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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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은 시끄럽고, 너저분했다.

이미 잔뜩 취해서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가 동행의 부축을 받아 끌려나가고, 얌전히 술을 마시다가도 난동을 부렸다. 그것을 말리는 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소란스러워지기도 했다. 뭇 귀족이라면 이 번잡한 소란을 견디지 못해 눈살을 찌푸리다가 결국은 나갔을 테지만 카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구석을 차지한 채 술잔을 비웠다.

그에게는 익숙한 소음이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귀족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카렐 아이작은 평민으로 살았다. 낮에는 어느 귀족가의 하인으로 일하고, 밤에는 주점에서 술을 나르면서.

그러다 보니 고상하게 굴어야 하는 살롱보다야 이런 주점의 구석진 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게 훨씬 더 편했다. 그리고 비단 그런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카렐은 지금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살롱이나 클럽에 나갈 수가 없었다.

황제는 제게 선택지를 준다고 했으나, 이미 이별을 주도한 이가 누구인지는 결정이 난 뒤였다.

카렐이 부재한 동안 황제의 관심을 얻어 그의 새로운 연인이 될 줄 알았던 마르첼 바렌이 제르바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그 원인이 된 자가 라사드궁에 머물며 극진한 총애를 받고 있노라는 소문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의 귀까지 들려올 지경이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황제의 연인이라는 허울을 잃은 그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표면적으로는 호의를 보였지만 내심 그를 비웃으며 추락을 기다리던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마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하루아침에 돌변해 싸늘한 시선으로 카렐을 바라볼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었다.

“…….”

상인들의 걸음은 뜸해졌고, 그를 향한 달콤한 말이나 호의는 식었다. 아예 못 본 사람처럼 취급하는 이들도 더러 존재했다. 이런데 어떻게 살롱이나 사교 클럽에서 술잔을 기울인단 말인가.

“기어 올라가는 건 그렇게 어려웠는데…….”

추락하는 것은 이토록 쉽다. 오로지 황제에게 기대어 살았으니, 카렐은 점점 주류에서 밀려날 것이다. 앞다투어 날아오던 파티 초대장은 오지 않을 것이고, 그가 주최하는 파티도 더는 북적이지 않을 것이다.

뭐가 됐든 옛날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살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카렐은 견딜 수 없었다. 그러기엔 이미 다른 세계를 엿봤다. 속으로는 그를 비웃을지언정 겉으로는 숙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바라보며 권력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를 알았다. 마음에 담은 누군가를 향한 소유욕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카렐은 어떤 것도 빼앗기기 싫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라얀.”

카렐은 이렇게 된 원흉의 이름을 부르며 이를 갈았다.

황제가 내보낼 때, 붙잡아 세우는 게 아니었다. 그깟 노래가 뭐라고. 음유시인이 뭐라고. 황제가 라얀을 극렬하게 꺼리는 것은 생각해 보면 그만큼 신경을 쓴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는데.

황제는 모두에게 냉정했지만 동시에 무신경했다. 누구에게도 애착 없었고, 누구도 꺼리지 않았다. 하여 내심 불안해하지 않았던가. 그 불안이 현실이 된 것이다.

아니지. 이게 아니다.

역시 아르헨에 가서는 안 됐다. 아르헨에만 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황제의 연인이었을 테고, 뒤에선 멸시당할지언정 적어도 앞에서만큼은 그의 눈에 들어보려 알랑거리는 콧대 높은 귀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리라.

모든 것을 망친 것은 결국 자신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원망하고 자책할 수는 없으니 다른 이를 원망해야만 했다. 그렇게 선택한 이가 라얀이었다.

‘…아, 저기, 네.’

본궁에서 그를 보자마자 부러 들쑤셨다. 내가 바로 황제의 연인이며, 너는 그냥 스쳐 지나갈 이에 불과하다고. 그런데도 말간 얼굴로 눈을 굴리다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라얀이 떠올랐다. 누가 봐도 믿지 않는 표정이라 모멸감과 열등감이 들었다.

그걸 죽이면, 황제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올까. 자신이 연인 행세를 하든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가끔은 다정한 모습으로 그를 귀찮은 잔소리의 방패막이로 삼아줄까.

그러나 카렐은 이 모든 것이 상상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비호를 받는 자를 무슨 수로 해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을 구한 건 나인데…….”

피에 젖었음에도 반짝거리는 금발은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두고 가고 싶지 않아서. 언제 깨어날지 기약도 없는 그를 극진히 살핀 것 또한 나였는데.

술잔을 비웠다. 목울대로 넘어가는 싸구려 술은 썼다.

씁쓸함을 겨우 갈무리한 카렐은 다 비운 술잔 옆에 돈을 올려놓고 비틀거리며 나갔다. 북적거리는 번화가를 지나 귀족들의 저택이 밀집된 거리로 발을 디디자 곧 소란은 잦아들고 적막이 찾아들었다.

터벅. 터벅. 그의 발소리만 들렸다. 달빛에 비치는 그림자 역시 그의 것뿐이었다.

“…….”

걷는 동안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서 어지러웠다. 별로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오랜만에 와인이 아니라 싸구려 독주를 마셨더니 금방 취기가 오르는 모양이었다. 겨우 걸음을 바로잡으며 터덜터덜 걸어가던 카렐은 뺨을 문질렀다. 공기가 이상하게도 습했다.

비가 오려나.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밝게 빛나는 별자리만 총총 보일 뿐이었다.

“분명 그 애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술에 취해 착각했나 보다. 쳐들었던 고개를 도로 내리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솜털이 쭈뼛거리게 하는 매혹적인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니?”

뻣뻣해진 고개를 겨우 돌리자 새까만 어둠이 보였다.

“…….”

아니, 그것은 요사하게 빛나는 보랏빛의 눈동자였다.

* * *

에르하르트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지친 것뿐이라던 라얀은 하루가, 이틀이 지나서도 눈을 뜨지 않았다. 열이 올랐다가 차가워지기를 거듭해 반복할 뿐이었다. 황궁의 의원이란 의원은 모두 다 불러와 다그쳤지만 라얀의 병세를 파악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의 진단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아무런 징후가 없습니다. 맥박도 정상이며 호흡 또한 그렇습니다. 잠이 든 것에 가까우니,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폐하.’

잠이 든 것이라니. 그렇다면 왜 깨어나지 않는가. 새벽녘에 왜 온기를 찾는 것처럼 꼼지락거리지도 않는가.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라얀은 잠버릇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버릇은커녕 미동조차 없었다. 이불을 차지도 않았고, 다리를 허우적거리지도 않았다. 입이 오물거리지도 않았으며, 품으로 파고들지도 않았다.

피부에 혈색조차 돌지 않아 창백하니 그는 숨만 쉬지 않는다면 정말로 죽은 사람 같았다.

인어라 다른가. 혹시 물에 담가야 하나. 하지만 그랬다가 익사하거나 가라앉기라도 하면? 인어라고는 해도 지금은 의식이 없으니 섣불리 어떻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여 그랬다가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될까 봐 두려웠다.

“언제까지 잘 생각이지. 그대.”

동화 속의 수백 년간 잠든 채 키스를 기다리던 공주도 아니면서. 아. 역시나 동화 속의 존재이니, 키스를 바라나. 에르하르트는 온기를 잃어 서늘한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풋내기처럼 입술만 맞대고 있었지만 라얀은 여전히 긴 잠에서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잠까지 전부 앗아가 놓고도 직성이 안 풀리나.”

