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에르하르트는 순간이었으나 범람하는 두통마저 잊었다.
“시종장의 말로는 모두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고, 곧장 침실에 들어가 살폈으나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침입한 흔적이나 저항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에르하르트의 표정을 본 기사는 시선을 피하며 어물거렸다.
“그리고 책상에 이런 게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보좌관에게 곱게 접힌 서신 하나를 전했다. 보좌관은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에르하르트에게 올렸다. 조각 나서 들리는 말을 하나하나 기워내 문장으로 만들어낸 뒤에야 에르하르트는 편지를 펼쳐 들었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
흘려 써서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필체, 단어조차 군데군데 틀린 엉망인 편지에는 서명이 적혀 있지 않았으나 주인이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침실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는 사실이나 내용을 논외로 두고라도, 이상하게도 모를 수가 없었다.
간결한 내용을 추려보면 결국은 작별을 고하는 말이었다. 라얀의 부재가 타의 아닌 자의라는 말이기도 했다. 서신을 꽉 움켜쥔 에르하르트는 카렐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내려다보는 눈빛은 찢어버릴 것처럼 살벌했다.
카렐은 그 시선에 어깨를 움찔거렸으나, 그의 입꼬리에는 흐릿한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아이작. 라얀은, 어디 있지.”
“어찌해서 그것을 제게 여쭈어보시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나한테 너와 말장난할 여유가 있어 보이나?”
에르하르트는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미끄러트려 가는 목을 한 손에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카렐의 말을 듣기 전이라면 라얀이 작별을 고하고 스스로 사라졌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이나마 했을 것이다. 그는 아르헨으로 돌아가겠노라는 말을 심심찮게 입에 담고는 했으니.
“어쩌면 ‘엘’과 사라진 걸 수도 있지 않나요.”
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이 마음 어딘가에 박혀 걸리적거렸다.
“친애하는 아이작. 그딴 소리를 지껄여 속을 들쑤실 거였다면 심장을 도려내 라얀에게 주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
“엘에 대한 이야기 역시 하지 말았어야지.”
그것은 분명 어떠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러니 말하라. 네가 한 말이 무엇인지.”
색이 빠지는 것처럼 나날이 희미해져 가는 라얀의 모습이 뇌리에 깊이 박혀 사라지질 않았다.
“라얀은 어디에 있는지도.”
“그냥, 잊으세요.”
“허튼소리 하지 말고.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말해.”
“지금까지처럼 그냥 잊은 채 사세요……!”
카렐의 절규는 둔탁하게 뒤통수를 쳤다. 얼얼했다.
“…뭐?”
에르하르트의 반문에 그제야 카렐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며 고개를 틀었다. 마치 감정에 휩쓸려 크게 실언한 사람처럼. 하지만 이미 에르하르트는 그의 말을 듣고 의문을 가진 뒤였다.
“잊으라니.”
즉시 말에서 뛰어내린 에르하르트는 카렐 역시 끌어 내렸다. 잠깐 풀려난 카렐은 헛기침을 하며 무심코 물러났지만 에르하르트는 도로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목깃이 숨통을 졸라매는 게 버거운지 카렐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지금까지처럼 잊은 채 살라니?”
그 말은 꼭, 자신이 여태 라얀을 잊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에르하르트는 조금 전 카렐의 말 중 불가해했던 표현부터, 자신을 대하던 라얀의 태도까지 전부 하나씩 되짚었다. 카렐은 ‘결국’ 구한 것은 본인이며, 잊은 채 살라고 했고, 라얀은 에르하르트를 그자와 착각하며 그리움이 물씬 담긴 서글픈 눈빛으로 보곤 했다.
돌이켜 보면 의심할 요소들은 많았다.
엘과 닮았다던 말이나, 이상할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것도, 순한 듯하지만 은근히 경계심이 높은 주제에 제 손길만큼은 한 번도 밀어낸 적 없다는 것도,
“…….”
그리고 제 마력이 새겨진 한 쌍의 팔찌까지.
“…그러, 니까.”
말문이 턱 막혔다.
내 기억 속에 비어 있는 존재가 라얀이었냐는 것도, ‘엘’이 실은 자신이었냐는 것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서.
갈라지는 목소리를 삼키며 에르하르트는 숨을 꾹 눌러 참았다.
무슨 까닭으로 제게 여태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지, 왜 혼자서만 그 시간을 기억하며 삼키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그것을 궁금해하는 게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라얀을 봐야 했다.
그의 무사를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다른 의문은 전부 그 뒤에 풀어내도 급할 것 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비틀면 네 가는 목이 단번에 꺾일 거다. 카렐.”
동요하는 마음을 겨우 다스린 에르하르트는 손바닥 아래로 맹렬하게 뛰는 맥박을 느끼며 나직하게 경고했다. 카렐은 숨통이 조여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르작거렸다. 핏발 선 카렐의 눈에 고통으로 인한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그의 대답을 강요하는 동시에 에르하르트의 머리 역시 바삐 돌아갔다. 사라진 라얀의 행방이 있을 법한 곳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아르헨.
그곳이 아니라면,
“네 저택이겠지.”
에르하르트는 패밀리어를 불렀다. 패밀리어는 금빛 가루를 휘날리며 날갯짓해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에르하르트와 카렐의 발아래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폐, 폐하!”
살벌한 분위기에 끼어들지 못하던 보좌관이 뒤늦게 그를 부르며 다가왔지만, 손이 뻗어지기 전 에르하르트는 빛으로 화해서 사라졌다.
* * *
라얀이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불편하다는 감각이었다. 온몸이 꽁꽁 얽매인 것처럼 답답했다. 몸을 뒤채려 해도 쉽지 않았다. 에리히가 너무 세게 끌어안았나. 아니. 그는 이렇게 세게 자신을 품어 안지 않는데.
그리고 에리히의 품일 리 없다. 자신은 떠나겠노라 마음먹었고, 편지를 썼으며, …아샤에게 홀린 채 그의 지시에 따르는 이를 마주쳤다. 거기까지 떠올린 라얀은 퍼뜩 눈을 떴다.
“일어났니. 생각보다 정신을 못 차리기에 내심 걱정하던 차였는데.”
눈만 깜빡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라얀의 정수리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꽂혔다. 하지만 라얀은 제 뜻대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물로 만들어낸 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겨우 고개만 들자 아샤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설마 그들에게 해를 끼친 건 아니죠?”
부쩍 고요했던 기류. 그 침묵. 위르겐을 제외한다면 거기에 있던 이들은 얼굴이나 겨우 익혔을 뿐, 말 섞은 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정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으로 인해 그들의 신변에 무슨 탈이라도 생긴다면 라얀은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참 변함이 없지.”
