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해서 복수한다-9화 (9/32)

9. 훈련

점심 식사는 팀원들이 모여 다 같이 했다. 회사 건물 안에 위치한 구내식당을 이용했는데, 급식 방식은 구내식당 주제에 뷔페였다.

최재철이 점심 식사용으로 고른 메뉴는 스크램블 에그와 치킨 샐러드, 그리고 밥이었다. 말 그대로 먹고 싶은 것만 올렸더니 이렇게 되었다.

“매일 이렇게 먹으면 살이 찌고 말텐데…….”

함박 스테이크에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입으로는 그런 혼잣말을 올린 건 다름 아닌 이지희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개 같은 손길로 비프 스테이크도 한 접시도 낚아채는 걸 최재철은 굳이 못 본 척했다.

오연화는 이지희와 완전히 반대였다. 단백질이라고는 훈제 연어가 전부에 양배추 샐러드를 한 접시 올렸다. 그리고 사과 한 알. 그것으로 끝이었다.

드레싱도 치지 않은 양배추 샐러드를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열심히 먹고 있던 오연화는 최재철의 시선에 문득 입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뭐, 그거야 어쨌든.

현오준은 식사를 마친 후에는 바로 실전 훈련에 들어갈 셈인 듯했다.

“오늘 팀을 결성한 건데 너무 이른 거 아닌가요?”

구문효가 베이컨 롤을 포크로 찍으며 귀찮은 듯 말했다.

“그렇다고 뒤로 미룰 이유도 없으니까요.”

된장국에 든 두부를 숟가락으로 뜨며 현오준이 대답했다.

“팀장님 뜻에 따르도록 하죠.”

최재철은 입안에 든 스크램블 에그를 삼키고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도 오늘 훈련은 대단히 기꺼웠다. 이 팀의 장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터였다.

다른 팀으로 치면 임무에 해당하는 걸 훈련으로 해치운다는 점에서 현오준의 팀이 맡은 임무가 얼마나 위험한지 반증헀다. 오늘 훈련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차원 균열 너머는 언감생심, 오늘 바로 팀을 해체하는 게 낫다.

“그럼 저도…….”

최재철의 말에 이지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동의를 표했다. 그걸 본 오연화가 생긋 웃으며 귀엽게 말했다.

“만장일치네요.”

“어? 나는?”

구문효가 어리둥절해했지만 오연화는 그를 외면했다.

“만장일치 맞아요! 저도 찬성! 찬성입니다.”

그러자 구문효는 얼른 그렇게 덧붙였다. 그런 구문효의 대답에 현오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식사를 마치고 바로 헬기를 예약하도록 하죠. 사실 이미 예약했지만요.”

*

현오준 팀이 도착한 곳은 홍대가 위치해 있었던 와우산 정상 부근이었다. TA가 관리하는 차원 균열으로,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헬필드가 그리 넓지 않은 대신 어보미네이션이 자주 기어 나오는 요주의 지역이었다.

가까운 곳에 군부대가 위치해 있어 그곳에 화력지원을 요청한 현오준 팀은 바로 실전 훈련에 돌입했다.

“자아, 그럼. 최재철 씨, 디코이 역할을 맡아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디코이는 차원 균열에서 어보미네이션을 끌어내는 가장 위험도가 높은 역할이었지만, 최재철은 두말할 것도 없이 승낙했다. 최재철에게는 별로 위험하지도 않을뿐더러, 최재철도 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구문효 씨가 주화력 담당에, 제가 서포트 역할을 맡겠습니다. 오연화 씨는 보조 화력을 담당해 주시고, 이지희 씨는 일단 대기해 주십시오.”

“저, 저도 할 수 있어요.”

차원 균열 가까이에 처음 와보는 이지희는 차원 균열이 발하는 특유의 차원력에 다소 압도당한 듯 보였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음에도 불구하고 의욕을 보이는 건 기특했지만 이건 훈련이고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아뇨, 대기하십시오.”

최재철이 고개를 젓고, 현오준이 다소 강한 어조로 명령하자 이지희도 뜻을 꺾었다.

“오늘의 목표는 평소와 달리 화력지원 없이 끌어낸 모든 어보미네이션을 처치하는 것입니다. 차원 균열 안에서는 화력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으니 이 정도는 당연히 해내야 합니다.”

“아, 몇 번째 말씀하시는 거예요.”

현오준의 브리핑에 구문효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문제없어요.”

“시작하겠습니다.”

구문효의 말을 받아 최재철이 신호하자 현오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 시작이다.

최재철은 면접 때와 똑같이 차원 균열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 광경을 이미 봤었던 현오준과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이지희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구문효와 오연화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이미 헬필드 안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큰 소리는 내지 못했다.

과연 어보미네이션이 자주 기어 나온다는 와우산 차원 균열답게, 처음부터 두 마리의 리자드독이 킁킁거리며 기어 나왔다. 최재철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최하급 어보미네이션들이 컹컹 짖으며 그를 향해 덮쳐들었다.

“큭……!”

구문효가 이를 갈면서 뛰쳐나오려고 했지만, 현오준이 시선으로 자제시켰다. 구문효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얌전히 후방으로 물러났다.

걸음을 멈춘 채 충분히 자신의 거리로 어보미네이션들을 끌어들인 최재철이 먼저 덤벼든 리자드독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리자드독은 즉사했다.

물론 그것으로 끝난 건 아니다. 최재철은 뒷발로 즉사한 리자드독의 시체를 후방으로 차버렸다. 되살아나 재생을 시작한 리자드독에게 구문효가 쏜 빛의 화살이 꽂혔다.

최재철은 자신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뒤이어 그를 덮치려드는 리자드독의 턱을 주먹으로 쳐올렸다.

“깽!”

리자드독이 단말마를 토해내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최재철이 쳐올린 주먹의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그 거체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턱이 박살났음은 당연하고, 뇌까지 충격이 전달되어 곤죽이 되었을 터였다. 즉, 이미 한 번 죽었다.

그 리자드독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고, 최재철은 다시 차원 균열을 향해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죽은 리자드독이 지른 단말마를 듣기라도 한 건지, 세 마리나 되는 또 다른 리자드독들이 컹컹거리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일격씩 먹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주먹으로 머리를 내려쳐 깨버리고, 손날을 뻗어 목을 잘라 버리고, 달려드는 놈의 가죽을 붙잡아 땅에다 메다꽂았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끌어냈나. 구문효, 괜찮겠어?”

최재철이 뒤를 돌아보며 구문효에게 물었다. 최재철이 처리한 리자드독들을 조준해 빛의 화살들을 날리느라 구문효는 즉시 대답하지는 못했다. 오연화가 대신 대답했다.

“재철 님! 뒤요!!”

대답이라기보다는 비명과도 같은 그 외침에도 최재철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는 발만 뻗었다. 빠악! 시원스러운 파공음과 함께 집채만 한 크로코리언이 허공을 날았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연화는 날아올라가는 크로코리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

“……?”

마침 지면으로 낙하하면서 다시 살아난 크로코리언에게 내려 차기를 꽂아 넣으며 최재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발밑에서 크로코리언은 다시 한 번 죽었다.

어보미네이션은 신기한 존재이다. 어떤 방식으로 죽어도 두 번은 되살아난다. 온몸을 채를 쳐놔도 원래 상태로 돌아와 살아나고야 마니, 차라리 깔끔하게 죽이는 게 힘이 덜 든다.

“후.”

그의 발밑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크로코리언의 목을 밟아 목뼈를 부러뜨려 완전히 죽인 그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혼자서 죽여 버리면 훈련이 안 됩니다, 최재철 씨.”

현오준은 최재철이 보여준 퍼포먼스에 놀라기는커녕, 그런 지적을 던져왔다.

“아, 죄송합니다, 팀장님.”

최재철은 사과했다.

“그럼 몇 마리 더 끌어내죠.”

“부탁드립니다.”

