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에르하르트는 거울 속 자신을 곁눈질했다. 금빛으로 부서지는 머리카락, 새파랗게 물든 눈동자, 조형된 이목구비. 언뜻 선황이 보일 때가 있어 못마땅한 적 있었지만 대체로 불만은 없었다. 한데 그런 제 얼굴이 요즘 부쩍 거슬렸다.
‘인간의 왕. …너는 그 흔적을, 그림자를 이길 수 있을까?’
대체 이 중 무엇이 그자를 그토록 닮았을까. 닮은 부분을 훼손하고 싶다가도, 막상 닮은 데가 있어 라얀이 자신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조각 난 말을 기워 대강의 형체로 유추하던 것을 온전한 형태로 마주하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쾌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인어의 앞에서는 여유를 부렸지만, 그와 달리 속내는 진창 헤집어졌다.
그날 이후로 난데없는 짜증이 치밀었고, 별안간 초조해졌다.
얼마 전이었더라면 에르하르트는 분명 그 개자식을 잊으라고 성마르게 라얀을 을러댔을 것이다. 하지만 선뜻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애가 또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다시는 자신을 향해 웃지 못하고, 재잘거리지 못하게 될까 봐. …아니면 그자가 나타났을 때, 한 점 미련도 없이 자신을 떠나게 될까 봐.
서서히,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관계의 우위는 아주 명확한 형태로 두드러졌다.
“…….”
에르하르트는 제 모습을 비추던 거울을 노려봤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으로 갈라진 거울 속에서 수십, 수백 명의 자신이 노려보고 있었다. 에르하르트가 손짓하자 깨진 조각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폐, 폐하?”
사냥복을 가봉하느라 여념 없던 재단사가 파열음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거들던 이들 모두 에르하르트의 눈치를 보고 숨을 죽였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갈라지며 튄 유리 파편에 긁혀 발갛게 생채기가 난 뺨을 살핀 보좌관이 시종에게 손짓했다.
“됐다.”
별것도 아닌 상처였다. 오히려 따끔거리는 느낌이 번져서 머릿속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던 열화가 가셨다. 제 뜻대로 되지 않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폐하. 궁내부 장관께서 오셨습니다.”
바깥에서 시종이 궁내부 장관의 입시를 고했다. 실내의 분위기를 미처 감지 못한 시종의 목소리는 바짝 얼어붙은 공기와 달리 평온했다.
“시착은 이만하면 되었겠지?”
“예? 예. 폐하.”
재단사는 혹시 의복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황제의 기분이 언짢은 것은 아닌지 식은땀을 흘렸다. 여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크게 칭찬하지도 않지만, 질책한 적도 없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물어봐야 하나.
장식이 조금 과한가. 아니면 자수가 마음에 들지 않나. 의복을 챙긴 뒤 나서기 전 황제를 향해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그것을 눈치챈 보좌관이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아. 그렇지.”
결국 체념하고 나서려던 재단사는 에르하르트의 부름에 뒤돌아봤다.
“봄옷을 여러 벌 맞출 예정이다. 외출복, 침의, 평복, 예복까지. 그의 치수는 조만간, 아니, 시종을 통해 전달하도록 하겠다. 최고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단추 하나조차도.”
봄옷, 그의 치수. 내내 서늘하다가 찰나 부드러워진 표정. …그 소문 자자한 황제의 연인을 이르는 게 분명하다.
“이를 말씀입니까. 언제든 전령만 보내주십시오. 미천한 실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단사는 순간 입이 벌어질 뻔했지만 겨우 표정 관리를 하면서 물러났다.
“폐하.”
재단사가 떠난 빈자리를 도로 채운 것은 궁내부 장관 랄프 딜런이었다.
“제국의 영원한 광영이 폐하에게 닿기를.”
“딜런 백. 생각보다 일찍 왔군.”
“폐하의 부르심인데 어찌 지체하겠습니까.”
궁내부 장관은 미소 지었지만 내심 긴장하며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국정을 논할 때가 아닌 이상 황제가 개인적으로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질타할 때조차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했다. 최근 아르헨에서 일어난 일만 해도 그렇다. 모두의 앞에서 황제에게 집중 포격을 받은 수석 마법사는 그때 눈 아래가 움푹 꺼져서 한참 동안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온데 신을 찾으신 이유가…….”
연회를 열기 위해서? 하지만 황제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번거로워하니 굳이 그것을 논하려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며칠 뒤 열릴 봄맞이 사냥 대회에 대한 이야기 역시 아닐 것이고.
그것은 이미 한 치 어긋남도 없이 순조롭게 준비 중이었다. 완벽하다 못해 결벽적이기까지 한 황제의 성정을 알기에 철저하게 임했다. 황제에게 보고도 올린 데다가, 그때 별말 없었는데. 그렇다 보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른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르네궁의 호수 문제로 불렀다.”
