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괴물들의 만찬 (8/16)

8장. 괴물들의 만찬

“너, 어째 피곤해 보이는데?”

“…….”

룩센의 떨떠름한 물음에 하리드 브리첼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우습게도 룩센의 말이 맞았다. 그는 까무룩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정말 피곤했다. 열흘 동안 들판을 달려도 멀쩡했던 자신이, 열 명의 부족을 때려눕히고 그들 무리의 수컷 대장의 구멍을 뚫으며 격렬한 섹스를 해도 쌩쌩했던 자신이 고작 인간 하나와의 섹스 때문에 시달려 졸린 상황이라니. 이렇게 어이가 없을 수가.

“왜, 룩센. 무슨 일이지?”

룩센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너 말이다. 요즘 들어 점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지 않냐, 수장님아. 어제는 점심 가까이 왔다면서. 대체 뭐야?”

“…….”

세 번째 밤부터 불이 붙은 인간 반려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그래서였다. 아침은커녕 점점 사람들이 활동할 시간대까지 한 번 박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몰랐다. 그만하자 말하면 어이없게도 사근사근하며 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을 달래기까지 했다. 그 본성을 이미 제대로 짐작하고 있는 하리드마저 넘어갈 훌륭한 사탕발림이었다.

‘조금만 더 해요, 하리드.’

‘내가 애원하지 않습니까. 한 번만 더 합시다. 이번에는 진짜로.’

‘아, 이건 사실 당신이 날 놔주지 않아서입니다. 이것 봐요. 나오고 싶어도 놔주질 않잖습니까. 음, 한 번 더 하라는 뜻이죠?’

‘박고 싶어, 하리드 브리첼. 다리 벌려요.’

‘이봐, 기사님. 앞과 뒤가 다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소원대로 짐승처럼 열심히 박고 있는데 왜 그만하자는 소리를 하지? 왜?’

하리드의 얼굴이 순간 먹구름이 몰려온 것처럼 어둑해졌다. 인간은 원래 이러나? 정도를 모르고 이쪽 아니면 저쪽인가? 세 번째 밤에 정보를 받아간 것 이후로 네 번째, 다섯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밤까지 치렀다.

그런데 어이가 없는 것은 그 이후의 밤에는 정보도 받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만히 그림처럼 앉아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르브리에는 매처럼 덮쳤다.

발을 디디면 동시에 옷을 벗어야 한다고 봐야 했다. 침대에 밀쳐지고 방의 바닥까지 내려가 구르다가, 벽에 서서 관계를 하지 않나, 이제는 욕실에서 씻자는 수작을 부리더니 그곳에서도 서서 한참 박아댔다.

뭐가 문제지. 대체 뭐가 르브리에를 저렇게 만들었지?

‘이제 남은 횟수는…… 마지막 한 번뿐인데.’

적극적으로 변한 상대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했으나, 그 변화가 너무 급작스럽지 않나. 불길했다. 르브리에는 특히 더. 그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은 일곱 번이 끝나면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며 인사할 것 같았다.

고생했어요, 안녕. 그따위로 지껄이며.

“수장님.”

그 섹스에 대한 과한 열정이 과연 자신처럼 반려에 대한 집착과 반응일까. 아니면 단순히 인간들이 그러하듯 즐기는 것인지.

그 순간만을.

그러니 그 약속이 끝나면 분명 르브리에는…….

“어이, 수장님!”

“……뭐야.”

“뭔 생각을 그리하는진 모르겠는데 말이야. 내가 널 찾아온 건, 그 녀석 기억해?”

“누구.”

“네게 이시르의 검을 전해 줬던 발 빠른 놈 말이야. 비아드.”

“그래.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룩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녀석, 사라졌어.”

“……무슨 소리지? 요람으로 돌아갔다는 소리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보고도 없지 않았나.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니 룩센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젊은 놈들답지 않게 순종적이고 말 잘 듣는 놈이었는데 말이야. 갑자기 사라졌어. 이곳이 영 재미없는 곳이긴 하지. 좀 쑤셔서 요람으로 돌아간 모양인데, 너한테도 보고하지 않았다 이거지?”

“본 적 없다.”

갑자기 있던 이가 사라졌으니 심각해질 법도 하건만, 그런가 하고 룩센은 가볍게 넘어갔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건 하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종족은 원래 그랬다. 아무리 수장이라 할지라도 젊고 어린것일수록 더더욱 말을 안 들었다.

그나마 수장의 말이 절대적으로 먹혀드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건 정말 드물게 오는 그날뿐이다. 가끔 튀어나오는 말 더럽게 안 듣는 혈기왕성한 것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결국 피와 살점이 튀기는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래서 비아드의 실종을 그들은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뭐, 돌아갔겠지. 애새끼도 아니고. 그나저나 너, 내일이 어떤 날인지 알지? 내일은 붉은 밤 축제면서 동시에 네가 그놈과 마지막 밤을 보내고 오는 날이야.”

붉은 밤 축제. 잠시 잊고 있었던 수장의 가장 중요한 의식의 날.

“그랬었지.”

하리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지막 밤은 아침까지 르브리에와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벽이 되어 어둠이 완벽하게 잠식했을 때 뜨는 그 붉은 달은 종족을 미치게 만들 테니까. 모조리 튀어나와 인간 세계로 뛰쳐나올 그것들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붉은 달에 영향받지 않을 수장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 오로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이날을 위해 그들 종족에게는 수장이 있었다. 미치지 않는 지표. 의식의 두뇌. 살육에 미쳐 종족들이 서로를 해하지 않도록 명령을 내려 줄 이.

그래서 수장은 미치면 안 된다. 죽어서도 안 된다. 그게 그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절대적인 의무였고, 하리드 브리첼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굳건한 수장이었다.

그의 상황을 알고, 반려의 존재를 알고, 그리하여 느낄 혼란을 다 아는 룩센조차도 그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가 묵직해졌다.

동족. 동족들. 사랑하는 혈족들.

그리고 반려. 그 동족들을 모두 끝낼 것이라는 멸망의 예언시를 타고난 그의 씹어 먹고 싶은 반려, 르브리에.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입 안에 모래가 찬 것같이 까슬했다. 목이 말랐다. 불쾌함과 서글픔과 흥분과 초조가 모두 뒤섞여 심장을 들썩였다.

“내일 이른 저녁쯤에 시간 비워 놔. 약속한 마지막 날이긴 하지만, 주기가 딱 맞아서 어쩔 수 없어. 일찍 치르자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래. 터지기 직전이라 우리 애들 데리고 사냥 나갈 거야. 네가 지금 정신이 빠져서 잊은 모양인데, 우리 사냥한 지 너무 오래됐거든. 너도 슬슬 한계가 왔을 거야. 그 상태로 붉은 밤을 맞이했다간 곤란해. 너까지 미치면 정말 재앙이라는 것을 알지?”

