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현우
김인수는 모습을 감춘 채 박기범의 자택으로 향했다. 깨진 창문 사이로 집 안에 침입한 그는 가장 먼저 박기범의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충전은 끝나 있었다. 그가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 알림이 몇 개 떠 있었다.
오원추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김전훈이 입원한 거 아냐? 내일 문병 갈 건데 너도 올래?]
그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가능성의 하나로 생각만 해두었던 건데,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다.
김인수는 박기범의 모습을 취했다. 헛기침을 몇 번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박기범이. 왜 이렇게 연락이 늦냐?]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간신히 찾았어. 그보다 뭐야? 김전훈이 입원했다는 거.”
물론 그 목소리는 박기범의 목소리였다.
[김전훈이 이상한 취미 있는 거 알잖냐. 그러다 반격이라도 먹은 모양이야.]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오원추는 박기범에 대해 별로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목소리 재현이야 완벽했지만, 말투가 문제였는데 별문제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업자득이라 이거군.”
[그거야 그렇다만 걔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라.]
“그거야 뭐. 그보다 얼마나 다쳤대냐?”
[온몸의 뼈를 다 작살을 내놨단다. 팔, 다리는 물론이고 손가락부터 갈비뼈까지 다 부러졌다던데. 그래도 신기하게 부러진 뼈가 내장까진 닿지 않아서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다 그러더라. 뭐, 격투기 챔피언이라도 건드렸나? 어떻게 그렇게 됐지?]
오원추는 재미있는 썰이라도 풀 듯 나불나불 떠들었다. 이놈도 김전훈을 별로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격투기 챔피언이라니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군.’
그걸 부러뜨린 게 나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문득 궁금해졌지만 호기심은 일단 덮어두었다.
“그래서? 내일 문병은 누구누구 가냐?”
[나랑 너.]
“시커먼 남자 둘이?”
[일단은 진현우한테도 연락했는데 그분께서 오실지 모르겠다.]
진현우.
진가규의 손자이자… 아마도 그의 신변에 닥친 불행의 원인을 직간접적으로 제공한 인물. 하지만 심증만 있지 확신할 만한 증거 같은 건 없었다.
[너도 알잖냐, 그분 A급 어벤저야. 이래저래 바쁘시지 않으시겠냐?]
“A급 어벤저라.”
[금수저가 좋은 게 뭐겠냐. WF에서 이미 한 자리 하고 있는 것 같더라.]
진현우가 A급 어벤저인 건 페이스북에다 대대적으로 자랑을 하고 있는 터라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진가규의 손자가 A급 어벤저라니. 물론 그냥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진씨 일가와 WF가 인위적으로 사람을 각성시키는 기술을 갖고 있을 가능성도 결코 낮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차원 균열로 그를 던져 넣은 게 진가규고, 지금 차원 균열 관련 산업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기업이 WF이기도 했다.
‘긴장을 풀 수는 없겠군.’
내일 진현우가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대비는 단단히 해서 나쁠 게 없었다.
“내일 몇 시?”
[백수 새끼가 뭘 그런 걸 따지고 앉았어?]
“그래서 몇 시?”
[두 시에 가자. 아, 진현우한테 연락 오면 걔한테 맞춰서 바뀔 수 있어.]
“알았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병원 이름과 위치는 이미 문자로 받은 터였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는 박기범의 침대에 몸을 던졌다. 며칠 안 써서 그런지 먼지가 피어올랐다. 휴대폰을 배 위에 올린 채 쉬고 있던 그는 부우웅 하는 진동음에 정신을 차렸다.
[현우 내일 온단다. 3시.]
문자를 받은 그는 픽 웃었다.
[알았다.]
짧게 답문을 보내고, 박기범의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은 그는 본격적으로 잠을 청했다.
*
아무리 전 세계에 차원 균열이 열리고 차원 마수, 지구에서는 어보미네이션이라 부르는 것들이 출몰하는 흉흉한 시대가 되었다 한들 서울 강남의 분위기는 10년 전에 비해 별로 달라지지도 않았다.
김인수는 이 화려한 거리와는 10년 전에도 영 인연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건 아니었다. 비정규직 시절, 심부름을 하기 위해 몇 번 지나친 게 다이긴 했지만 말이다.
오늘도 그는 강남에 놀러온 것은 아니었다. 김전훈의 문병을 위해 박기범의 모습으로 강남까지 오게 되었다. 사실 병원이 강남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진현우가 강남에서 만나서 같이 가자고 하는 바람에 오원추와 그가 일부러 여기까지 와야 했다.
