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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어쌔신 렌 (70/119)

6장. 어쌔신 렌

갑자기 두 나이프가 산산조각 난 채 부서져 버렸다.

더 이상 김강현과 루크의 마나를 이겨내지 못하고 내구성이 다한 것.

“어?”

“오 마이 갓!”

“여기서 끝난다고?!”

두 사람의 승부를 기대했던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했다.

“어쩔 수 없네요. 약속대로 여기서 끝내죠.”

“그렇게 하지.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냈어.”

그런데 정작 간이 비무를 겨룬 김강현과 루크는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악수 하며 친분을 다졌다.

“언뜻 들어보니 US 그룹에 다니고 있다지?”

“네.”

“그러고 보니 김고엽 회장과 닮은 것 같은데…… 혈연관계인가?”

전에 루시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기반으로 김강현의 얼굴을 오목조목 뜯어보던 루크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네. 할아버지 되십니다.”

“그래서 US 그룹이 정보 통제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건가?”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나도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싶군.”

루크의 혼잣말에 김강현과 검천호가 말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드들이 듣지 못하게 일행을 중심으로 마나막을 펼치고 말을 이어갔다.

“다들 알다시피 이 친구가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레드 나이트라는 건 알고 있을 테지. 그런데 본인이 밝히기 싫어해서 우리들이 정보를 막았고.”

“그렇죠.”

“그 일에 에피소드가?”

“솔직히 유럽과 한국의 헌터협회가 협조해서 전 세계의 정보 통제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개인적으로 나와 마스터 소드의 인맥을 활용했지만 미국 쪽은 힘들었는데, US 그룹에서 도와주더군.”

“아!”

“한국으로 돌아가면 고맙다고 인사해라. 그쪽에서 뚫렸으면 이렇게 웃고 떠들 시간 따윈 없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시간이 흘렀어도 미국이 강대국임에 변함없다.

미국 언론에서 뚫렸다면 단숨에 전 세계로 김강현의 신상이 퍼졌을 터.

이를 생각하니 김강현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더불어 아레스 그룹은 US 그룹엔 최대한 편의를 봐주마. 루시아를 그동안 잘 돌봐준 몫이라고 편하게 생각했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아니야. 그럼 우린 좀 더 술이나 더 마시러 가지! 한바탕 했더니 알코올이 다 날아가 버렸어.”

“그렇게 하지.”

말을 마친 루크는 다시 검천호와 함께 어울리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김강현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 말은 할아버지가 내 정체를 알아차렸단 거잖아?’

갑자기 김강현은 두통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동안 헌터로서의 실력을 감추었던 이유는 나중에 김고엽을 적대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테라 길드와 클라우드 길드를 통해 가족을 지킬 시스템이 완벽하게 준비되면 김고엽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날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부길드장과 이야기를 해보고, 지금은 잊자.’

지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없다는 걸 깨달은 김강현은 생각을 뒤로 미뤘다.

‘근데 편의를 봐준다는 말은 아마 눈치챈 거겠지.’

그리고 김강현은 루크와의 간이 비무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 * *

루크와 검천호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구석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애들 앞에서 망신당할 뻔했구나. 루크.”

“흠. 눈치챘나?”

“내가 먼저 알아차리기보단 강현이가 이상한 짓을 하기에 알아차렸지.”

“크흠! 덕분에 체면치레 했어.”

머쓱함에 루크는 헛기침했다.

“솔직히 말하면 진짜 비무를 했다면 망신당했을 거다. 잘 마무리했으니 잘되었지.”

“경험하기 전까진 이길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많이 다르더군.”

루크는 나이프를 쥐었던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자신감이 넘쳤는데 직접 부딪치자 강력한 공격성에 당황했다.

이를 틈타 인피니티 마나가 계속 공격했고, 방어도 소용없자 어쩔 수 없이 같이 공격하여 상쇄시킨 것.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치열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루크는 자신이 밀리고 있음을 확연하게 깨닫고 있었다.

김강현은 또한 자신이 이겨도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기에, 눈치껏 루크의 나이프가 부서질 때쯤 자신의 나이프를 스스로 부숴 무승부를 만들었다.

“대체 저놈은 어디서 나타난 거냐?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는 없잖아!”

