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오연화
오연화가 산 저녁밥의 메뉴는 샤브샤브였다. 얇게 저민 생 쇠고기를 펄펄 끓는 육수에 담가 익혀 먹는 고기 요리다. 아주 싼 메뉴는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비싼 메뉴도 아니었다.
“미성년 여자애한테 밥을 얻어먹는 건 생각보다 저항감이 있군.”
“그럼 대신 계산할래요?”
“잘 먹겠습니다.”
최재철의 대꾸에 오연화가 깔깔 웃었다.
“그리고 재철 님, 그냥 저한테 반말 쓰세요. 제가 한참 어린데.”
“음… 하기야, 그럼 연화도 나한테 반말 써.”
“아뇨, 그건 좀.”
오연화는 손을 내저었다.
최재철이 얇은 고기를 하나 육수에 넣을 때마다 오연화는 채소를 하나씩 넣고 있었다. 그리고 이지희가 고기를 건져 올릴 때 오연화는 육수에 데친 채소를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혹시 채식주의자인가?”
오연화가 점심때도 양배추 채 썬 걸 열심히 오물거리고 있던 걸 떠올린 최재철이 그런 질문을 던지자, 오연화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채소를 더 맛있다고 느끼는 것뿐이에요.”
“헤에, 특이하네.”
그렇게 말한 건 이지희였다. 그녀는 아까부터 고기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점심때도 함박스테이크와 비프스테이크를 동시에 먹던 걸 보면, 그녀의 식습관도 꽤나 특이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재철 님도 드세요.”
오연화가 말했다.
“먹고 있어.”
“많이요, 더 많이.”
아니, 이거 이지희를 위로해 주려고 사는 밥 아니었나? 최재철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왜 지금 이 자리에 오연화가 있는지에 대해 그는 생각했다.
“난 볶음밥 먹을 거야. 계란 볶음밥. 이 육수 졸인 거에 밥을 넣고 계란을 풀어서 볶은 거. 샤브샤브 집은 그걸 위해서 오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입으로는 그런 소릴 하면서.
*
해는 이미 졌다. 그야 저녁까지 먹었는데 해가 안 지길 바라는 게 더 이상하다.
그래서 최재철은 이지희를 먼저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딱히 바래다줄 필요는 없다고 이지희는 말했지만,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역시 걱정스러웠다. 사람이 마음을 먹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막상 몇 시간 전의 그 괴한들을 다시 혼자 마주쳤을 때, 이지희가 강하게 나갈 수 있을지는 그녀 본인조차 모를 터였다. 그녀 본인은 자신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믿음일 뿐이다.
그래서 최재철은 이지희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옆을 보았다.
오연화가 있었다.
“왜요, 재철 님?”
“너도 집까지 바래다줄까?”
“S급 랭커를 C급 어벤저가 보호해 준다고요?”
“하… 확실히 웃긴 이야기지.”
최재철은 픽 웃었다.
“나를 위해서야.”
“네?”
“속이야 어떻든 겉보기에는 미성년 여자애인데, 그냥 길바닥에다 버리고 가면 사람들이 날 뭐로 보겠니.”
“아하하, 그건 그렇네요. 그럼 데려다주세요.”
오연화는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느 쪽이야?”
“반대쪽이요.”
최재철의 질문에 그렇게만 대답한 오연화는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짚어서 걷기 시작했다. 최재철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자아, 이제 어쩐다.’
최재철은 생각했다.
오연화는 매력적인 인재이다. 지금 강하며, 앞으로는 더 강해질 수 있다. 가능하다면 영입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데 있다.
실력뿐만 아니라, 성격도.
“오연화.”
최재철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오연화는 뒤를 돌아보며, 최재철의 부름에 대답했다.
“오늘 왜 따라왔지?”
“어디요? 아, 지희 언니 집이요?”
아하하, 하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밝게 웃었다.
“혹시 제가 방해가 된 건가요? 오늘 지희 언니한테 작업이라도 걸려고 했던 거예요, 재철 님?”
“아니, 이지희는 관계없어. 난 너한테 묻고 있는 거야.”
최재철은 웃지 않았다.
“오늘 왜 따라왔지?”
그저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했을 따름이다.
오연화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참 침묵하던 그녀는 뒤늦게 질문에 대답했다.
“최재철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 고백처럼도 들렸다. 오연화가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두 뺨에 자리 잡은 홍조, 살짝 피한 시선, 떨리는 목소리.
완벽한 연출이었다.
“그래서? 어땠지?”
최재철의 시선은 오연화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조차 매달려 있지 않다. 그걸 곁눈으로 본 오연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패한 거 같네요.”
“그래, 넌 실패했어.”
최재철은 이번에는 웃었다. 웃는 타이밍이 이상하다, 이 남자. 오연화는 샐쭉이 생각했다.
“오늘 나한테 몇 번이나 시도했지?”
“무슨 이야기죠?”
“12번.”
오연화의 표정이 변했다.
“앞으로도 실패할 거야.”
12번.
그것은 오연화가 오늘 최재철에게 분석 스킬을 사용하려고 시도한 횟수였다.
오연화는 최재철과의 첫 만남에서 그가 자신이 뻗은 분석 스킬을 시야로 간파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재철이 등을 돌리거나 다른 곳을 볼 때마다 분석 스킬을 뻗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최재철은 시선을 돌려 오연화를 보았고, 그녀는 능력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12번 모두가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최재철의 대답으로 확실해졌다. 그는 12번의 시도 전부를 시야가 아닌 감각으로 간파하여 물리쳤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재철 님, 정체가 뭐예요?”
오연화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최재철이야. C급 어벤저지.”
예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전 S급 랭커구요.”
“그래.”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최재철의 모습을 오연화는 빤히 바라보았다.
이 문답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C급 어벤저가 S급 랭커의 능력을 간파했다. 그것도 시야가 아닌 수단으로.
오연화가 S급 랭커일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정신 능력계 차원 능력자이기 때문이다.
보통 일반적인 어벤저는 한 가지 능력과 그 능력을 응용한 확장 능력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정신계 능력자이기에 공격과 지원이 모두 가능한 다중 능력자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그녀는 공격에 염동력을 사용한다. 염동력 손아귀와 염동력 펀치는 그녀의 대표적인 공격 수단이다. 이것만 해도 원거리 공격 수단과 변칙적인 공격,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능력 중 일부에 불과하다. 투시, 투명체 간파, 천리안,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초감각 능력이 그녀를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그럼 최재철은 어떠한가? 오연화는 그와의 첫 만남을 되짚어 보았다.
최재철은 오연화가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분석 능력부터 날린 것에 대해 화를 내면서 공격해 왔다. 분석을 위해 뻗은 정신체에 입은 타격은 그녀에게 큰 고통을 선사했고, 그래서 최재철에게 염동력 타격을 몇 차례 가했지만 그건 정당방위였다.