그는 지금 정장을 빼입고 있었다. 정장은 그의 것이 아니고 일부러 박기범의 집에 침입해서 가져온 것이다. 그냥 위상 변화로 처리해도 될 일이었지만,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한 조치였다.
그래서 복장까지는 실물이었지만 얼굴과 몸까지도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결국 위상 변화를 취하기는 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김인수의 모습으로 난입하는 건 앞뒤가 뒤바뀐 짓이니 어쩔 수 없었다.
“A급 어벤저라. 어느 정도 능력자일까.”
진가규의 손자이자 A급 어벤저라는 진현우와 오늘 얼굴을 맞대게 된다. 지구에서의 능력자 구분은 B급까지는 대충 감이 잡혔지만, A급 이상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니는지는 김인수도 몰랐다. 그러니 그로서도 나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지는 죄가 아니지만, 약점이기는 하지.”
그는 쓴웃음을 흘렸다.
약속한 카페에 들어서자, 금요일 오후 2시 30분이라는 꽤나 장사가 잘 되는 시각일 터임에도 불구하고 안은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그리고 카페의 가장 크고 화려하고 편안한 의자에 상당한 미녀 둘을 양옆에 앉힌 진현우가 박기범의 모습을 한 김인수를 알아보고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여, 박기범이, 오랜만이야.”
대답하는 대신 그는 슥 진현우를 훑어보았다.
진현우는 온몸을 고급으로 치장하고 있었고, 그건 썩 잘 어울렸다. 아마 전문가의 코디네이션이라도 받은 것이리라. 분명 미남이기는 하지만 슬슬 20대 후반일 텐데도 아직 애송이 티가 묻어난다. 본인이 대단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대단한 사람의 혈연이라는 느낌이다.
물론 그에게는 이런 진현우의 인상이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차원력.
차원력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숨기고 있는 건지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차원력의 크기는 D급 정도에 불과했다.
‘하긴 A급 어벤저라면 자신의 차원력을 숨기고 다니겠지.’
실제로 적어도 그가 있던 이계에서는 대부분의 능력자는 자신의 차원력을 숨기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차원력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건 어설픈 애송이들 정도고, 보통 꽁꽁 숨겨서 쓸데없이 차원력이 낭비되는 것을 막고 자신의 능력도 숨긴다.
그리고 진현우도 아마 그런 부류일 것이다. 김인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D급 어벤저가 서류상으로만 A급으로 조작하고 있을 거라고 넘겨짚는 건 너무 안일하지 않은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멋대로 망상하는 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 적은 적어도 그의 인생에서는 거의 없었다.
그보다도 신경 쓰이는 건 진현우가 앉은 소파 뒤에 선 남자였다.
정장 차림에 머리는 짧게 깎고 선글라스를 낀 그 남자는 지나치지 않게 단련된 근육을 옷차림 속에 숨기고 있을 터였다. 외모야 더없이 ‘전 경호원입니다’라고 주장하는 듯 꾸미고 있었지만, 사실 평균을 넘지 않는 키 탓에 그리 위협적인 인상은 주지 않았다.
‘B급… 이로군.’
하지만 김인수는 남자의 본질을 파악했다. 어벤저다. 키나 근육 같은 게 중요할 리가 없었다. 중요한 건 능력이니까.
‘A급 어벤저의 경호에 B급이라니. 이상하긴 하군.’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빨리 왔군.”
“아니, 난 처음부터 여기 있었어. 네가 온 거지.”
진현우는 크큭 웃으며 개라도 쫓듯 여자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여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갔다.
“누구야?”
“아, 이 여자들? 내 액세서리.”
진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여자들도 그리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돈이라도 두둑하게 받는 모양이었다.
“어때? 이 카페.”
“좋은데? 왜 장사가 안 되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야 문을 닫았으니까. 전세 낸 거라고 생각해.”
“뭐?”
“이 카페가 내 것이거든. 새로 차렸어.”
“어, 그래.”
생각에 잠겨 있던 김인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진현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걸 본 진현우가 눈을 한 번 크게 떴지만, 다음 순간 여유 있게 웃었다.
“오늘은 봐준다.”
김인수는 진현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에게서 누군가의 모습을 연상해 냈다. 사막의 제왕, 그를 제물로 쓰기 위해 김인수를 차원 균열로 들여보낸 높으신 분의 표정과 지금 진현우의 표정이 겹쳐 보였다.
‘박기범도 진현우 앞에서는 한낱 똘마니에 불과했군.’
김인수는 웃었다. 그저 웃었을 뿐이었다.
