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해서 복수한다-3화 (3/32)

3. 최재철

어벤저(Avenger)라는 단어는 복수자라는 뜻의 영어 단어이다. 이 단어가 단순한 영단어에서 어떤 직업을 가리키기까지의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8년 전의 대재해, 차원 균열이 열리고 어보미네이션들이 쏟아져 나와 한국에 큰 피해를 입힌 그 사건. 아직 어보미네이션의 정체도 제대로 모르던 그 시기에, 주한 미군 사령관이 정체불명의 적들에 대한 반격을 시사하며 자신의 직속 부대원들에게 한 연설이 있다.

[제군들, 적들은 선전포고도 없이 민간인과 우리의 전우인 한국군, 그리고 우리에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평화는 깨졌고, 적들의 기습에 우리는 많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 공격을 결코 묵과할 수 없다.

제군들, 우리는 군인이기에, 명령받았기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의의 수호자로서 싸워야 한다. 평화를 해치고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의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복수의 철퇴를 우리는 휘둘러야 한다!

그렇다! 제군들은 이제부터 정의의 복수자다! 제군들이 행하는 것은 임무가 아니라 보복이다! 멋도 모르고 인류에게 이빨을 드러낸 저들에게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라!!]

이 연설은 후일 언론에 공개되었고, 그 이후 용감히 싸워준 저들 부대원은 어벤저 오브 저스티스(Avenger of Justice), 즉 정의의 복수자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말이다.

이 연설 이후, 용감하지만 무모한 돌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부대원이 몰살당하고 말지만 그들은 임무를 완수해 냈다. 치열한 싸움 끝에 어보미네이션들을 처치하고 차원 균열 쪽으로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몇몇의 부대원이 살아남았는데, 그들은 후일 어벤저 스킬이라고 불리게 되는 특수한 힘을 휘둘러 큰 활약을 펼쳤다. 김인수가 차원 능력이라고 부르는, 차원력을 이용한 그 특수 능력이 맞다.

그들이 어벤저 스킬을 발휘하는 모습은 영상으로도 남아 전 세계에 퍼졌는데, 덕분에 이후에 나오는 능력자들도 어벤저 오브 저스티스라 불리기 시작했다.

어벤저 오브 저스티스. 풀 네임은 일단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뉴스에서조차도 이렇게 쓰지는 않았다. 그냥 어벤저라고 칭하면 다 알아들으니까. 그리고 이 어벤저라 불리는 능력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차원 균열이 열리게 됨에 따라 어보미네이션 토벌의 핵심 전력으로 부상했다.

어벤저라는 직업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어벤저라는 직업은 꽤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딱 듣기에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직업일 텐데도 인기가 있는 이유는 굉장히 단순했다.

몸값이 비싸다!

차원 균열은 세계적인 문제라 인류 전체가 힘을 합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래도 자국의 어벤저를 확보하고 관리하는 데 각국이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각종 특혜를 주기까지 했다.

그러니 우연찮은 기회에 어벤저 스킬에 눈이라도 떠서 어벤저가 되면 인생 역전 스토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차원 균열이 가장 먼저 열린 여파도 있어서 이래저래 평범한 사람들이 살기 참 팍팍하니, 어벤저가 인기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걸 박기범의 신분으로 하긴 좀 그런데.”

어벤저에 대해 알아보면서 김인수는 그런 혼잣말을 했다.

수입도 높고 사회적인 인식도 괜찮다. 비록 위험도도 높고 힘들기도 하다지만 그거야 큰 문제가 아니다. 거의 중세 사회의 기사 같은 존재 아닌가?

더군다나 어벤저라는 명칭.

복수자.

애초에 복수만을 위해 지구로 돌아온 그에게 딱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는 직업이었다.

“박기범 외의 신분을 취득해야겠군.”

그렇다고 김인수의 명의로 어벤저 신분을 얻었다가는 이 세계에 내가 돌아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꼴이니 쉬이 선택할 수는 없었다. 그가 복수해야 할 대상들에게 쓸데없이 경계심을 안겨줄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은 주민등록 제도가 있어서 새로 신분을 얻기가 쉽지 않다. 결국은 불법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충분한 자금이 있다. 800만 원 정도로 새 신분을 얻을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건 지금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

“흠… 골치 아프군.”

김인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신분 세탁이라는 게 역시 말만큼 쉽지는 않았다. 특히나 그냥 인터넷으로 뒤지는 정보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새 여권과 신분을 사는 장면이 나와서 가볍게 생각했지만, 역시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대충 찾은 정보에 따르면 신분 세탁에 걸리는 시간은 기본적으로 3개월 이상, 그것도 대한민국의 국적은 힘들고 홍콩이나 중국 국적을 취득해 한국에 귀화하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아니면 북한인으로 신분을 위장해서 탈북민으로 가장하든가.

