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해서 복수한다-12화 (12/32)

12. 가르침

회사 건물 지하에 마련된 훈련실에 현오준 팀의 팀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현오준과 최재철이 훈련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다들 일어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스승님! 괜찮으신가요?”

“괜찮아요, 선생님? 팀장님이 안 괴롭혔어요?”

이지희와 오연화가 최재철에게 먼저 다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저라도 팀장님 걱정을 해야 될 분위기…….”

“됐습니다.”

구문효의 말에 현오준이 정색하면서 한쪽 손을 들어 저어했다.

“괜찮아. 그냥 사정 청취 하는 거라고 말했잖아. 기록이야, 기록.”

최재철이 그렇게 말하며 이지희와 오연화를 안심시켰다.

“헬필드 안에서는 사진도 영상도 안 남으니까요. 의례적으로 한 겁니다.”

최재철에 이어서 현오준이 설명했다.

“어쨌든 오늘 보셨듯이 헬필드 안에서는 언제나 위험이 존재합니다. 우주환 팀장 같은 A급 어벤저라 해도 예외는 아니지요. 그리고 차원 균열 안쪽은 더욱 위험하다고 합니다. 저도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일단 미군의 보고에 의하면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우리는 훈련을 더 해야 합니다, 맞죠?”

구문효가 익살스럽게 현오준의 말투를 따라하면서 말했다. 오연화는 질색했지만 이지희도 웃지 않았다. 현오준이 다시금 위험에 대해 인식시킬 필요도 없이, 이지희는 오늘의 사건에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실전 훈련을 할 만한 적당한 차원 균열이 없으니 부득이하게 실내 훈련으로 대체하겠습니다. 자, 그럼 구문효 씨와 제가 파트너가 되어 훈련하고.”

“아니, 또 왜요?”

현오준의 말에 구문효는 질색했지만, 현오준은 그냥 무시하며 계속해서 지시했다.

“이지희 씨는 최재철 씨가 가르쳐 주십시오.”

“네? 제가요?”

최재철이 놀라 되물었다. S급 랭커인 오연화가 있는데, 같은 신입 사원인데다 랭크까지 더 낮은 최재철이 이지희를 가르쳐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현오준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지희 씨가 최재철 씨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네, 저 가르치는 건 잘 못하더라고요. 보통 천재는 범재를 가르치지 못하는 법이라고 하던데, 제가 딱 그 꼴이에요.”

오연화가 끼어들며 자랑이라도 하듯 그런 말을 주워섬겼다.

“그리고 S급 랭커인 오연화 씨는 개인 정비를 해주십시오.”

“게임해도 돼요?”

“물론이죠.”

뭐가 물론이라는 거지? 최재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연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오연화는 움찔하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에요. 그냥 여기서 보고 있을게요. 아, 아니! 참관수업 할게요!”

오연화의 그런 반응에 현오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아가씨가 오늘은 웬일이지? 딱 그런 표정이다. 평소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뻔히 보이는 반응이기도 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지시를 끝낸 현오준은 구문효를 데리고 사격장으로 향했다.

“자, 그럼 우리도 시작하자.”

최재철은 이지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네!”

이지희가 기합이 잔뜩 들어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따라와.”

“네!”

오연화는 구문효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최재철을 졸졸 따라왔다. 최재철은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훈련실 구석으로 이동한 그는 자신을 따라온 이지희에게 말했다.

“내가 주특기로 하는 건 신체 강화 능력이지. 그러므로 나는 네게 신체 강화 능력에 대해 가르치겠다.”

그는 훈련실 벽 한쪽에 말려진 채 기대어 놓은 매트를 들어서 폈다.

“하지만 스승님, 전 방전 능력자인데… 제가 신체 강화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실 신체 강화 능력은 고유 능력이 아니라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

차원 능력은 고유 능력과 일반 능력으로 나뉜다.

고유 능력이라고 해당 능력자만 얻을 수 있는 능력인 건 아니다. 같은 고유 능력을 지닌 동종 능력자가 둘 이상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보통은 이미 어떤 고유 능력을 가진 차원 능력자라면 다른 고유 능력을 배우기는 매우 힘들다.

일반 능력은 차원 능력자라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물론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고, 스승의 가르침이나 어떤 계기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영 상성이 맞지 않는다면 아무리 일반 능력이라 해도 얻을 수 없는 경우의 수도 존재한다.

지구에서도 이런 구분법을 사용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최재철은 그냥 자신의 개념으로 이지희를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은 터였다. 덤으로 뒤에서 듣고 있는 오연화에게도 말이다.

“내가 말한 차원력이라는 힘의 개념은 이해했지?”

“네. 어벤저 스킬을 사용하기 위한 자원 같은 거였죠?”

그 정도로는 차원력이라는 힘에 대해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만, 최재철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수준으로는 그 정도로 충분하니까.

“넌 그 차원력을 전기 능력으로 치환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고, 손끝에서 전기력을 방출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이 있나?”

“어… 없는데요. 그냥 하다 보니 되던데.”

“바로 그거야.”

“네?”

이지희는 최재철의 말이 의외였는지 화들짝 놀랐다.

“차원력이 어떻게 전기력으로 치환되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듯이, 그걸 근력으로 바꾸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 중요한 건 이미지지.”

“이미지…….”

“이제부터 이미지 훈련을 할 거야. 매트 위에 앉아.”

이지희는 최재철의 말대로 매트 위에 앉았다. 오연화도 잠깐 망설이다가, 이지희와 1m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았다.