“알았다.”

“하리드, 잠시 반려에 관한 생각은 접어놔. 반려는 일방통행으로 자각되는 것이 아니잖아.”

그것이 정말 제대로 된 지식인지 이젠 그것마저 의심이 들었지만, 그는 룩센에게 불안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 의구심을 떨쳐 냈다. 붉은 밤, 그리고 마지막 밤. 그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내일이 되면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그 역시.

“……그래. 모두에게 전달해 놔.”

그래도 오랜만의 사냥을 생각하니, 그도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피의 감각을 되새기자,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에게 사냥이란 숨 쉬는 것과 같았으니까. 어쩌면 마지막 날에 대한 긴장을 사냥에 대한 흥분으로 도망가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 * *

시울 폰 샤나 후작은 황제에 관해서는 옳게 보았다. 황제는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여태껏 충직했던 짐승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쑥 떠오른 생각 하나. 짐승들이 찾고 있었던 것. 그것이 사람이고, 그 사람이 만약에 페르달 공작과 관련이 있다면?

샤나 후작이 말한 사내들끼리 붙는 가능성보다도 황제는 그것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자세히 알아야겠다. 그날 그렇게 내치는 것이 아니었는데. 후회를 떠올리며 그는 은밀한 밤에 샤나 후작을 불렀다. 언제나처럼 샤나 후작가가 오랫동안 황제의 수족이 되어왔던 것처럼.

“그때 했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졌네. 말해 보게나.”

“……아아. 공작에 관련된 이야기 말씀입니까, 폐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는 남자를 바라보던 황제는 등 뒤가 쭈뼛 서는 감각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고작 이틀이었다. 황제가 시울 폰 샤나 후작을 부르지 않은 것이. 그런데 대체 무엇이 바뀌었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달라.’

히죽 웃어 보이는 눈동자가 이상했다. 같은 사람인데도 꼭 겉모습만 같은 무언가가 시울의 흉내를 내는 것 같은 섬뜩한 공포가 들었다. 황제가 할 말을 잃어버렸을 때, 시울은 노래하듯이 말했다.

“제가 무언가 크게 착각한 모양이었습니다, 폐하. 자세히 조사해 보니 페르달 공작과 브리첼 공작의 접점은 없더군요. 기막힌 우연의 일치였지 뭡니까.”

“…….”

황제는 그 말끔한 얼굴을 잠시 침묵한 채 바라봤다. 시울이 황제를 잘 아는 만큼 그도 저 수하를 잘 알았다. 그래서 설령 저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저렇게 담백하게 물었던 먹이를 놔주는 시울 자체가 이상하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꾸만 히죽거리면서 웃는 것도 평소의 그와 너무 다르지 않은가.

빙글 웃은 사내가 어떤 미련도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산뜻하게 물었다.

“그러면 물러가도 될까요, 폐하.”

“……그리하게, 후작.”

끼익, 문이 닫혔다. 황제는 힘이 빠져 의자에 등을 기대며 턱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졌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충성스러웠던 브리첼도 제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하고, 살인인지 실종인지 정체 모를 황족 사건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고, 페르달 공작은 어김없이 황제 자신의 속을 불쾌하게 갉작거리고 있다. 자신의 제국에서, 그의 땅에서.

뜨득, 황제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 * *

살롱에 모여 있던 귀부인 중 한 명이 부채를 살랑이며 말을 꺼냈다.

“어디 요즘 무서워서 살겠어요? 밖을 못 나가겠다니까요.”

기다렸다는 듯 다른 여인이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페르달 공작 각하가 사건을 금방 처리하실 거라고 믿었는데.”

“그 신출귀몰 귀신 같은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요? 아무런 단서가 없는데. 아무리 유능한 분이더라도 그건 불가능하죠.”

모두가 한 입씩 보태며 요즘 가장 화두가 되는 사건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기 시작했다.

“벌써 18명째예요. 그리고 그 많은 사람의 사체조차 나오지 않았어요. 이건 어쩌면…… 반역 세력이 있는 것 아닐까요? 거기다 지금 살인이 멈춘 이유는 또 뭐죠? 소름 끼쳐.”

“어머, 당신 미쳤어요? 어디서 그런 소리를.”

황족 살인 사건.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아니, 더 심해졌다. 용의자는 여전히 오리무중, 실종자는 18명까지 늘어갔다. 그리고 우뚝 멈췄다.

이대로 실종 사건이 멈춘 것인지, 아니면 더 진행되는 것인지. 대체 범인은 누구이고 무슨 목적인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모두 소문이 나 버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귀족들을 평민들이 비웃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욕을 하든지 말든지 정작 귀족들은 언제 황족에서 자신들이 그 대상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여 있던 귀족 중 한 명이 입술 앞에 검지를 치켜세우며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내가 신빙성 있는 말을 들었어요. 이리 모여 봐요. 그 18명의 실종자 있잖아요. 세상에 알고 보니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어머, 그걸 누가 모르나요. 모두 황족이잖아요!”

말을 꺼낸 여자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쯧 찼다. 그리고 부채를 탁 치며 자기 말을 끊지 말라는 듯 눈빛으로 경고했다. 붉게 칠한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리며 조잘거렸다.

“그게 아니에요. 그들은 말이에요, 십 년 정도 전에 황궁에서 쫓겨난 전 1황자를 기억하세요?”

1황자. 모인 귀족들의 얼굴에 서늘한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왜 여기서 그 언급이 나온단 말인가.

지금의 황제는 원래 2황자로, 황위 승계를 할 예정이 없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정식 후계자를 제치고 그 자리에 올라섰다는 사실이 된다. 문제는 전 1황자, 황태자였다가 끌어 내려진 그 인물이 그렇게 명예롭게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황제는 제 첫째 아들을 괴물로 공표했다. 지금까지도, 그 내밀한 황궁의 사정을 귀족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황제는 그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감히 그걸 누가 물을 수 있겠는가.

2황자인 시절부터 현 황제는 제 형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었다. 죽은 이후에도 1황자가 보인다는 헛소리를 한동안 내뱉을 정도로.

“저기요. 전 황태자와 황태자비 말씀하시는 건가요? 원래는 내정되어 있었다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어쨌든 그들이 여기서 왜……. 황제 폐하께서 들으시면 경을 칠 이야기라는 건 알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2황자였던 황제 폐하는 그 사건에 대해 민감하시다고요.”

“쉿. 그러니까 조심해야죠. 다들 입조심해요.”

“……흥. 그래서요. 무슨 관련이 있는데요?”

말을 꺼낸 여자는 사뭇 매혹적인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그들에게 꽤 신빙성 있는 말들을 근거로 늘어놓았다.

