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마법 공학의 시작
“이런 일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응?”
“지금 최고의 복수는 성공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 인간. 아주 좋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유하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헬릭스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며칠 동안 납치되어 자신의 의사와 달리 끌려다녔던 이유하는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마나 전지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생각은 김건도 동일했다.
다행히 긍정적인 대답에 강려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지내도 괜찮을까요?”
“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앞으로 이유하의 거취였다.
분명 이 장소도 김우진이 알고 있을 것이기에, 여기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김우진의 성격상 이유하와 김건의 탈출 소식을 들으면 다시 뒤쫓아 올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장소나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쉬운 걸 가지고 고민하는구나. 이 몸께서 최적의 장소를 알고 있느니라!”
“네가?”
헬릭스의 말에 김강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보다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이곳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다들 식탐이 많은 소환수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천호. 그 인간의 집을 쓰면 될 것 아니냐? 주인이 없으니 허락을 맡아야겠지만 말이야.”
“관악산의 거처라면…….”
그런데 생각지 못한 말에 김강현이 무릎을 탁 쳤다.
그곳은 진법이 펼쳐져 있어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할 뿐더러, 이미 검천호의 구역으로 유명하여 정말 초짜 헌터가 아니면 혹시라도 근처에 잘 가려고 하지 않았다.
“S급 헌터 검천호를 말하는 거예요?!”
“그럼 강현 님이 그분의 제자?”
검천호의 이름은 유명하여 헌터들뿐 아니라 강려원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 정도까진 아니고, 약간의 신세를 져서 알고 있어. 덕분에 검 어르신 수련장을 종종 이용하고 있고.”
“우와!”
“실장님, 생각보다 유능한 헌터였군요.”
“려원 언니. 강현 님 혼자서 비천 길드를 쓰러뜨렸는데요. 유능이 아니고 매우 실력이 뛰어난 게 아닐까요?”
“에에엑?”
김강현이 비천 길드를 없앴다는 걸 몰랐던 강려원은 이유하의 말에 진심으로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 그럼…… 그 김강현과 실장님이 동일 인물?”
“언니, 정말 몰랐던 거예요?”
지금까지 그녀는 그 김강현과 이름만 똑같은 줄 알았는데,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에 김강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버버거렸다. 예상치 못한 강려원의 반응에 이유하는 자신이 실수한 건가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부실장님. 이건 비밀이니 당분간 지켜주세요.”
“당분간이요?”
“네. 나중에 방송 출연을 통해 밝혀지지 전까지만요.”
“바, 방송 출연? 그런 건 언제 찍었습니까?”
“강현 님, 되게 잘나가시네요.”
이번엔 김건과 이유하가 크게 놀랐다.
헌터와 US 그룹의 실세로 떠오르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방송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쌓으려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다음엔 어떤 것으로 자신들을 놀라게 할지 짐작할 수 없었다.
“좀 과정이 복잡하긴 한데,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김강현은 정신없는 분위기를 정리시키고, 검천호에게 연락해 자신 외의 사람들이 집에 머물러도 되는지 메시지를 남겼다.
마침 검천호는 시간 여유가 있었는지 바로 괜찮다는 답장을 보냈다.
급작스럽게 이사 결정이 나자 김강현은 인벤토리를 이용해 오피스텔의 짐을 검천호의 집으로 옮겼고, 당분간 이유하와 김건은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죄송합니다, 사장님.
“……아하하하하하!”
US 그룹의 본사에 들러 필요한 서류를 챙긴 김우진은 지방으로 내려갈려던 찰나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헛웃음만 나왔다.
그는 사람이 진심으로 화가 나면 웃음만 난다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어이없게도 웃음이 계속 나왔다.
“불과 1시간 사이에 US 연구소가 쑥밭이 됐단 말이지? 간신히 데려다놓은 두 사람은 도망치고 말이야.”
-…….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김우진은 윤석원의 보고를 떠올리며 내용을 복기했다.
