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출근 첫 날
월요일.
최재철에게 있어서는 TA라는 새 회사의 첫 출근일이기도 하다. 첫 출근이라고는 해도 신입 사원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개념에 가깝고, 대기업 소속 어벤저들은 임무가 있을 때마다 호출되는 업무 형태만 보면 외주 전문 업체와 비슷하기에 출근에 그렇게까지 큰 의의를 둘 필요는 없긴 하지만 말이다.
최재철은 그냥 면접 때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기로 했다. 어벤저들은 거의 안 입는다는 정장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복장은 자유이니 뭘 입어도 상관은 없었다.
넥타이를 꽉 조여매고, 그는 최재철의 모습으로 집을 나섰다. 어쨌든 10년 전에는 그렇게 되고 싶었던 대기업 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지금 와서 특별히 감회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나름 의의가 있기는 할 것이다.
*
TA 한국지사 2층의 커다란 홀에서 신입 사원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다. 이번 오리엔테이션은 오직 어벤저 신입 사원만으로 이루어져, 그 규모는 매우 작았다.
“아, 안녕하세요? 최재철 씨.”
홀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최재철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면접 때 봤었던 얼굴로, 그와 함께 합격한 신입 사원이었다.
군인처럼 짧게 깎은 머리와 미군 전투복이 잘 어울린다. 다부지게 벌어진 가슴과 어깨가 인상적이었다. 최재철은 그가 왼쪽 가슴에 단 명찰로 그의 이름을 파악했다.
“여의주 씨?”
“아, 명찰 보셨죠? 지금.”
여의주라는 이름의 그는 자신의 명찰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하긴, 면접 때 서로 자기소개 같은 건 안 했으니 이름을 기억하는 게 더 이상하긴 하죠.”
“그런 것 치고는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데…….”
“최재철 씨는 유명하니까요.”
“네? 제가요?”
그렇게 되묻긴 했지만 그는 곧 왜 자신이 유명해졌는지 알아차렸다. 그야 면접 때 그렇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면접관이 따로 보자고까지 했는데, 적어도 신입 사원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쪽이 오히려 이상하다.
“지금 겸손해하시는 거 맞죠?”
“아, 아뇨.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어쨌든 부럽습니다. 배우고 싶기도 하고요.”
“정말이요?”
최재철의 눈빛이 변했다. 사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에게나 자신의 지식이나 기술을 전수했다가 배신을 당한 기억이 있어서 그 후부터는 사람을 고르긴 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그를 배신했던 그 멍청이는 지금 시체가 되어 있다. 그가 직접 죽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더러운 짓을 하는 인간은 언젠가 자신도 더럽게 죽게 마련이다.
어쨌든 최재철은 좀 더 면밀히 여의주를 관찰했다.
이지희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차원력의 총량이 아쉽기는 하지만 괜히 면접 통과자가 아닌지라 완전히 가망이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효율적으로 고유 능력을 수련한다면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일가를 이룰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저, 저기…….”
여의주는 최재철의 바뀐 시선에 당황해했다.
“아, 스승님!”
그런데 그때, 마침 이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마치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뛰어와서 최재철 옆에 섰다. 그래도 회사에 출근한 것이라 가볍게 살짝 화장을 했는데, 괜히 연예인 지망생을 한 게 아닌지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미녀가 되어 있었다. 여의주가 그녀의 미모에 넋을 잃은 것을 곁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지희 씨.”
“네, 저예요.”
이지희는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여의주가 얼굴을 확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 댁이 왜? 최재철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여의주의 표정 변화를 못 본 척했다.
“스승님, 저 예쁘지 않나요? 오늘 좀 꾸며봤는데.”
“네, 굉장히 아름답네요.”
“반응이 너무 담백한데. 좀 당황하거나 그래야 되지 않아요? 이렇게 예뻐질 줄 몰랐는데, 뭐 이런 식으로.”
“이렇게 예뻐질 줄 몰랐는데.”
“아하하, 엎드려서 절 받았네요!”
이지희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런 이지희와 최재철을 보며 다른 신입 사원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이 정도의 미인인데다가 B급 어벤저이기까지 하니 주목을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최재철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지희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역시 스승님, 벌써 시선을 끌어 모으고 계시네요.”
“제가요?”
“그야 현오준 팀장이 개인적으로 식사까지 대접할 정도의 대형 신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니, 주목을 안 받는 게 이상하죠.”
“그런 소문까지 퍼졌어요?”
“네, 어벤저 네트워크에서. 정확히는 회사 인트라넷에서요.”
이래서 인터넷이란! 나중에 인트라넷에 자신의 이름으로 검색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최재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떤 뜬소문이 돌고 있을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음? 잠깐, 하지만 이게 반드시 나쁜 현상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최재철은 마음을 바꿔먹었다.
사실 좀 더 큰 다음에 날뛸 생각이었지만, 이미 이름이 알려진 이상은 억지로 겸양하는 것보다는 흐름대로 따라가는 것이 낫게 느껴졌다.
어차피 사내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슈퍼 루키로 인식되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B급 이상의 어벤저가 득시글대는 이 TA라는 대기업에서 입지를 확보하고 출세를 해서 금력과 권력을 손에 얻는 것이 목표인 이상, 어느 정도는 눈에 띌 필요가 있었다.
요는 최재철이 김인수인 것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 아예 뉴스에 나서 WF와 진가규의 시선을 끌어 모을 정도만 아니라면, 최재철로는 다소 날뛰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일정 이상의 능력자는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건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수단만 주의하면 된다.
‘좋아, 이왕 이름이 이렇게 알려진 이상 최대한 활용해야지.’
그렇게 생각을 끝낸 최재철이 고개를 들자, 줄곧 입을 닫고 있던 여의주가 시뻘게진 얼굴로 간신히 입을 벌렸다.
“저, 저기……. 소개, 소개 좀 시켜주세요.”
“소개? 자기소개? 자기소개는 직접 하면 되잖아요.”
최재철의 말에 여의주는 머쓱하니 섰다가, 눈을 질끈 감고 이지희를 향해 고개를 90도 각도로 숙이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여, 의주라고 합니다. 이상한 이름, 이죠? 와하하!”
이상한 이름이라는 자각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자기소개를 마친 여의주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네. 전 이지희입니다. 스승님 제자죠.”
이지희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 자…….”
여의주는 이지희의 말을 반추라도 하듯 우물거리다가 문득 최재철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어?”
“절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이렇게 대놓고 흑심에 가득 찬 남자도 간만에 본지라, 최재철은 가볍게 웃고 말았다.
“확실히 이지희 씨는 굉장한 미녀로군요.”
그는 거절의 말을 그렇게 돌려서 말해보았다. 아무리 어제 생활에 여유와 인내심을 가질 필요를 느꼈다 한들, 남의 연애에 다리를 놔줄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았다.
“어, 저, 그게…….”
