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끝의 시작
“어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하는 입맞춤은?”
감정을 자각한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던 연인이 서늘한 낯으로 물었다. 라얀은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에리히를 올려다봤다.
난폭하게 침입한 살덩이는 답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양 여린 살을 문지르고 혀를 얽었다. 그의 입맞춤은 사나웠다. 때로는 설레고, 때로는 조급했던, 또 늘 다정했던 과거의 입맞춤과는 달랐다. 라얀은 난폭한 입맞춤을 따라가지 못해서 숨을 헐떡거려야만 했다.
“싫은가?”
“…….”
“아니면 진저리칠 정도로 끔찍한가.”
“나는.”
말이 채 매듭지어질 틈이 없었다. 그러기에 앞서 에리히의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그는 라얀의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너랑 닿는 게 끔찍할 리가. 내가 얼마나 바라 마지않은 순간인데. 나는 항상 너와 이렇게 닿기를 원했는데. 더 나눌 것이 없어도, 그럼에도 나누고 싶었는데. 차마 나오지 못한 문장들은 혓바닥 아래에 고여 연인의 타액과 함께 삼켜져야 했다.
정신이 없었다.
에리히는 제게 조금의 여유도, 정확히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굴었다. 혓바닥을 감고 비비면서도 손은 성급하게 단추를 끌렀다. 그마저도 반 정도 끌렀을 때는 쥐어 잡아 뜯었다. 투둑. 옷이 볼품없이 뜯어졌다.
장작을 날름 삼키는 벽난로의 불길에도 서늘한 공기가 살갗에 닿았다. 거듭한 입맞춤에 흐물거리던 라얀은 무심코 몸을 움츠렸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뜨거운 열기가 뱀처럼 맨몸을 문질렀다.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손이 등골을 타고 내렸다. 선연한 감각에 솜털이 바짝바짝 올라섰다. 아. 라얀은 그의 손길을 따라 몸을 움찔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마저도 머금고 있는 에리히의 입술 틈으로 흩어져 뭉개졌다. 고작해야 그만한 소리가 에리히를 자극한 게 틀림없다. 라얀을 향하는 새파란 눈동자가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강아지처럼 굴지 마.”
내가 개새끼처럼 구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에리히는 손을 뻗어 라얀의 손 마디마디 사이에 깍지를 끼우며 턱을 빨았다. 턱선에서 미끄러지는 입술은 목울대로 내려갔다. 아무 흔적도 없는 새하얀 목에 붉은 울혈을 남겼다.
에리히는 새기는 것처럼 빼곡하게 흔적을 채웠다.
“흔적이 남지는 않았군. 다행히도 말이야.”
그는 라얀이 아까 밟혔던 곳을 혀를 단단히 세워 핥으며 중얼거렸다. 다행이란 말이 라얀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자를 향한 것인지 모르겠다. 애초 그런 것을 심도 있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습기 찬 입술이 가슴을 빨았다. 이를 세워 도드라진 부분을 긁었다. 라얀은 허리를 가늘게 떨며 헐떡거렸다.
“간, 지러워…….”
이게 정말 간지럽다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보다는 더 깊었고, 묘했다. 하지만 조각난 낱말로 정확한 감각을 정의 내리기란 어려웠기에 떠오르는 단어를 내뱉었다. 깍지 낀 손을 바르작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뱉어내는 숨이 열 올라 달떴다.
그만하고 싶기도 했고, 조금 더 했으면 좋겠기도 했다.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라얀은 손가락을 구부렸다. 손끝에 에리히의 손등이 닿았다.
의미 없이 긁는 손짓에 에리히가 잠깐 멈칫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그의 입술이 만약 깃펜이었더라면 라얀의 몸은 온통 그의 흔적으로 빼곡했을 것이다. 아래로 향하던 입술이 아랫배를 문질렀다.
그리고,
“아무래도 사랑하지 않는 이와 하는 짓도 금방 익숙해질 것 같군.”
자극으로 반쯤 단단해진 것이 에리히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너도, 나도 말이다.”
“아…….”
사랑하지 않는 이. 그 말이 쾌락에 절어 흐트러진 머릿속을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그렇지?”
라얀이 그에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피를 머금은 것 같은 입술이 비틀렸다. 에리히는 라얀의 다리를 벌려 그 틈으로 제 다리를 밀어 넣으며 명령했다.
“입 벌려.”
잠깐의 머뭇거림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에리히는 입술을 맞대고 끄트머리에 웅크리고 있는 살덩이를 기어이 잡아서 문질렀다. 그러면서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가 허리를 짓칠 때마다 서로의 성기가 탁탁 비벼 올려졌다. 벌써 단단해진 에리히의 것이 라얀의 것을 깔아뭉갰다. 끔찍한 감각의 점멸이었다.
“흐, 으…….”
미처 삼켜지지 않은 신음이 입술 표면으로 기어 나온다.
머리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피가 식었다. 에리히의 말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 이. 사랑하지 않는. …제 연인이, 연인 같지 않았다. 늘 닿고 싶고, 이 바라마지 않던 순간이 찰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시선을 맞추던 에리히가 제 눈에 서린 낯섦을 잡아챈 양 사납게 짓씹었다. 그는 라얀이 낯섦을 털어내기도 전에 발목을 잡아채 제 어깨에 걸치게 했다. 라얀의 다리가 허공에 떠서 달랑거렸다.
“나를 봐.”
“…….”
“라얀.”
“으…….”
“짐을, 나를, 보라고 했다.”
에리히가 보라고 하는 게 단순히 눈앞의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뜻이 아님을 알고 있다. 에리히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그 ‘개자식’을 제게 겹치지 말라고 을러대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그 애가 넌데. …하지만 너는 결국 그 애가 아니기도 했기에 마음이 실타래처럼 꼬였다. 풍랑처럼 흔들리는 마음은 뜻대로 움켜지지가 않았다.
“나를 보지 않겠다면, 보게 해야지.”
음습한 소유욕을 드러낸 에리히가 허벅지를 잡아 쥐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한 번도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적 없던 아래쪽에 물기에 젖은 습한 것이 닿았다.
“내 생각 말고는 무엇도 하지 못하게.”
“흐으……!”
뾰족하게 세운 혀가 아래를 적셨다. 라얀은 허리를 뒤틀었지만 모든 저항이 무용했다. 머리가 희어졌다. 머릿속에 들러붙어 있던 생각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흩어졌다.
허벅지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라얀은 얕은 신음을 흘리며 흐려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태양 같은 정수리가 보였다. 언뜻 보이는 새파란 눈동자는 라얀을 꿰뚫을 것처럼 주시하였다. 마치 네 아래에 있는 게 누구인지 알라는 듯이 명확하고, 확고한 뜻을 담아.
“아, 아… 하지, …흐으…….”
주름을 핥으며 안으로 파고 들어간 혓바닥의 감각에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진저리쳤다. 쾌락이 포말처럼 라얀을 덮쳤을 때 바짝 서 있던 성기가 묽은 액을 울컥거리며 뱉어냈다. 흥분을 가라앉히듯이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떨렸다.
“아…….”
에리히는 아래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올리며 우묵한 아랫배에 고인 정액을 손으로 훑었다. 그러곤 풀어진 라얀의 얼굴을 보곤 알 수 없는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조금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라얀에게 무게를 실었다. 그는 성급해 보였고 여유라곤 한 조각도 없어 보였다.
폐, 까지 꺼내진 말은 맺어지지 못했다. 혀가 침입했던 자리에 그보다 더 부피 있는 것이 진입했다. 고작 끄트머리였을 뿐이다. 하지만 벌어지는 느낌에 라얀은 숨을 멈췄다.
“숨 쉬어.”
에리히는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한 마디씩 끊었다. 손가락이 라얀의 입 안을 느릿하게 휘저었다. 혀를 누르고 입천장을 긁는 느릿한 손짓은 마치 키스하는 것 같았다. 라얀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그 옅은 날숨과 동시에 에리히가 허리를 깊숙이 짓쳤다. 뼈가 부딪힐 만큼 깊게 들어온 단단한 성기가 내벽을 무작스럽게 벌렸다.
꼬리가 갈라졌을 때처럼 고통스러웠다. 작살에 꿰뚫리면 이렇게 아프지 않을까. 불로 달군 꼬챙이로 아래를 지져대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바르작거리면서 벗어나려고 밀어냈지만 어망에 갇힌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 쉬라니까.”
허우적거리자 에리히가 눈가를 형편없이 찡그리며 속삭였다. 그는 고개를 내려 입술을 포갰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더운 숨이 불어 넣어졌다. 에리히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것같이 푸르기만 했던 눈빛이 마치 일렁이는 심해 같았다.
에리히. 부를 수 없는 이름이 목구멍에 턱 걸려 나오지 못한다. 라얀은 대신해 덜덜 떨리는 팔을 뻗어서 목을 감았다. 기억 속 연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다는 듯이. 에리히는 라얀의 접촉에 멈칫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양 성난 파도처럼 쳐올렸다.
