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US 그룹의 개혁
”이걸로 인사 개편 현황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최종 결재만 해주시면 내일 공지사항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래요? 고생하셨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김강현과 함께 가장 고생한 사람을 꼽으라면 강려원이었다.
식사는 회사 식단과 외부 음식으로 잘 챙겨 먹었으나 얼마나 일이 고된지 살이 4kg가 빠졌다. 그녀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는데 김강현이 틈틈이 챙겨주었던 포션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김강현은 그녀의 말에 회사 인트라넷에 들어가서 인사 개편의 내용을 확인하는데, 워낙 강려원이 꼼꼼하게 일을 잘해서인지 고칠 내용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결재 버튼을 눌러 승인한 뒤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급한 불들은 대부분 껐으니 정리되면 일주일 정도 휴가 가도록 하세요. 강 부실장님, 아니, 실장님.”
“아직 입에 붙으려면 멀었네요. 부회장님.”
“그러게요. 아무래도 처음 실장님을 만났을 때의 직책이 부실장이어서 쉽게 입에 붙지 않는군요.”
두 사람은 아직 적응되지 않아 머쓱하게 웃었다.
인사 개편과 함께 그들의 직책도 바뀌었는데 강려원은 전략기획실장으로 승진했고, 김강현은 US 그룹의 부회장이 되었다.
강려원의 승진은 당연한 것이었다. 김강현이 실장 자리를 맡고 있을 때 대부분의 일들을 그녀가 처리했다. 그간의 공을 고려하면 전혀 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강현은 부회장이 되어 현재 최고 경영자나 다름없었다.
‘누군가 이 자리를 맡아주면 좋겠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네.’
US 그룹의 부회장이라는 자리는 김고엽 회장이 부재중인 이상 권력을 쥐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였다.
막대한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기에 김강현은 다른 사람에게 이 자리를 넘기려고 했다.
“그동안 회장님을 옆에서 보필하긴 했지만, 나이가 많아 그 자리를 수행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비서실장으로 남겠습니다.”
“흐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내가 부회장을 맡는다면 내부에서 반발이 많을 거다. 이치상 네가 맡는 게 맞다.”
“경영을 짧게 공부하긴 했으나, 굉장히 오래전이다. 게다가 검찰 쪽 일로 정신이 없고, 내게 맡는 옷이 아니어서 거절하는 게 맞겠구나.”
그 후보로 이명원, 임재우, 김철진을 염두하여 이야기를 나눠보았으나 모두가 거절하여 결국 어쩔 수 없이 김강현이 맡게 되었다.
그동안 김강현이 김우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니며 언론에 나선만큼 내부와 주주들의 승인도 쉽게 얻었다.
“그런데 김철진 검사님에게 러브콜은 계속 이어지고 있나요?”
“네. 그래서 아버지도 꽤나 곤란한 모양입니다.”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이명원, 임재우, 김철진은 예전과 똑같은 자리에서 일하는데 김철진에게 정치권의 스카우트가 쏟아졌다.
검찰 출신에 US 그룹의 부회장을 아들로 두고 있으며, 자수성가한 이미지와 함께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김철진을 자신의 당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지지도를 높일 수 있어 정치권에서 힘쓰고 있었다. 김철진은 정치에 뜻이 없어 모두 거절하고 있지만 정치권에서는 쉽게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강 실장님. 시간 괜찮으면 같이 안 갈래요? 오늘이 회장님의 치료 마지막 날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그동안 골든 크라운의 마력 제거제를 만들기 위한 김강현과 이유하의 노력이 일부 결실을 맺는 날이었다.
김강현의 말에 강려원은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하고 함께 김고엽의 집으로 향했다.
“강 실장님. 어서 와요!”
“네. 사모님. 잘 지내셨어요?”