“웃어?”
진현우가 눈을 부릅떴다. 제 딴에는 위엄을 보이려 한 짓일 터였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다고.’
김인수는 소릴 내어 웃었다. 박기범의 목소리로. 그러자 진현우가 일어섰다. 이 카페에서 가장 편안하고 좋은 자리, ‘왕좌’에서 일어났다.
‘칼이라도 뽑아 들고 사형이라도 명할 것 같군.’
김인수는 비웃음 섞인 시선을 진현우에게 던지며 생각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오원추가 들어왔다.
“아, 박기범이! 현우야!”
2m가 넘지는 않더라도, 180㎝는 훌쩍 넘길 거한이 살가운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평소에 단련을 하고 있는 건지, 온몸에 빈틈없이 들어찬 단단한 근육이 인상적이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원추, 왔나.”
“어, 어어…….”
오원추는 명백히 당황한 눈치였다.
‘흥, 과연 그렇군.’
박기범과 마찬가지로 이 오원추도 진현우의 똘마니였으리라. 아니, 굳이 과거형을 쓸 필요도 없으리라. 지금도 그렇겠지.
“하, 원추, 웃기지 않아?”
“뭐, 뭐가?”
“박기범이 내 앞에서 웃더라고.”
“아, 그래?”
그제야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는 듯, 오원추는 크게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리고 즉시 그 어지간하게 여자애 머리통만 한 주먹을 그에게 휘둘렀다.
“후.”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어차피 할 복수였다. 이 오원추는 인규의 오른팔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그 악업을 행했을 주먹이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그럼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끄아아아아악!”
오원추의 비명이 카페 안을 가득 채웠다. 오른팔이 부러졌다. 비명도 나오리라. 평화 속에 사는 평범한 현대인이라면 말이다. 물론 부러뜨린 건 김인수다. 주먹을 살짝 피하고 손날로 지나가는 오른팔을 툭 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뭐야?”
진현우가 당황한 듯 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진현우가 그에게 주먹을 날려 왔다. 차원력을 담은 주먹을.
“허.”
그는 어이없이 웃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주먹에 담은 차원력의 양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라면 그냥 맞아줘도 될 법했지만, 그건 좀 자존심 상했다. 게다가 만약 연계 스킬이라도 발동한다면 골치 아파질 것도 같았고.
‘역시 상대 능력을 모르니 대처하기 귀찮군.’
그래서 그는 그냥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진현우에게 분석 스킬을 슬쩍 뿌려보았다. 간파당하면 살짝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이 새끼… 이거.’
진현우의 몸속을 분석한 김인수는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 했다.
‘D급이잖아?!’
인간이 차원력을 모으게 되면 몸의 어딘가에 차원력 코일이라는 걸 생성하게 된다. 부위는 개인차가 있지만, 어쨌든 차원력이 모일수록 그것은 몸속에 용수철 형태로 쌓인다. 그 형태를 따서 김인수는 코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코일이 한 바퀴 두르는 걸 기준으로 차원력의 크기를 가늠하는데, 이 진현우란 놈은 그 코일 한 바퀴조차 채 완성하지 못했다. 이놈을 상대로는 코일은커녕 서클이라는 단어도 아깝다.
‘이런 놈이 어떻게 A급 라이센스를 땄지?’
그렇게 의문을 가지자마자 답은 바로 도출되었다.
서류 조작이다.
어벤저는 그 중요도 때문에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직업이다. 라이센스의 급이 높을수록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A급 라이센스를 가진 어벤저라면 세금 면제부터 시작해서 온갖 복지 혜택에 연금까지, 그야말로 엄청난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모든 혜택은 당연히 세금으로 이뤄진다.
이 혜택을 착복할 목적으로 라이센스의 급을 조작했으리라는 건 쉽게 상상이 갔다.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는 필요 없다. 진현우의 할아버지는 김인규의 자살로 인해 드러난 불상사를 완전히 무마해 버릴 수 있을 금력과 권력, 인맥의 소유자니까.
‘그럼 이 뒤에 있는 경호원 같은 놈은…….’
그쪽으로도 분석을 날려봤더니, 정직한 B급이었다. 뭔가 특이한 고유 능력 같은 걸 가지고 있지도 않은 스트레이트한 신체 강화 능력자. 말 그대로 그냥 경호원이었다.
“이거야 원, 긴장한 내가 바보 같게 되잖나.”
김인수는 픽 웃었다.
“진현우, 나는 어벤저다.”
“뭐?”