여의주도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지, 최재철의 말에 크게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자아, 사담은 거기까지! 신입들, 이쪽으로 모여라!!”
그때, 홀의 단상에 누가 올라서서 그렇게 외쳤다. 홀 여기저기 흩어져 서 있던 신입 사원들이 그 외침에 단상 앞으로 모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와 열을 맞춰 섰다. 최재철도 자연스럽게 그 대열에 합류했다.
신입 사원의 숫자는 최재철을 포함해서 총 10명. 열을 맞춰 서 있으니 금방 셀 수 있었다. 이 중에서 면접 통과자는 다섯 명, 특채로 들어온 B급 어벤저가 다섯 명. 면접 때 만나본 이들의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으므로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면접 통과자들 쪽은 최재철을 제외하면 길드에서 나름 경력을 쌓은 이들이고 차원 균열과 맞닥뜨린 경험도 있지만 특채 신입들은 아마도 교육기관에서 바로 올라온 이들일 터였다.
그렇다고 특채들을 마냥 애송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B급 이상의 라이센스를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차원력이 필요하니만큼, 그 정도의 잠재력은 갖고 있을 테니까.
“자아, 신입들! 신입 오리엔테이션이라고는 해도 우리는 강의를 하거나 레크리에이션을 즐기거나 술을 먹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우리는 어벤저들이고, 앞 선에 나아가 실전을 치러야 하는 실무자들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너희의 쪼인트를 까거나 원산폭격 시키고 엉덩이를 두들기는 짓으로 위계질서를 세운다거나 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말한 단상 위의 상급 어벤저는 씨익 웃고 몇 초간 신입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음? 농담이었는데 웃지 않는 건가? 아무튼 좋다. 이 신입 오리엔테이션 동안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다. 우리는 팀을 짤 거다. 이 자리에는 결원이 생긴 팀의 팀장들이 들어올 거고, 너희는 맘에 드는 팀에 신청서를 넣으면 된다. 자발적이지? 각 팀은 수행하는 임무가 다르고, 이건 팀장들이 다 설명해 줄 거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팀을 찾도록!”
*
상급 어벤저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하는 듯 재치 있는 목소리로 신입 사원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떠들었다.
“요컨대, 주도적으로 움직여라! 아니면 연봉에 손해를 보게 될 거야.”
근로계약서를 아직 쓰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나. 최재철은 속으로 탄식했다.
만약 오늘 팀을 꾸리지 못하면 인턴용 계약서를, 아니라면 정직원용 계약서를 쓰게 될 터였다. 한 번 비정규직으로 일해 본 최재철은 두 입장 사이에 가히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아, 그럼 시작하자!”
단상에 서 있던 상급 어벤저는 그렇게 외치더니, 자신이 가장 먼저 단상에서 내려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등 뒤에 다른 팀장 어벤저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앗, 선배! 치사하게!”
“야! 거기 서!!”
그러나 상급 어벤저는 그런 비난 따위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 달렸다. 다른 신입 사원들을 헤치고 쭉쭉 진로를 뻗은 그는 이윽고 멈춰 섰다.
최재철의 앞이었다.
“네가 최재철이로군!”
상급 어벤저는 최재철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런 그의 뒤에는 다시금 비난이 쏟아졌다.
“선배, 안 돼요!”
“걘 내가 점찍었어!!”
그러나 상급 어벤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외야에서 뭐라 떠들든 상관 말도록. 내 이름은 우주환이다. 자아, 최재철! 나의 팀에 들어와라!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지.”
고작 이름 하나 말해놓고 자기소개가 끝나기라도 한 듯, 우주환은 최재철의 손을 끌어당겨 잡아 억지로 악수하며 바로 권유의 말을 던졌다.
“우주환 선배님.”
“아, 직급은 팀장이다. 여기 온 팀장 녀석들은 다들 팀장이야. 팀을 이끄는 장이니 팀장이지.”
“그럼 우주환 팀장님.”
“그래, 질문해라! 대답해 주지.”
“팀장님 팀에서 제가 수행해야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좋은 질문이로군!”
우주환은 씨익 웃어 하얀 이빨을 드러내어 보였다.
“우리 팀이 주로 수행하는 임무는 차원 균열 주변의 철저한 청소다. 지역사회와 공조해서 차원 균열 주변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지. 물론 팀 내에 디코이를 두고 차원 균열 안의 어보미네이션을 끌어내어 처치하는 것도 함께 한다.”
거기까지 설명한 우주환은 뭐라고 말하려는 최재철의 입을 막기라도 하듯 빠른 어투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팀은 전원 신체 강화 능력을 지닌 어벤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빠르고 안전한 임무 수행이 가능한 것이 특장점이다. 같은 신체 강화계 어벤저인 너와 딱 맞는 팀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우주환의 말을 들은 최재철은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이로군.’
단일 능력자로만 팀을 구성하다니, 비상식적인 걸 넘어서 몰상식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최하급 어보미네이션인 리자드독이나 하급 어보미네이션인 크로코리언까진 그냥 때려잡으면 되니 신체 강화 능력자만으로도 사냥이 가능하기는 할 터였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감출 줄 아는 변종인 변색 도마뱀이나 투명 마수가 나오면 감지 능력자 없이는 처치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헬필드 안에서는 적외선 감지 장치를 비롯한 현대적인 감지 장치조차 통하지 않으니 말이다.
우주환의 팀은 그냥 신체 강화 차원 능력자만 있다고 본인이 본인의 입으로 밝혔다. 만약 우주환의 팀 구성으로 임무 중에 차원 균열에서 변종 마수들이 기어 나오기라도 하면?
몰살이다.
물론 김인수 같은 다중 능력자, 대마법사라면 이 팀의 약점을 제대로 보완해 줄 수 있다. 하지만 팀에 참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재철이다. 김인수는 최재철이라는 신분에 걸맞은 능력만을 사용할 생각이었으므로, 우주환의 팀에 소속되는 자살행위를 해서는 안 됐다.
‘자아, 어떻게 거절하지?’
보아하니 이 우주환라는 남자는 나쁜 의미로 리더십이 강한 타입으로 보인다. 자신의 의견에 따르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른 의견은 들은 척도 안 하는 타입의 인간. 이런 타입의 인간은 제의를 거부당하면 적대 의식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대마법사인 김인수는 상성상 그저 신체 능력자에 불과한 우주환을 손쉽게 처치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지구에서 살인은 덮는 데 꽤나 돈과 권력이 필요한 범죄다. 쓸데없이 죽여야 할 상대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최재철 씨, 저기, 저는 유구언이라 합니다만…….”
그때, 그에게 다가온 것이 다른 팀장급 어벤저였다. 이름은 유구언. 키도 작고 체구도 작은, 약간 비굴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뭐야, 넌! 선배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잖냐! 다른 데로 가라.”
개라도 쫓듯, 우주환은 그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까부터 최재철 씨가 고민 중인 모양이던데요. 그럼 이야기는 끝난 거 아닌가요? 선배.”