“내가 연구소를 나간 후 침입자가 지 부소장의 모습으로 연구소에 들어왔고, 목걸이 신분증과 가짜 지문으로 보안들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안에 갇혀 있던 두 사람에게 물건을 전달해 탈출할 수 있게 도왔고, 압도적인 힘으로 함정을 파괴해 가드들이 막을 수 없었단 게 맞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지 부소장의 정보를 빼돌린 녀석이 있을 터. 그 새끼는 누군가?”
-은밀히 조사 중에 있지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놈들도 대놓고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까.”
아주 제대로 당했다.
김우진은 헌터 혹은 머더러를 움직이게 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가드 팀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강한 녀석이라면 윤석원의 판단대로 보내주는 것이 맞았다.
자신이 머더러들을 이용해 김건과 이유하를 납치한 이유는 사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강제로 그들을 구속시키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면, 일이 커져 자신의 힘으로 막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우선 내부 단속부터 하고, 서둘러 정리하도록 하지.”
-네. 사장님.
“그래. 고생하게.”
마음 같아서는 윤석원에게 욕을 하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화풀이에 불과하기에 현실적으로 상황 수습을 명령했다.
“김강현…… 으아아앗!”
전화를 끊자 김우진은 눈앞에 보이는 물건들을 내던지며 폭발했다.
지금까지 그는 탄탄대로를 걸으며 화려한 스펙을 쌓고 있었지만, 김강현이라는 녀석이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편이었던 김고엽도 어느덧 김강현에게 마음이 쓰고 있어, 곧 손에 잡힐 것만 같았던 US 그룹의 회장 자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무슨 수를 써야 해!”
김우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에 빠졌다.
***
“흐음, 이런 차림으로 있으려니 죽겠네요.”
“적응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김강현은 정장에 넥타이를 하고선, 불편함에 자꾸 칼라 쪽을 만지작대며 넥타이를 풀었다 조였다.
정장을 입은 이유는 오늘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회의에 김강현도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던전에 들어갈 일정을 잡았어야 했어.’
원래 오늘 회의는 지난번처럼 강려원이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김고엽의 강한 반대로 김강현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실장 자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부실장인 강려원이 참석했을 뿐이니, 이젠 실장인 김강현이 참석해야 한다는 명분에 반박할 수 없었다. 김강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김고엽의 계획이었다.
‘이 회의가 끝나면, 전략기획실장으로의 자리가 확정되겠지.’
US 그룹의 직원 대부분은 김강현이 전략기획실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내부적으로 정식 공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발표하게 되면 정식 공표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점점 이 자리를 빠져나가기가 어려워질 것이었다.
김고엽은 지난 전략기획실 실적 발표와 마나 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김강현의 자리를 더욱 굳힐 수 있다는 것을 노리고 있을 터였다. 김강현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실장으로서의 일은 충실해야 했으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간이 2시 반인데…… 시간 안에 맞출 수 있을까요?”
“우선 파일들을 준비해 놨으니 안 되면 그것만이라도 발표해야죠.”
초조한 마음에 강려원은 자꾸 손목시계를 보았다.
회의 시작은 오후 3시로, 이유하는 2시 30분까지 마나 전지 연구 영상을 보내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무언가 계속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지 영상 전달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쪽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겁니다. 우선 기다려 보죠.”
“알겠습니다. 실장님.”
정확히는 마나석을 전기로 바꿔주는 액체, 즉 전해질 연구가 미완성으로, 생각보다 마나석 대비 효율성이 좋지 않아 이를 개선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밤을 새우고 있었다.
이런 점을 알고 있는 김강현과 강려원은 차마 재촉하지 못하고 이유하의 연락을 기다릴 뿐이었다.
“김 실장,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 서 있나?”
“안에 들어가니 긴장이 돼서 바람 좀 쐬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흐음, 발표 준비는 완벽한 것이겠지?”
“네.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됐네. 그럼 이따가 보게.”
그때 김고엽이 나타나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딱딱한 말투로 김강현에게 말을 걸었다.
뒤편에는 그를 따르는 US 그룹의 계열사 사장들과 이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저 사람이 전력기획실장이라고?’
‘생각보다 젊은데?’
그들은 눈앞의 청년이 화제의 전략기획실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얼굴을 보며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 기색이 보였다.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실장님, 이제 들어가셔야 해요.”