라얀이 이렇게 된 이후로 에르하르트는 한잠도 들지 못했다. 두려웠다. 숨을 쉬지 않을까 봐.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진저리를 치면서 일어났다. 코 아래 손가락을 대서 미약한 호흡이나마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의 일상은 서서히, 하지만 완전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국정을 등한시할 수는 없으니 낮에는 일해야 했지만 회의를 하는 게 아닌 이상 라얀을 바로 옆에 둔 채로 공무를 살폈고, 밤에는 자지도 않고 뜬눈으로 라얀을 지켰다.

그러고 있으면 어느 때는 신경이 올올히 서는가 하면, 어느 때는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위르겐이 그러다가 폐하께서 몸져누우시겠다며 우려를 표할 정도였다.

“라얀. 그대가 사라지면 이 모든 게 괜찮아질까.”

차라리 라얀을 몰랐던 시절의 불면과 악몽이 달가울 지경이다. 바짝 날 선 신경을 가다듬던 에르하르트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라얀이 이대로 죽는다면 이토록 통제할 수 없는 마음은 다시 제 것이 될까. 제 행동의 낯섦에 거부를 드러내는 마음은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집혔다. …그리고 에르하르트의 손은 단 한 번도 홀스터는커녕, 라얀의 목울대에도 닿지 못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

뻗은 손은 결국 라얀의 뺨에 가 닿았다. 혹시 솜털이라도 상할세라 손길은 조심스러웠으며 애틋했다. 서늘한 체온에 기댄 채로 에르하르트는 눈을 감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일어나.”

제발. 돌아가겠다는 개소리조차도 반짝거리는 녹색의 눈만 볼 수 있다면 달가울 지경이니. 물론 정말로 그것을 들어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듣는 척은 해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맞닿은 체온을 느끼면서 가만히 숨을 고르던 에르하르트는 홀스터에 손을 얹으며 동시에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장전한 총구가 상대의 이마에 겨누어졌다.

서늘하게 식은 푸른 눈은 한 점의 자비도 엿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존재에 대한 긴장감 역시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총을 쥐지 않은 다른 손엔 언제든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마력을 응집했다.

명백한 형태로 드러내는 적의에도 소리 없이 스며든 상대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웃을 뿐이었다. 붉게 물든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고작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의 존재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마치 그의 뒤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이 넘실거려 그것이 제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개소리. 에르하르트는 압박감에 굴복하는 대신에 총구를 더 단호하게 겨누었다.

“인간들은 과연, 방심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구나.”

이마에 겨누어진 총구에 흥미를 드러내는 상대는 본인이 인간이 아님을 시사했다. 에르하르트는 부드럽고 매혹적인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방아쇠를 당기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 들어왔지.”

라사드궁엔 마법진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공간이동은 물론 조금이라도 공격성을 띠는 마법은 사용이 불가했다. 알베르 1세가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었다. 공간이동을 하려면 마법진을 그린 이를 웃도는 마력을 지녀야 했고, 현재 제국에서 그만한 실력을 갖춘 이는 오로지 에르하르트뿐이었다.

“내게 허락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서.”

“말장난은 할 생각 말아라.”

“말장난이라니.”

“…….”

“나는 거짓을 말한 적 없으며, 또한 단지 내 어린 동족이 그리워서 만나러 왔을 뿐이란다.”

“…동족?”

되묻는 말에 눈꼬리가 요사스럽게 접혔다. 가늘어진 보랏빛 눈이 향하는 궤적을 따르던 에르하르트는 이내 그의 정체를 금방 유추해 낼 수밖에 없었다.

“…인어.”

“저런.”

이 아이가 제 정체를 드러내기라도 했니? 아니면 방심하다가 들켰나. 침입자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머금어져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반응하는 대신 마력으로 황금실을 엮어 그의 몸을 억압했다.

“아르헨에서 있었던 일은 그쪽 짓인가.”

“그래도 심해 아래로 삼켜진 인간은 없었을 텐데. …내가 아는 존재 하나가 인간을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 특별히 자비를 베풀었거든.”

금빛 마력으로 엮어진 실에 속박된 침입자는 여전히 긴장이라곤 한 점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속을 들쑤시는 대꾸에 에르하르트는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즉각 총구를 밀었다. 상대의 이마에 총구가 완전히 밀착되었다. 에르하르트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사납게 으르렁댔다.

“겁도 없지.”

내 땅에서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제 발로 찾아올 생각을 했다. 그것도 자객처럼 소리 없이 스며들어서. 에르하르트는 그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인어인 게 뭐. 초자연적인 힘을 쓴다고 해서 뭐. 그들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또한 이곳은 바다가 아니었다.

방아쇠를 겨눈 손가락에 힘을 줬다.

“찾는 수고는 덜어줬으니 나야말로 그쪽에게 조금의 자비나마 베풀어주는 게 좋을까.”

“인간의 왕이여. 나를 죽일 생각이니?”

죽음을 입에 담으면서도 그에게선 여전히 두려움이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워 보였다. 어디 한번 장단을 맞춰주겠다는 행동은 에르하르트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미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에르하르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었다. 오죽하면 요즘 시종들은 숨 한 번 내쉬는 것도 제 눈치를 봤다. 라사드궁은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했다.

“죽이지 못할 까닭 있나.”

“하지만 그러기엔 너는 저 애를 살리고 싶을 텐데.”

그의 속삭임은 뱀보다도 더 간사했다. 에르하르트는 순간적으로 방아쇠를 겨누던 손의 힘을 풀었다. 에르하르트의 시선은 이 소란을 모른 채 침대에 누워 있는 라얀에게로 향했다.

견고했던 마음에 파문이 일자 침입자를 옭아매고 있던 금빛 마력 역시 흔들렸다. 겨우 다잡은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려 아샤를 노려봤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자비라는 생각이 들게 될 거다.”

침입자는 대꾸 없이 사뿐사뿐 라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는 어딘지 심기가 뒤틀려 보였다. 에르하르트가 그것을 조금 더 깊이 읽어보려고 하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작위적인 표정 안쪽으로 감추어졌지만.

그가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라얀과 같은 새까만 색의 머리칼이 그의 얼굴로 가닥가닥 흩어져 내렸다. 라얀.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처럼 밀착한 채 라얀의 이름을 속삭인다. 의미를 헤아릴 수 없는 언어가 쏟아졌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인어들의 언어임을 깨달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단순히 직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르하르트의 귓가에도 닿아 맴돌았는데 날 선 신경을 누그러트렸다.

그럼에도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고 라얀과 가까이 있는 아샤를 밀어내려고 할 때 그가 먼저 허리를 곧게 세웠다.

“…….”

불규칙하고 미약했던 호흡이, 돌아왔다. 창백했던 뺨이 조금이나마 혈색을 찾았다.

“라얀?”

침입자를 밀어내며 라얀을 살폈다. 여전히 눈을 뜨지는 못했어도 그의 부름에 반응하듯이 눈가가 움찔거리며 떨렸다. 에르하르트는 고작 그런 것 따위에도 벅차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애가 깨어나면, 내 이름을 전하렴.”

“…….”

“아샤.”

우리의 해묵은 재회 역시 그때로 기약해도 늦지는 않을 거야. 나긋하게 속삭이는 말은 묘했다. 에르하르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돌았다. 그러나 그는 왔을 때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 * *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하라.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해.’

동시에 제 이름을 부르라는 강요까지. 그는 집요했다. 라얀은 그 어떤 것도 약속해 줄 수 없었으며, 거짓을 말할 수도 없었고, 그의 청 역시 들어줄 수 없었기에 차라리 침묵했다.

