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실장님이…… 회장님의 숨겨놓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어엇!”
“쉿! 쉿!”
노 대리의 말에 몇몇 직원들이 크게 소리치자 얼른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이 도는 거야?”
“이런 이야기는 함부로 했다간 바로 퇴사야!”
“그러니까 저도 조심스럽습니다. 아시다시피 회장님에겐 가족이 US 전자의 사장님과 그 딸. 이렇게 두 명입니다. 그런데 실장님의 얼굴을 본 몇몇 사람들이 회장님과 닮았다는 말이 돌면서 소문이 났습니다. 게다가 이명원 비서실장님이 친근하게 다가가는 사람이 몇 명 없지 않아 가족이라는 말이 신빙성 있게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강 부실장님에게 실장님을 소개시킬 때 직접 왔었지?”
“보통이라면 인사과를 통해 왔을 텐데?”
일리 있는 노 대리의 말에 몇몇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자이든, 후자이든 직원들은 어떤 것이 진실인지 궁금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거기 모여 뭐 합니까? 혹시 역적모의라도 해요?!”
“헉!”
“강 부실장님.”
“오늘도 할 일이 태산이니 적당히 떠들고 각자 업무에 들어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예!”
그때 전략기획실로 들어온 강려원에 의해 대화가 중단되며 직원들이 서둘러 흩어졌다.
그녀는 다른 직원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려고 했지만 머리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회장님과 비서실장님은 무슨 생각이지?’
그녀는 실장으로 임명된 김강현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미리 알기 위해 이명원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는데, 대답이 황당했다.
“나도 잘 모르네.”
“네? 그럼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을 실장 자리에 앉혔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회장님과 나는 김강현 실장이 전략기획실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기에 그 자리에 앉혔고, 다양한 사업을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네. 하나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닌 강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발휘될지 모를 뿐이지.”
“그게 무슨?”
“그는 회장님과 내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뿐이네. 나머지는 자네가 직접 알아보게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믿을 수 있다는 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는 강려원은 김강현이 최소한의 조건을 갖췄음을 깨달았다.
더불어 전략기획실은 US 그룹의 초기 사업부터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책정되는 사업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보안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그런 만큼 실장이라는 자리는 전적으로 회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능력도 뛰어나야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언제 오는 거지?”
생각을 하다 시계를 보니 약속한 회의 시간의 10분 전인데도, 아직까지 김강현은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사이 전략기획실 직원은 하나둘씩 회의실로 들어가 회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11시가 되기 2분 전에 회의실로 김강현이 들어왔는데, 평상시 편한 복장이 아닌 셔츠와 재킷으로 회사 출근 복장을 갖추었다.
직원들이 김강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하자, 불편한 듯 다들 자리에 앉아 이야기해 줄 것을 부탁한 후 직원들의 얼굴을 살폈다.
‘궁금함과 경계가 뒤섞여 있네.’
“반갑습니다. 출근은 이틀 전에 했지만,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드리네요. 앞으로 전략기획실의 실장을 맡게 된 김강현입니다.”
짝짝짝짝짝짝!
“다들 바쁜 와중에 스케줄을 조정해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의를 진행하기 전에 몇 가지 안내 사항을 전달하겠습니다.”
직원들은 김강현의 입에 시선이 집중한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앞으로 전략기획실은 지금처럼 운영하되 제게 시작과 중간, 그리고 최종 보고, 이 세 개만 전달해 주세요. 제가 알아보니 강려원 부실장님이 이 보고들을 평소 회장님께 하셨으니 업무에 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더불어 업무를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강려원 부실장님을 통해 해결하되, 그래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면 제게 전달해 주세요.”
‘이, 이게 뭐지?’
‘오히려 강 부실장님에게 힘을 실어주네?!’
직원들은 김강현에게서 기존의 업무 체계를 유지하겠다는 말을 듣자 다행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실제로 관리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면 피해를 보는 것은 아래 직원들이었다. 서로 다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고, 강려원도 김강현이 자신을 인정하고 힘을 실어주자 고마움이 생겼다.
“그리고 제가 과분하게도 전략기획실장이라는 직함을 맡게 되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지 못합니다.”
“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래서 강 부실장님에게 일을 떠맡기려는 건가?’
‘정말 자리 차지하는 낙하산이야?’
