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A Midsummer Night’s Dream
제국 전역을 들썩이게 하는 초봄의 사교철이 지나면서 한참 고요했던 제르바는 한여름에 접어들면 다시 활발해진다. 매년 있는 연례행사 탓이었다. 그러니까, 헤셀러스의 건국일을 제외한다면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는 황제의 생일이 돌아온 것이다.
그 무렵이 되면 본저로 가 있던 귀족들이 전부 수도로 상경하고, 우호국을 비롯한 공국에서 선물을 실어다 날랐다. 외국의 상단들도 속속 제르바로 입성해 활기를 띠는 데 가세했다.
그러나 금년은 황제가 즉위 후 맞이했던 평소의 생일과 결이 달랐다.
우선, 황제 에르하르트 헤셀러스는 생일을 전후로 열흘 정도 아르헨으로 내려가 머물겠노라고 선언했다. 각자의 영지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귀족들은 제르바 대신 아르헨으로 이동하기 위해 길을 잡았고, 아르헨은 여름 축제와 맞물리기까지 해 사람들로 붐볐다.
시종들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고성을 정비했고, 마리엘 역시 하나뿐인 황녀로 귀빈들을 맞이하느라 여러모로 정신없어 보였다. 황제인 에리히는 말할 것도 없으니, 가장 한가한 이를 꼽으라면 단연 라얀이었다.
하지만 라얀도 저 나름대로 바빴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았다. 그러니까 에리히의 생일 때 어떤 선물을 줘야 하는지로.
“으음.”
알아온 세월이 길지만 놀랍게도 라얀은 에리히의 생일을 챙긴 적이 없었다. 인어에게 태어난 날은 그리 중요한 개념은 아니었다. 딱 한 번 각별한 의미가 되는 해가 있기는 했는데, 바로 성체가 되는 날이었다. 그날을 제외한다면 생일은 그냥, 태어난 날일 뿐이다.
인간에게 생일이 생각보다 중요한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작년 이맘때였다.
‘라얀은 오라버니의 탄일에 뭐 할 거야?’
평소처럼 놀러 와 조잘거리던 마리엘은 지나가듯 에리히의 선물로 무엇을 준비했느냐고 물었다. 라얀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마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는 거냐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고는 제 생일은 겨울이니 기대하겠다며 눈을 반짝거리면서 빛내기도 했다. 그제야 라얀은 인간들에게 생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완벽하게 깨달았다.
내내 고민하던 라얀은 화원에서 꺾은 꽃다발과 제 지느러미의 비늘을 에리히에게 줬다. 그것에도 에리히는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지만 라얀은 아쉬운 감정 속에서 다음을 기약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날인데, 자신은 여전히 헤매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에리히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황제인 그는 필요한 것부터,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전부 그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혹시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저번에 아닌 척 넌지시 물어보기도 했는데,
‘너.’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을 하더니 입을 맞추며 제 몸 위로 체중을 싣기나 했다. 라얀은 결국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한 채로 열락에 잠겨야만 했다. 그렇게 유야무야 지내다 보니 결국 오늘에 이르렀다. 날이 임박해지자 초조했다.
에리히가 기뻐할 만한 것을 주고 싶은데. 그에게 묻지 않고, 그가 깜짝 놀랄 만한 것으로. 볼품없지 않고 멋스러운 걸로.
“흐으음…….”
<그러다가 엘레브 해의 땅이 꺼지겠어요.>
거듭된 한숨을 보다 못한 알레가 핀잔을 줬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라얀은 그제야 그의 존재를 인지했다. 머쓱해서 웃자 알레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키워봤자 소용이 없다니까.>
하도 들었더니 이제는 익숙한 말이다. 미안. 성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사과에 알레는 혀를 찼다.
<그 인간한테 정말 선물 따위를 해야 해요? 어째서요? 라얀이 왜?>
알레는 모든 게 다 불만인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는 그 인간에게 유감이 상당했다. 라얀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과분하게 여겨야 할 텐데, 고작 선물 따위가 뭐라고 이렇게 고민하게 만들다니.
라얀은 상냥하지만 좋은 말로도 섬세한 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우리한테는 이렇게 뭘 줄지 고민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 인간이 뭐라고.
물론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에 라얀은 그 인간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했다. 제 목숨조차 가치 없다는 것처럼 내던져 버릴 만큼. 그리하여 알레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혹시라도 금세 질려 아티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를 품은 적도 있었으나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라얀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려워. 너무 어려워, 알레.”
<인간들이 좋아하는 보석이나 갖다 주지 그래요. 저 아래에 많이 가라앉아 있잖아요?>
성의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투에 라얀은 제 옛 수호자를 새침하게 바라봤다.
“엘은 그런 게 너무 많…, 그런데 알레, 같이 고민해 주는 거 아니었어?”
<제가요?>
“응.”
<인간들에 대해서 저와 라얀 중 누가 더 잘 알까요?>
“…나지.”
라얀은 의기소침해져서 알레의 등에 올라타 비비적거렸다. 알레는 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범고래가 숨을 들썩일 때마다 물결이 잘게 일었다.
<그만 시무룩해하고 나가보지 그래요.>
“응?”
<아무래도 당신의 인간이 온 것 같은데.>
알레는 라얀의 손목에 걸린 팔찌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푸른 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에리히가 그를 위해 고안한 것이다. 고민을 아직 못 끝냈는데. 하지만 라얀은 언제 시무룩해 있었냐는 양 밝게 웃으며 물살을 헤집고 바깥으로 나갔다. 알레 역시 인간형으로 모습을 바꿔 그 뒤를 따라나섰다.
“에리히!”
라얀은 활짝 웃으며 에리히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라얀의 뺨을 문질렀다. 일하다 왔는지 옷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 늦지 않는다고 네 시녀가 아주 사색이 되었다.”
“아.”
에리히의 생일은 며칠 남았지만, 그동안 내내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라얀 역시 당연히 참석해야만 했다. 알고 있었으나 준비 과정은 이런 식으로 종종 깜빡했다.
“나는 네가 무얼 하든 아무래도 좋은데.”
그냥 연회장에 모습을 비추지 않으면 더 좋을 것 같고. 뺨에 입 맞추며 농담처럼 덧붙이는 말에는 약간의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내가 가는 게 싫어?”
“그건 아니고.”
