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귀국과 성과
흥겨운 저녁 식사가 끝나고 테라 길드원들이 모두 잠든 시각.
김강현은 조용히 책상의 스탠드 등을 켠 채 자리에 앉아 종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바로 렌이 갖다 준 마르코의 의뢰 내용.
보는 동안 그의 김강현의 얼굴은 굳어져 펴질 줄 몰랐다.
“후우.”
3장의 내용을 살피는 데 1시간이 걸렸지만, 생각을 하느라고 이 시간이 굉장히 짧게 느껴졌다.
김강현은 긴 한숨을 토해내며 마나로 종이를 불태워 흔적을 없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이 일의 배후에는 김우진이 있었고, 마르코는 그의 손에 움직이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정확히는 타이밍이 좋았다.
“큰아버지와 몬스테일 그룹의 욕망이 만들어낸 사건이었네.”
만약 김강현이 아레스 그룹과의 협약을 원만하게 처리하고 귀국하면, 회장인 김고엽 세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김고엽의 손자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략기획실은 회장 직속의 부서로 이미 많은 이들이 그를 김고엽의 휘하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김우진은 더 위협과 경영권 확보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몬스테일 그룹은 아레스 그룹의 영향력이 커지자 시장에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고, 일시적이나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움직인 것이다.
그 증거로 김우진의 차명계좌에서 마르코에게 거액의 돈이 이체된 기록도 확인되었다.
“먼저 US 그룹의 세력 판도를 확인하고 차분하게 움직여야겠지.”
한국으로 돌아가면 할 일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나마 팀 내에선 별일이 없으니 다행이지.”
일주일에 한 번씩 강려원을 통해 전략기획실 업무 내용을 보고받았다.
기본적으로는 US 그룹의 프로젝트들을 개발하고 각 부서들을 서포트했지만, 따로 개발팀을 꾸려 최영하의 마나 자동차 개발을 서포트하고 있었다.
강려원이 입이 무거운 직원들을 선별하고 임원들에게만 공개된 자료들을 전달하여 일을 진행시켰다.
덕분에 이유하가 귀국하면 이들과 함께 일하게 될 것이었다.
김강현은 바로 며칠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만큼 철저하게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조금 아쉽긴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마르코가 잘했어!”
김강현의 귀국 전날 밤.
김우진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마르코로부터 일 처리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그 소식에 너무 기쁜 나머지, 그는 박수까지 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김강현을 흔적 없이 죽이는 것이었지만, 주변에 배치된 가드들과 헌터들 때문에 어렵다고 판단.
US 그룹과 아레스 그룹과의 사이를 벌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렌은 마르코에게 의뢰 성공을 알리며 상세하게 과정을 설명했다.
이 소식은 마르코를 통해 김우진에게도 전달되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아레스 그룹의 루시아 이사와 김강현의 친분이 있어 섣불리 정보 조작으로 사이를 벌리기에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아레스 그룹의 루크 회장에게 트랩으로 부상을 입히는 것이 가능. 변장 후 저택으로 잠입하여 성공.
-이후 루크 회장의 측근을 이용해, 김강현이 루시아 이사를 부추겨 루크를 없애고 아레스 그룹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림.
-내부에선 입단속을 하고 있으나 은밀히 퍼지고 있어 향후 US 그룹과 아레스 그룹의 동맹이 깨질 것으로 보임.
물론 김강현은 이 내용을 루크에게 공유했고, 루크 또한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먼저 몬스테일 그룹에서 전쟁을 선포한 만큼, 이를 통해 내부 개혁을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수련으로 회사를 비우는 동안 측근들을 통해 회사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에게 몬스테일 그룹의 돈이 흘러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계획이었다.
“이걸 빌미로 놈을 끌어내리면 돼! 더 이상 날뛰게 할 순 없지!”
김우진은 김강현을 떠올리자 이를 바드득 갈며 분노를 곱씹었다.
“그러고 보면 참 끈질긴 인연이야. 어떻게 그놈을 집안에서 쫓아냈는데, 이젠 그 자식 놈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그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인 김고엽은 늘 바빠 집에 들어오는 날이 한 달에 열 번이 채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김우진은 그것을 이해하며 언젠가 큰아들인 자신이 회사를 물려받을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며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반면, 김철진은 반대였다.
공부를 잘하긴 했지만 사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시기였다.
이를 통해 김우진은 김철진이 자신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생을 챙겼다.
“그날 밤에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굉장히 비가 오던 밤.
김우진이 12살 때의 일이었지만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다.
김고엽과 이명원이 새벽 무렵 거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잠을 자다가 목이 말랐던 김우진은 부엌으로 가던 중, 그들의 이야기를 우연치 않게 엿듣게 되었다.
“형님, 우진이, 철진이와 이야기도 못하고 가니 아쉽지 않습니까?”
“바로 지방 회사들과 계약 건 출장이 잡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자는 얼굴이라도 보고 나왔으니 괜찮아.”
“형수님이 아무리 애들을 잘 챙긴다지만 아버지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회사 일은 제가 좀 맡아서 할 테니 집에 조금만 더 신경 쓰시는 게 어떨까요?”
“아니야. 회사 운영이 이제 정상 궤도로 오르고 있는 만큼 내가 움직여야지. 밑에 직원들도 고생하는데 내가 쉴 수 있나.”