“그 18명의 황족이 바로 그 사건과 깊숙하게 관련이 있대요. 사건을 관조한 자, 방관한 자, 그리고 관여한 자! 모두 그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는 증인들이기도 하고요. 어때요, 일리 있지 않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누군가가 픽 비웃었다.

“그러면 가장 관련 깊은 황제 폐하께도 곧 실종 사건이 벌어진다는 소리인가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

정말 헛소리였다. 황궁의 황제를 얼마나 많은 인력이 지키고 있는가. 그런데도 왜,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 말을 꺼낸 여자조차도 스스로의 말에 한순간 부르르 떨 정도로 기이한 순간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생각했다. 정말, 정말일까? 의구심이 귀족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 18명의 사람을 죽인 것은 정말 전 1황자의 망령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살해당한 1황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귀족 여자는 유유히 웃으며 귀족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마침 살롱 밖에서 대기 중인 마차에 그녀가 오르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앳된 얼굴의 청년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잘했다, 제니스.”

“천만에요. 나엘 님.”

다그닥,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 * *

“오늘 르브리에는 궁에 나오지 않아요.”

“묻지 않았습니다만.”

“……그를 찾고 있는 줄 알았어요.”

“저는 지금 전하의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하리드는 눈을 들어 검을 들고 서 있는 황녀를 보았다. 평소라면 재잘거리면서 떠들었어야 했을 여자는 오늘따라 조용했다.

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녀가 18번째에 멈춘 실종자, 그리고 그 이상 벌어지지 않는 사건을 이야기할 줄 알았다. 몇 번 넌지시 물어보면서 관심을 표하곤 했으니까. 그러면 어찌 답을 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눈치로 언급하곤 했으니.

“전하.”

그러나 무거운 얼굴로 침묵하다 처음 내뱉은 말이 저것이다. 어떤 의미지. 가늠하듯 조용히 응시하고 있으니 점점 황녀의 숨이 거칠어졌다. 하리드는 미간을 좁혔다. 자세가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요즘 검을 연습하고는 계십니까. 저는 길을 터줄 수 있을 뿐, 그 이후의 노력은 전하께서 직접 하셔야 발전이 있을 겁니다. 원래 기본적인 체력이 있어야 검술을…….”

“공작, 제발.”

말이 뚝 잘려 나갔으나, 하리드는 반문하지 않고 가만히 동작을 선보이던 목검을 내렸다. 원래부터 그녀는 통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

“내가 처음부터 당신에게 검을 배우고 싶어서……. 그래서 스승이 되어 달라 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죠? 스승은 핑계였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수락했을 거예요. 철부지 여자가 대놓고 귀찮게 하는구나, 그리 여겼을지 모른다 생각했어요.”

하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걸 알아도 설마 직접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정말로, 이 여자는 르브리에를 닮았다.

시간과 경험이라는 것이 서로를 닮게 할 수도 있는 것일까. 르브리에는 자신의 부모를 죽인 남자의 딸과 함께 있으며 어찌 그리 웃을 수 있었을까. 도대체 그 복수라는 것을 얼마나 은밀하게 치러야 하기에.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만큼 절박했거든요.”

어쩌면 그리 머지않은 시일 내에 죽임을 당해 저 자리에 사라질지도 모르는 황녀의 처지는 가련했으나, 하리드 브리첼은 동정하지 않았다. 그녀를 동정하기에는 짐승이 죽인 자들이 더욱 가련했다. 짐승은 기본적으로 제 사람의 것이 아닌 일에는 무정했다.

“나는, 나는요.”

“듣고 있습니다.”

조용히 멀어지는 시녀들이 손수건을 쥐고 훌쩍이기까지 해 한숨이 났다. 짹짹거리는 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은 기분 좋게 사냥을 하고…… 마지막으로 르브리에와 밤을 보내는 날이었고.

멍하니 의식을 떠나보내려는 찰나, 황녀가 다가와 앞에 섰다. 그보다 작은 키로 올려다보는 여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작고 갸름했다. 희기도 했고, 또 무엇보다 둥글고 커다란 보라색의 눈동자는 굉장히 절박했다. 아무리 무정한 그라도 차갑게 내칠 수 없을 정도로.

“브리첼 공작, 제발 제대로 들어줘요. 한 번이라도 말하고 싶으니까.”

“…….”

“당신은 내 이름을 알고는 있나요?”

모를 리가 있나. 황녀, 이예르라.

“후후. 괜찮아요.”

하지만 내뱉어 대답한다고 해도 울상인 저 얼굴이 웃음으로 바뀔 것 같진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그에게 닿을 듯 말 듯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물리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잡아 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단칼에 끊어 내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것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

나는 당신의 아버지를 죽일 남자를 돕고 있지.

섹스도 하고 있어. 거기다 그는 내 반려야.

“사랑이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이라면 좋았을 것을요.”

그런 말들을 내뱉으면 당장 기겁하며 사랑 타령을 물리고 도망칠 여자였다. 분명 언젠가의 미래일 것이다. 끔찍하게 노려보며 저주할지도 모른다. 그녀를 깜찍하게 속여 온 르브리에를, 침묵으로 일관한 채 충성스러운 기사인 척 숨어 있었던 짐승의 수장인 그를.

“당신을, 하리드 브리첼.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

“브리첼. 당신을 생각하며 몇 년간 너무나 행복하고, 애틋했어요.”

하지만 저 감정만큼은 존경한다. 그는 절대 저런 얼굴로, 애틋함으로 그 남자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생각을 할 순 있어도 저렇게 소중하고 붉게 피어오르는 감각은 아닐 것이다. 쓰러뜨리고 서로를 탐하고 혀를 얽을지언정.

하리드 브리첼은 붉게 변한 얼굴로 떨리는 고백을 내뱉는 여자를 조용히 보았다. 사랑스럽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것이고, 기억에 남을 것 같냐 말한다면 그럴 것이라 답할 터였다.

하지만 그의 반려가 아니다.

반려에 매혹당한 심장은 더 이상 아무리 아름다운 이성을 보아도 뛰지 않고, 아무리 야들한 살내음을 맡아도 움직이지 않는다.

“야속하긴. 그래도 대답이라도 해 줄 줄 알았어요.”

“전하.”

황녀는 퍼뜩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자 시녀들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래요, 어떤 말이 나올 줄 이미 알고 있었어요. 당신의 시선은 단 한 번이라도 내가 궁금하다는 듯 바라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걸 알면서도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어……. 감정을, 강요할 순 없지요. 당신이 설령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이더라도, 나는 질투할 자격도 없었는데.”

보라색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그냥 너무 좋았거든요, 공작. 당신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곁에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어요. 너무나 사랑했어요.”

“……더 좋은 인연을 만나실 겁니다.”