“으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회의가 시작하기 5분 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이유하의 연락은 없었다.
강려원이 계속 시간을 체크하며 재촉하자, 김강현은 어쩔 수 없이 회의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오랜만이군. 김 실장, 강 부실장.”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김우진 사장님.”
그때, 자신들을 부르는 목소리에 김강현과 강려원의 발걸음이 멈췄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US 그룹 본사를 방문한 김우진과 그의 가드 팀장 윤석원이었다.
“흐음, 하려는 일이 잘되지 않아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네만.”
“그러셨군요. 한데 제가 알기론 이번 분기에도 US 전자 매출은 호조였는데,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눌 줄 알았던 김강현은 김우진이 말을 돌려 자신을 언급하자 순간 화가 치솟아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표정을 찌푸릴 텐데, 김우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바로 받아쳤다.
“최근 진행하던 일에 암초가 발견되어서 어떻게 없앨까 생각 중이네.”
“그렇습니까? 그래도 워낙 사장님 능력이 출중하시니 금방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네.”
서로 말은 편안하게 하지만 언급된 암초가 김강현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 때문에 내색할 수 없어 신경전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다 되었으니 먼저 들어가겠다.”
“알겠습니다.”
마침 회의실 입구에서 직원이 회의를 시작을 알리자 김우진이 발걸음을 옮겼다. 뒤편에 서 있던 윤석원도 곁눈질로 김강현을 본 뒤 김우진을 따라갔다.
김강현과 강려원도 더 이상 이유하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회의실로 입장했다.
* * *
“지금부터 US 그룹의 3분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임원들과 사장들이 모인 회의실에선 사회자의 진행으로 각 계열사의 실적 및 성과 발표가 시작되었다.
가장 상석에는 김고엽이 앉아 있었고, 그 밑으론 2분기 계열사의 실적대로 자리 배치가 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살벌한데?’
처음 US 그룹의 회의에 참석한 김강현은 서로 치고 물고 늘어지는 회의에 정신이 없었다.
한 계열사의 임원이 나와 실적과 성과에 대한 발표를 하는데, 내용에 따른 상세 분석이 있어야 했다. 만약 없다면 각 계열사에서 이것을 꼬치꼬치 캐물으며 명확한 답변을 요구했다. 그래서인지 발표를 할 때 말 한마디조차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여기도 전쟁터구나.’
같은 US 그룹 안에 소속되어 있지만, 계열사의 임원이라는 자리는 평생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연봉이 책정되어 있지만, 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고 성과가 없으면 바로 잘릴 수 있었다.
그래서 현재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했다. 중간중간 휴식 시간이 있었지만, 이 시간에는 자신의 발표 자리를 검토하거나 다른 계열사의 자료를 미리 확인하기 바빴다.
“다음엔 US 전자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김우진이 회의실 단상으로 이동한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갑습니다. US 전자의 김우진입니다.”
그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PPT를 열며 US 전자의 사업 방향과 실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현재 반도체 사업을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으며 다른 회사들로부터 공급을 맡아 수출에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체 반도체를 이용한 스마트폰과 전자 기기들을 생산 판매하여 대한민국 60%의 사람들이 US 전자의 전자 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더불어 해외 수출도 활발하여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 US 전자의 제품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특히 영업 이익은 매 분기마다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어 실적만 보았을 때 다른 계열사의 임원들이 깔 명분이 없었다. 이렇게 US 전자는 US 그룹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US 전자가 알짜배기야.’
‘매년 엄청난 금액을 다시 연구에 투자하니, 계속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지고 있구나.’
‘저걸 어떻게 이겨?’
김우진이 발표하는 동안 다른 계열사의 임원들은 내용에 약점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빈틈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발표를 위해 일주일 동안 US 전자의 경영 팀이 달려들었으니 무결점인 것은 당연했다.
“질문 있으십니까?”
발표를 마치고 질문 응답 시간이 되었지만 회의실엔 정적이 흘렀다.
앞서 다른 계열사들의 발표 후에는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US 전자는 단 하나의 질문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발표를 한 것이었다.
“다음은 US 그룹의 전략기획실입니다.”