그러나 이렇게 만든 신분은 메리트가 거의 없고, 잘못하면 송환 조치가 내려져 가본 적도 없는 홍콩이나 중국 같은 곳으로 보내질 수도 있었다.

물론 만약의 일이라는 게 생기면 김인수는 차원 능력을 사용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럴 거면 애초에 아예 신분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

이래저래 따져보니 박기범이라는 인간이 쓰레기이긴 했지만 그냥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그 신분에는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있었다.

“아, 그냥 박기범으로 해?”

골치가 썩은 나머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일어난 순간, 김인수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지갑이었다. 뒷자리의 손님이 그냥 두고 간 것 같았다. 김인수는 그 지갑을 주웠다.

“저런, 쯧쯧.”

김인수는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이런 습득물은 경찰에 가져다주는 게 원칙이겠지만 그렇다고 경찰서에 갈 마음은 없었다. 박기범의 신분인 채로 선행을 베푸는 건 약간 꺼려졌고, 김인수의 신분을 밝힐 수도 없으니 결국 선택할 길은 하나였다.

직접 찾아다 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란 생각도 들긴 들었지만,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을 잘 아는 이상 최대한 빨리 찾아다 주고 싶었다. 그리고 김인수에게는 그럴 만한 수단도 있었고 말이다. PC방에서 나온 김인수는 바로 그 수단을 실행했다.

“자아, 네 주인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라.”

지갑에 추적 마법이 발동해, 그의 눈에만 보이는 은빛 실을 생성해 냈다. 한쪽 끝은 지갑과 연결된 이 실의 끝에 지갑의 주인이 있을 터였다. 김인수는 짧게 숨을 내쉬고 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는 그럭저럭 상쾌했고, 걷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뭐, 산책 삼아 가볼까.”

김인수는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5분쯤 걸었을까.

차원력의 폭발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계약마와 계약한 탓이리라. 이 정도로 큰 차원력이라면 아마도 어보미네이션으로의 변이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컸다.

상급 계약마는 차원 균열 너머에나 틀어박혀 있을 테니, 계약마에 의해 존재를 빼앗기는 형식의 계약이 아니라면 이 정도로 폭발적인 차원력이 발생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직후 불과 몇 분 후, 새벽 공기를 가르는 헬기의 로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김인수는 그 로터 소리의 의미를 금방 파악했다. 이미 한 번 들어본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헬기 소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그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과 같았다.

불행히도 그가 들고 있는 지갑의 주인이 저 차원력의 폭발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골목을 돌자 그가 예상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피투성이 시체가 셋, 그리고 포효하는 검은 사자.

김인수는 자신이 든 주인 없는 지갑과 연결된 은빛 실의 끝을 바라보았다. 은빛 실은 사자와 연결되어 있었다.

김인수는 반사적으로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매개로 한 투명화의 능력을 써서 기척을 숨겼다. 사자는 김인수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다.

대신 사자는 피투성이 시체들을 코끝으로 툭툭 건드리더니, 입을 쩌억 벌렸다. 악어와도 같은 촘촘한 이빨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사자가 아니다. 차원 괴수, 지구에서 말하기를 어보미네이션이다. 사람들의 시체를 포식하기 시작한 사자를 바라보며, 김인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저 사자, 하급 어보미네이션인 크로코리언을 잡는 건 적어도 김인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박기범의 집과 달리 여긴 공터고, 사람들 눈에 띌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리 반지 운반자의 팔찌가 있다지만 마수 사냥 같은 자극적인 행동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 들린 헬기의 로터 소리는 이쪽으로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김인수의 예상대로 헬기는 공터의 상공에서 멈췄다. 헬기에서 내린 무장 집단이 자동소총을 사자에게 겨누며 외쳤다.

“손들어, 꼼짝 마!!”

크로코리언은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곧장 무장 집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걸 예상이라도 한 듯, 자동소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크로코리언은 소총탄을 맞고 타격을 입어 비틀거렸지만, 곧 가장 가장자리에 선 병사를 향해 악어의 입을 벌렸다. 저대로라면 희생을 피할 순 없으리라.

‘하는 수 없군. 조금만 도와줄까.’

저 병사도 무장을 하고 있는 이상 죽을 각오는 하고 여기에 왔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는 꼴을 지켜만 보기 좀 그랬던 김인수는 살짝 수를 썼다.

‘슬로우.’

크로코리언의 시간이 느려지며, 움직임이 약간 굼떠졌다. 병사가 크로코리언의 쩍 벌린 입속에 소총을 들이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타타타타타!

단단한 가죽으로 인해 보호받지 않은 부드러운 살 속에 총탄은 자비심 없이 파고들었다.

‘잘했다. 그 정도도 못 하면 죽어 마땅하지.’

김인수는 크로코리언에게 건 슬로우를 거둬들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로코리언은 절명하며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저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다시 일어서려는 크로코리언을 향해 일곱 정의 자동소총이 불을 뿜었다. 결국 크로코리언은 세 개의 목숨을 금방 낭비하고 말았다.