“예?”
장관은 귀를 의심했다. 황제가 말하는 르네궁의 호수란 선황이 차비 올리비아 윈스턴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은 칼레아를 이르는 것이었다.
“백이 그 호수를 만들 때 책임자였다고 들었는데.”
“선, …흠, 명을 받들어 신이 책임지고 관장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깃들었다. 칼레아를 고스란히 옮겨온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작은 칼레아는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완성한 뒤로는 볼 수 없었지만, 르네궁이 차후 개방되기라도 한다면 그곳은 황궁의, 아니, 헤셀러스의 명물이 될 것이다.
“크게 증축할 수 있겠나.”
“호수를, 말입니까?”
자부심에 빠졌던 장관은 놀라 되물었다.
뜬금없었다. …혹시 르네궁에 머무르는 황제의 애인이 그 호수가 너무 작다고 불평불만이라도 늘어놨나. 그게 아니고서야 황제가 갑자기 이제 와 작은 칼레아를 언급할 이유 없었다.
게다가 증축이라니. 불가능할 것은 없겠지만,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물을 빼고, 다시 땅을 파야 하며, 그에 걸맞게 새로이 조경도 해야 했다.
궁내부 장관이 난감한 표정을 짓든 말든 에르하르트는 꽤 진지했다.
호수는 분명 넓고 깊었다. 하지만 드넓은 바다를 유영하며 평생을 살아왔을 존재를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비좁았다.
때로 아르헨, 아니, 그곳은 라얀의 그자를 마주칠 수도 있으니 뒤로하고 달리 바다를 낀 별궁으로 데리고 갈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일 년에 며칠 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제르바에서 보내야만 할 텐데, 적어도 구색은 갖추고 싶었다.
라얀이 서서히 그자를 마음속에서 밀어내고 자신을 채울 수 있게. 그리고 그 애가 이곳에서 어떤 부족함도 느낄 수 없어서 다시는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저열한 소유욕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비용도 많이 들 것입니다. 폐하.”
완곡한 만류였다.
“그것은 공이 신경 쓸 것 없다. 짐의 사재를 열 생각이니.”
“예?”
“짐이 설마 누구처럼 개인적인 일에 국고를 열까.”
선황의 과거 행태를 비난하는 말에 궁내부 장관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건, …재고해 봐야겠군.”
또 쓰러지면 곤란하니 라얀이 물이 없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에 대해서 알아봐야 했다. 아니면 그때는 라얀을 데리고 바다를 매일 오가든가. 그 길에 소모될 마력이야, 못 버틸 것도 없었다.
“알았다. 사냥 대회를 마친 이후 다시 논의해 보도록 하지.”
“예. 폐하.”
“사냥 준비로 바쁠 텐데 물러나라.”
“신의 영광이 폐하와 함께하기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내부 장관은 곧바로 물러났다. 에르하르트는 차오르는 적막 속에서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나른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눈꺼풀 사이로 푸른빛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마리엘은?”
“아까 르네궁에 드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아주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그런가.”
홀로 있으면 또 불안해할 것 같아서 차라리 그 시간을 채울 이를 물색했고, 마리엘로 낙점했다. 라얀도 마리엘을 좋아하는 눈치고, 마리엘이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기뻐했으면 하는 것은 다른 쪽이었기에 마리엘의 기쁨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무덤덤한 반응에 보좌관은 머쓱한 표정을 하며 조심히 말을 붙였다.
“그, 오늘도 바쁘다는 전갈을 보낼까요?”
“…….”
“폐하?”
에르하르트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이틀째 라얀을 보러 가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감정을 다스리며 평온을 가장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필요한 만큼, 그리움도 깊어졌다. 결국, 오늘은 그리움이 이겼다. 에르하르트는 뺨을 만지작거렸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손끝을 타고 번졌다.
“역시 치료하시는 게…….”
“되었다니까.”
라얀에게 이것을 보이면 그 애는 자신을 걱정해 줄까. 그 걱정이 부피를 키우면 좋겠다. 그만큼 라얀의 마음속에서 그자가 차지하는 면적이 좁아지도록. 상처를 조금 더 키워볼까.
“참, 폐하. 궁중에서 지금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보좌관이 알았더라면 기함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가는 동안, 속내를 읽는 능력이 없는 그는 충실히 제 임무를 수행했다.
“본디 바람 잘 날 없는 게 황궁이다. 그런 거에 일일이 신경 쓸 여력 없다.”
“그것이 조금 기이하여 아셔야 알 것 같아서요.”
보좌관은 머뭇거리면서도 꿋꿋했다. 에르하르트의 성정을 익히 아는 그가 쓸데없이 소모되는 가십거리를 들고 왔을 리는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말해보라는 듯이 고갯짓을 까딱했다.
“…….”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에르하르트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 * *
“다 숨었어?”
