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죄와 벌
최재철은 잠에서 깨어났다. 간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잤더니 도리어 별로 푹 못 잔 것 같았다.
“…침대 탓만은 아니지.”
허벅지가 뜨끈뜨끈했다. 이불을 들춰보니 거기 오연화가 들러붙어 있었다. 그걸 본 최재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은 이렇다.
최재철이 오연화네 집에 묵었다.
이 한 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물론 거기까지에 이르게 된 경위까지 늘어놓자면 좀 더 길어졌다.
최재철은 울다 지쳐 잠든 오연화를 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오연화가 진짜로 잠든 게 맞나 싶을 정도의 괴력을 발휘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어찌어찌 손을 떼어내고 나가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대문이 막아섰다. 기이하게도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도 지문 인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연화가 일부러 한 짓이었다. 평소에도 지문 인식이 필요하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김인수의 능력을 이용하면 이런 고층 아파트에서 탈출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대문을 파괴해 버리는 것도, 초시공의 팔찌를 이용하는 것도, 별로 좋은 선택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잠든 오연화의 손가락을 이용해 지문 인식을 풀려고 한 순간, 오연화가 잠에서 깼다.
“아… 연화야? 나 이제 집에 가려고 하는데…….”
“자고 가요.”
최재철의 말을 끊고 오연화가 고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그녀의 눈빛에, 최재철은 처음부터 싸우길 포기했다.
“그렇게 하지. 목욕탕이나 좀 빌리자.”
그렇게 욕실도 빌리고 침실도 빌리게 된 거였다.
이렇게 넓은 집인데 손님방 하나 없을 리도 없다. 어차피 오연화 혼자 사는 집이라 침대까지는 기대도 안 했는데, 이 정도 집이면 손님방에 침대도 붙박이로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최재철은 손님방에서 자고, 오연화는 자기 방에서 자기로 했는데…….
“왜 얘가 여기 있지?”
오연화는 최재철의 허벅지를 꽉 끌어안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너무 꽉 끌어안아서 피도 안 통한다. 허벅지가 저릿저릿해서 푹 자지도 못했다.
시계를 봤더니 새벽 4시였다. 2시간도 제대로 못 잔 셈이었다. 안 그래도 어제 하루는 밀도가 너무 높아서 피로가 꽤 쌓여 있는데,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으휴…….”
최재철은 오연화를 자신의 허벅지에서 떼어내었다. 꼬물거리며 도로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오연화에게 차라리 이게 낫겠다 싶어서 옆구리를 내주었다. 이렇게 되면 서로 밀착한 면적이 더 커지긴 하지만, 그는 이런 어린애한테 이상한 충동을 느낄 취향도 아니었다.
그래서 최재철은 그냥 다시 잤다. 차원력까지 써서 피로를 회복할 게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자두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아직 어려서 체온이 높아 따끈따끈한 오연화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걸까. 그는 이번에야말로 푹 잤다.
*
최재철은 시선을 느끼고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시선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오연화였다. 눈을 떴더니 소녀와 바로 눈이 마주친다는 건 그렇게까지 불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너무 푹 잤군.”
“정말 너무 푹 주무시더군요.”
어째선지 오연화가 불쾌한 듯 대꾸했다.
“뭐야, 몇 시야?”
“8시 15분이요.”
“뭐?”
그녀의 말에 최재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늦었잖아?”
“아뇨, 안 늦었어요. 옷이나 입어요. 그 뻣뻣한 것 좀 가리구요.”
참고로 최재철은 팬티 바람이었다. 딱히 잠옷을 챙겨온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민망한 건, 잠에서 막 깬 그의 중심도 벌떡 일어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멀거니 통제되지 않는 자신의 일부를 바라보다 문득 이렇게 말했다.
“나도 아직 안 죽었군.”
“그거 성희롱이에요?!”
최재철은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국부를 가리며, 그녀를 흘깃 쳐다보았다.
“무슨. 자는 남자 방에 기어 들어와서 같이 잔 주제에.”
“그! …건…….”
오연화의 목소리가 급속하게 작아졌다. 들리지도 않게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우물거리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어어어쨌든! 빨리 준비나 해요!!”
“…화장실 빌릴게.”
그녀를 더 자극하는 게 별로 좋은 판단은 아닐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 최재철은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
아직 안 늦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재철은 5분 만에 준비를 마쳤다.
S급 랭커에게는 지각이 아닌 시각이라도, 바로 어제 첫 출근을 한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지각일 수 있었다.
아무리 외국계 회사라도 신입은 30분 전에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적어도 10년 전에 그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그랬다. 정직원으로 승격도 안 시켜줄 거면서 청소부터 설거지까지 뭘 그렇게 부려먹었는지.
‘역시 거기 가서 한번 뒤집어놓고 와야…….’
실제로는 그러지도 않을 거면서 최재철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픽픽 웃어대었다.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서는 건 약간 불쾌감이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옷에서 땀 냄새 나요, 선생님.”
오연화가 킁킁거리며 말했다.
“아니, 네가 날 집에 안 보내줘서 옷도 못 갈아입었잖아.”
최재철이 툴툴거리자 오연화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제 옷 빌려 드릴까요?”
대놓고 코를 대고 문대며 냄새를 맡는 오연화의 반응에 최재철은 어이가 없었다.
“그게 나한테 맞겠냐? 그보다 땀 냄새 난다면서? 들러붙지 마!”
“땀 냄새가 불쾌하단 말은 안 했잖아요.”
그러면서 말 안 듣고 아예 양손으로 최재철의 배를 꽉 잡고 더 들러붙었다.
‘이 녀석, 갑자기 나한테 왜 이렇게 들러붙지?’
어째 스킨십에 거리낌이 없어진 느낌이다. 최재철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곧 답이 나왔다.
