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짐승은 먹이를 찾는다
일찍이 짐승이 있었다. 언제부터 세상에 난지는 그들 스스로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동물보다 강했다. 전투는 곧 승리로 이어졌고 모든 것을 발아래 두며 포효했다.
‘살육, 파괴, 전투, 충동, 섹스, 정욕, 쾌락.’
그들을 지배하는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완벽한 짐승들의 세상, 짐승들의 나라였다. 헐벗은 것을 부끄럽지 아니하고 탐욕의 삶을 거리끼지 아니하는 쾌락에 의한 충동의 동물들. 모두가 그러했기에 완벽한 그들의 세상이었다. 오만한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왕이라 생각했고, 지지 않을 태양이라고 생각했다.
정녕 그렇게만 생각했다.
* * *
“각하, 응접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정중한 목소리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상대의 굴종을 보니 이번에는 또 어떤 소문을 들었을지 알법하다고 중얼거리며 하리드 브리첼은 시선을 들었다. 정면을 보자 제게 시선을 낮추고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인 반백의 인간이 보였다. 인간의 나이로 치면 50대 정도는 되어 보이는 주름진 얼굴의 인간이다. 아마 그쯤 되었을 것이다.
황궁에 인이 박인 듯한 저 남자는 황제궁의 시종장이다. 하리드는 몸을 곧추세우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묵직한 공기 속에 담긴 긍정에 시종장은 표하지 않으려 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서기 시작했다.
궁은 고요했다. 과한 적막이다. 화려함과 웅장함에 비해 이곳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들이 적기 때문이리라. 스읍, 숨을 삼키자 달콤한 허브 향기가 콧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보통의 인간보다 몇 배는 발달한 후각에 그것은 치명적일 정도로 농축된 것으로 다가왔지만, 나쁘진 않았다. 머리를 맑게 만들고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허브 향이다.
‘지나치게 깔끔하군.’
하리드가 보낸 반복된 입궁 거부에 황제의 속이 말이 아닐 터인데, 궁은 적막했다. 고개를 숙이고 바삐 걷는 궁인들은 기계적으로 보일 정도로 고요하다. 저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함부로 입을 떠들지 않으며 귀를 열지 않는다. 바로 지금 하리드 브리첼의 앞을 걷고 있는 저 반백의 시종장이 그러하듯이.
쿵, 쿵. 점차 빠르게 약동하는 앞선 인간의 심장 소리를 엿들으며 비스듬히 입술을 말았다. 긴장, 초조함, 두려움. 손끝에 잡힐 듯했다.
아마 황제가 자신에게 내린 부당한 처사에 대해 오가는 말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궁인들이 저러할 정도니 귀족들이야 말하지 않아도 만무하다. 충성스러운 기사가 황제에게 반기라도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인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전쟁터의 차출이 부당한 것이라고?
“……참 변함이 없군.”
문득 복도를 걷다 고개를 들었다. 가느다랗게 좁혀지는 눈매 속에 생생한 몇 년 전의 추억이 되새겨진다. 이 궁의 나이가 자신의 나이보다는 어릴 테지만, 오랜 세월을 이겨 낸 건축물을 보고 있으면 그 웅장함과 아련함에 짐승조차 감동을 느꼈다.
“지금 뭐, 라고 하셨습니까, 각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비록 그의 묵직한 목소리에 시종장이 경기라도 일으키듯 뒤를 돌아보며 겁에 질린 얼굴을 해 보였지만. 하리드는 나름의 멋쩍음을 느끼며 손을 휘저었다.
복도 천장 가득, 천사의 날개를 지닌 여인과 풍성한 웨이브를 자랑하는 금발의 미소년이 서로를 마주본 모습이 양각되어 있다. 천사의 웃음소리가 생생히 들릴 것 같은, 보드라운 깃털이 비처럼 내릴 듯한 선명한 조각이다. 저것을 만들기 위한 장인의 노력이 단순히 땀과 노력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피와 살이었을 것이라 흉흉하게 짐작될 정도로.
‘아름다움, 이라.’
그들, 짐승도 다르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고운 것은 구미를 당기게 한다. 인간들은 그것에 감탄하고 경탄하며 추켜세우지만, 짐승들은 그런 것들을 보면 발아래 꿇리고 흙탕물에 뒹굴게 하고 싶은 충동적인 욕구가 치민다는 점에서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은, 뜨겁지. 마치 영원히 타오르는 불처럼.’
대리석 바닥에 마찰하는 구두 소리가 꽤 깊게 울렸다. 연이어 이어지는 복도의 화려한 문들은 무료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적막과 고요, 이러한 평화는 그에게 좋지 않았다. 침묵은 닫혀 있는 본능을 괜스레 충동하는 고약한 것일 뿐이다. 서늘히 올라오는 익숙한 무력감을 느끼며 손가락을 쥐락펴락 반복했다. 그 모습에 앞서가던 시종장이 슬그머니 말을 덧붙였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당황하셨을 테지만, 각하. 하지만… 부디 불쾌히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그건 시종장이 관여할 일이 아니군.”
“예, 그렇지요.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허나, 요즘 폐하께서 근심이 참 많으십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답하니 얼른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재빠르다. 하지만 그는 눈앞의 인간에게서 기대와 미약한 희망을 읽었다. 또 무엇을 바라고. 속이 엉키는 기분이라 튀어나오는 비웃음을 삼키기 위해 혀를 내어 입술을 느릿하게 훑었다.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에도 짜증이 난다. 신경이 팽팽한 활줄처럼 날카로워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강철 체력이라고는 하나, 꽤 피곤했다. 하리드는 10일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싸웠고, 피를 묻혔고, 죽음을 칼에 발랐다. 그의 휘하에 있는 젊은 짐승들도 헉헉거리며 혀를 빼물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가까스로 수적 열세를 이겨 내고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 당장 황궁으로 돌아오라는 명이 다시 전달되었다. 기막힌 일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반발했을 그 무지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 자리에 있다. 거부는 세 번이면 족했다. 그 이상 넘어서면 황제는 초조함에 도를 넘게 되리라. 누구는 그 모습을 보며 역시 황제의 말 잘 듣는 개라고 비웃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나 알 게 뭔가.
‘그래야 하니까. 아직은.’
때마침, 시종장이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드니 황금색의 넝쿨로 장식된 커다란 고동색 문이 보였다. 둥근 아치 형태의 문은 섬세한 잠금 마법진이 덧발린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안전의 목적이 아니라 방문한 이의 기를 죽이기 위한 것이다.
“이곳에서 잠시 대기하시면 됩니다, 브리첼 공작 각하.”
“대기 시간은. 오래 걸리나? 빨랐으면 좋겠는데.”
시종장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혹여 변덕을 부려 발걸음을 돌릴까 우려된다는 표정이다. 저 반백의 인간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듯 보였다. 신기한 일이다. 가까운 만큼 황제의 본성에 대해서는 잘 알 텐데, 그 황제에게 충성을 바칠 요소가 남아 있었나?
“아닙니다. 폐하께선 최대한 빨리 응답하실 겁니다. 상대가 각하이시지 않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됐다. 입에 발린 말은 필요 없다. 얌전히 기다릴 테니 그대는 폐하께 잘 전달하라.”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혼자가 된 방 안을 훑었다. 응접실조차도 사치의 정점을 찍는 광경이다. 대체 왜 얼굴을 비추는 거울에 저따위 장식을 해 놓은 것인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뻐근한 목덜미에서 뿌드득 소리가 울렸다.
“후우. 지치는군. 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느릿한 숨과 함께 코끝에 닿아 오는 진한 꽃향기를 맡는다. 푸른 물속을 바라보는 듯, 청아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푸른 수정이 박힌 천장의 기운을 느낀다. 흑수정을 갈아 넣은 듯 거울처럼 빛나는 바닥과 황금 자수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무늬의 문양이 곳곳에 덩굴처럼 휘감겨 있었다. 보석과 보석과 보석. 하리드는 나른하게 웃었다.
황제가 하필 이 응접실로 안내한 것은 나름 그를 위한 배려이리라. 눅진하게 풀어져 당장 꿈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다고 항의하는 육체를 달랬다. 대지가 품은 보석에 담긴 정수와 힘이 미약하게 피곤함을 내리누르는 것을 느끼며 눈꺼풀을 꾹꾹 눌렀다.
“졸리군. 피곤하고.”
그는 괜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어제의 일을 되새긴다. 과거의 기억 속으로 날아든다. 정확히는, 제 부하와의 대화를. 마른 체구,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인간들이 흔히 선이 곱다 칭할 미남의 얼굴을 한 제 부하는 꿀처럼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 수장님. 이대로만 해 줘.’
‘자신감이 넘치는군, 룩센.’
그의 친구이자 부하는 오만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언제나 내가 내뱉는 확신이란 과언이 아닌 합리적인 결과에 의한 도출일 뿐이야. 하리드, 우리 수장님이 할 것은 이제 제대로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한 인간의 황제를 적당히 구워삶는 일일 뿐이지. 열심히 부르는 중이니 쫄래쫄래 들어가 안심이나 시켜 줘.’
‘쯧, 말버릇하고는.’
‘말버릇은 무슨. 우리는 상사와 부하 이전에, 친구거든요?’
