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기지개를 켜기 위한 준비Ⅰ
“이걸 우릴 제외한 자가 만들었다고??”
전신 갑주를 입은 중년의 남성이 스펠 바이러스 치료제를 분석한 결과를 보며 중얼거렸다.
스펠 바이러스의 치료제는 마법적인 요소가 섞여 있어 현대 과학 기술로 완전히 분석할 수 없었지만, 그는 지구에 존재할 수 없는 지식들을 다수 알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과 공유하고 외부로의 유출을 막고 있었다.
“테라 길드의 김강현.”
그런데 스펠 바이러스 치료제에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이 발견됨과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상위의 지식도 확인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움직여 물어보고 싶으나 그들은 신중하게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김강현이 적인지 아군인지 파악하는 단계가 남았다.
중년인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건너편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아무것이 없이 가운데 유리관만 하나 있었다.
그 안에서는 10대 중반의 소녀가 은은한 빛무리에 휩싸인 채 누워 있었다.
각성 스킬이 발휘되는 중인 상태.
이 상태는 정신을 잃고 있어 안전에 위협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항시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혹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의료기기도 세팅되어 있었다.
중년인 그녀가 언제 깨어날지 궁금했다.
그녀가 정신을 잃고 각성에 빠진 지 1년.
보통 각성 상태는 하루 이틀이면 끝나는데 이번 각성은 걸리는 시간이 길다.
그래서 김강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다.
김강현이 그녀가 말한 구원자인지, 세상을 없앨 파멸자인지 알 수 없어 지금은 기다릴 뿐이었다.
* * *
“다녀왔습니다.”
“강현아, 왔니?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괜찮아요.”
“정말이니?”
“오빠, 어서 와!”
“밖에서 생활하느라고 고생 많았다.”
집에 온 김강현은 가족들의 환대를 받았다.
바실리스크 레이드 이후 하루에 한 번씩 이수진에게 전화를 했었기에, 귀국 날짜가 잡히자마자 바로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가족들은 먼저 김강현의 건강을 챙겼다.
“네! 그리고 외국에서 선물들을 사 왔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아싸. 오빠 최고!”
“어머, 정말이니? 누가 사 왔는데 마음에 안 들겠니!”
김강현의 양손에는 집에 들어오기 전 아공간에서 꺼냈던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
김아현은 이미 김강현이 들어올 때부터 쇼핑백에 시선이 꽂혀 있었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쇼핑백을 낚아챘다.
“우와! 오빠가 이런 브랜드를 어떻게 알고 사 왔대?”
“유명한 브랜드니?”
“엄청요! 게다가 한국에는 입점도 안 해서 굉장히 희귀한 아이템들이에요.”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은 김아현은 김강현이 사 온 물건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정확히는 루시아와 직원들의 소개로 산 선물들이지만,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이수진과 김철진도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김강현은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응? 안 자고 무슨 일로 온 거냐?”
“잠시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요. 바쁘신 건 아니죠?”
“괜찮으니 들어와라.”
이수진과 김아현은 일찍 잠들었고, 김철진은 늦은 시간까지 책을 보다가 잠자는 편이라 평소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를 알고 있는 김강현은 서재를 방문했다.
김강현의 방문에 김철진은 읽던 책을 덮고 뒤쪽에서 의자를 가져왔다.
‘여기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야.’
김철진이 검사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법과 관련된 책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에 책이 많은 것이 신기하여 책으로 탑을 쌓기도 하고, 집을 만들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어 그런지 몰라도 책 냄새가 좋았다.
“실은, 회사 일에 대해서 조언을 얻고 싶어요.”
“어려운 점이 있더냐?”
“조금은요.”
김강현은 회식 자리를 통해, 직원들이 회사를 다니면서 어려웠던 점들과 건의 내용들을 들었다.
평상시 자주 회사에서 자리를 비우는 터라 회식을 통해 대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 내용들 중에는 바로 반영할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아무래도 회사 생활과 연관되어 있다 보니 김강현도 경험이 있는 김철진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다.
“흐음. 이건 직원들의 말을 따라주는 게 좋겠구나. 이 점은 회사에서도 싫어할 것이니 쳐내는 것이 좋겠고.”
“아!”
김강현의 고민을 듣는 김철진은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조언해 주었다.
덕분에 김강현은 간접적으로 사람들이 회사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과 고충들을 알게 되었다.
김철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흥미 있게 기억하는 김강현을 보며 물었다.
“재미있느냐?”
“네?”
“회사 일이 재밌냐는 말이다. 전략기획실장이라는 자리가 호락호락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쉽진 않을 텐데.”
“물론. 어렵죠. 게다가 처음엔 원치 않은 일이었으니 마음 내키지도 않았고요.”
“그럼 지금은?”
순간 김철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다 보니 재미있습니다. 물론 일이 쉬운 건 하지만 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업무를 해 나가는 과정이 좋습니다. 게다가 만들어 놓은 인연들이 소중하고요.”
“헌터로 활동하는 것 동시에 회사 일을 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고생이 많아. 회사에서 운영하는 사업들을 관리 감독하는 부서의 장인 만큼 많은 제안과 유혹들이 쏟아질 거야.”