에리히는 난감하게 웃으며 모호하게 대답을 늘어놓았다. 라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이야. 잊어줘.”
에리히는 뺨에 닿아 있던 입술을 미끄러트려 라얀의 입술을 머금었다.
“나는 보이지도 않나 보군.”
단단히 심기가 뒤틀려 비꼬는 목소리에 라얀은 알레의 존재를 인식하곤 에리히를 살짝 밀어냈다. 그는 아쉬운 듯 입술을 따라 붙였다가 금세 라얀의 뜻대로 움직여주었다.
“장식물 같길래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어 보여서.”
“아하?”
“일족의 수장이 되었다길래 바쁜 줄 알았는데…….”
에리히는 말을 멈추고 알레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닌가 보군.”
이토록 자주 나오는 것을 보니. 이죽대는 말에 알레가 비죽거리며 웃었다. 아. 저거 화났을 때 나오는 표정인데. 라얀은 난감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살폈다. 예전에는 그냥저냥 무난해 보였던 사이는 이제 누가 봐도 나빠졌다. 볼 때마다 으르렁거리고, 웃으면서 빈정거렸다. 라얀이 그만하라고 해봐야 그때 잠깐 소강될 뿐, 다시 만나면 도돌이표였다.
“그딴 쓸모없는 참견보다야 라얀의 안위에 신경을 쓰는 게 좋지 않나. 이 자국들은 대체.”
“아, 알레. 이건…….”
“그렇잖아요, 라얀. 다쳐도 금방 아물면서 이게 다 뭐예요.”
어차피 다툼이 오래가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쳐 두고 있던 라얀은 알레가 터트린 불만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손까지 저어가며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귓불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라얀이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에리히는 손을 깍지 끼며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그래서 아쉽지. 라얀의 몸은 너무 빨리 흔적을 지워내서.”
“뭐?”
“밤마다 정성을 들이는데도 고작해야 이틀도 가지 않거든.”
그러면서 에리히는 고개를 숙여 손등을 빨아들였다. 발그스름하게 자국이 남았다. 라얀은 툭툭 밀어냈다. 사뭇 날카로워지는 눈매를 본 에리히는 그제야 알레에게 세우던 날을 걷고 라얀의 눈치를 봤다.
“그…….”
알레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영리한 쪽에 속했다. 당장 보이는 반응만 봐도 에리히가 암시한 바를 눈치챈 게 분명했다. 라얀이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한 것도 아닌데 언제 날 세웠냐는 양 평화로워졌다. 한 명의 속이 시끄러운 게 분명하니 이를 과연 평화로워진 것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갈게요, 라얀. 또 봐요.”
알레는 일단 자리를 피하기를 선택한 것 같았다. 경황 없는 중에도 습관처럼 이마를 비빈 그는 물 아래로 사라졌다. 그제야 라얀은 팔꿈치를 세워서 에리히를 툭 쳤다.
“잘못했어.”
에리히는 곧장 잘못을 시인했다.
“화났어?”
화가 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굳이 어떤 감정으로 정의 내려야 한다면 겸연쩍었다. 알레는 제 탄생의 순간부터 함께해 온 존재다. 메르보다 훨씬 더 가족 같았고, 아니, 그냥 가족이었다. 에리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그보다 조금 더 긴밀한 것들은 말하기가 왠지 쑥스럽고 낯간지러웠다.
“아니. 그건 아닌데.”
라얀은 이런 감정들을 설명하는 대신 아니라는 말로 축약하고 지상으로 올라섰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부축한 에리히는 라얀의 기색을 한 번 더 살폈다.
“앞으로 네 수호자한테 잘할게. 라얀. 응?”
그러더니 곁에 붙어서 살랑거린다. 막상 그때 가면 또 지키지도 않을 게 뻔하지만. 라얀은 빤한 눈으로 에리히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작게 푸념했다.
“우리 에리히. 어릴 때는 착하고 순했는데.”
“…….”
본인인 에리히가 동의하지 않으며, 이미 저 아래 심해로 돌아가고 있는 알레 역시 들었더라면 그 인간은 한 번도 착하고 순한 적이 없었다고 기가 막혀 할 소리를 진심을 담아서 한 라얀은 에리히의 팔짱을 꼈다. 고민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소피아가 자신을 찾느라 사색이 되었다고 하니 얼른 돌아가야만 했다.
* * *
제르바의 그레이트 홀만큼은 아니어도, 아르헨의 홀 역시 화려함을 자랑했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널찍한 공간은 초대받은 인사들을 전부 수용해도 될 만큼 넓었고, 바깥의 화원은 여름을 맞이한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귀족들이 잠깐 나가서 거닐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거 맛있다.”
에리히는 이 연회의 주인공인 황제였고, 그런 만큼 내내 라얀과 있을 수는 없었다. 금방 돌아올게. 다소 짜증 난다는 듯이 뺨에 입을 맞추고 떠난 에리히의 빈자리를 보며 라얀은 홀짝홀짝 술잔을 기울였다. 단맛이 진한 술은 입맛에 딱 맞았다. 입가에 만족 어린 미소가 머물렀다.
세상에는 쓴 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라얀은 기회가 될 때마다 다양한 술을 접했다. 에르하르트는 세상 모든 달콤한 술을 접할 셈이냐고 물으면서도 제 입맛에 맞을 만한 것들을 공수해 와서 진열장을 채웠다.
곁을 지키던 소피아는 라얀이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담담히 바라봤다. 겉보기로는 술 한 잔만 해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것 같은 라얀은 상당한 주당이었다. 말술로 유명한 어떤 백작과 견주어도 모자람 없을 만큼 잘 마셨다. 그를 섬기는 동안 술 취한 모습을 본 적 없기에 소피아는 이제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염려는 외부에 있었다.
“오늘도 더할 나위 없이 빛나시는군요.”
그러니까, 황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저렇게 달라붙는 부나방들…….
술잔을 기울이던 라얀은 그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누구지. 낯선 얼굴을 기억 속에서 헤집었으나, 딱히 짚이는 바가 없었다.
“저는 하셀의 헤이든이라고 합니다.”
아르헨과 가까운 곳에 있는 영지의 남작이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청년을 보면서 라얀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라얀이 인사를 받아주자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이들이 앞다투어 자신을 소개했다. 제르바에서 몇 번 본 인물도 있는가 하면, 대체로 모르는 얼굴이었다.