묻는 말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제야 라얀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뜨며 뒤돌았다. 위르겐과 시녀 몇이 문가에 서 있었지만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찾을게.”
라얀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목청을 높인 뒤 발걸음을 뗐다. 공들여 찾을 필요는 없었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커튼 아래로 조그마한 두 발이 보였다. 그것을 보다가 위르겐에게 눈길을 주자 그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바로 찾아버려 토라졌던 아까를 기억하라는 듯이.
“…어디 있지.”
결국 라얀은 그것을 못 본 척하면서 의도적으로 커튼을 지나쳐 다른 쪽으로 향했다. 제가 느끼기엔 능청스럽다기보다는 어색하고 딱딱한 움직임이었으나 상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는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숨은 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면서도 라얀은 일부러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처음의 웃음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라얀이 계속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며 애먼 곳에서 헤매자 애가 탔는지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러다가 커튼이 들썩거리기도 했다.
라얀은 다시 위르겐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다.”
커튼 자락을 들쳤다. 숨어 있던 아이가 까르르 웃으면서 폭 안겼다. 라얀은 마리엘을 위해 허리를 굽혀주어야만 했다.
“어떻게 찾았어?”
마리엘의 뺨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
그냥 보였는데. 하지만 라얀은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말을 아꼈다.
마리엘은 몇 시간 전 별안간 찾아왔다. 눈을 반짝거리면서. 아주 기쁘게. 라얀을 부르는 외침이 얼마나 컸는지 뒤쫓아오던 유모가 제발 체통을 생각하라며 우는소리를 낼 정도였다.
라얀은 마리엘과 내내 숨바꼭질을 하면서 이리저리 숨고, 찾느라 뛰기 바빴다. 덕분에 혼자 있을 때면 번잡하게 찾아드는 생각은 아예 자취를 감춰버렸다.
“또 하자. 어. 이번에는 마리가 술래 할게!”
“마리엘 전하.”
“응?”
“조금 쉬었다가 다시 숨바꼭질을 하시는 건 어떠실까요? 주방장이 두 분을 위해 갓 구운 애플파이와 곁들일 차를 올렸습니다.”
고작 숨바꼭질인데도 힘에 부친다. 라얀의 얼굴에 드리운 피로를 눈치챈 위르겐이 적당히 끼어들었다.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크레이프도 준비했답니다.”
마리엘의 유모도 얼른 거들었다. 더 놀고 싶은 마음과 간식을 먹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던 마리엘은 유모의 말에 결국 패배를 선언하듯이 눈을 반짝거렸다.
“우리 간식 먹고 또 놀자. 응?”
혹시라도 마리엘의 마음이 바뀔세라 위르겐은 서둘러 시종들을 부려 디저트를 들여왔다. 달콤한 냄새와 홍차 특유의 향이 금세 방 안을 채웠다.
아이는 생기 넘치는 얼굴로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나는 오늘처럼 노는 게 재미있는데 펠드 부인이 열 살이 됐으니 그러면 안 된대. 헤셀러스에서 가장 고귀한 레이디이니 품위를 지켜야 한대.”
까닭 있는 불만부터 시작해서,
“제시도 벌써 어른인 척하고. 물론 우리는 숙녀가 맞지만.”
제 친구의 변화에 시무룩해했다.
“요, …라얀은 그러면 안 돼. 나랑 계속 같이 숨바꼭질하고 놀아줘야 해. 겨울에는 같이 눈사람도 만들고. 알았지?”
부정적인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눈썹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포크를 쥔 손을 까딱까딱 흔드는 마리엘을 보며 라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제게 무한한 호의를 보이는 마리엘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입가에 크림 묻었어.”
“어?”
일부러 말을 돌리자 마리엘은 뺨을 붉히며 얼른 입가를 닦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유모에게 아직도 묻었느냐고 되물어 확인하기까지 했다. 하는 양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어?”
“귀여워서.”
“…어.”
눈을 가늘게 뜨며 흘기던 마리엘은 툭 튀어 나간 대답에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레이디한테는 귀엽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아름답다고 해야지!”
마리엘의 주장에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웃음을 참듯 저마다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결국, 비집어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마리엘은 그것을 듣지 못했다.
“응. 아름다워. 마리엘.”
라얀이 순순히 아이가 원하는 말을 해준 덕분이었다. 라얀에게 주의를 뺏긴 마리엘은 포크를 꾹 쥐면서 시선을 내렸다. 토라졌나. 원하는 말을 해줬는데 왜 외면하지. 라얀이 마리엘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있잖아. 나랑 결혼할래?”
돌연 고개를 번쩍 든 마리엘이 올곧게 라얀을 바라보며 예기치 않은 청혼을 했다.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켰다. 유모는 거의 졸도할 지경이었다.
“내가 잘해줄게. 응?”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제 유모를 알 리 없는 아이는 눈을 빛내면서 약속했다. 라얀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왜?”
