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아직 끝나지 않는 싸움
“크하하핫! 내가 바라던 게 이거야!”
순식간에 마력이 증폭되면 마치 마약을 하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우경도 마력의 증폭을 경험하자 무적이 된 기분에, 바람의 칼날을 전신에서 내뿜으며 주변의 모든 것을 날카롭게 베어나갔다.
“피할 곳도 마땅치 않군.”
“언제까지 피할 순 없다.”
김강현과 헬릭스는 앞선 벼락 공격으로 은신할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없어, 이우경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어쩔 수 없이 바람의 칼날을 쳐내며 이우경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는데, 문득 김강현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까 이우경을 살폈을 때…… 증식이라는 스킬이 있었어. 발현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최대한 빨리 없애는 게 좋겠어.”
“흠…… 이 몸의 생각으론 살아 있는 인간이니만큼 언데드와는 다른 방법이겠지. 혹시 모르니 신체 일부를 자르는 짓은 하지 말거라.”
몇몇 마계의 마물 중 스스로 신체 일부를 잘라 증식하는 종족들이 있는 것을 떠올린 헬릭스가 말했다.
“시간을 벌어라. 놈을 묶는 사이 소멸시킬 수 있는 마법을 준비하도록 하마.”
“좋아.”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김강현은 붉은 마나로 휩사인 마검을 들고 이우경에게 달려들었고, 헬릭스는 아직 집 위에 남아 있던 마력 구름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우경은 자신을 향해 마검을 휘두르는 김강현의 공격을 막으며 소리쳤다.
“모든 것이 네놈 때문이다! 네놈만 아니었으면 내 아들이 뇌사에 빠질 일도, 비천 길드가 이렇게 무너지지도, 내가 이렇게 될 일이 없었을 것을!”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까? 스컬 길드를 이용한 불법적인 일들, 헌터협회와의 밀약, 그리고 범죄자들을 빼돌려 인체 실험까지!”
“시끄럽다! 그건 헌터들의 입지를 세우고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어! 그게 무슨 잘못이냐?!”
“……처음부터 비천 길드는 잘못되었군요.”
“뭐라고?!”
이우경은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감정을 토해냈다.
“다 네놈 때문이야! 너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응?”
그런데 분노에 휩사인 이우경의 마력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점점 기세가 흉포해지고 덩치가 커지더니 근육이 일렁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설마…… 증식?”
혹시나 싶은 마음에 김강현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우경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갈라진 단면에서 세포들이 증식되어 또 다른 이우경이 만들어졌다. 두 명이 된 이우경은 또다시 분열하여 강현의 눈앞에서 금세 네 명으로 불어났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분노에 휩사인 이우경들은 이성을 잃고 격렬하게 분노룰 표출했다. 마치 생각이 공유되는 듯 모두가 똑같이 고함을 질렀다.
“죽어엇!”
곧 2명의 이우경이 김강현의 양옆으로 달려들어 팔을 붙잡았다. 김강현은 이를 떨쳐내기 위해 팔을 휘둘렀다.
“크흣…… 히, 힘이……!”
그런데 김강현은 양옆에 붙은 이우경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괴력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에 양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놈을 자극하면 안 되거늘…… 사고를 쳤군.”
그 모습을 보던 헬릭스가 한숨과 함께 소리쳤다.
“잘 들어라. 놈이 증식하여 마력의 양은 똑같이 나누어졌을 터. 하지만 마력에 의해 신체 변형이 일어났으니 주의해라!”
“그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크으으읏!”
그사이 다른 2명의 이우경이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 김강현에게 뿌렸다. 김강현을 붙잡고 있던 놈들은 바람의 칼날이 닿기 직전 피해 버렸다.
“젠장!”
확실히 헬릭스의 말대로 마력을 이용한 스킬의 위력은 줄어들었지만, 이 괴력은 굉장히 성가셨다.
하지만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었다.
“본체가 증식된 육체들을 조종하다 보니 공격 패턴이 단순해졌어.”
이우경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니며 움직임을 살피니 금방 패턴이 눈에 잡혔다. 그렇지만 긴장의 끈을 놓으면 바로 괴력에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김강현은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하며 이우경들의 발을 묶었다.
‘이대론 놈에게 당해!’
이우경의 본체는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마법을 준비한 헬릭스에게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급해졌다.