순간 김강현의 말에 직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는데, 강려원은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른 직원이 손을 들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다른 직원들과 비교했을 때 불공평한 처사라고 판단이 듭니다.”
“그럴 수 있겠군요. 여상아 주임님.”
“어, 어떻게 제 이름을?”
“하하하, 전략기획실장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업무 파악과 여러분들의 이름과 얼굴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면 어떻게 일하겠습니까?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면 전략기획실장 자리를 맡되 무보수로 일을 합니다. 인센티브도 없으며 보수는 성과가 나온 후 판단될 예정입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개인적인 사정이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제가 헌터로 활동하고 있어 던전에 들어가게 되면 며칠 동안 밖에 나오지 못하고, 헌터 관련 임무로 여러 가지 제약이 있습니다.”
“아!”
“그래서!”
“이로 인해 부족함이 있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저와 연락이 되지 않을 때 허락이 필요한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는 강려원 부실장님이 판단 후 처리해 주시고, 사후 보고해 주세요.”
“네. 실장님.”
직장인의 능력을 판단하는 척도는 월급인데, 김강현은 이를 받지 않고 일을 하려는 것이기에 직원들은 수긍하며 이해했다.
더불어 강려원이 있으니 일에도 지장이 없고, 기존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US 그룹에서 과도하게 업무가 몰리고 있더군요. 이제부터 전략기획실이 할 수 없는 업무가 아니면 다른 부서로 쳐내겠습니다.”
김강현이 노트북과 연결된 빔 프로젝트를 실행시키자 스크린에 사업들의 내역이 정리되어 띄워졌다.
직원들이 정신없이 화면을 보니 현재 전략기획실이 진행하는 업무 중 3분의 1이 다른 부서들로 옮겨져 있었다.
“흐아, 살았다.”
“계속 야근 없이 일할 수 있겠다!”
“후우, 그동안 과부하로 일하느라 힘들었는데.”
직원들은 스크린을 보며 자신이 빠지는 업무들을 확인했다.
김강현이 그동안 전략기획실이 진행했던 보고서를 살펴보니 가장 큰 문제가 업무의 과부하였다.
전략기획실은 그룹의 부서들과 함께 사업의 시작과 총괄을 맡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 부서들이 부담스러운 업무나 해결하기 어려운 업무를 슬그머니 전략기획실에 떠넘기고 있었다. 게다가 완벽을 추구하는 강려원의 성격도 여기에 합쳐져 이와 같은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하다가는 전략기획실에서 업무들을 감당할 수 없어, 냉정하게 분석한 후 결정한 사항이었다.
김강현은 다음 페이지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각 사업들의 예산도 다시 정리했습니다. 이 내용은 전략기획실 전체 메신저로 전달할 테니 참고해 주세요.”
“하…… 저걸 이렇게나 줄인다고?”
“예산이 줄었는데 더 잘 될 것 같지?”
직원들은 스크린에 띄어진 예산표를 보며 혹시 잘못된 내용이 있나 확인했지만, 1원의 오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각 예산표에는 왜 이렇게 예산을 책정했는지 코멘트도 적혀 있어 이유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고작 한 사람이 왔을 뿐인데…… 이렇게 바뀔 수 있구나’
더불어 강려원은 스크린을 보며 속으로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전략기획실은 굵직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어 소요되는 예산과 일정들을 혼자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헌터 사업도 시작하려고 해서 고민과 부담감이 커지고 있었는데, 김강현의 등장으로 이 어려움들이 해결되고 있었다.
‘정말 그 많은 보고서들을 다 확인하고 분석한 거야?’
모든 직원들에게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전략기획실의 업무를 파악하고 예산을 짜기 위해선 그 보고서들을 확인해야 했다. 아무리 헌터라도 1년 치의 사업 보고서들을 이틀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확인하고 분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아, 꽤 고생하긴 했지…….’
김강현은 강제로 서류들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집어넣기 위해 고생한 이틀 전을 떠올렸다.
“헙?! 갑자기 무슨 일이냐?!”
“나와 같이 고생 좀 해야겠다.”
“뭣이?!”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자, 김강현은 헬릭스를 소환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던 헬릭스는 주변에 보고서들이 쌓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바로 김강현에게 뒷목을 붙잡히자 짜증 내며 발버둥 쳤다.
“이거 놔라! 감히 이 몸의 식사 시간을 방해하다니! 무엄하다!”