“뭐? 그럴 리가. 고민할 게 뭐 있나? 우리 팀이 실적 1위 팀이라고. 아, 이 이야기를 안 했군. 우리 팀이 실적 1위 팀이야. 그만큼 연봉도 높다고!”
“대신 사망률도 가장 높죠.”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만큼의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
‘타인의 희생 말인가.’
최재철은 우주환과 유구언의 대화를 들으며 실소했다.
“뭐, 어벤저업이라는 게 원래 위험하지. 우리 팀의 사망률이 약간 높긴 하지만, 너희 팀과 비교해서 그렇게까지 높은 편은 아닐 텐데?”
“높은 건 높은 거 맞잖아요.”
“위험한 걸로 치면 저기, 누구냐! 그 녀석의 팀이 가장 위험하지!”
사망률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게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뒤늦게라도 깨달았는지, 우주환은 화제를 돌렸다.
“현오준! 저놈 미친놈이라니까. 팀을 꾸려서 차원 균열 안으로 들어가겠다니 제 정신으로 할 생각은 아니지. 아직 임무를 수행할 팀을 못 꾸려서 그렇지, 임무가 시작되면 최고 사망률을 기록할 팀은 현오준 팀이 될 걸.”
“제 이야기 중이셨군요, 선배.”
어느새 현오준도 최재철의 옆에 와 있었다. 그의 존재에 우주환이 움찔 놀라는 것이 보였다.
“어, 어어, 그래.”
뭐지? 우주환은 현오준에게 약한 건가? 최재철은 흥미진진하게 두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유구언이 끼어들었다.
“어, 현오준 팀장, 그러고 보니 최재철 씨한테 미리 밥 샀다면서요? 그거 정말이에요?”
“뭐? 그게 정말이야? 그런 치사한 짓을!”
“선배도 자주 하시는 거 아닙니까. 면접관의 특권이라면서요.”
“엉? 어, 그래, 그랬지.”
공격할 거리를 찾았다는 듯 희희낙락하던 우주환의 얼굴은 다시 구겨졌다.
“어쨌든 그렇습니다, 최재철 씨.”
현오준은 겨우 최재철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사실 여기 계신 제 선배인 우주환 팀장님 팀에서는 더 큰 수익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유구언 팀장님 팀보다는 약간 위험하겠지만요. 하지만 제 팀은 안정된 수익을 얻기도 힘들뿐더러 수익에 비해 큰 위험을 부담해야 합니다. 이런 점을 제가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건 비겁하다고 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현오준 팀장님의 팀에 신청서를 내겠습니다.”
“그렇더라도… 네?”
현오준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기라도 한 듯 최재철에게 되물었다. 그는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했다.
“현오준 팀장님의 팀에 신청서를 내겠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현오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동시에 그 뒤에 서 있던 우주환의 얼굴이 구겨졌다.
“흥, 가끔 있지. 뛰어난 놈들 중에서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굳이 골라서 가려고 하는 녀석. 너도 현오준하고 같은 부류의 인간인 모양이로군.”
“죄송합니다, 우주환 팀장님.”
“사과할 건 없어. 하지만 후회하게 될 거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예언해 두지.”
우주환은 방향을 휙 돌려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유구언이 그 뒤를 따랐다.
“어이! 여의주란 놈은 어디 있나!”
“저기 있네요, 선배.”
“오, 여의주! 네가 여의주로구나! 이상한 이름이네! 우하하하!!”
“네, 예?”
아무래도 우주환의 다음 물색 목표물은 여의주였던 모양이었다. 우주환의 큰 목소리에 여의주가 쪼그라드는 모습이 여기서도 보였다. 그 모습을 몇 초간 보고 있으려니, 현오준이 최재철의 손을 잡았다.
“환영합니다, 최재철 씨. 정말로… 환영합니다.”
아니, 울먹일 것까진 없지 않은가. 그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요.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스승님.”
그때, 최재철의 등 뒤에 이지희가 들러붙었다. 뒤에는 팀장 몇 명이 따라붙어 있었다. 그 굉장히 부담스러운 모습으로, 이지희는 낭랑하기도 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도 스승님이랑 같은 팀에 신청서를 내겠습니다!”
최재철은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희 씨?!”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외친 후, 이지희는 깜찍하게도 웃었다.
“아, B급 라이센스를 지닌 이지희 씨로군요. 환영합니다. 생각도 안 했는데 이렇게 팀원을 충원하게 되다니 저로서도 영광이로군요.”
현오준은 기쁜 듯 웃었다. 이지희의 뒤에 들러붙어 있던 팀장들은 혀를 차면서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쓸데없이 적을 늘린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최재철로서도 바라던 결과이기는 했다. 곁에 두고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니 말이다.
“자아, 저희 팀은 충원이 끝났습니다. 최재철 씨, 이지희 씨, 저희 사무실로 안내하죠.”
최재철과 이지희의 신청서를 받고 그 자리에서 결재 사인을 한 현오준은 가방 속에 신청서를 잘 갈무리한 후 신입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스승님, 이 팀은 뭘 하는 팀인가요?”
역시 그냥 최재철만 보고 무작정 신청서부터 던진 거였나. 이 아가씨는 보기보다 무데뽀 같은 면이 있었다.
“차원 균열 진입입니다.”
현오준이 화도 짜증도 내지 않고 친절하게 말했다.
“차원 균열 진입이요?”
이지희가 화들짝 놀랐다.
“후후, 이지희 씨, 이미 신청서는 제 가방 안에 있습니다. 지금 와서 무르려고 해봐야…….”
“저 꼭 가보고 싶었어요! 차원 균열 너머로!!”
현오준, 그러니까 불과 몇 분 전부터 자신의 직속상관이 된 팀장의 말을 끊으며 이지희가 흥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저 차원 균열 너머에는 대체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저,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미친년이었군.”
버둥거리는 여의주를 어깨에 짊어진 우주환이 지나가면서 그런 말을 했지만 이지희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기회 생기면 나중에 꼭 한번 패줘야지, 저 무례한 인간.’
최재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자코 있었다.
“차원 균열 너머는 위험한 세계입니다. 위험도로 따지면 저희 팀은 우리 회사의 그 어떤 어벤저 팀보다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겁니다.”
“괜찮아요, 뭐. 전 부모도 없고 딸린 식구도 없으니까요.”
이지희는 소탈하게 웃으면서 묵직한 이야기를 던졌다.
“친구도 없고 말이죠.”
“네, 저 친구도 없어요.”
최재철이 한 마디 보태자, 이지희는 굉장히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듯 깔깔 웃으며 받았다. 현오준은 불쌍하게도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지만 애써 지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 그렇군요. 어쨌든 환영합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현… 팀장님!!”
역시 팀장 이름도 안 듣고 팀에 신청서를 낸 모양이었다.
“현오준 팀장님.”
“현오준 팀장님!”