사회자의 말에 김우진이 단상에서 내려가며 아래에 있는 김강현을 보았다.
‘한번 실력을 보지.’
아무리 사람을 잘 다루더라도, 헌터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별개였다.
어느 정도 연기력이 있어야 하며 화술이 필요했다. 김우진은 김강현이 지금까지 모든 일들을 잘 처리했지만, 이것만큼은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있었다.
“후우…….”
단상 위에 올라간 김강현은 회의실의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긴장되어 자신도 모르게 길게 호흡을 내쉬었다.
‘평상시 말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하는 거야.’
긴장을 없애기 위해 계속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리며 조용히 사회대 위에 올려진 마이크의 전원을 껐다.
사회자는 실수로 김강현이 마이크를 껐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지만,
“안녕하십니까? 전략기획실장 김강현입니다.”
‘목소리가 잘 들려?’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마치 옆에서 듣는 것처럼 또렷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 인피니티 마나를 실어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잘 들을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동안 전략기획실은 그룹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초안을 기획하고 계열사들과 연계하여 전체적인 방향을 이끄는 일을 맡아왔습니다.”
그 말에 몇몇 임원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많은 계열사들이 전략기획실의 도움을 받고 있었고, 그들 덕에 성공으로 이끈 프로젝트들이 대다수였다.
“각 부서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인데, 이렇게 전략기획실에서 맡은 업무가 많아지니 오히려 내부적으로 업무 과다가 이루어지고 있더군요. 그래서 전략기획실에서는 올해까지 본사의 각 부서와 계열사에게 관련 업무를 인수인계할 계획입니다.”
“갑자기?”
“그럼 사람을 더 뽑아야 하잖아?”
“내부적으로 근무 상황을 다시 체크해봐야겠는데!”
PT를 하기 전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임원들이 웅성거렸다.
김강현은 전략기획실에 취임하면서부터 각 부서와 계열사에서 들어오는 업무들을 쳐내면서 앞으론 다른 부서의 일을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힌트를 주었었다.
이를 미리 눈치챈 임원들은 오늘 발표가 있기 전부터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임원들에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오해를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전략기획실에선 그룹에서 진행될 프로젝트의 기획과 개발을 맡아 진행할 것이지만, 이 단계가 끝나면 관련 부서에 공을 전달하겠다는 의미니까요.”
“흐음.”
그 말에 딱딱하게 굳었던 임원들이 얼굴이 펴졌다.
전략기획실이 각 부서와 계열사들을 도와줌으로써 성과에 대한 부담이 덜했었지만, 계속 일정 부분은 도와주고 성과를 넘긴다는 말에 항의를 할 수 없었다.
‘당근과 채찍을 잘 쓰고 있구나.’
김강현의 교묘한 말솜씨에 김고엽은 탄성을 자아냈다.
임원들의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김고엽은 김강현의 말에 숨겨진 뜻을 정확히 읽었다.
그동안 전략기획실이 부서들 간의 연계와 일 처리를 원활하게 도와줬지만, 앞으로는 이 업무들을 본인들이 해야 한다. 공을 넘긴다고 해도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 좋은 성과가 되는 것일 뿐, 실패가 된다면 마이너스 영향이 미칠 것이었다.
‘각 회사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어.’
지금까지는 전략기획실이 부서들과 계열사들을 끌어줌으로써 그동안의 단점들이 가려져 있었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독립을 선언한 이상 단점들이 보일 테고 이를 메꾸기 위한 노력도 시작될 것이었다.
이 사이에 다시 김강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전략기획실은 마법 공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전념할 예정입니다.”
“마법 공학?”
“그건 무슨 분야지?”
곳곳에서 처음 듣는 단어에 의구심이 나왔다.
마나 전지를 알고 있는 김우진도 상세한 내용에 대해선 알지 못했기에 김강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들 헌터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헌터는 이 세계에 나타난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사냥하고, 각종 무구들과 마나석을 가지고 오죠. 전략기획실에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마나석으로, 현대 과학으로는 풀지 못한 신비한 힘이 담겨져 있습니다.”
