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운명은 정상을 향해 내달린다 (2/16)

2장. 운명은 정상을 향해 내달린다

연회장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남자는 이 모든 것이 익숙해 보였다. 낯설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겨 연회장의 시선을 받아 내었던 하리드와 룩센과는 달리, 짙고 고운 검은색의 천에 은색의 문양이 수놓아진 정장을 입은 남자는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느긋하다.

‘누구지.’

낯선 이의 체구는 늘씬했다. 팔다리는 길쭉길쭉했고 키도 하리드의 눈높이와 비슷할 만큼 컸다. 그들, 짐승들의 육체가 굉장한 장신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해서 언뜻 보기에는 힘없어 보일듯한 모습이었으나, 짐승의 눈은 잘빠진 옷감 아래 숨겨진 육체의 선을 가늠했다. 그리고 감탄했다.

‘제법이군. 모든 것이.’

반지르르하게 결이 좋은 회색 머리카락과 무척이나 흰 피부, 그리고 꽃이 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화려한 이목구비. 한눈에 잊히지 않을 외모를 지닌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저 새파란 눈동자. 꼭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날 듯하지 않은가? 푸른색은 사파이어 같았다.

룩센에게도 그 남자는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감탄을 숨기지 않으며 속살거렸다.

“하리드, 저 인간 좀 봐라. 와, 장난 아닌데. 지나가는 사람들 죄다 얼빠진 꼴을 보니. 얼굴도 얼굴인데 풍기는 분위기가…….”

“…….”

물론 그들, 짐승들은 아름다웠다. 인간에 비해 뛰어난 외향을 지닌 이들이 많았다. 젊은 수컷은 생동감 넘치는 육체의 선을 지녀 흉흉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짐승들은 험악하다. 수컷의 향기를 짙게 풍기는 이목구비와 굵직한 선을 지니고 있었고, 체구들도 인간보다 전체적으로 큰 편이었다. 대부분이 팽팽히 단련된 근육질이었다.

그러나 저 인간은, 아주 별개의 것으로 보였다. 미지의 생물이다. 아름답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미려하고 매끈하다. 그러나 인간도 짐승과도 비교 불가능한 별개의 것의 아름다움이다.

‘꼭 이야기에 나오는 요정 같은 놈이군. 우리와 아주 달라.’

순간적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변하고, 물 흐르는 듯한 발걸음으로 길쭉한 팔다리를 돋보이며 걸어 들어오는 남자만이 유채색으로 보일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을 건든 것은 상대의 심각하게 화려한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체… 이건 뭐지.’

하리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제 가슴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이상한 반응이야.’

이해할 수 없다.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하악골이 단단해지고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심장이 뻐근하게 조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행동이 이상했는지 룩센이 갸웃거렸다.

“왜 그래, 수장님? 무슨 문제 있어?”

“…….”

알 수 없으니 설명할 수도 없었다. 잠시의 망설임 끝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저 인간은 누구지? 넌 알고 있나?”

“아, 그건…….”

룩센이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곳곳에서 떠들기 시작하는 인간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켜보던 사람들의 긴장감이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

그건, 걸어 들어오던 화려한 미남인 남자가 시선을 자신들에게 주었을 때였다. 인간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인간들이 떠들었다.

‘오, 드디어 소문의 두 공작이 만났군? 브리첼 공작이 하도 두문불출하여 페르달 공작과 제대로 만난 적이 없지?’

‘아아, 제국 최고 미남들이 서 있으니 너무 황홀해요……. 특히, 저 새로운 얼굴. 우리 고귀하신 제국의 검. 순진한 황녀님이 관심 보이지만 않았으면 저 우직한 기사님을 내 아래에서 앙앙 울게 만들었을 텐데…….’

‘황녀님은 이런 곳에 오지 않으세요. 아주 곱고 순진한 분이잖아요? 그러니 이곳의 방종은 그분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죠. 자자, 모두 용기 내서 들이대 봐요.’

‘흥, 그런 이야기는 됐어요. 모두, 저 두 수컷 중 누가 더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우직한 남자도 좋잖아요. 나만 바라보고, 나만 아껴 줄 것 같아. 저런 무뚝뚝한 남자가 평소엔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 앞에서만 돌변한다고요. 페르달 공작님은 그런 게 없죠. 모두에게 친절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잖아요.’

‘그래도 다 무시무시하게 잘생겼잖습니까. 한입에 빨아 넣고 싶은 미남이죠. 나는 내 밑에 흐트러져서 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홀딱 벗겨서 저런 근육질의 남자에게 물건을 꽂아 넣으면… 그 쾌감이 장난 아니지요.’

‘흐응. 난 페르달 공작에게 한 표. 저 남자는 물에 젖은 장미처럼 요염하죠……. 찡그리는 얼굴은 얼마나 섹시할까?’

페르달 공작. 충격이 뒷머리를 때렸다.

분명 페르달이라고 했다. 저 남자가?

하리드는 의외의 사실에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

“…….”

상대의 푸른 눈과 그의 금색 눈동자가 뚜렷하게 마주쳤다.

창칼이 치고받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가 하리드의 눈썹이 상승 곡선을 그렸다. 그저 눈이 마주친 것뿐. 그런데 왜 이런 반응이란 말인가?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그 짧은 대치는 초승달처럼 두 눈을 둥글게 휜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림으로써 뚝 끊겨 나갔다. 그리고 하리드는 우습게도 여태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느리지만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날숨을 통해서 심장이 뻐근하게 긴장했음을 알아챈 것이다.

그때 룩센이 소곤거리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는 불쾌감에 가슴팍의 옷을 구겨질 듯 쥐었을 것이다.

“그래. 수장님. 넌 처음 보는 자야. 하지만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지. 기시감이 들지 않아? 기록으로 많이 봤을 텐데.”

“룩센…….”

“그 페르달 공작이 바로 저 인간이야. 그 인간 말이야. 잘 봐둬.”

“…….”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 보였는가? 인상을 찌푸렸던가, 아니면 무표정한 돌 같은 시선으로 페르달 공작을 바라봤는가? 적어도 평온함은 아니었다. 하리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멍하니 물었다.

“저 인간이 그놈이라고?”

“그래. 난 아직도 예언가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중이니까 잘 봐. 인간 중엔 제법 두각을 드러내는 젊은 귀족이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아직도 그냥 평범한 조금 똑똑하고 예쁘게 생긴 놈일 뿐이야. 그래서 아주 찝찝하다고. 그런데 넌 보지도 않겠다고 박박 우기질 않나.”

운명. 가혹한, 운명.

“…….”

“기이하지? 눈으로 보니 더하네. 정말 기이한 놈이야.”

남자는 정말 수면으로 떠오른 인어 같기도 했고, 숲속을 맨발로 거니는 요정 같기도 했다. 홀로 발광할 것 같은 뚜렷한 외양으로 제게 홀린 인간들 사이로 쏙 들어갔다. 살랑이는 웃음은 햇살 같다.

둘러싼 이들은 여인들도 있었고, 사내도 있었다. 공통점은 모여 있던 이들 모두가 침이라도 흘릴 듯한 시선으로 그 남자를 열렬히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비단 저 아름다운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자는 꼭 마약 같았다.