겨우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다. 오연화는 어제 최재철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고 펑펑 울기까지 했다. 그야 친근감을 느낄 만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방 놔두고 밤에 최재철이 자는 방에 숨어 들어와 허벅지 껴안고 잘 정도였나. 생각해 보면 역시 좀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이 행동에 계산 같은 건 없었으리라. 누가 봐도 이상한 짓을 계산해서 하는 건 더 이상하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거겠지.’
그건 그렇다 치지만, 역시 아무리 애라도 이 정도 크기의 애가 자기 몸에 들러붙어 있는 건 성가셨던지라 최재철은 간단하게 오연화의 구속을 풀고 떨어졌다.
“앗, 치사하게!”
“뭐가 치사하다는 거야?”
그렇게 투닥거리며 두 사람은 집에서 나섰다.
*
최재철과 오연화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왔다.
“과연, 이런 거였군.”
이 정도의 고급 주상 복합 아파트 단지 정도 되면 옥상에 헬리포트 정도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헬리포트에는 헬기가 한 대 대기하고 있었다. 그 헬기 옆면에는 커다랗게 TA의 회사 로고가 붙어 있었다.
최재철은 그제야 옥상으로 올라온 이유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S급 랭커 정도 되면 출퇴근으로 헬기 정도는 지원해 줄 수 있다, 이건가.”
이 헬기는 오로지 오연화만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오연화를 제 때 출근시키기만을 위한 회사의 지원이다. 과연, 8시 15분에 깼어도 늦지 않았다는 게 헛말은 아니었다.
“네, 뭐. 얼른 타요, 늦겠어요.”
오연화가 최재철의 등을 밀며 재촉했다.
“아무리 그래도 고자새끼라는 욕은 너무 심한 거 아냐?”
“제가 언제……. 앗!”
이 욕은 10분 전에 오연화가 팬티 바람으로 누운 채 서 있던 최재철에게 우물거린 혼잣말이었다. 아무래도 오연화는 그가 자신의 혼잣말을 들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듯,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얼른 가자. 늦겠어.”
최재철은 느물거리며 먼저 헬기에 올라탔다.
새빨개진 얼굴로 헬기 바깥에서 최재철을 노려보고 있던 오연화는 삐엑 하고 이상한 비명 소리를 한 번 내지른 후 헬기에 올라탔다.
헬기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그런 최재철과 오연화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출발합니다.”
최재철과 오연화가 헬멧과 헤드셋을 비롯한 안전 장구를 모두 착용하자, 조종사가 헬기의 로터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헤드셋을 통해 조종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혹시 아청법이라고 알아요?”
최재철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연화는 영문을 모른 듯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최재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조종사가 최재철에게만 들리도록 말한 모양이었다.
아청법. 아동청소년보호법의 줄임말. 이상하게도 이 소릴 듣자 한국에 왔다는 실감이 들어서 그냥 웃겼다. 그래서 꽤 무례한 축에 속하는 조종사의 발언에도 웃고 넘어갈 기분이 들었다.
“애 데리고 무슨 소릴. 얼른 갑시다.”
“아, 예. 하긴 그렇죠. 가겠습니다.”
헬기가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전경은 제법 볼만했다.
*
최재철을 비롯한 현오준 팀은 오전부터 헬기를 타고 날았다.
어제 그들 팀이 와우산 차원 균열에서 예상 이상의 성과를 올리는 바람에 당분간은 어보미네이션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비교적 가까운 와우산에서 훈련이 불가능해졌으므로, 현오준 팀은 좀 더 먼 차원 균열을 찾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북한산이었다.
북한산 차원 균열은 열린 지 꽤 오래되었다. 그냥 오래된 정도가 아니라, 세계에서 세 번째로 열린 차원 균열이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것도 있고 해서, 어보미네이션 시체의 안정적인 공급원으로 꼽히고 있었다.
과거에는 WF에서 관리했었지만, TA가 매입했다는 현오준의 설명에 최재철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재앙의 근원인 차원 균열이 거래 대상이 되다니.
‘그럼 차원 균열을 닫아버리면 회사는 손해를 보게 되는 건가?’
WF가 관리하는 차원 균열을 찾아다니며 닫는 것만으로도 진씨 일가에게 경제적인 타격을 줄 수 있겠다는 상상은 최재철을 꽤나 즐겁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은 아니지만,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뭐, 어차피 장기적으로는 모든 차원 균열을 다 닫으러 다녀야 하겠지만.’
이계에서 대마법사까지 역임하긴 했지만 그는 지구인이고 지구를 지킬 생각 정도는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구가 존재하는 이 차원의 위험 요소인 차원 균열을 그냥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뼈 빠지게 고생할 생각은 또 없지만 말이다. 그는 지구의 주인도 책임자도 아니다. 얻는 것도 없는데 이 한 몸 바쳐서 봉사 활동을 할 이유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 자신에게 위협이 될 때, 그러니까 서울이, 한국이, 아시아가, 지구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위험할 때 나서도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일단 자신의 목적을 우선시할 생각이었다.
‘제일 좋은 건 지구인들이 알아서 사태를 해결하는 건데 말이지.’
이계에서 그는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어스름의 대표자이자 상아탑의 교장이기는 했지만 그 차원을 구한 것은 어스름과 상아탑의 구성원들, 즉 이계의 주민들 스스로의 힘 덕분이었다. 그 과정에서 김인수의 도움과 가르침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지구 또한 지구인들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최고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 일단은 그 또한 지구인이니 만약의 상황이 닥친다면 힘을 쏟아붓겠지만 말이다.
‘나중 이야기지.’
그는 일단 눈앞의 과제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어, 현오준.”
우주환 팀장이 손을 슬쩍 들어 올려 보이며 현오준을 불렀다.
어제도 보았던, 최재철과 이지희를 자기 팀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근육질의 거한이다. 그런 우주환의 옆에, 똑같이 근육을 자랑하는 모습의 열화복제판 어벤저들이 스무 명 가량 죽 늘어선 것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 늘어선 줄의 끝에서 여의주, 최재철의 입사 동기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이쪽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여의주도 사실 그리 체구가 작은 편이 아닌데도, 다른 팀원들에 비하면 왜소해 보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 우주환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래. 맡겨만 줘. 우하하하!”