“아샤.”
“너답다고 해야 할까?”
아샤는 속삭이며 손톱으로 라얀의 뺨을 길게 긁었다. 따끔거렸다.
“아샤.”
고개를 저어 그의 손길을 털어내며 올곧게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바깥에선 온전히 힘을 쓰기엔 제약이 있단다.”
“…….”
“네겐 다행인 일이지 않니. 그리고 온전히 힘을 쓸 수 있었다 한들 네가 싫어할 텐데 내가 설마 그렇게 했을까. 라얀.”
아샤는 내쳐진 손과 라얀을 번갈아 보다가 찡그리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들이 무사하다는 말에 라얀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제 상황을 자각하며 쏘아붙였다.
“싫어할 줄 알았으면서 이런 짓을 하셨잖아요.”
“네 말에 가시가 있구나.”
나는 단지 너를 살리고 싶었을 뿐인데.
“…….”
아샤의 말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라얀은 눈을 부릅떴다. 라얀의 시선에 어린 경악을 살핀 아샤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 인간이 네 소멸 이후 기억을 찾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것은 확인사살이나 다름없었다.
라얀은 몸을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제 몸을 속박한 물의 사슬은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수호석도 없는, 게다가 소멸을 앞두고 쇠약해진 몸으로 아샤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둥거리며 몸부림치던 라얀은 금세 지쳐서 숨을 헐떡거렸다.
“저런. 라얀. 힘을 빼면 네가 힘들 텐데.”
“저는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면 저여야만 한다고 했어요!”
아샤의 손이 라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들어보렴. 한 번은 네가 살렸으니, 한 번은 그 애가 널 살리는 게 순리고 마땅한 이치이지 않겠니.”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그뿐이란다.”
“아샤는, 아샤는… 그 애를 건드릴 수 없잖아요.”
그것을 뿌리치며 라얀은 의문을 표했다. 단순히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정말로 아샤는 에리히의 목숨에 관련해 건드릴 수 없었다. 태초의 서약이 맺어진 매개는 에리히였다. 라얀이 에리히를 먼저 찾으러 갈 수 없으며, 기억 잃은 그에게 정체를 드러낼 수 없던 게 제약이었던 것처럼 아샤는 본인이 살린 에리히의 목숨을 취할 수 없었다.
그 점을 짚어내자 아샤는 짤막하게 감탄사를 흘렸다.
“우리 어린 인어는 영리하기도 하지.”
“아샤.”
“하지만 내가 건드릴 수 없다는 것뿐이지, 다른 이가 건드릴 수 없는 것은 아니잖니?”
“…….”
“내 손과 발이 되어줄 이는 얼마든지 있단다.”
라얀은 이 상황이 끔찍했다. 차라리 당장 소멸하기를 바랄 만큼. 혹은,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던 아샤가 미워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에리히는, 아샤의 뜻대로 되지 않을 거예요.”
연약하기 짝이 없던 어린 인간은 자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쉬이 당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그 애는 아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것이다. 라얀은 애써 자위하며 뒤틀리는 속을 보듬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 그건 지켜보면 알 일이지.”
“아샤. 제발…….”
“네가 그 인간의 죽음을 바라지 않듯, 나 역시 네 소멸을 바라지 않게 된 것뿐이니 부디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렴.”
네가 사라지면, 그래, 내 세상이 정말로 재미없어질 것 같거든. 웃으면서 덧붙이는 말에 라얀은 그를 노려보며 반박했다.
“그 애가 잘못되면 과연 제가 계속 살아갈까요?”
“살았으나 죽지 못하는 존재로 만드는 건, 라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아샤는 라얀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 내버렸다. 무력감에 입술만 깨무는 라얀에게 향해 있던 보랏빛 눈이 스윽 움직였다.
“마침 네 연인이 왔구나. 라얀.”
금빛의 가루가 흩날렸다.
그 사이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샤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콰광! 금빛 가루가 흩날려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 틈으로 창의 형태로 구현한 얼음이 난사했다. 그러나 긴 얼음 창은 아샤의 심장을 꿰뚫지 못하고 푸른 물의 장벽에 가로막혀 부서졌다.
마력의 파동을 견디지 못한 바닥이 엉망으로 깨졌다. 장엄한 홀이 폐허처럼 변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성격도 급해라.”
폐허 속에서 아샤는 마치 가면을 덮어씌운 것처럼 서늘하기 짝이 없던 얼굴에 서린 감정을 읽어냈다. 분노와 절박, 의문이 한데 얽혀 있는 표정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냉철했다.
“마음이 급한 것은 알겠지만, 인사가 너무 과하지 않니.”
오자마자 마법부터 난사하기에 이성이라곤 한 점 남아 있지 않을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였다.
에르하르트는 아샤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다시 얼음 창을 날려 보냈다. 아까보다 더 거대한 창이 연사했다. 장벽에 닿을 때마다 허물어졌지만 연달아 맞닿는 곳에 서서히 균열이 갔다. 그 틈으로 비집어져 들어간 창 하나가 아샤의 뺨을 깊게 할퀴었다.
투둑. 갈라진 살갗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대리석 바닥에 고였다.
“이종족의 피는 좀 파랄 줄 알았는데 다를 건 없군.”
도발이 목적인 빈정거림을 흘려들으며 아샤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닥에 고인 피와 몇 가닥 잘린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래. 확실히 바다 아래 묻힌 네 선조들과는 다르기는 하구나. 더 건방지고, 더 오만해.”
아샤는 가만가만 뺨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을 흠뻑 적시는 피를 보던 그는 비집어져 나오는 웃음 사이로 속삭였다.
“다음번에는 얼굴 따위가 아니라 네 심장을 관통할 거다.”
에르하르트는 다시 얼음 창을 띄우며 서늘하게 경고했다.
“묻겠다. 그는 어디에 있나.”
냉정한 척 가장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리로 오는 내내 짓씹어서 너덜거리는 입술에선 비릿한 향이 목구멍을 타 넘어갔다. 가슴이 지끈거렸고, 신경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
“아. 그래. 내가 도움을 준다고 해도 내치기만 하는 매정한 이 아이를 찾고 있니?”
아샤가 피로 얼룩져 있던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에르하르트는 눈을 크게 떴다.
“…라얀!”
라얀이었다.
아샤의 뒤에, 물의 장벽 속에 라얀이 갇혀 있었다. 라얀은 에르하르트를 보곤 벽을 두드렸다. 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처럼 애절했으며 절박했다. 라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보던 에르하르트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지끈거렸다.