“형님.”
“내 꿈이 무엇인 줄 아나? 나중에 두 아이가 크면 내 일을 물려받아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야.”
“하하핫,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십니까? 그럼 장난삼아 대표 자리는 둘 중 누구에게 맡기실 겁니까?”
“지금으로썬 철진이가 마음이 가.”
“어? 우진이는 왜?”
“나를 너무 닮아서인지 냉철한 면이 많아. 그래서 사람들을 두루 사귀는 철진이가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이야. 이 자리라는 게 너무 계산으로 움직이면 쉽지 않은 자리니까.”
여기까지가 김우진이 기억하는 이야기였다.
화가 난 그는 다음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바로 방으로 올라갔다.
그의 분노는 이미 머리끝까지 솟구쳐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이날부터 김우진은 더욱 냉정해졌고, US 그룹의 회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앉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많은 일들이 있었어. 유나 엄마와 헤어져야 했고, 내 사람들도 많이 떠나보내야 했으니까. 이제 멀지 않았어.”
“흡!”
‘이, 이게 무슨 말이야?!’
운명은 또다시 반복되었다.
김우진이 김고엽의 이야기를 우연치 않게 듣게 된 것처럼.
김유나도 김우진의 독백을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
스케줄을 마치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니 김우진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평소 김우진이 집에 있는 날이 많지 않아 종종 회사로 얼굴을 보러 가는 만큼, 안부를 물으려고 했는데.
‘엄마와 헤어졌다고? 혹시 내가 모르는 무언가 있는 게 아닐까?’
김유나는 양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 터져 나오려는 목소리를 막았다.
‘엄마는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녀가 알고 있는 건 단편적이었다.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출산하다가 죽었다는 것.
어릴 적 엄마 사진을 본 적이 있지만, 그 사진은 김우진이 발견하자마자 바로 불태워 버려 지금으로썬 희미하게 머릿속에만 남아 있었다.
“김철진, 김강현! 제발 내 앞을 막지 마라. 그때는 정말 나도 죽을 각오로 달려들 테니…….”
‘아, 아버지…….’
벽에 등을 대고 서 있어 김우진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평소 냉철한 모습에 살기 어린 김우진의 표정이 쉽게 연상되었다.
우선 김유나는 걷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하아! 하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참고 참았던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 이건 아닌 것 같아. 무언가 잘못되고 있어.”
평소 김우진이 US 그룹의 회장 자리를 노리고, 김고엽의 후계자로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US 그룹에서 가장 큰 회사인 전자 계열사를 맡아 타 계열사들을 압도적으로 누를 정도로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김우진은 너무도 멀리 가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엔 김강현이 떠올랐지만, 곧 지웠다.
지금 이 상황은 김강현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객관적으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민 끝에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조사와 아버지를 멈추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 * *
“우와와와!!! 이게 얼마 만이야!”
“흐응! 역시 공기는 한국 공기가 최고야!”
“드디어 돌아왔네.”
새벽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들은 유럽에서 방금 도착한 테라 길드로,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는 것도 모자라 카트에 캐리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원래 짐이 이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을 떠나기 전날, 루크가 이대로 손님들을 보낼 수 없다며 아레스 그룹에서 운영하는 백화점의 VIP실로 초대했다.
그리고 원하는 상품들을 선물하거나 파격적으로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분에 테라 길드원들은 이를 기회 삼아 즐거운 쇼핑을 하였고, 안 살려고 해도 살 수밖에 없는 개미지옥에 빠졌다.
김강현은 지친 길드원들을 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장기간 비행으로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테라 길드는 휴업 예정이니 당분간 푹 쉬세요!”
“길드장님. 진짜요?”
“그렇지만 자발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알아서 잘할 거라 믿습니다.”
테라 길드원들에게 넌지시 말했지만 다들 해야 할 일이 가득 있어 오랜 시간 쉬지 못할 터였다.
김건과 이유하는 마나 전지 개발을 해야 할 것이고, 연세연은 부길드장 기동진과 함께 길드 업무를 맡기로 했다.
검천호는 소속 이전에 대한 일을 처리해야 하고, 렌은 김강현과 함께 움직이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프냐?”
“아, 아닙니다. 길드장님.”
렌을 보니 표정이 어두워 아무래도 유럽을 떠난 것을 슬퍼하는 것 같았다.
이는 다른 테라 길드원도 마찬가지.
하지만 진실은 완전히 달랐다.
‘제대로 된 가격에만 팔았어도 지금 수익의 40%는 더 먹고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유럽을 뜨기 전, 루크의 도움으로 유럽 내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처분할 수 있었다.
급매로 팔아야 했기에 제값은 받지 못했지만.
만약 충분한 시간을 두고 팔았으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벌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괜히 배가 아프고 짜증이 났다.
끼이이이익!!
그 순간, 검은색 벤츠가 그들의 앞에 서더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 *
“외국에서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부길드장님!”
“진짜 오랜만입니다!”
벤츠에서 내린 사람은 기동진이었다.
길드원들이 이용한 비행기 편을 직접 예약했기에 도착 시간에 맞춰 딱 마중 나올 수 있었다.
“부길드장님도 고생 많이 하신 것 같은데요?”
“얼굴 볼 살이 없어졌습니다.”