나름대로 익숙한 상황이었다. 제르바에서도 이런 자리에 참석하면 으레 있는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익숙함과 별개로 이해가 가지 않기는 했다.
라얀은 공식적인 일이 아닌 이상 남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에리히와 놀고, 또 마리엘과 놀고, 종종 아르헨으로 가려면 몸이 두 개여도 부족했다. 그는 제일 한가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제일 바쁜 인어였다.
이토록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적은데도, 그를 향한 인간들의 호의는 끊기지 않았다. 훑는 시선에서 음습함은 찾아볼 수 없어서 경계하지는 않았으나 이해도 안 됐다.
“지금 드시는 와인은 하셀의 양조장에서 주조된 것이랍니다. 맛은 괜찮으십니까?”
“응. 달아.”
라얀이 크게 꺼리는 기색 없이 반응을 보이자 헤이든 하셀은 반색하며 주절주절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꽃향기가 나는 단맛이 자랑이긴 하지요. 50년을 숙성해야 이런 맛이 난답니다.”
황금빛의 술은 라얀과 나이가 비슷했다. 더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에리히한테 이걸로 진열장을 꽉꽉 채워달래야지. 또 투덜거리긴 하겠지만 그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해줄 것이다. 라얀은 흥얼거리며 미소를 띠었다.
“그.”
“응?”
라얀을 보다가 서둘러 말 붙이는 헤이든 하셀의 귓불이 왜인지 발그스름했다.
“혹시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대공.”
낭랑한 목소리가 헤이든 하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한껏 치켜든 마리엘이 보였다. 부채를 탁 접으며 그녀가 다가오자 모여 있던 이들이 한 걸음씩 물러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 역시 익숙한 광경 중 하나다. 라얀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면 얼마 가지 않아서 이처럼 마리엘이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정원의 장미 냄새가 향기로워 잠깐 산책하고 싶은데, 에스코트해 주지 않겠어요?”
이목이 있어서 그렇다는 건 알지만 역시 마리엘의 존댓말은 간지럽다. 그에 대답이 조금 늦자 눈을 찡긋거렸다. 당장 응하지 않는다면 후환이 염려되는 눈빛이었다. 라얀은 얼른 손을 내었다. 그 위로 마리엘이 손을 뻗어서 얹었다. 정원으로 나가는 그들을 붙들어 세우는 이들은 없었다.
정원은 장미 향과 풀 냄새가 한데 어우러졌다. 은은한 불빛 속 밀회를 즐기는 연인들을 이리저리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서야 마리엘은 라얀의 손등 위에 얹었던 손을 가지런히 내렸다. 마리엘은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본 뒤에야 벤치에 늘어져 앉았다. 조금 전 도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마리엘 전하. 체통을 생각하시지요.”
마리엘의 유모는 탄식했지만 마리엘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뭐 어때, 유모. 보는 사람도 없는걸.”
유모는 기어이 한숨을 내쉬었다. 들은 체 만 체 하며 배시시 웃은 마리엘은 라얀에게도 앉으라는 듯이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라얀은 그것을 보다가 물었다.
“사실, 마리엘이 나오고 싶어서 나 자꾸 데려오는 거지?”
“구두 벗으니까 살 것… 응?”
뾰족한 구두를 벗어 내던지던 마리엘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라얀의 말을 곱씹던 그녀는 아까 제 유모가 그랬던 것처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유모도, 또 소피아까지도.
눈치가 없는 건 분명 아닌데. 아니, 아니다. 마리엘은 금세 제 생각을 정정했다. 라얀은 자신이 관심을 두는 것에만 한정되어 눈치가 빨랐다. 오라버니인 에르하르트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 혹은 가까이에 두는 시종들의 기분 정도에만.
그러니 다른 이들의 호의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그 호의가 연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달리 보면 라얀에게 한눈에 반한 게 분명한 헤이든 하셀이 가여울 일이었다. 라얀에 관련한 일이라면 쪼잔해지는 오라버니의 기억에 새겨지고야 말았으니.
하지만 억울해할 것은 없었다.
라얀은 황제의 애인이었다. 그것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어떤 누구도 라얀에게 함부로 대하는 꼴은 볼 수 없다며 대공의 작위를 내렸다. 물론 영지도, 권력도 없어 오로지 명예뿐인 자리이긴 했지만. 한마디로 축약해 보자면 이것은 일종의 과시였으며 선언이었다.
그런데도 라얀의 얼굴에 홀려서는 허튼수작을 부리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뭐, 생각해 보면 어떤 위험이든 불사할 만한 얼굴이지만. 평생 고운 것들만 보고 자라 누구보다 심미안 높은 자신이 ―어릴 때였기는 해도― 청혼을 한 것을 보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오라버니는 그것을 못 견딜 만큼 거슬려 했다. 오죽하면 오늘 같은 일이 있을 때 본인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신을 훼방꾼으로 삼을 정도로.
“맞아. 들켰네. 내가 쉬고 싶어서 라얀 핑계 좀 댔어.”
라얀이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티를 내지 않고 홀로 속이나 끓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굳이 말해서 자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가끔 귀찮기는 해도, 사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오라버니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겠는가.
괜히 라얀을 마음에 담았다가 오라버니의 눈 밖에 나는 인사들이야 제 알 바 아니었다. 그리고 라얀에게 시꺼먼 흑심을 품은 이들을 골리고 싶은 것은 마리엘도 마찬가지였다.
“…….”
잠깐의 정적 후 순순하게 이어지는 수긍에 라얀은 의심의 눈초리로 마리엘을 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어깨만 으쓱거리면서 모르는 척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있더니 벗어둔 구두를 도로 신으며 일어났다.
“참, 두고 온 게 있네. 그러면, 여기에 잠깐 있어. 라얀.”
쉬고 싶어서 그를 핑계로 댔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마리엘은 유모와 함께 도로 팔랑거리며 온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자신을 데리고 나와서 인적 드문 곳에 놓고 홀로 돌아갔다. 일정한 패턴을 자각하자 다음에 벌어질 일도 쉬이 예상됐다.
“흐음…….”
하지만 이러는 이유는 잡힐 듯 말 듯 했다. 라얀은 풀벌레가 우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손등을 들어 올렸다. 아까 에리히가 약하게 남겼던 순흔은 몇 시간 사이에 희미해졌다. 다시 수호석을 가지게 된 뒤로 자신의 몸은 어떤 흔적이든 금세 지워냈다.
