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Epilogue : The end of the fairy tale is...
“나는 그 인간이 정―말로 싫어.”
아일라는 라얀의 주변을 빙글빙글 배회하며 에리히를 흉봤다. 그녀의 얼굴엔 불만이 덕지덕지 묻어나 있었다. 곁에 머물러 있던 알레와 유리 역시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라얀을 걱정하는 존재들이 이렇게 있는데.”
유리는 투정을 부렸고,
“아주 우리는 안중에도 없죠. 그 인간 때문에 죽을 뻔했으면서, 깨어나기 무섭게 바로 박차고 바깥으로 올라가기까지 하고.”
알레는 라얀의 죽음과 에리히를 언급했는데 그 기세는 꽤 살벌했다.
“으음.”
라얀은 웃었다. 괜히 무슨 말을 보태 에리히를 감쌀수록 쏟아지는 눈초리가 매서워진다는 것을 경험한 뒤로는 차라리 웃는 게 낫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걱정을 기반으로 하는 잔소리가 듣기 싫지는 않았다. 여전히 자신이 살아 움직이는 이 순간순간이 마치 기척처럼 느껴져서.
온몸을 관통하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소멸을 각오했었다. 바닥까지 보인 생명이 뭉텅이째 갉혀 나가던 감각은 지금 생각해도 퍽 선명했다.
라얀은 깨어나던 순간을 떠올렸다. 감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수십 년 동안 봐서 익숙한 천장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스로의 생환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라얀?’
이 장소도, 귀에 익은 아일라의 목소리조차도 그저 영원한 안식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풍경이라고만 여겼다. 그랬기에 아쉬웠다. 제 속내를 읽는다면 분명 아일라가 야속하게 생각할 테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보는 건 역시 에리히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서.
아일라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준 라얀은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한데 거기에 미련이 섞여봐야 걸음만 무거울 뿐이다. 그러나 라얀은 금방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눈이 감기는 것을 본 아일라가 대번에 다가와 양어깨를 잡고 흔든 탓이다.
‘다시 잠드는 건 안 돼!’
그것은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환상이 이렇게 현실적일 수 있나. 라얀이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부산스럽게 굴었다. 알레와 유리를 불러오라며 바깥을 향해 언성을 높이면서.
부유하던 감각이 서서히 중력을 찾아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일, …라얀?’
자신을 보고 안색이 일변하는 알레와 유리를 보면서 그 감각은 더욱 선명해졌다. 이것은 안식에 들기 전 보는 광경이 아니다. 라얀은 혼란스러웠다.
살았나.
어떻게?
그리고 의문이 채 해결되기도 전에 벼락처럼 떠오른 것은, …역시나 에리히였다.
라얀은 자신을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제 수호자들을 떨쳐 내며 몸을 움직였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몸은 하느작거려서 일어나기도 전에 도로 주저앉았다.
‘3년 만에 깨어났는데 몸이 잘도 움직이겠다.’
아일라의 눈가는 발그스름했지만, 말투만큼은 가시 돋쳐 신랄했다.
‘네가 어떻게 살아난 줄 알아? 메르께서 너를 데리고 와서 네 조각 난 수호석에 숨을 불어 넣어주셨어.’
수호석이라니. 자신에겐 수호석이 없었다. 그것은 아샤와 맺은 태초의 서약으로 에리히에게, …까지 떠올리던 라얀은 마지막 순간, 제 몸으로 빨려 들어오던 조각들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덕분에 메르도 한동안 칩거하셔야만 했지. …그렇게 살린 목숨이야. 그러니까 제발 네 몸 좀 생각해. 라얀.’
트라이던트부터 생의 보전까지. 메르가 어찌하여 제게 그런 관용을 베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의문에 파고들어 헤집기에는 3년 만에 깨어났다는 말이, 심장을 서걱서걱 베었다.
라얀은 가야만 했다. 에리히에게, 제 연인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어야만 했다.
‘…가야 해. 아니, 갈 거야.’
‘그때는 방심해서 너를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니?’
‘아일라.’
‘그렇게 보내서 3년 만에야 돌아온 네 모습이 어땠는데, …우리가 그걸 또 봐야만 해? 아니. 아니, 다른 애들이라면 모를까. 나는 절대 그 꼴 못 봐. 라얀.’
충고에도 라얀이 몸을 추슬러 비틀비틀 나아가자 아일라는 손을 쥐락펴락하며 을러댔다. 금방이라도 라얀을 눕히려는 의지로 불타는 그녀를 보면서 애원이라도 해야 고민하는 찰나,
‘그 애를 보내주거라. 아일라.’
냉랭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판도를 바꿨다.
“그래도 나 많이 괜찮아졌는데.”
에리히를 보러 다녀온 게 벌써 며칠 전이었다. 아직 좀 더 회복해야 하지만 확실히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 좋아졌다. 그 점을 조심스레 피력하자 아일라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켜 올라갔다.
“그때 메르가 너를 보내라고만 하지 않았어도.”
“…….”
“너는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을 거야.”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말에선 조금의 농담도 엿볼 수 없었다.
“시 메르라면 마땅히 관용이…….”
“라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단단히 비틀린 아일라를 달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알레와 유리를 바라봤지만 저마다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귀찮은 책무를 떠맡았는데.”
아일라는 곱씹을수록 짜증 나는지 표정이 감사나워졌다.
“하지만 너 말고 그 누가 왕의 후계가 될 수 있겠어.”
역효과가 날 것을 알면서도 라얀은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라얀이 추방당한 뒤, 그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아일라였다. 메르는 번식기마다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인어를 선별해 들이는 대신, 아일라를 시 메르로 삼았다고 했다.
파격적인 결정이었으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녀가 원로의 딸인 것을 젖혀두고서라도, 동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인어인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일라는 라얀이 돌아온 뒤 이 자리가 부담스럽다며 도로 그에게 내어주려 했으나 그 원을 이룰 수 없었다. 메르의 보살핌으로 어떻게 기워 붙였다고 해도 라얀의 수호석은 한차례 깨졌고, 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제 자리를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일라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기꺼웠다. 제 상태가 온전하다고 해도 아티사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이곳을 사랑하고, 이곳에 머무르는 존재들을 사랑하였으나, 결국 라얀의 선택은 언제나 에리히였으므로.
“이걸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한 대 쥐어박자니 3년 만에야 깨어난 벗에게 가혹한 것 같고, 마냥 참자니 약이 바짝바짝 오른다. 같은 햇수를 살아왔어도 저 애보다 내가 더 철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그 인간 때문에 자신이 움켜쥘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놓치고서도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조금은 얄미웠다. 인내와 충동 가운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일라의 꼬리가 사납게 움직였다.
“나, 다녀올게.”
그것을 지켜보던 라얀은 아일라의 화를 북돋는 대신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몸을 뺐다.
바깥과의 교류를 금하는 율법이 역사 너머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의도인지 몰라도 왕이 라얀이 바깥으로 나서는 것을 묵인했다. 그런 까닭으로 마땅한 명분이 없는 그들은 말리지는 못했다.
“기껏 키워놨더니…….”
별 같잖지도 않은 놈이 채어갔다며, 알레가 한탄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라얀은 도망치듯이 자리를 벗어났다.
* * *
어떤 저항도 없이 아티사의 수호 결계를 빠져나간 라얀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천천히 심해를 유영했다. 종종 불온한 고요가 도사리던 심해는 이제 제법 평온했다.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어린 인어 홀로 나오기엔 척박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제법.
3년 전, 흑해와 아티사의 암묵적인 협정이 갑작스레 깨졌다. 처음 1년은 혼란스러웠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평화로워졌다고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까. 꼭 구심점이라도 잃은 것처럼.’