거절의 표시에 마리엘은 눈에 띄게 실망하며 새 부리처럼 작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안 돼.”
“누구?”
“…….”
“오라버니? 오라버니를 좋아해서 그래?”
라얀은 잠시 주저했다.
“…응.”
머뭇거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에리히에게는 끝내 말할 수 없을 테지만, 한 명 정도는 제 마음을 알아도 되지 않을까. 에리히를 사랑해. 감쳐문 입술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고백을 곱씹으면서 라얀은 희미하게 웃었다.
“치.”
마리엘은 금세 토라졌다. 팬케이크를 으깰 것처럼 뒤적거리는 포크엔 뾰로통함이 묻어났다.
“라얀은 바보야.”
“마리의 말이 맞아. 나는 바보야.”
“아니, 진짜 바보는 아닌데…….”
라얀이 순순히 수긍하자 마리엘은 언제 토라졌냐는 양 당황해서 어물거렸다. 큰 눈을 깜빡거리는 아이의 눈빛에는 어떻게 말을 돌려야 할지 고민이 묻어났다. 어찌나 깊게 고민하는지 포크질도 멈춘 채였다. 라얀은 마리엘을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맞다. 라얀도 들었어?”
“뭐를?”
“있지. 들었는데 궁 안에 진짜로 인어공주님이 있대.”
요정님도 있는데 인어공주님이 없을 리가 없다는 말에는 들뜸이 묻어 있었다.
“…….”
라얀은 찰나 할 말을 잃었다. 요정이나 물의 정령이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는 제 정체가 그런 것이 아니니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어는 달랐다. 어찌하여 아티사에 그런 율법이 생겼는지 역사를 알기에 더욱이나.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이 인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에리히뿐일 텐데. 그뿐이어야 하는데.
“신기하지? 혹시 호수에서 본 적 없어? 응?”
마리엘은 마냥 설레 보였다. 인어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라얀은 아주 조금, 안도했다.
“마리엘.”
문이 열리고 동시에 에리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라얀은 고개를 돌렸다. 이틀 만이었다. 당혹스러운 중에도 반가움은 문득 무의식 사이에 끼어들어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내고야 말았다.
에리히 역시 마리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선은 라얀에게 향해 있었다.
“이만 가는 게 좋겠다. 곧 역사 선생이 올 시간일 텐데.”
“…오라버니가 와도 된다고 했으면서.”
“공부까지 뒤로하며 놀라는 말은 아니었지. 어서 가라.”
에리히는 손을 휘저어 마리엘을 쫓아냈다. 콧김을 뿜은 마리엘은 의자에서 내려와 라얀의 뒤에 숨었다.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열 살일 텐데.”
“나쁜 열 살 할 거야. 왜 다 오라버니 마음대로 해!”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마리엘의 모습에 에리히는 유모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마리엘을 어르는 데는 따를 자가 없는 말재간으로 살살 달랬다. 끝내 유모에게 넘어간 마리엘은 한풀 꺾인 모습으로 에리히를 흘기며 방을 나섰다.
라얀은 에리히를 바라봤다.
에리히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을 살피던 위르겐은 눈치껏 시종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
사냥제 준비 때문에 바빠서 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바쁘지 않은 거냐는 말이 입술 끝까지 차올랐으나 삼켰다. 왠지 그게 꼭 보고 싶었다는 말처럼 들릴까 봐.
“아, 저기. 마리엘이 인어 이야기를 꺼내던데…….”
“마리가?”
“요즘 호수에 자주 갔었잖아. 누가 본 게 아닐까.”
조심했어야 했다. 에리히가 부추겨도 싫다고 할걸. 에리히를 곤란하게 할까 걱정이 앞섰다.
“마리가 특별히 한 말은 없었고?”
“응. 그냥 인어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만……. 또 뭐가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라얀이 인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철렁했던 에르하르트는 이어지는 말에 내심 안도했다. 퍼져 있는 소문은 저렇게 말랑하고, 허상 같지 않았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이제 고작해야 열 살 된 황녀에게 온전한 모양새로 소문을 전할 리 없었다.
수백 년 전 인어와 인간 사이에 발발한 전쟁과 인어가 얼마나 잔혹한 존재인지, 얼마 전 아르헨에서의 초자연적인 현상 역시 사실은 인어가 벌인 일이라는 것까지.
대단히 악의적인 정보 또한 품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저 동화 속 환상의 존재로만 여기던 인어를 실체화하고 거기에 두려운 감정을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것이 적의로 비화하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으리라.
보좌관에게 전해 듣자마자 에르하르트는 그것을 철저히 단속하라는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라얀에게 달려왔다. 혹시라도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듣고 그것을 신경 쓸까 봐.
“그대가 신경 쓸 것은 없어.”