운명을 점지받은 인간이 싱긋 웃는다. 시선들을 여유롭게 흘려보내며. 저 작은 공간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미소와 부드러운 말씨와 손짓으로 사람을 홀려내고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관찰하며 하리드는 턱을 쓰다듬었다. 만만치 않다.

“다른 건 모르겠고. …타고난 여우로군.”

“으흠? 무슨 소리야?”

매혹을 장식처럼 두른 인간. 아주 위험한, 인간.

하리드는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정체 모를 껄끄러움에 시선을 돌리길 심장이 종용했다. 여러모로 눈에 독이 되는 인간이다. 앞으로 평생 모르길 바랐던 저 인간을 잊긴 힘들 것 같았다. 날카로운 조각처럼 박혔다. 일말의 교류 없는 완벽한 타인이 되길 원했던 인간. 그렇기에 단순한 기억의 조각으로 스치길 바랐던.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꿋꿋하게 피하고 있던 인간을 하필 이곳에서 마주치고 말았다는 건데. 재수 없게, 아니면 네 의도로? 둘 중 어느 것이지? 말해.”

룩센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할 거 있나. 너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잖아. 저놈이 연회장이란 연회장은 죄다 돈다는 것이야 이미 보고로 몇 번이나 말했고, 황제가 부른 중앙 연회를 저 인간이 빠질 리 없다는 것도. 그러니 어디서든 마주쳤겠지.”

그랬던가? 어쩌면 의식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평소와 다른 이상한 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새삼스럽게 어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기 직전 죄책감을 가질 만한 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저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짐승들이 노리는 일들이 모두 마무리되는 그 순간까지.

그때였다. 돌연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자리에서 일어선 황제가 손을 올리고 있다. 그는 곧 양쪽 팔에 다가오는 남자와 여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짐승들을 내려다보았다. 룩센이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슬프게 그를 바라봤다.

“어쩐다니.”

“뭘.”

“우리의 황제가 아주 큰 기대를 하고 계시는가 봐.”

“기대?”

“그래. 우리 짐승들에게 말이야. 이를테면 씨앗? 어디 하나 누구 잡아 씨물을 질펀하게 뿌리길 바란다는 뜻이지. 돌 하나 던져 짐승 둘을 잡겠다는 심보 아닐까? 욕심도 많지.”

“…….”

그 적나라한 말에 하리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쾌락에 빠져들기 쉬운 연회, 널려 있는 상대들, 그리고 황제가 원하는 것. 룩센은 얼이 빠진 듯 코를 킁킁거리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교미는 시간 가는지 모르고 빠져들 일이지. 싸고 흔들고 얼마나 화끈해? 토정하는 순간 뭘 생각할 수 있겠어? 섹스나 해라. 널린 게 상대이니 마음에 드는 인간 골라잡고 씨를 뿌려라. 애까지 낳아 주면 더 좋고. 딱 그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아?”

“룩센, 입조심.”

“왜. 인간의 살은 달콤하고 야들야들하지. 우리가 조금만 젊었어도 이곳은 지옥의 굴이나 마찬가지였을 거야. 확실히 황제 저 인간이 쉬운 인간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네. 끝까지 정신 차려야겠어.”

“알면 다행이군.”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황제의 양쪽 눈이 짓궂음을 담고 웃는다.

황제는 ‘어떤가?’ 그리 묻는 것 같았다.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가?’ 종용하는 것도 같았다. 곧 황제가 손을 들어 2층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이들을 가리켰다. 귀족인 자도 있을 것이고, 초대를 받아 이곳에 몸을 들인 특수한 자도 있을 것이다. ‘즐기게.’ 황제는 그리 말하는 것이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열 번이 될 테니까.

육체의 쾌락에 지나치게 정갈해 보이는 브리첼 공작이라는 자를 흔들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그 쾌락으로 달아날지 모르는 짐승을 붙잡으려 하는 것일까. 음습하고 은밀한 탐욕이 느껴지는 인간 황제의 눈은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일말의 변함이 없어 한숨이 나온다.

황제가 껄껄 웃으면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불빛이 일순간 몇 단계 아래로 꺼진 듯 어두워졌다. 1층의 연회 홀에서 느긋하게 즐기던 사람들이 저마다 노래를 부르거나, 웃음을 흘리면서 어디서 났는지 모를 가면을 썼다. 약속된 것처럼. 룩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욕설을 짓씹었다.

“젠장, 저건 또 뭐야? 허어, 처음 보는 건데?”

“네가 놓친 것도 다 있군.”

놀리듯 중얼거리자 룩센이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제기랄. 자존심 상해! 인간들은 왜 이렇게 꽁꽁 감추는 것을 좋아해? 파도 파도 나오는 게 아주 진저리가 난다고. 거기다 저거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이대로 써도 괜찮나?”

“그렇군. …교묘해.”

아무래도 마법적인 무언가가 걸린 물건인 듯 가면을 쓴 사람들의 기척이 모호하게 흐려졌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고 있던 누군가가 안개를 쓴 듯 흐릿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게 이 연회장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인가?’

길 잃은 미아처럼 멀뚱멀뚱 서 있는 두 남자를 위한 선물인지. 역시나 가면을 쓰고 다가온 시종이 그들에게 검은색의 가면을 내밀었다.

“두 분, 쓰시지요. 마음껏 즐기실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입니다. 뒷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코까지 가리는 형태의 그것 위에는 눈을 가득 휘며 웃고 있는 듯한 익살스러운 눈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색에, 금빛의 문양. 누구를 의식하고 준 것인지 선명히 알 수 있는 황제의 선물이다.

하리드는 이때 모르고 있었다. 가면을 쓰는 순간, 벗어날 수 없는 이곳의 규칙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얼굴의 피부 위로 차가운 질감이 덧발라졌을 때, 하리드와 룩센은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퍼져 나가는 희미한 마나의 제약과 마법진. 이건…….

동시에 황제가 보낸 시종의 가면으로 비추는 눈이 빙긋 휘었다.

“폐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가면을 쓰셨으니, 그 마법진이 파훼하지 않으면 동이 터도 이곳을 나가지 못하신다고. 즐기십시오, 두 분.”

물론 깨려면 깨지 못할 것 없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룩센은 고개를 저었다. 튀는 것은 좋지 않아. 그리 말하고 있었다. 하리드 역시 수긍했다. 황제의 의도는 명백하다. 자신의 굴에 끌어들였으니 걸맞게 행동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 동맹 관계였다.

“룩센, 파훼법은?”

“나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어째 짐작 가는 게 있지 않아? 이곳에서 할 일은 뻔해 보이는데.”

“…….”

룩센이 짓궂게 웃었다. 하지만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미약한 불쾌감을 담고 있다. 구속되는 것을 좋아하는 동족은 없으리라. 그들은 사냥하는 자였지, 묶인 자가 아니었기에.

“이 가면, 누구와 찐하게 섹스하면 아마도 풀릴걸.”

“…정확하진 않다.”

“여기서 다른 게 또 있냐, 수장님. 맞아.”

“섹스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조건인지 정확히 모르지. 우린 마법사가 아니다. 그리고 룩센, 몇 번을 말하지? 우리에게 인간과의 관계는 좋지 않다.”

“그거야 그렇지.”

성관계는 충동을 들끓게 한다. 하지만 다른 효과도 있었다. 자신들에게 연약한 인간들의 보드라운 육체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욕구를 가라앉히거나, 혹은 더욱 터뜨리거나. 룩센이 입술을 핥으며 윙크했다.