“그렇지. 저만한 힘을 얻은 건 그만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니까.”

루크와 검천호는 나이 차가 있지만, 서로 편하게 이야기는 나누었다.

“다만 부러워할 시간에 바실리스크와 싸울 때 보여주었던 기술을 갈고닦으면 좋지 않을까? 응용만 잘하면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기술이었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만큼 네가 상대하기 쉽지 않을 거다.”

루크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고, 검천호는 바실리스크 레이드에서 본 물의 피닉스를 떠올렸다.

이전까지 루크는 물을 다루기만 했을 뿐, 어떤 형태로 만드는 것은 어려워했었는데 이제는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발전하면 얼음도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

‘나 또한 전력을 다해야겠지.’

지금까지 두 사람의 승패는 검천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물의 피닉스를 보자 무패 전적이 깨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어, 최근 수련의 강도를 올렸었다.

“아무튼 이번에도 떠나기 전날에 한판 붙도록 하지.”

“좋은 추억이 되겠군.”

그리고 두 사람은 늘 그랬던 것처럼 비무를 약속했다.

* * *

간이 비무가 끝난 뒤 김강현을 비롯한 일행은 눈앞 식사에 집중했다.

5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집중한 탓에 다시 배가 고팠다.

더불어 정말 무승부였는지, 어느 한쪽이 봐준 것이 아닌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아. 놈의 테이블만 세팅하면 끝이야!’

렌이 테이블에 나르는 음식엔 독이 뿌려진 상황이고, 김강현의 테이블만 남아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주변을 살핀 렌은 조용히 이동했다.

“엇!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젠장!’

빈 접시들을 챙긴 렌은 걸어가면서 실수로 비틀거리며 김강현과 부딪쳤다.

혹시 품속에 담긴 독을 떨어트리거나 테이블에 독을 뿌린 것이 들킬까 싶어 긴장을 감춘 채 최대한 태연하게 대응했다.

다행히 들키지 않고 무사히 모든 테이블에 독을 뿌린 후, 렌은 저택을 조용히 빠져나기기 위해 움직였다.

‘잠깐. 이 마나는?’

단순한 웨이터의 실수라고 생각해 살짝 고개를 숙이던 김강현은 그와 부딪친 순간 왠지 낯설지 않은 마나를 감지하고 기억을 떠올렸다.

“호텔의 청소원?”

당시 헬릭스의 마력에 의해 금방 지워졌지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강현은 그를 붙잡으려는 순간.

“어떤 놈이 이딴 더러운 짓을 저지른 거냐?!”

“무, 무슨 일이십니까?”

“진정하세요. 헬릭스 님!”

갑자기 헬릭스가 저택이 떠나갈 정도로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그는 손에 든 고기를 들어 보이며 루크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이곳의 인간들을 통제해라. 이곳에 독을 탄 놈이 있느니라!”

“독이요?”

“말도 안 돼요!”

“그럼 이 몸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냐?”

“으음!”

헬릭스의 단호한 명령에 루시아가 반박했으나, 날카롭게 쏘아대는 눈빛과 살기에 입을 다물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군. 독이라니?”

“여기에 들어온 식자재들은 철저하게 검사를 하고 들어왔거늘!”

검천호와 루크가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그들도 예민한 편이라 독을 먹으면 바로 마나가 반응하여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김강현도 마찬가지.

“네 말대로 우리가 독을 먹었다면 나 또한 감지했을 텐데?”

“이 맛있는 음식에 독을 탔다는 것에 흥분했구나. 여기에 뿌려진 독은 조합독으로, 여러 개의 독을 섭취해야 독으로서의 능력이 발휘되는니라!”

“들어본 적 있어요. 조합이 까다로워 정말 독에 능한 어쌔신들이 쓸 텐데.”

“그래. 상당한 실력을 가진 놈이야. 게다가 놀라운 건 중독 현상이 하루 뒤에 나타나도록 조합됐어. 죽진 않지만 며칠 고생할 정도야. 물론 일반인들이면 죽겠지만 말이다.”

“그걸 어떻게 믿지?”

헬릭스의 설명에 이유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 설명을 곁들였지만, 루크는 더 명확한 증거를 원했다.

