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불온함이 깊어지다 (7/16)

7장. 불온함이 깊어지다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했던 룩센은 원하지 않는 손님을 맞이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오랜만에 뵙습니다, 룩센 님.”

멍하니 묻는 룩센을 향해 상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젊은 것 중 가장 발이 빠른 자, 요람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허락받은 전사 중 하나. 하지만 수장의 명령 없이 방문한 젊은 수컷을 향해 룩센은 이를 드러냈다.

“비아드, 네 안부 인사 받을 기분 아니야. 말해라. 수장이 널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이곳에 있지?”

“예언자께서 절 보내셨습니다. 수장을 뵈어야 합니다.”

“……이시르가?”

“예. 수장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룩센의 얼굴이 잠시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짐승들은 잠이 별로 없다. 그러니 본래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일주일을 한숨도 자지 않아도 멀쩡한 것이 그들 종족이었으니까. 비아드의 얼굴에서도 수장을 지금 만나지 못하리라는 의심은 없었다.

“안 돼. 잠시 기다려.”

“예? 그게 무슨.”

“……하리드는 지금 당장 못 만나니 잠시 기다리라고.”

정확히는 그들의 존경하는 수장은 쿨쿨 수면 중이었다. 간밤에 어찌나 질펀하게 노셨는지 정액 냄새가 풀풀 나는 몸으로 돌아와 산뜻하게 샤워도 하지 않고 풀썩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숙면 중이셨다. 놀랍기도 하지. 대체 얼마나 그 인간이 맛있으면 저 지경이란 말인가. 잠시 딴생각에 빠져 혀를 내두르던 룩센은 충격받은 것 같은 젊은 것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이왕 인간 세계로 나온 것, 어쩔 수 없지. 돌아가기보다는 합류해.”

“하지만 예언가님께서 급히 전하라 하셨습니다.”

“꼭 네가 전해야 하나?”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긴 했습니다만.”

“그럼 줘.”

얼빠진 비아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룩센은 다가온 다른 수컷들에게 발 빠른 자를 맡기기로 했다. 물론 그 전에 그가 가지고 온 것을 냉큼 건네받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체 그 예언가는 무엇을 보고 지금 이 시점에 전령을 보낸 것일까. 돌아서는 룩센의 얼굴이 심각함으로 물들었다.

* * *

“수장님,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하리드는 천에 감싸인 그것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굳었다. 이게 왜 여기에.

“난 이해가 안 가던데. 웬 낡아 빠진 검 하나를 들려 보내냐고. 그 노인네가 노망이 들었나. 거기다 뭐라고 했더라, 이걸 받으면 네가 단박에 알아들을 것이라 했다던데.”

“……이걸 가지고 온 게 누구라고.”

“비아드. 젊은 것들 중 가장 발 빠른 놈 있잖아.”

하리드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예언가 이시르. 종족의 미래를 내다보는 자. 하지만 언제나 불쾌함을 주곤 하는 예언의 감시자. 무엇을 훔쳐보고 또 무엇을 판단하여 이것을 경고하는가.

하리드는 제 팔뚝 길이의 고풍스러운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에 가득 찼다.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바라보던 룩센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이게 뭔데?”

“종족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 중 하나다.”

“이게? 뭐 오래되어 보이긴 하다만. 검 가운데 이건 뭐야?”

“……그게 이 검의 특이한 점이지. 생겨난 이유이기도 하고.”

“뭐?”

하리드는 생각했다. 만약, 이시르가 눈앞에 있었다면 그는 이 검을 망설임 없이 그 노파의 심장을 향해 휘두르지 않았을까. 불쾌함에 눈앞이 검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감히, 감히 이시르. 감히! 살기가 들끓었다. 반려의 본능이 파도처럼 들고 일어나 가시를 세우며 외쳤다. 지키라. 지키라고.

“어이, 수장님.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라고? 이 검 때문에 그래?”

“알 것 없다. 쓰이지도 않을 물건이야.”

거듭된 부정에 룩센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었다.

“하리드,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지금 왜 화가 난 거야. 알아야 대처를 하지. 이시르가 말한 게 무슨 뜻이냐고. 난 이해 못 한 것을 지금 넌 알아들었다는 소리 아니야. 이 검이 뭔데. 말해.”

“…….”

하리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가운데가 특이하게 파인 검을 증오스럽게 쓰다듬었다. 이래서 예언가를 좋아할 수가 없다. 은밀한 그 재촉과 내밀한 바람에 입술이 비틀렸다.

“이건 이 안에 피를 머금어, 반려를 죽일 수 있는 검이다.”

그 반려가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같은 짐승일지라 하더라도.

“한번 피를 적시면 사용하기 전까지 절대 마르지 않는 검이지. 이시르가 이것을 준 이유는.”

바위처럼 딱딱해진 룩센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리드는 짓씹듯이 내뱉었다.

“내가 이 검으로 르브리에를 죽이길 바란다는 것이겠지.”

동족인가, 아니면 반려인가. 선택을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려는 제 피로 물든 검으로 상대의 심장을 꿰뚫어 죽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왜 굳이 이 검을? 왜 반려의 관계를 굳이 들먹일까.

르브리에는 쉽사리 죽일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할 텐데?

* * *

황녀 이예르라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그 역시 브리첼 공작을 사위로 맞이하기를 강력히 원함을 알았을 때, 그녀는 꾀를 내었다.

‘그가 제 스승이 되면 어떨까요?’

‘하지만 네 스승은 이미 페르달 공작이지 않느냐. 황녀의 스승은 질렸다고 쉽사리 내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딸아.’

철부지를 보는 것 같은 아버지의 시선에 잠깐 발끈했지만, 이예르라는 제 훌륭한 스승에게 배운 것을 실현했다. 호흡을 낮추고, 표정을 흔들림 없게, 그리고 자신 있는 이유를 내밀어 상대를 설득할 것.

‘제 검술 스승은 없잖아요, 아버지. 르브, 아니 페르달 공작은 검을 쥐지 못해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남자의 유일한 단점은 그 높다른 학식도 아니고, 젊은 나이에도 꿀리지 않는 처세술도, 정치 능력도, 가문과 영지를 부유하게 하는 능력도 아니었다. 바로 검술이었다.