현오준의 부탁을 받은 최재철은 다시 차원 균열을 향해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빛의 화살로 리자드독을 간신히 두 번씩 더 죽여 처리한 구문효가 얼빠진 표정으로 최재철과 현오준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

“헉, 헉, 흐윽, 후우……!”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구문효를 보고, 최재철은 발걸음을 멈췄다.

“이쯤해서 한번 쉴까요?”

현오준의 말에 최재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문효는 손을 들어보였지만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만했다. 그는 불과 1시간 사이에 20마리가 넘는 리자드독과 10마리 가까운 크로코리언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참고로 보조 화력 담당인 오연화는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녀는 필요할 때에 S급 랭커답게 화력을 뿜어 상황을 정리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번 훈련 동안 위험한 상황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녀가 할 일도 없어졌다.

어쨌든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이 났으므로, 최재철은 저벅저벅 걸어 헬필드에서 나왔다.

“아니, 형, C급이라는 사람이 지치지도 않아요?”

“너하고는 달리 몸을 쓰니까.”

최재철의 변명 같지 않은 변명에 구문효는 멍하니 몇 초간 그를 바라보다가, 어이없는 듯 이렇게 되물었다.

“…보통 반대 아니에요?”

“아니, 몸을 쓰는 게 어벤저 스킬을 쓰는 것보다는 당연히 덜 지치지.”

“어라, 그건 그러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이해가 확 되네요.”

구문효는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지치면 곤란한데, 차원 균열 안까지 들어갈 거면……. 조금 더 화력을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는 걸 의식하면서 해보는 게 어때?”

“필요한 만큼이요?”

구문효는 눈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최재철의 말이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최재철은 조금 더 쉽게 설명을 해줄 필요를 느꼈다.

“화살을 난사하지 말고, 리자드독의 경우에는 미간에만 한 발 꽂으면 충분하니까. 물론 지금 쏘는 거보다는 위력을 약간 올리는 게 좋겠지.”

“아, 확실히.”

이해가 빠르다. 구문효는 좋은 학생이었다. 최재철의 입가에 미소가 자연스레 깃들었지만, 그는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려 미소를 숨겼다. 아무리 구문효가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지만 그는 최재철의 선배였다. 그를 보며 귀엽다는 듯 흐뭇하게 웃어서 좋을 일이 없었다.

“한 마리 사냥할 때마다 한 발씩만 덜 쏘도록 의식하면서 움직여 봐.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덜 지칠 거야.”

어쨌든 귀여운 학생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더해주고 싶어서, 최재철은 구문효에게 그런 말을 덧붙여주었다.

“알았어요. 어, 근데 형, 마치 이 능력을 사용해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뭐… 일반론이야.”

최재철은 그렇게 변명했지만, 사실 다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팀장님은?”

“아, 저쪽에.”

말을 돌리기 위해 최재철은 현오준을 찾았다. 그러자 구문효가 손가락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지원 병력으로 와 있는 화력지원 부대의 중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현오준이 보였다.

안 그래도 어보미네이션이 자주 출몰하는 이 지역의 부대원들이라 그런지 그들은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휴식을 취하며 현오준 팀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긴장하면 쉽게 지치고, 완전히 긴장이 풀어지면 유사시에 반응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저들은 이미 실전에 익숙한 전사들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도 징병제라 돈도 별로 못 받을 텐데, 잘도…….’

그의 실제 나이와 비교하면 열 살 이상 더 어린 군인들을 바라보며, 최재철은 안쓰러움과 대견함을 동시에 느꼈다.

“자아, 다시 훈련을 시작하죠.”

이야기를 마친 현오준이 다시 최재철과 구문효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구문효의 어깨가 쳐졌다.

“네? 벌써요?”

“지친 모양이로군요. 그럼 이번에는 구문효 씨는 좀 쉬시죠. 대신 이지희 씨!”

“아, 네!”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이지희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이지희 씨가 보조 화력을 맡아주시고, 이번에는 오연화 씨가 주화력을 담당해 주십시오.”

“네!”

“알겠어요.”

이지희와 오연화가 대답하자, 현오준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이번에는 최재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디코이역은 제가 맡겠습니다. 최재철 씨는 이지희 씨와 오연화 씨의 서포트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최재철의 대답을 들은 현오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디코이 역을 수행하기 위해 차원 균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지희는 첫 실전을 앞두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재철은 그런 그녀를 굳이 다독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최하급이나 하급 어보미네이션을 상대로 현오준 팀이 위기에 처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현오준이 멀어져 가자, 오연화가 최재철의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제 진짜 실력을 보여드릴 기회가 왔네요! 오전에는 좀 방심한 것뿐이니까요!!”

그것도 실력이지……. 최재철은 생각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S급 랭커의 능력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러므로 그는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말을 했다.

“그럼 기대해 보죠.”

마침 차원 균열 너머에서 크로코리언 한 마리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현오준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달려드는 크로코리언을 향해 오연화가 손을 내뻗었다.

‘호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최재철은 내심 감탄했다. 오연화가 뻗은 차원력의 덩어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되어 크로코리언의 거체를 움켜쥐었다.

‘염동력 손아귀라, 과연 S급이로군.’

염동력 타입의 어벤저 스킬은 정신 집중이 필요한 탓에 기습에 약하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 더군다나 A급을 초월한 S급인 오연화가 지닌 차원력의 규모라면. 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움켜쥔 순간 크로코리언을 으스러뜨려 절명시킬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손아귀에 붙잡힌 크로코리언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한 번 죽었다. 그 시체를 염동력의 손아귀로 움켜쥔 채, 오연화는 크로코리언의 부활을 기다렸다.

크로코리언이 되살아나자마자 그녀는 다시 주먹을 꽉 쥐었고, 염동력의 손아귀 속에서 크로코리언은 즉사했다. 다시 되살아나더라도 또다시 즉사할 건 빤했다. 최재철의 예상대로, 크로코리언은 마지막까지 오연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다.

“어때요? 재철 님!”

“훌륭하군요.”

“그렇죠? 헤헷.”

“그런데 두 마리를 동시에 잡는 것도 가능한가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원 균열에서 두 마리의 크로코리언이 튀어나왔다. 그 두 마리를 염동력의 손아귀로 잡아채며, 오연화가 대답했다.

“물론이죠!”

최재철도 이건 좀 놀랐다. 보통 염동력 계열의 차원 능력자는 한 점에 집중함으로써 능력을 끌어내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다수의 적에게 다소 무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연화는 두 마리의 크로코리언을 동시에 조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처치해 보였다.

‘오연화가 S급 15위였나. 그럼 이런 어벤저가 14명은 있는 건가.’

오연화의 능력은 당연히 대마법사인 김인수에 비하면 크게 못 미친다. 적어도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만 따지자면 말이다. 오연화와 동급의 차원 능력자가 동시에 20명이 덤빈다고 하더라도 김인수에게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가 15위라면, 10위권 내의 랭커들은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녔을까? 최재철은 입술을 핥으며 생각했다.

‘아니, 아니지.’

김인수는 이계에서 이미 정점에 달했고, 그에 걸맞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긴장감보다는 호기심과 호승심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지구에서도 정점에 달하는 것이 아니다. S급의 랭커들을 하나씩 꺾으며 1위를 차지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아니, 단순한 흥미를 이유로 친다면 그게 이유가 될지도 모르지만 역시 우선순위는 크게 뒤쳐진다.

‘그런 건 복수를 마치고나서 생각해 보자.’

내심 진가규가 S급 1위 랭커를 고용해 줬으면 하는 마음을 슥 접어놓으며, 최재철은 다시 시선을 정면에 돌렸다. 원거리에서 염동력 펀치로 세 마리의 크로코리언을 동시에 패죽이고 있는 오연화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때요? 재철 님?”

능력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계속해서 칭찬을 바라는 그녀의 모습은 나이티를 벗지 못한 어린애였다.

“대단해요, 역시 S급!”

“헤헤헤…….”

