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감지되는 위기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늦었느니라. 오래 기다렸나?”
“아, 아니.”
“으음…… 몸이 많이 지저분해졌구나.”
헬릭스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헬릭스는 돌아다니며 고생을 했는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약간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바로 지각에 대한 잔소리를 내뱉으려던 김강현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후우…… 밥은 먹고 다닌 거냐?”
“편의점이라는 곳에서 파는 삼각 김밥? 아현에게 부탁해 많이 얻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군.”
“그거 가지고 양이 찰 리 없지. 켈베로스를 먹는 게 어떠냐?”
“켈베로스?”
순간 헬릭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마족인 헬릭스에게 인간계의 음식은 취미로 먹는 것이고, 그의 주식은 마족과 마물의 마력이었다.
마물에 속하는 켈베로스는 마력을 많이 품고 있는 데다가 불꽃 속성을 가지고 있어 불꽃을 다루는 마족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
김강현은 자신의 키만 한 아공간을 열어 켈베로스의 사체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아공간을 열어 켈베로스의 사체를 꺼내는 즉시 흡수해라.”
“기대되는구나. 음…….”
헬릭스는 자신의 그림자를 키워 단숨에 엉망진창으로 조각난 켈베로스의 사체를 흡수함과 동시에 마력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켈베로스를 흡수하던 헬릭스가 갑자기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뜨더니, 김강현을 향해 화를 냈다.
“강현,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응?”
“가장 중요한 켈베로스의 심장이 빠지지 않았느냐?!”
평균적으로 켈베로스의 마력은 70%가 심장에 집중되어 있어, 심장을 흡수하는 것이 최고로 꼽혔다.
“지금 흡수한 켈베로스의 사체에서 흡수한 마력은 고작 10%에 불과해. 지금 이 몸을…… 사체 처리로 쓴 것이더냐?”
“아……!”
게다가 켈베로스가 화염 브레스를 쏠 때 몸 안에 모든 마력이 심장으로 집중되어, 몸에는 최소한의 마력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헬릭스의 말대로 조각난 켈베로스의 사체에 남은 마력은 10%에 불과했다.
“켈베로스의 심장은……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 챙겨주었어.”
“뭐라?!”
“그보다 얻어먹는 녀석이 화를 내? 오히려 주면 감사히 먹었다고 하는 거 아냐?”
“크흠……!”
‘이 자식이 까불고 있어!’
처음엔 챙겨줄 생각으로 켈베로스의 사체를 건넸는데, 헬릭스가 예상치 못하게 화를 내자 김강현도 버럭 반바갰다.
그래도 염치는 있는지 헬릭스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헛기침만 했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김강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심장을 빼놓고 준 건 미안해. 하지만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건 알아주면 좋겠어.”
“흠흠, 그래. 오랜만에 마력을 흡수하다 보니 이 몸도 실수를 저질렀구나.”
서로의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한 그들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열흘가량을 돌아다녔는데…… 종종 테라의 그놈들이 생각나더구나.”
“그놈들? 아! 처음에는 몰랐는데, 직접 정보를 모으러 돌아다녀 보니 그동안 녀석들의 고생이 많았겠어.”
“하긴…… 명령하면 다음 날 아침에 바로 정보를 냉큼 가져올 만큼 싹싹한 녀석들이었지.”
김강현과 헬릭스는 테라의 정보 길드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보 길드는 말 그대로 정보 상인들로 이루어진 곳으로 정보를 거래하며 수익을 얻었다. 테라 곳곳에 그들이 없는 곳이 없었고, 심지어 제국의 심처에 들어가 정보를 얻어낼 정도로 독종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무력이라는 약점이 존재했다. 평상시에는 정보를 이용해 상대방의 무력을 행사하기 전 무력화시키지만, 종종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 상대들이 있어 곤란함을 겪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라셀은 정보 길드에게 자신과 헬릭스의 무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원할 때 정보를 받아내는 거래를 진행했다.
