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테라 길드원들의 활약
“그래. 할 수 있어!”
“이까짓 몬스터쯤이야.”
“모조리 죽여 버린다!”
김강현의 짧은 말은 모두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면 앞으로 몬스터라는 불안함에 떨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이 보였다.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헌터들은 필연적으로 놈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거나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났다.
물론, 던전에 들어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목숨을 담보로 삼는 것이었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돈도 좋지만 더 이상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 세상에 살고 싶었다.
덕분에 그동안 으르렁거리며 싸우던 헌터들도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일치하여 힘을 합쳤다.
대표적인 자들이 중국의 무인들과 마인들이었다.
“방어를 철저하게 해!”
“마인들은 공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무인들은 마인들을 지원해.”
그들은 치열하게 싸웠기에 서로가 익힌 무공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몬스터에 따라 공격 스타일을 바꿔가며 적극적으로 나섰고, 큰 피해 없이 처치해 갔다.
‘제발 헌터들이 이겼으면!’
‘인류에게 희망을.’
‘화이팅!’
세계 곳곳에 있는 대피소의 사람들도 헌터연합의 승리를 기원했다.
김강현은 말은 헌터들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이 싸움을 단순히 헌터들만의 싸움으로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테티아의 의되였다.
마족 중에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강해지는 놈들도 있으니,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준다면 억제 효과가 있을 거라 판단한 것도 있었다.
몬스터들은 지그문트가 연 다섯 곳의 게이트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기존 던전들이 폭주하고 차원의 틈들이 벌어지자 도시 한복판에서도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를 예상한 김강현과 테티아는 싸움의 시작되자 사람들을 대피소 혹은 지하 방공호로 대피시켰다.
또한 지정된 장소에는 마법 각인과 보호 아티팩트를 설치해 안전에 신경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김강현에 말에 안정을 찾았다.
테티아의 판단대로 사람들은 헌터들을 응원하며 불안감을 없애고 있었다.
“정말 인류가 이길 수 있을지 몰라!”
테티아는 지구에 도착한 후 미셀을 비롯한 신의 기사단을 양성했고, 가이아의 의지를 받들어 사람들에게 능력을 부여한 뒤 헌터로써 강해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테라의 공격에 의해 인류가 이길 가능성은 20%로 생각했었다.
그만큼 그로시아스가 이끄는 몬스터들의 위력은 강대했고, 마계의 개입도 고려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김강현에 의해 부서졌다.
그는 테라에 있을 때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졌으며 더욱 강해졌다. 게다가 테라 길드를 세워 함께 싸울 동료들을 양성했다.
‘이제 승률은 57%까지 상승했어 남은 건 모두가 위기에서도 성장하길 바라는 수밖에…….’
그 마음은 전장의 헌터들에게 모두 전달되었다.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하나 되어 눈앞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 * *
“역시 네놈은 내 천적이구나. 이렇게 버틸 줄이야!!”
“나 또한 마찬가지다. 설마 라셀의 키메라 세포를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을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까.”
“이 몸을 무시하지 마라. 이 몸은 마계의 대마왕, 지그문트다!!”
콰아아앙!!
지그문트와 김강현은 대화를 하면서도 몸을 멈추지 않았다.
지그문트는 검은 마기를 전신에 두르고, 키메라 세포가 있어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상처를 입는다 해도 약간의 마력이면 금방 해복되었다.
라셀이 드래곤 하트로 마나 공급을 한 것을 알고 있던 지그문트는 자신의 뿔에 마력을 축적해 계속 끌어 쓰고 있었다.
‘마법 캐스팅을 신체의 움직임으로 하며 마투술을 펼친다고?’
김강현은 마검으로 지그문트의 공격을 상쇄시키며 생각했다.
보통 마법 캐스팅 과정은 수식을 계산하여 발현할 수 있는 일정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위저드가 캐스팅을 하는 동안 자신을 보호해 줄 가디언이 필요한데, 지그문트는 이런 상식을 뒤엎었다.
신체의 움직임을 마법의 캐스팅에 적용시켰고, 그러자 싸울 때마다 마법이 자연스레 캐스팅되어 저장되었다.
이를 눈치챈 김강현은 지그문트의 일정 행동을 억제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마투술의 실력은 마법 없이 웬만한 최상급 마족은 가볍게 상대할 정도로 강력해서 공략법을 찾기 어려웠다.
‘역시 쉽지 않아. 이 인간을 어떻게 없애야 하지?’
지그문트 또한 김강현을 죽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김강현의 신마력은 단숨에 키메라 세포를 소멸시켜 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뿔에 마력을 저장해 두지 않았다면 이 육체는 소멸했을 거야.’
천세후의 기억을 통해 신마력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신마력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맹수였다.
상처를 통해 자신의 몸에 들어온 신마력은 자신의 마력을 탐하며 힘을 키웠고, 계속 휘돌아다니며 키메라 세포를 죽여 나갔다.
덕분에 평소보다 회복이 더뎠고 점점 불사의 효과가 없어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창과 단단한 방패의 싸움이었다.
김강현은 신마력을 기반으로 계속 공격을 펼쳤고, 지그문트는 키메라 세포를 무기로 삼은 육체로 버티고 있었다.
승부를 보기 위해 숨겨놓은 패를 꺼내야 하지만,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동안 실력을 꽤 키웠구나.”