차원력을 실은 펀치를 회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진현우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어보미네이션 한 마리를 죽인 적이 있어. 그런데 넌 어떻지? 그 맥아리 없는 펀치로 나도 못 잡는데, 어보미네이션을 죽일 수 있겠나?”
“난 A급 어벤저야! 넌 C급이고! C급 버러지가!”
“허, 그러냐. 내가 C급인 건 어떻게 알았지?”
“너 같은 버러지는 C급이 어울리니까!”
진현우의 말에 김인수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는 팔을 들어올렸다.
“자아, 내가 뭘 하는지 보이냐?”
“뭐?”
진현우에게는 김인수가 펼친 능력이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그저 어리둥절해했다. 이놈이 진짜 A급 능력자라면 이런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 최소한 당황해서 허둥대기라도 해야 했다. 눈앞의 능력자가 자신을 초월하는 절대자임을 깨닫고 무릎이라도 꿇어야 했다.
방금 김인수가 발휘한 능력은 최고위 능력 중 하나인 차원 제어 능력이었다. 이 술집은 김인수가 차고 있는 아티팩트, 인롱의 팔찌를 매개로 한 차원 단절의 능력으로 인해 바깥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
이 정도의 고위 능력이다. B급이라도 차원력의 파동 정도는 느꼈을 거고, C급이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 정돈 눈치챘을 것이다. 실제로 진현우의 뒤에 선 경호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버러지 새끼가 허세를!”
그러나 진현우의 반응은 이거였다. 김인수는 코웃음을 쳤다.
“허, 버러지 새끼한테 맞아 뒈지는 놈은 그럼 뭐가 되지? 한 번 볼까?”
김인수는 주먹을 꾹 쥐고, 진현우에게 그걸 날렸다. 기습조차도 아니었다. 예고된 공격. 정면을 향해 날린 스트레이트 펀치.
평범한 능력자라면 당연히 반응하고 피하거나 막아야 한다. 그러나 김인수의 공격은 아무 저항 없이 진현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확 튀었다.
“우, 아?”
진현우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뇌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진현우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도련님! 이 자식!!”
경호원이 바로 소파를 뛰어넘어 김인수를 습격했다.
그러나 고작 B급 신체 강화 능력으로 그를 어찌할 수는 없다. 김인수는 경호원의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회피하고,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파직! 순간적으로 푸른 섬광이 튀었다.
“자고 있어라. 방해하지 말고.”
김인수는 전기 충격기와 같은 원리로 순간적인 고압 전류를 경호원의 몸에다 흘려 넣었다. 그 결과, 경호원은 그대로 기절했다.
“꺄아아아아악!”
한 박자 늦게 찢어질 것 같은 비명 소리가 카페 안을 내달렸다.
“도련님! 도련님이!!”
“겨, 경찰! 경찰 불러!!”진현우의 옆에 앉아 있던 미녀들과 카페 안의 종업원들이 놀라서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인수는 그들을 딱히 막거나 하지 않았다.
‘암만 경찰에 연락을 해봐라, 연결이 되나.’
차원 단절은 단순히 전파만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의 출입도 막으며 시야도 막아버린다. 지금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바깥의 인간들은 전혀 간섭하지 못한다.
진현우가 진짜 특급 능력자라서 단절된 공간에도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이 새낀 그냥 쓰레기니까.
“일어서, 새꺄.”
김인수는 진현우에게 명령했다. 진현우는 홀린 듯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놈들도 소란을 멈추고 멍하니 진현우가 일어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 나, 왜…….”
트롤 고문관의 반지의 힘이다. 김인수가 박기범을 실컷 팬 후 상처를 모두 없앴던 것처럼 진현우의 상처도 사라져 있었다.
“누가 A급이라고? 이 D급 새꺄. 아니, 너한텐 D급도 아깝다. 널 위해 E급이라는 새로운 라이센스를 만들어도 되겠어.”
김인수의 적나라한 발언에 진현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날 놀린 거냐!”
“아니, 넌 분명히 죽었었어. 그리고 또 죽을 수도 있지. 다시 한 번 죽어볼 테냐?”
“뭐……!”
진현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또 죽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그야 심장이 날아가는 경험을 했다. 그런 걸 두 번 맛보고 싶은 인간은 없으리라.
“너한테서 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진현우.”
파지지직. 그의 손끝에서 푸른 전광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타올랐다.
“널 좀 고문해야겠다.”
“……!”
진현우는 잔뜩 쪼그라든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호원은 기절해 있었고, 오원추는 부러진 팔을 부여잡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진현우 본인이 액세서리라 표현한 미녀들은 애초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카페의 종업원들은 겁에 질려 카운터 너머에 숨어들고 있었다.