그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초대로 이 자리가 마련되었고, 나름 신경 써서 준비했는데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제가 확인해 볼게요.”

그때, 이유하가 나서서 아공간 주머니에서 평소 가지고 다니던 플라스크와 투명한 색깔의 액체 한 병을 꺼냈다.

그 뒤엔 식자재들을 조금씩 잘라 플라스크에 담은 뒤 입을 열었다.

“이 액체는 독을 선별할 수 있는 검사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이 음식들에 독이 있다면 바로 판명될 거예요.”

“충분히 믿을 만하지.”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독 검사용 액체는 시중에 많이 풀려 있어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 모두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이유하는 조심스럽게 플라스크에 독 검사용 액체를 부었다.

“어?”

“정말 음식에 독이 있었다고?!”

“와!”

결과를 본 테라 길드원들은 모두 놀랐다.

식자재에 독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투명한 액체가 녹색으로 변했다.

만약 식자재에 독이 없었다면 액체는 그대로 투명해야 했다.

녹색으로 변했다는 건 충분히 살상 능력을 가진 독이라는 증거.

“의심해서 미안하군. 이 일은 내가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하지. 더불어 범인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잡아 이유를 듣도록 하겠다!”

루크는 확실한 증거 앞에 테라 길드원들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나를 건드리다니! 끝까지 찾아내주마!’

손님들을 모셔 놓고 망신을 당한 것은 둘째 치고, 이건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나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A급 이상의 헌터들이었기에 다행이지, 일반인들이었다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루크를 비난해도 할 말이 없었다.

“범인으로 짐작되는 자를 알고 있습니다.”

“뭐야?”

김강현은 분노한 루크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고,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우선 그자를 데려온 뒤 어떻게 된 것인지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순간 루크와 루시아는 이 모든 것이 김강현의 자작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위기를 느낀 김강현은 그동안 알아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 *

“아레스 호텔의 청소원과 방금 나타났던 웨이터가 동일인이라고?”

“그런 일은 불가능할 텐데요?”

루크와 루시아는 김강현의 이야기에 고개를 기웃거렸다.

루시아의 말대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몰랐을 리가 없다.

두 곳 다 사전에 신원을 확실하게 조사하는 곳이니까.

“그래서 그의 몸에 제 마나를 심어두었습니다. 쫓아가서 물어보면 답이 나올 테죠. 누구를 노린 건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움직인 것인지!”

“자네가 올 때까지 이곳을 정리해 놓지.”

김강현의 확신 어린 말에 루크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업과 길드를 병행하여 운영하는 루크는 주변에 적이 많았다.

아니, 자신이 모르는 적들도 많을 터. 그들 중 한 명의 짓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다.

“헬릭스 님. 독이 있는데 계속 먹어도 괜찮아요?”

“귀찮지만 마력으로 없애면 되느니라. 그리고 이 정도 따위로 중독?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기이하게도 헬릭스는 계속 음식들을 먹었다.

사건의 발단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는데도, 헬릭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계속 먹어댔다.

정말 괜찮은 건지 걱정될 정도.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헬릭스는 계속 마력을 운용하여 음식들을 소화시키며 독도 같이 없애 버렸다.

덕분에 작은 체구임에도 끊임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시간이 더 늦어지면 놓칠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김강현이 떠난 후, 흥이 식어 버린 일행은 헬릭스가 먹을 수 있는 음식 외엔 정리하고 저택 안으로 이동했다.

한편 김강현은 단숨에 땅을 박차 뛰어오른 뒤, 플라이 마법을 시전한 후 마나를 쫓았다.

‘독특한 마나 호흡법을 익힌 걸까? 아니면 특수한 공간? 마나의 흔적이 점점 지워져.’

아까 놈이 부딪쳤을 때, 이상함을 느낀 김강현은 역으로 상대의 몸에 인피니티 마나를 흘려보냈다.

추적 마법은 혹시 눈치채고 없앨 수 있으니, 마나를 심는 것이 확실한 방법이었다.

‘시내 한가운데?’

점점 마나를 뚜렷하게 감지한 김강현이 주변을 둘러보니, 빽빽한 건물들이 모여 있었다.

