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S급 던전의 소멸
“라 왕국의 빈민촌이었지. 기억하느냐? 라셀의 돈 주머니를 훔치다가 이 몸의 마법에 붙잡힌 것을.”
“네가 헬릭스 님이라고?”
“그래. 이름 없는 거지 아이에게 이름을 주고, 몇 가지 흑마법을 알려주었었지. 다음에 만난 것은 마왕을 소환하는 흑탑 녀석들과의 싸움에서였고.”
헬릭스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슬란은 빈민촌에서 소매치기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소년이었는데, 부유해 보이는 라셀의 돈 주머니를 훔쳤었다.
하지만 돈주머니에 헬릭스의 마법이 걸려 있어 금방 붙잡혀 버렸고.
그때 아슬란을 살펴보니 흑마법에 자질이 있어 재미삼아 흑마법과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 만날 것이라 이야기하면서.
그 후, 아슬란은 흑탑의 흑마법사와 인연을 맺어 흑마법을 정식으로 익히고 흑탑의 제자가 되었다.
빠르게 실력이 성장한 그는 마왕을 소환하는 의식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다시 헬릭스와 만나게 되었다.
“마족과 계약하여 영혼이 저당 잡히기 싫었던 너는 흑탑을 배신하고 이 몸과 함께 흑탑을 쓰러트렸지.”
아슬란는 순수하게 흑마법을 익히는 것에 있어선 거부감이 없었지만, 훗날 마족에게 영혼을 뺏기는 것이 싫어 계약을 맺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마왕 소환 의식에서 라셀과 헬릭스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흑탑에 나타났던 것.
결국 아슬란은 라셀, 헬릭스와 함께 흑마법사들을 쓰러트린 뒤 라 왕국에 귀의했다.
“간악한 마족! 내 기억을 읽고 흔들다니!”
“허, 네 기억을 읽었다고? 멍청한 놈. 네놈이야말로 제대로 환상 마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거늘!”
“뭐라고?”
“정신 차려라. 아슬란. 이러라고 네게 마법을 가르쳐 준 게 아니란 말이다.”
“닥쳐라! 반드시 네놈은 죽이고 말 테다!”
하지만 비틀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슬란에겐 진실을 말해줘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농락한다는 생각에 분노하며 마력을 운용하여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연세연, 본 드래곤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겠느냐?”
“네. 이왕하면 저 리치의 움직임도 같이 묶도록 하죠.”
“좋아.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확실한 연세연의 대답에 헬릭스는 날개를 크게 펼치며 마력을 집중했다.
바람이 소용돌이치고 검은 불꽃이 전신을 감싸 안았다.
“크아아앙!”
본 드래곤은 헬릭스와 떨어지기 위해 아이스 브레스를 시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헬릭스의 불꽃은 본 드래곤의 뼈가 녹을 정도로 엄청난 고열을 내뿜고 있었다.
“젠장! 노오옴!”
본 드래곤의 복구를 위해 아슬란은 절대영도를 시전하여 냉기를 강화했다.
덕분에 본 드래곤이 시전하는 아이스 브레스가 점점 전신을 감싸는 불꽃을 뚫고 파고 들어갔다.
“지금이다!”
“무슨?!”
그렇지만 이 모든 건 헬릭스의 노림수였다.
헬릭스와 본 드래곤이 붙게 되면 본 드래곤이 밀릴 수밖에 없고, 아슬란은 이를 커버하기 위해 나설 것이었다.
이때, 아슬란이 무방비 상태가 되니 연세연의 마법이라면 공략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
그리고 연세연은 헬릭스의 기대에 부응했다.
“프로즌 스톰!”
그녀의 손끝에서 분 바람은 금세 얼음 조각들이 되었고, 바람과 함께 휘몰아쳤다.
‘물과 얼음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어.’
연세연은 루크가 자신에게 건넨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얼음은 물을 얼려 만들어진 것. 루크 님은 물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얼음도 다룰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나는!’
점점 그녀가 만들어내는 얼음이 점점 뿌옇게 변해갔다.
지금까지 연세연이 만든 얼음은 투명하여 겉보기엔 아름답고 깨끗해 보였으나, 쉽게 부서지는 얼음이었다.
그래서 마나의 밀집도를 높이고 정교한 마나 컨트롤을 통해 기존의 스킬을 강화하자, 진화된 얼음 폭풍이 만들어졌다.
‘이 힘은 뭐지?’
연세연은 마나 홀에서 경험해 보지 못했던 냉기를 느꼈다.
그것은 어릴 적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복용했던 빙정의 기운으로 그동안 그녀의 힘이 약해 녹이지 못했지만, 새로운 힘을 얻음으로써 동화되어 갔다.
* * *
“이건 절대영도? 아냐, 그럴 리 없어!”
프로즌 스톰을 본 아슬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자신이 평생을 걸쳐 얻은 절대영도를 연세연이 구현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프로즌 스톰을 막기 위해 다른 한 손으로 보호 마법을 캐스팅했다.
“제 얼음은 고작 그 정도로 막을 수 없습니다!”
“크윽!”
연세연에게 이 기술은 단기간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구상했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피땀눈물이 서려 있는 만큼 단숨에 적을 얼려 버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프로즌 스톰은 본 드래곤과 아슬란을 덮쳤고, 그들을 얼려 버리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이 모습을 지켜본 헬릭스는 바로 아슬란에게 정신 마법을 시전했다.