‘현대화기도 이런 곳에서는 어보미네이션에게 아주 효과적이로군.’

상황이 끝나자 김인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상황이 돌아가는 걸 지켜보기로 했다.

“후, 어떻게 희생 없이 마무리가 됐군.”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식은땀을 닦았다. 아무리 특수 대원이라지만 한 명이 죽을 뻔했으니, 식은땀을 흘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막내 용감하더라. 당황하지 않고 아가리 안을 쏴버릴 생각을 다 하다니.”

그 위기에 처해 있던 병사에게 선임으로 보이는 자가 철모를 탁탁 두들기며 웃었다.

“어,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다. 헤헤…….”

막내라 불린 죽을 뻔했던 병사는 웃고는 있지만 아직 얼이 좀 빠져 보이는 게 죽음의 위기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움직였던 모양이었다. 오래 살아남을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건 그렇고 대장, 처음에 손들어! 이거 안 하면 안 됩니까? 그것 때문에 막내가 죽을 뻔했잖습니까.”

“매뉴얼에서 하라잖냐. 해야지.”

대장이라는 남자는 원칙주의자인 건지 부하의 항의에도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진짜. 대장은 유도리도 모릅니까? 어제 저녁에도 애송이를 벗겨먹을 수 있었는데…….”

“유도리, 일본어다. 쓰지 마라.”

“하, 대장…….”

대화를 듣다 보니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어제 저녁의 애송이라는 단어에서 감이 딱 왔다. 김인수는 저들이 어제 박기범네 집에 쳐들어왔던 특수 부대원들임을 알았다.

‘어보미네이션의 위치를 탐지할 수 있는 수단이 지구에도 있는 모양이로군.’

두 번이나 어보미네이션이 나타난 지점에 곧장 출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계약자가 최하급 계약마에 의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이할 때 나오는 차원력의 폭발을 감지할 수 있었기에 곧장 헬기를 타고 날아올 수 있었던 것이리라.

‘능력을 사용할 때 좀 더 주의해야겠군.’

그는 버릇처럼 능력이나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차원력을 숨기고 있었지만, 지구에서도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터였다. 하지만 지구에도 차원력 감지 기술이 있다면 앞으로도 차원력을 숨겨둘 필요가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동안에도 특수 부대원들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어쨌든 오늘은 어보미네이션 사냥에 성공했으니 흑자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한계가 올 겁니다.”

“알았다. 다음부터는 내가 가장 선두에 서도록 하지.”

“아니, 대장은 항상 선두에 서잖습니까! 뭐 그런 걸 변명이라고……. 됐어요! 얘들아, 시체나 얼른 옮기자. 새벽에 출동하려니 아주 죽겠구만.”

대원들은 크로코리언의 시체를 옮기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막내 대원이 물었다.

“그건 경찰이 알아서 할 거야. 우리 일이 아니야. 우리가 공무원도 아닌데 민간인 시체를 손대면 월권이야. 뭐, 어보미네이션 출현 신고는 이미 해뒀고 문제없이 처리되겠지.”

상급자의 대답에 막대 대원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코리언의 시체를 회수한 후, 대원들은 헬리콥터에 올라 자리를 떠났다. 참사가 일어난 현장은 그대로 남긴 채.

“후…….”

김인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꼭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김인수에게는 알아낼 수단이 있었다. 그는 그 수단을 활용했다.

“비전(Vision).”

그가 마법을 부리자마자 그의 눈에만 보이는 이미지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지갑의 주인은 지금은 시체가 된 이 세 명에게 강제로 이 공터로 끌려왔다. 새벽이라 지나는 사람은 없었고, 세 명은 지갑의 주인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욕설이 가득 섞인 이들의 대화에서 지갑의 주인이 다른 세 명과 동문 동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갑의 주인을 패대기친 후, 셋은 그의 주머니를 뒤졌다. 돈을 빼앗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갑은 나오지 않았고, 화가 난 셋은 더욱 심하게 폭행을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갑의 주인이 딱히 이들에게 빚을 지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학생 시절부터 돈을 빼앗던 양아치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였다.

폭행은 도를 넘은 수위까지 이어졌고, 지갑의 주인에게 최하급 계약마가 나타나 속삭이기 시작했다. 계약은 이뤄졌고, 지갑의 주인은 힘을 얻었다. 대신 이성과 자아를 잃고, 크로코리언이라는 존재가 되어서 세 양아치를 죽였다.

“한심하군.”

비전 마법을 끈 김인수는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 세 양아치가 죽은 건 자업자득이다. 하지만 이 지갑의 주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박기범 같은 인간과 똑같은 최후를 맞은 건 납득이 가질 않았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특수 대원들이 말한 대로 경찰이 오는 모양이었다. 김인수는 기척을 죽인 채 자리를 피했다. 쓸데없이 이목을 끌 이유도, 오해를 살 여지를 남길 필요도 없었다.