“그런데 요즘 얼마나 힘들기에 살이 빠졌어요? 제가 강현이에게 잘 챙겨주라고 애기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며칠 후에 휴가 받았어요. 그럼 휴가비 좀 넉넉하게 넣어달라고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집에 도착하자 이수진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는데, 강려원과 친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평소 이명원의 회사 심부름으로 회사와 이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이수진과 친해졌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수진이 편하게 대해주었고 지금은 친한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지.’
강려원은 이곳에 이수진이 있기 전과 후를 생각했다.
그녀가 알고 있던 김고엽의 집은 삭막하고 싸늘하여 들어올 때마다 서늘한 냉기가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고엽과 이명원이 집안 살림에 크게 신경 쓰는 것도 아니었고, 본인의 일들을 하기 바빴다. 하지만 이수진은 살림을 신경 쓰며, 주변 사람들을 챙기니 일하는 사람들도 힘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집안 전체에서 활기가 돌았다.
“오셨습니까? 강현 도련님.”
“오빠!!”
그사이 김강현이 거실에 들어갔는데 김유나, 김아현, 이명원, 이유하 등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응. 그런데 정말이야? 할아버지가 깨어날 수 있다고?”
“확실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해 봐야죠.”
김유나도 한 달 만에 보는데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살이 빠져 있었다.
지금 김고엽이 쓰러진 이유가 김우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녀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움과 함께 할아버지가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유하야. 준비는?”
“마나 링거만 투여하면 돼요. 하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절반 정도 되니 많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요.”
“완전 치료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깨어나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해. 실패해도 괜찮으니 걱정 마.”
반대로 김강현이 이유하를 격려하며 다독거렸다.
김고엽의 치료를 위해 연구를 하는 도중 그녀는 마력의 천적인 김강현의 인피니티 마나를 이용해 일시적으로 깨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제로 골든 크라운을 복용한 헌터들은 정신을 잃지 않고 마나로 위장한 마력을 사용하다가 폭주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몸이 약해 마력을 없애지 못하지만, 일정 시간 소멸되지 않고 마력과 싸울 수 있는 각성제를 만들어냈다. 이를 위해 사전에 동물을 통해 실험해 성공했고, 김강현을 비롯한 가족들의 동의를 얻은 뒤 일주일 전부터 각성제를 나누어 마나 링거와 함께 투여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으로 약을 투여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못 오시는 건가요?”
“아까 연락 왔는데 조금 늦는다고 하더구나.”
문득 이 자리에 없는 김철진이 떠오른 김강현이 이수진에게 물었다.
김철진도 시간 맞춰 오고 싶었으나, 하는 일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나 링거를 늦출 수 없었다. 지금까지 시간을 맞춰 주기적으로 투여했기 때문에 이 시간을 놓치면 지난 일주일의 고생이 날라가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유하는 마나 링거의 바늘을 김고엽의 손등에 조심스레 꽂고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만약 깨어난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10분에서 15분 정도 걸릴 거예요.”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며 김고엽을 바라보는데, 시간이 굉장히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느덧 20여 분이 흘렀지만, 김고엽은 미동도 하지 않고 깨어날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론상 완벽했는데. 죄송해요.”
“아니야.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거야. 다음에는 성공하겠지.”
“맞아요. 저희는 괜찮으니까 기운 내요!”
결과가 나타나지 않자 이유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강현과 강려원은 그녀가 힘내기를 바라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저기 방금 할아버지의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 김아현이 김고엽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라고?”
“자, 잠시만요!”
그녀의 말에 다급하게 이유하가 마나 링거의 상태를 살피고, 김강현이 김고엽의 상태를 살폈다.
‘숨소리가 바뀌고, 마나 흐름이 거세지고 있어.’
“유하야. 산소호흡기 제거 부탁해.”
그동안 산호호흡기를 계속 사용했던 이유는 자가 호흡이 어려웠기 때문인데, 지금은 스스로 호흡량이 많아져 산소호흡기가 없어도 될 정도였다. 더불어 마나 링거가 계속 투여되면서 김고엽 몸 안에 있던 마력이 일시적으로 줄어들었다.
“실패가 아니에요. 예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을 뿐이니까 곧 깨어날 거예요.”