“그래야 네놈을 죽일 수 있었구나.”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불가능해. 이 몸도 놀고 있던 게 아니니 말이다!”
카루소와 헬릭스의 싸움도 치열했다. 그들의 공격이 펼쳐질 때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불꽃을 다루는 마족으로 모든 공격에 불꽃이 실려 주변이 사막화되어 갔다.
둘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마법을 캐스팅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역시 저 채찍과 키메라 세포가 가장 큰 적이야!’
마력에 따라 변화하는 무기와 헬릭스의 신체 능력을 막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를 위해 카루소는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다.
“응?”
“지금부터는 다를 거다.”
말과 함께 카루소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불꽃의 색이 하얀색으로 바뀌었다.
헬릭스는 카루소의 불꽃을 통해 무슨 짓을 벌이는 것인지 알아차리고 소리쳤다.
“미친! 정말 목숨을 걸었구나.”
“네놈을 죽일 수 있다면 싼 값이지. 평생을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니 이야.”
“후우. 이 몸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이 몸도 목숨을 걸지.”
“뭐?!”
쉽게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선 헬릭스는 자신의 힘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그와 함께 헬릭스의 전신이 붉게 물들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정확히는 전신에서 고열이 발산되어 뿜어지는 연기였다.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
김강현이 신마력에 대한 단초와 강해지는 방법을 찾아내자, 헬릭스 또한 방법을 강구했다.
마법으로는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없었다.
마족으로 태어나 마법에 대한 재능을 타고났으며, 선대 발록왕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마계의 모든 마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드래곤 로드였던 벨가르트의 레어를 털어 드래곤의 마법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분석했다.
그래서 생각이 닿은 곳이 키메라 세포였다.
그동안 헬릭스는 키메라 세포를 단순히 상처를 입었을 때 빠르게 회복하는 용도로 활용했지만, 이를 이용하여 신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방법을 찾았다.
“큭!!”
‘이게 무슨?!’
갑자기 변한 헬릭스의 움직임에 카루소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공격의 방향도 어디서 펼쳐질지 몰라 난감했고, 채찍도 헬릭스의 신체와 동기화되어 무한대의 회복력과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힘과 스피드, 반응을 비롯해서 신체의 모든 능력이 비상식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헬릭스는 키메라 세포를 사용해 강제로 신체 능력을 끌어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마력의 양 또한 3배 이상 들어갔고, 체력도 받쳐주지 못했다. 게다가 집중력이 끊기는 순간, 키메라 세포가 폭주해 자기 자신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헬릭스는 이를 악물며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변의 모든 것과 동기화 된다.’
세포 하나하나 세밀하게 감지되는 움직임.
주변의 마나와 마력, 그리고 손에 쥔 채찍마저 키메라 세포와 연동하여 움직였다.
‘공격이 통하지 않아!’
카루소가 생명을 불태운 불꽃 공격을 아무리 시도해도 헬릭스는 아무렇지 않게 막아내자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그리고 점점 초조한지 공격에서 허점이 하나씩 드러났다.
둘의 큰 차이는 상대방에게 패를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였다.
카루소가 생명을 깎으면서 싸우는 것처럼, 모든 힘에는 대가가 필요하기에 헬릭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싸우는 헬릭스의 모습은 점점 카루소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그문트에게도 영향이 미쳤다.
‘카루소가 진다?’
지그문트는 김강현과 싸우면서 카루소와 헬릭스의 싸움을 신경 쓰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서로 각기 싸우고 있었지만, 카루소와는 사전에 한쪽의 싸움이 끝나는 대로 도와주기로 이야기를 한 상태였다.
그리고 만약 헬릭스가 이긴다면 바로 김강현을 도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했다.
지금 김강현 하나를 상대하는 데도 힘이 드는데, 헬릭스가 합류하면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간에게 다시 질 수 없다!! 더 이상의 패배는 없다!!’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마법을 시전했다.
지그문트는 절박했다. 인간에게 패배한 것이 수치스러웠고, 치욕이었다. 라셀에게 패배한 소식은 마계에 완연하게 퍼져 다른 대마왕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었다.
결국 그는 숨겨두었던 비장의 수를 꺼냈다.
“크아아아앗!!”
“미친?!”
‘정말 나를 죽이기 위해 환장했구나!’
지그문트의 눈동자가 완전히 검게 물들고 마력이 폭주하자, 그동안 제어하고 있던 키메라 세포도 함께 날뛰기 시작했다.
덕분에 지그문트의 덩치가 점점 부풀어 오르며 덩치를 키워갔다.
‘최악의 경우 놈과 함께 죽는다!!’
지구에 현신한 본체는 일부분일 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마계에 일부를 남겨두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죽어도 영혼만 무사하면 다시 부활이 가능하니 확실히 김강현을 죽이기 위한 방법으로 목숨을 건 것이었다.
“어? 어?!”
곧바로 지그문트는 김강현을 향해 뛰어들었고, 김강현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며 오러를 날렸지만 지그문트는 이를 무시하며 달려왔다.
그가 노리는 것은 단 하나, 김강현의 몸이었다.
‘설마 이것마저 견딜 수 있을까?’
물리적인 힘으로 싸울 수 없다면, 정신세계에서 싸운다.