“자. 이래도 내 심장을 향해 그것을 날릴 거니?”
“…….”
“빗나간다면 라얀이 다치게 될지도 모르는데.”
에르하르트는 손가락을 움찔 굽혔다. 자칫 라얀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식는 것만 같았다. 에르하르트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가 마력을 흩어내자 얼음 창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자. 그렇다면 대화를 해볼까.”
“한들 그것을 내가 신뢰할 수 있을까. 거짓을 입에 담는 자의 말 따위를.”
생각하자. 생각해야 한다. 라얀을 어떻게 무사히 이 품에 돌려받을 수 있을지를. 어떻게 해야 저 애가 솜털조차도 상하지 않을지. 에르하르트는 아샤의 말에 이죽거리는 한편 그의 너머에 있는 라얀만을 바삐 좇았다.
제 기억의 빈 조각을 쥐고 있는 이.
어쩌면 과거의 연인.
그래서 내내 눈에 밟히고, 거슬렸으며, 끝내 마음에 담게 된 것이리라.
웃는 얼굴로 안심시키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아쉽게도 그 정도의 여유가 제게는 없었다.
“저런. 저 애가 기어이 티를 냈나 보지.”
고작 한마디로도 함의한 바를 헤아린 아샤는 찰나 바닥에 널브러진 채 숨을 헐떡이면서도 일어나려고 끙끙거리는 카렐을 곁눈질했다.
“그것이 그대가 의도했던 바가 아닌가.”
그게 아니고서야 카렐이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라얀이 아샤의 저택을 방문한 날, 무엇인가 엿들었을 수는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아샤가 의도적으로 카렐에게 흘렸다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왜. ‘엘’이 사실은 너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 황홀했니?”
아샤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나른한 투로 물었다.
“라얀이 그토록 사랑해 잊지 못하는 존재가, 혹은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사실은 너라는 걸 알게 되어서, 기쁘기라도 해?”
“…….”
“결국, 무엇도 기억하지 못했으면서.”
아샤의 시선이 잠깐 에르하르트의 심장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미묘했으며 불온했다.
“그 시간을, 감정을 끝내는 기억해 내지 못한 거면서.”
아샤는 일부나마 에르하르트의 감정을 파악했다.
확실히, 라얀과의 시간을 기억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라얀이 그토록 사랑해 잊지 못한다는, 유일한 존재인 ‘엘’이 실은 자신이라는 것은 끔찍할 정도로 황홀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 어딘가가 짓이겨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기도 했다.
제 이름을 불러달라는 애원에도 어찌하여 고집스럽게 모르는 척했었는지 라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어서. 자신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람에 라얀에게 오랜 기다림을 안겨주어서. …또 그에게 뱉은 모진 말과 행동들이 전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제게 돌아왔다.
“함께하다 보면 언젠간 기억날 테고, 그것은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쁨도, 미안함도 라얀과 온전히 둘이서 나누어야만 하는 감정이었다. 저자에게 말할 것이 아니라.
“아니.”
“…….”
“너는 기억을 해냈어야만 했단다.”
아샤의 말은 듣는 순간 잠깐이었지만 정의할 수 없는 불쾌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인상을 찡그리며 한 걸음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탕!
어깨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어깨를 부여잡은 에르하르트는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목을 드러내며 카렐이 에르하르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카렐.”
“제가, 아직 사격이 미숙해서…….”
어물거리는 발음, 어딘지 평소와 다르게 멍한 눈빛. 에르하르트는 단번에 이상을 알아챘다.
“아이작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마음을 조금 어루만져 줬지.”
말도 안 되는 궤변에 에르하르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설마, 카렐을 어찌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증명하듯 에르하르트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대기 중에 흩어낸 마력을 다시 모아 응집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카렐은 단번에 폭사할 것이다.
단순히 제압만 할 수도 있겠지만 에르하르트에게는 그런 호의를 베풀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인간의 왕. 너는 라얀이 그때 왜 쓰러졌는지 궁금하지 않니?”
감히 제게 총구를 겨누는 성가신 것을 우선 치워낼 셈으로 카렐을 보던 에르하르트는, 요사스럽게 속삭이는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아샤에게로 향했다가 그 뒤의 라얀에게로 향했다.
“…….”
라얀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듣지 말라는 것처럼.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이.
“왜 그렇게 점점 야위어가는지, 궁금하지 않아?”
라얀을 보고 있으니 개소리를 지껄일 거라면 닥치라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소중하시다면 폐하의 심장을 칼로 찔러 그자한테 내어주지 그러세요. 악에 받쳤던 카렐의 말이 겹쳐 들려서. 라얀의 저 절박함이 마음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란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에르하르트는 자신이 숨을 쉬는지, 아니면 쉬지 않는지 그것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겨우 눈동자만 굴렸다. 라얀을 보자 그는 계속 고개를 젓고 있었다. 눈가에 맺힌 것은 분명 눈물이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진주가 되었다.
“왜…….”
근원이 되는 바다를 떠나 있어서? 그게 이유인 거라면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었다. 자신이 보러 가면 그만이었다. 열흘에 한 번이어도, 아니, 백 일에 한 번이어도 좋으니까.
“자신의 근원이 되는 것을,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내어줬거든.”
에르하르트의 반응에 가늘게 눈을 접은 아샤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제 가슴을 툭 두드렸다.
라얀은 이제 고개를 젓지 않았다. 애처로운 눈으로 에르하르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주 선명한 형태로 보였다.
―전부 다, 내가 바란 일이야. 네 탓이 아니야.
건네지는 라얀의 위로는 다정했으나 더할 나위 없이 잔인했다. 결국 아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그 ‘누군가’가 자신이라는 것 역시도.
확실히 그의 생존은 이상했다.
분명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스스로도 가망 없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카렐의 구완을 받으며 깨어났을 때, 에르하르트는 잠시나마 제가 소생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느꼈다. 그것은 아비에 대한 복수로 금방 잊었지만.
“…….”
이제야 알았다. 저 애가, 라얀이 자신을 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듯이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에르하르트가 기억하지 못하는 3년 내내.
“라얀…….”
“친애하는 왕. 라얀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찌하겠니?”
에르하르트는 동요했다. 주인이 동요하자 흔들림 없이 견고하던 마력 역시 흔들렸다. 안 돼. 라얀이 속삭인다. 그의 울부짖음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느껴졌다.
“네 죽음이, 저 애를 살릴 수 있다면?”
“…….”
“그렇다면 어찌할래. 인간의 왕이여.”
카렐의 말을 이제야 완전히 이해했다. …그리고 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는 그를 외면했다.
