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이어지는 악연 (61/119)

6장. 이어지는 악연

-키에에에엑! 케엣!

움찔!

“그래. 지난번엔 놈의 피를 먹지 못했지.”

헬릭스가 자신의 피를 주입하자, 블러드 웨폰은 마치 자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며 기괴한 신음 소리가 냈다.

“이번엔 저주받은 놈들이다. 그러니 이 몸의 피로 만족해라.”

헬릭스는 살짝 어지럽지만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을 참았다. 피 맛을 본 블러드 웨폰은 전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피를 가져간 후에야 진정되었다.

흑무와 싸운 후 피를 보충해 주지 않았더니, 이번에 상당히 많은 양의 피를 빼앗겼다.

“이 망할 무기는 여전하구나. 한데 이런 녀석이 또 없으니 그냥 쓸 수밖에.”

“바, 방금 뭡니까?”

“말 그대로 피를 먹는 무기니라.”

“헉!”

“걱정 마라. 여기 있는 인간들을 이 녀석의 먹이로 주지는 않을 테니.”

자칫 잘못하다간 저 무기에 피를 뺏겨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테라 길드원들을 비롯한 헌터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한 번 사용할 때마다 피를 먹여야 하는 부작용이 있음에도 헬릭스가 계속 블러드 웨폰을 쓰는 이유는 자신의 마력과 힘을 견뎌내는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시간 사용했더니 블러드 웨폰만큼 자신의 손에 착 맞는 무기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피를 먹는 무기라고?’

그런 상황에서도 록스는 블러드 웨폰에 대한 탐욕을 눈빛에 드러냈다.

사람의 피를 먹는 무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무기일수록 사용자가 막대한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란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별다른 스킬이 아니더라도, 적을 공격할 때 피를 흡수해 죽일 수 있었다.

“좋아. 네놈을 죽이고 전리품으로 챙겨가지. “

“인간 주제에 욕심이 많구나. 그래.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거라.”

“가랏. 데스 나이트들이여!”

헬릭스의 도발에 록스는 먼저 데스 나이트 5마리를 보냈다.

기이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헬릭스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자, 먹었으면 일을 해라.”

팔을 감싸고 있는 블러드 웨폰에 마력을 부여하자 형태가 막대기처럼 바뀌었고, 헬릭스는 데스 나이트들을 향해 이를 휘둘렀다.

동작이 큰 공격에 데스 나이트들은 검을 들어 막으며 계속 전진하려고 했다.

-그어어억!

-그엇!

그러나 계속 공격이 이어지자, 막대한 마력과 힘의 차이로 데스 나이트의 검이 부러지고 몸이 베어져 갔다.

“생각보다 잘 만들었지만, 언데드는 언데드에 불과할 뿐이지.”

쓰러진 데스 나이트들은 지그문트의 권능으로 인해 되살아났지만, 헬릭스가 계속 쉬지 않고 공격하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

“이익!”

“이거 가지고는 몸 풀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한꺼번에 상대해 봐라!”

헬릭스가 굉장히 쉽게 데스 나이트들을 쓰러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자, 록스는 기세를 꺾기 위해 40마리를 더 진군시켰다.

그리고 남은 10마리는 테라 길드원들에게 배치해 놈들을 제압할 것을 명령했다.

‘저놈들에게 10마리면 충분해. 문제는 눈앞의 저 녀석이야!’

록스는 눈앞의 헬릭스만 제거하면 테라 길드원들을 비롯한 헌터들을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라 판단했다.

하나 헬릭스는 마력의 양을 조절하여 데스 나이트를 베기 직전에만 일시적으로 마력을 폭증시켜, 약간이지만 힘을 아끼고 있었다.

‘아이들은 내버려 두어도 괜찮겠지. 이대로 죽으면 자신의 실력이 부족한 탓이니 말이야.’

헬릭스는 힐끔 데스 나이트들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테라 길드원들을 보았다.

확실히 그동안 열심히 수련을 한 덕분인지 10마리의 데스 나이트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쓰러트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좋아. 이대로 시간을 벌면서 데스 나이트들을 없앨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니라!’

이렇게 록스를 도발한 이유는 데스 나이트에 있었다.

신체 훼손당하거나 한번 육체를 잃어버린 데스 나이트들은 바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었다.

놈들이 부활하기 위해선 재료뿐 아니라 대량의 마력도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쉽게 부활하고 있었다.

헬릭스는 이유를 찾기 위해 계속 공격을 펼치며 분석에 들어갔다.

* * *

‘이제서야 나를 괴물이라고 한 이유를 알겠구나.’

김강현은 키메라 세포을 각성한 지그문트와 싸우면서 자신과 싸웠던 적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키메라 세포는 단순히 신체를 재생시키는 능력만 가진 것이 아니라 피부를 갑옷처럼 단단하게 만들었고, 신체의 기본적인 능력도 향상시켜 일종의 각성 상태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쓰러져도 부활하는 적을 상대하려니 김강현은 곤혹스러운 반면, 지그문트는 신이 났다.

“이것뿐이냐? 고작 이 정도로 날 쓰러트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느냐?”

“크윽!”

“좀 더 발악해 봐라. 인간이여!”

쾅!

마력이 실린 지그문트의 주먹이 얼굴을 향해 날아들자, 왼손으로 흘려 뒤로 보낸 김강현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가 마검을 휘둘렀다.

“소용없는 짓이다.”

마검에는 오러가 실려 있어 위협적인 공격이었으나 지그문트에게는 소용없었다.

살짝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베었지만, 금방 상처 부위에 거품이 생기더니 바로 재생되었다.

게다가 그의 손을 통해 검술을 비롯한 권술, 마법, 창술 등 갖가지 기술들이 쏟아졌다.