세 마리를 상대로 계속 염동력 펀치를 휘두르면서도 최재철의 칭찬을 듣고 헤벌쭉 웃는 걸 보니, 오연화는 아직도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오연화의 모습을 이지희는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능력에 압도당한 것으로도 보였다.

“나오자마자 처리해 버리시니 제가 할 일이 없네요, 연화 씨.”

현오준이 곤란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또 크로코리언 한 놈이 차원 균열에서 기어 나왔다. 현오준은 즉시 뒤로 크게 뛰어 크로코리언을 유도하며 말했다.

“한 마리쯤은 지희 씨에게 맡겨보시죠. 원래대로라면 보조 화력 담당의 임무는 주화력의 빈틈을 메우는 것이지만, 그냥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는 훈련이 되질 않으니까요.”

“아, 네!”

이지희가 화들짝 놀라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차원력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끝에서 굵직한 번개 한 줄기가 뻗어 나왔다. 번개는 곧장 크로코리언을 덮쳤다.

“크르렁!”

번개를 맞은 크로코리언은 큰 타격을 받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쏴! 다시!!”

최재철의 외침에 화들짝 놀란 이지희가 다시 손가락을 쳐들었다. 충격에서 회복한 크로코리언이 이지희를 향해 똑바로 달려들고 있었다.

“꺄악!”

이지희가 비명을 지르며 번개를 쏘았다. 상당히 당황한 듯 그 번개는 빗나가고 말았다. 그 빈틈을 타 달려든 크로코리언의 악어 같은 입이 쩌억 벌어져 이지희의 머리를 노렸다.

“처음에는 다 그렇죠, 뭐.”

오연화가 별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크로코리언은 허공에 둥실둥실 뜬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오연화가 염동력으로 붙잡아 공중에 매달아 둔 탓이었다.

“마무리하세요, 언니.”

“아, 네!”

반말을 쓰기로 했으면서 이지희는 자기도 모르게 오연화에게 높임말을 썼다. 쾅! 조금 전보다 굵은 번개가 크로코리언을 내려찍었고, 마수는 그대로 절명해 버렸다.

“두 번 더요.”

되살아나기 시작한 크로코리언에게 더욱 굵은 번개가 덮쳤고, 이번에는 한 발만으로 크로코리언을 죽일 수 있었다.

“마지막 한 발!”

오연화가 신나서 외친 신호에 맞춰서 이지희는 번개를 내뻗었다. 아마도 이지희에게 있어서는 최대 출력일 번개가 크로코리언을 덮쳤다. 쾅! 어찌나 강력한 번개였던지, 내리쳐진 지면에 잔류전류가 지지직거리며 푸른빛을 번쩍이고 있었다.

“헉, 허억……!”

이지희는 어깨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었는데 아마도 얼굴만 그런 건 아니리라.

이론적으로는 C급 어벤저인 최재철도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크로코리언인지라 이지희는 좀 더 쉽게 처리해야겠지만, 아무래도 경험과 숙련도의 차이는 역력히 드러나고 말았다. 처음치고는 상당히 잘한 편이었지만, 이지희의 표정은 그리 좋지는 못했다.

“지희 씨,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최재철 씨가 이상한 겁니다.”

이지희의 그런 표정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어낸 듯, 현오준은 그런 말을 그녀에게 던졌다.

“맞아요. 재철 님은 진짜 이상하다니까.”

오연화도 그렇게 말하자, 이지희는 어렵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죠? 제가 괜히 스승님으로 모시는 게 아니라니까요!”

“아니, 사람을 앞에다 두고 무슨…….”

최재철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덕분에 이상해질 수 있었던 분위기는 환기시킬 수 있었다. 같이 웃고 있던 현오준이 웃음을 멈추고 다소 진지한 목소리로 이지희에게 물었다.

“지희 씨, 계속 하실 수 있겠습니까?”

“조금만 더,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지희는 의욕을 되찾은 듯 그렇게 외쳤다. 그 말을 들은 현오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더 해보죠.”

“네!”

*

이지희는 오연화의 도움을 받지 않고 크로코리언 한 마리를 처치해 냈다. 그런 성과를 낸 대가로, 그 자리에 제대로 설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무릎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저, 지금, 제 몸에서 냄새날 것 같아요…….”

그래도 정신적으로는 여유를 되찾은 건지, 이지희는 그런 농담을 먼저 던져왔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그녀의 농담을 들은 현오준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이 이상 잡으면 헬기로 옮기지도 못 해요.”

오연화가 툴툴거리며 그런 말을 던졌다. 그도 그럴 만했다. 그들 앞에는 어보미네이션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거야 따로 수송부 인원을 부를 거니 괜찮습니다.”

현오준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리자드독이 서른 마리 가까이, 크로코리언은 열 마리가 훌쩍 넘었다. 어차피 이미 헬기 한 대로는 옮길 수 없는 중량이었다.

“오늘 훈련은 상당히 성과가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정산 금액도 기대하셔도 좋을 테지만, 그보다는 별문제 없이 실전 경험을 쌓은 게 좋군요. 다만, 차원 균열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팀 전체가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을 겁니다. 다음 훈련 계획은 그런 점을 의식하면서 짜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오준이 팀장으로서 오늘 훈련을 자평했다.

“자, 그럼 이만 정리하고 돌아갑시다.”

“네!”

지금까지 푹 쉬고 있었던 구문효의 목소리가 가장 활기찼다. 최재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구문효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차원 균열 쪽으로 휙 돌렸다. 그 행동을 취한 건 최재철뿐만이 아니었다. 오연화도 즉시 반응했으며, 현오준이 한 타이밍 늦게 반응했다.

“뭐, 뭐야?”

구문효가 영문을 모른 듯 같이 차원 균열 쪽에 시선을 던졌다. 완전히 지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이지희도 고개를 들었다.

차원 균열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와!”

그러나 최재철이 벼락처럼 외쳤다. 방금 전까지 디코이 역할을 하느라 차원 균열 쪽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현오준은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땅을 박찼다. 그 순간, 현오준이 지금까지 서 있던 지점의 땅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파였다.

“연화 씨!”

“네!!”

현오준의 외침에 오연화가 즉시 염동력을 내뿜어 적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그 염동력의 일렁임을 보고 그제야 구문효가 적의 정체를 깨달은 듯 외쳤다.

“인비지블 비스트!”

그렇다. 투명 마수다. 자신의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능력을 갖춘 마수. 투명 마수는 능동적으로 차원 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A급 어보미네이션이다.

‘지구에서는 인비지블 비스트라고 하는 모양이로군. 별로 다르지는 않네.’

최재철은 속 편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투명 마수의 능력이 단순히 몸을 투명하게 만들 줄 아는 게 전부였다면 A급 판정을 받지도 못할 터였다.

투명 마수의 모습은 두 배쯤 큰 거대한 표범 같다. 표범과 가장 다른 점은 등에 흡판이 달린 네 개의 촉수를 갖고 있어서 이걸 채찍처럼 날려서 공격하거나 멀리 있는 먹잇감을 낚아챈다.

원래부터 대형 고양잇과에 비견될 만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차원력으로 이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갖고 있다. 그 구조상 별 위력이 없어야 하는 촉수로 치명적인 공격을 가해올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금 전, 현오준이 서 있던 곳의 땅을 보면 그 위력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지뢰라도 폭발한 듯 사람 머리통만한 구덩이가 패여 있었다. 인간이 맞으면 몸에 저 구덩이가 생기리라.

‘최재철의 능력으로 저걸 처치하는 건 무리야.’

투명 마수는 자신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긴 촉수로 멀리서부터 사냥감에게 생채기를 낸 후 빈틈이 보이면 단번에 달려들어 물어뜯는 공격을 특기로 하며, 위협을 느끼면 그 자리에 실체가 있는 분신을 남겨두고 도망친다.

그 자체로 강력하기도 하지만, 경계심과 겁이 많아 사냥하기 까다로운 마수로는 첫 손가락에 꼽힌다. 겁을 줘서 쫓아내는 것 정도는 지금도 가능하지만, 일단 차원 균열에서 기어 나온 투명 마수가 다시 차원 균열로 돌아갈 리가 없다.