재밌는 사실은 이 소석이 알려지자 정보 길드가 라셀과 헬릭스의 산하로 들어갔다고 와전되어 아무도 쉽사리 건드리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겁이 없는 귀족들이 정보 길드를 공격하는 일도 발생했지만, 헬릭스의 무력 진압으로 모조리 몰살당했고 이때부터는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했다.
덕분에 정보 길드는 세력을 넓혀 테라의 모든 정보를 아우르게 되었고, 라셀과 헬릭스는 편하게 원하는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에서는 아직 정보와 관련한 인맥이 없으니 테라와 비교하면 매우 아쉬울 따름이었다.
“우선 이 몸께서 마력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었지.”
“알아낸 건 있어?”
“생각보다…… 심각하더구나.”
헬릭스의 몸에서 뻗어 나간 검은색 마력이 색깔이 다른 두 개의 구체로 유형화되었는데, 마치 지구본과 같은 모양이었다.
“왼쪽의 검은 구체가 지구, 오른쪽의 빨간 구체가 테라라고 설명하지. 지금 테라의 상황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구에서는 게이트를 통해 테라와 일시적으로 연결되고 있느니라.”
“…….”
“그리고 사람들은 연결된 공간을 던전이라고 부르고 있지.”
말과 동시에 점점 검은 구체에서 빨간 점들이 늘어났다. 이와 동시에 빨간 구체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차원의 틈에 있던 마력이 지구로 흘러들어 오고 있더구나.”
“문제는 점점 늘어나는 마력인가?”
“그렇다. 마력이 늘어나면 지구의 마나와 섞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더 강한 던전과 몬스터들이 나타날 것이다. 추론에 불과하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할 터.”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은 던전이라는 형태로 테라가 넘어오고, 거기서 생성된 게이트를 통해 몬스터들이 넘어오더군. 그런데 이 형태가 점점 커진다면?”
“나중에는…… 테라가 차원을 넘어올 수 있다는?”
“지구가 테라에 잡아먹혀 버리거나…… 지구에 테라의 세계가 구현되겠지.”
“……!”
검은 구체는 빨간 점이 점점 늘어나 결국 갈색 구체가 되었고, 오른편에 있던 빨간 구체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본 김강현이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자 오돌오돌 닭살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이건 우리끼리 나눌 이야기가 아닌 것 같군. 때가 될 때까지는 묻어두는 것이 좋겠지?”
“물론. 아직 가정일 뿐이니 굳이 말을 해서 소란 피울 생각 따위는 없느니라. 그리고 우연히 얼마 전, 세계 곳곳에서 몬스터들이 나타난 이유에 대해 알게 되었느니라.”
“그러고 보니 아직 그 사건은 조사 중이었는데…… 어떻게?”
“이 몸을 뭘로 보고 있느냐?! 이 몸은 마계의 마족 발록 님이시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게이트가 열리며 동시에 몬스터들이 쏟아진 사건은 아직까지 뉴스로 방영되고 있었고, 세계 각국의 헌터협회도 원인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김강현이 놀라자 헬릭스는 으스대며 입을 열었다.
“한편으로는 운이 좋았느니라. 게이트들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력의 흐름이 대기 중에 남아 있더구나.”
“그럼 그 흔적들을 쫓았겠군.”
“음…… 네 말대로 흔적들은 모두 한곳으로 집중되더구나.”
다시 생성된 빨간 구체의 한곳을 가리킨 헬릭스가 말을 이어나갔다.
“영국이라는 나라다.”
“영국이라면……?”
“그곳에서 흑마법 계열의 소환이 이루어졌더구나. 어떤 녀석이 소환되었는진 모르지만…… 소환될 때의 기다림을 참지 못해 차원을 찢어버리는 바람에 마력이 대규모로 흘러 퍼진 것이었어.”
“소환 마법진을 통해 누가 소환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철저하게 소환 마법진을 지웠더군. 그나마 이 몸이니까 흔적을 발견한 거지…… 인간들이라면 찾지도 못했을 것이야!”
“으으…… 아직 지구의 던전들이 어떻게 생겨나는 건지 원인을 찾지도 못했는데…… 타 차원의 존재가 나타나다니!”