라얀이 의식이 없던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던 아일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얀의 머릿속에는 수백 년간 흑해를 다스리던 한 존재가 스쳐 지나갔으나 침묵했다. 이제는 굳이 아샤를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도, 어쩌면 소멸도.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그를 향한 미움이나 원망을 깨끗하게 잊어버릴 것이다. 누군가의 살갗을 꿰뚫던 그 선뜩했던 감각과 찰나 얼핏 스쳐 지나간 작은 조각의 죄책감 역시도…….
그리고 수년간 라얀의 행동을 얽매던 태초의 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조차.
라얀은 잔여물처럼 남아 있던 기억과 감정을 털어내려는 듯 꼬리를 부산스럽게 살랑거렸다.
머릿속은 금세 다른 존재로 채워진다. 애초 부정적인 감정에만 몰두하기에는 이 기적 같은 현실이 마치 꿈만 같아서 내어줄 틈이 없었다. 살아서 사랑하는 존재를 다시 보는 게, 얼마나 경이롭고 벅찬 일이란 말인가.
라얀이 손으로 거푸 물살을 휘어잡았다. 가는 길이 더디게 느껴졌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검푸르게 일렁거리던 바다색이 조금씩 옅어졌다. 수면 위의 달빛이 바다에 스민 양 금빛으로 빛난다. 마치 에리히의 머리카락처럼. 연인을 생각하는 라얀의 얼굴엔 금세 미소가 머물렀다.
라얀은 조금은 조급하게 출렁거리는 파도의 포말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깥으로 빼꼼 드러난 얼굴을 살랑거리는 더운 바람이 간지럽히며 스쳤다.
“라얀.”
이미 와서 라얀을 기다리며 내내 시선을 바다에 두고 있던 에리히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리히.”
라얀은 눈을 접어 웃으며 매달리듯 그를 끌어안았다. 에리히는 당황하는 대신 익숙하게 라얀의 등을 마주 안았다.
“오늘은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러려고 평소보다 더 이르게 나섰다. 라얀은 뾰로통하게 말했지만 반가운 감정은 숨기지 못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나는 데도 이런다. 늘 그립고, 항상 반가웠고, 언제나 애틋했다.
“잘 쉬었어? 어디, 아픈 곳은?”
“내가 병자야?”
웃음으로 흘려낸 에리히는 라얀의 안부를 물었다. 당당히 되받아쳤으나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그런 말을 하려면 그때 쓰러지질 말았어야지.”
무리해서 올라와 기적처럼 에리히를 마주한 날, 끌어안은 채로 아주 잠깐 의식을 놓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라얀은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3년이나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고, 깨어나자마자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에리히를 보러 온 것이니까. 아무 탈 없이 심해를 헤쳐 바깥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선택을, 라얀은 아주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은 괜찮아졌어.”
어깨를 적시던 눈물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고작 며칠 사이에?”
“에리히. 대체 내 회복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엘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회복력이 좋아.”
이제는 여느 인어들과 비교할 수 없을 테지만, 그것을 굳이 말해 에리히의 걱정을 살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수호석이나마 있으니 여느 인간보다야 나을 것이다.
에리히의 염려를 덜어낼 겸 부러 툴툴거리며 건강을 과시하는데 라얀을 안은 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의아해서 올려다보자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
“엘? …에리히?”
거푸 부르는 말에서야 에리히가 눈을 깜빡거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라얀에게 닿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날 너를 부리나케 쫓아온 네 수호자가 나를 죽일 듯이 바라보던 게 갑자기 생각나서.”
제대로 거동도 안 되는 몸으로 바깥으로 나서던 라얀을 걱정해 몰래 쫓아 나온 알레를 이르는 게 틀림없다. 라얀은 그 당시의 일을 정확히 모른다. 알레는 못마땅해했고, 에리히는 침묵했으니. 그것도 캐물어야 하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라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에리히를 바라봤다. 눈가에 일렁이던 감정은 전혀 그런 것을 떠올리던 게 아니었는데.
“그냥.”
라얀이 미심쩍게 바라보자 그것을 완전히 외면하지 못한 에히리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보다도 희미한 속삭임이었으나 라얀에게는 선명히 들렸다.
“그냥. …이럴 때면 꿈이 아닌 것 같아서.”
에리히의 눈동자에는 숨겨지지 않는 불안이 얼룩져 있었다. 아. 뒤늦은 깨달음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깨어나 3년의 세월이 지나간 걸 알았던 순간, 에리히의 기다림과 절망을 염려하기는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라얀은 그 긴 시간의 공백을 느끼지 못했기에 이내 기적처럼 살아 연인과 만났다는 기쁨에 몰두했다. 그래서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는 긴 세월을 꼬박 감당해야 했던 에리히의 불안을 온전하게 헤아리지 못했다.
그날만 조금 울고, 그 후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몰랐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그 기약 없는 날들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아는데. 기다림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모르지 않는데. …심장이 욱신거렸다. 라얀은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겨우 마음을 다스린 라얀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잡아 내렸다.
에리히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촉. 라얀의 입술이 다소 까칠한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첫 입맞춤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처음 입을 맞출 때처럼 부끄러웠다. 겨우 그 감정을 지워내며 라얀은 에리히를 슬그머니 올려다봤다.
“자. 이래도 꿈 같아?”
“…….”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빠진 표정을 보건대 못 한 것 같았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라얀은 그의 뺨을 놓고는 뭍으로 올라갔다. 에리히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라얀의 알몸을 보곤 얼른 망토를 둘러주었다. 허공에 머무르는 것은 더운 바람인데도 혹시 그게 라얀의 살갗을 할퀴고 갈까 두렵다는 듯이.
꼭꼭 여며주는 대로 망토를 두르며 일어났다. 에리히가 걸치고 있을 때는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자신이 두르자 품이 낙낙했다.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건가?”
“왜?”
괜히 망토를 이리저리 들춰 보던 라얀은 염려로 범벅이 된 에리히를 보며 곧장 되받아쳤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는, 지상에 너무 오래 있어 쓰러진 적이 있으니까.”
그는 언급하는 것조차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기어이 말을 마쳤다. 알레보다 더 심한데? 라얀은 자신을 금방이라도 깨질 유리처럼 다루는 에리히를, 자신의 건강에 누구보다도 극성이던 알레보다 더 우위에 두었다.
“괜찮아.”
그때야 서서히 생이 바스러지고 있을 때였다. 완전하지 않아도 수호석이 존재하는 지금과는 비교 선상에 둘 수도 없었다.
“오늘은 밤새 에리히랑 있을 건데.”
라얀은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었다. 에리히는 손가락을 움찔거렸지만 밀쳐내지는 않았다. 따뜻하게 전해지는 체온을 느끼며 그에게 기댔다.
에리히의 불안이 이렇게나마 옅어지길 바랐다.
“안 돼?”
올려다보며 묻자 그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3년 동안 잠들어 있던 제게는 모든 기억이 어제의 것처럼 생생했으나, 바깥은 많은 게 변해 있었다. 낯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익숙했던 것은 종종 에리히와 거닐던 곳들만큼은 어떤 변화 없이 온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에리히는 추억을 좇아 돌아다니는 것에 얌전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때로는 라얀의 말에 옅게 웃었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한시적인 평화였다. 에리히는 달이 한 뼘 정도 서쪽으로 기울자 아닌 척 라얀에게 촉각을 곤두세웠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흘려들은 게 틀림없다. 오늘만 날인 건 아니고, 다음엔 태양이 걸려 있을 때 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늦은 밤이니 에리히도 자야 할 테고. 라얀은 아쉬움을 갈무리하며 그가 원하는 대로 고성 쪽으로 걸음을 되돌렸다.