내벽이 그의 추삽질을 따라 쓸렸다. 맞닿은 살이 적나라한 소리로 맞부딪쳤다. 벽난로의 타닥거림은 금세 다른 소리에 삼켜졌다.
마디마디 분절되는 신음과 희미한 울음, 살과 뼈가 부딪치는 소리…….
“너는, 이상해.”
“흐, 으……!”
그는 라얀을 집어삼킬 것처럼 짓쳐대며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고통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감각이 채웠지만 그럴수록 공허해졌다. 정의 내릴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빠듯한 충만감과 서늘한 결핍이 크게 부풀다 꺼지는 흉곽과 함께 오르내렸다.
울음이 눈가에 맺혔다. 에리히의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라얀은 눈물을 털어내듯 눈을 부산스레 깜빡이면서 더 필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래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깊어지는 밤, 라얀은 제 의식이 점멸할 때까지 에리히의 아래에서 헐떡거렸다.
* * *
라얀의 표정이 부쩍 심각했다. 사교계의 작은 태풍을 지켜보는 소피아의 표정 역시 덩달아 심각해졌다. 혹시 제 언행에 실수가 있었나. 아니면 다른 이유인 건가. 내내 제 행적을 되짚어봤지만 뾰족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헤르. 혹시 불편한 게 있으신가요?”
소피아는 제게 이런 막중한 임무를 부여한 위르겐을 원망하면서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응?”
언제 심각한 표정을 지었냐는 양 주름진 미간이 곧게 펴진다. 마치 봄처럼 연한 녹빛의 눈동자 안에 자신이 올곧게 담겼을 때, 소피아는 숨을 들이켤 뻔했다.
라얀이 르네궁에 머무른 지 한 달이 되었다. 그 말은 소피아가 라얀의 곁을 지키게 된 지도 마찬가지로 한 달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전히 저 얼굴엔 익숙해지지 않았다. 순간 모든 상념을 잊게 하며, 탄식이 새어 나오게 하는 얼굴에 어떻게 익숙해질 수 있겠나.
하지만 적어도 ‘척’이라도 해야 했다. 라얀이 황제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이상.
3년 전 홀연히 사라졌던 황제의 애인이, 그 손을 잡고 돌아왔다. 황제는 다시 그에게 르네궁을 내어주었고 온갖 사치품을 실어 보냈다. 궁중에서 제일 값지고 귀한 것은 보고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교계는 당연히 뒤집어졌다. 3년 전에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해서 황제가 3년 내내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전장을 나돌던 게 아닌가. 혹시 극도로 닮은 얼굴이 아닌가, 등등. 그 태풍의 당사자는 3년 전에나, 지금이나 황제가 싸고돌아 털끝 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더욱 불타올랐다.
더러는 예뻐봐야 얼마나 예쁘겠냐며 비웃었지만, 글쎄, 과연 라얀을 직접 보면 그 말을 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정말 딱 그만큼, 아니, 규격 외로 아름다웠다. 미인을 얻기 위해 수년간의 전쟁까지 불사했다던 어떤 신화가 어렴풋이 이해될 만큼.
“소피아?”
가만히 있을 때는 햇살 같았고, 수심이 그어져 있을 때는 심금이… 소피아는 돌아오는 라얀의 반응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에클레어에 손을 대지 않으셔서요.”
그제야 라얀의 시선이 내내 손대지 않고 있던 에클레어에 닿았다.
“혹시 질리신 거라면 주방장에게 일러서 다른 것으로 내오는 것도.”
“아니야. 괜찮아.”
고개를 저은 라얀은 에클레어를 반으로 솜씨 좋게 갈라 조각난 것을 포크로 찍어 삼켰다. 평소처럼 달콤한 맛이지만 잘 느껴지지 않았다. 라얀의 생각은 이미 다른 데 기울어 있었다.
어제, 꿈을 꿨다. 에리히와 처음으로 이어지던 날의 기억이었다.
조금쯤 행복하지만, 또 모순적이게도 불행했던 날을 이제 와 곱씹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날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되어 다른 것을 자각했을 뿐이다. 가령…….
“황제 폐하 오셨습니다.”
바깥에서 시종이 에리히가 온 것을 알리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라얀은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라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다가온 에리히가 라얀을 품에 끌어안은 탓이었다. 노골적인 애정행각에 소피아는 익숙하게 뒷걸음질 쳐서 물러났다. 탁. 문이 닫히자 오로지 둘만 남았다.
“왔어?”
“또 칠칠치 못하게.”
에리히가 고개를 숙여 라얀을 살피더니 입술의 크림을 훑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리면서, 라는 반박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이 나올 겨를은 없었다. 뺨을 감싸 쥐는 손길에 따라 턱을 들어 올리자 키스가 깊어졌다.
“으응…….”
입 안 곳곳을 탐하던 것이 라얀의 혀를 빨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견딜 수 없어서 양팔로 에리히의 목을 힘껏 감으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에리히와의 키스는 좋았다. 그가 자신을 휘저을 때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온몸에 힘이 빠져 흐물거렸다. 그렇게 비벼지는 체온과 맞닿아 있는 몸 너머로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이 좋았다.
입술이 머금어졌다가 숨 쉴 틈이 생길 때마다 타액으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라얀의 손이 미끄러졌다. 본능적으로 옷자락을 움키며 쓸자 날개뼈가 그 손짓을 따라 들썩거렸다.
“이제 깔끔해졌네.”
잠깐 숨을 고른 에리히는 쪼듯이 입술을 가볍게 부딪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이 다정하게 라얀의 입술을 문질렀다. 부은 입술에 닿는 손길은 세심하고 다정했다.
“나갈까?”
라얀은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
제르바로 돌아온 지 딱 한 달 즈음이 되었다. 라얀은 아티사에 있을 때보다 더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만끽 중이었다. 에리히는 자신에게 무엇이라도 더 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아르헨이, 혹시라도 바다가 그리우면 언제든 보러 가자면서 르네궁에 이동 마법진을 새겨주었다. 게다가 바쁜 게 분명한데도 틈틈이 라얀을 찾아와 잠깐씩이라도 보고 다시 숨통 트인 얼굴로 돌아갔다.
라얀은 에히리의 행동이 어떤 감정으로부터 기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치받아 오르는 불안 때문이다. 수없이 확신을 주었는데도 그는 이따금 새삼스러운 눈으로 라얀을 바라봤다. 뺨을 만지작거리고, 심장 박동에 귀 기울였다.
‘나 여기 있어.’
그럴 때마다 라얀은 에리히에게 찰싹 달라붙어 온기를 나누어주면서 속삭였다. 허기진 마음이 달래지기를 바라면서. 제 이런 노력이 효과가 없진 않았는지 지난 한 달 동안 에히리의 불안은 꽤 옅어져 있었다. 여전히 밤에는 라얀이 자신의 품에 없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굴지만.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삐걱거리는 일상은 느리지만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날씨 좋다.”
바람이 사근사근하게 뺨을 스쳐 지나갔다.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멀찍이서 뒤따라오는 시종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둘이 함께 있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좋아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에리히가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왜?”
에리히는 라얀을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는 걸 견디지 못했기에 힘을 준다고 한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냥 동요하는구나, 느껴질 정도였다.
“예뻐서.”
“나는 엘이 더 예쁜 것 같은데.”
목을 꺾어야 볼 수 있을 만큼 많이 자랐지만, 손도 한 마디는 더 크지만 라얀은 여전히 에리히가 작고 어린 인간으로 보였다.
내 연약하디 연약한 인간. 뭐, 내가 나이도 많으니까. 바깥에서 지내다 알게 된 건데 인간이 가장 우선시하는 게 신분이고, 그다음으로는 나이였다. 그러니까 자신은 에리히보다 아주 한참이나 어른이었다.
“귀여워.”
라얀은 에리히의 뺨을 가볍게 문지르며 속삭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회의장에서 황제의 날 선 혓바닥에 갈려 나가다 잠깐 자유를 찾은 궁정 대신들이 들었다면 기함할 말이었다.
“귀여워? 누가? …대체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하는 건지.”
에르하르트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무구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인을 바라봤다.
“나는 귀엽지 않아.”
“그러면?”
“생각이 깊고, 성숙하지. 나도 이제 어엿한 성체란 말이야.”
되돌려진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양 라얀의 눈썹이 불만을 품고 한껏 올라갔다. 토라졌는지 씰룩거리며 옅게 지는 주름마저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그래 봤자 오래 토라져 있지도 못할 거면서.
“라얀.”
“응.”
역시나 오래 모른 척하지 못하고 냉큼 대답이 돌아왔다. 웃음을 겨우 삼키며 아까 보자마자 내심 마음에 걸렸던 것을 짚었다.
“에클레어는 왜 남겼어?”