“좋아, 이제부터 차원력이라는 힘에 대해서 상상해. 그 힘은 아마도 네 단전에서 시작될 거야. 그리고 네가 능력을 사용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차원력이 배와 가슴, 어깨, 팔, 손가락 끝을 통과하겠지. 순식간에.”

최재철이 그렇게 말하자, 이지희의 손끝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잘 하고 있어. 이제 그걸 천천히 할 거야. 아주 천천히. 단전에서 차원력이 조금씩 뿜어져 나와서 배를 통과하고…….”

최재철은 느릿하게 말했다.

“가슴… 어깨… 팔… 멈춰.”

파지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이지희는 얼굴에 당황한 빛을 띠었다.

“훌륭해.”

하지만 최재철은 미소를 지었다.

“네 차원력이 전기력으로 치환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늦어졌어. 제대로 이미지를 하고 있다는 증거야. 자, 다시 처음부터. 단전… 배… 가슴… 어깨… 팔…….”

최재철은 느릿느릿 말했다.

“좋아, 멈춰.”

지직, 지직.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조금 전보다 작다.

“굉장히 습득이 빠르군.”

최재철은 이지희를 칭찬하며, 옆에 놓인 두꺼운 샌드백을 들어서 이지희 앞에 놓았다.

“쳐봐.”

펑!

70㎏은 충분히 넘는 샌드백이 3m 정도의 허공을 수평으로 날았다. 그걸 본 이지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연화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여자 힘으로 날릴 수 있는 무게의 샌드백은 아니다. 그리고 이지희는 그렇게 특출 날 정도로 근력을 단련시킨 여성은 아니다.

그런데 샌드백은 허공을 날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즉, 이건 능력이다. 지구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어벤저 스킬이다.

“자, 지금 네가 한 게 신체 강화, 그중에서도 근력 강화다. B급 수준치고는 많이 약한데, 도중에 차원력이 전기력으로 변환되어 새어 나와서 그래. 온전히 근력으로만 전환한다면 이것보다는 훨씬 센 펀치를 날릴 수 있게 될 거다.”

최재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명했다.

“이, 이런 걸 선생님은 어떻게 알게 됐어요?”

오연화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젊었을 때… 아니지, 어렸을 때 무협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래.”

이 대답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군대에서 무협 소설을 열심히 탐독한 그는 자신이 새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신체 강화 능력을 무협에 나오는 내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운용하고 연마했다.

물론 차원력은 내공 같은 건 아니었고, 무협 소설에 나오는 운기조식 같은 걸 한다고 늘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공과 같은 형식의 응용법이 유효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상아탑’에서 가르칠 때 같은 방식으로 교육을 했는데, 이 방법으로 상당수의 차원 능력자에게 신체 강화 능력을 획득시킬 수 있었다.

‘정말로 아무나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차원력의 운용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지화 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지희는 이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다. 오연화가 옆에서 같은 식으로 해보려고 애쓰고 있는데 잘 안 되는 것을 보면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차원력이 배를 통과할 때 집중시키면 배가 강화되고, 가슴을 통과할 때 집중시키면 가슴이, 어깨에 집중시키면 어깨가, 팔에 집중시키면 팔이 강화된다. 차원력이 머무르는 지점이 강화된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이지희와 오연화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초롱초롱한 게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확 드러났다.

‘좋은 학생들이로군.’

최재철은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실제로 신체 강화 능력을 사용할 때 신체 일부만 강화시켜서 사용하면 강화되지 않은 부분이 파손돼. 쇠망치의 손잡이를 수수깡으로 만들면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부러지겠지? 그런 느낌이야.”

자신의 팔이 수수깡처럼 으스러지는 걸 상상이라도 한 건지, 이지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상상력이 너무 좋은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며 최재철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연습 방법을 바꾼다. 차원력을 배에 일부, 가슴에 일부, 어깨에 일부, 팔에 일부를 조금씩 남겨가면서 옮기는 걸 이미지해 봐.”

*

훈련을 끝낸 이지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연화도 땀을 흘린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지희 정도는 아니었다.

차원력을 운용하는 데는 집중력과 체력을 요한다. 무조건 많이 한다고 좋은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최재철은 계속하겠다는 이지희에게 훈련 종료를 고했다.

“선생님, 저는 지희 언니보다 재능이 없는 걸까요?”

참관만 하겠다는 애가 어느새 수업에 푹 빠져 있더니만, 그 끝에 한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물론 오연화 이야기다. 그 소릴 들은 최재철은 픽 웃었다.

“S급 랭커가 그런 소릴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전 세계의 C급 어벤저들이 절망하고 좌절한 끝에 극단적인 선택마저 하고 말 거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선생님도 C급이잖아요.”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최재철이 노려보자 오연화는 꺅꺅거리며 좋아했다.

‘아니, 어째서?’

그런 오연화의 반응이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의문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고 있는 최재철과 오연화를 번갈아 보던 이지희가 문득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사이… 좋아지셨네요.”

“그래 보여?”

최재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의 기준으로는 딱히 오연화를 어제보다 더욱 친근하게 대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이지희의 표정은 심각했다.

“호칭도 선생님으로 바뀌었고…….”

“네, 어제부로.”

이번에는 오연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스승님… 어제랑 똑같은 양복…….”

“그야 어제 집에 못 들어갔거든. 연화 집에서 잤어.”

“네?!”

이지희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그런 이지희의 반응에 최재철은 이 아가씨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아, 어제 연화가 집에 돌려보내질 않아서 말이야.”

“그,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오연화가 부끄러워하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얘는 또 왜 이래?’

최재철은 내심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이잖아.”

“그야, 사실이지만서도.”

오연화는 최재철의 시선을 피하면서 힐끔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둘의 모습을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지희는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일침을 놓았다.