“에이, 그러지 말고!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레스토랑 코스 요리로 보답할 테니 부탁해.”
“레스토랑 코스 요리?”
순간 마음이 혹했는지 헬릭스의 표정이 풀리자 김강현은 계속 말했다.
“미슐랭이라는 호칭을 받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인정한 레스토랑이다.”
“흠흠! 맛은 확실한 거겠지?”
“물론이지.”
“크흠!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사정하니 이 몸께서 친히 도와주마.”
이젠 완전히 음식의 노예가 되어버린 헬릭스를 보며 김강현은 속으로 환호성을 외쳤다.
맛있는 음식이면 고급 인력, 아니, 고급 마족을 사용할 수 있으니 굉장히 효율적이었다.
김강현은 헬릭스에게 해야 할 일들을 설명했다.
“여기 있는 보고서들을 읽고 분석한 뒤, 그 내용을 공유하는 거다.”
“흐음…… 내용을 읽고 분석하는 건 마법의 도움을 받고, 서로의 기억이 영혼의 계약을 통해 공유되니 이를 이용하면 되겠구나.”
헬릭스의 몸이 검은빛으로 물들더니 보고서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헬릭스의 눈을 스쳐 지나갔다. 그 찰나의 순간 보고서의 내용은 헬릭스의 머릿속에 인식되며 빠르게 분석되고 있었다.
더불어 붉은빛에 물든 김강현은 한 손으로 보고서들을 넘기고, 한 손으로는 키보드를 두들기며 양쪽을 보았다.
이러한 모습을 직원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김강현과 헬릭스는 이틀 밤낮을 이용하여 모든 보고서들을 확인하고 분석, 정리했다.
‘이번 실장은 뭔가 다른데?’
‘정말 무언가 해낼 것 같아!’
이틀이라는 시간에 1년의 기록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하는 아무도 쉽게 못할 일을 해냈기에, 직원들은 이번엔 김강현이 어떤 것을 보여줄지 눈빛에 기대를 보였다.
“그럼 이제 전략기획실에서 진행할 헌터 사업에 대해 설명하죠.”
김강현은 본격적으로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략기획실 직원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기 위한 플랜을 오픈했다.
* * *
“말, 말도 안 돼!”
“이게 가능한 일이야?”
헌터 사업의 플랜을 본 전략기획실 직원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각 직원들의 능력을 고려한 인원 배치와 예산, 그리고 돌발 상황이 생길 경우를 대비한 대처법도 마련되어 있었다. 앞서 전략기획실의 업무 부담을 덜었기에 6개월 안에 완료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만약 테라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겠지.’
김강현과 헬릭스는 하루 동안 전략기획실의 보고서를 보고 업무 현황을 파악한 후, 남은 하루 동안은 지구에 테라의 지식을 어느 정도까지 전달할 것일지 이야기하며 헌터 사업을 구상했다.
“실장님, 질문 있습니다.”
“네. 강 부실장님. 뭔가요?”
“US 그룹은 헌터 사업에 후발주자로 이미 시장에는 많은 회사들이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중 연화 그룹이 독보적으로, 많은 회사들이 연화 그룹이 가진 지분을 가져오기 위해 다양한 아이템을 제시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아이템이 아니면 저희도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템을 가지고 회사들과 싸우기보다는 다른 회사들과 컬래버레이션으로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연화 그룹입니다.”
강려원의 말대로 현재 헌터 시장은 블루 오션으로 많은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중 연화 그룹은 헌터 무구들을 만들어내는 기술력이 가장 뛰어나 시장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수년 동안 기술력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염두에 둔 김강현은 연화 그룹과의 업무 협조를 통해 헌터 시장을 자세히 분석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 저희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연화 그룹과 어떤 컬래버레이션을?”
US 그룹이 헌터 사업에 진입하기로 확정된 것은 불과 2주 전이어서 컬래버를 제안할 만한 기획이 없었다.
하지만 김강현은 그곳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코팅 액체라는 물건이 있습니다.”
“코팅 액체요?”
“이 액체를 무구에 발라주면 무구가 코팅되어 쉽사리 상하지 않고 내구력이 높아지죠. 항상 몬스터와 격한 싸움을 하는 헌터들은 이 코팅 액체를 통해 무구를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더불어 꾸준히 관리해 주면 강화 효과가 생깁니다.”