확실히 부하인 룩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예상대로 일은 잘 풀리는 중이다. 이대로만 진행한다면 짐승들은 별다른 거슬림 없이 외유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곧 열리게 될 붉은 밤 축제를 무사히 잘 치를 수 있겠지. 길 잃은 어린 짐승들이 태어난 요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모두가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를까. 고향으로. 이 지긋지긋한 인간 세상을 떠나 그들만의 자유로운 고향으로. 그러면…….
“고향이라. 몇 년이나 지났다고 벌써 낯설어.”
인간의 세상은 모든 것이 빠르기만 해서, 비교적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떠나온 지 오래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을 감으니 고향 소리에 흥분으로 반짝이는 젊은 수컷들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룩센의 말에 담긴 그들의 기대. 흥분. 뜨거움. 열망.
고향은 짐승들의 땅이다. 공기도, 땅도, 하늘도 모든 것이 짐승들을 위해 흘러갔다. 땅을 밟는 순간 힘이 넘치고 온몸의 세포가 기쁨의 비명을 지를 것이다. 마음껏 변이하여 세상을 네발로 뛰놀 것이며, 마음껏 이를 박아 넣어 사냥감의 죽음을 즐기게 될 것이다. 본능으로 돌아가 지난 긴 세월이 꾸준히 그러했듯이.
그건 자신도 다르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전신에 짜릿한 울림이 진동을 한다. 배 속 깊은 곳 음험하게 솟구치는 짜릿한 충동이 진동처럼 퍼져 나가 즉물적으로 발기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쾌락이 뇌를 진탕시킨다. 그르렁, 울리는 소리와 함께 이가 날카롭게 치솟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는 돌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하지…….”
느긋하게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왜 이렇게 거슬리지? 뭔가를 잊은 것처럼.”
본능이 경고했다. 너희는 운명을 너무 쉽게 보았노라고.
이건 목표물을 그가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올라오는 불안감일까.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혹시라도 하리드 브리첼 본인이 인간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공기는 더럽고 상황은 답답하다. 이 갑갑한 육체에 묶여, 차가운 쇠사슬로 얽매인 것 같은 상황들이 좋을 리가 없다. 그르륵 울리는 것 같은 목울대를 스스로 쓸어내리며 입맛을 다셨다. 고향을 생각하면 식욕이 솟구친다. 이 피와 쾌락에 익숙한 몸뚱이는 분명 짐승들끼리의 축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마음껏 박고, 마음껏 타락하고, 마음껏 파괴하는 그 행위들을. 그는 제법 점잖고 얌전한 편에 속했으나 고향땅을 밟으면 많은 욕구를 풀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만큼 쌓였다. 하리드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래, 그럴 리가……. 너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어 그런 것일 뿐. 불안한 일이 있을 리 없지.”
눈을 다시 감았다. 잠시 눈이라도 붙일 요량이었다. 며칠 공복이 길었다. 다채로운 인간의 세상에서 가장 나쁜 점은 섭식이 힘들다는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것들을 데리고 다시금 비참한 사냥이라도 나가야겠다, 그리 생각하면서. 느릿하게 접히는 시야 너머로 야릇한 나른함이 흘러들어 왔다.
눈앞이 희고 붉게 물들었다. 아마도 깜빡 잠의 세계로 빠져든 것이리라. 시간은 과거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눈앞에는 매캐한 향을 피워 놓은 자가 있었다. 주름이 생생한 노파는 우울한 낯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건 언제였던가. 30년 전? 아니면 40년 전? 까마득했다. 수정구슬을 매만지던 노파가 입술을 열었다. 이미 포식자의 말로를 걷고 있는 누런 이가 독특했다.
‘우리의 현명한 수장이시여.’
쇳소리 섞인 노파 특유의 목소리가 음습하게 파고들었다. 그때의 그는 심드렁했다. 예언가의 말들은 그들의 삶에서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승리하는 정복자의 삶에 종족의 위기를 내뱉는 예언가의 말과 눈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도 다르지 않았다. 하리드 브리첼은 가장 강한 수장이었고, 그 오만함은 역대 수장 중 가장 강했다.
노파가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기 전까진.
‘종말이 다가오고 있나이다. 우리의 땅은 구멍이 난 배요, 다가오는 운명은 신의 풍랑이라. 다가오는 절벽 앞에서 우리는 노래할 것입니다.’
‘뭐라고?’
‘이 비천한 예언가가 미래의 틈을 엿보았으니, 그것은 종족의 피와 눈물입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갈 곳이 없고 달아날 곳이 없으니 사방이 막힌 형국입니다.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
섬뜩했다.
단 한 번도 짐승들에게 내려온 적 없는 절망의 예언시였다. 하리드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고, 분노 탓에 날카로운 이가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다. 불룩 격동하는 푸른 핏줄이 팔뚝 위를 가르고, 불쾌함으로 일그러진 금색의 눈동자가 노파의 눈동자를 꿰뚫어 버릴 듯 날아들었다. 불쾌했다. 자신이 지배하는 시기에 멸망의 예언시라?
‘제대로 말해라, 이시르. 네가 본 것이 무엇인지를. 감히 내 앞에서 종말을 논했을 때는, 그 목을 걸어야 할 것이다.’
‘이 비천한 예언가는 거짓을 말할 줄 모릅니다. 온전한 진실이니 판단은 오로지 수장의 몫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지 않음으로서 속이지 않던가?’
‘저는 전할 뿐입니다.’
이미 있었던 과거를 보는 것인데도 불쾌함은 역력했다. 회색으로 빛바래 앞을 볼 수 없는 노파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수장을 비웃는다. 그리고 화살 같은 경고를 던졌다. 노래하는 듯한 우울한 목소리가 바닥으로 내깔린다.
‘명심하십시오. 차후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되실 겁니다. 어느 순간이든 쓰라린 후회가 반드시 따르게 될 것이니 신중하십시오. 하나는 눈을 가린 얄팍한 안온함이요, 하나는 정당한 위선입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기억하십시오, 수장이시여. 당신은 종족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그리한다면 작은 희생으로 고귀한 대의를 품으실 수 있을 겁니다. 때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그 날카로운 푸른 손톱으로 적의 목을 꿰뚫을 수 있도록. 동족을 죽음으로 이끄는 이정표가 되지 마십시오. 당신은 우리의 지표가 되어 줄 수장입니다.’
‘적? 적을 죽여야 한다는 뜻인가. 그러면 종말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냐. 정보가 부족하다.’
‘다르지 않습니다. 허나… 완벽한 것도 아닙니다.’
예언가의 말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 모호함이다. 직접적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는 그들은 호수의 수면과 같은 비유를 통해서 넌지시 진실을 전하기 때문에 불쾌감만 찝찝하게 남았다. 결국 판단하는 예언가의 입장에선 잘못된 판단으로 비틀린 것을 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리드 브리첼은 그 예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시르, 준비된 때를 내가 어찌 알 수 있지? 네 말은 허황하다. 우리는 긴 시간을 살아가는 종족. 어느 순간 다가올 그 멸망이라는 것이 당장 막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긴 시간 끝에 다가오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지 않나? 그건 나의 예언시가 맞나?’
‘수장이시여.’
순간, 노파는 섬뜩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같은 기묘한 뒤섞임이었다. 뒤틀린 가면을 뒤집어쓴 광대같이 예언가는 흐느끼며 속삭였다.
‘제가 무어라 말씀을 드려도 당신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듣고 싶은 것은 달콤함이요, 듣기 싫은 것은 불쾌감일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제 목을 걸고 말씀을 드렸나이다. 때는 올 것입니다.’
‘……하.’
‘다만, 시기가 되었을 때 분명 수장께서는 스스로 깨달으실 겁니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우리는 끈적이는 거미줄에 걸린 가련한 곤충이니, 열심히 날갯짓할 수밖에 없습니다. 벗어나려 하면 더욱 옥죄고 놓으려 하면 붙잡는 것이 가혹한 운명의 실입니다.’
‘그럼 오만한 예언가야. 네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 네가 오늘 전해 줄 것이 내 혼란과 불안함인가?’
‘있지요. 있습니다. 우리가 죽여야 할, 적의 운명입니다. 그 적에 대해 일러드릴 테니 수장께서는 반드시 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회상을 빠져나오며 그는 눈을 떴다. 규칙적인 발소리가 귀에 닿았기 때문이다. 곧 문이 열렸고 아까의 시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하게 웃는 얼굴은 정중했지만, 여전히 검은 잉크 같은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각하, 드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하리드는 회중시계를 꺼내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분침은 변화가 미미했다. 역시 그렇군. 황제는 제 성정대로 몸이 달아 있었다. 거래의 대상이 매달리는 것은 나쁘지 않은 줄타기다. 탐욕 많은 늑대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줄을 잡아놓기 위해 인간의 황제는 과연 어떤 먹이를 내밀 것인가? 단순한 굴종인가, 아니면 속내를 숨긴 고고함인가.
* * *
황제는 제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목 뒤가 뻐근하고, 진땀이 축축하게 배어드는 손바닥을 꼼지락거리며 옷에 닦는다. 황제가 내보이는 초조함을 역력히 알고 있을 텐데도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은 꼭 달밤의 그림자 같았다.
“공작, 왔는가.”
황제는 가끔 저 남자 앞에서 자신이 어린아이가 된 기분도 느꼈고, 일국의 지배자가 아닌 제 손으로 철검 하나 들지 못하는 애송이가 된 기분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줄 구원의 대상을 만난 듯한 아득함도 느끼곤 했다.
