐서 흘려냈다.
“헉?!”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는데도, 선배는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최재철은 경멸의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답은 이겁니다. 니들은 너무 오래 실전을 쉬어서 이빨이 무뎌졌거든요. 후배들이 갖다 주는 공헌도만 처먹어서 하는 거 없이 살만 뒤룩뒤룩 찌니까 실력이 늘려야 늘 수가 없지.”
“……!”
“자, 어때요? 분하지 않습니까? 분하시면 제 얼굴에 한 방이라도 넣어보시죠?”
아무리 공격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것인지, 두 선배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니, 깨달은 것은 그것만이 아닐 터였다. 이빨이 무뎌지고 비계가 붙었다 한들 짐승은 짐승, 눈앞의 남자가 자신들 둘을 아득히 초월하는 강자임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후.”
최재철은 비웃음을 흘렸다.
“당신들도 어벤저 필수 교육으로 배웠겠지만, 라이센스 랭크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것에 불과해. 가능성은 갈고 닦지 않으면 실제 능력이 되지 않아. 그리고 그 나쁜 예가 바로 당신들이야. B급이라는 재능을 가지고도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니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러는 너는 C급이잖아!”
겁먹은 개가 짖듯, 선배가 짖었다.
“그래, 난 C급이고 당신들은 B급. 어벤저 라이센스 평가장을 나서는 시점에서는 그랬지. 그런데 지금 이 차이는 뭘까?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B급 선배들.”
최재철은 그런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화장실을 나와 버렸다.
‘아, 쓸데없는 오지랖을.’
그런 씁쓰레한 자각과 함께 말이다.
*
최재철이 자리로 돌아와 보니 이지희가 쓰러져 있었다.
“마시고 싶었나 봐요, 스승님이 맛있게 드시는 거니 자기도 먹어보겠다면서…….”
오연화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지희는 아무래도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얼마나 마셔서 이렇게…….”
“한 잔이요.”
“한 잔?”
“네.”
오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잔 마시고 이렇게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취해 버리다니.
“어제 와인을 마실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와인이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에 오연화가 벌떡 일어났다.
“아, 어제 지희랑 프렌치 레스토랑에 갔었어.”
“그 뒤에는요!?”
“그 뒤라니……. 아, 집에 데려다줬지.”
“그 뒤에는요!?”
“난 집에 갔는데. 왜?”
그 말을 듣고서야 오연화는 자리에 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구문효가 그걸 보면서 피식피식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야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태도다. 방관자가 보기엔 웃음이 나올 법도 했다.
“지희 씨가 먹은 건 이걸로 한 잔이에요, 형. 원샷해 버리던데. 술에 약하면 한 방에 가는 게 당연하죠.”
구문효가 유리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따로 술잔을 받아둔 게 없어서 물 잔에다 술을 따라 먹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약하지도 않은 일본주를 큰 잔으로 단번에 비워 버리면 이런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술에 익숙해져 있다면 또 모를까.
하긴 나이가 좀 있다고는 해도 아이돌 연습생으로 제대로 노력하면서 생활했다면 술을 마실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최재철도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짐작했다.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습생들은 가끔 숙소에서 도망 나와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게 그네들에게 있어서는 일탈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니까.
물론 데뷔하고 나서는 사회생활을 시작할 테니 술을 배우거나 하겠지만 이지희는 그 단계에 오르기 전에 좌절해 버렸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쓴다면 이지희가 이렇게까지 술에 약한 것도 이해는 갔다. 물론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이고 사실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그나마 주사가 잠드는 거라 다행이로군요.”
현오준이 잠든 이지희를 바라보며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지었다.
“만약 구문효 씨 같은 주사였다면…….”
“…여기서 또 왜 제 이야기가 나옵니까, 팀장님.”
“그야 우리 팀에서 주사하면 구문효 씨니까요.”
“…….”
구문효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대체 구문효의 술버릇이 뭐기에 현오준이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공세를 가하는 것일까?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새삼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일단 자게 두죠. 회식이 끝날 때까지 깨어나지 않으면 최재철 씨, 부탁드립니다.”
“아, 네.”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저희 집으로 데려가죠.”
오연화가 말했다. 물론 이지희에 대한 이야기다.
이지희는 회식이 끝날 때까지 푹 잠들어 있었고, 그렇기에 최재철이 그녀를 데려다주기 위해서는 직접 들어다 옮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신체 강화 능력을 지닌 어벤저인 최재철에게 그건 그렇게 큰 고생은 아니었다.
“아니, 왜?”
그래서 최재철은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오연화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미성년자한테 그걸 묻는 거예요?”
“유리할 때만 그 단어를 꺼내지 마.”
하지만 최재철은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 되물음이 대답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선생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뭐랄까,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오연화는 최재철의 표정을 보고 제 발이라도 저렸는지 빠른 목소리로 그렇게 변명했다.
“저기, 연화야.”
“네, 선생님.”
오연화는 최재철의 부름에 잘 훈련된 개처럼 즉시 대답했다.
“나, 당분간 연애할 생각 없어.”