말과 함께 김강현은 리모컨으로 PPT의 페이지를 넘겼고, 임원들은 헌터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몇 년 동안 핫한 주제를 말하라면 ‘헌터’를 빼놓을 수 없었다.
“현재까지 마나석은 마나를 가진 헌터들만 사용할 수 있었죠. 그런데 이 마나석을 일반 사람들이 쓸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
“전략기획실에서는 마나석을 활용한 프로젝트를 마법 공학이라 명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 먹거리에 대한 내용이 나오자 임원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뉘어졌다.
마나석이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지만 현재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어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반응과, 아직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기에 성공만 하면 시장을 100% 차지할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분명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US 그룹은 마나석과 관련된, 그리고 헌터와 관련된 기술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마법 공학을 시작하는 건 너무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우진 세력에 속한 임원에게서 김강현의 말에 반박하는 주장이 나왔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헌터들의 무구에 사용되는 코팅 액체를 개발해 관련 레시피를 연화 그룹에 판매했으며, 마법 공학의 시작을 위해 마나석을 이용한 마나 전지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
몇몇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몇몇 불신이 가득한 눈치였다.
헌터의 시대가 시작된 지 5년도 지나지 않았고, 마나석을 활용한 무구를 개발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헌터들은 마나를 직접 사용하니 마나석을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마나만을 가진 일반 사람들이 마나석을 사용하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갑자기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지자 가만히 있던 사회자까지 나서며 임원들을 진정시켰다.
“마나 전지는 마나석 에너지를 활용하여 전기를 만들어내는데, 마나석의 등급에 따라 사용 기간과 용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관련 내용을 자세히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때,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우진이 나섰다.
그의 말에 모든 임원들도 마나 전지를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아직 마나 전지는 개발되지 않았으니까!’
김우진은 확신했다.
김건과 이유하의 납치가 실패한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마나 전지의 개발에 대해 조사했고, 실험이 실패하여 이번 회의에서는 공개되지 못할 거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를 알고 김강현을 몰아붙인 다음 몰락시킬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개발 중인 마나 전지 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김강현은 PPT 화면에 헌터폰 영상을 띄웠다.
‘아냐. 불과 1시간 전까지 안 된다고 했거늘.’
김우진은 관련 자료가 있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김강현이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자 보지 말자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정말 아슬아슬했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유하의 연락이 오지 않아 조마조마하며 기다리던 중, 다행히도 발표 직전 이유하로부터 하나의 동영상이 도착했다.
아직 동영상은 보지 않았지만, 제목을 통해 마나 전지의 개발 영상임을 확인했으니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럼 함께 보시죠.”
김강현은 말과 함께 동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 * *
동영상을 재생하자 책상 위에 마나석과 액체가 담긴 상자, 그리고 전기 장치들이 보였다.
-마나 전지를 테스트하기 전 간단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책상 모습이 비춰지는 가운데 김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동영상에 집중되었다.
-지금 준비한 마나석은 D급 마나석으로, 유리 상자 속 전해질 액체에 넣을 것입니다. 그럼 전해질 액체에 의해 마나석에서 전기가 만들어져 중형 배터리 박스에 충전될 예정입니다.
특히 공학을 전공한 임원들이 보니, 마나석에서 전기를 만들기 위한 모든 세팅이 완벽했다.
10ℓ 크기의 유리 상자에는 전해질 액체가 가득 차 있었고, 여기서 전기가 만들어지면 배터리 박스에 보관하기 위한 장치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배터리 박스의 겉면에는 전기 잔량을 나타내는 화면이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김건이 마나석을 전해질 액체로 가득 찬 유리 상자에 집어넣었는데, 바로 마나석의 푸른빛이 줄어들면서 중형 배터리 박스에 전기가 순식간에 백 퍼센트 충전되었다.
“저게 가능한 것이었어?”
“저게 대중화되면 기존의 전기 업체는 다 망하지 않을까?”
마나석으로 전기가 만들어지자 모든 임원들이 패닉에 빠졌다. 공학을 전공한 임원들은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모두가 마나 전지가 세상에 끼칠 파장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김건이 유리 상자에서 마나석을 꺼냈다. 아까보다 마나석에서 보이는 푸른빛이 약해져 투명한 빛이 군데군데 보였다.