“응?”
“크아아아앗!”
한 명의 이우경이 희생을 감수하고 김강현의 정면을 향해 달려들어 시야를 가렸고, 그사이 다른 이우경들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뭘 하려고?”
거리를 두고 집중하여 마력을 모으고 있던 헬릭스는 이 모습에 의아해졌다. 김강현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마검에 마나를 실어 분신 이우경의 신체를 갈갈이 찢어버렸다.
그 직후 헬릭스와 김강현은 주변으로 흩어진 분신들이 펼치는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 길드장님?!”
“조용히 해라!”
“사, 살려줘! 으아아앗!”
“얌전히 내 먹이가 되거라!”
“커헉!”
이우경들은 길드원이었던 헌터들을 죽이고 심장을 꺼내 바로 입안에 집어넣고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괴물이야!”
“길드장님이 미, 미쳤어!”
“도, 도망가!”
“몸이 움직이지 않아!”
비천 길드의 헌터들은 이 모습을 보고 도망치려 했지만, 앞서 헬릭스의 벼락 공격으로 몸이 마비되어 얼마 가지 못해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사, 살…… 어?”
“죽이지 않아?!”
그런데 이우경들은 눈앞에 있는 비천 길드의 헌터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금색 캡슐을 복용해 마력을 가진 헌터들만 찾아 심장을 파먹었다. 하나의 심장을 먹을 때마다 이우경의 분신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었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본체는 더 이상 늘어난 분신들을 세세하게 통제하기 어려워지자 적을 죽여야 한다는 ‘살의’만을 심었고, 분신들은 무작정 눈에 보이는 헌터들을 죽이고 심장을 파먹는 기계가 되었다.
“그래. 모조리 죽어라. 이 힘으로…… 나는 김강현을 죽인다! 크크크큭!”
분신들이 헌터들을 죽일수록 이우경은 점점 힘에 취했다.
이를 지켜본 김강현은 서둘러 결정을 내렸다.
“이대론 모두가 죽을 거야…… 헬릭스!”
“무슨 일이냐?”
“지금 당장 벼락을 떨어뜨릴 수 없나?”
“아직 놈을 소멸시키기엔 위력이 역부족이거늘?”
“상관없어. 벼락은 놈이 아닌…… 나한테 떨어트리는 거니까.”
황당한 김강현의 요구에 헬릭스는 재밌어하는 미소를 띠며 답했다.
“설사 죽더라도…… 이 몸을 원망하지 말거라!”
우르릉! 우르르릉!
대답과 함께 헬릭스는 모으고 있던 마력을 구름에 집중했고, 평범했던 구름은 뇌운이 되어 빛줄기가 번쩍였다.
콰르르르릉! 콰아앙!
헬릭스가 위에서 아래로 팔을 내리는 동작에 맞춰 한 줄기 거대한 벼락이 김강현을 향해 떨어졌다. 순간 벼락에 의해 김강현의 모습이 완전 사라졌다.
그리고 파도처럼 흙먼지가 크게 일어나 주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하핫! 저, 저게 뭐야?”
“저놈들이 제대로 미쳤구나!”
“스스로 자기 편을 공격하다니……!”
“직접 놈을 죽여야 하거늘!”
벼락이 김강현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본 이우경들은 즐겁게 광소를 터뜨리거나 직접 죽이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시간이 지나자 흙먼지가 바람에 의해 점점 흩어졌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김강현이 그대로 서 있는 상태에서 벼락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황금빛 벼락은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어갔다.
“아슬아슬하게…… 성공인가?”
“마,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마침내 김강현은 황금빛 번개를 인피니티 마나로 물들여 그의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했다. 번개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되자 번개로 인한 고통과 마비 증상도 사라졌다.
“오호…… 벼락을 흡수한 걸 보니 꽤 무리하는구나.”
자신에게 벼락을 떨어뜨리라는 김강현의 말에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짐작하긴 했으나,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몸이 제 정상이라면 모를까, 김강현은 장기간 비천 길드와의 길드전으로 많이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테라 대륙에서부터 오랜 시간 지켜보았기에 강현의 작은 습관까지 알고 있던 헬릭스는 강현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의 끝을 내거라!”
헬릭스는 작은 손으로 주먹을 쥐며 김강현을 응원했다.
