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김고엽의 마력 중독
“이명원 비서실장님에게 연락받고 왔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김강현과 강려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김강현은 회사 일을 처리하기 위해 오랜만에 US 그룹 본사에서 강려원과 회의하며 그동안의 진행 상황을 체크하던 중이었다.
더불어 흑무와 제무월이 연관되어 있는 정체불명의 조직을 파헤치기 위해 중국에 머물 계획도 세우고 있었던 터라, 이 기간 동안 중국 지사를 활용해 회의 및 프로젝트 진행을 맡기로 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이명원에게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는 무슨 일이지?’
자세한 설명도 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강려원과 함께 이명원이 보내준 주소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병원 별관 앞에만 서도, 뛰어난 자체 보안 시설뿐 아니라 US 그룹 소속 가드들이 철두철미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출입자들은 무전으로 상부에 보고하여 신원도 철저히 확인하고 있었다.
“통과되었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무전을 통해 허가를 받은 듯, 가드가 김강현과 강려원을 데리고 별관 안쪽으로 이동했다.
김강현은 가는 동안 가드들로 보이는 자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곳에 무엇이 있길래?’
너무도 삼엄한 경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별관 가장 안쪽 방 밖에서 이명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강현에게 연락한 지 1시간밖에 되지 않았을 뿐인데, 그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놀라지 마시고, 같이 들어가시죠.”
이명원의 안내에 따라 두 사람은 같이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누워 있는 사람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회, 회장님의 모습이?”
“……?!”
그곳에는 김고엽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 쓰러졌을 때와 달리 모습이 변해 있었다.
우선 몸의 근육들의 대부분 소실되어 피부가 쪼그라들면서 마치 미라 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김강현이 느끼기에 생명력이 굉장히 희박했다.
“그게 어떻게 일입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반도체 공장 답사 가기 전 집에서 갑자기 쓰러지셨고, 병원 주치의의 말로는 급속도로 노화가 진행되어 이렇게 됐다고 합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멀쩡했는데, 갑자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모습으로 변해 버리다니.
물론 지병인 심장병을 앓고 있지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김고엽을 진찰한 의사는 젊었을 때부터 김고엽을 꾸준히 돌보던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노화라고? 평소 아티팩트만 잘 착용하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은 김강현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스펠 바이러스 사건으로 김강현은 김고엽에게 목걸이 형태의 아티팩트를 선물해 준 적이 있었다.
평소 안부를 물을 때마다 잘 착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이 아티팩트는 마력을 차단해 줄 뿐 아니라 해독 기능도 가지고 있어 기본적인 건강을 지키기에 적합했다.
“부실장님. 괜찮으십니까?”
“네. 네. 괜찮아요.”
그런데 옆을 보니 강려원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 김고엽은 그녀를 많이 아꼈고, 강려원도 그 마음을 알기에 최선을 다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강려원은 각종 대회를 휩쓸고 다닌 재원이었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원하는 대학교를 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를 안 김고엽은 그녀가 대학교에 진학하고 취업할 때까지 후원금을 지원했고, 강려원은 열심히 공부하여 US 그룹에 입사했다.
이후에도 김고엽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사원에서부터 노력했고, 지금은 전략기획실의 부실장을 맡아 그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김고엽이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제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김강현은 이명원에게 양해를 구한 뒤 김고엽에게 다가갔다.
현재 김고엽의 몸에는 산소 호흡기를 비롯하여 각종 의료기기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그만큼 상태가 심각하다는 증거였다.
‘의사의 소견대로 노화 증상이 있고, 심장도 불규칙적으로 뛴다.’
김고엽의 몸을 살펴보기 위해 손목의 맥을 통해 마나를 흘리자, 머릿속으로 3D 영상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감지되었다.
점점 근육들이 쪼그라들고 있었고, 뼈의 강도도 약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장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심장 박동이 굉장히 불안했다.
‘이게 과연 정상일까?’
신체에 상처가 있다면 출혈로 인해 심장이 격하게 뛸 수 있지만 김고엽의 몸에선 출혈 증상이 없었다.
게다가 인위적으로 만든 상황이 아니라면 이렇게 빠른 노화 증상이 나타날 리 없었다.
