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벤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선 은행에 들렀다. 일단 최재철의 명의로 그의 부모님에게 50만 원을 송금한 후, 더 보낼까 망설이다가 괜한 의심을 사기 싫어서 그만두었다.
“흠, 아무리 그래도 최재철의 명의값으로 50만 원은 너무 싼데.”
최재철의 어머니가 최재철에게 보이는 태도로 볼 때, 자신의 아들이 그리 풍족하게 살고 있지는 않다는 걸 짐작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돈을 더 보내주려면 그럴 듯한 건수를 하나 만들어야겠군.”
그게 바로 어벤저 라이센스 시험이었다.
*
8년 전에 첫 번째 차원 균열이 열린 뒤로 전 세계 곳곳에도 차원 균열이 열려 각 국가는 대응에 고심하고 있었다.
사실 한국이나 미국 같은 경우는 여력이 생겨서 차원 균열을 자원의 보고로 여기는 경향으로 흘렀지만, 이런 경우가 오히려 특이 케이스에 해당됐다.
북한 같은 경우는 차원 균열이 열린 후에 몰려나온 마수를 물리치지 못해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버렸다고 한다. 당연히 체제는 붕괴했고, 어찌어찌 살아남아 탈출한 북한인 보트피플이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다.
북한 같은 꼴이 되기 싫어서라도 각 국가는 차원 균열의 봉쇄에 사력을 다했다. 그리고 그 ‘사력을 다한다’는 것에는 어벤저의 육성과 관리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여기가 어벤저 자격 라이센스 평가장인가.”
그리고 김인수는 지금 최재철의 모습으로 그 국가가 육성하고 관리할 어벤저를 뽑는 국가 공인 시험장 앞에 서 있었다. 옛날에 땄던 운전면허 시험이 생각나서 그는 피식피식 웃었다. 국가 공인 시험이라니, 이건 상상하지 못했다.
좀 알아보니 어벤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또 아니었다. 이 어벤저 자격을 얻는 데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고 한다.
“뭐 이상한 걸 만지라고 하는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 그걸 만지면 색이 변한다고 하더라고요. 박기범 씨는 어보미네이션을 참 깔끔하게 처리하셨던데, 그런 재능이 분명 있을 겁니다. 한번 시험을 봐보시는 게 어때요?”
이틀 전에 박기범의 집에서 만난 특수부대의 대장은 박기범의 모습을 한 김인수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김인수는 눈치를 챘다.
‘차원력 측정이로군.’
김인수도 그랬듯, 계약마와의 계약으로 힘을 얻은 이들은 신체와 영혼뿐만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변이하게 된다. 차원 능력자가 되는 원리 자체는 어보미네이션이 되는 것과 같지만, 계약으로 얻은 힘을 자신의 의지로 사용하게 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몇몇 괴물의 신체 일부는 이렇게 변이한 존재의 힘에 어떤 반응을 보인다. 색이 변하는 것도 있고, 크기가 변하는 것도 있다. 위협적인 존재를 인지하고 보호색을 띠거나 위협을 하기 위해 보이는 반응인데, 죽어서까지 그 기능이 유지되는 것들도 있다.
김인수가 끌려갔던 세계에서도 흔히 사용됐던 측정 방식이었다. 그리고 김인수는 이 측정 방식을 속이는 방법까지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떤 괴물의 뭐가 나오느냐, 로군.”
말로는 그런 소릴 하면서도, 김인수는 휘파람을 불며 여유 있게 어벤저 라이센스 평가장으로 들어갔다.
*
사람들이 빼곡히 차 있는 라이센스 평가장은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인수는 자신이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전에 보았던 입사 면접시험장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비슷할 만도 했다. 여기에 와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자신의 인생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와 불안을 안고 있을 테니까.
김인수는 최재철의 모습으로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대기자는 많았고, 합격자는 적었다. 결과를 믿지 못하고 몇 번이고 다시 하려다 끌려 나가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풀이 죽어 축 처진 어깨로 비틀대며 걷는 인간도 있었다.