최재철이 옆에서 현오준의 이름을 말해주자, 이지희는 곧장 따라했다.
“어쨌든 이런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는 좀 그렇군요. 자아, 사무실로 가시죠.”
이지희의 미모에 최재철의 면접 때 소문, 거기에 가장 위험하다는 현오준의 팀이 지닌 악명까지 얹어져 그들 셋은 이 홀에서 엄청나게 시선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러므로 최재철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시선을 모으는 건 그 또한 그리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이지희도 순순히 현오준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막 이지희가 팀에 합류했을 때와는 달리, 현오준의 어깨는 아까보다 약간 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
현오준 팀.
사무실 문에는 그런 명패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팀의 팀장일 터인 현오준은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하고 배에 힘을 준 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목소리였다. 그 대답을 끝까지 듣고 1초 후에나 현오준은 문고리를 잡았다.
“팀장님, 오늘 신입 못 데려오면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미리 말씀 드리지 않았나요?”
문이 열리자마자 그런 폭언이 날아들었다.
“아니, 그게…….”
현오준은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기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사무실 안의 여자는 벌떡 일어났다.
“신입!”
그녀에게도 드디어 최재철과 이지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최재철도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이는 15세 정도일까. 아니, 더 적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미성년자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녀를 보고 있던 최재철은 문득 불쾌한 표정으로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아얏!”
사무실 안의 여자, 아니 소녀는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분석 스킬은 신경 다발을 밖으로 꺼내 상대에게 접촉시키는 거나 마찬가지인 행위이다. 그걸 쳐냈으니 꽤나 아플 터였다.
그렇다. 소녀는 최재철을 향해 분석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최재철은 그 능력에 카운터를 쳐낸 것이고 말이다.
이 분석 스킬이 바로 최재철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수단이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아도 자신의 정체만은 들키면 안 되는 최재철에게 있어서는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는 곳을 건드린 소녀를 최재철은 노려보았다.
소녀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만큼은 날카로운 적의를 던지고 있었다.
최재철은 ‘후’ 하고 짧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허락도 없이 분석 스킬을 쓰는 건 무례한 짓이라고 아무도 안 가르쳐 주던가?”
“앗, 저기, 최재철 씨.”
옆에서 현오준이 당황해서 끼어들려고 했지만, 최재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차원력으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주먹이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날리고 있는 건 물론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무실 안의 소녀였다.
‘염동력 능력자인가.’
염동력이란 건 그가 있던 이계에서도 꽤나 드문 차원 능력 중 하나였다. 아마 지구에서도 마찬가지일 테고, 이 능력 덕에 이 소녀는 꽤나 높은 랭크의 라이센스를 받았을 터였다. 자신만만하게 공격부터 날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소녀의 공격에는 그다지 살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을 아프게 만든 상대를 자신만큼 아프게 만들어주겠다는 그런 의지가 담긴 염동력 펀치일 터였다.
“쯧.”
그렇다고 순순히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이미 팀 내에서 죽어지낼 생각은 접은 최재철이다. 이런 기선 제압을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짧게 혀를 차고 염동력 공격을 손쉽게 피했다. 이 정도야 체술만으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재철의 몸놀림을 본 소녀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최재철은 소녀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차원력을 한껏 담은 주먹을……!
“후…….”
눈을 질끈 감은 소녀에게서 손가락 하나만큼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최재철은 멈췄다.
“계속할 텐가?”
“히, 히익!”
소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울려 버린 건가. 최재철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려고 했지만, 소녀는 울지는 않았다. 대신 현오준에게 빼액 소리 질렀다.
“팀, 장님! 얘 뭐예요?!”
“얘라니.”
최재철은 검지로 소녀의 이마를 살짝 때렸다.
“어른한테.”
“으으으……!”
소녀는 본격적으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 최재철 씨. 그녀는 일단은 우리 팀의 에이스입니다. 아직 미성년이라 제가 팀장을 맡고는 있습니다만, 그녀는 저보다도 높은 S급의 랭커입니다.”
“랭커.”
최재철은 전투태세를 풀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이상 작은 이 소녀가 랭커라니. 염동력이 드문 능력이기는 하지만 이 소녀가 랭커일 줄은 몰랐다.
어벤저의 라이센스 구분은 D급부터 A급까지 존재한다. 그 이상의 S급 라이센스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백히 A급을 초월한 상위 20명까지의 어벤저를 암묵적으로 S급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는 랭커라고도 하는데, 각 어벤저의 능력과 실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으, 상대가 안 좋았군.’
아무리 슈퍼 루키가 될 생각을 했다고 한들, 시작부터 S급을 상대로 맞먹어버리다니. 최재철은 계산 외의 상황 때문에 인상을 쓰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최재철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오준은 계속해서 소개를 했다.
“그녀의 이름은 오연화. S급 15위의 랭커입니다. 연화양, 그는 최재철 씨라고 합니다. 말씀 드린 적 있었죠? 제가 면접 때…….”
“어떻게 제 공격을 간파한 거죠?!”
눈에서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으면서도, 오연화는 목소리만은 당당하게 물었다.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오연화 씨. 오늘부터 이 팀에 소속하게 된 최재철입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최재철은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기세로 공손히 자기소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물론 무용지물이었다. 소녀의 시선은 전혀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질문에나 대답하세요!”
이렇게 된 이상, 상대가 바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보였다. 그러므로 그는 순순히 질문에 대답했다.
“그냥 제 눈에는 공격이 보였습니다. 어떻게, 왜 같은 걸 설명드릴 방법 같은 건 없군요.”
“그야 그럴 테죠! 그게 당신의 어벤저 스킬인가요?”
“어벤저 스킬.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아직까지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녀에게 최재철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녀는 말없이 손수건을 받아들고 자신의 눈물을 닦더니, 그 손수건을 최재철에게 도로 내밀며 조금 전보다는 진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격해서 죄송해요. 당황해서 그랬어요.”
사과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던지라, 최재철도 몇 번 눈을 깜박거릴 시간을 필요로 했다.
“별말씀을. 별로 살의가 느껴지는 공격도 아니었으니. 하긴 S급 15위의 랭커가 온 힘을 다했더라면 전 저항도 못 하고 죽어 있었겠죠.”
오연화의 눈물로 젖은 손수건을 갈무리하며, 최재철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걸 본 오연화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최재철의 손에서 손수건을 도로 빼앗아들었다.
“세탁해서 돌려 드릴게요.”
“아, 네…….”
사실 손수건을 가지고 가서 오연화의 눈물에다 분석 스킬을 걸어볼 생각이었던 최재철은 내심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손수건을 내주었다.
“괜찮은 탑 멤버를 영입해 오셨네요, 팀장님.”
다시 꼼꼼히 눈물을 닦은 후, 오연화는 현오준에게 말했다.
“탑?”
“아, 연화양의 분류입니다. 앞 선에 서는 어벤저를 탑이라고 분류하더군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임에서 따온 모양이던데…….”