난데없는 또 다른 적의 등장에 김강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원을 찢어발길 정도의 무력을 가졌다면 최소 지능을 가진 마수이거나 마족임에 틀림없어 지구에 피해를 주기 전에 없애야 했다.
“그렇게 끙끙거리며 고민할 필요 없다. 이 몸은 정보 조사를 위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몇몇 인간들도 이 사실을 알고 흑마법사를 뒤쫓고 있더구나.”
“정말?”
“그 인간들 중에는 검천호. 그 인간도 있더구나.”
“그래서 검 어르신이 유럽으로 파견을……!”
이제야 머릿속을 뿌옇게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힌 느낌이었다.
“아마 그쪽에서는 흑마법사의 존재를 눈치채고 소환을 하기 전에 없애려고 한 모양이더구나. 비록 소환은 막을 수 없었지만 웬만한 상위 마족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들이 모여 있으니 문제없을 게야.”
지구에서 흑마법사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지만, 테라에서처럼 완전히 배척당하는 건 아니었다.
지구의 흑마법사는 불법적으로 시신을 언데드로 만들지 않고 각 나라의 법만 지키면 무난하게 살 수 있었다.
예외가 있다면 지금처럼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릴 존재를 소환하는 경우였다.
“그렇군. 헬릭스.”
“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지구에 던전과 게이트가 나타난 것이 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게 무슨 소리냐?”
최근 던전에서 테라의 흔적을 찾던 김강현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맴돌았다.
시기적으로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해 영혼이 테라로 넘어간 시점부터 지구에 게이트를 통해 던전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주변에서만 게이트를 통해 몬스터들이 넘어왔다. 그래서 자신으로 인해 지구가 위험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김강현의 속마음을 들은 헬릭스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과율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
“테라의 주신처럼 각 세계에는 인과율을 맞추기 위한 신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의지라는 힘을 가지고 있느니라.”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세계의 비밀에 대해 헬릭스는 조심스럽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철저하게 움직이고 있느니라. 이를 맞추기 위해 테라에는 드래곤들이 존재했고, 인간들은 수를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이 벌였지. 지구도 마찬가지다.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게이트와 던전이 나타나자 인과율을 맞추기 위해 헌터라는 존재가 나타났느니라.”
“그럼?”
“알다시피 네 존재는 지구의 인과율에서 벗어났으니, 네 존재를 없애기 위해 던전과 게이트에서 많은 적들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라. 더불어 이 몸 또한 마찬가지로 지구의 주신의 입장에서는 많이 껄끄러울 테지.”
“그렇다면 상황이 상황인 만큼 주신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
“참, 지구에도 테라와 마찬가지로 암시장이 존재하더군. 그곳에서 이런 것을 발견했는데…… 어떠냐?”
“이, 이건?”
김강현은 헬릭스가 건넨 물건을 보자 눈이 크게 떠지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 * *
이우경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치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 작은 물건에 집중되어 있었다.
“길드장님.”
“그래. 들어와라.”
문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길드원이 사무실로 들어오자 이우경은 황급히 물었다.
“검사 결과는?”
“완벽합니다.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선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만 인체에 무해합니다.”
“효과는 어떻게 나왔나?”
“1.5배의 영구적인 마나 상승. 집중력과 체력도 1.3배 상승되었습니다.”
“알았다. 그만 나가봐라.”
그 말을 끝으로 길드원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사무실을 나갔다. 여전히 이우경의 손가락은 계속 책상 위를 치고 있었다.
“정말 신뢰할 수 있을까?”
이우경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금색 캡슐을 보며 중얼거렸다. 금색 캡슐의 겉면은 말랑말랑한 막으로, 액상의 내용물이 밀봉되어 있었다.
방금 길드원이 이 금색 캡슐을 분석해 보고를 올렸지만, 출처가 꺼림칙했다. 철저하게 성분을 분석해도 쉽사리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들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 성분 조작도 가능할 테지.’