획기적인 아이템의 등장에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나만 있으면 자동 복구가 되는 김강현의 마검과 달리 헌터들의 일반 무구들 수명은 길지 않았다. 항상 고된 싸움을 하기에 쉽게 무구가 상해서, 던전을 나올 때마다 헌터 상점에 들러 수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코팅 액체가 있다면 헌터들은 돈도 아끼고 장기간 사냥도 가능할 터였다.
“게다가 코팅 액체는 소모성입니다. 그럼…….”
“무구를 수리하는 비용보다 싸게 먹힐 수 있겠죠.”
“동시에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에게 이건 무조건 성공한다는 판단이 섰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먼저 헌터 사업에 뛰어든 연화 그룹은 대규모 헌터 공장을 운용하여 무구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에 코팅 기술을 가지게 된다면 타 기업들과 다른 독자적인 기술로 시장을 차지할 것이었다.
“한데 이 기술은 어디서…….”
“맞습니다. 코팅 액체에 대해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전략기획실 직원들이 김강현에게 물었다.
그들은 내부에서 헌터 사업을 발족하기 위해 헌터 시장을 샅샅이 조사하며 다른 회사들이 연구하고 있는 기술에 대해 조사했었지만 코팅 액체에 대해선 파악하지 못했다.
“코팅 액체는 제 독자적인 기술입니다.”
“……!”
‘이 코팅 액체를 만드느라 1년을 고생했었지.’
테라의 라 제국 소속의 연금술사들이 무구의 내구도를 높이기 위해 이 코팅 액체를 만들었는데, 이때 라셀이 도움을 준 적이 있어 제작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직 지구에는 코팅 액체를 만드는 기술이 없으니 효과적이면서도, 세상에 공개해도 큰 무리가 없는 아이템인 것 같았다.
“그럼…… 그냥 우리가 파는 게 어떨까요?”
“맞습니다. 오히려 시장 점유율 1위인 연화 그룹에 넘기면 후발주자인 우리가 시장에서 입지 잡기가 더 어려울 겁니다.”
전략기획실 직원들의 생각이 다르자, 김강현은 고개를 저으며 친절히 설명했다.
“무구 제작을 할 수 없는 우리에겐 메리트 있는 아이템이 아니고, 코팅 액체를 만들기 위해선 대규모의 자금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럼 다른 부서의 예산을 끌어와야 하니 부담이 많습니다. 차라리 이를 다른 회사에 팔아 정기적인 수입을 확보한 후 다른 아이템을 준비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아!”
“그리고 전 전략기획실을 믿습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인 곳인데 설마 아이템 하나 생각하지 못할까요?”
잠시 코팅 액체의 장점에 빠져 주변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던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김강현의 말에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리를 맡았던 사람들과는 완전 다르잖아!’
‘코팅 액체라는 아이템을 염두에 두고 이 사업 플랜을 미리 짰을 수 있어. 하지만 단기간 안에 업무를 파악하고 예산을 재구성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회의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자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김강현이 낙하산으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진짜 실력이 있다고 믿게 되어 불만 사항이 사라졌다.
“강 부실장님.”
“네.”
“빠른 시간 안에 연화 그룹과의 미팅을 준비해 주세요. 다른 분들은 연화 그룹의 인사 목록 체크와 플랜대로 업무 진행을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혹시 하고 싶은 말 있으십니까?”
혹시나 싶어 물었지만 김강현이 완벽하게 준비를 해온 덕분에 아무런 질문도 없었다.
“실장님, 개인적으로 질문 하나 있습니다.”
“응? 노의무 대리님. 뭔가요?”
그때 노의무가 손을 번쩍 들고 말을 하자 김강현은 미소를 띠며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회사에 실장님이 회장님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소문과 해외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유명한 자제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어떤 게 맞습니까?”
“허억!”
“저, 정말 말했어!”
노의무가 손을 드는 모습에 직원들은 설마 했지만, 이 자리에서 말을 할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노 대리!”
“괜찮습니다. 그런 소문이 있다는 것이 재미있네요. 그리고 이런 소문은 내버려 두면 과장되어 퍼지게 마련이니 제가 직접 정리하는 것이 좋겠군요.”
어떻게 보면 무례한 질문에 강려원이 화를 내며 이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김강현은 직접 소문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결정에 직원들의 눈이 김강현의 입에 집중되었고, 그동안 관심 없어 보이던 강려원까지 김강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둘 다 헛소문에 불과합니다. 전 회장님의 자식도 아니고, 해외엔 한 번도 가본 적 없습니다.”
