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아레스 그룹
“조용한데? 혹시 스컬 길드 배후에 비천 길드가 있는 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거냐?”
“아, 아닙니다.”
“뭔가 숨기는 게 있으면 빨리 말해봐라. 숨기지 말고!”
유지운은 자신의 질문에 김강현의 표정이 굳어진 채 풀어질 줄 모르자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에 대답을 재촉했다.
‘나중에 밝혀졌을 때 이야기하기보단…… 미리 대비를 해놓는 것이.’
“실은…….”
김강현은 A급 헌터 시험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심스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헌터협회의 직원들이 비천 길드에 매수당해 이한결과 비천 추살조가 신분을 바꿔 A급 헌터 시험에 응시했고, 그가 이들을 어떻게 쓰러트렸는지까지 조금의 거짓도 섞지 않고 말했다.
“뭐……? 뭐어?!”
유지운은 김강현의 말을 듣는 동안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더니, 이한결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끄응…….”
‘이 녀석이 사건사고를 불러일으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재앙이야!’
유지운은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지금까지는 유지운만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능력 밖이었다.
‘헌터협회 일부 사람들이 비천 길드에 매수당했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렇지만…….’
최근 권력을 쥔 유지운은 헌터협회를 깨끗하게 되돌리기 위해 각 길드에 매수당한 헌터협회 직원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2대 길드 중 하나인 비천 길드를 건드리는 건 쉽지 않아, 유지운도 조용히 눈치를 보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무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비천 길드장 이우경은 A급 헌터이지만 실력이 S급 헌터에 가깝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이 있느냐?”
“정보를 모을 생각입니다. 적의 규모와 실력이 어떤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비천 길드와 싸울 생각이구나.”
“네.”
유지운은 확고한 대답에 그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음을 깨달았다.
‘지금 비천 길드가 조용한 건…… 폭풍 전의 고요로군.’
이우경은 한 명의 적을 상대할 때에도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
그 또한 김강현처럼 상대해야 할 적에 대해 파악하고 철저하게 사냥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중에 제가 비천 길드와 싸울 때 헌터협회에서 다른 길드들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중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대한 힘써보마. 그런데 이 이야기를 누가 또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검 어르신께는 미리 언질을 드리려고 했는데…… 집에도 안 계시고, 연락이 닿질 않더군요.”
검천호는 만약 비천 길드와 김강현이 싸우게 된다면 오히려 즐거워하며 이를 지켜볼 위인이었다. 그는 김강현을 강하게 키울 생각으로, 비천 길드 따위에 진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었기에 김강현은 검천호에게서 비천 길드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검천호 님은…… 당분간 연락되지 않는 지역에 있어 어려울 거다.”
“어디 가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
“물론,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야 한다.”
유지운은 살짝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지금 유럽 헌터협회의 요청으로 비밀리에 파견되어 그쪽에 가 계시다.”
“유럽 헌터협회?”
“그래. 이유는 극비여서 설명해 줄 수 없구나.”
‘S급 헌터가 극비로 움직인다?’
S급 헌터는 나라의 안전을 위해 다른 나라에 파견되는 일이 쉽사리 없었다. 그런데 비공식적으로, 그것도 비밀리에 파견되었다면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짐작되었다.
김강현은 아쉽지만 궁금증을 접었다. 검천호의 실력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든 스스로 몸을 뺄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가 무사히 귀국하길 바라며 유지운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 * *
비선 병원의 특실은 화려한 인테리어와 한강 뷰로, VIP들이 건강검진이라는 명목으로 잠시 들르곤 했다.
그런데 현재 그 특실의 침대에는 한 사람이 간신히 호흡기에 의지한 채 생명의 끈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째서…… 이놈이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이냐?!”
“…….”
“…….”
이우경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이한결을 바라보며 비천 길드 간부들을 향해 소리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순간…….’
‘죽음이다!’
평소의 이우경이 아니었다.
그들의 생각대로 이우경은 극도의 혼란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크흐흐흐…… 헌터로서의 삶이 끝나고 근맥 신경들이 갈갈이 찢어졌다지? 식물인간으로 설사 기적적으로 깨어난다 해도 평생 누워 있어야 한다고?”