지그문트는 키메라 세포로 김강현의 몸을 흡수한 뒤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미 이 방법으로 천세후를 상대했기에 자신이 있었다.
“젠장!!”
김강현은 지그문트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너무 늦었다.
살짝 지그문트의 손이 닿았을 뿐인데, 놈이 빠르게 김강현의 몸을 끌어당겼다.
“김강현!!!”
“네 상대는 나다!!”
이를 본 헬릭스는 김강현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눈앞의 카루소 때문에 갈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이를 악물며 카루소를 상대해야 했고, 그사이 김강현은 지그문트에게 집어삼켜져 버렸다.
* * *
“지그문트 님의 존재가……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놈과 싸우다가 소멸된 건가?”
지그문트가 김강현을 자신의 정신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순간, 일시적으로 지구에서 지그문트의 존재도 사라졌다.
이것을 평범한 헌터들은 감지하지 못하지만, 지그문트의 직속 수하인 세 마왕과 마하드라, 그리고 테티아는 알아차렸다.
테터아는 김강현이 지그문트를 반드시 쓰러트릴 거라 믿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계속 지구 곳곳에 위치한 헌터들을 서포트했다.
반대로 종속의 마왕 체이난과 천공의 마왕 라이트는 당황스러움에 마력이 흔들리며 싸우던 적에게 빈틈을 보였고, 마하드라는 지그문트의 기운이 사라지자 속으로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광혈의 마왕 크로아셀은 눈앞의 적을 상대하느라 지그문트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놓치는 순간…….’
‘이 싸움은 끝난다.’
그것은 검천호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한 호흡에 몇 차례의 공방이 오고 가는데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 목숨을 두고 싸우는 승부라는 것이 너무도 아쉬울 정도로 둘의 실력이 뛰어났다.
‘아주 재미있어. 지그문트 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 후회가 없을 정도로!’
힘들고 지친 상황임에도 크로아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그는 다른 마왕들과 달리 이 싸움에 회의적이었다.
지금 마계에선 신계의 천족들을 상대로 한 싸움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두 세력의 영토 싸움 또한 심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들보단 천족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다.
한데 이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무력을 가진 인간과 싸우게 되자 기쁘기 짝이 없었던 것.
이는 검천호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계속 싸우고 싶지만, 이제 끝을 내야 한다!’
생사를 건 싸움에서 강한 상대와 겨루는 것은 즐거웠지만, 검천호는 정확하게 현실을 직시했다.
‘길어야 20분이 한계야.’
마나로 신체 능력을 강화해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떨어진 체력을 보완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실력의 완숙함도 크로아셀이 위였다.
지금까지 그와 동등하게 겨룰 수 있었던 이유는 검천호가 익힌 천류검이 테라와 마계, 그리고 신계에서 볼 수 없었던 검술이기 때문에 공략법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려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수십 차례 공방을 주고받은 상황.
곧 천류검의 약점을 찾아 공격할 것이니 승부를 봐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그런데 몇 차례 검을 나누다 보니 크로아셀의 예리함이 아주 약간 떨어진 것이 느껴졌다.
거리상 스웨덴으로 짐작되는 곳에 있던 강대한 마력의 존재가 사라진 이후부터였다.
크로아셀은 지그문트가 사라진 것을 개의치 않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무의식중 일부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그것이 검천호에게 틈을 만들어주었다.
“크윽, 인가안!!”
“이제 간신히 하나 들어갔을 뿐이다.”
검천호가 크로아셀의 마력이 흐트러진 곳을 천류신검으로 베었다.
그러자 크로아셀의 왼쪽 허리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크로아셀은 당황하며 역공을 취하려고 했지만 이미 검천호는 만반의 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이대론 끝이 나지 않는다.’
정신없이 싸우던 크로아셀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눈앞의 인간은 강하여 평범한 수로는 이길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 수를 꺼내야 하는가?’
그리고 순간, 크로아셀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버렸다.
‘무슨 짓을?’
갑작스러운 크로아셀의 행동에 놀란 검천호가 의문을 드러냈다.
크로아셀의 검은 명검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그의 파괴적인 마력을 견디어낼 정도로 단단했다.
웬만큼 뛰어난 검들도 그의 마력을 견디지 못했기에 이 검은 어떤 명검보다 소중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필요가 없어졌다.
생각과 함께 크로아셀은 전신의 마력을 손에 집중했다.
마력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며 검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블러드 스펠!”
크로아셀이 자신의 피를 마력에 섞어 밖으로 분출한 것이었다.
핏방울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암기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의 손에 피로 만들어진 검 한 자루가 만들어졌다.
그에게 광혈이라는 호칭이 붙은 이유인 블러드 스펠이라는 기술 덕분이었다.
이때 그는 눈이 붉게 물들며 미친 전사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피를 이용하는 만큼 얼마나 피를 소모하느냐에 따라 위력과 시간이 달라졌다.
‘놈이 목숨을 걸었구나.’
그 모습을 본 검천호는 전신에 소름이 돋아 오싹거렸다.
크로아셀의 블러드 스펠을 본 순간, 스치기만 하더라도 치명상을 입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확한 판단이었다.
블러드 소드에 베이면 크로아셀의 피가 타인의 몸에 스며들어 독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를 상대한 마수나 마족이 살아남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유일하게 지그문트만이 살아남았고, 덕분에 크로아셀을 수하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검천호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블러드 스펠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 모든 걸 걸자.”