‘역시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의 마왕인가?’

그만의 유일함을 상징하는 칭호는 강자존인 마계에서 인정받았다는 증표나 다름없다.

그리고 ‘무한의 마왕’이라는 칭호만큼 지그문트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었다.

권술, 마법, 창술 등 여러 가지 기술을 사용하는 전투 스타일처럼, 무엇이 지그문트의 주무기인지 아는 마족은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빠른 습득력으로 새로운 능력을 금방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괴물들이 모인 마계에서도 지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드래곤, 마족들과 싸운 경험들을 밑바탕으로 지그문트의 공격을 막아내며 그의 약점을 분석하고 있지만 쉽지 않았다.

‘이대론 몸이 못 버텨!’

약점을 찾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김강현은 점점 버티기 어려워졌다.

겉보기엔 지그문트가 설렁설렁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급소를 공격할 때는 속도가 빨라지며 더욱 많은 마력이 실렸다.

김강현은 간신히 마검의 옆면으로 주먹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고작 이것뿐이냐? 죽기 전에 꽁꽁 숨겨 놓은 걸 꺼내보아라!”

‘정말 마지막의 수까지 써야 하나?’

그가 아는 라셀, 아니, 김강현의 실력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눈빛이 죽지 않았고, 무언가를 노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예상대로 김강현은 최후의 수를 아끼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쓸 순 없었다.

힘 조절이 되지 않아 광장이 부서지고, 자신의 몸 또한 망가질 것이었다.

‘신체의 방어력만 높이면 가능성이 있는데! 아!’

방법을 고심하던 김강현은 놓치고 있던 하나를 떠올렸다.

‘마검이 삼킨 갑주! 그걸 꺼내 입으면!’

무려 S급 갑주로, 지그문트를 쓰러트릴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었다.

김강현은 서둘러 마검에게 의지를 쏘아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흐음, 끝까지 숨겨놓을 생각이냐? 그렇다면 강제로 꺼내게 만들어주지!”

지그문트는 아까보다 마력과 살기를 더욱 강하게 내뿜으며, 오른쪽 팔과 다리를 뒤로 당기더니 마치 활 쏘는 자세를 취했다.

그의 오른 주먹에 마력이 점점 집중되었다.

이 모습을 본 김강현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 그건?”

“그래. 이 위력은 너도 알고 있지?”

“미친! 그걸 썼다간 여기가 무너진다고!”

“그럼 안 무너지게 알아서 잘 막아봐라!”

레이저처럼 쏘아질 저 공격은 집약된 마력의 양이 많아 한 방에 일반 병사 만 명이 전멸당했다.

이를 한 번 겪은 테라의 국가들은 지그문트와 마족들을 상대할 때는 일반 병사들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고 투입하지 않았을 정도.

자신의 눈앞에서 마력포 생성되자 김강현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지만, 급히 마검에 인피니티 마나를 흘려보냈다.

우우우웅!

그때, 조용하던 마검이 검명을 토해냄과 동시에 그의 의지가 김강현의 머릿속으로 전달되었다.

“겨우 그거였어?”

김강현은 마검의 의지를 듣고자 너무도 쉬운 것을 어렵게 생각했음을 깨달으며, 인피니티 마나를 무작정 쏟아부었다.

“마갑 소환!”

소환에 필요한 마나가 충족되자 마검에서 쏟아진 검은빛이 김강현을 감쌌다.

콰아아아앙!

그사이 마력포가 도달해 김강현을 덮쳤고, 광장이 흔들리며 천장에서 돌덩이가 떨어졌다.

이를 보며 지그문트는 분명히 피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으응?”

‘아직 서 있어?’

방금 공격은 자신의 생각보다 강하여 김강현이 서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건만, 흙먼지 안에서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에 지그문트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윽고 흙먼지가 걷히자 지그문트는 김강현이 무사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크로노스의 힘을 끌어냈다고?”

그곳엔 검은 갑주를 입고 완전무장한 상태의 김강현이 있었다. 마력포로 인한 상처로 부상은 없어 보였다.

‘아슬아슬했어. 그런데 정말 갑주 입은 게 맞아?’

갑주는 전신 갑옷으로 빈틈이 하나도 없었지만, 마치 입고 있지 않은 것처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데다가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중세 시대 스타일처럼 보이는데도 경갑처럼 두께가 얇았다.

마검 크로노스(SSS급)

-마계의 희귀 금속 다크니움으로 만들어졌으며 마수 크로노스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다. 단단함은 지상 최강의 금속이라 불리는 아다만티움과 비견되며, 주인의 기운을 증폭시킴과 동시에 손상 시 기운을 흡수해 성장한다. 마나를 이용해 아공간에 보관되어 있는 마갑을 소환할 수 있으며, 절대불멸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

혹시나 싶어 살펴본 마검 크로노스의 정보가 바뀌어져 있었다.

그동안 김강현이 인피니티 마나를 불어넣어 부족한 힘이 보충되었고, 이번에 다크니움으로 만들어진 이탈리아의 영혼을 흡수한 덕에 잃어버렸던 갑주를 복구시킬 수 있었다.

“그래. 이래야 재미있지. 명색히 본 왕을 죽였던 녀석인데, 이렇게 쉽게 죽을 순 없지.”

한편, 점점 강해지는 김강현을 보며 지그문트는 살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그에게 있어 김강현은 절대 살려두고 싶지 않는 적이지만, 쉽게 죽여 버리면 그동안 곱씹었던 분노가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질 것만 같았다.

끝의 끝까지 괴롭히다가 죽일 생각에 희열을 느꼈다.

“미안하지만 죽을 놈은 네가 될 것이다.”