화를 내는 그는 후벼팔 것처럼 날카롭게 말하면서도 몸을 쓸어내리는 손짓도,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것 역시도 다정하고 무르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그랬기에 라얀은 더 괴로웠다.

“…으으.”

라얀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라얀?”

유독 눈부시게 느껴지는 햇살에 미간을 좁힌 라얀은 제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실눈을 떴다. 흐릿한 초점이 서서히 명확해지며 연녹색의 홍채에 상이 맺혔다.

“에리, …폐하?”

에리히가 마치 낯선 것을 보듯이 라얀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의 손은 라얀에게 닿을 듯 말 듯 움찔거렸고, 시선은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라얀 역시 멍하니 시선을 마주치다가 지난밤을 떠올리면서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동시에 조바심이 일었다. 혹시 잠든 사이에 제 몸이 흐릿해진 게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야 에리히가 왜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본단 말인가.

“의원. …위르겐. 의원을 안으로 들여라! 어서!”

혹시 무얼 봤느냐고. 그렇다면 그에 대해 무슨 답을 해야 하지? 라얀은 초조하게 고민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리히가 불쑥 그를 품에 안은 탓이었다.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숨이 막혔다. 라얀은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바르작거리다가 고작 그만한 몸짓으로 지쳐서 축 늘어졌다. 자신이 힘을 쭉 빼고 몸을 늘어트리자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던 에리히도 겨우 품에서 조금 떨어뜨려 위아래로 살폈다.

“왜. 어디 안 좋은가?”

짚어내려면 많았다. 허리가 지끈거리고, 다리 사이는 여전히 얼얼했다. 물론 지금 제 몸 상태로 밤새 안겼던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지만.

라얀이 말을 골라내느라 멀뚱멀뚱 있는 사이 바깥에서 웬 중년의 사내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는 에리히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후 조심히 라얀을 살폈다. 라얀은 낯선 인간의 손길에 무심코 몸을 뒤로 물렸다가 에리히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별말 없이 조금 전 라얀을 살핀 인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기진한 것 외에는 달리 이상이 없습니다. 맥박도, 체온도 전부 정상입니다. 폐하.”

“라얀이 일어나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며칠째 똑같은 말이로군. 짐이 혹시 의원이 아니라 앵무새와 이야기를 하는 건가.”

“저, 그게…….”

의원은 억울했다. 정말로 며칠 전이나 지금이나 라얀에겐 어떤 뚜렷한 병세가 없었다. 열이 끓는 것도 아니었고, 맥이 희미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안색이 창백하기야 했지만, 그것이 온몸에 빼곡한 울혈이 남을 만큼 고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고려한다면 지극히 정상이었다.

달리 고할 말이 없어 머뭇거리자 황제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손을 두어 번 휘저었다. 성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의원은 화색이 되어 왕진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섰다.

의원까지 나가고 나자 이 넓은 침실 안에는 다시 자신과 에리히 둘만 남았다. 라얀은 어색함과 제 속을 복잡하게 하는 염려로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틀, …아니지, 사흘 만에야 깨어났다.”

에리히의 말끝에는 한숨이 배어 있었다. 라얀은 순간 사흘이라는 시간을 곱씹었다. 사흘이나 의식이 없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단순히 잠들었다가 일어났을 뿐인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나?”

정말로, 단순히 잠들었다가 일어났을 뿐일까.

“…….”

공백인지도 몰랐던 기억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삼켜질 것처럼 집요했던 관계, 이미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에는 한계에 다다라 있던 체력과 정신력, …라얀은 타들어가는 갈증을 견디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물에 이끌렸고, 그 후로의 기억이 어렴풋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제 기억이 왜곡된 것은 아닐지 다시 한번 짚어보았다. 그때 아무 말이 없던 에리히가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워 맞췄다.

“청록색의 지느러미가 꽤 인상 깊더군.”

라얀의 눈동자가 불안한 모양으로 흔들렸다.

에리히가 기억이 있더라면 들킨다 해도 놀랄 필요 없지만―애초 기억이 있더라면 들킨 것도 아닐 테지만―, 그에겐 어떠한 기억도 없었다. 절벽에서 추락하던 그를 구해준 라얀도, 그 미지의 존재를 궁금해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연을 맺어보려 하던 에리히도.

“…….”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어린 날의 그처럼 호기심을 보일까. 아니면 아득히 먼 과거에 발발한 전쟁으로부터 비롯된 경계와 적의를 드러낼까.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저기.”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는데 라얀은 어떤 말로 뒤를 이어야 할지 헤맸다. 입술이 열렸다가 다물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에리히는 다그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안 싫어?”

“뭐가.”

라얀은 인간들이 ‘다른 것’을 얼마나 배제하고 경계하는지 지난 3년간 나름대로 겪어왔다. 그 점을 짚자 에리히는 눈썹 한쪽을 추켜올리며 되물었다.

“그게, 그러니까…….”

에르하르트는 아까부터 우물쭈물하는 라얀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무덤덤한 척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모든 광경이 현실성 없었다. 혈색이라곤 없던 이가 깨어나서 제 눈앞에서 눈을 깜빡거리고, 숨을 쉬고, 손을 움직이는 것이.

“나는 인간이 아니잖아.”

한참을 머뭇거리던 라얀이 툭 말을 던지며 눈치를 봤다.

“마리의 착각처럼 물의 요정 역시 아니었고 말이지.”

“…….”

“하지만 그 애라면 이 사실을 좀 더 기꺼워할 거다.”

요정이 나오는 동화책보다는 인어가 나오는 동화책을 더 좋아한다고 들었거든. 에르하르트는 실없이 굴었다.

라얀이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인어가 인간들의 생활 기반을 위협할 수 있고, 어쩌면 그들은 또다시 대립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라얀과는 상관없다고 여겨졌다. 하물며 깊게 생각하기엔 욕조에 생기 없이 늘어져 있던 그의 모습이 더 깊이 뇌리에 박혀서 다른 것까지 곱씹을 만한 여력이 없었다.

“다만 궁금한 게 있는데.”

“응?”

“갑자기 쓰러진 것도 그렇고, …혹시 이게 이유인가?”

네가 아르헨에 돌아가겠노라 고집부리는 이유가, 사실은 그 개자식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네가 바다에 기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냐고 물었다. 차라리 그 이유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다고 말한다면 간사하게도 그가 깨어나는 순간부터 다시 저변에서부터 들끓는 심화가 조금쯤은 가라앉을 것도 같아서.

“봤다시피 나는 인간이 아니라, 물이 필요해.”

“…….”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아르헨으로 돌아가려는 건 아니야.”

괜히 과거의 그를 끄집어내서 또 정신을 잃기 전의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지만 라얀은 또다시 그의 말에 맞서는 대답을 했다. 혹시라도 그가 원하는 답을 하게 된다면 그들이 정의 내릴 수 있는 어떤 사이가 될까 봐.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잊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봐 그것이 염려됐다.

“…하.”

에리히는 침묵에서 답을 헤아렸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라얀은 무심코 몸을 움츠렸다가 스스로 놀랐다. 기억에 남은 마지막 밤이 스쳐 지나가면서, 아주 잠깐이지만 그를 두려워한 게. 에리히는 그날 분명 제게 다정하고 무르게 굴었는데도 말이다.

“…….”