-지금은 전해질 액체를 많이 써서 전기가 빠르게 충전되었을 뿐입니다. 마나석의 등급과 전해질의 양에 따라 전기의 양과 충전 속도가 달라질 것이니 참고해 주시고, 테스트 영상 촬영은 여기까지입니다.
말과 함께 3분가량의 영상이 종료되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떠한가? 마나 전지라는 게 가능성 있어 보이나?”
“이건 기적입니다. 마나 전지의 활용성은 무궁무진하니까요.”
마침 김고엽이 옆에 있던 공학 전공의 임원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러고는 미래에 마나 전지가 쓰일 곳을 떠올렸다.
안정적으로 마나 전지를 생산할 수 있다면 원자력 발전소는 사라질 것이고, 각 기업에서도 마나 전지를 선호할 것이었다.
마나 전지는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친환경 에너지에 속하며, 전기는 우리 일상에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안전성에 있어서도 마나 전지만큼 뛰어난 것이 없으니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뛰어났다.
임원이 마나 전지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자 김고엽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영상에서 보신 것처럼 아직 마나 전지는 개발 상태입니다. 상용화를 하기 위해선 액체 형태의 전해질을 고체로 바꿔야 하며, 효율적인 배터리 출력 방식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와 관련하여 질문 있으십니까?”
이번 일을 통해 김강현은 배터리 쪽을 공부하다, 마나를 만들어내는 전해질이 액체 상태면 안정성이 좋지 않아 배터리가 폭발할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일반적인 배터리와 다르기에 처음부터 모든 것을 연구 개발해 만들어야 했다.
발표가 마무리되었지만 다들 마나 전지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어 질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짝! 짝! 짝! 짝!
적막한 회의실에 김고엽의 박수 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임원들이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김강현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이 모습을 보는 임원들의 시선은 각기 달랐다.
‘역시 위험해. 이대론 지금 자리마저 위험할 거야.’
김강현이 발표마저 성공적으로 해내고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자 김우진은 위협과 함께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의 힘만으로 김강현을 US 그룹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휘하의 모든 세력을 동원해야 간신히 없앨 수 있음을 깨달았다.
‘더 큰 문제는 전략기획실이 힘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
US 그룹의 전략기획실은 모든 프로젝트를 관리 감독하며 막강한 권력을 유지했지만, 주로 계열사들과 부서들의 서포트에 힘을 써왔다. 하지만 김강현이 실장으로 부임한 이후 서포트 역할을 줄이고 마법 공학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새로운 권력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더불어 중립이거나 적대적인 이들은 물론, 마법 공학이 모든 계열사와 부서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생각한 임원들의 시선이 김강현에게 호의적이었다.
‘어쩌면 손가락 크기의 배터리가 발전소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전기가 있는 곳에 마나 전지는 무조건 쓰일 거야.’
‘이뿐만이 아니야. 다른 에너지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면!’
그들은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칠 마나 전지로 인해 시작될 새로운 생태계를 구상했다. 그러고는 김강현을 예의 주시하며 친분을 쌓으려는 생각을 가졌다.
모든 계열사와 부서들의 발표가 끝나자 김고엽이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발표를 들으니 다들 3분기에도 고생들을 많이 했어.”
우선 김고엽은 자리에 모인 임원들을 격려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하지. 금일 전략기획실에서 발표된 마나 전지는 그룹에서 정식 공문이 전달되거나 발표가 있기 전까지 엠바고를 걸도록 하겠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미 개발 단계에 들어갔으니 발표만 해도 회사 가치를 크게 높일 수 있습니다!”
몇몇 임원들이 의구심을 나타냈다.
“회의에 앞서 전략기획실장으로부터 마나 전지에 대한 보고를 받았지만,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정말 가능성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네.”
“그렇긴 하지.”
“마나석을 활용한 아이템이라니!”
“그런데 우리가 마나 전지를 개발하고 있는 소식이 다른 회사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떻겠는가? 증권가와 시장에 소문이 퍼질 것이고, 대항하기 위해 다른 회사들도 시장에 뛰어들겠지.”