보통 어쌔신들이 은신처를 만드는 장소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 그래야 은밀히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어쌔신은 반대로 사람들이 많은 곳에 은신처를 만든 모양이었다.

“어디에 숨은 거지?”

저녁이었지만 시내 광장에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였다.

이들의 눈을 피해 은신처로 들어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터.

김강현은 주변을 자세히 살피며 마나를 퍼트렸다.

‘허, 이렇게 숨을 수 있다고?’

광장의 가운데에는 분수대 하나만 있을 뿐, 사방이 뚫려 있어 숨을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혹시, 분수대 밑에 은신처를?’

정말로 은신처가 분수대 관리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쌀쌀한 찬바람이 불고 있어 분수대를 운영하고 있지 않지만, 관리 인원은 꾸준히 드나들고 있었다.

이를 이용해 위장 신분으로 분수대를 관리하며 은신처 입구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네.”

관리실에는 책상과 철제 옷장, 그리고 간이 침상만 있었다.

빈 철제 옷장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안에서도 문을 닫을 수 있게 작게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김강현은 안에 들어가 손잡이를 당긴 후 돌렸다.

끼이이익! 끼익!

그러자 기계음과 함께 쇠사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제 옷장이 아래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철제 옷장이 감쳐진 엘리베이터였다.

마나로 주변 탐색을 하니 철제 옷장 밑으로 긴 구멍이 있고, 복잡하게 기계가 설치되어 있어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시도한 것이었다.

“독에다가 변장, 그리고 트랩까지 운용한다.”

‘만약 실력마저 있었으면 진작 나를 노렸겠지.’

이 어쌔신이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졌다.

능력이 다양한 만큼 실력은 생각보다 높지 않겠지만, 어떤 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흥미진진했다.

약 1분 동안 밑으로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

김강현은 각종 함정들이 있다는 가정하에 마검을 든 후 발걸음을 옮겼다.

* * *

“언제 놈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서둘러 도망치자!”

렌은 웨이터 변장을 지우지도 못하고 은신처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금고로 향했다.

오늘 작전을 시행하기 전 부피가 큰 물건과 귀중품들은 미리 처분하거나 은행에 보관했고, 금고에는 남에게는 절대 보여주거나 맡길 수 있는 물건을 보관해 뒀다.

금고는 여는 방법이 복잡했는데, 홍채와 지문 인식을 비롯하여 총 10자리의 비밀 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달칵!

열린 금고 안에는 수십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내 생명줄이야.”

종이 뭉치를 순식간에 훑어본 렌은 품속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바로 의뢰 계약서. 적당한 금액을 받고 성실하게 수행한 의뢰들이지만.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될 의뢰들이 몇 개 있었다.

의뢰 후 또 다른 어쌔신을 고용하여 그를 죽이려 한 놈들도 있었지만, 렌은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살아남았다.

렌은 수행했던 의뢰 내용을 미끼로 그들을 협박하여 도망칠 계획이었다.

“여길 처분하지 못한 게 아쉽네. 일단 봉쇄하고 나중에 처리해야지.”

그의 은신처 한 벽면에는 서류들이 가득했고, 다른 두 벽면에는 모니터와 기계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의뢰인이 주는 정보는 무조건 신뢰할 수 없었다.

의뢰를 수락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흐르는 만큼, 의뢰인이 준 과거의 정보는 질이 낮은 경우가 많았다.

렌은 의뢰를 받으면 표적을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완벽히 분석하여 암살했고, 그 덕에 다른 어쌔신보다 의뢰비를 높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모니터를 통해 은신처로 향하는 통로가 선명하게 보였다.

“젠장, 저기에 들어간 돈만 수억 인데!”

적의 침입을 대비해 트랩을 설치했고, 꾸준히 관리하여 새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비록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중고로 팔아도 80%는 받을 텐데.

하지만 이곳에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으니 씁쓸하게 마음을 돌려야 했다.

“응? 저게 뭐야?”

시스템을 통해 트랩과 카메라 작동을 끄려던 렌은 오른쪽 구석 모니터 화면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걸 발견했다.

“저, 저놈이 어떻게 여길!”

모니터의 화면을 확대하여 보니 김강현이었다.