“모조리 죽어랏!”
파지직!
김강현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해 마검을 크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붉은 벼락이 수십 갈래로 찢어지며 분신들을 향해 쏟아졌다.
“이까짓 것…… 어?”
“끄아아아앗!”
“뭐, 뭐야!”
눈 깜짝할 사이, 어느새 붉은 번개가 분신들의 몸을 꿰뚫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천천히 날아드는 빛줄기는 오히려 속도가 너무 빨라 눈으로 좇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커어엇!”
“내, 내 힘이 사라져……!”
붉은 번개에 닿은 분신들은 마력이 일제히 사라지며 타들어가 세포가 완전히 소멸됐다.
그들은 무기력하게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한 줄기 비명만을 지를 뿐이었다.
“크으으…… 이러…… 말도 안…… 쿨럭!”
증식 스킬로 만들어낸 분신들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사라지자 본신의 이우경은 허탈함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본신도 붉은 번개를 맞았으나 분신들보다는 내구성이 높아 버틸 수 있었다.
하나 분신들은 단 일격에 검은 재만 남긴 채 모조리 사라졌다.
“후…… 본신까진 무리였나?”
‘이제 남아 있는 마나는 한 줌뿐.’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김강현은 이우경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헬릭스가 시간을 들여 번개의 위력을 높일 게획이었으나, 더 시간을 끌면 이우경에 의해 사상자가 끝도 없이 나올 것이었다.
헬릭스의 번개가 내리치기 직전 몸을 마나로 얇게 감싸 전신을 보호했지만, 예상외로 벼락의 위력이 강해 충격과 함께 내상을 입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김강현은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우경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김강현! 반드시 너만은 죽인다!”
방금 공격에 이우경은 본신의 육체도 붕괴되고 있었다.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깨달은 그는 죽을 각오로 남아 있는 마력을 한껏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전신의 바람의 칼날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김강현을 저승 가는 길의 길동무로 삼기 위해 몸을 날렸다.
* * *
‘이 느낌은 뭐지?’
상처투성이에 한 줌의 마나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기이하게도 김강현은 생소한 감각이 전신을 감싸며, 주변의 마나들도 선명하게 감지되어 눈에 보였다.
그런데 꼭 어디선가 경험한 적이 있는 것처럼,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마나의 축복!’
테라의 라셀은 드래곤 하트로 마나의 축복을 받아, 항상 주변 마나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그때는 너무나도 익숙했기에 당연시하게 여겼지만, 김강현으로써 마나의 축복을 경험하자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왜 이제야?’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의 김강현은 정신과 육체가 한계에 이르러 평소와 달리 공허의 상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전투 중이라 매우 날카롭게 신경이 서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몇 가지 조건이 겹쳐 마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응? 뭐가 달라진 것 같은데?”
헬릭스는 찰나의 순간 김강현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했다.
그사이 김강현은 마검을 가슴 위로 들어 올리며 이우경을 향해 검날을 겨누었다.
“크아아아앗!”
이우경은 살기 가득한 모습으로 크게 기합을 지르며 어느새 김강현의 눈앞에 도달해 팔을 휘둘렀고, 김강현은 이우경을 향해 힘없이 마검을 내리쳤다.
이를 본 이우경은 김강현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에 웃음을 지었다.
“주…… 우…… 어……!”
그러나 김강현이 휘두른 마검에 이우경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태풍처럼 강력한 마나 폭풍이 휘몰아쳤다.
이우경은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커진 두 눈으로 몸을 바라보며 자신이 죽었음을 알아차렸다. 마나 폭풍에 의해 갈라진 몸이 산산조각 나다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이우경은 분신들처럼 검은 재도 남기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이게 무슨……!”
“…….”
이 모습을 보던 헬릭스가 놀라 탄성을 뱉었지만, 그 누구보다 놀라고 얼떨떨한 사람은 김강현이었다.
자신은 단지 기이한 감각을 따라 마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이런 파괴력을 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흠…… 드디어 인피니티 포스를 완성한 건가?”
“인피니티 포스?”
“그렇다. 마나의 도움이 없이 직접 공간을 가르는 것이 인피니티 포스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지.”
헬릭스의 말에 김강현은 손에 든 마검을 들어 보았다.
솔직히 인피니티 포스의 완성은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다.
