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연화그룹과의 계약
“어제 모든 업무에서 물러나 있던 연철무 회장이 본사에 나타나 이사진과 계열사 사장들을 전원 소집했다고 합니다.”
“연철무 회장이? 설마 인수인계를 하려는 거 아냐?”
“그동안 연종진 부회장이 잘 이끌고 있었잖아.”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해외에 있는 임원들을 제외한 국내에 있는 임원들은 무조건 5시간 내로 소집이었다고 합니다.”
“뭐어?”
“진짜 심상치 않은데.”
“게다가 전원 소집을 하기 전, 과장급 이상 인사들은 모두 감사 팀에 의해 감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설마 나 때문에 일어난 거야?’
아무것도 모른 척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강현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발언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감사 내용을 바탕으로 임원 회의에서 바로 몇몇 이사들과 사장들을 해임시키고, 각 부서에서 과장급 이상들의 직원들에게도 칼바람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제보한 것이 있나.”
“잘못하면 우리 쪽에도 칼바람 부는 거 아냐.”
“혹시 세무 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정리하는 건가.”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연화 그룹에 닥친 일에 감정 이입이라도 했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보다 일이 커졌는데? 난 이번 일과 관련된 사람들만 없애는 줄 알았는데.’
노의무의 이야기를 들으니 자신의 말 한마디가 연화 그룹 전체를 강타하는 스케일로 커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면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했고, 자신이 아니었어도 걸린 순간 더욱 큰 벌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참! 실장님! 며칠 전 대규모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습니까?”
“혹시 레이드 이야기 좀 해주실 수 없습니까?”
“뉴스로 들었는데…… 결과만 이야기해 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 좀 부탁드려요!”
갑자기 이야기의 화제가 레이드로 넘어갔다.
이번처럼 대규모 게이트가 열리게 되면 사람들은 대피소로 피신하고 헌터들만 남아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상대하게 되니, 사람들은 레이드의 상세한 내용은 주변에 친분 있는 헌터들을 통해 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뉴스를 통해 레이드의 과정이 나오긴 하나 그 내용은 일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뉴스에 나온 헌터의 모습이 실장님 같은데?”
“진짜? 에이…… 설마?!”
“으음…….”
‘인피니티 마나에 의해 모습이 가려져서 다행이지.’
김강현은 전략기획실 직원들의 시선이 몰리자 주춤거리며 살짝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그도 뉴스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지만, 카메라가 멀리 있었고 인피니티 마나로 가려져 형체만 나왔을 뿐 얼굴이나 상세한 모습은 찍히지 않았다.
게다가 유지운에 의해 정보 통제가 되고 있어, 김강현의 정보는 언론에 들어가지 않고 별명만 헌터들 사이에서 돌 뿐이었다.
‘그래도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다행이지.’
방송국과 기자들은 신비에 싸인 김강현의 정보를 파기 위해 노력했지만 헌터협회와 US 그룹에 의해 암암리에 막히고 있었다.
검천호의 이름까지 빌려 업체를 통해 더 이상 정보가 퍼지는 것을 막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막을 순 없는 노릇이기에 타이밍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전 한강 공원에서 다른 헌터들과 함께 아크 스파이더 솔저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진짜요?”
“공격조에 속한 헌터들을 보면 S급 헌터인 검천호 님을 비롯하여 대형 길드의 길드장들이에요. 물론 저도 실력이 괜찮긴 하지만, 저 정도로 뛰어나면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길드를 차리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요.”
“일리 있는 말이네요.”
“희미하긴 하지만 체구나 모습이 실장님 같은데.”
“으아~! 나는 모르겠다.”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김강현이 부정하며 설명하자 공격조에 속한 헌터가 김강현이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이 혼란은 더 큰 혼란으로 덮어졌다.
“실장님! 실장님!”
“부실장님?”
김강현을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모든 직원들이 그곳을 바라보니 입구에서 강려원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평소 감정 조절을 잘하는 강려원이 소리치자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놀란 기색이었다.
“지, 지금 응접실에 실장님을 찾는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나를?”
김강현은 약속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지만,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사이 강려원이 말이 이어졌다.