정확히는 전투 능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 페르달 공작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곁은 거의 놀라운 실력의 기사, 나엘 폰 라리트가 따라붙곤 했다. 황녀와 수업을 할 때도 복도에서 대기할 정도로 바짝 붙어 호위를 한다.

하얀 피부에 매끈하고 길쭉한 팔과 다리, 체구는 큰 편이지만 그러나 연어처럼 미끈한 남자가 검까지 잘 쓰면 그건 반칙일 법했다. 그래서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연약한 남자를 자신이 지켜 주고 싶다고.

‘그러니 학문은 그대로 그에게 배우고, 검술과 체술만 브리첼 공작에게 배울 순 없을까요?’

‘그렇게 함께 있고 싶으냐? 그와 말이다. 겉모습은 참 잘생겼지만, 무뚝뚝하고 무정한 사내 아니냐.’

‘……그래도 좋아요.’

수줍게 말하며 의견을 피력하고, 그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때만 해도 황녀의 머릿속에는 핑크색 물결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제 다 됐다. 둘만 있는 시간 속에서 분명 아찔하게 이 마음을 전달할 수 있겠지! 그도 날 좋아할 거야, 왜냐하면 난 황녀니까!

하지만 현실과 상상은 퍽 달랐다.

분명 하리드 브리첼 공작과 자신만 있어야 하는 연무장에는, 어쩐 일인지 든든한 편이었던 스승 르브리에도 같이 끼어 있었다. 어째서인지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것은 황녀 자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연무장에서 검을 들고 훈련을 받듯 뒹굴고 있는 것은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왜 이렇게 된 거야?’

울상이 된 이예르라는 속상해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시녀들의 부채질을 받으며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나마 위안은 두 남자가 참으로 잘생겨서 보는 맛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훌쩍 콧물을 삼키며 이예르라는 제국의 검에게 처참하게 당해 뒹구는 제 말끔한 스승을 향해 속으로 응원을 던졌다.

그리고 한편, 엄숙한 기사의 발에 걸려 그대로 바닥으로 뒹굴어 널브러진 르브리에는 죽여 버릴 것 같은 강렬한 눈빛으로 하리드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작게 속삭였지만, 하리드는 듣는 척 마는 척 했다.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는 뜻이다. 휘잉! 소리와 함께 묵직한 검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나고, 볼썽사납게 그것을 피하는 상대의 움직임에 무뚝뚝한 기사의 입술 위로 웃음이 스쳤다. 황녀가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른 순간이기도 하다. 원래는 부루퉁하게 지켜보며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고 물으려던 황녀는 두 주먹을 꼭 쥐고 가끔 웃는 그 근사한 미소를 보기 위해 혈안이 됐다.

하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당장 제 구멍을 혀로 농락하고 희롱하다 제발 그만하라는 애원과 눈물까지 뽑아낸 가증스러운 인간을 골려주는 데 온 힘을 다할 예정이었다. 하리드는 검을 휘두르며 동시에 애벌레처럼 데굴 구르는 남자를 향해 발을 찍었다.

쿠웅! 소리와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아쉽게도 발을 피한 남자가 식은땀이 흐르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흙바닥에 누워 있어도 미모가 죽지를 않는 건 꽤 심장을 아프게 만들었지만.

“이제, 그만, 하시지요. 브리첼 공작?”

하리드는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먼저 우열을 가리자는 등의 말을 꺼낸 건 그쪽일 텐데.”

“그게, 당신이 유리한 검술로 대결하자는 건 더더욱 아니었고 말입니다!”

발악하는 모습이 꽤 절박하고 가련해 보이긴 했지만, 코웃음 칠 일이었다. 황녀도 주변의 모든 인간도 속고 있다. 이 인간이 이렇게 나약해 빠졌다고? 자신을 움켜쥐던 그 손아귀의 힘은 제 종족의 젊은것들도 놀랄 만큼 강한 것이었다. 하물며 연약한 인간이.

지금도 보라. 결국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한 대도 안 맞지 않았는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고는 하나 중요한 건 르브리에가 피했다는 사실이었다. 르브리에는 분명 강한 인간이었다.

‘그걸 밝힐 생각은 없지만.’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으니 봐줄 필요도 없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남자를 향해 다시 검을 무겁게 휘두르니, 뒤에 서 있던 황녀가 꺄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먼지가 일어나고, 황녀가 비명을 질러 시녀들이 움직여 시선이 분산된 순간.

어쩌면 그늘 아래 서 있던 르브리에의 기사인 나엘이라는 인간은 보았을 번뜩이는 움직임. 흰 손날이 칼날처럼 휘두른 목검을 막고, 공격을 물처럼 흘려보냈다. 그러고는 툭, 검의 진로를 차단하기까지 했다. 목검을 손으로.

“…….”

“…….”

이제 그만하시지? 번뜩이는 눈은 더 하면 앙칼진 고양이처럼 뛰어들어 물어 버리겠다는 살기가 가득했다. 아니면 다음에 볼 밤에 각오하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아무리 그라도 울면서 매달리게 한 것에 대한 악감정은 불처럼 뜨거웠다.

“꺄악, 어, 어떻게 해. 르브리에, 괜찮아요?”

황녀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오지 않았다면 그 살벌한 대치는 더 이어졌을 것이다. 어찌나 대단하신지, 가면을 번갈아 뒤집어쓰는 것처럼 코앞에 있던 르브리에의 표정이 변했다. 물감을 확 부은 것처럼 인상을 쓰던 낯이 사라지고 더없이 부드러운 산들바람처럼 녹아들었다.

‘하!’

그 코웃음을 알아챈 것인지, 르브리에는 대뜸 하리드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부여잡았다. 이건 또 뭐 하는 수작질이냐 눈알을 부라리니, 굉장히 아련하고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지껄이는 것이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브리첼 공작. 이제 그만 용서해 줘요.”

황녀도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는 보라색 눈동자를 축축하게 빛내며 애원했다.

“나도 이렇게 부탁할게요, 공작. 화 풀어요…….”

그 얼마나 간절한 목소리인지. 누가 들으면 제 연인을 감싸는 애틋함인 줄 알 것 같았다. 보고 있는 하리드의 입술이 절로 세게 비틀렸다. 이것들이 정말 가관이군.