‘오크 따위에게 당한 이후 개량한 버전이니라. 이번엔 쉽게 당하지 않을 테다!’
일전에 오크 주술사와 싸운 후 그의 머릿속을 살펴보던 헬릭스는 정체불명의 적에게 당한 경험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수모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정신 마법을 새롭게 업그레이드했다.
이제 한순간의 빈틈을 발견하면 상대방이 시전한 정신 제압을 없앨 수 있을 터.
헬릭스는 아슬란에게 걸린 마법을 없애기 위해 그의 정신세계로 들어갔다.
* * *
‘놈들의 기억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김강현은 헬릭스가 아슬란의 정신세계에 들어간 방법을 파악하고 눈앞의 라우드를 노려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강현과 라우드는 서로 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공략하고 있었으나,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뚫리지 않는 창과 방패의 대결이다.
라우드는 불사의 신체를 무기로 오로지 공격만 펼치고 있고, 김강현은 전신을 둘러싼 오러 실드로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서로 기세가 팽팽하여 지금은 어느 한쪽도 밀리는 감이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강현이 불리해질 터.
“후우! 후우!”
“건아. 좀만 더 버텨라!”
“걱정하지 마십쇼! 이 정도로 쓰러질 리 없습니다!”
검천호와 김건의 체력도 바닥나고 있었다.
무려 10명의 S급 헌터와 동시에 싸우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방은 지칠 리 없는 언데드였으니, 점점 검천호와 김건의 상처는 늘어만 갔다.
김강현은 라우드에게 검을 휘두르며 조심스레 말했다.
“라우드, 기억하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네가 소드 마스터가 됐을 때 말이다. 신이 나서 방방 뛰다가 발목이 삐끗 나갔었지.”
“그, 그걸 어떻게?”
이 이야기는 라셀과 라우드만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밤늦은 시간, 라셀이 라우드의 수련을 도와주고 있었을 때 갑작스레 무의식에 빠진 라우드는 얼떨결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본인도 믿어지지 않아 신이 나서 뛰어다니다 실수로 연무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며 발목 부상을 입었던 것.
그는 방정 떨다가 다쳤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기사단원들에게 이 주일 동안 수련을 핑계로 사라진 뒤, 부상을 완벽하게 치료하고 당당히 소드 마스터로 복귀해 많은 기사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 이야긴 아무도 모를 텐데!”
“왜 모른다고 생각하지? 그 사람이 바로 여기 있는데.”
“라셀 님?”
두 사람은 계속해서 서로 검을 부딪치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데스 나이트가 되었지만 라우드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럴 리 없다! 그분은 용마대전에서 돌아가셨고, 내 눈앞에 나타날 리 없단 말이다!”
콰앙!
라우드는 머리에서 떠오르는 이상한 생각을 날려 버리며 검에 오러를 더욱 크게 담아 힘을 주었다.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군. 그럼 내가 라셀이라는 걸 증명하면 될 터!”
“뭐?”
김강현은 아공간에 넣어둔 초상화들을 꺼냈다.
마침 라우드는 김강현에게 검을 휘두르던 중이었지만, 눈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자 허공에서 검을 멈췄다.
“이때는 라 제국의 선포 날로 다 같이 모여 마법으로 저 장면을 저장했었지. 이건 용마대전이 벌어지기 전 다 같이 살아 돌아오자는 약속으로 만든 거고, 이건 네가 소드 마스터가 된 개념으로 나와 함께 만들었던 것 아닌가?”
“으으으-”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내용까지 김강현이 이야기하자 라우드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환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고, 지금 네 모습을 똑바로 봐라. 라우드. 고작 어둠의 힘에 잠식당해 조종당할 테냐?”
“내가 언데드가 되었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바로 지금!’
라우드가 혼란스러워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김강현은 준비한 정신 마법을 발동하여 그의 정신세계로 들어갔다.
* * *
“여긴?”
“라 제국의 수도니라.”
“헬릭스?”
“아무래도 아슬란과 라우드. 두 녀석의 정신세계가 이어져 있는 모양이야.”
“언데드가 되면서 강제로 연결되었구나. 혹은 일부로 하나로 만들었거나.”
아슬란의 기억을 읽으려던 헬릭스가 같은 정신세계에 있었다.
김강현은 이들을 언데드로 만든 자가 강력한 힘으로 자아를 통합했음을 알아차렸다.
빨리 기억을 읽어 어떻게 데스 나이트가 되었는지, 왜 이 던전 안에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정말 여기가 라 제국의 수도가 맞는 거야?”
“폐허가 되긴 했지만 맞느니라.”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지?”
주변을 둘러보는 그들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곳곳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고 건물들은 부서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수도의 모든 사람들이 죽은 채 쓰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부상에 의한 죽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김강현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기이하게도 손이 몸을 뚫고 지나갔다.
“그만둬라. 여긴 녀석들의 기억 속이야. 우리가 물리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건 없느니라.”
“크윽!”
“우선 서둘러 놈들을 찾아야 하느니라. 이 시간에도 놈들의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 말이야!”
헬릭스의 말대로였다.
김강현은 급히 마음을 수습하고, 익숙한 길을 따라 움직였다.
“어디로 가는 거냐?”
“황궁. 아까 시체들을 보니 대규모의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아. 라우드와 아슬란은 에이트의 안위를 확인하러 움직였을 거야.”
“일리 있는 말이구나.”