“고마워요.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들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씁쓸했다. 수업할 기분이 아니겠지. 아니, 이 수업을 더 이상 하게 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조용히 뒤를 돌아 시녀들과 함께 걸어가던 황녀는 돌연 뛰쳐나가 버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 곁에 누가 있는 것이 더 괴로워 보이는 뒷모습을 보면서 감히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리드 브리첼은 가슴 안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죄책감을 가질 리가. 자신이. 헛웃음을 지으며 던져 버렸던 목검을 다시 주우러 고개를 숙이려는 때, 그는 미간을 좁히며 제자리에 서서 호흡을 했다.

‘뭐지?’

잠시였지만 눈앞이 빙글 돌았다. 꼭 빈혈이라도 온 사람처럼. 헛웃음을 지을 일이다. 그들 종족이 빈혈이라니. 너무 오랫동안 사냥을 하지 않은 탓일까.

종족의 본능에 따라 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 버리고 네발로 뛰어 도망치는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지 않아서일까. 기이하게 배 속이 요동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하리드는 생각을 끊어 냈다. 그때의 그는 몰랐다. 자신이 넘겨 버렸던 어떤 가능성, 그 작은 가능성을.

자신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수장의 능력 중 무엇이 있었는지를.

쿠웅-. 그의 배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씨앗을 발아하듯 조용한 울림을 표했다. 내가 여기 있어요, 그리 말하는 것처럼.

* * *

일이 터진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모든 특이한 것을 합쳐 놓은 것 같은 날.

그들이 오랜만에 사냥을 떠나는 날이었고, 하리드가 황궁으로 불려간 날이었으며, 그날 밤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르브리에를 다시 보는 날이었다.

“꺄아아아악! 꺄아아아!”

마침 황궁 성벽을 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하리드는 갑자기 울리는 그 찢어지는 고함에 마차의 문을 벌컥 열었다. 굴러 내려가듯 뛰어나간 그는, 아마도 부지런히 아침 일을 하기 위해 궁을 오가고 있었을 시녀가 비명을 지르는 이유를 함께 목격했다.

“…….”

“꺄아아아아아악!”

그것은 목이었다. 잘린 목이 장식처럼 늘어져 있었다. 길게 울리는 시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리드는 눈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열여덟.

그건 실종자들의 것이다. 아니, 이제는 살해당한 18명의 황족들의 혀 잘린 머리가 성벽에 전시되어 있었다. 저 고약한 짓을 지시했을 인물을 떠올리며 하리드는 금빛 눈을 섬뜩하게 빛났다. 저것을 내걸었다는 것은…… 검을 휘두르기로 한 것일까.

오늘 밤. 자신들의 마지막 밤을 끝으로.

* * *

“공작, 브리첼 공자아악! 대체 왜 이제야 오는 건가!”

“…….”

“밖의 잘린 목을 보았나. 그것을 보았냔 말일세! 대체 그대는 무엇을 한 게야!”

역시나 황제는 노발대발 날뛰었다. 이 순간만큼은 눈앞에 선 자가 누구인지, 그가 얼마나 평소 짐승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잊은 모양이었다.

붉게 달아올라 분노에 날뛰는 모습이 평소와 참 달랐다. 처음부터 인내심이 뛰어난 자가 아니었으니 제 권위를 손상하고 나아가 목숨을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적이 달가울 리 없었다. 지배자로서 근엄하게 주변이 겪을 혼란을 수습하기보다는 참고 참아 왔던 불안이 터진 모양이었다.

‘나도 한동안 오지 않았으니, 더 그렇겠지.’

붉게 핏발이 선 눈동자를 하고 있던 황제는 문을 열고 들어온 하리드를 보자마자 체면도 잊고 옥좌에서 뛰어 내려왔다. 계단을 구를 듯이 타고 내려와 두 팔을 뻗어 하리드의 가슴팍의 옷을 꽉 쥐었다.

“이건 반역일세!”

“좋은 뜻을 품은 것 같진 않더군요.”

“그걸 말이라고! 그대에게는 나를 지킬 의무가 있어!”

“……의무.”

비뚜름한 비웃음이 솟구치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아직 황제는 더 믿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이미 깨져 버린 짐승들의 계약을. 아니, 어쩌면 저 영악한 인간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리드 브리첼 자신의 행동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가까스로 덧붙이고 있었던 그 충정이라는 것을 내던져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래도 모른 척하고 싶은 거겠지. 계속 믿고 싶기 때문에. 강력한 짐승들의 힘이 여전히 자신을 호위하고 있다고.

황제는 손톱을 까드득 물어뜯었다.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씁쓸한 혈향을 풍겼다. 하리드는 콧등을 찡긋했다. 이상하게 저 피 냄새가 굉장히 역했다. 사냥을 오래 하지 않은 자신에게 온갖 피 냄새는 달콤해야 정상일 텐데 왜 이렇게 거북할까.

“처음부터 페르달이 의심스러웠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사건의 담당이 아무것도 잡지 못했어!”

르브리에가 아니라 다른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저 꼴이 났을 것이다. 단지, 황제를 농락하는 주체의 의미는 바뀌었겠지만.

“폐하, 진정하시지요.”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는가! 공작은, 공작은 모르네.”

“제가 무엇을 말입니까.”

“저 시체! 시체들!”

황제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굉장히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을 마주한 것처럼. 하리드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저 반응은 자신이 죽은 전 1황자 부부에 관련되었기 때문인가. 단지 그것 때문에?

“확인, 확인을 하지 못했었어. 그래, 그랬었어. 그놈의 이름이, 이름이 뭐였더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 윽.”

황제가 갑자기 힘을 주어 목을 조일 듯이 옷자락을 잡아 흔들었다. 고작 작고 늙은 인간의 힘이었지만, 하리드는 잠시 휘청였다. 그리고 흔들린 자신을 무섭게 관조했다. ……분명 힘이 평소보다 떨어졌다. 왜 이러지? 금식의 기간이 길어서?

그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는 것을 모르는 황제는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옷이 찢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날 죽이러 올 걸세! 저것들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을 내가 알고 있노라고!”

“무슨 짓을 하셨는데 이리 떠시는 겁니까.”

“…….”

“제게 말하지 않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 그건.”

“제가 모르는 게 있습니까.”

퍼뜩, 이성이 돌아온 사람처럼 황제가 굳었다. 그리고 옷을 놓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물러났다. 하리드 브리첼은 그 반응을 경계했다. 저 황제가 자신에게 속이는 것이라? 10년을 곁에 붙어 있었다. 황제가 제 형이던 1황자 부부를 밀고해서 죽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별 내용이 아니라 생각해서 파고든 적이 없었는데, 왜 저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1황자는 결백했나? 모함으로 죽였나? 저 황제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 하지만 황제는 흘러가듯 말했다. 확인을 하지 못했다. 죽이러 온다, 자신을. 그것은 사건에 깊게 관련되어 있는 자들 중 하나가 복수하러 온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페르달은. 페르달 공작 부부의 아들이 1황자의 복수를 해 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페르달 공작 부부는.”