“그런가요? 정신없어서 몰랐습니다.”
테라 길드원들의 말대로 몇 달 만에 보는 기동진의 외향이 달라져 있었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만 해도 적당한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최근 바실리스크 레이드 정산을 비롯해서 스펠 바이러스 치료제 등 갖가지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살이 조금 빠져 날렵한 턱선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틈틈이 체력 유지를 위해 운동을 하고 있어 살이 빠진 감도 있었다.
“검 어르신. 길드장님에게 이야기에게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그리고 렌 님에 대해서도 이야기 들었습니다. 임시로 길드 건물에 거처를 마련했으니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도 괜찮으실까요?”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다 길드장님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인데요.”
기동진의 배려에 렌은 고마워하며 인사했다.
“맞다. 부길드장님! 여기 유럽 여행 선물이에요.”
“술 좋아하신다고 해서 비싼 걸로 사 왔습니다.”
“어?”
“너도?”
“하하핫! 생각지도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본 테라 길드원들은 서로 살짝 놀랐다.
다들 유일하게 한국에 남았던 기동진이 마음에 걸려, 말하지 않아도 선물을 하나씩 준비했던 것이었다.
“저도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하는 게 좋겠죠?”
기동진은 고마움을 표현하며 검은색 카드를 한 장씩 건넸다.
카드에는 길드원들의 이름이 금색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길드 명의의 카드입니다. 길드 업무로 돈 쓸 일이 있으면 마음껏 결제하면 됩니다. 한도는 무제한이지만, 결제 내역은 꼼꼼히 확인할 겁니다.”
“우와!”
“오오옷!!”
“다들 피곤할 테니 택시 잡아서 그 카드로 결제하시면 되겠네요.”
“부길드장님. 정말 써도 되나요?”
연화 길드에 몸담았던 연세연이 믿기지 않아 물었다.
길드 운영비는 정해진 금액이 있을 터.
결제 내역을 확인한다 해도 이렇게 길드원들이 마음껏 쓰게 되면 길드 운영에 차질이 있게 될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길드 자금은 넉넉하고, 길드장님이 먼저 제안하여 만든 것이니까요.”
“흠흠!”
기동진의 말에 모든 시선이 김강현에게 쏟아졌고, 머쓱해진 김강현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뭐 해요? 선물 다 주고받았으면 떠나지 않고! 안 가면 남아서 일 시킵니다!”
“갑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일 시킨다는 말에 테라 길드원들은 순식간에 택시에 짐을 싣고 순식간에 떠났고, 그 자리에는 김강현, 렌, 기동진만 남게 되었다.
“부길드장님. 길드로 돌아가면 렌에게 보안 시스템을 등록해 주세요.”
“걱정 마십시오. 길드장님은 집으로 가십니까? 그럼 가는 길에?”
“들를 곳이 있어서 따로 움직일게요. 짐만 길드로 옮겨주세요.”
기동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뒤, 렌과 함께 움직였다.
길드원들이 모두 떠나자 김강현도 택시를 잡아 바로 이동했다.
* * *
“간식 사 가지고 왔으니 드시고 하세요.”
“어?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출장은 잘 다녀오셨나요?”
“네. 덕분에요.”
김강현이 향한 곳은 US 그룹의 본사.
그동안 강려원을 통해 업무 보고를 받았지만 장기간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바로 방문하게 되었다.
“실장님. 오늘이 귀국 날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면 마중하러 공항에 나갔을 텐데.”
“평소 바쁜 걸 아는데요. 그냥 택시 타고 잘 왔습니다.”
사무실이 소란스러워지자 안쪽에 있던 강려원이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왔다.
“참, 부실장님. 이번 주 보고서는 이따가 저와 10분 정도 회의로 대체하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팀원들은 오후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없습니다. 오늘은 금요일에 말일이라 기존 업무를 체크하고 정산 예정입니다.”
김강현의 말에 강려원은 스케줄을 생각한 뒤 말했다.
“업무 마무리되는 대로 전략기획실 회식하러 가죠. 시간은 끝나는 대로입니다.”
“그럼 점심시간까지 마무리되면 그 시간에 하나요?”
“물론입니다. 오늘 해야 할 업무를 다 끝냈는데 사무실에 남을 이유가 없죠. 회식 후 바로 퇴근입니다!”
“우오오!!”
“아싸!”
순간 강려원이 당황하며 물었지만, 김강현의 결정이 내려졌다.
곳곳에서 작게 직원들의 환호성이 들리기도 하고, 신이 나 작게 파이팅하는 직원들이 보였다.
“저는 회장님과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말과 함께 김강현은 전략기획실을 떠났고, 잠시 사무실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지금 몇 시야?”
“오전 10시니까, 점심시간까진 3시간 남았습니다.”
“젠장. 뭐부터 해야 하지?”
“이 대리님. 어제 드렸던 검토 서류 1시간 안에 가능하십니까?”
“물론이지. 50분 안에 피드백 줄게.”
“여보세요. 전략기획실입니다. 3일 전에 전달했던 공문 확인하셨습니까?”
회식과 조기 퇴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용하던 전략기획실 사무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8시간 안에 해야 할 업무를 3시간으로 끝내야 한다는 것은 업무량이 2배 이상 늘었다는 것이지만, 일전에 점심 회식과 조기 퇴근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시 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더불어 움직이며 김강현이 가지고 있는 간식을 하나씩 가져갔다.