“……황녀 전하가 그런 말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쌀쌀한 말에 황녀가 민망할 법도 했지만, 그 딱딱한 분위기를 잘라낸 르브리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학식이 더 뛰어나다는 잘난 척으로 입을 놀린 건, 친애하는 황녀 전하의 스승 자리를 반쯤 빼앗겼다는 질투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르브리에, 그렇게 안타깝게 중얼거리는 황녀를 보니 더욱 짜증이 치솟았다. 이것들이 지금 자신을 앞에 두고 뭔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더 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닥하니 연기에 빠진 남자는 마음껏 입을 놀려댔다.

“예. 미꾸라지처럼 검도 모르는 것이 입을 놀렸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하지만 이제 그만, 그 검에 맞으면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얼굴에 멍이라도 들 것 같아요.”

제대로 맞으면 멍은커녕, 이가 후두둑 빠질 것이다. 그런데 저리 말하는 것은 그렇게 맞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가증스러운 것.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술술 나오는 거짓말들에 이제는 웃음마저 터질 지경이었다. 실제로 살짝 웃어 버린 것도 같았다. 황녀와 르브리에의 시선이 하리드의 입술에 똑바로 내리꽂혔으니까.

“제발, 나도 이렇게 부탁할게요, 브리첼 공작. 르브리에를 용서해 줘요. 네?”

“잘못했습니다. 당신의 수업에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공작.”

“……화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대련이었지.”

“그럼 용서해 주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든지.”

이러다 화병 나겠군. 하리드는 남녀의 그 애절한 부탁을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목검을 휙 집어 던졌다. 끝까지 연기에 심취해 고맙다고 지껄이는 남자의 잘난 면상을 확 긁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씹어 삼키면서. 르브리에는 황녀와 지나치게 친근했다. 정말, 보고 있으면 뱃속이 꼬일 것처럼 말이다.

* * *

“후작, 어찌 되었나.”

“황공하옵니다만, 폐하. 시일 내로 하리드 브리첼 공작을 불러들여 확인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분명 이후로 이어진 만남이 있었습니다. 주로 밤의 시간대였으며, 두 공작이 동시대에 행방이 묘연했음을 파악했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묘하지요. 만약 두 공작이 무언가 뜻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라면, 혹시라도.”

“혹시라도?”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불쾌함으로 일그러지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샤나 후작은 자신이 준비한 것을 떠올렸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저 의심 많은 황제에게 의심의 싹을 틔우는 것.

은밀한 시간, 조용한 만남, 누구도 모르는 비밀. 그런 것에서 가장 연상되기 쉬운 것은 치정이 맞지 않은가.

“지금 그 둘이 그런 사이라는, 지금 후작이 말하고 싶은 건 그런 의심이란 말인가? 그건 지나친 억측일세.”

“하지만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습니다. 페르달 공작을 보실까요, 그렇게 문란하게 즐기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누구 하나 정착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그자는 황녀에게 관심이 지대하지 않나.”

“그러나 이성이 이성을 바라보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지요.”

좁혀지는 미간은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경악, 불쾌, 그리고 손톱 사이에 가시라도 박힌 사람 같은 짜증이 배어 있었다. 샤나 후작은 피어나는 웃음을 삼키며 정중한 척 고개를 더욱 숙였다. 이것으로 브리첼 공작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믿고 또 믿는 황제의 총애가 거두어지게 될 것인가?

“고생했네, 후작.”

“…….”

“나가 보게.”

하지만 간결히 떨어진 목소리에는 이 이상의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단칼 같은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샤나 후작은 치미는 탄식을 가까스로 눌렀다. 변함이 없는가? 더 속살거려 흔들고 싶은 욕망을 삼키며 샤나 후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좋은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물러날 수밖에. 하지만 샤나 후작은 황제를 잘 알았다. 분명, 지금은 저렇게 나오더라도 어느 순간, 불현듯이 의심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사실은 그랬던 것 아닌가?’하는 가정을 하면서 천천히 하리드 브리첼을 놓게 되리라. 그리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황녀의 옆자리 역시.

‘그래, 황녀가 있었지.’

끼이익 닫히는 황제의 문을 바라보던 시울 폰 샤나 후작의 눈이 번뜩이며 빛을 머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늦게 잠드는 습관이 있는 황녀라면 아직 깨어 있을 것이다.

불빛이 밝혀 있다면 정원으로 가 보자. 잘 하면 그녀를 훔치듯 볼 수 있을 것이다. 샤나 후작은 예전에 접었던 그녀에 대한 열망이 다시금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리드 브리첼도, 르브리에 페르달도 아닌 바로 자신이 황녀의 손을 잡고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을.

“이보게.”

지나가는 시종을 향해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황녀 전하와 조용히 약속되어 있는데, 안내해 줄 수 있겠는가?”

“이 시간에 말입니까?”

“원래 조용한 시간이 대화를 나누기 좋은 때가 아니던가. 중요한 일일세.”

“……가시지요.”

시종은 황제의 측근 중 하나였고, 시울 폰 샤나 후작과 황제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황제의 수족인 만큼 가까이 만나야 할 일이 있는가, 그렇게 이어진 사고는 시종이 그를 황녀의 궁으로 인도하게 만들었다.

* * *

황녀는 복도를 지나 쓸쓸한 자신의 정원으로 걸어갔다. 푸른 달빛에 빛나는 붉은색의 장미들을 바라보면서 그 향기를 음미했지만, 가라앉은 속은 좀체 풀리지 않았다.

‘르브리에.’

오늘 그녀는 기이한 것을 목격했다. 하리드 브리첼 공작이 돌아서는 순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스승의 옆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달랐어.”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굉장히 소름 끼치고 섬뜩한 무언가를 본 것처럼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찬물이 어깨 위로 뿌려진 듯 움츠러든 것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다시금 돌아보는 르브리에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는 것이다. 너무 짧은 변화였다. 그러나 분명히 보았다. 그 눈동자에 있던 것은 끈적하기까지 했던 이상한 열망…….

“하지만 르브리에가 브리첼 공작을 왜……?”

물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르브리에 아닌가. 산뜻하게 웃으며 그녀의 사랑을 응원해 주던 제 스승. 제 편.