귀족들은 모른다. 저자의 정체를. 그렇기에 안심하고 또 두려워한다.
“하리드 브리첼 공작.”
“예, 폐하.”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황제는 웃었다.
“오랜만이군. 그간 고생이 참 많았네. 그대가 일구어 보낸 승전보들은 제국의 상징이 되었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내 그대에게 너무하였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러할 것이요, 아니라면 아닐 것입니다.”
아직도 생생하다. 황제가 처음 저 남자를 보았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가. 세상이 흔들리고 디딘 땅과 하늘이 뒤바뀐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칼에 찔린 자의 고통에 가까웠다. 괴물은 지극히 근사한 모습으로 다가와 유혹의 혓바닥을 남실거렸다. 짐승의 금속성의 눈동자는 욕망을 아는 자를 부채질했다.
손을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대, 섭섭하였는가? 온당한 대가도 주지 아니하고 밖으로 방치하여서? 아니면 다른 귀족들이 그대에게 줄을 대지 못하게 방해하여서? 그것도 아니라면.”
황제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그리 묻자, 남자가 묵직한 시선을 들어 바라보았다. 순간 헉, 하고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건 공포였다. 나약하고 연약한 생쥐가 거대한 짐승 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욕구.
그러나 느긋함과 인내심을 배운 거대한 짐승은 날카로운 이로 황제를 꿰뚫는 대신, 충성과 신뢰라는 이름의 미소를 내보였다.
“폐하, 저는 그런 것에 욕망하지 않습니다.”
“브, 브리첼 공작.”
“그 어느 것 하나도 덧없는 것이니 바랄 리 없습니다.”
“…….”
안도로 입술을 떠는 황제의 나약함을 보며 강직한 기사는 고요히 미소 짓는다. 아주 가냘프고 미미한 미소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황제는 구명의 순간을 맞이했다.
“저희 사이에 이런 대화는 논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만. 아니었습니까?”
“그, 그러한가.”
“예. 중요한 것은 제가 폐하의 기사라는 것이고, 인간들이 욕심내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안함이 찾아들 때는 계약을 되새기십시오. 계약이 존속하는 한, 제 검의 끝은 황제 폐하의 적을 무참히 도륙할 것입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저는 따릅니다.”
그래, 그랬지. 저 짐승은 그랬지. 황제의 손이 순간 부르르 떨렸다. 매번 저 짐승을 시험한다. 저들이 어찌 반응하는지를 초조함으로 손톱을 깨물며 지켜본다.
‘그래서 항상 불안한 것이야.’
마침내 저 짐승이 그가 노린 것을 훌륭히 물어왔을 때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저자의 목줄을 다른 이가 탐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저 짐승을 손에 쥐게 된 이후 황제의 생은 항상 같았다.
“이런, 추…태를 보여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퍽 오랜만에 뵈니, 제게 묻은 살기의 잔향에 흔들린 것일 겁니다. 폐하께서는 기사가 아닌 일반인이니 더욱 그러합니다. 호흡을 가다듬으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심장의 떨림이 가실 겁니다.”
“크, 크흠.”
순간의 까마득한 점멸 속에서 환상을 본 황제는 의자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스스로 읊조린다. 저 남자는 현재 자신의 기사였고, 황제가 아무리 굴욕적인 명령을 하여도 기꺼이 따를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 그러니 괜찮다. 괜찮다. 저 짐승은 현재 자신의 것이다.
자신의 것.
은밀한 만족감에 기지개를 켰다. 마치 자위를 하는 것처럼 섬뜩한 쾌감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황제는 축축한 혀로 입술을 훑었다,
“미안하네, 허허.”
후들후들 떨릴 것 같은 다리를 느끼며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남자를 바라본다. 하리드 브리첼. 그가 경애하지 마지않는 충직한 기사. 절대검. 제국의 방패. 그리고… 괴물. 인간의 목덜미 따위 단숨에 물어뜯어 버릴 수 있을 강력한 괴물. 그의 괴물이다. 황제는 그제야 고요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야. 볼 때마다 그대는 참으로 그 외양이 뛰어나 짐의 심장조차 놀라게 만들어. 그래, 이건 다 자네의 그 뛰어난 외모 탓일세.”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인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건 조소였다.
“폐하, 놀랄 것이 무엇 있습니까. 겉모습은 단순히 껍질에 불과한 것. 한순간에 벗어 버릴 수 있는 겉껍질이 무엇 중요합니까? 특히 폐하께서는 진실을 아실 텐데요.”
“허허. 그거야 아네만, 또 아름다운 것에 흔들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 않은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그 껍질이 자네의 것이 아닌 것도 아니요, 본질이 무엇이든 시각에 흔들리는 것이 또 인간이지. 실제로 그대에 대한 인기가 하늘을 찌르니 자꾸만 성도 밖으로 내보내는 짐에 대한 원망 어린 시선도 독하기 그지없네. 투서까지 날아왔어.”
“이상하군요. 제 얼굴을 아는 이는 드뭅니다만.”
“어허, 명성이 있지 않은가, 명성이. 소문도 있고. 보는 눈들도 있지. 그대를 아예 보지 못한 자들의 상상이 더해져 더 높다랗게 치솟는다 봐야 하겠지. 그리고 보게나, 자네가 어디 한번 보고 잊힐 외양이어야지. 무섭기도 하고, 조각 같기도 하고, 흐음. 역시 감탄이 나오는군.”
황제는 느릿하게 상대를 훑어보며 감탄했다. 듬직한 체구의 단련된 육체는 같은 사내로서도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조각 같은 것이었다. 찌르면 단단하게 튕겨 나올 근육이 손끝에 만져지는 듯, 군더더기 없는 육체는 멋없는 기사복조차도 화려한 예식에 입을 연회복처럼 돋보이게 만들었다.
요즘 귀부인들의 정찬이 마르고 아리따운 미청년보다는 짐승처럼 달려드는 조각 같은 짐승남이라는 것을 떠올리니 더욱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황제는 비죽, 저 정갈한 짐승과는 어울리지 않을 배덕의 연회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황제에게는 잠자리를 지켜보는 고약한 취미도 있었던 탓이다. 저 조각 같은 몸매로 여인을 짓이기며 허리를 뒤흔드는 광경은 아주 훌륭하겠지. 넓은 어깨와 생동감 있는 두꺼운 가슴, 옷자락에 가려 있어 보이지 않을 오밀조밀한 복근과 팽창된 육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록하게 느껴지는 허리. 길쭉한 팔다리의 육체를 바라보고 있다 보면, 저 남자가 지독하게 잘생긴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게 했다.
귀를 덮고 짙게 흩날리는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과 깎아지는 조각처럼 높다란 콧대, 우직하게 다물려 있는 모양 좋은 입술. 그리고 잘 벼려진 검처럼 진하기만 한 황금색의 눈동자가 압권이었다. 정제된 기사였으나, 그윽한 눈매는 아찔한 관능을 속삭였다.
잠시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황제의 눈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기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끈적하게 흐르려던 공기가 뚝 끊겼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폐하. 저를 부른 이유를 말해 주시지요. 시간이 물처럼 흐르지 않습니까.”
“아아.”
남자는 단정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정제된 위압감을 두른 늑대였다. 그다지 날카롭지 않은 눈매로도 느껴지는 서늘함 속에 웬만한 자들은 쉬이 가까이하지 못하는 자. 귀족들이 침을 흘리며 바라보아도 홀로 탑처럼 서 있는 자.
어떤 여인이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 눈동자 속에는 어떤 이에 대한 탐욕도 보이지 않는다. 그게 참 아쉬운 일이다. 사랑이라는 열망만큼 누군가를 완벽히 쥐고 흔들기 쉬운 것이 없을 터인데.
“그래, 그래. 말하지. 사실은 짐이 그대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 불렀네. 정확히는 부탁이라 해야 할 것이야. 들어줄 수 있겠는가?”
“…….”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고, 황제는 습관적으로 손톱을 탁탁 튕겼다.
“오래 보아 온 그대도 잘 알 터이네. 내 진심으로 믿는 것은 오로지 브리첼 공작, 자네와 자네 가문밖에 없다는 사실을. 짐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운 것인지, 이 제국이 평화로워 보이는 겉모습 아래 얼마나 많은 혼란이 뒤섞여 있는지를. 난 정녕 자네만 믿네.”
만약 누군가가 현재의 로티에르 제국의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자가 누구냐 묻는다면?
제국의 어린아이조차도 모두 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하리드 브리첼. 그 남자를.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브리첼 공작은 현재, 제국의 가장 강한 검이었다. 기사라면 하리드 브리첼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배척을 미덕으로 여기는 골수 귀족들 역시 은연중에 그를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브리첼 공작에게는 어떠한 수단도 통하지 않았다. 협박도, 회유도, 그 밖의 여러 가지 유혹들도.
함정에도 빠지지 않았고, 정쟁에는 관여조차 하지 않았다. 탐욕과는 거리가 없는 고고한 검이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그렇게 몇 년을 황제에 대한 충성으로 전쟁터를 떠돌았다.