웃음을 거둔 서늘한 눈으로 카렐을 바라봤다.
총구가 위협적으로 그를 향해 있었다. 언제라도 당길 수 있을 것처럼 방아쇠를 팽팽하게 당기는 손가락은 움찔거렸다. 에르하르트는 그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탕! 총성이 울렸다.
“…아.”
당연히 덮쳐 올 줄 알았던 통증 대신 가느다란 신음이 들렸다. 저절로 눈이 떠졌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허공에 나풀거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이었다.
라얀은 에리히가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 정말 아주 느릿느릿하게, 그러나 찰나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에리히.”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그를 향하는 총구가 끔찍했다. 저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에리히가 아르헨에 있을 적 제게 겨눈 적 있으며, 또한 조금 전에 에리히의 어깨를 피로 물들인 것이기도 했다.
간절히 바랐다.
이렇게 무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에리히의 죽음을 다시 보게 하지 말아달라고.
누구를 향한 기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답해준다면 누구든 좋았다. 설령 그 대가가 죽음이어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영원한 고통이라 해도, 그 역시 상관없었다. 라얀은 다시는 3년 전처럼 무력하게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제발. …제발.”
간절한 기도가 닿았을까, 가슴에서 늘 지니고 다녔던 비늘이 허공에 떠오르면서 빛을 뿜어냈다. 알레가, 제게 억지로 쥐여 주었던 것이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어 잊고 살았던 것이 반응했다.
빛을 발하던 비늘이 길쭉한 형태로 늘어났다.
은빛의 트라이던트.
“이게 왜…….”
왕의 삼지창이었다. 오로지 메르를 위한 것으로, 왕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창이다. 이것이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
망설일 시간조차 없었다. 라얀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잡았다. 트라이던트는 제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감응하듯이 전신을 가늘게 울던 창은 라얀이 어찌 움직일 새도 없이 마치 자아가 있는 것처럼 멋대로 휘둘러졌다.
아샤가 그를 가둔 장벽이 산산조각으로 무너지며 깨졌다. 자신의 마력으로 쌓아 올린 장벽이 깨지자 아샤의 몸이 비틀거리며 흔들렸다. 그가 돌아봤다. 깨진 장벽과 라얀의 손에 쥐어진 트라이던트를 보는 그의 표정이 찰나 오묘해졌다.
“그건.”
아샤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는 시선을 내렸다. 정확히는 아샤의 심장을 관통한 창의 끄트머리를. 라얀의 시선이 그의 궤적을 좇았다. 손바닥에 닿는 감각은 더할 나위 없이 선뜩했다. 이는 제 의도가 아니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실로 라얀에게는 후회를 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샤 너머로 카렐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 게 보였다. 라얀은 아샤를 스쳐 지나갔다. 자꾸만 힘이 빠져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에리히와 가까워졌다.
조금만,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에리히……!”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찰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등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제 몸 같지 않았고, 이 감각이 생경했다. 그릇이 깨지고, 그 틈으로 겨우 움켜쥐고 있던 혼이 빠져나갔다. 아.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는 신음조차 길지 않았다.
대신 역한 비린내가 그 자리를 채웠다.
라얀은 울컥 입 안에 고이는 것을 뱉어내는 대신 삼켰다. 그와 함께 세상이 기울어졌다.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세상이 기우는 게 아니라 제 몸이 속절없이 아래로 무너지고 있었다.
충격을 대비하듯 눈을 감았으나 따뜻한 온기가 받쳐줬다. 겨우 눈을 들어 올리자 에리히가 보였다. 조금도, 아주 티끌만큼도 다치지 않은 그가 라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떨리는 푸른 눈에 습기가 어렸다.
“…라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제 죽음은 아주 고요해, 어느 누구에게도 파문을 남기지 않기를 바랐다. 라얀은 그에게 사무치는 기억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애써 웃으려 했으나 입꼬리를 올리려 할 때마다 울컥 치솟는 피를 삼켜내기에도 버거웠다.
“왜, 어째서…….”
발포하고 나서 정신을 차린 것처럼 주저앉는 카렐 아이작의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에르하르트의 시야에 담긴 것은 오로지 라얀이었다. 어떻게든 웃어보겠다고 입가를 끌어 올리는 라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서늘한 뺨을 쓰다듬는 에르하르트의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렸다.
이것은 사실 현실이 아니라 헤어 나올 수 없는 악몽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끔찍한 지옥이 현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삐이이이―.
이명이 시끄럽게 울린다.
‘태양을 닮은 것 같아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파도에 삼켜져 난파되었던 기억이 하나씩, 하나씩 재정립되어 어제의 일처럼 선명해진다. 푸른빛이 그들을 감쌌다. 그것은 주변을 맴돌다가 라얀에게 스며들었다. 의아함을 느낄 새 없었다. 환청처럼 어린 미성이 스치듯 지나가서. 범람하는 기억에 뒤채느라.
‘태양을 본 적 있어? 태양은 당신의 머리를 닮았어? 반짝거려? 빛이 나?’
푸르른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제 금발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에리히.’
희미하게 머물렀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며, 온전히 그를 제 세계에 받아들이던 얼굴도,
‘나도 네게 내 세계를 보여줄게.’
첫 입맞춤을,
‘인어도 사랑하는 이와 입을 맞춘대.’
조금은 황당했던 고백을,
“내가…….”
너와 함께한 그 시간을 내가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내가 어떻게, 감히 그 찬란한 시간을. 마지막 순간 네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네게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한 것을 그토록 사무쳐 하며 눈을 감았었는데.
“내가, 어, 어떻게… 라얀.”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기억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잔재처럼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절망과 비탄뿐이었다. ‘엘’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찰나 느낀 희열조차 끔찍하고 역겨웠다.
여태 이어온 이 생이 실은 라얀의 목숨을 담보로 했다는 사실은 에르하르트를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에, 리히…….”
라얀은 숨을 깔딱거리며 에르하르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얼굴엔 슬픔이 얼룩져 있었다.
“아무것도, 네가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하길 바랐는데…….”
힘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손이 가만가만 에르하르트의 뺨을 쓸었다. 깃털 같은 손짓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너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어.”
“…….”
“어때. 내 자란 모습?”
말문이 턱턱 막혔다. 지금 그게 할 말이냐고 하고 싶은데 입에 재갈이라도 물린 것 같았다. 모든 문장이 낱말째 쪼개져 비산했다. 에르하르트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에 뭉개진 손바닥이 엉망으로 망가졌다.
“내가, 널 살릴 거다.”
자꾸만 까라지는 라얀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더듬더듬 속삭였다. 그리고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살릴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제 목숨과 그의 생을 바꾸는 것.