*

김인수는 손에 쥔 지갑의 처분에 고민했다. 지갑 안에는 7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생각 외로 큰돈이었다. 어쨌든 가족에게라도 돌려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그는 지갑 주인의 자택으로 향했다. 자택을 확인하기 위해 본 주민등록증에 새겨진 지갑 주인의 이름은 최재철이었다.

“여긴가.”

지은 지 20년은 충분히 된 엘리베이터가 없는 낡은 원룸 빌라 5층. 주소를 확인해 보니 여기가 맞았다. 김인수는 계단을 뚜벅뚜벅 올랐다. 이 시점에서 그는 이미 어떤 예감에 그는 사로잡혀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안에 인기척은 없었다.

‘역시.’

최재철은 혼자 살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지갑만 놓고 올까.’

지갑 안에 든 열쇠가 집의 열쇠일 터였다. 완전히 외부인인 김인수가 집 열쇠를 여는 건 그리 좋아 보일 리 없었지만, 이 빌라에 들어오기 전에 그는 이미 최재철의 모습을 취한 상태였다. 문을 따고 들어가자 가구도 없는 텅 빈 방이 그를 맞이했다.

생활감은 있었다. 낡은 이불이 흐트러진 채 내팽개쳐져 있었고, 옷 몇 벌이 벽에 박힌 못에 걸려 있었다. 잠옷 대용으로 쓰던 것으로 보이던 빛바랜 와이셔츠는 이불 위에 구겨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편의점 음식의 포장지가 비닐봉지에 싸인 채 덩그러니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싱크대 수도꼭지는 완전히 잠기지 않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김인수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러자 방 안에 놀라울 정도의 적막이 내렸다.

“후…….”

그 적막을 버티지 못하고 김인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직후,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슬리퍼를 찍찍 끄는 소리와 함께 문 앞까지 온 인기척은 아무런 사양도 없이 문을 쾅쾅쾅 두들겼다.

“총각! 집세! 내놔!!”

아무래도 집 주인인 모양이었다. 김인수는 문을 열었다. 억척스러워 보이는 아주머니가 화색을 띠었다.

“오, 문을 열었네. 오늘도 없는 척 할 줄 알았더니.”

“얼마죠?”

“모르는 척 하고 있네. 두 달 밀렸으니까 70만 원. 내놔, 얼른.”

김인수는 최재철의 지갑에서 70만 원을 꺼내어 그녀에게 넘겼다. 먹이를 노리던 야생동물처럼 돈을 낚아챈 아주머니는 손에 침을 뱉어가며 야무지게도 돈을 세더니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직장에서 잘렸다고 울더니만, 있잖아? 돈. …다음부턴 늦지 마.”

그것으로 용건은 끝났다는 듯 아주머니는 문을 쾅 닫았다.

“…지갑에 먼지밖에 안 남았군.”

천 원짜리 잔돈 하나 안 남은 최재철의 지갑을 방구석에 놓으며, 김인수는 피식거렸다. 그는 충동적으로 벽을 기대고 앉았다. 아주머니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다시 방은 적막 속에 빠져들었다. 방바닥은 차가웠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김인수는 반사적으로 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재철아?”

전화 너머에서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묘한 예감에 김인수는 대답하길 망설였다. 그러자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말했다.

“들리니? 엄마야.”

“아, 엄마?”

누구세요, 라고 대답했다간 큰일 날 뻔했군. 김인수는 생각했다.

“서울 생활은 좀 괜찮니?”

두 달 밀린 집세를 내고 지갑에는 돈 한 푼 없고 직장에서 잘려 직업도 없는 젊은이, 최재철이 괜찮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김인수는 최재철이 아니었다.

“네, 괜찮아요.”

“아, 그래?”

목소리 너머 최재철의 어머니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돈 좀 보내줄 수 있겠니?”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50만 원… 정도면 될 거 같은데.”

아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그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대뜸 돈 이야기부터 꺼내는 걸 보니 꽤나 급했던 모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알았어요.”

“정말이니? 괜찮겠니?”

“예, 괜찮아요.”

“그래, 그럼 부탁한다……. 아버지 병원비가 밀려서……. 너한테까지 손 벌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괜찮아요. 보내드릴게요.”

“고맙구나.”

“뭘요.”

“그럼 부탁한다.”

전화는 끊겼다. 김인수는 무거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갑을 찾아보니 구깃구깃한 쪽지가 발견되었다. 계좌번호와 함께 아버지 병원비, 50만 원이라는 휘갈겨 쓴 글자가 보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최재철.”

김인수는 중얼거렸다.

“네 역할, 내가 샀다.”

그렇게 김인수는 최재철이 되기로 했다.

*

낮 동안은 조용히 지냈다.