“스승님……. 그거, 범죄예요.”

“스승이라 부르면서 범죄자 취급을 하다니.”

최재철은 어이가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범죄라며? 내가 오연화 집에서 물건을 훔쳤다거나, 뭐, 그런 생각을 한 거 아냐?”

최재철은 태연하게 그렇게 대꾸했다. 물론 실제로는 이지희도 범죄라고 도둑질 같은 걸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굳이 그녀의 망상이 뭔지 확실하게 들쳐줄 이유는 없었다. 성희롱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저, 그런 생각 한 거 아니에요.”

“그럼 무슨 생각했는데?”

“…….”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게 최재철이 노린 바였다.

“그보다 오늘도 집까지 데려다줄까 생각하는데, 어때?”

“…저요? 저희 집이요? 저를요?”

생각에 잠겨 정신을 놓고 있던 이지희는 화들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럼 너희 집에 널 데려다주지, 오연화를 데려다 앉히겠어?”

“그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오연화가 끼어들었다.

“안 돼.”

이지희가 말했다.

“오늘은 내 차례야.”

“차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지희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누가 에어컨을 틀기라도 한 건지 어째 훈련실의 기온이 몇 도쯤 내려간 것 같았다. 그러자 오연화가 한 걸음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오늘은 제가 물러서죠. 어차피 어제 랭겜을 못 돌려서 오늘 돌려놔야 돼요.”

“랭겜?”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연화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또 뭔가 게임 용어를 자기도 모르게 말해 버린 걸까. 최재철은 생각은 했지만 그걸 굳이 확인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결론은 난 것 같군. 좋아, 그럼 휴식도 끝난 거 같으니 다시 훈련을 시작하지.”

“네!”

이지희와 오연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둘은 서로를 응시했다. 제자 간에 경쟁이 붙는 건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최재철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최재철과 이지희는 퇴근길에 올랐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둘이서.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군.”

“아하하, 그러게요.”

최재철의 말에 이지희는 밝게 웃었다. 어째선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저녁 식사 하실래요? 제가 쏠게요!”

“아니, 그건 좀. 지난 주말에도 내가 얻어먹었는데.”

“아… 네…….”

이지희의 어깨가 금세 축 처졌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티를 내는데, 최재철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저기, 미안하지만…….”

“네?”

최재철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야기도 멈췄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어벤저로군.”

“네?”

“그것도 다섯 명.”

최재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쓴웃음은 곧 미소로 바뀌었다. 분석 스킬을 뻗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데다, 그 능력을 뻗어 온몸 구석구석을 분석해도 막거나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능력의 존재조차 간파하지 못하는 하위 능력자. 그것도 분석 결과 전원 신체 강화도 간신히 하는 단일 능력자였다.

이 정도라면 차원 능력자라는 단어를 써주기도 아깝다.

‘아, 지구에서는 어벤저라고 했지. 뭐, 그게 그거지.’

최재철은 속편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저 다섯 명이 정말로 우리를 쫓아오는 건지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군.”

“다섯 명을 상대로 왜 그렇게 여유로우신 거죠?”

그런 이지희의 대답을 듣고, 최재철은 그녀에게 차원력을 감지하는 법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거야 뭐 어쨌든, 그는 이지희를 데리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포위됐어. 명백히 우릴 노리는 거로군.”

“네?!”

이지희가 놀라 외쳤다.

“목소리 죽여. 어쨌든 좋은 기회야.”

“좋은 기회라뇨?”

최재철의 눈에는 자기 말을 듣고 목소리를 낮추는 이지희가 귀엽게도 보였다.

“이지희.”

“네?”

긴장한 기색의 이지희에게 최재철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을 바꿔 먹기에는 항상 계기가 필요한 법이지. 그리고 오늘 일은 좋은 계기가 될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지희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알아듣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최재철이 자신에게 뭘 시킬지. 그리고 그걸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우리 앞을 가로막은 어벤저 저 다섯 명, 네 힘으로 격퇴해.”

그래도 최재철은 용서 없이 말을 끝마쳤다.

“네?!”

이지희가 깜짝 놀랐다.

“제, 제가요!?”

“그래. 흠, 이렇게 덧붙일까?”

최재철은 장난스럽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제자여, 이것이 내 첫 번째 시험이다.”

“시험이요?”

최재철의 그 말에 이지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혹시 이 시험에 떨어지면…….”

“아, 그래. 페널티가 필요한가? 그럼 너한테 다시 높임말 써준다거나, 이런 거 어때?”

“시, 싫어요.”

왜 싫어하지? 최재철은 웃기다고 생각했다. 물론 싫어할 걸 알고 던진 말이긴 했지만 말이다.

“대신 네가 제대로 격퇴한다면, 네가 생각하기에 적당한 상을 하나 주지.”

흔들리던 이지희의 눈빛이 번뜩였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오늘 저녁밥 사세요.”

최재철은 허허 웃었다. 그 정도야 쉬운 부탁이었다. 아니, 지난 주말에 한 번 얻어먹었으니 이번엔 자기가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좋아.”

고개를 끄덕여 이지희의 제안을 받아들인 최재철은 골목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저것들을 저쪽으로 유도하자.”

*

그리고 그들은 이지희와 대면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뒷골목. 여기서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보는 사람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김현직의 동생들이 골목을 틀어막고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조차도 개입할 수 없는 법과 질서의 사각지대. 다섯 명의 어벤저가 여자를 둘러쌌다.

‘아까 그 남자는 어디로 사라졌지?’

김현직은 생각했지만, 그리 중요한 건은 아니었다.