현대의 의술로 식물인간을 깨운 뒤 폐인이 된 이한결의 몸을 원래대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는 만큼, 약의 성분 따위는 조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이우경의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허공에서 나타난 그의 주변은 검은 연기로 감싸여 있어 생김새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길드장님. 결정하셨습니까?”
“……그래.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지.”
이우경은 대답과 함께 책상 위에 있던 금색 캡슐을 입안에 넣어 단숨에 삼켰다.
“크윽……!”
곧 배 속이 뜨거워지더니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신음 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흐아…… 하아…… 하아…….”
5분 동안 지속된 열기가 천천히 사그라지자 이우경은 거친 호흡을 내쉬며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훔쳤다.
고통으로 입술을 깨물어 터진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며 흑무가 말했다.
“이우경 길드장님. ‘어둠’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후우……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이미 나 몰래 어둠과 접촉한 길드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내가 거절했다면…… 나를 죽이고 그들을 앞세웠겠지.”
“하하하! 설마요.”
“게다가 내 아들이 너희들에겐 인질이나 다름없지 않느냐?”
만약 길드원들을 내세우는 것이 실패한다면 흑무는 이우경의 말대로 이한결을 내세워 협박할 계획이었다.
“아직 비천 길드는 어둠이 생각하는 역량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길드원들이 강해질 수 있도록 내일까지 약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그보다 약속대로 그 연기를 없애주실까?”
“상관없지만…… 이제 어둠에서 발을 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
지금까지 이우경은 흑무가 속한 세력인 어둠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절대 그 이상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금색 캡슐을 복용하여 어둠과 완벽히 손을 잡은 이상 어떤 단체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흑무는 웃음과 함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연기를 없앴다.
“다, 당신은……?!”
“내 정체를 아는 것 같으니 말을 편하게 하지. 아마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 거다.”
“마, 마…… 말도 안 돼!”
“조용히. 그러다가 밖의 사람들이 들어올 것 같군.”
“허…….”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인물의 등장에 이우경은 전신의 힘이 빠지며 허탈함을 느꼈다.
그는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나, 소수의 헌터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유명했다. 게다가 이미 양지에서 상상 못 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세력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설마 나를…… 비천 길드를 이용해 한국을 장악할 생각이었나?”
“그럴 리가. 고작 나라 하나를 먹기 위해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그럼?”
“아직 우매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 세계에 어둠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 기대해도 좋아. 어둠에 속한 이상 비천 길드가 성장할 수 있도록 확실히 지원할 테니.”
말을 마친 흑무는 올 때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이우경은 다리가 풀려 버렸다.
“하하하, 이제 끝까지 함께 갈 수밖에 없겠어.”
흑무의 정체를 안 이상, 또 그가 자신을 알고 있는 이상 이우경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죽음뿐이리라.
“하지만 얻어낼 수 있는 건 모조리 얻어내야겠지.”
그에 대한 공포는 어둠으로부터 얻어낼 이득을 떠올리자 금세 사라졌다.
삐-
“응? 무슨 일이지? ……그게 사실인가?”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전화을 받은 이우경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놈을 죽일 수 있는 명분이 생기다니……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이우경은 전화를 끊은 뒤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팀장들을 소집했다.
* * *
“정말 그놈이 날 만나고 싶다고 한 게…… 맞느냐?”
“네. 할아버님.”
“도대체 무슨 애길 하려고?”
‘비천 길드와의 싸움을 도와달라는 것인가?’
연철무는 연세연과 이야기를 나누며 김강현이 자신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떠올렸는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비천 길드와의 소문이었다.
적대적 관계인 비천 길드의 정보를 꾸준히 모으고 있던 연화 길드는 자연스럽게 김강현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비천 길드와 김강현의 싸움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한데 그놈 성격상 절대 남의 손을 빌리지는 않을 텐데?’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가 본 김강현은 굉장히 자존심이 높은 편으로, 결코 자신의 싸움에 남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이 상황에서 자신을 만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실례합니다.”
“응? 자넨?”
“앗! 연철무 길드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으음……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인가?”