말 그대로 조용히. 최재철의 방은 낮이 되어도, 저녁이 되어도 시끄러워지지 않았다. 이 낡은 빌라가 방음이 잘 된다고는 상상하기 힘드니, 아무래도 이 층에 사는 건 최재철뿐인 것 같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나으리라.

‘아니, 그냥 단순히 오래 집을 비웠을 수도 있지.’

그거야 어찌 됐건, 그가 이 빌라에 드나드는 걸 목격하는 이가 적은 건 김인수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좋았다. 며칠 정도 최재철이 집을 비운다거나 하는 일이 생겨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할 외부인은 없을 테니 말이다.

어차피 출입 자체는 최재철의 모습으로 할 테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걸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 그럼.’

밤이 되었다. 복수귀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기에 좋은 시간이다. 김인수는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이용해 존재감을 지운 채 최재철의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박기범의 집이었다. 깨진 유리창으로 박기범의 방에 침입한 그는 목적한 물건을 집어 들었다.

박기범의 휴대폰이었다.

‘오늘의 타깃은…….’

그는 박기범의 휴대폰을 들어서 주소록을 주욱 훑었다.

‘김전훈.’

김인수는 씨익 웃었다. 먹잇감을 앞에 둔 야수의 미소였다.

*

한때는 치안이 좋기로 유명했던 서울의 밤거리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았다. 차원 균열이 열린 뒤로는 모든 것이 변했다. 많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게 변하고 말았다. 적어도 뒷골목의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깜박거리는 가로등 밑은 평범한 시민이라면 피해야 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중년 남성이 한 명. 그 중년 남성을 습격한 것이 분명한 청년 셋. 청년 하나가 중년 남성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아저씨, 사람을 쳤으면 피해 보상을 해야지.”

“내가 언제……!”

중년 남성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청년의 주먹이 중년 남성의 명치에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욱, 하고 고개를 숙이는 중년 남성에게 청년은 말했다.

“아저씨가 어깨로 내 친구를 치고 가는 바람에 친구 어깨가 탈골이 났다고요. 예? 이거 보상금을 단단히 받아내야 쓰겠는데.”

“이 무슨……!”

중년 남성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다음 일격이 명치에 꽂혔다. 결국 중년 남성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청년은 큭큭 웃었다.

‘내가 더 강하다!’

이 감각에는 질리질 않는다. 이 순간만큼은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젖어들 수 있었다. 취객에게 시비를 거는 일차적 목적은 돈이긴 하지만, 이 기분을 느끼기 위한 것도 있었다.

뚜르르르.

전화기 울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청년은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에 뜬 이름은 박기범. 청년은 한 번 씨익 웃고 전화를 받았다.

“어, 도련님, 오랜만이네.”

[너 지금 중동초등학교 뒷골목에 있냐?]

“어라, 어떻게 알았지?”

[알았다]

“뭐야, 왜 그러는데? 나 일하는데…….”

툭, 전화가 끊겼다.

“아니, 이 새끼가 형한테…….”

청년은 화가 나서 애꿎은 중년 남성을 걷어찼다.

“뭐, 됐어. 나중에 가서 손 좀 봐주고. 지금은 이쪽 일부터 처리해야지. 자아, 아저씨, 보상금을 지불할 시간이에요.”

청년은 낄낄 웃으며 중년 남성의 품속에 손을 넣었다.

*

“일이라. 하, 이것 참.”

김인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지금 가로등 위에 서 있었다. 단순히 폼을 잡고 서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은 어지간하면 머리 위를 올려다보지 않는다. 의외의 사각인 셈이다.

그리고 ‘일’은 그의 발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김인수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청년, ‘김전훈’의 위치를 찾는 건 굉장히 간단한 일이었다. 이 멍청하고 불쌍한 생물은 휴대폰에 딸린 GPS로 자기 위치를 뿌리고 다니고 있었다. 그냥 휴대폰의 GPS 기능을 꺼두기만 해도 이렇게는 안 될 테지만, 김전훈은 그 자신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러고 있지 않았다.

‘자아, 그럼 어쩐다.’

조질 대상은 김전훈 하나다. 하지만 그의 발밑에는 피해자인 중년 남성과 김전훈의 친구 둘이 추가로 있었다. 넷 중 그 누구도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유용하게 쓰일 도구가 하나 있다. 김인수는 그의 왼쪽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오른손 검지로 한 번 그 반지를 슥 만지자, 그의 발아래에 차원력으로 이뤄진 필드가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일어날 일은 김인수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파티의 시작이다.”

*

중년 남성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든 청년의 등 뒤에 누군가가 착지했다. 그 인기척에 청년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 뭐…….”

청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명치에 누군가의 주먹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퍽!

“우욱?!”

청년은 예기치 못한 고통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크훅, 커헉!”

‘숨이 안 쉬어져!’

엎드린 채 몇 번을 기침을 하며 숨을 쉬려 노력했다. 그의 앞에 선, 그에게 그 고통을 부여한 누군가는 그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문득 물었다.