‘연인 사이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냥 도중에 헤어져서 다른 곳으로 가버린 거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대응하면 된다. 그것이 김현직의 기본적인 업무 태도였다.

“크흐흐, 여자, 그것도 미녀. 좋아, 아주 좋아. 사진으로도 마음에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예뻐 보이는군. 사진사의 실력이 엉망진창이었던 모양이야.”

오만구가 앞으로 나서서 위협적으로 이지희를 내려다보았다. 키 차이는 거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실제로 두 배는 아니겠지만, 좌우앞뒤 어느 쪽으로 보나 이지희에 비해 오만구의 체구가 압도적이었다.

그런 오만구의 앞에 선 이지희가 전혀 위축된 기색이 없어 보인다는 것에서 김현직은 불안을 느껴야 했다.

이지희의 몸을 핥듯이 시선으로 훑은 오만구는 아무런 신호도 사전 동작도 없이 즉시 주먹을 뻗었다. 김현직이 뭐라고 반응할 틈도 없었다. 김현직이 상황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이지희의 높은 코에 오만구의 크고 거친 주먹이 닿아 있었다.

아니, 김현직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신체 강화는 어벤저의 기본. 그렇게 말씀하셨죠? 스승님!”

이지희가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것이 들렸다.

김현직과 그의 동생들이 두려워 남자의 뒤에 숨어서 벌벌 떨다가 종국에는 다리까지 풀려 업혀가야 했던 여자였다. 그것도 바로 어제의 일이다. 그랬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한 목소리였다.

이지희의 하이힐이 오만구의 미간에 파고드는 것을 김현직은 뒤늦게 바라보았다.

‘어째서?’

1초. 아니, 그보다도 훨씬 짧은 시간 전에는 맞는 쪽은 분명 이지희 쪽이었다. 그런데 눈 한 번 깜박일 새에 입장이 바뀌어 있었다. 오만구는 여전히 주먹을 뻗고 있었지만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장면이 바뀌어 있지? 눈도 깜박이지 않았는데!’

우지끈.

거목이라도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오만구의 몸이 뒤로 크게 젖혀졌다.

“…크어억!”

한 타이밍 늦게 오만구가 고통의 신음을 흘렸고, 그의 거체가 뒤로 털썩 쓰러졌다.

“형님! 이 개 같은 년이!!”

오만구의 졸개들이 김현직보다는 조금 빨리 반응하며 외쳤다. 가장 먼저 반응해서 이지희에게 달려든 졸개가 받은 보상은 이지희의 뒤돌려 차기였다.

“꽥!”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진 그 졸개의 턱은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히익! 컥!!”

다른 놈이 동료가 당하는 걸 보며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 결과 그가 다음 타깃이 되고 말았다. 손날이 목에 꽂혀 파고드는 끔찍한 광경에 김현직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물론 실제로 목구멍이 뚫리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저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직접 사장 손에 맞아본 김현직은 안다.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두 놈은 공세를 그만두고 벌써 물러나려고 하고 있었다. 한 놈은 허둥대다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이지희는 멀쩡한 쪽을 노렸다. 큰 걸음으로 다섯 걸음은 도망간 놈의 등에다 날아 차기를 퍽 먹여 날려 보내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와장창!

맞은 놈이 유리창 속이 처박히는 소릴 들으며, 김현직은 이게 현실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지희의 신체 능력이 좋은 건 김현직이 실장 노릇을 하며 그녀의 그룹을 프로듀스할 때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도가 심했다.

이지희는 충분히 단련된 육체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게 격투기를 위한 몸은 아닐 뿐더러 힘이 셀 것 같은 몸매도 아니었다. 힘을 주면 잔 근육이 드러나긴 하지만 팔다리는 기본적으로 얇고 허리와 어깨도 결코 두껍지 않아 여리여리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냥 보기만 해도 이지희가 날려 보낸 놈하고 그녀는 체중 차가 배는 날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도 가벼운 것으로 무거운 걸 쳐서 날려 보낼 수는 없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보이는 장면은 거의 물리 법칙을 초월한 것처럼 보였다. 체구가 작은 여자가 자신보다 훨씬 큰 남자를 발로 차서 몇 미터씩이나 날려 보내다니, 영화로 찍어놔도 비현실적인 장면이라고 비판받을 것이다.

이게 어벤저의 힘인가!

“이년이!”

과연 C급 어벤저라 해야 할까. 평범한 인간이라면 기절하거나 잘못하면 죽었을 수도 있는 일격을 맞고도 오만구는 그렇게 외치며 이지희에게 달려들었다.

이지희도 오만구를 이미 쓰러뜨렸다고 생각해 방심했는지, 오만구가 뻗은 손에 잡히고 말았다. 드드득. 멱살을 잡은 억센 손에 이지희의 블라우스 앞섶이 뜯어져 나갔다.

“이익!”

이지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코 바로 위까지 주름이 꼈다. 김현직은 그게 이지희가 극도로 분노했을 때 보이는 표정인 걸 알고 있었다. 과거 딱 한 번 봤다. 그가 그녀에게 스폰서 이야기를 꺼냈을 때의 일이었다.

“흐흐흐, 귀여운 것!”

오만구는 멱살을 잡은 손을 끌어당겨 이지희를 끌어안으려고 들었다. 그게 오만구의 흑심에서 그냥 나온 동작이 아님을 김현직도 알아차렸다.

‘베어허그!’

곰이 사냥감을 무력화시키듯, 이지희를 끌어안아서 C급 어벤저의 신체 강화 능력을 이용해 온몸을 으스러뜨릴 셈이다!

“야아압!”