“하지만 우리가 교미하다 충동적으로 일 치르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지, 친구야. 세월에 따라 자제력이라는 것이 생겼단 말씀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뭔 이상한 걸 보더라도 그 상대는 기억도 못 하겠지. 최고네.”

“왜 자기합리화 중이지?”

“지금 상황에 적응하는 거지.”

하리드는 인상을 구기며 경고했다. 아무래도 제 친구가 솔깃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번뜩이는 눈이 특히 그러했다.

“룩센 디암. 경솔하다.”

룩센은 코웃음을 친 뒤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했다.

“이보세요, 수장님. 황제가 얼마나 능구렁인지 몰라? 우리 정체가 까발려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 작자가 모를까. 적어도 오늘, 이 연회장에서 누구와 질펀하게 놀아도 그건 안전할 거다.”

확실히 이 가면의 효과는 꽤 놀라울 정도다. 물론 짐승의 날카로운 눈에는 이 가면의 제약이 통하지 않았다. 여전히 인간들이 또렷하게 인지된다. 육체가 다르기 때문이요, 인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것 외에 온 감각을 통해서 주변을 느끼는 짐승에게는 눈앞에 있는 시종도, 가면을 받아 쓰고 올라간 황제도,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그 여우 같았던 인간도 뚜렷하게 자각되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짐승과의 관계도 잊을 만큼 흐릿하게만 남을 것이다. 알 수 있는 것은 상대에 대한 안개 같은 자각, 그리고 체구가 어떠한지, 손과 발은 어떠했는지, 나눴던 대화의 기분이나 함께 있었던 순간의 느낌, 그러한 희미한 감각만이 남게 될 것이다.

음습한 방식이다. 아주 은밀하고 또 위험한 물건이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면서도 은밀하게 파고들어, 이곳에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없게 하는 제약까지 걸려 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귀족들이 큰 약점이 될 수 있는 비밀을 주기적으로 공유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 가면의 힘이 크리라.

“그보다는 친구, 우리가 어떤 상대를 골라야 하는지 정해야…….”

한숨을 쉬며 앞으로 어찌할지 이야기하려는 때였다.

“안녕, 멋진 남자.”

룩센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와 그의 팔에 느릿하게 팔을 얽은 것이다. 장미꽃 향기가 진하게 흘러들어 왔다. 여자의 부푼 가슴에서 풍기는 것이다. 룩센은 놀란 듯 바라보다 사르르 눈을 휘며 웃었다.

“누구시죠? 적극적인 아가씨.”

“누구긴요. 촌스럽게. 그저 이곳의 흔한 사람 중 하나랍니다. 육체를 달궈 줄 파트너를 찾는. 마침 당신 옆이 비었네요.”

“호오.”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풍성한 깃이 달린 흰색의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가 붉은 입술을 휘며 웃었다. 마치 부끄럽다는 것처럼. 하지만 행동은 적극적이었다. 어느새 룩센의 팔을 타고 올라간 흰 손은 수컷의 탄탄한 가슴팍을 느릿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붉은 입술을 혀로 은근하게 축이며 여인이 나른하게 속삭였다. 룩센을 향하여.

“그러니 물을게요. 당신, 나랑 잘래요? 당신 같은 타입이 내 이상형이거든. 마구잡이로 박아 주면 좋겠어요. 난 열정적인 남자가 좋거든.”

“아가씨. 이거 너무 적극적인데요. 후회하지 않겠어요? 난 꽤 과격한데.”

여인이 야릇하게 웃으며 입술을 할짝였다.

“더 좋죠. 망설이지 말고 날 따라와요. 천국을 보게 해 줄게요.”

“어쩔까……?”

“뭘 망설여요. 이곳은 그런 곳인데. 들어올 때부터 각오했을 것 아니에요? 걱정 말아요. 돌아갈 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녹진하게 풀어진 육체만을 끌고 가게 될 테니까. 모두가 그래요.”

여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는 머메이드 형으로 곡선을 강조하는 붉은색이다. 흰 피부와 도톰한 입술, 자신감이 넘치는 듯한 움직임. 잘 정리된 손톱이 조금 강하게 룩센의 팔뚝을 긁어내렸다.

나 가도 되나, 수장님? 그리 묻듯, 자신을 바라보는 룩센의 눈동자에 조금씩 열기가 들어차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침이 고이는 듯 붉은 혀가 입술을 할짝였다.

룩센도 욕구가 쌓이긴 쌓였을 것이다. 그는 흘러들어 오는 대부분 정보를 직접 처리하며, 다른 짐승보다 항상 더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힘이 강한 만큼 욕구도 크다. 하리드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었다.

“……적당히 해라.”

관계하되 흥분에 날뛰어 죽이지 말란 뜻이었다. 인간, 특히 중앙의 귀족을 죽이면 곤란하다. 황제가 원하는 바도 아닐 것이다. 룩센이 씩 웃었다.

“그럼 다녀올게? 아, 나 없다고 사고 치지 말고, 친구야.”

“허…….”

허락하자마자 희희낙락 발걸음을 옮기는 뒤통수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1초의 망설임도 사라진 룩센 덕분에 순식간에 혼자 남았다. 인간들은 보기보다 간악하고 교활하여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그래서 이곳을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누차 잔소리하며 쏘아붙인 것은 어디의 누구였는가? 불쑥 튀어나오는 꼬리가 있었다면 살랑살랑 흔들렸을 것 같은 뒷모습을 쏘아보며, 하리드는 이마를 문질렀다. 저놈이 마음껏 욕구를 풀고 돌아오는 동안 무엇을 한다지?

‘이제 어찌한다.’

그리 느긋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아주 잠깐 어릴 적에도 느껴보지 않은 난감함에 빠져들었다. 돌아본 광경에 어느새 식은땀이 흘렀다. 침묵하던 하리드 브리첼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 뭐지?”

아주 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의 주변에 둥글게 원이라도 그릴 듯이 모여 있는 인간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들이 조금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는 괜스레 목덜미의 옷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땀이 찼다.

“말해라. 다들 내게 용건이 있는 건가.”

이거였나. 황제가 바라던 상황이.

일제히 웃음이 가득 번지는 인간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것처럼.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말을 쏟아 내었다.

“용건? 당연하지요. 당신은 최고로 멋진 먹잇감인걸.”

“겁먹을 것 없어요. 꿈 연회는 모두가 마음껏 뛰노는 장소랍니다. 어떤 더러운 욕구도 허용될 수 있어요.”

“당신 멋진 거 알아요? 누굴 선택해도 당신에게 응할 거예요.”

연신 쏟아지는 눈빛은 바쁘게도 하리드라는 남자의 모든 것을 훑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의 윤기 어린 흑색과 단단한 피부, 단련된 근육. 머리부터 발끝까지 평가라도 내리듯이.

욕망이 덕지덕지 달라붙는 기분이라 혀를 찼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노련한 시간을 보낸 자신과 룩센이 아니라, 자제력이 없는 젊은 종족이었다면 큰 사태가 터져도 벌써 터졌을 것이다.

“이곳의 규칙은 알고 있어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 가면을 썼다는 것은 누군가와 잠자리를 하지 않으면 못 나간다는 뜻이에요. 질펀하게 뒹굴어야 한다고요.”