오늘 할 훈련은 우주환의 팀과 공조하여, 차원 균열 너머의 어보미네이션을 재빨리 처리하고 차원 균열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현오준 팀이 차원 균열에 진입하는 것을 팀의 목표로 삼는 이상, 잔챙이들을 상대하느라 체력을 소모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짓이 아니다.
그러니 다른 팀이 기존의 디코이 전법으로 차원 균열 너머의 어보미네이션들을 섬멸한 후에 현오준 팀이 차원 균열에 돌입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오늘의 훈련은 그 시뮬레이션이다.
“저희가 실제로 차원 균열에 진입하는 것도 아니니,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오늘은 체력을 온존하고 작전 상황에 익숙해지는 것을 우선시해 주십시오.”
현오준은 이렇게 브리핑했다. 어제 훈련으로 체력 소모가 컸던 것을 염두에 두고 오늘 스케줄을 짠 모양이었다.
“자, 그럼 미션을 시작한다! 오늘의 디코이는 여의주, 너로 정했다!!”
우주환은 여의주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여의주는 상상도 못 했다는 듯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얼른 가.”
“저, 팀장님. 저 어제도…….”
“가라면 가!”
우주환은 갑자기 화를 내며 벼락처럼 외쳤다. 여의주는 더 이상 항의하지 못하고 조심조심 차원 균열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 여의주의 등에다 대고 우주환은 답답하다는 듯 큰소리로 다시 외쳤다.
“얼른 가, 멍청아!!”
우주환의 외침에 반응하기라도 한 듯, 차원 균열에서 리자드독 두 마리가 컹컹거리며 뛰쳐나왔다.
“히, 히에에에에엑!”
여의주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이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 비명 소리 탓에 리자드독 세 마리가 추가로 튀어나왔다. 합쳐서 다섯 마리. 그걸 본 우주환이 기겁하면서 필드 바깥으로 뛰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한꺼번에 다섯 마리나 끌어내는 놈이 어디 있냐!!”
우주환의 다른 팀원들도 뒤늦게 우주환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 꼴불견에 오연화는 얼굴을 찌푸렸다.
“화력! 화력지원!!”
가장 먼저 헬필드를 빠져나온 우주환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의 외침에 사전에 정해둔 장소에 매복을 하고 있던 화력지원팀이 부랴부랴 매복지에서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상대가 지능이 없다시피 한 리자드독이라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지능이 있는 어보미네이션이 여기 있었다면 화력지원팀마저도 위험에 빠질 만한 상황이었다.
“사선! 사선에 막내가 있습니다, 팀장님!”
다른 팀원이 우주환을 향해 외쳤다. 그의 말대로 우주환 팀의 막내인 여의주가 다섯 마리의 리자드독을 끌고 이쪽을 향해 죽어라 뛰어오고 있었다. 그의 위치상, 화력지원팀이 사격을 가한다면 여의주까지 총에 맞을 위험이 있었다.
“에이, 멍청한 막내놈!”
우주환은 혀를 차면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여의주의 울먹거리는 표정이 여기서도 잘 보였지만, 우주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여의주가 리자드독에게 따라잡히길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 그 태도에 최재철은 할 말을 잃었다.
상대는 다섯이나 되고, 화력지원팀이 한 번에 상대하기에는 좀 버거워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여의주가 리자드독에게 따라잡힌다면 그는 공격받아 사망할 것이고, 그 틈을 타 화력지원팀이 사격을 가해 섬멸을 할 수 있기는 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무 명이나 되는 어벤저가 있으면서 저걸 그냥 내버려 둬?’
어벤저의 존재 의의는 헬필드 안에서도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해 어보미네이션을 섬멸하는 데 있다. 그런데 스무 명이나 되는 선배가 막내를 디코이로 던져놓고 나 몰라라 도망 오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쩔 수 없군요, 연화 씨.”
현오준도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닌 듯 못 다 숨긴 불쾌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오연화를 불렀다.
“네.”
지금이라도 따라잡힐 것 같은 여의주를 향해 오연화가 염동력의 손아귀를 뻗었다. 손아귀에 잡힌 그를 오연화는 손쉽게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선이 확보됐다!”
“발사!!”
사선을 가로막고 있던 여의주가 오연화에 의해 치워지자, 화력지원팀은 곧장 리자드독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순간적으로 목표물을 잃고 기세를 잃은 다섯 마리의 리자드독은 화력지원팀의 가열한 사격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재장전!!”
탄창 하나를 비워 버린 화력지원팀의 일제사격이 끊겼다. 그 사이에 부활한 리자드독이 이번에는 화력지원팀을 향해 똑바로 달려들었다.
“발사!!”
일사불란하게 재장전을 마친 화력지원팀은 다시 사격을 가했고, 리자드독을 상대로는 충분히 저지력을 지닌 5.56㎜ 나토탄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이번 생명을 소모해서 어보미네이션은 10m를 전진했고, 그들과 화력지원팀간의 간격은 7~8m에 불과했다.
“재장전!!”
다시 화력지원팀의 일제사격이 끝났다. 리자드독들도 부활했다. 마지막 목숨이다. 인간에게는 원래 하나밖에 없고, 어보미네이션들도 셋 중 두 개의 목숨을 써버렸다.
“발사!!”
화력지원팀의 지휘관이 벽력처럼 외쳤다. 턱밑까지 닥쳐온 리자드독을 향해 화력지원팀은 단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사격을 가했다.
타타타타타!
리자드독들이 생각하지 못한 건, 총탄도 가까이에서 맞을수록 위력이 높다는 점이었다. 위력이 높다는 건 그만큼 저지력을 가진다는 뜻이고, 조금 전과 똑같이 10m를 전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개만도 못한 지능의 최하급 어보미네이션들이 그런 걸 생각할 수 있을 리도 없지만, 어쨌든 일제사격에 의해 이뤄진 화망은 단 한 마리의 리자드독도 뚫지 못했다.