에리히를 기다리던 시절에 수도 없이 기웃거리던 곳이라 라얀은 에리히의 손을 맞잡은 채로 막힘 없이 걸었다. 금세 성문이 보였다. 맞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라얀은 아니었으니 범인은 따로 있었다. 올려다보자 에리히가 라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뺨을.
“…….”
얽지 않은 손이 허공에서 머뭇거리다가 이내 라얀의 뺨에 닿았다.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이제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뺨을 문지르는 표정엔 짙은 후회가 새겨져 있었다. 라얀은 그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금세 눈치챘다.
“에리히.”
라얀은 뺨을 스치던 탄환 대신 다른 것을 기억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예컨대 밤새 에리히의 평온한 밤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었던 시간, 주점에서 곤경에 처한 자신을 구해주던 에리히, 자신이 깨어날 때까지 밤새 기다려주면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주던 숨길 수 없는 다정함 같은 것들.
“얼른 들어가자.”
그러지 않기로 하지 않았느냐는 말 대신에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마주쳤다. 깍지 낀 손을 더 강하게 얽으며 에리히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강한 힘도 아니었지만 에리히는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라얀이 이 성에 머무른 것은 단 하루였고, 그나마도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성큼성큼 나아가던 걸음에 조금씩 머뭇거림이 묻어나자 어느 순간부터인가 에리히가 이끌었다. 단단하게 얽은 손은 여전히 그들을 잇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해?”
성내는 고요했다. 자박자박. 대리석 바닥에 맞닿는 그들의 걸음 소리마저 선명한 울림으로 돌아올 만큼. 처음에는 늦은 밤이라 다들 잠든 건가 했지만 그런 것 치고도 기척이 없었다.
“위르겐은?”
바깥 세계에 무지했을 때라면 모를까. 이제 라얀도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가령 에리히가 아무리 누가 따라다니는 걸 성가셔한다 한들 이렇게까지 아무도 없을 수는 없었다.
하물며, 위르겐은 에리히의 시종장이 아닌가. 그는 종종 제게 자신은 원래 폐하를 가까이서 섬겨야 하지만 그분의 명으로 라얀의 곁에 있는 것이라는 말을 건네곤 했다. 생색을 내는 것이라기보단, 이만큼 에리히가 라얀에게 정성이라는 것을 주지시키려는 듯이.
“음.”
침음을 흘리는 에리히는 어딘지 무심한 표정이었다.
“곧 오겠지.”
그러더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라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금방 의문을 거두어냈다. 고요한 주변에 의문이 생겼을 뿐, 제게 그렇게 중요한 궁금증은 아니었다.
그들의 걸음은 곧 침실에 닿았다.
침실의 문을 열자 그 틈으로 에리히에게서 느낄 수 있는 향기가 났다. 어딘지 서늘하고, 그러나 따뜻한. 어두웠던 곳에 은은히 불이 밝혀졌다. 화려하고 장엄하기 짝이 없던 제르바의 침실보다는 작으면서도 조금 더 살풍경한 정경이 보였다.
“…….”
라얀의 눈길을 잡아끄는 게 있었다.
한쪽 벽면에 걸린 태피스트리였다. 사방으로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바다와 그 가운데 암석, 또 암석 위에 굴러다니는 수정구까지. 흔해 빠진 풍경처럼 보였지만 그들이 처음으로 이름을 나눈 곳이다. 라얀은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거 잃어버렸는데…….”
저것뿐만이 아니다. 야금야금 모아둔 것들은 전부 소실되었다. 정확히는 라얀이 떠난 이후로 메르가 모든 흔적을 말살시켜버렸다는 것에 가까울 테지만.
다른 것은 그래도 괜찮았는데 에리히가 만들어준 낮의 세상이 담긴 수정구가 사라진 것만큼은 아쉬웠다. 벽면에 걸려 있어 닿지 않을 수정구에 온 신경이 쏠린 탓일까. 무심코 손을 뻗으며 다가가다 중심을 잃었다.
그러나 라얀이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기도 전에 몸이 들렸다. 허공에서 양다리가 달랑거렸다. 라얀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자신을 받쳐 안아 든 에리히를 바라봤다.
“…….”
그냥 중심만 잠깐 잃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려다보는 에리히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혹시 자신이 양다리가 부러진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내려달라는 말은 입 안에 머물렀다가 꼴깍 삼켜졌다.
라얀이 적당한 말을 고르는 사이 에리히는 거침없이 걸었다. 침대 앞까지 닿은 그는 조심스레 자신을 내려놨다. 푹신한 감각이 등부터 감싸 안았다.
“쉬어.”
다정하게 건네는 말의 의도야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라얀이 뭍에 올라온 순간부터 내심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는데 어떻게 모를까.
“…….”
잠드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양 머리맡에 앉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에리히를 보다가 금세 자신의 목적을 상기했다. 뭍에 올라와 밤새 에리히와 있으려고 하던 그 이유를. 라얀은 꾸물꾸물 안쪽으로 굴러서 옆자리를 내어주며 손으로 탁탁 두드렸다.
“엘도 얼른 누워.”
곤란한 표정도 잠깐이었다. 에리히는 순순히 제 말에 따랐다. 라얀은 몸을 내리는 그를 기다렸다가 품으로 파고들었다. 에리히 역시 마주 안아주었다. 쿵쿵. 귀를 기울이자 사이에 두고 심장 박동이 들렸다.
그토록 열렬히 갈망하는 존재의 품이었다.
자신을 기억하고, 켜켜이 쌓아온 모든 기억의 역사 속에 머무르는 이. 마음이 벅차올라서 괜히 더 깊숙이 파고든 채로 눈만 빼꼼 올렸다. 에리히는 잠기운이 한 점도 머무르지 않는 눈으로 라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야 하는데. 그도 그럴 게 라얀은 자고 일어난 에리히과 눈 맞추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때, 정말로 꿈이 아니지? 하고.
“엘. 내가 동화책 읽어줄까?”
어떻게 재울지 고민하던 라얀은 마리엘이 한 말을 떠올렸다. 잠자리에 들면 유모가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준다고. 에리히는 동화를 어린아이나 읽는 것이라 선 그은 것을 보면, 마리엘처럼 어린 인간에 한정된 것 같지만.
“아니.”
어리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기엔 에리히의 반응은 단호한 면이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
그는 왜인지 괴로워 보였다. 라얀은 차마 이유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리히의 가슴을 토닥거리며 아티사에서의 일을 천천히 실타래처럼 풀어냈다.
깨어난 이후로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티사에서의 일은 하는 말을 또 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에리히는 그것을 지겨워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차이점을 하나씩 찾아내며 대답을 곁들였다. 성실하게 들어주니 금세 신이 난 라얀은 아일라를 비롯한 제 옛 수호자들이 그의 험담을 한 것을 쏙 빼놓으면서 조잘거렸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라얀의 목소리가 점점 불분명해졌다. 에리히를 재우려던 것인데 먼저 잠들게 될 것 같았다. 자신의 목소리에 어린 잠기운을 읽어냈는지 에리히가 다정하게 등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좋은 꿈 꿔. 라얀은 끌어안는 품에 파고들며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얽힌 숨이 평온한 밤을 닮아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 * *
이따가 다시 올게. 여전히 환상같이 아스라한 연인은 해가 뜨기도 전에 에르하르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 알레가, 아일라가……, 하고 중얼거리는 얼굴에는 찰나 근심이 어렸지만 금세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검푸르기까지 한 물살 아래로 사라지는 라얀을 보면서, 에르하르트는 왜 그가 제르바의 호수 아래에서 유영하느라 보이지 않을 때면 까닭 없이 불안했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봐. 손 닿지 않는 곳으로 영원히 사라질까 봐.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한 주제에 라얀이 자신의 영역으로 떠나버릴 때면 불안한 것이 마음 언저리 어딘가에 잔여물처럼 남아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잔잔한 파도 사이로 혹시 라얀이 다시 빼꼼 모습을 드러내며 웃지 않을까 한참을 기다리던 에르하르트는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뜬 다음에야 겨우 성으로 돌아갔다.