“맞습니다.”
그 말에 김강현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도 몇 개의 제안과 유혹들이 오고 있으니 말이야.’
김강현이 회사 방문하는 날이 들쭉날쭉하다 보니, 메일이나 메신저를 통해 연락이 오곤 했다.
내용은 서로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자, 불법적인 일, 뇌물 등 다양했다.
만약 김강현이 헌터를 하지 않고 온전히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이었으면 더 심했을 것이었다.
“한편으론 그런 연락 덕분에 쓸 만한 사람들을 거를 수 있었습니다.”
의도가 좋지 않은 연락을 받은 김강현은 강려원과 공유하여 그들에 의해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지 조사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자들이 있었고, 직책에 의해 공을 빼앗긴 사람들이 많았다.
이 내용들을 감사팀과 공유하여 뇌물을 받거나 업무 내용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거나, 타인의 공을 빼앗은 자들을 처단함과 동시에 피해를 봤던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타 부서임에도 불구하고 전략기획실 일이라면 자신의 부서 일을 제쳐주고 도와줄 정도였다.
격려에 김강현은 멋쩍게 웃으며 쑥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였다. 김철진에게는 어린아이로만 보이지만, 밖에선 팀의 장으로써 활동하니 대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네가 중심을 잡고 네 사람들을 지키려면, 회사 내에서 너만의 힘과 세력이 있어야 한다.”
“파벌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마지막으로 물으마. US 그룹의 일에서 손을 뗄 생각이 없느냐?”
김철진은 진심을 담아 물었다.
자신도 검찰 소속의 검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주변의 정치 싸움에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것이 쉽지 않기에 말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칼만 들지 않았지 언제든지 자신의 목을 쳐낼 수 있는 전쟁터였다.
“세상에선 어떤 것도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걸 헌터로 활동하게 깨달았어요. 파벌 싸움을 하게 되면 어려움도 있을 거고, 소중한 것을 잃을 때도 있겠죠.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기보단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겁니다!”
“그게 네 결정이냐?”
“네.”
김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한 눈빛을 보이자 김철진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음을 느꼈다.
말할 수는 없지만, 김강현은 이미 테라의 귀족 사회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보았다.
그곳과 비교하면 이곳은 양반이었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함부로 죽지 않고, 정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목숨을 빼앗거나 노예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테라에서 몇십 년간 겪었기에 이곳에서도 자신 있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US 그룹은 김고엽 회장과 김우진 사장. 두 사람의 힘겨루기가 팽팽하게 진행되는 중이야. 그리고 그들을 견제하는 중립 세력이 있다.
“중립 세력이요?”
“그래. US 그룹의 세력도를 10으로 표시하면 김고엽 회장과 김우진 사장은 각각 4개 곳의 세력을 거느리고 있어. 남은 2개는 중립 세력이고.”
“두 세력의 입장에서는 종종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겠네요.”
김철진은 자신이 알고 있는 US 그룹의 파벌 세력에 대해 공유했다.
중립 세력에 대해 알게 된 김강현은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어떤 의견을 모을 때, 그들을 끌어들이느냐에 따라 결정이 될 테니 둘 다 혈안이 되겠네요”
“그렇지만 중립 세력의 생각은 달라. 자신들에게 이득이 있지 않는 한 김고엽 회장의 편을 들어주지.”
“네?”
“그들은 중립이면서 반 김우진 사장 세력이니까.”
“그게 무슨?”
김우진을 적대한다면 차라리 김고엽의 세력 휘하로 들어가는 것이 회사 생활 하는데 현명한 것이 분명한데, 어느 한쪽도 속하지 않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헷갈려하는 김강현을 보며 김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나와 함께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집을 나가기 전에 말인가요?”
“맞다. 회사가 빠르게 커지니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생기더구나. 그들은 나를 따랐기에 일찌감치 두 세력의 눈 밖에 났고, 나에게도 버림받았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실력으로 회사에서 인정받아 자신들만의 세력을 이루고 있다는구나.”
말과 함께 김철진은 품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꺼냈다.
“그들을 이끌고 잇는 사람이다. 내 이름을 대고 연락하면 한 번은 만나준다고 하니 시간 내보거라.”
“US 건설 임재우 사장.”
명함의 직함과 이름을 본 김강현은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일전에 있었던 임원 회의에서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뒤에 있었던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진중한 눈빛이 돋보이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 혹시 이 사람과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있을까요?”
“내 고등학교 친구면서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지. 오래전 연락처로 연락해 보았는데 다행히 번호를 바꾸지 않았더구나.”
“…….”
“혹시나 싶어 말하지만 내 인연을 가지고 그들을 끌어들일 순 없을 거다. 재우는 내 사정을 알고 있어 이해할 수 있다지만, 그 녀석이 이끄는 사람들은 아무런 말 없이 내가 떠나 버렸으니 원망하는 마음이 클 게야.”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는 주변 사람들을 챙길 만한 여유가 없었고, 자신을 수습하기 바빴다.
시간이 흘러 뒤를 돌아보니 죄책감과 미안함에 연락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김강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잊고 있었던 임재우의 연락처를 떠올려 연락했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