그런 걸 남 일이라도 보듯 멀뚱히 구경하고 있던 김인수, 아니 최재철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어, 최재철 아냐?”
최재철은 말을 건 인간을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최재철보다는 15㎝ 정도 키가 더 커 보이고 체격도 다부졌지만 잘 단련된 근육질 몸과는 걸맞지 않게 얼굴은 묘하게 비겁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이 새끼가 형 봤으면 네가 먼저 인사를 해야지.”
최재철이 대답하지 않자, 그 남자는 냅다 최재철의 뒤통수를 후리려고 손을 들었다. 최재철은 가볍게 그 시도를 막아내고 물었다.
“누구?”
“하, 나 참. 이 새끼가!”
화가 난 남자는 욕설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소리가 긴장된 대기실의 시선 모두를 끌어모았다. 남자는 완전히 사회성을 잃어버린 짐승은 아닌 듯, 그 시선에 위축되어 조용히 앉았다.
“나 진짜 기억 안 나냐? 하긴, 3년 만에 만나는 거긴 하지만…….”
“기억 안 나는데.”
“어, 그래?”
남자는 뻘쭘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같이 노가다 알바 했던 이상렬이야, 나.”
태도로 보아 뭐, 친구나 동창인 줄 알았더니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3년 전에 고작 일주일 같이 일한 게 전부였던 지인이었던 모양이다.
“너도 어벤저 면허 시험 받으러 왔냐?”
“응, 뭐.”
“허, 네가 뭐 어벤저 재능이 있겠냐?”
이 남자의 성격은 원래 이런 것 같았다. 한 번 인간을 얕잡아보면 끝도 없이 얕잡아봐, 안하무인격으로 나오는 무례한 인간. 이런 인간은 김인수가 끌려갔던 이상한 세계에도 많았다. 정확히는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족이었지만, 그거야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런 타입의 인간은 한번 손을 봐주는 게 가장 좋지만, 최재철은 그냥 이 남자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손목을 비틀어 버리는 건 쉽지만, 그런 식으로 주변의 시선을 끌어모으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한국에서 폭행은 범죄다. 박기범이라면 모를까, 최재철의 신분으로 전과자가 되는 건 피하고 싶었다.
최재철의 무시에 이상렬도 발끈한 것 같았지만, 그도 쓸데없이 관심을 사는 건 싫었던지 더 이상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최재철의 차례가 되었다.
측정실 안에 들어가 보니, 안에는 네 명의 참관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 잘 보이도록 측정용 시약들이 유리 상자 속에 담겨진 채 놓여 있었다.
참관인들은 모두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오전 일찍부터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운 채 참관 중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최재철은 테이블 위의 측정용 시약들을 바라보았다.
‘차원 박쥐의 눈알, 변색 도마뱀의 꼬리, 투명 마수의 비늘인가.’
차원 박쥐의 눈알이 가장 민감하고, 그 뒤로는 변색 도마뱀과 투명 마수의 차례였다. 모두 차원력에 반응해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마수들이다. 잘 모르긴 하지만 차원 박쥐가 D급, 그 뒤로 C급, B급을 판가름하는 시약일 터였다.
‘자아, 이제 어쩐다.’
투명 마수의 비늘을 반응시켜 B급이 되는 건 쉽다. 김인수의 입장에서는 최재철의 정체가 김인수인 것만 안 들키면 되니, 처음부터 B급을 받아버리는 것도 괜찮긴 하다. 슈퍼루키로 처음부터 주목받으며 온갖 지원을 다 받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최재철은 그게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초심자는 그만큼 자주 시비에 걸리게 마련이다. 시기와 질투는 물론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견제를 당하거나 다른 세력에 휩쓸릴 수도 있다.