“이러면 나도 바빠지겠는데?”
강려원은 직원들이 올리는 서류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승인해야 했다.
물론 실장 직함을 가진 김강현이 있지만, 전략기획실 내에선 그녀가 모든 것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찾는 직원들이 보이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다녀왔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그래. 한데 밖이 좀 소란스럽구나.”
“직원들이 다들 열심히 일하는 것이니 조금 양해 부탁드립니다.”
“목표가 생겼으니 열심히 할 만하지. 평소에도 저렇게 하면 얼마나 좋을꼬.”
“직원들 월급 상승과 퇴근 시간을 빨리 하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회장실에 들어가자 미리 김강현을 기다리고 있는 김고엽과 이명원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김강현이 US 그룹의 정문에 들어왔을 때부터 안내데스크로부터 연락을 받아 기다리고 있었다.
전략기획실 상황 또한 미리 비서실을 통해 들은 상황.
“됐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리에 앉아라.”
사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월급과 퇴근 시간은 예민한 부분이었다.
김고엽은 김강현이 소파에 앉아 바로 본론을 꺼냈다.
“유럽은 어떠했냐? 스펠 바이러스와 헌터 일로 정신이 없긴 했겠지만 잘 다녀온 듯싶구나.”
“네. 덕분에요. 말씀대로 한동안 바빠 귀국 일정이 미뤄졌지만, 잘 마무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네가 보내준 아티팩트는 유용하게 잘 사용하고 있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더불어 김고엽은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스펠 바이러스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아티팩트였다.
유럽을 떠나기 전에 스펠 바이러스의 백신 겸 치료제는 전 세계에 배포되었고, 각 국가의 지침에 따라 접종되었다.
덕분에 현재 스펠 바이러스로 고통받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소 컨디션 관리에도 많이 도움 될 겁니다. 그러니까 계속 착용하고 다니세요.”
“그럼 계속 잘 쓰마.”
그 뒤로도 김고엽과 김강현은 유럽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누었다.
내용의 주는 아레스 그룹과의 협력 체계와 최영하 엔지니어의 영입.
‘강압적이긴 하지만 이 녀석을 끌어오길 잘했어.’
김고엽은 김강현의 실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 증거로 전략기획실의 조기 퇴근 건에 대해서 다른 팀에서 불만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체 업무에 지장이 없고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면 책임자의 재량으로 실시하도록 공문을 내렸다.
그러자 각 팀을 맡고 있는 책임자들은 눈치를 보며 조기 퇴근을 실시하지 못했다.
현재 실적으로 조기 퇴근을 했다간 당장 다른 팀에서 말이 나올 것이 분명할 정도로 하루하루 업무를 치는 데 정신없었다.
또한 김강현은 주어진 일을 하면 예상했던 결과 그 이상의 결과를 내놓았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
처음에는 철진의 자식과 헌터라는 정보를 얻자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하는 녀석이라 생각해 일을 시켜보려고 불렸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협박이 있었지만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마침 헌터 관련 사업을 생각하고 있었고, 전략기획실을 통해 힘을 주며 이명원이 도와줄 경우 바보 같은 짓만 하지 않으면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상상 이상이었지.’
김강현은 이명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전략기획실을 휘어잡았고, 그 능력은 끊임없이 발휘되었다.
특히 김강현의 진가는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된 순간에 나타났다.
스펠 바이러스로 각국으로 예정된 수출이 멈춰 경제 활동이 스톱될 위기였다.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스펠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속에 들어오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아티팩트를 만들고, 스펠 바이러스의 원인인 바실리스크를 쓰러트리고, 치료제를 만든 사람이 바로 김강현이었다.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깜짝 놀랐다.
순간 이 내용을 사람들에게 오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추는 것이 김강현과 좋은 관계를 만드는 데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마침 유럽과 한국의 헌터협회가 김강현의 정보를 숨기려는 움직임을 포착했다.
김고엽은 이명원을 통해 정보를 차단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차단했지만.
그가 건드리기 어려운 거물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어쩌면 나보다 더 부자일지도 모르지.’
김강현은 하루라도 스펠 바이러스를 빨리 종식시키기 위해 이득을 최소화하고 배포를 서둘렀지만, 이 과정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을 취득했다.
그가 만든 치료제는 유일무이한 백신 겸 치료제로 다른 제약회사들이 개발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막아 버렸다.
지난 두 달 동안 각국에서는 먼저 스펠 바이러스 치료제를 수입하기 위해 치열하게 암투를 벌였고, 우선권을 가져가기 위해 김강현에게 높은 로열티를 제시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가 담을 수 없는 녀석일지도 모르지.’
시간이 지날수록 김강현이 능력이 드러남에 따라, 김고엽은 US 그룹이라는 그릇에 그를 품을 수 있을지 걱정과 의문이 들었다.
똑똑똑.
“응? 누구십니까?”
김고엽이 그런 생각을 하며 김강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 * *
“실례하겠습니다.”
“김우진 사장?”
“네. 일전에 말씀드린 보고를 올리러 왔습니다.”
“마침 잘되었군. 들어오너라.”
노크 소리와 함께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우진.