“……뭐라 했나?”

“그들은 왜 죽었습니까? 설마 1황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게, 지금 자네 입에서 왜 나오지?”

그 반응에 더더욱 섬뜩한 경계가 날카롭게 솟구쳤다.

짐승은 기민하게 코를 움직여 냄새를 맡았다. 잊고 있는 것이, 놓친 것이 있다. 오래간 이곳을 유영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황제의 개가 되어 시간을 보낸 자신들이 놓친 것이 있었다!

으르렁거리며 위협하고 싶은 기분을 끔찍하게 참아내며, 하리드는 눈을 똑바로 떴다. 그리고 물었다.

“말해 주시지요, 폐하.”

“그대는, 그대는 어찌하여 쓸데없는 과거의 일에…… 혹시 자네, 우리의 계약을…….”

“폐하.”

까득까득. 이제 황제의 손은 멀쩡한 손가락이 없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늙어 버린 것 같은 얼굴로 황제는 계단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페르달 공작은 형님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였지. 나는, 하나의 불씨도 남겨 놓고 싶지 않았네……. 하지만, 아주 은밀하고 교묘했어. 누구도 의심하지 못했을 걸세. 그러니, 그러니 내가 페르달의 아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겠는가. 어린 것까지 죽이기는 싫었으니.”

과연 그랬을까. 유약하고 힘없는 어린아이에게 작위를 주면, 주변에 승냥이 같은 것들이 달려들어 알아서 뜯어먹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닐까. 연약한 척 이어지는 황제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하리드는 머리를 굴렸다.

지나치게 은밀했던 르브리에. 18명의 잘린 머리. 황제를 압박하고, 황녀를 교묘하게 구슬리던 모습. 페르달의 이름을 말하며 내보이던 기묘한 위화감. ……르브리에. 하지만 르브리에는 분명 페르달 공작 부부의 아들이었는데.

‘르뷔.’

내게 속인 게 무엇이지.

‘르뷔.’

너를 보며 놓친 게 무엇이지?

‘르뷔.’

네 진짜 목적이, 무엇이지?

‘르뷔…….’

정말 널 죽이지 않으면, 내 종족은 침몰하는가.

하리드는 까마득한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살아 있었을 수도 있어, 그랬을 수도 있어…….”

“누가 말입니까.”

어깨를 떨며 웃고 울던 황제는 광기에 휩싸인 자처럼 목을 끓며 속삭였다. 번들거리는 눈빛은 미친 사람의 그것과 비슷했다.

“……형님의 아들. 그 괴물 새끼 말일세.”

괴물.

괴물 새끼.

그 단어가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 * *

한편, 하리드 브리첼 공작이 입궁했다는 소식에 울적해진 이예르라 황녀는 피신 중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명령을 해도 그를 강제하여 결혼하진 않겠다는 마지막 의지를 다지며, 고백해서 차인 남자와 평생을 살라면 그건 정말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지는 것이라고 눈물을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흐윽, 흑. 흐윽.”

중얼거리면서 그녀밖에 모르는 아무도 모르는 정원의 숨겨진 장소에서 어린아이처럼 무릎에 고개를 묻고 훌쩍거리고 있었을 때였다. 대체 이 지긋지긋한 사랑은 언제가 되야 사라지는 걸까.

하리드 브리첼, 그 이름을 들으면 날뛰는 갈매기 떼처럼 와르르 울리는 이 심장은 언제 고요해지는 것일까.

18명의 잘린 목도 경악스러웠고, 기겁하며 걸어가던 황녀가 마주쳤던 시울 폰 샤나 후작은 더욱 두려웠다. 불쾌한 낯으로 공작들에 관해 떠들려는 것이면 자중하라고 쏘아붙이자, 그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을 했다. 마치 저번의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다, 다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아. 훌쩍이며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슬픔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바로 위에서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여기에 있었군요.”

“……르브리에?”

대체 여기에 왜 그가.

믿고 있었던 남자의 등장에 환한 웃음이 떠오르는 것도 잠시였다. 황녀 이예르라는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떠올리며, 미소가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빙긋 웃고 있는 르브리에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랬지만…….

이곳은.

“르, 르브리에.”

“예, 전하.”

이곳은 자신밖에 모르는데.

‘어, 어떻게 르브리에가 이곳에.’

어떤 표정을 하고 올려다봤을지 모르겠다. 한 가지 정확한 것은 무척이나 두렵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을 올려다보는 얼굴이었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르브리에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달콤한 꿀처럼 웃으며 그녀를 위로하지도 않았고, 주저앉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지도 않았다.

그저 웃었다. 그림처럼 그렇게 고요히 서서.

“르브리에…….”

아닐 거야. 설마, 아닐 거야. 이 사람만은 아닐 거야.

격렬하게 외치는 스스로의 감정을 내면의 목소리가 비웃었다. 정말 그래? 정말 저 남자를 믿을 수 있어? 사실 알았잖아. 그에게 이상한 점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가 이곳을 어떻게 알았겠어. 이곳을 또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였지?

“르, 르브…….”

“이예르라 전하. 당신은 처음부터 참 똑똑했죠. 사랑스러운 아이였어요.”

“…….”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빙긋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서도 썰물처럼 점차 표정이 빠져나갔다. 무표정한 낯으로 내려다보는 그 얼굴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것.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던 그의 회색 머리카락이 만약, 만약 다른 색으로 바뀐다면.

손이 떨렸다. 달싹이는 입술이 멍청하게 말을 쏟았다.

“내가 이곳을 알려 준 적이 있었나요?”

제발 그렇다고 말해.

“그럴 수도 있지요.”

제발 당신이 아니라고 말해.

표정이 사라진 그가 낯설고 두려웠다.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얼굴이 서서히 겹쳐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왜냐하면 여태껏 잊고 있었던 그 아이는…….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뛰었다.

“무얼 의심하십니까?”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모습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모, 몰라, 모르겠어요.”

“맞추신다면, 특별한 상을 드릴 텐데.”

익숙한 그가 지독하게 낯설어서 이예르라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스승님. 당신, 누구야. 당신 대체 누구예요.

“처음부터 나를.”

속이고 곁에 다가왔어요?

“아니, 어떻게, 어떻…….”

죽지 않고 살았어요?

“아버지를, 나를…….”

원망해요?

어떤 문장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이예르라는 용기가 뚝 떨어져 입을 꾹 다물었다. 흔들리는 그 눈빛에 상대의 미소가 더욱 진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당신에게는 미움이 없었습니다만.”

그런데?

“한 가지는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이예르라는 조용히 입을 벌렸다. 서서히, 서서히 변해 가는 상대의 눈동자를 석고처럼 응고되어 바라볼 뿐이었다. 푸른색에 붉은 물감이 풀어진다. 그리고 또렷하게 드러난 그것은.