라우드는 에이트를 가장 가깝게 보필하는 근위기사단장을 맡고 있었지만, 평상시에는 황궁과 수도의 경계를 맡고 있었다.
아슬란도 수도의 저택에서 마법 연구를 하는 편이었으니, 이런 대형 사건이 벌어졌다면 황궁으로 움직였다는 공산이 컸다.
예상대로 황궁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라우드와 아슬란을 볼 수 있었다.
* * *
“이만하면 다 처리한 건가?”
“그런 것 같군. 더 이상 언데드들의 마력과 몬스터들의 생명력이 감지되지 않아.”
둘은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말했다.
라우드와 아슬란은 황궁의 어느 건물 앞에 서서 이곳에 들어가려는 언데드들과 몬스터들과 싸우느라 상처투성이였다.
체력도, 마나도, 마력도 바닥이지만 이렇게 쉴 시간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황제 폐하는 은신처에 도착하셨을 터.”
“우리도 주변 정리하고 다른 이들과 합류하자고.”
그들은 지친 몸을 일으키며 미리 준비된 은신처로 움직였다.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그들의 길을 가로막았지만, 라우드의 검과 아슬란의 마법에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대체 이게 뭔 난리인지!”
“용마대전이 끝난 지 10년 밖에 안 되었는데 또 이런 대참사라니.”
“다시 흑탑이 부활한 걸까?”
“아무도 모르지. 하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배후를 잡아 죽이고 싶다는 거야.”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했다.
그나마 두 사람이 수도에 있어 위기 상황에 바로 대처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먼 곳에 있었다간 황제 에이트를 죽게 내버려 둘 뻔했다.
그만큼 수도와 황궁에 나타난 몬스터와 언데드의 수는 많았고, 강력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테라 대륙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터라, 서둘러 다른 곳에도 지원이 필요했다.
라 제국은 용마대전이 끝난 이후 10년 동안 안정화를 위해 군대를 늘리고 영지 재정도 탄탄하게 마련해 두어 이런 위급 상황이 벌어졌을 때 바로 대처할 수 있었지만, 다른 제국과 왕국들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라 제국의 안정을 위해선 황제 에이트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만약 에이트가 죽을 경우 어린 두 황자의 세력들이 황제 자리를 두고 싸움이 벌일 수 있었다.
“아직까지 별일 없는데?”
“대체 저 녀석들을 누가 죽인 거지?”
한편, 이들을 발견한 김강현과 헬릭스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곳은 라우드와 아슬란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정신세계인 만큼 그들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응?”
“이 기세는 뭐야!”
그때,
김강현과 헬릭스는 갑자기 앞쪽에서 감지되는 힘에 소름이 끼쳤다.
분명 이곳은 상대방의 기세나 살기 등 힘을 감지할 수 없는 장소일 텐데.
그럼에도 이를 부정하듯 상대의 존재감이 강하게 감지되었다.
라우드와 아슬란도 그를 발견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 눈을 가진 사내였는데, 붉은 로브를 착용한 데다가 마력을 풍기고 있어 흑마법사로 짐작되었다.
“마법사단의 생존자인가?”
“그럴 리가, 마법사들은 모두 각 영지들로 보냈지 않나.”
라우드의 말에 아슬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몬스터와 언데드의 침공 소식을 들은 직후, 수도에 남길 인원을 제외한 마법사들을 영지 파견해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했다.
수도에 남은 마법사들은 도시를 지키기보단 수도의 백성들을 지키며 피신했다.
“이봐. 누구냐?”
라우드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 나갔다.
적이라고 판단될 경우 당장에라도 베어버릴 기세.
“피, 피해!”
“뭐?!”
아슬란이 사내의 마력에 섬뜩함을 느끼고 다급히 소리쳤다.
그렇게 라우드도 이상함을 감지하고 피하려고 하는 순간.
사내의 머리 옆에서 검은빛의 구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라우드!”
“큭! 괜찮아! 일단 아군은 아닌 모양이야.”
“젠장. 그나마 깨끗하게 날아가서 피 멈추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균형이 맞지 않을 거다.”
“나중에 좋은 녀석으로 만들어 줘라.”
방금 공격으로 라우드의 왼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원래는 심장을 노린 공격이었으니, 반응하지 못했으면 바로 현장에서 죽을 뻔했다.
검은빛의 구체는 라우드의 왼팔을 뚫고 뒤편의 건물도 깨끗하게 없애 버렸다.
뒤에 있던 아슬란이 급히 다가와 지혈시킨 후, 같이 싸울 준비를 마쳤다.
“분명 녀석들에게 모든 생명체를 죽이라고 했거늘. 내 예상보다 강한 인간들이구나.”
“모두를 죽이라고?”
“그럼 이 모든 게?”
“그래. 내가 언데드들을 소환하고 몬스터들을 조종했다.”
남자는 당당하게 자신이 한 행동을 밝혔다.
“허? 그래 놓고 네가 인간이냐?”
“당연한 일을 한 것 가지고 뭐라고 지껄이는 것인지 모르겠군. 원래 인간은 하등한 존재로 모두 죽어야 함이 마땅하거늘.”
“뭐야?”
“네놈은 절대 살려줄 수 없겠군.”
라우드와 아슬란은 무조건 놈을 죽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만약 놈을 여기서 놓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고, 어쩌면 테라의 모든 사람들이 죽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터.