몸에 닿는 손길은 없었다. 라얀은 힐끔거렸다. 에리히는 어딘지 당혹스러워 보였다. 뺨을 성마르게 쓸어내는 손은 잘게 떨렸다. 라얀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하자 에리히는 내려서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굴곡진 얼굴의 곡선이 보였다. 둥근 이마,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푸른 눈동자를 감싼 짙은 금색의 속눈썹, 오뚝한 콧대, 예쁜 모양의 입술까지. …라얀은 에리히가 제 마음을 정리하는 동안 그의 측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어.”

불쑥 고개를 돌리는 에리히와 시선이 얽혔다. 라얀은 멍청한 소리를 냈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에리히는 그새 표정을 정돈해서 당혹스러워하던 아까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깨어난 것을 보았으니 됐다.”

침대맡에 앉아 있던 에리히는 몸을 일으켰다.

“저기…….”

미련을 떨쳐야 한다고 한 것은 라얀이었다. 찰나지만 그를 두려워한 것도 자신이었는데 막상 뒤돌아서는 등을 보니 절로 붙드는 말이 튀어나갔다.

“참, 네 동족이 너를 보러 왔던데.”

붙잡고 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의외로 에리히가 해결해 주었다. 동시에 다시 의문을 안겨주었다. 동족이라니. 그를 찾아 여기까지 올 만한 이는 없었다. 아일라조차도 단 한 번도 바깥으로 올라오지 않았는데 누가 그를 찾아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

아. 하나 있었다.

“아샤.”

한때는 친구라고 여겼던 이. 지금은 제 생을 움켜쥐고 있는 태초의 맹약자.

“그래.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더군. 건방지게도…….”

벌컥 언짢은 티를 내던 그는 이어지던 말을 뭉갰다.

라얀은 그가 흐린 말끝을 궁금해하는 대신 시선을 내렸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동요하는 표정을 가려줘서 다행이었다. 아샤가 어떤 이유로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좋은 의미는 아닐 터였다.

“아샤는 지금 어디 있어?”

겨우 숨을 고르기 무섭게 라얀은 아샤를 찾았다.

“그것을.”

“폐하.”

바깥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에리히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송구하나 전할 것이 있어서.”

“들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위르겐이 들어왔다. 그는 먼저 황제의 심중을 살폈다. 그러고는 며칠 만에야 의식을 찾은 라얀에게 살짝 눈짓을 보내고, 이내 고했다.

“아이작 자작이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나중에 확인하지.”

지금 그깟 거 때문에 시간을 방해한 것이냐는 황제의 반문은 가히 날카로웠다. 위르겐은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 황급하게 말을 이어붙였다.

“…그것이 폐하께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작은 후견인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카렐이 왜.”

“그것은 저 또한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위르겐에게서 서신을 넘겨받은 에르하르트는 아이작 가문의 인장과 필체를 확인했다. 분명 전부 다 카렐 아이작의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연유로 라얀에게 서신을 보낸단 말인가. 카렐을 라얀의 피후견인으로 삼았지만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들 사이엔 어떤 유대도 존재하지 않았다.

에르하르트는 망설임 없이 서신의 겉봉을 뜯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겉봉을 벌려봤으나 서신은 조각조차 없었다.

“대체…….”

카렐이 왜 네게 이런 장난을 치는 거냐고 묻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라얀은 무언가를 손에 쥔 채 그것을 홀린 것처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진주였다. 에르하르트는 저것이 카렐의 서신에 있던 것임을 눈치챘다.

“라얀?”

“…아샤.”

라얀은 그가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진주를 움켜쥔 채 그 이름을 속삭였다.

* * *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흔들리는 마차는 별로 익숙하지는 않았다. 에리히가 어릴 적에 한 번, 그리고 또 이곳으로 올 때 한 번으로 고작 두 번이 전부이니 익숙해질 틈도 없었다.

라얀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진주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것이 아샤가 제게 전하는 메시지임을 한 번에 알아봤다. 라얀은 그 즉시 나가야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에리히는 방금 일어난 게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면서 만류했지만 이번에는 라얀의 고집이 이겼다.

“고작 진주 한 알로 거기 그자가 있다고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친한가 보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리히의 목소리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다분했다.

그는 라얀이 아샤를 만나러 나가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조건 하나를 걸었다. 동행할 것. 그리고 라얀이 그에 대답하기도 전에 위르겐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지시했고, 지금이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라얀은 그를 두려워했으면서도 결국은 친구라고 생각했으나, 아샤는 아니었으니 친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3년 전 비극의 일부는 아샤가 초래한 것이었다. 물론, 그가 아니었어도 불시에 성장기에 접어든 라얀은 에리히에게 닥칠 일을 막을 순 없었겠지만.

“진주가 인어의 보석이라서, …그래서 짐작해 본 거야.”

폐하가 아샤가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도 해줬잖아. 덧붙이는 말에 에리히는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으로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반쯤 옆으로 기울인 고개가 까딱거린다. 헤아려보자면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 보겠다는 표현이었다.

“…몸은.”

“괜찮아.”

허리 아래로 둔중한 통증은 있지만 그것 말고는 괜찮았다. 타들어갈 것 같은 갈증도 느껴지지 않았고, 요 며칠 그랬던 것처럼 숨이 버겁지도 않았다. 아마 아샤가 손을 써준 덕분이 아닐지 짐작했다.

“그런데 혼자 다녀와도 됐는데. 폐하는 바쁘잖아.”

누가 말해준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늦은 밤에 소리 없이 들어와서 해가 뜨기도 전에 소리 죽여 나가는데, 어떻게 모를까. 그리고 모르기에는 에리히의 얼굴이 부쩍 까칠했다.

“그건.”

네가 또 내가 없는 사이에 쓰러질 수도 있지 않으냐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네가 동족을 따라갈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사실이니 거짓은 아니다.

라얀의 동족이 그를 찾아왔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제게는 좋은 이유가 아닐 것이다. 에르하르트가 초조를 누르지 못하고 회의까지 뒤로 미뤄가며 여기 있는 까닭이었다.

“아…….”

마침, 마차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폐하. 도착했습니다.”

도착을 알리는 소리에 에르하르트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마력을 거둔 손으로 라얀의 손을 잡아 그를 에스코트했다.

하지만 마차 바깥으로 나가는 이는 라얀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고 싶지만, 그리고 그 인어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지만 혹시라도 에르하르트가 카렐의 저택에 방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사그라진 스캔들에 불을 지피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가 굳이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아니라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에르하르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를 보는 라얀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다녀와.”

“…….”

“그대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테니.”

라얀이 기다린다는 이를 두고 홀연히 떠날 만큼 무정하진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대답을 듣기 전, 문을 닫았다.

라얀은 굳게 닫힌 마차의 문을 바라봤다.

“헤르(Herr, 미혼의 남성을 이르는 말).”

그의 도착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이가 라얀을 불렀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자신을 부르는지 몰라서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하염없이 마차만 보는 라얀을 보다 못해 기사가 어깨를 톡톡 치며 눈짓한 뒤에야 겨우 알아챘다.

“아, 네.”

“헤르 라얀이 맞으십니까? 저는 이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인 벤이라고 합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헤르.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내는 몸을 옆으로 살짝 비키며 안내를 자처했다. 라얀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을 지나서 저택 내부로 들어갔다. 그는 다른 생각―가령 아샤가 왜 왔는지에 대한―에 빠져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앞서가던 사내가 멈춰 선 것도 몰랐다.