“이 쓸모없는…….”
빠드드득. 진현우의 이빨이 갈렸다. 적대심 가득한 시선은 곧 김인수를 향했다.
“박기범, 이 배은망덕한 새끼……. 누가 네 죄를 없애줬는지도 잊었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진현우는 그렇게 외쳤다.
“내 죄 말인가?”
“어, 그래.”
차갑게 식은 김인수의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진현우는 다소 안심한 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김인규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기소 당했던 걸 잊지는 않았겠지?”
“그걸 어떻게 잊겠나.”
“그럼 나에 대한 은혜도 잊지 않고 있겠군!”
“어떤 은혜?”
“이 새끼…….”
“자, 말해봐. 내가 너한테 어떤 은혜를 입었지?”
시비라도 걸듯 일부러 건들거리며 말했지만, 김인수는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였다. 예상은 하고 있다. 하지만 확신이, 확증이 필요하다. 진현우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증언이라면 가장 확실하겠지.
김인수가 듣고 싶은 건 그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연기하고 있었다. 그 대답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술수에 진현우는 넘어갔다.
“김인규네 부모를 치워줬잖아! 내가!!”
진현우는 답답함 반, 분노 반이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자신의 운명을 파멸로 이끌 말을.
철컥.
그런 소리가 났다. 마치 권총의 실탄이 장전된 듯.
‘환청이다.’
김인수는 냉철하게 판단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이성은 이미 분노로 인해 달아올라 제 구실을 못 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격철음은 그의 분노에 불꽃이 피어오른 소리였다.
그래, 심증은 있었다. 하지만 확증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진현우가 자기 입으로 확증을 말해주었다. 김인수가 자신의 심증을 굳히고 확신할 근거를 직접.
‘역시 이 새끼였어.’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인규가 박기범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김인수의 어머니가 그 일로 학교에 항의를 했다. 그걸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학교 측은 박기범의 정학을 취소했고, 인규의 갈비뼈가 부러졌고, 폭행죄로 기소된 박기범에게는 무죄판결이 나왔다.
그 일을 기사화한 김인수의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의구심을 느끼고 진상을 캐낸 김인수의 아버지도 자살로 위장되어 살해당했다. 그리고 김인수 본인조차도 차원 균열 속으로 던져졌다.
이 모든 점을 선으로 잇는 존재가 진현우였다. 진현우의 존재가 학교 폭력으로 끝날 사태를 김인수 가문의 멸족으로 키웠다. 자기 친구, 아니, 부하인 박기범의 죄를 사해주겠다는 생각 하나로 네 명을 죽였다.
어느 정도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진가규라는 괴물이 등장하는 조건으로는 박기범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진현우가 뭔가를 했으리라는 생각은 했다.
그 추측을 진현우가 방금 자신의 입으로 확신으로 바꾸었다.
김인수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가 냉정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두 눈은 형형히 불타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와 복수심으로.
“사람 둘, 아니지, 인규까지 합치면 셋을 치워서 네 죄를 없애줬다. 이 정도 은혜를 입었으면 알아서 기어도 모르는 판에, 이 좆도 모르는 금수 새끼야! 너는……”
김인수는 진현우의 말이 마저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퍽.
다시 한 번 진현우의 심장이 터져 나갔다.
“억……!”
힘없는 단말마를 토해내며, 진현우는 쓰러졌다.
“일어서라, 진현우. 어보미네이션도 세 번은 죽는다고.”
“끄윽…….”
진현우가 고통스러운 숨을 토해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사실 트롤 고문관의 반지로 죽은 자는 살릴 수 없다. 그래서 김인수는 진현우가 죽기 직전에 살려내고 있었다. 그 덕에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이미 두 번이나 느낀 터라, 그의 정신은 극도로 갉아 먹혔을 것이다.
“자아, 진현우, 세 번째다. 이번엔 막아라. 못 막으면 죽는다.”
“그만! 그만해!!”
이번에 끼어든 건 의외로 오원추였다. 팔이 부러진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주인님을 위해 일어나는 꼴이 가상하기는 했다.
“박기범이, 그만해! 네 맘은 알아!!”
“뭐, 이 새끼야?”
오원추의 말에 김인수는 말 그대로 돌아버렸다.
“네가 내 맘을 안다고?”
“그, 그래!”
김인수의 격노에 주춤거리면서도, 오원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인규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도 이해해! 그 죄책감을 진현우에게 부딪히는 것도 이해는 해! 하, 하지만…….”