김고엽은 살짝 생각하더니 안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는 평소처럼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고, 왼손에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김우진은 가볍게 인사 후 김강현 반대편 소파에 앉아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강현아.”
“네. 큰아버지.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늘 똑같지. 너는 이번 출장이 힘들었는지 살이 좀 빠진 듯싶다.”
“고생을 좀 하고 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앞으로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김우진과 김강현은 친절하게 안부를 물으며 화기애애한 모습을 자아냈지만, 서로 속마음은 달랐다.
‘언제까지 그 미소가 유지될지 두고 보죠.’
‘아주 재밌는 하루가 되겠구나.’
김우진은 비서실과 전략기획실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두고 있었고, 김강현의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미리 마르코를 통해 유럽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김강현에게 똑똑히 망신을 주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강현은 순순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속에 칼날을 숨긴 채 대화를 이어나가다 김우진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여기 보고서입니다. 회장님께서 최종 확인 부탁드립니다.”
“흐음.”
드디어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꺼냈다.
앞서 대화할 때는 편하게 이름을 불렀지만 일 이야기가 시작되자 바로 호칭을 바꿨다.
이명원을 통해 보고서를 전달받은 김고엽은 꼼꼼하게 살폈다.
“이번 분기의 실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군. 곳곳에서 대규모 납품이 진행되었고, 아랍 쪽에서 좋은 성과가 있었어. 게다가 반도체는 국내에서도 꾸준히 수요가 있지만 다른 국가들에게도 요청이 쏟아지고 있으니 4분기 실적은 더 좋겠구나. 고생했어, 김 사장.”
“아닙니다. 직원들이 모두 열심히 해준 덕분이지요.”
김우진은 공손하게 모든 공을 직원들에게 돌렸다.
물론 여러 가지 사업들을 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특히 반도체 수출은 직접 업체들을 찾아가 거래를 성사시킨 만큼 의미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김 실장님도 아레스 그룹과 협약 건으로 출장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궁금하군요.”
마치 뱀이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빛처럼 김우진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이걸 노렸던 건가?’
그제야 김강현은 김우진이 나타난 이유를 깨달았다.
미리 마르코를 통해 자신과 아레스 그룹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아레스 그룹과의 협약이 무산되었을 거라는 판단을 했을 터.
‘US 전자의 실적을 보여주어 자신의 실적을 어필함과 동시에 날 깎아내릴 생각이겠지.’
마나 전지 개발로 위기감을 느꼈으니 이번엔 꽤 고군분투한 모양이다.
하지만 김강현은 이미 이 판을 뒤집을 실적을 준비했다.
“잠시 전화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거라.”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어!’
김강현은 김고엽에게 허락을 구한 뒤 굳은 얼굴로 전화를 걸었다.
이 모습에 김우진은 발버둥을 치는 것이라 판단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은 김강현이 고꾸라질 경우 전략기획실장 자리에 올릴 사람도 내정해두었다.
“네. 강 부실장님. 일전에 전달드린 아레스 그룹의 서류들을 회장실에 전달해 주시겠어요?”
헌터폰 너머로 강려원의 대답이 들려왔다.
김고엽의 지시에 이명원이 잠시 회장실 밖에 나가 보고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저게 과연 쓸모 있을까? 아레스 그룹에서 우리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만큼 소용없어!’
김우진은 속으로 미소 지으며 확신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다시 한번 마르코와 연락하여 아레스 그룹의 동태를 살폈다.
은밀히 내부 감사를 통해 루크를 습격한 범인이 루시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고, 남매 싸움이 시작되었다.
더불어 루시아는 김강현과의 끈을 잘라내기 위해 움직였다.
‘루크 회장에게 김강현과 마르코의 약점을 넘기면 내가 아레스 그룹과 손잡을 수 있어!’
김우진은 다음 플랜을 짜 두었고, 바로 회장실을 나가면 바로 시행 예정이었다.
앞서 마르코와 손을 잡았지만, 김강현이라는 적이 없어지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처분할 대상에 불과했다.
그사이 김고엽은 이명원에게 보고서를 전달받아 꼼꼼히 읽어갔다.
“크하하하핫! 하하하핫!”
“……?”
“…….”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그런데 갑자기 김고엽이 기쁜 듯 큰 웃음을 터트렸다.
이유를 알고 있는 김강현은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고, 김우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옆에 서 있던 이명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역시 김 실장은 상상 이상의 능력을 해내는군. 이번 출장에서 아주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어. 자네도 한번 보게나.”
김고엽의 힘찬 목소리에 이명원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보고서를 받았다.
‘대체 어떤 결과이길래? 허억!’
“이, 이게 가능한 것입니까?”
이명원도 보고서의 내용을 읽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암. 가능하지. 여기 눈앞에 결과가 있지 않나? 루크 회장이 김 실장을 아주 잘 본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결과니까.”
“실례가 아니라면 저도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 김 사장도 보게나.”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김우진은 긴장한 표정으로 이명원에게 보고서를 받아 확인했다.
“AI 프로그래밍과 시스템 개발 협력? 그리고 반도체 파운드리와 공장 건설 지원?!”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아레스 그룹에서는 첨단화된 무기 제작을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술력으론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US 그룹과 손을 잡은 것.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무기 시스템 도입을 위한 반도체 제작과 원재료 수입 등 모든 것을 US 그룹과 함께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여기서 파생되는 이익만 계산해서 그룹의 4년 치 흑자야!’