땅만 보고 걷다가 그와 부딪혀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뒤에야 라얀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저기.”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방금까지 능숙하게 길잡이 노릇을 하던 집사는 라얀의 사과를 들을 생각도 없이 서둘러 물러났다. 저 문 너머에 있는 존재를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되짚어 보니 오는 길에 사람을 한 명도 마주하지 못했다. 아무리 정신을 다른 데다 두었다 한들 오가는 기척까지 완전히 인지하지 못한 건 아니었을 텐데.

저택은 기이할 만큼 고요했다. 황궁 역시 매사 언행을 조심하느라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이지만 그 결이 달랐다. 그러니까 이건, 조금 익숙하다. …주위를 압도하는 두려움에 숨을 죽이는 분위기.

라얀이 처음 흑해에 닿았을 때 느꼈던 것이다.

“내 어린 인어.”

그것을 깨닫는 순간 문이 열리며, 동시에 웃음기를 머금은 낮은 목소리가 정수리에 흩어졌다.

“오랜만이구나.”

“…아샤.”

라얀은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조금 들어야만 했다. 3년 만에야 보는 아샤는 여전했다.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고 선 아샤의 보랏빛 눈동자는 웃고는 있지만 지울 수 없는 나른함과 권태를 품고 있었다.

“왜, 왔어요?”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아샤가 온 이유를 헤아려봤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르헨에 있는 동안에도 찾아오지 않았다. 하물며 위르겐에게 듣기를 이곳은 아르헨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아르헨이요? 글쎄요. 이동진으로 가는 게 아니라면 스무 여일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동진은 황제나, 각 이동진이 그려진 성의 주인이 인가하지 않는 이상 사용할 수 없노라는 말까지 친절하게 덧붙였다. 물론 그가 인간들이 쓰는 방법을 사용했을 리는 없지만, 어쨌든 그토록 먼 거리였다.

내내 생각해 봤지만 아샤가 올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또 ‘재미’를 위해서 무슨 짓을 할 수도 있으니 그 의도에 경계심이 들었다.

“만나자마자 추궁부터 하는 거니.”

그들의 인연은 3년 전에 끝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비록 그들 사이에 내기라는 이름의 태초의 서약이 놓여 있었으나 그것이 아샤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되지 못했다.

“만날 만한 사이는 아니니까요.”

또한, 라얀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원망했다.

아샤가 아니라면 에리히에게 닥칠 일을 막아낼 수 없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감정은 별개였다. 아티사에 매여 있지 않았더라면 그 시간만큼 더 사랑할 수 있었을 테고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을 테니. 에리히가 동굴에서 죽어가던 모습이 마치 자신을 기다리던 것 같아서 떠올릴 때마다 피가 식었다.

“아무래도 문 앞에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어차피 아무도 없잖아요.”

대꾸하던 라얀은 그제야 이 저택의 주인인 카렐 아이작에 생각이 미쳤다. 어떻게 아샤가 그의 저택에 있는 것일까. 흑해에 사는 그와 인간인 카렐 사이에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그것을 물어보기에 앞서 아샤는 몸을 옆으로 살짝 틀었다. 까딱거리는 고갯짓에 뜻을 헤아린 라얀이 이기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샤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와인을 따랐다.

“너도 한잔 줄까.”

권하는 것까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그를 잘 모르는 이가 본다면 인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얀이 고개를 젓자 아샤는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지냈니?”

“아샤.”

우리 사이에 그런 일상을 묻는 게 가당키나 하느냐는 부름이었다. 아샤는 웃으며 와인으로 입술을 축였다.

“그냥요. …잘 지냈어요.”

라얀은 결국 체념하고 그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뭉뚱그렸다. 정말로 자신의 지난 3년은 ‘그냥’이었다. 해가 저물면 죽을 것처럼 에리히를 그리워하다가도 또 해가 뜨면 어떻게든 그 감정을 뒤로한 채 살아가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 오늘에 이르지 않았는가.

“잘 지냈다, 라.”

아샤는 예상치 못했다는 양 잠시 멈칫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네가 너의 생까지 걸어가면서 살렸는데도 여전히 널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의 옆에서.”

아샤는 한없이 가벼운 어조로 아무렇지 않게 라얀을 후벼팠다.

“하루하루, 죽어가면서 말이지?”

가까이 다가온 아샤는 라얀의 가슴을 가볍게 짚었다. 수호석이 있어야 했던 자리였다. 라얀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갈 곳 잃은 아샤의 손은 허공을 잠시 맴돌다가 도로 거두어졌다.

“그건…….”

에리히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고, 죽어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샤의 지적에 라얀은 그 어떤 말로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유예되었던 죽음이 다가오는 것뿐이에요.”

라얀은 겨우 마음을 가다듬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무사히 자란 에리히를 보고, 그의 옆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 아주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만큼 이별이 고통스러울 테지만 그것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그리고 아무리 고통스러운들 소멸하고 나면 전부 흩어질 덧없는 감정이었다.

“아샤가 왜 왔는지 묻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

“사실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모든 감정을 갈무리한 뒤에 하려던 말을 꺼냈다. 아샤가 무슨 이유로 왔든 간에 도무지 해결되지 않던 타들어갈 것 같던 갈증이 가신 것은 전부 그 덕분일 것이다.

에리히는 제게 사흘 만에 깨어났다고 말했다. 아샤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눈 뜨지 못한 채 소멸을 맞이해야만 했을 게 분명했다.

“고마워요.”

“…….”

“적어도 에리히의 눈앞에서 소멸하지 않게 해줘서. 아샤가 허락한 시간이니만큼 모를 리는 없을 테지만, 정말로 슬슬 한계에 다다라서 내심 조마조마했거든요.”

순수하게 고마움을 표현하자 아샤는 라얀을 내려다봤다. 그는 어딘지 심기가 비틀려 보였다. 돌이켜보면 아샤는 자신이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때면 이런 반응을 보였다.

“너는 그동안 변한 게 없구나. 조금도 변함없이 여전해.”

칭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평이었다.

“나는 네가 나를 보면 삶을 구걸하기를 내심 기대했었다.”

아샤는 라얀이 벌려놓았던 거리를 도로 좁혔다. 창살 너머로 들이치는 태양에 일렁거리는 새까만 그림자가 라얀을 삼킬 것처럼 드리워졌다.

“구걸하면, 달라질 게 있나요?”

“어쩌면 자비로운 내가 너에게 살 수 있는 선택지를 하나 내어줄 수도 있지 않니. 가령…….”

라얀은 그의 그림자 안에 갇힌 채로 아샤를 올려다봤다. 자수정 같은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아샤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작게 물보라가 일어났다가 잦아들었다. 그의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이것으로 네 수호석을 지닌 이의 심장을 갈라서 가져오라고.”

아샤는 단검을 라얀의 손에 억지로 쥐여 줬다.

“하지만 수호석은…….”

당신이 가져가지 않았느냐는 말은, 이어지는 말에 삼켜졌다.

“그리고 난 그것을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인간에게 내어줬고.”

라얀은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눈을 부릅뜨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왜!”

언성을 높였던 라얀은 호흡을 골랐다.

“…저는 돌아가도 결국은 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자신은 시들어가는 에리히의 모습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아샤를 부를 것이며, 그에게 에리히의 목숨을 살려달라 간절히 애원할 것이다. 자신의 생을 내어놓으라는 말에는 또다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수호석을 그의 손에 들려주었으리라.

“오늘의 답도, 그와 다르지 않아요.”

살게 된다 한들 그 생의 여백에 에리히가 없다면 결국은 의미 없었다.

“누군가가 사라질 거면 저여야만 해요.”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하는 거라면 그것은 모든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이어야만 했다.