매일 사고만 치는 못난 자식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정신을 차릴 것이라 생각해 계속 기회를 주고 돌봐주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의학적으로는 소생할 수 없는 식물인간이었다.
“한결이와 같이 간 비천 추살조는?”
“네. 마나 폭주로 인해 헌터로서는 재기 불가능하며, 후유증으로 백치가 되어버렸습니다.”
“백치? 백치라고?”
‘김강현…… 그놈에게 내 아들과 A급 헌터 4명이 당했다고?’
이한결과 비천 추살조가 A급 헌터 시험에 신분을 위장해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이우경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강현의 무력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시험 장소도 섬으로 바꾸고 비천 추살조까지 붙여줬는데, 돌아온 것은 싸늘하기 짝이 없는 시신이었다.
‘김강현! 김강현! 김강현!’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헌터협회로부터 위장 신분으로 잠입한 이한결과 비천 추살조가 몬스터들로부터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우경은 사실 확인을 위해 심복들을 시험장으로 급히 보냈다.
그곳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이한결과 비천 추살조가 몬스터들과 싸우다가 자멸한 흔적들이었다.
‘이건 놈이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자신을 건드리면 이렇게 만들어주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헌터 시험이라는 제약이 있으니 만약을 위해 목숨만 붙여놓았을 뿐, 제약이 없었다면 모조리 죽었을 것이었다.
“김강현…….”
“네?”
“김강현이라는 헌터에 대해 모조리 조사해라. 무엇을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놈에 대해서 샅샅이 파헤쳐라!”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네!”
이우경의 발악 서린 목소리에 비천 길드 간부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병실을 바삐 나갔다.
“후우…… 후우…… 후우…….”
‘지금 할 수 있는 건…….’
가슴속에서는 화가 치솟았지만 머리는 오히려 냉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흑영!”
“…….”
“근처에 숨어 있다는 거 알고 있다. 어서 나와라!”
“후훗. 부르셨습니까?”
이우경의 분노가 담긴 외침에 천장에 숨어 있던 자가 웃음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은 복면에 검은 야행복 차림으로, 체형과 목소리로 남성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너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대신 조건이 있다.”
“……무엇입니까?”
“한결이를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동시에 힘을 다오.”
“음…….”
흑영은 이우경의 조건에 잠시 고민에 잠겼다.
흑영은 이우경과 상하관계가 아닌 협력관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세력에 속해 있었다. 얼마 전 비천 길드에 혹할 만한 제안을 했지만 넘어오지 않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이한결의 부상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알겠습니다. 하나 한 가지 아셔야 할 것 있습니다.”
“뭐지?”
“그 과정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힘들 것입니다. 비천 길드장님이 지금까지 거치신 과정은 약과일 정도로 말입니다.”
그의 말에 이우경은 옛날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도 그들이 건넨 힘을 얻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고 참아냈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건 한결이의 몫이다. 만약 그렇게 죽는다면 제 업이겠지.”
“좋습니다. 그럼 1시간 후 아드님을 데리고 가겠으니 마지막 인사를 나누시지요.”
말을 마친 흑영은 이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천장 속으로 몸을 감추었고, 이우경은 이한결을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놈은 이 아비가 죽여줄 테니…… 반드시 살아남도록 해라.”
이우경은 얼굴도 모르는 김강현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 * *
“으으…… 추워.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었나?”
갑자기 전신을 덮치는 오한과 소름에 김강현은 몸을 부르르 떨며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리모컨으로 에어컨을 끄고, 다시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예상했지만 반응이 너무 좋은데?”
김강현은 연화 그룹에 판매한 코팅 액체 라이선스 정산 내역이 띄워진 화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연화 그룹에서는 코팅 액체 덕에 무구를 생산하는 라인을 늘렸을 정도로 엄청나게 판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일단 초반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코팅 액체만 따로 판매하는 것은 보류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코팅된 무구는 내구력이 타 무구들에 비해 높을 뿐더러 강화 효과까지 보여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연화 그룹이 헌터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일이 머지않아 보였다.
연철무에게 진 빚도 절반 이상 갚은 뒤였다.
“이제 슬슬 다른 프로젝트도 진행해야겠어.”