라얀이 자아내던 소음으로 아주 잠깐 활력이 돌았던 성은 죽음을 삼킨 것처럼 고요해져 있었다. 성의 유지 및 보수를 위해 사용인들이 머물렀으나, 에르하르트가 소란을 싫어하는 것을 알아 그가 올 때면 눈치껏 본성으로는 걸음 하지 않았다.
발코니의 난간에 기댄 에르하르트는 하염없이 바다만 내려다보았다.
라얀이 옆에 없을 때면, 에르하르트는 매번 이렇게 공허한 눈으로 밤이 저물어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잘거리던 목소리와 무의식적인 손짓, 발짓을 하나하나 기억 속에 새기면서 이것은 결코 자신이 빚어낸 허상 따위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스스로를 다잡으면서.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
하루하루 희미한 환희와 의심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했다. 달이 하늘에 걸리면 나타나 물안개와 사라지는 그가 과연 정말로 실재하는 존재일까. 혹시 전부 환상이 아닐까. 라얀이 그립고 사무쳐서 그것을 견디지 못해 허상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하고.
어쩔 수 없었다. 거듭된 불면에 수면제의 힘을 빌려가며 겨우 잠을 청할 때면 그는 항상 라얀이 나오는 꿈을 꿨고, 깨어나면 피 냄새로 얼룩진 전쟁터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으므로.
때문에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만난 뒤로는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눈 감는 순간, 꿈에서 깨어날까 봐.
다시 냉혹한 현실로 밀려날까 봐서.
‘자. 이래도 꿈 같아?’
하지만 찰나처럼 입을 맞춰놓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안녕. 내 현실.’
희붐한 새벽에 잠긴 새순 같은 눈이 제게 닿으며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줄 때, 밤새 연인의 잠든 모습을 지켰던 에르하르트는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것이 정말로 꿈이 아니라 현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숨을 쉬고 내뱉을 때마다 가슴이 턱턱 막히지만 그럼에도 견뎌야만 했던 삶이기에 버티던 나날로부터, 드디어 끝을 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뼈가 저리는 공허에서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금세 다른 감정이 선명한 형태로 에르하르트를 짓눌렀다. 죄책감이었다.
그를 단순히 꿈속 허상 즈음으로 생각하면서도,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 물어본 적 있었다. 내가 밉지는 않으냐고. 그 말에 라얀은 미간을 좁히며 갑자기? 하고 말을 돌렸다.
감히 잊었다. 그뿐인가. 자꾸만 잔잔하게 이어지는 나날에 돌을 던져 파문을 그리고, 눈에 밟히는 그가 못내 당황스러워 자꾸만 모질게 굴기까지 했다. 원망이 두렵지만 그럼에도 라얀이 자신을 미워하는 일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라얀은 무엇이라 대답했던가.
‘오히려 나는, 엘. 네 모습이, 표정이 너무 맺혔어.’
모든 걸 기억해 버린 너를 두고 가야 하는 게 더 사무쳤다며, 울고 싶은 것처럼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자신을 살피던 라얀의 표정 같은 것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허상이라면, 그저 웃는 모습만 눈에 담고 싶었다.
그리하여 삼켰다.
혹시나 꿈이라서, 비겁하게도 자신이 위안처럼 듣고 싶은 말만 듣게 될까 봐. 또한 그런 게 아니더라도 돌덩어리처럼 묵직한 이 죄책감이나 속죄는 전부 에르하르트의 몫이다. 쉬이 털어내 가벼워질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라얀…….”
고개를 기울이고 포말이 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연인의 이름을 부르던 에르하르트의 시선이 흘끔 문 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문을 두드리며 폐하, 하고 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에르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또 문을 두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위르겐의 얼굴이 보였다. 부랴부랴 게이트를 타고 인근의 성으로 이동해 여기까지 달려왔을 얼굴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다 생각했지.”
3년 동안 에르하르트는 종종 이런 식으로 아르헨으로 와서 처박혀 있곤 했다. 처음엔 말도 없이 사라진 에르하르트 때문에 황궁이 발칵 뒤집혔으나, 그의 행동 양상을 학습한 위르겐은 며칠은 내쳐 두었다가 너무 오래 지체한다 싶을 때면 그를 찾으러 왔다.
물론 그것은 마중이라기보다는 에르하르트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것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위르겐은 게이트를 타고 와서 이동하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지난 3년간 종종 벌어지는 연례행사였지만, 이번에는 부쩍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출전한 황제를 곁에서 보좌하던 마법사가 한 말이 마음에 박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경한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폐하께서는 꼭 영면을 바라시는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폐하라 하여도 그렇게 마력을 끌어다 쓰시면 육체가 견뎌내지 못할 게 분명해 옥체를 보중하시라고 충언을 드려도, 오히려 기껍다는 표정을 지으시니. 이번에는 부쩍 더하셨습니다. 역류하는 피를 삼키시더군요.’
마법에 무지한 자들은 전쟁터에서 보인 황제의 전능을 경애하고 두려워했으나, 마법사들만큼은 경외하는 한편 그를 염려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황제가 그러쥘 수 있는 마력이 무한하다 한들 그것을 담은 그릇이 유한하다고. 그것이 언제 깨질지 두렵다고.
황제가 어찌하여 그러는지는 알고 있다.
살고 싶게 했다던, 자신의 전부이며 세상이라고 칭하던 존재를 잃고 나서 그의 생은 마치 박제된 것만 같았다.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죽어 있는, 그런 삶.
수면제 없이는 잠도 청하지 못하는 황제는, 하도 매만져 닳아버린 이불을 버리지도 못하고 한편에 두고 있었다. 그는 3년 내내 작위적인 웃음조차도 한 번 지은 적이 없었다. 겉보기로는 멀쩡해 보여도 황제가 한계에 치달아가는 게 보였다. 그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죽음을 향한 길을 걷고 있었다.
마음 추스르다가 결국은 다잡고 오곤 하니까, 그가 종종 되새기듯이 하는 말이 있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위르겐은 정해둔 날을 지나기 무섭게 곧장 게이트를 탔다. 언제나 그렇듯이 공허해 보이는 얼굴을, 혹은 다 꺼져 가는 생을 마주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위르겐을 맞이하는 황제의 얼굴은 의외로 생기가 돌았다.
“전공을 논해 전리품 분배를 해야 할 텐데, 짐이 여기 있어 더뎌지고 있겠군.”
“총사령관과 궁내부 장관을 비롯한 이들이 공과를 논하고 있사옵니다.”
어련히 알아서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에르하르트는 제 앞에 놓인 현실을 대면했다.
어쨌든, 그는 빌어먹게도 헤셀러스의 황제였다. 원하든, 원치 않는 자리였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마리엘이 다 자라서 제 몫을 하기 전까지는 제 의무를 지켜야만 했다. 이 자리를 얻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가 무엇인지 알기에 더더욱.
연인.
그리고 그와 쌓아 올린 모든 기억.
“…그래.”
해서 저버릴 수 없는데, 라얀에게 함께 가자고 할 수도 없었다. 라얀은 이제 지상에 있는 게 버겁지 않다고 했지만, 자꾸만 힘없이 쓰러져 있던 모습이 어제 본 것처럼 선명했다. 실제로 어제도 휘청거리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더라도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 모든 것을 등지고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감히. 이미 한 번 모든 것을 내던지고 제게 온 적 있던 라얀에게 그것은 너무 이기적이며 가혹한 일이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시 메르는 언젠가 저 심해를 지배하며 누렸을 거다. 이렇게 약해지지도,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조차 없었겠지.’