“일리 있는 말이군요.”
“오픈을 하더라도 다른 회사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경쟁력이 필요하다고 보네. 게다가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인 만큼 신중하게 진행하고 싶군. 다들 생각이 어떠한가?”
김고엽의 말은 평온했지만, 말투에서 고집이 느껴졌다.
이럴 경우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김고엽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확신이 있었고, 그가 고집을 부린 케이스는 무조건 성공을 거뒀다.
“회장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맙군, 김 실장.”
김강현도 괜한 소문으로 다른 회사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주는 것보단 나중에 확실하게 공개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큰아버지 때문에 건과 유하가 납치되었지만, 다음엔 어떤 놈들이 움직일지 몰라.’
마법 공학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개발자인 이유하를 찾을 것이고, 이번 납치와 똑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현장 실무자나 다름없는 김강현까지 김고엽의 의사에 동의하자 마법 공학의 엠바고가 이루어졌다. 만약 마법 공학이라는 단어를 어딘가에서 꺼내기만 하면 US 그룹이 끝까지 쫓아 찾아낼 것이 분명했기에, 임원들은 이 순간 오늘 회의실에서 보고 들은 것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걸로 3분기 대표 회의는 종료하겠네.”
김고엽의 말에 회의실의 모든 임원들이 박수를 쳤고, 뒤이어 말이 이어졌다.
“다들 고생했으니 식사라도 하고 가게나. 최 이사.”
“네. US 호텔 쪽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진짜는 지금부터지.’
김고엽은 회의가 끝나면 임원들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이 회의는 서로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한 전초전일 뿐, 진짜는 이 식사 자리였다.
‘이번에 자동차 쪽의 상황을 자세히 살아봐야겠어.’
‘전자 쪽의 약점을 얻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이 식사 자리에서는 원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정보 공유를 하기도 하고, 친분도 쌓는 중요한 자리였다.
아무리 회의에서 좋은 결과를 내었어도 다른 임원들과 친분을 쌓지 못한다면 외톨이가 되어 고립될 수 있었다.
“김 실장은 처음인 만큼 꼭 참석하게나.”
“네, 회장님.”
‘빠져나가긴 어렵겠네.’
이런 자리가 고역인 김강현은 식사 자리는 핑계를 대어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김고엽의 말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임원들은 김강현을 보며 각자 목적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결국 김강현은 함께 회의에 참석했던 강려원과 함께 US 그룹의 호텔로 이동했다.
***
자정이 가까워진 늦은 밤. 김강현은 호텔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바로 가려고 했지만, 다시 김고엽의 손에 붙잡혀 티타임 시간까지 보낸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피곤에 지친 김강현은 강려원과 함께 회사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보다 어리지만, 대단해.’
두 사람은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김강현은 식사 시간에 받은 명함들을 헌터폰에 저장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호텔로 자리로 옮겼지만, 김강현에겐 마음 편히 식사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음식은 뷔페 형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무언가를 먹으려고 하면 사람들이 찾아와 말을 거니 그들과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화기애애하게 웃고 떠는 게 뭐가 어렵냐고 투덜거릴 수 있지만, 각자 부서들을 이끄는 장이나 회사를 움직이는 임원인 만큼 말 한마디로 수억의 돈이 움직일 수 있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의 장점과 약점을 파악해야 했고, 무언가 거절해야 한다면 기분 나쁘지 않게 이야기해야 했다.
말만 식사 자리일 뿐, 서로 자신의 편과 적을 구분해야 하는 정치 싸움의 자리였다.
‘김우진 사장만 제외하고 모든 임원들과 좋은 관계를 만든 것 같아.’
수십 명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 않는 일이었을 텐데, 김강현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해냈다. 게다가 마치 이런 대화가 능숙한 듯 대화를 나눴던 모든 임원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좋은 친분 관계를 쌓았다.
강려원은 김강현이 이런 자리가 처음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따라다니며 대화를 도와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도움 없이도 상대방들을 하나하나 미리 파악하자 너무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후우, 참 하루가 길었어.’
간신히 명함 저장이 끝난 김강현은 기지개를 켜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