마갑으로 다시 기회를 얻게 된 김강현은 긴장하며 마검을 지그문트에게 겨누었다.

‘내가 유일하게 놈을 쓰러트릴 방법은 단 하나! ‘

지그문트가 모르는 약점.

문제는 그 방법이 도박이나 다름없다는 것.

하지만 물러날 곳이 없는 김강현은 목숨을 건 도박을 시도했다.

* * *

“세연 언니! 오른 방향을 견제해 주세요. 건!”

“말하지 않아도!”

빠직!

“알고 있다고!”

김건은 왼쪽 방향을 향해 피어스 방패술을 펼쳐 단숨에 데스 나이트를 바닥에 고꾸라트린 후, 상체를 숙였다.

콰과광! 콰광!!

뒤이어 빨간 액체가 담긴 유리병들이 날아오더니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며, 데스 나이트의 전신을 날려 버렸다.

“아이스 스톰!!”

후방에 있던 연세연은 마법을 시전해 오른 방향에서 돌격하는 데스 나이트들 3마리의 움직임을 봉쇄했고, 어느새 반대편에 있던 김건이 이동하여 단숨에 데스 나이트들을 쓰러트렸다.

“하아, 하아. 이거 도저히 끝이 안 보여!”

“그래도 우리보다 힘겹게 싸우는 강현과 헬릭스보단 쉬운 편이잖아!”

“헬릭스 님은 빼는 게 어떨까요?”

“공감!”

이 세 사람은 10마리의 데스 나이트를 상대로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처음엔 뼈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없애 버렸으나, 계속 데스 나이트들이 부활하자 자신들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싸움이라는 깨달았다.

이후 김건과 연세연은 이유하의 지휘로 데스 나이트들을 견제하며, 이놈들을 쓰러트릴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헬릭스 님에게 부탁하는 건 무리겠죠?”

“우리가 찾는 게 빠를걸!”

힐끔 헬릭스를 보니 정신없이 블러드 웨폰을 휘두르며 이들을 조종하는 록스를 노리고 있었다. 그에게 데스 나이트는 귀찮게 치근덕거리는 장애물에 불과해 보였다.

“어차피 놈들은 계속 부활할 테니 쓰러트리는 건 무의미해요.”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야.”

“방법을 찾아야죠. 우선 힘을 아끼는 것이 중요하니, 방어 체제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세 사람은 잠깐 눈빛으로 동의하며 바로 움직였다.

* * *

‘젠장! 여기서 모두 죽는 거야?!’

‘이대론 죽기엔 너무 억울하다고!’

헌터들은 다크 위저드들과 싸우기 전만 하더라도 마왕의 등장에 겁먹고 절망했다.

설사 우연치 않게 살아난다 하더라도 마왕이 뿌린 스펠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져 곧 자신들도 죽을 것이라는 판단에 이성이 마비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앞에서 다크 위저드들이 자신들을 향해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 저게 무슨 짓이야?’

‘상대는 마왕이라고! 저건 불가능해!’

그런데도 김강현은 혼자 마왕 지그문트와 싸우고 있었다.

인간에 불과한 김강현이 마계의 존재라 불리는 지그문트를 이길 리 없었다.

하지만 김강현은 힘의 격차가 있더라도 계속 달려들어 끊임없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데스 나이트들과 싸우는 테라 길드원들도 동일했다.

두려운 적을 상대로 분전하는 그들을 보면서, 헌터들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그래. 여기서 쓰러지면 무슨 낯으로 죽은 녀석들을 보냐!’

‘고작 이 녀석들을 상대로 죽으면 엄청 꼴불견이잖아.’

‘실력은 저 녀석들에게 밀리지만…… 이대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어!’

자신들로써는 싸우기도 불가능한 적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는 테라 길드원들.

헌터들은 서서히 자신도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눈앞의 적은 마왕도 아니고, 데스 나이트도 아닌 고작 흑마법이나 사용하는 다크 위저드들이다.

‘이들도 쓰러트리지 못하면 헌터라는 자격이 없다’는 생각으로 헌터들은 죽을 각오를 다짐했다.

이러한 반응에 루시아와 로렌스는 얼떨떨하긴 했지만, 서로의 감정을 접고 순수하게 헌터로서 길드원들을 이끌며 협력했다.

‘생각보다 잘하고 있잖아. 저 정도라면 이 몸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어.’

헬릭스는 데스 나이트들을 상대하며 테라 길드원들과 인간들을 틈틈이 살펴보고 있었다.

쉽게 가고자 했다면 자신이 록스와 모든 데스 나이트들을 상대하고, 인간들끼리 싸우게 하면 되었다.

괜히 서로 싸우는 데 힘 낭비하지 말고 성장하기를 바라며 일부러 그들을 위험으로 내던졌던 것.

그래도 여차 잘못하면 개입하려고 했으나 잘 싸우는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현도 방법을 찾았으니, 이쪽이 조금 거들어주어도 괜찮겠지.’

김강현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던 헬릭스는 지그문트를 쓰러트릴 비장의 한 수 또한 공유하고 있었다.

“이쪽도 데스 나이트들의 부활을 어떻게 막느냐가 문제구나.”

데스 나이트를 소환한 것은 지그문트이나,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은 다크 위저드인 록스가 임시로 가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록스를 죽여 버리면 다시 지그문트에게 데스 나이트들의 권한이 돌아갈 것이기에, 록스를 제압하여 데스 나이트들을 역소환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알아차린 것인지 록스는 데스 나이트를 이용해 근처에도 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고 있었다.

“조금 힘을 올려볼까?”

이 지지부진한 싸움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헬릭스는 채찍처럼 휘두르던 블러드 웨폰에 마력과 피를 주입했다.

-케에에에엣!!

