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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이면의 세계에서 건너온 자들 (4/16)

4장. 이면의 세계에서 건너온 자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가 있다.

머리 위를 떠받치는 것이 푸른 하늘이고, 발을 디디는 것이 초록빛 대지인 것이 당연한 진리를 아무렇지 않게 뒤바꾸는,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혼란의 세계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면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를 기만하고 속인다. 눈에 보이는 것은 거짓이며 현재의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뿐이라고 고하며 현실로 도피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은……(중략)……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건 파란의 예고와 같았다.

-<이종족, 그 탄생과 멸망에 관하여> 중 발췌. 작자 미상.

* * *

제니스는 노련한 창부였다. 어려서부터 이 세계에 몸을 담고, 불유쾌한 일들을 많이 겪으면서 마모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오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것을 스스로 불행이라고 곱씹으며 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저를 찾아와 매달리는 손님들을 은근히 종용하고 움직이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재밌군요.”

그러는 동안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 봤다.

겉으로는 정숙하고 고귀한 척하는 사제님들이 어찌 무너지는지도 적나라하게 봐 왔고, 신사답고 엄숙한 귀족님이 발아래에서 쾌락에 부들부들 떨며 어떤 음습한 욕망을 바라는지도 겪어 봤다.

때로는 약자 앞에서만 제 낯을 보이는 비열한 인종을 만나 고통도 겪어 보았고, 몸 파는 일을 하는 자신들보다도 아름다운 남자나 여자를 상대하는 일도 많이 해 봤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가슴속에 꾹 숨겨 둔 진실한 마음 한 조각이 절대 흔들리지 않는 것. 바람처럼 스치며 사라져갈 손님들에게 절대 그 진실한 마음 조각을 주지 않는 것.

‘이 사람, 무서운 손님이야.’

제니스는 눈앞에서 설탕처럼 부드럽게 웃고 있는 남자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상대의 얼굴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인형처럼 곱고 예쁘게 생긴 것뿐 아니라 치켜 올라간 눈썹의 화려함이나 조각처럼 섬세하고 오뚝한 콧날, 붓을 펴 붙이기라도 한 듯 풍성하고 투명한 속눈썹, 아름답게 빛나는 사파이어의 눈동자, 석류라도 따 문질러 덧바른 것처럼 반들거리는 붉은 입술,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밝고 창백하도록 흰 피부까지.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호리호리해 보이는 선과는 달리 사람을 많이 상대해 본 그녀는 딱 봐도 남자의 감춰진 육체가 단단하고 날렵할 것이란 것까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저 완벽한 상대가 왜 이렇게 무서울까?

제니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달콤하게 웃으려 노력했다. 겁먹은 티를 내서는 안 된다. 흔들려서도 안 된다.

“그 남자의 행방은 아무도 몰라요. 죄송해요, 손님.”

“하지만 모두가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당신이라고 하던데 말입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어머, 제 뜻을 오해하셨군요. 그 이후의 행적은 모른다는 뜻이에요. 귀족님도 알다시피 저는 이곳에 매여 나가지 못하는 몸이랍니다. 자유롭게 두 발 달려 나갈 수 있는 수컷의 행방을 제가 어찌 알겠어요?”

“그렇습니까? 흐음, 이거야 곤란하게 되었군요.”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해요. 하지만 그분은 술에 많이 취해 있었어요. 그 이후의 일이라면 사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처연하게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도 제니스는 연신 남자를 살폈다. 우아하게 기울어지는 목덜미, 빙긋 웃는 입술의 움직임, 그리고 가면처럼 매끈하기만 한 그 빈틈없는 미소.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한 번쯤 안아 보고 매달리게 하고픈 나비 같은 남자였지만 동시에, 거미줄을 펼쳐 놓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거미 여왕 같은 느낌을 주는 괴이한 사내였다.

“다른 들은 것도 없을까요, 아름다운 아가씨.”

“…듣기 과분한 말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무식하여 아는 것이 없답니다. 혹여 무슨 말을 들었더라 하더라도 흘려듣고 물처럼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을요.”

창부들은 입이 무거워야 한다. 손님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접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소문을 내 입을 놀리는 것은 목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저 남자의 손짓, 발짓에 다 내뱉고 싶은 두근거림이 심장을 조인다고 하더라도.

“흐음. 그래요, 그렇겠군요.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아예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서 말입니다.”

“네?”

제니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뒷목이 서늘해졌다. 왜일까?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봐도 보이는 것은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신사 한 명뿐이었다.

고급스러운 정장과 광택이 도는 검은색의 지팡이, 그리고 말끔하게 쓸어 넘긴 회색의 머리카락. 그래서 더욱 저 보석 같은 외모가 빛을 발한다. 동그랗게 뽀얀 흰 이마가 말끔한 사내.

“나는 고민 중입니다, 제니스.”

“…….”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제니스의 두 눈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오한이 이제는 찬물을 끼얹듯 쏟아졌다. 놀라움과 경악이 어린 그 얼굴을 보며 남자가 고요히 웃는다.

“놀란 토끼 같군요. 무엇이 그대를 두렵게 했지요?”

이제 어둠이 내려앉는 창문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꼭 스스로 그림자가 된 듯 기이하기만 했다. 입술을 달싹이자 스스로가 듣기에도 겁에 질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제, 제 이름을 어찌 아셨죠?”

말한 적 없다. 포주도 모르는 그녀의 진실한 이름을 낯선 남자가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 그 괴로운 시간 속을 빠져나올 때 그녀가 잃어버리지 않은 유일한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하며 오므라지는 손을 보며 남자가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으나, 그것마저도 무서웠다.

아무도 몰라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제니스의 눈매가 표독스러워지는 순간, 그가 손가락을 들어 입술 앞에 세웠다.

“쉬이,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만.”

다가온 것은 무척이나 차가운 손끝이었다. 경직된 그녀의 귓불을 매만지는 손가락이 차갑고 서늘했다. 하지만 부드러웠다. 가시처럼 날카롭게 서 있던 경계와 의심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것은 경악스러운 변화였다.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도 침착해지는 심장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경계하지 말아요. 당신과 나는 뜻이 같지요.”

“같, 다구요?”

“그래요. 제니스, 그대가 그 손님의 정보를 꾸준히 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경악으로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그것을 어떻게!

“어, 어, 어떻…….”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입이 무겁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해하지 않아요. 그럴 여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요. 그대는 느낄 겁니다. 내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당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어요. 아니, 돕고 싶어 하고 있지요.”

잃어버린 과거가 제니스의 망막을 채웠다. 절망, 비명, 공포, 그리고 불타는 듯한 복수심.

“도와준다고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바란다면. 복수를 위해서 그 어떤 위험도 감내한다면.”

얼굴을 바짝 내리고 그녀의 목을 살며시 쥔 사내가 유혹하는 악마처럼 입술을 비틀었다. 이상하다. 제니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고운 입술 사이로 생경한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림자를 뒤로한 채 스스로 검은 그림자가 된 듯한 남자가 속삭였다.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요?”

“당신이 가슴속에 품은 것.”

“…….”

심장이 쿵쿵 뜨겁게 뛴다. 남자의 손이 느릿하게 우아하게 뻗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파르르 떨리며 홍조를 띠는 연분홍의 살갗이 사랑스럽다는 듯,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는 반투명한 재질의 어깨끈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린다.

이제 남자의 얼굴은 제니스의 바로 옆에 와 있었다. 차가운 숨결이 헐벗은 어깨 위로 쏟아졌다. 손가락을 느릿하게 흔들며 남자가 물었다. 툭, 하고 치면 떨어질 옷가지였다.

“원한다면 당신에게 힘을 주겠습니다.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복수? 물론 원했다. 제니스의 검은 눈이 강렬하게 튀어 올랐다. 여태까지 그녀를 살아오게 한 직감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저 남자를 잡아. 저 남자에게 애원해. 잡아!

턱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심장은 기쁨으로 펄떡이고 있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면서,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자는 그 속을 내보이라는 듯 종용했다.

“나는 힘을 원, 해요.”

“그렇군요. 현명한 선택입니다.”

“모두 죽이고 싶어요. 정말, 힘을 얻을 수 있나요?”

“그럼요. 아주 잠깐의 고통일 뿐입니다. 자아, 이리 와요.”

우아한 남자가 결국 슬립의 끈을 훑어 내렸다. 헐벗은 육체를 타고 부드러운 재질의 옷가지가 껍질을 벗는다.

“흐으.”

“쉬이. 당신은 다시 태어나게 될 겁니다.”

이제 그녀는 언제나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긴장과 기대로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어깨를 쥐었다. 아니, 매끄럽게 쓰다듬으며 목덜미 위로 올라와 목을 매만졌다. 귓가에 속삭이던 남자가 고개를 더욱 그녀에게로 깊게 숙인다.

살갗 위로 닿는 남자의 숨결.

부드럽고 매끄럽기만 한 손길.

그리고…….

“하아악!”

눈앞이 번쩍 튄다.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 격통, 몸부림치며 몸을 태우는 불꽃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구. 두려움. 하지만 뒤이어 찾아오는 죽어 버릴 것 같은 열락, 심장이 튀어 오르는 환희, 그리고 쾌락.

쾌락, 쾌락! 미쳐 버리는 기분이었다. 제니스는 마음껏 소리 질렀다. 아아악. 아아악! 발끝이 오므라들고, 육체가 날뛰는 것처럼 경련했다. 좋았다. 너무 좋았다.

“축하합니다, 제니스.”

붉게 젖은 송곳니, 우아한 미소. 제니스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을 드디어 만났다.

* * *

“이런.”

뚜벅, 방문을 닫고 낡은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마침 계단의 옆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제 얼굴이 비친 때였다. 말끔한 흰 뺨에 튄 붉은색의 액체가 선명하다.

“묻었었군.”

엄지로 느릿하게 훑으니 이지러지는 액체가 비릿한 향을 뿜었다. 느릿하게 비웃던 남자는 액체에 젖은 손가락을 바라보다 그 손을 입 안으로 향했다. 붉은 혀가 장미꽃 같은 살점 사이에서 튀어나와 동그란 손끝을 핥는다. 할짝, 젖은 소리와 함께 자취를 감춘다.

비탄, 눈물, 누군가의 애원, 그리고 증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이며 이제는 그의 것이기도 하다.

그날 밤 어떤 운명이 또 바뀌었다는 것을, 그 은밀함은 달밤 아래 숨 쉬는 짐승들조차도 알지 못했다. 여느 날과 같이 남자는 그저 우아하게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원하는 것을 위하여. 제 그늘 안에 두게 된 여자는 아주 훌륭한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수확이 좋은 밤이군.”

사교계를 오가는 귀족이라면 모를 수 없는 얼굴, 빙긋 웃으며 사창가의 건물을 나서는 이는 바로 제국의 공작 중 하나. 바로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이었다.

까아악. 저 어딘가에서 까마귀가 서늘하게 울었다.

* * *

“정신 차리자, 친구야. 나는 아무래도 네가 귀신에게 홀렸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 그럴 수 있지. 인간의 살결이 오죽 보들보들하고 야들야들하냔 말이야.”

시끄러웠다. 무척이나.

“체향 좋은 인간은 가끔 그대로 변신하고프게끔 돌아 버리게 만드는 게 있어. 그놈도 멀끔하고 매끈하게 생긴 데다가, 냄새도 깨끗할 것 같으니 허기진 네가 잠시 욕망에 굴복했을 수도 있지. 그런 거야. 일탈이 괜히 있겠어?”

잔소리를 폭탄처럼 맞았다. 서글프게도 그 잔소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귀가 아팠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만 좀 닥치라는 뜻을 피력했으나 상대는 아랑곳없었다.

“근데 말이야. 먹잇감을 대상으로 엄한 생각을 품는 건 안 돼. 관심도 안 돼. 그냥 다 끊어. 절대 안 돼. 시작도 안 해버리면 그것만큼 쉬운 게 없어. 아직 요만큼 솟은 호기심이니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야. 돌아가는 일만 생각하자. 응? 우리 요람 말이야. 얼마나 좋아. 떠올려 봐. 그곳에서 휘몰아칠 심장의 고동 소리를 생각해 보라고!”

하리드가 블랙 울프 기사단의 훈련을 마친 뒤, 브리첼 공작가에 올라온 서류들을 처리하고 마침내 지긋지긋하게 올라오는 귀족가의 연회 파티 초대장들을 어떻게 고르고 불태워야 하나 고심하고 있는 순간까지도 친구의 잔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끝이 없었다.

결국 하리드 브리첼은 쥐고 있던 깃펜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노려보았다. 저 입. 저놈의 입.

“그만해라. 귀가 울릴 지경이군. 뭐가 그렇게 불만이지?”

“뭐라고?”

“잔소리 그만하라고 했다.”

“잔소리?”

이제는 주기도문을 외우듯 중얼중얼 내뱉던 룩센의 얼굴 위로 발끈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떻게 적반하장 격으로 그리 말하느냐는 듯 배신감 어린 얼굴이었다.

“잔소리라니, 잔소리라니! 네가 안 하던 행동을 하니까 불안해서 그렇지! 부정할 수 있어? 르브리에 그 인간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며. 다 들었거든? 다 네놈 수족들이긴 해도, 네 바로 아래는 나라는 걸 잊은 모양이지!”

“그럴 의도는 없었다.”

“와, 웃기네! 내가 발끈할 건 아니까 피한 거겠지. 틀려?”

“…….”

“거봐. 대답 못 하시네. 고귀하신 우리 수장님은 거짓말은 못 하시지. 넌 지금 르브리에 그 인간이 궁금해진 거야. 관심이 가기 시작한 거야. 빌어먹을.”

이야기가 제대로 이어지자 기회를 잡았다는 듯 룩센 디암은 눈을 빛냈다. 하리드는 앓는 한숨을 내뱉었다. 벌써 피곤했다. 테이블에 쌓이고 쌓인 초대장 중 하나를 든다. 펼쳐 보니 듣도 보도 못한 무슨 남작가의 초대장이다. 말끔히 구겨 버리면서 눈썹을 끌어 올린다.

“설마 눈 돌아버리게 맛있는 향이 나기라도 했어? 아니면 구멍이 남다르디? 대체 그놈에게 갑자기 관심 갖는 이유가 뭐야. 하리드 브리첼, 너 홀랑 까먹은 모양인데 우리 얼마 안 남았다. 놈은 수많은 인간 중 하나일 뿐이야.”

“알고 있다.”

까드득, 룩센의 손끝에서 비죽 솟은 날카로운 것이 단단한 책상의 표면을 긁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나무가 긁힌 자욱이 선명하게 남았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에 닿는다. 너덜너덜한 자국. 룩센은 음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알아?”