이 같은 생각은 병원 주치의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에는 없었지만, 그는 원인을 찾기 위해 김고엽의 혈액을 채취하여 검사 중이었다.
‘마력 중독?’
혹시나 싶은 마음에 김강현이 김고엽의 상태창을 살피니 이런 문장이 떴다.
그런데 방금 살핀 김고엽의 몸에선 마력을 느낄 수 없어 또다시 의문이 들었지만,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강 부실장님. 유하에게 연락해 둘 테니 한 가지 물건을 받아 와 주시겠어요? 회장님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니 바로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선 이유하를 이곳으로 부르는 것이 맞지만, 김고엽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았다.
그렇지 않아도 김고엽의 병환은 언론에게 좋은 먹잇감이었으니까.
강려원은 김강현의 말에 바로 연구소로 이동했고, 그사이 김강현은 이유하에게 현재 시제품으로 만들고 있는 그것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유하는 아직 개발 중이라며 제대로 작동할지 걱정했지만, 헌터가 아니라 일반인에게 확인 여부만 할 거라고 하니 수긍하며 전화를 끊었다.
“도련님. 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것입니까?”
“아직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강 부실장님이 오고 난 뒤 설명하겠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있는 이명원이 답답한 듯 물었으나 김강현은 설명을 뒤로 미뤘다.
김강현도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김고엽의 몸에 이것이 들어가 있다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실장님. 이것이 맞습니까?”
“네, 이리 주십시오.”
강려원은 40분 만에 이유하에게 받은 물건을 전달했다.
평소 연구소와 거리를 생각하면 1시간이 걸릴 시간이었지만, 정신없이 자동차 액셀을 밟아 시간을 단축했다.
김강현은 그녀로부터 주먹만 한 투명 구슬을 받자마자 김고엽의 손끝을 살짝 찔러 피를 낸 뒤 구슬에 묻혔다.
“지금 무엇을?”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구슬에 마나를 흘리며 결과를 기다렸다.
이것은 마나 & 마력 판독기로 시전자가 마나 혹은 마력을 흘리면 그 농도를 확인하고 어떤 종류인지 파악할 수 있는 도구였다.
일반인들은 마나를 자유롭게 흘릴 수 없어, 약간의 피를 구슬에 떨군 뒤 마나와 마력을 흘리면 피의 주인이 가진 마나와 마력을 판단할 수 있었다.
‘설마 골든 크라운은 아니겠지.’
김강현은 불안한 기색으로 투명한 구슬에 집중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생각나는 것은 골든 크라운뿐이었다.
시전자의 생명력을 담보로 힘을 끌어내며 마나로 위장이 가능한 마력!
헌터들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어 골든 크라운의 마력과 부딪치면 마나 폭주와 역류가 일어나지만, 일반인이라면 생명력이 흡수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노화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충분히 설명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확인해 보고 싶지만 건드리면 터지는 폭탄이야.’
물론 도구의 도움 없이 직접 김강현이 김고엽의 몸에 마나를 흘려 확인하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 김고엽은 간신히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라, 자칫 마력이 폭주하기라도 했다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어서 김강현은 번거롭더라도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황금색 마력. 골든 크라운이야.”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곧, 투명한 구슬은 황금색으로 물들었고 사이한 마력이 감지되었다.
“비서실장님. 최근 회장님이 드신 약이 있나요?”
“네?”
“회장님에게서 마력 중독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음식도 가능성이 있지만, 약으로 섭취하는 것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있습니다. 최근 회장님이 드시던 약이 하나 있습니다.”
이명원을 품속에서 약 상자를 꺼낸 뒤 그 안에서 환들을 냉큼 꺼냈다.
아침마다 한 알씩 복했하지만, 김고엽은 피곤할 때마다 한 알씩 먹으면 효과가 있다뎌 이명원에게 맡겨두고 먹곤 했다.
“흡!”
김강현은 이 약이 골든 크라운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 알을 바로 삼켰다.
몸 안으로 약이 들어가자 소량의 마나가 흘러나왔는데, 이는 골든 크라운의 마력이 아니었다.