‘아니, 이게 아니지.’
논점이 엇나갔다. 오연화는 자신의 머릿속을 다시 정리했다.
오연화는 처음에는 최재철이 자신의 분석 스킬을 간파해 낸 것에 대해 극단적인 신체 능력강화 덕이라고 여겼다. 어벤저 스킬로 강화할 수 있는 신체 기관 중에는 당연히 눈도 포함되어 있다. 분석 스킬을 위해 날린 정신체는 투명체에 속하니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최재철은 시야가 아닌 감각으로 오연화의 분석 스킬을 간파해 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최재철은 신체 강화 능력자가 아니다. 최소한 두 종류 이상의 능력을 지닌 다중 능력자, 그것도 초감각을 지닌 정신 능력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나랑 같은 S급? 아니, 아니지. 어벤저 오러는 나보다 훨씬 작아.’
어벤저 오러라는 건 어벤저 스킬을 사용하기 위한 힘이 신체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오연화의 초감각 시야에는 오러처럼 보이기에 그녀가 혼자 속으로 붙인 이름이다.
어벤저 네트워크에서도 이걸 표현하는 단어가 통용되지 않는 걸 보아, 이걸 볼 수 있는 사람 자체가 드문 것 같았다.
그 소위 말하는 어벤저 오러의 크기가 최재철의 것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C급… 아니지. B급 정도… 이려나.’
참고로 오연화의 어벤저 오러는 A급 어벤저인 현오준이나 구문효의 것보다 훨씬 컸다. 그녀의 어벤저 오러도 처음 B급 판정을 받았을 때에 비해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쉽게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최재철은 어벤저 라이센스 평가장에서는 D급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이렇게 단시일에 C급으로 성장한 건 최재철이 처음이라고, 현오준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걸 그녀도 들었다.
‘말이 안 돼. 앞뒤가 안 맞아.’
어벤저 라이센스 평가장에서 시행하는 어벤저 스킬 측정은 어벤저 오러의 크기로 판정하는 경향이 있다. 능력의 종류나 강력함을 따지는 건 그 뒤의 일이다. 하지만 최재철은 그 어벤저 라이센스 평가장에서 D급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B급으로 보인다. 아무리 최재철의 성장 속도가 이례적이라 한들, 이렇게까지 빠를 수가 있을까? 이건 이례적인 걸 넘어서 이상하다. 비정상적이다.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리리라.
“…어떻게 속인 거죠?”
그래서 그녀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뭘 말이야?”
“어벤저 라이센스 측정이요.”
그녀는 답답한 듯 물었다.
“간단해. 네가 할 수 있는 걸 했어.”
최재철의 대답에 오연화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최재철의 대답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대답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어벤저 오러의 크기를 일부러 작게 만들어 감추고 있다.’
역시 ‘이례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처음부터 감추고 어벤저 라이센스 평가를 받은 모양이었다.
‘어벤저 오러의 존재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오러를 조절할 수 있기까지 하다니……!’
그녀는 자신의 경악을 숨기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최재철의 다중 능력자 설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질문이 잘못된 모양이로군요. 다시 질문할게요.”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최재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해.”
“왜 그랬죠?”
A급은 아니라 한들, B급만 되어도 받는 혜택은 어마어마하다. 당장 B급인 이지희만 해도 별다른 전투 경험이 없어도 실전 면접조차 거치지 않고 바로 대기업인 TA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C급은 정말 열악하다. 눈앞의 최재철처럼 운 좋게 대기업에 들어오는 일도 있었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실전 면접을 거쳐야 하고, 그것도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그런데 왜 굳이 그런 고생을 사서 했을까?
그 질문에 대한 최재철의 대답은 이랬다.
“주목받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야.”
‘주목받고 싶지 않다, 라.’
그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대답이었다. 완전히 납득할 만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더 캐물어 봤자 만족할 만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기대할 수도 없을 뿐더러, 정말로 원래 ‘그런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으니 이 질문은 여기까지 하자고 오연화는 마음먹었다.
그녀는 더 알고 싶은 것을 질문했다.
“…실제로는 어느 정도죠?”
“실제?”
“당신의 능력.”
흠, 하고 한 번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던 최재철은 문득 어떤 의미를 담은 건지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목받을 정도지.”
아무리 그래도 이 대답에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애매한 대답이로군요. B급 정도만 되도 주목은 받을 텐데.”
“뭐, 나도 자세히는 몰라. 측정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건 그렇겠네요.”
오연화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측정 기구는 국가 자산이라 아무에게나 빌려주지 않으니, 개인이 알아서 자신의 어벤저 스킬을 측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질문은 이것으로 끝인가?”
최재철의 말에 오연화는 잠깐 고민하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요.”
“그럼 나도 부탁을 좀 해도 될까?”
가슴이 뛰었다. 좋은 의미로는 아니었다. 그러나 동요를 간신히 숨기며,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되물었다.
“질문이 아니라요?”
“지금 너한테 궁금한 건 별로 없어서 말이야.”
최재철의 말은 오연화를 약간 상처 입혔다.
그녀는 나름 귀여운 언행으로 최재철의 호감을 조금이라도 사려고 했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다.
‘연기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의 연기가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이 오연화의 일방적인 착각이었음이 드러났으니, 최소한 부끄러운 일이긴 했다.
“분석 스킬을 쓰지 말라는 거죠? 알았어요.”
그래서 그녀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최재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도 있지만, 그것뿐인 건 아니야.”
“그럼요?”
최재철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적어도 그녀는 무섭게 느꼈다.
“더 이상 팀에 민폐를 끼치지 마.”
최재철의 말에 오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제가 무슨…….”
“오늘 일이야.”
최재철은 오연화의 말을 확 잘라 버리고 대꾸했다.
“하긴 난 오늘 너하고 처음 만났으니 오늘밖에 없긴 하지만.”
“오늘?”
“뭐야, 모르겠어? 정말로 눈치 못 챈 거면 곤란한데.”
최재철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그런 최재철의 목소리를 들은 오연화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소름이 돋아 있었다.
‘어째서? 날이 그렇게 추운 것도 아닌데.’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팔 부분을 손바닥으로 비벼댄 후, 적절해 보이는 대답을 최재철에게 던졌다.
“인비지블 비스트를 상대할 때?”
“맞았어. 다행이네.”
오연화의 대답을 들은 최재철의 목소리가 다소 온화해졌다. 그러자 오연화의 온몸에 돋아 있던 소름도 누그러졌다. 파르르 떨리던 손가락 끝도 조용해졌다.
‘이건 뭐지?’
이렇게까지 확실한 변화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이상, 그녀도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말도 안 돼. 내가? 아무리 이 아저씨가 실력을 숨기고 있다 한들, C급을 상대로 S급 랭커인 내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눈을 들어 다시 최재철을 보았다. 여전히 B급의 오러다. 조금 전에도 그랬다. 최재철의 오러에는 변화가 없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럼 무엇 때문에 나는 이 남자에게서 두려움을 느끼는 거지?’