“그래.”

“계획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의견을 낸 건 우리 모두 동의한 일이야. 이제 행동하는 일만 남았어. 우리가 움직이면 모든 것이 끝나. 돌아갈 일만 남았다고. 여기서 변수가 생겨서는 안 돼. 그건 우리가 보낸 몇 년의 시간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이야.”

“그것도 안다.”

“그런데 왜? 뭔가 의구심이 생긴 거라면 내게 상의를 했겠지. 하지만 지금 네 행동, 여러모로 수상해. 내 의심이 미친 게 아니란 뜻이야.”

“…….”

그 질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왜. 그러게, 왜.

그 순간, 다음 초대장을 열어보던 손이 제자리에 멈췄다. 하리드 브리첼의 금속성을 띤 금색 눈동자가 제 손에 들린 초대장에 고정되었다.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느낀 룩센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 초대장에 시선을 둔다. 곧 룩센의 얼굴이 종잇조각처럼 구겨졌고, 입술 사이로는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장이시여.’

예언가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떠오른다. 막연한 불안감이 심장을 두근두근 울렸다. 놓아라. 이것을 놓고 뒤돌아서라. 차갑게, 짓밟고 돌아가라. 핏속에 감춰진 짐승이 소리쳤다.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하리드 브리첼!

“버려.”

“…….”

룩센이 애원했다. 종이를 쥔 손이 순간 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기에.

“제발, 친구야. 그거 버려라.”

“…….”

“설마…… 가려고? 아니지?”

그건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공작. 그가 보낸 것이었다.

「담백한 밤을 위해.

브리첼 공작, 그대를 페르달 공작가의 연회에 초대합니다.

부디 본인의 생일을 맞이하여, 자리에 참석해 빛내 주시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정갈하지만은 않은, 절대 담백할 리 없는, 화끈하고 쓰린 밤을 함께 보낸 인간이 보낸 초대장.

어쩐지 그 화려하게 꾸며진 금색의 초대장에서 저를 향해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는 요망한 얼굴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배 속이 요동쳤다. 마구 괴롭혀졌던 어떤 부위가 확 오므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목울대 저 깊은 곳에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본능이 이성을 패배시키는 소리였다.

* * *

어둠은 안정을 준다. 짙은 밤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은밀함은 스스로를 숨겨야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고요한 수면과 같다. 창문으로 보이는 깊고 깊은 어둠 속, 불빛 하나 비추지 않는 밖의 풍경을 보며 남자가 빙긋 웃었다. 유리로 비추는 눈동자는 선명한 푸른색이다. 손을 들어 남자는 흰 손끝으로 유리를 긁었다.

끼익.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다가와 묻는 이를 유리에 반사된 상으로 바라보면서 그는 눈을 휘었다. 즐거움, 희락, 말할 수 없는 비밀. 그의 뇌리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그를 즐겁게 해 주었던 고결한 공작님의 모습이 투영되었으나,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소문과는 참 달랐거든. 의외였지.”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는 주시해야 할 대상이고, 저번 밤에 이루어진 일들은 그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경계에 지나지 않았다. 순간의 즐거움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지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나엘?”

앳된 얼굴의 남자는 기척이 없었다. 얼굴은 꼭 주인인 르브리에와 꼭 닮게 파리했고, 입술은 붉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카락의 모양새와, 정갈하지만 존재감 없이 고요한 이목구비, 그리고 침묵을 미덕으로 여기는 눈일 것이다.

앳된 사내를 향한 르브리에의 시선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어제 보고를 들었습니다. 한 명을 추가로 늘리셨다고요.”

“그래, 그랬지. 왜. 계획에 없던 이라 잔소리를 할 셈이냐?”

바라보며 웃자, 앳된 남자는 얼른 고개를 숙인다. 반지르르한 남청색의 머리와 동그란 정수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시간은 참 물과 같다. 어느새 한 사람의 몫을 충분히 하게 된 자는 소년에서 청년이 되었다.

“제가 감히요. 다만, 조금 더 주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째서? 그녀는 충분한 동기와 의지를 지녔어. 그곳에서 숨죽이며 버텨 온 용기는 대단하지 않던가? 나는 그녀를 존경한다. 동료가 되기 충분했지. 그 일은 됐다.”

“……하면, 며칠 전의 일입니다. 브리첼 공작과의 일도 기억하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그렇겠지. 가면은 만능이 아니니. 공작. 공작이라…….”

별안간 르브리에가 웃음을 흩뿌리자, 곁에 서 있던 앳된 얼굴의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주군?”

“……그 황제의 개. 생각보다 흥미롭더군.”

유리창에 비춘 제 얼굴을 보며 고개를 느릿하게 저으며, 입술을 훑었다. 지금쯤 초대장을 받아 보지 않았을까. 보자마자 어떤 얼굴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가린다.

“아주 재밌는 기사님이었지.”

아아, 쓸데없는 감정이다. 지금의 이 웃음도. 온화하고 온유하였던 표정이 순식간에 심해로 가라앉으며 르브리에의 얼굴은 무정하고 삭막하게 죽은 시체의 것처럼 변했다.

감정이란 이런 안개와 같은 것. 제일 중요한 것은 숨기고 있는 진심이다. 푸르게 돋아난 팔뚝의 핏줄을 매만진다. 차가웠다. 그날 밤 가지런한 치아가 이곳을 꽉 깨물었을 때 느꼈던 통증은 제법 지독했었다. 놀랄 만큼 그 상대와의 시간은 몇 번이나 기억날 만큼 마음에 들었으나, 그뿐이다.

푸른 눈이 독하게 빛났다. 서슬 퍼런 그 기색은 잘 갈아낸 단도와 비슷하다.

“어젯밤 계획으로 죽은 이는?”

“없었습니다. 모두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좋군. 밤의 상황이 그러하다면 낮의 상황은 어떻지? 연회의 준비는 어찌 되어 가고 있나. 황궁은?”

“모두 순조롭습니다. 황녀도 그리고 황제도. 아, 조만간 황제가 샤나 후작을 불러들일 수 있을 듯합니다.”

“흐음. 그 남자도 언제 처리를 해야겠지.”

아주 만족스러운 과정들일 뿐이다. 짙은 밤, 보이지 않을 숲속에서 울부짖는 누군가의 비명을 가늠하며 그는 즐겁게 콧노래를 불렀다. 이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인내하면 되는 것이다. 비통과 절망과 눈물만이 가득한 순간을 상상하자. 어찌 즐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계획이 순조로우니 하루하루가 즐겁군.”

“주군께서 그러하시다니 바로 제 기쁨입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현재의 행복을 살고 있는 아가씨도, 과거의 잘못을 잊은 채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 안달이 난 남자도, 그리고 비밀을 꽁꽁 숨기고 권력의 편에 붙은 자들도 모두 즐겁게 불타게 될 것이다. 아주 활활.

“혹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목이 마르구나.”

“주군, 기꺼이.”

그 위엄에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충직한 종은 주인의 명령 하에 얼굴에 발긋한 빛을 띤다.

그 순종에 붉은 입술이 곱게 휘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앳된 얼굴에 스치는 긴장과 각오를 보며 온유하게 눈을 휜다.

착하고, 가여운 것.

“오렴, 나엘.”

손을 뻗었다. 가련하고 안타까운 자신의 심복이 입술을 깨물며 다가온다. 단추가 풀리는 소리와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푸른 달빛 아래 희고 창백한 살갗이 드러난다.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났다.

달밤 아래 미치지 않은 자가 없으니, 이 세상이 곧 혼돈이었다.

* * *

“그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엇을요?”

연회는 평소와 달리 어수선했다. 주최자가 그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공작인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의아한 모습이다. 하지만 모여 있는 귀족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안개처럼 퍼져 있었다. 누군가가 말을 꺼낸 그 화두에 슬며시 따라붙는 시선들이 여럿이었다.

“그거 말이에요. 이번에 또 일이 터졌다고 하네요.”

소식에 둔한 여인을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한 여인은 귀족들 사이에서 정보통이라고 불리는 백작 부인이었다. 모두가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을 알면서도, 제 불안을 혼자 담고 있기 싫은 여인은 빠르게 입을 놀렸다.

“벌써 열셋이나 죽었어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이 스쳐 지나가고, 누군가가 그녀의 말에 불안한 목소리로 동조했다.

“어머나……. 그게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어요?”

“그럼요. 소식이 느리시군요. 후우, 어쩌면 폐하께서 이 불안한 시국에 브리첼 공작을 수도에 불러들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해결을 못 하고 있으니까요.”

“백작 부인께서는 모두가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시네요. 모두 브리첼 공작의 혼인을 위해 폐하께서 그를 곁에 붙잡아 두려고 하시는 거라던데…….”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웃음거리로 넘길 만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모두 이 일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그런가요?”

수도의 살인 사건. 그건 암암리에 떠도는 은밀한 것이었다. 귀족들은 입 밖에 꺼내길 꺼렸고, 평민들은 소식을 듣지 못해 알지 못했으며 황궁은 침묵하고 있는 일.

벌써 열셋이 죽었다. 모두 황궁을 나선 황족의 핏줄을 품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아무도 몰랐으나 피해자가 다섯이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 사건을 참관 중이었던 자가 그것을 밝혀 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귀족이 바로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공작이다.

“하지만 부인, 아직 살인이라고 판명 나진 않았잖아요?”

반문을 받은 백작 부인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디 그런가요!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않았잖습니까. 이건 명백한 살인 사건이에요. 이미 모두가 살인 사건이라고 하고 있어요. 생각해 봐요. 너무 이상하죠.”

“뭐가요?”

“어느 누가, 무슨 이유로 감히 황족을 해한단 말인가요? 폐하께서 왜 침묵하고 계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 외숙께서 황가의 방계 핏줄이시니 어디 밤 외출이 불안해서 나갈 수가 있어야지요…….”

“공식적으로 발표하면, 많은 혼란이 오게 돼서 그런 것 아닐까요.”

“이 답답한 사람, 그걸 누가 모른답니까.”

백작 부인이 부채에 얼굴을 숨기며 속삭이는 말에 주변에서 엿듣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서 경멸에 가까운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지나친 의식이라는 뜻이었다. 그보다 훨씬 진한 피를 지닌 이들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또 마음껏 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귀족 사냥.

정확히는, 황족 사냥.

누군가 황족의 피를 잇는 이들을 잡아 족족 죽이고 있었다. 궁 밖을 나가더라도 고위 귀족 못지않은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람을 얻어 나가게 되는 이들이 그리 죽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가. 더 소름이 끼치는 것은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실종 사건이라고 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살릴 것이라면 대체 누가, 황족들을 은밀히 납치한단 말인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고 그러는 거지.

“페르달 공작께서 완벽하게 해결해 주시면 좋으련만.”

백작 부인의 안쓰러운 한탄과 함께, 연회장의 가장 큰 샹들리에의 불이 꺼졌다. 모두가 기대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페르달 공작은 이렇게 여러 가지의 쇼를 보이곤 했는데, 그 광경들이 정말 화려하고 아름다워 황궁의 연회보다도 인기가 많을 정도였다. 딱딱한 형식적 절차 없이 두런두런 떠들고 있던 귀족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바로 그때였다. 귀족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머, 저분은?”

“……웬일이야. 저 직접 보는 거 처음이에요…….”

어둠에 잠긴 연회장에서 유일하게 빛이 밝혀진 입구 쪽에서 마침 누군가가 걸어 들어온 것이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고위 귀족. 그러나 그 특징이 유달리 또렷하여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남자. 현재 사교계의 가장 큰 관심사.

“저분이 브리첼 공작님이시지요?”

한 앳된 영애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중얼거리는 말에 귀부인들이 탄식을 흘렸다. 정말, 그 소문 속의 공작은 그 어떤 상상보다도 멋진 남자였던 탓이다.

* * *

‘가지 말자. 가지 말아야 해.’

룩센은 진심으로 고했다. 숫제 울음까지 고여 있었다. 물론 그 말에 하리드도 어느 정도 수긍을 했다. 문제는 초대장을 구기지 못한 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육체였다. 자신을 고귀한 공작님이라 칭하며 비웃듯 농락하던 그 목소리가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는 이곳에 있다.

‘르브리에.’

운명이 가리킨 적.

예언자 이시르가 자신의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알아낸, 운명이 예언한 종족의 적.

늑대들은 세상에 나와 예언의 해와 시와 분에 태어난 그 인간을 찾기 위해 몇 년을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겨우 찾았다. 어떠한 흠도 없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사냥감에게 달려들 시기만 노리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 그 일념 하나로.

‘마땅히 죽여야 할 인간. 숨통을 끊어 놓아야 할 적.’

그렇다. 그런데도 알 수가 없다. 수장인 자신이 왜 모든 이성을 내버린 것처럼 흔들리는가. 어이하여 그 인간의 살내음을 배고픈 짐승처럼 허덕이며 다시 맡고 싶단 말인가? 혹시 룩센의 말도 안 되는 잔소리대로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리드 브리첼! 너 진짜 이럴 거야?’

‘가서, 확인하고 오겠다.’

‘대체 뭐를? 뭐를 확인할 건데?’

‘그 무엇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확신이 필요해, 룩센.’

‘그러니까 무슨 확신 말하는 거야. 결론은 하나야, 수장.’

바로 그 순간, 수많은 인간의 향수 냄새와 지독한 분 냄새 사이로 그 향기가 맡아졌다. 하리드의 심장이 팽창되고 눈이 확장되었다. 선명한 향기, 뚜렷한 내음. 모른 척할 수가 없는 이 유혹.

-두근.

이제는 두려울 정도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다른 것들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체취. 부드러울 것이 분명한 살내음, 달콤하고 쩍 달라붙는 것 같은…… 놈의 냄새. 시선은 먹이를 쫓는 늑대처럼 자연스럽게 그를 향했다. 빛 아래 웃고 있는 그 남자를 항하여.

‘르브리에.’

놈은 곱게도 웃었다. 매끄럽게 넘긴 머리카락은 반듯했고, 가만히 끝이 말린 입술은 온화했다. 뚜렷하게 떴다가도 살짝 내리뜨는 눈꺼풀의 움직임은 나른하고 섹시했으나, 누군가 말을 걸듯 다가오면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확실히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그는 연회에 익숙해 보였다. 숨기는 것에도 능숙해 보였다. 그 누구도 저 미소 아래 어떤 계산과 속셈이 오가는지 모를 것만 같은 두터운 가면이다.