“흐아아앗!”
“절대영도!”
마음을 먹은 두 사람은 힘을 끌어모아 오러 소드와 얼음 칼날을 쏘아 보냈다.
크기는 1m에 불과할 만큼 작았으나, 소형 영지 하나는 단숨에 없앨 만큼의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은 대륙 곳곳에 나타난 언데드와 몬스터를 조종하는 만큼 막대한 힘을 가진 존재였으며, 라우드의 왼팔을 순식간에 없앤 강자였다.
남자는 가만히 서 있다가 오러 소드와 얼음 칼날이 눈앞에 다가오자 오른팔을 허공에 휘둘렀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아니다. 노, 놈의 힘에 없어진 거다.”
오러 소드와 얼음 칼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력에 민감한 아슬란은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어둠의 공간에 의해 오러 소드와 얼음 칼날이 소멸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 인간들은 재미있어.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할 텐데 다른 종족들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거든.”
남자는 오른팔을 들어 보이며 상처를 확인했다.
10%의 힘이면 저 두 사람의 공격을 없앨 수 있다고 판단하고 마법을 시전했는데, 생각보다 위력이 강했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상처가 생겨 버렸고.
“그래서 인간들은 모조리 없어져야 한다!”
순간, 하늘에서 막대한 마력이 감지되며 검은 구름이 수도 상공에 모여들었다.
더불어 검은 구름 사이로 붉은빛이 비추더니 불꽃에 휩싸인 돌덩어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콰르르르릉!
콰앙!
“저, 저게 마법으로 가능하다고?!”
“미티어 스트라이크.”
절대 마법 중 하나인 유성 마법.
하늘 밖 세계에 존재하는 유성을 대륙으로 끌어들여 추락시키는 마법으로, 막대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 사이에선 금기 마법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유성의 지름은 10㎞ 정도.
지상에 떨어질 경우 라 제국의 수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자명했다.
그 모습은 마치 세계의 멸망과도 같았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살아남아 봐라. 쓰레기들아!”
말과 함께 그는 이동 마법을 시전하여 수도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주변 마나 흐름을 꼬아놓아 아무도 이동 마법을 펼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즐거웠다, 아슬란.”
“너와 함께라면, 수도 전체가 내 무덤이면 나쁘지 않겠지.”
라우드는 유성을 향해 검을 들었고, 아슬란도 마법을 준비했다.
어느새 머리 위로 내려앉은 유성을 향해, 두 사람은 마지막 발악으로 모든 힘을 난사했다.
그와 함께 세상은 검은빛으로 물들었고, 둘의 기억도 끝이 났다.
* * *
“커억!”
“헤, 헬릭스 님?”
“괜찮다. 그보다 아슬란과 도마뱀은?”
헬릭스는 아슬란의 정신세계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연세연에게 상태를 물었다.
정신세계에서는 30여 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현실은 불과 1초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
“크으으으으.”
아슬란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로 인해 본 드래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잠시 헬릭스와의 싸움을 멈추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들을 따라 헬릭스와 연세연도 지상으로 내려온 뒤, 헬릭스는 작은 강아지의 형태로 폴리모프했다.
이곳에 걸려 있던 공간 마법도 어느새 풀려 있었다.
“라우드! 정신 차려라! 라우드!”
“으으윽!”
라우드의 상태도 아슬란과 똑같았다.
두 사람은 김강현과 헬릭스에 의해 잊고 있던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그동안 강제로 지웠던 기억을 복구하는 과정은 언데드라 하더라도 엄청난 정신력을 소모했다.
김강현을 비롯한 테라 길드원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면밀하게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커억!”
“허어억!”
5분쯤 지나자 라우드와 아슬란은 깊은 호흡을 토해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라우드?”
“아슬란?”
김강현과 헬릭스가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입니다. 헬릭스 님.”
“라, 라셀 님. 진짜 라셀 님이십니까?”
“기억을 되찾았구나!”
“네. 지금 제 모습과 라셀 님이 낯설긴 하지만…… 저는 당신이 아는 라우드가 맞습니다.”
두 언데드는 생전의 기억에서부터 던전에서 이들과 싸운 기억까지 모두 회복했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
“분명 저희들은 미티어 스트라이크 마법으로 죽었었는데.”
“여긴 지구라는 곳이며 테라로 강제 소환되기 전에 살던 세계다. 이곳은 던전이라 불리며 몬스터들이 나타나지.”
“그럼 이계라는 말입니까?”
“맞다. 일전에 라셀이 자신이 살던 세계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더냐?”
“허.”
아슬란은 김강현과 헬렉스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들은 테라에서 라셀이 이계에서 온 인간이며 드래곤 로드 파벨리온에 의해 개조된 키메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거짓을 말할 위인이 아니기에 진실을 대면하자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너희들의 기억을 통해 마지막 순간을 보았다. 그 이후의 기억이 존재하느냐?”
“음.”
기쁨의 해후도 잠시.
김강현은 언제 상황이 돌변할지 몰라 빠르게 라우드와 아슬란에게 질문했고, 둘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아뇨. 없습니다.”
“저희의 기억은 모두 지워지고 뇌리에 남은 명령만 있습니다.”
“무엇이냐?”
“인간들을 모두 죽여라.”
그 순간 김강현과 헬릭스는 등골이 오싹했다.
단순히 협박성이 다분한 말이지만, 아슬란의 말이 그들의 기억을 통해 본 로브 사내와 겹쳐 보였다.