그냥 힘과 기술만 치면 최상급의 어벤저일지라도 ‘지구의 어벤저’로서는 초심자인 최재철로서는 지식과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강자들의 견제로 행동에 차질이 생긴다면, 아예 어벤저가 되지 않는 것이 낫다.
그렇다면 최재철이 내려야 할 결론은 이거였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시작해서,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최고의 존재라도 처음부터 재능을 타고나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보다는 밑바닥부터 산전수전 겪으며 성장한 자가 그래도 덜 질시 받는다. 자신도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동질감도 얻을 수 있을 테고.
성장하는 도중에 견제를 받지 않은 채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수도 있다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세력을 구축하고 커버린 후에는 견제 좀 받아도 상관없다. 그때는 최재철의 명의로도 날뛸 수 있게 되리라.
‘어쨌든 지금은 어벤저가 되어야 하니 박쥐 눈알만 반응시킬까.’
결론을 내렸으니 이제는 행동이다. 최재철은 자신의 차원력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차원력을 뻗자, 차원 박쥐의 눈알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곤에 젖어 있던 참관인들이 갑자기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재철 씨? 맞죠?”
최재철은 참관인들이 왜 이러는지 모른 채 당황했다.
“맞습니다만.”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그 말을 한 참관인의 눈에는 기대감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다른 참관인들은 조심스럽게 유리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그제야 최재철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챘다.
그는 지금 테이블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진 상태였다. 거리도 떨어진 데다 유리 상자를 덮은 상태에서 시약이 반응했으니, 참관인들 입장에서는 놀랄 만도 했다.
‘측정 방법을 내가 착각한 모양이로군.’
최재철은 서둘러 차원력을 거두었다. 물론 차원 박쥐의 눈알은 반응하도록 내버려 둔 채, 그 상태로 시약들 앞에 다가갔다.
“손을 뻗어서 측정 시약들을 만져보세요.”
그가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약들이 반응하지 않았지만, 참관인들은 아직 기대감을 접지 않은 채 재촉했다.
물론 최재철이 일부러 차원력을 숨겼으므로 그들이 기대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한데… 이런 일도 있나?”
참관인 중 한 명이 실망스러운 한숨을 토해냈다.
“최재철 씨, D급 어벤저 판정입니다. 축하합니다.”
다른 참관인들도 다시 자리에 널브러지듯 앉았다. 축하한다는 말이 그렇게 안 어울리기도 쉽지 않은 태도였다.
최재철은 뜻대로 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측정실을 뒤로했다.
“너야 뭐, D급이 딱 어울리지!”
멋대로 평가표를 들여다본 이상렬이 그를 비웃었다. 물론 최재철을 그를 무시했다. 곧 이상렬의 차례가 돌아왔다.
“흥, 형 하는 거 잘 봐라.”
이상렬은 콧방귀를 뀌며 측정실로 향했다.
잠시 후, 이상렬에게는 어벤저 재능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꽥꽥 돼지 멱따는 소릴 내며 측정실에서 끌려 나오는 이상렬을 못 본 척하고 최재철은 시험장을 뒤로했다.
*
어벤저 라이센스를 얻은 최재철은 어벤저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휴대폰과 비슷한 어벤저용 단말기를 입수했다.
이것은 어벤저 라이센스를 증명하는 도구인 동시에 어벤저 전용 네트워크인 ‘어벤저.net’에 접속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기본적이고 고전적인 스마트폰의 기능도 모조리 들어 있으니 상당히 편리한 도구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최재철이 어벤저가 되었으므로 어벤저들이 사용하는 네트워크 시스템에도 가입할 수 있게 되었고, 적어도 차원 균열과 어벤저 업계에 대해서는 일반 인터넷보다 더 신뢰도가 높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어벤저.net에 접속해서 새로 알게 된 사실로는 이런 것이 있었다.