생물로서의 본능.
그런 문구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네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겠군?”
최재철은 말했다. 마치 상급자처럼, 연장자처럼, 선생님처럼.
S급 랭커가 된 이후로, 누구도 그녀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S급 랭커를 괴물처럼 여기고 있었고, 또 그건 사실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그 자리에서 터뜨려 죽일 수 있는 괴물, 그게 오연화다.
물론 그녀가 실제로 그런 짓을 한 적은 없다. 만약 저질렀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 했겠지. 아무리 그녀가 S급 랭커라 한들, 핵미사일을 맞으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아니, 굳이 핵미사일까지 끌어올 것도 없이 미사일만 맞아도, 로켓포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맞아보지는 않아서 모르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분명 오연화를 괴물 취급한다. 아직까지는 말을 잘 들어주는 맹수 취급이라고 하는 게 더 와 닿으려나.
사람을 습격하면 바로 살처분 당하겠지. 하지만 그전까지는 그럭저럭 대우도 잘 해주고, 일대일로 맞닥뜨리면 두려워하기도 한다. 완전 맹수 그 자체 아닌가!
그런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귀여운 자신을 연기한 것이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이 최재철이라는 남자에게는 무용지물이었던 모양이다. 이중의 의미로 말이다.
‘자꾸 다른 생각을 하게 되네.’
오연화는 고개를 들어서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 정체불명의 남자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그녀 자신이 이 남자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두려움에 당황하기까지 했다.
이건 좀 신선했다.
“…네, 뭐. 제가 당신을 신경 쓰느라 인비지블 비스트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했고, 그래서 팀장님이 대신 막아주었죠.”
“그래, 맞아.”
최재철은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족한 건 어디까지나 대답일 뿐, 그녀 본인은 아닌 모양인지 곧 미간을 찌푸린 채 이렇게 이어 말했다.
“게다가 그걸 계산에 넣고 움직였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걸 계산에 넣었다니요?”
오연화는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최재철은 힐난하듯 말을 이었다.
“팀장님이 널 지켜줄 걸 알고 일부러 집중점 하나를 나한테 낭비한 거잖아.”
최재철이 거기까지 간파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터라, 오연화는 할 말을 잃었다.
최재철이 말한 집중점이라는 단어는 생소했지만, 그게 뭘 가리키는지 그녀는 금방 파악했다. 그녀 본인이 어벤저 스킬을 사용할 때, 어느 한 좌표에 정신을 집중시켜서 그곳을 기점으로 능력이 발휘되도록 하는데 그걸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역시 정신 능력계 어벤저인가.’
용어가 어찌 됐든, 집중점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을 정도라면 이 남자도 역시 정신 능력계 어벤저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게 앞뒤가 맞았다.
‘여기서 ‘그게 팀장님의 일이니까요’라고 대답하면 어떤 반응이 날아들까?’
오연화는 잠깐 생각했지만, 곧 그 충동을 접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화를 낼까 봐.
…혼날까 봐.
‘그래, 난 이 남자가 두려워.’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대답은 단순해졌다.
“반성할게요.”
“반성까지? 그럴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최재철은 의외인 듯 눈을 크게 떴다.
“의외인가요?”
“그래. 네 인상이 좀 바뀌는군.”
최재철이 웃었다. 오연화는 그의 웃음에 자신의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진 것을 느꼈다. 가슴을 죄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이 느낌을 마지막으로 느꼈던 게 언제였더라.
‘그래, 맞아.’
학창시절이었다. 담임 선생님한테 혼날까 긴장했다가, 그게 아니었을 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오연화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걸 곧장 입 밖에 내었다.
“재철 님, 꼭 선생님 같아요.”
선생님.
그녀도 평범한 학생이던 때가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점차 학력이란 게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2020년 정도 됐을 때는 아무도 대학을 안 갔다. 차원 균열이 열리고 어보미네이션들이 쳐들어오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세기말도 아닌데 세기말적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했다.
조금은 안정을 되찾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연화도 학교를 안 갔다.
그녀의 최종 학력은 중졸이다. 사실 어벤저 교육을 받으면서 중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자격을 딴 거라 명확히 따지자면 중학교 중퇴지만, 그거야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지금 그녀는 S급 랭커고, 학력 따위가 그녀를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급 랭커, 괴물이 되어버린 그녀는 가끔 학창 시절을 그리워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때를.
“그래?”
최재철은 그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저도 지희 언니처럼 재철 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아니지. 스승님은 좀 그렇고, 전 선생님이라고 부를게요.”
눈앞의 이 남자는 그녀를 평범하게 대해줄 것만 같았다.
중학생 1학년 때 첫사랑 상대였던 담임선생님처럼 자신을 대해줄 것 같았다. 그때는 결국 고백을 하지 못하고 아무 일도 없이 끝났다. 단지 그 정도의 에피소드라 한들, 그래서 오히려 달콤한 기억으로 남았다.
‘뭐,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그렇게 자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연화는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가슴이 뛰고 있었다.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이게 뭐라고.’
오연화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S급이 C급 상대로 그렇게 부르고 다니는 건 별로……. 아, 아니지. 어차피 지희도 그러고 있으니 상관없나. 나이 차도 있고…….”
최재철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더니, 멋쩍은 듯 말했다.
“그래, 뭐, 마음대로 해.”
그 대답이 순수하게 기뻤다.
*
오연화에게 한 차례 설교를 해버린 입장인 최재철은 기묘한 우울함에 잠겨 있었다.
그는 가르치는 건 좋아하지만 설교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냥 입 다물고 넘어가려고 하는 주의지만, 이계에 있었을 때 교장을 역임했던 이력 탓인지 자기도 모르게 설교를 해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랬다.
설교 탓일까, 오연화도 어째선지 조용해져 있었고,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힐끔거릴 때마다 오연화의 고개가 광속으로 돌아가는 걸 보니 그녀도 최재철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더 느긋하게, 천천히 친해져 가도 됐을 텐데.’
굳이 오늘 해야 됐어야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이기도 했고. 다행히 오연화가 그의 설교를 잘 받아들여서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오늘 일로 평생 척을 질 수도 있었다.
‘하… 선생님이라. 비꼬는 거겠지.’
아무리 미성년이라고 해도 자존심이 있고 인격이 있다. 이런 최소한도의 반격조차 허용해 주지 않으면 나쁜 마음을 묵히고 원망까지 받게 될 수도 있다. 그 정도는 최재철도 이해하고 있었기에, 다소의 반격을 허용할 마음은 있었다.
‘그래도 선생님이라니. …그 말은 정식으로 듣고 싶었는데.’