아쉬워하던 에리히, 연회 따위 가지 않으면 좋겠다던 에리히…….
슬슬 가닥이 잡혔다.
“소피아.”
“네. 혹시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에리히가 너무 귀여운 것 같지 않아?”
“…네? 폐하께서요?”
소피아는 드물게도 표정관리를 못 하며 반문했다. 그 ‘황제’가 대체 어디가 귀엽냐는 듯이. 하지만 그녀의 반응이 어떻든 라얀은 에리히가 하는 짓이 귀여워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어쩌면 이렇게 질투도 귀엽게 할까. 그러고 보면 에리히는 아일라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야 질투였는지도 모르고 마냥 기억력이 좋다면서 그를 칭찬했지만. 이제는 그게 질투였음을 잘 알고 있다.
“라얀.”
그러는 사이, 얼마 가지 않아 수풀을 밟는 소리와 함께 예상한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가 일이 있어서 오지 못한다기에 대신 데리러 왔다.”
다 알고 왔으면서.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평소보다 발그스레한 에리히가 손을 뻗었다. 살짝 웃은 라얀은 그 손을 잡는 대신 팔을 당겨 제 쪽으로 미끄러트리며 쪽쪽거렸다.
“…으, 음!”
불도 밝히지 않은 어둠 속에서 라얀은 벽을 등진 채 앓는 소리를 냈다. 혹시 머리를 부딪칠까 한 손으로 뒤통수를 감싼 에리히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붙어서 라얀의 입술을 탐닉했다.
그들은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
에리히가 귀여워 가볍게 입을 맞췄을 뿐인데, 그게 자극이 되었는지 에리히는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허겁지겁 입술을 붙이며 공간 이동을 했다. 부서지는 금빛 가루 속에서 라얀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이런 적나라한 애정 행각에 익숙해진 게 분명한 소피아의 표정이었다.
“에리히, 아직 연회, 아…, 끝나지 않았는데.”
물론 에리히는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진작 자리를 비우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일렀다. 게다가 오늘부터 며칠 동안 쭉 열릴 이 연회는 에리히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연회의 주인공이 이렇게 이르게, 또 오래도록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걸까.
“지금 그게 신경 쓰여, 라얀?”
에리히는 옷자락 사이를 파고들며 으르렁거렸다.
“귀엽게 굴지를 말았어야지.”
“내가 언제, 아…….”
귀엽게 군 적 없다. 오히려 귀여운 것은 에리히가 아니었나. 라얀은 반박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파고든 손이 유두를 아프지 않게 비틀면서 짓눌렀다. 저릿해졌다. 라얀의 다리가 찰나 꺾여 휘청거렸지만 사이로 파고든 에리히가 흔들리지 않게 받쳐 주었다.
“마리엘이 알아서 하겠지. 신경 쓰지 마.”
열네 살짜리한테 전가하는 말투는 태연했다. 어차피 그 애도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한 것도 아닐 거고. 뒤이어지는 말은 제법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보다 라얀. 네 입 안에서 술맛이 나.”
얼마나 마신 거야? 에리히는 콧등을 살짝 깨물면서 속삭였다. 그의 손은 착실히 라얀의 몸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뒤통수를 감싸던 손은 훑듯이 목덜미로 내려왔고, 뾰족하게 솟은 유두를 지분거리던 손은 등골을 타 올라가 날개뼈를 매만졌다. 슬쩍슬쩍 허리를 움직여 아래를 비비는데 옷자락 사이로 양감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너도, 으, 술맛 나. 써.”
라얀은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맞받아쳤다. 에리히는 다른 술을 마시기라도 한 건지 맛이 달랐다. 술도 못 마시면서 기왕이면 단 걸로 먹지, 싶다가도 그는 원체 단 음식이라면 좋아하지 않으니 술도 단맛이 나는 건 멀리하나 보다 싶었다. 에리히의 입맛을 되짚어보던 라얀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아니, 그냥, 너 귀여워서.”
질색하면서도 자신에게 디저트를 가져다주겠다고 그것을 또 챙겨온 어린 시절의 에리히가, 맛있으니 너도 먹어보라며 건네주는 것에 아무 내색 없이 삼키던 그 모습도.
“혼자서만 여유가 넘치지.”
“아…….”
에리히는 라얀이 엉덩이를 뒤로 물린 것을 비웃듯이 아래를 더 가까이 붙였다. 아까보다 더 묵직해진 느낌이 제 아래를 찔렀다.
“나는 뇌가 녹아버릴 지경인데.”
귓불을 깨물면서 허리를 비볐다. 연이은 자극에 아래가 서서히 힘을 받기 시작했다. 에르하르트는 등골을 지나 옆구리를 문지르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제 은밀한 곳에 에리히의 손이 닿았다. 그는 라얀의 성기를 아프지 않게 쥐며 훑었다. 라얀은 끙끙거리며 에리히에게 기대듯이 안겼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아, 에리히, …으, 응…….”
라얀이 열기에 잠긴 목소리로 에르하르트를 불렀다. 제게 흑심을 품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방긋방긋 웃어주던 라얀을 보느라 꼬인 속이 서서히 풀렸다. 기실, 라얀이 먼저 웃으며 가볍게 입을 맞추던 그 순간부터 형체 없이 사라지던 감정이지만.
이 애는 왜 이렇게 예쁠까.
대체 무얼 먹고 자랐으면 어디 하나 모나고 부족한 데가 없이 사랑스러운가. 조금만 덜 사랑스러웠더라면 황제가 그토록 귀히 여기는 연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라얀에게 수작을 걸려는 이들이 지금보다는 없었을 텐데.
뻔히 의도가 보이는 야회의 초청장이며 연서를 전부 불에 살라버리며 은연중에 경고했는데도 꼭 한 번씩 에르하르트의 속을 긁었다. …물론 라얀은 모든 위협을 감수할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아는 이는 오로지 자신뿐이었으면 했다.
“엘, 손, …손 떼.”
라얀은 허리를 배배 꼬며 엉덩이를 자꾸만 뒤로 빼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자극이 갈까 생각하는 게 빤했지만, …에르하르트는 그의 목선을 따라서 짓씹으면서 기둥을 빠르게 훑다가 손끝으로 선단을 문질렀다.