그러나 오만구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는 않았다. 이지희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양팔에 힘을 주자, 오만구의 구속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풀리고 말았다.

“헉!”

오만구는 놀라 헛숨을 토해내었다. 그건 빈틈이었다. 다음 순간, 이지희의 팔꿈치가 무방비상태가 된 오만구의 명치에 꽂혔다.

“쿠어어억!”

급소에 꽂힌 일격에 오만구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아직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이지희는 아름답게 단련된 다리를 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 그리고 그 발꿈치가 무릎을 꿇은 오만구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쾅!

사람이 사람을 패는 데 이런 소리가 나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파열음의 뒤로는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 파열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닥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모두가 말을, 넋을 잃은 채 이지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에서 거품을 내뿜으며 기절한 오만구를 제외하고는.

“괴, 괴물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 두목이 당하는 꼴을 멍하니 보고만 있던 놈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었다.

그 공포는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김현직에게도 말이다. 그는 이성을 잃고 뒤로 돌아 달리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의 앞을 이지희가 가로막고 섰기 때문이다.

‘언제?! 날 앞지르는 건 보이지도 않았는데!’

김현직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실제로 입에서 터져 나간 건 비명이었다.

“그렇게 괴물 보듯이 비명 좀 지르지 마세요, 실장님. 귀청 나가겠네.”

이지희는 귀엽게 미간을 찡그리며 자신의 양 귀를 막는 제스처를 취했다.

“지희, 지희야, 히… 히히히……….”

김현직의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이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자신조차 자신이 왜 웃는지 몰랐다. 사람은 공포에 질리면 웃는구나, 나중에나 그렇게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사장님한테 전해주세요. 저한테 손 떼시라고……. 아셨죠?”

아, 오줌 지릴 것 같다. 김현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그는 이미 시원해져 있었다.

*

이지희가 보인 기량은 실로 훌륭했다.

신체 강화 능력이야 B급인 그녀가 당연히 쓸 수 있어야 하는 능력이었다. 차원력을 신체 능력으로 전환하는 것은 마법사가 아닌, 단일 능력만 지닌 일반 능력자라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 정도의 재능이라면 쉽게 익힐 수 있을 터였고 실제로 이렇게 그의 눈앞에서 해내 보였다.

놀라운 점은 최재철이 그녀에게 신체 강화 능력에 대해 가르쳐 준 게 바로 오늘이라는 점이다.

신체에 차원력을 흘려 강화시키는 것은 쉽게 배웠고, 오늘 내로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최재철은 판단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제어해 낼 줄은 몰랐다.

보통은 좀 더 헤매게 마련이다. 팔은 강화했지만 허리는 강화하지 못해서 펀치가 이상하게 들어가거나, 그런 시행착오를 겪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고 보니 춤에는 자신이 있다고 했었지. 신체 능력은 원래 뛰어났던 거려나.’

그녀는 아이돌 지망생이었고, 그런 만큼 신체를 다루는 훈련을 미리 받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훈련이란 게 격투 기술이 아니라 댄스라는 점이 약간 다르지만, 춤과 격투기는 은근히 겹치는 부분이 많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신체 능력도 물론 훌륭했지만, 더욱 훌륭한 것은 그녀가 사용한 기술이었다.

자신의 몸을 번개 같이 움직이는 기술.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는 순간 이동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최재철은 그녀가 스스로의 몸을 순간적으로 번개로 바꾼 것을 보았다. 구문효가 사용한 응용 기술인 ‘점멸’과 동급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 원리는 최재철이 염동 능력에 사용되는 집중점을 기점으로 차원 커터를 뿜어내는 것과 같다. 즉, 쉬워 보이지만 상당히 고도의 테크닉이다.

물론 고유 능력에 고유 능력을 응용해서 쓰는 최재철의 복합 능력보다는 한 단계 낮은 기술이기는 하지만, 그녀 본인에게 복합 능력의 재능이 있음을 시사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녀의 이력서에는 번개 속성의 방출 능력자라고 기재되어 있을 터였고, 실제로도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최재철이 신체 강화 능력이 어벤저의 기본 능력이라고 말해준 것만으로도 그녀는 스스로의 재능을 이렇게까지 개화시켰다.

“훌륭해.”

그 한 마디가 아깝지가 않았다. 그야말로 마음에서 우러난 최재철의 칭찬에 이지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럼 합격! 합격인 거죠?!”

“그래.”

최재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희는 그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며 기뻐했다.

“그럼 우리 밥 먹으러 가요!!”

“그전에 들를 곳이 있어.”

“어디요?”

“옷집.”

블라우스 앞섶이 다 뜯어져 하얀 브래지어가 훤히 드러난 이지희의 가슴을 가리키며 최재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지희는 놀라서 블라우스를 여몄다.

“후.”

짧게 숨을 내쉰 최재철은 자신이 입고 있던 정장 웃옷을 벗어 이지희에게 걸쳐주며 말했다.

“그런 일격을 허용하다니, 10점 감점이야.”

“그, 그래도 합격이죠?”

“그거야 물론.”

최재철의 말에 이지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저 싸우고 있을 때 스승님 어디 계셨어요?”

“계속 거기에 있었어. 숨어 있긴 했지만.”

정확히는 오늘 오전에 사용했던 바람의 장벽 능력을 활용해 모습을 감췄었다. 순수한 5:1을 만들기 위한 조치였다. 아까 그놈들이 남자부터 처리하자고 최재철에게 먼저 덤벼 버리면 시험이고 뭐고 없어지니까.