‘이 감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
하지만 오늘 싸움으로 무의식중에 인피티니 포스의 완성을 본 김강현은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이제 마무리를 하자꾸나!”
헬릭스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말하자, 김강현은 영문을 알지 못해 고개를 기웃거렸다.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이우경이 죽어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이다.
“저쪽이로구나!”
퍼엉!
갑자기 헬릭스가 북쪽을 향해 불꽃 덩어리를 날렸다. 폭발음과 함께 땅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김강현과 헬릭스는 구멍이 생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쯧…… 인간들이란…….”
“이럴 수가…….”
구멍 안쪽의 상황을 본 김강현은 차마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에 눈을 질끈 감았고, 헬릭스는 혀를 찼다.
그곳은 비천 길드의 몇몇 헌터들만 알고 있던 비밀 실험실이었다.
침대 위에는 손발이 쇠사슬로 묶인 채 해부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벽 한쪽에 있는 유리관에는 특수용액에 잠겨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전신이 모두 상처투성이에 수술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김강현은 더 자세한 상황을 알기 위해 구멍 안으로 들어간 후, 안쪽으로 들어갔다.
“으으으으…….”
“이제 누굴 데려가려고 하는 거냐?”
“크흐흐흐, 개새끼들아! 천벌을 받을 거다!”
땅굴 곳곳에 구멍을 뚫은 후 철창으로 입구를 막아 감옥으로 쓰고 있었다.
그 안에는 머더러 헌터들이 갇혀 있었는데,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변기 하나만 있었고 위생 상태는 더럽기 짝이 없어 환경 자체가 열악했다.
그들은 김강현이 자신을 해부하고 실험하러 데리러 온 비천 길드의 헌터인 줄 알고 갖은 욕과 함께 분노를 쏟아냈다.
“놈을 너무 쉽게 죽였어…… 만약 이런 상황이었다면 끝까지 괴롭히다 죽였을 것을……!”
“나도 아쉽긴 하지만…… 살려두었어도 골칫덩어리였을 거다.”
헬릭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강현은 헌터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길드전은 끝났습니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드릴 테니 지금 당장 헌터들을 보내주십시오. 단, 입이 무겁고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이 일은 자신의 손을 벗어난 일이라 판단한 김강현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생각이었다.
전화를 끊은 헌터폰의 화면에는 유지운의 이름이 띄워져 있었다.
* * *
“이번 한국행은 꽤 괜찮은 여행이었네요.”
흑무는 어느 산의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아쉽게도 그동안 기반을 만들어놓은 비천 길드가 한순간에 상쇄되어 날아가긴 했지만, 더 중요한 마인의 연구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동굴을 따라 계속 걸어가자 끝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곳엔 넓은 공동과 함께 첨단 의료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의사들과 과학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흑무를 발견하자 하던 일을 멈추고 바쁘게 달려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교…… 흡!”
“제가 말했을 텐데요? 그 말은 입에 담지 말라고요!”
“죄, 죄송합니다! 흑무 님!”
무의식중에 과학자는 입에 익은 말을 꺼냈다가 흑무의 살기에 바짝 몸을 웅크렸다.
“우선 이걸 받으세요.”
“이건…… 무엇입니까?”
과학자가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흑무가 건넨 물건을 받아 확인하니 여러 장의 종이였다.
“한국의 비천 길드에서 연구한 각성제의 분석표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하니 약을 사용할 것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이한결은 어디 있습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흑무는 안내를 받으며 동굴의 가장 안쪽 방으로 이동했다. 가는 동안 몇 번씩이나 그들의 신분을 확인할 만큼 보안 절차가 굉장히 철두철미했다.
그 방에는 이한결이 유리관 특수 액체에 전신이 잠긴 채, 생명을 유지하는 산소 호흡기를 비롯한 각종 의료기기를 부착하고 있었다. 3명의 과학자들이 이한결의 상태를 시간마다 체크해 분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조용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상태는 어떤가요?”
“지난 치료들을 통해 물리적인 부분은 모두 회복시켰습니다. 하지만 깨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정신적인 부분, 금제가 걸려 있습니다. 해결을 위해 주술과 흑마법까지 동원했지만 깰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재미있군요. 조직의 힘으로도 깰 수 없는 금제라…… 이번에도 버틸 수 있을 지 보지요. 준비하세요.”
