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광기의 밤, 붉은 달 축제
돌아오는 그 길이 어찌나 길게만 느껴지던지.
들썩이는 미친 것들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하리드는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멍하니 그 길을 걸어왔다.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르브리에의 목소리가 귀에 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하리드는 손을 들어 천천히 자신의 배 위에 올렸다.
‘설마.’
조금씩 피곤함을 느끼는 육체. 빈혈. 그리고 이따금 퍼지는 파동. 배 속 깊은 곳에 있는…….
수장에게는 능력이 몇 가지 있었다. 광기에 찬 동족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 꿈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엿보고 누군가의 의식을 볼 수 있는 재능. 마지막으로.
‘잉태.’
하지만 생각을 깊게 할 수 없었다. 그의 기척을 느끼고 쏜살같이 달려온 갈색의 웨어울프가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룩센?”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그가 르브리에와 몇 시간 함께 있는 동안, 예상하지 못한 것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우드득, 까드득.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헐벗은 남자로 변한 룩센이 헐떡였다.
“수장.”
“무슨 일이지?”
“돌아가는 판이 불길해. 황궁에서 일이 터졌어.”
“설마 황제가 일을 벌였나?”
“그럴 기미가 있었던 거냐?”
눈에 띄게 불안해하던 황제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던 자신, 그가 초조함에 페르달 공작을 공격했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이어진 룩센의 말에는 조금 놀랐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황제가 공격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도리어 반격해서 황궁을 친 페르달 공작의 세력이야! 르브리에 그 인간, 너랑 같이 있던 것 아니었어?”
같이 있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일련의 그 공격들은 미리 예고된 것이었을 것이다. 하. 이 얼마나 대단한 배짱인지. 황제를, 그 복수의 끝을 드디어 터뜨릴 날에 모든 것을 이끌어야 할 자가 자신과 함께 있었다는 뜻이 된다.
어떻게 하더라도 승리를 예감한 장수처럼 오만하기 그지없다.
“황궁에서 지금 전투가 벌어지는 중인데, 인간들의 싸움판에 우리가 끼어드는 것도 이제 이상하고, 하필 오늘은 또 붉은 밤의 축제잖…….”
“가자.”
룩센의 눈썹이 요동쳤다. 하리드는 크게 숨을 삼키며 웨어울프들의 눈에만 보일 붉은 하늘의 물결을 황홀하게 올려다보았다.
“황궁으로.”
이 길을 따라, 광기의 물결을 따라 걷고 또 걸으면 그가 있을 것이다. 피가 터지고 죽음이 난무하는 황궁의 한가운데에 어쩌면 제 적의 목을 틀어쥐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남자가.
꿈속의 아이처럼 황제의 목을 토끼의 것처럼 비틀며 희게 웃을 제 반려가. 감쪽같이 속았다. 생각도 못 했다. 하나의 가능성을. 위대한 예언자 이시르도, 예언도, 그리고 오만했던 동족들도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었던 것.
어떤 동물에게도 천적은 있다. 천적이, 있다.
먹이사슬처럼 그 천적에게 패배하는 순간…….
“우리가 놓친 게 있다.”
“허?”
하리드의 눈이 짐승처럼 쭉 찢어졌다. 앙큼한 그의 반려는 처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정말 대단하게도 숨겼다. 이제 알겠다. 멸망의 예언시의 뜻이 진정 의미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어째서 웨어울프의 예언이 하필이면 자신에게 그 검을 쥐어 주게 했던 것인지. 왜, 왜 하필 르브리에를 죽여야 했던 것이었는지를.
“우리가 놓친 것은 우리의 상대가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지.”
“……뭐라고? 너 대체 뭘 알아챈 거야?”
“쉿. 문이 열린다, 룩센.”
우오오오오오오오!
하리드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길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상처가 쩌억 갈라지듯 흥분한 짐승들이 쏟아져 내렸다.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웨어울프에게 허락된 유일한 일탈, 붉은 밤 축제의 시작이었다.
‘가자.’
하리드 브리첼은 무겁게 눈을 감았다. 룩센도 곧 이성을 잃었고, 동족들은 모두 변화하여 뛰쳐나갔다. 하리드 브리첼 역시 한숨을 내쉬다가 몸을 웅크리며 피의 본능에 모든 것을 맡겼다. 풀이 스치는 냄새, 감각, 욕구, 그리고 향기로 자신을 부르는 존재.