상황 종료.
위험했지만 어떻게든 희생을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주환과 여의주는…….
“막내, 이 멍청아! 너 때문에 몇 명이 위험에 빠졌는지 알아!?”
“죄, 죄송합니다!”
“시끄러! 이 새끼야!! 저기 가서 머리 박고 있어!!”
여의주는 울먹거리는 표정으로도 순순히 뒤로 물러나 땅에 머리를 박았다. 어쩌면 디코이 임무에서 해제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팀의 디코이를 맡았다간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랄 테니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화력지원팀 형님들. 다시 매복지로 돌아가시죠.”
우주환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면서 화력지원팀에게 지시했다. 화력지원팀이 자신의 말에 따라 물러나자, 이번에는 현오준을 향해 다가왔다.
“이야, 역시 S급 랭커는 다르군! 누구 하나 죽어야 해결될 상황을 능력으로 해결해 버리다니. 덕분에 아무도 안 죽고 끝났어. 고마워!”
우주환은 현오준이 아닌 오연화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오연화는 고개를 팩 돌리며 우주환을 외면했다.
“하하하! 작은 아가씨는 여전하군. 자아, 어쨌든 훈련을 재개하지. 야! 잡은 어보미네이션들 옮겨라! 먹을 건 먹어야지.”
우주환의 팀원들은 팀장 말에 따라 다섯 마리의 리자드독 시체들을 옮겼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현오준이 문득 우주환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 한 마리 넘겨주시죠.”
“뭐, 뭐?”
현오준의 말이 너무나도 의외라는 듯, 우주환의 목소리 톤이 쭉 올라갔다.
“이보게, 후배. 우리 막내가 고생해서 끌고 온 놈들이야. 그런데 이걸 나눠먹겠다는 건가?”
“예, 선배.”
현오준은 별로 흔들리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S급 랭커 능력 값이 그렇게 저렴하진 않으니까요.”
그 말에 우주환은 끙, 하고 말을 삼켰다.
“원래 자네 팀의 훈련은 전력을 온존하고 우리 팀의 사냥이 끝난 뒤에 차원 균열에 접촉하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그건 그거, 이건 이거죠.”
현오준은 어디까지나 단호했다. 그의 단호한 말에, 우주환은 오연화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흠,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야, 한 마리 빼줘라.”
“아, 알겠습니다.”
리자드독의 시체 한 구가 시체 더미에서 분리되었다. 그러자 현오준은 직접 가서 리자드독의 시체를 이쪽으로 질질 끌고 왔다.
“왜 팀장님이 직접… 저 시키시지.”
구문효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자 현오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이럴 때 많은 사람이 움직이면 상황이 악화되게 마련이니까요.”
이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최재철이 느낀 건 하나였다.
‘아, 역시 저거 뒤통수 한 대 쳐버리고 싶다.’
최재철이 그런 충동을 느끼는 상대는 물론 우주환이었다.
차원 균열 근처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서 필요 이상의 어보미네이션을 끌어낸 건 물론이고, 그 책임을 여의주에게 전가한 것도 모자라서 아예 희생양을 삼으려 들기까지 하다니. 어딜 어떻게 봐도 훌륭한 악당이었다.
그 팀장의 그 팀원이라고, 스무 명이나 되는 능력자가 위험에 빠진 막내를 위해 뒤돌아서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그들 전체가 신체 강화 능력자인 건 우주환의 입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체 강화 능력자는 아무래도 전투 방식이 근접전이 되어버리는 탓에 최하급 어보미네이션인 리자드독이라 할지라도 부상의 위험을 안아야 한다.
그래도 그들은 어벤저다. 헬필드 안에서 싸우는 것이 직업인 집단이다. 더군다나 높은 연봉까지 받는 몸이다. 그럼에도 우주환을 위시한 팀원들은 너무나도 간단히 동료를 버린 데다, 화력지원팀에 본래 자신들의 임무인 전투를 전가시켰다.
‘동료도 버리는데, 민간인은 얼마나 쉽게 버릴까?’
화력지원팀의 훈련도가 높아서 망정이지, 한 명이라도 두려움에 뒤돌아섰다면 화력팀의 화망은 리자드독을 저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희생을 냈을 터였다. 그리고 만약 화력팀이 위기에 빠졌다면 우주환과 그의 팀원들은 간단하게 그들을 저버렸을 것이다.
‘아무리 만약의 이야기가 의미 없는 이야기라지만.’
그래도 그냥 두고 보고 참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만약 최재철이 우주환의 상급자였다면 땅에 머리를 박아야 할 건 여의주가 아닌 우주환이었을 것이다.
‘저런 걸 그냥 놔두면 안 되는데.’
입사 2일차의 신입 사원이 팀장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참는 수밖에…….
‘어? 내가 왜 참아야 하지?’
문득 그런 의문이 최재철을 사로잡았다.
다음 순간, 그는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재철 씨?”
“죄송합니다, 팀장님. 저 좀 나대겠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현오준 팀장에게 그렇게 속삭인 후, 최재철은 우주환에게 외쳤다.
“우주환 팀장님, 디코이 그냥 제가 하면 안 됩니까?”
“어, 네가?”
우주환은 얼굴에 화색을 띠며 현오준 쪽은 보지도 않은 채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
최재철은 늘 그렇듯 차원 균열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오, 저게…….”
우주환도 최재철이 어떻게 디코이를 하는지 소문은 전해들은 듯, 뒤에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래도 방금 전에 자기가 소릴 질러서 리자드독을 끌어냈다는 자각 정도는 있는지, 목소리는 꽤 낮춘 편이었다.
‘하, 고마워해야 하나.’