이지희가 신체 강화 능력을 높은 수준으로 습득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투명체 간파 같은 응용 능력은 아직 취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직 가르칠 게 많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가르칠 필요는 없다. 본인의 모티베이션을 유지시키는 것도 중요한데, 여기엔 상벌을 확실히 하는 게 특효약이다.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어?”

“돈까스요.”

“돈까스 좋아하니? 하지만 오늘은 좀 비싼 걸 먹지 그래? 그래도 상인데.”

상이라는 말에 이지희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장고 끝에 그녀가 내놓은 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럼… 스테이크?”

“돈까스 다음에는 스테이크라… 고기 좋아하는구나.”

“네, 헤헤.”

멋쩍은 듯 웃는 그녀를 데리고, 최재철은 다시 큰길로 돌아왔다.

골목길을 막고 서 있던 이지희의 전 소속사 일당 중 하나가 이지희와 최재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깜박였지만, 금세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 노력을 높이 산 최재철은 그를 못 본 척해주었다.

*

자정이 지나도 김현직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이지희의 전소속사 사장, 주승호는 손톱을 깨물었다.

“실패한 거냐. 실패한 거냐고, 김현직. 실패했으면… 실패했으면 실패했다고 보고를 해!”

와장창!

그가 던진 유리컵에 의해 유리 찬장이 박살났다. 그리고 그 찬장에 진열되어 있던 트로피들이 와르륵 쏟아졌다.

“안 돼! 안 돼……. 내가 무슨 짓을……!”

그 트로피들은 그가 이룬 성과들이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을 꼬드기고 속여 팔아넘겨서 얻은 결과물들. 죄악의 대가. 치른 희생이 컸기에 더욱 값진, 그가 이뤄낸 것들.

그도 처음부터 이런 인간은 아니었다. 누군들 처음부터 나쁜 놈이겠는가. 어미 뱃속에서부터 악당인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가 처음 이 사무실을 일으켰을 때는 오로지 실패만을 경험해야 했다.

실패, 계속된 실패. 무엇이 잘못된 걸까.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던 그에게 뻗어온 유혹의 손길. 생각의 끝에 그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너무 착하게 살려고 했어. 그래서 실패한 거야.’

그렇게 그는 유혹에 넘어갔다. 악행을 저질렀다. 그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는 협박당했다. 과거에 저질렀던 악행을 덮어두기 위해 억지로 악행을 이어나갔다.

계속해서 쌓아가는 죄업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던 그는 심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은 성공에 목마른 연예인 지망생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적절한 후원자를 찾아주는 일이라고, 어디까지나 사업의 일환이라고 말이다.

‘사업이라면 어쩔 수 없지. 싫어도 해야 하는 게 일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일을 열심히 할’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그는 주도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후원자들의 취향을 분석하고 거기에 딱 맞는 여자애를 물색해서 적극적으로 접촉해 지망생으로 끌어들인 후 온갖 회유와 협박을 통해 스스로 후원자를 찾아가게 만드는 그의 수완은 그를 이 사업에 끌어들인 ‘그분’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들 정도였다.

‘그래, 나는 나쁜 놈이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누굴 탓할까. 그는 그냥 악당이었다. 영화나 소설, 이야기에나 나올 전형적인, 그림에 그린 것 같은 악당이었다.

그러나 악당이라면, 악행을 저지를 거라면 성공이라도 해야 했다.

‘나는 이 정도의 나쁜 짓을 했으니, 이 정돈 성공해야 돼.’

그런 기묘한 보상 의식이 그의 영혼 근저를 틀어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끝.

여기까지.

김현직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그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실패했다, 틀림없이. 그러나 주승호는 그 실패를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 실패는 그의 파멸로 이어지므로.

뚜르르르.

전화가 왔다. 그의 투실투실한 몸이 움찔 떨렸다.

전화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받아야 했다.

‘이게 김현직에게서 온 전화면 얼마나 좋을까. 성공을 알리는 전화라면…….’

그러나 전화기에 찍힌 발신인 이름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진가충 사장님.

‘그분’이다.

“으으으… 으으…….”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꼴이 되어야 하지?’

억울했다. 그러나 그의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전화를 받아야 했다.

“여보세요.”

-약속 시간이 2시간이나 지났군.

전화 너머의 그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분노에 차 있을 줄 알았는데. 그의 눈앞에 희망의 빛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열심히 사죄를 하면 받아줄지도 모른다.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만족을 드렸는가. 그 실적을, 그의 충성심을 사서라도 한 번 정도는 용서해 주실지도 모른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됐네.

“예?”

꿈만 같았다. 이제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용서해 주신다니. 그런 꿈만 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자넨 끝났어.

하나 꿈이었다. 헛된 희망이었다. 충격을 받은 주승호는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쾅.

전화기를 떨어뜨린 소리는 아니었다. 잠겨 있던 사무실의 문이 파괴되는 소리였다.

그 문을 넘어, 두 명의 남자가 들이닥쳤다. 침입자는 고작 둘. 남자라면 저항을 한 번 시도해 볼 법도 했다. 하지만 주승호는 저항할 의지를 잃은 채 그 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주승호 사장님이시죠? 저희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둘 중 하나,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쪽이 주승호에게 말했다. 다른 쪽은 차가운 눈으로 주승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승호는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내뱉었다.

“허, 어벤저……!”

“어라, 제가 어벤저인 건 어떻게 아셨죠? 아, 하긴 뭐, 그거야 크게 중요하지 않죠.”

어벤저라 불린 웃는 쪽의 어벤저는 손을 한 번 내젓고 자신의 파트너에게 말했다.

“옮겨.”