“김전훈, 맞나?”

“뭐……!”

우직!

“끄아아아악!”

청년은 자신의 손가락이 거꾸로 꺾여 이상한 방향으로 향한 것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불청객은 가차 없이 대답을 요구했다.

“질문에 대답해라.”

이상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다른 두 놈은? 그제야 청년의 눈에 다른 둘은 기절한 채 뒷골목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김전훈, 맞나?”

대답을 주저했다. 0.5초. 다음 손가락이 꺾였다.

“으아아아아악!!”

“김전훈, 맞나?”

비명을 듣는 둥 마는 둥, 다음 질문이 곧장 날아들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또 손가락이 꺾일 것이다. 그렇게 사고한 것은 뇌가 아니었다.

“맞아요! 맞아, 내가 김전훈, …뭐야.”

황급히 대답한 청년은 황당함에 말을 잃었다. 그제야 자신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고 손가락을 꺾어댄 인간의 얼굴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씨발, 뭐야. 너, 뭐야.”

꺾인 손가락에서 오는 격통에 더듬거리면서도, 청년, 김전훈은 낯빛을 바꾸며 외쳤다.

“김인규?”

그 얼굴은 그의 옛 동창생의 얼굴이었다.

‘아니야. 인규는 죽었어!’

그렇다. 김인규는 죽었다.

그가 죽인 것은 아니다. 김인규의 죽음에 그는 조금의 책임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김인규를 폭행하기는 했다. 그가 그의 주먹으로, 지금 그의 뒤에 쓰러져 있는 중년 남자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맞구나, 김전훈.”

김인규라 불린 남자는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야수의 그것과도 같아, 김전훈은 등골이 싸늘해지는 감각에 입을 닫았다.

그가 야수라면 자신은 사냥감이었다. 본능이 그렇게 고해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야수의 어금니가 김전훈의 목덜미에 날아들었다. 실제로는 옛 동창의 주먹이 날아든 것임에 불구하고, 목숨의 위협마저 느끼며 김전훈은 그 일격을 피하려 애썼다.

그러나 무리였다.

우지직!

쇄골이 갈라지는 소리를 귀가 아닌 기관으로 들으며, 김전훈은 비명을 토해내었다.

“샌드백으로 썼었지.”

김인규가 말했다.

“나를 말이야.”

“…그게, 뭐.”

한참 비명을 질러 말라붙어 버린 목소리로 김전훈은 간신히 토해내었다.

“그게 뭐! 그래서 뭐, 이 새끼야!!”

“그게 뭐?”

김인규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김전훈은 그 순간 상대가 김인규 본인이 아님을 확신했다.

김인규라는 놈은 자신의 주먹으로 죽일 수 있는 놈은 아니었다. 그게 분해서 더욱 세게 주먹을 꽂아 넣었지만, 그놈은 바뀌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김인규의 영혼에, 인생에, 정신에 김전훈은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럼 이건 뭐지?’

만약 김인규가 지옥에서 되돌아온 거라면, 복수하기 위해 온 거라면 찾아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김전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냐, 너.”

“방금 전에 네가 네 입으로 내 이름을 불렀지?”

“넌 김인규가 아니야.”

“그래, 난 김인규가 아니다.”

맥이 탁 풀릴 정도로, 상대는 자신이 김인규가 아니라고 자백하고 말았다.

“널 죽이지는 않을 거다, 김전훈. 인규를 죽인 건 네가 아니니까. 하지만…….”

김전훈은 그런 상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형형히 타오르는 눈빛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살의뿐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윽……?!”

그는 신음 소릴 토해내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콘크리트로 세워진 단단한 벽이 그의 뒤를 가로막고 있었다. 취객으로부터 돈을 뜯기 위해 CCTV도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온 것이 도리어 그에겐 화근이 되었다.

“내 체력 단련에 도움을 좀 줘야겠다.”

그 말을 들은 김전훈은 흠칫 놀랐다. 왜냐하면 그 말은 그가 인규를 샌드백 삼아 패기 전에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새끼의 정체는……!’

김전훈이 생각할 수 있었던 건 거기까지였다.

고통이 그를 지배했다.

*

김인수는 기절해서 축 늘어진 김전훈의 몸을 길바닥에 팽개쳤다.

그는 한숨을 토해내었다.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통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답답함에 가까웠다.

이 김전훈이란 놈은 곁가지에 불과했다. 이런 놈을 족친다고 만족감이 들 리도 없었다.

그는 기절한 김전훈의 품속을 뒤졌다. 지갑을 보니 2만 원이 들어 있었다. 하기야 돈이 풍족했다면 취객을 습격하지도 않을 터였다. 그 돈을 김전훈의 지갑 속에 도로 넣어버리고, 김인수는 다른 것을 꺼냈다.