하리드는 속지 않았다. 그 은밀하고 수상했던 연회에서 보여 주었던 르브리에의 모습에는 저런 온화함이 없었다. 온실에서 자라난 화초처럼 순진하고 정결해 보이는 얼굴이 가증스러울 지경이다. 대단했다. 눈치 없고 소문에 어두운 이가 본다면 외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그만큼 때 타지 않은 온유한 신사라고 여길 만큼 능숙하지 않은가.

“…….”

“…….”

그 순간,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아니. 이 연회장에 들어온 이래 놈을 바라본 이후, 그의 시선이 빗겨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바삐 다른 이들에게 오가던 르브리에의 시선이 다시 돌아온 것이 정확하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이 관통당한 듯한 찌릿함이 번져 나갔다.

‘미치겠군.’

쿵. 쿵. 쿵.

그건 기쁨이기도 했고, 절망이기도 했다. 퍼져 나가는 숨길 수 없는 열기에 구두 속에 감춰진 발가락이 따끔거렸다. 마침 그에게 말을 건 어떤 귀부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의 말에 집중하는 인간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매끈한 흰 자기에 물이 맺혀 또르륵 굴러떨어질 듯한 모습이었다. 단 숨이 붉은 입술 사이로 살짝 흘러내릴 때면 배고픈 짐승은 안구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할짝, 흰 치아 사이로 붉은 혀가 빼꼼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감췄다. 웃음을 삼키며 움직이는 목울대가 지나치게 요망했다. 또다시 힐끗 눈이 마주쳤다. 시기를 가늠하는 것처럼 마주친 눈을 빗겨 내며 다시 주변으로 돌린다. 르브리에는 이쪽을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으나 부러 시선을 오래 두지 않는다. 이건 뭔가. 밀고 당기기인가.

“하.”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흐릴 때, 어느 순간 그 인간이 혼자가 되었다. 연회장의 꽃과 같았던 이들도 잠시 홀로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처럼. 놈은 기둥의 뒤 잘 보이지 않는 공간에 숨어들었고, 하리드는 아까부터 서 있던 곳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림자 속, 잠겨 든 인간의 모습을 본다. 그림처럼 우아했던 미소가 점점 사그라지고, 거품 속에 잠겨 있던 것이 슬며시 드러나는 순간을. 인간의 얼굴은 반은 샹들리에의 불빛을. 나머지 절반은 어둠 속에 가려 있었다. 그 모습이 꼭 가려진 진실을 살며시 내민 것 같아 심장이 짜릿했다. 저게 저놈의 본성이다.

‘기억합니까.’

저를 바라보며 달싹이는 입술의 느릿한 움직임을 짐승의 눈은 재빨리 훑었다. 한 자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얇게 점멸했다.

꿈틀거리는 무언가처럼 붉은 혓바닥이 습해 보이는 인간의 입술을 스스로 핥았다. 둥글게 핥으며 입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애탔다.

놈이 웃었다. 사르르 접히는 눈매가 달큼했다.

‘나는 기억하는데.’

모른 척하자 했던 것이 누구였던가? 정말 알 수가 없는 놈이다. 사뭇 짓궂음까지 내포하는 눈빛은 벌을 꾀는 꽃과 같았다. 이리로 오라. 이리로 와, 은밀한 때를 기억하자. 괜스레 손끝이 뜨거워진다.

‘겁 없는 인간이야.’

저놈은 알기나 할까. 자신이 숨죽이고 있는 맹수의 코털을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을. 일순간의 호기심인가, 아니면 은밀하게 무언가를 내포한 협상가인가. 전자도 후자도 짐승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것이었다. 허탈하다. 흔들리는 자신이, 그리고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상황이.

‘다가가도 될까. 저 인간에게 관여해도 될까. 르브리에라는 인간에 대해 궁금해해도 될까.’

낯선 것은 괴롭다. 모든 것을 깨부수고 아무 걱정 없이 뛰던 어릴 적과는 또 다르다. 하리드 브리첼은 수장이었고, 현재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부담으로 얽매여 있는 때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어릴 적에, 조금이라도 더 이른 시기에 저 인간 만났다면 망설임 없이, 재보는 것 없이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리드는 한쪽 입술을 슬며시 비틀었다. 놈의 눈이 커진다. 또렷하게 보이는 농락과 유혹에 마냥 흔들리기에는 그는 이미 지긋한 성인이다. 그리고 저건 풋내기 애송이다. 하리드는 유유히 고개를 돌렸다. 놈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이 피부 위로 느껴졌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르브리에에게서 벗어나자 둘러싸고 주시하는 수많은 시선이 보였다. 그래, 궁금하겠지. 시선들을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는 이들도 있었고 다가오고 싶다는 듯 눈을 빛내며 숨을 크게 마시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저 여자는 황녀인가.’

유독 한 여인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기억에 주의하여 담진 않았지만,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황제가 애지중지하는 인간. 그리고 황제가 곤란한 부탁을 한 대상이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빼어난 미인이었다. 특히, 풍성한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었다.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그들 짐승의 성격상 흰 피부의 미인은 굉장히 흡족한 대상이긴 했다. 오히려 르브리에보다 저쪽에 끌려야 하는 것이 정상으로 보일 만큼, 흔들리는 시선으로 부끄럽다는 듯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풋풋함조차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지.’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와는 다르게 육체의 본능은 다른 쪽에 시선을 둔다.

뚜벅. 발걸음 소리조차 익히고 말았다. 기둥에서 걸어 나와 다가온다. 자존심이 상한 날카로운 놈의 기색이 공기를 찌릿하게 울린다. 놈의 체취, 그 미쳐버리게 만드는 체향이 가까워졌다. 콧속이 괴로워지고 주먹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쥐어진다.

“황녀 전하. 오셨습니까?”

“…르브리에.”

황녀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하리드가 아닌 르브리에였다. 놈의 매끈한 뒷모습만 보였다. 저 여인을 어떤 얼굴을 하고 바라보고 있을까. 황녀의 앞을 반쯤 가리다시피 한 통에 순간 황녀와 마주보던 시선이 뚝 끊겼다. 둘의 사이는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온화한 목소리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르브리에, 내 스승님은 오늘도 무척 바쁘군요. 이곳에서 가장 인기인을 따지자면 분명 당신일 거예요. 어떻게 본받아야 할까요?”

“과분한 말씀이군요. 언제나 감사할 뿐입니다, 고귀하신 전하.”

“후우, 이렇게 능수능란해서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는 거라구요. 르브리에, 이게 마냥 칭찬으로 들리는 거예요? 정말로? 아니면 또 나를 놀리는 건가요?”

“칭찬 아니었습니까? 그럼 그 외의 뭐가 있단 말이지요. 모르겠군요. 되레 전하께서 저를 놀리시는 것 같습니다만.”

“…됐어요. 이 바람둥이. 한 마디도 안 져주죠?”

둘이 서로를 친근하게 바라보며 웃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하리드는 살짝 날카로워져 있는 제 손톱을 심각하게 노려보았다. 이게 왜 튀어나왔지?

‘기분이 더럽군.’

빌어먹게도 짐승의 귀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대화를 잡아채었다. 적당히 듣는 수준이 아니라 한마디 한마디 오갈 때마다 심장에 처박히는 기분이다.

‘황녀와 진심으로 친한가?’

웃음이 살짝 섞인 그 친근한 대화는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면 예상한 대로 숨기고 있는 목적이 있는 건가?’

황녀에게 다가가는 이들이 적은 이유는 그녀의 높은 위치 때문이다. 그런데도 르브리에는 달랐다. 단순히 그가 연회에 익숙한 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리드는 그가 보고받았던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황제의 유일한 스승. 젊은 나이의 고위 귀족이 황녀의 스승이라는 것은…….

짐승의 눈이 비틀렸다.

‘황제는 나와 저놈을 저울질하고 있나. 아니면 다른 의심을 하고 놈을 황녀 곁에 둔 건가.’

뭐든 불쾌했다. 사근사근 이어지는 놈의 목소리가, 더없이 안심된다는 듯 웃으며 바라보는 황녀의 눈동자가. 그리고 짐승은 고뇌하기 시작했다. 저것이 왜 불쾌한지 이해하기 위해서. 단순한 육체의 끌림과 쾌락에 의해 저런 교류조차 불쾌할 만큼 자신은 저 인간이 마음에 든 것인가? 그 밤이 그렇게 좋았나? 어째서?

“페르달 공작과 만나는 건 처음이겠군.”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놀라진 않았다.

“그래. 페르달 공작, 누가 봐도 참으로 잘난 사내라네. 우리 아이와도 잘 어울리겠지.”

아무리 정신을 팔고 있었다고 하나, 인간 특유의 기척을 잡지 못할 리 없었고 상대는 기사도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니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황제였다.

“도드라지긴 하군요.”

“고작 그뿐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저이. 어떻게 보이나?”

황제의 깊은 시선은 제 딸과 그녀의 스승을 향해 있다. 주변에서 그 둘을 바라보며 속닥거리는 귀족들이 다수 있었다.

언제나 무언가를 가늠하고 경계하며 판단하는 이들은 오늘도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누구에게 줄을 대야 하는지를 판가름 중일 것이다. 황제의 얼굴은 딸을 사랑하고 애틋하게 바라보는 아비의 것이 분명했지만, 짐승은 다른 냄새를 맡았다. 우려. 걱정. 질투.

…질투라. 무엇을?

“제게 왜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본능에 밝지 않은가. 특히 그대는.”

“아직도 잘 몰라 헛발질을 할 때가 많습니다. 괜한 의심으로 유능한 자를 잃으실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한가? 흐음.”

황녀와 르브리에의 대화가 보란 듯 이어지는 것이라면, 황제와 하리드의 대화는 조용하고 느릿했다. 하나둘, 이곳으로 향하는 시선들이 늘어난다. 그것이 참 기묘한 대치라고 생각했다. 인간들의 정치놀음에 끼고 싶은 생각은 일절 없었지만 황제와의 대화에 르브리에의 시선이 결국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놈의 깊은 시선은 복잡한 거울 같았다. 불쾌함도 신중함도 호기심도 그리고 조소도 느껴졌다. 저런 놈을 두고 룩센이 뭐라 했던가. 평범하고 흔한 인간일 뿐이라고? 그야말로 우스운 소리다. 오랜만에 짐승들은 헛다리를 짚었다. 운명의 계시자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인간이 숨기고 있는 것, 하리드 브리첼을 평소와 다르게 만드는 것을 알아야 했다. 짐승의 동공이 날카로워지는 순간, 황제의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보게나. 주시하고 있는 인재라네.”

“…….”

인재. 인재라. 그 숨겨진 듯이 참으로 기묘하여 그는 웃었다. 동상이몽의 순간이다.

* * *

이예르라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브리첼 공작이, 그녀의 마음속 그분이 아바마마의 명으로 연회에 참석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보는 것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너무, 너무 좋아. 하지만…….’

언제나 의연하고 대범해야 할 황녀답지 않게 바르르 떨리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을 느꼈고, 누구나 우러러보는 것이 응당 당연했을 황족답지 않은 수치심과 부끄러움도 느꼈다. 그건 공작의 시선이 그녀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속상해. 왜 나를 보지 않는 거예요, 브리첼 공작.’

이예르라는 자신이 황족 특유의 오만한 모습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또한 받들어지는 것이 익숙한 위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심 그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당연히 그가 자신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리라 여겼던 것일까. 자존심이 수그러들고 수치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아름다워…….’

황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경을 치거나 쓴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사그라졌다. 그는 아름다웠다. 이렇게 심장을 터지게 할 만큼, 그의 눈은 매혹적이었다. 아름답고 유혹적인 금색 눈동자.

‘겉모습만 마음에 드신 거 아닐까요?’라고 당돌한 시녀 하나가 그렇게 물었을 때도 이예르라는 깔깔 웃어 버렸다. 혹여 그에게 과한 흠이 있어도 다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좋았다. 미친 것처럼 사랑했다.

금세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 너무나 안타까워 한숨이 나왔다. 달려가 나를 보라고, 손을 뻗어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다가오지 않는 이에게 먼저 다가가 말문을 여는 것이 우아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하고 싶다.

‘브리첼 공작.’

이예르라는 너무나, 너무나 오래 그를 그리워했다. 콩닥거리는 심장에 작은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그 순간, 언제나 저 남자는 강인했다. 그래서 한순간에 매료당했고 지금까지 이 연정을 키워 온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두려움과 동시에 흥분으로 뜨거워지는 피를 느끼며 이예르라 황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참을 수 없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의 시선을……!

달콤한 향수의 향기와 함께 눈앞에 화려한 상의가 끼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눈앞을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짐승 같은 짙은 수컷의 향을 풍기는 남자가 사라지고, 화려한 이목구비의 미남이 끼어들었다.

“르브리에?”

언제나와 같이 우아하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스승.

별다를 것 없는 그였으나, 왜였을까. 그 순간 그의 뒤에 진 밝은 샹들리에로 인한 그림자 때문이었을까. 올려다본 스승의 매끄러운 얼굴이 순간 어둡게 보였다. 항상 웃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기묘한 착각도 들었다.

‘뭐지? 잘못 봤나?’

눈을 깜빡이는 순간 이예르라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 완벽히 돌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모든 것이 순간의 착시라고 여겼다. 긴장과 흥분으로 떨리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찾고, 후들거리며 떨리던 다리가 대지 위에 굳건히 섰다.

“르브리에.”

“황녀 전하, 오셨습니까?”

의도적이지 않은 행동이었겠지만, 스승의 등장으로 인해 가려진 시야가 안타까웠다. 조금은 초조함을 담아 눈을 깜빡였지만, 곧 아바마마의 등장에 안심이 되었다. 브리첼 공작이 평소처럼 훌쩍 연회장을 떠나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다가가야 그의 마음에 자취를 남기게 될까?

그저 흔한 영애들처럼 잊히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리드 브리첼이라는 남자에게 이예르라라는 여자를 심어 줄 수 있게 될까? 적어도 타인처럼 눈인사만 하는 관계는 되고 싶지 않았다. 정략결혼으로 그를 삭막하게 묶어 두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열망하기를, 이 타는 시선으로 함께 보아주기를 바랐다.

‘아파. 가슴이 너무 아파. 사랑해요, 브리첼 공작. 당신을 사랑해요.’

어리고 초조하며 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눈빛은 좋지 못하리라. 아직 그녀의 일방적인 마음일 뿐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또 오리라.

이예르라가 아무리 순진한 온실 속 화초처럼 컸다고는 하나 그녀는 결국 황족이었다. 눈을 깊게 내리뜨고, 한숨과 함께 웃음을 되찾으며 눈앞의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온화한 눈빛. 언제나 함께해 줄 그녀의 편. 이예르라의 눈동자 한가득 굳건한 신뢰가 가득 차올랐다.