“놀리기는. 그런 건 아니고 정확한 의미는 저 3층의 방에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는 것이오.”

“어머나, 웃겨. 누가 병신처럼 들어갔다 아무 일 없이 그대로 나와요? 이봐요, 멋진 남자.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도 못 할걸요. 그래서… 파트너는 중요하죠. 가끔 예의 없는 것들이 있거든.”

자기들끼리 견제하는 시선과 말들이 꽤 우스웠다.

어느새 하리드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이번에는 자신 쪽에서 인간들을 관찰했다. 모인 자들은 외양은 제법 괜찮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기껍진 않다. 굳이 성기를 일깨워 박고 싶은 충동이 없었다.

“그래서?”

뜨겁게 단전을 달구는 그런 본능, 눈앞이 벌겋게 변하는 감각. 그러한 것. 이제 혈기 왕성하지 않은 성숙한 수컷은 그리 쉽게 날뛰지 않았다.

“어머. 당신, 배짱 있네요.”

“후우, 좋아요. 초보자를 위해 우리가 한발 양보하죠.”

“우리 중 당신이 고르는 것도 좋겠군요. 그게 아무래도 압박이 덜하지 않겠습니까?”

가면을 써서 인지가 모호해졌다고는 하나 상대에 대한 느낌은 정확히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기억력이 좋은 이들은 마법을 뚫고 눈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이리라는 추측까지도 가능하리라. 확실히 자신들, 짐승들의 육체는 인간들이 보기에 매력적일 것이다. 팽팽하게 솟아오른 근육의 육체는 낭비라고는 일절 없었으니.

“흐음. 내가 고르라고? 너희 중에?”

사실 눈앞에 벌어진 것이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매번 짐승의 피로 목을 축이고, 적군을 사살하며 충동을 가라앉히고 있었던 하리드에게 있어서 꽤나 오랜만인 성관계는 달구어진 쇠를 녹이는 빗물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유쾌하진 않다. 짙은 검은 눈썹이 일렁였다.

‘그렇군. 황제의 꼬드김에 흔들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에 빠진 듯 보였던 것일까. 가만히 바라보는 하리드를 향해, 용기 있는 누군가가 손을 뻗었다. 이제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사슴처럼 긴 목이 두드러지는 가느다란 체구의 남자. 눈이 컸다.

“이봐요, 그러지 말고 나랑 3층에 가요. 좋은 것을 알려줄 테니까. ……응? 나 담백한 것도 자신 있어요. 혹시 여자만 가능한 건 아니죠? 설마 남자 경험 없어요? 그래도, 그래도 이번에 남자랑 관계해 봐요. 내 뒷구멍 아주 쫄깃하다고 좋아한다고요. 꽉꽉 물어 줄게요. 대물도 받을 수 있어요!”

하리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여기서 내 개인 취향은 말하고 싶지 않은데.”

무심한 태도에 상대는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눈을 붉게 물들이며 엉덩이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당장 아래를 세우고 파정이라도 할 듯한 태도였다. 상대로부터 음욕에 젖은 짙은 냄새가 훅 끼쳐 왔다. 하리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으읏. 그, 그러지 말고 나와 자요. 마구 빨아 줄게요.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요. 자신 있어요, 응?”

내뱉는 목소리는 제법 미성이었고, 다가오는 체향도 깨끗했다. 가느다란 체구와 부드러운 피부는 고와 보였고, 보들보들해 보이는 머리카락은 솜털처럼 가느다랗고 결이 좋아 보인다.

수컷이었지만 관계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이는 상대였다. 내밀어져 흔들리는 상대의 손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잠시간에도 몸이 달았는지 체향이 후끈 짙어졌다. 살갗에서 풍기는 살내음이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어쩔까.’

고민하며 지그시 바라보니 못 참겠다는 듯 그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훤히 드러난 목을 느릿하게 쓰다듬으면서 달뜬 숨을 내쉬는 것이 경험이 꽤 있는 상대인 듯했다.

그러자 동시에 새치기를 한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간들이 저마다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달라붙기 시작했다. 가면 안의 눈들이 번뜩인다.

“아니 이 애송이 새끼가, 어딜 끼어들어? 죽고 싶어?”

“걸레 같은 그 몸뚱이 치워. 이 사람은 내가 찍었어, 이쪽이 먼저야!”

인간들은 가장 먼저 다가섰던 사슴 같은 남자를 툭툭 치면서 앞다투어 사납게 달려들었다. 번들거리는 눈들이나 흥분에 겨운 목소리가 무척이나 따끔하게 날뛰었다.

“아직 뭘 모르네요. 저런 풋내 나는 애송이 따위 쳐다보지 말아요! 난 어때요? 조임에는 자신이 있는데, 쫄깃하게 쥐어짜 줄게요.”

“당신은 뒤가 좋아요, 아니면 앞이 좋아요? 사내 취향이면 내가 더 낫지 않나? 난 양쪽 모두 자신 있습니다. 당신 취향에 맞춰 줄 수 있어요. 박히는 것도 좋아한다면,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아 주지요.”

“흥! 딱딱한 남자 따위, 보드라운 여체가 더 기분 좋다는 걸 이분은 알 거예요. 자, 이 손을 잡으세요, 아주 뜨겁게 달구어 줄게요. 영광인 줄 알아요, 난 먼저 이런 제안 잘 안 한다구요. 다음에도 날 찾을 수밖에 없는 밤을 가르쳐 주겠어요.”

욕망의 아우성 같다.

과연 저 굴 속으로 손을 넣어 인간을 취하면 바뀌는 것이 있을까.

“이거야 원, 난장판이로군요.”

“…….”

그 순간,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다. 유유자적, 부드러운 음성. 뚜렷하다. 그 목소리에 짜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의 인간들이 일제히 침묵한다. 그리고 하리드의 심장 역시.

쿵.

모든 감각이 가시처럼 들고 일어났다.

“상대는 초보인데, 너무하지 않습니까.”

하리드의 매끄럽게 깎아진 콧등에 주름이 졌다.

“여러분, 배려를 해야지요. 이 분위기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가면 안에 가려져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눈매 역시 바늘처럼 날카로워졌다. 불쾌감. 당혹스러움. 그리고 혼란. 심장이 조용히 아프게 뛰기 시작하는 감각은 아까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저 남자.’

그 목소리. 동시에 맡아진 이 향기. 고개를 들자 예상했던 남자가 조용히 서 있었다. 정확히는 하리드의 앞에 끼어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가린 채. 그 모습이 우습다. 꼭 레이디를 지키는 기사의 모습 같지 않나? 누가 봐도 더 호리호리한 자는 하리드의 앞을 가린 자였다.

그 불청객이 부드럽고 우아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사람은 나와 갈 겁니다. 모두 비켜 줘요.”

나긋한 미성에 몇몇이 항의를 했다.

“뭐라고요?”

“이런 게 어딨어요!”

그들은 뾰족해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방금의 시끄러움과는 확연히 다른 조심스러운 수긍이 그 속에 배어들어 있다. 강자 앞에 몸을 숙이는 약자처럼.

“양보도 미덕이랍니다, 여러분.”

그 남자는 자신의 손목을 그러쥔 상태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있었다. 하리드는 가만히 그 상황을 관조했다. 말을 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에 가까웠지만.

“미워라. 가장 매력적인 남자 둘이 같이 가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너무해. 당신 인기 많잖아요……. 그새 채가는 겁니까?”