도망치게 내버려 두면 반드시 큰 인명 피해를 낼 터였다.

‘잡아야 해!’

최재철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행히 여기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다. A급인 현오준에 S급인 오연화도 있었다. 최재철은 비록 C급이지만, 차원 마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갑자기 각성했다고 치자.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정체를 숨기는 것보다는 투명 마수를 처치하는 게 중요하다. 최재철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연화 씨!”

“꺄악!!”

현오준이 놀라서 오연화에게 달려들었다. 오연화는 비명을 질렀다. 현오준이 오연화와 투명 마수의 사이를 끼어들어 공격을 대신 막아주었다. 현오준은 다행히 차원력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한 덕에 별 피해를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투명 마수가 비릿한 미소를 짓는 것이 최재철에게는 보였다. 본래대로라면 보이지 않았어야 했겠지만, 투명 감지 능력을 기본적으로 활성화시키고 있는 덕이었다.

저 미소는 투명 마수가 현오준 팀의 전체보다 자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기에 지은 것이리라.

무리도 아니었다. 아무리 오연화가 S급이라지만 기습에 약한 염동력 차원 능력자라, 투명화로 몸을 숨기고 촉수로 원거리에서 기습을 하는 게 특기인 투명 마수와는 상극이었다.

투명 마수의 눈이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가장 강한 차원력을 지닌 적이 염동력으로 자신을 완전히 막아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투명 마수는 다수의 차원 능력자를 상대로도 사냥할 생각을 굳혔다.

그 목표물은 여기서 가장 약한 최재철이었다.

‘나만 낚아채고 빠질 셈이로군.’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기는 했다. 최재철이 김인수라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차라리 잘 됐어. 그럼 최재철의 능력으로도 어떻게든 대응이 가능하겠는데?’

자신을 휘감기 위해 날아오는 촉수를 피하며, 최재철은 생각했다. 그가 촉수를 피하자 투명 마수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저 괴물에게 지성과 감정이 있다는 증거였다.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투명 마수는 이번에는 두 개의 촉수를 내뻗었다. 하나는 똑바로, 다른 하나는 땅을 훑으며. 그걸 본 최재철은 지면을 탕, 하고 찼다. 그의 몸이 쏜살처럼 투명 마수를 향해 날았다. 투명 마수가 놀라서 대기시켜 둔 다른 두 촉수를 급히 내뻗는 것이 보였다.

놀랄 만도 했다. 여기서 가장 미약한 차원력을 지닌 상대가 투명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간파하고 공격마저 피하는 데다 도망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을 향해 달려드니 말이다. 그래도 아직 마음속에 빈틈이 남은 건지, 도망칠 생각은 없어보였다. 최재철에겐 다행이었다.

최재철은 다시 한 번 땅을 박차 몸의 방향을 크게 틀었다. 그러면서 외쳤다.

“오연화! 붙잡아!!”

투명 마수는 네 개의 촉수를 모두 뻗었다. 그 말인즉슨, 오연화가 투명 마수의 공격을 대비할 필요 없이 모든 집중력을 공격하는 데 투자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거대한 염동력의 손아귀가 투명 마수를 향해 날았다. 투명 마수는 놀라서 뒤로 뛰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붙잡았다!

크로코리언도 으스러뜨리는 염동력의 손아귀로 투명 마수의 숨통을 끊기 위해 오연화는 집중했지만, 차원력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투명 마수의 몸은 그리 쉽게 으스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주어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을 본 현오준이 외쳤다.

“구문효! 이지희! 쏴!!”

“어, 어디요?!”

두 사람에게는 투명 마수의 모습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게 정상이다.

최재철은 몇 분 전에 잡은 크로코리언의 시체로 다가가 그 목을 확 뜯어내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크로코리언의 머리에서 시커먼 혈액이 뚝뚝 떨어졌다. 최재철은 그 목을 투명 마수에게 휘둘러 피를 끼얹었다. 그 피도 투명 마수에게 닿자마자 투명해져 버렸지만, 부자연스러운 윤곽이 그 자리에 남았다.

더 이상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아아아압!”

구문효의 최대 출력 빛의 칼날이 투명 마수에게 날아들어, 그 목을 잘라 버렸다. 꿈틀거리던 투명 마수는 곧 절명해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난 것은 아님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지희!!”

“네!”

이지희의 전력을 다한 번개가 투명 마수에게 내려 꽂혔다.

쾅!

되살아난 투명 마수의 몸에 전격이 작렬했다.

이지희의 뇌전은 비록 위력이 모자라 움직임을 멈추게 만드는 데 그쳤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더 이상 반항을 하지 못하는 투명 마수의 몸이 이미 염동력의 손아귀에 의해 우그러뜨려지고 있었으니까.

“잘 하셨습니다!!”

현오준이 팀원들을 칭찬하며, 투명 마수를 향해 직접 몸을 날렸다.

“끄압!”

현오준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투명 마수를 향해 발을 뻗었다. 마지막 목숨을 가지고 버둥거리는 투명 마수의 머리에 현오준의 후려차기가 정통으로 꽂혔다. 괜히 A급 신체 강화 능력자가 아닌지라, 그 일격으로 투명 마수의 머리가 터져 버렸다.

“후우우우!”

긴 호흡을 내뿜으며 자세를 가다듬은 현오준. 그와 동시에 쿠당, 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 마수의 시체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저 멀리서 와아! 하는 감탄사가 터졌다. 화력지원을 위해 헬필드 바깥에서 대기하던 군인들이 구경하다가 내지른 탄성이었다.

이제까지 투명했던 투명 마수가 죽으면서 그 모습이 드러나, 그들의 눈에는 현오준의 일격에 허공에서 갑자기 시체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군인들의 환호성을 들은 현오준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었다.

*

와우산 주둔지로 돌아가는 군인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도 그럴 만했다. 이렇게 대량의 어보미네이션을 한 번 끌어다 내어놓으면 차원 균열 주변도 당분간은 조용할 테니 말이다.

실제로 마지막 크로코리언을 끌어올 때, 현오준은 차원 균열에 손을 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가야 했다.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경계심이 많아 차원 균열 바깥으로 좀처럼 나오지 않는 투명 마수까지 나왔을 정도니, 아마 차원 균열 너머의 경계 부근 어보미네이션은 거의 다 나왔을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만큼 예기치 않은 어보미네이션의 등장도 줄어들 테니 주둔지 병사들의 수고와 위험도 줄어들 터였다. 더욱이 아무리 징병제라지만 이런 목숨을 건 임무에는 작은 액수나마 국가에서 생명 수당이 나오는데, 오늘은 아무 위험 없이 임무를 완료했으니 소소하게라도 PX에서 냉동식품이라도 돌려먹을 수 있으리라.

‘연초도 이제 자기 돈으로 사다 피워야 한다던데, 에휴. 불쌍한 것들.’

사실 담배 보급이 끊긴 건 10년도 전의 일이다. 그래도 김인수 본인은 그전에 군 복무를 완료한 데다 요 10년간 이계에 있었으니 새삼스럽지만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최재철은 군인들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면서도, 그래도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약간은 뿌듯해했다.

“그러고 보니 문효는 군대 언제 가?”

최재철은 생각난 김에 곁에 있던 구문효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구문효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아, 형, 저한테 왜 그러세요. 저 방산이에요.”

“방산?”

너무 의외인 대답이 돌아와서 최재철은 그렇게 되묻고 말았다. 물론 방산이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모르지는 않는다. 그가 서울에 있었을 때도 방산, 방위산업체 대체 복무라는 시스템은 있었으니까.

“네. 방위산업체 모르시진 않죠? 어벤저가 차원 균열 관련 산업체에 일정 기간 종사하면 군 복무가 면제돼요. 물론 어벤저 B급 이상 라이센스가 필요하고 방산 기간 동안은 돈도 얼마 못 벌지만……. 뭐, 그래도 군대 가는 것보다는 낫죠!”