‘테라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인간들도 모두 없애려는 목적이 아닐까?’
“한 가지만 더 물어보지. 너희들을 죽인 자와 언데드로 만든 자는 똑같은 녀석일 터. 그에 대한 기억은?”
헬릭스의 말에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며 라우드와 아슬란의 입을 보았다.
* * *
“역시 기억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명령에 충실한 언데드에 불과했습니다.”
라우드와 아슬란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죽음 이후의 기억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던전을 만든 테라의 고위 종족?’
두 사람을 언데드로 만든 이는 마법을 시전하고 언데드와 몬스터를 조종했다.
차원을 뚫고 이세계에 던전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막대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심지어 마족이나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강현과 헬릭스는 점점 범위를 좁혀 나갔다.
‘지그문트와 마족들은 아니야. 용마대전으로 마계의 힘이 약해졌고, 그랬다면 다크니스라는 조직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겠지.’
만약 마계의 힘이 건재했다면 다른 마왕들과 함께 강림했을 텐데, 소환자에 의해 지그문트만 지구에 강림하고 힘을 비축하는 것을 보면 마계는 제외였다.
‘드래곤? 같은 종족들이 이를 방치할 리가 없어.’
이들은 자존심이 높고 오만한 종족이지만, 중간계의 조율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절대 테라를 망가트릴 녀석들이 아니었다.
만약 악한 길에 빠진 마룡이 나타난다면 일반적으로 드래곤들 중 한 마리가 처단자가 되어 마룡을 없애곤 했다.
때문에 마룡이 된 드래곤은 일반적으로 마계로 도망쳤다.
‘혹은 신의 이름으로 정화를 하는 건가? 그러기엔 테라의 힘이 약해진 상태고, 불과 2,000년 전에 정화가 이루어졌어.’
많은 이들은 모르지만 테라는 신의 이름으로 여러 번의 정화 단계를 거쳤다.
인간들의 욕심이 하늘을 찌르고, 다른 종족들의 생명까지 위협할 상황에 이르면 신의 가호를 받은 드래곤들이 나섰다.
이 드래곤들은 각 나라들을 없애버림과 동시에 인간들의 숫자를 10분의 1로 줄여 버리는 등 문명을 퇴화시켰다.
이러한 정화를 통해 어떤 시대는 마법이 부흥하기도 하고, 혹은 검이 부흥하는 등 다양한 문화가 계속해서 발전했다.
‘어렵구나. 정보가 너무 적어.’
‘분명 여러 던전을 돌다 보면 정보를 더 얻게 될 거다.’
김강현과 헬릭스는 이 던전을 만든 자가 테라를 멸망시키고, 인간들을 없애 버리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이 던전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죠?”
그때, 김건이 모두가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앗! 그러고 보니…….”
“보스 몬스터라 생각되는 데스 나이트와 리치를 제압했는데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군.”
보통 보스 몬스터를 죽이면 바로 던전을 나갈 수 있는 게이트가 생성된다.
하나 그들은 라우드와 아슬란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저희의 영혼석이 심장에 있습니다. 이를 동시에 파괴하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모르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이 나는군요.”
라우드와 아슬란이 살짝 고개를 기웃거린 후 대답했다.
테라 길드원들은 던전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생기자 다들 안도하는 기색이 되었지만, 김강현과 헬릭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영혼석을 부순다는 건 너희들의 소멸을 뜻하는 거다. 알고 말하는 것이냐?”
“네에?”
“다시 던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요?”
김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헬릭스의 말을 거들었다.
“영혼석은 유일하게 네임드 몬스터만 가지고 있어. 즉, 유일하게 하나뿐인 몬스터란 말이지.”
“괜찮습니다. 저희가 원해서 어둠의 종속이 된 게 아니니까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소멸하는 편이 좋습니다.”
잔인한 말임에도 라우드와 아슬란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나갔다.
“뒤편의 옥좌가 이곳을 유지하는 힘의 근원이니, 부수어 무덤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래야 저희들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입니다.”
“라우드…… 아슬란.”
그들을 보는 김강현의 눈이 붉게 물들며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이들의 운명이 너무도 처참했다.
한평생 기사와 마법사의 삶을 추구하며 갖은 노력을 통해 원하는 경지에 올랐는데.
죽음 이후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많이 약해지셨군요, 라셀 님.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아까보다 환하게 웃으며 김강현을 위로했다.
‘시간이 흐르니 이런 라셀 님을 보게 되는구나.’
그들에게 이런 김강현의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그들이 아는 라셀은 항상 냉정하며 감정 표현이 없었다.
적에게는 자비 없이 오로지 죽음뿐이어서 같은 소속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을 정도.
이제 라셀이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제정신으로 사는 게 아니었으니까.’
라우드와 아슬란의 말에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김강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면 어떨까?
말과 문명이 다르고 자신만 외부인인 세계라면?
세상에 나오기 전, 파벨리온의 레어에서 실험체의 삶은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다.
무사히 탈출한 뒤에도, 겉모습은 사람들과 똑같을지 몰라도 생활 습관이나 문명, 언어, 행동 등 모든 것이 낯설고 적응하기 어려웠다.
키메라 세포로 인해 다치는 것이 불가능했고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던 데다가 이대로는 무한한 삶을 살 것 같아 내심 죽기 위해 미친 듯이 싸우는 괴물의 삶을 살았다.