솔직히 브리첼 공작을 너무나 사모하고 애정하지만, 믿는 것 자체는 르브리에를 더 믿었다. 그만큼 보아 온 세월이 있었고 그가 보여 준 행적들이 있었다. 마냥 순진하고 순박할 것 같은 이예르라는 그래도 황녀였다.

계산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었고, 사람 보는 눈도 어느 정도 있었다. 르브리에는 아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잠 못 들 것처럼 불안함을 느끼는 것일까, 자신은.

정원의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이예르라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단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내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르브리에라면 그녀가 청혼했을 때, 긍정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브리첼 공작만큼은 전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나한테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일까?’

조금씩, 조금씩 의기소침해졌다. 수업을 근거리에서 하며, 특히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면 몸을 부딪칠 수도 있고 거리도 가까우니 금방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음흉한 속셈이 있었다.

그런데 상대는 무적이었다. 흔들리기는커녕, 지나치게 엄격한 검술 선생이었다. 눈은 지나치게 싸늘했고 농담 한번 한 적도 없다. 마음은 쓸쓸해지는데 체력만 늘어갔다. 거기다 브리첼 공작은 자신보다 가끔 끼어드는 르브리에와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아니야. 왜 자꾸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튀고.’

손가락을 매만지며 발치에 떨어진 장미꽃들을 툭툭 발로 찼다. 향긋한 향기와 좋아하는 사람이 근거리에 있는 상황과 부족할 것 없는 황녀로서의 지위. 모든 것이 초조할 것 없는 행복이었다. 그런데도 왜 자신은 만족을 모를까.

“이게 다 궁이 쓸쓸하기 때문이지…….”

이예르라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하늘 위에 뜬 달을 올려다봤다. 이상하게도 가끔 어릴 적 누군가가 있었던 기분이 든다. 바로 곁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친근하게 제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사람이 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모의 기억일까? 그러기에는…….

생각이 뻗어 가려 했을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감히 황녀의 정원에 들다니. 눈을 매섭게 뜨며 돌아보는 순간,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대체.”

“전하.”

“시울 폰 샤나 후작, 대체 이 시간에 여기에는 무슨 일인 거죠?”

매섭게 뜬 이예르라와 시선을 마주친 남자는 지나치게 대범했다. 황녀가 무섭지도 않은지, 무례하게 찾아든 주제에 빙긋 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외모도 나쁘지 않고 나쁜 소문도 없는 남자였지만, 황녀는 예전부터 저 남자가 은근히 기분 나쁘고 싫었다. 지금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조차도.

“난 당신을 초대한 기억이 없어요!”

“긴히 전해드릴 일이 있어 실례를 범했습니다.”

“낮에 찾아와도 충분했을 텐데요.”

“이렇게 고민을 하고 계셨을 것 같아서요.”

“……뭐라고요?”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남자는 아주 진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르브리에의 얼굴에 익숙한 황녀에게는 그 가증스러운 거짓이 아주 도드라져 보여 소름만 돋았다.

“대체 뭐하자는 수작질이에요?”

“제가 지금 어디서 왔는지 아십니까, 전하?”

“그걸 내가 어찌 알…….”

“페르달 공작의 뒤를 캐다 왔답니다.”

“……뭐?”

페르달? 르브리에?

여기서 왜 그가 나온단 말인가.

마치 방금까지 떠올리고 있던 희미한 의심을 그가 간파라도 한 것 같아, 황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수치심이었다. 믿고 믿어도 모자랄 스승을 두고 감히 이상한 생각을 한 자신을 저자가 눈치챈 것 같아서.

“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페르달 공작은 브리첼 공작과 은밀한 밤에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벌써 몇 번이나 동시에, 같은 시간대에 저택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니까요.”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황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파도처럼 쓸려 나갔다.

은밀한 만남.

순진한 소녀도, 해맑은 사랑에 빠진 여인도 그 자리에는 없었다. 그저 창백하고 딱딱한 석고상처럼 무표정하게 굳어 남자를 바라봤다. 붉은 입술이 조금 달싹였다. 그리고 속삭이듯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요?”

그 목소리는 이예르라의 달콤한 음성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무정했다. 꼭, 화가 났을 때의 르브리에처럼.

“지금 당신이 누굴 두고 어떤 소리를 지껄인 건지 알고나 있는지 묻고 싶군요, 샤나 후작.”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동시에 사라졌다는 것.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전하? 분명 그들은 황궁에서 처음 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왜 모른 척했을까요? 제가 분명 그들이 같이 뒤따르는 것을 보았는데도요.”

“헛소리. 폐하께서도 이 헛소리를 아시나요?”

“제게 그런 명을 내리신 게 누구이실 것 같습니까, 전하.”

“…….”

“아버지가.”

“예. 그렇습니다.”

이예르라의 눈동자가 바람 위의 낙엽처럼 조금씩 흔들렸다.

희미하게 웃으며 르브리에를 바라보던 브리첼 공작. 자신을 그렇게 봐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무정한 기사. 친근하게 굴어도 정말 그 선과 벽은 넘지 않았던 스승이 지난 며칠간은 무척이나 격없게 브리첼 공작의 수업에 참여했다는 것도 떠올렸다. 돌아서던 기사를 바라보던 그 끈적했던 순간의 눈빛까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정말 둘 사이에 뭔가가 있나?

그걸 자신만 모르고 있고?

그렇다면 둘은…… 어째서 날 속였지?

“자세한 것을 알게 되면 전하께 바로 고하러 오겠습니다.”

“…….”

“그럼 좋은 밤 되시기를, 전하.”

농락하는 것인지, 인사를 하는 것인지 모를 남자가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쓸쓸하고 향긋한 정원에 오로지 그녀를 혼자 남겨 두고. 그 상념, 흔들림이면 되었다는 듯 만족한 미소를 띤 채 사라지는 시울의 모습은 분명 비정하고 잔인했다.

쓸쓸한 바람만이 이예르라의 곁에 남아 흔들렸다.

‘르브리에 당신이 내게 이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닿을 수 없는 속마음을 두드리면서.

* * *

시울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 되었다. 황녀의 그 표정! 확실히 먹혔다. 둘을 근거리에서 보았던 그녀였으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던지도 몰랐다. 그 심상찮은 반응은 진실되어 보였다.

‘페르달과 브리첼이?’