최재철은 활짝 웃는 구문효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문효야.”

“네, 형.”

“한 대만 때려도 되겠니?”

최재철의 표정을 보며 마주 웃고 있던 구문효의 표정이 갑자기 확 굳어졌다.

“…설마, 형……. 군대 다녀오신 거…….”

최재철은 말없이 웃으면서 주먹을 쥐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C급……. 으아, 으아아아!”

구문효의 비명이 와우산에 울려 퍼졌다.

*

최재철은 오늘 하루만에 1억 2천만 원을 벌었다. 연봉의 절반을 넘는 금액이다.

첫 출근 날 이걸 다 벌었다고 한다면 다른 업계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을 터였다. 아니, 최재철은 몰랐지만 아무리 어벤저 업계라고 해도 그냥 순수 어보미네이션 사냥만으로는 이 정도로 많이 벌지는 못한다.

물론 오늘 투명 마수를 포함해 꽤 많은 어보미네이션을 사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좀 큰 금액인 것 같아 현오준 팀장에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 디코이의 임무 공헌도가 가장 높게 잡힙니다. 그러니 가장 많은 돈을 가져가는 것도 최재철 씨가 되어야겠죠.”

보통 한국 기업에서 그러듯 연공서열로 팀장이 가장 많은 돈을 가져갈 줄 알았던 최재철은 다시 한 번 외국계 기업의 문화에 감동해야 했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임무 수행을 지켜본 건 현오준 팀의 팀원들과 군인들 정도고, 외부인들이 팀의 정산 배분을 알 리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오준이 임무 공헌도를 임의로 정산해도 아무도 뭐라고 못 할 터였다. 그러니 이건 그냥 현오준 팀장의 재량이라고 봐도 되었다.

‘이 사람, 첫인상하고는 많이 달라 보이는군.’

처음 면접 때는 그냥 멋모르고 자기 실력을 과신하는 애송이로 보였는데, 오늘 지휘하는 것도 그렇고 팀원들을 대하는 모습도 그렇고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팀장 같았다.

다들 기피한다는 차원 균열 내부 탐사 임무를 목적으로 꾸린 팀에 S급과 B급의 인재가 괜히 배속된 건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예상 외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게 전부 최재철 씨 덕분입니다.”

현오준이 말했다. 다소 낯간지러운 말인지라 최재철은 손을 내저었다.

“전부 제 덕분이라는 건 너무…….”

“아뇨, 따지고 보면 이지희 씨가 저희 팀에 들어오시게 된 것도 최재철 씨 덕분이니까요. 애초에 다섯 명의 팀이 꾸려진 것 자체가 최재철 씨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오준은 묘하게 딱 잘라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애초에 제가 S급 랭커가 있는 팀에 들어오게 된 게 팀장님 덕분이죠. 감사를 드려야 할 건 오히려 제 쪽입니다.”

최재철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팀장님, 애초에 ‘우리 팀에 S급 랭커가 있다’고 말씀하셨으면 훨씬 쉽게 팀이 만들어졌을 텐데 제게 그런 말씀을 안 하신 이유가 뭡니까?”

“오연화 씨께서 그런 말은 뿌리고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셔서요.”

현오준은 헛웃음을 섞어 말했다. 아마 농담은 아닐 것이다.

*

퇴근 시간이 되었다.

‘팀장의 성격이라면 회식 같은 게 있겠지. 아니면 저녁 늦게까지 훈련을 하든가…….’

최재철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회식도 야근도 없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대접할 때는 달랐지만, 어쨌든 명목상으로 제가 팀장이고 최재철 씨가 팀원이 되어버린 이상 회식은 야근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아쉽지만 식사는 내일 점심 때 같이하는 걸로 하지요.”

현오준은 내심 회식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회사 내규로 그렇게 정해진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논리의 이야기를 듣고, 최재철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이게 외국계 회사인가. 회식에는 당연히 전원 참석을 해야 하고 야근 수당은 사측에서 삥땅치는 게 당연했던 10년 전의 그가 다녔던 회사와는 기본 마인드부터가 달랐다.

참고로 업무 시간 동안은 차원 균열 탐사에 앞서 팀장 현오준의 브리핑이 있었다. 차원 균열 탐사에 필요한 장비나 다른 지원용 물품 등은 사측에서 준비해 주니 지시 사항에만 잘 따르면 된다는 그 브리핑은 최재철을 한층 더 놀라게 했다.

예전 경험에 따르면 장비는 당연히 자신이 준비해야 했었다. 이런 거 하나하나에 놀라는 게 좀 촌스럽다는 건 그도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놀라운데 어쩌란 말인가.

어쨌든 차원 균열 탐사에 앞서 몇 차례에 걸친 합동훈련을 진행해야 하고, 그동안은 출근을 해야 한다. 임무가 없으면 쉬어도 된다는 다른 어벤저 팀과 달리 차원 균열 탐사 팀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됐네. 시간이 생겼어.”

업무 시간을 끝난 후, 최재철은 그렇게 이지희에게 말을 걸었다.

“네?”

“나한테 시간 있냐고 묻지 않았어?”

“아, 네. 그러고 보니…….”

“생겼어.”

“아…….”

최재철의 말에 이지희는 어째선지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렸다.

“뭐예요, 언니? 지금 재철 님한테 데이트 신청하시는 거?”

오연화가 불쑥 상반신을 내밀며 이지희를 놀려대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는데요?”

“아니야, 난 그냥…….”

뭐라고 항변을 하려다가, 이지희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우물거리고 말았다.

“연화야, 우리 데이트할까?”

대화가 끊긴 틈을 타, 구문효가 끼어들었다.

“거긴 닥쳐요, 좀.”

오연화는 구문효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차가운 오연화의 태도에 구문효의 어깨가 축 처지고 말았다. 그걸 조용히 보고 있던 현오준이 구문효에게 제안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구문효 씨. 저랑 데이트 좀 하죠.”

“엥? 팀장님, 어째서?”

구문효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걱정 마십시오, 야근 수당은 나올 겁니다.”

“어째서!”

“같이 훈련이나 좀 하다 가시죠.”

“아, 데이트란 게 그쪽이었군요.”

구문효의 얼굴에 명백한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현오준은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싫으시다면 억지로 시킬 수는 없죠. 하지만 팀 내부에서 주된 화력 담당인 구문효 씨의 기량은 팀의 전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알았어요. 하면 되잖아요!”

이미 자주 있는 일인 건지, 구문효는 쉽게 포기하고 그냥 현오준과의 훈련을 택했다.

“그런데 팀장님이 야근을 하시는데 저희만 빠지는 건…….”

구문효와 현오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지희가 그들의 눈치를 보자, 현오준이 웃으며 말했다.

“팀장으로서 야근 수당을 너무 많이 지출하는 건 인사고과에 영향을 미칩니다. 세 분은 먼저 퇴근하시죠. 어차피 내일부터 질리도록 할 훈련입니다.”

“네, 그럼 저희는 퇴근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한 번 훗, 하고 웃은 오연화는 다시 최재철과 이지희 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데이트가 아니면 저도 같이 따라가도 되나요?”

“아, 물론!”

예상 외로 이지희가 고개를 쉽게 끄덕이자, 오연화는 재미없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야, 진짜 데이트 아니에요?”

“아니야.”

“그럼 뭐예요?”

“그, 글쎄.”

이지희는 오연화의 시선을 피했다. 오연화는 이지희를 지켜보다가 최재철에게 물었다.

“저 진짜 따라가요?”

“네, 뭐, 지희가 괜찮다면야. 그보다 우리 어디 가는 건데?”

“어… 저희 집이요?”

이지희의 대답에 사무실 안에 침묵이 자리 잡았다. 이지희는 반응이 왜 이런 건지 짐작도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네, 뭐, ‘그런 거’라면 저더러 따라오라고 하지도 않겠죠.”

오연화는 툴툴대듯 대꾸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미성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뭔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요, 그럼. 우리 같이 지희 언니 집 구경이나 하러 가요, 재철 님.”

