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4. 끝나지 않을 일상
아이는 코끝을 찡그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열렬한 부모는 제 아이가 얼마나 예민하고 기민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 자주 잊는 것 같았다.
참으로 질척한 신음 소리를 떠나서,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진한 피 냄새에 아이는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코를 틀어쥐고 문을 열자,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뱀파이어의 기사가 보였다.
아이는 조금 반가운 얼굴을 해 보였다.
“스승님.”
나엘 폰 라리트.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아무래도 좀 한심한 것 같은 제 아버지인 황제의 수족. 진중한 것은 다른 아버지가 더 좋았지만 그래도 결국 그들에게 서로가 가장 첫 번째라는 것을 아는 아이는 부모에게 매달리기보다는 그냥 할 일을 했다.
웨어울프도 그렇다고 뱀파이어도 아닌 아이는 지나치게 조숙했고, 능력이 많았다.
“왜 깨셨습니까.”
“잘 수가 있어야지요.”
“……이런.”
“아무래도 두 분은 절 잊는 때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나하린 님.”
그리고 나엘은 조금은 안타까운 듯 예쁜 인형 같은 어린아이를 내려다봤다. 그가 황궁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었지만, 저렇게 얼굴 찌푸린 아이가 밤중에 깨어나 문 열고 나오는 것도 너무 자주 본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뱀파이어의 왕국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인간들은 그들을 무서워했지만, 이 치세는 오래갈 것이다. 그리고 웨어울프들 역시 그들의 상황을 받아들여 가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그리하여 다음 대의 수장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을.
눈앞의 아이는 완벽한 뱀파이어도, 완벽한 웨어울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쪽의 아버지를 닮아 반짝이는 은발이었지만, 그들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눈이 아니었다. 다른 쪽의 아버지를 닮은 금색의 눈동자였다. 이 피도, 저 피도 아니지만 강력하며, 더더욱 인간에 가까운 아이. 하지만 이 아이는 분명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 것이다. 자신들이 그러하듯이.
“나하린 님, 산책을 가실까요?”
나엘에게도 황제가 자신의 반려의 피를 격하게 빠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 자라는 건 아이에게 너무 가혹하다.
“스승님이야말로 더 이상 침실 앞을 지키지 않으셔도 돼요.”
“예?”
“밤에 호위 하는 거 말이에요.”
아이는 마른세수를 하며 짐짓 걱정된다는 듯 나엘을 올려다보았다.
“저 두 분은 누가 죽이려고 해도 못 죽여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하린은 무척이나 착했지만, 또 저럴 때를 보면 역시 황제 르브리에를 꼭 닮았다. 진중하고 무뚝뚝한 면은 다른 아버지를 닮았지만…….
그래도 아이는 친절했다. 흰 손이 흔들렸다. 조심스럽게 맞잡자 싱긋 웃는 미소는 충분히 어여쁘다.
“내일부터는 호위 서지 마세요. 스승님도 주무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어째서요?”
“……저는 두 분을 지키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아이의 눈동자가 잠시 크게 벌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엘은 답지 않게 실바람 같은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그랬던 거구나…….”
기쁘게 웃는 아이를 보며 나엘은 조심스럽게 그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례한 행동일지 모르나,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니 그 역시 마음이 풀렸다.
이때, 나엘은 자신이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고마워요, 스승님.”
“어디로 산책을 가고 싶으십니까?”
“동쪽 정원이 좋겠어요.”
두 종족 어느 것도 아닌 애매한 나하린이었지만, 그만큼 둘의 특성을 모두 가져 굉장히 강했다. 평소에는 수더분했지만, 건드리는 사람에게는 성질도 자못 더러웠다.
나하린이 하염없이 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로지 나엘 자신뿐이라는 것을. 아직 어린 짐승의 속내를 모르는 스승은 그저 하염없이 제 불쌍한 제자를 보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가 너무 잘 자란 제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지만 어쨌든 지금 그들은 퍽 행복했다.
헐떡이는 황제와 반려의 소리가 멀어진다. 고요한 복도에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아이와 기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언제나 변하지 않을, 그들의 일상이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