내심 오연화를 가르치고 싶었던 최재철의 입장에서 듣고 싶은 호칭이기는 했지만, 그걸 비꼬는 방식으로 듣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뭐, 앞으로 잘하면 되겠지.’
선생님, 선생님 부르다가 진짜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겠는가? 최재철은 그냥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
최재철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오연화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선생님.”
오연화가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말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들은 어벤저였다. 취해야 할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자.”
*
손가락만 한 구멍이 허공에 떠 있었다. 마치 작은 차원 균열처럼. 그리고 그 작은 구멍에서는 차원력이 힘차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기세로 인해 조금씩 구멍이 넓어지고 있었다.
“이건… 별로 안 좋군.”
“네? 그게 뭔데요?”
오연화가 놀라 물었다. 놀란 건 최재철도 마찬가지였다. S급 랭커도 이걸 모르다니.
“이거 처음 봐?”
“네…….”
오연화는 어째선지 풀이 죽어 목소리를 낮췄다. 모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이래저래 좋지만, 또 설교를 할 마음이 없었던 최재철은 그냥 설명해 주었다.
“막 생겨난 차원 균열이야. 이쪽에서 열지 않은… 그러니까 반대쪽에서 비집고 나오려고 하는 차원 균열이지. 즉, 곧 나올 거야.”
“뭐가요?”
“차원 마수… 어보미네이션. 그것도 차원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녀석.”
거기까지 말한 후에 최재철은 씩 웃었다.
“하기야 S급 랭커가 있는데 딱히 긴장할 이유도 없지. 준비하자.”
“아, 네!”
최재철의 말에 오연화는 조금 전보다는 자신감을 되찾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거칠게 차원력을 뿜어내던 작은 차원 균열 주변에 차원 필드, 미군들이 쓰는 용어로는 헬필드가 깔리기 시작하면서 문어 같은 생물의 촉수 끝이 차원 균열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연화야.”
“네!”
오연화는 의욕이 넘쳤다. 왜 의욕이 넘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에겐 좋은 일이었다.
“저거, 끌어낼 수 있겠어?”
“해볼게요!”
오연화의 집중점이 꿈틀거리는 촉수에 생기고, 그녀의 능력인 염동력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염동력의 손아귀가 촉수를 움켜잡았다.
“읏!”
염동력의 손아귀에 느껴진 촉감을 그녀 자신도 느끼고 있는 건지, 그녀는 징그러운 듯 진저리쳤다. 그렇다고 손아귀를 놓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손아귀로 촉수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저 작은 균열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생물이 조금씩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히익!”
그녀의 입에서 조금 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비명과도 같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만했다. 방금 전의 그녀가 미끄덩거리고 차가운 촉감에, 즉 상상할 수 있는 징그러움에 진저리친 거라면, 지금 것은 상상 외의 것을 보았기 때문에 반응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생물의 몸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십자 모양으로 갈라진,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히 박힌 입을 쩌억 벌리고 있다. 게다가 그 몸의 머리가 달려 있어야 할 자리에 촉수 두 개가 돋아나 있고 팔 다리가 붙어야 할 곳도 촉수가 붙은 데다, 그 모든 촉수에 빼곡히 안구가 돋아난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생명체를 보았다면 누구라도 비명을 지를 것이다. 물론 이미 그걸 한번 본 최재철은 비명 같은 건 지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후.”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차원 균열에서 끌려 나오는 차원 마수를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이 세상의 존재가 발음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뤄진 이름을 가진 그 차원 마수는 최재철이 있던 이계에서는 틈새의 눈이라 불렸다.
틈새의 눈은 그 어떤 차원에도 소속되지 않은, 차원 균열 속에서만 존재하는 강력한 마수다. 차원 균열 속에서 태어난 이 마수는 다른 차원의 모든 것을 관찰하려 든다.
문제는 그 관찰의 방식이 파괴라는 점이다. 가장 먼저 겉모양을 감상한 후, 껍질을 까서 속을 보고, 반으로 갈라서 단면을 관찰한다. 그 관찰이 끝나면 한입 크기로 잘라내 자신의 입에 집어넣어 맛을 보는 수순을 따른다. 당연히 관찰의 대상은 이 과정에서 죽게 된다.
그리고 지금 틈새의 눈이 겉모양을 감상하고 있는 개체는 다름 아닌 오연화였다. 중력을 무시하고 여기가 우주 공간인 것처럼 둥실둥실 떠 있는 틈새의 눈은 촉수에 빼곡히 달린 수많은 안구로 오연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틈새의 눈이 다음에 취할 행동은 명백했다. 오연화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촉수 끝에 우수한 절삭력을 지닌 차원력 커터를 꺼내 들었다. 지금 최재철이 사용하고 있는 절단 능력과 비슷한 성질의 능력이다.
하지만 그 차원은 말 그대로 다르다. 차원의 벽을 가르고 차원 균열을 만들어낼 정도의 차원력 커터. 어중간한 방어나 반사, 무효화 능력은 그냥 무시하고 관찰 대상을 토막 낸다. 그 커터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기만 해도 위험했다.
“쳐!”
그걸 알고 있는 최재철은 벼락처럼 외쳤다. 다행히 오연화는 즉시 반응했다.
오연화가 뻗은 염동력 펀치가 틈새의 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틈새의 눈은 차원력으로 강화한 촉수를 내밀어 그 펀치를 손쉽게 막아내었다. 그러나 공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다음 일격! 그 또한 막혔다. 그 다음 일격마저 막아내기 위해 촉수를 움직이고 있는 틈새의 눈을 향해 최재철이 파고들었다.
틈새의 눈은 수많은 안구로 최재철의 움직임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세 개의 촉수는 오연화의 염동력 펀치를 막아내고 있었고, 하나는 염동력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다. 틈새의 눈은 남은 두 개의 촉수를 최재철을 향해 뻗었다. 물론 차원력 커터를 전개한 채로!
인간의 팔다리 따위는 젤리 썰어내듯 손쉽게 잘라낼 수 있는 우수한 차원력 커터지만, 그걸 갖고 있는 건 틈새의 눈만은 아니었다. 최재철도 양손에서 차원력 커터를 전개해, 틈새의 눈이 뻗은 커터와 상쇄시켰다. 평소에 C급 어벤저로서 사용하고 있는 절단 능력과는 차원이 다른, 틈새의 눈과 같은 레벨의 차원력 커터다. 당연히 상쇄가 가능했다.
틈새의 눈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십자로 난 입이 묘한 곡선을 그린 것처럼도 보인다. 이미 오연화의 공격을 상쇄한 촉수를 돌려서, 틈새의 눈은 최재철을 반으로 쪼개려 들었다. 차원력 커터로 감싸인 촉수가 힘차게 그의 머리를 향해 내려쳐졌다.
촤악.
다음 순간, 틈새의 눈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표정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그건 오연화도 마찬가지인 듯, 공격을 멈추고 눈은 깜빡거리고 있다.