“그, 그런 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요!”
오연화는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어 현오준의 말을 끊었다. 자신이 게임을 한다는 걸 들킨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아니, 자기가 먼저 게임 용어를 써놓고 그걸 부끄러워하다니.’
최재철은 어이없어했지만, 현오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부드럽게 이지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오연화에게 그녀를 소개해 주는 것으로 화제를 전환시켜 주었다.
“아아, 연화 양, 이쪽은 이지희 씨. B급 라이센스를 지닌 방전 능력자입니다.”
“와, B급이라고요? 어떤 마술을 부려서 데려온 거예요?”
오연화는 눈을 반짝이며 이지희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상황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해 약간 멍하니 있던 이지희는 오연화의 시선에 다소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지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선배님!”
이지희의 입에서 나온 선배라는 말에 오연화의 눈동자가 두 배로 더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헛기침을 하더니, 오연화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저, 하지만 제가 훨씬 어린데 그냥 연화라고 불러주세요.”
오연화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첫 인상과는 달리 그럭저럭 상대할 만한 인격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하기야 서로 당황해서 나눈 펀치의 교환이다. 최재철은 속으로 오연화의 이미지를 살짝 상향 조정했다.
“업계 경력으로도 라이센스 급으로도 당연히 선배신데 제가 어떻게…….”
오연화의 말에 이지희는 황송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연예계가 체육계하고 비슷하다더니, 이지희도 그런 수직 관계에 익숙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굉장한 미녀!”
이지희의 말을 오연화는 그런 감탄사로 끊었다. 이제야 주목해서 이지희의 얼굴을 들여다 본 모양이었다.
“저기, 그 화장 어떻게 한 거예요? 언니라고 불러도 되요?”
어린애답다고 해야 될까, 아니면 단순히 원래 성격이 산만한 것일까. 오연화의 관심사는 벌써 바뀌어 있었다.
“저, 그런데 연화 양. 구문효 씨는 어디 가셨죠?”
이지희와 오연화의 사이를 조심스럽게 파고들어, 현오준은 오연화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 현오준에게 오연화는 너무나도 간결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몰라요.”
“아, 그렇군요.”
“애초에 팀원 간의 연락은 팀장님이 맡으신 일 아닌가요?”
오연화는 뾰쪽한 반응을 보였다. 그걸 보며 최재철은 속으로 오연화의 이미지를 다시 약간 하향 조정했다. 어쨌든 그런 오연화의 말에도 여전히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럼 잠시 연락해 보도록 하죠.”
현오준은 한 걸음 물러나더니 뒤로 돌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아무래도 이런 대응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하기야 팀장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A급, 오연화는 S급 랭커다. 이게 지구의 어벤저 사회에서는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연화 씨, 구문효 씨라는 분은 어떤 분이시죠?”
최재철은 오연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텀이에요.”
“네?”
“아, 이게 아니라…….”
오연화가 당황하는 걸 보니 또 무의식중에 게임 용어를 써버린 모양이다.
“원딜… 이것도 아니지. 아, 뭐라고 그러지? 그거 있잖아요. 슈… 슈터?”
“아아, 궁병인 모양이군요.”
“네, 그거. 아쳐죠.”
왜 굳이 영어로 바꿔서 말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구문효라는 어벤저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는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마법사의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 화살을 날려대는 능력을 주특기로 하는 차원 능력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재철 님.”
최재철이 오연화의 그 부름에 반응하는 것은 아주 약간 늦었다.
“저요?”
“제가 재철 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재철 님 말고 어디 있어요? 어… 아저씨라고 부를까요?”
“아뇨.”
최재철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실제 나이는 이미 30대를 훌쩍 넘긴지라 아저씨라고 불려도 억울해하면 안 되지만, 그래도 아저씨라고 불리고 싶지는 않은 게 그의 본심이었다.
“그럼 재철 님이라고 부를게요!”
오연화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뭐… 아저씨보단 낫지.’
재철 님이라는 호칭은 살짝 생소했지만, 최재철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게임에서 별로 안 친한 상대를 이름에다 ‘님’을 붙여서 부르나 보다, 그 정도의 인식이었다. 참고로 그의 그런 추측은 그리 틀린 건 아니었다.
“아, 곧 구문효 씨도 이곳으로 올 겁니다. 그럼 팀원 전체가 갖춰지는 셈이 되죠.”
마침 통화를 마친 현오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드디어 저희 팀이 완성되었습니다.”
“팀장님의 팀이겠죠.”
“아뇨, 그건…….”
오연화의 일침에 현오준은 다소 당황한 듯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오연화의 목소리에 아까보다 조금 더 가시가 돋쳤다.
“드디어 그 차원 균열 내부 탐사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서 좋겠네요. 어쨌든 저로서도 아무 일도 안 하고 돈만 받는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서 다행이지만요.”
“네, 제 오랜 꿈이 드디어 이뤄지는 순간입니다. 감격적이로군요.”
다소 비꼬는 기색이 있는 오연화의 말에도 현오준은 순수하게 감동한 듯 대답했다.
“차원 균열 안의 환경은 헬필드보다도 더욱 가혹합니다. 미군들이 몇 번이나 진입했지만 감당하지 못하고 전멸했을 정도이니까요. 헬필드 안과 똑같이 현대화기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비들조차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전투복은 물론이고, 플라스틱 물통조차 차원 균열 안쪽에 진입하자마자 파손돼서 못 쓸 물건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김인수도 이계에서 겪은 고충이었다. 아직 마법사조차 되지 못했을 시절, 큰 맘 먹고 비싼 돈을 주고 산 머스킷 총포가 차원 균열 안에서 터져 버린 경험은 김인수의 머릿속에서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차원 균열 안에서는 현대화기와 장비를 활용하지 못하게 되니, 모든 상황에 맨몸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것도 어보미네이션들이 덤벼오는 위험한 환경에서. 훈련받은 미군들조차 전멸할 정도니, 일반인에게는 도저히 무리입니다.”
그러니 차원 능력자가 필요하다. 지구에서 말하는 어벤저가.
“필요한 능력을 갖춘 어벤저를 모으고 팀을 꾸리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만, 최재철 씨와 이지희 씨가 팀에 지원해 주셔서 드디어 본연의 임무가 가능한 팀 구성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현오준은 최재철과 이지희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현오준의 그런 인사에 이지희는 상당히 당황한 것 같았다.
“그, 그러지 마세요, 팀장님. 부담스러워요.”
이지희의 말과 동시에 오연화가 픽 웃는 것이 보였다. 현오준도 머쓱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때쯤 사무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이는 갓 20살이 된 걸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아니, 더 어릴지도 몰랐다. 그는 오른손을 픽 올리고 이렇게 외쳤다.
“왔어요!”
오연화가 고개를 팩 돌리고 못 본 척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현오준은 반대로 그를 반겼다.
“구문효 씨, 왔군요!”
“오, 신입들 왔네? 전화로 말씀하신 그 신입들인가요?”