손. 피부. 맞닿아 있는 감각. 심장이 또다시 뛰어올랐다. 이 알 수 없는 향기가 너무 진했다. 정녕 살내음인가. 이것이? 이렇게 독특하게 달콤하고 시원한 향기가? 당혹스럽다. 모든 것이 괴이했다.

하리드는 미간을 좁혔고 그를 사이에 둔 첨예한 갈등은 이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날 세우지들 말아요. 오늘 첫 경험을 끔찍하게 겪은 이 신사분이 훗날 이곳을 꺼려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면….”

나긋한 부드러움과 단칼 같은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독특한 목소리였다. 짐승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동시에 당혹스러운 생각들이 하리드 안에서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저 옷깃을 헤치고 살에 코를 박으면 어떤 향기가 날까. 탄력적으로 흐를 저 흰 피부를 입 안에 머금고 빨아들이면 어떤 맛이 날까. 이 단내가 피부의 향인가 아니면 피의 향인가. 답지 않은 뜨거움으로 음험한 생각을 머금은 순간, 뒤돌아보는 눈과 마주쳤다.

푸른색. 청명한 바다의 빛.

“그게 더 아쉬운 일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긋나긋하게 날아드는 나비처럼 녹아드는 듯한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인간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손목에 닿아 있는 손가락의 감촉이 나쁘지 않다. 아프지 않게 살며시 내려온 그 손은 무척 고왔으며 줄기줄기 피어난 서리처럼 무척이나, 차가웠다.

아니. 아니다. 문제는 이 남자의 모든 것. 그거였다. 배고픈 짐승은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발밑이 무너진다.

“그렇지요?”

“…….”

남자가 저를 돌아보며 웃었다. 동의를 바라듯.

‘뭐지, 이놈은?’

하지만 그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만져 보고 싶어지는 눈매. 접히는 눈꼬리가 야릇하다. 저 눈웃음은 습관인가. 둥근 초승달이 꼭 사냥감을 앞두며 고뇌하는 여우 같지 않은가. 풍성한 속눈썹 아래 물결치는 눈동자는 꼭 보석 같다. 보기 싫으냐 묻는다면 그렇다 대꾸할 자신은 없었지만, 은근히 사람의 속을 뒤집히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충동질. 나쁜 욕구를 끄집어내는 듯한 시선. 욕구. 눈앞의 인간은 그것을 통째로 자극하는 해로운 것이었다. 어쩐지 메마른 것 같은 입을 열며 하리드는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스스로도 몰랐지만.

수많은 생각과 욕망을 내리누르고 튀어나온 자신의 목소리는 푹 잠겨 있었다.

“그건 지금 나와 자자는 뜻인가? 저 위에서?”

“이런. 아쉽게도 난 남자 취향은 아닙니다.”

그리 말하는 주제에, 인간 남자는 입술을 엄지로 느릿하게 훑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그 손짓에 시선이 붉은 입술에 꽂혔다. 곧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도톰한 살 위로 인간의 붉은 혀가 남실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빨아들이면 달콤할 것 같은 살덩어리.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입술이 반짝이면 그 순간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잘 안다는 행동.

상대는 영악하기까지 했다. 친근하고 호의적이며 신사적인 것으로 보이는 상대였지만, 그 속에 숨긴 것은…… 어쩐지 퍽 다른 무언가일 것 같다.

“지금 말과 행동이 다른데.”

“이 행동이 어때서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혹시, 무슨 음흉한 생각이라도 했습니까? 이런.”

“…….”

시선이 가늘어지자 남자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뺨과 뺨이 닿을 만한 거리에.

“저 위에 나와 올라가고 싶습니까?”

“…….”

“당신, 재밌군요. 날 보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

“궁금한데.”

코를 틀어막고 싶었다. 체향. 이 체향은 위험하다. 얼굴 가득 독한 술을 쏟은 듯, 진한 향기에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 같아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와득.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턱관절이 꽉 다물린다. 입 안에 비릿한 맛이 돌았다. 성기가 우뚝 설 것 같았다. 이가 간지러웠다. 달려들어, 저 흰 살갗을 이로 꿰뚫어 버리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하, 농담입니다. 단지 당신은 이곳이 처음인 듯하여 도움을 주려는 것뿐이에요. 당신에게 손을 내민 인간들, 고급스러운 척하고 있지만 죄다 취향이 더럽거든요…….”

그때의 하리드 브리첼은 우습게도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다가오길 바랐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귓불이 바짝 서는 것 같다. 아니, 온몸의 털이.

“구해 주는 것, 싫습니까? 그럼 내 손을 놓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으면 됩니다. 간단하지요?”

야살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분노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손을 뻗어 방금 느꼈던 살내음을 마음껏 느끼기 바라는 충동으로 뇌가 녹았고, 동시에 절대 저 인간을 자신의 영역에 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날카롭게 교차했다.

참을 수 없다. 무엇을?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리자, 남자는 발을 뒤로 물리며 그와의 접촉을 풀었다. 아. 아쉬움이 가득 담긴 신음을 내뱉을 뻔한 순간의 자신이 더없이 짜증 났다.

“규칙을 모르는 것 같으니 설명해 주자면, 그 가면을 벗고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누군가와 3층의 방을 들렀다 아침에 나가야 합니다.”

“그 뜻은?”

“도와준다고 했잖습니까? 나와 올라간다면, 순순히 보내드리죠.”

하리드는 픽 비웃었다.

“웃기는군. 내가 누구에게 당할 만큼 약해 보이나? 저들 중 하나를 잡아채어 들어갔다 나와도 그만인 일이지. 그리고 내가 왜 너를 믿어야 하지?”

“흐응.”

스스로 생각해도 날카로운 어조였다. 호의를 담뿍 담고 다가온 남자가 멋쩍음을 느낄 만큼 무뚝뚝하고 차가웠다. 그는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가왔던 그대로 물러날 것이라 생각했다. 미련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남자는 도리어 재미있다는 듯이 작은 웃음을 흘리며 제 뺨을 문지르는 게 아닌가. 그리고 스륵,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거절은 오래간만이군요. 색다릅니다. 조금 오기도 생기고요.”

“비키시지. 너를 상대할 이유가 없다.”

“이곳은 황제 폐하의 명 아래, 자신에게 청한 누군가의 요구를 반드시 허해야 하는 곳이랍니다. 응하거나, 누군가에게 요구하거나. 누구에게 청할 것 같지 않으니 당신은 나와 저 사람 중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저들의 취향이 더럽다고 경고했고요. 힘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당하는 경우도 생긴답니다. 그러니 호의를 담아, 마지막으로 더 질문을 드리도록 하지요.”

그 입술.

하리드의 시선이 반듯하게 우물거리는 남자의 입술로 향했다.

“나쁘지 않은 밤을 보내게 해 주겠습니다. 아주 담백한 밤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

싱긋 웃으면서 상대가 알아서 상상하게끔 만든다. 가면으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화려한 미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하리드 브리첼을 어떻게 해 보겠다고 다가서 있던 인간들의 시선이 순간 그 남자에게로 향했다.

느릿한 한숨. 벌어진 입술의 떨림. 의도적으로 길쭉하고 아름다운 목선을 따라 흘러내린 손가락의 자취. 단단하게 조여진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하고, 그 안에 숨겨진 육체를 탐하게 충동질하는 욕망. 조명 아래 놓인 진주 같은 남자였다.