틈새의 눈의 촉수가 잘려 나가 허공에 둥실거리고 있었다. 반투명한 혈액을 흩뿌리며 허공에서 꿈틀거리던 촉수는 마치 지금 생각났다는 듯 중력에 사로잡혀 지면에 내동댕이쳐졌다.
“계속 쳐!”
“아, 네!”
최재철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오연화는 공격을 재개했다. 틈새의 눈도 다급하게 다시 방어행동을 시작했다.
퍼억.
으드드득.
이 촉수 하나를 공격에 돌리느라 방어가 소홀해진 탓에, 염동력 펀치 한 방이 제대로 들어갔다. 두 촉수의 사이, 인간으로 치면 옆구리로 칠 부위에 강력한 일격이 작렬했다.
“카아아아아악!”
틈새의 눈은 소름 돋는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좋아!”
최재철은 마수가 고통으로 인해 몸을 비틀고 있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촉수에 달린 안구들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틈새의 눈은 최재철에게 이미 두 개의 촉수를 할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품속으로 달려드는 그의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틈새의 눈이 촉수를 두 개나 그에게 할당했기 때문에, 최재철도 그 공격을 막느라 휘두를 팔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조금 전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써걱.
“키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며, 촉수가 하나 더 내동댕이쳐졌다. 그 비명 소리에는 고통뿐만 아니라 당황과 당혹, 그리고 미지에 대한 공포가 섞여 있었다.
“잘 하고 있어.”
마수가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최재철은 만족스럽게 말했다. 촉수 셋으로도 막기가 버거웠던 오연화의 염동력 펀치다. 순식간에 촉수 두 개가 잘려 나가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틈새의 눈은 최재철을 공격하던 촉수를 거두고 도망치려고 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최재철은 한층 더 과감하게 틈새의 눈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가 염동력 커터를 휘두르자, 틈새의 눈은 피하기 위해 촉수를 꿈틀거렸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촉수 하나가 더 잘려 나갔다.
‘어떻게? 무엇으로?’
촉수의 눈들은 최재철에게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수백 개의 안구를 동원해도 틈새의 눈은 최재철이 어떻게 자신의 촉수를 잘랐는지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그렇게 많은 눈을 갖고도 보지 못하는군.”
최재철은 틈새의 눈을 비웃었다. 물론 이 마수는 지구의 언어를 모르므로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아직 살아남은 촉수의 눈들이 분한 듯 부릅뜨는 것이 보였다. 이제부터라도 최재철에게 집중하려는 걸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동체를 붙잡아!”
최재철의 외침을 들은 오연화는 지금껏 촉수 하나를 붙잡고 있던 염동력 손아귀를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기고 또 다른 손아귀로 마수의 동체를 붙잡았다.
“쿠구구구구국!”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틈새의 눈은 최후의 발악인양 살아남아 있는 모든 촉수를 최재철을 향해 휘둘러 왔다.
“후.”
그러나 최재철은 짧게 숨을 내뱉고 양손의 차원력 커터와 또 하나의 커터를 휘둘렀다. 남아 있던 세 개의 촉수가 모두 한꺼번에 잘려 나갔고, 틈새의 눈은 말 그대로 그 이름도 무색하게 입만 산 존재가 되었다.
“이제 보였나?”
제3의 차원력 커터.
염동력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응용해 온 복합 능력. 집중점을 기준으로 삼아 차원력을 뿜어내 적을 자르고 가르는 기술.
물론 이런 곡예를 누구나 할 수는 없다. 애초에 다중 능력을 다루지 못한다면 그보다 높은 단계의 복합 능력은 꿈도 꾸지 못하니 말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엄청난 고도의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미 여러 능력을 동시에 다루게 되어 마법사라는 칭호를 얻은 그의 제자들마저 최재철의 가르침을 받고도 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의 이러한 응용 능력이 그를 다른 마법사와 차별화시키고, 대마법사라는 칭호로 불리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현재의 최재철은 절대 사용할 수 없는 경지의 능력이다. 그럼에도 오연화의 앞에서 이런 능력을 꺼내 보인 이유는 틈새의 눈이 그만큼 강력한 마수이기 때문이었다. 최재철은 절대 처치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상대라, 하는 수 없이 김인수의 능력을 끌어다 써야 했다.
실제로 모든 촉수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틈새의 눈은 아직 살아서 흉악한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죽일까요?”
오연화가 물어왔다. 반짝거리는 시선과 함께. 김인수에게는 익숙한 시선이다. 저 시선에 담긴 감정은 동경이다. 기분은 좋았지만, 동시에 위험 또한 느꼈다.
역시 오연화에게 숨길 수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복합 능력을 보여주고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긴 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 같은 건 품고 있었다.
그러나 오연화의 시선은 ‘전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걸 한 건지 알아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최재철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가볍게 대꾸했다.
“아니. 죽이면 되살아날 거 아냐. 힘들어, 피곤해. 그거 그냥 차원 균열 속에 넣어버려.”
“네.”
오연화는 단 한 음절의 반론조차 하지 않고 순순히 최재철의 말에 따라 차원 균열 속에 마수의 머리통을 밀어 넣어 버렸다.
“아, 촉수들은 남겨놔. 비싸게 팔릴 거야.”
염동력 손아귀로 잘려 나간 촉수들을 모아들이고 있는 오연화에게, 최재철은 그렇게 덧붙였다.
“아주 수익이 없는 건 아니로군요.”
저 멀리서 헬기 로터 소리가 들렸다. 틈새의 눈 출현으로 인해 일어난 차원력 파동을 감지하고 화력지원팀이 날아오고 있는 것일 터였다.
일을 그전에 처리해야 했다.
최재철은 공터에 어질러진 종이 박스 무더기를 들어 올렸다. 거기엔 30㎝ 정도 크기의 입방체가 놓여 있었고, 불길한 빛과 진동을 내고 있었다. 그는 이 물건을 처음 보지만, 이 물건의 용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하, 개새끼들.”
최재철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나온 욕설에 오연화가 움찔 몸을 떠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대신 기계를 주먹으로 박살 냈다. 빛과 진동은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사람 머리통보다 조금 더 크게 벌어져 있던 차원 균열은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닫혀 버리고 말았다.
“아직 차원 균열이 안정화되기 전이어서 다행이로군. 잘 닫혔어.”
최재철은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었다. 차원 균열 주변의 헬필드도 자취를 감춘 것을 확인하는 그를 바라보며, 오연화는 어리둥절한 채 질문했다.
“뭐, 뭐죠?”
“차원 진동기야. 차원 균열을 열기 위한… 정확히는 균열 너머의 마수를 불러들이기 위한 기계야.”
“차원 균열을 연다고요? 그것도 마수를 불러들여서?”