“추적당했어? 그럴 리가?! 아티팩트는 제대로 작동 중이라고!”

평상시 위험한 일을 하고 만큼 렌은 움직임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해로운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목걸이를 착용하고, 몸의 컨디션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망토 또한 착용하고 있었다.

김강현의 예상대로 두 아티팩트가 인피니티 마나를 점점 없애고 있었지만, 렌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 잠깐? 이대로 놈을 없애면 가장 완벽한 거 아냐?”

그때, 하나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쳤다.

의뢰인인 마르코는 김강현과 아레스 그룹과의 불화를 요청했지만, 내심 죽이는 것을 원하는 눈치였다.

이곳은 자신의 은신처로 아무도 이곳을 알지 못했다.

즉, 놈을 죽이고 은신처를 붕괴시키면 어떤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

“좋아. 손 좀 풀어볼까?”

이 은신처 트랩의 난이도는 S급 헌터를 상대할 수 있다.

렌은 자신만만하게 손가락 깍지를 낀 후 관절 마사지를 했다.

그리고 마르코에게 추가 수당을 받을 생각으로 기뻐하며 트랩을 발동시켰다.

* * *

콰앙! 쾅! 쾅쾅!

“흠, 상당히 신경 써서 만들었네.”

김강현은 평온한 말투와 달리 빈틈없이 날아오는 강철 화살들을 마검으로 쳐냈다.

그륵! 쾅!

뒤이어 바닥이 꺼짐과 동시에 천장에서 다시 강철 화살들이 쏘아졌고, 밑에서는 독연기가 피어올랐다.

“흡!”

이에 숨을 멈추고 독연기는 마검에 오러를 실어 쏘아 없애 버렸다.

강철 화살들은 왼팔에 마나를 실어 쳐냈지만, 잔상처들을 입었다.

콰앙!

오러는 단숨에 독연기를 뚫고 바닥의 트랩을 파괴했고, 김강현은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그 순간을 노렸던 것인지, 마나 폭탄들이 사방에서 쏘아졌다.

콰르르르르릉!

귀가 멍멍할 정도로 큰 소리의 폭발음과 함께 통로가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로는 외벽에 기스만 날 뿐 튼튼했다.

마나 폭탄은 A급 헌터라면 흔적도 남기지 못할 죽을 수 있는 위력이었다.

“2중, 3중으로 아주 피를 말리는구나.”

마나 폭탄의 연기가 사라질 무렵, 붉은 오러로 전신을 둘러싸고 있는 김강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사이 다시 마나 폭탄들이 장전되어 발사되려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오러를 쏘아 살짝 외벽을 무너트렸다.

콰아아앙!

마나 폭탄들이 외벽 안에서 터지는 소리들이 들렸다.

통로가 흔들렸지만 천장에선 잔돌멩이들만 떨어질 뿐 멀쩡했다.

“나 혼자 오길 잘 했네. 길드원들을 데리고 왔다간 손 쓸 새도 없이 당해 버렸을 거야.”

김강현은 끊임없이 발동되는 트랩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며 중얼거렸다.

이 트랩의 설계자는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방심할 수 있는 타이밍에 트랩이 발동하도록 조치했다.

게다가 꼼꼼하여 종종 아찔한 위기가 찾아왔다.

오러로 전신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근데 이렇게 가다간 시간이 꽤 오래 걸리겠는걸?”

트랩에 대한 관련 지식이 없어 김강현은 무조건 파괴하며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마나와 시간이 소모되자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저거 10만 달러짜린데! 그건 17만 달러!”

이 모습을 통로 곳곳에 설치된 초소형 카메라의 화면을 통해 보고 있던 렌은 머리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초소형 카메라는 벽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어 통로가 무너지지 않은 이상 멀쩡하지만 애지중지하게 산 트랩들이 망가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중고 물건들은 하나도 못 건지는 거 아냐?”

은신처 제작에 들어간 금액은 약 20억이었고, 그중 절반이 트랩을 비롯한 침입자 방지용에 쓰였다.

트랩이 파괴될 때마다 돈이 날아간다는 생각에 렌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

“이대로 트랩들을 발동시켜? 아니면 폭파해 버려?”