“네!”
과학자들은 흑무에게 건네받은 각성제를 만들기 위해 성분 분석표를 확인하다 다급하게 소리쳤다.
“흐, 흑무 님!”
“무슨 일입니까?”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잘못하면 실험체가 죽을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미 여러분께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은 시간 낭비이니 살 수 있을지 죽을지…… 그 운을 본인에게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없었다.
흑무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성분 분석표에 적힌 대로 각성제를 즉석에서 만들기 시작했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8㎖의 검은 액체가 완성되었다.
그들은 바로 링거를 통해 각성제를 이한결에게 투여했다.
“끄으으윽…… 끄아아아앗!”
투여하기가 무섭게 이한결은 눈을 까뒤집더니 당장에라도 유리관을 깨고 나올 것처럼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리관은 강력한 마나에도 파괴되지 않을 만큼 단단하여 주먹질과 발질길에도 깨지지 않았다. 이한결은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운지 더욱 강하게 몸부림치며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흐음…… 생명을 태워도 고작 이 정도이군요.”
이한결에게 주입한 각성제는 강제로 생명력을 소모시켜 스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만드는 약이었다.
외부에서 금제를 풀 수 없다면 내부에서 풀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이우경은 김강현의 손에 죽었고, 그 아들도 김강현이 내린 금제에 의해 죽는군요.”
각성제의 효과는 5분으로,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삐! 삐! 삐이이익-
때마침 바이탈도 심정지를 알리며 이한결의 숨이 끊어졌음을 알렸다.
흑무는 한숨을 내쉬며 과학자들에게 손짓했고, 그들은 아무런 말없이 유리관 안에 든 특수액체를 제거했다.
삐- 삐- 삐- 삐-
뒤이어 산호 호흡기를 비롯한 의료기기를 제거하려고 버튼을 눌러 유리관을 내리는 순간, 갑자기 멈춰 있던 이한결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 갑자기 심장이 뛰고 바이탈도 정상치로 올라가!”
“폭주할 가능성도 있으니 다시 유리관을…… 허억!”
과학자들은 헌터가 아닌 일반인들이어서 이한결이 폭주할 경우 그대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급히 한 과학자가 버튼을 눌러 유리관을 올리려고 했지만, 유리관이 다시 올라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크르르르르…….”
점점 심장 박동수가 올라가고, 이한결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아 가래 낀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하지만 이한결은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호기심이 생긴 흑무가 가까이 다가갔다.
“주…… 죽…… 이…… 인…… 다…… 아…… 김…… 강…… 현……!”
그 목소리는 흑무에게만 들릴 정도로 굉장히 작았다.
“크르르르…… 죽인다……! 죽어랏!”
이한결은 말이 끝나자마자 흰자를 내보이며 이성을 잃었다. 그리고 검은색 마나를 내뿜으며 피아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려 했다.
“깨어난 건 축하할 만한 일이지만 난동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말과 함께 흑무는 몸에 두르고 있던 검은 연기를 움직여 이한결의 몸을 속박하며 입과 코도 틀어막었다.
“읍! 으읍! 읍읍!”
호흡을 할 수 없게 된 이한결이 본능적으로 얼굴을 속박하는 검은 연기를 떼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검은 연기는 더욱 이한결을 옭아맸다.
결국 이한결이 산소 부족으로 기절하자, 그제서야 그의 몸을 옭아매던 검은 연기가 사라졌다.
“이한결을 치료실, 아니…… 무간지옥으로 보내세요!”
“아, 알겠습니다!”
무간지옥이라는 말에 과학자들은 움찔거리며 서둘러 기절한 이한결을 카트에 실어 이동시켰다.
그곳은 실험에 실패하거나 통제가 되지 않는 실험체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커다란 공동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다른 실험체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후후후. 김강현을 향한 복수심을 유지한다면 그곳에서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자는 새끼의 생존능력을 키우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흑무는 무간지옥에서 이한결이 생존하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를 원했다.
그 기대를 충족한다면 아낌없는 지원을 통해 강해지게 도와줄 것이지만, 충족하지 못한다면 무간지옥에서 그대로 죽을 것이니 모든 것은 이한결이 하기 나름이었다.
흑무는 훗날을 기대하며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