블러드 웨폰은 점점 전달되는 힘이 많아지자 헬릭스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길이를 늘려 신이 나 데스 나이트들을 쓸어 버렸다.

“젠장! 고작 한 놈에게 진다는 게 말이 돼?”

거침없이 당하는 데스 나이트들을 보며 록스는 다급히 버프를 시전하여 그들을 강화시켰다.

계획이 마음과 달리 이상하게 흘러가자 그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잘못되었어!’

록스는 지그문트의 소환했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마왕은 마계를 지배하고 있는 군림자이니, 계획대로라면 그의 뜻대로 세상이 종말했어야 했다.

지그문트는 키메라 세포를 이용해 더욱 강해졌고, 자신도 데스 나이트들을 하사받았으니 눈앞의 인간들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다고 판단했었다.

‘어차피 데스 나이트 유지에 필요한 마력은 마왕님의 것. 단순히 시간만 끌어도 우리들의 승리다.’

한낮 인간들 따위로는 절대로 지그문트를 이길 수 없다고 분석했건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지그문트를 상대로 버티고 있고, 다크 위저드들은 헌터들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바로 죽을 것이라 생각했던 외국의 헌터 3명은 데스 나이트의 발을 붙잡았다.

게다가 자신은 눈앞의 적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여기서 어느 한쪽의 균형이 무너지면 끝이다!’

김강현과 지그문트의 싸움에 개입한다는 건 마왕의 분노를 살 수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데스 나이트를 다크 위저드에게 보내고 싶었지만, 몇 마리라도 빠졌다간 바로 헬릭스의 공격에 당할 것이었기에 지원이 불가능했다.

록스는 헬릭스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데스 나이트에 각종 버프를 시전하고 저주 또한 걸었지만, 헬릭스는 금방 디스펠 마법으로 저주를 해체했다.

그렇다면 네 곳의 싸움 중 어느 쪽이 먼저 승리하느냐에 따라 모든 싸움의 승패가 갈릴 것이다.

이를 깨달은 것은 헬릭스도 마찬가지.

‘단숨에 판을 바꿔주마!’

언제까지 이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할 생각 따윈 없었다.

주변 상황을 지켜보니 가장 빠르게 승부를 볼 수 있는 곳이 자신.

그는 단숨에 데스 나이트를 제압하기로 결심했다.

화르르르륵!

“블러드 웨폰. 단숨에 놈들을 집어삼켜라!”

-케에에엣!

헬릭스가 블러드 웨폰에 검은 불꽃을 싣자, 아까와 달리 더 진한 검은빛이 돌았다.

록스는 아까와 똑같다는 생각에 데스 나이트들을 이용해 자신의 앞을 막게 했다.

“어? 어째서 불꽃이 꺼지지 않는 거냐?”

“네 실력으론 없애지 못할 테니 포기하거라.”

그동안 데스 나이트들은 불꼬쳉 타고 남은 잔재를 통해 다시 부활했는데, 이번에는 불꽃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부활한 데스 나이트들을 다시 없애고 있었다.

당황한 록스는 급히 피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블러드 웨폰의 움직임이 빨라 순식간의 40마리의 데스 나이트들이 당해 버렸다.

“앞서 공격들은 내 마력으로 만든 불꽃이나, 이건 마계에서 소환한 지옥의 불꽃이니라.”

“뭐?”

“이 불꽃은 적이 완전히 소멸되기 전까지 꺼지지 않으니, 더 이상 데스 나이트들을 조종할 수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부활한 데스 나이트들이 움직이기 전, 지옥의 불꽃이 그들의 몸을 덮쳐 단숨에 재로 만들었고, 잠시 후 다시 부활했다 또다시 재가 되었다.

보통의 데스 나이트들이라면 흔적도 없이, 영혼조차 없어질 것이었으나 지그문트의 권능에 의해 사라지지 못하자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록스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헬릭스는 단숨에 움직여 왼팔로 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컥!”

“이 몸은 너희들을 잘 알고 있느니라. 삐뚤어진 욕망으로 세상에 원한을 가진 채 타인을 짓밟으려고 하지.”

“커어엇! 커어어어!”

지그문트의 말에 록스는 무언가 말을 이었지만, 완전히 목이 제압당해 숨을 쉬기도 어려운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릭스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네놈이 억울한 것이 있다면, 힘이 필요하다면……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말고 직접 해결했어야지. 저놈은 소환하지 말아야 했어!”

“커헙! 컥! 컥!”

“네 복수를 위해 타인들을 이용하지 말았어야 했느니라!”

록스는 숨쉬기 발악했지만 점점 그의 목을 쥔 헬릭스의 손아귀의 힘이 강해졌다.

록스의 기억을 읽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나니, 그의 입장에서도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록스는 인간으로썬 하지 말아야 짓들을 너무도 많이 일으켰고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편하게 죽이고 싶지 않지만, 시간이 없으니 지옥에서 평생 괴로워해라!”

말과 함께 헬릭스는 록스의 목을 부러트린 뒤, 마력으로 불꽃을 만들어 그의 전신을 뼛조각도 남기지 않도록 불태웠다.

“로, 록스 님!!”

“안 돼!!”

멀리서 싸우던 다크 위저드들이 록스의 죽음에 크게 놀라며 소리쳤지만, 헌터들과 싸우고 있어 그에게 달려올 수 없었다.

‘계약자가 사라진 이상 지그문트에겐 페널티가 주어질 터! 어쩌면 마계로 귀환될 수 있다!’

헬릭스가 록스는 죽인 이유는 간단했다.

지그문트를 소환하고 계약한 인간이 록스이기 때문.