‘너에게 가마, 르브리에.’
괴물의 반려는 같은 괴물이었다.
* * *
흥얼거리는 목소리는 즐거움이 넘쳤다.
“폐하, 기억하십니까?”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제국이 벌레들에게 이토록 파먹혀 변질하였던 것인지. 왜 자신은 눈먼 것처럼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인지!
끄윽, 끄으윽. 목에서 가래 끓는 것 같은 억눌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앞에는 언제나 불쾌하고 거슬렸던 미남자가 그림처럼 고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였다. 이 젊은 귀족이 싫었던 이유는,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해서였다.
“기억하세요, 폐하?”
형님. 자신이 죽인, 자신이 발고하여 죽인 억울했던 그 사람.
그가 가진 것들이 탐이 났다. 어린 시절의 황제는 언제나 그 사람을 동경하고 질투하고 시기했다. 형님.
“원래 나쁜 짓을 하고 살면 언젠가 되돌려 받는 법이거든요.”
르브리에가 원래 저런 자였던가. 저렇게 말하고, 저렇게 웃는 자였던가? 그 기괴한 느낌은 황제가 퍽 잘 알고 겪은 것과 비슷했다. 그자. 그 남자. 지금 이 자리에 보이지 않는 그의 계약 상대. 황제의 짐승이었던 제국의 검. 그가 내보이는 이질적인 감각이 바로 눈앞의 매끈한 상대와 비슷한 게 어이가 없었다.
“끄으윽, 끅!”
그러나 애원하진 않겠다. 황제는 오기로 눈을 빛냈다. 욕심에 저지른 일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정당했다. 형님은 괴물을 낳았어! 현재 눈앞의 르브리에가 증명하지 않던가! 형님이 낳은 것은 괴물이었다는 것을!
끄아아악. 꺄아악! 사람들의 비명이 울리고 피 냄새가 범벅이 되었다. 무언가 부서지고 도망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황궁은 이제 더 이상 그의 황궁이 아니었다. 이 괴물들의 발에 짓밟혀 모두가 죽을 것이다.
죽였어야 했는데. 형님과 함께 형님의 새끼도 잡아 죽였어야 했는데, 페르달이 숨겼구나. 제 자식을 미끼 삼아 같은 이름을 주고 숨겼던 것이구나!
“……끄윽, 끅, 르, 뷔, 네놈이…….”
“영광스럽게도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셨군요, 숙부. 그래요, 그렇게 불렸지요. 부모님은 날 사랑스러운 애정을 담아 르뷔라고 불렀습니다. 르브리에보다 그렇게 불리는 순간이 더 많았어요. 몰래 키우는 황자의 아들 따위 당신은 기억조차 제대로 못 해 줬지만 그래도 그 애칭만은 기억했나 보군요.”
“끄으윽…….”
“맞습니다, 나는 르뷔예요. 당신이 죽인 자의 아들.”
흰 피부 위로 스치는 푸른색의 핏줄, 그리고 변화하며 찢어지는 동공이 소름이 돋았다.
“그분들은 나를 지키려 했을 뿐인데.”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불길하게 바뀌는 짙은 붉은 눈동자. 천천히 물이 빠지듯 변해가는 은색의 머리카락. 바르작거리는 발걸음에도 벗어날 수 없는 희고 차가운 손가락의 강력한 힘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뱀의 독니처럼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이빨. 괴물이었다. 형님이 낳았던, 그 괴물 새끼!
“내가 괴물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부모님은 아무런 죄가 없었죠.”
웃기는 소리다. 괴물을 낳은 시점에서 그들은 괴물이었다!
“평범한 분들이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걸 알면서 날 숨기며 키우고 있던 1황자 부부를 밀고했어요. 같은 괴물이라고, 목이 잘리고 그 시체마저 불길 속에서 타게 했죠. 그 죽음에는 영광도 없었습니다.”
사악한 눈이 끈적하게 웃으며 죽어가는 그를 조롱했다.
“똑같이 죽여드리겠습니다. 당신의 것을 모두 빼앗고, 내가 차지해 괴물들의 왕국을 세울 겁니다. 당신이 아끼던 모든 것을 잃게 할 거예요. 죽음 뒤에도 당신의 이름이 그 어디에도 없도록, 폐하.”