“르브리에, 내 스승님은 오늘도 무척 바쁘군요. 이곳에서 가장 인기인을 따지자면 분명 당신일 거예요. 어떻게 본받아야 할까요?”

“과분한 말씀이군요. 언제나 감사할 뿐입니다, 고귀하신 전하.”

“후우, 이렇게 능수능란해서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는 거라구요. 르브리에, 이게 마냥 칭찬으로 들리는 거예요? 정말로? 아니면 또 나를 놀리는 건가요?”

“칭찬 아니었습니까? 그럼 그 외의 뭐가 있단 말이지요. 모르겠군요. 되레 전하께서 저를 놀리시는 것 같습니다만.”

“…됐어요. 이 바람둥이. 한 마디도 안 져주죠?”

신비할 정도로 눈앞의 스승이 편했다. 스승은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를 이제는 안다. 모든 사교계의 귀족들이 제 스승을 환영하며 반기는 것은 단순히 그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예르라는 모두의 집중을 받는 수려한 스승이 오직 황녀인 그녀에게만 더욱더 친숙하고 친근하게 대해 준다는 것에 은밀한 우월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 이쪽을 보, 보셨어.’

그 순간, 하리드 브리첼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에게 향했었음을 그녀는 알아챘다. 어쩌면 어디가나 시선을 집중시키는 스승에게 시선을 향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살포시 찌푸려지는 브리첼 공작의 미간마저도 아름답고 그윽했다. 허물없이 웃어 보이려다 황녀는 눈을 깜빡였다.

왜 저런 표정이실까? 설마 르브리에와 자신의 대화가 마음에 안 들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혹시 브리첼 공작도 자신을 마음에 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같은 사내가 대화하는 것이 혹여라도…….

생각이 마구잡이로 뻗어 나가려 했을 때였다.

“이런, 전하.”

“으응?”

톡, 하고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손끝이 그녀의 손 등을 두드렸다. 친밀하지만 또한 무례하지 않은 정도의 접촉이었다. 깜빡이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비스듬히 팔짱을 끼고 있는 르브리에가 보였다.

“얼굴을 숨기셔야지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사정을 모르는 이도 다 알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좋지 않지요.”

“헉. 그, 그래요? 정말? 내가 그랬어요?”

“후후, 귀여우신 분. 그래도 어느 정도 감정을 속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무릇 사랑이란 먼저 고백하는 자가 곤란해지는 법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당신께서는 이 황궁에 단 한 분밖에 없는 고귀한 황녀 전하가 아니십니까. 꽃을 바치기보다는 받으십시오.”

잠시 불만이 솟구쳤다. 그게 무슨 상관일까.

“난 누가 먼저든 상관없어요. 이게 이상한 걸까요?”

“전하, 오늘은 탐색전으로 해 두시지요.”

“난요. 기뻐 죽을 것 같아요. 브리첼 공작이 떠나지 않고 이곳에 있다니. 너무 쉬운가요?”

“순수한 기쁨은 보기 좋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이상하지 않지요.”

“정말, 정말로요. 죽을 것 같이 기뻐요…….”

저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자존심 따위 모두 팽개치고 발치에 엎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지 말고, 나를 보아 달라고. 내 이름을 다정하고 달콤하게 불러준다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을 것이라고. 부디 나만의 기사님이 되어 나의 남편이 되어 달라, 이예르라는 간절하도록 그리 청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저 과묵하고 고귀한 수컷을 제 사람으로 삼는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하리라.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은가. 저 사람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그러나 그 순간 르브리에의 만류하는 시선과 동시에 그의 뒤로 보이는 아바마마와 시선이 마주했다. 그녀의 부친은 무척이나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질책하고 있었다. 속을 내보이는 딸의 철없음을 찌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밖의 다른 것을 질책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예르라는 눈매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께서, 으음, 내가 역시 잘못한 걸까요…?”

“이런, 제 총명한 제자가 어떤 잘못을 할 리가 없지요.”

“아아. 그와 이야기하고 싶어요.”

“공작은 폐하와 대화 중으로 보입니다. 쉽사리 곁을 주기 힘든 분위기인데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많은 레이디가 그에게 춤을 청할 거예요. 수많은 사람이 그가 춤 신청을 받길 원하겠죠. 거부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그 모습을 보기 싫으십니까?”

“…싫어요. 너무, 싫어.”

그녀는 질투라는 걸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다 가졌으니까. 원하기만 하면 추함을 내보이지 않아도 다 손아귀에 잡혔기 때문이다. 사람도 드레스도 친구도 재물도 보석도. 그러나 이제 이예르라는 그 감정을 알았다.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은 기분을 알았다.

브리첼 공작이 제 앞에서 다른 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고, 춤을 춘다면. 상상하기만 해도 전해지는 모멸감과 절망감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전하.”

“르브리에.”

희게 변하는 제 손등을 바라보자 부드러운 손길이 손을 감싸 쥐듯 들어 올렸다. 웃고 있는 스승의 얼굴을 마주치자 시근덕거리며 솟아오르던 감정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런 얼굴 하지 마시지요. 혹여라도 벽의 꽃이 되시지 않도록 제가 헌신할 생각이니까요.”

“역시 내 스승은 바람둥이였군요. 됐어요. 브리첼 공작을 놓친다 하여 벽의 꽃이 되진 않아요.”

“그럼 제가 벽의 꽃이 되지 않게 도와주시는 것으로 하지요.”

“어마, 그건 하늘이 무너질 만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잖아요.”

그 허물없는 농담에 딱딱하게 굳어졌던 어깨가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

다시금 금색의 시선이 이쪽에 닿았다. 그러나 그토록 원하던 시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심장이 조금씩 차게 가라앉았다. 마치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아둔한 이성은 알아차리지 못한 일을 알아챈 본능이 비명을 질렀으나, 이때의 이예르라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뜨거운 시선이 닿는 것이 르브리에의 손을 맞잡은 제 손일 것이라고 그렇게 간절히 믿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몰랐다. 그 질투의 끝이 누구에게 향한 것이었는지를, 말이다.

* * *

야살스러운 눈꺼풀이었다. 깊고 풍성한 투명한 속눈썹 아래,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사파이어 조각이 화려하게 빛났다. 심해의 산호초처럼 영롱하게 빛났다가도 아스라이 풀어지는 연기처럼 몽롱하게 변하는 눈빛은 사람을 애타게 만든다. 손에 쥐는 순간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안타까움을 느껴 정신없이 뒤를 쫓는다. 그런 시선이었다.

나를 바라봐. 나만, 오로지 나만.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다. 탐하고 싶어? 그리 묻는 얼굴이다. 달콤한 꿀을 거절할 나비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것도 흥미가 있다면 더더욱.

‘아주 대놓고, 도발하는군.’

상대인 짐승은 저 눈빛이 얼마나 더욱 야살스럽게 풀어질 수 있는지 겪은 자였다. 달큼하게 뿜어지던 숨결이 얼마나 축축해질 수 있는지, 부드럽고 온화할 듯 보이기만 하는 저 얼굴이 얼마나 달빛 아래 요사스럽게 변모할 수 있는지. 가지런한 치아는 곱고 단단했고, 틀어쥐는 손가락은 차고 아팠다.

주시하고 있던 시선들이 자신들이 바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 시시하다는 듯이 흐트러졌다. 황제는 온화하게 웃었고, 그런 그의 시선을 따라 황녀와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폐하, 인재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렇네. 역시 자네는 잘 아는군.”

“말씀하신 건 둘 중 어떤 의미입니까?”

“그건 왜 묻는가?”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방향에 따라 제가 걸어가야 할 길도 달라질 테니.”

“흐음, 맞네. 하지만 아직 가늠하는 중이네. 확신할 수가 없군.”

“그럼 묻겠습니다. 제게 주셨던 제안, 저 말고 다른 선택지는 혹여 저 사람입니까?”

황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무언가를 속삭이는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 웃어 보이는 아름다운 여자. 확실히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게 중요한가?”

“궁금증일 뿐입니다.”

황제가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가느다랗게 뜬 눈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게 했으나, 몇 년을 보아 온 짐승은 그 날숨에서 불쾌를 읽었다.

‘웃기는군. 짐승에게 내보내려는 제 딸은 괜찮고, 오히려 같은 인간에게 보내는 것은 꺼린다.’

그르렁. 만약 저택에 홀로 있는 순간이었다면 정중한 브리첼 공작의 가면 따위는 벗어던진 채 통렬히 비웃었을 것이다.

황제여. 그대의 욕심을 보라. 이곳 가득한 저 인간들을 보라. 저 탐욕들을, 저 끈적거리는 시선과 욕심들을. 이 연회장에 화려한 음악을 타고 흐르는 것은 달콤한 공기가 아니라 저열하고 지저분한 욕망뿐이로구나!

황제는 드디어 생각을 마쳤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선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의 뒷모습에 둔 채로.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네. 물론 그도 나쁘진 않지. 황녀도 다른 누구보다 친근감을 느끼는 중이니까. 하나, 경에게 한 제안은 거두지 않았으니 단정하진 말아 주게.”

“일말의 가능성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허어, 오늘따라 공작답지 않게 집요하구먼. 혹시 그대는 저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모두가 저이를 좋아하지 않나.”

“…….”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의식 속 울타리에 감춰진 본능이라는 짐승이 끌끌 웃었다. 지독하게 마음에 들어 문제가 아니겠는가? 잘근잘근, 머리부터 발끝까지 맛보고 싶지 않은 곳이 없도록 말이다.

“그대가 처세술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네만. 그래도 사교계에서 전쟁터의 기사들처럼 굴었다가는 꽤 난감할 걸세. 명심했으면 좋겠군. 그대가 귀족들 사이에서 꺼려진다면 그것 또한 곤란한 일이 될 거야. 브리첼가는 언제나 황제의 힘이며 검이어야 하네. 흠 없는 고결한 검 말이네.”

“예, 압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허허, 아니야, 아니야. 알아서 잘하겠지.”

사실 그는 불쾌했다. 그래, 인정하자. 욕지기가 솟구칠 정도로 이 상황이 짜증났다. 끽끽거리는 쥐새끼들이 발끝을 지나다니는 기분이다. 이건 꿋꿋하게 잡히지 않았던 동족 범죄자들을 잡아 처넣기 위해 추격하던 때의 기분과도 비슷했다.

‘결혼?’

감정적으로 복잡한 건 싫다. 하지만 심장은 감정을 토했다.

‘저 여자와 결혼. 르브리에 저놈과 황녀의 결혼.’

짐승은 단순했다. 시기와 질투 이따위 것들 역시 짐승이 가질 만한 것이 아니다. 진 자는 분노하고 승리한 자는 기뻐한다. 침범의 욕구를 품은 자는 욕망하고, 침범당한 자는 분노한다. 오로지 그것뿐이다.

‘불쾌하군. 그래, 불쾌해.’

흰 손가락. 여유롭게 황녀의 손을 받쳐 들었다가, 그녀의 손가락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터치하고 물러난다. 치고 빠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러고는 제 손가락에 달라붙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기라도 하듯, 아주 은밀한 부위들을 매만졌다. 가지런히 정리된 손톱의 반질거림이 유독 도드라졌다. 그 나뭇가지처럼 유려한 손가락들이 의도적으로 옷소매에 감춰져 있을 제 손목의 손을 매만진다. 당장에라도 아찔하게 파고 들어갈 것처럼.

그건 때로는 나풀거리며 움직이는 붉은 제 입술로 향했다가 도톰한 살점을 꾹 눌렀고, 뜨끈하며 감미로울 것이 분명한 두피 속으로 들어가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목이 마른 듯 일렁거리는 불룩 튀어나온 목울대를 스치듯 흘러 내려가기도 했고, 단단하게 솟아 있을 가슴팍을 따라 흘러내려 앞가슴 주머니에 담겨 있는 조화를 매만지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손가락들은 스스로의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에 닿았다. 인간의 모든 움직임이 짐승을 들썩이게 만든다.

‘제기랄.’

손을 얹는 듯 움직이며 그러쥐듯 움켜쥔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야했다.

짐승은 입맛을 다셨다. 안구가 뜨거워진다. 옆에 서 있던 황제가 어느새 물러갔음에도, 황녀가 우물쭈물하며 다가오려다가 어떤 기사의 손을 잡고 춤을 추러 나갔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 끈끈하게 닿아 오는 저를 향한 시선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하리드 브리첼의 시선은 사로잡힌 것처럼 움직이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저 인간이 무엇이길래, 이 지경이지.’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일어서며 뭉쳤다. 욕망을 참기 위해서였다. 턱관절이 단단하게 뭉치니, 제게 다가오려던 이들이 일순간 모두 멀어진 것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알겠다. 표정이 꽤 험악할 것이다.

브리첼 공작의 매너는 아주 개 같았다고, 그런 소문이 돌지 않을까.

‘이건 뭐 하자는 수작이야.’

놈의 손가락이 스스로의 육체에 닿는 곳곳. 그것의 의미.

모를 수가 없었다. 그건 모두 간밤에 하리드 브리첼이 게걸스럽게 핥았던 곳이다. 탐했던 곳이다.

유려한 눈매가 완연히 하리드 브리첼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웃는다. 아주 화려하고, 퇴폐적인 웃음이었다. 영롱한 흰색 장미보다는 매혹적인 향을 풍기는 붉은 장미. 도발적으로 황녀의 곁에 치근거리며 시선을 잡아끌어 분노를 촉발시키는 제 촉매.

더 웃긴 것은 따로 있었다. 놈의 저 가벼운 수작. 속이 내보이는 손가락질에 아슬아슬하게 들끓어 오르게 된 자신의 상태였다.

화가 났다. 본능이 허기를 비명처럼 외친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장 탐하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아주 뜨겁게.

까맣기만 한 밤하늘, 푸르게 빛날 달이 그날따라 유독 요사스러운 붉은빛을 머금은 듯도 했다. 아주 멀리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처연한 하울링이 들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 * *

파르르. 노파의 주름진 눈꺼풀에 경련이 일었다. 굳건히 감긴 눈꺼풀 속의 안구가 어떤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는지 모두 알 수 있을 만큼. 싸하게 퍼지는 향내 사이로 노파를 시중들고 있었던 젊은 여자의 얼굴 위로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예언자는 많이 약해졌다. 보아서는 안 될 미래를 보는 바람에 길지 않은 수명이 반절이나 깎여 나간 탓이다. 그 순간이었다.

“커흑!”

“예언가님!”

순간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던 노파가 붉은 피를 토했다. 끝없이 나올 듯한 그 붉은 액체에 젊은 여자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지나갔다.