김인수는 벼락이 내리쳐지듯 오원추에게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끄아아아아악!”
오원추는 격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생으로 오른팔이 뽑혔다. 그야 괴로울 것이다.
‘이놈은 오른팔을 부러뜨린다고 예고했었지. 화가 난 나머지 도를 넘어선 복수를 했군.’
김인수는 큭큭큭 웃었다.
하지만 복수에 도가 있나?
“오원추, 이 새끼야, 내가 김인규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다시 한 번 말해봐라.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미, 친 새끼…….”
진현우가 입을 열었다. 잘려 나간 오른팔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오원추에게 그의 오른팔을 던지며 김인수는 진현우를 응시했다. 말할 거 있으면 더 말해보라는 의미였다.
“넌 옛날부터 그랬어……. 사디스트 같으니라고……. 너 같은 새끼한테 힘을 줘선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었지…….”
“허.”
진현우의 말을 들은 김인수는 혀를 찼다. 여기서 진현우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뭔 개소리야, 진현우.”
그런 말을 한 건 오원추였다. 뜯겨져 나간 오른팔에서 후드득후드득 피를 흘리며. 지금이라도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의 그는 기이한 흥분 상태에 잠겨 외쳤다.
“인규를 괴롭히라고 박기범한테 명령한 건, 너잖아!”
명령?
김인수는 순간적으로 오원추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랬다. 그가 오늘 여기에 와서 본 광경은 ‘왕국’이었다. 사막의 제왕이 다스리는 시골 부락과도 같은 ‘작은 사회’. 이 사회에서 진현우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박기범조차도 진현우의 앞에서는 일개 병사에 불과하다.
“그래, 내가 명령했지.”
진현우는 오만하게 말했다.
“그런데 뭐? 박기범, 이 새끼는 지가 나서서 즐겁게 김인규를 괴롭혔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나한테 책임을 돌려? 이런 후안무치한 새끼가 있나!”
“…왜 나한테 인규를 괴롭히라고 명령했지?”
박기범은 그냥 김인규와 눈이 마주쳤기에 타깃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김인규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 내 명령을 안 듣는 병사는 처형해야지.”
상황 판단이 떨어지는 건지, 진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박기범, 너도다. 너도 처형할 거야. 그래, 내 능력은 약할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집안, 진씨 가문은…….”
진현우가 말할 수 있었던 건 거기까지다.
쾅.
진현우가 폭발했다. 말 그대로. 비유나 은유 같은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그 상반신이 폭발했다. 진현우의 상반신이 피 안개가 되어버리는 것을 김인수는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쿠당.
그의 하반신이 힘없이 그 자리에 무너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는 충격에 잠겨 말을 잃고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완전무결한 공포 앞에 선 자는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뱀 앞의 개구리처럼 그저 굳어질 뿐이다.
“심플해졌군.”
김인수는 말했다.
“역시 내 원수는 진씨 가문이야.”
“박기범, 너…….”
오원추는 경악한 채 박기범의 모습을 한 김인수를 바라보았다.
“너… 뭐야?”
알아챈 건가? 내가 박기범이 아니란 걸. 그렇다면 날카롭군.
그 날카로움 때문에 목숨을 잃을 거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멍청한 척을 했을 거다.
김인수는 그런 말을 흘리지는 않았다.
“다 카운터 너머에 잘 숨었군. 잘했다.”
김인수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기절한 경호원을 한 손으로 집어 쓰레기봉투라도 던지듯 카운터 너머로 집어던졌다. 여자들의 비명 소리가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곧 그의 몸이 막대한 차원력에 의해 감싸이기 시작했다.
“자, 이걸로 끝을 보자.”
그 말을 들은 오원추의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자신의 운명을 깨닫기라도 한 듯.
다음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불꽃과 폭음이 진현우의 시체와 오원추를 집어삼켰다.
생존자들은 폭발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카운터 너머에서 나오지 못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압박감에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들리지 않았던 바깥의 소음이 카페 안에 왁 치달았다. 차원 단절이 풀린 탓이었다. 사실 몇 초 전에 박기범의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부터 들려오던 소음에 겨우 정신을 차린 그들은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진현우의 하반신과 오원추의 하반신, 그리고 박기범의 하반신이 전위 예술처럼 흩어져 있는 광경을 본 그들의 입에서는 뒤늦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박기범의 방.
푸른색으로 빛나는 원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원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박기범이었다.
정확히는 박기범의 모습을 한 김인수였다.