소환의 계약은 모든 차원을 통틀어 소환자가 계약자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를 지켜야 하고, 지키지 못할 경우 소환된 생명체는 절반의 힘이 소멸되거나, 계약자가 없어진 이상 이 세계에 남을 이유가 사라져 다시 원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그런데 김강현과 싸우는 지그문트는 록스가 죽기 전과 똑같이 강대한 힘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역소환의 흔적도 보이지 않자 헬릭스는 당황스러웠다.

[멍청한 놈. 본 왕이 그런 것도 대비하지 못한 채 강림한 줄 아느냐?]

[지그문트!]

[아직 네 적은 죽지 않았으니 똑바로 보아라!]

그 기색을 눈치챈 지그문트는 헬릭스에게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뒤돌아보니 벌써 불에 타 사라져야 할 록스의 시체가 멀쩡했다.

* * *

“……젠장. 설마 이런 망신을 당하게 될 줄이야!”

“사, 살아 있다고?”

“우선 이 거추장스러운 불꽃부터 없애야겠군.”

“너어?”

오히려 지옥의 불꽃에 휩싸인 록스는 담담하게 말을 할 정도로 멀쩡했다. 그는 바로 지옥의 불꽃을 역소환시켜 없애 버렸다.

록스의 모습은 전과 비교하면 너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리치? 언제 놈의 권속이 된 거지?!”

“그렇군. 그분에 의해 영원한 불사의 힘과 지식을 가지게 되었구나.”

원래 록스는 헬릭스가 소환한 지옥의 불꽃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시체도 불꽃에 휘말려 사라지기 직전이었지만, 지그문트가 손을 써둔 덕분에 리치로 부활한 것이었다.

[테라에서처럼 똑같이 당할 수 없지 않느냐?]

“지그문트!!”

다시 전달되는 지그문트의 메시지에 헬릭스는 자신이 크게 당했음을 깨달았다.

잠시 지그문트의 악랄한 방식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보통 소환된 마족은 이 세계에 남기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계약자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데, 지그문트는 생각을 달리했다.

‘어차피 이 몸을 소환하는 자들은 흑마법사들이니, 나의 권속으로 만든 후 불멸의 삶을 주면 간단한 거 아닌가?’

말이 불멸의 삶이지, 결국은 언데드가 되는 것이다.

지그문트의 권속이 되는 순간 과거의 기억은 변형되어 오로지 충성심과 존경심만 남게 된다.

계약자가 언데드가 되어 마족의 권속이 되면 근본적인 계약의 주체가 뒤바뀌어 오히려 마족을 제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지게 된다.

이를 이용하여 지그문트는 소환에 성공하자 록스에게 자신의 힘을 일부 전달하며, 그의 심장이 멈출 때 리치가 될 수 있도록 마법을 심어두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다.”

화르르륵.

록스는 데스 나이트들에게 걸린 지옥의 불꽃을 다시 마계로 역소환시키고, 전보다 강화된 버프를 부여했다.

그러고는 데스 나이트들의 보호 아래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흥, 그래 봤자 뼈다귀는 뼈다귀지.”

‘확실히 긴장 좀 해야겠는걸……?’

리치가 된 록스가 아까와는 다른 화력을 보여주자, 헬릭스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염려하며 침을 삼켰다.

‘마력과 피가 충분하지 않아. 그리고 인간들이 버티지 못해!’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들 쪽.

그나마 다행인 건 헌터들이 다크 위저드와의 싸움에서 금방 밀릴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테라 길드원들도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지만, 무한대로 부활하는 언데드들을 상대로 이제 버틸 힘이 없어 보였다.

‘가능성이 있는 건 강현뿐. 그때까지 버텨보는 거다. 정 안 되면……!’

최악의 경우엔 이곳을 봉인하고 같이 자멸할 생각까지 떠올렸다.

헬릭스는 마력을 끌어 올리며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하는 김강현을 바라보았다.

* * *

“고작 이것뿐이냐? 더! 더 힘을 내보아라!”

“크윽!”

“정말 이 정도가 네 한계인 것인가?”

지그문트는 계속 적극적으로 공격을 펼쳤고, 김강현은 급급하게 막기 바빴다.

중간중간 기습을 펼쳤지만 지그문트에게 치명타를 입힐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잠깐 상처가 나도 금방 키메라 세포에 의해 회복됐다.

‘이젠 끝을 보아야 한다.’

계속 지루한 싸움이 이어지자 지그문트는 종결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김강현이 마갑을 소환할 때만 해도 조금 싸움이 재미있어질 거라, 충분히 복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반대로 마갑에 의지하며 살기 위해 방어하기 바빠 보였다.

‘아직 저 눈빛이 걸리긴 하지만…… 생각보다 많이 지쳤어.’

육체가 키메라 세포로 재구성되자 마력의 소모가 컸다.

키메라 세포는 끊임없이 신체의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마력을 계속 필요로 했고, 마력은 무한이 아니기에 한계가 존재했다.

설마 이런 부작용이 있는 줄 알았다면 초반에 싸움을 끝냈을 것이었다.

그동안 뿔에 마력을 모아두어 버티고 있었지만 더 싸움이 길어지면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아직 포기를 하지 않아 보이는 김강현의 눈빛이 불길했지만, 지그문트는 마음을 다잡고 뒤로 물러났다.

“김강현. 이제 너와 나. 우리의 악연을 끊자.”

“뭐?”

“본 왕의 마지막 공격이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라.”

지그문트는 말과 함께 양 주먹을 허리 쪽으로 젖히며 마력을 집중했다.

그 순간 김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달려들어 김강현이 도망갈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위험을 느낀 김강현은 피하려고 하지만 이미 길이 막혀 있었다.

“크헉!”

마력포가 실린 왼 주먹이 김강현의 옆구리에 박히자 마갑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김강현은 다시 마갑을 복구하기 위해 아공간으로 보냈고, 덕분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끝이다!”