강인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수장조차 종족의 멸망시에 그토록 사색이 되었는데, 이 와중 앞길을 밝히는 예언가마저 읽는다면 종족의 앞날이 어찌 되겠는가?

“예언가님! 괜, 괜찮으십니까?”

“…발이 빠른 자를.”

“네?”

희게 변한 안구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맹인의 시선 속에는 무엇이 비추고 있는 것일지. 주름진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며 음색을 흘린다.

“발이 빠른 자를 데려와라. 지금 당장.”

* * *

누군가 보았다면 그 둘이 우연히 같은 곳을 걸어가는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 앞선 자는 돌아보지 않았고, 뒤에 선 자는 따르지 않았으니. 복도는 넓었고 황궁의 방은 많았다.

“…….”

“…….”

소리가 멀어진다. 누군가의 웃음소리, 음악 소리.

선명한 것은 오로지 그의 앞에서 걸어가는 타인의 발소리. 익숙하다는 양 미로처럼 복잡하고 고요한 길을 지나 몇 번의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을 들으며 하리드 브리첼은 생각에 빠진다. 왜, 당연하다는 듯 저자를 따라가고 있는지를.

누구도 약속하지 않았다. 시선 한번, 흘낏. 물 흐르듯이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남자를 홀연히 뒤따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으나 정신을 차리니 연회장과 멀어지고 있었다. 꼭 홀린 것 같다.

동그란 뒤통수가 참 예쁘기도 하다는 헛생각을 할 때였다.

“여기가 딱 적당하지요. 조용하고 인적도 거의 없습니다. 눈에 띄지 않거든요.”

르브리에가 드디어 멈춰 서며 말했다. 천천히 돌아보는 자의 눈높이가 자신과 똑같다.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리드 역시 그 이상한 분위기에 심취한 듯 툭 던졌다.

“페르달, 넌 황궁을 꼭 제집처럼 말하는군.”

잠시 멈칫했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상할 게 있습니까. 자주 와 봐서 그렇지요. 황궁은 외부인에게도 개방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지요.”

“이런 깊은 곳까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시시콜콜 사정을 다 말해야 하나요?”

“…그래, 꼭 그렇진 않지.”

복도의 끝, 검은색의 문이 그들을 반겼다.

“자, 브리첼 공작. 들어갈까요.”

손을 뻗자 황궁의 것 같지 않은 기름칠 되지 않은 소리가 끼이익 울렸다. 스산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문을 열자 보이는 광경은 나쁘지 않았다. 두껍게 쳐진 커튼 사이로 흐리게 비추는 푸른 달빛. 침대의 반투명한 천개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

“…….”

시선이 마주쳤다. 손가락이 움칫한다. 공기가 서서히 끈적해지는 기분이다. 혀로 보란 듯이 입술을 스윽 훑는 움직임은 의도적인 건가, 아니면 요망한 습관인 건가.

“재밌네요.”

“무엇이?”

르브리에의 두 눈이 마음껏 휘어지고, 녹아드는 듯한 말투가 나긋하게 울렸다. 연회장에서의 페르달 공작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달랐다.

“당신이 초대에 응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뭐, 끝의 끝까지 도망가지 않는군요. 역시 대범하신 기사님.”

“내가 네 무엇이 무서울까.”

담담하게 대꾸하자, 르브리에의 미소가 비틀렸다.

“뭐, 그도 그렇군요. 무서울 건 없지요. 밤에 일어나는 열정적인 일이 으레 다 그러니까요.”

“…….”

“누군가에게는 추태이고, 누군가에게는 비밀로 해야 할 아주 은밀한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순간을 상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브리첼, 당신답지 않게 겁먹고 피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당신이 날 피하길 바랐을지도 모르고요.”

“아. 취향이 최악이로군.”

“당신이나 나나.”

두근, 심장이 뛰었다. 두근, 혈관이 맥동한다. 달빛 아래 흔들리는 흰 손가락을 거세게 빨고 싶어서 입 안이 쩍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싶은 욕구를 내리누르고 지껄이는 말들은 기억에 남지도 않았다. 샛노란 눈동자 위로 금색의 동공이 짐승으로 변모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리드는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 저 살내음. 달콤하고 싱그러운 그의 냄새. 야스럽게 휘어지는 눈매부터 흔들리는 목젖까지. 완벽했다. 오로지 그의 존재가 그들을 미치게 하는 달빛과 닮았다.

“나는 시간이 많아서 말입니다. 본의 아니게 후끈한 밤을 보낸 상대가 조금 궁금해져서 말이지요. 우리가 참 내밀한 관계를 맺었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의 보지 말아야 할 곳을 마구 보고, 매만졌고, 당신 또한 내 내밀하고 은밀한 것을 마구 쓸어내리고 빨았지요.”

“……부러 그렇게 말하는 건가?”

“왜요. 수치스러웠어요?”

적나라한 말을 내뱉으며 심술궂게 웃는 모습조차 고아하다. 그러면서도 힐끗 바라보는 눈매에는 연신 상대를 가늠하는 빛이 숨어 있었다. 어떤 반응을 내보이는지에 따라 자신 또한 카멜레온처럼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서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안 될 자였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아, 별거 없는 결론이었습니다. 궁금해졌으니 열심히 정보력을 동원해 찾아봤지요. 귀족다운 은밀한 노력을 했다, 이 말씀.”

네 뒷조사를 해 봤다, 이 말이었다. 이 무슨 대범함인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면서도 더 해 보라는 듯 바라보자 상대는 씩 웃는다. 아니, 꼭 애교라도 부리는 짐승처럼 다 큰 수컷이 살금살금 내보이는 미소가 무척이나 달콤해 보여 어이가 없었다.

“쓸모 있는 게 좀 나왔나?”

“정말 아쉽게도 알려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그래?”

“예. 브리첼가. 본래 이름은 오래된 명문가였지만, 수도의 권세에는 잘 참여하지 않던 가문. 그런데 한 남자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하리드 브리첼. 젊은 수장. 검사.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하여 황제의 위신을 쌓고, 전쟁터를 휩쓴 제국의 검…….”

“거참, 흔하군.”

“네. 그래요, 흔하죠. 하지만 재미있지 않습니까? 잘 살펴보면 여기에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있어야 할 것.

하리드 브리첼은 이때가 되어서는 조금 웃고 말았다. 이제 확신한다. 그날 밤 자신을 몰아세웠던 저 인간의 어처구니없음도 물론이거니와, 이 현실 자체도. 짐승의 살기의 앞에서도 제 할 말을 마음껏 늘어놓는 저 인간은 천하의 둔한 놈이거나 아니면… 대단한 무언가라는 것을.

“그게 뭐지?”

르브리에가 조용히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달빛 아래 환히 드러나는 목울대, 목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음미하듯 하리드는 눈을 감았다.

“당신은 과거가 없습니다, 브리첼 공작.”

하리드 브리첼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런 자들은 많지. 흔한 용병의 과거조차 베일에 감싸여 있는 경우가 태반인 것을. 그게 무슨 문제가 되지?”

“왜 문제가 없습니까. 무서운 일이지요. 이 꼼꼼하고 사악한 귀족들이 과거가 없는 자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름 끼칩니까. 무엇보다 저 간교한 황제 폐하께서 그런 당신을 곁에 꼭 붙잡고 있다는 것이 가장 놀라운 기적이지요.”

“…….”

“자아, 여기서 생각을 해 봐야 했습니다. 아주 열심히 말이에요. 과연 우리의 능구렁이 같은 폐하께서는 이 남자의 실력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놈이 걸어온다. 하리드는 깨달았다. 그의 기척이 아주 미묘하게 신묘하다는 것을. 독특할 것 없는 듯했지만 자세히 주의를 기울이면, 분명 보통 사람의 기척과는 기이하게 달랐다.

“내밀한 무언가를 확실히 쥐고 있는 것일까.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자라면 모두 후자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요, 그겁니다. 비밀. 비밀이 가장 중요하지요.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역시 악취미야.”

“네, 악취미죠. 발기할 것 같았거든요. 목줄 매인 강직한 기사님이라, 이 얼마나 퇴폐적입니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 되었어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궁금해서 서성거렸죠. 알고 싶구나. 갖고 싶구나. 그 비밀.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시선은 아름다운 별빛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요사스럽게 빛나는 사악한 뱀의 독니 같다. 심중을 숨기고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조용히 몸을 웅크리며 튀어 나갈 준비를 하는, 위험한 놈이다. 짐승의 본능은 비슷한 것을 확연히 알아보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가르쳐줄 리 없는 비밀이겠지.”

“아아. 어떤 만족스러운 헌납이 따르더라도 말입니까?”

“…….”

뻗어 오는 르브리에의 손을 본다. 가느다랗고 흰, 처음 본 순간부터 다르지 않은 그 고운 손을.

“왜 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요? 당신도 나에 대해 알아봤을 것 아닙니까.”

하리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봤다. 그리고 궁금해졌지.”

“먼저, 나에 대한 감상은?”

“넌 안개같이 모호하더군.”

“어떤 부분이?”

“지나치게 확고한 부분이.”

그가 빙긋 웃는다. 그게 바로 정답이라는 듯. 무지하지 않아 기쁘다는 듯. 오만한 미소며 칭찬이었지만, 하리드는 턱을 매만지며 그 모습조차 달게 관찰했다.

하리드는 탐닉하듯 읽었다.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이라는 인간이 보내 온 것으로 추측되는 삶을, 남겨진 정보를. 그 이후에 남은 것은 무척이나 선명한 껄끄러움이다. 이게 정말 르브리에의 삶이 맞나?

“나와는 달리, 너의 과거는 너무 잘 짜 맞추어져 있었다. 틀리나?”

“…호오.”

“꼭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처럼 말이야. 아주 예쁘게 빚어진 도자기 같은 삶이더군. 완벽하고 모난 것 없는 꽉 조여진 퍼즐같이 말이야.”

“잘난 삶에 대한 질투인가요?”

“아니. 그건 지나친 강박에 가까운 완벽이었다.”

부러 넘어간 사실일지, 아니면 기록된 서류의 삶을 지닌 인간이 그가 아니길 바랐던 것인지 모르겠다.

예언가의 음습한 목소리는 속삭였다. 죽이셔야 합니다. 그 인간을 죽이셔야 저희의 미래가 바로 섭니다. 노파가 눈앞에 있다면 묻고 싶었다. 정말 그러한가, 이시르? 예언가여. 멸망이라는 것이 단순히 한 인간의 목숨을 끊어 피해질 수 있는 것이었던가? 예언가여. 감히 너는 내게 무엇을 숨겼는가?

“완벽함이 잘못은 아니지요. 저는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고, 또 평범하게 잘나게 자라 이곳에 서 있습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공작이 되어 헛소문이 많이 따라붙긴 했습니다만, 그거야 브리첼 당신도 겪은 일일 테고.”

서로의 눈이 가늘어져 경계한다. 번들거리는 그 시선 속에는 상대에 대한 호기심, 경계, 그리고 끈적이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이상한 건 오히려 당신이었죠.”

“뭐가.”

“당신은 정말 이상합니다. 이상함을 옮아 온 것인지 나까지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지요. 당신이 쉽지 않다는 것, 위험하다는 것. 무언가 숨기고 있고, 그게 황제가 안심할 정도의 것이라는 점. 황제가 엎드리라면 어쩌면 내게 했던 것처럼 그 내밀하고 쫄깃한 속살을 내보일 만큼 충직한 황제의 개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황제는 내 취향이 아닌데.”

“하하. 그 인간 취향이 고약하긴 하지요.”

욕망이 이성을 짓뭉개는 순간을 하리드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리 호승심에 미쳐 날뛰어도 영악한 짐승은 항상 뒷일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만 미쳐 날뛰었으며 언제든 다시 돌아올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본능에 지배된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내던지지는 않는 선에서 행했다. 그것이 미치지 않아야 할 수장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저자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

“어쨌든 당신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묘하게 궁금하더란 말이지요. 자꾸만 생각이 날 만큼.”

룩센의 조언이 백번 옳았다. 가까이해서는 안 되며 관심 갖지 말아야 할 인간이었다. 하물며 이러한 접촉은.

“지금도 그래요. 상대에 대한 똑같은 의구심을 품었을 당신. 날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는 건 같은 뜻이라 봐야 하는 겁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뭐긴요. 난 당신이 궁금했다니까요.”

…이런 둘만의 고요는 옳지 않았다.

뚫어져라 바라보니, 르브리에가 사악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저주를 속삭이는 마녀처럼 은밀하게 조곤거렸다.

“고귀한 기사님의 그날 밤, 은밀하고 짜릿했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 거 아닙니까? 아래가 근질거리던가요. 내 손가락을 야무지게 물고 당기던 그곳이 간지러웠던 것 아닙니까? 아아, 정숙하고 정갈한 그 연회복 아래에 그렇게 생기 넘치는 육체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그곳의 그 누구도 몰랐다는 게 아쉬운 일입니다.”

“…넌 여전히 입만 살았군. 그 마구 지껄이는 말들 속에 진심이 있긴 한가?”

“왜요. 어디서 거짓말이야, 브리첼. 당신도 부정하지 못할 텐데요.”

어둠 속에서 놈의 눈빛만 형형하게 빛났다. 달뜬 호흡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미끈해서 티 없이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우유의 표면을 연상케 했다. 손을 뻗어 뺨을 매만지자 야릇한 숨을 흘린다.

“내가 궁금했잖아요, 당신.”

흰 손이 제 뺨 위에 놓인 하리드의 손을 움켜잡았다.

“고귀한 기사님. 연회장에서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타올랐잖아요.”

아니, 그 표현은 틀리다. 넝쿨이 단단한 기둥을 타고 오르듯 옭아매었다고 봐야 옳았다. 스치듯, 다시는 놓지 않게 가두어 버리듯, 차가운 체온이 피부 사이로 스며들었다. 놈은 여전히 찼고, 여전히 야했다.

“우리가 동시에 같은 것을 떠올렸다는 것. 뜨겁고, 질척하고, 갈증을 부추기는 그 순간을 그렸다는 것.”

인간의 단단한 무릎이 뜨거워진 허벅지 사이로 은밀하게 파고들었다. 섬유가 스치는 소리가 야했다. 파고드는 뱀처럼 느릿한 움직임으로 아까부터 자극받은 곳을 누르는 행동에 갈비뼈가 팽창했다. 르브리에는 그 반응을 직시하며 기쁘게 웃었다.

“부정할 수 있습니까? 바지 아래, 여기를 이렇게 키우고서?”

역시 요망한. 말은 튀어나오지 못했다. 내뱉은 것은 신음이었다.