그런데 1분도 지나지 않아 한 줄기의 사이한 마력 한 줄기가 흘러나오더니 김강현의 심장을 노리며 쏘아졌다.
‘이대로 당할 것 같으냐?’
이를 예상한 김강현은 단숨에 몸 안의 마력을 심장을 향해 보내며 마력이 마음대로 날뛰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리고 마력보다 10배 이상의 마나를 모아 단숨에 이를 소멸시켰다.
“후우.”
김강현은 눈을 뜨며 길게 호흡을 내쉬었다.
‘이 마력에는 흑마법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다. 이걸 만약 계속 복용한다면!’
“실장님. 괜찮습니까?”
“아, 네. 약을 분석하느라고 약간 고생을 했네요.”
이명원과 강려원은 신기한 눈빛으로 김강현을 바라보았다.
김강현이 약을 먹자,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더니 전신에서 붉은빛의 마나가 은은하게 뿜어졌다.
김강현이 깨어나길 기다린 그들은 다행히 그가 무사한 것 같자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회장님. 회장님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아까 말했던 대로 회장님은 마력 중독에 걸린 상황입니다. 원인은 이 약이고요.”
“그럴 리가? 분명 이 약을 먹고 회장님의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이명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가 보기에 이 약을 먹는 동안 김고엽은 건강했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김강현의 말대로 마력이라면 몸 상태를 악화시키고 아파야 했던 것이 아닌가?
“이 마력은 사람의 생명력을 담보로 힘을 끌어냅니다. 만약 회장님의 상태가 좋아졌다면,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럴 리가…….”
김강현의 말에 이명원은 망연자실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보신단인 줄 먹었던 약이 설마 김고엽을 해치는 약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실장님. 하지만 원인을 알았으니 치료 방법도 있겠지요?”
그때, 강려원이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 * *
“방법은 제가 직접 없애는 것인데 회장님의 체력이나 생명력이 바닥이라 무조건 돌아가실 겁니다.”
“치료제는 없는 건가요?”
“현재까지는요.”
“그럼 기약 없이 치료제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김강현은 강려원과 이명원에게 치료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자신의 마나를 흘려 김고엽의 몸 안에 있는 마력을 없애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혈맥들이 터지며 내상을 입을 것이었다.
평범한 상태라면 며칠 요양을 하면 될 일이나 김고엽은 그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결국은 마력을 없앨 수 있는 마력 제거제가 필요한데 그것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해도 골든 크라운의 마력을 없앨 수 없다.’
김강현은 이유하와 함께 다크 사이드와 암상회가 가지고 있던 골든 크라운을 분석하여 마력을 제거할 방법을 찾고 있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혹시 스펠 바이러스를 없앴던 바실리스크 부산물을 이용하여 만들면 효과가 있을까 싶어 시제품을 만들어 보았으나, 일시적으로 골든 크라운의 마력을 없앨 뿐 오히려 바실리스크의 마력을 흡수하여 더욱 위세를 늘렸다.
그래서 오기가 생긴 이유하는 마나 전지 개발과 더불어 골든 크라운의 마력 제거제 연구에도 힘쓰고 있었다.
‘만약 회장님이 계속 쓰러져 계신다면 앞으로 회사는?’
이명원은 김강현의 이야기를 들은 후 김고엽의 건강과 더불어 US 그룹을 떠올렸다.
냉정하지만 김고엽은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고, 그의 결정 하나하나로 회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면 상관없으나 장기간 모습을 드러나지 않으면 내부에서도 김고엽의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가 돌 것이었다.
김고엽의 심장병은 유명해 꾸준히 정기 검진을 받고 있었다.
그런 만큼 오너 리스크로 큰 파장이 일어날 터.
‘가장 큰 것은 김우진 사장님의 욕심이지.’
임원들 사이에서 김고엽의 뒤를 이어 US 그룹의 회장이 될 사람은 김우진뿐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우진은 김고엽의 유일한 혈육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업가로서 능력도 뛰어났다.
손녀인 김유나는 연예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기업 운영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김유나는 방송을 통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US 그룹에서 일하고 있지만, 자신은 주주로만 활동할 뿐 운영에 대해선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어쩌면 지금 상황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지 모르지.’
그가 아는 김우진은 철두철미했다.