방금 공격으로 균형이 무너지고 빈틈이 드러나자 남은 오른 주먹이 김강현의 심장을 노리며 휘둘러졌다.

“헛!”

그 순간.

지그문트는 섬뜩한 소름과 함께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마검을 발견하고 급히 몸을 뒤로 뺐다.

마치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김강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인피니티 포스!”

김강현이 죽음의 위기를 느낀 것인지, 정말 승부를 볼 때라고 느껴 이렇게 공격하는지 판단이 서진 않았지만, 우선 오른 주먹에 집약한 마력은 사용하지 않고 왼팔과 양다리를 이용하여 방어에 나섰다.

그런데 오러가 공간을 베며 정신없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결국 그는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오른팔도 방어에 쓸 수밖에 없었다.

“크읏!”

‘갑자기 마력 폭주라니!’

다급히 방어를 하던 중 지그문트의 내부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동안 지그문트의 말에 잘 운용되던 마력이 통제를 벗어나 날뛰며 신체 곳곳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

게다가 멀쩡하기 그지없던 피부도 갈라지며 회복 속도도 느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강현의 공격이 이어지니 정신 차릴 틈이 없었다.

“네놈이냐?!”

“나는 한 게 없어. 다만 이때를 노렸을 뿐.”

“예측하고 기다렸다고?”

김강현의 말에 지그문트는 원인이 무엇인지 바로 깨달았다.

“키메라 세포……!”

“그래. 키메라 세포가 날뛸 때를 기다렸고, 놓칠 수 없지!”

이 부작용은 아마 파벨리온의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키메라 세포를 안정화시키는 것이 중요했으니 부작용은 다음 문제였다.

아니, 이미 고쳤다고 쓰여 있을 수 있었다.

부작용을 막기 위해 파벨리온은 라셀의 몸에 드래곤 하트를 이식시켰고, 이 때문에 라셀은 무한정 마나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라셀은 부작용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으나, 헬릭스는 마력 운용에 대해서 연구와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지금을 놓치면 놈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거다!’

키메라 세포로 인해 마력 폭주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마력 운용 능력이 뛰어나면 절대 마력 폭주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대로 자신들은 전멸당할 터였다.

그래서 계속 지그문트를 조금씩 공격하며 키메라 세포의 운용 능력을 확인했다.

그리고 지그문트가 양손에 마력을 모으는 순간, 자신이 입혔던 상처의 회복이 더뎌지고 다른 곳의 피부가 갈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마력 폭주의 징조를 발견했다.

‘만약 헬릭스가 이 과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거야.’

라셀은 드래곤 하트 덕에 무한대의 마나를 가지고 있어 이러한 부작용을 겪지 않았으나, 헬릭스가 이로 인해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키메라 세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지그문트라면 헬릭스와 똑같은 과정을 겪을 것이라 판단하고 기다렸다.

‘섣불렀어. 이렇게 키메라 세포를 이식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오만했구나!’

뒤늦게 지그문트는 파벨리온의 기록을 맹신했음과, 키메라 세포를 자신의 몸에 이식하는 것은 신중하게 했어야 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네놈도 정상이 아닐 텐데?”

“맞아. 이 기회를 노리느라 몸이 엉망진창이긴 해. 서로 마찬가지 아닌가?”

“이번 한 번으로 승부를 보는 게 어떠냐?”

“옛날 같으면 악착같이 싸웠을 텐데…… 많이 변했군. 지그문트.”

“마왕 체면이 있지. 인간 한 명을 상대로 구질구질하게 싸우긴 싫다.”

김강현과 지그문트는 서로의 몸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노리기 위해 김강현은 버티고 버텼지만 지금 쓰러져도 무방할 정도로 한계에 도달했고, 지그문트는 간신히 마력 폭주를 억제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잘 들어라. 놈이 공격하는 순간…….]

[네. 마왕님.]

김강현에게 했던 말과 달리 지그문트는 록스에게 메시지 마법을 보내 뒷공작을 시도하며, 오른 주먹에 실린 마력으로 마력포를 쏘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한편, 김강현은 오러를 두 줄기로 만들어낸 뒤 마검에 꼬아 위력을 높였다.

“흐아아앗!”

“하압!”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마력포와 오러를 쏘아보냈다.

광장을 뒤흔들 정도로 강한 충격과 함께 진동이 순식간에 몰아쳤다.

* * *

“아쉽게도 여기서 끝을 내야겠군.”

“뭐?”

“다음엔 이렇게 물러나는 일은 없을 거다.”

지그문트의 메시지 마법을 받은 록스는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앙! 콰아아앙! 콰르르릉!!

“처, 천장이 무너진다!”

“로, 록스 님!”

“사, 살려주십쇼!”

다크 위저드들은 판테온 신전의 지하에 은신처를 만들었고, 이곳이 헌터들에게 노출되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천장에 마나 폭탄을 설치해 두었다.

은신처에는 갖가지 흑마법 자료들이 있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복구 가능한 것들이었다.

이 마나 폭탄은 록스의 마력으로 발동시킬 수 있었는데, 다크 위저드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멋대로 터트린 것이었다.

“이제 쓸모가 없으니, 순순히 나의 마력이 돼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록스는 그들에게 10마리의 데스 나이트들을 보내 부하들을 순식간에 죽인 후 그들의 마력을 흡수했다.

“내부 분란이야?”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젠장! 우선 피할 데부터 찾아!”

테라 길드원들을 비롯한 헌터들은 정신이 없었다.

광장이 무너져 돌덩어리들이 자신들을 향해 떨어지고 있고, 눈앞의 적들은 같은 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이쪽으로 모이거라! 어서!”