“윽!”

“아아, 아주 뜨겁군요.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있었던 거야.”

달큼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놈의 머리카락이 바짝 닿아 뺨에 부딪힐 정도였다. 귓가의 솜털이 바짝 서고,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귓속에 박아 넣는다.

“윽, 너. 예의가, 없어.”

“궁금해지네요.”

“뭐, 가 말이지?”

차가운 손가락이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하리드의 단단하게 팽창한 가슴팍 위를 어루만졌다. 스치듯이 옷자락 위에 무언가를 펴 바르듯 율동하다가, 옷자락 안에 감추어질 어딘가를 가늠하듯 손가락으로 빙글 원을 그렸다.

“으음…….”

“이곳을 아프게, 이로 깨물었죠.”

“아.”

“섰나요? 아니면 간지러운가.”

만져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영락없이 단단해진 무언가가 당장에라도 빨리고 싶다는 듯 지끈한 울림을 퍼뜨렸다.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 감각이 더없이 생소했다. 가슴의 여린 살을 마음껏 빨리고, 만져지고 싶은 욕구라니. 엉덩이 깊은 곳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당혹감도 심장 어림을 파고들었다.

“하아, 이런. 기사님, 그런 얼굴을 해 보이면 어떡합니까. 자꾸 호기심을 자극하지 말아요.”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놈이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아니, 미려하게도 웃었다. 하리드 브리첼은 순간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그 눈동자만을 바라봤던 것도 같다. 하늘하늘. 흩날리는 결 좋은 회색 머리카락을 손아귀에 쥐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인간은 입술도 고왔다. 숨결도 달다. 처음 보았던 그날보다도 더더욱, 배고픈 짐승은 미약에 미혹된 어리석은 것처럼 안달이 나 있었다. 꼬리라도 불쑥 튀어나왔다면 엉덩이를 들썩이며 재촉했을 것 같다.

무엇을?

“여기 말이에요.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됐습니까.”

“으윽!”

꽈악, 무릎으로 은근하게 누르는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당장에라도 바지를 뚫고 솟구치고 싶다는 살덩이의 욕구에 허리를 꺾으며 순종하고 싶어진다. 눈앞에서 요망하게 움찔거리는 붉은색의 입술을 꽉 물어뜯으면 얼마나 달콤할 것인가.

“으응? 말해 봐요. 어서.”

“아, 너, 당장 치…”

“치우라는 게 아니겠죠. 만져지고 싶은 거잖아요?”

“허억…….”

동공이 쭉 갈라지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흉포함을 머금었다. 그러나 겁 없는 인간은 제 여린 목덜미의 살을 내보이며 오히려 그 달큼한 향취를 진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연회장에서 날 봤을 때부터 이랬습니까? 아아, 제기랄. 고고한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렇게 팽창한 물건을 숨기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당신, 너무 음란하잖습니까? 곤란한데. 이렇게 취향을 저격하면 어떡합니까?”

“빌어먹을, 그러는 너는.”

지끈. 보란 듯이 부피를 부풀기 시작하는 짐승의 것을 문지르는 요망한 움직임을 막으며, 손아귀에 담긴 인간의 유려한 허벅지를 터뜨릴 듯이 꽉 부여잡았다.

“네 이곳은, 페르달.”

힘 있는 말의 근육처럼 단단하고 오밀조밀하다. 그러나 놈은 그것조차 아름다웠다. 튀어나온 목소리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휘몰아치는 정념, 열정, 그리고 욕구.

“하아. 기사님의 손은 야하기도 하지…….”

“그놈의 입과는 달리 살갗이 요동치는데.”

“당신의 좆만큼 할까요. ……으음.”

바짝 들이대며 압박하는 인간의 눈동자 역시 제가 지닌 감정과 다르지 않아, 기꺼웠다. 날카로워진 이를 탱탱한 살갗에 박아 넣고 싶은 감정을 느끼며 하리드는 입술을 끌어당기며 웃었다. 아니 웃었다고 생각했다.

“네 좆은 다른가?”

“흐응, 궁금하면 만져 보던가……. 그래도 발정 나서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기사님과는 달리 나는 정숙하지요. 참는 것도 잘한답니다.”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웃기는군요. 보지도 않고 왜 자신합니까?”

“그런 것치고는…….”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제 바로 앞에 있는 놈의 뺨을 보았다. 머리카락을 들췄고, 그리고 숨겨진 귓불을 바라본다. 동그란 형태를 지닌 그것은 인간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티끌 없이 아름다웠다. 희고 선명한, 지나치게 도톰하지도 얇지도 않은 그것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신다.

“너도 내게 안달이 난 것 같아서.”

“으음……!”

그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바로 끌어당겨 그 고운 귓불을 집어삼켰다. 입 안에 넣고 빠는 그 말랑한 살이 너무 달았다.

“으……아!”

추읍, 추읍. 끈적하게 살점이 빨리는 소리가 울렸다. 마구 씹었다.

“아, 제기랄, 비겁…… 약, 한 곳을…….”

닥쳐. 그 입 좀 제발.

고귀한 귀족 도련님은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브리첼 공작은 원래 무뢰배였다. 약탈자였고, 파괴자다.

어쩌면 단순한 흥미로, 한순간의 유희로 다가왔을지도 모르는 젊은 귀족이 맛있어 보이는 순간 그들의 위험한 줄타기는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배고픈 짐승은 만족을 몰랐고 처음부터 깨닫지 않고자 하였던 그 욕망을 눈뜨게 만든 것 역시 눈앞의 겁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책임을 져줘야지. 이 불씨에 대한 책임을.

“하, 하읏……!”

놈의 신음은 달았다. 제 가랑이를 잔인하게도 파고들어 내리누르고 있던 동그란 무릎을 옆으로 치워 버리며, 하리드는 손을 불쑥 뻗었다. 그날 밤. 놈의 차가운 손이 제 바지 속을 파고들었듯이 그 역시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위치일 뿐이다.

속옷 속까지 단박에 집어넣은 거칠고 커다란 손은 한 번에 목표를 움켜쥐었다. 놈의 것은 뿌듯하고 뜨뜻하다. 심이 단단하게 솟아오른 살덩어리는 아주 미끈하고 예쁘게 생긴 모양새를 자랑했다. 당장 꺼내어 마음껏 흔들어 주고 싶을 정도로.

“섰군. 터질 것 같은데.”

“으음…… 하아… 손도 빠르셔라….”

“어떻게 해 주길 원하지,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야릇한 얼굴을 한 주제에 르브리에는 오만한 명령을 내리는 여왕처럼 웃었다. 흔들리는 눈썹은 여유만만해서 오히려 약점을 쥔 하리드가 더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끼게 했다.

“이런 은밀한 곳을 매만지고 있으면서… 풀 네임을 부르는 겁니까. 기사들은 그래요? 너무 딱딱하잖아요. 재수없게.”

“그러면?”

“후우.”

“내가 널 어찌 부르길 원하지?”

불쑥, 하고 손안의 것이 더욱 팽창했다.

“이름을.”

달칵 소리와 함께 놈의 하얀 손이 스스로의 바지를 풀어, 아래로 내리는 모습이 야살스러웠다.

“불러야죠.”

“이름…….”

“그래요.”

축축한 혀가 입술을 핥고, 내리뜬 눈이 오만한 여왕처럼 그를 내려다보며 휘어졌다. 자아, 어서. 식은땀으로 솟아올라 발갛게 변한 얼굴은 노련한 창부 같기도 했고, 어쩔 줄 모르는 풋내기 같기도 했다. 일그러진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하리드는 손안에 담긴 인간의 성기의 뿌리를 꽈악 쥐었다. 윽! 앓는 소리.

“내가 왜?”

하리드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언제 섰는지에 대한 대답.”

“하으! 제기랄, 그렇게 꽉 쥐지 말, …아, 입만 살아서. 진짜 얄미워 죽겠네요.”

“대답.”

“좋아요! 그럼 먼저, 불러요.”

“뭘.”

“…르, 르뷔.”

르뷔?

“아, 그렇게 부르는 게 좋겠어. 불러봐, 브리첼. …흐으!”

“파정을 참으면 불러주지.”

“으읏…….”

놈의 신음은 감미롭고 좋았다. 참고 참아 앓는 듯이 이어지는 듯 하면서도 과하지 않았고, 듣는 이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는 것이 있었다. 만져지는 손안의 살은 매끈했고, 희미하게 흔들리는 엉덩이와 허리는 고귀하고 온화한 낯을 하고 있던 한낮의 페르달 공작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그 괴리감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참아 봐.”

탁, 탁탁. 탁. 거세게 손안에서 흔들었다. 놈이 도리질을 친다.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머리카락의 끝이 달콤해 보였다.

분명 이런 모습을 또 본 자들이 있겠지. 축축하게 벗겨진 귀두의 반들반들한 끝을 손가락으로 우악스럽게 문지르면서 짐승은 느긋하게 웃었다. 능숙해 보였으니까 많은 이들을 만났을 것이다. 잔뜩 흐트러져 풀어진 푸른 눈동자 가득 똬리 진 눈물방울의 쾌락을 본 자가 또 있겠지. 그런데 왜, 그 스쳐 지나간 자들이 짜증이 날까. 이 모습을 누군가 또 봤다고 생각하면.

‘아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약간 뜬 놈의 허리가 바르르 떨리고 허벅지에 힘이 꽈악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불쾌하군.’

그리고, 손안에 쥔 것이 뜨거운 것을 팍 토했다.

“……참지 못했군. 인내가 부족해.”

“하아, 하아, 하……. 성격, 진짜 개 같군요, 브리첼 공작.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마구 지껄이고 말이에요.”

“내게는 애칭을 부르라 청해 놓고, 너는 그렇게 부르나?”

스산하게 내리떠진 하리드의 눈동자가 설핏 살기를 띨 때였다. 놈의 과거. 자신이 모르는 그 과거가 궁금했다.

그것을 눈치챘을 리는 없지만 뜨거운 숨을 내쉬며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던 놈이 하리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정확히는 목의 옷깃이다.

“!”

“큰일이야.”

“뭐?”

“당신이 우는 게 보고 싶어졌어. 어떡하죠, 기사님?”

눈을 커다랗게 뜨는 순간, 하늘이 돌았다. 털썩 소리와 함께 침대에 쓰러진 것이다.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천장의 무늬를 멀뚱히 바라볼 때, 스르륵 옷자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놈이 아주 기이하게 웃었다.

“나는요. 감질 나는 건 못 해 먹겠어. 성기가 터질 것 같아서요. 만지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잖습니까. 더 진하고 재밌는 놀이를 하죠. 마구 박고 흔드는 거요. 아래가 헐고 찢어지도록 배 속에 처박는 것 말입니다. 관심 갑니까?”

“너. 사람 넘기는 게 익숙한데.”

“그보다는 본능에 취한 행동은 아닐까요?”

“본능?”

“기사님의 무력이야 워낙 유명해서, 틈을 보이면 잡힐 것 같고.”

그리고 말입니다, 놈이 나른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벗겨 먹고 싶다는 듯이 날 바라보거든. 그 눈이 아주, 뜨겁고, 야하죠. 이 옷들 따위는 방해가 된다는 듯이. 골려 주려다 이쪽이 먹히면 아주 곤란하거든.”

“…독심술까지 했나?”

“아하하하!”

푸른 달빛. 헐벗은 육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을 것처럼 하리드 브리첼은 느릿하고 끈끈하게 눈앞의 인간을 바라보았다. 아니, 눈으로 감상했다. 유려한 미. 하지만 그것뿐이다.

대체 무엇이 이렇게 그의 본능을 자극하며 미치게 하는 것일까. 저 독특하고 침을 돋게 하는 은밀한 향취? 아니면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밀어 넣는지도 모르고 다가오는 저 뻔뻔한 대범함?

“당신 진짜 재밌습니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이더라.”

“잘 웃던데.”

“그거랑은 다르죠.”

놈이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나긋나긋, 끈끈하게 이어지는 듯한 그 감미로운 목소리는 명백한 유혹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아래가 뿌듯하게 차오른다. 바지가 답답한 것은 르브리에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상하죠. 배가 고파져요. 당신의 근육은 아주 쫄깃할 것 같아서 이가 근질근질해지거든. 정말 사흘은 굶은 것처럼 허기가 집니다. 당신의 뭐든 삼킬 수 있을 것처럼 말이에요.”

“육식동물이라도 된 듯한 말투야.”

“당신의 살은, 그만큼 맛있어 보인다는 뜻이죠.”

“칭찬인가?”

르브리에가 손을 뻗어 하리드의 옷을 조심스럽게 열어 펼쳤다. 은근한 땀이 차올라 있던 상체에 시원한 공기가 닿았다. 느긋한 손길과 함께 놈의 머리가 그의 가슴팍으로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질감. 솜털이 쭈뼛 서는 순간, 빙긋 웃은 르브리에의 숨결이 팽팽하게 솟은 가슴의 여린 살점으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 하리드는 터지는 신음을 입을 깨물며 참았다. 뾰족하게 세워진 혀가 의도적으로 싸악- 단단하고 달콤한 사탕을 핥듯이 스쳤다. 노려보자 스윽 웃는 얼굴이 노련했다.

“물론 칭찬입니다. 그런 의미로 묻는 건데요.”

“하…….”

으음. 앓는 소리를 꿀꺽 삼키는 턱관절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후후, 낮게 웃으며 르브리에의 숨결이 다시금 타액이 닿아 반들거리는 살점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말랑하게 죽어 있던 것이 뾰족하게 머리를 쳐들 정도로 뜨끈하다.

“맛있는 기사님. 이것, 먹어도 됩니까? 응?”

“…….”

“당신의 맛있게 익은 젖꼭지 말입니다.”

“으음.”

“이렇게 바짝 서서 빨아달라고 애를 태우고 있는 살점 말이에요.”

“……후우.”

그게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젤리라든가, 푸딩이었다면 직접 저 요망한 입술 사이로 욱여넣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저 야살스러운 인간이 인질로 잡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자아, 빨리 말해 봐요.”

느릿한 긴장이 흘렀다. 혀가 한번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지잉 울리는 것 같은 그곳이 간지러웠다.

“단풍처럼 잘 익은 색감이에요. 마구 빨면 어떻게 변할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양이군요.”

“그거 참, 쓸데없는 호기심이야.”

상대의 눈이 야릇하게 휘었다.

“왜요? 얼마나 짜릿하게 바르르 떨며 울지, 입 안에서 아프게 씹어대면 이 살점의 주인에게 어떤 감각을 줄지 너무 궁금하지 않습니까.”