“그에게 고백하셨다던데. 그건 좀 거슬리더군요.”

“…….”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진 마세요, 전하.”

“…….”

“오늘은 여기까지, 당신의 목을 취하진 않겠습니다.”

빙긋 웃은 그 남자는, 여태까지 알아 왔던 것과 다른 전혀 낯선 그 남자는 바람처럼 속삭였다.

안녕, 사촌.

황녀는 그 소름 끼치는 단어를 똑똑히 들었다.

* * *

“…….”

하리드는 고개를 들었다. 이 황궁 어딘가에서, 제 반려의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만날 필요 없다. 몇 시간 뒤에는 격렬하게 뒹굴게 될 것이다. 그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리드 브리첼은 언제부턴가 품속에 숨겨 다니게 된 그 검을 떠올렸다.

차갑고 불편한 감각을 주는 옛 검. 이시르가 전해 준 것이며, 경고한 검이다. 죽이라. 망설이지 말고 죽이라, 수장이여. 죽이십시오, 제발. 이시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리드는 이를 악물었다.

혹여 르브리에가 인간의 황제가 될지라도 그가 자신들 짐승을 죽이진 못한다. 배척하지도 못한다. 예언시는 이해할 수 없다. 고작 인간일 뿐이다. 그러니 바뀌는 것은 없지 않은가. 나약한 생각을 떠올려 봐도 결론은 같았다.

‘피할 수 없겠지.’

하리드는 오늘 밤, 인간과 마지막 밤을 보내며 선택해야 했다. 반려를 품을지. 아니면 이 검을 쥐고 동족을 선택할지. 멸망의 예언시는 아직도 바뀌지 않았으며, 하리드는 반려로서 그를 속박했는지에 대해 조금의 자신도 없었다.

쓰라린 패배를 알리는 것처럼 쓴 물이 올라오는 결과였다. 그들의 은밀한 밤은 르브리에가 아니라 하리드를 길들이며 묶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 르브리에의 향기는 언제든 그를 발정시켰으니까.

* * *

아우우우, 길게 소리가 울린다. 목을 울리다 휘영청 뜬 달밤을 보고 네발로 기는 짐승의 머리는 하울링을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히 늑대의 울음소리를 넘어 진동에 가까웠다. 공기를 찢고, 고요한 밤의 시간을 박살 내 울리는 명령에 거대한 육체로 질주하던 이들이 움찔 그 자리에 멈췄다.

-오라. 모두 오라.

-너희의 수장에게 달려오라.

사냥의 밤은 광기의 밤이었다. 곧 새벽이 넘어가 약속된 붉은 밤의 시간이 도래하면 더욱 밀쳐 날뛰게 될 것이다. 특히 인간 세계에 주둔하는 그들은 억눌린 혈기에 더욱 괴로워할 것이다. 선명하게 비명을 지르는 살기 속에서 의식을 잃는다. 수컷들은 달렸다. 온전한 이성도 영혼도 놓아 버린 채. 날카로운 손톱을 뻗어 고함을 지르고, 탄력적인 다리를 뻗어 땅을 박찬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짐승들은 그들의 먹이였다.

꾸드득. 관절이 비정상적으로 꺾이고 수축하고 변하는 모습은 흉측했다. 인간들이 보았다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마침내 온전한 시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하리드 브리첼은 헐벗은 육체로 대지 위에 섰다.

“…….”

검푸른 저녁의 아래 수치를 잊고 질주하던 동족들의 울음에 귀를 기울인다. 기괴하게 뻗은 관절과 강력한 손톱은 그들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었으나, 인간들에게는.

생각의 흐름이 푸른 눈의 주인에게로 휙 튀어 올랐다. 만약 르브리에가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단 한 순간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제 반려는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게 될까. 거대한 덩치, 날카로운 이빨, 샛노랗게 번뜩이는 기괴한 괴물의 눈동자에 기절할까.

휘리릭 손을 휘젓자 공중에 쩍 갈라진 모양이 나타났다. 검은 문처럼 보이는 것에 팔을 집어넣자 준비해 놓은 옷이 뚝 떨어졌다. 여벌은 몇 개나 더 있었다. 변이할 때마다 찢어지는 옷은 골치 아픈 것이라, 아주 가끔 사냥을 나올 때는 마법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몇 놈이나 초원으로 나갔지?”

옷을 입으면서 묻자, 어느새 쿠웅! 소리를 내며 다가온 거대한 갈빛의 웨어울프가 하리드 옆에 착지했다. 크게 굽어진 등과 거친 갈기 털,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가 뚜렷했다. 하리드는 그것을 보며 말했다.

“룩센, 배는 좀 채웠나?”

-크르르르릉.

수장의 하울링으로 광기에 의식이 날아간 동족들은 이성을 찾는다. 그것은 붉은 밤일수록 강하게 작용했다. 늑대인간들이 다 저렇다. 웨어울프는 어쩌면 저주받은 종족이 아닐까. 깊은 밤, 새벽, 이제 요람의 문이 열리면 쏟아져 나올 어리고 혈기 넘치는 것들을 말리기 위해 하리드는 제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래서였다. 그 말을 했던 것은.

“정리는 네가 좀 맡아라.”

꾸드득, 아까와 비슷한 울림이 요란하게 퍼졌다. 그리고 바닥에 웅크리듯 주저앉아 헐떡이는 숨 쉬는 인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룩센이었다.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올려다보는 그의 부하.

“무슨 소리야? 너 왜 벌써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

룩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잠깐만, 하리드. 그게 뭐야.”

“보는 그대로지.”

하리드는 손을 들어 올려 가늘게 떨리는 제 오른손을 보았다.

“혼란의 증거다.”

“맙소사.”

오늘같이 중요한 날. 그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언제부터 미치고 있었던 것인지, 반려라는 관계가 이렇게 자신을 몰아붙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저 멀리서 울음소리를 퍼뜨리며 위치를 알리는 동족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머리가 멍했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장은 미치지 않는다. 아니, 미치지 않아야 했다. 미쳐버린 동족들 중 유일한 제정신인 지표였으니까.

“먹을 수가 없어.”

“하리드 브리첼…….”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은 것처럼, 짐승의 살도 삼킬 수가 없었어.”

입 안은 날것들의 피로 흥건했는데 한 모금도 삼킬 수 없었다. 비위가 역하고 구역질이 솟구쳤다. 배 속이 거부하듯 꼬이며 요동쳤다. 웨어울프가 광기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 살아 있는 생명의 피와 살과 죽음으로 목을 축이는 것이다.

인간을 사냥할 수 없으니 인간 세계로 온 그들이 택한 것은 들짐승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년, 긴 적응의 시간을 거쳐 오만한 제국의 귀족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짐승의 것조차 마시지 못하게 된 자신은.