렌은 고민에 빠진 채 기계 장치에서 해골 문양이 그려진 버튼을 보았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은신처를 붕괴시킬 수 있는 장치를 설치했다.

저 버튼을 누르면 흔적도 없이 이곳이 없어질 터.

즉, 다른 이에게 은신처를 팔 수 없고 트랩에 투자된 돈도 사라진다.

“맞아. 비상 통로가 있었어!”

문득 만들어놓고 잊고 있던 통로가 하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 비상 통로는 트랩이 없는 곳으로, 나중에 보수가 필요할 경우나 일부 트랩들만 발동시킬 경우를 대비하여 만들어놓았다.

“그 끝에는 은신처를 붕괴시킬 수 있는 폭탄들이 있지! 흐흐흐!”

렌은 김강현이 도착하는 순간 은신처 붕괴 버튼을 누르기로 결정했다.

은신처에 투자한 돈이 아깝지만 마르코에게 뜯어내면 괜찮을 터였다.

마음을 먹은 그는 바로 김강현이 지나가는 길에 비상 통로를 열었다.

* * *

‘함정인가? 아니면 초대?’

김강현은 벽 쪽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자 발걸음을 멈춘 채 그 자리에서 문을 살펴보았다.

“제발 안으로 들어가라. 제발.”

모니터로 이 모습을 보는 렌은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했다.

“아악!”

하지만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김강현은 고민 끝에 오러로 문을 부수고 전진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 그리고 느낌이 좋지 않아.’

문이 열리기 전까진 몰랐는데 문이 열린 순간 통로 끝에 강대한 마나가 감지되었다.

무언가 준비되어 있음을 확신했다.

“번거롭긴 하지만 이쪽이 놈에게 더 타격이 있을 테니까.”

말과 함께 김강현은 벽에 박혀 있는 초소형 카메라를 보았다.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부숴 버릴까 생각했지만.

저것을 보고 실시간으로 대처하는 반응이 꽤 재밌어서 내버려 두었다.

게다가 저걸 부수려면 세밀하게 오러를 날려야 하기에 귀찮은 것도 있었다.

“잠깐? 어차피 부수는 거잖아?”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김강현은 이대로 가다간 통로를 지나가는 사이에 놈이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 끝에 김강현은 전신에 오러를 두른 채 전력 질주했다.

* * *

“저놈은 뭐야? 사람이 호의(?)를 베풀었으면 받아야지!”

비상 통로를 부수는 모습에 렌은 분노하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었다.

그만큼 스트레스와 짜증이 많이 쌓였다.

“5분에서 6분? 놈이 도착하기 전에 뜨자!”

렌은 비밀 금고에서 꺼낸 서류들을 품속에 넣은 뒤, 비상 폭발 장치를 10분 후로 발동시켰다.

그는 비상 엘리베이터로 빠져나간 뒤, 다시 이용하지 못하게 봉쇄할 것이었다.

그럼 이곳에 김강현이 도착하더라도 빠져나가지 못한 채 은신처 붕괴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빠져나가려면 다시 돌아온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데, 불과 5분 만에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렌이 책장을 밀어 비상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키자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 헛!”

“어딜 도망가려고?!”

“제,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모든 기계 작동을 마치고 움직이려던 렌은 입구에서 난 인기척에 화들짝 놀랐다.

김강현이 서 있었다.

황급히 비상 엘리베이터의 작동을 멈춘 렌이 단검을 꺼내 들며 김강현의 공격을 피했다.

“고작 1분밖에 안 지났는데? 그 트랩들을 그렇게 빨리 돌파했다고?!”

“전력을 다해 돌파했을 뿐이다.”

“그동안은 힘을 아낀 거란 말이야?”

“튼튼하게 지어진 게 단점이었어. 이를 믿고 전력으로 달렸더니 금방 도착하더군.”

트랩들을 부수며 돌파하다 보니 통로는 웬만한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통로가 부서질까 봐 힘을 아낀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튼튼하니 그냥 전력으로 돌파한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렌은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통로를 비추는 모니터들을 보았다.

그의 말대로 모든 트랩들이 엉망진창 망가진 상태였고, 카메라 몇 개는 고장 난 상태였다.

‘확실히 일반 어쌔신과는 다르네.’