에르하르트는 망설임 없이 마력을 응집했다. 제 몸을 폭사할 만한 위력이었다.
그것을 보던 라얀이 힘없이 떨리는 손으로 에르하르트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검게 죽은 피를 거푸 토했다. 그러면서도 에르하르트가 허튼짓을 할까 봐 손을 놓지 않았다.
“에리히. 엘. …기억해.”
우리 약속했잖아. 더듬더듬, 희끄무레한 속삭임이 이르는 약속이 무엇인지 에르하르트는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호수에서. 응?”
풀벌레 우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던 이파리 소리, 은은하게 내리던 달빛, 어린애도 아닌데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다며 내심 비웃었던 약속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라얀이 제게 지금 얼마나 잔혹한 말을 하려는지도.
“슬퍼하지 않고, 오래 행복하고, 늘 웃고.”
“그만.”
“가끔, 가끔 생각하기로 나랑 약속했잖아.”
“제발. 라얀.”
“…그렇지?”
라얀은 에리히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미안하다는 말을 삼켰다.
실로 미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겨지는 마음이 어떤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그 기다림이 얼마나 사무치고 외로운지 떠올리려면 이토록 생생한데. 내가 지금 너를 그런 지옥 속에 밀어 넣고 있는 건데.
“그래 줄, 거잖아.”
하지만 그럼에도 에리히가 살아가기를 바랐다.
이기적이게도 이번에는 그를 구할 수 있어서 기쁘기까지 했다.
“…….”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새순처럼 빛나던 눈을 덮는다. 라얀의 손이 힘없이 천천히 스러졌다.
“…라얀?”
부르는 소리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아, 아…….”
에르하르트는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더듬거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라얀의 손을 더듬더듬 만지며, 그의 이름만 반복적으로 불렀다. 세상이 무너진다 한들, 이보다 무참할까.
“하, 하하!”
끔찍한 공허를 찢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이 상황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 중이던 에르하르트를 현실로 끌어당기는 소리였다.
조심히 라얀을 내려놓으며 정중하게 이마에 입을 맞춘 에르하르트는 표정이라곤 드러나지 않는 낯으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빛으로 이루어진 창은 섬광처럼 번뜩거리며 빛났다.
탁, 탁. 단조로운 걸음은 아샤의 앞에서 멈췄다. 그의 가슴에는 이미 창 하나가 박혀 있었다. 아샤는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제 가슴을 꿰뚫은 창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나른하게 웃으며 저 아래를,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죽음으로 여전히 등가가 가능한가.”
“‘그것’은 주인을 찾아갔지만, 모든 일엔 시기가 있는 법이라.”
아샤는 그의 심장을 바라보면서 묘하게 웃었다.
“그러게 말하지 않았니. 너는, 기억을 해냈어야만 한다고.”
아샤는 웃고 있었으나 선명한 악의와 희미한 허무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내가 널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겠군.”
에르하르트는 손을 가볍게 펼쳤다. 빛으로 이루어진 창은 섬광처럼 번뜩거리며 빛났다.
“한낱 인간이. 건방지기는.”
맞받아치는 악의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를 감싼 탁한 마력도 에르하르트를 찌를 것처럼 날카롭게 들끓었다.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가 번졌다. 모든 것을 삼킬 것처럼 커져 가는 회오리를 가만히 응시하던 에르하르트는 마력을 덮어 그것을 무력화시켰다.
“너야말로 건방지게도.”
그를 제압한 에르하르트는 망설임 없이 창을 높게 치켜들었다가 내리꽂았다.
“내 것을 건드리지 않았나.”
뼈가 부서지고 살점이 찢어지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선혈이 속눈썹에 엉겨 붙었다. 눈을 깜빡이자 그것은 마치 눈물처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쉽구나.”
에르하르트를 보던 아샤는 손을 뻗어 옷깃을 잡아당겼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숨결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그리워할 네 절망을, 오래 지켜볼 수가 없어서.”
그는 에르하르트의 감정을 읽어내며 비웃었다. 속삭이는 말에 에르하르트는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아샤의 몸이 차츰차츰 희미해지면서 흩어졌다.
“부디 오래 고통스러워하렴.”
피를 털어내듯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는 보랏빛 잔재가 먼지처럼 허공을 부유했다. 은빛의 창이 쨍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끝은 허무하고 공허했다.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
에르하르트는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떨궜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새하얀 진주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 * *
비가 내렸다. 태양이 구름 뒤로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상은 탁한 잿빛으로 물들었다. 어디를 가든 전부 무채색이었다. 완연했던 봄은 서늘한 빗줄기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폐하. 이러다 정말로 옥체 상하십니다.”
위르겐은 미동도 하지 않는 등을 보면서 조바심이 났다.
사냥터에서 갑자기 사라진 황제의 행방을 파악해 카렐 아이작의 저택으로 갔을 때, 그는 늘어진 라얀을 추슬러 안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황제의 표정에 희로애락은 완벽하게 지워져 있었다.
그때부터 내내 이 상태였다.
라얀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그를 침대에 눕히고, 맞은편에 앉아서 가만히 바라봤다.
“…폐하.”
식음을 전폐하며, 밤낮을 뜬눈으로 꼬박 지새우며. 내키지 않으면서도 매사 손에서 놓는 법 없던 국정조차 전부 등진 채로.
“제발. 그분도 원치 않으실 겁니다.”
이미 사흘이나 흘렀다.
황제의 건강도 건강이지만, 그를 위해서라도 계속 이렇게 무너져 있어서는 안 됐다. 황제를 두려워하는 귀족들이 감히 불순한 마음을 품지야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애인의 죽음으로 인하여 상심해 국정을 내팽개쳤다는 소문이 퍼져 봐야 그에게 하나 좋을 게 없었다.
“위르겐.”
호소에 반응하듯이 황제가 위르겐의 이름을 불렀다. 며칠 만에야 겨우 듣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짐이 왜 선황을 끌어내리고 황위를 찬탈했는지 아나.”
“그것은…….”
위르겐은 머뭇거렸다. 선황이 예언의 아이였던 황제를 죽이기 위해 끝내는 올리비아를 죽이고 그녀를 미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냐는 말은 차마 자신이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살고 싶어서.”
삶을 단지 태어났으니 견뎌야 할 부산물로만 여기며,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죽음을 기다리던 그는 라얀 때문에 살고 싶어졌다.
“이 애 때문에, 살고 싶어져서. 그래서 이 자리가 탐이 났었다.”