물론 고마운 마음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최재철의 발소리에 리자드독 한 마리가 킁킁거리며 기어 나왔다. 이제까지 질리도록 본 광경이다. 곧 최재철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달려드는 것도 정해둔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좀 다르다. 최재철은 달려드는 리자드독을 바로 죽이지 않았다. 대신 공격을 슬쩍 피하고 목덜미를 잡아채서, 그대로 우주환을 향해 던졌다.
“으악! 무슨 짓이야!?”
우주환이 놀라서 소릴 질렀다. 괜히 A급 근육덩어리인 건 아닌 듯, 날아온 리자드독을 받아서 목을 졸라 죽이면서 말이다.
그리고 우주환의 외침을 들은 리자드독 세 마리가 차원 균열 너머에서 튀어나왔다.
‘일부러 소릴 지른 거군, 저거.’
그게 아니더라도 최재철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가 할 건 인과응보를 조금 돕는 것이 될 테니까.
최재철은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어보미네이션이 더 추가되면 곤란했기 때문에, 발소리는 죽였다. 아무리 그래도 ‘대외적인’ 최재철의 능력으로 상황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방향은 당연히 우주환 쪽이었다.
우주환은 방금 리자드독 한 마리를 받아 목을 졸라 죽인 참이었다. 그리고 그 리자드독은 되살아나고 있었고, 그렇기에 우주환은 다시 한 번 그것을 죽여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 마리의 리자드독이 추가로 덮치면 어떻게 될까?
“야! 이거 너희가 처리해!”
우주환의 판단은 빨랐다. 과연 베테랑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자신의 품을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는 리자드독을 부하들에게 던지면서 화력지원팀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일부러 속도를 늦춘 최재철의 등 뒤를 향해 리자드독 한 마리가 덤벼들었다. 누가 봐도 절체절명의 상황. 하지만 최재철은 살아남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덮친 리자드독의 기세를 이용해 그대로 우주환을 향해 날려 버렸다.
“이런 씨발!”
우주환은 욕설을 하며 날아오는 리자드독을 받아 그대로 지면에 찍어버렸다. 리자드독은 그대로 절명했다. 최재철은 그런 우주환의 어깨를 밟고 뛰어넘었다. 물론 그의 등 뒤에는 두 마리의 또 다른 리자드독이 따라붙어 있었다.
“잘 부탁합니다, 팀장님!”
“너 이 새끼, 일부러 그런 거지?”
우주환은 이를 득득 갈면서 날아드는 두 마리의 리자드독을 양손으로 붙잡아 두 마리의 머리를 부싯돌이라도 다루듯 서로 부딪히게 만들었다. 쾅! 두 마리의 리자드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괜히 A급은 아닌 건지 네 마리의 리자드독을 순식간에 한 번씩 살해한 우주환은 축 늘어진 양손의 리자드독을 최재철을 향해 던졌다.
“옛다! 네놈꺼다!”
최재철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평범한 C급이었다면, 공중을 날아오면서 부활한 리자드독 두 마리를 어찌하지 못하고 물려 죽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C급은 아니었다. 신체 능력 강화를 이용해 날아드는 리자드독 두 마리의 공격을 피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우주환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우주환이 지면에 처박은 리자드독이 막 부활한 시점이었다.
“아, 씨발, 진짜!”
우주환은 지면에 처박은 리자드독을 자신의 팀원들 쪽으로 차내면서 최재철이 자신의 머리 위를 뛰어넘는 걸 봤다. 최재철을 격추시키기에는 타이밍이 약간 맞지 않았다. 그 뒤에 리자드독 두 마리가 컹컹거리며 우주환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결국 우주환은 공격을 어보미네이션들에게 가했다.
양손의 주먹 한 방씩. 최하급 어보미네이션의 머리통을 터뜨려 버리는 건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성가신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최재철, 너 이 새끼야!”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우주환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 소릴 듣고 차원 균열에서 리자드독 두 마리가 추가로 컹컹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나오는 크로코리언.
그것들은 모조리 우주환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최재철 어디 갔어?”
우주환은 당황해서 외쳤다. 그 외침으로 인해 크로코리언 한 마리가 또 추가되었다.
아무래도 일부러 소릴 질러 어보미네이션들을 불러내 차원 균열 쪽에 좀 더 가까운 최재철에게 붙일 생각이었던 듯했지만, 최재철이 모습을 감춰 버렸기에 모든 어보미네이션이 우주환을 노리고 달려들게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했던 대로 되살아난 리자드독을 팀원들 쪽으로 던져 떠넘기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팀원들은 먼저 헬필드 바깥으로 도망쳐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던져진 리자드독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 우주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에이, 썅!”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우주환의 처절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미 상황은 C급 단일 능력자인 최재철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말았다. 우주환이 이렇게 많은 어보미네이션을 동시에 끌어낼 줄이야, 이건 최재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크로코리언 두 마리에 리자드독 다섯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 우주환의 전투 능력은 가히 경이롭다고 해도 좋았다. 있는 거라고는 신체 강화 능력밖에 없는 단일 능력자가 저 정도로 싸우기는 쉽지 않다.
있는 손과 발만 휘둘러 결국 크로코리언 두 마리 모두 세 번씩 살해해 그 시체를 밟고 선 우주환의 그 모습은 차라리 장엄했다. 그는 피투성이였지만, 그의 몸에 묻은 액체 중 그가 흘린 피는 없었다.
‘저렇게 잘 싸우면서 말이야.’
최재철은 바람의 장막을 거둬들여 모습을 드러냈다. 김인수가 지닌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이용하면 더 편하겠지만, 앞뒤가 맞지 않게 되니 일부러 바람의 장막을 썼다.
풍압을 이용해 시선을 흩는 원리인데, 조금만 적의 수준이 높아도 간파당하는 조악한 방식이지만 하급 어보미네이션과 우주환에게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어, 뭐야, 최재철! 너 어디 있다 왔어?!”
우주환은 화가 난 듯 외쳤지만 그 목소리는 조금 전만 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차원력 소모가 심각할 텐데, 이 이상 어보미네이션을 끌어냈다간 아무리 A급 어벤저인 우주환이라도 무사하긴 힘들 테니 당연했다.