“그게 정말이니?”
“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됩니다.”
김강현은 확신 어린 자신감을 가지고 대답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김강현과 이유하는 약이 몸에 반응하기까지 시간을 놓치고 있었다. 동물로 임상 실험을 거치긴 했지만, 사람은 약 기운이 완전히 발현되기까지 동물보다는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이었다.
실패가 아니라는 말에 모든 사람들은 긴장하며 김고엽을 지켜보는데, 곧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그의 입이 열렸다.
“으음. 무, 물. 목이 마르구나.”
오랜 시간 말을 하지 못해 목소리가 쩍쩍 갈라지며 탁했지만,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미지근한 물을 반 컵 정도 준비해 주세요.”
계속 김고엽의 몸을 살폈던 이유하가 말했다.
지금 그는 한 달 이상 마나 링거에 담긴 영양분으로 버텼기에 갑자기 물이나 음식이 몸에 들어가면 깜짝 놀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눈꺼풀이 여러 번 움직이더니 김고엽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왜 다들 여기 모여 있느냐?”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모, 몸이 무겁구나. 팔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아.”
“잠시만요. 근육이 경직되어 있어 함부로 움직이려고 했다간 다칠 수 있습니다.”
“크윽.”
김고엽은 눈앞에 낯익은 사람들을 비롯해서 낯선 사람들까지 함께 있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고, 지금 자신이 왜 일어나지 못하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사이 이명원이 침대의 높이를 조절하여 김고엽이 상체를 일으킬 수 있게 조치하니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하기 편했다.
“지금 회장님은 약 두 달 정도 정신을 잃고 누워 있다가 깨어나신 겁니다. 그러니 무리하지 마십시오.”
“뭐라고? 그게 무슨?!”
게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에 대해서 깜짝 놀랐다.
“혹시 회장님이 깨어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마나 링거의 투여가 끝나면 다시 마력이 활동하게 되니까…… 3시간 정도예요. 이후에는 3일 후에 일어날 것이고요.”
이유하는 김고엽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마나 링거를 투여하여 계속 김고엽이 깨어날 수 있게 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알게 모르게 몸에 부담이 컸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김고엽의 건강을 고려하여 깨어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하니 3일 정도의 휴식이 필요했다.
“잠깐만. 거기 뒤에 있는 건 철진이의 가족 아니냐?”
“네?”
“아, 안녕하세요,”
그때 김고엽은 사람들 뒤쪽에 있는 김아현과 이수진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실제로 얼굴은 처음 보았지만 사람을 통해 그들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고 사진으로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색하여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했다.
“회장님이 정신을 잃으신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천천히 말씀드릴 테니 놀라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이명원은 우선 김고엽이 사태 파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고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진이가 그 약을 보내 날 죽이려 했다고?!”
“맞습니다.”
김고엽은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 한 달 넘게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데,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더불어 김우진이 자신만 노렸던 게 아니라 김강현을 죽이려 살인 청부를 시도하고, 과거 자신과 김철진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물론 믿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나마 다행으로 강현 도련님이 힘써준 덕분에 회장님의 경영권을 지킬 수 있었는데, 만약 김우진 사장님의 뜻대로 됐다면 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을 겁니다.”
“흐음.”
평소 김우진이 회사에서 운용하는 사회 기부와 재단을 비롯한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득이 나지 않는 자회사들을 처분하고 싶다는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상 만약 경영권을 가질 수 있었다면 이것부터 해결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득을 보지 못하더라도 김고엽이 이 사업들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정옥연의 뜻을 잇기 위해서인데 김우진은 이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래.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야.”
이명원과 김강현의 설명에 그래도 자신이 없었던 동안 회사가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했다.
“명원이, 그럼 우진이는 어떻게 되는 건가?”
“김우진 사장님이 친분 있는 로펌 변호사들을 고용했지만, 20년의 징역이 예상됩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이 점에 있어서는 김고엽도 단호했다.