돌아왔다며 끌어안더니 금세 제 품에서 의식을 잃은 라얀을 보면서 허둥지둥하고 있는데 라얀의 수호자가 다가왔다. 경황없는 틈에 그는 라얀을 제 품에서 채가며 금방이라도 죽이고 싶다는 눈을 하고서는 사납게 짓씹었다. 에르하르트가 라얀에게서 빼앗은 것이 이렇게나 많다고.
과거에도 라얀의 수호자는 그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고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증오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서 생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것을 빼앗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빛날 수도 있던 미래까지도.
그러니 그는 라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서도 안 됐다.
“…폐하.”
하지만 라얀 없이 살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는 에르하르트의 유일한 의미였다. 하나뿐인 색채였고, 세상이었다. 라얀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어떤지, 그는 지난 3년간 사무치게 새겼다. 그것은 황량했으며 끔찍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계절이었다.
“폐하?”
위르겐이 오면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곧장 제르바로 돌아가던 에르하르트가 아무 말 없자 그는 의아한 얼굴을 하며 재차 불렀다.
“…오는 길이 고단했을 텐데 쉬어라. 이따가 다시 얘기하지.”
“그.”
의문을 표하려던 위르겐은 곧 에르하르트의 기색을 살피고선 눈치 좋게 물러났다. 고요하게 문이 닫혔다. 에르하르트는 바람에 실려오는 짭조름한 바다의 내음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 * *
날이 밝기 전, 에리히를 뒤로하고 아티사로 돌아간 라얀은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는 알레를 내보내고서는 혼자 방 안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표정이 부쩍 심각했다.
에리히에게는 티 내지 않으려고 내내 웃는 얼굴을 했지만, 라얀은 지금 다소 심란했다. 혼자 삭이며 가슴앓이하는 모습을 모르면 몰랐지,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라얀은 홀로 속 편했던 자신을 탓했다.
‘…얀. 라얀…….’
하물며 자신이 잠들 때 함께 잠들었을 줄 알았던 에리히가 자신의 이름을 마치 목숨줄을 붙드는 것처럼 속삭이는 소리에 어렴풋이 깨어나야 했을 때는 더욱더.
꿈이 아니라고 말해줬는데도,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고 했음에도 제 연인은 기다림이라는 악몽 속에 갇혀 있었다. 여전히 그 지옥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억지로라도 재울까 했으나 그것은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할 게 뻔했다. 잠든 척 숨을 죽이며 내내 그의 품에 안겨 온기를 나눠주는 것 말고는, 새벽 별이 명멸할 때 막 깨어난 척 그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네는 것 말고는.
이처럼 에리히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으니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아티사에서 얼마간 더 머무르다가 에리히에게 갈 생각이었는데, 조금만 당기는 게 좋지 않을까. 몸도 거의 다 회복되었고, 남은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에리히를 저대로 둘 수 없었다. 곪아 썩어가는 모습을, 터트리지도 못하고 혼자서 삭이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보고 싶지 않았다.
“…….”
라얀은 결심한 듯이 박차고 나갔다.
라얀이 광장을 가로지르자 시선이 모였다. 3년 전 돌아와 오래도록 가사 상태였다가 며칠 전 깨어났다는 소문은 접했어도 라얀을 보는 것은 처음일 것이다. 깨어난 뒤로 자신의 침실에 있거나 바깥으로 나갈 때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경비가 허술한 결계 쪽으로 들락거렸으니.
자신을 향해 몰린 시선을 인지했으나 그에 일일이 응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적의는 없다는 점이, 대개의 시선이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것이 자그마한 위안이 되었다.
왕의 침소가 가까워졌다.
한 손에 창을 들고 단단한 표정으로 지키는 수호 인어들을 보자 실감이 났다. 내심 긴장되는 마음을 드러내듯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찼던 꼬리짓이 조금씩 느려졌다.
“저…….”
오기는 했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라얀은 잠시 머뭇거렸다. 저 스스로 왕의 침소에 온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옛일이었다. 심지어 마지막이 그리 좋지 못했고, 깨어날 때 언뜻 보기는 했으나 그때도 에리히를 생각하느라 겨를이 없어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메르가 자신을 순순히 만나줄 거라는 보장 역시 없었다.
“들어가십시오. 오시거든 언제든 안내하라 이르셨습니다.”
말을 매듭짓지 못했는데 수호 인어가 창을 거뒀다. 메르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말과 함께.
설마 자신이 찾아올 것을 예비해 놨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얼떨떨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작 문 하나만을 넘어섰을 뿐인데 위압감을 품은 서늘한 기류가 라얀을 감싸 안았다.
왕좌에 앉은 메르는 무언가에 골몰한 듯 측면을 보다가 라얀의 기척에야 시선을 내렸다. 품은 온도는 다를지언정 꼭 닮은 녹색의 눈이 허공에 얽혔다.
“왔구나.”
툭 내던지는 말에 특별한 애정 같은 건 묻어나지 않았다.
“언제쯤 올까 했지. 그래. 이별을 고하러 온 것인가.”
메르는 라얀이 어렵사리 여기에 온 이유를 금세 짚어냈다.
“…허락하실 건가요?”
“않겠다면?”
“…….”
“순응하고 얌전히 시 메르로서 내 자리를 계승하겠느냐?”
“그건…….”
“결국은 원하는 대로 할 거면서 왜 되묻는지 모르겠구나.”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양 메르는 피식 웃었다가 금세 입매를 가다듬었다.
“네 존재는 아티사의 새로운 후계한테 걸림돌이 되겠지. 한데 굳이 막아설 이유가 있을까.”
아일라가 시 메르가 된 지 어느덧 5년이 지났다고 해도, 수십 년을 시 메르로 불린 것은 바로 라얀이었다. 아무리 라얀이 인간을 옹호하며 율법을 어겼다 한들 돌아온 이상, 하물며 라얀의 상태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아니니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온 것을 보니 혹여 추방령이 거두어진 게 아닌가, 아무리 공명정대하고 냉철한 왕이라지만 마음은 끝끝내 친자인 라얀에게 기우는 것이 아닌가, 하고.
메르는 다른 이들의 심리를 파악해서 분명하게 짚고 있었다. 내가 너의 행보를 막지 않는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티사와 새로운 후계인 아일라를 위해서라고. 이것은 대단히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듯이.
“이야기는 끝난 것 같구나. 가보거라.”
라얀을 향해 이만 가보라는 듯이 손을 휘저은 메르가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시선을 거두는 모습에서는 자신을 향한 어떤 미련도 묻어나 있지 않았다.
서늘한 눈이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음에 라얀은 뒤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문득 어떤 충동이 살살 부추기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왜, 그러셨어요.”
목구멍까지 차올라 언제 넘쳐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말이 툭 튀어 나갔다. 어렴풋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묻지 못할 것이며, 듣지 못할 거라고.
“알레를 통해 비늘 조각을 허락하신 것도…….”
알레가 제게 쥐여 주었던 인어의 비늘 조각은 메르의 것이었다. 그것이 트라이던트가 되어 손에 잡히던 감각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라얀은 아마 트라이던트를 붙든 채로 오래 얼빠져 있었으리라.
“저를 데리고 와서 살리신 것까지 전부 다요.”
게다가 메르는 부서져 산산조각 난 수호석에 힘을 불어 넣어가면서까지 라얀의 목숨을 붙여놓았다. 라얀이 완전히 숨을 거두기 전, 기억을 되찾은 에리히로 인해 수호석을 도로 돌려받기는 했지만 그녀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혹은 운이 좋아 살았다 한들 깨어나는 게 이보다 더 오랜 시간 걸렸거나.