“그래. 너도 방금 봤잖아? 이걸 망가뜨리니 차원 균열이 사라지는 걸.”
최재철은 망가뜨린 차원 진동기의 뚜껑을 비틀어 따고, 복잡한 기계장치를 헤집어 수리가 불가능한 상태로 만든 후 내부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투명한 판이었는데, 일견 유리처럼 보였지만 표면을 두드리니 쇳소리가 났다.
“봐라.”
최재철은 그걸 오연화에게 내밀었다. 오연화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이건……!”
“뭔지 아는 거야?”
“네. 이건 다이아 스틸이라는 이름이 붙은 금속이에요. 저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어벤저 네트워크에서 S급 랭커 전용 정보로 공개된 페이지에서 본 적이 있어요. …한국은 물론이고 지구에서도 구할 수 없는 물질이죠.”
지구에서는 다이아 스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로군. 최재철은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오연화에게 이어서 질문했다.
“그럼 어디에서 구할 수 있지?”
“…차원 균열 너머요.”
오연화는 정답을 말했다.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TA에서는 아직 차원 균열 탐사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고 했지?”
“네. TA는 물론이고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죠. 사실상 지금 지구상에서 차원 균열 탐사를 나설 수 있는 집단은 둘뿐이에요.”
“미군과 WF, 맞나?”
“…맞아요. 그리고 그 다이아 스틸을 차원 균열 속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것도 그 두 집단뿐이라는 뜻이 되죠.”
오연화는 불쾌한 듯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이 우리나라에 일부러 차원 균열을 열려고 이런 기계를 만든 게 되나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야.”
“그게 아니면……!”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오연화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리고, 최재철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오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그 사람들도 한국인이잖아요? 자기 조국에다가 차원 균열을 열려고 드는 미친 짓을…….”
“뭐, 지나친 억측을 미리 할 필요는 없지.”
최재철은 그 투명한 금속판을 슥슥 닦아서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걸 본 오연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그 다이아 스틸 판을 어떻게 하실 거죠?”
“누가 잃어버렸는지 확실해질 때까지는 내가 맡아둘 셈이야.”
최재철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린 채 말했다.
“이 금속판을 찾으러 오는 게 WF일지, 미군일지. 참 기대되는군.”
*
최재철은 오연화와 미리 말을 맞춰, 여기에서 열릴 뻔했던 차원 균열과 차원 진동기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언급을 꺼리기로 했다. 그저 여기에 나타난 어보미네이션, 빅 마우스를 둘이서 처치한 것으로 상황 설명을 마쳤다.
‘틈새의 눈이 빅 마우스라니. …뭐, 확실히 그거 입이 크긴 하지.’
최재철은 피식피식 웃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빅 마우스가 남기고 간 촉수들을 판매해서 최재철은 2천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건 제 돈이 아니에요.”
그의 옆에 선 오연화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신의 휴대폰에 문자로 찍힌 금액을 보면서 하는 말이었다. 거기에는 1억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최재철이 어보미네이션 처치의 공헌도를 오연화 쪽으로 높게 잡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빅 마우스는 C급이 무슨 수를 써도 처치할 수 없는 어보미네이션이기 때문에 이게 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오연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선생님, 계좌 번호 불러주세요.”
“싫어.”
“왜요? 돈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나도 알아. 그게 싫다는 거야. 그 돈은 네가 갖고 써. 그게 자연스러워.”
오연화라는 개인에게 그의 숨겨진 능력을 드러내는 건 별 상관없지만, 데이터로 남는 기록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리고 통장 거래는 말할 것도 없이 공식적인 기록이다.
오연화가 돈을 인출해서 현금으로 그에게 떠안겨 준다면 모를까, 계좌 이체 같은 부자연스러운 짓을 용인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현금으로 주라고 요구할 생각도 최재철에게는 없었다. 몇 푼 안 되는 돈보다는 오연화라는 사람을 얻는 게 최재철에게는 더 중요하다.
‘뭐, 1억이 몇 푼 안 되는 돈은 아니지만. 오연화의 가치에 비하면 푼돈이지.’
지금은 방위산업체에 근무 중이라 그리 많은 돈을 받지 못하는 몸이지만, S급 랭커인 오연화는 그 자리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부자들이 찾아와 돈을 안겨줄 신분이다. 그러나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재차 계좌 번호를 요구해 왔다.
“됐어. 넣어둬.”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됐어. 내가 됐다는데 왜 고집이야?”
오연화의 입술이 한층 더 삐죽 나왔다. 어마어마하게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최재철은 픽 웃었다.
“나중에 다른 걸로 갚아.”
“다른 거? 그게 뭐죠?”
“나중에 나 한번 도와주면 되지.”
“도울게요! 제가 뭘 도우면 되죠?”
“아니, 지금 말고.”
아무래도 오연화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 같았다. 사실 이게 빚이라고 할 것도 아닌데 이렇게 빨리 갚으려고 하는 걸 보니. 지금도 불만스러운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쨌든 어보미네이션의 잔해를 치우고 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어느새 시간은 오후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군.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다. 얼른 가자.”
자정이 다 되어 가는데 미성년인 여자애를 아직도 집에다 데려다주질 못했으니, 그녀의 부모님에게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조차 제대로 떠오르질 않았다.
“…네.”
오연화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날 게 걱정인 거려나.’
최재철은 가볍게 생각했다. 아무리 S급 랭커라 한들, 이 나이대의 여자애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역시 부모일 터였다.
“저기, 선생님.”
“어?”
“저희 부모님 뵙고 가시겠어요?”
“…그러지.”
어쨌든 오연화가 늦어진 원인의 상당 부분은 최재철이 제공했다. 같이 변명이라도 해줘서 덜 혼나게 만들어주는 게 최소한도의 배려라 할 수 있으리라.
*
거대한 주상 복합 단지의 위용이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8년 전의 대재해 이후에 지어진 이 주상 복합 단지는 마치 중세 시대의 성을 연상하게 했다. 단단한 외벽으로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내부에 틀어박힌 채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기 위한 시설.
처음에는 굉장한 인기를 자랑했으리라고 익히 짐작이 갔다. 차원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에 딱 좋은 시설이라고 생각이 들 만도 했으리라.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일 터였다.
하지만 곧 인기가 식었으리라는 짐작 또한 가능했다. 저 안에서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이해서 날뛰기 시작한다면? 그 상상 하나로 저 현대의 성채는 바로 존재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라지만 주상 복합 단지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적어도 저 주택들이 꽉 차 있지는 않으리라는 추정을 쉬이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나 살 수는 없는 주택일 것이다. 4층까지는 온갖 상점과 시설이 가득 들어차 있고, 지하철까지 바로 연결되어 있는 최고급 주택이 저렴할 리는 없으니까. 더군다나 위치마저 종로다.