“그럼 이명원 비서실장님이 왜 실장님에게 도련님이란 호칭을?”
“아버님이 어린 시절에 이명원 비서실장님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명원 비서실장님께서 어린 아버님을 보는 것 같다며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랍니다.”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김고엽의 손자라는 사실을 감췄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김철진을 비롯해 가족의 신상이 세상에 공개되고, 지금까지의 일상이 바뀔 수 있어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거짓도, 진실도 아니지만 직원들에게는 충분한 설명이 되어 모두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회의를 하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절반쯤 지났네요.”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직원들의 말과는 달리 표정에서 많이 배고프다는 기색들이 보였다. 김강현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오후 시간은 다들 비워놓으셨지요?”
“네. 실장님 말씀대로 오후 스케줄은 없습니다.”
“혹시 오후에도 회의를 하실 건가요?”
“으흠. 전 말을 길게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답과 함꼐 김강현은 품속에서 한 장의 카드를 꺼냈고, 이를 본 직원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침 식사 때니 밖에서 먹는 것이 어떻습니까? 밥은 회사 카드로 먹는 것이 제일 맛있지 않습니까?”
“우오오오!”
“실장님, 최고입니다!”
“오후에 스케줄이 모두 비워져 있으니 간단히 밥만 먹는 것보다는 회식도 같이 하는 게 좋겠군요. 회식은 근무 시간에 하는 것이 제일 재밌지 않나요? 물론, 술은 강요가 아니니까 편하게 먹도록 하죠.”
갑작스럽게 잡힌 회식이지만, 근무 시간에 한다는 말에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었다.
평상시 회식은 근무 시간이 종료된 이후 저녁에 있어 어쩔 수 없이 근무의 연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후 시간대에 하게 되면 시간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뿐더러 땡땡이를 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장님, 그런데 저희가 많이 먹어 법카 한도가 초과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제 개인 카드로 결제하죠. 다음 주부터 죽도록 일하라고 제가 사는 거니 너무 신나 하지 마십쇼.”
“괜찮습니다!”
“메뉴는 소고기 어떻습니까? 혹시 고기 싫어하는 사람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노 대리님이 근처 소고깃집 예약하고, 10분 내로 출발합시다.”
“네. 실장님.”
김강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대단한 사람이네.’
지금까지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려원은 속으로 감탄했다.
솔직히 김강현의 첫 등장은 별로 좋지 않았다. 첫날부터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보다 업무 현황을 모조리 보고하라는 말에 미운털이 박혔었고, 오늘 얼마나 뛰어난 놈인지 지켜보자는 내심을 다들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단 60분이 조금 넘는 시간 안에 직원들이 가지고 있던 불만을 종식시키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자신의 사비를 털어 회식을 쏘겠다는 말로 직원들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얻었다.
설사 자신이라 하더라도 이 같은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이기에 강려원은 김강현의 능력이 뛰어남을 확인했다.
‘회사 일이 재미있겠어.’
강려원은 노트에 회의 기록을 마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그녀는 전략기획실 실장 자리에 쓸모없는 사람이 앉는 것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회사 내 암투에도 신경 쓰고 있었는데, 김강현의 등장으로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어짐을 느꼈다.
그리고 김강현이 자신을 지지하는 이상 앞으로 전략기획실을 잘 이끌어 나갈 자신감도 생겼다.
“부실장님, 안 가세요?”
“갑니다, 실장님.”
회의실을 나가려던 김강현은 아직도 남아 있는 그녀를 불렀고, 강려원은 김강현을 따라나섰다.
* * *
“안녕하세요, 연 어르신.”
“오랜만이구나. 그럼 가져온 물건들을 꺼내보거라.”
며칠 후, 김강현은 연철무의 대장간을 방문했다.
그리고 연철무의 말에 인벤토리를 열어 몬스터의 부산물을 꺼냈는데, 모두 깨끗하게 손질된 최상품의 물건들이었다.
부산물들은 산을 이룰 정도로 테이블에 쌓였고, 연철무는 이를 견적 내기 시작했다.
“흠…… 이 정도면 사백 정도 쳐줄 수 있겠구나.”
“그렇군요. 그럼 그 돈은 빚 청산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연철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몬스터들의 부산물을 챙겼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