라얀이 3년 만에 깨어난 것은 전적으로 메르 덕분이었다.
라얀은 아일라가 말한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일라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메르가 제 조각 난 수호석에 숨을 불어넣어 주느라 반년간 칩거를 해야 했다고.
“이제 와 고작 그런 게 궁금한가?”
궁금했다.
라얀에게 바다의 안온한 품을 허락하지도 않았던 메르는, 그러니까 어머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일을 할 존재가 아니라서.
라얀의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녀는 단 한 번도 다정하게 라얀을 보듬어준 적은 없었다. 한때는 촉망받는 후계자였던 만큼 원하는 것이라면 전부 안겨주었지만 그뿐이었다. 라얀을 낳은 이는 그녀일지 몰라도 정성을 들여 이만큼 키워낸 이는 알레이지 않은가.
사실상 둘의 사이엔 어떤 유대조차 없었다. 핏줄이라는 것과 왕과 그 자리를 계승한 후계자의 관계라는 것 외에는.
“이유라. 이유.”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답을 헤아리듯, 어쩌면 문장을 가다듬는 듯한 행동에 라얀은 가만히 기다렸다.
“네가 날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
“어머니라고.”
그녀의 입술 끄트머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단어는 어딘지 생경했다. 그들이 그런 관계로 묶여 있음에도. 메르 역시 낯선지 찰나 미간을 좁혔다가 라얀을 내려다봤다.
“라얀. 단언컨대 나는 그날의 네 선택이나 앞으로의 네 선택 역시 일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게 가장 유의미한 것은 언제 바스러질지 모르는 나약한 감정 따위도, 설령 나 스스로도 아닌 바로 이 아티사이니까.”
그것이 왕으로서 내가 짊어진 일평생의 의무지. 그녀의 대답에서 조금의 과장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흔들림 없는 표정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의무에서 비롯된 고단함이 아니라 아티사를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었다. 메르는 사랑을 언제 바스러질지 모르는 나약한 감정 따위라고 단언했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결국은 그녀 역시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왕으로서 네게 이 바다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처분이었다.”
“…….”
“하지만 네가 생사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이 온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가 온다면 한 번쯤은, 그래, 일평생 한 번 정도는 네가 날 부르던 이름에 충실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지. 단지 그뿐이었다. 이런 보잘것없는 이유라서, 네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실망했니?”
왕이니 드러내지는 못했어도 실은 내가 가장 각별하게 여기는 것이 너였다는 대답이 아니라서 실망했냐고 묻는다. 혹시라도 라얀의 답이 실망이었다고 해도 금세 흘려 잊을 것만 같이 건조한 표정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애초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고, 답이 듣고 싶었을 뿐이다. 돌아 나가면, 살아서 다시는 왕을 볼 일은 없을 테니까.
대화가 끊기자 적막이 돌았다. 메르는 아까처럼 나가라고 손짓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로 가야만 했다.
“행복하세요.”
“…….”
“진심이에요.”
라얀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기 직전, 조용히 왕의 평온을 바랐다. 찰나 왕의 시선이 제 등에 달라붙은 것도 같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의 연인에게 돌아갈 때였다.
* * *
해가 떠 있을 때 지상에 오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재회를 늦은 밤에 한 탓인지 암묵적으로 그들의 만남은 달이 뜨는 어두운 밤이었다. 어쩌면 과거의 습관이 무의식에 새겨진 탓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라얀이 동굴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 에리히는 없었다.
당연한 일인데 괜히 아쉽고,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예정에 없던 시간에 불쑥 찾아간다면 깜짝 놀라겠지? 앞으로 아티사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 너와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하면 좋아해줄까. 에리히의 반응을 하나씩 상상해 보는 라얀의 입매가 슬금슬금 풀렸다.
“…라얀.”
그러자 배웅한답시고 뒤따라온 알레가 시무룩한 음성으로 그를 불러세웠다. 라얀은 잠시 그를 잊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얼른 표정을 매만졌다.
“알레.”
라얀이 왕의 홀로 향한 것은 당연히 아일라의 귀에도 들어갔다. 독대를 마친 라얀이 제 궁으로 돌아가기 무섭게 아일라를 비롯한 수호자들이 그를 찾았다. 셋 다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아마도 라얀이 메르를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라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다들 알고 있었잖아, 라고. 아무도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의식을 차리자마자 에리히부터 찾던 라얀이 아티사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으리라는 것은 내심 알고 있는 사실이었을 테니. 그저 예상보다 일러서 당혹스러워했을 뿐이다.
“언제든 돌아와요.”
“…….”
“물론, 돌아오지 않을 당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한숨과 함께 흘러나오는 말에는 옅은 원망이 섞여 있었다.
수년 전, 라얀이 아티사를 등지고 에리히를 선택하면서 이미 한차례 이별한 적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한 번의 이별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올 수도 있잖아요. 그 인간이 당신을 속상하게 할 때라든가, 혹은 우리가 그리울 때라든가. …라얀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올 테니까.”
“응.”
“…….”
“약속할게. 미덥지 못하면 태초의 서약이라도 할까?”
라얀이 태초의 서약 때문에 어떤 꼴을 당했는지를 알고 있는 알레는 눈을 세모꼴로 떴다. 장난이야. 무마하는 말에도 사나워진 눈매는 누그러지는 법이 없었다.
“내 수호자. 맹세할게. 영원한 이별은 아닐 거라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 에리히에게 부탁해서 아르헨으로 오겠다고, 부르면 나오기나 하라면서 하얀 머리칼 사이를 쓸면서 진지하게 달래자 그제야 알레의 표정이 풀어졌다. 부디 행복해야 해요. 알레는 라얀의 손에 제 뺨을 얹은 채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는 대답을 듣고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밀어내지 않으면 한참을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아서 먼저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알레는 아쉬움과 여러 감정으로 뒤섞인 눈으로 라얀을 보다가 천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이별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은 비단 제 소중한 이들뿐만이 아니었으니. 다만 우선하는 게 있을 뿐, 라얀 역시 또 한 번의 헤어짐에 쓸쓸해졌다.
라얀은 희게 포말이 일어나는 파도와 소금기 묻은 바람 내음을 한참 동안 곱씹다가 그 감정에 삼켜지기 전 털어내듯 돌아섰다.
입을 옷도, 로브를 둘러줄 에리히도 없었기에 라얀은 오늘 새벽에 그가 알려준 비밀통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이 길로 올라가면 곧장 에리히의 침실이니 괜히 찾아 헤맬 필요도 없이 그를 볼 수 있었다.
라얀은 어둠 속을 헤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에리히와 함께 내려올 때는 그가 불을 밝혀주어서 잘 몰랐는데 길이 울퉁불퉁했다.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한 몸을 추슬러가면서 얼마나 걸었을까. 어둡고, 축축한 길은 곧 끝을 보였다.
손을 뻗어 벽을 더듬거렸다. 에리히가 어딘가를 만졌던 것 같은데. 기억을 뒤적여가면서 벽을 이리저리 쓸어내리자 덜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빛이 새어 들어왔다.
발코니를 통해 햇살이 내리치는 방 안은 고요했다.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에리히?”
엘, 속삭이면서 침실을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도 없었다. 하긴. 계속 방에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나가서 찾아볼까 했으나 괜히 엇갈릴까 봐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공간에서 맞이하면 더더욱 자신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서. 또한, 결정적으로는.
“…음.”
여기서 나가려면 걸칠 만한 옷을 찾아야 했다.
라얀은 옷을 찾아 헤맸다. 맞지 않는 옷 사이에서 헤매다가 결국 로브를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나마 의장을 갖추고 한숨 돌린 라얀의 눈에 문득 걸리는 것이 있었다.