그사이 김강현은 렌의 은신처를 살폈다.

보통 어쌔신들의 은신처들에서는 책이나 서류들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보기 귀찮을 뿐더러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쪽에 기계 장치를 보니 이곳에서 모든 트랩들을 관리한 모양이었다.

‘저 타이머는 뭐지?’

그때.

기계 장치와 연결된 모니터 구석에서 지금도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 타이머를 발견했다.

남은 시간은 약 8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되지 않았다.

‘지금이다!’

렌은 김강현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조용히 은신처의 그림자에 스며들어 갔다.

그는 찰나의 순간을 읽고 적의 목숨을 끊어놓는 어쌔신이다.

게다가 이곳은 자신이 직접 만든 은신처로 곳곳에 숨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두었다.

‘이곳에선 무적이지!’

만약 이곳에서 싸울 경우를 대비하여 살상 능력이 높은 무기들도 숨겨두었다.

이를 찾아 김강현을 공격하려고 마음먹은 렌은 은밀히 손을 뻗었다.

“커헉!”

“허튼짓하지 않는 게 좋아.”

분명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을 텐데, 정확히 렌의 얼굴에 검면이 날아들었다.

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시 은신했다.

“꾸엑!”

하지만 김강현은 정확하게 렌의 위치를 파악한 뒤 검면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만약 죽이기로 마음먹고 검날로 베었으면 큰 상처가 났을 것이었다.

“코, 코피?”

“도망치는 건 소용없으니 가만히 있는 게 좋다니까.”

김강현은 미량이지만 아직 자신의 마나가 렌의 몸속에 있음을 감지하고 이를 이용해 그를 찾아냈다.

최근 마왕 지그문트, 바실리스크 등 큰 싸움을 겪다 보니 신체적인 능력과 함께 마나 감응과 컨트롤이 많이 늘었다.

기본적으로 렌이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가 렌의 마나를 가려주고 있었지만.

아티팩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 파장을 제거하고 자신의 마나를 감지하니 선명하게 렌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아악! 악! 뭐, 뭐 하는 거냐?!”

“일단 맞고 시작하자.”

김강현은 마검의 검면으로 렌을 쫓아다니며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 자식 때문에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놈이 어떤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모르지만 편하게 휴식을 취할 시간에 이곳까지 와야 했다.

좀 평탄하게 데리고 갈 줄 알았는데 트랩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맛보니 괜히 짜증 났다.

“자, 잠깐만.”

“잠깐은 무슨 잠깐! 너 때문에 달밤에! 체조! 하잖아!”

렌은 한국어로 말하는 김강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화가 굉장히 나 있음을 말투에서 감지했다.

‘엘, 엘리베이터가!’

우선 김강현의 공격을 피하는데, 이 과정에서 책장이 파괴됐다.

문제는 그 책장이 비상 엘리베이터를 여는 장치였다는 것.

더 이상 장치를 작동시킬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시간 없다고!’

렌은 처음엔 김강현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움직임을 읽고 도망치지 못하게 막거나 미리 이동해 동선을 제한했다.

게다가 은신처는 자유롭게 뛰어다닐 만큼 넓지 않았다.

벽면에는 책과 기계 장치들이 있어 움직임에 제한이 있었다.

렌은 마음이 조급했다.

이 순간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포, 폭탄이 터진다고!”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헛소리를!”

“거짓말 아니라고! 저 타이머 시간이 끝나면 여긴 붕괴된다고!”

너무 다급한 나머지, 렌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잊어버린 채 그냥 반말로 소리쳤다.

그제야 김강현은 렌을 쫓아가 패는 것을 멈추고 모니터를 보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2분 정도.

“이걸 멈출 방법은?”

“없어. 유일한 경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는 건데 그것마저 부서져 버렸어.”

렌은 김강현이 부순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서진 책장 사이로 엘리베이터가 다니는 구멍이 보였다.

방금 공격으로 붕괴되며 엘리베이터가 찌그러져 작동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서 죽자고?”

방법은 만들면 된다.

“단숨에 빠져나갈 생각이니, 챙길 것부터 서둘러 챙겨.”

“무슨 수로?”

“지금 말할 시간에 어서 움직여!”