“아…….”
그의 물음에 라얀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것은 라얀이 부쩍 좋아하는 것이었다. 단 거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는 그가 자주 찾는 디저트인데 반의반도 먹지 않은 것을 보니 영 마음에 걸렸다.
질리지 않게 곧잘 변주를 주었는데도 질렸나. 물론 한 달 내내 먹었으니 질리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라얀이 좋아할 법한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시켜야 하나. 에르하르트는 요리사가 들었더라면 경악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나갔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이 이곳에서의 생활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연인을 위하여 기꺼이 등지고 온 제 터전이 조금도 그립지 않게, 아쉽지 않게, 자신을 선택한 것이 후회되지 않도록.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라얀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좋고, 소중한 것만 안겨주고 싶었다.
“앞으로 다른 간식을 내오라 이를까?”
“아니!”
라얀은 격렬하게 부정했다. 인간 세상의 음식은 대개 맛있었고, 에리히가 준 것은 전부 입맛에 딱 맞았지만 그중 부쩍 입에 당기는 것이었다.
다만 오늘은 다른 생각에 빠졌을 뿐이다.
가령,
“그냥,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에리히는 어째서 자신과 교미하지 않는가.
입맞춤은 시시때때로 했다. 어두운 밤, 침대에 파묻힌 채 몸을 얽고 혀를 섞었다. 서투르게 에리히를 따라가다 보면 둘을 감싼 열기가 농밀해졌다. 그럴 때면 에리히는 열 오른 숨을 한참 동안 씨근덕거리다가 라얀을 품에 안고 잠을 청했다.
“무슨 생각?”
그동안은 에리히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그의 불안을 달래주느라 의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꿈을 꾸고 자각하고 나니 자꾸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니까, 꼭 에리히가 그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만 같다고.
“혹시 아르헨이 생각나? 다녀올까?”
라얀이 실수로 고개만 살짝 끄덕여도 바로 아르헨으로 가자고 할 기세다.
“말고.”
“그럼?”
“음…….”
라얀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에리히는 곧 귀를 바짝 기울여왔다.
“에리히 생각했어.”
속닥거리는 말에 에리히의 얼굴에 곧 웃음이 스몄다. 거짓말은 아니니까. 라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에리히에게 더 바짝 기댔다.
“그렇게 귀여운 말은 좀… 예고하고 해.”
“흥.”
풀리는 입꼬리를 겨우 매만진 그는 라얀에게 품을 내주었다. 익숙한 온기였다. 깍지 낀 손에 장난을 치며 생각을 밀어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짚어보면, 에리히 역시 이 순간순간을 새기느라 그런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 복잡하던 생각을 정리하자 코끝으로 꽃향기가 스쳤다.
“봄이 왔네.”
이곳의 봄을, 내가 보고 있네. 향기가 올라오는 방향을 바라보며 속삭이자 행간을 헤아리던 에르하르트가 꽃대를 망설임 없이 꺾어 쥐여 주며 대답했다.
“그러게. 봄이지.”
손바닥에 닿는 노란 꽃과 에리히를 번갈아 보던 라얀이 웃는다. 산책은 결국 기다리다 못한 위르겐이 이제는 가셔야 한다고 사정을 하기 전까지 한참 이어졌다.
* * *
르네궁의 구석구석이 에르하르트가 연이어 보낸 꽃다발로 채워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색색의 꽃이 침실을 화사하게 장식했다. 더 이상 침실에 둘 데가 없자 회랑의 화병에 장식했다. 덕분에 궁에는 꽃향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내 몸에서도 꽃향기가 날 것 같아.’
어디를 가든 은은하게 스며드는 향기에 자신의 몸에서도 꽃향기가 날 것 같다고 말하자 에리히는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렇다면 네가 내 봄이네, 하고.
“라얀.”
이렇게 다정한데, 이렇게나 제게 부드러운데 왜 교미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 라얀의 매끈한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꿈으로 자각한 이후로 라얀은 며칠에 걸쳐서 은근하게 내색을 보였다. 입을 맞출 때 괜히 에리히의 등을 쓸어내리기도 했고, 껴안고 잘 때 부러 그 틈에 파고들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키스가 짙어질 때가 있었지만 그는 끝내 담백한 태도를 견지했다.
“라얀.”
대놓고 물어볼까. …하지만 이상하게 부끄럽다. 살아가면서 라얀이 부끄러움을 느껴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는데, 그 몇 번 되지 않는 것들이 대체로 에리히와 관련되어 있었다. 고백을 했을 때라거나, 아니면 이번 같은 일이라든가. 전부 다.
“라얀!”
“어?”
높아진 언성이 라얀을 불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마리엘이 불퉁해진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라얀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배시시 웃었다.
“세 번이나 불렀어. 라얀 차례란 말이야.”
마리엘은 그들 사이에 놓인 체스판을 가리키며 새치름하게 말했다. 아. 라얀은 곤란한 표정으로 눈썹을 내렸다.
잘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말을 어떻게 옮겼는지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알려줄 것 같지도 않고, …흘끔 보자 역시나 표정이 강경했다.
“얼른.”
라얀이 고민에 빠져 머뭇거리니 마리엘이 재촉했다.
당혹스러운 것과 별개로 예전에는 숨바꼭질이나 하자고 하던 아이가 이제는 체스를 조르고 있는 이 상황이 새삼스레 신기했다. 마리엘은 제게 흘러간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를 체감하게 했다. 예를 들어 젖살이 빠진 뺨이라든가, 한 뼘 이상 부쩍 자란 키 같은 것들이.
“어디로 옮겼는지 알려주면 안 돼?”
“안 돼.”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라며 부쩍 단호하게 굴었다. 라얀은 결국 홀로 이 판을 타개할 수밖에 없었다.
“어, 거기다가 두면…….”
끙끙거리면서 고심하던 라얀이 말을 옮기기 무섭게 입 대려던 마리엘이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라얀이 말을 내려놓자 마리엘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간결하게 외쳤다.
“체크메이트!”
아이의 말이 제 판의 왕을 잡았다. 그제야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했음을 깨달았지만 늦었다. 깨끗한 패배였다. 맨 처음 체스를 두자던 마리엘에게 이끌려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졌을 때를 생각하면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일이었다. 그때에 비하자면 몇 수는 주고받을 수 있으니 아주 조금의 발전은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했어?”
게임이 끝나고 더 이어갈 의중이 없어 보이니 곧장 시종이 판을 치웠다. 그러는 내내 마리엘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는 라얀이랑 놀고 싶어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오라버니가 스승을 한 명 더 붙이는 바람에 해야 할 게 더 늘어났거든. 뻔하지. 나쁜 에르하르트 헤셀러스.”
라얀은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 마리엘이 올 거란 소식을 접하고 내심 불만을 드러내던 에리히가 생각난 탓이다. 우리 황녀께서는 시간이 많아 좋겠어, 하고. 아마 이 말을 고스란히 옮긴다면 마리엘은 씩씩대며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남매가 정말 이렇게나 꼭 닮았다.
“그건 아마도 마리엘이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해서…….”
“아니야.”
웃음을 갈무리한 라얀이 애써 핑계를 쥐어짰다. 마리엘은 아주 단호하게 부정했다.
“절대로 그건 아니야. 오라버니는 내가 라얀을 자주 보러 오니까 약이 오른 거야.”
질투가 심해서, 하여튼 속이 좁아서는, 등등. 마리엘은 코웃음 치며 에리히의 속셈을 헤아리며 신랄하게 꼬집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어디 오라버니 원하는 대로 해줄까 봐서.
“마리엘은 공부하는 게 싫어?”
“요정님은 좋아?”
마리엘은 이제 라얀이 인어라는 것을 안다. 제 정체를 굳이 나서서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달려오던 마리엘의 모습에 충동적으로 말했다.
마리엘. 나는 요정이 아니고 인어야. 그 난데없는 고백에 아이는 잠깐 웃었고, 제 손을 슬그머니 붙들었다.
어쨌든 그 고백 이후로 당연히 인어님이라고 부를 줄 알았던 마리엘은 이제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니니 이름으로 부를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종종 그를 요정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된 버릇 같았다.
“아니.”
라얀은 별 고민 없이 곧장 부정했다. 공부하는 건 썩 재미있지 않았고, 불편함을 느끼지도 못했다. 에리히 역시 제게 어떤 것도 강제하지 않았다. 라얀이 읽지 못하는 단어는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어주는가 하면, 예전에 익힌 것을 토대로 천천히 읽으면 오히려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때 그가 뭐라고 했더라.
‘네가 무엇이든 알았으면 하지만,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어.’
못난 모습이라며 잊으라고 했으나 깊었던 눈은, 그 아래 스며 있던 감정은 잊히지 않았다.
“봐. 라얀도 싫으면서.”
마리엘은 조잘거리며 대꾸한다. 아이는 좀처럼 라얀이 상념에 잠길 틈을 주지 않았다.