“취할 수 없었어.”

언젠가 미칠 것이다.

“말도 안 돼…….”

룩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리드는 망토를 휘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언제 뚝 끊어질지 모르는 것처럼 이성은 얄팍하게 흔들렸다. 아주 위험했다. 그는 빠르게 중얼거렸다.

“배가 고파. 이건 어렸을 적의 것보다 더해.”

“설마 토했어? 뭐, 뭐야. 여태까지 이랬던 거야?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건데. 왜 내게 말을 안 했……!”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 텐데, 룩센.”

“이건 말도 안 돼, 하리드. 넌 수장이야.”

“하지만 반려를 맞이한 웨어울프 중 하나이기도 하지.”

“……네 반려는 인간이잖아.”

반려에게 각인이 되어 버리면, 그 반려의 것밖에 취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긴 세월을 살고 인간은 금세 죽어 버릴 것이다. 그들의 시간은 같지 않으며 또한 반려의 자각 역시 동일하지 않았다. 매달리는 것은 짐승이고 인간인 르브리에는 언제든 그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

하리드는 쓰게 웃었다.

“룩센, 배가 고파서 미칠 것 같은데.”

“잠깐, 잠깐만. 내가 어떻게든 장로들에게 연락을 해서.”

“아니.”

혼란스러워하는 룩센을 막으며, 하리드는 작게 미소했다. 인정할 수밖에. 웨어울프의 섹스는 단순히 몸을 겹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상대에게 욕정하며 목덜미를 물어뜯고 그 피를 삼키고 음미해야 했다.

고삐는 놈에게 넘어갔다. 달려가면, 이 충동에 굴복하여 달려가는 순간, 르브리에와는 끝이 날 것이다. 고삐는 넘어가고 누구도 쥐지 않은 채로 끝날 것이다.

“녀석만 생각이 나. 녀석의 피, 체취, 그리고 살내음.”

“뭐라고?”

까드득. 까득. 이가 갈렸다. 눈앞을 벌겋게 물들이는 식욕.

그 인간을 죽이게 될지 몰라도 목에 이를 박고 싶은 욕구.

보석처럼 뚜렷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몸 아래 깔아 넣고 놈의 성기를 구멍 깊숙이 박아넣고 흔들고 싶은 욕망.

텅 빈 위장이 비명을 지르고, 내벽이 꽉 조였다. 후끈하게 재촉한다. 르브리에. 르브리에를. 그의 정액을. 그의 커다란 성기를. 그리고 그 손길과 체취를.

“그러니 가야겠어. 뒤를 부탁한다.”

“하리드! 안돼! 야!”

어떤 식으로 보일지 알았다. 그런데도 처음 겪는 당황과 충동에 풋내기처럼 굴복했다. 본능이 재촉했다. 가. 르브리에에게. 가서 키스해. 목을 축여. 섹스해.

마지막 이성을 놓아 버린 하리드 브리첼은 우드드득, 옷을 찢어발기며 변이했다. 그리고 네발로 뛰어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밤은 신기한 시간이다. 달 아래에서는 햇살 아래 보이지 않던 것을 보여 주었다. 그건 추악한 본성이기도 했고 은밀히 숨기던 정체이기도 했다. 르브리에 역시 달을 사랑했다. 푸른색으로 비추는 그 고즈넉한 빛 아래 서면 그도 고요해지는 안락을 느꼈기 때문에. 시끄러운 생각들을 잠재우고 차갑고 둔중하게 뛰는 심장을 외면하고, 목을 태우는 것 같은 갈증에서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조금 다르지만.’

한숨을 쉬며 이제는 익숙해진 장소에 먼저 몸을 뉘였다. 푹신한 침대의 감각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감각들이 끔찍하게 선명히 날뛰었다. 르브리에는 창문 밖을 보았다.

황녀의 흔들리던 눈동자.

아무것도 모르게 끝까지 속일 수 있었는데, 어째서 말해 주고 말았을까. 생각보다 순진하고 여렸던 제 사촌의 모습 때문에?

그는 불쑥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 말 잘 들으셔야 합니다.’

죽은 자식의 이름과 위치를 팔아, 주군의 자식을 지킨 자들. 나약하고 어려 죽은 자식의 이름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주군의 자식과 똑같이 지은 것은 모두 그를 위한 대비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이와 주군의 아이는 기이하게도 한날한시, 똑같은 성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쪽은 언제 죽을지 몰랐고, 한쪽은 너무나 건강했다. 그러니 그들의 아이는 주군의 아이를 위한 그림자로 안성맞춤이었다. 정녕 비정한 부모였고, 충직한 가신이었다. 페르달. 그 충성스러웠던 이름, 페르달.

‘절대 비밀을 들켜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부모께서 어떤 선택을 하셨는지, 위기의 순간이 올 때마다 비통함을 상기하십시오.’

단지 황제의 두려움과 불안으로 인해 죽어야 했던 자들.

‘살아가십시오, 르브리에 전하.’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며 목울대가 일렁였다.

안구가 뻑뻑하게 당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그리고 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지.

“…….”

그 순간 르브리에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야 할 창문을 바라봤다.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달이 환히 고개를 내미는 순간, 커다란 창문으로 푸른 달빛이 쏟아졌다. 그자는 그곳에 있었다. 그림자처럼 우뚝 선 커다란 체구와 키가 뚜렷했다.

“…….”

“…….”

섬뜩한 침묵이 흘렀다. 그 기괴한 형상을 보며, 르브리에는 탄식하듯이 중얼거렸다.

“……브리첼.”

하리드라고 불러.

무뚝뚝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브리첼.”

크르릉, 울리는 울음소리가 굉장히 거칠었다. 시선이 마주했다. 느릿한 숨 한번을 쉬는 동안, 창문 밖에 서 있던 남자가 어느새 르브리에의 뒤에 서 있었다. 숨결이 뜨겁게 닿았다.

“하리드 브리첼.”

돌아와. 중얼거리는 순간, 금속의 빛을 띠던 눈이 평소의 것으로 돌아간다. 아름다운 황금빛으로 물들어 눈앞에 섰다. 날것 그대로 옷자락 하나 걸치지 않은 조각 같은 육체가 르브리에의 앞에서 맛있게 핥아 달라는 듯이 빛났다.

“하리드.”

르브리에는, 또 다른 짐승은 무릎을 꿇듯이 속삭였다.

“내 반려…….”

상대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검은 그림자가 르브리에를 덮쳐 눌렀다. 풀썩, 뒤엉킨 육체가 침대로 쓰러졌다.

* * *

흐릿한 의식의 세계는 안개를 헤치는 것 같다. 하리드 브리첼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의식의 공간, 자신의 것일 수도 타인의 것일 수도, 과거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는 수장이 오가는 꿈의 세계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보았다.