에리히에겐 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괜찮을 것이다. 사실, 아주 조금 걱정인 부분도 있지만 에리히가 기억하는 자신과의 시간은 고작해야 한 달 남짓이다. 라얀이 어디로든 떠나면 금세 잊을 것이다.

“저, 이만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바깥에서 노크와 함께 재촉했다. 왜인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에리히가 상상됐다.

“갈게요.”

라얀은 재촉을 핑계로 흐트러진 망토 자락을 여미며 뒤돌았다.

“하지만 그 인간이, 네 소멸과 동시에 너를 기억하게 된다면?”

아샤가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 애는 과연 비극을 견뎌낼 수 있을까.”

입술을 깨문 라얀은 대답하지 않고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돌리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등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길쭉한 손이 라얀의 손등을 덮었다.

“배웅은 여기까지만 하마.”

그대로 문을 당겨서 연 아샤가 라얀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 * *

에리히가 라얀의 소멸과 동시에 기억을 찾는 것은 생각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까지처럼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라얀이 사라지고 한참 후에나 서서히 찾아가던가.

라얀은 불안했다.

‘네 소멸과 동시에 너를 기억하게 된다면, 그 애는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야릇하고 불순한 의도를 담은 아샤의 속삭임과 웃음이 밤낮없이 머릿속을 점령해서 흩어지지를 않았다. 혼자 있을 때면 라얀은 내내 그 말을 생각했고, 다시 아샤에게 가서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다. 에리히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할 셈이냐고. 도대체 그 애한테 어떤 절망을 안길 셈이냐고.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아샤를 자극하게 될까 봐 염려되었다. 그는 사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한 말인데 괜히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운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휘둘리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그러기엔 아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항상 웃음을 머금은 서늘한 얼굴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러나라.’

그는 흑해의 주인인데도 라얀을 구했다.

‘네가 바라는 것을 하나 들어줄까?’

곁을 내어주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흥미로워할 만한 것, 가령 네 수호석을 걸 수 있겠니?’

결국은 뒤에서 라얀을 곤경에 처하게 하기도 했다.

‘…그 애는 그 절망을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또한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굳이 뭍에 올라와 호의를 베풀고, 분명하지 않은 말로 자신을 멋대로 휘두르려고 한다.

―여전히 끝은 발치에 도사리고 있으나―아샤 덕분에 몸이 한결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로 인하여 그만큼 근심이 늘었다. 라얀은 에리히와 함께 있을 때면 애써 의연한 척했으나 홀로 있을 때면 그 생각으로 끙끙 앓았다.

그 애가 기약 없는 절망을 견디지 못하면 어떡하지.

모든 것을 품고 가야 할 것은 오로지 자신이어야 했고, 기다림과 절망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리히는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그의 생에 놓여 있는 것은 평온이어야만 했다. 라얀은 오로지 그것만을 바랐다.

“들어가겠습니다.”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라얀은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누구에게든 제 고민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라얀이 평온을 가장하자마자 며칠 봤다고 익숙해진 사내가 들어왔다.

별안간 에리히의 침궁 대신, 그가 가지 말라고 을러대던 곳에 머무르게 된 이후로 사내는 매일같이 비슷한 시간에 와서 라얀을 살폈다. 불편한 곳은 없는지, 어제와 다른 것은 없는지 질문을 하고 청진했다.

‘폐하께서 라얀 님의 건강을 염려하시며 보낸 의원입니다.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영문 모를 행위에 라얀이 꺼리는 기색을 보이자 그를 눈치챈 위르겐이 살살 어르고 달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라얀은 점점 쇠약해져 갔으나 그것은 수호석을 잃었기 때문이지, 질병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의원은 랴얀의 이상을 짚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에리히의 마음이 편할 수 있다면 적어도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의 뜻을 따라줄 수는 있었다. 한편으로는 제게 이상이 없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도 그게 소멸이라고는 생각지 못하리라는 계산도 염두에 있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아주 사소하게라도 말입니다.”

물론 에리히의 앞에서 소멸하고, 그가 기억을 찾는다면 안배는 전부 무용한 것이 될 테지만.

“없어요.”

의원은 제 말에 부정의 의미로 작게 고개를 흔들며 대답하는 미청년을 바라봤다. 화려한 듯 섬세하게 조형된 이목구비의 미청년은 단 한 번도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음에도 이미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황제가 물고 빠는 새로운 애인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일인데 심지어 르네궁의 새 주인이었다. 선황의 총비였으며 또한 황제의 생모였던 올리비아의 거처였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의미를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작 평민 따위가 르네궁의 새로운 주인이라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황제의 안온한 보살핌 속에서 지내는 미청년은 전혀 모를 테지만 사교계의 인사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서 눈이 벌게져 있었다. 만일 자신이 매일 르네궁으로 왕진 다닌다는 사실이 궁중에 퍼졌더라면 그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한껏 애단 닦달로 괴로웠을 것이다.

의식이 없던 며칠간 황제의 다그침과 살기를 생각해 본다면 아주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으나. 지난 기억을 되살린 의원은 날 세우던 황제를 떠올리곤 몸을 떨었다. 황제는 단번에 귀족들을 숙청하던 지난날보다 더 서슬 퍼렇고 냉엄했다.

“혹시 불편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시종을 통해 저를 불러주십시오.”

황제는 카렐 아이작에게도 이렇게까지 지극정성이지 않았다. 다른 이를 대할 때보다 물렀고, 그때는 그것을 대단한 총애의 의미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미청년에게 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황제가 실은 카렐 아이작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생각하게 되리라. 그 르네궁을 거처로 허락한 게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할 지경이니.

“아주 늦은 밤이라도 좋으니 말이지요.”

무엇이 황제를 그토록 열렬히 매료시켰을까. 가히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아름다운 외모?

“그렇게 할게요.”

아니면 누군들 홀리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목소리인가.

“흠……. 의원님.”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렀다. 그를 증명하듯이 시종장이 헛기침하며 그를 불렀다. 서둘러 시선을 갈무리하며 가방을 챙겨 물러났다. 

그간 몰랐는데 황제는 질투심과 소유욕이 대단했다. 단순히 촉진을 하기 위해 손대는 것도 얼마나 못마땅해하던지. 눈빛에도 죽을 수 있었다면 그는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편안한 여생을 살고 싶으면 알아서 몸을 사려야 했다.

“날이 따뜻한데 잠시 산책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의원이 나가자마자 위르겐이 라얀의 의중을 살폈다.

“그냥 조금 쉴래요.”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면 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타래처럼 켜켜이 꼬여 있는 생각을 풀어내려면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첨탑에 걸려 있는 태양이 저물면 에리히가 돌아올 것이다. 그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면.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 낮까지 산책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위르겐은 다행히 두 번 권하지 않았다.

“…….”

빛가루처럼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라얀의 입꼬리가 도로 내려갔다.

* * *

해는 금세 저물었다. 장막처럼 드리우는 어둠과 함께 에리히는 희미한 잉크와 초봄의 냄새를 묻힌 채로 르네궁으로 돌아왔다.

“위르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라얀을 눈짓으로만 살핀 그는 열린 문 앞에 서 있던 위르겐을 불렀다.

“물러나겠습니다. 부디 밤의 평온이 폐하와 함께하기를.”

단순히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위르겐은 바삐 물러났다. 닫히는 문 너머로 느껴졌던 기척들이 썰물처럼 사라진다. 항상 그랬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라얀의 주위를 살피던 인기척들은 에리히가 오는 것과 동시에 저 멀리 사라졌다.