“네! 여, 연화 그룹의 연철무 회장님과 연종진 부회장님입니다!”
“허걱!”
“마, 말도 안 돼!”
너무 긴장한 나머지 대답하는 강려원이 말이 떨렸고, 전략기획실 직원들도 손님들의 정체를 알자 경악함과 동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더불어 김강현이 자신들의 범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철무 회장님은 몰라도 연종진 부회장님이?’
연철무와는 친분이 있지만, 연종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김강현은 그가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을 계속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이 계시는 응접실로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실장님.”
김강현은 강려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화 그룹의 내부 상황을 정리하기까지 최소 일주일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진행 중에 자신을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코팅 액체를 비롯해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 것인지 머릿속을 정리하며 응접실로 향했다.
“여기입니다.”
“혹시 회장님께는 연락을 드렸습니까?”
“네. 지금 회사로 오시는 중이라 30여 분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응접실 문 앞에 선 김강현은 강려원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선 준비된 다과를 먹고 있는 연철무와 중년의 남성인 연종진이 있었다.
‘근데 왜 날 적대하는 거지?’
김강현은 들어가자마자 연종진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양을 통해 헌터가 아님을 확인했는데, 그는 김강현이 평생의 숙적이라도 되는 듯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혹시 연종진을 다른 장소에서 본 적이 있나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왔으면 자리에 앉거라. 계속 올려다보니 목이 아프구나.”
“네, 연 회장님.”
서로 부르는 호칭만 바뀌었을 뿐, 연철무와 김강현의 태도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이쪽은 연종진. 현재 연화 그룹의 부회장이자 내 아들이다.”
“연종진이네. 반갑네.”
“안녕하십니까? 전략기획실 실장 김강현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강려원 전략기획부실장입니다.”
곧 연철무의 소개로 김강현과 연종진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고, 강려원도 김강현의 도움을 받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김강현과 연철무는 이곳이 회사라는 사실을 잊고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네 제보 덕분에 그동안 딴생각을 하고 있던 놈들을 없앨 수 있었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별말씀을 하시는군요.”
“아니야. 이참에 정적들도 쳐낼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지.”
“그럼 개인적인 빚 좀 깎아주시겠어요?”
“하하하, 그건 별개이지 않느냐? 나중에 사업 쪽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도록 하마.”
‘연화 그룹 인사 정리의 배후가 실장님?!’
강려원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인사 정리에 대한 핵심을 꿰뚫었다.
그녀도 연화 그룹에 인맥이 있어 대규모의 인사 정리가 있다는 소식을 어제 들었고 연철무가 직접 감사 팀을 움직여 벌인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뒤에 김강현이 있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덕분에 김강현이 가진 인맥이 어디까지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몇 가지 사담을 나눈 뒤 본격적인 사업 이야기로 넘어갔다.
“일전에 네가 우리에게 제안한 협약에 조건에 대해선 알고 있다. 하나 우리 쪽의 실수가 있었고, 이를 감안해서 다시 처음부터 협약 조건을 듣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연철무의 질문에 김강현은 강려원이 보내준 보고서를 떠올리며 연화 그룹과 맺으려 했던 협약 내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연철무와 연종진은 신중하게 이야기를 들었고, 설명이 끝났음에도 머릿속으로 이익을 계산하느라 정신없었다.
‘확실히 승산 있는 아이템이야. 만약 다른 회사에 넘어간다면…… 끔찍하군. 이건 인센티브를 주어서라도 잡아야 하는 협약이야!’
이미 연철무로부터 코팅 액체로 코팅된 무구를 본 연종진은 시장에서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김강현의 설명을 듣자 무조건 협약을 맺어야 한다는 확신이 섰다.
연종진은 연철무와 눈빛으로 서로의 의사를 주고받았다.
“음…… 김강현 전략기획실장이라고 했나?”
김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종진의 말을 기다렸다.
“이 협약은 무조건 연화 그룹과 맺어주면 좋겠네. 더불어 US 그룹이 요청하는 조건들은 무리하지 않는 선이면 모두 수용하지.”