그 말을 들은 오연화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딱 굳었다. 물론 순간적일 뿐이었다.
“아, 하하하! 그 이야기를 왜 지금?! 제가 선생님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쵸! 그렇잖아요, 이상하잖아요!”
“지금 이상한 건 너야, 연화야.”
최재철은 느낀 대로 말했다.
“그래요?”
“응.”
“S급 랭커는 좀 이상해도 돼요.”
“응, 뭐, 그렇긴 하지.”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좀 진정을 한 건지, 아니면 제 정신을 차린 건지 오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얼굴은 물론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게 최재철의 눈에는 귀여워 보였다.
“그래, 알았어. 지희는 너희 집으로 옮기자.”
그래서 최재철은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오연화의 말대로 하기로 말이다. 그러자 오연화는 어째선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택시를 부를게요! 사실 이미 불렀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얼른 가야겠군.”
“네!!”
최재철은 이지희를 들고 오연화와 함께 일식집을 나섰다.
*
“그럼 난 이만.”
이지희를 오연화의 집 손님방 침대에 내려놓은 최재철은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또.
“선생님.”
오연화가 최재철을 불렀다. 은근히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자고 가요.”
만약 오연화가 2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최재철에게 최소한도의 인내심도 없었더라면 지금 당장 오연화를 덮쳐도 할 말 없는 시추에이션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오연화는 20대 중반이 아니라 10대 중반, 아니, 사실 초반에 가까운 소녀였고, 최재철은 소녀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연화야.”
“네, 선생님.”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최재철을 그렇게 말한 후에나 아차, 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꽤나 유명한 대사지만, 유명했던 것도 10년도 더 전 이야기. 오연화가 이 대사의 속뜻을 알아들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
아니나 다를까, 오연화는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 라면이라도 먹고 가세요.”
정말로 못 알아들은 게 맞는 걸까. 최재철은 오연화의 말을 듣고 의심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속뜻을 알고 하는 소린 아닐 터였다. 옛날 영화에 나왔던 유명한 대사지만, 그 영화가 나온 지는 2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냥 순수하게 라면 먹고 가라는 소리겠지. 최재철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미안하지만 연화야, 오늘은 선생님이 볼일이 있구나.”
“네? 무슨 볼일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인가요?”
“그래, 네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지.”
최재철의 말에 눈을 반짝이는 오연화. 그런 그녀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문 좀 열어줄래?”
*
오연화는 3분 정도 생떼를 썼지만 결국에는 순순히 최재철을 보내주었다.
“흠, 그럼 가볼까?”
오연화의 집에서 충분히 멀어지고, 그녀가 뒤를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나 그는 행동을 개시했다.
오늘 볼일이란 건 그냥 단순한 확인이었다. 이틀 전과 어제 일어난 일이 과연 오늘도 일어날지, 그걸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렇다. 이지희에 얽힌 이야기다. 더 정확히는 그녀의 전 소속사, 더 나아가, 그녀를 원하는 ‘높으신 분’에 대한 이야기.
그들이 이대로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지희는 그 실장이라는 남자를 충분히 겁먹게 만들었지만, 상급자란 놈들은 하급자들이 겁을 먹으면 화부터 내고 몰아붙이게 마련이다. 물론 안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이번 경우가 그런 예외적인 경우일 가능성은 낮았다.
“D급 어벤저를 동원할 놈이라면, C급을 또 동원하고도 남지.”
최재철은 경험적으로 판단했다.
로마 군대가 갈리아를 정복하듯, 아니면 다키아를 정복하듯 패배하면 더 많은 병력을 승리할 때까지 보내는 것이 돈도 권력도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더 작은 세력을 상대로는 효과적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도 성공한 사례가 많은 방법이기는 하다.
그 소모를 계속해서 감당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긴 하지만.
어느 정도 사람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는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이용해 자신의 모습을 이지희의 것으로 바꾸었다. 어차피 천천히 존재감을 지웠다가 서서히 다시 회복시키면서 한 처치이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어벤저가 아니라면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을 터였다.
“아무 일도 없는 게 가장 좋긴 하지.”
그는 이지희의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고 픽 한 번 웃었다. 자기 입에서 나온 이지희의 목소리가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의 모습을 취하는 건 대단히 간만이기는 했다. 적어도 그가 세력을 규합하고 대마법사의 직위를 얻은 후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그의 제자들은 그가 다른 이의 모습을 취하는 걸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나 여자의 모습을 취했을 때는 질색을 했다. 그렇기에 그는 대마법사의 직위에 오른 후부터는 의식적으로 반지 운반자의 팔찌 사용을 저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제자를 위한 일이다. 대마법사의 위신이니, 개인적인 거부감이니 같은 것을 내세우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뭐, 쓸 필요가 있으면 쓰는 거지.”
그는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또각또각 걷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그러고 보니 이지희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고, 반지 운반자의 팔찌는 그것조차 제대로 구현해놓았기 때문에 그도 지금 하이힐을 신은 상태였다. 정확히는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지만, 어쨌든 걸을 때마다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나니 기분이 기묘하기는 했다.
“후.”
이 일을 빨리 해치워야겠다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