그 또 목숨을 걸고 모든 마나를 천류신검에 집중시켰다.
그렇게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분위기를 읽고 승부를 걸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승부는 한 번에 결정된다.’
둘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웠다.
그 순간 빈틈이 보일 것이고, 상대방은 그 빈틈을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먼저 검천호의 발걸음이 한 발짝 나아가며, 크로아셀을 향해 몸이 쏘아졌다.
‘죽인다!’
크로아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는 블러드 소드를 뒤로 젖힘과 동시에 검천호의 약점을 탐색했다.
하지만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검천호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예상하며 방어하고 있었다.
‘먼저 공격해라!’
이것이 검천호의 노림수였던 것이다.
크로아셀이 공격하는 순간 완전무결한 자세가 무너지며 분명 빈틈이 보일 테니까.
‘답이 보이지 않는다면 정면 승부뿐!’
우지지직!!
생각과 함께 블러드 소드의 크기가 무지막지하게 커졌다.
평범한 롱소드가 3m 크기의 검으로 변하자 크로아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손으로 블러드 소드를 들며 검천호을 겨누었다.
‘끝이다!’
크로아셀이 노린 것은 검천호의 천류신검이었다.
만약 신체의 일부를 노린다면 이를 방어하거나 회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은 달랐다.
검사에게 유일한 무기가 사라진다는 건 패배나 다름없었다.
‘역시’
짧은 순간에 판단을 내린 크로아셀을 보며 김천호는 속으로 감탄했다.
정확하게 바로 자신의 약점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신체의 어떤 부위를 크로아셀이 노리든 막을 자신이 있었지만, 천류신검만큼은 예외였다.
유일하게 천류신검만이 자신의 힘을 감당할 수 있기에 이 검이 부러지면 자신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천류신검에는 푸른빛 무리가 맺혀 있는데,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마인드 소드, 심검이 펼쳐져 있었다.
쿠우웅!
블러드 소드와 천류신검이 부딪치자 일제히 충격파가 몰아치며 검을 쥔 팔이 저릿거렸다.
더불어 강대한 마력과 마나가 충돌하며 다리의 힘이 풀릴 정도로 강한 반동이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검을 손에서 놓지 않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팽팽하게 힘겨루기가 이어지며 어느 누구 하나 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피하는 순간 목숨을 잃는다!’
크로아셀과 검천호의 힘은 동등하여 승부를 내기 어려웠다.
그때,
‘응? 역시 한계를 보이는 건가?’
미세하지만 천류신검에 금이 가는 것을 본 크로아셀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하지만 조금의 방심이 승패를 가릴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블러드 소드에 힘을 쥐었다.
검천호도 이를 알아차렸지만 여기서 천류신검을 움직이는 순간 블러드 소드가 자신의 몸을 꿰뚫을 것이었다.
그리고, 검천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
갑자기 검천호가 천류신검에 마나를 세게 집어넣으며 검에 가 있는 금을 벌어지게 만들었고, 일부로 산산조각이 나게 만들었다.
이를 본 크로아셀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산산조각이 난 천류신검에는 아직 심검이 맺혀 있었고 그것들이 일제히 블러드 소드를 꿰뚫으며 크로아셀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심검의 크기는 더욱 커져 마치 수십 자루의 검이 날아가는 형상을 띠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앗!!”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크로아셀은 비명을 질렀다.
전신에 심검들이 박힌 것이다.
무방비 상태로 직격을 당하자, 마치 전신에 난도질이 당한 것처럼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일격으로 더 이상 지구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승부를 걸었던 블러드 소드는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뿌려져 있어 더 이상 싸움이 불가능했다.
“어떻게 된 것이냐?”
크로아셀은 간신히 서 있으며 검천호에게 물었다.
“내 목숨과 검을 걸었을 뿐이다.”
그 대답대로였다.
검천호는 일격필살의 승부를 걸었는데, 천류신검을 희생해서 공격을 펼친 것이었다.
천류신검은 운석으로 제작되어, 심검을 입힌다면 블러드 소드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만약 실패했다면 크로아셀과 반대의 입장이 되어 있겠지만, 다행히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검을 잡는 건 어렵겠군.’
검천호는 밀려드는 고통에 표정을 찡그렸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검과 함께 오른팔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만약 검을 쥐고 있던 오른팔을 휘두르거나 방향을 틀었다면 크로아셀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그는 목숨 대신 오른팔이면 생각보다 싼 것이라 여겼다.
“다시 기회가 있다면 싸우고 싶군.”
“얼마든지.”
말과 함께 크로아셀은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일반적인 소환이라면 마계로 귀환이 되겠지만, 그들은 본신을 그대로 가지고 차원을 넘어온 것이었다.
마계에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본신의 조각을 남겨두었지만 그것은 지그문트가 승리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다시 부활할 것이다.”
크로아셀은 지그문트의 승리를 믿으며 의식이 사라졌다.
“남은 건 강현과 아이들을 믿는 것이구나.”
크로아셀이 사라지자 그제야 검천호는 긴장이 풀리고 싸움의 후유증이 오는 것을 느꼈다.
곧 그는 상처를 통해 남겨진 크로아셀의 마력이 자신의 몸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 그대로 주저앉아 마나 호흡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 * *
“크으윽!”