구문효는 현오준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최재철과 이지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최재철은 관심 없는지 슥 지나치더니, 이지희를 보곤 그 자리에 못 박혔다.
“예쁘다!”
심플하다면 심플한 반응이었다.
“저기, 팀장님. 무슨 더러운 수작을 부려서 저런 미인을 우리 팀에 끌어들인 겁니까? 솔직히 말씀하세요.”
구문효 본인은 속닥거릴 셈으로 소리를 낮추고 한 말이었겠지만 다 들렸다. 최재철에게도 들릴 정도니, 이지희도 당연히 들었을 터였다. 오연화에게도 들렸는지 그녀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저기요, 우리 언니한테 시비 걸지 마세요!”
“어, 언니? 아뇨, 저기. 별로 시비 걸 생각도 없었는데…….”
아무래도 구문효는 오연화에게는 약한 모양인지 바로 쪼그라들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현오준이 최재철에게 구문효의 소개를 했다.
“최재철 씨, 이쪽은 구문효 씨라고 합니다. 사격계 어벤저죠. 구문효 씨, 이쪽은 최재철 씨입니다. 신체 강화계 어벤저입니다.”
“신체 강화계라, 랭크는 어떻게?”
“C급입니다만.”
“C급! 전 B급입니다!”
구문효가 콧대를 높였다. 그러자 오연화가 바로 태클을 걸어왔다.
“저기요! 멋도 모르고 재철 님한테 시비 걸지 마세요!!”
“엥, 재철 님?! 어째서! 나한테는 이름도 안 불러주고 계속 ‘저기요’라고 부르면서 어째서!!”
조금 전과는 달리 구문효는 흥분했다. 그러나 그 분노의 대상은 오연화가 아니었다.
“결투다! 무슨 수작을 부려서 연화 씨에게 님까지 붙여서 이름을 불리는 영광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나도 당신을 이겨서 문효 님이라고 불리고 말겠어!”
구문효는 최재철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뭔가 결투 신청의 내용이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최재철은 크게 기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 좋죠. 서로의 능력을 파악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방법도 드무니까.”
게다가 상대가 B급이라면 조금 전과는 달리 마음 놓고 밟아줄 수 있다. 최재철의 그런 계산으로 인해, 그와 구문효의 결투가 성사되었다.
*
아무리 그래도 사무실에서 결투를 벌이는 건 별로 좋지 않다는 현오준의 의견에 따라, 그의 팀 전원은 어벤저 전용 지하 훈련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니, 왜 아무도 안 말리죠? 댁도 그래! 보통 C급이 B급 결투를 받아?”
먼저 결투를 신청한 주제에 구문효는 그런 소릴 했다. 최재철은 그런 구문효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현오준에게 말했다.
“팀장님, 시작 신호 부탁드려도 될까요?”
“시작!”
다소 갑작스러운 신호였지만, 최재철은 즉시 반응했다.
“어, 어!”
아주 약간 늦게 반응한 구문효가 놀라 빛의 화살을 쏘아대었다. 최재철은 그 화살을 쉽게 피했다. 그러자 화살들은 궤적을 바꾸어 최재철을 쫓아왔다.
“역시 B급!”
최재철은 흥이 돋아 외치며 그 화살을 주먹으로 쳐서 지워 버렸다.
“뭐야, 왜 신났어?!”
구문효는 어이없어 하며 빛의 화살을 두 발 더 쐈다. 최재철은 위빙으로 정면의 화살을 피해버리고, 곧장 구문효를 향해 돌진했다.
“와아!”
구문효는 놀라 외쳤다. 그와 동시에 등 뒤의 화살들이 발하던 기척이 사라져 버렸다. 역시 유도에는 집중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최재철은 구문효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다음 순간, 구문효의 모습이 빛에 싸여 사라졌다.
‘점멸!’
구문효가 점멸, 즉 순간탈출능력을 사용했음을 간파한 최재철은 즉시 반응해 고개를 돌렸다. 8m 좌전방에 그를 향해 손가락을 뻗은 구문효가 있었다.
“하아아압!”
구문효는 기합성을 외쳤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빛의 칼날이 뻗어 나와 최재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훌륭하군!”
최재철은 구문효를 칭찬하며 좌측으로 크게 뛰어 빛의 칼날을 피했다. 그 회피기동을 예측이라도 한 듯, 구문효는 다음 빛의 화살을 정확하게 노려 쏘았다.
팡!
최재철은 그 화살을 주먹으로 쳐 날리고 다시 구문효에게 접근했다. 놀라 눈을 크게 뜬 구문효의 얼굴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크으으윽!”
자신의 턱 밑에서 멈춘 최재철의 주먹을 바라보며, 구문효는 식은땀을 흘렸다.
“뭐야, 뭐예요? 정말로 C급? 말도 안 되잖아?”
“계속할까?”
“아뇨! 졌어요!!”
구문효는 시원스럽게 패배를 인정했다. 최재철은 만족하고 주먹을 거두며 넥타이를 다시 다듬어 매었다. 그리고 활짝 웃는 얼굴로 구문효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훌륭한 기량입니다. 같은 팀이 되어 영광스럽군요.”
실제로 훌륭한 기량이었다. 보통 사격계 능력자는 자신의 공격으로 적을 죽이는 것만 생각한다. 덤벼들기 전에 죽여 버리면 방어할 필요가 없으니, 괜찮은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세상이 생각한 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먼저 공격당한다거나, 적이 자신의 공격에 버틴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대항할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그냥 죽는다. 죽어버리면 끝이다.
그런 점에서 구문효는 그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을 내놓았다.
먼저 점멸. 자신의 몸을 빛으로 바꾸어 순간적으로 멀리 이동하는 능력.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강력한 빛의 칼날을 발사하는 능력.
먼저 공격당하면 그걸 피하고 전력을 다한 일격을 날려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사격계 능력자로서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정답이었다.
그리고 그 정답을 내놓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 능력들을 갖추어놓았다는 점에서 이 구문효라는 남자가 지능과 재능, 그리고 근면성 모두 갖춘 훌륭한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훌륭한 인재 앞에서 어찌 훌륭하다는 칭찬을 아낄까!
얼굴을 활짝 핀 최재철의 칭찬에 구문효는 다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최재철이 내민 손을 맞잡아 악수하며 그는 말했다.
“제가 선배인데다 B급인데 왜 칭찬을 받아야 하죠?! 하지만 영광입니다!”
생각해 보니 구문효의 말이 맞아서 최재철은 머쓱하니 웃었다. 상아탑에서 다른 마법사들을 가르치던 버릇이 나오고 말았다. 어쨌든 사용한 능력은 최재철로서 발휘할 수 있는 능력뿐이었으니 이쪽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태도는 고칠 필요가 있으리라.
“저기,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딱 봐도 저보다 나이 많아보이시는데.”