“뭘 하고 있었지.”

길쭉하게 뻗은 다리로 금세 거리를 좁힌 에리히는 라얀이 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라얀은 얼른 책을 덮어 옆으로 숨겼지만 에리히는 기어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동족의 이야기라 더 관심이 많이 가나 보지.”

더 구해다 줄까? 말투에는 설핏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잡념을 떨칠 겸 그가 예전에 안겨준 동화책을 습관적으로 읽고 있었을 뿐이다. 라얀이 됐다며 손을 젓자 그는 도로 동화책을 건네준 다음 라얀의 손을 붙들어 일으켰다.

그에게 이끌려 복도로 나갔다. 복도를 지나쳐 후원으로 가기까지 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이곳에는 둘만 있었다.

“몸은?”

“괜찮아. 멀쩡해. 아무렇지 않아.”

에리히는 의원처럼 매일매일 라얀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 거듭해 괜찮다는 확신을 받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다는 것처럼. 대답을 듣고도 미심쩍다는 표정을 거두지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폐하는 왜 내 말을 안 믿어?”

“그대는 티를 내지 않으니까. …됐고, 얼른 들어가.”

한참 동안 못마땅하게 미간을 좁히던 에리히는 호수로 턱짓했다. 저번에 인어라 물이 필요하다는 말을 귀담아들었는지 에리히는 라얀을 호수로 들여보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렇게 하루도 거르지 않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물과 닿으면 한결 낫기는 했다.

라얀은 꾸물거리다가 호수로 들어갔다.

귀가 뾰족해지고, 작은 아가미가 생긴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얕은 갈퀴가 불투명하게 보였다. 라얀은 완전히 인어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지느러미를 살래살래 흔들며 어둠에 잠긴 호수로 파고 들어갔다. 호수 안을 제 영역인 듯 한참을 유영하던 라얀은 물을 함빡 머금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박차면서 튄 물방울이 달빛에 산란했다.

라얀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

에리히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호수의 수면 위로 올라온 라얀과 눈을 마주치곤 비로소 안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런 얼굴로 봐?”

“그건… 글쎄. 모르겠군. 도무지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막연함이라.”

그는 제 감정을 명확히 정의할 수 없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 됐다. 이리 와봐.”

“왜?”

까딱거리는 손짓에 라얀은 순순히 그를 향해 다가가서 올려다봤다.

“그냥.”

“…….”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뾰족하게 가시를 드러내지 않는 에리히는 어딘지 과거를 겹쳐 보이게 해 곤란했다. 속없이 좋아할 수 없는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라얀이 본신으로 돌아와 있을 때는 그의 체온을 뜨겁게 느끼는 걸 안 이후로는 아예 손가락 하나 스치지 않게 조심하는 게 제 눈에도 보였다.

“저, 폐하도 들어와 볼래?”

라얀은 분위기를 흩트렸다.

“갑자기?”

“싫어?”

“예전에 바다에서 죽을 뻔한 기억이 있어서 딱히.”

그는 뭉뚱그렸지만 말하는 즈음이 언제인지 알겠다. 폭풍우가 몰아쳐서 격랑이 치는 바다에서 떠다니던 그를 건져내 뭍에 올렸던 게 여전히도 생생했다. 혹시라도 망망대해 속 어딘가에서 표류하는 에리히를 찾지 못할까 봐 막막해했던 감정까지도.

게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적도 있고. 상황은 기억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은 사라졌으니 에리히에게는 바다에 빠졌던 기억만이 남아 있을 터였고, 그것은 그리 좋은 기억이 되진 못했다.

“아…….”

“물론 그대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굳이 좋지 못한 과거를 떠올리게 한 것은 아닐지 걱정하느라 라얀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그것을 놓치지 않은 에리히는 말을 덧붙였다.

“난 헤엄을 치지 못해. 그대처럼 물에서 숨을 쉴 수 없지.”

“그 문제라면 내가 숨을 불어 넣어주면 되는걸.”

“…숨을?”

찰나였지만 에리히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어떤 식으로?”

아. 어조는 나긋하지만 그는 불쾌함을 감출 때 짓고는 하던 표정을 했다. 라얀은 눈치껏 대답을 회피했다. 침묵하자 그것마저 심기가 불편한지 눈썹이 한 마디 정도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으나 다그치지는 않았다.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해.”

별이 총총 떠 있던 밤하늘을 눈짓하던 에리히는 도로 라얀에게 시선을 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색을 잃지 않는 푸른빛의 눈은 형형했다. 눈꺼풀에 덮여 있을 때 까뒤집어서라도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눈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어떤?”

그 눈빛에 홀려 대답이 더뎠다.

“이상하게 그대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

“꼭 나를 오래 알아온 이처럼.”

라얀은 찰나 호흡을 멈췄다. 지나온 모든 시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제게 에리히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물론 착각일 테지만. 가장 가까운 레아조차 때때로 내 감정을 다 헤아리지 못했는데 네가 나에 대해서 잘 알 리가 없지.”

어떤 말로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에리히가 알아서 결론을 내렸다. 라얀은 안도의 숨을 쓸어내리다가 그를 불렀다.

“폐하.”

“…한 번쯤, 아니, 그래. 말해.”

손을 휘저으며 이를 악물던 그는 금세 불만을 삭이고 감정을 다스렸다. 라얀은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그를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가, 도로 보며 말을 골랐다. 곱씹는 것은 오랜 고민의 과정이었다.

“폐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어떨 것 같아?”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더 말해보라는 듯이.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니까 따라 죽으려고 하는 동화책이 생각나서…….”

“어린애들이 보는 건데 그런 내용도 있다고?”

“응? 응.”

당연히 에리히가 시종을 통해 보낸 동화책에 그런 내용은 없었다. 정확히는 잘 모른다. 인어가 나오는 동화책만 읽었을 뿐, 다른 것은 쌓아두고 손조차 대지도 않았다.

단지, 이게 며칠 내내 이어간 고민 끝에 내린 묘안이었다.

“폐하는 어떻게 할 것 같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삶을 이어갈 암시를 주는 것.

“…그대는 어떨 것 같은데.”

잠깐 생각에 잠긴 것처럼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던 에리히는 답을 되돌렸다.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그대가 먼저 생각을 밝힌 다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게 더 올바른 방식 아닌가.”

“그래도 내가 먼저 물어봤으니까 폐하가 대답해.”

“네가 답하지 않으면 나도 하지 않겠다.”

별것도 아닌 일로 티격태격 고집을 부리는 것도 오랜만이다. 대답을 미루는 에리히에게 짜증이 나는 것도 찰나였다. 라얀은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지금 꺼내서 사그라질 때까지 곱씹을 수 있을 감정이 아니기에 서둘러 갈무리했다.

“…나는 그 애가 모든 걸 잊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

“…….”

“앞서 떠나야만 했던 연인도 그걸 바랐을 테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제 죽음에 슬퍼하지 않기를. 오래 행복하기를. 늘 웃기를. 자신을 생각하는 건 아주 가끔이기를.”

부디 에리히가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면, 오늘 밤 자신이 속삭이는 이 말도 함께 떠올려주기를 바랐다. 모쪼록 그의 절망이 길지 않도록. 후회로 사무치지 않도록.

“상대방이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더니, 그대는 두고 죽은 자에 이입해 답을 하는군.”

“나는 대답했잖아. 폐하라면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에리히는 무의식적으로 라얀의 머리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감았다. 생각에 잠겨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옛날에 곧잘 하던 버릇 중의 하나였다. 두피가 살살 당겨지는 느낌이 간지러웠지만 라얀은 잠자코 있었다.