특히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부지와 자재들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아레스 그룹이 책임진다는 조항도 있었다.
US 그룹에서는 그냥 사람만 와서 일하면 될 수 있게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적혀 있었던 것
즉, 말이 계약이지 돈을 퍼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분명 이 녀석과 아레스 그룹과 사이가 좋지 않을 텐데?”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젠장!’
너무 당황한 나머지 김우진은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토해냈고, 이를 김강현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고 김고엽과 이명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크흠. 사업을 하다 보니 아는 사람들로부터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직접 결과물을 보니 헛소문에 불과했군요.”
“아무래도 US 그룹과 아레스 그룹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세력의 정보를 들으신 듯싶네요. 예를 들면 경쟁 무기 제조업체에서요.”
“좀 더 알아보고 이야기했어야 했거늘. 괜한 걱정을 했어.”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 녀석이 내 속을 꿰뚫어보고 있었어!’
김우진은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잘 넘겼지만 속으로 부글부글 화가 솟구쳤다.
여기에 김강현이 기름을 부었다.
“더불어 아직 준비 중이나 아레스 그룹으로부터 투자받을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투자를 말하는 것이냐?”
“일전에 공개했던 마나 전지를 비롯하여 파생되는 관련 사업들입니다. 아직 기본적인 틀밖에 나오지 않았으나 이야기를 나눠 보니 루크 회장님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신다고 하더군요. 더불어 유럽에 진출 시 아레스 그룹에서 유통을 도와준다고 합니다.”
“하긴. 마나 전지는 크게 수요가 있을 터. 그나마 잘 이야기가 됐다니 다행이구나.”
“네. 단순한 배터리의 개발이 아니라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아이템이니까요. 저희 측에서 마나 전지에 대한 정보를 오픈하기 전까진 비밀을 지켜주실 겁니다.”
일주일이라는 휴식 기간 동안 김강현은 단순히 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따로 루크와 면담하여 사업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나 전지는 US 그룹 내에 엠바고.
절대 언급하지 말라는 김고엽의 말이 있었으니, 진행하기 전에 이명원을 통해 허락을 받고 진행했다.
루크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혁명적인 아이템인 데다가 잘하면 핵보다도 더욱 파괴적인 무기를 생산할 수 있어 무조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레스 그룹은 이미 마나석을 이용한 배터리를 개발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추후 US 그룹에서 마나 전지가 개발되면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
유럽 출장에 대한 성과를 들은 김고엽은 김강현을 칭찬한 후, 김우진을 보았다.
“김우진 사장은 이번 건을 잘 검토하길 바라네. 그렇지 않아도 해외에 파운드리 공장을 만들 계획이 있었지 않았나?”
“네. 좋은 기회니 직원들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거꾸로 마르코와 내가 놈에게 놀아나고 있었구나! 모두 알고 움직인 거였어!’
그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눈빛이 마치 살인을 저지를 만큼 무서웠다.
이제서야 모든 정황을 파악됐다.
자신과 마르코와 협력하여 루크와 김강현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고, 역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바보같이 자신과 마르코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놈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던 것.
더욱 치욕적인 것은 김강현에 의해 자신이 이득을 얻게 된 것으로, 그의 입장에선 적에게 동정받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회장님. 그럼 이 건을 검토하기 위해 먼저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확인하고 알려주게나.”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 자리에 있다간 분노를 참지 못할 것 같아 김우진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불어 김강현의 인사에 화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고 밖으로 나갔다.
“안녕히…… 허억!”
회장실 문밖에는 김고엽의 비서가 앉아 있다가, 너무 놀라 잠시 숨이 멎었다.
마치 도깨비처럼 화난 얼굴이어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우진의 비서들조차 무서워 아무도 말을 걸지 못했다.
“여기선 나 혼자 갈 테니 나중에 따라와라.”
“네. 사장님.”
그는 단숨에 엘리베이터 앞에 선 뒤 뒤따라오는 비서들에게 통보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김우진은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으아아앗!! 이 개새끼야!”
쾅! 쾅! 쾅쾅!
드디어 화가 폭발한 김우진은 크게 발을 구르며 주먹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를 계속 쳤다.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살짝 흔들렸지만, 분노에 취한 김우진은 계속 화를 쏟아내기 바빴다.
“그래. 끝끝내 내 발목을 잡겠단 말이지! 이젠 나도 참지 않는다! 무조건 너와 나 중 하나가 없어져야 할 거다!”
김우진은 김강현에게 살의를 품었다.
그래도 지금까진 혈연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다른 이의 손을 통해 정리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불가능함을 느꼈다.
하루가 다르게 김강현이 김고엽의 신뢰를 얻고 있음을 물론, 자신의 파벌에서도 탈주하려는 임원들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김우진일세. 일전에 말했던 ‘그걸’ 준비해 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대신 모든 책임은 사장님에게 있습니다.
“그러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섬뜩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김우진은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 *
김우진이 나간 뒤 김강현과 김고엽의 대화는 순탄했다.
김강현은 그동안 강려원에게 보고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전략기획실의 사업 방향을 이야기했고, 김고엽은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마. 그리고 내가 말한 제안은 빠른 시일 안에 답해주면 좋겠구나.”