연철무가 연종진을 데리고 온 이유는 서둘러 협약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다.
현재 연철무는 공식적으로 업무에는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연종진이 나서서 빠르게 계약하고 인사 정리에 대한 뉴스까지 이 협약으로 덮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상세한 협약 내용은 전략 기획실에서 짜놓았으니, 저는 여기서 빠지고 연화 그룹의 실무진을 불러 조율하면 좋겠습니다. 그럼 오후쯤에는 협약 발표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자네가 빠진다고? 이유가 뭔가?”
“제 역할은 사업의 큰 틀을 세우고 방향을 이끌어주는 것이고, 상세한 사업 내용과 실무는 강 부실장님을 포함한 실무진들이 잘 알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게다가?”
“전 지금 무보수로 일하고 있어 괜히 나서서 고생하고 싶지 않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순간 연철무와 연종진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하하하하, 맞다! 맞아! 나서지 않아야 할 일에 괜히 나서서 고생할 필요가 없지. 하하하!”
“…….”
그렇지만 곧 연철무는 박수를 치며 웃음을 터트렸고, 연종진은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하나하나 틀린 말이 없었고, 그 말 안에 연철무가 연종진에게 하고 싶은 말도 담겨 있었다.
‘다 좋은데…… 모든 것을 직접 하려고 하는 게 문제야.’
내부감사를 통해 연철무는 이사진들과 사장들이 뒷주머니를 차게 된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는데, 연종진이 이사진들과 사장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정확히는 연화 그룹을 잘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그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혼자가 이끌어가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불만이 생긴 이사진과 사장들이 다른 생각을 먹고 돈을 빼돌렸던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이와 비슷한 말을 다시 김강현에게 듣자 연종진은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그럼 연 부회장님과의 일은 끝난 것 같으니, 연 회장님으로 넘어갈까요?
“응?”
“제가 생각하기엔 연 회장님이 직접 방문하신 또 다른 목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김강현은 자신만만하게 확신한 채 미소를 띠었다.
* * *
‘연화 그룹의 회장이 아닌 대장장이라면 말이지.’
코팅 액체 협약 건은 연화 그룹 사장급 인사가 방문하더라도 충분한데 연종진까지 나선 이유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연철무가 직접 나선 이유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떠올랐다.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하나…….’
연종진은 연철무와 대화를 나누는 김강현을 보며 뛰어난 사업 수단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을 파악했다.
하지만 김강현에게 생긴 질투와 미운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옆에서 연철무는 김강현에게 속마음을 들키자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맞다. 하하하, 몇 날 며칠을 코팅 액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더구나.”
“연 부회장님이 나서서 협약을 맺기로 한 만큼 여기서 말씀드리죠.”
“이렇게 쉽게.”
“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어디 가서 말할 사람들도 아니니까요.”
시원한 김강현의 대답에 연철무는 귀를 쫑긋 세웠고, 다른 사람들도 궁금함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 금속들의 배합 비율은 눈대중과 몇 번 시도를 통해 감을 잡으셨을 겁니다. 마지막에 배합되는 금속이 뭔지 찾으셨는지 궁금하군요.”
“네 말대로다. 어스톤을 찾느라고 고생 좀 했지.”
“그럼 30%는 끝났군요. 가장 중요한 것은 불의 온도, 그리고 금속과 마나의 비율입니다.”
“불은 짐작했지만, 금속과 마나의 비율이라니?”
“제련 타이밍에 따라 불의 온도를 다르게 하여 제조하는 건 기본이고, 일정량의 마나를 주입시켜야 합니다. 이 마나의 양과 제련 기술에 따라 코팅 액체의 품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마나가 무구에 코팅 액체가 스며들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냐.”
“맞습니다. 어스톤은 코팅 액체의 마나가 활성화되도록 도움을 주고 있고요.”
연철무는 코팅 액체를 만들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해결되는 것을 느꼈고, 계속 눈을 반짝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서 번번이 만들 때마다 실패할 수밖에 없던 것이구나.”
“네. 지금 말씀드린 것만 주의하신다면…… 무난하게 중품의 코팅 액체를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코팅 액체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한 연철무는 당장에라도 대장간에 달려가 코팅 액체를 만들고 싶었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인내심으로 버텼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연 부회장님.”