어느새 모니터 화면에는 앞으로 US 그룹 전략기획실이 진행했던 사업과 새로운 사업에 대한 기획서들이 띄워져 있었다. 자주 회사에 오지 못하니 한 번 방문하면 가능한 많은 일들을 처리했다.
똑똑똑.
“실장님, 찾으셨습니까?”
“네. 들어오십시오.”
때마침 강려원이 실장실 문에 노크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코팅 액체에 대한 결산 내역 보고서를 확인했습니다. 이제 자금이 마련되었으니 유용한 곳에 쓸 계획입니다.”
“혹시 미리 구상한 사업이 있으십니까?”
현재 코팅 무구는 헌터들 사이에서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아이템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시장에 풀리자마자 다른 기업들이 이를 카피하기 위해 코팅 무구들을 분석했으나, 아무도 카피하지 못해 연화 그룹 독점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강려원은 이번에는 김강현이 어떤 아이디어를 제안할지 궁금했다.
“먼저 개발 팀을 만들 생각입니다.”
“개발 팀을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강려원은 김강현의 말을 반복해 물었다.
현재 회사 입장에서 생각하면 개발 팀은 언제 실적을 낼지 모른 채 끊임없이 개발비와 인건비로 돈을 잡아먹는 하마인지라, 아직 시기상조라 판단되었다.
이러한 기색을 눈치챈 김강현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강 부실장님, 마법공학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 * *
“마법공학이요?”
“마법공학은 마법, 연금술 등을 과학 지식과 결합한 기술로, 단순히 헌터 무구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전자 제품을 비롯한 우리들의 실생활에 적용 가능합니다.”
“……!”
순간 강려원은 직감적으로 돈 냄새를 맡았고, 김강현은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헌터들의 실력이 늘어날수록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마나석이 늘어날 것이고, 추후에는 인공 마나석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에 매장되어 있는 석탄과 석유의 자원량은 한계가 존재했다. 이에 전기를 싸고 많이 생산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운용하는 나라들이 점점 늘어났다.
김강현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건 마나석뿐이라고 판단했다.
‘천천히 내가 알고 있는 연금술 지식들을 공개하고, 차후 인공 마나석을 공개한다면!’
이미 지구의 발전 속도에 맞춰 머릿속으로 마법 공학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테라의 지식을 그대로 가져다 쓰기에는 환경이 달랐지만, 김강현은 지구의 과학 기술을 이용한다면 더욱 효율적이고 뛰어난 연금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현재 시장은 헌터들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법 공학의 타깃은 헌터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포함입니다. 마법 공학이 세상에 공개되면 사람들의 삶이 바뀔 것입니다.”
말과 함께 김강현은 미리 준비한 기초 연금술과 시약 제조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문서를 건넸다.
내용을 확인한 강려원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법공학을 연구할 개발 팀을 꾸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봉은 아끼지 말고 사람들을 스카우트하도록 하고, 제조에 특화된 생산직 헌터들의 거취도 파악 부탁드립니다.”
“네!”
던전에 들어가 싸우는 전투 헌터들과 달리 생산직 헌터들은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대우가 낮았고, 수익이 들쑥날쑥해 생활 형편도 좋지 않았다. 하나 마법공학이 발달하고 개발이 진행될수록 생산직 헌터들의 역할은 점점 커질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연 어르신이 특이 케이스지.’
물론 예외로 연화 길드의 연철무를 들 수 있었다. 그는 본래 블랙스미스로 각성했지만, 타고난 전투 센스로 배틀 블랙스미스로 2차 각성했다. 하지만 2차 각성한 케이스는 굉장히 드문 경우라,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되었다.
강려원이 대답과 함께 실장실을 나가자 김강현은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으그그그그그!”
그동안 밀린 업무를 모두 처리한 김강현은 기지개를 켰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 소리가 튀어나왔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시간을 보니 시계 바늘이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은 점심을 먹으러 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김강현이 직원들에게 따로 부르기 전까지 자신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신경 쓰지 말라고 말을 해놓았기에, 아무도 부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간 것이었다.
김강현은 작성 완료된 기획서들과 보고서들을 회사 서버에 저장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진 전화기에서 알람이 울렸다.