이미 집안 내의 사람들, 혹은 비서실의 직원들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놓고 김고엽의 입원 소식을 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원은 문득 김우진이 회장 대리, 혹은 회장이 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건 무조건 막아야 해!!’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평소에도 김고엽과 김우진의 경영 철학이 달라 부딪치곤 했다.
그나마 김우진이 뛰어난 실적으로 US 전자를 이끌고 있어 김고엽이 참을 뿐이었다.
만약 김우진이 US 그룹을 이끌게 된다면 대대적인 인사이동과 더불어 김고엽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었다.
실수 하나라도 했다간 선대의 회장인 김고엽과 비교당할 것이기에, 아예 이런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만큼 김우진은 자존심이 강했으며 한편으로는 김고엽보다 독재 성향이 심했다.
‘지금 김우진 사장님을 막을 사람은.’
이명원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실장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요?”
“회장님의 세력을 이끌어 주십시오.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실장님뿐입니다.”
“네?”
이명원은 간절한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만큼 진심이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김강현과 강려원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만요. 어째서 실장님을 택하신 거죠? 오히려 비서실장님이 나서는 것이 맞지 않나요?”
강려원이 판단하기엔 이명원이 나서는 것이 맞았다.
그동안 US 그룹이 성장하기까지 이명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 많았다.
그가 없으면 US 그룹이 굴러가지 않았다.
대외적으론 비서실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회사의 사소한 것까지 꼼꼼하게 살폈을 정도이며 종종 김고엽의 업무를 그가 선조치 후보고하기도 했다.
이런 점들은 임원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수용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일평생을 회장님의 그림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만큼 제가 나서는 건 맞지 않습니다. 제가 나서서 그룹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회장님의 후광 덕분입니다. 그런데 회장님이 쓰러진 것을 안다면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겠습니까?”
“아!”
“그들은 지금의 US 그룹이 있기까지 자신들이 공을 세웠다며 내세울 것입니다. 이렇게 우후죽순 많은 사람들이 나서면 오히려 김우진 사장님에게 대항하기는커녕 내부 분열이 일어나겠지요.”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지금까지 이명원은 공을 세웠어도 모두 내세우지 않고 김고엽에게 돌렸다.
임원들에게 이명원이 견제받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김고엽의 비서로 일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원들이 김강현 실장님을 인정할까요? 분명 단기간에 높은 실적을 쌓았고 눈도장을 찍었지만, 그들에게 굴러온 돌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강 부실장이 염려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처음 김강현이 낙하산이 전략기획실장 자리를 차지할 때, 그룹 내부에서 말들이 많았다.
그만큼 전략기획실장은 US 그룹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으니까.
모든 임원들이 자신이 가거나 자기 라인의 사람을 꽂으려고 했다.
하지만 김고엽의 뚝심 있는 고집으로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고 김강현을 내리꽂았다.
덕분에 미운털이 박힌 상황이었지만, 김강현은 이를 실력으로 정면 돌파했다.
지금은 모든 이들이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장님이 회장님의 핏줄이라면요?”
“네?”
“김강현 실장님은 회장님의 손자입니다.”
이명원은 몇몇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을 꺼내놓았다.
그녀는 이명원의 말이 믿기지 않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김고엽과 김강현을 번갈아 보았다.
“실장님. 비서실장님의 말이 정말인가요?”
혹시나 싶은 마음에 강려원이 묻자 김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회장님과 실장님이 닮긴 했는데?’
강려원은 곰곰이 이명원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생각해 보았다.
만약 김강현이 김고엽의 손자라면 모든 것을 충족한다.
김고엽이 쓰러짐으로써 그의 세력이 흔들리는 이유는 구심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현재 향하기 가장 쉬운 곳은 김고엽의 혈연인 김우진.
착실히 경영 수업을 받았으며, 지주사의 지분 승계도 이루어진 김우진은 현재로써 가장 완벽한 후계자로 보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능력을 인정받은 김강현이 김고엽의 직계로 나선다면?
임원들의 마음이 또다시 동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더불어 최측근인 이명원과 강려원이 김강현을 지지한다면, 본래 김고엽을 따랐던 이들은 더욱 김강현을 따를 것이었다.