정말 그 사내 둘이 서로 사귀는 사이라든가 밀회하는 사이일지도 몰랐다. 시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동성애가 불법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리적으로 역겨웠다. 사내놈의 똥구멍이라니. 억만금을 줘도 핥지 못할 더러운 것이다.

‘혐오스러운 것들. 뭐가 부족해서 사내놈을 만나? 하.’

시울은 퉤 침을 뱉었다. 그 커다란 놈들이 뒹굴며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꽂는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치솟았다. 아니, 아니지. 그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콧노래를 부르려 노력했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두 놈을 동시에 떨어뜨릴 수 있는 화제가 될 수도 있다. 황녀를 사이에 두고 농락한 두 공작, 황제가 가만히 있겠는가. 거짓으로 퍼뜨리려던 것이 진실이라면, 정말 신이 자신을 돕는 것이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군. 이대로만 더 이간질하면……. 응?’

저벅, 조용한 궁의 복도를 빠져나오는 제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키득거리던 웃음이 딱 멈추고 들썩이던 어깨가 고요해졌다. 미간을 좁히던 그가 고개를 휙 돌렸다.

“…….”

하지만 미로처럼 긴 복도의 끝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복도에 걸려 있는 벽의 등불만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착각이었나? 아무래도 너무 신이 나 헛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시울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어서 돌아가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 당장 황제를 찾아가서 어떻게 입을 놀려야 할지와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

그렇게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가려는 순간, 시울은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져야 했다. 무언가 까만 것이 그를 확 덮친 것이다.

* * *

고요한 밤에 은밀한 과정들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것은 달콤한 밀회일 수도 있고, 서늘한 복수일 수도 있고, 쥐새끼를 잡기 위한 살기일 수도 있었다.

조용히 정문을 열고 들어오는 앳된 청년이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붉은 기운이 뒤섞인 타액이 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침 마차를 타고 나서려던 사내는 소매를 정리하며 한쪽으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침을 뱉었던 앳된 청년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정중하고 충직한 그의 첫 번째 종.

반듯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르브리에는 부드럽게 물었다.

“왜 그리 울상이지?”

“송구합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주제에, 고개를 들어 제 주인을 충성스럽게 바라본 기사는 입술을 느릿하게 닦았다. 닦이는 것은 분명히 묽은 액체였다. 저 꼴로 길을 질주했으니, 마주친 사람이 있었다면 귀신을 봤다며 기절했을 것이다. 르브리에는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왜 울상이냐 물었다, 나엘.”

“……맛이.”

“응?”

나엘, 르브리에의 기사, 페르달 가문의 가장 정교한 검은 얼굴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맛이 없었습니다. 욕심도 많고 번뇌도 많았습니다. 욕망의 덩어리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끈적거렸습니다.”

그 조용조용한 말투에도 담겨 있는 투덜거림에 르브리에는 순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강직한 종은 자신에게 지금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싫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처리를 잘하고 왔다, 그러니 칭찬해 달라.

“황제의 손과 발이었으니, 더러운 일은 다 했을 거다. 원래 그런 자였지.”

“하지만 제대로 먹었습니다.”

르브리에의 눈이 슬며시 떠오르는 기쁨으로 휘어졌다. 푸른색으로 청명하게 빛나야 할 그 눈동자에 스친 것은 어쩐지 평소와는 아주 다른 기묘한 빛깔이었지만.

그런 것에 위화감을 느끼는 상대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주인과 종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기쁜 달성감을 공유했다.

“그래서 그는 완벽히 새로 태어났나?”

“예. 쥐새끼가 방해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후작, 그놈. 어찌나 깔짝거리면서 자신들의 뒤를 캐는지, 그걸 모르리라 생각한게 순진하고 귀여울 정도였다. 그렇단 말이지. 황제의 손과 발이 하나씩 잘려나간 셈이다. 르브리에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처리하느라 수고했다.”

“주군. 오늘도, 가십니까?”

그 끊어지는 듯한 망설임 섞인 물음에, 매끈하게 웃으며 걸어가려던 르브리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나엘.”

“……예.”

“불만이 있나? 너와 동족들 모두?”

“…….”

“나엘, 너는 내게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건 질문에 대한 답을 숨겨서도 안 된다는 것이지.”

부드럽지만 분노가 넘실거리는 그 목소리에 앳된 청년은 불쑥 고개를 숙였다. 주인의 화는 무척이나 두렵고 섬뜩한 것이었다. 핏속에 내재된 본능이 발등에 입맞춤을 해서라도 빌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단지 주군께서…….”

“내가.”

“즐거워 보이셔서…….”

“뭐라고?”

르브리에는 잠시 무표정한 낯으로 제 충직한 종을 내려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청년을.

“웃고 계셨습니다. 가끔은, 콧노래도 부르셨습니다.”

경직된 낯으로 르브리에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마차의 창으로 비추는 제 얼굴을. 달빛을 벗 삼아 유리에 떠오른 제 얼굴을.

평소와 그리 다를 것 없다 생각한 낯에는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움찔 떨릴 듯 흔들리는 입술의 끝, 가느다랗게 휘어지는 눈망울 속에 스치듯 비치는 붉은색의 기운, 열망과 기대.

“주인님?”

르브리에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엘, 전해 준 것은 제대로 파악했나?”

“예, 지도는 명확했습니다. 남은 인간은 넷입니다.”

“오 일 안에 끝낸다. 할 수 있겠지?”

“예.”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며 르브리에는 마차에 올라탔다. 곧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밤을 달린다. 그 안에서 르브리에는 읊조렸다. 착각일 뿐이다. 모든 것은 그 남자가 제 예상과 너무나 달라 일어난 흥미일 뿐이다. 고작, 그것뿐이다.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것이었다. 제게 하리드 브리첼이라는 인간은.

‘그래, 그것뿐이지.’

그런데도 왜 이렇게 목이 마른 것일까.

왜 자꾸 웃음이 나는 것일까.

왜 자꾸만…… 심장이 뛰는 것 같은 기분일까.

“그래. 무서운 착각일 뿐이야.”

그는 습관적으로 목덜미를 매만지며 무릎을 두드렸다. 그는 지금 세 번째 약속의 밤을 보내러 가는 중이었다.

* * *

오늘 밤의 르브리에는 어쩐지 평소와는 좀 달라 보였다. 처음부터 그랬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 생각하기에는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초조한 것도 같았고, 화가 난 것도 같았다.