“시, 싫어!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

주승호의 외침도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웃는 얼굴의 어벤저가 주승호의 이마에 손을 대자마자 건전지가 다 떨어진 장난감처럼 축 늘어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는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 그건 주인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웃지 않는 어벤저의 질문에, 웃는 얼굴의 어벤저는 그렇게 대꾸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주승호의 미래를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주승호는 그의 인생에서 느껴보지 못한 궁지에 몰릴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와 고통 속에서 그는 속삭임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선택하게 될 것이다.

궁극의 선택을.

“하하, 어보미네이션 공장이라니. 도시 괴담으로나 나올 소리지.”

“네? 방금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웃는 얼굴의 어벤저는 웃지 않는 어벤저에게 손을 내저었다.

“빨리 데려가기나 하자고.”

*

최재철은 물론이고 김인수도 지구에서는 부자였던 적은 없다.

그러다 보니 직접 디자인부터 재단, 재봉까지 하는 양복점의 확보와 괜찮은 레스토랑의 예약에는 좀 애를 먹었다. 그렇다고 최고급을 지향할 필요까지는 또 없었지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고 어느 정도가 딱 적당한지를 가늠하는 것도 힘들었다.

‘뭐, 내가 바로 그 소위 말하는 벼락부자니까.’

어쨌든 비슷한 벼락부자들이 많은 어벤저 네트워크에서 적당히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어벤저 네트워크에 어보미네이션과 차원 균열뿐만이 아니라 생활 정보를 다루는 게시판도 있다는 걸 최재철은 뒤늦게 알았다.

레스토랑의 예약부터 마친 최재철은 바로 양복점으로 향해 이지희의 옷을 사주면서 자신의 정장도 새로 맞췄다. 물론 그냥 갈아입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지금 입고 있는 정장은 몸을 움직이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싸구려라 합성섬유가 많이 사용된 지금의 정장은 차원 균열 안에 입고 들어가면 다 뜯어지고 해져서 못 쓰게 될 터였다.

디자인과 원단까지 다 지정해서 자신의 몸에 딱 맞춘 정장을 주문하는 데는 시간도 오래 걸렸고, 돈도 많이 들었다.

굳이 비싼 정장을 계속 고집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정장을 입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천연섬유로 맞춤복을 입으려면 선택지도 제한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정장은 좋은 선택이었다.

그냥 대충 몸에 맞는 기성품 하나를 당장 사다 입고, 기존에 입던 더러워진 정장은 세탁시켜서 택배로 발송하고, 맞춤 정장을 세 벌 주문하자 천만 원이 훅 날아갔다. 최고급품도 아니고 매장 측에서 추천하는 캐시미어나 비쿠냐는 다 무시하고 적당히 튼튼한 모직을 골랐는데도 이렇다.

“손님께서 풀 캔버스를 고르셔서 가격대가 이렇게 된 겁니다.”

최재철에게 재단사가 식은땀을 흘려가며 변명하듯 말했다.

이게 사기나 바가지 같은 건 아니었다. 어벤저 네트워크에 올라올 정도의 가게다. 어벤저 스킬이라는 특이한 능력을 지닌 어벤저들을 상대로 쓸데없이 거짓말이나 사기 같은 걸 쳤다가 무슨 일이 생기는지 잘 이해하고 있는 가게이기도 했다.

다만 벼락부자의 소위 ‘쫀심’을 자극시키고 허영심을 만족시켜서 돈을 버는 방식을 쓰기는 한다. 어느 정도 랭크가 되는 어벤저는 전형적인 벼락부자라, 장인들도 적당히 비싼 원단을 추천하고 돈을 우려내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최재철은 지구에서는 벼락부자에 속하지만, 이계에서 이미 국가 예산 단위의 돈을 만져본 인간이다. ‘이 정도는 입어주셔야……’라는 말이 통할 리도 없었고, 고급이라는 이유로 무의미한 기능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다만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덧붙이는 데는 역시 돈이 많이 들었다. 그것이 재단사가 말한 풀 캔버스였다. 최재철은 풀 캔버스라는 게 뭔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그게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골랐다.

게다가 기계를 쓰지 않고 재단사가 직접 바느질을 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으니, 가격대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쓰기로 마음먹은 돈이다. 하긴 어제 벌어들인 돈도 있고, 억대의 연봉도 확보했는데 이런 돈까지 아낄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투자다. 그렇게 생각하면 속이 쓰릴 일도 없었다.

*

“늦어져서 미안하군. 배 안 고파?”

“배는 고파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제부터 먹으러 갈 거죠?”

“그래야지.”

최재철은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택시는 서울의 거리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확실히 10년 전에 비해 자동차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석유의 가격은 어보미네이션 자원의 출현으로 많이 떨어졌어야 정상일 테고, 그런 만큼 차를 굴리는 부담이 많이 줄었을 텐데도.

팍팍한 세상이다. 휘발유 가격과 상관없이 차를 못 굴리는 인구가 더 는 탓이겠지.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최재철은 쓸데없는 생각을 접었다. 곧 목적지였다.

예약한 프렌치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이지희는 갑자기 긴장한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 올 줄은 몰랐는데.”

이지희의 혼잣말에 최재철은 다시금 피식거리게 되었다.

“그럼 어떤 곳을 올 줄 알았는데?”

“그냥, 프렌차이즈요.”

“그래도 상인데 아무 데나 데려올 수는 없지. 뭐, 이런 곳은 나도 처음이지만.”

“그, 래요?”

이지희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아니, 단순히 조명 때문일지도 몰랐다.