‘이대론 몇 번 버티지 못해!’
김건은 헌터들을 통솔하면서 체이난의 움직임을 봉쇄하며 공격했만, 시간이 갈수록 벅참을 느꼈다.
“후방 라인은 더 올라와서 전방을 도와주세요. 점점 공격이 거세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위저드들은 마수의 공격이 끝나면 바로 반격합니다!”
그리고 헌터들은 김건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했다.
하지만 팽팽한 힘겨루기만이 이어질 뿐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아앙!!”
체이난도 답답함에 으르렁거리며 화를 분출했다. 베히모스와 동기화했음에도 인간들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놈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살아남은 마수들이 꽤 보였다.
체이난은 고민 끝에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무슨 짓을 하려고?!”
그는 순식간에 50m 정도 간격을 벌리고는, 위저드에게 걸맞은 최적의 공격 환경을 만들었다.
“젠장, 모두 몸을 숙이세요!!”
순간, 김건이 체이난에게서 뿜어지는 마력의 흐름을 읽고 소리쳤다.
무의식중에 헌터들은 김건의 말대로 몸을 숙였다.
“크아아앙!!”
체이난은 꼬리에 오러를 길게 뽑아낸 뒤 휘둘러 주변에 있는 마수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다행히 마수들의 크기가 사람의 4, 5배 정도 되어, 헌터들은 살짝 몸을 숙인 것만으로도 체이난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자기편을 죽였어?”
“그게 아냐! 놈의 점점 몸이 커지고 있어!”
체이난의 꼬리에는 놈이 죽인 마수들이 마치 꼬치처럼 매달려 있었는데, 하나같이 몸이 비틀어지며 생기를 잃어갔다.
그와 동시에 체이난의 몸이 커지며 점점 마력의 양이 증가했다.
그 마력은 전보다 사납고 강렬하여 모든 헌터들이 느낄 정도로 선명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절대 질 수 없지!’
마수들을 모두 잡아먹어 힘을 키운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마족과 마수는 상대방을 죽인 뒤 힘을 흡수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체이난은 이를 활용하여 마수들의 힘을 키우고 천천히 잡아먹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인간들의 저항이 거세자, 어쩔 수 없이 지금 마수들을 흡수한 것이다.
“크아아아아앙!!”
‘이 빚은 인간들의 목숨으로 대신한다!’
체이난은 이를 갈며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놈들 때문에 계획이 틀어진 만큼 대가를 톡톡히 받을 계획이었다.
체이난이 시전한 피어가 헌터들의 뇌리에 공포를 심어주었다.
“저, 저걸 어떻게 이겨?!”
“여기서 끝인가…….”
방금 전까지 체이난과 팽팽한 승부를 이뤘건만, 갑자기 힘의 격차가 커지자 헌터들은 두려움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김건도 마찬가지였다.
헌터들을 인솔하고 있어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방법이 하나 있어.”
“뭐라고?”
“놈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이야.”
그때, 조용히 후방에 있던 이유하가 나서며 말했다.
그 말에 모든 헌터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했다.
“가능하면 끝까지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으니까 말하는 거야. ……생명을 불태우면 돼.”
“자세히 설명해 봐.”
“지금 버프로 일시적으로 능력치가 향상됐지? 이건 신성력으로 가지고 힘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킨 거야. 그런데 신성력을 써서 생명력을 힘으로 전환하면 어떻게 될까?”
“그게 가능하다고?”
“맞아. 하지만 싸우다가 죽을 수 있고…… 어떤 후유증이 있을지 몰라.”
이유하는 신성력을 이용한 버프의 강도를 최대로 올리면 생명력까지 소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달았다.
하지만 상대방의 동의 없이 생명력을 소모시킬 수 없으니, 지금까지는 신체에 무리가 없는 정도로 버프를 시전한 것이었다.
“그럼 확실히 놈을 죽일 수 있는 거지?”
김건의 대답에 이유하는 주변의 헌터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건 혼자서는 솔직히 승산이 없었다.
만약 생명을 불태우면서 싸우면 일시적으로 지금보다 3~4배 정도 강해질 테지만 유지 시간이 굉장히 짧을 테니까.
‘여기 있는 헌터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불가능해.’
승리 조건은 모든 헌터들의 참여였다.
그래야 간신히 자신들의 승률을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같이 죽자는 말은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까?”
“놈을 쓰러트릴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기꺼이 참여하죠!”
“젠장, 나 죽으면 살아남은 녀석들이 가족들은 챙겨주겠지.”
“빨리 버프 좀 걸어주쇼!”
분위기를 읽은 헌터들이 자진해서 이유하에게 버프를 걸어줄 것을 말했다.
“여러분.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그럼 여기서 도망치라고요?”
“저놈을 두고 가면 세상에 멸망할 겁니다.”
“저 마수를 죽인 뒤 돈이나 한탕 벌어보자고요!”
이유하는 헌터들이 혹시라도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려 결정했을까 싶어 만류했지만, 그들은 여기서 명예를 지키고 죽을 각오를 한 상태였다.
사실 아까 싸우는 도중에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지금 놈을 죽이지 못하면 더 이상 죽일 기회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들의 선두엔 김건이 있었다.
“후우, 알았어요.”