그때였다. 멀리서 비명이 울렸다. 안 돼! 황제의 독기 어린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돼! 아버지를! 르브리에! 안 돼요!
“안 돼요, 르브리에! 제발, 제발, 아버지를 살려줘요!”
이예르라의 목소리였다. 아, 내 딸. 마찬가지로 새하얀 피부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닌 괴물들에게 끌려오는 제 아름다운 딸이 보였다. 불쌍한 것. 가엾은 것. 하염없는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온 아이는 비정한 괴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빌었다.
“제발, 제발요. 내 목을 줄게요. 날 죽여요. 아버지는, 아버지는.”
“가엾은 사촌. 내 제자.”
황제는 발을 버둥거리며 괴물의 배를 차 버리고 싶었다. 저를 쓰레기 잡듯이 쥐고 있던 목을 집어 던지만 않았더라도, 다가온 다른 괴물들이 제 사지를 부여잡고 구속하지만 않았더라도.
내 딸에게 손대지 마라!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주저앉아 울고 있는 이예르라의 앞에 괴물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턱을 들어 올리며 눈을 마주했다. 또르륵, 흘러내리는 그 눈물을 스윽 훑으면서 웃는다.
“이예르라 전하, 여전히 눈물이 헤프군요.”
“흐윽, 흐으윽…….”
“하지만 정해진 건 돌이킬 수가 없는 법입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해 왔는데, 당신의 눈물과 부탁 한 번에 그걸 무너뜨릴까요. 당신이 뭐라고요.”
“제, 흐읏, 흑, 제, 제발!”
“나도 빌었답니다, 사촌. 당신의 아버지에게. 제발, 날 죽여 팔다리를 잘라도 좋으니 죄 없는 부모님은 용서해 달라고 모른 척해 달라고 빌었답니다. 그랬더니 당신 아비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과거를 상기한 남자는 황녀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 목을 졸랐지요.”
황제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퍼렇게 질린 여자가 목을 부드럽게 틀어쥔 그 서늘한 감촉에 뻐끔거리며 입을 벌렸다.
“나는, 나는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말해 준 것을 말하지 않았어! 그, 그런데 이게 그 보답인가요?”
“황녀 전하.”
“이게 답이냐고 물었어요!”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내가 정말 당신이 좋아 곁에서 스승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당신은 내 원수의 딸이 아닙니까.”
“르, 르브리에!”
“내 사촌은 어찌나 어리석은지. 당신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 긴 복수의 시간을 버려야 합니까? 그게 그렇게 대단한 선처였어?”
“흐으윽!”
“당신은 겁이 났을 뿐 아닙니까. 당장 달려가 르브리에의 정체가 사실은 전 황태자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현실이 꿈처럼 지나가리라 여겼던 것뿐이잖습니까. 전하.”
빙긋 웃은 남자는 황제에게 고개를 돌리며 속삭였다. 당신이 그랬듯이, 똑같이. 아비 앞에서 딸을 죽이면 훌륭한 복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비명을 질렀고, 르브리에는 그 순간 생각했다. 저 황녀. 절망으로, 그리고 이윽고 분노로 일그러지는 보라색 눈동자는 지나치게 자신의 눈빛과 닮았다.
죄가 없더라도, 죽여야 할 원수였다.
제국의 모든 것을 짓밟으리라 그렇게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르브리에는 눈짓했고 대기하고 있는 그의 종들이 황제를 집어 던졌다. 발끝으로 사람을 부리던 제왕은 길의 비렁뱅이처럼 발아래에 뒹굴었다. 딸에게 기어온 그의 배를 차버리며 르브리에는 고혹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단박에 목을 쥐어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자비는 없습니다. 복수가 원래 그렇잖아요.”
“아아아악!”
황녀가 비명을 지르고 동시에 우두둑.
“잘 가요, 숙부님.”
거짓말처럼 손쉽게 목이 꺾였다. 손을 타고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핥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는 더러운 피였다. 높다란 비명과 함께 이예르라의 몸이 옆으로 무너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기절한 것이다. 형편없군. 르브리에는 그 모습을 감흥 없이 바라보다가 손에 있는 뜨거운 시체를 집어 던졌다.