구문효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젊은 나이에 입지와 능력 모두를 갖춘 이의 입에서 나오기 어려운 말이었다. 보통 이런 타입은 자존심이 강해서 고개를 굽히기 힘들어하는데 말이다. 그만큼 최재철을 높이 평가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긴 하겠지만, 구문효라는 남자의 인성을 엿볼 수 있는 면이기도 했다.
‘그냥 오연화에게 밟혀 살아서 그런 거 같기도 하지만.’
그런 누가 들어도 화낼 만한 생각은 생각만으로 접어두면서, 그런 구문효의 태도를 높이 사서 최재철은 한 번 겸양했다.
“아니, 그래도 제가 후배인데…….”
그랬더니 나오는 말이 이거였다.
“에이, 그래도 형은 형이죠.”
이런 대화를 아까 했던 것 같다 싶더니만, 이지희와 오연화가 했던 대화를 그대로 하고 있다는 걸 최재철은 뒤늦게 깨달았다.
“팀장님, 괜찮겠습니까? 팀 내 상하 관계가 흐트러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현오준에게 그렇게 물었더니,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나이만 좀 더 적었으면 최재철 씨를 형님으로 섬기고 싶을 정도니까.”
“그건 또 무슨…….”
“역시 최재철 씨의 어벤저 스킬 숙련도는 굉장하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서 익히셨는지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최재철을 바라보는 현오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이지희가 최재철을 스승으로 섬기겠다고 말할 때의 눈빛 같았다.
“그냥 정신 차리고 보니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저도 잘 몰라요.”
최재철은 다소 당황하면서 그렇게 둘러대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반쯤은 사실이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최재철 씨가 저희 팀에 손색없는 존재라는 걸 다른 팀원들에게도 알릴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아 기쁩니다. 보통 어벤저들은 랭크로 서로를 평가하는 경우가 많아서 골치 아프거든요.”
“아, 결투를 방치한 건 그런 이유였어요? 팀장님도 참.”
구문효가 쓴웃음을 흘렸다.
“저로서도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제로 이번 결투는 그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구문효가 꽤나 쓸 만한 슈터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꼭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걸.’
그런 욕심이 날 정도는 되었다. 물론 앞으로 그가 더 성장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지만, 최재철은 그를 성장시킬 자신이 있었다. 센스도 좋고 재능도 있다. 적어도 평범한 차원 능력자를 넘어서서 다재다능한 마법사가 될 가능성은 갖고 있다고 보았다.
“어쨌든 그럼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형!”
“그래, 그럼 그렇게 해라.”
최재철은 바로 말을 놓았다. 어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친해질 필요가 있으니, 말투부터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상대가 먼저 요청한 거니 더욱 괜찮았다.
“저도요, 스승님!”
이지희가 뭔가 열망을 담은 시선으로 최재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한테도 반말 써주세요! 부탁이에요!!”
부탁이라고까지 하는데 딱 잘라 거절하기엔 뭔가 좀 꺼려졌다. 최재철은 다소 당황하면서도 이지희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스승님?”
오연화가 이지희를 멀뚱히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언니랑 재철 님, 무슨 사이예요?”
“스승과 제자 사이예요.”
이지희가 오연화에게 대답했다. 뭔가 좀 자랑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흐응, 하고 오연화는 좀 생각하더니, 스승이니 뭐니 하는 건에 대해서는 이미 흥미를 잃은 듯 화제를 바꾸었다.
“언니도 저한테 그냥 말 놓으세요.”
“선배님이 제게 먼저 말을 놓으시면요.”
“아, 그건 부담스러운데.”
“저도 부담스러워요.”
이상한 걸 가지고 다투기 시작하는 두 여성진 뒤에서, 현오준이 외로운 듯 중얼거렸다.
“저도 최재철 씨를 형님으로 모시는 게 나을까요?”
“아뇨.”
최재철은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현오준은 아쉬운 듯 웃었다.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아무래도 이 남자 특유의 농담이었던 것 같다. 별로 진담처럼 들리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농담은 여기까지라는 듯 표정을 바꾸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현오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제 두 분은 정식으로 저희 팀에 편입되셨으니, 인사과에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십시오. 기본적인 정보는 모두 전달해 두었으므로 별문제 없이 계약이 진행될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11년 전에 다녔던 중소기업에서는 근로계약서 같은 건 보여주지도 않았다. 원래 작성을 안 하는 거라나, 뭐라나. 처음 입사할 때는 분명 정규직으로 모집했지만, 정작 면접을 받고 나니 비정규직이 되어 있었고 첫 월급은 인턴 사원에 준해서 받았다.
‘생각해 보니 열 받네. 거기도 가서 뒤엎어놓고 올까?’
그런 충동이 잠깐 들었지만, 최재철에게는 먼저 처리해야 할 우선순위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규직 사원으로 등록되는 것도 그 최우선사항과 연결되는 조건이기도 했고 말이다.
진가규에의 완전무결한 복수. 그 조건에는 김인수 본인의 성공과 행복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작 10년 전의, 그것도 지금 이 순간까지 잊고 있었던 사소한 원한을 되갚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위험을 부담할 생각은 없었다. 성공만 하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완전히 리스크를 배제하고도 행할 수 있는 복수다.
“그럼 지금 바로 인사과에 가면 됩니까?”
“네, 이지희 씨도 함께 가시죠. 인사과는 10층입니다.”
그렇게 최재철과 이지희는 둘이 함께 체육관을 나왔다.
“저기, 스승님.”
체육관의 문을 닫자마자, 이지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최재철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퇴근 후에 시간 있으세요?”
“오늘 몇 시 퇴근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입사 기념 회식을 열지도 모르겠고.”
설마 첫 날부터 야근을 시키기야 하겠냐만, 최재철은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혹시나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팀장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고는 한들 말단 사원 입장에서 야근이 없을 거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현오준의 성격상, 회식을 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보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아, 그냥요. 별거 아니에요.”
어째 좀 급하게 이야기를 얼버무리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최재철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미 결정된 일이긴 하지만, 정말로 괜찮겠어? 차원 균열 탐사라는 건 확실히 위험한데.”
“뭐, 말씀드렸다시피 전 책임질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가능하면 스승님과 함께 있는 게 저한테도 더 도움이 될 거구요.”
“도움? 아아, 가르침 말인가.”
“네.”
이지희는 두 번씩이나 고개를 끄덕여가며 대답했다.
“뭐 지희 씨는 B급 어벤저이고, 지금은 경험이 부족한 것일 뿐이니 나를 금방 넘어설 거야. 내가 가르침을 받을 날도 머지않았을걸.”
최재철은 가벼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이지희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저기, 스승님.”
“어?”
갑작스럽게 진지한 목소리로 부르니 최재철의 입장에서도 약간 긴장이 되었다. 이지희의 긴장이 그에게도 전염된 것이리라.
“저, 저…….”
“뭐야, 얼른 말해.”