물론 사업을 하는데 완전히 깨끗할 수는 없지만,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김고엽은 최소한 합법이라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김우진에게는 이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유나가 마음고생이 심하겠구나. 언론에서는 우진이와 너를 엮으려고 할 테지만, 아무것도 몰랐을 것. 최대한 손을 써주도록 하마.”
“네. 그렇지 않아도 강현이가 많이 신경 써줬어요.”
그녀의 말에 김고엽의 시선이 김강현을 비롯한 김아현, 이수진에게 향했다.
“실은 회장님이 쓰러져 계신 동안 수진 아가씨께서 집안일을 하시며 수발을 드셨습니다.”
“어째서? 네 남편과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알고 있어요. 하지만 철진 씨의 아버지이자 강현이의 할아버지가 맞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크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렇게 가족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요.”
“…….”
“최소한 아이들에게 자신들에게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회장님도 알지 않으신가요? 가족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요.”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김고엽의 몸이 들썩거렸다.
그는 고아였고,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사업적으로 성공한 이후 자신과 정옥연에게 얽힌 출생의 비밀을 알고 싶어 사람을 써서 조사했다.
김고엽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고, 어머니는 미혼모로 혼자서 아이를 키울 수 없어 고아원에 맡기고 도망갔다.
그리고 정옥연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부모님의 남은 재산을 친척들끼리 나눠 가진 후 아이는 매정하게 고아원에게 맡겨졌다.
이렇게 해서 김고엽과 정옥연이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고엽은 김우진과 김철진만큼은 부모가 없는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운명은 잔인했다.
덕분에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김고엽과 김철진은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얼굴은커녕 대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다시 되돌리기보다는 회사에 집중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야. 내가 진실을 외면해서 이렇게 되었겠지.’
개인적으로 이명원이 김철진과 연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명원을 통해 김철진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타이밍을 봐서 먼저 연락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자존심이 이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철진 씨와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흐음.”
이수진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답했다.
이제 김고엽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고, 이렇게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단번에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숨에 호전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조금이라고 개선될 여지가 있다고 여겼다.
김고엽에게서 고민하는 기색이 보이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아버지가 깨어났다고?!”
그때, 방 밖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더니 김철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연락을 받은 후 급하게 차를 몰고 도착한 김철진의 복장은 흐트러지고 호흡이 가쁜 상태지만 깨어난 김고엽을 보자마자 안도의 기색을 보였다.
“크흠!!!”
“…….”
이렇게 20여 년이 지나 만나게 된 두 부자는 서로 어색하여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저희는 잠깐 밖에 나가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강현 도련님.”
김강현이 두 사람을 보니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것 같아 오히려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고, 이명원과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생각이었다.
순간 당황한 김고엽과 김철진이 막아보려고 했으나 순식간에 사람들이 나가 버려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부디 잘되어야 할 텐데.’
김강현은 최악의 상황으로 두 사람이 크게 싸우는 것을 막기 위해 김고엽의 방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 말을 꺼낸 것은 김철진으로, 굉장히 어색했다. 하지만 한번 대화의 물꼬를 트니 김고엽도 대답해 두 사람은 조심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울음소리가 들리자 이명원이 안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김강현의 제지로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이렇게 김고엽과 김철진은 처음으로 서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다.
* * *
“그래도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야.”
김고엽이 깨어난 밤에 김철진은 김고엽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앞으로 대화할 시간이 있으니 서먹하지만 관계를 개선해 보기로 했고, 이수진은 김고엽의 집에서 계속 지내기로 했다. 아무래도 김철진이 김고엽을 더 만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집에서 혼자 지내는 것보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것이 내심 재밌었다.
덕분에 김아현도 김고엽의 집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김고엽에게 이쁨을 많이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게다가 김유나도 이수진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었다.
“길드장님. 약속 시간이 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그때, 김강현은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하던 일을 정리하고 손에 편지 한 통을 든 채 밖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길드에 방문하셨군요. 가능하면 자주 오시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확 US그룹을 무너뜨릴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어느 정도 정리됐으니 저 없이도 잘 돌아갈 겁니다. 이제 헌터와 길드 일에 신경 써야죠.”