아니면 이 관계에 혹시 질린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에는 하리드가 견딜 수 없어졌다. 아직 제대로 관계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인간은 변덕이 심하지 않은가. 그건 짐승들이 따라갈 수 없는 감정의 변화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황녀에게로 뛰었다. 그녀의 옆에서 친근하게 웃고 있었던 낮의 르브리에.

“르뷔.”

갑자기 참을 수 없어 초조해졌다.

막 유두를 부드럽게 핥으며 헐벗은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애무하려던 인간이 머리를 들었다. 왜 그러냐는 눈빛은 꼭 불같이 뜨거웠지만. 하리드는 그들이 한 번도 성기를 처박으며 관계한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순간 굉장히 불쾌해졌다.

“르브리에.”

“왜요.”

엉덩이를 빠듯하게 쥐는 인간의 서늘한 손의 감촉이 평소보다 강했지만, 헐벗은 제 육체를 내려다보는 시선 역시 어째 반사되는 불빛에 다른 색으로 보이는 것처럼 선명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럽지가 않다.

쿵, 쿵. 쿵. 격렬하게 뛰며 반응하는 심장 소리는 자신의 것이다. 놈의 것은 강하지 않았다. 오로지 떨리는 손끝으로 우악스럽게 인간의 피부를 쥐어뜯듯 식은땀을 흘리는 것도 자신뿐이다. 흥분으로 다리를 부들거리며 발정난 늑대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놈의 살갗에 코를 박고 치솟는 행복을 내리누르느라 자조까지 느끼는 것도 오로지 자신뿐이다.

‘왜 다르지.’

같은 반려인데. 초반에 가졌던 여유가 마른 물처럼 증발한 지 오래였다. 잘되어 가고 있는 것 맞냐는 룩센의 말들도 조용히 받아치지 못할 만큼 하리드는 궁지에 내몰렸다. 어째서, 다르지?

“왜 말을 하다 맙니까?”

집중하고 있는 푸른 눈동자는 굉장히 유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조금씩 스며든 친근함은 익숙해진 자에게는 또렷하게 알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하리드 브리첼은 그와 르브리에의 관계가 많이 변화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낮의 얼굴이 자꾸만 눈을 가렸다. 웃으면서 황녀의 손을 잡던 르브리에. 행복해 보였던, 평범해 보였던 남자의 얼굴. 그리고 그 옆에 더없이 잘 어울렸던 황녀, 여자. 그리고 같은 인간.

‘이건 무슨 감정이지?’

짜증 같기도 했고, 심장이 욱신거리며 쑤시는 것 같기도 했다. 제 다리 사이로 들어와 있는 르브리에를 바라보면서도 뭔가가 아닌 것 같다. 이건 저 눈동자에 자신에 대한 갈망이 없기 때문인가.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서글픈가.

‘아.’

서글프다고?

심장에 화살이라도 꽂힌 듯, 욱신 쑤셨다.

“왜 말을 안 하는 겁니까, 브리첼. 그렇게 쳐다만 보면 알 수가 있나.”

“하리드라고 불러.”

“…….”

불쑥 튀어 나간 말은 상황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살랑이는 놈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그 투명한 빛의 특이한 속눈썹을 올려다보다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작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나뭇가지처럼 날카롭고 바위처럼 단단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리드라고 불러라.”

“……갑자기?”

“그렇게 불러.”

“……이상하군요. 내가 부른 적이 없었나? 아닐 텐데.”

지금 그렇게 불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굉장히 이상하고, 야릇한 슬픔 비슷한 것을 삼키며 짐승은 손을 움직였다. 하얗고 변함없이 반듯한 인간의 귓바퀴를 움켜쥐듯 주물럭거렸다. 서늘하고 시원하다. 머리끝까지 피가 돌아 터질 것 같은 자신과는 다르게.

“불러.”

너는 언제부터 황녀가 마음에 들었지?

사실은 이러고 있는 나와 아무 감정도 없나?

반려의 맹약과 구속은 정말 너에게는 들지 않는 것인가?

모든 것이 잘 끝나리라, 너와 나를 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나?

“이봐요, 기사님.”

눈으로 말을 전할 수 있다면, 하리드 브리첼은 훨씬 더 감정이 풍부하고 유려한 기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히도 그런 기술은 없었다. 청아함보다는 짙은 무거움으로, 아련함보다는 관능으로 다가가는 수컷 짐승은 그저 뚫어지게 자신을 내리누른 인간 남성을 올려다보았다.

갈망을 담고서. 너를 원해. 너를 원한다. 한가득 품기를. 너를.

가만히 바라보던 르브리에게 툭 내뱉었다.

“사실 기분이 좋진 않았습니다.”

그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그 말은, 속을 들킨 기분이어서 철렁했다. 동시에 불쾌감도 들었다. 불안함도 솟구쳤다.

“어째서? 그건 나 때문인가? 이 밤이 불쾌한가.”

“아니. 이 자리가 싫은 게 아니야.”

“그렇다면.”

“이상하게 불쾌하더란 말입니다. 당신이 낮에 보였던 행동이. 시선이. 왜 자꾸, 봤습니까?”

“……뭐를.”

덜컹, 하고 심장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인간이 말하는 것을 되새긴다. 봤다고? 무엇을. 설마 르브리에를 바라보던 자신을 알아챘던 것일까. 황녀와 있는 걸 신경 쓰던 제 어이없는 모습을 비난하는 걸까. 짐승은 나약하게 숨으며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불쾌함에 이를 드러내며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조금씩 경직되어 가는 그 분위기 속에서 날카로움은 서로에게 전염되어갔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무엇을 봤…….”

“발뺌하는 겁니까? 봤잖습니까. 아주 뚫어지겠더군요.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습니까?”

처음부터. 보는 순간부터. 반려의 향으로 그를 정말 짐승 이하로 만들어 버린 주제에 저딴 말을 지껄이다니. 하리드의 숨이 격렬해졌다. 헐벗은 가슴팍이 크게 부풀자, 반사적으로 내리누르는 상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기만 했다. 그게 또 분노를 촉발했다.

“너야말로 시선을 못 떼더군.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았나?”

“……여자?”