출신 성분이 확실하지 않은 변방의 귀족이었던 브리첼 가문의 위상이 현재 가장 높은 고위급으로 오른 데에는 황제의 꾸준한 지지가 있었다. 아무리 귀족들의 입김이 세다고 하나, 로티에르 제국의 가장 큰 별은 황제다. 누가 감히 브리첼 공작을 폄훼하겠는가.
“폐하, 저희는 계약 관계입니다. 감정의 호소를 하지 마십시오.”
단칼 같은 냉정함이었다.
“…….”
황제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순간 금이 쩍 갔다. 위태로운 그들의 관계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계약. 진정한 충성으로 인한 신뢰가 아니기에 저 검은 언제든 황제를 떠날 수 있었다. 저 절대적인 계약, 달콤한 계약에는 기한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초조함을 삼키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브리첼 공작을 잃어버린 황권은 어찌 될 것인가?
황제는 두려웠다. 그건 떨리는 눈망울이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래. 섭섭하나 그건 분명한 사실이지…….”
“폐하께선 명을 하고, 저는 그것을 받들면 됩니다. 약속된 기한까지. 이미 황권은 충분히 안정되었고, 폐하께서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후우. 아닐세, 아니야. 인간은 언제나 권력을 탐한다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브리첼 공작, 정녕 제국에 끝까지 머물 생각은 없는가?”
잠시 정적이 흘렀다. 황제는 빈틈없이 웃고 있었고, 브리첼은 냉정한 시선으로 그를 본다.
“그 건에 대해서는 일전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초대 황제와의 계약에 따라 브리첼 가문은 온전히 그대들의 것일세. 그리고 내 생이 길어 봐야 얼마나 길겠나. 그대들 또한 욕구가 있을 것이고 자손 또한 인간과 낳을 수 있지 않나. 짐은 그대에게 주고 싶은 것이 많네. 참 많아. 권력도 미인도 재물도 한없이 줄 수 있다네.”
“폐하.”
황제는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언제나 놀랍다. 가만히 숨을 쉬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끌어당기는 존재라는 것은. 아마 황제 본인이 조금만 젊었더라면, 저 남자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자가 아니었다면 주책맞게 들이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만큼 저 맹수는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황녀가 그토록…….
속으로 떠오른 욕심을 꿀꺽 삼키며 황제는 제 콧수염을 쓰다듬다 빙긋 웃었다. 그 모습 어디에도 욕망과 탐욕이 보이지 않는다. 수더분한 눈매와 선한 인상은 황제를 희대의 성군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 눈에 서린 차가움을 짐승은 알아챘다.
“그래, 그대의 말이 맞을 수도 있어. 적은 없고, 불안조차 짐의 망상일 수도 있네. 그러나 근거 없는 우려도 아니지. 그대도 알다시피 귀족들은 호시탐탐 짐의 권위를 노리고 있지 않나?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는가. 요새 일어나는 사건은 더욱 짐을 불안하게 하고 있네.”
그건 짐승이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들의 황제는 더욱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브리첼 공작, 한번 고려해 보게. 현재 짐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 듯싶은가? 왜 짐이 그대를 이곳으로 불렀을까? 요구가 무엇일까?”
“글쎄요. 식견이 짧아 모르겠습니다만.”
황제가 무릎을 철썩 쳤다.
“어허! 그대가 모르면 누가 알까. 내 넌지시 이야기했던 것이 있지 않은가. 잘 떠올려 보게.”
한편 하리드는 끓어 오르는 짜증을 삼켰다. 질질 끌기는. 은근한 기대가 어린 중년 남자의 시선이 퍽 지겨워졌다. 들끓는 그 흉악한 살기를 전혀 모르는 연약한 인간은 오로지 제 지위와 계약만을 믿고 짐승에게 미끼를 흔들어대는 중이다.
“아네, 알아. 자네가 이 제안을 유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을.”
“그러면 무르시지요.”
경직된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황제였다. 짐승은 인간의 초조함을 여유롭게 관찰했다. 아쉬운 건 이쪽이 아니었다. 끊어질 목줄을 쥐고 있는 저쪽이었지.
“그대가 내게 머무른 시간이 벌써 10년이 넘어가네. 짐의 권위가 나약했을 때 그 기반과 뿌리에 그대가 있어 주었어. 이제 와 브리첼 가문이 사라지는 것이 제국에 어떤 혼란을 불러올지 짐은 걱정할 수밖에 없네.”
“저희가 나눈 계약은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계약 연장을 바라시는 겁니까?”
“이건 그대들에게 찰나의 유희 아니던가. 짧은 시간에 불과해. 부디 배려를 해 주게나.”
같은 대화의 반복이다. 이래서 궁에 들어오기가 싫었다. 하리드 브리첼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며 얼굴을 굳혔고, 황제의 얼굴 역시 조금씩 굳어가는 중이었다. 황제는 자신과 황녀와의 결혼을 바랐다.
‘아이를 낳고 정착하라? 우습군.’
황제는 계약의 이면을 몰랐다. 그는 권력과 혈통과 지위를 주고, 이쪽은 그가 바라는 강력한 힘을 내어 준다. 상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철저히 숨겼다. 하여, 황제는 짐승들이 지난 10년간 인간의 개 노릇을 하면서까지 찾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비웃음을 내리눌렀다. 그 비밀을 알아내어 강력한 짐승을 영원히 본인의 힘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리라.
“후우. 역시 그런가?”
가만히 침묵하자,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피곤하고 힘겹다는 듯이. 그건 황제가 지닌 처세술이었다. 저 힘이 풀어진 나약한 목소리에 마음 약한 자들은 알아서 지닌 것을 황제에게 바치곤 했다. 속에 삼킨 말들을 술술 내뱉고 아부를 하면서. 물론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공작, 내 아이가 싫은 것인가? 그래서 이러한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황제는 황가와의 성혼을 원했다. 황족의 핏줄에 짐승을 거두어들여, 훗날 강력한 그 힘이 인간들 사이에서 피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허황한 꿈. 어쩌면 그 혈육을 미래의 황제들이 휘두를 수 있는 훌륭한 개로 만들려는 잔인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짐승을 길들일 수 있는 것은 같은 짐승뿐이지.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저 어리석은 인간은 양떼들 사이에 풀어진 늑대가 어떤 살육을 벌일지 모르는 것이다. 잡힐 듯한 욕심을 비웃으며 그는 관조했다.
“그렇게도 황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 꺼려지는가? 내 아이는 참 착하네. 어여쁘고, 무엇보다 그대에게 참 잘할 것이야. 그 아이는 이미 자네를….”
“폐하, 거기까지. 과분한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차갑게 내쳐지자 황제의 눈동자에 순간, 자존심 상한 지배자의 일렁임이 스쳐 지나갔다.
“묻겠습니다. 폐하께선 황녀님을 아끼십니까.”
“…그렇다네. 몰라 묻는가.”
“제가 황녀 전하께 씨만 뿌리고 도망가면 어찌하려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대는 그러지 않을 것이야.”
순간 짐승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정녕 그러합니까?”
“…….”
“제가 어찌할 것 같습니까, 폐하. 진심으로 책임감을 가질 것 같습니까.”
“…….”
“그럴 리가.”
그 순간, 황제는 흠칫 놀랐다. 몇 년을 알아 온 이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주 적나라한 것이었기 때문에. 꿀꺽. 마른침이 넘어갈 때 형형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황제의 얼굴로 향했다.
저건, 무슨 얼굴이지? 선명한 조소, 그리고 발아래를 기는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오만함. 황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철모르는 어린아이 취급당한 수치였다.
“저는 괴물입니다.”
“브리첼.”
“인간들의 옛이야기 속에 그런 것이 있더군요. 괴물에게 바쳐진 아름다운 공주님. 그 끝이 어떻겠습니까? 하고자 하는 그 부탁이라는 것은 황녀 전하를 그리 만드시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지 잊으셨습니까? 제가 황녀 전하를 어찌 볼지도?”
“……그건.”
이용하면서도 황제는 그들을 자세히 모른다. 그게 바로 저 용기의 근원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지.
그 날카로운 대치는 끼익 열리는 문을 통해 황제에게 소식을 전하러 온 시종장 때문에 끊겨 나갔다. 다급한 얼굴로 다가와 무언가를 내미는 시종장의 행동에 황제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리드 브리첼은 그 손에 쥐어진 쪽지처럼 보이는 것을 바라보았으나 보이진 않았다.
‘뭐지?’
순간 황제의 기색이 급변했다. 언제 실망하고 분노했냐는 듯, 변모하여 부드럽게 웃었다. 놀라운 변모였다. 가끔 인간들의 저러한 연기력에 짐승은 하염없이 감탄했다.
“후우. 알겠네. 알겠어, 하지만 그리 화내지 말고 다시 한번 고려해 주게. 마음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저를 부른 이유는 그것이 다이십니까.”
“아니, 그럴 리가.”
황제는 꽤나 음흉한 시선으로 공작을 바라보며 손안에 놓인 쪽지를 구겨 버렸다.
“거부한다면 다른 명을 내리지. 이건 거부하지 말게나.”
“무엇입니까.”
“그대에게 전쟁터를 벗어나, 제국 수도에 머물 것을 명령하겠네. 한동안 그대가 전쟁터로 향할 일은 없을 것이야. 이제 때가 되었네. 외부가 아닌, 내부에 머물게. 이제 그럴 때도 되었지 않나.”
“…그 말씀은?”