‘지구로 돌아온 뒤로 그때의 기억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좋은 기억은 아니야.’
물론 테라에서 좋았던 기억들도 있어, 가슴에 품은 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은 지금의 김강현이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어느새 잃었던 감정들을 되찾은 그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고맙다. 라우드, 아슬란.”
김강현은 그들의 위로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며 과거 주변 사람들을 지금처럼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말씀을.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았겠지만.”
“놈이 눈치채기 전에 서둘러 주십시오!”
라우드와 아슬란은 자신들을 종속시킨 자와의 끈이 강제로 끊어져 있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덕분에 자유 의지로 기억을 되살리고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이를 알아차리고 다시 자신들을 조종하면 죽는 과정이 힘들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기분 나쁜 예감은 항상 잘 맞아떨어졌다.
“끄륵! 끄르르륵!”
“끄어어어어억!”
갑자기 라우드와 아슬란이 괴성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며 점점 희미해지는 정신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히 종속 마법에서 벗어나다니! 어떤 놈인지 궁금하구나.
“노, 놈입니다! 끄으윽.”
“어서 죽여주십시오!”
그들은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들을 언데드로 만든 자임을 깨닫고 서둘러 김강현과 헬릭스를 재촉했다.
“젠장!”
“미안하다.”
둘은 다시 라우드와 아슬란이 정신 지배를 당하기 전에, 마검과 블러드 웨폰으로 그들의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크윽!”
“설마 늦은 건가?”
공격은 라우드와 아슬란의 몸을 꿰뚫지 못한 채 그들이 내뿜는 마력에 의해 멈췄다.
“강현아, 헬릭스!”
“너희들은 나서지 마!”
“여기에 휘말리면 바로 죽는다.”
겉보기엔 김강현과 헬릭스가 무기를 휘두른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 적의 마력에 대항하기 위해 계속 마나와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테라 길드원들이 개입하면 바로 힘의 충돌이 일어나 김강현과 헬릭스가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상황.
그때, 라우드와 아슬란의 두 눈이 붉게 물들며 동시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놈들이 언데드들의 종속 마법을 깬 것이냐?”
“그래. 네놈은 누구냐?”
“던전을 만들고 이들을 언데드로 만든 녀석이냐?”
김강현과 헬릭스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대는 대답을 하기 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간들? 설마 여길 찾아내고 이들의 정신 지배를 깰 줄이야…… 여긴 인간들의 수준이 높다는 건가?”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대답해라!”
“이 몸은 테라 세계의 지배자, 그로시아스니라.”
“그로시아스?”
두 사람은 그로시아스라는 이름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목소리는 왠지 낯익은데.’
‘그로시아스라는 이름을 쓰는 자가 있던가?’
테라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진 자들의 이름을 꿰뚫고 있던 김강현조차 그로시아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헬릭스도 순식간에 머릿속을 뒤져 그로시아스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 이종족, 드래곤, 마족, 천족 등을 떠올렸으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테라 세계의 지배자라고?”
“네놈이야말로 세계의 지배자를 지칭하다니. 상당히 미친놈이로구나.”
그로시아스가 내뱉은 말의 무게를 아는 김강현과 헬릭스가 반박했다.
그들이 아는 테라는 지상계, 마계, 천계로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마계와 천계가 호시탐탐 지상계를 노리는 관계로, 마계가 지상계를 점령하면 천계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팽팽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지상계는 드래곤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어 이 세 곳이 통합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미 지상계가 내 손아귀에 들어왔고, 곧 천계도 들어올 것이다. 게다가 마계는 용마대전의 후유증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 이만하면 테라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가 당연하지 않느냐?”
“네놈…… 누구냐?”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느낀 김강현은 다시 한번 정체를 물었다.
순간 섬뜩함이 들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라면 라우드와 아슬란처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언데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라는 상상도 떨칠 수 없었다.
“기대해도 좋다. 그곳에도…… 응? 설마 헬릭스?”
“이 몸을 알고 있다고?”
“크크큭, 이쪽 인간이 라셀인가?”
‘우리를 알고 있어?’
김강현은 라우드와 아슬란의 시선 너머의 존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다시 한번 기억을 떠올렸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웃음소리에서 분노와 희열이 느껴졌다.
“크크크큭, 드디어 찾았다. 찾았어! 테라를 모조리 뒤져도 없었던 놈들이 그곳에 숨어 있었구나. 크하하하하하하!”
“허억!”
“뒤로 물러나서 몸을 보호해!”
그의 웃음소리와 함꼐 라우드와 아슬란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졌다.
몸이 주저앉을 정도로 강력한 파동에 김건과 연세연이 버티지 못하자 다급히 김강현이 소리쳤다.
다행히 검천호의 도움으로 금방 대처할 수 있었지만, 김강현과 라셀은 움직이지 못한 채 계속 그와 힘겨루기를 이어나갔다.
“이제야 모든 궁금증이 풀리는구나. 라 제국이 멸망해도, 네놈과 가까웠던 자들이 모조리 죽어도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들이 말이야!”
“다시 한번 말해봐라. 뭐라고?!”
순간 김강현은 화가 솟구치며 강하게 마나를 내뿜었다.
* * *
“이 인간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라 제국은 멸망했다. 살아남은 인간들이 저항하고 있지만 쓸데없는 몸부림이야.”
“이 개자식이!”
“진정해라. 강현! 놈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느니라!”