*

세 사람은 회사 건물을 나와 몇 분간 말없이 걸었다.

“자아, 그럼 슬슬 말해줘. 용건이 뭐지?”

최재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가 무안한 듯 얼굴을 붉혔다.

“벼, 별거 아닌데. 민폐일 수도 있는 거예요.”

“민폐인지 아닌지는 내가 직접 듣고 결정하지.”

“저, 그게…….”

이지희는 다시 망설였다. 최재철은 인내심을 갖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오연화도 이지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말이다.

“멈춰.”

지하철역으로 가는 지름길인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말없이 걷던 세 사람 앞을 막아서는 남자들이 있었다.

근육질에 머리를 짧게 밀고 이런 저녁 시간에 선글라스를 낀 데다 정장을 맞춰 입은 그들의 인상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그쪽 사내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이지희의 표정이 무너졌다.

“야, 꺼져. 우리가 볼일이 있는 건 그쪽 여자다.”

리더로 보이는 정면의 가운데 선 남자가 최재철에게 턱짓을 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정면에 셋, 후방에 둘인가. 모두 어벤저는 아니로군.”

“뭐?”

최재철의 혼잣말을 들은 남자의 안색이 바뀌었다. 덤으로 오연화도 헉하고 놀라는 소릴 냈다.

최재철이 어려운 걸 한 건 아니었다. 기척을 알아채는 데는 아티팩트나 어벤저 스킬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그 기척에 차원력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으니, 완전히 자신의 능력을 숨길 수 있는 고위 차원 능력자가 아니라면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상대가 차원 능력자라면 이런 식으로 나올 이유가 없었다. 김인수는 최재철로서의 옅은 차원력을 자연스럽게 흘리고 다니고 있었다. 만약 그를 적대시하는 차원 능력자라면 능력으로 먼저 공격하거나 차원력을 뿜어 위협했지 복장이나 숫자로 위협하려고 들지는 않았으리라.

오연화가 놀란 이유는 좀 신경 쓰였지만, 이 정도는 C급 차원 능력자라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고 최재철은 판단했다.

“설마, 너… 어벤저인가?”

상대는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 건지, 그런 말을 던져왔다. 상대가 어벤저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능력은 같은 어벤저가 아니면 갖추기 어려운 것이기는 할 테니, 그의 판단은 틀리지는 않았다.

‘괜찮군.’

상대가 눈치 없는 놈이라면 도리어 이쪽이 피곤해진다. 어느 정도 상식적인 사고 능력을 지닌 상대인 편이 오히려 최재철에게는 유리했다.

“내가 어벤저인 게 중요한가? 여기 CCTV가 없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은데. 일부러 이런 곳을 노려서 접근해 온 걸 보면 별로 떳떳한 놈들은 아닌 것 같군.”

최재철의 말을 들은 남자는 골치가 아파진 듯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대기 시작했다. 남자의 부하들도 불안한 듯 눈치를 보고 있었다. 뒤에 있는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그 여자가 뭐 하는 여자인 줄 알기나 해?”

결국 남자는 대화로 해결을 보려고 생각한 건지, 최재철에게 그런 말을 던졌다. 사정을 모르면 끼어들지 마라, 이건가.

하지만 최재철은 별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당당하던 여자가 바들바들 떨면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걸 보면서도 쉽게 자리를 비켜줄 정도로 정이 없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벤저잖아.”

“헉, 어벤저?”

최재철의 대답에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보아하니 저들은 이지희가 어벤저가 된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무려 B급 어벤저님이신데도 모르는 걸 보니, 별로 정보력이 좋은 단체 소속은 아닌 듯 보였다.

“몰랐던 모양이로군?”

최재철의 대꾸에 남자는 발끈해서 외쳤다.

“어벤저래 봤자! 총 맞으면 뒈지는 건 똑같잖아!”

“멍청한 놈들이로군. 그래서 지금 너희가 총을 갖고 있나?”

“…….”

남자는 침묵해 버렸다. 설령 이들이 총을 갖고 있다 한들, 그는 충분히 제압해 낼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불과 C급 어벤저인 최재철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거였고, 그래서 이들에게 총이 없는 건 사실 다행이었다.

“꺼져.”

“두, 두고 보자!”

남자들은 그런 말을 남기고 도망쳐 버렸다.

“고전적인 놈들이로군.”

최재철은 코웃음을 쳤다. 이지희는 남자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완전히 상황이 끝난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며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저거였어요? 우리랑 같이 집에 가자고 한 이유가.”

오연화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질문에 이지희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오연화가 놀라며 이지희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언니? 괜찮아요?”

“많이 놀란 모양이로군.”

최재철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어디 앉을 곳으로…. 카페가 좋겠어. 일어설 수 있겠어?”

“아, 네. …네.”

이지희는 대답하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그녀의 무릎은 풀린 채였다.

‘하는 수 없군.’

최재철은 그녀를 들어다 자신의 등에 업었다. 그녀는 순순히 업혔다. 그녀의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마치 천적을 만난 토끼 같은 반응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오연화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얼른 가죠.”

*

여자를 업고 시내를 걷는다는 건 생각 외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최재철은 그냥 덮어놓고 가장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됐어요, 이제. 내려주세요.”

“아, 그래?”

다행이로군, 이라고 말을 잇지는 않았다. 얼굴을 보니 좀 붉어져 있는 게 여기까지 업혀온 것도 꽤나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네요.”

“아니, 이제부터 물어볼 건데.”

“네?”

“아, 메뉴.”

“에스프레소…….”

“말고.”

“…딸기 스무디요.”

망설임 끝에 대답한 그녀는 멋쩍은 듯 웃었다.

“전 딸기 파르페요. 재철 님이 사주시는 거죠?”

거기에 오연화가 뻔뻔하게 말했다. 그 말에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뭐. 나보다 연봉이 적어도 다섯 배는 높을 거 같은 S급 랭커한테 먹을 걸 사주는 것도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거 같은데.”

“아, 치사하게! 게다가 저 연봉 그렇게 안 높아요. 방산이라서…….”

오연화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단어에 최재철은 표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엥? 방산? 미성년에 여자애인데?”

“법이 바뀌었어요. 어벤저에 여자고 남자고 어린애고 없다면서……. 어벤저는 전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돼요. 아마 지희 언니도 그럴 걸요?”

“아, 응. 맞아요.”

이지희가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 때문에 훈련소 끌려가서 4주 훈련까지 받았다니까요. 그것도 어벤저용 특별 코스로!”

하기야 어벤저는 그 업무 특성상 전투 능력을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데다 임무 중 군대와 연계하는 일도 잦다. 오늘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4주간의 군사훈련은 필수라고 봐도 됐다. 확실히 여자나 어린애라는 이유로 훈련을 안 받게 할 수는 없다.

훈련을 시키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그 후에도 방산으로 묶이는 건 좀 이상했다. 관련 업계에서 로비라도 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복무 대체라는 명목으로 고급 인력을 아주 싼 값에 부려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로비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런 뒷사정이야 어쨌든 그렇다면 결국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어벤저는 이미 군 복무를 마치고 정상적인 계약을 맺은 최재철이 된다. 더군다나 오늘 임무에서도 디코이 보정을 받아서 가장 높은 배당금을 가져온 것도 있다.

“그럼 사줘야겠군.”

“네, 사주세요!”

최재철의 혼잣말에 오연화가 나이에 걸맞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웨이트리스를 불러 주문을 마치고나자, 다시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한 상태가 되었다. 카페에서는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자, 최재철이 주문한 더치커피에 이지희가 주문한 딸기 스무디, 그리고 오연화가 주문한 딸기 파르페가 나왔다. 이지희는 스무디 잔을 붙잡더니 꽂혀 있던 빨대를 빼버리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전 소속사 사람들이에요.”

딸기 스무디를 단숨에 반쯤 마셔 버린 후에나 그녀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아까 그 남자들? 조폭이 아니라?”

“네…….”