“세연이에게 듣기로는 약학에 대해서도 뛰어나다고 하더군. 가지고 있는 지식이 이게 끝은 아닐 테지.”
“네. 그런데 세상에 선보이는 것은 시기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그것들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군.”
테라에서 삶을 보낸 김강현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많은 연금술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들을 바로 지구에 풀어버리면 마나 산업이 너무 급격히 발달해 지구의 과학과 심각한 불균형을 일으킬 수 있었다.
‘마나 산업은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해.’
김강현은 코팅 액체를 시작으로 과학과 함께 성장하는 마나 산업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었고, 헌터들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사람들을 타깃으로 생각 중이었다.
김강현의 말에 연종진은 돈 냄새를 느꼈다. 지금 연화 그룹에서도 헌터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는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아티팩트를 만들어내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김강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시기가 단축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순순이 내어줄 리는 없겠지 말이야. 결국 강력한 라이벌이 될 거야!’
개인적으로 이 미팅을 참석하기 전 US 그룹 헌터 사업에 대해서 조사하고, 코팅 액체를 기술 이전하려는 이유를 분석했다.
아직 US 그룹은 전략기획실에만 비밀리에 헌터 사업을 발족했고, 이에 대한 자본이 없는 상황이라 코팅 액체를 팔 수밖에 없었다. 이를 미끼로 코팅 액체를 후려칠 생각도 했지만, 연철무의 얼굴과 US 그룹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들의 실수가 있어 후하게 협약을 맺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US 그룹이 연화 그룹에 손을 뻗었어도, 5년 후에는 서로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으마. 뜬금없겠지만 세연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연이 말입니까? 좋은 친구죠.”
“그래.”
연종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을 김강현에게 던졌는데, 김강현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만족스러운 것인지 불만족스러운 것인지 얼굴 표정이 오묘해졌다.
똑똑똑.
“실례하겠습니다.”
그런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들어왔다.
“명원이 아닌가? 오랜만이네.”
“연 회장님, 그리고 연 부회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지금 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네. 회장님께서 두 분의 방문 소식을 들으시고, 얼른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명원으로, 김고엽과 함께 출근하자마자 비서실로부터 연철무와 연종진이 김강현이 만나러 왔음을 전달받고 조심스레 응접실을 방문했다.
“때마침 여기 이야기도 거의 끝나가니 난 자네와 같이 가도록 하지. 넌 어떻게 하겠느냐.”
“해야 할 일이 있어 바로 회사에 돌아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연 회장님.”
“그럼 두 사람은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네. 조심히 가시지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연철무와 연종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강현과 강려원은 따라 일어나며 배웅했다.
응접실 밖으로 나오자 이명원은 갑작스러운 비서실 호출에 자리를 떴고, 연철무는 엘리베이터까지 연종진과 함께 걸어갔다.
“어떠냐? 저 정도면 세연이가 호감을 가질 만하지 않느냐? 강한 헌터인 데다가 US 그룹의 전략기획실장이면 넘치지.”
“한 번 만난 것으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럼 여러 번 만나보면 되겠구나.”
“으음…….”
연종진은 말을 들을 때마다 표정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내 딸이 처음 호감을 가진 남자가 저 녀석이란 말이지!’
그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연세연이 김강현의 칭찬을 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 연세연을 홀렸는지 궁금해 얼굴을 봐야 했다. 그 누구보다 연세연을 곱게 키웠기에, 딸자식을 가진 아버지라면 함부로 데려가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쯧쯧, 언제까지 다 큰 자식을 품에 안고 살 거냐? 참 속 좁기는!”
“아버지.”
“생각 좀 해봐라.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호감만 가지고 있을 뿐이니라. 아직 어떻게 지 몰라.”
‘헌터로서 강하고, 몇 번 만나 보니 인간성도 있고, 집안도 든든한 고엽의 손자라면…… 충분히 예비 손주 사윗감으로 충분하지.’