“아,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라얀, 고민 있어? 왜? 오라버니가 속상하게 해?”
내가 혼내줄까? 말만 해보라면서 마리엘은 위협적이기는커녕 앙증맞기만 한 주먹을 한껏 움켜쥐었다. 아이에게는 말할 수 없겠으나 열세 살의 마리엘은 아주 조금 난폭해진 것도 같다. 여전히 열 살의 그때처럼 귀엽지만.
“고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봐. 제시도 고민이 있으면 항상 나한테 말하거든!”
친구의 이름을 대며 가슴을 탁탁 치는 모습은 자신만만했다.
라얀은 스스로가 아직 바깥의 규범과 상식에 부족한 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하는 고민이 마리엘에게 털어놓을 법한 게 아니라는 것은 아무리 상식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어린 애한테, 인어로 치면 이제 꼬리질이나 겨우 하고 있을 법한 아이에게 이렇게 어른스러운 고민을 터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제시의 고민은 뭔데?”
라얀은 대답을 돌렸다.
“제시가 그러는데 요즘 루카스가 좋다고……. 아.”
무심코 말하던 마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의 비밀은 이미 새어 나온 뒤였다. 양옆으로 구르는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거 비밀이야.”
당혹스러워하던 마리엘은 한참 후에야 엄숙한 얼굴로 라얀의 입을 단속했다. 제시라는 이름은 언젠간 들어본 것도 같지만. 마리엘은 자신이 제시와 루카스라는 아이와 만날 만한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아예 생각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손가락까지 내밀면서 재촉하는 것을 보면.
“진짜로 비밀이야. 라얀.”
다 자란 것 같으면서도 이것만큼은 3년 전과 똑같아서 라얀은 설핏 웃었다. 에리히도 이렇게 읽기 쉬우면 좋을 텐데. 언젠가는 그 애의 생각을 헤아리는 것이 가장 쉬웠던 것 같은데 요즘은 어렵다.
붙어서 눈을 보고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영 모르겠다. 에리히는 감정을 숨기는 게 더 능숙해져 있었다. 때로는 갈무리하지 못하는 감정의 파편을 흘리곤 했지만 그조차 찰나였다. 그는 금세 익숙하게 그 감정들을 삼켰다.
“라얀. 요정님. 얼른 손가락 걸어.”
마리엘이 파닥파닥 손을 흔들었다. 재촉에 못 이기는 척 손가락을 걸기 위해 손을 뻗었다.
“라얀?”
라얀이 잠깐 머뭇거리는 것을 눈치챈 마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어디 아파? 응? 오라버니를 부를까?”
금방이라도 바깥에서 사람을 부를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에 라얀은 고개를 저으며 마리엘의 팔목을 붙들었다.
“아니야, 마리엘. 괜찮아.”
순간 속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순히 착각인 모양이다.
봄이 온 제르바는 더우니까. 바닷바람이 불지 않는 이곳의 더위는 아르헨에 비해 건조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아마 익숙지 않은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리엘을 보낸 다음 호수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이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마리.”
하지만 도통 염려가 걷히지 않기에 라얀은 마리엘에게 바짝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곳의 이야기를 해줄까?”
마리엘은 금세 안절부절못하던 기색을 걷어냈다.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초롱초롱해졌다. 이렇게 숨기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는데 왜 먼저 나서서 묻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슬며시 떠오르는 의문을 접으며 라얀은 아티사의 이야기를 물을 긷듯 하나씩 퍼 올렸다.
* * *
마지막으로 살피던 서류에 서명한 다음 보좌관에게 건네주고 나니 마침 첨탑의 종이 열일곱 번 울렸다. 에르하르트는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손도 대지 않은 홍차는 온기를 잃고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폐하. 차를 새로 내오라 이르겠습니다.”
위르겐이 완곡하게 돌려 말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입에 머금으면서 고개를 까딱 흔들었다.
“마리엘 전하께서 르네궁에 머무르시다가 돌아가셨고, 헤르께서는 소칼레아에 가셨답니다. 한 시간 전에 온 전언이라 아직 그곳에 계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위르겐은 익숙하게 라얀의 소식을 전했다. 르네궁의 일은 속속들이 에르하르트의 귀에 들어왔다. 사소한 것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라얀에 관련한 일이라면 전부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를 알기에 위르겐은 어떤 것도 가감 없이 전했다.
라얀에게 있었던 일을 전해 듣는 에르하르트의 표정이 봄을 맞이한 눈처럼 녹았다. 분명 논의를 거친 다음 올라왔을 게 분명한 서류들을 살피면서 몇 번이고 욕을 삼키느라 일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보다 마리엘은 당분간 바빠서 못 갈 줄 알았는데.”
역사학을 추가했는데 어떻게 시간을 낸 모양이다. 오히려 에르하르트의 방해를 장작 삼아 더 의욕에 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3년 전―아무리 어렸다고는 해도― 마리엘이 라얀에게 청혼한 것에서 비롯된 아주 작은 심술이었을 뿐, 정말로 동생이 제 연인을 찾아가는 것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영리하기도 하지. 근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대체 누구를 닮았는지 모르겠으나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하고야 마는 그 고집과 성미 때문은 아니었다.
만일 에르하르트의 뜻이 확고했더라면 마리엘이 아무리 기를 써도 라얀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지 못했으리라. 아무리 그가 마리엘을 제 후계자로 낙점했다 한들 그 애는 황녀였고, 에르하르트는 황제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라얀이 마리엘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 미움받을 수 있는 아주 조그마한 가정조차 견딜 수 없었다. 또한 마리엘 덕분에 라얀이 자신이 부재하는 동안 덜 적적할 수도 있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라얀이 지금 소칼레아에 있다고 했나.”
“한 시간 전에 왔던 전언이었으니 아직도 그곳에 계실지는 모르…….”
위르겐의 답은 끝맺어지지 않았다. 말이 맺어지기 직전 에르하르트가 마력을 끌어서 움직였다. 서서히 사라지는 그를 보는 위르겐의 표정은 퍽 익숙했다. 아마도 이후에 있을 공작과의 만찬을 다른 날로 어떻게 미루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눈을 깜빡였을 때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건조하고 삭막한 집무실 대신, 신록으로 우거진 수풀이 그를 반겼다. 새가 지저귀고, 작은 동물들이 풀숲을 밟는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인 곳을 천천히 거닐었다.
라얀이 소칼레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단 하나이기 때문에 에르하르트의 목적지는 명확했다. 과연. 호수로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기척이 들렸다. 무심코 흥얼거리는 소리도.
제르바로 돌아온 라얀은 이곳에 머무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가 이곳을 좋아할 때면, 연인의 부재를 그리워하면서 증축한 보람을 느꼈다.
에르하르트는 걸음을 멈춘 채로 멀리서 그를 지켜보았다. 수면 위에 떠서 하느작거리거나, 물 아래로 파고들었다가 다시 금세 올라오기도 했다.
“…….”
웃음이 나다가 가라앉았다. 보람 역시 이내 사그라졌다.
에르하르트와 동화 속 공주와 왕자처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거라면서 제게 한 발짝 다가온 라얀에게 안겨준 게 고작해야 저런 것뿐이라.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라도 안겨주어야 하는데 아직도 라얀에겐 달리 신분이 없었다. 그에게 고작해야 귀족 작위 하나 안겨줄 여력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에르하르트의 총애가 심상찮다는 걸 아는 귀족들은 라얀을 제 가문의 양자로 들이고 싶노라 은근히 의중을 비쳐 왔다. 그도 그럴 게 과거, 윈스턴 공작가가 올리비아를 양녀로 들인 이후 마정석 광산이나 기름진 영토 등 황제에게 하사받은 것이 어디 한둘이던가.
가당찮았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고작해야 일개 귀족 가문의 양자로 삼아 곁에 둘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연인에게 대공의, 공국의 왕 자리도 주지 못하겠는가.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것은 제 곁에 두고 싶었다. 라얀의 세계가 더할 나위 없이 넓어지기를 바라면서도 조금만 더 이 품 안에 두기를 원했다. 라얀이 오로지 자신만을 향해 웃어주기를, 말해주기를, 손을 뻗어주기를. …인정한다. 이것은 저열한 이기심이고, 음습한 소유욕이다.
“왜 거기서 보고만 있어?”
물 밖으로 빼꼼 모습을 드러낸 라얀의 눈이 수풀 사이로 향했다. 정확히 에르하르트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기척을 완벽하게 지우지는 않았다. 귀가 밝아 이런 식으로 곧잘 눈치채는 라얀이, 제게 먼저 말을 거는 게 좋아서.
에르하르트는 불쑥 이는 감정들을 하나하나 치워내며 라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축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귀는 뾰족하게 솟아오른 대신 둥글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의 불투명한 수막 역시 없었다. 돌아온 뒤로 라얀은 전처럼 물에 들어가도 인어의 형상을 하지 않을 때가 많아졌다. 이럴 때면, 라얀이 조금 덜 아슬아슬해 보였다.