이때, 헬릭스가 대규모의 방어 마법을 펼치며 황급히 소리쳤다.

테라 길드원들과 헌터들이 그의 주변으로 다급히 모여들었다.

콰르르릉! 콰아앙!

뒤이어 김강현과 지그문트의 공격이 충돌했다.

앞서 일어난 폭발과 함께 더욱 큰 충격파가 광장을 휩쓸었다.

* * *

“마력? 무슨 일이지?!”

두 공격이 부딪쳐 크게 흙먼지가 일어나자 김강현은 팔로 앞을 가리며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대규모의 이동과 마력이 감지되자 바짝 긴장하며 오른손으로 마검을 들어 겨누었다.

사아아앗!

“데스 나이트?! 크읏!”

바람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사라지며 튀어나온 것은 검은 무구를 입고 있는 20마리의 데스 나이트들.

김강현은 대항하기 위해 반격을 취하려고 했으나, 앞선 공격의 반동으로 바로 공격을 막을 수 없어 허리 쪽에 치명상을 입었다.

“이 자식들이!”

그렇지만 고통을 참은 채 바로 자세를 취하며 데스 나이트들을 쓰러트리는데 놈들의 움직임 패턴이 이상했다.

‘날 쓰러트리는 게 아니라, 발을 묶는 것 같은데?’

아직 주변의 흙먼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순 없었지만, 데스 나이트들은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않고 그저 자신이 전진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스타일이 변했어?”

헬릭스 또한 이상함을 느꼈다.

그에게도 20마리의 데스 나이트들이 달라붙어 그가 이동하지 못하게 공격하며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남은 10마리의 데스 나이트들은 테라 길드원들을 비롯한 헌터들에게 배치되었다.

그사이 서서히 흙먼지가 걷히며 주변 시야가 확보됐다.

헬릭스와 헌터 일행은 눈앞에서 지그문트와 록스가 사라지자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그들은 멀리 도망간 것이 아니라 지그문트가 소환된 마법진 위에 서 있었는데, 땅에 새겨진 각인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록스는 마법진 중앙에 손을 뻗은 채 마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설마?!”

“헬릭스!”

“이 몸도 알고 있느니라! 어서 움직여라!”

김강현과 헬릭스는 데스 나이트들을 뿌리치기 위해 각자 바닥나 있는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본 왕의 커다란 오판이다! 설마 이런 부작용이 있는 줄 짐작하지 못했으니. 너희들을 우습게 보지 않겠다고 생각했건만, 아직 무시하는 마음이 남아 있던 모양이야.”

“지그문트!!”

“이번에는 운이 좋은 줄 알거라. 만약 몸이 정상이었다면 이곳에 죽는 건 너희들이었으니 말이야!”

“웃기지 마라. 순순히 보내줄 것 같으냐?!”

김강현과 헬릭스는 지그문트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눈앞에 데스 나이트들이 그들의 몸을 붙잡고 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막무가내인 놈들의 움직임에 둘은 몸에 마나와 마력을 발산해 쫓아낸 후, 지그문트를 향해 달려갔다.

[록스. 아직 멀었느냐?]

[곧입니다. 잠시만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순식간에 데스 나이트들을 뿌리친 김강현과 헬릭스가 양쪽에서 달려들자 지그문트는 조급한 마음에 록스를 재촉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하고 싶었으나, 이 마법진은 록스가 발동해야 했기에 그의 말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쾅! 우두두둑!

“그 안에 갇혀 있어라!”

지그문트가 땅바닥에 발을 구르며 마력을 흘려보내자, 단숨에 김강현과 헬릭스의 눈앞에 흙벽이 일어나며 그들을 덮쳤다.

“고작 이 정도로!”

“막겠다고 한 거냐?!”

만약 다른 헌터들이었으면 흙벽 안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나, 김강현과 헬릭스는 관성을 이용해 몸으로 흙벽으로 부수고 전진할 뿐이었다.

이미 천장에선 마나 폭탄과 싸움의 영향으로 작은 돌덩어리들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 영향으로 금이 갈라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그때, 지그문트의 피부의 색깔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근육들이 몸에서 튀어나갈 것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으으으, 록스!”

이 영향이 얼굴에도 미치자 지그문트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키메라 세포의 폭주.

공급되는 마력의 양이 줄어들자, 세포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놈을 쉽게 죽일 수 없어! 놓치면 안 돼!’

이를 발견한 김강현과 헬릭스는 다음은 없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 천금 같은 기회는 절대 다시 오지 않음을 절실히 알고 있는 그들은 기를 쓰고 놈들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죽어!”

“끝이다. 지그문트!”

지그문트와의 거리를 10m를 남겨두자 김강현은 마검에 오러를, 헬릭스는 공중에 지옥의 불꽃을 소환했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짓기 일보 직전.

더 이상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보이자, 지그문트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허망한 마계 귀환을 예감했다.

“됐습니다. 마왕님!”

콰앙! 쿠우우웅-!

“마, 말도 안 돼…….”

“여기서 놓친다고?”

정말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

김강현과 헬릭스가 공격을 펼치는 순간 마법진이 완성되었고, 동시에 그들의 공격을 공간 왜곡으로 아예 없애버렸다.

“헬릭스, 파훼할 방법이 없는 거냐?”

“단순한 이동 마법진이 아니라 공간과 공간을 붙였느니라. 이건 강제로 떼어 놓으려다간 이 나라 전체가 공각 왜곡에 휘말릴 것이야.”

“미친!”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강현은 마검으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헬릭스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자 분노에 양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었다.

“크크크큭. 그래. 아직 마신께선 내게 기회를 주는구나.”

“간발의 차였습니다. 마왕님이 예견한 대로 공간 마법진을 따로 마련해 두길 잘했지요.”