그럼 최재철이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우주환을 향해 한 번 빙긋 웃고, 다시 차원 균열을 향해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잠깐!”
우주환은 기겁해서 외쳤다. 목소리는 여전히 죽인 채였다.
“뭡니까, 우주환 팀장님?”
최재철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리 죽여, 미친놈아! 어보미네이션 또 나올라!!”
우주환이 다급하게 말했다.
참고로 지금 헬필드에는 그들 둘뿐이었다. 이렇게 작은 목소리라면, 대화를 듣는 이들도 따로 없을 터였다.
“뭐? 미친놈?”
“왜? 뭐?”
우주환은 비릿하게 웃었다.
“네가 아무리 유망주라지만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넌 C급, 난 A급. 넌 말단, 난 팀장. 나댈 때는 발밑 좀 보고 나대는 게 어떠냐?”
그런 우주환의 질문에 최재철은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에 여의주를 죽이려고 했지?”
“내가 죽이려고 했다고? 아니지. 그건 자살이지. 죽었다면 말이야.”
“차원 균열 주변에서 큰 소릴 내는 건 확실히 자살 행위지.”
니글거리게 웃고 있던 우주환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데 씨발, 너 아까부터 왜 반말이냐?”
“그리고 넌 날 죽이려고도 했지.”
“질문에나 대답해라.”
“나한테, C급 어벤저에게 아무리 최하급이라지만 어보미네이션 두 마리를 던져?”
“질문에 대답하라고!”
우주환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아직 충분히 큰 목소리인 건 아니었다.
“하, 조금 전과는 달리 자살할 생각까지는 없는 것 같군.”
“뭐, 이 씨발놈이, 죽고 싶냐?”
“이 대화를 녹취하면 널 협박죄로 고소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우주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건지, 충혈된 시선을 최재철에게 던지며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냐, 그래. 죽여주마. 그렇게 죽고 싶어 하는 후배를 죽여주는 것도 선배의 도리 아니겠냐.”
“자기보다 강해질 것 같은 후배를 일부러 죽음에 몰아넣으면서까지 팀장 자리에 연연하는 선배의 도리 말이냐.”
“그래, 이 새끼야. 그 여유가 언제까지 유지되나 보자.”
우주환이 섰다. 최재철과는 주먹 하나만큼의 거리다.
“최재철. 이 헬필드 안에서는 총알도 쓸모가 없다. 그럼 녹음기는 어떻게 되고, 카메라는 어떻게 될까? 녹음이 될 거 같냐? 녹화가 될 거 같아?”
우주환은 비릿하게 웃었다.
“답은 아니다. 내가 여기서 널 패 죽여도 증거 같은 건 아무것도 안 남는다, 이 말이야. 증인이야 있을 수 있겠지. 그런데 말이다, 이 새끼야. 여기 있는 애들은 전부 내 아래야. 니 팀장도 내 후배고. 그럼 뭐다?”
우주환이 드러낸 이빨에서 살의가 엿보였다.
“파묻을 수 있단 말이다. 권력으로 성립하는 완전범죄다, 들어는 봤냐?”
최재철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김인수가 당한 게 그 잘난 완전범죄란 거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김인수 본인도 차원 균열 속에 던져졌고, 돌아와 봤더니 가해자는 부사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했단다. 그런 그가 ‘권력으로 성립하는 완전범죄’를 모를 수야 없었다.
최재철의 날카로운 시선을 본 우주환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토해내었다.
“허, 간덩이가 부은 거냐?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일도 상상 못 할 정도로 멍청한 거냐? 네가 상황을 모르는 거 같으니 설명해 주마.”
우주환은 차원 균열을 가리켰다.
“넌 이제부터 저 차원 균열 안으로 던져질 거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준비도 없이 말이야.”
그 시점에서 최재철의 얼굴에서 여유란 것이 사라졌다. 그 표정을 보며 우주환은 드디어 최재철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 거라고 생각한 건지,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이게 네가 원하던 거 아니었냐? 현오준의 팀에 들어간 게, 차원 균열 안을 보고 싶어서였지? 네 소원을 들어주마.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냐?”
*
‘이 정도면 졸아서 무릎을 꿇겠지.’
우주환은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난 날 차원 균열 안에 던져 넣으려는 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아.”
최재철은 주제에 걸맞지 않은 건방진 소릴 했다.
“용서하지 말아봐라, 이 새끼야!”
우주환은 최재철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들어서 던지려고 했다. 그의 힘이라면 이 거리에서라도 인간 하나를 차원 균열 안으로 던져 넣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최재철의 몸을 들어 올린 건 맞았다. 하지만 그 방향이 이상했다. 최재철은 그의 등 뒤에 있었다.
‘뭐야?’
자신의 팔이 거꾸로 꺾인 것을, 우주환은 뒤늦게 알았다. 관절이 꺾인 건 아니었다. 어깨가 잘려 나가 힘을 전달받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끄아아아아악!”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팔이 잘려 나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A급 어벤저로 각성한 후로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 고통에, 그는 비명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는 차원 균열 주변이었다. 헉, 하고 자신의 비명을 삼킨 그는 급히 차원 균열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 비명에도 어보미네이션이 기어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스물.
공간이 일그러진 것처럼 보인 걸 발견한 건 기적과도 같았다. 그는 A급 신체 강화 능력자였지만 눈과 귀를 강화하는 법은 몰랐다.
좋지 않았다. 만약 방금 전에 본 일렁임이 어보미네이션의 것이라면, 그는 천적과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는 투명체를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게다가 공격 방식은 근육을 이용한 근접 전투. 인비지블 비스트라도 나왔다면 눈 뜬 채 죽어야 한다.
‘씨발, 씨발! 왜 이렇게 된 거야? 최재철은 어디 갔어?!’