르네궁의 호수를 증축하는 데 앞서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소문을 단순히 무마할 게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을 바로잡으며 근본적으로 두 종족이 상생할 수 있는 기틀을 잡아야 했다. 그래야 라얀이 이곳에서 살아가는 게 그리 힘들지는 않을 테니.
“신경 써야 할 게 있다면 오로지 건강뿐이지.”
라얀을 안심시키고 나자 다른 것들이 눈에 보였다. 이틀 만인데, 긴 시간인 듯했으나 고작해야 그뿐이었는데도, 라얀은 그새 더 희미해진 느낌이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에르하르트는 제 감정을 다스린답시고 핑계 대며 찾지 않은 지난 며칠을 후회했다.
“어찌 점점, 말라가는 것 같지?”
성큼성큼 걸어가 마른 뺨을 매만졌다. 빤한 시선으로 에르하르트를 보던 라얀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뺨.”
“아.”
무심코 뻗어진 라얀의 손가락이 상처 근처에 닿았다. 혹시라도 닿을까 봐 움츠러드는 손가락 끝이 뺨을 간지럽혔다.
“별거 아니다.”
다친 것을 보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것을 직접 보니 썩 기쁘지만도 않았다. 아주 조금쯤은 희열이 번졌으나, 염려하는 표정이 마음 어딘가를 후벼 파서.
“혹시, 키우고 싶은 동물이 있나?”
에리히는 라얀을 끌어당겨 안았다.
“응?”
“토끼? 여우? 새?”
그대가 원하는 것을 잡아다 주겠다. 그게 무엇이든. 끌어안은 채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밀어처럼 귓가를 간지럽힌다.
“…….”
아무 기약도 해서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술을 달싹거리던 라얀은 숨이 까라지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안겨 있어서 다행이다. 그로 인해 에리히가 제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라얀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서서히 다가오는 끝을 헤아렸다.
* * *
펜을 쥐고 있는 자세는 다소 엉성했으나 표정만큼은 진지했다. 저, 폐하한테 편지를 쓰고 싶어요. 위르겐에게 한마디 건네자마자 그는 즉시 양피지와 펜, 잉크를 준비했다.
라얀은 곁눈질로 배워온 대로 깃펜을 잡고 잉크를 묻힌 뒤 한참을 머뭇거렸다.
위르겐은 그 망설임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줄로만 알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
무슨 말로 첫마디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냥을 다녀와 가장 먼저 마주할 것이 자신의 빈자리일 그에게 대체 어떻게 제 말을 전해야 할까. 여태껏 몇 번이고 이별을 이야기했으나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 미처 몰랐다.
그러나 결국은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끝은 점점 선명한 실체를 갖추고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손끝이 투명해지는 등 전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끝은 발치에 드리워져 있었다. 라얀은 그것을 직감하는 순간 갈등의 추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에리히가 자리를 비우는 오늘만을 기다렸다.
지금이 아니면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 라얀은 결연한 표정으로 양피지에 펜을 얹었다. 삐쭉삐쭉한 글씨가 단어를 이루고, 문장을 이룬다. 어떤 말로 채워야 할지 막막해했던 게 무색하게도 라얀은 담담하게 에리히에게 이별을 고했다. 거짓과 진실이 적절하게 섞여 있었다.
‘엘’을 찾으러 가기로 했으며, 아르헨으로 와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것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 그 말은 이별의 언어로 대신하며 온점을 찍었다. 양피지를 반듯하게 접어 책상 한가운데에 올려놓고 나자 정말로 끝이었다.
그것을 미련에 잠긴 채 오래도록 눈에 담던 라얀은 제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아르헨에서 들고 온 것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 팔찌뿐이다. 가져갈 것 역시 결국은 그뿐이었다.
팔찌를 소중히 챙겨 들며 라얀은 잠시 고심했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조금 까다롭기는 할 테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기척을 살피며, 그들의 방비가 허술한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호석을 잃은 빈껍데기이며, 죽음을 앞두었다고 해도 라얀의 오감은 인간들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었다.
다만, 제 마지막 염려이자 불안요소는 아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샤에게 누군가의 기억을 되찾게 할 능력은 없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그 입이 문제다. 무슨 말로, 어떻게 에리히를 헤집어놓을지 모르는 일이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다면 굳이 아샤가 에리히에게 흥미를 가지며 집요하게 굴지는 않을 것도 같았다.
“…….”
고민을 이어가던 라얀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빠져나갈 틈을 노리기 위해서 바깥의 동향에 귀 기울이고 있었는데 별안간 소음이 끊겼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도, 소리 죽인 발걸음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박자박. 오로지 이리로 향하는 선명한 걸음 하나 말고는.
탁. 문이 열렸다.
위르겐일 수는 없었다. 그는 항상 들어오기 전에 노크를 하고 기척을 냈다. 라얀이 내켜 하지 않으면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저렇게 조심스럽지 않게 문을 열지도 않았다.