프렌치 레스토랑은 초보자가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뭘 그렇게 설명을 하는 게 많고, 그것도 외래어와 외국어를 줄줄이 늘어놓는지. 웨이터는 분명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 손님을 대하고 있었지만,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친절한데 불친절하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돈 내고 밥 먹으러 온 곳인데 이쪽이 긴장을 해야 되는 건 왜일까요? 아니, 물론 제가 돈을 내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나는 돈을 내지. 하하하.”

최재철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악전고투를 하며 간신히 주문을 마치고, 두 사람은 식전 와인이 든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를 외칠 분위기는 아니지?”

“그럼 짠, 할까요?”

“그게 그거 아니야?”

최재철와 이지희는 잔을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전채 요리가 트레이에 옮겨져 왔다. 그리고 웨이터께서 말씀하시길.

“끝에 있는 식기부터 사용하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요리마다 사용하는 식기의 순서도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최재철은 끙, 하는 소릴 내었고 그걸 들은 이지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식사는 이제 시작되었을 따름이었다.

*

“비싸지 않았어요? 제가 사드린 것보다 훨씬 크게 얻어먹은 것 같은데.”

“아니, 이건 상이라니까. 네가 먹어야 할 것을 먹은 것뿐이야.”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저기, 스승님.”

“어.”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이상한 타이밍이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콜택시를 부르려고 할 때 꺼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와인 잔을 나누거나, 달콤한 디저트를 먹거나, 식후의 차 한 잔을 마실 때 했어도 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 그러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타이밍은 더더욱 기습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최재철은 간신히 반응했다.

“없어.”

“아…….”

명백하게 밝아지는 표정. 그렇기에 최재철은 계속해서 말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하려는 일을 다 마칠 때까지는. 앞으로도 없겠지.”

“아…….”

명백히 어두워지는 표정. 최재철은 다소 안쓰러움을 느꼈다.

이지희는 매력적인 여자다. 최재철은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지희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최재철은 곧장 고개를 저을 것이다. 최재철은 이미 철부지라 할 나이를 훌쩍 넘겼고, 자신의 마음을 분별할 줄은 알았다.

그가 지금 이지희에게 느끼고 있는 매력이란 건 그 능력, 그 아름다움, 그 성격에 대한 것이었다. 이건 소유욕이었다. 사랑이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은.

더군다나 연애라는 건 지금의 그에게는 지나치게 달콤했고,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은 그런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지나치게 금욕적일 필요가 없다고는 해도, 정도라는 건 있는 법이다.

“그 하시려는 일이…….”

물론 그가 하려는 일이라는 건 진씨 일가에 대한 복수다. 하지만 그건 김인수의 몫이고, 최재철의 입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가요?”

“그래, 맞아.”

넓은 의미에서는 맞았다. 진가규라는 괴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 단순히 금력과 권력을 손에 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인맥에는 어벤저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지희는 그 어벤저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차원 균열 너머로 가야 해. 그리고 이건 위험한 임무야. 현오준 팀장님도 말씀하셨지만, 죽을 수도 있어. 그런데 무책임하게 연애를 할 수는 없잖아?”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니, 그냥 사실이었다. 그저 전부 털어놓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것도 그러네요.”

이지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가 안 오는군. 역시 차를 한 대 살까?”

“요즘은 리스가 인기라고 하더라고요. 특히 어벤저들 사이에서는요.”

“어벤저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리스를 해줘?”

“뭐, 사망 보험금에서 빼면 되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 쓸데없는 대화를 하는 사이에 택시가 왔다.

*

이지희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최재철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만이었다.

“얼마나 살았다고, 이제 여기가 내 집 같군.”

최재철, 즉 김인수는 쓴웃음을 픽 흘렸다.

그런데 우편함에 편지가 한 통 꽂혀 있었다. 21세기도 20년도 더 지난 이런 시기에 편지라니. 김인수는 신기해하며 편지를 꺼내들었다.

보낸 사람은 최재철의 어머니였다.

김인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편지 봉투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히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손글씨로 빼곡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네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편지를 썼다는 말, 네가 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고 응원한다는 말, 보내준 돈 덕분에 아버지가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 돈은 좀 남았지만 생활비가 없어서 염치없게 그냥 쓰겠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감사의 말.

“하.”

웃으려 했지만 메마른 웃음조차 제대로 입을 통과하지 못했다.

상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거다. 이계에서는 세력 하나를 이끄는 명사이자 세계를 대표하는 영웅, 가장 지혜로운 대마법사인 그조차도 미처 예견하지 못한 일이다.

최재철의 명의는 이미 사들였으니 앞으로 그의 부모에게는 불효를 하겠다고 독종처럼 맹세했건만, 편지 한 통으로 그 맹세를 이리도 쉽게 무너뜨리다니.

그는 이계의 언어로 욕설을 몇 개 내뱉었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그동안 끊어놓았던 전화기의 선을 다시 연결했다. 그렇다고 연락이 바로 온 것도 아니고, 그가 먼저 연락을 할 것도 아니었다.

염치없지만 남은 돈은 쓸 거라고 편지에다 쓴 여자다. 정말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할 터였다. 그런 연락이 온다면 도움을 줄 의향이 김인수에게는 바로 방금 전에 생겼다.

“최재철, 네 어머니는 이렇게도 강하다.”

질투심을 섞어 내뱉은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경질과 불쾌함과 함께 묘한 고양감이 그의 신경을 부풀어 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 안에 다소곳이 넣은 그는 싱크대의 서랍장에 편지 봉투를 밀어 넣었다.

오래간만에 최재철의 모습에서 김인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일요일에 빨아둔 이불 위에 몸을 던졌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것도 있어서 꽤 피로가 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은 쉽게 올 것 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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