“네.”
‘이건 아버지와 상의해봐야겠네.’
이야기 중간에 김고엽은 김강현에게 한 가지 제안을 제시했다.
가족과 연관되어 있는 일이라 바로 결정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일주일 안에 대답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회장실을 나왔다.
“10분! 10분 안에 보고서 수정해서 다시 가져오세요.”
“네. 부실장님!”
“경영지원팀인가요? 제출했던 회계 감사에 오류가 있으니 다시 수정해 주세요!”
전략기획실에 가니, 점심시간 전까진 30여 분이 남아 있는 상황이라 직원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물론 강려원도 바빠 보여 그녀와 회의를 하기보단 회사 메신저를 통해 추후 파악해야 할 업무와 내용들을 기입해 전달해 두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5분 전, 강려원이 중요한 서류들을 가지고 김강현을 찾아왔다.
“최종 결제 부탁드립니다.”
“정말 시간 안에 다 마무리했네요.”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오늘 하루 동안 해야 할 업무를 3시간 만에 끝마치고 강려원을 통해 보고를 올렸다.
덕분에 김강현은 점심 회식과 조기 퇴근의 무서움을 느끼며 꼼꼼하게 서류를 살폈다.
바쁜 와중에 일은 철저하게 해온 터라 잘못된 점은 없었다.
김강현이 사인하자 전략기획실의 모든 직원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상태에서도 환호성을 내질렀다.
“부어라! 마셔라!”
“소고기는 행복입니다!”
“고기가 살살 녹는다. 녹아!”
회사를 나오자마자 직원들은 언제 지쳤냐는 듯 생기가 넘쳤고, 지난번에 회식했던 소고깃집을 방문하여 고기를 흡입했다.
이렇게 3시 반까지 회식을 한 뒤, 각자 원하는 직원들끼리 2차를 가기도 하고 집으로 가는 등 해산했다.
파아아앗!
김강현은 직원들과 헤어지자마자 몸속의 알코올을 바로 마나로 태웠다
“이제 회사 일은 얼추 마무리됐네.”
이번 회식 금액은 김강현의 사비로 진행되었다.
몇백만 원의 금액이 나왔지만 아깝지 않았다.
그동안 강려원을 받은 보고를 통해 전략기획실 직원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실장이라는 직함을 맡고 있음에도 잘 신경 써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이제 다음 약속 장소로 움직이자.”
회식 중 마신 술기운을 마나로 날려 버리자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제 회사 일만 끝냈을 뿐, 아직 김강현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게 누구야? 유명하신 레드 나이트님이 아니십니까?”
“왜 그러십니까? 그냥 평소 하던 대로 대해주세요.”
“아닙니다. 지금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 레드 나이트님이신데요. 여기 상석에 앉으시지요.”
“알겠습니다. 지운 님 의견대로 하지요.”
“야, 진짜 그러기냐?”
다음에 찾아간 곳은 한국 헌터협회로, 부협회장인 유지운을 만나러 왔다.
감찰팀장에서 부협회장으로 승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지운은 늘 그대로였다.
미리 방문 약속을 잡아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강현이 왔다는 소식에 하던 일을 뒤로 미루고 김강현을 맞이했다.
“먼저 장난을 친 게 누구인데 그러십니까?”
“그래도 두 번은 거절했어야지.”
“요즘은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더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기는. 너 때문에 몇 번씩 가슴이 요동친다.”
김강현은 유지운의 장난을 받으며 소파에 앉았고, 뒤이어 유지운은 한쪽에 마련된 커피머신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가져왔다.
“그래도 손님이니 차는 대접해야겠지.”
“잘 마시겠습니다.”
“그래. 이젠 완전히 귀국한 것이냐? 그쪽 일은 마무리된 것이고?”
“네. 그렇지 않아도 스펠 바이러스의 치료제 작업을 하느라고 좀 늦어졌네요. 그보다 우리나라 치료제 접종은 어떻게 됐습니까?”
유지운은 한국 헌터협회에서 유일하게 김강현이 레드 나이트임과 동시에 스펠 바이러스 치료제의 개발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미국, 유럽과 똑같이 1순위로 치료제가 공급되었고, 이송에 특별한 조건이 없기 때문에 모두 접종이 마무리된 상태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점을 많이 고려했는데 다행이네요. 다른 국가들도 접종이 계속되고 있으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음 달에는 끝내겠군요.”
“정말로 네 공이 많이 컸어.”
보통 의약품을 이동시킬 때는 약의 종류에 따라 상온, 냉동을 분리하여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하나 김강현이 개발한 스펠 바이러스 치료제는 상온에서도 보관이 가능해 쉽게 유통이 가능해서, 빠르게 스펠 바이러스를 종식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테라에서의 경험을 살리길 잘했어.’
테라의 사람들 사이에서 돌던 전염병 상황을 경험했던 김강현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스펠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물론 테라는 공간 마법이라는 이동 수단이 있지만, 부유한 상단이나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어 빠르게 치료제를 운송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날씨의 영향을 받는 먼 거리가 대다수였기에 보관 방법이 불편하면 운송하기가 어려우니 지구에서는 이 점을 신경 썼다.