곧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연철무와 연세연의 시선이 문에 집중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연철무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여기서 강현을 만나기로 했는데……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듣지 못했네. 한데 강현이가 자네를 이곳에 초대했단 말이지?”
“네. 마침 약속한 시간이 되어가는군요.”
‘헌터협회의 유지운을 여기로 불렀다고?’
이제 상황이 어떻게 되는 건지, 김강현의 어떤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건지 연철무는 짐작할 수 없었다.
‘모두 상품의 무기들이야. 대단해’
그리고 유지운은 신기한 표정으로 가게 안의 물건들을 살펴보는 데 정신이 없었다.
헌터들 사이에서 연철무가 무기를 비롯한 다양한 물건들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지만, 정작 중요한 가게의 위치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었다.
설사 안다고 해도 연철무가 쉽사리 물건을 팔지 않아 물건을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구경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유지운은 이 기회가 반가웠다.
“안녕하십니까?”
그때, 이 자리를 만든 김강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연철무, 연세연, 유지운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 어서 와라. 세연아.”
“네, 할아버님.”
“차를 좀 내오거라.”
“알겠습니다.”
김강현이 도착하자 유지운은 구경을 멈추고 가게 안에 마련된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고, 김강현도 자리에 착석했다.
미리 준비를 해놓았는지 연세연이 금방 세 잔의 녹차와 과자를 가지고 왔다.
“……전 안쪽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세요.”
“그래. 고맙다.”
‘대체 무슨 일이지?’
연세연은 조용히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으려고 하다가 세 사람이 흘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세 사람은 녹차만 마실 뿐이었다.
“그래. 우리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이는 연철무였다.
“우선 헌터들 사이에 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선 두 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비천 길드와의 싸움을 말하는 게로구나.”
“정말 놈들과 싸울 생각이냐?”
“네. 연 어르신. 그리고 제가 비천 길드에 대해 조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김강현은 비천 길드와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들이 자행한 일들을 이야기하자 연철무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서렸다.
유지운은 비천 길드의 악행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할 말을 잃었다.
‘놈의 더러운 짓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연철무는 이우경이 헌터가 되기 전에 조폭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진 최소한 인간으로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어 묵인했지만, 헌터 살인을 비롯해 마약까지 건드리고 있다면 이미 그들은 선을 넘은 것이었다.
“확실한 정보더냐?”
“네. 그렇습니다.”
정보의 근원지는 헬릭스로, 암흑가를 돌아다니며 모은 정보였다.
당연히 사람들은 비천 길드와의 거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헬릭스는 마법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을 읽어냈다. 더불어 자신과 접촉한 기억을 지워 흔적도 완전히 남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증인, 혹은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움직이려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어떻게?”
“저에 대한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으로 명분을 만들고 판을 키울 생각입니다.”
“명분? 판을 키운다고?”
아리송한 김강현의 말에 연철무와 유지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띠리리리링! 띠리링!
“아, 죄송합니다!”
“크흠!”
“괜찮습니다. 아마 저에 대한 내용일 것입니다.”
갑자기 유지운의 헌터폰이 울리는 바람에 흐름이 깨졌다. 그러나 이어진 김강현의 말에 유지운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여보세요. 잠시 밖에…… 뭐?!”
유지운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에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김강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 그래. 알았어. 곧 들어가마.”
그리고 다급히 전화를 끊고 다시 자리에 앉자마자 김강현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설마 이를 예상하고?”
“네. 맞습니다. 생각보다 비천 길드가 빨리 움직였군요.”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설명을 해보아라.”
“하…….”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연철무는 유지운에게 답을 재촉했지만, 유지운은 충격적인 소식에 할 말을 잃은 뒤였다.
“이곳에 오기 전 헌터협회에 들러 길드 가입 신청을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비천 길드가 제 길드에 길드전을 신청했다는 전화였겠죠.”
“길드전?!”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연철무도 어이가 없었다. 김강현은 이 기세를 몰아 바로 본론을 꺼냈다.
“테라 길드는 연화 길드, 그리고 헌터협회와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