이렇게 복수가 재미없어서야. 그는 나른하게 한숨을 터뜨렸다.
그리고 웃으면서 속삭였다.
“왜 이렇게 늦는 겁니까, 기사님.”
다 알았을 거면서.
비명이 난무하는 곳에서 르브리에는 명령을 내렸다.
“가라.”
대기하고 서 있던 모든 동족이 마음껏 피를 취하도록. 절망과 공포를 이 제국에 퍼뜨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앞으로 살아갈 인간들이 괴물들의 왕국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공포로 군림하도록. 괴물은 괴물답게 말이다.
“하하…….”
* * *
그리고 하리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제는 목이 꺾여 시체가 된 채 뒹굴고 있었고, 황녀의 짙은 금발이 바닥에 퍼져 있었다. 도망가는 인간들과 살기와 피가 범벅이 된 황궁.
“…….”
곧, 하리드를 따라 달려온 수많은 짐승이 물결처럼 퍼져 자연스럽게 살기와 분노가 일어나는 대상을 경계했다. 붉은 밤이 그들을 축복하고 있었다. 광기는 힘이 되고, 살기는 무기가 되리라.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며 흉곽을 부풀렸다. 저 괴이한 것들의 목을 물어뜯자! 축제를 벌이자! 살벌한 살기의 축제를!
웨어울프들은 언제든 미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이미 미쳐 있었다. 하리드가 손가락만 한 번 까닥한다면 이곳은 살육의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침통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던 짐승들의 수장은, 여태 몰랐던 것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이질적이고 강렬한 기운을 풍기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피부가 쭈뼛거리면서 서고, 튀어나왔던 꼬리가 불쾌감으로 부풀었다. 발톱이 땅바닥을 긁으며 목울대가 그르렁 흔들렸다. 냄새. 죽은 시체의 향이 난다. 차갑고 서늘하며, 얼음 같은 것들의 피는 달콤하지 않았다. 시리고 푸르다. 그리고 강했다.
‘저것들인가.’
그건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갑자기 등장한 낯선 괴물들을 향해 경계를 드러냈다. 가운데에서 희게 빛나고 있는 제 주인을 지키듯이 주변을 에워싼 것이다.
푸르고 희고 아름다운 낯을 한 인간을 닮은 그것들은 짙은 피비린내 나는 송곳니를 날카롭게 세우며 당장 달려들 것처럼 웨어울프들을 노려봤다.
팽팽한 긴장, 괴물과 괴물은 천적이었다.
우드드득. 소리와 함께 하리드는 인간으로 현신했다. 괴물들을 거느리며 헐벗은 육체 그대로 타박거리며 걸어오는 남자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했다. 탄탄한 허벅지가 얼마나 달콤한지, 그리고 그 사이를 파고들면 어떤 황홀감을 느끼는지 기억하는 흰 짐승만이 타는 갈증을 느끼며 입술을 핥았다.
“이제 왔습니까? 늦었네요.”
“……언제부터였지.”
“당신을 기다렸는데.”
“대체 언제부터.”
“당신이 생각보다 늦게 와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르브리에는 꼭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다. 짙은 침묵 속에서 하리드는 그 희고, 낯선, 그러나 너무나 달콤한 제 반려를 보았다. 까만 밤에도 잊히지 않을 투명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더없이 잘 어울렸다. 항상 위화감을 느끼던 그 회색 머리카락보다 훨씬. 요요하게 빛나는 살기 어린 붉은색 눈동자는 푸른색의 것과는 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짓이기면 끈적한 피가 흘러내릴 것 같은 검붉은 장미 같은 사내였다.
“르브리에. 언제부터, 알았지?”
“글쎄. 고작 그게 궁금합니까?”
“나는.”
하리드가 주목한 것은 르브리에의 태도였다. 떼로 몰려온 거대한 짐승들의 모습에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그와 함께 보냈던 마지막 밤. 몇 시간 전의 순간에도 놀라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알았냐고 물었는데.”
“당신만 날 감시한 건 아니니까요.”
“처음부터 알았나?”
“그건 아닙니다. 오래되진 않았어요. 훌륭한 미끼를 잡았거든요.”