단호한 헌터들의 태도에 이유하는 질끈 눈을 감으며 그들에게 걸려 있는 버프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자 헌터들의 몸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솟구쳐 전신을 감쌌다.
“빛무리가 사라지는 순간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이에요. 모두 살아남길 기원할게요.”
“젠장, 이런 힘을 평소 가지고 있으면 좋았을걸!”
“반드시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도달하고 말 테다!”
“여기서 죽으면 너무 아깝잖아.”
갑자기 강대한 힘을 지니게 된 헌터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열에 휩싸였다.
마치 마약을 한 것처럼 정신이 잠깐 몽롱해지며 힘에 취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저희들은 목표는 하나입니다. 단숨에 끝냅시다!”
선두에 김건이 나서며 말했고, 그 뒤를 헌터들이 뒤따랐다.
“크아아아앙!!”
‘인간들 따위가 끝까지 대항해?!’
체이난은 포기하지 않는 헌터들을 보며 분노가 폭발했다.
인간은 하루살이였다.
그런 녀석들이 계속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게 당연했다.
‘어? 어?! 이게 무슨!’
그런데 생각보다 헌터들의 저항이 거셌다.
분명 공격 패턴은 아까와 똑같은데 힘의 격차가 달라졌다.
‘나를 압도한다고?’
헌터들은 철저하게 체이난의 약점을 공략했다.
마력의 흐름이 약하게 흐르는 부분을 계속 노리자 점점 빈틈이 커져갔다.
‘내가 진다?!’
동기화한 베히모스의 육체가 점점 버티기 힘들어졌다.
체이난은 패배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들었지만, 이를 부정했다.
이미 테라에서 인간들에게 패배를 겪고 트라우마가 되었다.
다시 인간들에게 진다는 건 인정할 수 없었다.
그때, 체이난의 목덜미로 김건이 달려들었다.
“흐아아앗!!!”
‘단숨에 놈의 목숨을 거둔다!’
김건은 라운드 실드에 5중 실드를 만든 채 피어스 방패술을 시전했다.
“크아아앙!!”
베히모스의 핵에 김건의 힘이 도달하며, 놈의 육체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노, 놈이 쓰러진다.”
“어서 피해!!”
거대한 베히모스의 몸이 쓰러지자, 헌터들은 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급히 몸을 날렸다.
김건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며 표정을 굳힌 채 끝까지 베히모스를 살폈다.
‘어디 있는 거냐?’
베히모스가 쓰러졌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최종 보스는 체이난으로, 그를 쓰러트려야 했다.
쿠우우웅!
“크으으, 감히 인간 따위가!!”
쓰러진 베히모스의 몸통 위로 체이난의 상체가 드러났는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베히모스의 목숨이 끊어져 더 이상 동기화를 할 수 없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수들을 남겨둘 것을…….’
자신이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모든 마수들의 힘을 흡수했는데, 이런 결말을 맞이하자 치욕스러웠다.
체이난이 일단 이곳을 벗어난 뒤 다른 마왕들과 합류해야 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절대로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김건이었다.
그는 베히모스와 동기화한 체이난이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고, 최후의 한 방을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그녀가 완전히 베히모스에게서 모습을 드러내자 김건은 라운드 실드를 날렸다.
라운드 실드에는 오러가 거대한 창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창끝은 체이난을 겨눈 채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아, 안 돼!! 여기서 끝날 수 없단 말이야!!”
체이난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아직 발이 베히모스에게서 나오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당황하며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오러의 창에 꿰뚫려 육체가 소멸을 맞이했다.
“끝인가……?”
김건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끝까지 체이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놈이 오러의 창에 꿰뚫리는 모습을 보자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그를 휘감고 있던 빛무리도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정말 고맙습니다.’
체이난을 죽이기까지 김건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헌터들의 희생이 있었다.
만약 그들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마왕을 죽이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다.
“건아!”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직전, 어느새 이유하가 다가와 부축하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사, 살아 있어.”
김건을 감싸던 빛무리가 사라지자 죽은 줄 알고 조마조마했던 이유하는 정신을 잃은 김건의 호흡이 계속 이어지자 안도하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 * *
‘지그문트 님에 이어 크로아셀, 체이난까지 당했다고? 마왕 체면이 말이 아니군.’
라이트는 렌과 연세연을 압도하며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다.
지그문트를 시작으로 크로아셀과 체이난의 마력이 사라지자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상대하는 인간들의 수준을 생각하니 충분히 당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상대했던 테라의 인간들보다 수준이 높으며 강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끝이다! 이 기회에 내가 대마왕에 등극하는 거다!’
그는 두 사람을 상대하며 승부를 볼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고, 서서히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더불어 이 둘을 죽이고 홀로 지구를 정복하여 새로운 대마왕에 오를 생각에 마음에 들떴다.
그렇지만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건 렌과 연세연도 마찬가지였다.
* * *
“준비는 끝났어.”
“정말?”
“남은 건 우리 둘의 호흡뿐이야.”
연세연은 라이트에게 날릴 최후의 마법에 대한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바로 시전해 버리면 라이트가 바로 눈치채고 회피하거나 상쇄할 것이 분명했기에 렌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녀는 메시지 마법을 통해 렌에게 작전을 짧게 설명했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거냐?”
라이트는 바쁘게 움직이는 렌을 보며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그 또한 그들이 자신에게 펼칠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냥 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대항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밟아주마!’