“네. 전략기획실장 김강현입니다.”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이명원 비서실장입니다. 회장님께서 실장님을 찾고 있으신데, 지금 회장실로 올 수 있으십니까?
“바로 가겠습니다. 혹시 회장님이 무슨 일로 저를 찾는 건지 알고 계십니까?”
-대답을 드리기 전에…… 질문의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명원의 목소리에서 호기심이 느껴졌다.
“회장님과 원활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미리 회장님의 의도와 생각을 짚고 갈 수 있다면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 생각이라면 당연히 알려 드려야지요. 지금 회장님은 외국에서 오신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신데, 그분을 실장님께 소개시켜 줄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비서실장님.”
이렇게 짧은 통화를 종료하고, 김강현은 회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이 깊고 영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명원은 김강현과의 통화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회장님 말씀대로 승산 없는 싸움이 아닐 수 있겠어.”
그는 김고엽으로부터 US 그룹의 후계자로 김강현과 김우진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명원은 그동안 그룹에서 세력을 이룬 데다 능수능란한 김우진이 압도적인 우세라고 생각해 우려를 표했지만, 지금까지 김강현이 이룬 것들을 보니 점점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짧은 통화를 보니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 즉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명원은 다시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회장님. 찾으셨습니까?”
“그래. 어서 오거라.”
김강현은 회장실에 들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김고엽과 금발의 외국 여성을 발견했다. 김고엽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강현을 맞이했다.
‘헌터?’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지만 그녀에게서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고엽은 그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불렀다. 서로 인사 나누었으면 좋겠구나.”
“US 그룹의 전략기획실장 김강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녀, 루시아는 김강현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아레스 그룹의 이사 루시아입니다. 그런데 영어를 능숙하게 쓰시는군요?”
“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통역을 맡아주기로 하신 분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군요.”
‘미리 언어 습득 마법을 펼치길 다행이군. 으윽.’
이명원과의 통화 후 혹시나 싶은 생각에 마법을 통해 세계 각국의 언어를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용량의 지식을 집어넣느라고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다행히 원활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 교통사고로 몇 년간 공부를 하지 못했을 텐데…….’
김고엽은 김강현이 4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입원하고 있었고, 회화는 꾸준히 하지 않으면 점점 실력이 줄어든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지금 상황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역시 틀림없네.’
김강현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루시아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자세히 읽었다.
헌터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어, 자신도 모르게 마나가 흘러나와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기세를 형성했다. 물론 김강현은 인피니티 호흡법으로 마나를 갈무리해 그보다 강자가 아니면 그가 헌터임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김강현은 루시아의 건너편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저와 비슷한 나이 같은데…… 아레스 그룹의 이사를 맡고 계신다니 대단하네요.”
“아니에요. 제가 아레스 가문의 사람이라 이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을 뿐, 회사 경영은 전문가에게 일임하고 있어 얼굴 마담일 뿐입니다.”
루시아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대답했지만, 아레스 그룹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사리 인정하지 못할 말이었다.
아레스 그룹은 유럽에 위치한 무기 제조업체로 세계 각국에 다양한 무기들을 공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레스 그룹의 회장은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로 유명해, 자식이라 하더라도 결코 낙하산으로 배치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한국에는 어떤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요 며칠 뉴스에선 아레스 그룹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요.”
“보안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한지라 언론에서도 알지 못했을 거예요. 실은 US 그룹의 반도체 기술에 굉장히 많은 관심이 있어 협력을 제안하러 왔답니다.”
“소형화, 시스템 개선, 그리고 AI 개발이군요.”
“어머?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김강현의 대답에 루시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지만, 눈은 매우 놀라고 있었다.
‘혹시 정보가 유출됐나? 아니면…….’
그녀의 생각대로 김강현은 반도체 사업이라는 말만으로 정보를 유추해 낸 것이었다.
현재 아레스 그룹은 US 그룹의 반도체 기술을 통해 무기의 소형화와 복잡한 시스템의 개선, 추후 인공지능 시스템과 AI를 도입해 발전을 꾀하고 있었지만, 반도체 기술이 부족한지라 US 그룹과의 협력 체계를 통해 벤치마킹할 계획이었다.
‘이 녀석…….’