하리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사라졌던 비아드. 당연히 요람으로 돌아갔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젊은 수컷은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가 으드득 갈렸다. 제가 욕구에 미쳐 발광하는 동안, 저이는 차갑고 냉정했던 모양이었다. 적의 틈새를 노리기 위한 시간들이었을 뿐이었나 보다. 처참할 정도로 괴로웠다.
“그를 죽였나?”
“아니요. 그랬다간 당신이 날 정말 싫어하게 될 것 같아서.”
“…….”
“왜요. 기분이 구립니까? 배신당한 것 같아요?”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빙글거리는 낯짝이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웃을 수 있지. 자신마저도 저릿한 참담함을 느끼는 이 와중에, 어째서. 혹시 그와 자신이 반려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당신도 말 안 했잖아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러니 화내지 맙시다.”
“…….”
“우리가 서로 괴물이라는 것, 그렇게 아름다운 진실은 아니었잖아요.”
“괴물.”
“그래요, 괴물.”
아무리 강대한 괴물이더라도 서로가 반려라면, 죽일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 피를 담아 심장을 찌르면, 그도 자신도 상대의 손에 의해 죽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검이 자신의 품 안에 있다.
조각처럼 빛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하리드는 침을 삼켰다. 으르릉, 울리는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그를 재촉했다. 수장이여. 수장이여!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그랬듯 우리의 적을 향해 이를 드러내시오. 달려들어 죽이시오. 우리를 위하여!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지?”
“글쎄요.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이후의 일을 생각해 본 적은 없거든요. 워낙 이 순간만 그리며 살아와서.”
반짝이는 은발이 흔들렸다. 가늘게 휘어진 그 사랑스러운 눈매를 슬프게 바라보며, 하리드는 이를 악물었다.
왜 그의 피 맛을 맛본 적 있는 것 같은 기분일까. 우리는 목에 이를 박아 넣은 적이 없는데. 사실은, 그럴 수 있는 상대였음에도 피를 탐한 적이 없었는데.
제 반려가 연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강렬한 배신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안도를 주었다. 기쁨을 주었다. 그가 자신을 두고 먼저 죽진 않겠구나. 자신의 검이 저 심장에 꽂히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그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얼마나 수장의 자격이 없는 생각인가. 그가 괴물이라는 것에 기뻐하다니!
“당신이야말로. 날 어떻게 할 겁니까? 지금 여기에 달려온 이유.”
“…….”
“날 죽이고 싶어요? 당신들의 동족은 우리를 아주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당신들을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진 않고……. 슬프게도 우리와는 좀 다른 것 같군요.”
“다르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그렇습니까?”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종용하는 목소리가 은밀했다. 나긋하게 이어지는 말투, 손길, 부드러운 음색. 저 입술에 깊게 키스하면 어떤 맛이 나는지 잘 아는 육체가 내밀하게 뜨거워졌다. 내벽을 꽉 채우는 두껍고 빠듯한 감각을 아는 허벅지 사이가 간지러웠다. 달려들어 물어뜯고 싶었고, 성기가 뜨겁게 발기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서면, 넌 우리를 뒤쫓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심심하거든요.”
“사냥감을 노리듯이 뒤를 따라, 우리의 요람을 짓밟으려 하겠지.”
“그래요, 그렇겠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원하는 사냥감이 있거든요. 도망가는 것을 보면 뒤따라 목에 이를 박고 싶은 건 우리의 본능이라서요.”
“……너희의 이름은 뭐지?”
축축한 입술 사이로 발긋한 혀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또렷하게 보이는 비정상적으로 날카롭고 긴 송곳니. 자신들의 것과는 형태도 능력도 다를 것이다.
스윽, 그 붉은 눈동자가 헐벗은 하리드의 육체를 따라 흘러내렸다. 어깨를, 숨을 쉬는 꽉 조인 흉곽을, 홈이 파인 복부를, 그리고 다리 사이에 늘어져 있는 그것까지. 배가 당겼다. 후욱, 숨을 쉬자 젖꼭지가 바짝 서는 것이 보지 않아도 알만큼 적나라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 상대의 가느다란 웃음소리도.
제기랄.
“우리는 말이죠.”
그가 다가왔다. 미끄러지는 구슬처럼 앞에 섰다.