르브리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은 황제의 사위가 되기 위한 게 너의 목적이었나? 복수가 아니라, 내가 잘못 짚은 거였나?”

“……이봐요, 기사님. 지금 뭔가 심각하게 착각하는 것 같.”

“닥쳐라, 르브리에.”

“예?”

“누워.”

벌떡 일어난 하리드 브리첼은 마음껏 힘을 발휘했다. 가뜩이나 살랑거리는 반려의 혈향에 미쳐 버릴 것 같은 욕구는 차츰 농도가 진해지고 있었다. 거세게 잡아 밀쳐 버리자 깔린 자와 까는 자의 위치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동그랗게 뜬 눈을 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인간을 바라보며 하리드는 목 깊은 곳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당장 껍질을 벗어 버리고 싶다. 들쑤시는 송곳니의 감각과 손끝에서 튀어나오고 싶다 발악하는 손톱이 아플 정도로 뻐근했다. 침이 고였다. 잘근 씹으면 너무나 감미로울 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희고 고운 살갗을 마구잡이로 씹어 버리고 싶은 것을 참는 이유는 그렇게 했다가는 르브리에가 죽기 때문일 뿐이었다. 같은 짐승이었다면, 이렇게 참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 격렬하고 뜨겁고 더럽게 뒹굴었을 텐데. 혹시 다칠까 봐 처음부터 엉덩이를 내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로 먹고, 또 잡아먹혔을 것이다.

‘내 반려.’

손을 걸어 놈에게 마지막으로 걸쳐져 있던 것을 촤악 잡아 뜯어 버리자, 고운 얼굴 위로 짜증이 스쳤다.

‘나의 반려.’

하리드는 언제나 옷을 찢어 버렸고, 르브리에는 정중하게 그의 옷을 벗겼다. 그래서 마지막에 떠날 때 르브리에는 언제나 아티펙트를 사용하며 그놈의 버릇 참 더럽다고 비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오늘 준 정보는 네가 충분히 원하는 것이었을 텐데.”

“그랬죠.”

“그러면 값을 해야지.”

“그래서 봉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원하는 대로 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갚아라.”

수치스럽게도 불현듯 깨달았다. 이 불쾌함과 초조함이 무엇이었는지를. 질투였다. 그 여자를 향한 질투였다. 눈앞의 반려와 같은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였고, 그 부드러운 시선을 받으며 온화한 대화를 이어 가는 그들 사이에 대한 질투였다.

“뭘 원하는데요.”

초조하게 입 안의 살을 씹었다. 하리드 브리첼은 삐거덕거리며 뭔가가 잘못 마찰되는 소리를 들었다. 이상하다. 잘못되었다. 아무리 반려라 할지라도 이쪽이 끌려가서는 안 되었다. 열락이어야 했다. 그저, 열락. 놈을 자신과 같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잊었다. 잊고 말았다.

탐하는 이 시간이 좋아서 그저 빠져들었다.

하리드는 내리누르듯이 상체를 움직이며 제 아래에 누운 인간을 노려봤다. 그리고 속삭였다.

“안아.”

“…….”

유혹하라고 말한 건 저 입이다. 그럴 기분이 들도록, 단계적으로 접촉하는 걸 게임을 오가는 것처럼 하자고 한 것도 저 입이다. 그러니 짐승은 상대가 마음껏 그럴 흥취가 돋도록 움직이기로 했다. 여태 얌전히 입을 다물고 누워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나른하게 한쪽 입술을 꼬는 기사의 얼굴은 정숙함을 벗어던졌다.

유혹이 기름처럼 번들거리며 흐르는 모습에 아래 깔린 남자의 성기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한 짐승은 오로지 으르렁거리며 인간을 위협했다.

흰 귓불을 와득 깨물었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아플 정도로.

“날 안아.”

“……브리첼.”

흉흉해지는 인간의 눈동자가, 어쩐지 붉은빛으로 보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눈 색이 변하는 인간이 있을 리 없지. 제게 헛웃음을 지으며 하리드는 르브리에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턱을 움켜잡았다.

“오늘은 빼지 말고 네 짐승같이 커다란 성기를 내 안에 처박으란 말이다. 그게 오늘 네가 내게 치러야 하는 대가다.”

하리드는 몰랐다. 그게 신사의 가면을 쓴 르브리에가 움켜쥔 마지막 이성을 뚝 잘라 낸 순간이었다는 것을.

* * *

거친 움직임에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흔들리는 제 상태를 내려보는 상대는 매끄러운 음성으로 평온하게 지껄였다.

“왜 그래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짐승같이 커다란 성기를 처박으라고.”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철썩거리며 자꾸만 울리는 커다란 소리가 엉덩이를 매맞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크고 뜨거운 것이 몸을 두 쪽으로 갈라 버릴 것처럼 우악스럽게 파고들고 또 파고들었다. 배 속을 뚫어 입으로 튀어나올 기세로 내장을 처박고 또 꿰뚫었다.

“하악, 하…으, ……읏, 윽, …으!”

“자꾸 빠져나가려고 하지 말아요. 박는 데 불편하니까.”

“흐읏, 아, ……아!”

“더 깊게 박아 줄게요. 부족하다는 거 압니다.”

르브리에는 말을 잘 들었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리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벌름거리면서 조금씩 젖어들던 구멍 사이를 단숨에 꿰뚫었다.

‘……!’

그 순간 하리드는 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격통, 손가락으로 풀지도 않은 곳을 꿰뚫은 거대한 것. 그의 허리를 깔고 앉듯 성기 위로 무너진 통에 체중에 눌린 것이 타격이 컸다.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굳어 있는 몸을 르브리에가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배가 가득 찬 것 같았다. 놈의 커다란 성기가 내장을 뚫고 자리잡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항문은 어쩌면 찢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숨 쉬어요.’

그 부드러운 음성에 밭은 숨이 내쉬어질 찰나, 얼얼함조차 느껴지지 않는 곳을 파고든 것이 더욱 크게 부풀었다.

‘아직 다 발기 안 했으니까.’

‘……하, 으…….’

‘이제 움직일 겁니다.’

컸다. 지나치게. 보고 만지고 핥을 때는 몰랐던 것이 아래를 파고드니 직접 본 것보다 더욱 크게 느껴졌다. 도리질 치며 빠져나가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르브리에는 그의 허리를 잡아챘다. 하리드가 조금도 움직일 수 없도록 말의 고삐를 잡아채듯 옭아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 하으, 아, 아……! 윽, 읏!”