폭발의 화려한 불꽃 속에서 그는 슬쩍 몸을 빼내었다. 카페에 남겨진 박기범의 하반신은 고깃덩이에다 적당히 술수를 부려 놓은 것에 불과하다. 속일 수 있어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속임수였다.
어차피 들켜봐야 박기범의 신원으로 한 짓이다. 그에게까지 해가 이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후.”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세 팔찌 중 가운데 있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팔찌의 이름은 초시공의 팔찌. 그가 이계에서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사용했던 귀중한 유물이다.
이 유물은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그가 카페에서 몸을 뺄 때도 이 초시공의 팔찌를 매개로 한 순간 이동 능력으로 빠졌다. 이 팔찌의 능력 덕에 그가 지금 박기범의 집으로 이동했음까지 간파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다소 즉흥적으로 움직이고 말았군.”
그는 중얼거렸다.
“진현우를 사로잡아서 감금했어야 했어.”
인질로 쓴다고는 해도 어차피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었고, 뭔가 더 얻어낼 게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문득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 일부터가 즉흥적이었다.’
애초에 진현우가 낚일 거라고 생각하고 움직인 것도 아니다. 본래는 오원추 정도만 낚아서 팔정도만 부러뜨리고 말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복수심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작은 것도, 제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원추와 진현우를 직접 보고 진상을 알아챘을 때, 그의 복수심에는 이미 불이 붙어 있었다.
죽이지 않고 멈출 수는 없었다.
“후회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지.”
어떻게 움직였어도 이 결과에 도달했으리라.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미련을 버리고 다음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우선 진현우와 오원추의 피에 물든 박기범의 정장을 벗었다. 그리고 손끝에서 푸른 불길을 뿜어 그 정장을 태워 버렸다. 푸른 불길은 연기도 내지 않고 정장을 부지불식간에 태워 버린 후 다른 곳으로 옮겨 붙지도 않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박기범의 신원은 못 쓰겠군.’
지금까지 쓰고 있던 박기범의 모습은 이걸로 폐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살인을 저질렀으니, 이제 박기범의 모습으로 다니면 경찰에 쫓기게 될 터였다.
아니, 그 이전에 공식적으로 박기범은 죽었다. 일단은 카페에 박기범의 하반신 시체를 남겨 죽은 것처럼 처리했으니 말이다.
쯧. 그는 혀를 찼다.
진현우는 죽어 마땅한 놈이다. 용서할 생각도 없다. 죽인 것을 후회하지도, 자책감을 받을 이유도 없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진가규였다.
자신의 손자를 살해당하고도 모른 척 지나갈 진가규는 아니다.
만약 김인수 급의 대마법사가 진가규의 진영에 있다면, 장소의 기억을 열람하는 능력인 비전 능력을 이용해 카페에서 있었던 일들을 복기할 것이고, 그 자리에 있던 박기범이 사실은 살아서 빠져나왔음을 알아챌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박기범의 방에서도 그는 박기범인 채로 행동해야 했다. 만약 다른 능력자가 이 방에 와서 조사를 하더라도 아무런 힌트도 얻을 수 없도록.
그리고 이제 여기서 박기범은 완전히 증발해야 했다. 깨끗하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래도 최악의 경우에는 내가 지구로 돌아왔다는 걸 들켰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낫겠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인수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그가 지금 박기범이나 최재철의 신원을 빌려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이유가 진가규에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최악의 경우를 떠올린다면 더 이상 무모한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당분간 김인수로 움직이는 것도, 직접적인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것도 그만둬야 했다.
적어도 이번에 그가 충동적으로 저지르고 만 행동으로 인해 적들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른다. 그걸 알기 전까지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냉정해져야 해…….”
그는 주문처럼 그 말을 되새김질 했다.
박기범은 어보미네이션화시킨 후 죽이고, 김전훈은 전신의 뼈를 전부 부러뜨렸고 오원추는 팔을 뽑은 후 폭사시켜 놨다. 진현우는 세 번 죽였다. 이로써 인규의 복수는 끝냈다.
그래서 속이 시원해졌는가?
“아니.”
아니었다. 인규는 괴롭힘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동생을 자살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죽고, 그 자신도 죽을 뻔했다.
진가규의 팔다리를 꺾어놓아 진씨 가문을 완전히 무력화시키지 않는 한 복수는 완결되지 않는다. 진현우 하나를 죽임으로써 종결될 복수는 절대 아니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힘이었다. 당분간은 최재철로 움직이며 어벤저로서 경력과 힘을 쌓아야 했다. 진가규를 벌레처럼 밟아죽일 수 있는 지구에서의 힘. 금력과 권력, 정보와 인맥이 필요했다.