나쁜 놈이고 용서의 여지도 없는 놈이지만 힘도 없는 놈이다. 인규 입장에서는 이 녀석은 안중에도 없었을 터였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최소한 인규가 느낀 고통은 맛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의무였고, 그렇기에 그는 이행했다.

그 와중에 위기의 중년 한 명을 구하기는 했지만, 이건 덤 같은 것이었다. 그는 정의의 용사가 아니므로, 굳이 정의를 행할 필요는 없었다.

“아저씨.”

“으, 응?”

시종일관을 영문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며 지켜보고 있던, 완전히 피해자일 뿐인 중년 남자의 시선에서는 김인수에 대한 호감 같은 건 별로 묻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법도 했다.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중년 남성의 입장에서는 지금부터 김인수가 자신을 해할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었다.

“많이 다치셨네요. 대신이라고 하긴 좀 뭐하지만 이거라도 받으시죠.”

김인수는 김전훈 외 2명의 지갑에서 꺼낸 그들의 신분증을 중년 남성에게 넘겨주었다.

“이놈들을 고발하셔도 좋고, 그냥 넘어가셔도 상관없습니다. 알아서 하시죠.”

중년 남성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인수는 이 중년 남성의 복수마저 떠맡을 생각은 없었다. 복수하고 싶으면 스스로 할 것이다. 어쨌든 그 수단은 넘겨주었다. 그것으로 만족한 김인수는 뚜벅뚜벅 걸어 자리를 벗어났다.

오늘 느낀 만족감이라고는 그것 정도였다.

*

돌아오는 길은 조금 복잡했다.

우선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이용해 존재감을 지운 후, 서서히 되돌리면서 박기범의 모습을 취했다. 그리고 박기범의 집으로 갔다.

겨우 하루 사이였지만, 박기범의 자택은 못 본 사이 유리창이 깨져 외풍이 들어와 스산해져 있었다. 유리창을 깬 특수 부대원들은 수리비도 김인수에게 주고 갔지만, 그가 그 돈으로 이 집을 고쳐줄 의리 따위는 없었다.

김인수는 박기범의 방으로 가 박기범의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그리고 박기범의 모습을 그만두고 다시 존재감을 지워 깨진 유리창을 통해 집 밖으로 나왔다.

이로써 박기범은 귀가한 채 집에 남아 있는 셈이 된다. 적어도 휴대폰의 GPS 정보나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의 블랙박스, 그리고 경비 카메라 상으로는 말이다.

그렇게 박기범의 집에서 빠져나온 김인수는 그대로 서서히 최재철의 모습으로 바꾸면서 최재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귀찮고 복잡한 짓이었지만 그에게는 꼭 필요한 절차였다. 최재철과 박기범, 두 사람은 완전히 접점이 없다. 앞으로도 없어야 하고.

김인수는 최재철의 신원을 최대한 깨끗하게 관리할 생각이었다. 기껏 새로 얻은 신원이다. 이 정도 귀찮음 정도는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시간은 이미 늦어 밤이 깊었다. 최재철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김인수는 바로 잘 준비를 했다. 능력으로 체력을 회복하는 것은 간단했지만, 그런 식으로 차원력을 낭비하는 건 그리 현명한 짓은 아니었다.

차원력을 회복하는 수단 중 가장 안전하고 결과적으로 효율적인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 회복이다. 그에게는 아직 막대한 차원력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마구 낭비할 정도로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야 했다. 수면은 자연스럽게 체력을 회복하기에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싱크대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작은 소음이 적막보다는 낫다는 것을 그는 이계에서의 생활로 잘 알고 있었다.

‘자아, 이제 어쩐다.’

자리에 누운 채 그는 생각했다.

지구에 돌아오자마자 박기범을 죽였다. 그리고 오늘은 김전훈을 족쳤다.

이 두 건의 복수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다. 적절한 방법과 수위로 복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복수로 인해 김인수의 존재가 뒤를 밟힐 염려도 없었다. 박기범은 죽었고, 김전훈 외 2명, 추가로 그 자리에 있었던 목격자인 중년 남성에게는 김인수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두었다.

그들은 오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다른 목격자도 없을 것이고.

오늘 사용한 아티팩트는 그가 왼쪽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인 진홍왕의 유물이었다. 능력의 발동은 일단 범위를 지정해서 필드를 까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전자를 제외한 필드 안의 생물과 무생물은 필드가 깔린 시점부터 회수하는 시점까지 필드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

즉, 김전훈은 병원에서 일어나면 자신이 왜 이렇게 크게 다쳤는지 기억해 내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중년 남성은 폭행당하던 자신의 손에 왜 가해자들의 신분증이 들려 있는지 모를 테지만, 어쨌든 능력의 효과가 발동하기 전까지의 일은 기억할 테니 적절히 행동할 것이다.

목격자의 방지에는 인롱의 팔찌를 사용했다. 공간을 완전히 잘라내 구분하는 이 아티팩트는 필드 밖의 그 어떤 존재도 필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다. 외부 목격자 발생의 원천 봉쇄가 가능한 셈이다.