D급 어벤저는 어벤저라는 이름만 달고 있을 뿐, 일반인이랑 그리 차이가 없다. 어벤저 자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D급 라이센스로는 취직이 힘들어 교육을 통해 C급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이거라도 따려고 애 쓰는 인간이 많은 건, D급 어벤저는 가능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차원력이 전혀 없는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지만, D급이라도 있다는 건 노력 여하에 따라 성장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D급 어벤저는 일단 국가에서 취직할 때까지 최대 3년간 연금이 나오고, 8시간의 필수 교육과 100시간까지의 선택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그걸 알게 된 최재철은 약간 후회했다.
“그냥 처음부터 C급을 딸 걸 그랬나.”
하지만 원래 D급이었다가 필수 교육과 선택 교육을 받는 중에 성장하고 각성해서 C급이 되는 케이스가 처음부터 C급이었던 경우보다 더 많다고 하니, 오히려 그의 선택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필수 교육을 받으며 아슬아슬하게 C급으로 성장했다는 시나리오가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최재철은 귀갓길에 올랐다.
*
다음 날, 최재철은 지정 어벤저 교육장으로 나갔다.
어제 평가장에서 그렇게 많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벤저 교육장에는 사람들이 득실득실 댔다. 이게 다 D급 어벤저라니, 취직이 잘 안 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오전 동안의 수업은 최재철에게는 지겨울 뿐이었다. 차원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으로 발현시키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교육으로, 완전히 기초 중에 기초였다.
차원력으로 한 가지 능력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능력자를 넘어서서, 다양한 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받은 최재철에게 이런 교육은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간신히 졸음을 버텨내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조금 바뀌었다.
“여러분의 어벤저 능력이 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 자신조차요! 하지만 여러분이 잠재 능력이 있다는 것은 어벤저 라이센스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능력이든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실습에 임하십시오.”
C급 어벤저인 교관이 말했다. 각 실습자들 앞에는 백색의 A4 용지가 나눠져 있었다. 이걸로 이제부터 실습 훈련을 할 모양인 것 같았다.
“종이에 손을 대고, 능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하십시오.”
특이한 방식이로군, 라고 최재철은 생각했다.
“느긋하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필수 교육 중에 어벤저 능력을 각성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각성이 늦는다고 능력이 뒤떨어지는 경우도 없습니다.”
교관의 격려가 버릇처럼 이어졌다. 교관 입장에서는 매일 하는 말을 오늘도 한 것일 뿐이리라. 그만큼 필수 교육만으로 능력에 각성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럼 한번 해볼까?’
옛날로 돌아가 초심을 되찾는다는 느낌으로 최재철은 종이에 손을 내밀었다.
‘첫 속성으로는 뭐가 좋을까?’
차원 능력이란 건 차원력을 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른 힘으로 변환하는 데서 일단 시작한다. 열에너지나 전기에너지 같은 게 가장 대표적이긴 하리라. 이미지화 하기 쉬운 만큼 흔할 테고.
아무리 밑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린다지만 너무 흔한 속성으로 시작하는 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흔한 건 가치가 없어 보이게 마련이다. 실제 가치와는 상관도 없이.
그러므로 최재철이 고른 속성은 다른 것이었다.
파삭.
최재철이 종이에 차원력을 조금 불어넣자, 종이가 날카롭게 잘렸다.
절단 능력. 굳이 속성으로 따지자면 바람일까.
종이가 잘려 나가는 소릴 들은 교관이 눈에 띄게 놀랐다. 하지만 교관은 직업인답게 곧 평정을 되찾았다.
“벌써 능력에 각성한 분도 계시군요. 굉장히 드문 예입니다. 37번… 최재철 씨, 다음 단계로 넘어가시죠.”
교관은 교보재 상자에서 흰색 플라스틱 판을 한 장 꺼내어 최재철 앞에 놓았다.
“여기에 능력을 발휘해 보시죠.”
“네.”
최재철은 대답하고 플라스틱 판에 손을 뻗었다.
와지직!
플라스틱 판이 잘려서 결대로 쪼개졌다.