그는 렌과 연세연에게 자신과의 힘의 격차를 보여줄 생각으로 필살의 마법을 캐스팅했다.
과거 지그문트도 이 기술에는 대응이 어렵다고 했을 정도로 그 위력은 어마무시했다.
“라이트닝 프리즌(Lightning prison)!”
말과 함께 하늘의 검은 먹구름에서 번개가 하나둘씩 떨어졌다.
한데 번개가 잠시 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유지되었다.
“설마?”
작전대로 덫을 놓고 있던 중 예상치 못한 마법에, 당혹스러움이 연세연의 얼굴에 드러났다.
‘아니야. 이걸 역으로 이용하면!’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다.
연세연은 메시지 마법으로 렌에게 작전대로 계속 움직여 줄 것을 부탁했다.
렌은 그녀의 말에 의구심 없이 수락했다.
작게는 자신들의 목숨이, 크게는 세상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다.
결코 연세연이 허투루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을 것이라 믿었다.
“끝까지 발버둥 쳐 보아라. 인간들이여!”
라이트는 연세연과 렌의 움직임을 예상하며 마법을 시전했지만, 번번이 공간이 뒤틀리며 아슬아슬하게 번개가 표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갔다.
‘분명 저 인간의 짓이군.’
라이트는 신중하게 렌을 살폈다.
허공에 공간의 틈을 크게 열어놓고 번개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라이트도 번개가 떨어지는 지점을 계산하고 있었으나 렌이 이를 고려해서 공간의 틈을 만들어 계속 라이트의 공격이 엇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트닝 프리즌의 무서움은 지금부터였다.
“마법 변형?”
“점점 피하기가 어려워지네!”
마치 나무 가지처럼 지면에 고정된 번개에서 번개 줄기들이 뻗어나갔다.
그리고 새장처럼 그들의 움직임을 점점 봉쇄하며 그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라이트는 한 곳에 렌과 연세연이 모이는 순간,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이미 지점도 설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헌터들은?”
“놈이 마법을 시전하자마자 바로 물러나서 피해는 줄였어.”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다른 헌터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들의 싸움이 격해짐에 따라 점점 피해 영역이 커지고 있었다.
라이트가 라이트닝 프리즌까지 시전하자 마계의 문을 통해 나온 마수 중 절반이 죽임을 당했다.
그렇지만 라이트는 눈앞의 렌과 연세연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마수들의 죽음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사이에도 번개의 감옥은 그들을 압박하며 한 장소로 몰아넣었다.
“죽어라!!”
그들이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라이트는 냉소를 지으며 렌과 연세연을 향해 거대한 번개를 떨어뜨리기 위해 손짓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렌과 연세연은 여유로웠다.
“씨앗은 곳곳에 다 뿌려놓은 거지?”
“누가 시킨 일인데. 이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 보라고.”
“그래야지.”
대답과 함께 연세연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나를 운용했다.
그리고 번개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순간,
“진 절대영도, 프로즌 플라워(Frozen Flower).”
새하얀 빛과 함께 얼음 줄기가 솟구쳤다.
연세연은 각성한 후 절대영도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된 후, 절대영도 마법을 최적의 형태로 활용할 수 있는 마법을 만들어냈다.
얼음 줄기가 번개를 튕겨냄과 동시에 꽃봉오리를 만들었고, 천천히 개화하며 한 송이의 꽃을 피워냈다.
“저, 저건 뭐지?”
강대한 마나가 담겨 있는 프로즌 플라워를 라이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번개를 상쇄시킬 정도라면 놈들도 신경 써서 준비한 마법일 터.
그는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좋아. 그래야 쓰러트리는 맛이 있지.”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싸우고 싶은 투쟁심이 솟구쳤다.
라이트는 라이트닝 프리즌의 간격을 촘촘하게 좁히며 절대로 그들이 탈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승부를 가를 것이라 판단했다.
“개화하라! 얼음꽃이여.”
그녀의 말과 함께 라이트닝 프리즌 곳곳에서 얼음꽃들이 피어나며 영역을 넓혔다.
‘어떻게 된 거냐?!’
연세연은 이미 승리를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것이다.
속으로 크게 당황한 라이트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마력을 번개에 집중했지만, 연세연의 움직임이 빨랐다.
그녀의 마나가 번개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얼음꽃을 피워냈다.
라이트는 이유를 찾기 위해 번개들을 살폈다.
“마나 씨앗?”
자신의 마력에 가려져 눈치채지 못했다.
번개 곳곳에서 연세연의 마나가 씨앗의 형태로 군데군데 박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번개에 최소 4개의 마나 씨앗이 박혀 있었다.
‘단순히 내 공격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어. 내 공격을 읽고 먼저 선수를 친 것이구나.’
머릿속으로 렌과 연세연의 작전이 그려지자 라이트는 이를 갈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라이트닝 프리즌이 무력화되고, 프로즌 플라워는 번개의 마력을 양분 삼아 점점 위력을 키워나갔다.
‘이 공격에 모든 걸 건다!’
라이트는 라이트닝 프레임에 모든 것을 걸고 마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연세연도 프로즌 플라워에 정신과 마나를 집중했다.
만약 라이트닝 프리즌의 마력을 흡수하여 위력을 높이지 않았다면, 라이트와 승부를 볼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점점 프로즌 플라워의 힘이 강해질수록 버티기가 어려워졌다.