“뱀파이어라고 합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나는 우리의 이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신기하지요?”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응당 그럴 수 있다는 것처럼 르브리에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매만졌다. 마른침을 삼키는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서늘한 손바닥이 탐욕스럽게 짙은 접촉으로 가슴을 훑어내렸다.
손바닥의 여린 피부에 바짝 서 단단해진 유두가 짓이겨졌다. 아니, 비벼졌다. 스윽, 슥. 부끄러움도 모르고 젖꼭지를 짓누르며 다른 한 손은 허리를 타고 뒤로 넘어갔다. 조금씩 움찔거리는 우두머리의 올라붙은 엉덩이를 꽉 쥐며 가까이 다가와 속삭인다.
“우리는 피를 먹이로 삼아 탐하는 흡혈귀지요.”
은밀한 내부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당장 힘을 주면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날카로운 이와 손톱이 솟고, 오래 살며, 상처가 생겨도 나아 버립니다. 피를 빨아 감염시킬 수 있고, 인간보다 훨씬 강하고 잔인하지요. 피를 탐하고 상대를 매혹할 수도 있습니다. 송곳니를 박아 빨면 상대는 바짝 열이 올라 쾌락에 미치게 되지요.”
“악마 같군.”
“당신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런 종족이죠.”
움찔거리는 입구가 조금씩 그것을 삼키고 싶다는 듯 요동을 쳤다. 후후, 웃는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가득했고 하리드는 이를 악물며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광기 어린 동족들 앞에서, 어리고 풋내나는 것들 앞에서 적의 손가락을 항문에 꼽고 허리를 뒤흔드는 광경을 보여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 그래요. 오늘따라 고집스러운데.”
나긋하게 속삭이는 음성은 오로지 하리드의 귓가에만 닿았다.
힘을 주며 버티는 엉덩이의 살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은밀한 곳을 재촉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들어가 박힐 거예요. 당신의 내장을 뜨겁게 만질 겁니다.”
그 감각에 녹여진 육체가 목소리만으로 반응했다. 엉덩이가 들썩이고 허리가 흔들릴 것 같았다. 울컥, 하고 나와서는 안 될 것이 뜨겁게 분비되어 엉덩이 구멍을 뜨끈하게 만들었다.
“봐요. 당신도 날 원하잖아요.”
매끈하고 뜨거운 혀가 귓불을 사악 훑었다. 하리드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짐승들이 발광하듯 분노하는 목소리가 머리를 쾅쾅 울렸다.
“젖을 수 없는 수컷 주제에 언제나 이렇게, 발정해서 움찔거리고 있잖아. 먹어 달라고. 박아 달라고. 이 음탕한 기사님. 당장 드러눕고 싶잖아. 다리를 벌리고 애원하고 싶잖아. 이 안에 내 성기를 처박으면 어떤 기분인지 잘 알잖아요.”
흰 괴물의 수장은 마음껏 지껄였다. 유혹했다.
“충성스러운 당신의 괴물들이 보고 있어요.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내게 다리를 벌려 봐요. 애원하고 울부짖어봐. 수장의 구멍이 얼마나 쫀득하고 달콤하게 성기를 처먹는지 보여 줘요. 나랑 뒹굴어.”
“크윽.”
“다 버리고, 내게 와. 하리드 브리첼.”
귓바퀴를 타고 뜨거운 혀가 귀속의 구멍을 파고들었다. 흠칫, 척추를 타고 뜨거운 쾌락이 퍼졌다.
“내 개가 되어 준다고 했잖아. 잊었어?”
“…….”
“약속했잖아.”
그는 모른다. 르브리에는. 이미 그는 흰 괴물의 개였다. 동족만 없었다면 기꺼이, 낯선 괴물들이 보는 앞에서 다리를 벌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를 깔아뭉갰을지도 모른다. 쉽게 죽지 않는 반려라는 사실에 기꺼워하며 당장 그의 바지를 벗기고 우뚝 선 성기를 향해 엉덩이를 주저앉혔을지도 모른다. 허리를 뒤흔들며 교성을 내지르며 더 박으라고, 더 세게 처박으라고.
“르브리에.”