이지희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저, 아이돌이었어요.”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제껏 흘린 단어들을 종합하면 말이다.

“아이돌! 언니가요? 아, 과연!”

그러나 오연화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곧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이지희는 그런 오연화의 반응을 쓴웃음을 지은 채 바라보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반도 냈고, 행사도 뛰어봤고, TV… TV에는 못 나가봤네. 음반은 별로 안 팔렸어요. 하지만 행사는 자주 나갔죠. 아주 많이…….”

백화점 옥상에서, 슈퍼 앞에서, 안경점 앞에서 그녀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얼굴과 이름을 알릴 수 있다고 믿으며, 처음에는 다들 이렇게 시작한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그녀는 작고 볼품없는 무대 위에서 자신들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미소 지었다.

“제가 예쁘잖아요.”

“네, 사실 예쁘죠.”

농담처럼 꺼낸 이야기에 오연화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희 입장에서는 좀 뻘쭘해진 건지 얼굴을 좀 붉혔다.

“사실 전 노래에도 자신이 있었고, 춤도 잘 췄어요. 몸매… 몸매야, 뭐, 그래요, 뭐. 지금은 관리 안 해서 이런 거예요.”

“그게요?”

“아니, 이게 아니라.”

오연화 탓에 자꾸 분위기가 이상해지니 이지희는 손을 내젓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쨌든 전 자신이 있었어요. 외모 되고, 노래 되고, 춤 되는데 안 뜰 리가 없다고…….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더라고요.”

수다쟁이처럼 떠들던 그녀의 눈가에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저희 팀이 뜨기 위해서는 제가 뭔가를 더 지불해야 했어요.”

그녀는 ‘뭔가’가 뭔지 설명하지 않았다. 최재철도 묻지 않았다.

오연화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거슬릴 정도로 대꾸를 던져왔던 것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짐작하고 있는 거려나.

최재철은 굳이 추측하려 하지 않았다. 이지희의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전 그걸 거부했죠. 그래서 모든 게 망가졌어요.”

울음 탓에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그녀는 말했다.

“그동안의 노력도, 품어왔던 꿈도. 소중하게 생각했던 팀원들… 사장님, 프로듀서, 매니저, 스탭 분들……. 친했는데 절 비난하더라고요. 제가 치러야 할 것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 망한 거라고…….”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하는 이지희를 바라보며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오연화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최재철은 무시했다.

“그렇게 궁지에 몰린 거로군.”

“…네?”

최재철의 반응이 의외이기라도 했던 건지, 이지희는 눈물마저 멈추고 멍하니 최재철을 바라보았다. 최재철의 말은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계약을 했고.”

“아…….”

그제야 그녀는 최재철이 무슨 이야기를 한지 알아들은 건지 눈을 크게 떴다.

최하급 계약마와의 계약, 그리고 어벤저로서의 각성.

사실 모든 어벤저가 계약마와의 계약으로 어벤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아무 이유 없이 능력에 각성하는 사례도 드물게 있고, 다른 어벤저의 장기를 이식받아서 차원력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도 많은 경우의 수가 있긴 있었다.

그러니 최재철의 발언은 넘겨짚기였다. 그리고 그 넘겨짚기는 잘 통했고, 최재철은 이지희가 계약으로 어벤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옆에서 오연화가 놀라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최재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재미있었지만, 그는 그녀의 시선을 굳이 못 본 척했다. 대신 그는 이어서 해야 할 말을 했다.

“용케 놈들에게 먹히지 않았군.”

“그야…….”

이지희는 티슈로 눈물을 닦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불공정 계약에는 이력이 났으니까요.”

연예 기획사와 연습생 사이의 불공정 계약은 이미 뉴스로도 여러 번 났을 정도로 흔한 사례였다. 뉴스로 나왔음에도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절망적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하급 계약마들의 지능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고, 상대가 ‘어떤 식으로’ 궁지에 몰렸는지도 모르고 그냥 냄새만 맡고 몰려든 것이었을 터였다.

이지희는 궁지에는 몰렸지만 당장 힘이 필요할 정도로 다급한 건 아니었고, 그래서 충분히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그 끝에 이지희는 훌륭하게 계약마를 속여 먹였고, B급 어벤저의 능력을 얻어냈다.

최재철과는 달리.

김인수가 아닌 진짜 최재철과는 달리, 말이다.

옛 동창들에게 끌려 나와 집단 린치를 당하느라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어보미네이션이 되어버린 진짜 최재철을 생각하면, 그는 딱히 이지희에게 동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꿈을 포기하고 어벤저가 된 건가?”

“네, 뭐.”

그런 그의 다소 뚱하기까지 한 반응에 이지희는 그게 마치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별로 동정해주시지는 않네요.”

“동정? 내가 왜?”

이지희에게서 나온 의외의 말에 최재철은 눈을 깜박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발언이었다.

“넌 B급 어벤저고 나는 C급 어벤저야. 누가 누굴 동정해?”

이번에는 이지희가 눈을 깜박일 차례였다. 사실 그의 진짜 정체인 김인수는 B급이고 A급이고 상관없는 존재였지만, 여기선 그런 걸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최재철로서 말했다.

“과거야 어쨌든 넌 어벤저가 됐잖아. 네가 직업에 대해서 자각을 좀 가지는 게 어때?”

“자각이요?”

“그래, 자각. 넌 힘을 가졌어. 넌 강해. 그런데도 그런 식으로 비참해하는 건 궁상일 뿐이야.”

“구, 궁상……!”

최재철이 꺼낸 단어에 충격이라도 받은 듯, 이지희는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최재철은 이쯤에서 공격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방금 전 같은 경우도 그래. 상대는 모두 일반인이었어. 물론 넌 어벤저니 그치들을 죽여 버린다면 네가 법적으로 불리한 상황에는 놓이겠지. 하지만 그치들은 절대 널 협박하거나 먼저 덤벼들 수 없어.”

최재철은 충격 받은 이지희를 앞에 두고 자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왜? 네가 더 강하니까. 오늘은 내가 구해주긴 했지만, 사실 구해줄 필요도 없었어.”

“하, 하지만 무서웠어요.”

이지희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 네가 무서워하는 광경은 꽤나 재미있었지. 큰 개가 어린 고양이를 두려워하는 것 같더군.”

최재철의 신랄한 비유에 이지희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런 그녀에게 최재철은 굳이 한 마디를 더 꽂았다.

“넌 네 강함을 좀 더 자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아, 아아…….”

알아들은 건지 어떤 건지, 이지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힘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각이 늦은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강함과 상대의 강함을 재단하는 능력은 엄청나게 중요해. 익혀두는 게 좋을 거야.”

이지희의 변화하는 표정을 보며 최재철은 자신이 다소 너무 세게 말했나 고민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럴 필요는 없었다.

“네, 스승님!”

방금 전까지 받은 충격은 어디로 간 건지, 이지희는 당당히 대답했다.

“그리고 뭐, …너한테 희생을 강요하는 놈들에게 희생해 주지 못했다고 책임감을 느끼는 건 내가 생각하기론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건 그렇네요. 아, 근데 지금 건 위로 맞나요?”

그녀의 눈매 끝에는 아직도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과거의 상처나 아픔은 더 이상 그녀를 구속하지 못할 테니까. 다시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통통 튀는 장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동정이야 안 하지만 그래도 우는 여자한테 위로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한 마디 정도가 아니었는데요.”

계속 놀리려드는 이지희에게 최재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하지 말걸 그랬어.”

“아하하, 아니에요. …고마워요.”

“…뭘.”

그런 대화가 오간 후, 어째 미묘한 침묵이 몇 초간 자리를 지배했다.

“파르페 맛있네요.”

오연화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가득 퍼 올리면서 말했다. 뭔가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듯, 그녀의 표정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재철은 그녀에게 그걸 여기서 캐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다행이네요.”