불쾌감으로 일그러지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황제는 공작의 알현을 허가한 이래, 최초로 유쾌하게 웃었다.
“브리첼 공작. 자네는 지금부터 사교계를 지긋지긋하게 누비는 고위 귀족의 의무를 다해 주어야겠네. 놀고먹고 즐기게. 온갖 연회를 참여하면서 말이야. 알겠는가?”
하리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 * *
사교계가 들썩였다. 하리드 브리첼 공작, 그리고 그가 이끄는 블랙 울프 기사단이 귀환한 것이다. 수도에 머물지 않는 브리첼 공작의 이야기는 유명했다. 무엇보다 사교계가 들썩이는 이유는 그의 귀환이 평소와 다르다는 점이었다. 평소와 달리 앞으로도 기약 없이 수도에 머무를 것. 황제가 내린 밀명은 그의 묵인 아래 은밀히 입에 입을 타고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리드 브리첼이 사교계에 입성한다. 황제는 공작의 성혼을 바라는 것이다. 제국에 몇 없는 공작가 중 하나이며 변방의 수호자에서 황제의 오른팔로 격상한 젊은 귀족에게 쏠리는 관심은 상당히 뜨거웠다.
또한 제국의 검이라는 유명 인사인 하리드 브리첼을 가까이에서 보지 못한 귀족들이 대다수일 정도로, 그는 남다른 은둔자였다. 그와 친분 있는 대화를 나누어 본 적 있는 자들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자, 과연 어떤 인물일까. 하리드 브리첼, 그 고귀한 기사는 얼마나 매력적일까.
* * *
그리고 여기, 누구 못지않게 흥분한 여인이 있었다.
“어떡해요! 아바마마께서 제 청을 들어주신 것이 틀림없어요!”
흥분으로 가득 찬 얼굴이 곱다. 곱게 칠한 분홍색의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가만히 두면 껑충 뛰어갈 듯한 그 기쁨을 앞에 둔 남자는 여인이 사랑스럽다는 듯 곱게 웃었다. 동시에 여인과 남자를 관찰하고 있던 방 안의 시녀들이 순간 애끓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의 미소가 너무나 우아하고 달콤했기 때문이다.
“어, 어떡해. 어떡하면 좋지요? 내, 내가 무얼 해야 할까요? 직접 보면 심장이 터져 버리지 않을까요? 아아아!”
“후후. 진정하시지요, 황녀 전하. 그는 이곳에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지만요. 그분이 사교계에 오신대요. 페르달 공작은 알지요? 내가 얼마나 그분을 기다렸는지를요. 아아, 흥분을 감출 수가 없어요.”
흥분에 가득 찬 여인은 이 제국에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황녀였고, 남자는 그녀를 가르치는 유일한 스승 페르달 공작이었다. 그렇기에 스승인 그는 황녀의 말에서 지적할 것을 몇 가지 찾았으나 굳이 날카롭게 찌르진 않았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당연하지요! 아바마마께서는 분명 혼, 혼인을…… 염두에 두시고 부르신 걸 거예요. 그가 받아들일까요?”
“흐음, 확실히 브리첼 공작이 적령기이긴 하겠군요. 황녀 전하만큼 잘 어울리는 상대도 없을 것이고요.”
“그,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황녀, 이예르라가 흥분으로 들썩이자 그녀의 꿀같이 짙은 금발이 폭포처럼 물결쳤다. 어깨의 동그란 선을 드러낸 분홍 드레스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흔들렸고, 희게 빛나는 상아색의 고운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누군가에 대한 애심으로 물든 보라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황홀하기만 하다.
확실히 황녀 이예르라는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이성에 끌리는 수컷이라면 한 번쯤 시선을 돌리고야 말 그러한 미인.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재미있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스승이라는 남자는 이 여인이 이 제국에서 지니는 가치를 생각했다.
황녀 이예르라. 황제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끼는 현 황실의 유일한 핏줄. 나름 고운 심성에 인형같이 고운 외모로 그녀의 손을 잡길 바라는 영식이 한가득 대기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런 와중에 혜성같이 수도로 입성한 브리첼 공작이라.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영광의 자리를 안겨 줄 이 여인이 바로 그 브리첼 공작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배자의 딸이 보내는 열렬한 사랑이라. 그만큼 큰 힘이 없지.
남자는 기이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너무 좋아요…….”
세상을 모르는 새장 속의 여자, 이예르라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뻐 쓰러질 것 같다는 것처럼. 흰 손이 제 머리카락을 여러 번 매만지자, 한숨과 함께 다가온 시녀들이 황녀의 머리를 다시 매만지길 반복했다.
그녀의 촉촉하게 젖은 눈을 다분히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남자는 웃었다. 확실히 황녀는 싫어하는 게 힘들 만큼 무척 아름답고 어여쁜 여인이었다. 안면 없는 브리첼 공작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꿈을 꾸는 것 같아요. 그분께서, 그분께서 저를 아실까요? 말을 걸었다가 심장이 멈추면 어쩌지요? 그대로 뻥 터져 버릴지도 몰라요.”
“그 무슨 약하신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황녀 전하를 모르는 이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무관심한 것으로 정평이 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히 그럴 리가요. 그는 이 제국을 지키는 공작 아닙니까.”
황녀가 뺨을 붉게 물들였다.
“정말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는군요. 덕분에 용기가 나요. 항상 고마워요, 페르달 공작. 나 용기 내 볼 거예요. 그가 등장하는 연회는 황궁 연회겠지요? 이번에는 내가 열 차례인데……. 올까요? 초대장은 언제 보내야 할까요?”
남자의 부드러운 위로에 황녀가 제 입술을 가리며 웃으며 연신 조잘거렸다. 흥분에 겨운 작은 종달새 같다. 황녀의 스승이자, 브리첼 공작만큼이나 유명한 페르달 공작은 황녀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튕겼다. 황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봤다.
“응? 뭐예요, 페르달 공작?”
“어허. 집중하셔야지요. 좋으신 마음은 알겠으나 지금이 무슨 시간입니까.”
“무, 엇을요?”
동그랗게 떠진 보라색 눈동자를 보며, 남자가 사르르 눈꼬리를 휜다. 그 농밀한 눈빛에는 의도적인 유혹이 가득해 만약 순진한 황녀가 아니라 다른 여인이었다면 마른침을 넘기며 손을 내뻗었으리라.
“공, 작?”
수컷의 진한 향을 내뿜는 미소를 보면서도 그저 놀라기만 한 황녀 이예르라만 아니었다면. 르브리에 페르달은 조금 김이 빠진 듯했다. 괜스레 피식 웃은 그는 다정한 눈짓과 웃음으로 제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잊으신 것 같은데, 저희는 수업 중이었답니다.”
“앗! 그, 그랬죠! 어떡하지, 미안해요. 내가 사담만 실컷 늘어놨군요.”
“네에, 그렇습니다. 오늘 할당량을 채우지 않으면 이 스승이 곤란해진답니다. 다름 아닌 황녀 전하의 수업이니 기록이 모두 남는답니다. 폐하께서 경을 치시겠군요.”
황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미, 미안해요. 페르달 공작……. 어, 어떡해요? 시간을 연장할까요?”
부끄러움으로 뺨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은 위엄을 가져야 할 황녀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상당히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귀여움이다. 페르달 공작은 온기를 담으며 입술을 휘었다. 그 둥근 호선이 화려한 이목구비에 접목되자 오색 찬란한 나비와 같이 빛나 시녀들의 숨을 또다시 멎게 했지만.
“하하. 농담입니다.”
“네?”
“황녀 전하를 놀리려 심술을 부린 것이란 뜻입니다. 단지, 전하.”
“뭔가요?”
페르달 공작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저도 사내인데 제 앞에서 너무 낯선 남자의 이야기만 하시는 것 아닙니까. 너무 섭섭합니다. 제게도 관심 가져 주시지요. 이를테면.”
“고, 공작?”
르브리에는 목울대에서 울리는 것 같은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 느릿하게 뻗어 오는 그 손가락에 방 안의 모든 여자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은밀한 목소리. 그 달콤함.
“조금 더 친근한 사이가 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는 좋은데요.”
“페, 페르달 공작……. 그, 그.”
황녀의 얼굴이 이제는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남자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낮게 웃음을 터뜨렸고, 시녀들은 헛숨을 들이켜며 치마를 꽉 쥔 채로 초조함을 삼켰다. 야릇했다. 저 남자는 지나치게 퇴폐적이다.
“으, 읏. 공, 공작…….”
“사랑스러우신 분.”
그의 손이 황녀의 잘 관리된 머리카락을 아주 느릿하게 얽기 시작했다. 마치 우아하게 뻗은 나뭇가지처럼 희고 아름다운 손끝이 황녀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굽슬굽슬 파도를 치는 금발을 톡 건드리다가, 기둥에 얽히는 넝쿨처럼 긴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감아올렸다.
“머리칼이 무척이나 부드럽군요.”
“읏…….”
그건 사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무례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황녀의 유일한 스승의 자격을 지녔다고는 하나 어찌 감히 황녀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나긋나긋한 손짓은 너무나 꿀처럼 달콤하여 황녀 본인도, 주변의 시녀들도 멍한 표정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머리카락마저도 사랑스럽습니다, 황녀 전하.”
그가 만진 것이 머리카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 촉감이 피부에서 느껴지는 것 같은 저릿함.