그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생각하면 정신이 멍해질 것만 같았다.
‘10년을 참았다. …더 참을 수 있어.’
그는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살의를 잠재우기 위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이용해 존재감을 지우고 조용히 박기범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15분 후.
박기범의 집이 폭발에 휩싸였다.
이 가스폭발 사고는 언론에서 짤막하게 다뤘다. 일개 시민의 집이 불타는 것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뉴스가 아니었다. 실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없었고. 쏟아져 나오는 뉴스 속에 매몰되어, 사람들은 잊어버리거나 아예 모르는 작은 사건이 되었다.
*
진가규가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세계적인 대기업이자 차원 균열과 어보미네이션 산업에서는 1인자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WF.
그 WF의 계열사인 WFF. WF의 소유인 차원 균열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이 회사의 부사장실로 급보가 날아들었다.
“뭐? 현우가 죽었어?”
그렇게 말한 이는 WFF의 부사장, 진현우의 아버지이자 진가규의 아들인 진가충이었다. 그 목소리는 별로 충격을 받은 것처럼도, 분노한 것처럼도 들리지는 않았다.
-예, 부사장님.
“어, 그렇군. 그 녀석, 아버지가 귀여워하셨지. 그래, 시체는 많이 남았나?”
-예? 아… 예. 하반신이 남아 있습니다만…….
“그럼 되살리게.”
진가충은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얼마나 드는가?”
-제물로 다섯 명의 희생과 12억 2천만 원 상당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인건비는 포함하지 않은 가격입니다.
“자네, 방금 뭐라고 했는가?”
진가충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다섯 명? 희생? 내가 몇 번 말해야 알아듣나?”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제물 다섯 마리가 소모됩니다.
전화 너머의 상대는 뒤늦게 눈치를 챈 듯, 자신이 사용한 용어를 바꾸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것들을 같은 인간 취급해야 쓰겠는가?”
그제야 진가충은 화를 풀었다.
“그래도 그나마 좀 적게 드는군. 하반신이 많이 남아서 그런가?”
-하, 하지만 부사장님.
“뭐가 또?”
-아드님의 두부… 그러니까 머리 쪽이 없어서…….
“기억이나 인격에 손실이 있을 수 있다?”
-그, 렇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나도 아버지도 그놈에 대해서는 잘 몰라. 내용물이 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단 말일세. 대충 자네가 알아서 쑤셔 넣게.”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전화 너머의 목소리에는 다소 체념이 섞여 있었다. 진가충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현우가 죽는 걸 본 놈들의 입은 자네들이 대충 막아두게. 언론보도도 막고. 잘 알고 있지? 그리고… 현우 죽인 놈이 있나?”
-예. 박기범이라고, 아드님의 동창생이었던 듯합니다. 최근에 어벤저로 각성했는데, 미등록 상태로 남아 있다가 이번 일을 벌였습니다.
“그거 일단 치워두게. 그래도 진씨 가문의 일원에게 손을 댔는데 대가는 치러야지.”
-아, 그런데…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자폭한 것 같습니다.
“확실한가?”
-예?
“두 번 묻게 만들지 말게. 그놈이 자폭한 게 확실하냐고 물었네.”
-하지만 시체가…….
“어벤저란 놈들이 무슨 술수를 벌였을지 알게 뭔가? 마지막으로 묻겠네. 확실한가?”
-아닙니다.
“그럼 뒤를 캐게.”
-알겠습니다.
진가충은 전화를 끊고 쯧, 하고 한 번 혀를 찼다.
“쓸데없는 데다 시간을 썼군. …자, 어디까지 했더라?”
“아… 아…….”
부사장의 의자에는 아직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녀가 앉아 있었다.
마약에 흠뻑 취해 ‘아’밖에 말하지 못하게 된 소녀의 나신을 그는 미술 작품을 감상이라도 하듯 내려다보았다. 소녀의 나신은 이미 그의 체액으로 흠뻑 젖어 더럽혀져 있었지만, 그의 중심은 아직도 만족할 줄 모르고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그래, 그래, 귀여운 것.”
그는 인형이라도 다루듯 소녀를 번쩍 들어 올리고 자신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의 배 위에 올렸다. 소녀는 마치 그런 움직임을 하도록 프로그래밍이라도 된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밤은 길고, 우린 시작했을 뿐이야. 그렇지?”
“아… 아……!”
소녀의 ‘아’ 하는 음색이 바뀌어가는 과정을 음미하며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