“그럼 실장님은 김우진 사장님의 아드님인가요?”
‘설마 숨겨놓은 손자?’
김강현의 나이를 기반으로 계산을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닙니다. 회장님에겐 연을 끊고 지냈던 김철진 작은 도련님이 계셨고, 김강현 실장님은 그 분의 아드님입니다.”
“그, 그럴 수 있나요? 자, 잠시만요. 혹시 제가 입사 초반 들었던 소문이 사실이었나요?”
문득 그녀는 입사 초반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신입 사원일 때 우연치 않게 임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김고엽에게 김우진 말고 또 다른 아들이 있다는 것.
이 이야기는 일반 직원들에게도 살짝 돌았지만, 일만 하는 김고엽의 평소 행실을 보면 불가능해 보였다.
거기에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일절 여자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루머에 불과하다고 판단했었다.
김고엽은 개인사생활을 언론에 노출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도 싫어했다.
게다가 외부 행사 때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경우가 아예 없어 김철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그 소문을 말하는 것이라면 저도 알고 있죠. 김철진 작은 도련님이 뉴스에 나왔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임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당시 김철진은 검사로 활동하며 조금씩 이름을 알리던 시기로, 신문에 작게나마 이름과 사진이 실렸었다.
그때 몇몇 임원들이 김철진을 기억했고, US 그룹 내부에서 소문이 돌았던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김고엽은 언론에 힘을 써 김철진의 이름이 나오지 않게 만들었고, 임원들의 입단속을 시켜 루머로 만들어 버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지?’
갑자기 예상치 못한 진실을 알게 된 강려원은 얼떨떨했다.
마치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듯했다.
처음 김강현이 전략기획실장 자리를 맡게 되었을 때 다른 회사의 도련님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었는데, 그게 자신들이 다니던 US 그룹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이명원의 말대로 김강현이 나서면 그동안 전략기획실장을 맡은 것은 경영 수업으로 포장하고, 김고엽의 세력을 이끌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갖춰진다.
게다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이기에 정통성에 있어서도 김우진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실장님.”
“후우. 머리가 아프네요.”
강려원의 부름에 김강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장 중요한 관문이 남아 있었다.
바로 김강현의 의사였다.
이명원과 강려원은 그가 나서주길 바랐지만 김강현이 원해야 가능했다.
‘지금까지 조용한 삶을 원했는데 불가능한가?’
김강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이 평탄하지 않음을.
지금까지 헌터로 활동하면서 주변의 도움으로 최대한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고 가족들과 평안한 날들을 보낼 수 있도록 힘을 써왔다.
그런데 US 그룹의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이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의 강권이었지.’
US 그룹의 일에 관여하게 된 것은 김고엽이 가족을 상대로 협박해서였다.
당시 김강현은 인지도도 낮았고, 마땅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는 강제였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회사 일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재미도 있었다.
그렇지만 김고엽을 대신하여 앞으로 나서게 되면 자신은 또 다른 전쟁을 하게 될 터였다.
김강현은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이명원 비서실장님.”
“네. 도련님.”
“회장님이 저를 부르기 전까지 저는 남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고요.”
말과 함께 김강현이 뿜어내는 분위기와 말투가 달라졌다.
이전에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김강현은 마치 높은 산처럼 크게 보였다.
“어떻게 보면 제 삶에 회장님이 들어온 것이지요.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제가 왜 전면에 나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를 알려주시겠습니까?”
김강현은 이명원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 * *
꿀꺽!
이명원과 강려원은 긴장하여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애초에 김강현은 US 그룹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앞서 말했던 대로 김고엽과 인연을 끊고 살았었고, 이미 김우진이라는 걸출한 후계자가 있었다.
김강현의 입장에선 이대로 물러나도 상관없었다.
“돌아가신 사모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할머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게 무슨?”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이야기는 회장님의 두 아드님도 모르실 겁니다.”
이명원은 김강현을 설득하기 위해서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입을 열었다.
“지금은 US 그룹이라 불릴 만큼 회사가 커졌지만, 실장님이 태어나기 전에는 작은 중소 회사에 불과했습니다. 회사의 경영을 위해 회장님께선 영업을 맡았었죠.”