“누구…….”
라얀은 경계심을 높이며 들어온 이를 바라봤다. 시종의 복장을 한 청년은 침실에 든 적도 없고, 말을 섞은 적 역시 없지만 오며 가며 본 이였다.
“아름다운 아티사의 후계자시여.”
그는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아티사. 후계. …라얀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고개를 드는 상대의 시선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아샤가.”
“그분의 부르심입니다.”
“아니. 나는 아샤와 만나서 할 말이 없어.”
아샤의 말을 들어야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라얀은 단호했다. 한편으로는 아샤에게 홀린 게 분명한 사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 대 살짝 치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네 연인에 관한 것인데도?”
“…….”
라얀은 얼어붙었다. 연한 녹빛의 눈이 사내를 향했다. 그는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새까만 눈으로 라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봄 사냥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새로운 계절의 풍요를 기원하며, 황실과 나아가 제국의 건재함을 보이며, 또한 청년들이 보란 듯이 제 실력을 뽐내는 자리이기도 했다.
순위를 매기기도 하는데 그 안에 드는 귀족 청년들은 그것을 자랑으로 삼으며, 사교계에서도 제법 괜찮은 혼처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 때문에 출신이 변변치 않은 미혼의 청년들은 봄마다 열리는 사냥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오늘 부쩍 날이 맑습니다.”
에르하르트는 작년 사냥 대회의 우승자로, 이번에도 역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에르하르트는 우승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우승하면 받는 화관을 안겨줄 연인도 없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럼에도 우승을 한 것은 귀족들에게 제 존재를 드러내며 가치를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내심 마법만 할 줄 아는 샌님이라고 여기는 그들의 콧대 역시 꺾어서 자근자근 밟아둘 겸.
하지만 올해는 여러 가지로 진심이었다.
귀족들을 제 발아래 두어야만 했고, 그보다는 화관을 걸어주고 싶은 이가 있었다.
라얀. 해사하게 접히는 녹빛의 눈을 떠올렸다. 우승했다고 하면 그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짝거리다가 이내는 대단하다고 평해줄 것만 같았다.
“그렇군.”
에르하르트는 구름 한 점 떠다니지 않는 하늘을 흘끔거렸다. 정말로 날이 좋았다. 사냥하기엔 그리 좋은 날씨는 아니다. 사방이 선명히 잘 보였지만, 잘 보이는 것이 이쪽의 장점만은 아니었다. 이래서야 오늘 수확이 괜찮을지 모르겠다.
총부리를 매만지며 주위를 가늠하던 에르하르트는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사슴을 보거든 그것은 죽이지 말고 짐에게 신호하라고 일러라.”
“사슴을 말입니까?”
“그래.”
라얀은 어떤 동물을 가지고 싶은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에리히는 고민 끝에 사슴으로 결정했다. 본래는 토끼나 여우, 새를 염두에 두었으나 그것들은 너무 작았다.
라얀의 품에 안기고도 남을 만큼. 라얀이 그것들을 품에 안고 좋아할 모습이 왜인지 선연했고, 에리히는 별로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사슴이라면 르네궁의 정원에 풀어두고 관상하면 되니, 그리 나쁘지는 않은 선택지였다. 또 작은 동물들보다는 크니 구색 맞추기에도 좋았다.
“작고 예쁜 것으로.”
보좌관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렇게 말을 전하겠다고 대답을 올렸다.
“참, 그 소문은?”
“단속하여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하오나 아무래도 아르헨에서의 일이 있고, 그 일로 폐하께서 서가를 열어 고서를 내어주신 적도 있으니만큼 인어의 존재를 완전히 허구로 여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대부분 불안해하기보다는 호기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
“일단은 동화 속 존재가 아닙니까.”
지시를 받았으니 따를 뿐, 보좌관은 소문을 썩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에르하르트가 어찌하여 그런 소문에 민감하게 신경 쓰는지를 궁금해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고대의 문헌이 남아 있고, 아르헨에 인어에 관련한 전설이 남아 있다고는 해도 실재하는 인어를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기 힘들 것이다.
“그래.”
환상을 덮어씌우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일단은 부정적으로 난 소문을 잡는 게 더 급했다.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세게 쥐어 당겼다. 그가 속도를 올리자 보좌관 역시 뒤따랐다.
에르하르트는 부러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 다니며 사냥에 집중했다. 탕! 총부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마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사냥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나 뒤따르는 시종의 손에는 이미 그가 쏜 총에 숨을 거둔 것들이 한껏 들려 있었다. 올해도 과연 폐하가 우승을 하시겠습니다. 보좌관은 에르하르트를 띄워주었다.
에르하르트는 찬탄이 거슬려 인상을 찌푸렸다. 거듭해 총을 장전하여 겨눌 때마다 기감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지금 둘러싼 모든 소리가 전부 하나의 소음으로 느껴졌다. 덤불을 헤치는 소리도, …또 바스락거리며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소리까지.