‘비워두는 것보다는 가격을 내려서라도 사람을 들이는 게 낫다’는 정책을 좀처럼 취하기 힘든 프리미엄급 매물의 비애도 작용할 테니 여전히 엄청나게 비싼 집값을 자랑할 터였다.
그런 곳이 오연화의 집이었다.
“역시 S급 랭커는 사는 곳도 다르군.”
“그쵸?”
오연화는 최재철의 말에 딱히 반박하지도 않았다.
“제 돈으로 산 건 아니에요. 회사에서 줬어요. S급이라도 방산이라서 연봉은 그렇게 못 챙겨주지만 현물로라도 지급해 주겠다며 입사할 때 계약해 주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별로 자랑하는 기색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목소리만 듣자면 그녀는 마치 이 집에서 억지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속내야 어쨌든, 그녀가 말한 내용을 듣자하니 최재철은 자신의 추측을 좀 수정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S급 랭커는 숨 쉬는 것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다. 이게 그 좋은 예였다.
안에서 어보미네이션이 날뛰면 어떻게 하지? 그 염려를 불식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S급 랭커 어벤저의 존재니까. 우리 아파트에는 S급 랭커가 살아요! 이거 하나로 이 아파트의 가격은 정점을 찍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아파트에는 오연화라는 S급 랭커 어벤저가 산다.
‘그냥 비싸서 많이들 못 사는 것이겠군.’
최재철은 그렇게 자신의 짐작을 좀 수정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최재철의 손을 오연화가 덥석 잡았다.
“들어가요.”
오연화는 어째 좀 신이 난 듯 말했다. 방금 전의 자기 집에 대해서 말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최재철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이제부터 엄마한테 혼나게 될 텐데, 왜 신이 났지?’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약속을 어길 이유도 없으니, 최재철은 순순히 오연화의 뒤를 따라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카드 키로 세 개나 되는 게이트를 일일이 열어서 들어가야 드디어 엘리베이터 앞에 설 수 있었다. 쓸데없이 보안이 철저하다는 생각을 하며, 최재철은 오연화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는 그들 외에는 없었다.
오연화는 카드 키로 엘리베이터의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버튼을 눌렀다. 38층. 최상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소리 없이 빠른 속도로 상승을 시작했다. 고속 엘리베이터라 그런지 얼마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이 층에 사는 건 오연화네 집뿐인 모양이었다. 문이 하나뿐이었다. 오연화는 지문 인식 장치를 이용해 집 현관문을 열었다.
집은 엄청나게 넓었다. 풋살 경기장만 한 거실에는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벽걸이 TV는 오랫동안 켜지 않은 듯 화면에도 먼지가 붙어 있었다. 집 안은 어두웠다. 불은 꺼져 있었다. 오연화의 부모님은 모두 잠들어 계신 것 같았다.
그런데 오연화가 외쳤다.
“다녀왔습니다! 엄마, 나 왔어!!”
최재철이 말릴 새도 없었다. 하긴, 말릴 이유도 없었다. 가정사야 모두 다른 법이고, 굳이 그가 끼어들어 뭐라고 할 권리는 없었다. 그런데 오연화의 외침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사실 최재철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 집에는 아무도 없다.
지금 들어온 그들을 제외하고는.
먼저 집 안에 들어간 오연화는 현관에 선 채 움직이지 않는 최재철을 향해 돌아섰다. 연극은 끝났다는 듯, 그녀의 표정은 더 이상 밝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이건 함정이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말대로 신발을 벗고 집안에 들어섰다. 난방이 되지 않은 방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거실의 코너를 돌자 보인 한쪽 벽면에 꽤 고운 어머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생활감이 없는 드넓은 거실에 보기 드물게 따스함이 존재하는 공간인 것 같았다.
“엄마 영정이에요.”
오연화가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혹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하…….”
최재철은 답답함에 한숨을 토해내었다.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인규 사진은 물론이고, 부모님 영정조차 챙기지 못했다.
지갑에 넣어 다니던 가족사진은 그가 처음으로 계약마와 계약했을 때 지갑째로 빼앗겼다. 다른 사진은 옛날 그가 살던 집에 가면 있을지도 모르지만, 없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월세로 살던 집인데 10년간 월세를 못 냈다. 어떻게 됐겠는가? 최재철은 굳이 상상하려 들지 않았다.
게다가 김인수라는 존재는 지구에서는 잊힌 채여야 했다. 그렇다면 최재철의 모습으로든 뭐로든 옛 집 가까이 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했다. 적들에게 단 하나의 단서도 줘서는 안 되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사진 한 장조차 가져오지 못했다. 동생과 부모님의 얼굴은 이제 기억 속에만 있다. 이 기억이 언젠가 변질되지 않으리라 누가 보증할까.
그래서 이렇게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은 오연화를 보고도 그가 느낀 감정은 연민 같은 게 아니라 부러움이었다. 그리고 부러움부터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미, 미안해요.”
최재철이 내쉰 한숨 소리를 듣고 무슨 오해를 했는지, 오연화가 갑작스레 사과했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집에 혼자 들어오기가 싫어서.”
울먹거리는 소리가 섞이기 시작한 오연화의 말에, 최재철은 이것마저 연기는 아니리라고 판단했다. 물론 그녀의 속내에는 그에게서 동정심을 끌어내려는 계산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게 전혀 먹히지 않아서 당황한 것도 맞을 거라 보았다.
하지만 집에 혼자 들어오기 싫다는 말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일 터였다.
김인수는, 최재철의 모습을 한 김인수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생이 죽고, 아버지까지 잃었을 때, 미래도 없고 보람도 없는 계약직 노동에 시달리다 피로로 푹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온 그 날의 일을.
집안은 조용했다. 문을 닫고, 잠깐 현관에 멍하니 섰다. 그러다 문득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해 그 자리에 엎드려 서럽게 울었다.
10년 전의, 그래도 20대였던 당시의 그도 그랬다.
그렇다면 이 꼬마는 어떻겠는가.
이 넓고 화려하지만 온기 없는 집에서, 언젠가 그녀도 그처럼 주저앉아 울었을까.
그거야 모른다.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그랬던 적이 있는지 물어보는 대신, 조용히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여자애의 머리 모양을 망치는 건 매너가 아니란 건 나중에 떠올랐지만, 이미 올린 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연화 선생입니다.”
최재철은 오연화 어머니의 영정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잘 가르치겠습니다.”
“……!”
몇 초 정도는 오연화도 참았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참지는 못했다. 소리를 죽이고 울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키려고 애쓰는 그녀의 모습을 곁눈으로 내려다보며, 그는 다시금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참았다.
*
“지희 언니는 스스로 계약을 맺었다고 했죠.”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에 오연화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아니에요, 저는……. 처음에는 아빠였어요.”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도 두서가 없었지만, 최재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아, 저희 엄마 집안이 꽤 유복한 편이었어요. 그래서……. 그런데 아빠가 바람을 피우고 말았죠. 화가 난 엄마가 아빠를 몰아세웠는데, 그때 그 목소리가 들렸어요.”