US 그룹은 단기간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거래처를 뚫고 회사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모두 김고엽이 발로 뛰어다니며 이루어내야 했다.
“사모님은 회사 살림을 맡으셨는데, 직원들의 월급이 부족하면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줄 정도로 초반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
강려원은 처음 듣는 US 그룹의 전신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다.
많은 사람들이 US 그룹의 화려한 모습만 알고 있을 뿐, 성장하는 과정은 잘 알지 못했다.
당시에 일했던 사람들은 현재 US 그룹에 소수만 남아 있었고 현재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을 하셨죠. 그런데 문제는 사모님의 건강이었습니다. 원채 몸이 약하신 분이었는데 회사 일에 전념하다 보니 건강이 점점 나빠만 갔습니다.”
“회장님께선 눈치채지 못했던 것입니까?”
“네. 사모님께서 철저하게 숨기셨죠. 그래서 회장님께서도 사모님의 병환을 뒤늦게 알아차리셨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님은 왜 그렇게 회사에 집착하셨던 겁니까?”
“회사를 운영해야 장학과 봉사 재단을 운영할 수 있으니까요.”
“네?”
갑자기 뜬금없는 말에 김강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것은 강려원도 마찬가지였다.
“재단이요? 분명 회사가 어렵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회장님과 사모님의 뜻에 의해 회사 순수익의 일부는 재단을 통해 운용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US 그룹에서 나오는 이익의 10%는 재단에 기부되고 있지 않나요?”
강려원은 연말이 되면 매년 전 지주사의 자금 흐름을 확인했는데, 김고엽의 지시에 의해 거액의 금액이 매년 재단에 기부되고 있었다.
그것은 US 그룹 이전부터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맞습니다. 이것이 회장님과 사모님이 회사를 차린 이유니까요.”
“왜 이렇게까지 사회에 환원을 하는 거죠? 일반적인 회사와 다르게 말입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비서실장님.”
두 사람은 US 그룹의 재단 활동이 활발한 이유를 물었다.
보통 재단을 이용한 기부 활동은 대부분 회사가 어느 정도 커진 다음 세금을 덜 내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US 그룹처럼 회사가 창립할 때부터 재단을 같이 만드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할 바에야 회사를 만들지 않고, 재단만 운용하며 돈을 다른 회사와 사회로부터 기부받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회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저는 서울의 어느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죠. 그렇지만 고아원 운영이라는 게 쉽지 않습니다.”
“흐음.”
“워낙 경제가 안 좋기도 했거니와 남북 전쟁이 끝난 뒤라 돈을 벌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회장님과 함께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사모님은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봤죠.”
“설마?”
김강현은 어느 정도 이명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대략 사정이 짐작되었다.
강려원도 마찬가지였다.
“회사를 차린 것이 고아원의 운영하기 위해서였고, 나중에 회사가 성장하면서 재단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면 미쳤다고 할 수 있지만, 두 분은 진심이셨기에 저 또한 평생을 회장님 곁에 남아 보필했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이 일에 미칠 정도로 회사를 성장시키신 것입니까?”
“네. 기부를 받는 건 회장님과 사모님 성격상 어려운 일이었고,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는 데 남의 돈으로 생색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었으니까요.”
그 시절을 떠올리자 이명원은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참으로 힘든 시대였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이명원의 아이들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 또한 고아원을 운영할 돈을 벌기 위해 월급을 반납하며 일했다.
“하지만 김우진 사장님이 회장, 혹은 회장 대리가 된다면 이러한 회장님과 사모님의 유지가 한순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분의 입장에선 재단을 운영하는 것이 손해일 테니까요. 그리고 대규모의 인원 감축이 이뤄질 것입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효율을 중시하는 김우진 사장님은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는 재단과 필요 없는 계열사들은 처분할 테죠.”
‘그리고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 넣겠죠.’
이명원의 말을 듣던 강려원이 자신의 생각을 보태며 뒷말은 삼켰다.
김우진은 왜 김고엽이 US 그룹이 성장하는 데 필요 없는 재단에 신경 쓰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어머니인 정옥연의 뜻인 것도.