그쪽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손가락은 한껏 젖혔다.
“…폐하.”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조금이지만 풀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아이작.”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게다가 에르하르트만 아는 경로였기에 사냥하는 동안 귀족의 얼굴을 하나 보지 못했다. 그 점을 짚자 카렐은 조금 난감하게 웃었다.
“길눈이 어둡다 보니, 작년에 폐하와 동행한 길로만 다녀서…….”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에르하르트가 손짓 한 번 하면 당장에라도 자리를 뜰 것처럼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아니, 기왕 만났으니 동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사교계에서 그들은 일단 헤어진 사이였다. 결별한 이들이 다시 붙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귀족들이 어떤 식으로 입방아를 찧을지 뻔했다.
“물을 것도 있고.”
그것을 알면서도 에르하르트가 동행을 허락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어떤,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요. 폐하.”
“아이작. 네가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
“가령, 수도에 낸 그 소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보고 싶은데.”
어설픈 모양새로 말을 끌던 카렐이 멈칫했다. 에르하르트는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일별했다.
“폐하, 그게 무슨…….”
에르하르트는 카렐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허공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탕!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발포했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다. 동시에 멀리서 새가 날개를 푸드덕 떨며 곤두박질쳤다. 눈치만 보던 보좌관은 시종만 보내려다가 차라리 자리를 비키는 게 낫겠다 싶었는지 동행했다.
“아니면, 굳이 이 길로 온 이유부터 물어볼까?”
총구를 도로 아래로 내린 에르하르트는 그를 향해 눈길을 비스듬히 비껴 내렸다.
“억울합니다. 폐하.”
얼어붙어 있던 카렐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에르하르트는 말의 갈기를 가볍게 쓸어준 뒤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실, …아니, 모르실 테지만 저는 지금 다른 이들과 마주하는 게 조금 불편합니다. 하여 혼자 길을 헤매다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을 뿐 폐하를 찾아서 이리로 온 게 아니에요.”
가슴에 손을 얹는 호소는 짐짓 진실해 보였다.
“그리고 소문이라니요. 저는 폐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어에 관한 소문 말이다.”
에르하르트는 코웃음을 쳤지만 카렐의 변명에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카렐이 정말로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 이 길로 온 것이든, 아니면 의도적이었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짐이 설마 여태 누구인지 짐작도 하지 못해서 가만히 있던 것이라고 생각한 건 아닐 텐데.”
“…….”
“아르헨의 일, 인어와 관련한 고대 문헌에 대해 아는 이는 손으로 굳이 꼽아볼 필요도 없고, …또한 아이작, 네 저택에는 실재하는 존재가 하나 있지 않나.”
아샤를 짚어 말할 때 에르하르트의 어조에는 얼핏 살의가 비쳤다가 사라졌다.
소문을 접하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 존재였다. 더불어 카렐 아이작을 선상에 올렸다. 제아무리 대단한 존재라 한들, 이곳에서 누구와 인연이 있겠는가.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테고, 그렇다면 그것은 카렐 아이작일 것이다.
“…폐하. 저는, 그건…….”
“아이작. 내가 지금 네 변명을 듣고 싶어 이러는 걸까.”
그럼에도 곧바로 카렐 아이작을 불러 추궁하지 않은 것은 그것보다는 소문을 덮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네가 그자와 무슨 관계이든, 과거부터 아는 사이였든 뭐든 그런 것은 궁금하지 않아. 무슨 의도로 그따위 소문을 퍼트린 것인지도 알고 싶지 않다.”
“…….”
“다만, 용납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그를 구한 대가로 한 번쯤 눈감아줄 수는 있었다. 일단, 라얀에게 해가 된 것도 없었으니.
“하지만 한 번만 더 라얀을 흠집 내려고 하면 그때는 이렇게 넘어가 줄 일 없겠지.”
마지막 경고였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에도 내놓지 않고 홀로 보고 싶지만, 라얀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 없음을 안다. 그렇다면 그가 사교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는 흠 하나 없이 완벽해야만 했다. 어느 누구도 그를 훼손할 수 없으리라.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에게 시들지 않는 영광을 안겨주겠다는 약속은 입에 발린 달콤한 거짓말 따위가 아니었다. 에르하르트는 그에게 무엇이든 안겨줄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천하라고 해도.
“아이작. 그래도 너는 옆에서 짐을 오래도록 지켜봐 왔으니 알아서 새기리라고 믿는다.”
황위를 찬탈하고 정적을 처리하는 일까지. 전부 옆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았냐고 주지시켰다.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얼마나 피비린내 났으며 또한 무자비했었는지를 떠올린 것처럼 카렐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눈엔 언뜻 두려움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러면 다른 쪽으로 가서 사냥하는 게 네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데.”