“지희 씨 말고 그냥 지희라고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심호흡까지 하고 한다는 말이 이거니,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맥이 빠질 법도 했다.
“그렇게 할게.”
“아… 네!”
이지희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자아, 얼른 가자고.”
“네, 스승님!”
*
최재철은 정규직으로 계약한 근로계약서를 교부받았다. 어쩌면 당연히 받아야 하는 이 권리에 최재철은 감격에 가까운 감정을 맛보았다. 그전 회사에서는 못 받은 것 중 하나이니 말이다.
먼저 연봉은 2억 2천만 원. 그가 비정규직의 입장에서 전전긍긍하며 살던 시절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높은 수준의 연봉이었다. 여기에 임무에 참가할 때마다 생명 수당과 임무의 공헌도에 따른 추가 수당이 붙는다.
괜히 다들 어벤저가 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조건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진씨 일가와 맞서 싸워야 하는 김인수의 기준으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돈의 문제는 아니다. 그는 지금 환금성이 있는 보석류와 귀금속류를 산더미처럼 갖고 있으니까. 진짜 문제는 최재철이었다. 김인수에게는 최재철이라는 인물이 그런 보물을 가질 수 있는 당위성이 필요했다.
월세도 제대로 못 내던 하류 인생이 어벤저로 각성해서 대기업에 취직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 많은 귀금속과 보석류, 그리고 일부는 지구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물질들을 어디서 가져왔느냐는 질문에는 아직 대답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필요한 게 차원 균열 너머로의 탐사다. 차원 균열 너머에서 가져왔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실제로 그가 지구에 가져온 보석류, 귀금속류, 희토류는 전부 차원 균열에서 얻은 것들이다.
그렇다고 첫 임무를 다녀왔다고 룰루랄라 대량의 보석을 전부 팔아치울 수는 없다. 그는 일개 팀원이고, 차원 균열 내부의 물질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배당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니 한 번 다녀올 때마다 조금씩 처분하는 게 기껏일 터였다.
결국 임무에 열심히 참가해야 하고, 임무마다 높은 성과를 올려서 추가 수당을 노리면서 사내에서의 입지를 넓혀가야 한다. 경험을 쌓는 척을 하며 어벤저 랭크도 슬금슬금 올려가서 차후에는 팀장 자리까지 기어 올라가야 한다.
물론 이건 단지 보석을 환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 아니라, 그가 지구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단계이기도 했다. 이계에서야 ‘어스름’의 주인이자 ‘상아탑’의 교장이지만, 지구에서는 아직 일개 어벤저일 뿐이니까.
‘가야 할 길이 멀군.’
팀장까지 기어 올라가더라도 그가 달성해야 할 목표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TA의 팀장이 WF의 회장과 다퉈서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니 말이다. 물론 단순히 힘으로 눌러 이기는 건 가능할지 모르지만, 김인수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모든 면에서 진가규를 압도하여 처치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생각하면, 정규직 근로계약서에 기뻐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자.’
다시 생각하면 첫 번째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더군다나 오늘만 꽤 괜찮은 인재를 둘이나 더 발견했다. 오연화와 구문효, 그들이 김인수의 사람이 되어줄지는 조금 더 봐야겠지만,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에게 큰 힘이 되어줄 터였다.
어쨌든 처음 서울에 돌아와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몰랐던 때에 비하면 상당히 상황이 나아졌다. 10년 전, 차원 균열 안으로 던져졌을 때에 비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근로계약서를 잘 갈무리한 후, 그는 다시금 결의를 다졌다.
*
진현우는 눈을 떴다.
잘그락거리는 금속음이 귀에 거슬렸다. 더 자고 싶은데, 그 소리 때문에 깼다. 깨자마자 머리가 엄청나게 지끈거린다는 걸 자각했다.
“아… 으……!”
그가 낸 신음 소리에,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순간 멈췄다.
“오, 깼군.”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 목소리였다. 그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머리가 뭔가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손과 발도 단단히 묶여 있었다.
“내 말을 알아듣겠나? 알아들을 수 있다면 눈을 깜박거려 보게.”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역시 언어 회로도 망가졌군. 이거 처음부터 다시 깔아야겠는데.”
그 말과 함께 뒷목에 뭔가가 지지직하고 지나갔다. 눈앞이 번쩍했다.
진현우는 기절했다.
*
기절해 버린 진현우의 머리맡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말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니…….”
왼쪽 그림자가 놀라운 듯 말했다.
“아니, 죽은 사람은 못 살려.”
오른쪽 그림자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럼 이건 뭐죠?”
“죽은 사람과 똑같이 생긴 또 다른 생명체지.”
왼쪽 그림자의 힐문에 오른쪽 그림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냥 생전의 모습을 모방한 단백질 인형 같은 존재라고 할까. 우리 갑님께서는 그래도 상관없는 모양이니, 뭐 내가 상관할 건 아니지만 말이야.”
오른쪽 그림자가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이 사람을 되살리는데 제물이 다섯 마리 들어갔다고 했죠?”
“응? 어, 그래. 되살린 건 아니지만 들어간 제물은 다섯 마리 맞아.”
“그 제물이라는 게 뭐죠?”
“빚쟁이.”
오른쪽 그림자의 대답에 왼쪽 그림자는 잠시 굳어졌다.
“…네?”
자신의 말에 왼쪽 그림자가 충격을 받은 게 재밌기라도 한 듯, 오른쪽 그림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빚쟁이라고. 혹시 뜻을 모르나? 빚을 진 사람을 뜻해. 한자로는 채무자지.”
“자, 잠깐……. 지금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내가 그랬나?”
“그러셨어요!”
딴청을 피우는 오른쪽 그림자의 말투에 놀림당하고 있다는 걸 자각이라도 한 듯, 왼쪽 그림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약간 격해졌다. 그 반응에 그만 놀려야겠다는 생각이라도 든 건지 오른쪽 그림자의 목소리가 조금은 진지해졌다.
“왜 이렇게 따지고 들어. 다 합의가 된 사항이야.”
“합의, 라니…….”
“빚을 없애주는 조건으로 자기 생명과 몸을 마음대로 쓰라는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들이지. 사실 이런 계약을 맺는 건 불법이지만, 세상이 법대로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더라고.”
“…….”
침묵해 버린 왼쪽 그림자의 반응이 기꺼웠는지 오른쪽 그림자가 여유를 되찾았다.
“뭐야, 갑자기 왜 입을 닥쳐? 우리 일이 이런 건 줄 몰랐나? 몰랐다는 말은 하지 마. 몰랐을 리가 없어. 그렇지?”
오른쪽 그림자는 왼쪽 그림자에게 대답을 종용했지만, 왼쪽 그림자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른쪽 그림자는 혀를 한 번 찼다.
“자아, 어쨌든 일이나 하자고.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아야 할 거 아니냐?”
“…그건 그렇네요. 이런 걸 만드는 재료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지? 나도 그래.”
오른쪽 그림자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푸흐흣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