“나올, 흐, 나올 것… 아.”
제게 안겨 있는 라얀의 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 안에서 꿈질거리던 것이 울컥 파정했다. 에르하르트의 손은 묽은 탁액으로 젖었다. 라얀은 제 젖은 바지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에르하르트의 손을 보다가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손 떼라고 했는데…….”
사정 후 나른해진 목소리로 라얀이 투정 부리는 것을 들으니 머리가 정말 어떻게 되는 것 같았다. 연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말을 포탄처럼 내던지다가도 때때로 정말 생각지도 못한 데서 쑥스러워하는데, 그게 마음 어딘가에 불을 지폈다.
“아무래도 귀엽기는 네가 더 귀엽게 구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잡아 뜯어내다시피 라얀의 옷을 벗겨낸 에르하르트는 그의 탁액으로 젖은 손으로 구멍을 덧그렸다. 파고들어 내벽을 긁자 아래는 익숙하게 에르하르트의 손가락을 잡아 삼켰다.
“아니, 으음, 아니거든.”
서로가 더 귀엽다고 티격태격하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데도 그때마다 서로 진심으로 임했다. 그리고 에르하르트는 늘 궁금했다. 대체 라얀은 뭘 보고 그를 귀엽다고 하는 것인지. 나이 때문이라고 하기엔, 사실… 라얀은 마리엘과 친구라고 해도 크게 위화감이 없었다.
“좋아. 결론을 내보자. 라얀 대체 왜 내가 귀엽다는 건데.”
에르하르트는 나긋나긋하게 물으면서 라얀의 아래에 손가락 하나를 더 쑤셔 넣었다. 라얀은 에르하르트의 어깨를 짚은 채 허리를 떨면서 발갛게 달아오르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혀를 얽고 숨을 갈취했다. 입천장을 긁자 바닥을 지탱하는 발끝에 힘을 주고 그러모았다.
격렬한 입맞춤을 쉬이 따라갈 수 없었다. 라얀의 숨이 달릴 때에서야 에르하르트는 겨우 입술을 뗐다.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말하라고 했으면서…….”
하지 못하게 한다고 라얀은 풀린 눈에 힘을 주며 흘겼다. 그마저 사랑스러워서 입가와 뺨에 입 맞추며 내벽을 문지르자 아, 하고 또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알았어. 이제 정말 말해봐.”
서서히 풀리는 아래에 손가락 하나를 더 늘렸다. 손가락이 세 개가 들어가자 버거운지 라얀은 눈썹을 찌푸리긴 했지만 크게 아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먼저, 단것도, 으음, 못 먹으면서 먹는 척했던 거랑…….”
“응. 그리고?”
그게 대체 언젯적 일이냐는 반박을 하는 대신 에리히는 아래를 벌린 손가락을 휘저었다. 주름진 내벽을 벌려대고 위아래로 쑤시자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또, 질투, …아, 응, 천천히, …질투하는 것도 귀여워.”
“질투?”
이 말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사실이 아니라서가 아니고, 라얀이 눈치챘다는 사실에. 에르하르트는 잡아 벌린 내벽을 더듬으며 라얀을 내려다봤다. 몸을 뒤채던 라얀의 눈이 오늘 창공에 떠 있는 반달처럼 휘어졌다.
“나, 이제 연회에 참석하지 말까?”
대충 넘겨짚는 건 아닌가 했는데 라얀은 그가 정확히 무엇에 질투하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질투하고, 소유욕을 느낀 것도 맞고, 가끔 라얀에게 흑심을 품다 못해 연서까지 보낸 건방진 놈은 군인으로 임명해 저 멀리로 보내버린 것 역시 맞지만, 라얀에게만큼은 결코 내보이지 않으려 했던 제 감정을 들키고 나니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니. 그러지 마.”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 한숨처럼 말했다. 고작해야 치졸한 질투 따위로 그의 발목을 묶어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의 라얀은 새장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저 창공을 누벼야만 했다.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
이것은 그가 알아서 수습해야 하는 감정이었다.
“으, 응… 에리히. 엘.”
라얀이 어르는 것처럼 에르하르트를 불렀다.
“나한테는 에리히뿐인걸.”
“…….”
“다 알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했다. 눈앞이 어질거렸다. 라얀은 정말이지, 말하는 것조차도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더운 숨을 토해내며 야트막하게 있던 수치와 민망을 걷어냈다. 빠듯하기는 해도 아까보다는 풀린 아래에서 손을 뺐다.
그 감각이 퍽 생경한지 라얀의 허리가 튀었다.
“라얀.”
에르하르트는 아까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짓씹듯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허벅지를 붙잡아 옆구리에 걸쳤다.
“허리 잘 감고 있어.”
뻐근해질 정도로 흉흉하게 세우고 있던 성기가 빠듯하게 구멍을 벌리고 들어갔다.
에리히의 성기가 깊이 치고 들어왔다. 벽에 기대 서 있는 탓에 감각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라얀은 오롯이 에리히에게 무게를 지탱한 채로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찔러대는 그를 따라 흔들렸다.
“천천, …아……!”
“안이 너무 좁아.”
“…네가, 으, …크다는 생각은 안 해?”
파도처럼 휩쓰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말하다가 혀를 씹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아픔보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쾌감이 더 컸다. 라얀의 온 신경은 에리히와 맞닿아 있는 곳에 몰려 있었다.
“힘 빼, 라얀. 응?”
에리히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더운 숨이 훅 느껴지자 솜털이 쭈뼛거리면서 곤두섰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라얀은 에리히와 닿아 있을 때면 매번 처음인 것처럼 허둥지둥했고, 몸을 감싸는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등골을 어루만지던 손이 내려와 허벅지를 훑는다. 길고 곧게 뻗은 손은 마치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리드미컬했다. 몸이 흐물흐물 녹는 것 같았다. 에리히에게 기대지 않고 땅을 짚고 서 있는 다리 한쪽이 자꾸만 휘청거렸다.
“내 라얀은 아직 걸음마를 배워야 하는 나이였나?”
“무슨, 흐……!”
웃음기가 번진 목소리에 발끈하기도 전에 에리히가 다른 쪽 다리도 안아 올렸다. 양쪽 다리가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그 낯선 감각에 익숙해지기도 전 에리히가 둔부를 움켜쥐며 위로 찔러 올렸다. 그가 쳐올리는 대로 라얀은 흔들렸다.