반대로 연철무는 어제 연화 그룹을 완전히 뒤엎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김강현이 손주 사윗감으로 욕심났다. 때마침 연종진이 김강현에 대해 궁금해하길래 데리고 온 것도 있었다.
설레발을 치는 걸 수도 있지만 김고엽에게 슬며시 양 집안의 혼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세연이의 결혼은 절대 안 됩니다!”
“쯧쯧, 심각한 딸 바보구나.”
‘근데 이놈을 보아하니 쉽지 않겠어.’
연종진은 연세연의 결혼을 상상하자 아무런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도 모르게 적대감을 드러낸 딸 바보 아버지는 뚱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탔고, 반대로 연철무는 연종진을 배웅한 후 김강현과 연세연을 어떻게 엮어줄지 고민하며 김고엽을 찾아갔다.
“오랜만일세, 고엽.”
“허허허, 1년 만인가? 철무! 자넨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군.”
“헌터인 탓에 그런 거지. 겉만 젊을 뿐, 속은 늙은이야.”
“어서 자리에 앉게.”
김고엽은 연철무를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했고, 연철무도 간만에 보는 친구의 환대에 기분 좋게 웃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나야 똑같지. 회사로 출퇴근과 출장. 늘 반복되는 삶이지. 자넨.”
“작은 가게 안에 대장간 차리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았지. 이제 슬슬 회사 일도, 길드 일도 복귀할 때가 되서 인사나 하러 왔네.”
“얻은 게 있나 보군.”
“덕분에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자네 손자가 많은 도움이 되고 있네.”
“강현이 말인가.”
처음엔 가벼운 사담을 나누다가 김강현의 이름이 나오자 김고엽의 눈이 반짝거렸다.
“헌터로서나, 사업가로서나 아주 재미있는 녀석이야. 마음 같아서는 손녀사위 삼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하하하, 자리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는데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야.”
가끔 김강현이 방문해 업무 보고를 하면서 자신이 생각지 못한 제안을 하면, 그의 피를 이었다는 것이 느껴지곤 했다. 더불어 이명원과 강려원을 통해 듣는 김강현의 소식도 김고엽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더불어 아크 스파이더 퀸 대피령이 떨어지기 전, 강려원의 연락을 통해 미리 피신했던 적도 있어서 김강현이 가진 능력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건가? 그동안 자네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손자가 떨어졌으니 말이야.”
“자네라면 말해도 되겠지. 대신 비밀을 지켜주게.”
어떻게 보면 서로 회사를 이끄는 총수들이기에 적이나 다름없었지만, 이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친분이 있었기에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였다.
김고엽은 자신과 김철진이 혈연관계를 끊어야 했던 이야기와 김강현이 전략기획실장을 맡은 일까지의 이야기를 꺼냈는데, 듣는 동안 연철무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하아. 자네도 참 아이러니한 인생이야.”
“그때는 어쩔 수 없었네. 그리고 지금도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가서 말해주고 싶지만…… 자네가 원하지 않겠지.”
“말하는 순간 자네와 나는 끝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직접 푸는 것이 좋겠지만 고엽, 이 친구가 말하지 않겠지.’
단호한 김고엽의 대답에 연철무는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진실을 말하더라도 김철진과 김강현이 믿을지조차 미지수였다. 게다가 꼬이고 꼬인 매듭은 쉽게 풀 수 없을 만큼 단단했다.
“그런데 자네 손녀가 강현과 비슷한 또래인가.”
“관심 있나?”
“자네가 둘을 맺어주고 싶은 것 같아 꺼내보는 것일세. 이름이…… 연세연이었나.”
“맞아. 10여 년 전에 봤을 텐데 잘도 기억하고 있구만.”
10년 전에, 연철무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김고엽의 가족을 초대해 식사를 한 적 있었다.
둘 다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라 서로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지만, 1년 전부터 스케줄을 비워놓아 만든 자리였다.
“허허허, 애들 마음이 쉽게 움직이는 게 아니지만, 늙은이들끼리 합을 맞추는 건 가능하겠지.”
“좋아! 그 점은 아주 마음에 드는군.”
김고엽과 연철무는 오랜만에 마음이 일치하자 기분 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