“…….”
홀린 듯이 발코니로 나갔다.
라얀이 일평생 살아온 터전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평소였더라면 난간에 반쯤 걸터앉아 바다 구경에 심취했을 테지만 라얀을 발코니로 이끈 것은 따로 있었다. 낮의 세계가 정교하게 묘사된 수정구. 순간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은 건 아닐까 착각하다가 흠 하나 없이 깨끗한 것을 보곤 곧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에리히.”
제 다정한 연인은, 이것을 잃어버리고 속상해하던 모습을 내심 마음에 담아둔 게 틀림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진다. 입가가 배시시 풀려 씰룩거렸다. 수정구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소중히 끌어안았다.
라얀은 그에 집중해 있느라 이쪽으로 향하는 기척에 미처 귀 기울이지 못했다.
“누구냐! 누가 감히 내 허락도 없이 폐하의 침실에 들어 있는 것이냐!”
귓전을 때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야 라얀은 깜짝 놀랐다. 수정구를 놓칠 뻔한 것을 겨우 두 손으로 잡아채며 조심히 뒤를 돌아봤다.
“폐하께서 아니 계시거… 헉!”
위르겐은 언제 노호성을 질렀냐는 양 라얀을 보고서는 경악해 숨을 들이마셨다. 못 박힌 듯 자리에 선 그는 새하얗게 질려서는 눈만 깜빡거렸다. 위르겐의 머리는 예전보다 조금 희끗해져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기억 속의 모습과 흡사했다.
“저, 오랜만이에요. 위르겐.”
조금 더 나이가 들었어도 그는 위르겐이었고, 제르바에서 제게 살가웠던 몇 안 되는 이였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웃은 라얀이 한 걸음 다가서자 평소의 진중함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뒷걸음질 치다가 휘청거렸다. 중년의 사내는 결국 중심을 바로잡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위르겐!”
“유, …유령이 말을…….”
놀라서 넋까지 잃은 위르겐을 보면서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침음을 삼켰다. 반가움에 잠시 젖혀둔 깨달음이 뒤늦게 머리를 치고 갔다. 라얀을 아는 이들은 전부 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에리히가 자신을 환영 따위로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저 유령 아닌데…….”
그렇다고 에리히에게 한 것처럼 지난 3년의 일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었다. 라얀은 이것 보라며, 햇살에 드러나는 선명한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부정했다.
얼어붙어 있던 위르겐은 눈을 위아래로 굴렸다.
“오. 신이시여.”
그는 끝끝내 신을 찾으며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위르겐이 진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황제의 시종장으로 요구되는 덕목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어떤 상황에 놓이든 평정을 지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위르겐은 일단 라얀의 생환을 받아들였다.
정확히는 덮어놓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무엇이 됐든 간에, 설령 연인을 그리워하다 못한 황제가 사술을 이용해 육신을 빚어낸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의 존재는 황제의 유일한 희망이자 삶의 의지가 될 테니.
막상 이렇게 생각은 해도 그가 정말로 그릇된 존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은 했다. 언젠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3년 전과 달리 지금의 라얀은 생기가 넘쳤다. 생명력이 가득 차다 못해 넘실거렸다. 이런 게 어떻게 사술로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라얀은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다.
과연, 식음은 전폐한 것 같은데도 묘하게 생기 돌던 황제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왜 평상시와 달랐는지도, 그리고 순순히 따르고 있지만 반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명령 또한.
“폐하께서는 잠시 제르바에 가셨습니다.”
놀람을 걷어낸 위르겐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어…….”
하려던 질문을 가로채인 라얀은 어물거렸다.
“급히 처리하실 일이 있으신 터라.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실 겁니다.”
종종, 아니, 사실은 자주 깜빡하지만 에리히는 황제였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바빴다. 라얀이 일어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우고, 늦은 밤이 까마득하게 깔려서야 침궁으로 돌아왔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어딘지 피곤이 짙어 보이는 표정을 하고는.
하루가 어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빠진 연인을 며칠 동안 자신의 곁에만 묶어둔 것이다. 라얀은 다소 충동적이기까지 했던 제 결정에 안도했다.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더 에리히를 고생시켰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알겠어요.”
라얀은 발코니 너머를 흘끔거렸다. 첨탑 위에 가파르게 걸려 있는 태양은 시들지 않을 것처럼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에리히가 오기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위르겐은 일을 위해 자리를 뜨기 전,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덕분에 폐하께서…….”
“…….”
“아니,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할 뻔했군요.”
“위르겐.”
라얀은 서둘러 나가려는 그를 붙잡아 세웠다.
“그 애는, 지나온 세월을 내게 단 한 마디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 애’라고 했지만 그것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를 수 없었다. 황제의 총애를 지극히 누렸다고는 해도 평민에 불과한 라얀이 지고한 존재를 그리 칭한 것은 경을 칠 일이었다. 하지만 위르겐은 황제가 그를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여전히 선명하게도 기억하고 있었다.
“에리히는 혹시 잘 지내지 못했나요?
“…….”
“단, 한 순간도?”
“그것은―.”
“거짓은 섞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제가 어찌 감히 폐하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한참을 머뭇거리던 위르겐은 라얀의 간절함에 입을 열었다.
“다만, 폐하께서는 종종 다짐하듯이 이 말을 되새기시더군요.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고요.”
라얀은 정처 없이 떨리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눈꺼풀에 덮인 눈동자에는 무수한 감정이 떠올랐다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약속이요, 약속…….”
그게 무엇인지 모를 수 없다.
동화 이야기를 꺼낼 때 왜 에리히가 강하게 거부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오래 행복하고, 늘 웃으며, 자신을 아주 가끔만 생각해 주기를.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기 위해 강요한 그 맹세가 어떤 식으로 에리히의 목을 죄어왔을지도.
그래서 마음이 조금, 아팠다.
* * *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 무엇도 강요할 생각 없었고,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의무 역시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가 내린 선택은 둘 다 놓지 않는 것이었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에르하르트는 위르겐에게 곧장 성을 단장하라고 지시했다. 최소한의 보수는 하고 있지만 그뿐이다. 손봐야 할 데가 많았다. 그동안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라얀이 드나들 테고, 에르하르트 역시 제르바에 있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순간을 이곳에 할애할 테니 최소한의 구색은 맞춰야 했다.
그런 뒤 본궁에 아르헨과 잇는 이동 마법진의 수식을 새길 겸, 며칠간 미뤄둔 국정을 돌볼 겸 제르바로 돌아갔다. 며칠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일이 산적했다. 전리품과 공과에 관한 것은 전부 그가 최종적으로 처결을 내려야만 했기에 직인을 찍고 나니 이미 해가 아득히 저물어 있었다.
급히 살핀다고 살핀 건데도 순리대로 흐르는 시간은 그가 잡아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새 달빛이 이울었다. 그러니까, 라얀과 평소에 만나곤 하던 시간보다 한참 지나 있었다.
기다릴 텐데.
초조함이 에르하르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원치 않는다. 긴 시간을 헤아렸어야만 했던 라얀에게, 다시는 어떤 기다림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일평생 제 몫이어야만 했다.
조금은 서늘했던 공기가 따뜻해지는 것을 감지할 새도 없이 에르하르트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금세 그의 걸음은 느려졌다.
“…….”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는 이가 있었다.
“엘. 왔어?”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 사이로 새순 같은 눈이 반짝거렸다. 라얀은 눈을 호선으로 그리며 이리 오라는 듯이 가는 팔을 하느작하느작 흔들었다. 에르하르트는 망연히 서 있다가 그 손짓에 마법이 풀린 것처럼 천천히 다가갔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경황이 없어 미처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라얀의 착장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까지 내려와서 늘 등을 가리던 머리는 하나로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걸친 옷은… 어렴풋하지만 분명 자신이 황자 시절에 입던 옷이었다.