“아, 아…….”
얕게, 계속해서 자극점을 찌르며 헤집었다. 쾌감이 희게 점멸했다. 라얀은 숨을 헐떡이면서 에리히의 어깨에 얼굴을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침대, 으, 침대로 가……. 응?”
“네가 원한다면.”
날것의 쾌감을 더 참기가 힘들었다. 쿡쿡 찔러대는 것은 금방이라도 라얀을 잡아 삼킬 것만 같았다. 짓찧던 허리짓을 잠깐 멈춘 에리히는 라얀을 받쳐 안은 채로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움직일 때마다 안에 찔러 넣은 것이 입구를 자극했다. 그의 것이 조금씩 밀려 나왔다가 다시 얕게 치고 들어갈 때마다 희끄무레한 탁액이 아래로 떨어졌다. 으응……. 다리를 타고 흐르는 느낌에 라얀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 무심코 허리를 감아 그를 당겨 안았다. 조금이라도 덜 움직여볼 셈으로 그런 것인데 에리히를 흥분시킨 게 틀림없었다. 그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에리히가 걸음을 멈췄다. 몸이 기울어지자 등에 푹신한 시트가 닿았다. 그가 완전히 제 것을 물리자 아래가 뻐끔거리면서 에리히의 흔적을 울컥울컥 토해냈다. 그것을 치덕치덕 문지른 에리히는 라얀의 다리를 어깨에 걸며 느리게 다시 성기의 끄트머리를 입구에 맞췄다.
젖은 아래는 빠듯하게 에리히를 받아들였다. 그는 느리게 허리를 짓쳤다. 성기가 내벽을 긁고 지나갈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에리히는 고개를 숙여 라얀의 목선을 빨아들였다.
“이렇게 흔적을 남겨놓는 데도, 왜 다들 내 것을 탐하지 못해 안달일까.”
그는 이를 세워 여린 살갗을 긁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아래를 더 붙여 라얀의 성기를 문질렀다. 이미 다시 발기한 성기에 자극이 닿자 금세 두 번째 절정을 맞이했다.
온몸이 가닥가닥 예민해지는 것만 같았다. 신경 줄이 바짝바짝 타올랐다. 라얀은 온몸을 경련하듯 떨면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눈앞이 희뿌옜다. 차오른 눈물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꼬리를 타고 아래로 흘러 떨어졌다.
에리히는 눈꼬리부터 느릿느릿 핥으며 웃음기를 섞었다. 바르작거리며 시트를 움키던 라얀은 그의 손을 잡으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런다고 아래를 짓뭉갤 것처럼 찍어 내리는 힘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엘, 에리히, 아, 이제 그만…….”
더는 못 하겠어. 두 번의 절정을 맞이했는데, 쾌락점을 누를 때마다 말랑해져 있는 성기가 다시 힘을 받자 라얀은 슬슬 힘이 달렸다. 애원하는 말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랑곳하지 않은 에리히는 난폭한 파도처럼, 혹은 잔잔한 물결처럼 아래를 문질렀다.
라얀은 피하듯 위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가로막혔다. 그는 쾌감으로 희뿌예진 머리로 에리히가 흔드는 대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입을 맞추고, 혀를 얽고, 마치 신이 빚어낸 것처럼 근육으로 잘 짜여 있는 단단한 살갗을 손톱으로 긁어 붉은 실선을 남기면서.
“아.”
에리히가 짧게 침음을 뱉었다. 그의 허리짓이 더 격렬해졌다. 그가 꿰뚫을 듯 치받을 때마다 속살이 딸려 나갔다가 다시 처박혔다. 안을 뭉개는 움직임에 라얀은 숨을 헐떡거렸다. 허리 아래로는 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앞으로 절대 먼저 뽀뽀하지 말아야지. 내일이 되면 잊어버리고야 말 생각을 하면서 라얀은 연신 신음을 흘렸다. 깊이 찔러넣은 에리히가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숨을 불어 넣었다.
라얀은 다시 한번 까마득한 절정을 맞이했다. 뒤에서도 뜨거운 감각이 번졌다.
“나, 이제 진짜 못 해…….”
라얀은 발그스름해진 눈으로 에리히를 보면서 얼른 말했다. 에리히는 어딘지 부족해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 없이 그냥 가만히 라얀을 품에 끌어안았다. 결합된 아래가 조금 불편했다.
“움직이면 못 참을 것 같아.”
뒤척거리던 라얀은 그의 한마디에 순순히 안겼다. 물론 불신 어린 눈초리도 함께였다. 이러다가 다시 또 열기가 지펴진 게 하루 이틀이던가.
에리히와의 교미는 좋았지만, 정말 황홀했지만 그런 만큼 진이 빠졌다. 몸을 완전히 회복한 뒤로는 기력이 달려본 적이 없는데 그와 관계를 나누고 나면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올올히 올라선 감각이 쉬이 사그라들지 않아 라얀을 괴롭혔다.
라얀은 괜히 발가락을 움켰다가 활짝 폈다 하면서 감각을 떨쳐 내려고 애썼다.
“라얀.”
“…진짜 안 돼.”
더 했다가는 정말로 너무 버거웠다. 한 번 더 이르자 위에서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눈만 흘끔 올려서 에리히를 보니 그가 눈을 길게 접어 웃고 있었다. 왜 웃냐는 듯이 바라보자 엉덩이를 톡톡 두드린다. 결합되어 있는 부분에 자극이 닿자 허벅지 안쪽이 떨렸다.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니라.”
한참 웃으며 라얀의 얼굴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던 에리히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야회에 가는 건 괜찮은데.”
“…….”
“너무 다 받아주지는 말라고.”
그새 까맣게 잊고 있던 말의 연장선이었다. 라얀은 에리히를 흘끔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에리히의 목덜미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이런 건 어릴 때와 똑같다.
역시 귀여웠다.
대체 왜 모두가, 심지어 당사자마저도 스스로의 귀여움을 부정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귀엽고,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제 몸 안에 여전히 둥지를 틀고 있던 것이 살짝 빠져나갔다. 아래가 허전해지는 감각에 인상을 찡그린 라얀은 꾸역꾸역 에리히의 몸 위로 기어 올라갔다.
“라얀?”