“마리엘이랑은 잘 놀았고?”
“또 졌어.”
시무룩한 모습은 꼭 비 맞은 강아지같이 처량하면서도 귀여웠다. 마리엘과 체스를 둬서 지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가르쳐 줄까?”
가르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에르하르트는 자신이 꽤 잘 가르친다고 자부했다. 그러니까, 원리를 설명하는 대신 대뜸 결과물만 내놓고 왜 모르냐면서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 라얀보다는.
그럼에도 그간 두고 본 것은, 이를테면 염려였다. 영리한 라얀은 금방 익힐 테고, 체스에 능숙해지면 재미를 붙일 텐데 그러다가 마리엘과 아예 붙어 지내면 어떡하나. 이 또한 치졸하기 짝이 없는 소유욕이다. 하지만 그 감정조차 졌다고 시무룩한 라얀의 표정을 보니 형체를 잃었다.
“음. …나중에.”
냉큼 그러마, 할 줄 알았던 라얀은 의외로 사양했다. 그러더니 한참 빤히 보다가 에르하르트가 의아해할 틈도 없이 뺨을 쥐고 고개를 치켜 올렸다. 입술이 맞물렸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몸을 물리는 대신 능숙하게 허리를 받쳐서 라얀을 위로 안아 들었다. 에르하르트의 무릎 위에 앉은 라얀은 목을 감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코로 숨 쉬는 법도 몰라 헐떡이더니 이제는 익숙하게 혀를 감아왔다.
키스가 깊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에르하르트의 옷은 라얀으로 인해 엉망으로 구겨졌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입술을 탐했다. 난잡하게 얽힌 혀, 서로 받아 삼키는 타액, 질척이는 소리가 고요한 숲에 울렸다.
라얀의 혀를 세게 문지르며 빨았다. 안겨 있는 몸이 잘게 떨렸다. 목을 감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르하르트 역시 라얀의 머리칼을 쥔 채로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귓바퀴를 문질렀다. 둥그런 귓바퀴는 라얀처럼 말랑거렸다.
마치 영혼이 결합하는 것 같아서 입 맞추고, 혀를 얽는 순간이 좋았다. 황홀했고, 꿈 같았다.
“으응…….”
라얀의 입술 틈새로 기어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에르하르트는 그제야 붙이고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타액이 실타래처럼 길게 늘어졌다.
“에리히?”
발긋해진 눈을 보는데 아래로 열기가 쏠렸다. 라얀은 하느작거리며 더 붙어왔다.
“엘…….”
“돌아가자. 너무 오래 있었어.”
연인을, 이 존재를 아주 조금도 해치고 싶지 않다. 에르하르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라얀을 일으켰다. 마력을 움직여 그의 몸에 있는 물기를 모두 걷어낸 다음 옷을 입혔다. 형편없이 구겨지고 젖은 제 옷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라얀?”
손을 잡으려 했는데 라얀이 그를 툭 밀어냈다.
“왜.”
얼른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라얀이 고개를 내리고 있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얕게 너울지는 목소리로 그의 기분이 읽혔다.
“어디 불편.”
“엘, …왜 나랑 교미하지 않아?”
번쩍 치켜든 얼굴은 찡그려져 있었다. 귀에 흘러 들어오는 말과 그의 표정을 살피느라 바로 반응을 못 하자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라얀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나만 …몰라. 나, 갈 거야.”
에르하르트는 유리된 것처럼 조각조각 난 문장들을 온전히 헤아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뒤따르기 위해 한 걸음 디뎠다. 그러기 무섭게 손가락질했다.
“따라오지 마!”
기세가 제법 사납고 맹렬했다. 에르하르트는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라얀은 에르하르트를 흘겨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어찌나 거세게 걷는지 발을 디딜 때마다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가 발그스름하게 붉었다.
라얀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야 겨우 그가 한 말을 더듬었다.
교미.
“…….”
에르하르트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열기가 올랐다.
아슬아슬하게 차오른 말이 결국 삼켜지지 않고 흘러넘쳐 에리히에게 가 닿았다. 하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가자며 손을 뻗는 그를 본 순간 라얀은 정말로 견딜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게 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의문인지, 갈급함인지, 그도 아니면 서운함이었는지.
“…흥.”
라얀은 어느새 어둠으로 잠긴 방 안에서 홀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한참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문 바깥으로 슬쩍 곁눈질하기 바빴다. 몇 번이고 따라 들어오려고 시도했으나 라얀의 강경한 거부에 부딪혀 들어오지 못했던 에리히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조용했다.
희미한 소란이 느껴지는 걸 보니 바깥에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엉망으로 엉켜 있던 감정이 조금 삭여진 탓일까. 달래듯이 이름을 부를 때보다 조용히 있는 게 더 신경 쓰였다. 결국 그 감정을 외면하지 못하고 침대 아래로 살그머니 발을 뗀 라얀은 문을 사이에 두고 기대어 앉았다.
“…….”
쪼그린 무릎에 손을 얹고 턱을 괴었다.
내가 너무 화를 냈나. 밀어낼 때 손을 너무 세게 치지는 않았겠지. 에리히가 한 발짝 밀려났던 것도 같은데. 역시 연장자인 내가 참아야 했을까.
“라얀.”
내내 그의 생각에 잠겨 있던 라얀은,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라얀이 문가에 기대어 앉아 있다는 것을 아는 양 목소리는 고요했다.
“문 좀 열어주면 안 될까?”
우리 나눠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보다 배는 안 고파? 때가 지난 지 한참이야. 건과일이라도 들여보낼까? 에리히는 제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말을 건넸다. 문을 사이에 두고 웅웅거리는 에리히의 목소리는 듣기 좋아 계속 귀 기울이게 됐다. 라얀은 속으로 그의 말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었다. 안 돼, 싫어, 배고파, 등등…….
그러고 있었더니 조금씩 마음이 말랑해졌다.
“나는 그냥, 무서워서 그랬어.”
이제는 슬슬 대답할까 고민하는 사이 에리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참의 고민과 갈등이 묻어나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너를 망가트릴까 봐. 내 욕심이 너를 힘겹게 하는 걸까 봐.”
짙은 사무침이 묻어났다.
“라얀. 나는 너를 밀어낸 게 아니야.”
내지르고 나서 왠지 얼굴 마주 보기가 민망해 고치처럼 숨어 있었을 뿐, 화가 났던 것도 아니었던 라얀은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에 내심 당황했다.
그의 말대로 대화를 나눠보는 게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문고리에 손을 얹을 때였다. 착각으로 여기고 말았던 열기가 또다시 몸속에서 피어올랐다. 희미하게 사그라들던 아까와는 달리 아주 선명한 형태로.
라얀은 손을 내리며 다시 몸을 둥글게 말았다.
고통스러운 열기는 아니었다. 단지 조금 못 견디게 간질거렸다. 참지 못해 살갗을 긁어보았으나 이 갈증은 해갈되지 않았다. 애초 그런 것에서 발화한 간지러움이 아니라는 듯이.
‘첫 발정기는 지나고 가지그래.’
라얀이 떠나던 날, 고집을 꺾지 못해 마지못해 보내면서도 한마디 얹던 아일라가 떠올랐다. 발정기. …발정기. 라얀은 그것을 가만히 되뇌었다.
성체가 된 인어는 발정기가 온다. 상식이었으나 한 번도 그것을 의식해 본 적 없었다. 수호석이 없었던 탓인지 성체가 된 뒤로도 라얀은 한 번도 발정기를 겪지 않았다. 3년을 그렇게 살았으니, 수호석을 돌려받았다 한들 신경 쓸 리 없었다. 그래서 아일라의 말도 흘려들었는데.
“…….”
이것이 발정기임은 굳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라얀.”
그 순간, 에리히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마치 라얀의 이상을 알아채고 헤아리는 양.
“네가 원치 않아도 문을 열어야겠어.”
“아니…….”
첫 발정기가 조금 길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라얀은 혼자서 어찌 삭여보려 했지만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통보한 에리히는 라얀의 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잠가버린 문 따위는 애초 그의 방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처럼 아주 수월하게.
들어온 그의 시선은 곧장 라얀에게 꽂혔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무릎을 꿇은 에리히는 라얀의 오금을 받치고 안더니 침대로 가 눕혔다. 이내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었다. 발정기에서 비롯된 은은한 미열일 뿐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에리히의 표정은 형편없이 구겨졌다.
“당장 의원을 부르지. 아니, 아니다. 지금 바로 아르헨으로 갈까?”
“…아니.”
“하지만 열이 나. 또 예전처럼…….”
에리히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역시 아르헨으로 가는 게 좋겠어.”