그로시아스의 말장난에 김강현이 넘어가자 급히 헬릭스가 진정시켰다.
“후우, 하지만 저 말이 완전 거짓이 아니라는 거다. 너도 보지 않았냐? 라 제국의 수도가 한순간에 없어지는 모습을!”
“사람만 무사하면 도시는 다시 재건하면 된다. 그리고 라우드와 아슬란이 싸울 당시 도시의 사람들은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놈들의 기억을 읽었구나.”
“젠장!”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헬릭스의 말에, 김강현은 그로시아스가 말에 거짓을 섞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정했다.
라우드와 아슬란의 죽음 과정을 알기 위해선 그들의 기억을 읽지 않으면 확인이 불가능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이렇게 던전들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냐 말이다.”
헬릭스는 조심스레 그의 목적을 물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너희 둘을 향한 복수.”
“나와 헬릭스?”
‘정확하게 우리들을 가리키는 것을 보면 우리와 악연이 있을 터.’
그로시아스의 대답에 김강현은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 자신들과 척을 진 자들을 이름을 되뇌었다.
인간 중에선 흑탑의 수장과 크라인 제국의 황제 등이 떠올랐고, 마계는 모든 마족들이 대상이었다.
드래곤들 중에서도 몇몇 녀석들이 떠올랐다.
“두 번째는, 끄으윽- 인간들의 몰살. 인간들은- 크윽, 절대 살려둬서는, 커헉! 안 될 쓰레기들이니라!”
그로시아스가 라우드와 아슬란에게 정신 마법을 강하게 펼치자 두 사람의 신음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두 사람의 마력이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냐?!”
김강현과 헬릭스는 날뛰는 마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현재 운용 중인 마나와 마력을 마검과 블러드 웨폰에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라우드와 아슬란의 고통이 간접적으로 느껴졌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마력 폭주로 이어져 자신들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너희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 정도로 죽지 않겠지만, 부상은 입힐 수 있겠지.”
“그로시아스!”
“서로 즐겁게 헤어지길 바라지.”
그는 냉혹했다.
라우드와 아슬란이 그들과 친분이 있다는 걸 짐작하고 일부러 마력 폭주를 일으켰던 것.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은 자아를 잃고 살아 있는 존재들을 찾아 공격하는 괴물에 불과해진다.
본래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선 그들을 소멸시켜야 하긴 했지만, 그로시아스는 더욱 잔인하게 죽이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의 계략에 김강현은 분노에 차 소리쳤다.
“괴로워해라. 끄륵! 고통스러워해라. 끄으, 라셀, 분노에, 끄르르륵- 절망하며 몸부림쳐라. 크크큭!”
그로시아스는 마지막 전언을 남기고 라우드와 아슬란의 정신에서 벗어났다.
“젠장! 라우드, 아슬란! 정신 차리거라!”
“끄으으윽!”
“어, 어서, 크륵, 죽여주십시오!”
헬릭스가 다급히 그들의 이름을 외쳤지만, 라우드와 아슬란은 그로시아스가 새겨놓은 마력 폭주를 간신히 억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검 어르신.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냐?”
차분하게 가라앉은 김강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렸다.
아니, 그 목소리에는 깊고 깊은 분노가 있었지만,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제로 가라앉힌 것에 불과했다.
“강제로 서로의 힘을 충돌시킬 예정입니다. 그때 폭발이 일어나지 않게 무력화해 주시겠습니까?”
“어렵지만 해보마.”
“강현. 괜찮은 거냐?”
“후우, 놈의 계략이 화가 나지만 이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잖아. 지금은 그로시아스보단 라우드와 아슬란이 우선이야!”
김강현은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았다.
화가 나더라도 눈앞에 그로시아스가 없는 이상, 무형의 존재에게 화를 낼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라우드와 아슬란에게 평온한 소멸을 주는 것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녀석들의 마력이 요동칠 때, 타이밍을 맞춰 충돌시킨다. 헬릭스.”
“좋다. 너희들은 이 몸의 신호에 맞춰 억제하는 마력을 풀거라!”
“…….”
라우드와 아슬란은 헬릭스의 말에 어떤 대답이나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마력 폭주를 억제하기 위해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만큼 작은 움직임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헬릭스는 알아들었다는 가정하에 신호를 내보냈다.
“지금!”
파아아앗!
외침과 함께 라우드와 아슬란은 마력을 발산시켰고, 동시에 김강현과 헬릭스도 마검과 블러드 웨폰에 힘을 집약해 마력을 폭발시켰다.
“하아앗!”
콰아아앙! 콰앙!
그 순간 검천호가 천류신검을 휘둘러 폭발의 범위을 최소화시켰지만, 거센 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라의 홀이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약한 폭발이더라도 그동안 낡아 부서진 건물 곳곳에 금이 가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기세였다.
“라우드!”
“아슬란!”
일시적으로 라우드와 아슬란의 마력 폭주가 중단되고 빈틈이 생겼다.
김강현과 헬릭스는 다시 한번 그들의 심장에 박혀 있는 영혼석을 부쉈다.
“가, 감사합니다.”
“라셀 님, 헬릭스 님. 부디 평안하시길.”
종속의 증거이자 그동안 그들의 육체를 유지시켰던 영혼석이 부서지자 라우드와 아슬란은 짧은 시간이나마 다시 정신을 차렸다.
“젠장. 그곳에서는 편히 쉬거라.”