필드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리는 진홍왕의 유물과 공간을 잘라내 완전히 유리해 내는 인롱의 팔찌, 이 두 아티팩트를 적절히 조합하면 필드 안의 인간도 거기서 일어난 일을 인지하지 못하고 밖에서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지하지 못한다.

완전무결한 결계의 완성이다.

이 결계의 완성을 위해서는 상당한 차원력의 소모를 감당해야 한다. 물론 김인수에게는 그리 부담되는 소모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소모는 소모였다. 만약을 위해서라도 미리 회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신경을 써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한 명씩 찾아다니면서 족치다 보면 어쨌든 소문이 나게 되어 있다.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분석되면 김인규의 복수로 귀결될 것이고, 김인수의 존재가 드러날 위험도 있었다.

이러다 보면 적들의 경계를 살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심이 최종적으로 복수해야 하는 진가규에게까지 퍼지면 골치가 아파진다.

박기범은 그냥 죽여 버렸고, 김전훈까지는 괜찮다. 박기범의 죽음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고, 김전훈은 자신이 누구한테 당했는지도 모르니까.

다만 언젠가는 박기범의 사망이나 실종이 알려질 걸 생각하면 이런 방식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해봐야 하나, 많아도 둘 정도이리라. 그 뒤로는 텀을 두거나 다른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 먼저 복수를 하느냐에 대해서도 미리 결정해 놔야 했다.

‘일단은… 내일 밤은 오원추로군.’

오원추. 박기범 일당 3인조 중 하나이자 인규의 오른팔을 부러뜨린 놈이다. 일단 대외적으로 알려진 주모자 셋은 반드시 처벌할 생각이었으니, 오원추는 빼놓을 수 없었다.

‘오원추까지는 족치고, 다음은 나중에 생각해야겠군.’

김인수가 지금 가장 복수하고 싶은 대상은 당연히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인 장본인인 진가규다. 하지만 김인수는 진가규에게는 특별한 복수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있는 대로 다 패 죽이는 게 복수라고 생각했으면 최재철의 신원을 빌리는 방법을 택하지도 않았다. 내가 돌아왔다, 고 크게 외치고 곧장 원수들을 죽이러 갔을 것이다.

막아서는 자들을 모조리 베고 그 시체를 넘어 원수의 목을 일격에 날리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통쾌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김인수는 지금 당장에라도 그 방법을 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파멸뿐이다. 힘으로 모든 것을 제압한 자의 최후란 그렇게 정해져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의 파멸은 그의 원수들을 기껍게 만들 것이다.

김인수가 원하는 것은 철저하고 완벽한 복수였다. 복수를 완료하고도 승리자로서 남아 성공을 구가하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정보를 얻고, 지위를 얻고, 권력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진가규에게 대항할 수 있는, 아니, 찍어 누를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갈 길이 멀군.”

상대는 세계 최고의 대기업 WF의 회장.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은 곧 금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가규는 이 사회에서의 정점이나 다름없었다. 즉 그를 찍어 누른다는 건 동시에 그 정점에 도전하는 것이기도 했다.

단순히 달려가 목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고 찍어 누를 생각이라면 평범한 방법으로는 시도조차 불가능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능력 있는 자들이 자신들을 넘어설 수 없도록 갖은 노력을 다해왔고, 그 노력은 이미 결실을 맺고 있으니까.

하지만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이미 역사는 왕을 끌어내렸고 귀족들의 목을 날렸다. 그 역사의 귀결이 황제의 등극이라 한들,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는 혁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하려는 것이니까.

그리고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이 사회에는 그에게 딱 걸맞은 수단이 있었다.

차원 균열, 차원 마수, 그리고 차원 능력자 어벤저.

“…일단 어벤저부터 되어야겠군.”

지위와 권력을 얻는 것이 최재철이라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뭐로든 복수의 수단을 얻는 것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최재철로서, 어벤저로서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힘을 붙여가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정리하며 그는 잠자리에 들었다.

*

아버지의 꿈을 꾸었다.

별로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이고, 수틀리면 아들들에게 소리부터 지르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 한들, 그는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생이 죽은 그 후에 아버지가 보인 눈물을 김인수는 아직도 기억한다.

이제 너만 남았구나.

아버지의 그 말도 어제 들은 것같이 기억했다. 그 남자의 눈에서 김인수는 각오라는 것을 보았다. 당시의 그는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그 장례식에서 김인수는 읊조렸다.

이제 나만 남았구나.

그때는 그 읊조림의 의미가 조금 달랐다. 나라도 살아야지, 나라도 가문을 이어야지, 그렇게 정당화를 했었다.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기로 하며 복수심을 묻어두기 위해 애썼다.

“나밖에 할 사람이 없어.”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인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읊조림의 의미가 이전과는, 1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밖에 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해야만 했다.

반드시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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