겨우 감정을 삭인 에리히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엇이든 라얀에게 굽혀주지만 건강에 한해서만큼은 타협하지 않았다. 지금 말리지 않는다면 에리히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안아 들고 이동 마법진을 타고 아르헨으로 갈 것이다.
“진짜 아픈 거 아니야.”
라얀은 에리히의 손이 닿지 않을 침대 안쪽으로 기어들어 가며 말했다.
“이건 그냥, 그냥… 내가 성체라서, 어쨌든 이건 당연한 거란 말이야.”
두서없이 중얼거리면서 라얀은 이불을 끌어당겨 제 몸을 가렸다.
당연한 거? 라얀을 침대 바깥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손을 뻗던 에르하르트는 라얀이 한 말을 짚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열기로 인해 체온은 평소보다 높으나 그 외의 이상은 없었다. 확실히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보다는…….
에르하르트는 언젠가 라얀이 해주었던 어떤 말을 기억해 냈다. 엘. 인간도 성체가 되면 발정기가 있어? 라던.
“잘래.”
집요한 시선을 받으며 라얀은 돌아누웠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아마도. 부추기는 충동 역시 사그라들겠지. 모쪼록 그러길 바라며 눈 감기 무섭게 몸이 도로 돌려졌다.
“라얀.”
에리히가 라얀의 이름을 속삭였다. 참을 수 없어졌다. 라얀은 충동적으로 에리히의 뺨을 쥐고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번에도.”
“응.”
“또 밀어낼 거야?”
그렇다고 한다면 절대로, 한 일 년 즈음은 입도 맞추지 못하게 해야지. 아니, 손도 못 잡게 해야지. 라얀은 숨을 씨근덕거리며 속으로 다짐했다.
“에.”
“내가 감히 너를…….”
어떻게 그러겠어. 에리히는 채 말을 끝맺을 여유조차 없는 사람처럼 라얀의 아랫입술을 빨며 중얼거렸다. 성마른 갈급함은 입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라얀은 기꺼이 그 품에 파고들었다.
처음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라얀이 살아 자신의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러나 인간이란 본디 탐욕으로 가득 찬 존재다. 옆에 두니 닿고 싶었고, 닿으니 입 맞추고 싶었고, 입 맞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탐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에르하르트는 참았다.
“으, 음…….”
첫 관계를 어그러트린 자신의 욕심이 기어이 라얀을 집어삼킬까 봐.
“엘, …아, 에리히…….”
아니, 명백히 강압으로 이루어진 그 관계를 떠올린 라얀이 자신을 경멸하며 밀어낼까 봐 두려웠다. 에르하르트는 욕심을 수면 아래 감추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간, 지러워.”
라얀을 깊숙이 당겨 안은 에르하르트는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며 몸을 쓸었다. 그는 제 손이 닿을 때마다 몸을 파드득 떨면서 가느다랗게 투정을 부렸다. 평소보다 높은 체온이 뭉그러졌다. 하아. 더운 숨을 뱉어낸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다시 일으켰다.
라얀이 달뜬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에르하르트는 연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셔츠 단추를 풀었다. 하나, 하나 풀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잡아 뜯어서 침대 아래로 내던졌다. 그는 도로 몸을 낮추며 라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발개진 두 눈가에, 물방울 같은 콧등에, 또 양 뺨에. 도장을 새기듯이 찍어 내려가는 입술은 턱선을 지나 목선으로 미끄러졌다.
이를 세워 쇄골을 긁듯이 깨물었다.
라얀은 파드득 몸을 떨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에리히의 손이 살갗을 간지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배를 덧그리던 손은 위로 기어 올라가 가슴을 문질렀다. 손을 세우고 유륜을 긁으며 둥글게 문질렀다. 오싹했다. 몸을 뒤틀려고 했지만 다리 사이에 제 무릎을 끼워 넣고 체중을 싣고 있는 에리히 때문에 그 역시 쉽지 않았다. 흐으, 라얀은 열기로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발정기 탓일까. 아니면 애정이 담뿍 담긴 저 시선 때문일까.
라얀은 에리히가 제 몸을 지분거리는 감각을 좀처럼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꾸만 발가락이 바짝바짝 굽어들었다. 바지에 가려진 아래는 벌써 단단하게 부풀고 있었다. 라얀은 손을 뻗어 탄탄한 가슴을 더듬거리다가 허리를 껴안았다.
“제발, 라얀…….”
뼈마디를 더듬거리는 손길에 에리히는 눈가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엔 어떤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 건드리면 못 참겠어.”
에리히는 사납게 속삭이며 목선을 따라 잘근잘근 깨물었다. 에리히의 입술을 따라 붉은 순흔이 마치 길처럼 났다.
“네 모든 걸 전부 다 삼키고 싶어서.”
“으, 응…….”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유륜 주위를 둥글게 핥다가 깊게 빨아들였다. 손은 미끄러지듯이 내려가 옆구리를 스치고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솜털이 바짝바짝 섰다. 에리히에게 매달린 라얀은 신음을 흘리며 바르작댔다.
“에리히, 엘, 더… 더 만져 줘.”
열기 띤 숨을 연거푸 내쉬며 애원했다. 에리히와 닿고 싶었다. 닿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에리히의 눈이 빛났다. 그는 라얀의 뒤통수를 헤집으며 입을 맞춰왔다. 게걸스럽게 혀를 빨아대고 입천장을 세게 긁는다. 엉덩이를 움켜쥐던 손은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민감한 곳에 손길이 닿자 움찔거리며 떨렸다.
“흐…으……!”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입술 틈으로 흘러나왔다. 에리히의 손이 허벅지를 쓸어내리자, 라얀은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무심코 나온 습관이었다.
집요하게 굴던 에리히가 손을 멈칫거렸다.
혀를 어루만지며 빨던 에리히가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땀으로 앞머리가 흐트러진 그는 살짝 짜증이 나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라얀을 향한다기보다는…….
“라얀. ‘나’를 기억하지 마.”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에르하르트는 가능하다면, 기억이 없던 시절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어 했던 것 같지만, 설마 그가 느꼈던 살의가 자신의 것만 할까.
“그건 잊고, 나를 기억해.”
애초 라얀은 제 것이었다.
내 세상. 내 전부. 내 구원. 나의 빛. …제 삶의 모든 것이었던 존재를 상처 입히며, 할퀴고 기어이 삼킨 자를 어떻게 증오하지 않을 수 있나.
“…에리히?”
이미 반쯤 쾌락에 잠겨 있던 라얀은 흐릿한 시선을 보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이 오로지 자신만을 기억했으면 했다. 그는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시작은 라얀의 발끝이었다.
하얗고 말랑거리는 발가락에 입술이 닿자 움찔거린다. 다음은 발등이었다. 발등에 입술을 맞추며 도드라진 복숭아뼈로 거슬러 올라갔다.
“…….”
한때 남아 있던 노예의 낙인이 사라진 뼈마디는 연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아무리 생에 열의가 없던 때였다고 한들 감히 라얀에게 그런 것을 남긴 자를 너무 쉽게 죽였다. 치미는 후회와 살의를 감추며 이를 세워 약하게 긁었다. 라얀의 발가락이 굽어들었다. 그게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엘, 뭐 하는 거야…….”
라얀은 달뜬 숨으로 에르하르트를 불렀다. 금방이라도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지만 인내하며 깊게 빨아들였다. 가는 다리에 자신이 남긴 흔적이 꽃 피웠다.
가는 종아리에 느긋하게 키스하면서 올라갔다. 라얀은 다리를 오므리려고 힘을 주었지만 사이에 에르하르트가 있기에 무용한 일이었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치며 허벅지 안쪽을 빨았다.
“에리히, 하, 하지 마…….”
라얀은 허리를 뒤틀면서 소스라쳤다.
에리히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열기가 피어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간지러운 듯하다가도 따끔했다.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계속해 줬으면 좋겠기도 했다. 모순적인 감정을 안 듯 에리히는 멈추지 않았다. 라얀은 손을 뻗었다. 결 좋은 머리칼만 손아귀에 휘감길 뿐이었다.
“…아……!”
조금씩 부피를 키우는 성기의 끝에 입술이 닿아왔을 때 라얀은 에리히의 머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탄성을 흘렸다. 촉. 선단에 입 맞추는 소리는 침구의 부스럭거림에 잠기지 않을 만큼 컸다. 기분이 이상했다. 다리를 움직였지만 에리히의 어깨에 매달려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자칫 그의 목을 조를까 봐 무섭기도 했다.
라얀이 망설이는 사이 에리히는 천천히 그것을 삼켰다. 습한 혀가 뭉툭한 기둥을 핥는다. 끔찍할 정도로 다디단 쾌락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되었다. 허벅지에 경련이 일었다.
머리칼을 쥔 손에 계속 힘을 주자 에리히는 위로 팔을 올리더니 라얀의 두 손을 한데로 잡아 결박하듯이 붙잡았다. 동시에 삼킨 것을 세게 빨았다.