“전혀. 네 반응이라면 궁금한데.”

“오, 이런. 그런 기회가 올지 모르겠군요, 왜냐하면, 나는 배가 고프고…….”

놈이 제 젖꼭지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린 건 착각일 것이다. 심드렁하게 그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것은 지나치게 불타오르려던 생각과 욕망을 누르려던 하리드의 처절한 방어 본능이었다.

“지금 허리를 흔들며 우는 건 당신이거든. 브리첼 공작.”

“…으윽!”

하지만 발칙한 인간은 그 방어 지대를 무참히 밟고 습격해 왔다.

“!”

거세게 빨렸다. 휩쓸려 떨어져 나갈 것처럼 뜨겁고, 아팠다. 하지만 동시에 원하던 것이 그곳에 닿았다는 것처럼 내장 깊은 곳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움찔거렸다.

“하, 아!”

쭈우웁. 쭈읍. 보란 듯이 소리를 내며 질척거리는 젖은 소리에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습한 숨결, 뜨거움. 그리고 벌어진 붉은색의 입술이 허락도 받지 않고 붉은 살점을 맛있게도 탐했다. 아프게 꽉 깨물 때는 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가 르브리에의 것과 그의 것이 맞닿았고, 축축하고 뭉근한 살덩어리로 충혈되도록 깨물린 유륜을 둥글게 핥으면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오며 턱관절이 불거졌다.

“예뻐요.”

“후으, 하아, 하…….”

놈이 살점을 물며 웃었다. 촉, 초옥. 몇 번이나 사탕을 빨 듯이 입 안에서 굴리다가 뱉어내는 모습에 헐떡이는 숨을 쉬며 노려본다. 혓바닥이 왜 저런 감각을 주지?

“아아, 정말 귀엽게 됐어요. 발갛게 익었어요.”

“읏!”

손으로 꾸욱 누르는 통에 허리가 훅 튕겼다. 붉은 입술 사이로 희롱당하다 축축하게 젖어 내뱉어진 그의 유두는 반질반질하게 빛나고 있었다.

“벗어요, 브리첼 공작.”

“아, 읏…….”

“귀엽게 울지 말고. 그렇게 야하게 인상 쓰지 말고요.”

“너, 그 입, 하아…….”

“나만 벗게 하지 말고, 어서 그 야한 엉덩이를 움직이며 옷을 벗어 봐요. 구경해 줄게요.”

배 속이 울렁거렸다. 젖어 바짝 선 한쪽 유두를 희고 고운 손끝이 야무지게 쥐어 비틀었기 때문이다.

“이런 단련된 가슴 위에 이런 유두는 반칙이잖아요.”

“윽!”

“괴롭혀 주고 싶게. 짓씹고 꼬집어 주고 싶게.”

“하, 하아. 윽, 아, 프게, 으윽…….”

“아파요? 정말? 아닐 텐데요. 가슴을 내밀고 있잖아요. 자, 옷을 벗어요. 바지 내려.”

흐윽,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뜨겁고 부들거리는 허벅지를 따라 축축하게 젖은 바지를 내린다. 잘 내려가지 않아 한숨을 쉬면 젖꼭지를 쥐고 있는 손가락의 힘이 더 강해졌다. 비틀고, 매만지다가, 주변을 둥글게 간지럽히던 손끝은 곧 살점의 가운데를 손톱으로 꾹꾹 내리눌렀다.

“허벅지가 아주 탄탄해서 깨물고 싶어요. 씹어 먹게 해 줄 건가요? 원한다면 다리를 활짝 벌려 봐요. 허벅지에 힘을 풀고, 당신의 은밀한 구멍으로 날 유혹해 보세요. 부끄러움 따위 쓰레기처럼 버려요.”

“…으, 으음…….”

“역시 이곳, 기분 좋군요. 야한 기사님.”

놈이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처럼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르뷔라고 부르며 울어 봐요. 부드럽게 빨아 줄게요.”

“하아…….”

이름이란 신성한 것이다. 하물며 가까운 이에게만 허락하는 그 애칭을 눈앞이 벌겋게 변하는 상황에서 부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입을 꽉 다물자 상대의 얼굴이 살짝 비틀렸다는 것을 바르르 떨고 있던 하리드는 알지 못했다.

바지를 겨우 다 벗어 떨어뜨렸을 때, 기다렸다는 듯 허벅지를 잡아 벌리는 손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유두가 꼬집힐 때마다 온몸이 긴장되듯 경직되었던 육체 때문이다.

“고집이 센 것도 기사님만의 매력이지요. 이해합니다.”

“…뭐?”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깜빡이자, 흰 손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속옷으로 가리지 못한 채 뚜렷하고 수치스러운 날것 그대로 위용을 내보이는 수컷을 놈의 손가락이 희롱했다. 축축하게 젖은 선단을 검지로 느릿하게 훑어 뿌리까지 스윽 내려오자 하리드는 튀어 오를 것 같은 혈관의 아픔을 꾹 내리눌렀다.

밤의 마력이다. 고작 저 손에. 다리가 풀려 인간이 침대에 눌린 엉덩이를 뿌듯하게 움켜쥐는 것도 막지 못했다. 아플 정도로 꽉 손아귀에 쥐며 놀리듯 바라보는 것도 비웃지 못했다.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엉덩이 골을 주욱 훑었을 때, 기묘한 신음이 튀어 나갔다.

“하으윽!”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교성에 하리드의 눈은 동그랗게 커졌고, 마주친 르브리에는 심술궂게 웃었다. 사악한 고양이 같은 웃음이었다.

“이런. 여전히 듣기 좋은 교성이에요. 어쩔 수 없이 뱉는다는, 그 아슬아슬한 매력이 있죠. 입술을 잘근 깨물고 야하게 터뜨리지 않겠다는 의지도 괴롭히고 싶을 만큼 귀여워요. 그리고 더 괴롭혀 주고 싶어지죠. 울리고 싶거든. 얼마나 더 괴롭히면 야하게 울어 줄까? 어딜 괴롭혀야, 참는 것을 버리고 언제 엉덩이를 마구 흔들면서 울어 줄까?”

“후우, 흐, 너는, 질이 나빠 보이는…… 으읏!”

“이런 곳이 약한 공작님이라니, 얼마나 야합니까.”

“닥치…… 으으… 너, 자꾸…….”

“감질나요? 간지러운가요? 이 꽉 닫힌 곳에, 무얼 넣어 줄까요?”

흥분한 듯 조금씩 낮아지는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잘 빚어진 르브리에의 얼굴에는 잔혹함이 안개처럼 덧발라져 있다. 태생적인 것이다. 아마 놈의 손가락 끝이 엉덩이 사이의 내밀한 곳을 꾸욱 누르지 않았다면 더 그자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을 거칠게 찔러버리면, 당신은 어떻게 울까요? 갸르릉거리는 고양이처럼 교성을 흘릴까요?”

“…나중에 죽고 싶으면.”

“우는 모습도 궁금하지만, 부드럽게 느끼게 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죽는 게 무서워서 항복하는 건 아니에요, 브리첼.”

“하, 퍽이나 그러겠…… 흐음…….”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당신, 거부하지 못하잖아요. 내 손가락이 좋아서, 내가 주는 감각이 좋아서, 그리고 이 순간이 나쁘지 않아서. 그렇지요? 말해 봐요. 나쁘지 않다고. 아아, 아니야. 좋다고 말해 봐요. 응? 봉사 중인 내게 그런 말은 해 줘야지요.”

하으으.

느릿하게 흔들리며 놈의 것이 들려진 허벅지의 살에 마찰하기 시작했다. 뜨겁고 축축한 것이 피부를 뚫어 버릴 듯이 뜨겁게 비빈다. 아아, 탄식과 같은 한숨이 붉은 입술 사이로 튀어나올 때마다 토정할 듯한 감각에 뱃가죽이 요동쳤다.

놈의 숨이 달았다. 기분 좋은 듯 속삭이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 눈앞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안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줄다리기에 진 자신이 휙, 끌려가는 기분.

다 주고 싶어지는 기이함. 저 목소리에 따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몽롱함.

“브리첼……. 기분 좋게 만들어 줄게요. 내 이것, 배 속을 아주 기분 좋게 뚫어 줄 겁니다.”

“박으면 잘라 버릴, 으읏.”

“아아, 너무해라……. 그놈의 강직함은 내다 버리란 말이에요. 고작 손가락만으로 만족하다니, 너무하잖아. 으응…….”

오밀조밀하게 주름진 곳을 마구 매만지고 내리누르고 안달이 날 듯 훑던 손가락이 결국 그곳을 비집고 들어갔다.

‘윽!’

이것으로 두 번. 과정은 담백해도 섹스 자체에 인색하지 않았던 짐승에게도 뒤는 낯설고 생소한 곳이었다. 강한 수컷이 제 뒤를 열 일은 거의 없었고, 하리드는 특히 조심해야 할 수장이었다. 그런데도, 그곳이 열리는 감각에도 그는 이를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뒤틀며 엉덩이를 띄웠다.

더. 더. 더 박아. 더, 더 뜨겁고 격렬하게.

“아아, 부드러워. 이렇게 축축하게 젖으면 어떡합니까.”

“흐읏, 윽, 하아……!”

“좋아요?”

쿨쩍거리는 소리, 퍽, 퍽. 손가락이 내장을 긁을 듯 날카롭게 처박히는 소리. 그의 웃음소리. 습하게 퍼지는 수컷의 진한 향기. 그리고 달구어진 인간의 성기가 허벅지의 살을 뜨겁게 핥는 접촉.

흔들리는 육체와 조금씩, 조금씩 같이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하는 제 신체. 뜨거운 열기에 빠져 정신없이 허리를 뒤흔들어댄다.

한순간으로 스쳐 지나갈 인간. 아무 의미도 없는 인간. 그냥 탐욕이다. 이건 그냥 순간의 욕정이다. 기울어지는 인간의 목덜미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영근 열매처럼 땀이 맺혀 있다. 하아, 하. 거친 숨결이 피부 위로 쏟아졌다.

“당신은 이상해, 브리첼.”

“하아, …하…아, 으, 읏!”

그건 내가 할 말이다. 페르달.

“정말, 이상합니다…….”

엉덩이를 쑤시고 있는 주제에 아름다운 낯으로 노래하는 요정처럼 구슬프게 중얼거리는 말이 우스웠다.

희미하게 웃자 비틀린 입술 그대로 다가와 코를 살짝 깨무는 모습이 더욱 웃겼다. 정말 못돼 보이는 표정 아닌가. 갖고 싶은 게 바로 코앞에 있는데 주지 않아 안달이 난 못된 꼬마의 얼굴이다. 비웃듯 자꾸만 웃음을 흘리자 배 속의 내장을 찌르는 손놀림이 거칠어졌다. 이제 손가락은 여러 개가 박혀 마치 꿈틀거리는 놈의 성기가 처박혀 흔들리는 것처럼 두꺼웠다.

내벽에 뜨겁게 긁힌다. 주름이 벌어지고 거칠게 손가락이 추삽질을 반복했다. 찌걱, 찌걱. 살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으, 흐으…… 하아, 우, 으! 아!”

“말해 봐요. 애원해 봐요. 당신도 원하잖아. 아닌가?”

“크, 으, 읏!”

“이렇게 가득 꿈틀거리면서, 더 큰 걸 박아 주길 원하는 것 아닙니까. 허락을 해 봐요. 고귀한 황제의 개를 마구잡이로 짓밟고 처박을 순 없잖아요. 그러니 말해 봐. 박아 달라고.”

놈은 입이 더러웠다. 열정에 능숙했다. 그러나 그 눈동자 속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황제가 아니라 나라고.”

욕망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과 분노, 수치. 동시에 당장 달려들지 않으면 목말라 죽을 것 같다는 욕구와 적나라한 솔직함. 어떤 게 저 인간의 본심일까.

팔을 뻗은 것은 순전히 흔들리는 허리 탓이다. 쿨쩍거리다 못해 퍽퍽 아래에서 치다시피 하는 그놈의 손 때문에 허리가 불편해서, 그래서 지탱하려 놈의 어깨를 끌어안았던 것이다.

“…….”

“…….”

그런데 훌쩍 가까워진 위치가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꽉 끌어안은 것 같은 자세가 지나치게 친근했다. 잠시 크게 뜨인 푸른 눈 역시 당혹스러움을 뚜렷하게 품었다.

제기랄. 가슴과 가슴이 스치듯 맞닿고 구멍을 희롱하던 손이 꿀쩍거리는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아, 눈을 깜빡이는 순간 몸이 번쩍 들리다시피 끌려 나갔다.

“……!”

“그렇게 쳐다보면.”

“으윽!”

“미치라는 거지. 응? 기사님.”

놈은 힘이 셌다. 제 뼈대와 무게를 생각하면 기이할 정도로 거셌다. 아픔마저 느끼는 악력이 어깨를 잡아채며 허리를 짓이겼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놈의 뜨거운 허벅지 위에 몸이 놓여 있었다. 다리를 손으로 벌리고 성기를 쥐며 또다시 토하길 종용한다.

흐릿한 시야로도 상대의 눈빛이 뜨거웠다. 닿는 곳곳 열기가 스친다. 잡아먹는 짐승인 자신이 오히려 사냥당하는 기이한 공포가 쭈뼛 솟아올랐다. 부드러운 손이 허벅지를 뜨겁게 훑으며 내밀한 곳까지 파고들어 간지럽혔다. 어서. 어서요.

“다리를 가득 벌리고 싸 봐요. 수치를 버리고.”

“으읏, 아, 으…….”

“내가 보는 앞에서. 싸.”

“아, 흐, ……으, 다, 리.”

“더 벌려 줄까요?”

“아!”

두껍고 뜨거운 성기가 하리드의 엉덩이 골을 스치듯 미끄러졌다. 충혈될 듯 뻐끔거리는 항문에 잘못 길을 찾아들면 그대로 미끄러져 파고들 것처럼, 그 주변을 스치듯 허물어졌다. 뜨겁고 간지러워 엉덩이를 들썩이듯 피하려 하면 허리를 꽉 쥐며 주저앉혔다.

안 돼. 본능이 소리쳤다. 저놈의 성기를 품으면 분명 후회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꽉 긴장되어 빳빳해지는 등줄기를 차가운 손이 쓰다듬었다. 달래듯이 속삭인다. 버티는 근육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브리첼.”

허리가 뒤흔들린다. 살과 살이 땀에 젖어 쩍쩍 달라붙었다. 차가운 얼음처럼 내려앉았던 르브리에의 육체가 하리드의 온기를 빼앗듯이 조금씩 뜨거워지는 감각은 두 짐승에게 알 수 없는 쾌감을 충족시켰다.