김강현은 렌을 재촉하며 필요한 물품을 챙기도록 했다.

조금 시간을 주자, 렌이 은신처에 숨겨놓은 귀중품들을 챙기고 중국으로 갈 수 있는 브로커들의 자료를 가방에 넣었다.

“지금부터 보는 걸 함부로 떠들고 다녔다간 바로 죽인다.”

“뭐?”

렌이 준비를 마치자 김강현은 말과 함께 오러로 전신을 감쌌다.

전에 바실리스크를 상대할 때처럼 오로라를 띠고 있는 모습.

“커헙! 서, 설마?!”

‘레, 레드 나이트!’

너무나 유명한 모습이었기에, 렌은 첫눈에 김강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조금 강한 헌터? 어디서 정보가 잘못된 거야!’

레드 나이트의 신상 정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저 독특한 오러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도 정보 계열에 종사하고 있어 알아내면 대박이라는 판단에 레드 나이트의 정보를 파악하려고 했으나, 너무도 큰 벽에 찾아낼 수 없었다.

‘루크보다 더 무서운 적이 있었어!’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지금 정보 상인들 사이에서는 레드 나이트를 세계 다섯 손가락에 드는 무력을 가진 자라고 평하고 있었다.

검천호와 루크가 같이 있었지만, 바실리스크에게 치명타를 준 것은 김강현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헌터들도 바실리스크를 쓰러트렸지만 대규모 인원을 기반으로 한 레이드였기에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만약 김강현을 암살하려고 했다면 오히려 자신이 죽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사이, 김강현은 부서진 책장의 잔해를 치운 뒤 비상용 엘리베이터 구멍을 보았다.

“남은 시간은 12초 정도?”

타이머를 보며 머릿속으로 시간 계산하니 충분하다는 판단이 섰다.

“이봐, 이리 와서 내 손을 잡아.”

“넵! 알겠습니다.”

김강현의 정체를 알게 된 렌은 군기가 바짝 든 군인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갑자기 왜 저래?’

영문을 모르는 김강현은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좀 때린 게 효과 있나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을 놓지 마. 그럼 바로 죽을 거다.”

“네? 으아앗!”

말과 함께 김강현은 비상 엘리베이터 통로로 몸을 날렸고, 순간 겁을 먹은 렌은 크게 비명을 질렀다.

“어?”

콰아아아앙!

뒤이어 은신처의 폭발 장치가 발동되어 진동과 함께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매번 이런 고생길이냐!’

김강현은 비행 마법으로 비상 엘리베이터 통로를 날아갔다.

지난번 판테온 신전 탈출 때 상황이 머릿속에서 오버랩됐다.

반면, 렌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김강현의 팔이 아닌 허리를 양팔로 꽉 붙잡았다.

“사, 사람 살려!”

밑을 내려다보니 시뻘건 화염이 살아 있는 것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들을 향해 솟구쳤다.

지하 깊숙이 묻은 마나 폭탄들이 터지는데, 연달아 계속 진동이 울렸다.

다행스럽게도 지반 공사는 탄탄하게 해놓아 땅 위의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렌은 당장에라도 불길이 자신을 덮칠까 싶어 무서웠다.

‘저건 뭐야?’

김강현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화염 기둥을 피해 전력으로 지상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앞쪽에서 어둠이 더욱 짙어진 것을 감지했다.

책장을 부수면서 내려오던 비상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춰 있는 것이었다.

파아아앗!

“으아아아! 이런 미친!”

시간 여유가 있다면 마검으로 잘라 버리겠지만, 뒤에선 화염이 자신을 태워 버릴 듯 쫓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렌에게 자신의 오러를 전달 후, 그냥 비상 엘리베이터를 뚫고 지나치며 끈을 잘라 버렸다.

쿵! 콰아앙!

비상 엘리베이터가 조금이라도 불길을 막아주길 바랬으나, 생각과 달리 단숨에 불길에 휩싸여 녹아 버렸다.

“올라가면 바로 끝이냐?”

“네, 네! 끝까지 올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습니다!”

“문으로 나가면 어디와 연결되지?”

“부, 분수대의 물탱크입니다.”

어떻게 하면 화염 기둥을 없애 버릴 수 있을지 고민하던 김강현은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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