라얀을 기억 속에서 지운 뒤로는 살아가고 싶었던 본래의 이유는 잊고, 증오스럽기 짝이 없던 아비로부터 황위를 찬탈해야 한다는 목적만이 남아 버렸지만.
“그랬는데 짐이 이 애를 잊었지.”
전부를 지워낸 삶이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내 전부를.”
“…….”
“내 세상을.”
깨끗하게 잊었다. 3년 내내 기억 속 여백에 허덕이면서도 이 애를 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다. 심지어 마주친 그 순간에조차도.
라얀은 그토록 기쁘게 웃으며 제게 달려왔는데 외면했고, 감히 솜털 하나 건드려서 안 되는 이를 이 손으로 상처 입혔다. 너절하기 짝이 없는 말로 그를 난도질했으며, 제 감정에만 치우쳐서 억지로 이 여린 몸을 품에 안고 제멋대로 굴렸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 했던 행동들을 떠올릴 때마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세상이 깜깜해지고, 호흡하는 게 끔찍했다.
그중 가장 그를 비참하게 하는 것은, 라얀이 자신을 단 한 순간도 원망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제게 한 번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고, 에리히라고도 불러주지 않았으나 결국은 그게 전부 다 사랑임을 이제는 알았다.
그저, 그 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에르하르트를 ‘에리히’라고 부를 수 없었을 뿐이다.
“내 세상이 끝났는데.”
왜 여전히 해가 뜨고, 달이 뜰까. 비가 내리고, 생명은 피어났다가 시들까. 어째서. 시간의 추는 왜 멈추지 않나.
왜.
내 세계가 끝장난 것처럼, 이 모든 것이 끝장나지 않는 걸까. 에르하르트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저주스러웠다. 전부 다 멸해버리고 싶다. 끝내 그 불길이 자신조차 남지 않게 살라버릴 수 있도록.
에르하르트는 완전히 산산조각 난 아티팩트와 진주를 으스러질 것처럼 쥔 채로 헐떡거렸다. 폐하. 그의 상태가 심상찮아 보였는지 위르겐이 한 걸음 다가와서 에르하르트를 불렀다.
‘약속했잖아. …그렇지?’
환청이 들렸다. 들끓는 마력을 누르자 반사 작용이 일어났다. 역류하는 마력에 속이 뒤틀렸다.
덩어리진 것을 겨우 삼키며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입가엔 미처 삼키지 못한 선혈이 흘러 번졌다. 그것을 대수롭잖게 훑어내며 라얀을 바라보는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라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조차 원망스럽다.”
네가 모든 것을 쥐고 떠나버려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죽음조차 허락할 수 없게 되었으니. 에르하르트는 이제 끔찍한 그리움을 끌어안은 채 기약 없는 평생을 살아야 했다.
아니,
이것조차 내가 초래한 것일까. 그래. 결국 내가 초래한 것이다. 감히 누가 누구를 원망하나. 어떻게 내가 감히 찰나라도 네게 그런 불온하기 짝이 없는 감정을 품을 수가 있나.
“폐하.”
바깥에서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나가 물러나라 이르겠습니다.”
위르겐은 에르하르트의 눈치를 살피며 바깥의 이를 쫓아내기 위해 바삐 걸음을 놀렸다. 에르하르트는 멀어지는 걸음 소리에서 신경을 끄며 하염없이 라얀을 바라봤다.
상처를 지워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라얀은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어 꼭 깊은 잠이 든 것만 같다. 손바닥을 긁으면 오므리면서 간지럽다고 투정 부리면서 눈을 뜰 것만 같은데. 손가락 마디마디를 얽으면 그대로 꽉 움켜쥐며 웃어줄 것도 같은데. …사흘 내내 라얀은 눈 한 번 뜨지 않았다.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도 미약한 숨결이나마 느껴지지 않았다. 라얀은 마치 이 모습 그대로 박제된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에르하르트는 약간의 희망이나마 놓지 못한 채 품고 있었다. 재처럼 흩날려 소멸하던 아샤와 달리, 라얀은 이렇게 잠이 든 것처럼 눈 감고 있으므로. …어쩌면 너절해진 간구였다.
“폐하. 송구하오나 아뢰어야 할 것 같습니다.”
“…….”
“그, 지하 감옥에 둔 아이작 자작이 자백했답니다.”
위르겐의 말을 들으면서도 에르하르트는 여전히 라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카렐 아이작은 역심을 품어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지하 감옥에 처박혔다. 전부 아샤 때문이라고, 자신은 황제를 죽이려 한 적이 없다고, 그저 황제의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이라며 내내 부정하더니 끝내는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살 시도를 했다고…….”
카렐의 말대로 그는 아샤에게 매혹되었을 뿐이다. 그들의 목소리엔 사람을 홀리는 위력이 있으니.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에르하르트는 카렐을 용서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을 쐈더라면, 그가 거둔 목숨이 자신의 것이었더라면 에르하르트는 얼마든지 삶의 관용을 베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총구가 향한 곳에 있던 이는 라얀이었다.
“죄인이 스스로에게 죽음을 내리다니. 그런 관대함을 베풀 수는 없지. 죄를 자백했으니 지체 없이 처형을 집행하라.”
“예.”
그러나 카렐은 알고 있을까. 누군가는 그에게 허락된 죽음을 부러워하고,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위르겐. 이만 나가라. 혼자 있고 싶으니.”
“폐하.”
“오늘만. …오늘까지만.”
계속 이렇게 이 순간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에르하르트는 현실을 살아가야만 했으니.
위르겐은 결국 에르하르트를 꺾지 못하고 물러났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빗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인 적막 속에서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손을 어루만지며 그와의 약속을 곱씹었다. 의도를 읽어내지 못한 채 맞받아치듯 가볍게 대꾸하던 순간을 원망했다.
“내 도움을 자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쓰다니.”
그리고 서늘한 공기와 이질적인 기척을 느꼈다.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
“아니면 이 애다운 행동이었다고 해야 할지.”
에르하르트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뒤돌아봤다가 굳었다. 허리까지 구불구불 늘어트린 검은색의 머리, 서늘한 녹안, …온도는 다르지만 놀라울 정도로 라얀을 닮은 여인이었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다.
라얀을 낳은 자.
아득히 푸르른 창해를 다스리는 왕.
그리고 어쩌면 라얀이 스스로를 흠이라고 자학하게 한 존재.
“…왜 왔지.”
라얀의 생모였지만, 그를 내내 위축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에르하르트에겐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이는 아니었다.
“잠시 내어주었던 내 것을 가지러.”
그녀가 손을 뻗었다.