“당신이 울며 애원할 때까지는, 내 좆을 처박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흐, 읏, 하, 윽!”

“도망치지 마. 응?”

“하아……!”

“내가 상냥해질 수 있게.”

늦게 가라앉은 르브리에의 목소리는 꼭 짐승의 울림 같았다. 그럴 리가 없었는데도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따끔한 감각과 함께 어깨에 무언가가 박혔다. 등 뒤로 뻗듯이 끌어안은 긴 팔이 하리드 브리첼을 옭아맸다. 팔 안에 갇힌 근육이 용을 쓰듯 꿈틀거렸다. 척추를 압박하며 끌어당기며 거미의 다리처럼 타고 오른 손가락 끝이 어깨의 탄탄한 피부를 아프게 눌렀다.

“아래를 잔뜩 세운 주제에 엉덩이 흔들며 도망가고 싶다는 얼굴 따위도 하지 마요. 이건 다 당신 탓이에요. 그렇게 조르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입으로는 거부를 하면, 어떤 기분이 드느냔 말이에요. 엉덩이를 그렇게 조이면서 허리를 야하게 흔들면 어떻게 해요, 기사님. 알아요?”

이상해. 이상했다.

“듣고 있어요?”

이상한 건 자신이 아니라 르브리에였다. 머리가 녹진하게 풀어진다. 타액을 주르륵 흘리는 것도 잊을 만큼 참기 힘든 욕구에 내밀한 구멍이 연신 움찔거리며 떨렸다.

“도망가면 짐승은 뒤를 따른답니다, 기사님. 그 흰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어져요.”

그것 역시 자신이 할 말이었다.

“언젠가 도망치는 사냥감의 목을 물고, 그 따끈한 살에 이를 박아 넣고 싶은 욕구 때문에요. 그리고 옷을 찢어발기겠지요. 도망가는 당신의 뒤를 잡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 아아, 나는 발기하겠죠. 그리고 당신의 단단한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박아 넣어 버릴 거예요. 상냥하지 않게, 과격하게. 그러다 당신이 도망치려 하면, 팔다리를 잘라 울타리 안에 처넣고 싶어질 거예요.”

짐승의 욕구를 인간이 논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찢어 버릴 거예요, 당신의 구멍을. 정신없이 매달려도 놓아주지 않을 만큼 배 속 깊은 곳까지 처박아 버릴 거예요. 기대돼요? 당신은 아무것도 싸지 못할 거야. 오로지 내 정액만 희뿌옇게 내뱉게 되겠죠. 이 구멍으로. 상상해 봐요. 내게 사로잡힌 당신을.”

“으윽.”

끔찍할 것이다. 끔찍해야 마땅할 미래다.

그런데 왜.

왜 저 사악한 말들에 심장이 미칠 듯이 뛰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상해요. 당신은 정말 이상해. 당신을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야, 기사님……. 나는 그러면 안 되거든. 정말이에요.”

그렇게 말한 뒤 거세게 뒤얽히는 입술을 거부하지 않으며 하리드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으음…….”

놈의 가느다란 목을 비틀어 꺾고 싶기도 하고, 그대로 놈의 발기한 성기에 엉덩이를 맞춰 내려 흔들고 싶기도 했다. 여전히 들어올 듯 들어오지 않으며 뜨겁게 엉덩이 사이를 처박을 듯 비비는 르브리에의 성기가 불붙은 듯 뜨거웠다.

둘은 그 많은 생각과 고민을 뒤로 한 채 짐승처럼 혀를 얽었다. 그날 밤처럼.

* * *

“뭐, 뭐지?”

짙은 색의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턱을 괸 채로 서류를 분류하고 있던 룩센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마구잡이로 갈겨지고 있던 깃펜이 우뚝 그 움직임을 멈춘다. 오한이다.

“으으으!”

자꾸만 불길함이 용솟음쳤다. 하리드 브리첼, 제 주인이자 친구인 녀석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파고 들어왔기 때문일까.

“제기랄.”

녀석의 그런 모습은 룩센에게는 지나치게 생소한 것이었다. 갈망을 지독할 정도로 잘 수습하여 어린 동족들 사이에서도 특출한 놈이었다. 물론 수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으나, 역대 수장들이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었음을 떠올려 보면 하리드는 특히나 특별했다.

‘꼭 가야겠어?’

‘자신이 없다.’

‘뭐?’

‘이대로 관심 두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러니 해결하게 오겠어.’

‘…그거 정말 해결하러 가는 거 맞는 거지, 친구야? 어?’

‘…….’

멸망의 예언시를 들었던 수뇌부들이 혼란하지 않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의 수장이 하리드였기 때문이다. 낯선 인간의 땅으로 나와 예언을 격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그런데 지금 상황은.

룩센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기랄. 일이 아주 더럽게 꼬이고 있어. 그놈이 뭐가 특별하다고 이 난리인 거냐고……. 어? 대체 뭐가!”

입술을 잘근잘근 혹사하며, 시커멓게 죽은 것 같은 눈을 덮으며 매만졌다. 꾸드득 안구가 구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서글픈 사실은 당장 하리드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막는 것이 가능한지, 옳은 건지도 모르겠다. 원래 헤프고 식욕에 허덕이는 놈이었다면 몰라도 저 과묵한 친구가 저러는 건 무섭기만 했다.

마구잡이로 성질을 내던 룩센이 눈을 번쩍 뜨며 중얼거렸다.

“설마 희대의 악마 같은 인간이라 하리드를 제 발아래 두고 부려 종족이 멸망한다는 우스갯소리는 아니겠지? 그건 정말 아니지?”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이번에 하리드에게 보고를 하면서 다시 한번 정리해서 본 그들이 감시하고 있는 인간.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왜 이 인간을 죽여야, 우리의 멸망시가 빗겨 나가는 건지.”

예언에는 많은 정보가 나와 있진 않았다. 그들의 예언가는 음울한 목소리로 운명을 타고난 자의 태어난 해, 달, 그리고 년, 시간을 말해 주었을 뿐이다. 성별도, 이름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찾는 작업은 꽤나 끔찍했다.

“이 인간이 맞아. 아무리 봐도 이 인간이야.”

그렇게 몇 년을 허비했다. 찾아내었을 때 그 인간은 이미 사교계에 데뷔한 후였다. 그것도 젊다 못해 어린 공작가의 당당한 가주로서. 그대로 깔끔하게 죽이고 떠나기에는 참으로 문제가 많은 위치의 귀족으로서 말이다.

“확실히 이상하긴 해…….”

깔끔하다. 지나치게. 꼭 그렇게 보여 주고자 작정한 이력처럼. 그러나 또 찌르고자 하면 나오는 것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은 베일에 감추어진 과거를 갖고 있긴 했지만, 이것은 병약하여 수도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생긴 비밀일 뿐이다.

물론 공작가의 자제가 아무리 병약하여 수도를 떠나 있었다 하더라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거나 얼굴을 소상히 아는 자가 없다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지만, 또 귀족가에서 없는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르브리에 그 인간과 병약이라는 단어가 너무 안 어울린다는 거지. 인간은 원래 잘 변한다지만 체질이 쉽사리 변할 수가 있나? 만약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걸 하리드가 귀신같이 알아내고 반응한 거라면…….”

주기적으로 공작가를 오가는 의원이 있다고는 하는데 정체불명이다. 잡아낼 수 있으면 공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을 텐데 못 잡았다. 그건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르브리에라는 그 모호한 인간은 짐승들을 따돌릴 수 있다는 정보력을 지니고 있다는 거였으니.

“아아아! 모르겠다, 제기랄!”

사실 룩센은 자존심이 상했다. 갑자기 멀쩡하던 수장을 미치게 만든 그 르브리에라는 인간의 존재부터, 고작 인간을 죽여야만 안정될 수 있는 짐승들의 미래라는 것 자체가.

자신들이 얼마나 강한 종족이던가. 얼마나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던가. 모두가 인간 하나의 목숨으로 바뀔 자신들의 미래를 알면 기가 막혀 코웃음을 칠 것이다.

“이 와중에 너까지 날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하냐, 수장아…….”

지금쯤 신나게, 정체를 파악하겠다는 명분으로 무도회장에서 르브리에를 바라보고 있을 우두머리의 모자란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이인자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문제의 인간 놈이 자신들의 고귀한 수장과 상상한 것 그 이상의 진한 접촉을 하고 있다는 걸 추호도 모르고 있었을 때였다.

* * *

헐떡이는 숨을 내쉬던 상대가 픽, 하고 길게 웃었다. 바라보니 헐벗은 육체를 가릴 생각도 안 한 채 제 배 위에 튄 것을 문지르며 놈이 나른하게 입술을 휘었다.

눈을 마주치자 보란 듯이 희게 젖은 손을 뻗어 하리드의 복부 위를 문질렀다. 근육이 파르르 떨려 신음을 삼키자 놈이 이를 드러내 보일 듯 환히 웃었다. 아니, 비웃음이다.

“아주 대단하신 기사님이로군요. 끝까지 그걸 참아? 좆같네요.”

“왜. 그럼… 나도 널 칭찬해야 하나?”

“지금 장난해?”

부아가 치민다는 목소리를 들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구멍만 꿰뚫지 않았을 뿐이지 할 짓은 다 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이 열렬하게 바라보는 눈을 보니 새파란 애송이를 보는 것 같아 흥미까지 돋는다.

결국 오늘도 놈의 손가락만 열심히 일했다. 저 징그럽게 큰 인간의 성기는 제 구멍을 뚫지 못했다. 널브러진 바지를 주워 다리를 꿰며, 하리드는 비죽 웃었다. 우악스럽게 후벼 파인 곳이 지끈거리면서 울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이 둔중한 거북함 역시 곧 회복될 것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해도 네놈만큼 이상할까.”

“기가 막히는군요.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거든요? 당신과는 매번 시작도, 끝도 죄다 이상합니다. 다 줄 것처럼 위아래로 울며 그렇게 난리를 피워 놓고 기어이 못 박게 해? 대체 얼마나 잔인해질 겁니까?”

“아아, 그래. 그렇군.”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상대가 발끈했다.

“농담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한번 시작하면 달래지 못한 적 없던 내 물건이 이렇게 불쌍한 적은 처음입니다.”

“뭐가. 네 페니스가?”

“그래요, 제기랄!”

“그게 자랑인가.”

짐승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래, 또 바뀌었다. 몇 개의 얼굴이 있는 것일까. 세상 모든 사람 홀릴 것 같았던 기색의 인간은 사라지고 이번에는 뒷골목의 거친 건달 같은 날카로운 기색의 남자가 시근덕거린다. 괜스레 심술이라도 부리듯 바지를 꿰차 입은 하리드의 복부를 할퀴며 내리긋는 손톱이 날카로웠다.

역시 아직 어린가, 속이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게 재밌었다. 귀엽기도 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신사의 가면 틈새로 튀어나오는 저 성정이 궁금하기도 했다.

“르브리에.”

“왜요!”

바로 그 순간, 자신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미 입술은 움직이고 있었다. 놈에 대해 훑어보았던 기록들. 분명 놈이 원하는 것은 예상 가능한 수준의 것이다. 이미 세상을 떠버린 페르달 공작에 대한 복수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저 인간의 속을 흔들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수.

“너.”

그것 때문이었을까. 놈이 궁금했기 때문에? 복수를 위해서 저 인간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휙휙 변하는 저 가면 아래는 진정 무엇을 숨기고 있을지. 제게 보이는 저 충동적인 감정들조차 어쩌면 저 인간이 자신을 떠보기 위한 연기인지가 궁금해서?

그리고 하리드 브리첼, 자신은 어떤 진실을 원했기에?

“페르달.”

운명의 긴 골짜기, 외따로이 떨어진 운명 조각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리석은 짐승은 몰랐다. 자신이 있었고, 바꿀 수 있다 여겼고, 오만했던 짐승들의 왕은 제 앞의 이질적이고 매혹적인 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방금까지 그르렁거리며 욕설을 중얼거리던 주제에, 손을 뻗으니 눈을 살며시 감으며 뺨을 기대 오는 인간 남자를 향해. 차갑고 식어 버린 매끄러운 뺨의 피부가 손바닥 위에 찰싹 소리를 내듯이 감겨 왔다.

“말했을 텐데요.”

불퉁한 목소리에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르뷔라고 부르라고. 빌어먹을, 당신 고집 더럽게 셉니다. 어떻게 그 단 한 번을 안 불러? 내가 아무에게나 그 이름을 부르게 한 줄 압니까?”

네 푸른 눈동자 속에 예사롭지 않은 것을 읽은 본능을 무시하는 까닭은.

수장으로서의 그가 속삭인다. 죽여야 해. 잠깐의 유희 말고, 다른 어떤 것도 깨닫지 말아야 해. 저 도자기처럼 희고 유려한 목을 잡고 그대로 꺾어 버리자. 죽여, 이 세상에서 저놈의 흔적 자체를 지워 버리자. 그래야 한다.

“빌어먹을 고지식한 기사님은…….”

그러나 흉흉한 생각들은 까맣게 뒤덮이고 만다. 두꺼운 모래를 덮고, 덮어 동산이 될 때까지 꽁꽁 숨기는 것이다. 하지만 본능은 오늘도 철저하게 졌다. 달싹이는 입술은 쿵쾅거리는 심장의 울림을 자각하며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내뱉었다.

“르뷔.”

“…….”

그 이름을. 내밀한 이름을. 아주 천천히, 만족스럽게 휘어지는 얼굴을 보니 입술이 근질거린다. 따라 웃고 싶은 것처럼 입술이 흔들렸다. 웃고 있는, 진득한 만족감에 젖어가는 상대의 푸른 눈은 청아하고 고아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끈적거리고 번들거린다. 누가 저 인간더러 맑고 조용한 청년이라고 했지?

“그래요, 생각보다 당신이 부르는 내 이름, 듣기 좋군요…….”

예언 속의 인간. 그리고 그 인간에게 이토록이나 끌리는 자신. 불안함이 스멀스멀 기어와 심장을 움켜쥐었다. 안 된다는 자각과 더 알고 싶다는 본능이 사납게 서로를 물어뜯었다.

사실은 놈과 타액을 섞었던 첫 순간, 깨달았다. 눈앞의 인간은 불구덩이를 향해 걷고 있다. 그 끝에는 누군가의 피가 낭자할 것이다. 죽음은 야생 들꽃처럼 발아래 피어 있을 것이고, 짐승들은 그곳에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리드 브리첼 자신은, 바로 지금.

“너, 나와 거래를 하자.”

선택을 했다.

패는 던져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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