‘흐읏.’
황녀는 발끝을 오므라뜨렸다. 붉어지는 그녀의 뺨을 보면서 짓궂은 듯, 만족스럽게 웃는 르브리에의 청아한 푸른 눈을 힐끗 바라보면서.
야릇했다. 이상하게도 온몸에 열이 붙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이예르라 황녀는 도톰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동시에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다. 제 스승인 남자, 벌써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한 지 2년이 훌쩍 넘는 사람을.
낯가림이 심한 편인 그녀에게서 쉽사리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낼 만큼 사교적이고, 웬만한 여인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답게 사교계의 꽃이나 다름없는 유명인. 황녀는 당황을 삼키며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게 읊조렸다. 낯이 불처럼 뜨거웠다.
“놀, 놀리지 말아요. 정말 부끄럽게! 나도 알아요. 이래서 인기가 많은 거지요? 다들 페르달 공작의 이야기를 해요. 이번에는 누구와 사귀었다느니, 매번 너무 바쁘잖아요. 가벼운 바람둥이의 손길에 넘어갈 만큼, 이 이예르라, 채신없지 않답니다. …그러니 이만 놀리세요.”
빠르게 말을 잇는 황녀를 바라보다, 남자가 빙긋 눈을 휘었다.
“또 섭섭한 말씀을. 제가 감히 어찌 전하를 놀리겠습니까. 이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랑스러운 음색, 사랑을 읊조리며 발갛게 물드는 얼굴. 다가가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은 진심입니다. 제 접촉이 불쾌하십니까, 전하? 제가 싫으신가요?”
“그, 그, 그렇지만… 이런, 이런 거리는 너무 가까, 가까운 것….”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 사이에.”
“으윽…….”
“아니 그런가요?”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을 바라본다는 듯한 저 시선을 받으면, 아무리 받는 것에 익숙한 황녀일지라도 어쩔 줄 모를 기분이 되곤 했다. 괜스레 쿵쿵 뛰며 난리가 난 심장을 도닥이면서 이예르라는 스스로에게 되새긴다.
르브리에는 친절한 것뿐이야. 만약 저 사람이 날 좋아한다면, 이런 이야기에 뜨거운 질투를…… 보였겠지?
“아하하!”
그 순간, 르브리에는 크게 웃은 뒤, 손을 거두며 팔짱을 꼈다. 느긋하게 바라보며 웃는 모습은 다분히 짓궂기만 했다. 이예르라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 남자가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그가 웃음을 간헐적으로 내뱉으며 눈물을 훔쳤다. 눈물이 날 만큼 웃겼던 모양이다. 황녀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변했다.
“사랑스러운 전하, 언제나 잘 넘어오시는군요. 이러니 자꾸 놀리고 싶어지는 거 아닙니까. 조금 더 사람에 대한 면역을 기르세요.”
“뭐예요?”
황녀의 두 눈이 날카롭게 치떠졌다. 어떻게 저리 못될 수가!
“또 놀리는군요! 못됐어요, 페르달 공작!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요!”
“전 정말 섭섭했는데요, 전하. 아니, 속상한 것에 가깝군요.”
“응? 속상하다고요? 왜…요?”
보고 있던 시녀들이 혀를 쯧쯧 찼다는 것을 둘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저 사교계의 인기남이 황녀 전하에게 속마음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수군수군. 연신 힐끗거리며 피어나는 로맨스일지도 모르는 광경에 식은땀 섞인 손을 마구 쥐며 수군수군. 소수는 ‘능수능란한 공작의 화술에 순진한 황녀 전하가 오늘도 넘어가시는구나!’하는 우려를 삼킨다는 것을.
“뭐예요.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왜… 섭섭한데요? 말해 봐요, 어서. 어서요.”
“저희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된 지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응……. 그럴 거예요.”
정확히는 2년하고 10일.
그 숫자를 일일이 세고 있었다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이예르라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의 스승은 어떤 여인에게도 자상하고, 뛰어난 능력과 학식을 지녔으며, 뒤처지지 않는 매끄러운 화술과 품성으로 노귀족들의 인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가끔은 그를 너무나 사랑한 사람들이 황족인 그녀에게 감히 질투를 품을 정도로.
“바로 그겁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 후우. 이게 뭡니까.”
“윽?”
“너무하세요, 전하.”
순식간에 황녀와의 거리를 좁히듯 테이블에 바짝 상체를 숙인 남자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 풍성하게 흩어지는 르브리에의 속눈썹은 특이하게도 투명한 듯한 빛깔이다. 결 좋게 흐트러진 회색 머리카락과는 사뭇 다른 빛깔.
“대체 언제가 되어야 저를 르브리에라고 친근하게 불러 주실 참입니까? 밖에서도 페르달 공작, 둘이 있을 때도 그리 부르시고. 자꾸 그리 호명하시면 버려진 듯 풀이 죽곤 합니다. 너무 차갑고 냉정합니다.”
“그, 그건 생각도 못 해 본 문제인데…….”
“불러 주세요. 전하. 다정하고 부드럽게.”
“이, 이름은…….”
말문이 막혔다. 능숙하게 말하고 있지만, 축 처지는 르브리에의 눈꼬리를 보면 섭섭하다는 기색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황녀는 웃음으로 빈틈없는 남자가 제 속을, 감정을 내보이는 것을 처음 보아 입술을 달싹일 정도로 당황했다. 정말로 섭섭한 것인가? 유심히 관찰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브리첼 공작의 이야기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입니다. 예, 물론 잘 압니다. 제 애틋한 제자께선 그를 무척이나 경애하신다는 것을. 하지만 저희는 다른 의미로 가깝지 않습니까? 친근함에는 표현이 따르는 법이지요. 저는 증거를 원합니다.”
“공작…….”
“관대하신 전하, 제가 속상하지 않게 해 주세요. 자, 따라 해 보시지요. 르브리에. 친근함을 담아서요. 미소도 같이 주시면 세상을 가진 듯 행복하겠군요. 어서.”
“읏. 지금? 얼굴을 보고 …이렇게 바로요?”
“네. 지금. 어서.”
다시금 르브리에의 그 요망한 손가락이 황녀의 얼굴 위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무려, 톡. 발갛게 도톰한 입술 끝을 건드렸다.
“!”
“이 입술로, 제 이름을 담아 주시지요, 전하.”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스치다가 다시 한번 꾸욱, 윗입술보다 두꺼운 부피감을 지닌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눌렀다. 따끈한 체온이 닿자 황녀는 손끝을 확 오므라뜨렸다. 배 속 깊은 곳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당황으로 마구 팔락거리는 황녀의 눈꺼풀을 바라보며, 남자가 와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붉게 달아오른 것 같았던 끈적이는 공기가 와장창 깨진 것도 그 순간이요, 황제가 몰래 붙여 놓았던 그림자 호위들이 살기를 거둔 것 역시 그 순간이었다.
“하아!”
“숨은 쉬셔야지요.”
손이 물러나고, 치아를 내보이며 웃는 르브리에의 아름다운 모습에 황녀는 찬물을 맞은 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곧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 사람이 날 또 놀렸구나! 황녀는 주먹을 꽉 쥐고 위협하듯 흔들었다.
“정말 이러기예요! 못됐어, 정말!”
“흥, 전하께서 수업에 집중하지 않은 벌입니다.”
“…르, 르브리에!”
씩씩거리면서도 섭섭한 기색을 기억한 모양인지, 바로 이름을 불러주는 황녀를 보며 르브리에는 손으로 잦아드는 웃음을 가렸다.
“듣기 좋군요.”
황녀는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그냥, 그냥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으면 좋았잖아요. 이런 장난은 하지 말아요, 르브리에.”
“제가 전하를 그만큼 아끼고 경애한다는 뜻입니다.”
“아아, 정말! 너무 짓궂잖아요!”
“아하하하!”
퍽 훈훈한 광경이었다. 황궁 내부에서 황녀의 부마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 사람이 르브리에 폰 인센 페르달 공작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황녀와 스승의 사이는 지나치게 친근했다.
황녀는 이제 울상인 얼굴로 빠르게 속삭였다. 이 역시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황녀는 순진했지만, 황족이었으니.
“알, 알잖아요. 나는, 속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당신은, 그러니까 스승님은 내게 그런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난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비록 브리첼 공작에게 보내는 연심과는 다르지만…… 꼭 가족 같이요.”
풀이 팍 죽은 황녀의 모습을 보고 턱받침을 하며 남자는 야릇하게 웃었다.
‘가족이라.’
믿음을 주는 사람, 가족. 그렇게 중얼거리는 달싹임은 소리가 되어 흐르지는 않았다.
“슬프군요. 제가 전하를 곤란하게 만든 건가요?”
황녀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녀는 진심을 내보이듯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그를 응시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나는요. 브리첼 공작이 좋아요. 정말 좋아서 죽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장난으로라도 질투한다고 말하지 말아 줘요, 르브리에.”
진지한 황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남자는 제 턱을 톡톡 두드렸다.
“대체 그가 왜 그렇게 좋으신가요? 제대로 마주한 적도 없는 이 아닙니까. 얼굴도, 제대로 대화도 해 보지 않은 상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괴이합니다.”
황녀는 잠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냐고요? 연애를 그렇게 많이 해 본 르브리에가 그걸 물어요?”