라얀은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뺨을 양껏 쥐고 입을 맞췄다. 에리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잠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는 듯이 가만히 보다가 제 몸 위로 올라가 있던 라얀의 몸을 그대로 뒤집었다.
“알지? 나는, 아마도 참으려고 했어.”
라얀의 고개 옆으로 팔꿈치를 기댄 에리히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속삭였다. 양옆으로 눈을 굴리던 라얀은 입을 벌리며 목을 둘러 안았다. 에리히가 벌린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 * *
에리히의 생일 당일. 연회는 특별하게도 선상에서 열렸다.
모든 인원을 수용할 수는 없는 터라 선별된 이들만 배에 오르고, 나머지는 고성의 홀에 열리는 연회에 잔류했다. 더운 물기를 머금은 아르헨의 여름을 내심 버거워하던 귀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양 호기심 어린 얼굴로 승선을 기다렸다.
라얀도 평소였더라면 그 대열에 합류했을 것이다. 바다는 그의 터전이었지만, 배에 오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엘. 인간들은 배를 띄우면 뭘 하고 노는 거야? 그게 재미있어? 응? 기실 갑작스러웠던 아르헨행 자체가 라얀의 한마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라얀은 즐거움을 누릴 수가 없었다. 내심 긴장한 낯빛으로 손만 쥐락펴락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전하의 선물이라면 폐하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실 거예요.”
보다 못한 소피아가 라얀을 살살 달랬다. 워낙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터라 그녀는 라얀이 선물을 준비한 게 맞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제 말이 틀리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라얀이 지나가던 길에 주웠다면서 돌멩이 하나를 선물이랍시고 건넨다면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도 남을 이였다. 황실의 보고에 넣어두고 국보로 삼아 대대로 물려주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 황제이니 라얀이 빈손이라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왜 그렇게 오래 안절부절못했느냐고 안아서 달래주지 않을까.
“…그럴까?”
“그럼요.”
라얀이 머뭇거리면서 되묻자 소피아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라얀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이 조금이나마 희미해졌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문이 열렸다. 소피아가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평소에도 화려하지만 부쩍 눈이 부셨다.
흘러내리는 금발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사파이어로 장식한 새하얀 예복을 갖춰 입은 에리히는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라얀이 멍하니 있자 에리히가 다가와 손을 내민다.
“왜. 또 반한 것 같아?”
내가 언제 반했다고. 물론 매일매일 반하지만. 라얀은 새침하게 흥흥거리면서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연인의 생일을 축하해 줄 시간이었다.
마리엘은 일곱 살 때 배를 타봤는데 그때 속이 울렁거려서 힘들었다며, 승선하는 대신 고성에 남아 있기로 했다.
‘라얀. 오라버니 반응 꼭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기야. 알았지?’
라얀이 에리히에게 무슨 선물을 주려는지 유일하게 알고 있는 마리엘은 배에 오르는 라얀을 황급히 붙잡고 귓속말을 했다.
‘아이참. 내가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하는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던 마리엘은 에리히가 둘이서만 속닥거리는 모습에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리자 혀를 쯧쯧 차며 한 걸음 멀어졌다. 하여튼 집착은,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지만 에리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배에 오르자 선내에는 아름다운 선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한껏 기대 중이던 귀족들은 삼삼오오 난간에 기대어 바깥을 구경했다. 라얀은 그들 틈에 섞이는 대신 에리히에게 이끌려 위층 선실로 올라갔다.
배가 해안가에서 멀어질수록 바닷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그리우면서 익숙한 내음이었다. 종종 와서 알레와 만나고, 혹은 홀로 헤엄치면서 놀 때와는 달랐다. 잘게 일렁이는 물결에 창백한 달이 비쳤다.
“라얀. 하늘을 봐야지.”
라얀이 배 주변으로 이는 포말을 바라보느라고 여념이 없는데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높은 데서 더 잘 보라고 기껏 데리고 올라온 건데.”
그제야 라얀은 고개를 들었다. 폭죽이 어두운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핑, 하고 위로 솟아오른 불꽃은 여러 가지 색으로 산란했다. 그가 어릴 적 늘 꿈꾸고 상상했던 광경이었다. 연녹색의 눈동자에 찰나 모든 색이 담겼다. 붉은빛이 되었다가, 푸른빛이 물들고, 노란색으로 물들다가 다시 평소의 녹빛이 되었다.
“어때?”
“예뻐.”
불꽃놀이는 제르바에서도 몇 번 봤다. 그러나 어둠을 머금어 검은빛으로 일렁이는 바다 위에서 터지는 불꽃을 보는 것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황홀했고, 기뻤다.
에르하르트는 난간에 기대다시피 하는 라얀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미 터트리는 불꽃에 정신이 팔린 라얀은 순순히 안겼다. 에르하르트는 하늘이 아니라 제 연인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가느다랗게 뻗은 속눈썹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음영이 드리웠다. 라얀의 얼굴에는 근심 대신 은근한 미소와 즐거움이 엿보였다.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지난 며칠,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 생일 때문에 고민하던 라얀을 모르지 않는다.
틈만 나면 생각하고, 잠꼬대로도 중얼거렸다. 가끔은 자신이 보석함에 모아둔 진주를 보면서 이것을 팔면 돈이 되는지 갈등하고, 또 안 그런 척 뭐가 좋으냐고 묻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냥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고작해야 그게 뭐라고.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고민이 귀여웠고 한편으로는 애틋했다.
먼지 한 톨, 그가 먹다 남긴 쿠키 조각, 혹은 아무 데서나 굴러다니는 돌멩이 따위를 줘도 에르하르트는 그것을 그 어떤 것보다도 귀히 여길 수 있었다. 사시사철 라사드 궁의 후원 한구석을 차지한 채 경관을 해치는 데 가장 크게 기여 중인 그 눈사람처럼 말이다. 혹은 저번 생일에 라얀에게 받았던 들꽃과 그의 지느러미 비늘처럼. 라얀은 모를 테지만 그가 준 그 선물은 마법으로 영구 보존해 제 보고에 넣어두고 종종 꺼내 보고는 했다.
제게 있어 라얀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선물이었다. 숨 쉬는 것으로도 기적이었고, 그를 향해 웃어주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라얀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보다가 그의 뺨을 아프지 않게 살살 꼬집었다. 말랑말랑한 촉감이 손에 감겼다.
“이금, 머하는 거야?”