하지만 하리드 브리첼은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 풋내기 애송이가 아니었다. 그를 유혹하는 반려의 강렬함만큼 수장으로 살아온 세월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옷을 넣어 놓았던 공간을 찢었다. 팔을 집어넣자 나온 것은 옷이 아닌 낡아빠진 검이었다. 붉은 눈이 그것을 재빨리 훑었다. 휘어지는 짙은 시선은 약간의 불쾌를 머금었다.
꼭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동족들이 환호했다. 찔러. 찔러 버려!
“르브리에, 선택하라고 했나.”
검을 쥔 하리드는 그것을 움켜쥐었다가 곧 뒤로 던져 버렸다.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승리의 미소가 번지는 요염한 흰 괴물을 바라보며, 하리드는 목울대를 울렸다.
기쁜가. 내가 너를 선택한 것 같아서.
그는 손을 뻗어 은사 같은 고운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감촉은 다르지 않다. 빛깔은 달라도. 날짐승을 끌고 오는 것처럼 거칠고 모욕적인 태도로 머리채를 끌었다. 미소한 얼굴에 입을 크게 벌려 그 입술을 집어삼켰다. 감미로운 키스는 잊어 버릴 듯이 짓씹고 빨았다. 터지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 돌아 버릴 것처럼 달콤한 피를 마구 빨았다.
이게 그의 피다. 르브리에의, 피다.
어쩌면 다시는 맛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아니, 그래야 하는.
“크윽!”
내미는 하리드의 혀를 날카로운 적의 송곳니가 꿰뚫었다. 피가 번진다. 게걸스럽게 탐하던 상대가 순간, 움찔하면서 몸을 튕겼다. 하리드는 머리칼을 놓고 그가 벗어나지 못하게 어깨를 꽉 끌어안으며 손을 움직였다.
푸욱, 파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하리드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피가 섞인 타액이 길게 늘어지는 얼굴을 바라봤다.
“으, 읏…….”
짐승들의 하울링과 흰 괴물들의 비명이 시끄럽게 뒤섞였다.
붉은 입술 사이로 울컥거리면서 쏟아져 나오는 반려의 피 냄새가 머리를 돌게 했다. 그 순간에도 르브리에는 웃고 있었다. 하리드의 손이 그의 배를 꿰뚫은 상황에서도.
지독한 놈. 우리는 어쩌면 악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흐으, 이게, 달콤한 키스를 나누다가 할, 짓입니까? 예의는… 어디다 버렸어요?”
상황에 맞지 않는 그 천연덕스러운 말에 하리드는 웃고 말았다.
“너에게 배웠을지도 모르지. 넌 싸가지가 없어.”
“하지만 알잖아요. 배를 뚫어봐야 죽지 않는다는 걸.”
“그래, 나와 같겠지. 괴물들의 왕. 너는 저것들의 첫 번째이며, 뿌리일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파헤치던 멸망의 예언시는 네가 저들의 왕이기 때문이었어.”
천적. 웨어울프는 언젠가 뱀파이어들에게 패배할 것이다. 시작된 것은 바꿀 수 없다. 이미 르브리에를 죽이더라도 뱀파이어들은 번성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웨어울프는. 하리드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제 배 속의 존재를 상기했다. 괴물과 괴물의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게 될까. 생각해 보면 그 어느 미래에서도 다른 수장을 본 적이 없다. 제 후계자를, 권능을 넘겨주어야 하는 종족의 후계자를 본 적이 없다. 다음 대의 수장은 없을 것이다.
제 배 속에 자리잡은 이 생명은 웨어울프도, 저 흰 괴물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웨어울프의 그 누구도 수장을 낳지 못할 것이다.
히죽 웃으며 쓰러지는 흰 몸뚱이를 마지막으로 바짝 끌어안았다. 제 왕이 적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안 흰 괴물들은 이를 드러내면서도 다가오지 못했다. 달싹거리는 르브리에의 입술을 깊게 빤 하리드 브리첼은 속삭였다.
“끝까지 도망쳐 주지.”
마주한 입술이 빙긋 웃었다. 달싹인다. 그래요. 죽을 기세로 도망가 봐요. 잡는 순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별이다, 르브리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짐승은 달렸다.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동족을 이끌면서. 괴물의 수장은 종족을 택하지도, 반려를 택하지도 못했다. 피리를 부는 소년처럼 앞장선 괴물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배 속에서는 여전히 가냘픈 태동이 울렸다. 제 존재를 알리듯.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듯이.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