은빛으로 첨예하게 빛나는 삼지창이 그녀의 손으로 빨려갔다. 한 손에 삼지창을 쥔 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곧 에르하르트에게 향한다. 그러니까 제 뒤에 있는 라얀에게로.
“그리고 그 애를 우리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서.”
“내 연인이다.”
“내 아들이지.”
“…….”
“내 후계자가 안식에 들어야 할 곳은 이런 바깥 따위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이고.”
그녀는 시종 나긋하면서 단호했다.
“인간. 그대는 라얀이 일평생 안식에 들지 못했으면 좋겠나?”
막아 세운 몸이 찰나 흔들렸다. 에르하르트의 시선이 라얀에게로 향했다.
“…….”
라얀을 잃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 연인이 이곳에 매여 있느라 영원히 안식에 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은 그보다 더한 악몽 같았다.
이 낯선 땅에서, 아무것도 기댈 데 없는 이 지상에서 라얀은 오랜 시간을 외로워했고, 혹은 인간에게 배신당하며 상처받았다. 자신이 대체 무슨 권리로 라얀의 안식을 방해한단 말인가.
왕이 한 발짝 디뎠다.
에르하르트는 비틀비틀 반 발짝 물러나며 애원했다.
“…잠깐.”
“…….”
“작별 인사를 하겠다.”
에르하르트는 뒤돌아 라얀을 눈에 담았다. 봐도 봐도 사무칠 얼굴을 다시는 잊지 않도록 기억 속에 각인하며 손가락 사이사이를 어루만지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입을 맞췄다. 듣지는 못할 테지만 그의 귓가에 대고 끝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혹은 다른 말도.
“…….”
그대로 등졌다.
다시 몸을 돌려 라얀이 누워 있던 침대를 바라봤을 때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야 해.’
라얀의 목소리가 아스러진다.
‘부디, 살아줘.’
너는 정말로 내게 잔인해. 도대체 왜 내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을까. 에르하르트는 그가 누워 있던 침대를 손으로 가만히 쓸었다.
라얀의 체취가 금세 희미해져 간다.
창을 두드리던 빗소리 역시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지옥 속에서 에르하르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주인을 잃은 침대를 등지고 나서는 걸음은 무겁게 침잠되어 있었다.
* * *
연회는 웃음과 술,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로 넘쳐 흘렀다.
에르하르트는 술잔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황좌에 앉은 채로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화담을 나누거나, 남녀가 쌍을 이뤄 함께 즐거이 춤을 추는 모습을 권태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연회장은 여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성가시게 굴던 왕국 하나를 헤셀러스 아래로 무릎 꿇리고서 여는 승전 파티였다.
개선의 나팔 소리, 완벽한 승리로 이끌어낸 황제를 향한 찬양, 저마다 뿌려지던 꽃가루, 그리고 승전을 축하하는 이 파티까지. 전부 하나같이 성가시기 짝이 없지만 에르하르트는 착실히 자리를 지켰다.
“폐하.”
목을 거칠게 할퀴고 넘어가는 술은 유독 독했다.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술잔을 내려놓는 대신 계속 입술을 축이던 에르하르트는 곁눈질하며 말을 툭 던졌다.
“마리엘.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아가씨가 너무 오래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덤덤하게 건네는 말에 마리엘이 인상을 찡그린다. 그래도 이제 열세 살이 되었다고 전처럼 발끈해서 파들거리지는 않았다.
“어쩌겠어요. 궁중에 황후가 없으니 데뷔탕트도 못 치른 제가 안주인 역할을 해야지요.”
혓바닥도 제법 날카로워졌다.
전쟁을 치르느라 궁을 비운 것은 고작해야 반년일 뿐인데 어린애들은 그 짧은 시간에도 부쩍 자랐다. 아니, 따지고 보면 저 애가 열세 살이 되는 때까지 3년 동안 정복 전쟁을 벌인답시고 궁 안에 얌전히 머무르던 시간이 채 1년이 되지 않으니 마리엘의 성장이 그렇게 빠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짐과 첫 춤으로 파티를 열었으니 네 할 일은 다 했다. 황녀. 그러니 졸리면 가서 자렴.”
“…….”
“자라야지, 어서. 아. 그래. 공부는 잘 하고 있겠지?”
내일 선생들을 불러 공부에 진척이 있는지를 묻겠다는 말에 마리엘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누르는 것처럼 드레스 자락을 꾹 말아쥐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파묻힌 새하얀 얼굴이 분노로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기어이 마리엘은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고 역정을 냈다.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마라. 그게 군주의 소양이다.”
“나한테 그걸 왜…, 됐어요. 폐하와 더 이상 말을 섞어봐야 저만 피곤할 것 같네요. 너무 과음하시는 것 같아 염려되어 와봤더니 잔소리나 듣고. 괜히 왔어.”
에르하르트는 앞에 놓인 잔을 헤아렸다. 들고 있는 것까지 고작해야 겨우 세 잔째였다. 누군가의 참견을 들을 정도로 과음을 하지는 않았다. 잔을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거리자 마리엘은 콧김을 뿜으며 중얼거렸다.
“라얀은 다정했는데.”
“…….”
“물론 내 고백을 거절, 아…….”
설마 들릴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마구잡이로 말을 내뱉던 마리엘은 에르하르트의 표정을 보곤 황급히 삼갔다. 조금이나마 감정이 드러났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탁. 술잔을 내려놓으며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마리엘은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제가 그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알아.”
“…….”
“안다. 의도가 아니라는 것 정돈.”
에르하르트는 3년 전, 라얀이 사라진 이후로 그에 관한 말은 어떤 것이든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어차피 라얀은 소문으로만 존재했을 뿐 그에 대해 실제로 아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하루하루가 가십거리로 넘쳐나는 궁중은 금세 그의 존재를 잊었다.
물론 마리엘만이 반발하듯 라얀은 어디 갔느냐며 찾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침묵하는 행렬에 동참했다. 어쩌면 그것이 저 애가 조금쯤 자랐다는 증거 중 하나일 것이리라.
“네 말대로 술이 과했다. 쉬어야겠으니, 너 역시 적당한 때에 궁으로 돌아가라.”
“오라버니…….”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멀쩡해졌지만, 술을 핑계로 댔다. 한껏 흥취가 올랐으니 이 파티가 금방 파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리엘에게 당부를 건넨 에르하르트는 곧바로 궁으로 돌아갔다.
위르겐은 익숙하게 그의 시중을 들었다. 침의로 갈아입은 에르하르트는 모두를 물렸다.
“…….”
발코니의 난간을 짚으며 적막 속에서 고요하게 서 있던 에르하르트는 마력을 움직였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는 익숙한 짠내가 코끝을 찔렀다.