귀족들이랑 마주치는 게 왜 껄끄럽다고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렇게 내몬 것은 결국 에르하르트였으니까. 하지만 언제고 있을 일이었고 그것이 조금 당겨졌을 뿐이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계속 함께 있다가 누군가의 눈에 띄어 또 헛소문의 당사자로 오르내리고 싶지도 않았다.
에르하르트는 카렐을 무심하게 등졌다.
“폐하께서는.”
“…….”
“그 인어가 그렇게도 소중하신가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영영 잊고 살았으면서 왜, 이제 와서. …카렐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겨우 억눌렀다.
‘알고 싶은 게 있다면 엿듣지 말고, 물어야지.’
아샤를 저택으로 들인 것은 의도였다. 그가 찾는 이가 라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혹시라도 라얀에 대해 무슨 약점이라도 하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카렐은 그것을 취할 저열한 속셈을 품고서 아샤를 저택에 들인 것이다. 그에게서 풍기는 불온한 기운을 애써 무시하며.
하여 라얀이 저택을 방문했을 때 곁방에서 몰래 엿듣다가 아샤에게 들켰다. 나른하게 웃던 그는 카렐을 탓하는 대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인어가 정녕 존재하는 것도 그랬지만, 라얀과 황제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때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오랜 정신적 방황 끝에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아르헨에 간 것을 후회하며, 황제를 꾀어낸 라얀을 원망했으나 사실은 억울해할 것도 없었다. 황제를 살린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목숨과 맞바꿔 살린 생을 보듬어줬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뭐.
그래서 뭐.
“결국 폐하를 살린 것은, 저였어요.”
고작 보듬어준 것이라고 해도 카렐이 그때 황제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숨결은 희미했다. 게다가 그 금발. 황가의 상징이니만큼 진작 황제의 생존을 눈치챈 선황이 그때야말로 진정 목숨을 거둬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네가 내게 도움을 주었으니, 나도 네게 도움을 주어야겠지?’
하지만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막막해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까라졌다. 그것을 눈치챈 것처럼 상대는 요사하게 웃으며 카렐의 혼란을 들쑤셨다.
‘그자의 마음을 온전히 가질 수 있도록.’
그는 카렐이 가장 원하는 바를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그자나 너나 하나같이 왜 짐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들까.”
“…….”
“정작 짐이 갈망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묻지를 않는데.”
에르하르트는 자조했다. 라얀은 그 무엇도 궁금해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는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을 보이더니 이제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머문 이 때문인가 싶어 속이 뒤집어지다가도 결국은 그 초연함에 금방 애가 탔다.
“그리고 카렐. 네가 짐을 살렸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 애가 내 심장에 칼을 꽂아 넣는다고 한들 그조차 이해할 지경이니까. 까닭을 알 수 없는 맹목적인 애정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에르하르트는 이제 그조차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만하면 네 투정은 다 들어줬을 테지.”
에르하르트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그를 등졌다.
“그렇게도 소중하시다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카렐의 목소리는 어딘가 악에 받쳐 있었다.
“정말로 폐하의 심장을 칼로 찔러 그자한테 내어주지 그러세요.”
또한 아리송했으며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윽.”
에르하르트는 침음을 흘렸다.
기꺼이 내어드릴게요. 이 애를…세요. 기억에 없는 잔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파편으로 조각 난 것들이 온몸을 찔러댈 것처럼 달려든다. 눈을 뜨면서도 꿈을 꾸나. 왜 깨어나면 잊는 악몽의 잔재가 갑자기 덮쳐드는 걸까.
에르하르트는 휩쓸고 할퀴는 것들로부터 번지는 통증을 견디듯 말고삐를 움켜잡으며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희게 질린 손등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폐하?”
새파랗게 질린 에르하르트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그새 돌아온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그를 부르며 다가왔다.
“오, 지 마라.”
숨을 씨근덕거리면서 에르하르트는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킨 채 날뛰는 기억들의 타래를 풀어내려 했다. 그러나 찢긴 기억들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에리히. 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머리끝까지 신경이 곤두섰다. 거친 숨에 흉곽이 부풀려지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통제되지 않는 마력이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날카로운 기류에 동요한 말이 푸르릉 울면서 투레질했다.
“폐하. 폐하!”
혹시 저러다가 낙마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때에 멀리서 황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다급했으며, 안색은 창백했다.
“무슨 일이냐.”
보좌관은 얼른 기사의 앞을 막아서며 대신해 물었다. 누가 봐도 좋은 소식은 아닌 표정이지만 부디 별거 아니길 바랐다.
“궁에서 온 전언입니다.”
에르하르트의 시선이 이쪽으로 기울었다. 유리구슬같이 파란 눈은 찌를 것처럼 날카로웠다. 기사는 앞으로 이어질 상황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분이.”
“…….”
“그분이 사라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