“어… 그… 최재철 님의 능력은 굉장히 스트레이트한 파괴 능력이로군요.”
교관은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며 손에 든 단말에 뭔가 열심히 기록했다. 그리고 교보재 상자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듯 먼지가 쌓인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금속판이었다.
“다음은 이겁니다.”
“네.”
최재철은 대답하고 금속판에 손을 뻗었다.
깡!
경쾌한 소리와 함께 금속판이 반으로 잘렸다.
그것을 본 교관은 서둘러 교실에서 나갔다. 나가면서 전화기를 꺼내드는 게,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려는 것 같았다. 교실 안의 모든 이가 그를 주목하는 것이 보였다.
‘아… 너무 오버했나?’
눈물 나도록 지겨웠던 오전 수업과 지구에서의 차원력 측정에 대한 흥미가 섞여서 약간 지나치게 능력을 발휘해 버린 모양이었다.
“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여자애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머뭇거리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한 듯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화장기가 없어서인지 어려 보이는 인상에, 별로 꾸미지도 않았는데도 꽤 예쁘장한 모습이었지만 최재철이 주목한 건 그런 그녀의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의 차원력이었다. 아직 힘을 제어하는 방법도 몰라서 그 육신에서 넘쳐나 넘실거리고 있는 방대한 차원력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아, 그게……. 흠, 손 만져도 되나요?”
“네? 어…….”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최재철은 물론 여자애 손 한번 만져보겠다고 수작을 부린 건 아니었다. 결국 다른 것보다 호기심이 더욱 컸던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여자애의 손가락 끝만 살짝 만졌다.
빠직.
살짝 차원력을 흘렸을 뿐인데, 그녀의 손끝에서 정전기가 일듯 섬광이 한 번 반짝였다.
“어?”
여자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최재철은 한 번 슬쩍 웃었다.
그때쯤 교관이 돌아와서 여자애는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빨리 C급에 도달하는 실습생이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해서 교보재 준비에 미비가 있었군요. 실습을 계속 하도록 하죠. 자, 그럼 다시…….”
교관은 마치 고무처럼 보이는 이상한 소재로 만들어진 교보재를 최재철의 앞에 내려놓았다.
“시작하시죠.”
더 이상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던 최재철은 더 이상 차원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새로운 교보재를 손에 쥐어도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대각선 뒷자리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에 최재철이 손을 만진 여자애가 범인이었다. 종이 전체가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신비로운 광경에 모두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42번 이지희 님이로군요.”
교관은 조금 전보다는 냉정하게 대응했다. 여자애, 이지희의 앞에 금속판과 플라스틱 판을 차례로 내려놓고, 둘 모두에다 이지희가 푸른빛을 발생시키자 최재철이 일부러 반응시키지 않았던 새 교보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최재철이 예상했던 대로 이지희는 새 교보재에도 능력을 발휘시켰다.
그러자 이젠 모두의 이목이 이지희에게 쏠렸다.
“손! 제 손 좀 잡아주세요!”
교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이지희에게 이런 소릴 하는 남자도 나올 정도였다. 상황이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자 최재철은 남몰래 빙그레 웃었다.
최재철이 아까 이지희에게 한 건 그녀의 몸속에서 막혀 있던 차원력의 통로를 바깥으로 뚫어준 것뿐이다.
그녀는 방대한 차원력을 갖고 있었지만 그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D급 판정을 받았을 것이고, 이 교실에서 실습을 이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통로가 뚫린 지금은 B급 이상의 판정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이지희의 존재가 두각을 드러낸 덕분에 이 교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그녀가 되었다. 최재철은 필수 교육 첫날에 C급 판정을 받은 이 교실의 유일한 학생이었지만, 하루만에 B급을 받은 이지희에 비하면 그리 화제가 되지도 않았다.
*
필수 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최재철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이지희였다. 오늘 교육 중에 최재철이 차원 능력을 개통해 준 여자애다.
최재철은 이지희의 옆으로 돌아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최재철을 불렀다.