에리히는 뿌리 끝까지 삼키고 혀로 기둥을 감아 문질렀다. 다른 손으로 고환을 살살 주물렀다.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이 위로 끌어 올려지다가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은 이 감각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라얀은 거푸 숨을 헐떡거렸다. 흐느낌에 가까웠다.
“싫, …으, 싫어…….”
라얀이 내뱉는 소리에 에리히가 눈만 살짝 들었다. 바다처럼 푸르렀던 눈은 불그스름했다. 그는 눈가를 사납게 휘며 묻고 있었다. 정말, 싫은 거냐고.
라얀은 고개를 끄덕일 수도, 흔들 수도 없었다.
“엘, 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에리히는 물어 삼킨 성기를 빨면서 느릿하게 움직였다. 입을 벌렸다가 오므린다.
라얀은 고개를 도리질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희뿌옜다. 점멸하는 감각이 그대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라얀은 붙들린 손을 떨쳐 내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 그만, 엘… 이상해…….”
그냥 전처럼, 까지 뱉어내던 라얀은 더 말할 수 없었다. 에리히가 목구멍이 닿는 데까지 물어 삼키며 깊숙이 조여와서 나오려던 말이 알 수 없는 신음으로 조각났다. 어쩔 줄 모르겠는 감각에 눈시울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아. 몸이 배배 꼬였다. 마른 가슴을 들썩이던 라얀은 짤막한 신음과 함께 눈가를 가렸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는데. 웅얼거리는 말이 입 속에 묻혔다.
“아까 말했잖아, 라얀.”
“…….”
“‘나’를 기억하지 마.”
비로소 입술을 뗀 에리히는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얀이 토해낸 탁액이 묻은 입술은 번들거렸다. 몸의 힘이 쭉 빠졌다. 라얀은 입술을 꾹 다물고 땀에 젖은 눈을 깜빡였다. 어찌할 새도 없이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흘린 눈물은 시트를 굴러다녔다.
에리히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나른해진 눈꼬리를 문질렀다.
“너…….”
“사랑해. 라얀.”
에리히는 아침마다 혹은 잠들기 전, 아니면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제르바로 돌아오고 나서 그에게 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헤아린다면 제 손가락, 발가락은 물론 르네궁 시종들의 것까지 다 합쳐도 모자랄 터였다.
귀에 인이 박일 만큼, 그렇게도 들은 말이다.
“알면서 그러는 거지.”
그럼에도 에리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 어딘가가 벅차올랐다. 티끌만 한 원망이 치솟더라도 물거품처럼 흩어져 가라앉았다.
“뭐가?”
“…몰라. 키스해 줘.”
라얀은 에리히를 향해 손짓하며 입맞춤을 졸랐다.
“입 맞추면 비릴 텐데.”
위로 몸을 끌어 올린 그는 얼굴 구석구석을 새 부리처럼 쪼았다. 간지러웠다. 라얀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목에 손을 감으며 에리히의 얼굴에 쪽쪽거렸다.
“아.”
등골을 느릿하게 쓸던 손이 엉덩이 골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사정 후 쪽쪽 입을 맞추며 물속에 잠겨 있을 때처럼 하느작거리며 풀어져 있던 라얀은 별안간 닿는 자극에 몸을 움츠렸다. 마치 달래려는 듯이 에리히의 입술이 눈가에 내려앉았다.
“으, 으…….”
방금 라얀이 흘린 흔적으로 척척한 회음부를 문지르던 손이 안을 벌리며 들어왔다. 내벽에 닿은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구부려졌다. 이물감이 익숙해지면 마디진 손가락이 하나씩 늘어난다. 길게 뺐다가 다시 쑤셔 넣으며 느릿하게 왕복할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에리히에게 바짝 매달린 라얀은 한쪽 눈을 일그러트리며 옅은 한숨을 흘렸다.
“라얀. 입 벌려.”
작게 입을 벌렸다. 그 틈으로 에리히가 붉은 혀를 밀어 넣는다. 손가락을 구부려 내벽을 벌리며 들어올 때는 세게 문지르고, 뺄 때는 혀를 억세게 얽었다. 으응. 라얀이 흘리는 신음은 에리히의 입술 너머로 스러졌다.
뇌가 녹아버리는 것 같다. 크림처럼 몽글몽글하게. 거듭되는 자극에 한 번 사출한 성기가 조금씩 힘을 받았다. 위로 올라붙은 성기가 에리히의 것과 닿았다. 그는 닿는 것을 내려다보더니 웃으며 허리를 추어올렸다. 핏줄이 올올히 선 기둥이 문질러졌다.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 감각이 아득히 감질났다. 조금만 더 강하게. 조금만 더, 강렬하게. 라얀은 파드득 떨면서도 무심코 그를 따라 허릿짓 했다. 아. 에리히는 짤막하게 침음을 흘렸다.
“라얀. …네가 건드리면, 못 참겠다고 말했잖아.”
열기로 눅눅해진 목소리가 사나웠다. 에리히는 내벽을 넓히던 손을 뺐다. 허전할 틈은 없었다. 라얀의 다리를 어깨에 걸친 그는 제 것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아, 으……!”
몇 번이나 겹쳤던 몸이니 익숙해졌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빠듯했다. 여전히 버겁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처음 몸을 겹칠 때와 비슷했다.
“라얀.”
“으응.”
“라얀.”
에리히는 연신 제 이름을 속삭이며 입을 맞췄다. 그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라얀은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뻗었다. 그의 등을 감으며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거푸 숨을 쉬자 경직된 몸이 차츰 느슨히 이완되었다.
라얀의 숨소리가 안정되자 에리히가 허리를 쳐올렸다. 끄트머리만 겨우 들어왔던 것이 내벽을 벌리고 들어왔다. 라얀. 숨 쉬어. 천천히. 라얀이 또 숨을 들썩이자 에리히는 낮게 잠겨 갈라진 목소리로 달랬다.
둥근 이마에 가닥가닥 달라붙은 검은 머리를 가볍게 쥐어 넘겨주기도 했고 깍지를 끼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키스를 하기도 했다. 에리히는 라얀이 고통에 익숙해지도록 인내했다.
“엘…….”
라얀은 까라지는 목소리로 연인을 불렀다.
“응. 라얀.”
에리히 역시 다정하게 대답했다. 라얀은 어떤 말을 하는 대신 아까처럼 허리를 움직였다. 에리히가 인상을 찌푸리며 애걸했다. 제발, 라얀, 하고.
하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에리히의 목에 제 팔을 걸고 다시 허리를 살짝 흔들었다. 구멍을 빠듯하게 벌리고 있던 것이 아주 조금 바깥으로 밀려났다가 박혔다. 속살이 딸려 나가는 느낌에 라얀은 끙끙대며 몸서리쳤다.
체액으로 부드럽게 맞물려 부피로 인한 압박만 빼면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그리고 라얀은 에리히가 자꾸만 참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
제 노력이 통했는지 에리히는 열 오른 한숨을 내쉬었고,
“으, 응……!”
이내 몸을 뒤로 길게 물렸다가 안으로 치받고 들어왔다.
에르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라얀의 골반을 단단히 움켜잡고는 허리를 얕게 쳐올렸다. 압박감에 숨 막히는지 라얀은 찰나 숨을 몰아쉬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양 삼켰다.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숙여 가늘게 뻗은 목에 입술을 묻었다. 이미 자신이 남긴 흔적으로 가득한 목선을 따라 잘근잘근 깨물고 빨아들이며 라얀의 감각을 이리저리 분산시켰다.
“아, 에, 에리…, 으, 응…….”
사랑하는 연인은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뽀얗던 뺨은 발그스름했고, 달아오른 눈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울먹거렸다. 명징하게 빛나던 녹색의 눈은 평소와 달리 열기에 잠겨 흐려져 있었다.
그러나 찬란하게 반짝이는 애정만큼은 여전히도 변함없었다.
라얀의 애정은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에르하르트는 내벽을 거칠게 긁었다. 빠르게 뒤로 물러난 성기가 엇박자로 치고 들어갔다. 어딘가를 긁고 지나갈 때 라얀은 아, 하고 짤막하게 탄성을 내지르며 어설프게 허리를 들썩거렸다.
“흐으, 아……!”
허벅지가 잘게 경련했다. 에르하르트는 성기를 재차 물렸다가 내벽을 다시 세게 문질렀다. 라얀이 고개를 저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어설프게 조여오는 감각에 에르하르트는 눈이 핑핑 돌 것만 같았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욕설을 씹어 삼키고는 라얀의 손에 깍지를 끼며 위로 결박했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흉곽이 오르내릴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쉰 그는 연인을 시트 아래 파묻어버릴 양 퍽퍽 쳐올렸다. 힘을 이기지 못한 라얀의 몸이 자꾸만 위로 쏠렸다.