“너희들을 이렇게 만든 그놈은 우리가 복수해 주마.”
“감사합니다.”
“두 분은 천천히 오십시오!”
라우드와 아슬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점점 몸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슬퍼하는 김강현과 헬릭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데스 나이트와 리치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 자리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게이트가 형성되었다.
라의 기사단과 본 드래곤은 라우드와 아슬란의 마력으로 소환되었던 존재들 또한 소멸을 맞이했다.
우르르르르릉! 콰아앙! 콰앙!
라의 홀이 부서지며 건물 잔해들이 그들을 향해 떨어졌다.
“어서 가자. 여기 있다간 위험할 것 같구나.”
“강현 형님, 헬릭스 님!”
“먼저 가. 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어.”
김강현은 던전을 탈출하려는 검천호와 김건의 말에 게이트가 아닌 옥좌로 향했다.
“진짜 던전을 소멸시키려고 하는 거야?”
“국제법상 던전을 없애는 건 범죄야!”
다급하게 연세연이 소리쳤다.
던전이 지구에 나타난 시간은 1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사체로 만드는 제품들과 마나석은 인류에게 막대한 부와 편리함을 주고 있었다.
이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세계헌터협회는 던전의 소멸을 금지한다는 법안을 국제법으로 지정해 놓았다.
일전에 김강현이 비천 길드와의 싸움에서 B급 던전을 소멸시킨 적이 있었지만, 비천 길드가 헌터협회를 이용해 소멸 내용을 은닉해 그냥 넘어갔던 것.
“이 던전은 내버려 두면 안 돼. 라우드와 아슬란이 소멸되었어도 이 자리를 대체할 보스 몬스터가 생성될 거고, 그로시아스의 명령을 받고 움직일 거야. 이 사실을 알고 내버려 두라고?”
“그건!”
옆에서 그들의 모든 대화를 들었던 연세연은 반박할 수 없었다.
테라의 모든 인간들을 없앴고, 지구의 인간들도 없애겠다는 그로시아스였다.
또한 이 던전뿐 아니라 다른 던전에도 놈의 손길이 미쳐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우리 먼저 가마. 곧 뒤따라 나오거라.”
“검 어르신…….”
“지금은 그냥 가자꾸나.”
‘던전이 생겨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던전 국제법을 지정하는 자리에는 검천호도 있었다.
그 또한 평소라면 던전을 소멸시키는 헌터를 누구보다 나서서 막았을 터.
하지만 던전에 대한 진실을 엿본 이상 던전 국제법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김강현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검천호, 김건, 연세연이 먼저 던전에서 나갔다.
“어쩌면 우리로부터 던전과 헌터의 시대가 시작된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모든 것이 너로부터 시작하고 있어.”
김강현과 헬릭스는 옥좌에 다가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두 세계의 시간의 흐름은 달랐지만, 던전이 김강현의 영혼이 테라로 넘어간 이후 지구에 발생한 것은 분명했다.
더불어 지금까지 만났던 마왕 지그문트, 라우드, 아슬란 등은 전부 라셀과 인연이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그로시아스도 자신들과 연관성이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놈만큼은 죽이겠다!”
콰아아앙!
김강현은 마검를 오러를 둘러 단숨에 옥좌를 가루로 만들었다.
그러자 라의 홀의 붕괴가 더 빨라졌다.
성도, 던전도, 공간이 일그러지며 천천히 소멸되기 시작됐다.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평안한 휴식이 되길.’
던전이 소멸되는 이상 이곳의 몬스터들도 같이 소멸되어 사라질 것이었다.
그 말은 원치 않게 언데드가 된 테라의 사람들도 소멸되어 쉴 수 있을 뜻이었다.
김강현은 헬릭스와 함께 던전에서 탈출했고, 동시에 게이트도 소멸하며 자리에는 어둠만이 남았다.
* * *
“결국 소멸한 건가?”
그로시아스는 자신과 종속의 계약으로 연결된 라우드와 아슬란의 기운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보통 언데드들은 육체를 잃어버렸을 경우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조치해 놓았으나, 김강현과 헬릭스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영혼까지 소멸시켜 그로시아스와의 끈을 없애 버렸다.
“게다가 던전까지 사라지다니…… 역시 라셀과 헬릭스로군.”
방금 소멸한 던전에는 언데드 전력의 2할이 보관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언데드 제련 과정을 거치고 있는 미완성품.
만약 완벽하게 제련이 끝났다면 온전한 라의 기사단과 흑마법사단까지 소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막대한 전력의 피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시아스는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찾았다. 설마 원래 세계로 돌아갔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어. 크크크큭!”
그는 10년간 테라 전체를 뒤지며 라셀과 헬릭스를 찾았다.
라셀이 죽음을 맞이할 당시 눈앞에서 그의 죽음을 보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영혼에 건 마법이 사라지지 않았다!’
라셀은 특별하게 만들어진 존재로써, 그의 행방을 파악하고 종속시키기 위해 영혼에 마법을 걸어두었다.
만약 라셀이 용마대전에서 죽었다면 마법도 사라졌어야 했는데, 마법은 사라지지 않고 건재했다.
라셀이 살아 있다면 그와 계약을 맺은 헬릭스 또한 당연히 살아남았을 터.
“라셀. 라셀!”
그로시아시는 라셀을 떠올리자 그에게서 입은 얼굴의 흉터에서 통증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