“근데 이번 일로 얼마나 번 거냐?”
“네?”
“박리다매로 싸게 치료제를 공급했지만 전 세계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엄청 부자가 됐을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계좌에 다 보관 중이어서.”
“쳇. 부러운 녀석.”
문득 유지운은 이번 일로 벌게 된 김강현의 수입이 궁금해 물었지만, 대답해 주지 않아 살짝 삐진 기색이었다.
하지만 진짜로 김강현은 치료제로 얻게 된 수입이 얼마인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금액적인 문제는 모두 기동진과 담당 세무사가 관리하고 있었다.
평소 돈을 보고 움직이면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가능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보다 지난번에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습니까?”
“길드원들 영입 말이냐?”
“네. 검 어르신 대한 자료는 여기에 있을 테니 가입 서류만 보냈고, 렌의 경우는 상세하게 신상 내역을 조사해 전달드렸었죠.”
“잠깐만 기다려라.”
김강현은 대화가 무르익자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꺼냈다.
그는 유럽에서 거주하는 동안 유지운을 통해 검천호와 렌이 테라 길드에 소속될 수 있도록 서류를 접수했다.
검천호는 원래 한국 헌터협회 소속이라 절차에 있어 어려움이 없었지만, 문제는 렌이었다.
유럽 헌터협회에서 헌터 인증만 했을 뿐 활동 내역이 존재하지 않았고, 어쌔신으로 활동하기 위해 신분도 가짜 신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루크를 통해 진짜 렌의 신분을 다시 만들고 과거를 깨끗하게 지웠다.
“여기 있네. 검천호 어르신과 렌. 두 사람은 어제부터 테라 길드에 소속되었다.”
유지운은 미리 서랍에 넣어둔 서류를 찾아 김강현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연화 길드는 친분이 있어 넘어가겠지만, 주변 길드들의 견제가 만만치 않을 거다.”
“먼저 걸어오는 싸움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렇지만 먼저 적을 만들지 마라.”
“참고하겠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 끝에 김강현은 자신들을 견제하는 길드들은 내버려 두지만, 건드리는 녀석들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비록 테라 길드가 소수로 이루어져 있지만, 한 명. 한 명의 전력이 뛰어났다.
다른 길드원들은 A급 헌터나 얼마 있지 않으면 S급 헌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더불어 가만히 있으면 자신들을 호구로 볼 녀석들이 있기 때문에, 움직일 때는 과감히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놈을 먼저 건드리면 풀 한 포기도 남지 않을 거야.’
한국에서 무력만 따지자면 가장 강한 세력이 테라 길드였다.
김강현, 헬릭스, 검천호. 셋 중에 아무나 나서면 웬만한 길드는 완전 초토화가 될 것이어서 유지운은 마음이 조마조마할 따름이었다.
“참, 강현아. 세계헌터협회에 아는 사람이 있냐?”
“세계헌터협회요?”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유지운은 생각난 것이 있어 물었다.
“너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서 말이야.”
“제가 레드 나이트이기 때문인가요?”
“그것도 있지만 위험 분자일 경우 미리 처단하겠다는 의도가 있겠지.”
“살벌하네요.”
“원래 세계헌터협회가 만들어진 목적이 각 나라 헌터협회의 부정부패를 막고 세상의 균형을 위해서니까.”
“자세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나요?”
김강현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자 호기심을 가졌다.
“각 나라에 혹은 연합으로 헌터협회가 있는 것은 알고 있을 거다. 이 협회들의 상위 조직이 세계헌터협회로, 정확히는 위원회라고 불리는 편이 맞아.”
“위원회요?”
“그래. 세계헌터협회는 어느 특정 장소에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협회장을 포함해 총 10명의 헌터로 구성되어 있고, 그 명단은 세계헌터협회장만 알고 있다고 해.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헌터협회들의 부정부패들을 감시하고, 세상의 균형을 깨뜨리는 자들을 처단하고 있지.”
“그럼 누가 저를 조사하는지도 모르는 거네요?”
“맞아. 어떻게 보면 절대권력이지. 그렇지만 그들이 공개적으로 움직였을 땐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정확한 증거가 있어 나름 청렴결백한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세계헌터협회가 너를 조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협회장님의 이야기 때문이야.”
“그러고 보니 협회장이라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 없네요?”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김강현은 재미있어 계속 물었다.
그가 알기에 한국 협회의 협회장은 출장 중으로 계속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유지운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대외적으론 출장이지만 세계협회헌터에 속한 채 어떤 조직을 쫓고 있다.”
“네에?”
대답에 김강현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고, 유지운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의 말대로 어떤 조직을 쫓느라고 장기간 협회를 비울 수밖에 없었고, 유지운이 협회의 대소사를 다루며 그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고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 만약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검 어르신께 물어봐.”
“검 어르신이요?”
“그래.”
김강현은 갑자기 검천호의 이름이 나오자 의문스러웠다.
“그분이 어디에 소속되는 것이 싫어 세계헌터협회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초창기 헌터협회들이 세워질 때 고문 역할로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물어보면 웬만한 것은 대답해 주지 않을까?”
“한 번 기회가 되면 물어볼게요.”
이후로 김강현은 길드 운영에 대한 조언을 유지운에게 구한 뒤 헌터협회를 나왔고, 최종 목적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