쿵 소리가 났다. 서둘러 아래로 끌어당기고 살피는데 라얀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구음으로 사정해서 가라앉았던 성기가 다시 힘을 받아 에르하르트의 아랫배를 쿡쿡 찔렀다. 에르하르트는 부러 체중을 실어 그의 성기를 뭉갰다.
“흐으, 아……!”
에리히의 것이 점막을 벌리고 지나갈 때마다 배꼽 아래가 간질거려 몸이 절로 들썩였는데 성기에 체중이 실리며 압박되자 참을 수가 없었다. 라얀은 이 감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나는 말이 모두 조각나 파도에 휩쓸려버렸다.
“엘, 으응, 엘…….”
그래서 매달리듯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뺨에 닿는 그의 머리칼에 비비적거리기도 했다. 고개를 치켜든 에리히가 허리를 느긋하게 움직이면서 귓불을 잘근거렸다. 과민해진 귓불에 더운 숨이 닿자 소스라쳤다. 라얀은 깍지 낀 손을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세상 모든 것이 저 아래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에리히는 몸을 길게 물렸다. 벅찰 정도로 안을 채우던 것이 빠져나가자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찰나였다. 눈을 채 깜빡이기도 전에 라얀의 몸이 뒤집어졌다. 구겨진 시트 자락에 빳빳하게 솟은 유두가 쓸렸다. 몸을 뒤틀기 전 에리히는 둔부를 잡으며 질척하게 젖은 구멍을 벌리고 들어왔다.
아까보다 더 적나라하고 날것의 감각이었다. 라얀은 마른 등을 들썩거리며 어찌할 바 모르는 이 열락감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깨물지 마.”
“하, 흐, 하지만…….”
에리히가 젖은 손가락으로 혓바닥을 눌렀다. 침이 고인 혓바닥을 살살 긁으며 동시에 허리를 튕겨 아래를 쑤셨다. 위아래로 쉼 없이 감각이 몰아닥쳤다. 머리끝까지 열이 나서 어떤 사고도 할 수 없었다. 도저히 쾌락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듯 위로 기어 올라가려고 했지만 그것을 눈치챈 에리히가 라얀의 몸을 감아쥐었다.
에리히에게 붙들린 채 그가 밀어붙이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렸다. 짧게 끊어지는 신음과 땀에 젖은 살이 찌걱거리며 맞부딪치는 소리, 더운 숨소리 같은 것들이 난잡하게 뒤섞였다.
거칠게 맞물릴 때마다 살갗이 저릿했다.
“…라얀. 이름을, 이름을 불러줘.”
쾌락에 잠겨 앓는 소리만을 내는 라얀을 향해 에리히는 다정하게 요구한다. 조각나는 단어들을 겨우 기워 붙여 한 문장으로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도 부르던 이름이다. 왜 불러달라는 걸까. 그러나 라얀은 의문을 해소하는 대신 입을 달싹거렸다. 에리히. 에리히. …엘.
“계속. 계속 불러줘.”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등골을 따라 입을 맞춘 에리히는 살기둥을 밀어 넣었다. 거친 움직임에 엉덩이가 뭉개졌다. 라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형편없이 구겨진 시트 자락을 움켜잡았다.
극도의 고양감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등골이 쭈뼛거린다. 라얀은 이것을 해소하고 싶었지만 시트에 비비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에, 으, 에리히…….”
덜덜 떨리던 손이 본능적으로 아래로 향했다. 그러나 원하는 것에 닿기 전, 뜨겁고 눅눅한 것이 제 성기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흐, 아, 으읏……!”
허리가 절로 튀었다. 자극이 가해지기를 바랐으면서, 움켜쥐고 비비는 손길에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비틀었다. 놔줘, 아니, 놓지 마, 아냐, 놔줘. 모순적인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터져 나왔다. 에리히는 성기를 쥐고 앞뒤로 문질렀다.
찰나 오감이 멀어지면서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 몸이 늘어졌다. 에리히의 손에 제가 쏟아낸 백탁액이 묻어서 엉겼다. 에리히는 정액이 묻은 손으로 라얀의 엉덩이를 양껏 움켜잡으며 사정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라얀은 탈력감에 까라진 채로 몸만 얕게 떨었다.
아. 에리히가 입술을 짓씹으며 아주 잠깐 멈췄다가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곤 라얀의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입을 맞추면서 성기를 빼냈다. 뿌연 액이 주르륵 밀려 나왔다. 회음부를 타고 내리는 감각에 잠깐 움찔거렸지만 라얀은 그대로 늘어졌다.
발정기의 열기가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 같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겨우 몸을 돌려 에리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머리칼을 하나하나 쓸어넘겨 주면서 젖은 눈가를 문질러주고 잘게 키스를 뿌렸다. 다정한 후희였다.
“…어.”
하지만 지분거리는 키스가 짙어지고, 마치 퍼즐 조각처럼 끼워 맞추고 있는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눈만 깜빡거리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쿡, 그의 것이 아직 채 다물리지 않은 입구 주위를 문질렀다.
“…….”
에리히를 바라보자 그는 조금은 난감하게, 하지만 열기 띤 얼굴로 웃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라얀.”
라얀은 한숨처럼 질문을 던졌다.
“…알면서 그러는 거 맞지?”
아까는 모르겠지만 이번은 확실하다. 심증으로 묻자 에리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치미를 떼곤 등골을 마디마디 쓸어내렸다. 미끄러진 손은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어 음낭에 닿았다. 그것을 손바닥에 넣고 굴리며 에리히는 대답했다.
“내 고백은 언제나 진심이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 같네.”
대꾸할 틈도 없이 에리히는 입술을 맞물리며 혀를 감고 나긋나긋하게 문질렀다. 흐응. 목 안에서 신음이 굴러다녔다. 힘들지만, 좋으니까. 라얀은 결국 눈을 감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밤은 아직 길었다.
* * *
새벽 별이 명멸했다. 라얀의 몸을 씻기고 나서 깜빡 잠들었던 에르하르트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기운이 가물거렸던 눈은 몇 번의 깜빡임으로 금세 또렷해졌다.
“…….”
고개를 내리자 가슴팍에 매달려 쌔근쌔근 잠든 라얀이 보였다. 그의 몸엔 자신이 남긴 흔적으로 빼곡했다. 새까만 머리칼에 파묻힌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흘린 눈물은 침상 위에 굴러다녔다. 라얀의 이마를 짚었다. 체온은 뜨겁지 않고 평소와 같았다. 안긴 몸의 온도도 헤아렸다. 마찬가지였다. 그의 발정기가 지나간 것이다.
“라얀.”
열이 내린 것을 확인한 에르하르트는 자신이 남긴 흔적을 하나하나 더듬다가 자그맣게 라얀을 불렀다. 지난밤 제법 잘 따라오던 그는 잔뜩 지쳤는지 눈썹 하나도 미동하지 않았다.
너무 괴롭혔나. 어둠이 시들고 서서히 빛이 올라올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아마 라얀이 기절하듯 잠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침실은 정적 대신 난잡한 소리만이 울려 퍼졌으리라.
그럼에도 에르하르트는 놓을 수가 없었다. 닿지 않는 법을 알지 못했다. 라얀이 너무 달아서. 너무 간절해서. 너무 애틋해서. ‘그것’의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조차 기어이 참던 라얀이 제 앞에서는 거리낌 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너무 사랑스러워서.
언제 사랑스럽지 않은 적 있겠느냐마는.
쪽.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둥그런 이마에 입 맞췄다. 다음으로는 뺨에. 턱 끝에. 자는 중에도 지분거림이 귀찮았는지 라얀의 눈썹이 꼼질꼼질 움직였다. 으응.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더 파고들었다. 무심결에 손으로 그의 팔을 토닥토닥 두드리기도 했다.
에르하르트는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자신의 불면이 염려되었는지 품에 파묻힌 채 토닥거리던 라얀이 떠올라서.
잠든 중에도 이다지도 상냥하고 다정했다. 에르하르트는 살짝 쳐들었던 고개를 도로 베개에 기울이며 라얀을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틈 하나 없이 맞물린 온기 속에서 수마가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다. 점점 해가 떠오르고 있으나 연인과 이 시간을 조금만 더 누려도 되지 않을까. 한, 며칠 정도만.
그런 다음, 이 애를 모두에게 내보일 것이다. 자신의 것이라고 온 세상에 알릴 것이다. 라얀은 그의 품 안에서 누구보다 영광될 것이며, 또한 누구보다 평온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전, 며칠 정도만 온전하게 라얀을 가지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야 겨우 재회한 연인이었고, 그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만약 라얀이 들었더라면 기겁했을 계획을 제멋대로 세웠다.
“잘 자. 내 사랑.”
희미하게 읊조린 말이 부디 라얀의 꿈에도 닿기를. 그의 바람을 들어주듯 라얀의 입꼬리가 배실배실 올라갔다. 그것을 보며 따라 웃던 에르하르트는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곧 침실에는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안온한 평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