대신 최재철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 그의 대꾸에 오연화는 입을 크게 벌리고 아이스크림을 우물우물 먹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잘 보니 그녀는 어느새 파르페를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같이 먹을 때는 입이 짧은 게 아닐까 했는데, 디저트를 먹을 때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걸 본 이지희도 지금 와서 스무디 컵에다 다시 빨대를 꽂고 쪽쪽 빨기 시작했다. 어째 다 음료에 손을 대는 분위기라 최재철도 더치커피 잔에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최재철은 이지희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결국 오늘 나한테 볼일이란 건 뭐였어?”

“아, 그거 방금 전에 없어졌어요.”

“없어지다니?”

“괴한들이 제 주변을 어슬렁거려서 무섭다는 말씀을 드릴 생각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이거로군?”

“네!”

이지희는 만면의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꽃과 같이 웃는 그녀는 확실히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럼 오늘 지희 언니 집에 가는 건 어떻게 된 거예요?”

“그, 그건 취소할래.”

오연화의 말에 이지희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대화도 오갔던 것 같다. 이지희의 대답에 오연화는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아, 그럼 저녁밥을 제가 쏠게요. 밥이나 먹으러 가요.”

“연화가? 어째서?”

“그거야, 뭐.”

오연화는 왼손 검지 끝으로 뺨을 긁으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전 S급 랭커니까 B급인 지희 언니한테 동정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요?”

*

이지희가 남자한테 업혀서 가는 걸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전 기획사 실장, 김현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지희가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멍하니 있던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장님, 실패했습니다.”

김현직 실장은 불호령이 떨어질 걸 알면서도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전화로 보고라도 해둬야 사장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수습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쪼인트 한 대 걷어차이는 걸로 끝나느냐, 개같이 굴러다니며 밟히느냐의 차이다.

-너 이 새끼, 죽고 싶냐! 어!!

아니나 다를까, 격노한 사장의 고함 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3분 동안 온갖 욕설의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사장의 욕설은 사람의 약점을 찌르는 구석이 있어서 듣고 있자면 울고 싶어질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안 들을 수는 없다. 듣고 있냐고 물었을 때 1초 안에 ‘네’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욕먹는 시간만 늘어날 뿐이었으니까.

-변명이라도 듣자. 왜 실패했냐?

“이지희가 어벤저로 각성했습니다.”

김현직 실장은 급하게 말했다. 변명할 수 있을 마지막 기회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의외로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어벤저로 각성했다고?

“예.”

김현직은 이지희가 부러웠다. 자기도 어벤저로 각성만 한다면 이딴 기획사 따윈 때려치우고 만다. 그런 생각에 어벤저 적성 시험을 한 번 받으러 갔었지만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적성이 없었다.

-김현직 실장.

사장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김현직은 긴장하며 대답했다.

“예, 사장님.”

-우리의 사훈이 뭐냐.

“열심히 살자, 입니다.”

대외적으로는 그랬다.

-그거 말고, 새끼야.

아니나 다를까, 사장은 ‘진짜 사훈’을 요구해 왔다. 김현직은 진저리를 쳤다. 그나마 영상통화가 아니라서 진저리를 친 게 들키지 않은 것만이 다행이었다.

“…최고의 고객에게 최고의 여자를, 입니다.”

사장은 김현직의 대답이 늦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욕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더 듣기 싫은 소릴 늘어놓을 터였다. 그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그래. 우린 그걸 모토로 이 바닥에서 자리 잡았다. 우리가 이만큼 큰 것도 다 고객님들 덕택이야. 너도 잘 알지?

“예, 사장님.”

꾸벅꾸벅. 김현직은 듣기 싫은 소릴 고개를 숙여가며 들었다.

-그리고 그 최고의 손님, 어? 어떤 분인지 너도 알잖냐, 실장아. 그 우리 최고의 손님께서 이지희에게 꽂혔어요. 그럼 말이다, 우리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대령해 드려야 하지 않겠냐?

“그렇습니다, 사장님.”

참자. 참아야 한다. 김현직은 속으로는 그렇게 되뇌며 입으로는 대답을 잊지 않았다.

-알면 수단 방법 가리지 마라.

순간적으로 김현직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예?”

-귀에 좆 박았냐, 새끼야?! 대가리가 있으면 굴리라고. 좆대가리만 굴리지 말고 등신아!

갑작스런 욕설에 당황한 김현직이 금방 대답하지 못하자, 사장은 답답한 듯 가슴을 쳐가며 말했다.

-길드 놈들에게 연락해라. 이지희가 각성했다고? 그래 봤자 얼마 안 됐을 거 아니야! 아무리 쓰레기 새끼들이라지만 여러 놈이 덤벼들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반쯤 죽여서라도 끌고 와.

“하지만…….”

김현직은 뭐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장은 반론을 용납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씨발놈이 나한테 토 다냐? 닥치고 내일 20시까지 이지희 끌고 와!

“아, 알겠습니다!”

툭, 전화는 끊겼다.

김현직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부하들이 움찔 놀라는 것이 보였다. 사장과의 통화는 그들도 다 듣고 있었으리라.

“야.”

“예, 형님.”

김현직은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며 조폭같이 구는 동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조폭이 하는 일과 별반 다르질 않았다. 이러려고 이 업계에 들어온 게 아닌데. 하지만 현실이 이런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들었지?”

“아닙니다, 형님.”

“지랄 말고, 사장님이 말씀하신대로 해.”

“아, 예!”

바로 동생들은 각기 아는 길드에다 연락을 넣기 시작했다.

어벤저 스킬로 구린 일들을 맡아서 해주는, 좋은 말로 해결사, 전통적인 표현으로 용역 일을 하는 어벤저 길드는 생각보다 많았다.

애초에 국가와 기업들의 갑질에 제대로 먹고 살기도 힘든 길드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이 돈과 범죄의 유혹에 빠져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D급 차원 능력자라도 일반인 상대로는 꽤나 거들먹거릴 수 있으니, 조폭끼리의 항쟁에 용병으로 끼어드는 일마저도 잦았다.

들키면 어벤저 라이센스를 박탈당할 테지만 국가랍시고 그들의 능력마저 빼앗지는 못하니, 일단 하루 벌어먹기 위해서라도 구린 일에 손을 대는 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차원 균열이 열린 지 8년, 어벤저라는 직업이 생긴 지 5년. 아직 법망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니 말이다.

일을 저지른 용역 어벤저보다 고용한 측에 더 큰 책임을 물리는 것 또한 대표적인 법의 구멍 중 하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고용자의 명령에만 따른 무고한 어벤저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는 개소리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물론 현실은 다르다.

애초에 국가에서 어벤저에게 세금을 면제하고 특혜까지 주는 이유는 인재 유출 방지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런 어벤저를 감옥에다 처박아두면 그것도 국가의 손실이지 않느냐는 높으신 분의 의향이 반영된 결과였다. 실형을 때리기보다는 적당히 사회봉사로 넘기고 그 시간만큼 국가에서 어벤저를 무료로 부려먹는 게 이득이라는 계산적인 판단도 끼어들었다.

문제는 ‘고용한 측’의 책임을 최고 책임자에게 묻는 게 아니라 실무자에게 묻는다는 점이었다. 누가 생각해도 이상한 법이었지만 이것도 로비의 결과물이었다. 멀쩡한 법이 높으신 분들의 이해득실로 인해 변모하는 건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어쨌든 그래서 고용한 용역 어벤저가 이지희나 아까 그 남자를 죽이기라도 하면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 김현직이었다. 사장은 뚝 잡아뗄 게 뻔하고, 조금 전 휴대폰 통화 기록을 경찰에 넘기더라도 별 의미가 없을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썩어빠졌어.”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그걸 다 태울 때쯤 되자 동생들 중 한 놈이 말했다.

“내일 된다는 놈들이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바꿔봐.”

김현직은 마지막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내고 담배 꽁초를 비벼 껐다. 이대로 이 동생에게 어벤저들을 고용하게 해서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짓을 했다간 사장하고 똑같은 놈이 된다.

‘그건 정말 아니지.’

김현직은 쓴웃음을 짓고 동생의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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