“그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면 좋겠습니다.”
문 앞에는 기동진이 대기하고 있었고, 회의실로 가는 동안 짧게 이야기를 나눴는데 말에 가시가 숨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동진이 보는 김강현은 길드장임에도 길드에 신경 쓰는 일이 적었다.
말만 부길드장이지 실제로는 길드장이 해야 할 업무를 기동진이 전부 맡고 있었는데 모두 그를 믿기 때문이었다. 물론 충분한 보상을 해주고 있어 그나마 불만 사항이 조금 적지만 김강현이 자주 얼굴을 비추면 좋겠다는 생각에 말을 꺼냈다.
당연히 김강현도 이를 알고 있지만 최근 워낙 US그룹 일이 바빠 정신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쪽에 닥칠 일이 많아 이제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운 님이 보내주신 초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길드원들의 의견을 듣고 움직이기로 하죠. 저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길드원들도 해당되는 만큼 독단으로 결정하기 어렵네요.”
“네. 방금 모든 길드원들이 모였으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이를 위해 김강현은 처음으로 길드원 소집 명령을 내렸고 다들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김강현과 기동진이 회의실에 들어가자 다들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길드장님!”
“무슨 일로 소집 명령이 떨어졌나요?”
“오호?”
회의실에 모인 길드원들을 본 김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강해졌다고?.’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다들 한 단계 이상의 벽을 뛰어넘었다.
김건, 렌, 연세연은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S급 헌터의 초입에 도달해 있었다. 약간의 깨달음만 있다면 금방 각성할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검천호는 현재의 강함의 크기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 말은 자신과 동등하거나 새로운 경지를 창안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게 모두 이 몸의 능력이니라. 다들 기본 실력이 있는지라 수련시키는 맛이 괜찮더구나.”
“으!!!!”
“정말 수십 번을 죽다 살아났지만 확실히 실력이 늘어나니 반박할 수 없네.”
“소집이 아니었다면 오늘도 지옥을 경험하고 있을 거야.”
헬릭스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세 사람은 끔찍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때 발록의 수장을 맡았던 헬릭스는 발록들을 강하게 하기 위한 수련 방법과 마족들을 괴롭히며 만들었던 수련 방법을 그들에게 적용했다.
그들은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헬릭스의 수련 지도를 받았는데, 너무 끔찍하여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수련 장소는 그들의 꿈속이었다. 잠만 자면 마법에 의해 헬릭스의 정신세계에 초대되었다.
그곳에선 죽어도 죽지 않기에 헬릭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강해지게 만들었다.
몸은 힘들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잠을 자지 않기 위해 노력해 보았으나, 이를 예상한 헬릭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에 정해진 시간에 강제로 잠을 자도록 수면 마법을 걸어두었다.
물론 아티팩트에 걸린 마법을 해제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어떤 위저드도 헬릭스의 마법을 풀지 못했다.
덕분에 생사를 넘나들며 수련하니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겨루면 새로운 경지에 들어갈 것 같은데.’
반면 검천호는 이들과 달랐다. 그 또한 헬릭스의 정신세계에 초대되어 생각지 못한 적들과 싸웠는데, 아무리 죽어도 다시 되살아나 적을 쓰러트릴 수 있을 때까지 싸울 수 있으니 미치도록 행복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단점을 개선하며 계속 강해지니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흠흠, 바쁜 시간 중에 오늘 이렇게 모인 이유는 테라 길드에 초대장이 왔기 때문입니다.”
“초대장이요?”
“늘 오는 거 아닌가요?”
다들 김강현의 말에 시큰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실리스크 레이드 이후, 세계 각국과 단체에서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내용을 보면 다들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초대들이라 모조리 거절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은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 이렇게 모이게 되었습니다.”
“대체 어디길래?”
“세계헌터협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