하지만 김고엽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냉철한 사업가인 김우진에게 재단은 눈엣가시였다.
다만 김고엽이 건재하기에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강려원의 생각대로 전략기획실을 비롯해서 US 그룹의 요직들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로 임명하고 기존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보낼 것이었다.
“김강현 도련님. 이 늙은이의 부탁을 제발 들어주십시오!”
“…….”
이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고 병실 안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다만 김고엽의 생명을 확인하는 의료기기의 기계음만이 계속 들렸다.
‘돌아가신 할머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그러고 보니…….’
김강현은 문득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10살 무렵 화장실이 급해 잠에서 깨었는데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안을 보자 김철진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김철진은 고민이 많은 표정이었는데,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김강현이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사진이었다.
사진 안에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 2명과 한 여성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사진이 낡아서인지 보관을 위해서인지 코팅이 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사진이냐고 물어보자 김철진이 당황하며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황급히 그 사진을 숨겼다.
‘그 사진이 아마 할머님과 같이 찍은 아버지와 큰아버지였을 거야.’
이명원의 이야기를 듣자 다시금 그 사진의 얼굴들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후, 사진은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인지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때 김철진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고아라고 말했었고 가족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이 발견되면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리는 셈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둘 다 바보 같은 사람들이네.’
김강현은 김고엽을 보며 생각했다.
서로 이야기를 해보면 오해를 풀고 지냈을 수 있었을 텐데, 서로의 자존심이 강해 이야기해 보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 남남이 되어 살아왔다.
만약 정옥연이 살아 있었다면 두 사람 사이를 중재했지만, 그녀가 없어진 지금 오해는 단단한 얼음이 되어 아직까지 풀지 못한 채 응어리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김고엽 회장님, 아니,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면으로 나서겠습니다.”
“도련님!”
“실장님!!”
이명원과 강려원은 김강현이 결정을 내려주자 고마움을 느꼈다.
솔직히 김강현은 김고엽과 정옥연의 사연을 듣자 도저히 이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물론 이대로 계속 US 그룹의 일에 나설 생각은 없었지만, 최소한 김고엽이 깨어날 때까지 어떻게든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를 허락받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그분의 허락이 없으면 저는 결정을 철회할 수밖에 없고요.”
“실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김강현의 뜬금없는 조건에 강려원은 어리둥절했나, 이명원은 금방 그 의미를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3일입니다. 그 안에 결정을 내려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3일은 이명원이 김고엽의 부재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종종 김고엽은 2~3일 정도 요양이나 휴식을 위해 자리를 비우곤 했었다.
임원들에게 김고엽이 자리를 비웠다고 이야기하며 김우진 세력의 동향을 파악할 예정이었다.
강려원도 조금 뒤늦게나마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그래. 오늘도 잘 지냈니?”
“네. 평소처럼 바쁘게 수련하고 일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가네요.”
“나도 마찬가지구나. 뭔 놈의 사건들이 계속 생기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그날 저녁, 김강현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김철진을 기다렸다.
귀가한 김철진은 김강현과 간단히 인사와 함께 안부를 나눴는데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김강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김철진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깐 서재에 가서 이야기하자꾸나.”
그는 피곤한 마음에 씻고 쉬고 싶었으나 진지한 김강현의 얼굴이 진지하여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두 사람은 서재로 이동했고, 자리에 앉자마자 김철진이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회장님이 쓰러지셨고 현재 입원 중입니다.”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너무 놀란 나머지 김철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오늘 아침 정신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한 상태이신데, 병원과 협조하여 이명원 비서실장님이 정보 통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김우진 사장님을 비롯해서 몇몇 임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하아, 그 사람이 심장병을 앓고 있지만, 갑자기 쓰러질 정도로 안 좋은 상태가 아닐 텐데?”
김철진은 김고엽의 소식을 TV와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원치 않더라도 보고 듣고 있었다.
반도체 공장 시찰 소식을 어제 뉴스로 보기도 했다.
“실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김강현은 김철진이 골든 크라운이라는 마력이 담긴 약을 꾸준히 복용한 것과 이로 인해 생명력이 계속 소모되고 있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이야기를 듣는 김철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진 채 펴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