김고엽은 김강현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반도체 기술이라는 말에서 이런 추론을 했다는 점과 미리 추론을 내기 위해 앞서 정보들을 모아 분석하고 공부했다는 것에 속으로 높이 평가했다.
지금 김고엽과 루시아만 알고 있지만 여러 번 비밀리에 아레스 그룹 실무진이 입국하여 US 그룹 협상진과 협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종 결정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어 협약을 맺기 위해 그녀가 한국에 방문한 것이었다.
“크흠. 강현아. 사업적인 이야기는 그만하고 부탁을 하나 하려고 한다.”
김고엽은 이 이상의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나눌 것이 아니라고 판단해 두 사람의 대화를 끊고 김강현을 보았다.
“오늘 하루 여기 있는 루시아 양의 서울 구경 가이드를 하거라.”
“네?”
“네 짐작대로 그녀는 아레스 그룹 실무진과 업무 협력을 체결하기 위해 왔지만, US 그룹 실무진과 내용을 조율하는 동안 시간이 남는 상황이다. 마침 네가 언어가 통하니 직접 루시아 양과 함께 다니면 좋을 듯싶구나.”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김강현은 루시아가 얼굴 마담이라는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루시아는 아레스 그룹의 이사로서 실무진을 이끄는 수장으로 파견되었지만, 실질적인 업무에는 관여하지 않아 협상에서는 제외되었다. 나중에 실무진이 협상한 내용을 검토하고, 기자회견에서 사인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이 루시아가 할 일이다.
‘이참에 친분을 쌓으라는 의미겠지.’
아레스 그룹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나라가 없었다. 게다가 아레스 그룹의 이사와 친분을 쌓는다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김고엽은 김강현에게 일일 가이드를 부탁했다.
“네. 그럼 차와 운전기사 한 명을 준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다.”
“그럼 레이디께서는 저와 함께 가시지요.”
“좋아요.”
김고엽의 생각을 읽고 제안에 수락한 김강현은 루시아에게 손을 뻗어 정중하게 동행을 구했다.
루시아는 재미있다는 듯 밝게 웃으며 김강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밖으로 나갔다.
* * *
“우와~ 여기가 말로만 듣던 경복궁이군요.”
어느새 한복을 입은 루시아는 주변을 구경하기 바빴고, 김강현도 한복으로 환복해 루시아를 뒤를 따라다녔다.
“혹시 경복궁은 언제 지어졌나요?”
“경복궁은 1395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지었습니다.”
“그럼 600년이란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켜왔네요.”
“아쉽게도 1592년에 일어난 일본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1867년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었어요.”
“아…….”
루시아는 김강현에게 설명을 들으며 경복궁을 감상했다.
그러다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질문 했는데, 그럴 때마다 김강현은 가이드로서 완벽하게 대답했다.
“물 위에 건물이 지어져 있네요. 이건 어떤 건물인가요?”
“왕이 신하들과 큰 규모의 파티를 즐기거나,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던 경회루입니다. 연못에선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서는 인왕산과 궁궐의 모습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습니다.”
“근정전 마당에 비석에 한자가 쓰여 있고, 쇠고리가 박혀 있어요. 이것들은 어떤 용도로 쓰였나요?”
“이 비석은 품계석으로, 신하들이 직급에 맞춰 줄을 서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이 쇠고리는 햇빛이나 비를 가려줄 천막을 치는 데 사용했습니다.”
‘상태창이 눈앞에 설명을 띄워주니 진짜 편리하네.’
상태창을 통해 사물의 상태와 설명이 다 보여서 마치 전문가처럼 루시아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
“고층 건물들 사이에서 이렇게 전통적인 건물들이 잘 보존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어려서부터 루시아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오빠를 따라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았지만, 한국처럼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 안에 문화유산이 함께 공존하는 나라는 흔치 않았다.
“그러고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신기해요. 반만 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나라에 침략을 당했지만 결코 꺾이지 않은 정신을 가지고 있어요.”
그 말에 김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시아는 한국을 방문하기 전, 한국의 역사를 확인해 보았다.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끊임없이 수탈과 침략을 당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이를 이겨낸 나라였다.
특히 가장 놀라웠던 것은 2차 세계전쟁 이후 벌어진 6·25 전쟁으로, 남북한으로 나라가 갈라진 후 경제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한참이나 쇠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모아 지금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는 것이었다.