최재철은 다시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리고 이 주변에 살아서 움직이는 거라곤 우주환밖에 없다.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어보미네이션은 100% 확률로 자신을 노릴 것이다. 우주환은 직감적으로 판단했다.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생명체를 덮치는 게 어보미네이션의 습성이다. 그러한 어보미네이션의 습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우주환이었다.
어떻게 하면 어보미네이션의 공격성을 타인에게 떠넘길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걸 이용해서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미래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싹수를 쓱싹할 수 있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쓱싹당할 대상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그는 알아차렸다.
우주환은 입을 꽉 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어깨를 반대쪽 손으로 붙잡고 고통을 참은 채, 그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러나 혹은 아니나 다를까.
퍼억.
중국 식칼로 고깃덩어리를 내려쳤을 때 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물론 고깃덩어리는 우주환, 중국 식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보미네이션이 맡았다.
“끄악!”
미처 참지 못하고, 우주환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허벅지 살이 야구공만큼 떨어져 나갔는데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 비명으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될 수도 있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차원 균열에서 추가로 어보미네이션이 기어 나올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우주환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냥 차원력을 상처 부위에 불어넣어 대충 지혈을 마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행동이 어떤 의미도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 찹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보미네이션이 그에게서 뜯어낸 허벅지 부위 고기를 씹어 먹는 소리였다.
우주환의 입장에서는 소름이 돋는 소리였지만, 동시에 다행이기도 했다. 어보미네이션이 고기를 먹느라 정신이 팔려서 조금이라도 속도가 느려진다면, 우주환의 생존 확률 또한 올라갈 테니까.
‘살아남을 수 있어!’
우주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퍼억.
이번엔 목덜미였다. 원래대로라면 머리로 가야 할 피가 허공에 팍 솟구쳤다. 우주환은 몇 걸음 더 도망쳤다. 거기까지였다.
우주환은 쩍 벌어진 입을 보았다. 거기서 그의 의식은 끊겼다.
그의 숨도 끊어졌다.
*
변색 도마뱀. 지구에서는 빅 카멜레온이라는 알기 쉽다면 알기 쉬운 이름으로 불리는 저 어보미네이션은 사실 랭크로 치면 C급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 색깔을 순식간에 바꿔 모습을 숨기는 그 특질 덕에, 아무나 잡을 수 있는 어보미네이션은 아니었다.
그냥 몸 색깔만 바꾼다면 특수한 수단 같은 게 필요할리도 없지만, 변색 도마뱀은 자신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멋대로 ‘안 보인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능력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변색 도마뱀의 이런 정신 공격을 막는 방법은 생각 외로 간단하다.
바로 ‘나는 투명한 것도 볼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면 변색 도마뱀의 암시에 걸려들지 않는다. 변색 도마뱀은 여전히 변색 능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겠다고 생각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처럼, ‘나는 투명한 것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사람이 ‘투명한 것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즉, 변색 도마뱀을 보기 위해서는 실제로 투명체를 간파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정말로 투명한 걸 볼 수 있다면 마음을 따로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
아니면 단순히 정신 능력을 막는 방벽을 치거나, 자신이나 타인에게 암시를 걸어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우주환은 세 가지 능력 모두 없었다.
투명체를 간파하는 능력은 C급에 속한다. 신체 강화 능력의 하위 범주에 속하니, 투명체 간파 능력만 갖고 있다면 랭크는 오히려 더 낮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주환은 극단적인 근력 강화 능력에만 특화되어 있었고, 그 힘으로 인해 A급을 받았다.
그래서 A급 어벤저라는 양반이 C급 어보미네이션에게 이리도 쉽게 참살당한 것이다.
단순히 랭크로만 차원 능력자를 구분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랭크의 고하보다는 필요한 상황에 필요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실제로 헬필드 바깥에 나온 변색 도마뱀들을 처치한 건 C급 어벤저, 여의주였다. 혼자 힘으로 잡은 건 아니지만 그의 투명체 간파 능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변색 도마뱀들을 전부 처치한 후, 우주환 팀과 현오준 팀의 합동훈련은 그대로 종료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어나갔는데 아무런 사후 처리도 없이 훈련을 계속할 수는 없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
당연하지만 우주환의 죽음에 최재철은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었다. 그가 한 행동은 모조리 정당했다.
가장 처음에 리자드독을 우주환에게 던진 것은 물론 모습을 숨겨서 위기를 모면한 것도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가 우주환의 어깨를 자르긴 했지만, 그건 우주환이 먼저 그를 차원 균열 쪽으로 던져 넣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정당방위였다.
차원 균열 주변에서 언성을 높여서 필요 이상의 어보미네이션을 끌어낸 것은 온전히 우주환의 책임이었다. 그중에 변색 도마뱀이 포함된 것도 물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요소는 아니었다.
자업자득.
그렇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최재철 씨, 어쩌다가 우주환 팀장이 그렇게 흥분하게 된 건가요?”
사정 청취를 맡은 사람은 현오준이었다. 그런 현오준에게 최재철은 명쾌한 대답을 했다.
“반말을 했어요.”
“저런.”
현오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녹음기를 껐다.
헬필드 안에서는 녹음이나 녹화는커녕 사진조차 찍히질 않는다. 그래서 헬필드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오로지 증인의 증언만이 증거로써 유효하다.
지금 한 사정 청취도 기록의 일환으로 남겨야 하기 때문에 녹음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팀장님, 다 보고 계셨죠?”
녹음기가 꺼지자마자 최재철은 현오준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현오준 또한 A급 신체 강화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우주환과는 달리 감각 기관을 강화하는 능력도 사용할 수 있었다.
현오준이 최재철에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정확히 밝힌 적은 없지만, 바로 어제의 일만 떠올려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어제 인비지블 비스트의 등장을 감지하고 그 공격을 간파해 오연화를 지킨 데다 마무리 일격까지 날렸다.
그런 현오준의 능력이라면 아무리 멀리서 헬필드 너머에서 일어난 일이라 한들, 지켜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보기만 한 게 아니라 듣고 있었을 가능성까지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사정청취에서 현오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임했다.