연세연은 정신을 집중해 라이트를 향해 꽃을 피웠고, 라이트도 얼음꽃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승부는 일격에 이루어졌다.
강대한 두 힘의 충돌하자 온 세상이 새하얀 빛에 휩싸이며 거대한 폭발이 이루어졌다. 뿌연 흙먼지가 주변을 감쌌다가 사라지는데,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던 번개와 얼음은 온데간데없고 싸움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라이트는 눈을 감은 채 지상에 서 있었다.
라이트닝 프레임은 없어졌고, 연세연은 모든 마나가 고갈된 채 간신히 서 있었다.
“끄으으, 쿨럭!”
그때, 연세연이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자세히 보니 안색이 창백해진 채 마나 역류의 증상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연세연!”
“괜찮아.”
다급히 렌이 다가가 살피려는 찰나, 그녀는 손을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인간치고는 대단했어.”
진심으로 라이트는 감탄을 담아 말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마족과 드래곤, 그리고 인간과 싸웠지만 이렇게 격렬한 싸움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당할 만큼 카운터 공격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축하한다. 인간. 네 승리다.”
그 말과 함께 라이트의 몸이 심장으로부터 점점 얼어갔다.
연세연은 정신이 없어 보지 못했지만, 프로즌 플라워가 라이트닝 플레임을 부수고 라이트의 심장을 꿰뚫었다.
변명의 여지없이 힘의 차이에서 밀린 만큼 라이트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지그문트 님.’
지그문트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영혼체가 아직 지구에 남아 있는 것은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곳에 존재하지 않은 특수한 환경에서 싸우고 있을 터.
라이트는 얼었던 몸이 부서지며 점점 의식이 멀어져 갔고, 멀리서나마 지그문트가 승리하기를 빌며 지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저, 정말 해냈어. 하하하.”
렌은 라이트의 죽음을 목격하자 살았다는 안도와 성공했다는 기쁨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연세연과 함께 마왕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에 처음에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니 정말 승리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어.”
“뭐?”
“이곳을 빨리 정리하고 강현에게 가야 해. 그곳이 최후의 장소가 될 거야.”
그녀의 말에 렌은 당황스러웠지만 이어지는 다음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이곳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터.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다면 그를 도와주는 것이 빨리 이 싸움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안 돼. 네 마나 역류부터 치료하고 가자.”
* * *
‘모든 마왕들이 당했다고? 미친!’
마하드라는 인간들과 겨루면서 계속 감각을 열어 마왕들의 전력을 체크하고 있었다.
지금은 인간들의 멸절이라는 목적이 일치하여 일시적으로 그들과 손을 잡았을 뿐, 그가 진심으로 따르는 건 그로시아스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언제든지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들에 의해 크로아셀, 체이난, 라이트가 패배를 당하고 영혼만이 마계로 강제 귀환을 당하자 작전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도 상황이 좋지만은 않아.’
그는 이를 갈며 눈앞의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성수를 비롯한 신성력이 담긴 아티팩트를 아낌없이 사용했으며, 기사단을 비롯한 인간들의 공격 체계가 뛰어났다.
덕분에 지지부진한 힘겨루기가 이어지며 쉽사리 승부를 낼 수 없었다.
이 상황에 다른 마왕들을 물리친 자들까지 합류하면 자신이 죽을지도 몰랐다.
‘결국 도박을 할 수밖에!’
이미 인간들이 이동 마법을 방해하는 마법진을 몇 겹으로 시전해두어 도망을 칠 수 없었다.
강제로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간 차원의 틈에 끼여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떠돌 것이었다.
결국 마하드라는 미셀을 비롯한 신의 기사단을 향해 브레스를 쏠 준비를 했다.
“또 온다!!”
“이번엔 실수하지 말아야 해!”
브레스를 쏜 후 그 반동으로 2~3초 동안 마하드라는 움직임이 멈추게 된다.
미셀은 그 타이밍을 노리는 것이 유일하게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곧바로 그의 지휘 아래 모든 헌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쿠아아아아앙!!
마하드라의 브레스가 쏘아지고, 신의 기사단이 선두로 브레스를 막기 위해 나섰다.
후방에 있던 미셀 또한 마하드라를 향해 뛰어들었다.
‘지금이다!’
일시적으로 모든 대처 능력이 봉쇄된 마하드라를 지금 쓰러트려야 한다는 생각에, 미셀은 타워 실드에 모든 힘을 집중해 드래곤 하트를 노렸다.
콰아아앙!
정확하게 미셀의 공격이 드래곤 하트를 가격했고, 그것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브레스를 쏘던 마하드라의 거대한 몸체가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우와와와!!”
“드래곤 슬레이어의 탄생이다!!”
이를 본 헌터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하는데, 정작 마하드라를 쓰러트린 미셀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쉽다고?’
지금까지 놈을 쓰러트리기 위해 그렇게 고생했는데, 마지막에는 마치 놈이 일부러 죽어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정도로 너무도 쉽게 공격이 허용되었다.
‘아니야. 그만큼 놈도 지쳤던 탓일 거야.’
하지만 미셀은 순간 느낀 의아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모두가 극도로 지친 상태였으니까.
‘어차피 마하드라는 죽었어.’
미셀은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고 김강현에게 합류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