홀린 듯 불꽃놀이를 보던 라얀은 에리히에게 시선을 돌렸다. 뺨이 잡아 당겨진 탓인지 발음이 샜다.
“내 선물을 보고 있지.”
선물? 라얀의 눈이 양옆으로 도르륵 굴렀다. 그러다가 에리히가 이르는 선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에리히는 아쉬워하는 기색으로 순순히 놓아주었다. 라얀은 뺨을 매만지며 괜히 불퉁하게 말했다.
“선물 따로 있는데.”
“…정말?”
에리히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지, 저 표정은. 라얀은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제야 에리히는 제 표정을 수습했다.
물론, 라얀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에리히의 선물을 고르지 못했다. 무얼 고르든 남루하고, 형편없어 보였다. 언제나 그의 훌륭한 조언자였던 알레도 이번만큼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가오는 날에 전전긍긍하던 라얀에게 실마리를 준 것은 다름 아닌 에리히였다.
“뭐야?”
하지만 막상 줘야 할 때가 되니 라얀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특히 은근히 기대 어린 눈이라든가, 살살 풀리는 입가를 보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눈감아봐.”
머뭇거리던 라얀은 손을 뻗어 에리히의 눈꺼풀을 내렸다. 그는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손바닥에 닿는 속눈썹이 간지러웠다. 라얀은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내렸다. 여전히 에리히의 눈은 꼭 감겨 있었다.
“손도 내밀어봐.”
“대체 뭘 하려고?”
에리히는 반문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길게 뻗은 손이 제 앞에 놓였다. 그것을 보던 라얀은 에리히의 눈앞에 손을 한 번 흔들었다. 혀를 쏙 내밀어보기도 하고, 소리는 내지 않고 입으로만 바보, 멍청이라고 속삭여보기도 했다. 에리히는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에도.
그제야 라얀은 주머니에 꾸물꾸물 손을 집어넣어 에리히의 선물을 꺼냈다.
“…….”
심플하게 세공된 반지가 라얀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에리히에겐 이보다 더 화려한 게 어울릴 것 같았으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것도 마리엘 덕분에 구한 것이었다. 으음, 앓는 소리를 낸 라얀은 에리히의 손을 조심히 맞잡은 채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매일 만지작거리던 손이라 대강 어림짐작만 했는데 딱 맞았다.
“이게…….”
눈을 뜨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에리히의 푸른 눈이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고정되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겠지. 슬쩍슬쩍 곁눈질을 했는데 그의 감정을 짚어낼 수 없었다.
라얀이 반지를 생일 선물로 준비하게 된 계기는 별거 없었다.
‘으음, 결혼 서약할 때 서로에게 반지를 건네. 그게 영원한 사랑의 약속이래.’
인어는 영원을 함께하고 싶을 때 반려의 인을 새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매개로 사랑을 맹세할까. 그가 인어인 것을 아는 사람은 둘뿐이니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 만한 이는 결국 한 명뿐이었다. 마리엘에게 넌지시 묻자 아이는 피아노 건반을 동당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러다가 금방 뒤돌아 라얀을 보는데 눈이 반짝거렸다.
‘오라버니한테 반지를 주려고?’
자꾸 흔적을 남기는 것도 그렇고, 질투를 하는 것도 그렇고……. 라얀은 에리히한테 확신을 주고 싶었다. 굳이 살갗에 새겨진 흔적이 아니더라도 나는 너의 것이며, 너는 내 것이라는 명징한 증거 역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안타깝게도 에리히는 인어가 아니니, 반려의 인을 나눌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방식을 따라야 했다. 그리하여 라얀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반지를 골랐다.
조금만 더 일찍 생각했더라면 에리히에게 보다 어울리는 디자인을 고를 수 있었을 텐데.
“생일 축하해.”
치미는 아쉬움을 삼키며 에리히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때까지도 에리히는 아무 말 없었다. 가만히, 아주 오래도록 라얀이 끼워준 반지를 눈에 담았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서.
“…그, 별로야?”
시일이 촉박했지만 마리엘을 괴롭혀가며 나름대로 에리히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고르고 고른 것이다. 흰 피부에 어울리는 백금 테에 그의 눈빛을 꼭 닮은 블루 다이아몬드를 박았다. 라얀이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심 조마조마하며 묻자 그제야 에리히는 눈을 깜빡여 라얀을 보았다.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번졌다. 그는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가, 결국은 라얀을 끌어당겨 안았다. 어찌나 강한 힘인지 숨이 막힐 정도로.
“에리히. 아파, 아프다니까.”
켁켁거리며 팔뚝을 두드리자 그제야 에리히는 라얀을 놓아주었다. 그의 얼굴은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다른 감정 하나 없이 오로지 기쁨만이 역력한 얼굴에 그제야 안절부절못하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잘 끼고 다녀. 봐. 누가 에리히한테 수작 부리면 왼손을 이렇게 흔들어야 해.”
라얀은 반지 낀 손을 흔들어 시범을 보였다.
“자. 따라 해……. 에리히?”
에리히는 한쪽 무릎을 꿇고 라얀이 흔들던 왼손을 붙잡아 덜컥 입을 맞췄다. 서늘한 반지에 입술의 온기가 옮아 미지근해졌다. 괜히 간지러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에리히는 놓아주지 않았다. 라얀은 그가 하는 대로 뒀다.
“라얀.”
한참을 그러고 있던 에리히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정말로.”
“……”
“내 평생, 이토록 완벽한 생일은 여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왜 그런 말을 해?”
라얀의 반문에 에리히가 눈만 올려 그를 바라봤다. 라얀은 그가 그런 것처럼 무릎을 꿇어서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속삭였다.
“나는 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네 생일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거야.”
쌓이고 쌓이면 그게 평생이 되고, 영원이 되도록. 우리의 사랑이 빛바래지 않고 찬란해지도록.
“너의 모든 날을 빛나게 만들어줄 거야.”
라얀은 그를 끌어안으며 맹세했다. 에리히는 순순히 안겼다. 나도. 나도 너한테 그런 날만 만들어줄 거야. 라얀. 목이 잠겼는지 속삭이는 말은 조용했지만 제게는 아주 선명한 소리로 들렸다.
하늘 위로 또 불꽃이 펑펑 터지며 그들을 오색찬란하게 물들였다.
완벽하고 완전한, 날이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