[힘을 원하나.]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고……. 그 자리에서 계약이 성립되었어요. 아빠는 어보미네이션으로 변이해 버렸고, 곧장 엄마를 잡아먹으려고 했죠. 그런데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어요.”
[힘을 원하나.]
“엄마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제 앞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힘은 저 아이에게, 대가는 나야.’
“엄마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저는 그렇게 어벤저로서의 힘에 각성했고, 엄마는… 엄마는…….”
오연화는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됐어.”
최재철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오연화의 어머니는 어보미네이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어보미네이션은 서로 싸우기를 그만두었을 것이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냥감을 노렸을 것이다. 그 대상은 물론 오연화였다. 하지만 오연화는 이미 각성한 상태였고,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최재철의 말에 오연화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마치 한계까지 차올라 있던 감정의 보가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 듯, 오열을 토해내었다.
자신의 손으로 부모를 죽였다.
오연화는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을 터였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가 죽인 것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해 오는 어보미네이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했을 터였다.
하필이면 왜, 오늘 처음 만난 최재철에게 이런 이야기를 토해낸 것일까. 그 이유는 그녀 본인도 모를 터였다.
어쩌면 오늘 처음 만났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히, 그녀 본인이 한계에 달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혼자 품고 있기에 그녀는 너무 어렸다.
최재철은 오연화가 자신에게 들러붙는 걸 허용했다. 그의 양복을 눈물과 콧물 범벅으로 만드는 것도 허용했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녀는 진정하기는커녕, 한층 더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었다. 어린애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의 나이에 걸맞은, 그런 눈물을.
*
WFF 부사장실.
전화기가 울렸다. WFF의 부사장, 진가충은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잡아채었다.
“말하게.”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무작정 사죄부터 했다. 그런 전화기 맞은편의 상대에게 진가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사죄가 아니네. 보고하게.”
-실패했습니다.
“변명할 기회를 주지. 변명하게.”
-이지희가… 어벤저로 각성했습니다.
“별것 아닌 변수로군. 그래, 그래도 그런 변수로 하루쯤 늦어질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일세, 더는 안 되네.”
진가충은 으르렁거렸다.
“내일까지. 내일 20시까지 내 앞에 이지희를 데려다 놓게.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최선을 다하겠…….
“최선이 아니라 결과를 보이게.”
진가충은 전화를 끊었다.
“되는 일이 없군그래. 안 그런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몸을 파묻은 그는 자신의 앞에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에게 동의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그래. 다시 한 번 말해보게. 뭐랑 뭘 실패했다고?”
“아드님을 살해한 범인인 박기범에 대해…….”
“그거 말고.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더 중요한 걸 말하게. 보고하게.”
진가충은 보고자를 노려보았다. 보고자는 움찔하며 진가충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마른 목소리로 보고자는 필사적으로 사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가충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는 보고를 종용했다.
“보고를 하라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진가충은 의자에서 일어나, 마침내 무릎마저 꿇고 만 보고자를 벌레라도 보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시선을 돌렸다. 지금껏 부사장실의 구석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자가 그 시선에 반응해 벽에서 등을 떼고 제대로 섰다.
그는 웃고 있었다.
진가충은 그에게 시선으로 명령했다. 그러자 그는 뚜벅뚜벅 걸어왔다.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진가충에게 절하는 보고자의 겨드랑이를 붙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헉! 흐윽!!”
보고자가 남길 수 있었던 말은 거기까지였다. 웃는 얼굴의 남자가 보고자의 이마에 손을 대자마자 그는 그 자리에 축 늘어져 기절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기절한 보고자를 겨드랑이에 끼고 든 채, 웃는 얼굴의 남자는 웃는 얼굴로 진가충에게 물었다.
“그걸 내게 묻나?”
“그야 주인님, 제가 주인님 외의 누구에게 지시를 받겠습니까? 주인님이 명령해 주셔야 움직이죠. 제가 주인님 뜻을 넘겨짚고 멋대로 움직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웃는 얼굴의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진가충은 두통을 느낀 듯 자신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공장에 넘기게.”
“공장에요?”
“그래. 몇 번이고 말하게 만들지 말게.”
“예, 주인님. 명령에 따릅지요.”
웃는 얼굴의 남자는 기절한 남자를 바싹 말라빠진 바게트라도 들 듯 가볍게 옆구리고 끼고 부사장실에서 나갔다.
“하……. 누가 내 일을 일부러 방해라도 하는 것 같군.”
진가충은 골치가 아픈 듯 자신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쥐어짰다.
“무슨 일입니까?”
“별거 아냐. 용산 쪽에 먹고 싶은 땅이 있어서 차원 균열을 열고 사람들을 빼서 헐값으로 먹어보려고 했는데 계획이 틀어졌어.”
진가충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게다가 차원 진동기도 망가진 채로 발견됐고, 다이아 스틸 렌즈까지 누가 털어갔어. 그게 얼마짜린데……. 아니, 값으로 환산이 안 되지. 미군이랑 우리만 생산할 수 있는 건데. 멍청한 놈들! 차원 진동기를 설치했으면 그 자릴 지켜야지, 그깟 목숨이 아깝다고 도망을 가나?”
혀를 끌끌 차던 진가충은 문득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이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였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가충은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자네가 직접 움직여줘야겠어.”
“제가 말입니까?”
“그래. S급 9위 랭커인 자네라면 빅 마우스도 별거 아닐 테니 말일세.”
진가충은 큭큭 웃었다.
“뭐, 지금 당장이라는 말은 아니야. 그전까지는 자네 사수를 따라다니며 일을 좀 배우게. 언제까지고 자네 같은 고급 인력을 놀려둘 수는 없으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하… 난 이제 스트레스를 좀 풀어야겠네. 나가보게.”
“예.”
무표정한 남자는 한 번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부사장실에서 나갔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진가충은 캐비닛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지문으로 캐비닛의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서랍을 드르륵 열었다.
서랍장 안에는 여자가 알몸인 채로 잠들어 있었다. 진가충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귀여운 것.”
서랍장 위에 놓인 작은 케이스를 집어든 진가충은 케이스를 열어 안에 든 주사기를 꺼냈다. 여자의 팔에 주사기를 찌르고 안에 든 액체를 거침없이 쭈욱 밀어 넣자, 여자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오늘은 네 후배와 함께 셋이서 즐길 생각이었다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여자에게 속삭이듯 말하며, 진가충은 여자를 서랍장 안에서 꺼내들었다. 여자는 진가충의 손에 닿은 것만으로도 절정에 이르기라도 한 듯, 달콤한 신음성을 토해내며 경련했다.
“그래, 그래. 귀엽구나. 하하하하.”
진가충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여자를 들고 부사장실의 의자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