괜스레 기분이 나빠 툭 물었다. 꼭 풋내기 취급하는 모습이 참 우스웠다.

“남자 취향이 아니라면서 왜 매달리지? 웃기는 놈이군.”

“나도 오늘은 뒹굴 기분이 아니라서. 겸사겸사 서로 도움을 받는다고 치지요. 당신의 느낌도 그다지 나쁘지 않거든요. 이후로 친하게 지내게 될지 어찌 압니까?”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요. 그래서 내 손, 잡을 겁니까?”

남자가, 아니 페르달 공작 그가 손을 뻗었다. 가면의 눈구멍으로 휘어지는 눈동자가 수집욕을 자극하는 사파이어를 닮았다. 물끄러미 내민 손을 바라보던 짐승은 아주 오랜만에 제 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그랬다. 그는 저 남자가 궁금해졌다.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운명의 끝, 예언의 의미.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것과 동시에 수레바퀴가 달칵 굴러갔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았다. 그는 손을 잡았다. 아주 고귀하고 우아하게 상대가 웃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잘했어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끝까지 튕기는군요. ……브리첼 공작.”

“…….”

맞닿아 있는 희고 보드라운 손이 거친 손을 꽈악 힘있게 잡았다. 예상외로 무척 우악스러운 손길이다. 하리드는 가면 뒤로 보이지 않을 남자가 느릿하게 웃음 지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 * *

백조의 날개깃 같은 움직임으로 앞장선 남자는 익숙한 듯 어느 방의 문을 열었다. 늘어진 천막의 형태로 허술하게 싸여 있는 겉모습과는 달리, 들어간 자가 알아서 나올 때까지는 누구도 밖에서 해제할 수 없는 굳건한 중첩 마법진이 깔려 있었다.

참 쓸데없는 것에 정성을 들였군.

마음껏 섹스하기 위한 방을 위해 천문학적 단위의 골드를 들여 마법사에게 마법진을 수놓게 했을 과거의 황족을 생각하니 헛웃음만 나왔다.

“너, 날 알더군. 가면의 힘이 통하지 않았나?”

“어떨 것 같습니까?”

“떠보지도, 거짓말도 하지 마라. 아주 불쾌하니까.”

방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둥근 형태의 거대한 창문은 스테인드글라스였다. 다채로운 색이 달빛을 받아 방 안을 독특한 색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어두운 공간 속으로 들어온 인간 남자가 드디어 하리드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네. 사실 그랬죠. 그런 조잡한 힘 따위 통할 리가. 하지만 당신도 그것에 놀라지 않더군요. 당신에게도 가면이 소용없는 거 아닙니까?”

“…….”

“그리고 내가 누군지 그쪽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어째서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순순히 따라와서? 아니면 페르달 공작 자신의 소문이 꽤 유명한 편이라서? 그는 그 오만한 자신감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알고 있던 것은 맞지만 저 남자가 생각하는 그 어떠한 이유 때문도 아니었다.

“웃기는군. 나는 수도에 관심이 없다. 널 알고 있을 것이라는 건 지나친 자만 아닌가?”

이 공간 특유의 느낌 때문일까.

“그럼 날 모른다는 공작 각하께 제 소개를 하도록 하지요.”

저 남자만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아까보다 후끈하게 다가오는 달달한 체향이 한층 더 강해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바짝 다가온 남자가 끈적하게 속삭였다.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나는 당신과 같은 공작입니다. 그리고 뭐, 이 날카로운 태도는 이해가 갑니다. 경계심이 들고 의아하겠지요. 정말 별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자꾸 그렇게 정색하면 놀리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무슨 의미지?”

흰 와이셔츠, 그리고 검은색의 조끼의 가벼운 차림이 된 인간 남자가 나른하게 웃었다. 가면은 아직 벗지 않았다.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사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 가면은 당신과 내가 이 방을 함께 나가면 벗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당장 이 가면을 벗는 방법이 있지요.”

스르륵. 옷감이 풀리는 소리.

나직했고, 은밀했다.

남자, 르브리에의 손이 스스로의 은빛 크라바트를 풀며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른 긴장이 공기를 경직시켰다. 시선을 이끄는 것처럼 다른 어디로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긴장감을 내뿜으며 르브리에가 한 걸음 다가온다. 바짓단 아래로 빛나는 복사뼈가 은밀하게 달콤해 보였다. 네발짐승처럼 기어 저 툭 튀어나온 뼈를 핥고 싶은 저열한 충동이 든다.

“궁금합니까? 솔직하게 요구하면 알려줄 용의가 있는데.”

“필요 없다. 떨어지지? 네가 말한 담백한 밤이 이것인가.”

“아아, 정말. 은근히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분이로군요. 왜 그렇게 고고하게 굴어요. 응?”

“네가 이상하게 구는 거겠지.”

흰 살갗을 빛내는 목이 완연히 드러나고, 푸른색과 붉은색, 흰색 등 다채로운 색이 뒤섞인 달빛 아래 남자가 요염하게 웃었다. 분명 그 웃음은 요염했다. 끈적한 타르처럼, 녹아내리는 초콜릿처럼.

“브리첼 공작. 나는 말입니다. 아주, 아주, 아주 친절해서…….”

보통 친절한 사람이 스스로를 그리 칭하지는 않던데.

그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이상하게도 침을 삼키는 것도 어려웠다. 정확히는 남자의 모든 것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발긋한 색감의 인간 남자의 손톱에만 머물러 있었다. 정확히는 그 손톱이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 느릿느릿 이동한다.

“싫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꼭 다시 설명해 주고 싶어집니다. 도망가면 쫓아가서 끌어 앉히고 조목조목 대답을 듣게 해 주고 싶어지지요. 아주 친절하지요?”

그건 성격이 더럽게 나쁜 거다.

“그러니 제 앞에서 자꾸 싫다, 싫다 그런 기색으로 충동질을 하면…….”

목울대. 눈앞에 보이는 인간의 목울대를 꾹 눌러보면 어떤 신음을 낼지 궁금했다. 흰 도자기 같은 목의 피부를 손가락으로 주욱 긁어내리면 어떤 자욱이 생길지. 욕망으로 뜨거워지는 눈동자를 스스로 느낀다. 겁 없는 저 인간은 제 연약한 육체를 짐승이 어떻게 범할 수 있는지 상상도 못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리 충동질을 하는 것이다. 잡아먹어 달라고. 핥아 달라고. 이를 막아 달라고. 무참히 망가뜨려 달라고. 순간 툭 소리를 내며 르브리에의 손끝이 목의 단추를 풀었다.

하나, 둘, 셋. 딱 그만큼.

‘……달군.’

움푹 파인 쇄골이 보인 것도, 단단한 가슴팍이 제대로 보인 것도 아니다. 옷자락 안에 숨어 있을 발긋한 살점이 보인 것도 아니고, 실오라기 하나 없이 유백색의 날 몸으로 그의 앞에 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목이 탔다. 안구가 뜨거워진다. 주먹을 꽉 쥔다. 또였다. 또 이 초조함이 몸을 지배했다. 심장이 쿵덕거리며 혈류를 뜨겁게 자극했다. 눈앞이, 벌겋게……. 단순한 성욕인가, 이게? 왜 이 남자에 대한 반응만 이렇게 다른 것일까.