“잠깐만요!”
솔직히 별로 엮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도 좀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니, 이게 아니잖아요.”
“뭐가요?”
“오늘 고마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별 말씀을, 그럼.”
감사 인사를 받는 건 나쁘지 않았다. 최재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고 다시 제 갈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러자 이지희는 최재철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아, 잠깐만요.”
“네?”
“저, 저기… 같이 식사라도 안 하실래요?”
뒤늦게 부끄러움이 찾아오기라도 한 건지,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으며 여자는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최재철은 생각했다.
그의 방에는 조리 도구 따위는 없다. 평소에는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 게 분명한 방의 광경이 떠올랐다.
즉, 저녁 식사는 어차피 외식을 해야 했다. 혼자 밖에서 밥 먹는 거야 별로 상관없었지만, 한국에선 그런 광경이 이상하게 시선을 끈다는 것을 뒤늦게 생각해 냈다.
침묵에 잠긴 최재철의 모습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이지희는 급하게 덧붙였다.
“제가 쏠게요!”
“가시죠.”
더 달리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
교습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본식 돈가스 전문점으로 향한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시간대도 아직 이른지라 다른 손님은 거의 없었다.
“저한테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자리에 앉자마자, 이지희는 최재철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 왔다. 더 이상 호기심을 참지 못해 다른 거 다 생략하고 질문부터 던졌다는 인상이다. 평소부터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이리라.
“뭐 말이죠?”
“오늘 수업 시간에…….”
냅다 질문부터 던진 게 실례인 걸 뒤늦게 깨달은 탓인지, 이지희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렇게 보면 귀여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제대로 꾸미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꽤 예쁘장한 외모도 한몫하고 있었다.
“아아, 그건…….”
최재철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냥 아가씨가 예뻐서 손 한번 잡아보려고 수작 부린 거예요.”
“그런 거였다면 이 자리에서 밥을 제가 쏘진 않겠죠? 이 자리도 제가 거의 억지로 간신히 만든 것 같은데. 최재철… 씨가 제게 호감이 있는 거였다면 밥값을 내는 건 제가 아니라 최재철 씨였겠죠.”
이지희는 뺨을 부풀리며 곧장 반론을 던져왔다. 그런 그녀의 반론에 최재철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 로스까스 시켜도 되나요?”
그 대꾸에 이지희는 삐친 듯 최재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손을 들어 외쳤다.
“여기요, 로스까스 두 개 주세요.”
주방에서 직접 예, 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주문이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이지희는 최재철을 노려보았다. 나는 밥을 샀으니 너는 대답을 하라는 강렬한 주장이 담긴 시선이었다.
“진짜 별거 아닌데. 전 그냥 종이에다 대고 한 걸 아가씨 손에다 한 것뿐이에요.”
“…종이는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았나요?”
“네. 그러니 사실 아가씨 손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수도 있죠. 제 능력이 C급에 불과해서 아무 일도 안 생기기는 했지만.”
농담조로 말하기는 했지만 부분적으로 사실인 대답이기는 했다. 실제로 그가 출력을 조절하지 않았더라면 이지희의 손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대답을 들은 이지희는 최재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거짓말.”
“네?”
“얼굴에 쓰여 있어요, 거짓말이라고.”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한 이지희는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런 이지희의 말에 최재철은 내심 당황했다.
‘이 아가씨에게 거짓 탐지 능력이 발동한 건가. 그런 건 탐지 못 했는데.’
최재철의 표정을 보고 그가 불쾌해한다고 생각한 건지 이지희는 당황하며 급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농담이에요. 혹시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뇨, 저야말로. 아가씨 손을 찢는다느니 이상한 소릴 먼저 한 건 저니까.”
“사실 이런 이야기보다는… 고맙다는 말씀을 먼저 드렸어야 하는데.”
“네?”
이지희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최재철 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능력을 사용하는 법도 몰랐을 거예요. 그래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도… 있었어요.”