지그시 바라보는 르브리에의 푸른 눈은 진지해 보였다.
사랑에 이유가 필요할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황녀는 자신의 과거를 곰곰이 떠올렸다. 언제부터 그 남자를 보며 심장이 이렇게 시끄럽게 뛰기 시작했는지. 전쟁터의 혹독한 상황에서 그 사람이 어떤 일과를 보냈고, 어떤 승리를 거머쥐었는지 가장 궁금한 것이 되었는지를.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고뇌하듯 턱을 문질렀다.
“글쎄요. 제 심장은 그렇게 열렬하지 않아서일까요. 부럽기도 하고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합니다. 자, 전하. 이 냉혈한에게 그 두근거리는 첫사랑의 순간을 들려주시지요. 어떠셨습니까?”
“음. 그가 좋은 이유는…….”
이예르라의 보라색 눈동자가 순간, 제비꽃처럼 몽롱하게 풀어졌다. 그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진하게 떠오르는 그 순간들을 르브리에는 조용히 관찰한다.
고요하고, 습윤하게. 늪지대의 짐승처럼 기민한 시선으로.
“그냥. 그냥이에요.”
“첫눈에 반하셨습니까?”
“그래요. 그랬어요. 보는 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꼭 달려오는 마차에 치인 것처럼, 기다려 온 사람을 만난 것처럼……. 궁의 복도를 걸어오던 그분을 발견했던 그 순간부터 나는 영혼을 빼앗겨 버리고 만 거예요.”
르브리에의 입술에 슬쩍 차가운 비소가 흘렀지만, 사랑의 순간에 빠진 여인은 알아채지 못했다.
“영혼을 뺏기다니, 그건 꼭 브리첼 공작이 악마라도 되는 것 같은 비유로군요.”
그 말에 황녀가 펄쩍 뛰며 정색했다.
“아니, 아니에요. 그분은, 그분은 그런 사악한 분위기가 아니에요. 너무나, 너무나 황홀한 사람이에요.”
“황홀하다?”
“그래요.”
단호하게 내뱉는 시선이 제법 또렷하다.
“짙은 향수를 쏟아버린 듯 어지러웠어요. 알고 있던 내 세계가 통째로 뒤흔들리는 느낌은 공포에 가까웠죠. 충격이었고 혼란이었어요. 하지만 눈을 뗄 수 없었어요. 그분의 모든 것들이 하나씩 조각나 내게 박히는 기분이었는걸요.”
“흐음, 그렇군요…….”
“브리첼 공작을 보기 전의 나와, 본 후의 내가 나뉜 것 같아요.”
사랑. 사랑이라.
어떤 사랑은 역사 속 위대한 결말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사랑은 비참할 정도의 참극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늘어진 회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남자는 고요히 웃었다. 과연 이 귀여운 제자의 사랑은 어떤 방향으로 굴러가게 될까.
어쨌든 르브리에는 산뜻하게 웃으며 이 대화의 끝을 맺었다.
“이제부터 그 브리첼 공작을 지긋지긋하게 보시게 되었으니, 전하의 스승으로서 열심히 응원 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그는 화제의 인물이라 경쟁자도 많으실 겁니다. 힘내시는 겁니다?”
“뭐야. 응원이에요, 아니면 겁주는 거예요?”
“둘 다겠죠?”
“정말! 아-아주 고맙군요. 짓궂은 스승님!”
그 소문 속의 하리드 브리첼이 궁금한 것은 비단, 황녀뿐이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부드러운 깃털 같은 미소를 지은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 은밀한 냉기를 내뿜었다.
* * *
“제에발 얼굴 좀 펴라, 수장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룩센.”
“좋아,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제발. 웃는 건 바라지도 않아. 얼굴만 펴라. 다가오는 인간들 죄다 기겁하며 도망가게 생겼다. 어디 대화나 하겠어? 넌 잘생겼지만, 정감 가게 생긴 건 절대 아니거든.”
“도망치면 귀찮지도 않을 테니 좋은 일이지. 이대로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나올 거다.”
“와아, 그렇게 되면 황제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다름 아닌 중앙 연회를 조용히 있다 나오겠다고? 누가 널 그렇게 놔둔다니?”
“시끄러워.”
친구의 쏟아지는 잔소리를 들으며 하리드 브리첼은 밤하늘 아래 밝게 빛나기만 하는 길의 조명을 내려다보았다. 영구히 인간들을 수호하고 그들의 보호가 되어 준 마법이라는 산물이 어둠 속에서도 길을 밝힌다. 황궁의 연회 홀로 향하는 길목은 반짝이는 듯한 대리석을 하나하나 깔아 놓은 무척이나 사치스러운 길이다.
뭔가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인상을 확 찌푸린 친구가 하리드에게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웬만하면 황제의 비위를 맞춰 주라 했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덥석 들어주는 건 아니지? 인간과의 결혼이라니, 어이구. 완전 미친 소리지.”
어깨를 부르르 떠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결혼? 긍정적인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다.
“네가 잔소리하지 않아도 안다. 눈 깜빡할 새에 죽어 버리는 인간과 결혼할 리 없지. 그런 충동이 들 리도 없고.”
“물론 그런 문제도 있지만, 네가 누구냐. 넌 우리 수장이야. 겨우 약해빠진 인간 따위와 혼인? 가당치도 않지! 요람의 종족들이 황제의 제안을 들으면 들불처럼 일어나 난리를 칠걸. 저 건방진 인간 황제 놈의 목을 확 따 버리겠다고 말이야.”
낄낄 웃는 룩센의 얼굴을 보며 하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 철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중앙 연회에 대해서 모든 걸 알아보지는 못했는데. 좀 불안하네. 황제 이 빌어먹을 인간, 왜 매사 이렇게 촉박하게 일을 진행하는 건데? 전쟁터에 갑자기 집어 던질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말이야.”
하리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보는 이도, 듣는 이도 없다지만 룩센의 말들은 보통 귀족들이 들으면 기겁할 것들뿐이었다.
“넌 입만 조심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아이고, 그러세요. 우리 수장님은 행동을 조심해야 할 텐데? 네가 또 겉가죽은 참 반지르르하잖냐. 그 여자들 생각 안 나? 세사족의 공주들. 널 보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임신할 것 같다고 하던데. 아래가 질펀하게 젖었다고 난리 난리를…….”
“닥쳐라, 변태 같으니.”
“캬아, 자기는 얼마나 정숙하시다고. 어디서 내숭을 때리고 그러세요, 네가 얼마나 정력왕인지 내가 다 기억하는구만. 그게 언제더라. 오백 년 전이냐, 천 년 전이냐?”
“닥치라고 했을 텐데.”
룩센 디암. 저 나이대의 종족치고 마른 체구를 지닌 멀끔하게 생긴 청년을 보며 누구도 그 속에 숨어 있는 음험함을 알아채지는 못하리라. 진저리를 내며 혀를 차자 상대가 깔깔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그래도 걱정하지는 마. 내가 누구냐, 언제나 수장님을 위하는 부하 아니냐. 장애물 하나 없이 길 깔아 주지. 넌 달려가기만 해.”
“걱정한 적 없다.”
룩센은 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그래. 그 오만함. 그 태도. 아주 좋아. 목표물만 해결하면 다 끝이야. 완전히 끝이라고.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 알고 있지? 다른 생각이나 다른 변수, 지금은 절대 안 돼. 사양이야. 그것만 잊지 마.”
“…….”
룩센은 요람에서부터 이곳까지 따라온 하리드의 참모이자, 등을 맡길 수 있는 자이며, 종족의 이인자임과 동시에 친구였다. 그러나 애석히도 저 남자는 성격이 좋지 못하다. 냉소적이고 냉철하여 세상을 비틀어 보며 조소하길 즐기는 성정이었다.
“어. 다 왔나 보네. 기대돼서 심장 터질 것 같구만. 황제가 친히 불렀으니 한층 더 경악스러울 거 아니야? 그 악명 높은 중앙 연회가 얼마나 경악스러운지 좀 볼까.”
“…….”
그 순간, 저 멀리서 인간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마차가 달리고 있는 길의 끝을 향했다.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거대한 연회궁. 아직 다가서지 않았는데도 느껴지는 공기가 다르다.
인간들의 수도 연회를 제대로 참가하는 것은 실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얼굴만 비추고 자리를 뜨는 것과 제대로 이름을 올리고 귀족들과 안면을 트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였으니. 황제의 변덕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리드는 목을 꽉 조이고 있는 셔츠를 괜스레 손가락으로 흔들었다. 귀찮군.
룩센은 창문으로 보이는 궁을 보며 경악하며 소리쳤다.
“와. 저거 봤어? 미쳤지. 미쳤어! 돌은 게 분명해. 저 보석들로 떡하니 건물을 짓다니, 진짜 인간들은 기겁할 의미로 대단하단 말이야? 와아, 돈 지랄도 적당히 해야지. 그리고 보석으로 저리 큰 건물을 만들려면 인간들의 시간으로 대체 얼마나 걸린 거야? 와아, 집착 심하잖아.”
“적당히 해라. 우리와 문화가 다른 것뿐이지.”
룩센이 날카롭게 눈을 뜨며 그를 노려봤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다는 듯. 그 가벼운 분위기에 웃음이 아니라 짜증이 나는 것은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이기 때문일까.