“친절해지고 싶어지잖습니까.”

뭐?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바로 코앞에 르브리에의 가면이 있었다. 숨결이 있었다.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순식간에 그 일이 일어났다. 감히. 겁 없는 인간이 감히 짐승의 입술을 집어삼킨 것이다.

“!”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났다. 대범하게 집어삼킨 주제에 키스의 움직임 자체는 조심스러웠다. 깃털처럼 부드럽고 보드라웠다. 입술의 살을 핥듯이 쪽 빨고, 갈라진 틈으로 축축하게 젖은 혀를 집어넣는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온기를 나누어 주는 그 움직임이 제법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흐응.”

르브리에는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차가운 듯했다. 서늘하게 움직이는 체온이 도리어 쭈뼛한 긴장감을 가져다주는 것이 퍽 나쁘지 않다. 인정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기꺼울 만큼 이 남자의 모든 것이 달게 느껴졌다. 나른하게 내뱉는 숨결도, 한 번에 잊히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외양도, 풍기는 공기도, 달콤해 목이 마르게 만드는 체향도, 그리고 이 차가운 타액조차.

“하아, 하.”

그렇다면 이 느낌은 무엇에서 기인한 것인가? 꼭 매료 마법에라도 걸린 기분이다.

하리드 브리첼은 자문했다. 이 모든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고작 인간의 아름다운 외양만으로 흔들리기에는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온 존재라는 점이다. 본능에 따라 마구 흥분할 수는 있었지만, 언제나 드러내지 않고 동요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그건 눈앞의 인간이 독특하다는 뜻이었다.

‘수장이시여.’

예언가가 내뱉었던 음울한 목소리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하리드가 때를 알게 될 것이라 했다. 운명의 시기라는 것은 언제이며, 또 그녀가 이야기한 적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정말 눈앞의 이 남자가…….

‘멸망의 예언시. 그래, 평범할 리 없다는 뜻인가?’

놈에게는 특별한 어떤 것이 있었다. 가시처럼 따끔거리는 경계가 퍼져 나간다. 자신들 짐승들이 놓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자신의 이 반응이 독특한 것이라면 아까 전의 룩센은 왜 평온했나. 자신과는 달리 꼭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하아, 달콤하네요. 상대는 무정하지만, 입술만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 딱딱한 말투나 목소리와는 다른, 맛이 있어요.”

“…….”

“한 번 더.”

입술을 맞닿은 채 바로 코앞에서 마주본 채다. 거부하지 않으니 고개를 살짝 기울여 더 깊게 파고든다. 도발적으로 바라보는 그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이것은 장난일 뿐이다, 그렇게 쏘아보는 듯했다. 가면과 가면이 마주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뭘까. 분명 속셈이 있을 텐데?’

우스웠다. 눈앞의 인간은 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짓을 하는 것인가? 그 속이 궁금했다. 그래서 하리드는 행동하기로 했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군. 너, 기술이 별로야.”

“하아? 뭐라고요?”

“자. 더 해 봐라.”

느릿하게 비벼지던 입을 슬며시 열어 주었다. 그러며 쏘아보자 상대 역시 슬그머니 눈을 휘며 웃었다. 커지는 상대의 눈동자를 뚜렷하게 바라보면서 시선으로 뜻을 전달한다. 할 수 있다면, 더 깊게 얽어 봐라. 오만한 명령이라도 하듯, 가만히 서서 입술만을 움직였다.

“좋아요.”

순간 자존심이 상한 듯 일그러졌던 푸른 눈이 순식간에 펴진다. 감정이 재빠른 인간이었다. 맞물려 있던 곳에 틈이 생기자 습윤한 소리와 함께, 가면 속으로 보이던 상대의 눈이 가느다란 초승달처럼 기울어졌다. 흡족하다는 듯이. 찌릿하다. 요사스러운 놈이었다.

“!”

그 순간,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던 움직임이 변모했다. 제 어깨를 그러잡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역시 억센 힘이었다. 몸이 휘청 밀려난다. 상대가 고개를 더욱 기울이고 물기를 머금은 혀가 목구멍에 닿을 듯 깊게 파고들었다.

쿵!

“윽!”

“하아, 하…….”

어느새 하리드의 등에는 딱딱한 벽이 닿았다. 침입자의 축축한 살덩어리는 입 속을 마구 파고들어 여린 부분을 헤집고 쑤시고 훑었다. 연약한 입천장을 간질이듯 자극하고, 단단한 치아를 느릿하게 애무한다. 내밀하고 부드러운 점막을 훑으며 침샘을 자극했다. 뜨거운 타액을 훑어가는 움직임은 화려한 무희의 춤사위 같다. 뜨거운 살덩어리가 입 안을 농탕칠 때마다 허리를 따라 쭈뼛하는 감각이 퍼져 나갔다.

이것이 키스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헷갈릴 정도로 은밀하고 자극적인 움직임이었다. 앓는 소리가 미약하게 새어 나가자 우습다는 듯이 웃는 눈이 무척 얄미웠다.

단단한 치아가 하리드의 혀를 짓씹고 간지럽혔다. 혀뿌리까지 뽑을 기세로 강하게 빨았다가 입 안의 타액을 모조리 흡수할 것처럼 젖은 소리를 내며 꿀꺽였다. 한번 접촉이 깊어질 때마다 아랫도리가 강하게 팽창하는 기분이 아주 적나라했다.

‘이 인간은 밥 먹고 매일 키스만 한 건가.’

그 능숙함에 기꺼움보다는 노여움이 설핏 치밀어 오르는 건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가만히 입술을 내어주고 있었던 하리드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당하기만 하는 건 취미가 아니었다.

“크읏!”

“……후으.”

그는 손을 뻗어 남자의 사슴 같은 목을 틀어쥐었다. 한 손에 잡힐 만큼 고운 목선이다. 움켜쥐고 잡아당겨 이번에는 이쪽에서 집어삼켰다. 놈의 부드러운 혀를 휘어잡아 빨아당겼다. 도톰한 입술을 깨물고 게걸스레 핥았다. 멀어지려는 목과 얼굴을 잡고 이번에는 놈을 벽으로 밀쳤다.

쿠웅.

“읏!”

“쉬이.”

뺨을 집던 손을 두피로 파고들고, 손가락에 얽히는 부드러운 질감을 감미롭게 음미하면서 혀를 움직인다. 입 안에서 터지는 신음이 달았다. 하리드는 그것조차 마구 삼켰다. 거칠다 해도 나름 신사다웠던 르브리에와는 달리 규칙 없이 찌르고 핥았다. 입 안에 담기는 살을 짓씹고 할퀴고 연약한 살점이 망가질 때까지 마음껏 움직였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 타액을 마구 훑고, 입 안에 들어온 살을 아플 정도로 질겅였다. 짐승은 텅 빈 허기를 채웠다. 이상하게도 키스만으로도 조금씩 조금씩 그 허기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건 기이한 감각이었다. 짐승들은 언제나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조금 더, 더. 더.

“윽! 개도 아니, 읏!”

“……더.”

허리가 저릿했다. 바르르 떨리는 상대의 움직임에 사냥꾼의 기질이 샘솟는다. 그르렁. 타액도 숨결도 달고 달아 아주 만족스러운 상대는 퍽 오랜만이라, 이대로 벗겨 침대로 쓰러뜨리고 싶은 욕구가 퍼지고 있었다. 허리가, 엉덩이가 흔들릴 것 같다.