“아뇨, 이지희 씨는 제가 아니었어도 능력에 눈뜨셨을 겁니다. 그렇게 방대한 차원력을 갖고 계시니 시간 문제였죠.”
“차원력?”
이지희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뭐죠?”
그녀의 반응에 최재철은 아차 했다. 한국에서는 차원 능력을 차원력이라는 자원을 소모해서 사용한다는 개념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계에선 다 아는 거라고 필수 교육의 이론 시간을 대충 넘겨 버린 것은 실수였던 모양이다.
“아, 제가 어벤저에 관심이 많아서 번역서로 먼저 공부를 했었거든요.”
최재철은 그렇게 방금 생각난 변명을 해보았다. 그러자 이지희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건 저도 그래요. 요즘 어벤저에 관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차원력이라는 단어는 처음 듣는데, 그게 뭐죠?”
최재철은 이지희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모양이었다.
“차원력이라는 건 차원 능력… 아, 한국에서는 어벤저 스킬이었나요? 어벤저 스킬을 발동시키는데 필요한 자원이라고 이해하시면 편합니다.”
“자원이요?”
“네. 뭐… 마법을 사용할 때 마나가 필요한 거라고 생각한 것과 같습니다.”
“아아.”
이지희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마법 같긴 하네요. 이 어벤저 스킬이라는 거.”
손끝에서 파직거리는 스파크를 잠깐 일으켜 보이며, 이지희는 대답했다.
“네, 그러니까 능력을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자원이… 차원력이 소모되니까요. 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절로 차오르기는 합니다만 쓸데없이 남용하는 건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요.”
최재철의 말에 이지희는 곧 스파크를 꺼뜨렸다. 그러다가 문득 얼굴을 들어 최재철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스승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뭐, 그거야 별 상관없습니다만, B급 어벤저가 C급 어벤저를 상대로?”
“제가 모르는 걸 가르쳐 주시는 분이 스승님이 아니면 뭐겠어요.”
이지희는 웃으며 대답했다.
*
최재철은 어벤저용 단말기에 등록시킨 이지희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뭐, 인맥이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은 이지희의 성격은 약간 부담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꽤나 유능한 인재가 될 터였다.
지금은 일개 B급 어벤저지만, 그것은 그녀가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판정된 것에 불과했다. 그 막대한 차원력을 제대로 활용하게 되면 A급 어벤저는 물론이고 다양한 차원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마법사로 성장할 수도 있다.
그래 봤자 가능성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 말은 맞다. 지금 이지희는 당장 차원 균열 안에 던져 넣으면 B급이 아니라 그냥 단번에 죽어나갈 초심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더욱 많은 수련과 교육을 필요로 한다.
바로 최재철 같은 스승의 가르침을 말이다.
그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건지 어떤 건지는 몰라도, 이지희는 최재철을 상당히 따르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하고 부르며 쫓아다니는 모습이 귀엽게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기본 바탕은 꽤나 귀여운 얼굴이기도 하고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최재철은 고개를 저었다.
여자 얼굴에나 홀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김인수는 복수자다. 불법적인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이 처벌하지 않은 자를 그의 손으로 처벌하고, 죄 지은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죗값을 물리는 대가로 그는 범죄자가 될 것이다. 김인수는 그러하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단말기를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어차피 최재철로서의 인맥이다. 불상사가 생기면 최재철이라는 신원은 감춰 버리면 그만이다. 만약의 경우가 닥쳐오더라도 그녀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이지희는 김인수를 모르고, 김인규에 대해서도 모를 터였다. 완전무결한 부외자다.
이지희는 최재철로서만 상대한다. 이 원칙만 지킨다면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오히려 갑자기 관계를 끊어버리고 쓸데없이 원한 관계를 만드는 편이 더욱 위험하다.
그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이지희에 대해 생각하는 건 이걸로 끝이었다. 최재철의 역할도 오늘은 이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김인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