“어이구! 젊은 놈들이 들으면 까무러치겠네. 우리 수장님, 언제부터 그리 관대해지셨어? 한때 피를 부르는 광포한 파괴자로 유명했던 하리드 브리첼은 대체 어디로 갔나 몰라. 정말 고귀하고 엄숙한 기사 놀이에 심취하기라도 한 건 아니지? 그러다 손톱 녹슨다.”
“시끄러우니 그만 좀 떠들어라.”
끼익,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좋아. 좋아. 가 볼까, 하리드?”
“……그래.”
무료함과 귀찮음으로 가득 찬 한숨과는 별개로, 브리첼 공작의 본분을 다할 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샛노랗게 빛날듯한 금안을 번뜩이며 짐승은 마차의 문을 열고 발을 디뎠다. 냄새를 맡기만 해도 역겨운 인간들의 짙은 욕구 속으로 걸어 들어갈 시간이었다.
* * *
순진한 이들은 황궁의 중앙 연회에 대해 환상을 품곤 했다. 황족들이 사계절에 한 번씩 여는 중앙의 연회. 수도의 대귀족들이 입장할 수 있는, 황궁의 초대장을 받은 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환상의 장소. 그런데도 그곳에 있었던 일들을 떠드는 이가 너무나 적어 베일에 싸인 꿈의 연회.
‘꿈 같긴 하군.’
하리드는 그들이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뚜렷한 시선들을 느꼈다. 그 적나라한 시선들은 마치 내쏘아진 화살과 같았다. 다른 것이라면 쇠에서 느껴지는 정적임이 아니라, 당장에라도 다가설 것 같은 번들거리는 욕구에 가득 찬 시선이라는 것.
따로 이름을 호명하지 않고 입장하는 것부터가 보통의 연회와는 달랐다. 황제가 하필 제대로 된 첫 연회의 초대를 이것으로 한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황녀와의 결혼을 자꾸 거부한 자신을 놀리고자 함인가, 복수인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가.
“워후. 대단한데. 아주 코가 비틀어지겠어…….”
룩센이 옆에서 작게 속삭이며 혀를 내두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도 동의했다. 코가 비틀어질 듯한 정액 냄새, 향수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아주 진했다. 그리고 적나라한 욕망의 시선들 역시.
‘누구지?’
‘문장을 보면 모르나. 브리첼 공작이지 않나. 둘 중, 저 흑발이겠지. 그 유명한 인물이 드디어 사교계에 납시었군.’
‘정식 첫 연회가 중앙 연회라니 선택이 고약한걸요? 폐하께선 무슨 생각이신 거죠? 아니면 보이는 것과 달리 공작이 꽤 지저분하게 성생활을 즐기는 걸까요? 후후후.’
여기저기서 떠드는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쏟아졌다. 그들은 은밀히 속닥거린다고 생각했겠지만, 인간의 청력이 아닌 짐승의 그것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소리들을 주워 삼킨다.
‘흐응, 그나저나 브리첼 공작 섹시한데요. 어깨, 팔뚝,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저 육체. 힘 좋게 생겼어요. 벗겨 보고 싶은데……. 때리는 맛이 있을 것 같아. 등도 단단해 보이고 저런 남자가 뒷모습이 죽여주거든요. 엎드리게 해 놓고 엉덩이를 내리치면, 흐응.’
‘어허! 브리첼 공작을 희롱했다간 적당한 처벌로 끝나지 않을 거요, 부인. 남작 출신 기사 놈 하나를 주웠다고 들었는데 그놈으로 만족하시는 것이 어떨지. 부인께선 브리첼 공작을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끼고 사는지 모르나?’
‘하아. 침대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저렇게 다리가 풀릴 것 같은 얼굴은 오랜만인걸요. 어쩐지 위험해 보이잖아. 과연 누가 먼저 다가갈까요? 어떤 취향이려나. 뭐 아는 사람 없어요?’
‘페르달 공작과 비견될 미남이에요. 흐응, 날 선택해 주지 않으려나?’
가득 채운 붉은 정욕과 끈적한 열망들에 가장 처음 떠오른 것은 비웃음. 역시 들은 것과 다르지 않다.
처음 짐승들이 인간들에게 섞이기 위해서는 남다른 준비가 필요했다. 배우고, 알고, 오히려 인간들 스스로보다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했다.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의 확보는 필수였다. 황궁에 숨어 있는 곳곳의 더러운 정보들을 블랙 울프 기사단만큼 잘 아는 이가 있을까?
하여 중앙 연회에 대한 소문 역시 들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했다. 역시 인간들이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지. 룩센이 주변을 훑어보다 속살거렸다. 질렸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간은 가끔 짐승들보다도 욕구에 대단했다.
“우리 벽의 꽃으로 가만히 있다가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잡아먹힐라.”
“그 입 좀 조심하라 했을 텐데.”
룩센은 하리드의 어깨를 툭 쳤다.
“으허, 하지만 수장님. 저것 좀 봐. 우리를 아주…… 잘 구워진 토끼 바라보듯 하잖아.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니까? 와, 인간들이 무섭기는 처음인걸. 번들번들한 눈빛을 보니 까딱하다가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홀딱 벗겨지겠어.”
“자중해라.”
사중으로 만들어진 다이아몬드 샹들리에가 연회장에 화려한 불빛을 쏘아 내고, 금으로 치장된 바닥과 벽이 눈을 찌푸리게 할 만큼 번뜩였다. 그 안에는 온갖 화려한 공작새들이 모여 있는 듯 보통은 보기 힘든 복장을 한 여자, 남자들이 한가득 있었다.
연회장의 입구 쪽에는 부채를 살랑이며 모여 있는 여인들이 웃으며 자신들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쭉 둘러본다.
건물의 구조는 단순했다. 3층의 건물. 1층은 모두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댄스홀이었고, 2층은 살롱과 비슷하게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 쉬운 구조. 그리고 3층은…….
‘온갖 더러운 소문의 출처는 저곳인가.’
하리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둠으로 가려진 3층의 구조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고급스러운 재질의 천으로 가려진 공간들은 길게 이어진 방을 가린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비밀 장소로의 입구를 막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곳에는 천막 아래 붉은 끈이 내려 있었고, 어떤 곳은 푸른 끈이 내려져 있었다.
아마도 이 공간에서 느껴지는 은밀하고 음습한 욕구의 향기와 가식이라곤 하나 없이 스며드는 비릿한 피 내음과 정액 냄새의 근원지는 저곳일 것이다. 간혹 살과 무언가가 마찰하는 소리, 비명 같은 것들이 들리기도 했다. 보통의 인간들은 들을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인간의 욕구가 제멋대로 귓바퀴를 타고 흘러 들어와 내부를 핥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때마침 웃음기를 담은 룩센의 목소리가 인간들의 욕망을 향해 이죽거렸다.
“오호라, 저 미묘하게 가려진 천막들이 다 그것이란 말이지?”
“그렇겠지.”
“절대로 정보를 밖으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암묵의 장소. 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당사자들밖에 모른다던. 어떤 섹스가 벌어지는지 상상도 못 하겠어. 인간들은 어떨 때 보면 우리보다 몇백 배는 잔인하다니까.”
붉은 끈 표식은 안을 사용하고 있는 자가 있다는 뜻이고, 푸른 끈은 비었다는 뜻이다.
그 순간, 두 짐승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은밀하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동시에 와락 인상을 구겼다. 적나라하고, 즉물적인 욕구. 시선이 형체를 지니고 옷 위를 더듬는 기분이다. 좋진 않았다.
“정보 전하는 놈이 소문 그 이상의 것을 보게 될 거라더니. 어째 틀리지 않은데. 그렇지? 야아, 살 떨린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코 베이겠어.”
“…….”
그랬다. 이곳은 고급스러운 창굴이었다.
만약 황제가 곧바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하리드 브리첼이나 룩센 디암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을 수도 있었다. 황제는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라 하였지 그 밖의 다른 명령을 덧붙이진 않았으니. 그러나 황제는 재빨랐다.
“모두 언제나처럼, 작위도 직위도 그 모든 편견도 잊어버린 채 본능에 취한 시간을 보내다 가시게나. 처음 오는 이도 익숙한 이도 편견 없이 자유롭기를. 무거운 침묵 속에 행복하기를 바라네.”
선한 얼굴 뒤에 교활함을 삼킨 인간의 수장은 그렇게 말하며 하리드를 묶어 두었다. 황제와 은밀한 시선을 교환하는 이들이 히죽 미소를 짓는다.
황제도 열심히 이곳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또다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쾌락에 가득 찬 비명 소리. 여자의 것도 남자의 것도 있었다. 대체 무슨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가끔 인간들의 비틀린 성욕은 짐승들의 파괴적인 욕구만큼 대단하다.
저 연약하고 으스러뜨리면 부러질 가련한 생물들은 오늘도 열심히 타액을 섞고, 허리를 흔들며 씨를 뿌리는 것일 테지.
‘?’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리드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하는 것을 느꼈다. 소름이 돋을 만큼 뜨겁고 끈적거리는 열정으로 가득 찬 시선들은, 지금 입장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느릿하게 그 시선의 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 그는 드디어 보았다. 그 남자를. 발광하는 밤하늘의 별처럼 모든 이의 눈빛을 쓸어 담고 있는 그 화려한 남자를. 어쩌면 마주하지 않았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제 악연의 실을 마주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