“…성에 갔었어?”
금방 전후사정을 짐작한 뒤에 묻자 라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가 보고 싶어서 올라왔는데, 위르겐이랑 만났어.”
날 보면서 얼마나 깜짝 놀라던지, 넘어지기까지 해서 덩달아 놀랐다고 재잘거렸다.
위르겐의 반응이야 익히 짐작이 갔다. 라얀에 관한 일은 그에게도 아직 언급하지 않았으니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유령인가 싶었을 테고, 에르하르트가 라얀을 그리워하다 못해 미쳐서 사술을 행한 것은 아닐지 의심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기다림은 일평생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는 다짐이 무색해졌다.
“왜?”
대답을 바라지 않은 뇌까림이었는데 라얀이 말꼬리를 물었다.
“기다림은 내 몫이어야 하니까.”
“그게 왜 네 몫이야? 돌아올 너를 기다리는 게 얼마나 설레는 일인데. 나도 널 기다릴 거야. 엘. 널 기다릴 수 있는 권리를 내게서 빼앗아가려고 하지 마.”
돌아옴, 기다림, 설렘. 제게는 전부 생경한 것들이다. 라얀이 죽은 줄 알았던 지난 3년은 기약도, 희망조차 없는 기다림이었으며, 돌아온 후에도 그것을 믿지 못해 허상인지 아닌지 헤아리고 초조해하기에 바빴으니.
그래서 기다림이 설렌다는 라얀의 말이 머리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
또한, 라얀의 의도 또한 금방 읽혔다.
“위르겐이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가.”
아까 위르겐과 만났다고 하기에 라얀에게 이상한 말을 한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마냥 기우가 아니었다. 에르하르트가 미간을 좁히자 라얀은 말없이 손을 뻗어 주름진 곳을 꾹 눌렀다.
“위르겐은 별말 하지 않았어.”
“라얀.”
“정말이야.”
다만 그가 아끼고 아끼다가 꺼낸 한마디에서 자신이 수백, 수천 마디를 읽고 헤아렸을 뿐이다. 또한 애초에 라얀은 위르겐의 말이 아니더라도 에리히의 불안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곧장 결단을 내리고 주변을 정리하지 않았던가. 언제나 연인의 시선이 닿는 데 머무르면서, 그를 어루만져 주려고. 사랑하는 터전이, 소중한 존재들이 아쉬워하는 것까지 뒤로하면서.
라얀이 내내 곱씹은 것은 가뜩이나 기약 없는 기다림에, 그 절망이 버거웠을 에리히를 얽어맨 게 바로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동화를 핑계 삼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던 에리히에게 약속을 이끌어냈을 때, 또 생이 스러지기 직전 그에게 다시 한번 그것을 상기시켰을 때 라얀이 바라던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그것이 에리히의 삶에 어떤 동력이 되기를, 이겨내기를, 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구원의 한 조각이 되기를. 그래.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에리히에게 족쇄가 되었다. 이겨내기를, 그러다가 툭 털어내기를 바란 건데 멍에를 지우고 견디는 삶을 살게 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네게.
“에리히.”
“응.”
“엘.”
“그래.”
감정을 삼켜내며 거듭해 이름을 부르는데도 에리히는 귀찮아하는 기색 하나 없이 꼬박꼬박 대답했다.
“널 기다리면서 동화를 조금 읽었는데.”
“라얀.”
“그 동화의 끝이 어떻게 나는지 알아?”
에리히는 예상대로 라얀의 말을 막으려고 들었다. 하지만 라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 척 꿋꿋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에리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마에 닿아 있는 손을 끌어내려서 잡고,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오래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얀은 에리히가 맞잡은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꼈다.
“나는 이 동화처럼 너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지도 않을 거고, 그런 잔혹한 약속을 하라고 새끼손가락을 내걸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는.
“우리는 그럴 거야.”
“…….”
“그렇게 함께. 응?”
무수한 감정으로 뒤엉켜서 헤아릴 수 없는 푸른 눈이 어떤 대답도 없이 라얀을 바라봤다.
“아……!”
에리히의 입술이 닿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라얀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입맞춤에 응했다. 익숙한 침입자가 여린 점막을 헤집었다. 한 손은 뺨을 쥐다가 뒤통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는 그들 사이에 생기는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끌어안으면서 숨을 갈취해 갔다.
꼭 어릴 적 그때 같다.
언제 숨을 쉬어야 할지, 어떻게 혀를 얽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라 서투르지만 그럼에도 함께 감정을 나누는 순간순간들이 좋기만 했던 옛날을 떠오르게 했다. 라얀의 목에서 가느다랗게 앓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에리히는 이성이 돌아온 것처럼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라얀.”
동굴에 낮게 울리는 에리히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대체 너는 왜 이렇게 다정할까.”
마치, 울음을 참는 것도 같았다.
“그러면 안 돼?”
“안 돼.”
“…….”
“자꾸 그 다정을 빌미 삼아 용서받고 싶어지니까.”
“그게 어때서? 너도 내게 다정했잖아. 내가 달콤한 걸 좋아하는 걸 알고 매일 줬고, 종종 입가를 털어줬고, 같이 호수를 산책하면서.”
“그런 건.”
“나는 그런 너를 기억하기로 했어.”
“…….”
“내가 이걸 잃어버려서 아쉬워하는 걸 그냥 흘려넘기지 않고, 다시 만들어서 주려고 한 다정한 너만 기억에 새기기로 했어. 엘.”
라얀은 품에 소중히 품고 있던 수정구를 꺼내면서 가만가만 이야기했다. 좋고, 귀하고, 소중한 기억들만 쥐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자고. 그리고 평범하게, 때로는 특별하게, 가끔은 싸우기도 하면서 여느 연인들처럼 지내자고.
고개를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시선을 보면서 라얀은 다그치는 대신 연인의 손을 움켜잡았다. 위로하듯이, 혹은 달래는 것처럼.
“감히, …내가 감히 너와 그런 걸 바라도 되는 걸까.”
“말했잖아.”
“…….”
“나는 너랑 동화 속 공주님과 왕자님처럼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라고.”
우리는 지나온 세월보다 훨씬 긴 시간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라얀은 단단한 목소리로 호언장담하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닿을 듯 말 듯 하는 귓가에 대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은 이제 갈 데도 없어.”
“그게 무슨 말.”
“가출했어, 너랑 살 거라고.”
허락받았고, 작별 인사까지 나누고 왔으니 가출이 아니라 출가에 가까웠지만 라얀은 제멋대로 왜곡했다. 에리히가 황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라얀은 뻔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응수했다.
“그러니까 엘이 책임져 줘야 해.”
잠깐이었지만 그의 시선이 꼭 말썽을 부리는 어린애를 보는 것 같았다. 새치름한 눈으로 받아치자 금방 풀어지기야 했지만.
끝내 한숨을 내쉰 에리히는 결심한 것처럼 라얀을 품에서 떼어 놓았다. 그러곤 손쓸 틈도 없이 한쪽 무릎을 땅에 대어 꿇어앉았다. 양손으로 라얀의 손을 조심히 받친 채 입술을 얹은 그는 한마디, 한마디를 새겼다.
“라얀.”
“…….”
“네게 시들지 않을 영원을 줄게.”
손등에 닿는 숨결은 엄숙한 맹세였다.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자는 기약이었다.
“응, 응.”
라얀은 웃으면서 에리히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다시 한번 입술이 닿아 맞물렸다. 라얀은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둘렀다. 에리히는 그런 라얀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달빛 아래, 그림자가 마치 하나처럼 얽혔다. 라얀은 비로소 선명해진 연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