쏴아아― 파도 소리도.
아르헨이었다.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거대한 마력을 운용한 탓에 순간 현기증이 일고 머리가 아파왔지만 입술을 짓씹으며 버티니 어느 순간 괜찮아졌다.
에르하르트는 짙은 그리움이 일렁이는 눈으로 달빛에 반사되는 바다를 바라봤다.
“라얀.”
그는 겨우 웃음 비슷한 것을 지었다. 그러나 저 거대한 파도 아래의 세계에서 안식에 잠긴 연인의 이름을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어린 쓸쓸함은 차마 감추지 못했다.
“…….”
고작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아득한 감정이 그를 덮친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턱턱 막히는 호흡을 억지로 틔우며 겨우 감정을 삭인 에르하르트는 절벽 아래로 내려가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그는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천천히 제 일상을 말했다. 왜 전쟁에 나간 것인지, 어떻게 이겼는지, …또 그 시간을 무슨 생각을 하면서 견뎠는지.
3년간 에르하르트는 곧잘 이런 식으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라얀에게 안부를 전했다. 그에게 단 하나도 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견딜 수가 있어서.
“참, 마리엘이 그새 좀 자랐다.”
그 애가 자라는 게 더디게만 느껴졌는데 돌이켜보니 많이 자랐다고. 공부를 게을리해도 타고난 머리가 나쁘지 않아 잘 따라간다고. 그녀의 스승들은 에르하르트에게 고하면서도 황녀에게 어찌 제왕학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성년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하지. 얼른 자라야 모든 걸 물려줄 수 있을 텐데.”
에르하르트는 마리엘한테 모든 것을 물려줄 작정이었다. 거슬러 내려가면 여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니 마리엘이 황위에 앉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 애가 얼른 자라면 좋겠어. 그래야…….”
내가 널 따라가 영원한 안식에 잠길 수 있을 테니.
라얀은 그가 슬퍼하지 않고 오래 행복하고 늘 웃으며, 자신을 가끔 생각하기를 바랐지만 에르하르트는 단 하나도 지킬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슬픔에 잠겼고, 행복할 수 없었으며, 웃을 수도 없었다. 매일매일 라얀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가 없는 삶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3년을 견뎠다. 견디는 동안 세상 모든 것이 무채색이었다. 봄도, 여름도, 가을조차도 마치 모두 황량한 겨울 같았다. 늘 그를 따라가고 싶다가도 약속을 상기시키며 견뎠다.
에르하르트는 이것을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라얀이 이 낯선 땅에서 자신을 기다린 시간 만큼, 혹은 그 시간 이상을 기다리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조금은 버틸 만해졌다.
“그때가 되면 내가 약속을 어겼다고는 하지 마라. 라얀.”
너는 내게 행복하랬지, 따라오지 말라는 말은 한 적 없으니.
“…….”
너울지는 파도를 보며 감정을 삭이던 에르하르트의 걸음은 한때 그들의 안식처였던, 그리고 라얀이 그를 기다리는 동안 머물렀던 곳에 닿았다.
라얀이 그리울 때마다 아르헨에 왔으면서 이곳에 오는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점점 희미해져 가던 숨결을 지켜보다가 제 목숨을 걸었을 라얀이 생각나고, 이곳에서 자신을 내내 기다리면서 그리워했을 그의 모습이 그린 것처럼 떠올라서 괴로웠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눈물과 이미 깨져서 제구실을 못 하는 아티팩트를 엮어 만든 팔찌를 손에 넣고 가만가만 굴렸다.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 종종 하는 짓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제 머리에 총구를 겨눌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할까.”
이미 죄수 된 심정으로 네가 날 기다린 시간만큼의 기한을 채웠는데, 내 뜻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제 머릿속엔 이미 미래 같은 것은 없었다. 제국의 영광 따위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다.
충동이 이성을 부추겼다. 달콤한 자기 파괴적인 욕구가 그를 지배했다. 에르하르트는 늘 지니고 다니는 총을 천천히 제 머리에 겨눴다.
방아쇠만 당긴다면,
“…….”
그것이야말로 에르하르트가 오래 행복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진심으로 웃을 수도 있으리라.
쏴아. 쏴아. 파도가 암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귓전을 두드렸다. 서서히 그 소리마저 멀어져 방아쇠를 당기는 손에 힘을 주려고 할 때였다.
“에, 리히.”
끔찍하리만치 다디단 환청이 들렸다.
하. 에르하르트는 헛웃음을 삼킬 수 없었다. 그토록 애원해도 3년 내내 꿈에 한 번 나와주지 않더니 이제야 들리는 환청이 원망스러워서. 그럼에도, 그가 그리워서…….
“에리히.”
환청은 또 한 번 에르하르트를 불렀다.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겨우, 겨우 스스로에게 죽음을 허락했는데. 환청에 굴복하는 순간 또 이 지겨운 삶의 수레바퀴 안에서 돌아야 할 테니.
“엘. 정말 나를 보지 않을 거야?”
“…….”
“응? 난 네 얼굴을 보고 싶은데.”
환청은 마치 진짜 같았다. 저 그립고, 서운한 감정이라니.
에르하르트는 오기가 생겼지만,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령 스스로에게 내리는 죽음이 유예되더라도 한 번쯤은, 라얀이 보고 싶었다. 꿈에도 찾아오지 않던 라얀의 환상을 이렇게라도 보고 싶었다.
몸을 돌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차오른 물기로 반짝거리는 눈물.
“에리히.”
꿈인가. 눈을 뜨고 꿈을 꾸나. 저게 어떻게 환상일 수가 있을까. 총을 든 손이 힘없이 늘어졌다. 탁. 총이 바닥으로 떨어 떨어졌다.
“…내가 너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
“미안. 미안해.”
기어이 라얀은 에르하르트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은 땅으로 흩어져 진주가 되었다.
“아…….”
그쯤 되었을 때, 그는 환상이 아니라 실체로 보였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 달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령 안는 순간 흩어질 신기루라고 해도.
그래도 좋았다. 상관없었다.
“라얀.”
“응.”
“라얀…….”
그는 신기루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에르하르트를 더듬더듬 마주 끌어안으며 어깨에 턱을 괴었다. 아. 말문이 막혀서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차라리 그를 더 세게, 부서질 것처럼 끌어안았다. 눈물이 라얀의 어깨로 떨어져 굴렀다.
“돌아왔어. 네게. 내가. 너의 세계로…….”
라얀은 숨 막힐 것처럼 안는 온기 속에서 잘게 흔들리는 등을 도닥였다.
태양이 안겼다.
아니, 그것은 태양을 닮은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