유럽에선 북한과 휴전 중인 나라이니 치안이 좋지 않고 사회 분위기가 어두울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서울이라는 도시를 둘러보니 외국에서 알고 있는 한국과 너무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 나라에 기반을 만들려면 쉽지 않겠구나.’
한국을 방문하자마자 고궁을 들르자고 한 이유는 이 나라가 가진 역사와 문화를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역사와 문화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뿌리로 이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는데, 한국은 아레스 그룹이 진출하기에 쉽지 않을 듯했다.
“그럼 다음 장소로 가볼까요?”
루시아는 잠시 복잡한 생각은 접고 김강현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게 다 무료라고요?”
“네. 다 먹고 부족하면 리필해서 다시 줍니다.”
“이렇게 하면 남는 게 있나요?”
“괜찮습니다. 한정식 집에서는 메인 요리와 함께 밑반찬들을 함께 줍니다. 다른 식당에 가도 3, 4개의 밑반찬들이 나오고요.”
“유럽에선 이렇게 하면 망할 것 같아요.”
고궁을 둘러보다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다. 마침 루시아도 아침을 먹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라, 운전기사를 통해 경북궁 근처 한정식 집에 예약한 후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한정식 집에 나오는 밑반찬들을 본 루시아는 입을 벌리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젓가락질은 처음 해보는지 몇 번 나물들을 떨어뜨리더니 금방 적응해서 능숙하게 식사를 했다.
“잘 먹었어요. 이렇게 많이 먹은 건 오랜만이라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드네요.”
그녀는 정말 대식가라고 할 정도로 많이 먹어서, 김강현은 속으로 놀람을 감추었다.
‘마나를 그런 용도로 사용할 줄이야.’
식사를 하는 도중 루시아에게서 마나 흐름을 감지했는데, 어느 정도 배가 차면 마나를 운용해 강제로 소화시켰다.
“참, 제가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네. 알겠습니다.”
후식으로 나온 식혜를 마시며 한 루시아의 말에 김강현은 가볍게 승낙했다.
* * *
‘하하하…… 이게 말로만 듣던 지옥이네.’
단순히 루시아를 따라다니며 구경만 했을 뿐인데 김강현은 마치 하루 내내 적과 싸운 것처럼 굉장히 피곤해져 근처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루시아가 가고 싶다고 한 곳이 쇼핑몰이었다. 가볍게 한 승낙이 이렇게 큰 업보로 몰려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손님, 이 옷은 어떠신가요?”
“좋네요. 그럼 44사이즈로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반면 루시아는 매장 직원과 굉장히 즐거워하며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김강현은 루시아에게 유럽에서도 즐길 수 있는 쇼핑을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하려는 건지 물었다.
“그곳에선 돌아다닐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요. 게다가 오빠가 붙여준 경호원들 때문에 움직임에 제약이 있고요.”
이 말을 듣고 쇼핑을 가자는 루시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근처 US 그룹이 운영하는 백화점 멤버스 라운지로 이동했다.
이곳은 VIP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전담 직원들이 편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고 있었다.
“음…….”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김강현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하고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여성용 목걸이와 남자 넥타이핀을 볼 수 있을까요?”
“안내드리겠습니다.”
직원을 따라간 김강현은 주얼리 룸으로 이동했다.
“혹시 찾으시는 브랜드가 있으신가요?”
“아니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에게 선물할 예정입니다. 좋은 제품이 있으면 추천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직원은 여러 종류의 목걸이와 넥타이핀을 꺼내 보이며 설명했지만, 김강현은 직원이 하는 말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한국어인데 왜 어렵게 들리지?’
평소 명품이나 패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직원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김강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어떤 것을 고를지 고민하고 있었다.
“직원이 추천해 준 제품들이 다 예쁘고 좋네요. 이 중에서 고르시면 될 것 같아요.”
“옷은 다 고르셨나요?”
“네. 덕분에 예쁜 옷을 골랐습니다.”
그사이 루시아는 수백 벌의 옷 중 딱 한 벌을 고르고, 김강현에게 다가왔다.
“그럼 이것들로 포장해 주세요.”