아주 어린 꼬마를.

‘…….’

꼬마는 신이 난 것 같았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아주 맑았다. 환히 벌어진 입술은 귀여웠고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은 눈부신 은발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은 맑고 선명한 푸른색이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여뻤다. 인형처럼 고운 아이였다.

그리고…….

현재의 하리드는 생각했다. 닮았다고.

하리드는 광활한 들판에 서 있었다. 초록빛 물결 속, 개구쟁이처럼 달리던 아이밖에 없다. 이곳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의식일까.

하리드는 자신이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보았다. 깔깔깔, 웃음소리가 울렸다. 아이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의 곁에 다가갔다.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은사 같은 머리카락이 굉장히 고왔다. 현재는 아니고, 미래일 리는 없을 것 같다. 직감이 고했다. 이것은 과거다.

그때였다. 청명하고 평화로울 것만 같았던 광경 속에서 이질적인 울림이 퍼진 것이. 우드득, 하고 어떤 것의 뼈가 부러지는 익숙한 소리가 났다. 설마 아이가? 놀라 내려다보니, 더욱 경악할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희게 웃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움켜잡은 것을 기쁘게 들어 올렸다. 그것은…… 목이 부러진 토끼였다. 천진하고 맑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살기 어린 미소가 아이의 낯에 떠올랐다. 입이 벌어지고, 단풍 같았던 입술이 뚝뚝 흐르는 토끼의 피를 꿀꺽 마셨다. 작은 턱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

하리드는 경악하여 한 걸음 물러섰다.

대체 이게 무슨?

꿀꺽. 달게도 마시는 소리가 이성을 두드렸다. 이 과거를 보여 주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수장의 능력이 경고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인간도 토끼의 목을 부러뜨려 터진 피를 저리 맛있게 마시지 않을 것이다. 머리카락의 색이 달랐지만, 아이는 그가 알고 있는 누군가를 너무 많이 닮았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쥐고 있던 토끼를 휙 던져 버리며, 피범벅이 된 얼굴로 아이가 웃으며 그 여인에게 달려갔다. 엄마!

천진난만한 아이와는 다르게 부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인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피를, 그리고 아이를 바라보다가 흐느끼듯 숨을 내쉬며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엄마.

아가.

엄마, 배가 고파요.

아가. 내 아가. 르뷔, 내 아가…….

* * *

번쩍, 눈을 떴을 때 제일 처음 본 것은 난장판이 된 정경이었다. 시간은 아직 자정이 넘지 않은 밤인 것 같았다. 태풍이라도 휩쓴 것처럼 가관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침대는 반파되었다. 대체 무슨. 하리드 브리첼은 입 안의 혀를 굴리며 일어났다. 왜 이렇게 목이 아프지?

‘마지막 기억이.’

비명을 지르는 룩센의 얼굴이 마지막이었다. 기억이 끊겼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깼습니까?”하고 물어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공포로 굳어 있을 뻔했다. 보았나. 아니면 들켰나. 무슨 짓을 저질렀지? 설마, 그 모습으로 그에게 달려왔나?

너는 알았는가. 나를 보았는가.

긴장이 심장을 옥죄었다. 이 위험한 거래의 끝은 이렇게 끝나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

묻고 싶었다. 보았느냐고. 기억이 나느냐고. 몇 시간 동안,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몇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하지만 엉망이 된 방 안의 풍경 어디에도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기억 안 납니까? 당신이 술이라도 퍼마시고 왔는지, 난장을 부렸습니다. 이리저리 부수고 난리더군요.”

“…….”

개소리였다. 그 정도로 그쳤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믿고 싶었다. 유려하게 말하는 그 웃음 섞인 목소리를. 그리고 확신했다. 웨어울프의 그 괴물 같은 모습을 보았다면, 르브리에가 저런 말을 건넬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더라도 그게 가능할 리 없다.

그렇게 안심하려는 순간, 꿈속의 어린아이가 뇌리를 스쳤다.

쿵. 쿠웅. 쿵. 불안하게 뛰는 심장. 뒤에서 다가오는 반려의 진하고 달콤한 향기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좀 봐봐요, 기사님.”

“…….”

“나 봐요.”

고개를 돌리자 말끔한 얼굴로 웃고 있는 르브리에가 있었다. 어디 하나 부러지고 다친 것 같지 않은 평소의 그였다. 상쾌하고 시원한 공기가 조금만 더 있으면 붉은 밤의 달이 열릴 것이라는 걸 경고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했다. 일곱 번째의 마지막 밤을 끝내고, 예언시에 대한 결정을 머금은 채 돌아가야 했다.

자신은 돌아가야 했다.

“……르브리에.”

“오늘이 마지막 밤입니다, 하리드 브리첼. 우리의 거래가 끝나는 날이요.”

거래라고 하기에는 처음 몇 번 이후에는 정보가 오가지도 않았다. 그저 열락에 빠진 것처럼 하염없이 박고 또 박았다. 뒤흔들리는 허리와 빠듯한 구멍의 아픔도, 생소했던 자존심의 박탈도 희미해져 교성을 지르며 허리를 뒤흔드는 것으로 바뀌었다.

탐하고 탐했다. 짐승의 수장은 체면도 잊고, 위치도 잊고 팔을 뻗어 반려의 달콤한 목을 끌어안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더. 더. 더! 재촉하고 눈물지으며 매달렸다.

“왜 18명에서 살인을 멈췄지?”

“죽일 놈은 다 죽였거든.”

“이후에는?”

“무엇을 할 것 같습니까?”

가만히 바라보는 것을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우리 키스할까요? 마지막 밤인데.”

농담이라도 내걸 듯이 말하는 모습에 피식 웃었다. 하지만 르브리에는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조용히 다가서서 하리드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마지막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미래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잖습니까. 당신도, 나도.”

고개를 비틀고 부드럽게 파고드는 입술이 생소했다. 간지럽고 보드라운 접촉이 깃털처럼 살점을 적셔 왔다. 반려. 그의 손으로 죽일지도 모르는 반려. 입술이 달았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접촉은 더욱 얼얼하고 깊은 것으로 바뀌었다.

화살처럼 뜨거운 것이 아프게 치열을 더듬고 목구멍을 핥았다. 절박하고 애틋하게, 물어보고 싶은 말들을 서로 삼키면서 결국 묻지 않는다. 집요하게 파고들며 꽉 움켜쥐는 손길만이 진실했다. 아름답다. 반려의 모든 것은. 그를 죽이고 또 죽여도 놓지 못할 만큼. 하리드 브리첼은 그 아득한 감각에 빠지며 웃었다.

이 키스가 끝나면, 그와 자신의 이 시간도 끝나게 될 것이다.

어째서 울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반려는 서로를 위한 만찬이다.

먹고 또 먹어도 만족스러울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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