하리드 브리첼은 이 남자를 먹고 싶었다.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게 무슨 방법이든.

“!”

그때, 가면이 주르륵 흘러내리지 않았더라면 짐승은 제 손에 잡힌 먹이를 마음껏 탐했을 것이다. 충동질하는 욕구에 힘입어 인간의 옷자락을 잡아 벌리고 목에 얼굴을 묻었을 것이다.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피부 위, 축축한 혀로 그림을 덧그렸을 것이다. 옷을 찢어발기듯 벗기고 흰 피부 위를 마음껏 괴롭혔으리라.

“하아, 하아.”

“…떨어졌군. 가면.”

하지만 쨍그랑 소리와 함께 가면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들의 입술도 멀어졌다. 멈칫한 순간 놈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입술과 입술에 이어진 투명한 선이 뚝 끊기고 텅 비어 버린 손이 아쉬움을 고했다.

“허억. 진짜 당신…….”

“…후우.”

조금 거친 숨결이 된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본다. 살짝 흐트러진 모습으로 올려다보는 모습이 배 속 깊은 곳을 자극했다. 미미하게 충혈이 된 입술을 노려보듯 바라보면서 그는 입맛을 다셨다.

배가 고팠다. 지금보다 더. 이것으로는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조금 더. 뜨겁게 눈을 뜨며 입술을 핥자, 상대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낭패감이 어린 표정이라 놀리고 싶어졌다.

“이봐요. 대체.”

“왜. 시작은 너다.”

남자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내가 도발하긴 했지만… 진짜 행동이 고약하군요! 키스를… 왜 그따위로 합니까? 무슨 매너가. 당신이 짐승이에요?”

“왜. 마음에 안 들었나?”

느긋하게 물으니 르브리에는 코웃음을 쳤다. 눈매가 제법 사나웠다. 입술을 씹힌 자는 아까의 나긋함은 집어치운 채 불쾌감과 짜증을 담아 으르렁 대꾸한다.

“그게 씹어 먹는 수준이지, 무슨 입맞춤입니까? 아아, 제기랄. 아직도 얼얼한 것 같잖아? 그게 마음에 들면 변태지.”

“……난 그쪽이 더 좋은데. 취향이야. 씹는 맛이 있지.”

“하, 웃기는군요. 그럼 당신 좋다는 사람에게 게걸스럽게 들이대시지요? 난 개가 아니니까.”

“같이 응했지 않나?”

“제기랄, 착각도 유분수지. 아니라니까요?”

“입술에 침이 가득한데.”

“누가 개처럼 날뛰며 처발랐나 보죠.”

말투가 희미하게 바뀌었음을 느끼고 하리드 브리첼은 내심 웃었다. 역시, 이 인간은 마냥 신사답고 부드러운 놈이 아니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날카로워진 눈매만으로도 분위기가 일변한다. 까닥 고개를 꺾은 르브리에가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옷소매의 단추를 풀고 한 번 접어 슥 끌어 올린다. 푸른 정맥이 돋보이는 그 흰 팔뚝을 짐승은 음침하게 바라보았다. 자욱이 잘 생길 것 같은 피부였다.

“이봐요, 브리첼 공작. 뭘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이 접촉은 없던 것으로 하지요. 앞으로 계속 얼굴도 볼 사이라서. 우리 둘. 꽤 민망해지지 않겠습니까.”

“없던 것으로 하자?”

“예. 그게 당신도 낫지 않습니까? 본래라면 황제 폐하의 은총 아래 오늘 밤의 기억을 자연히 잊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겐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니까요.”

하리드는 입술을 비틀었다. 어디서 그런 앙증맞은 거짓말을.

“너는 가능할지 몰라도 난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게 불가능하다. 취향이 아니야.”

“그놈의 취향. 취향!”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반문하자 매끄러운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자. 장난이었습니다, 장난. 당신이 좀체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니 짓궂게 대응한 겁니다. 보시다시피 이 빌어먹을 가면은 타액을 섞으면 떨어지거든. …당신이 그렇게 개처럼 달려들 줄은 몰랐습니다만.”

“수컷이 다 그렇지. 자극하니 되돌려 준 것뿐이다. 네가 먼저 혀를 할짝였으니까.”

“하. 난 안 좋았…… 아 빌어먹을. 그래요. 시작을 내가 했으니.”

비죽 비웃는 입술도 섬세하다. 목소리도 듣기 좋다. 이제는 제 머릿속의 생각들을 따라잡기 힘든 짐승은 그냥 기분 좋음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비스듬히 몸을 반만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며 상대를 지그시 바라본다. 한 번 더 핥고 싶다. 저 입술을. 그 열망을 담으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듯이 상대의 말이 느려질 때까지.

“좋습니다. 다 좋게 생각해서, 친근하게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지요.”

“친근? 이상하군. 너와 난 처음 본 사이다만.”

“그래요. 그러니 그 이상은 아니지! 이후의 아랫도리 상대가 급한 거면 지금 당장 이 방을 나가 다른 이를 찾으면 될 겁니다.”

“…….”

“왜 대꾸가 없습니까. 나 혼자 떠들어요?”

짜증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주 사나웠다. 그는 용건 끝났으니 나가 보겠다는 듯 몸을 빼는 인간을 보며 쓱 웃었다. 누구 마음대로?

“너. 전투를 아나?”

“뭐요?”

황당하다는 듯 멍해진 얼굴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웃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가늠해 보아도 까마득했다. 먼저 움직임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옷소매의 단추를 풀렀다. 그리고 꽉 조여 맨 타이를 풀었다.

그 움직임을 기민하게 경계하고 있는 상대의 눈을 훑었다. 계속, 저 인간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게 우습다. 계속 부정하고 튕기는 말을 하고 있으면서 충동질한 건 저쪽이었고, 지금도 바로 나가지 않고 기다리는 태도 역시 이상하다. 저 인간은 지금 불쾌한 척, 화난 척을 하고 있었다. 키스에 감흥이 없었다고? 개소리.

하리드 브리첼은 입술을 비스듬히 휘었다. 저 푸른 눈동자조차 제 입술에 힐끗거리며 머무르고 있음을 안다. 짐승은 본능에 충실한 생물이었고 그건 여지없이 촉을 발휘했다.

“전투의 시작은 상대의 마음이지만, 이쪽이 동의하지 않으면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지.”

“지금 그게 왜 나옵니까?”

다르지 않으니까. 손을 들어 인간을 가리킨다.

“여기서 무례한 건 내가 아니라 너고, 기분 나빠야 할 상대는 네가 아니라 나다. 페르달 공작. 그리고.”

“그리고?”

눈앞의 인간이 그러한 것처럼, 하리드 역시 느릿하게 겉옷을 벗었다. 툭 하고 무게감을 가지고 겉옷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마 룩센이 있었다면 그 비싼 것을 그따위 취급하느냐며 윽박질렀을 광경이었다. 그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너와는 달리 난 아무나와 키스하지 않는다.”

벌어지는 눈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속셈은 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니 책임을 져 줘야지.”

이왕이면 몸으로. 밤은 길었다. 그것만큼 만족스러운 것이 없어 짐승은 느른하게 입술을 가로로 찢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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