“…예, 뭐.”
현오준은 거짓말해 봐야 별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재철 씨가 거짓 증언을 하질 않아서 별로 의미가 없었긴 했죠. 결과를 놓고 보니 제가 속인 것 같아서 죄송스럽습니다만…….”
“아뇨, 괜찮습니다. 사실 거짓말을 하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로군요.”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난 후에도, 현오준에게서는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다.
“저, 최재철 씨.”
“예.”
“질문 하나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이건 녹취하지 않겠습니다.”
“그 질문을 듣고 결정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럼 질문부터 듣죠.”
“어째서 오늘 디코이 역할을 자처하셨죠?”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최재철은 대답하는 것을 약간 망설였다. 그 침묵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현오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최재철 씨, 당신은 유능한 어벤저입니다. 어딜 봐도 C급 이상이죠. 아니, 사실 저는 당신을 A급 이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현오준의 말에 최재철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가 현오준의 앞에서 보여준 능력은 높게 쳐봐야 B급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오준은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최재철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A급 이상이다.
현오준의 랭크가 A급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최재철이 자신을 능가한다고 평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 저는 당신을 저보다도 높은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오준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최재철의 가설을 참인 명제로 바꿔놓았다.
“어벤저 스킬 시험장에서 나누는 랭크는 사실 정확하지 않죠. 아무리 랭크가 높다한들, 그걸 활용하는 방법에 따라 전투력은 크게 차이가 나게 마련이고, 어벤저 스킬 시험장의 측정 장비는 이런 것까지 판별해 주지는 않습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아무리 품고 있는 차원력이 방대하다 한들, 그걸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C급만도 못하다. C급 어보미네이션인 변색 도마뱀에게 참살당한 A급 어벤저 우주환이 그 좋은 예였다.
“최재철 씨의 어벤저 스킬 응용력은 엄청나게 높습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저는 오늘 당신이 디코이로 나서는 걸 막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재철 씨, 만약 당신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C급 어벤저였으면 오늘 죽었을 겁니다.”
죽음.
무거운 단어다. 꺼내기 쉬운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현오준은 그 단어를 말했다.
“우주환 팀장은 당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의주를 죽이려고 한 것처럼… 말씀입니까?”
“이제까지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죠.”
이미 희생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늘 최재철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것처럼 우주환 또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팀원의 죽음에 대해 도의적 책임이라도 졌다면 여태 팀장 자리에 앉아 있을 리도 없다.
“최재철 씨, 어째서 오늘 살해당할 위험까지 안고 디코이로 나서셨죠?”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죽을 테니까요. 앞으로, 누구든.”
최재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제 미약한 힘으로나마 그에게 교훈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헛된 믿음이었죠. 저는 그가 그렇게 쉽게 죽음을 택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우주환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자살’한 셈이다.
“관대하시군요.”
현오준은 최재철의 생각으로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그 상황을 모두 보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최재철 씨가 우주환 팀장을 직접 죽였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C급이 A급을요?”
최재철은 웃었다. 재미있는 농담이었다. 그러나 현오준의 얼굴에 농담하는 기색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더욱 진지한 목소리로 그에게 이런 제안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게 된 모양이더군요. 다시 한 번 라이센스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검사비는 회사에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모두 듣고, 보고, 알고 있었다니, 최재철이 바람의 장벽을 쳐서 투명화 비슷한 효과를 얻은 걸 현오준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거 하면 연봉은 오릅니까?”
“이미 한 번 체결된 계약이라 그건 좀 힘들 겁니다만……. 대신 내년 연봉 협상에 유용한 카드로 쓰일 겁니다.”
“그럼 내년에나 하죠.”
최재철은 웃어보였다.
“그렇게 하시죠.”
현오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사정 청취는 종료되었다. 공식적인 것으로든, 비공식적인 것으로든.
*
최악이다.
이지희의 전 소속사 실장이자 매니저였던 김현직은 생각했다.
그는 사장 명령으로 이지희를 ‘조용히’ 데려오기 위해 어벤저들을 고용했다. 고용 대상인 어벤저는 총 다섯 명. 한 명은 C급이고, 나머지는 전원 D급이다.
이거야 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이지희가 B급 이상일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지희와 함께 있던 남자 어벤저도 마찬가지. 상식적으로 B급 이상 어벤저이라는 게 그렇게 어디에나 널려 있는 존재일 수가 없다.
김현직의 기준으로 ‘초인’인 B급 이상만 아니라면 아무리 어벤저라 한들, 덤비는 상대도 어벤저라면 머릿수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이들의 인성이었다.
“이 여자를 납치하라고?”
길드장을 맡고 있는 C급 어벤저, 이름은 오만구라고 한다. 2m의 거구에 몸으로 먹고 사는 직업답게 잘 단련된 근육질에 배는 좀 나오기는 했지만 체구 자체가 크니 그런 면에선 오히려 든든함이 느껴졌다. 몸은 그랬다.
“그래.”
“크흐흐, 미인이로군.”
문제는 얼굴이었다. 더 정확히는 눈이었다. 뭐에라도 취한 듯, 풀린 눈으로 이지희의 사진을 감상하던 오만구는 혀로 입술을 핥더니 김현직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럼 우리가 좀 맛봐도 되나?”
뭐가 ‘그럼’이야? 뭘 맛본다는 거야? 김현직은 이들의 사고 구조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안 돼.”
김현직의 대답을 들은 어벤저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군. 알았어.”
그 대답을 들은 김현직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전혀 알아들은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그의 말을 그냥 대놓고 무시할 것처럼 보였다.
“가자, 얘들아.”
“예, 형님!”
어벤저들의 집단인 길드인 주제에, 그들은 마치 조폭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하기야, 그건 김현직과 그의 부하 직원들도 마찬가지긴 했다.
‘에잇,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걱정하지 말자. 설마 정말로 이지희에게 쓸데없이 손을 대겠어?’
김현직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