루시아의 말에 김강현은 고민 없이 수수한 사파이어와 루비 목걸이, 그리고 다이아몬드 넥타이핀을 골랐다.
‘여기에다가 마법 세공을 하면 2~3일은 걸리겠네.’
헬릭스가 가족들에게 붙어 있지만 24시간 보호가 불가능했기에 가족들의 안전과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제작하기로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루시아도 옷을 계산하기 위해 카드를 꺼내는데, 이를 김강현이 막아섰다.
“한국을 방문해 주신 손님이니……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보답으로 내일 비싼 저녁을 사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루시아가 골라놓은 옷을 챙기러 자리를 비우자 김강현은 직원에게 물었다.
“모두 얼마인가요?”
“네. 3억 2천만 원입니다.”
‘역시 어마어마해.’
직원이 보여주는 가격표를 확인하니 역시 VIP들만 이용하는 멤버스 라운지라는 것이 인식되었다.
순식간에 소형 아파트 금액이 결제되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자 괜히 가슴이 쓰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품속에서 카드 한 장을 직원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일시불로 계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 카드는 뭐지?’
직원은 이곳에 배치받기 전 각 나라의 카드를 공부했지만, 이런 형태의 카드는 처음 보아 당황스러웠다.
카드의 앞면에는 IC칩과 카드 번호, 영어로 된 김강현의 이름, 라이선스 A가 각인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김강현의 사인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동안 교육받은 것이 있어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결제를 요청했다.
‘이, 이게 긁히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은 다시 김강현에게 카드와 함께 영수증을 건넸다.
‘정말 라이선스 카드로 결제가 되는구나.’
김강현은 직원에게 받은 카드를 다시 헌터폰에 인식시켰다.
그동안 헌터폰의 전자 결제 기능만 사용하던 터라 라이선스 카드로 직접 결제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헌터들이 지급받은 라이선스 카드에는 신용카드 기능과 함께 헌터폰을 작동시킬 수 있는 칩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귀찮음에 이 카드를 직접 꺼내서 사용한 적이 없었다.
“혹시 더 갈 곳이 있으신가요?”
김강현이 직원에게 포장된 주얼리 액세서리를 받으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용히 가고 싶은 장소를 이야기했다.
* * *
어두운 조명과 신나는 EDM 음악 소리, 그리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우! 기분 최고야!”
단정한 옷을 입고 있던 루시아는 섹시한 의상으로 갈아입은 채 강남 어느 클럽에서 신나게 춤추고 있었다.
‘아까 백화점에 들른 게 빅 픽처였네. 빅 픽처!’
김강현은 정신없이 춤추는 루시아를 보며 생각했다.
‘백화점에 이어 클럽. 처음부터 이 코스를 생각했던 게 틀림없어.’
루시아가 백화점에 들른 것은 클럽에 입장하기 위한 옷을 사기 위함이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클럽의 분위기와 딱 맞는 의상을 고를 수 없었다.
“뭐 해요? 얼른 나와서 같이 춤춰요!”
“어?! 어!”
“클럽에 왔으면 재밌게 춤을 춰야지. 구석에서 술만 마시고 있으면 어떡해요!”
정신없이 춤추던 루시아는 숨어 있는 김강현을 찾아 무대 위로 끌고 왔다.
그녀는 춤으로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자유를 누리느라 텐션이 굉장히 올라가 있었다.
“와우! 커플 댄스야!”
“저 여자 엄청 춤 잘 춰!”
“남자도 장난 아닐 거야!”
루시아는 클럽에서 춤 춘 지 10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단숨에 클럽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에이, 뭐야?”
“모, 몸치?”
‘어렵다. 어려워…… ,’
김강현은 얼떨결에 루시아를 따라 춤추기 시작했지만, 움직임이 뻣뻣해 마치 나무 각목이 춤추는 것 같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테라에서도 사교 모임이나 연회에선 조용히 구석에 앉아 음식만 먹었다. 노래 한 곡이 끝나자 김강현은 루시아에게 잠시 화장실 다녀오겠다며 말하고 자리를 비웠다.
“머리 아프다.”
클럽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공기가 좋지 않았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화장실을 가던 김강현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죄송하…… 어?”
“넌?”
그런데 낯선 장소에 굉장히 의외의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