모든 것이 지그문트의 계략이었다.

만약 자신의 소환이 어려울 경우 그동안 모은 영혼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자 소환 마법진에 공간 마법진을 겹쳐 만들었던 것.

다행히 소환에 성공하여 공간 마법진의 각인이 살아 있었고, 마력만 주입하면 바로 발동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이런 긴급 상황에서 유용하게 사용하였으니, 그들에겐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인간들의 영혼을 거름 삼아 다시 돌아올 것이다. 너희들은 영원히 스펠 바이러스를 해독할 수 없고, 절대 찾아내지 못할 것이야!”

“지그문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그문트와 록스는 검은빛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김강현을 비롯한 일행은 두 눈을 뜨고 그들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데스 나이트들이 쓰러지잖아?”

“아니, 소멸된다!”

그와 함께 헌터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바닥에 쓰러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놈들은 지그문트의 마력과 권능으로 깨어난 이상 그의 영향권 안에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데, 영향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떨어지자 힘을 잃고 소멸되는 것이었다.

“그보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지그문트와 록스의 탈출이 이루어진 후, 광장의 붕괴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자 헌터들은 살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어느덧 천장에선 작은 돌덩어리들뿐 아니라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떨어졌고, 바닥이 갈라지며 끝없는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몇 헌터들은 갈라진 바닥의 틈에 빠질 뻔했으나 주변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차라리 되돌아가는 건 어떨까?”

“그쪽은 틀렸어!”

“여기가 던전이면 바로 나갈 수 있을 텐데…….”

되돌아가는 입구는 큰 돌덩어리로 막혀 있는 데다 곧 붕괴될 것처럼 보였다.

‘던전이라면 바로 게이트를 발견해 나갈 수 있겠지만, 여긴 다크니스가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이야.’

아쉽게도 지그문트를 죽이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탈출해야 했다.

헬릭스가 이동 마법을 시전하고 싶어도, 앞서 록스가 공간을 비틀며 이동해 버려 정확한 좌표를 계산해도 차원의 틈에 빠질 수가 많았다.

‘차라리 고속 이동 마법이라면?’

좌표를 이용한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면, 공간 왜곡이 사라지는 지점까지 고속으로 벗어나면 어떨까.

공간 왜곡만 벗어나면 이동 마법을 쓸 수 있을 터였다.

김강현도 이러한 헬릭스의 생각을 읽고 동의했다.

‘가능성은 낮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야.’

구체적으로 생각하니 자신이 천장을 뚫어 길을 만들고, 헬릭스의 고속 마법으로 탈출한 뒤 이동 마법을 쓰면 될 일이었다.

김강현은 바로 헌터들에게 이 방법에 대해 말했고, 헌터들은 살 방법이 있다는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내 힘만으론 불가능하고, 너희들의 마나를 가져가야 해.”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지금 김강현의 몸은 한계에 도달했고 바로 쓰러져도 무방할 정도로 상처투성이다.

천장을 뚫고 올라가기 위해선 회복은 둘째 치고 마나의 회복이 절실한데, 아무리 인피니티 호흡법을 운용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방안으로 헌터들로부터 마나를 가져가야 했지만, 그들도 상태가 좋지 않아 최악의 경우 그들의 생명력도 가져가게 될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우리의 목숨은 당신에게 맡겼습니다.”

“목숨만 붙어 있을 수 있다면 생명력쯤이야!”

그런데 헌터들의 대답은 바로 시원하게 나왔다.

자신의 생명력이 사라지는 일인데도 흔쾌히 수락하며 너도나도 자원했다.

‘테라 길드, 그리고 이 사람 덕분에 살 수 있었는데.’

‘지금 그를 믿지 못하는 쓰레기지!’

마왕이라 불리는 마족과 싸워 살아남았으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김강현을 비롯한 테라 길드의 공이 혁혁했다.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는 모습에 반한 그들은 김강현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김강현을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로렌스 또한 자신의 팔을 건넸고, 테라 길드원들을 비롯한 루시아는 만약 잘못되어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팔을 내밀었다.

“반드시 해내죠. 아니, 무조건 살아서 돌아갑시다!”

김강현은 헌터들의 진심을 느끼며 그들의 마나와 생명력을 가져갔다.

다들 지친 상태인지라 몇몇 헌터들은 기운이 모조리 빠져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한편, 헬릭스도 남아 있는 마력을 짜내어 마법을 준비하는데 그 또한 마력이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이를 알고 있는 김강현은 헌터들에게 받은 마나를 인피니티 마나로 변환한 뒤 헬릭스에게 전달했다.

마나와 상극인 마력을 지니고 있지만 비슷한 성향의 인피니티 마나는 예외였기 때문.

[뒤를 부탁한다. 헬릭스. 그리고 부담 갖지 마라.]

[쓸데없는 걱정이니 네놈이나 잘해라.]

금방 기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낀 헬릭스는 고맙다는 말이 쑥스러워 괜히 투덜거렸다.

“후우.”

김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길게 숨을 내쉬고, 차가운 마검의 감촉으로 긴장감을 날려 버렸다.

각오를 다진 그는 양손에 마검을 쥔 채 몸을 숙인 반동을 이용해 천장을 향해서 뛰어올랐다.

“흐아아아아앗!”

천장의 두꺼운 돌과 땅을 뚫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중간중간 돌덩어리와 흙이 떨어졌지만, 그는 이를 마나 소드로 가르며 일직선으로 거침없이 지상을 향해 올라갈 뿐이었다.

‘으으으!’

근육이 찢어지고, 핏줄이 터지고, 몸이 한계를 뛰어넘어 비명을 질러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찰나의 순간 김강현은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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