마구잡이로 시야가 뒤흔들렸다. 꼭 말을 타는 것처럼 저보다 희고 고운 인간의 허리 위에 앉아, 하리드 브리첼은 그의 손길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들썩거리는 허리에 따라 리듬을 맞춘다.

내장을 꿰뚫듯 파고드는 거대한 기둥에 욱, 욱, 맺혀 있던 뜨거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힘이 빠져 수그러들라치면 다시금 짓쳐들며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잡아 흔들었다. 이미 손자국이 수차례 새겨졌다 사라지길 반복한 엉덩이의 살점은 감각도 없었다.

철썩철썩,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렸다.

“하아, 하…… 뜨거워. 손가락을 먹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가 없거든. 느껴집니까, 하리드 브리첼? 당신이 지금 어떻게 내 걸 먹고 있는지 말이야. 아주 쫄깃하게 빨아들이고 있어. 맛있다는 듯이, 게걸스럽게.”

“하윽, 하…윽, 읏, 너무, 빨…… 윽!”

그는 마구 지껄이는 상대와 달리 내뱉을 수 있는 게 신음뿐이었다. 말을 할라치면 더욱 거세게 처박히는 것에 더더욱 숨결만이 흐트러졌다.

“개처럼 박아 줄게요. 발정난 개처럼, 짐승처럼, 내장 깊숙이 날 기억하도록 정액을 퍼먹여 주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름 하나 부르지 않았다고 섭섭해하는 귀여운 짓은 하지 말란 말입니다.”

“으, 으읏, 응…… 윽, 아아, 악!”

“그래요. 스스로 엉덩이를 잡아 벌려 봐요.”

더 들어올 곳도 없었는데 자꾸만 더 깊숙하게 처박혔다. 울음과 비슷한 소리를 흘리며 하리드는 르브리에의 음성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얼얼한 엉덩이를 스스로 잡고 조금이라도 더 뜨거운 살덩어리를 집어삼키기 위해 노력했다. 살이 우악스럽게 당겨졌다. 이미 팽팽하게 혹사된 구멍이 비명을 질렀다.

더, 더, 더 먹어야 한다. 반려가, 내 반려가 시키니까.

“하아……. 착하네요.”

“흐, 흐으읏, 으…….”

그러다가 순간, 경련하듯 깊숙한 곳을 찌름과 동시에 꼭 배변하는 것 같은 감각이 익숙하게 몸을 덮쳤다. 파들거리며 떨고 있을 때 내벽 가득 뜨거운 것이 발작하듯 채우는 순간이었다.

“……!”

몸이 후딱 뒤집혔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이 처박혔다. 한쪽 다리가 르브리에의 어깨 위로 올라가고, 희뿌연 것이 비를 뿌리듯 비산했다. 인간의 가슴팍에 튄 제 정액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술을 먹혔다. 그리고 빠져나오지 않은 채로 다시 크게 부푼 것이 흐물하게 풀어진 내벽을 사정없이 괴롭히기 시작했다.

퍽. 푸욱, 퍼억, 퍽!

“흐으, 흣……아, 악, 으읏!”

“왜 만족을 모르고, 자꾸 조르는 거예요. 기사님. 자꾸 조이면 배가 터질 정도로 싸주고 싶어지잖습니까.”

“으, 읏, 그, 그만, 하, 으……윽! 멈췄, 다, 가, 흐으윽!”

“안 돼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이렇게 쫀득하게 물고 있으면서요.”

따라 찔걱거리며 열렸다가 조이기를 반복하는 구멍이 요란하게 울었다. 붉게 달아올라 딸려 나오는 살점을 사정없이 후벼파는 르브리에의 성기는 탐욕스러웠다. 마구 뒤흔들리는 다리를 또렷한 흰 이빨로 잘근거리며 씹었다가 욕설을 내뱉으며 르브리에는 뭔가를 참아 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살도 달아서 미쳐 버릴 것 같아.”

“하아, 하, 너, 조금 쉬었, ……다가, 윽!”

“쉴 시간이 어디 있어요. 밤은 짧은데.”

전혀. 밤은 짧지 않고 길었다. 푹, 푸욱 처박히는 소리와 엉덩이를 쥐어짜는 것 같은 손아귀의 감각에 하리드는 부르르 떨었다.

“기사님.”

나긋하게 이어지며 흘러들어 오는 저 호칭은, 놀리는 것이다.

“황녀는 포기해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퍽! 아까보다 더욱 세지는 허릿짓에 하리드는 앓는 것같이 비명을 질렀다. 짐승은 자신이었는데 제 반려가 짐승 같아 보였다. 도망가듯 몸을 비틀고 상체로 이불을 쥐며 일으키려 하자, 목 뒤를 와작 깨물렸다.

“윽!”

“왜 자꾸 움직여. 도망가는 것처럼.”

“……르브, 리에!”

“이걸 꽂은 채로 어디로 나가려고요.”

“으윽!”

“그래요. 기사님. 당신 엉덩이를 뚫고 있는 건 납니다. 황녀는 곱고 여려서 이런 짓을 해 주지 못해요. 당신이 이 앞을 휘두르는 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 야하지 않습니까. 예민하고, 질척거리고, 너무…….”

“으읏, 윽! 아, 윽!”

“제기랄.”

뒤에서 끌어안듯 뿌리까지 꽉 쥐어 오는 손에 성기가 비명을 질렀다. 하리드는 밀쳐지듯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도 희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창밖의 풍경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해가 뜨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요. 어딜 봐.”

“이제, ……해가, ……으윽!”

“아직 안 갔다고 했잖아요. 잔뜩 조이면서 왜 그런 말을 하지?”

“아아!”

“괜찮아요. 난 아직 안 지쳤거든.”

“……아, 읏, 아!”

엉덩이 사이를 들락거리는 성기는 여전히 심이 두꺼워 짐승을 절망하게 했다. 젊은 인간은 설마 나이 먹은 짐승보다 정력이 셌던 것인가. 눌러서는 안 되는 버튼을 누른 사람처럼, 하리드는 입술을 깨물며 벌름거리는 구멍에 힘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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