“연인이 바란다니 슬퍼하지 않고, 오래 행복하고, 늘 웃고, 아주 가끔 생각해야겠지?”

“그게 뭐야.”

라얀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전부 자신이 한 말이다. 어디에서도 고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라얀만 초조하고 급했다.

“진지하게 대답했는데 폐하는…….”

“나도 고심했다. 신중히 답한 거야.”

라얀이 연신 불만을 쏟아내니 에리히는 그제야 수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저 성의 없는 대답이나마 다짐을 받고 싶었다.

“약속해.”

“뭘?”

“폐하의 대답이 진심이라고, 나랑 약속해.”

푸른 눈에 황당함이 번졌다. 고작 동화 속 인물의 일로 왜 언쟁을 해야 하며, 또 약속까지 해야 하는지 영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라얀은 꿋꿋하게 새끼손가락을 치켜들며 재촉했다.

“얼른.”

“그건 설마 마리에게 배웠나?”

네가 내게 알려줬다는 대답은 할 수 없으니 라얀은 손가락만 더 바짝 올려서 흔들었다. 에리히는 그것을 심란한 표정으로 봤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라얀은 약속하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불안을 달래고 싶었다.

“…마리도 이제 자신이 숙녀라고 주장 중이라 새끼손가락은 걸지 않을 텐데.”

그는 한참을 못마땅한 얼굴을 하다가 목소리를 낮춰 수식을 영창했다. 금빛 가루가 에리히의 몸을 휘감았다. 그런 뒤에야 에리히는 라얀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그래. 약속하지.”

뜨거워야 했을 손은, 서늘했다.

“이만 가자. 너무 오래 있었다.”

“아…….”

에리히가 손가락을 얽은 채 그대로 자신을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다가 감기 걸리겠다.”

라얀은 쉬이 뭍으로 올려졌다. 인간으로 형체가 변하자 조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번졌다. 몸을 살짝 떨자 에리히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로브로 이내 자신을 칭칭 감았다. 겨우 얼굴만 드러낸 라얀은 에리히의 손에 이끌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

풀벌레 소리,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 소리, 사뿐한 발걸음 소리.

모든 게 고요한 밤이었다.

침실로 돌아간 라얀은 에르하르트의 옆에서 잠든 척하다가 살짝 일어나 새가 지저귀듯이 허밍을 했다. 한참을 조곤조곤 노래를 부르더니 금세 잠들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을 때, 에르하르트는 눈을 떴다. 눈에서는 한 점의 잠기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매일 밤 이랬다는 건데.”

에르하르트는 요즘에서야 왜 근래 두통이 사라졌는지, 빌어먹을 악몽이 없었는지, …또 라얀이 의식이 없는 며칠 동안은 다시 불면에 시달렸는지를 깨달았다.

“…….”

둥근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라얀이 잠든 모습을 바라봤다. 감긴 속눈썹은 눈가에 닿을 만큼 길게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조금의 근심도 없이 쌔근거리던 얼굴엔 금세 주름이 생긴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움찔거리면서 떨다가 에르하르트가 그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 그제야 제 손을 쥔 채로 도로 편안해진 얼굴로 잠에 빠졌다.

에르하르트는 움켜쥐는 손길을 느끼며 한참 동안 보다가 조금 더 달이 기울었을 때에서야 몸을 일으켰다. 혹시 라얀이 자신의 뒤척거림에 깨어날까 봐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침대에서 벗어나 아주 잠깐 라얀을 바라봤던 에르하르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슴푸레한 등만 켜둔 익숙한 침실 대신 낯선 공간이 보였다. 불쾌하게 흐르는 날카로운 기류가 불온한 모양새로 에르하르트의 주위로 흘렀다.

“오늘로써 내가 네 영역을 허락 없이 침범했던 값을 치렀구나.”

만물이 잠든 고요한 밤이다. 매혹적인 목소리가 새까만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침입으로 인해 깨어난 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개소리 말고.”

에르하르트는 냉랭하게 잘라내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한 발짝 거리를 좁혔다.

상대방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의미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날 대체 라얀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

짜증을 감추려 했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이를 향한 인내는 턱없을 정도로 부족했다. 그런 에르하르트의 모습을 보며 상대는 묘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에르하르트는 한참 뒤에야 겨우 적의를 숨겼다.

“그쪽을 만나고 온 뒤로 영 불안해하던데.”

라얀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다 보였다. 눈치 빠른 위르겐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걸 고려해 보면 잘 숨기지 못한 것은 아니고, 그냥, …그래, 이상하게도 에르하르트의 눈에는 그의 기분이 훤히 읽혔다. 마치 라얀이 제 감정을 헤아리는 것처럼.

만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 고작해야 표정만으로 서로의 감정을 이토록 잘 헤아릴 수 있다니. 착각이라고 넘겼지만, 때때로 착각 같지 않을 때도 있었다.

“거슬리게 말이지.”

에르하르트는 요즘 라얀의 건강에 부쩍 예민하게 반응했다.

라얀이 의식을 찾자마자 르네궁으로 보냈고, 혹시라도 그가 불편을 느끼지 못하도록 위르겐과 그가 신임하는 시종들로 꾸려 라얀의 시중을 들게 했다.

과연 사교계에 큰 소란이 일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난데없이 나타난 이가 르네궁을 떡하니 차지했고, 황제의 시종장을 부리며, 에르하르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같이 그곳을 찾으니 오히려 조용하고 무관심한 게 이상한 일이었다.

셋 이상 무리 지으면 하나같이 르네궁에 둥지를 튼 황제의 애인 이야기뿐이라는 소문은 에르하르트에게도 닿았다.

에르하르트는 귀족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어대든 관심 없었다. 오히려 라얀에 관한 소문을 부풀리면 부풀렸지, 일축할 생각은 없었다. 억측과 비난이 아니면 되었다.

그는 소문에 간섭하지 않았다. 에르하르트의 묵인 아래 라얀은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에르하르트가 라얀을 르네궁으로 보낸 것은, 그들 생각처럼 대단히 낭만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그토록 질색하는 궁에 라얀을 두고 싶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라얀을 그곳으로 보낸 것은 시선에서 자유로우며, 가깝고, 라얀이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호수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라얀이 에르하르트의 침궁을 벗어났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라얀이 조금이나마 생기 있는 얼굴로 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처음으로 아비가 올리비아를 위해 만든 흔적이 역겹지 않고 달가웠다. 그 또한 아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나쯤 했으니 지옥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에르하르트는 떠오를 때마다 신경을 갉작거리는 존재를 향한 감정까지 뒤로 미뤄두며 온전히 라얀에게 온 신경을 기울였다. 그 애가 핏기없는 낯으로, 숨조차 쉬는지 알 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 어딘가가 내려앉아서.

그런데 정작 라얀은 이자를 만난 이후로 뭔지는 몰라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잠도 깊이 자지 못했다. 에르하르트의 입장에선 거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게 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순순히 뱉는 것이 피차 좋지 않나.”

“또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것 같고. 수백 년 전, 바다 아래 수장되어 사라진 네 선조들처럼 되고 싶은 건 아니잖니. 이 손에 스러진 금빛 머리의 수를 헤아리며 이제 와 거기 하나 더 보태고 싶지는 않단다.”

“나는 그들과 달라서. 그리고 그쪽이야말로 사는 곳을 본인의 피로 물들이고 싶은 건 아닐 텐데. 아니면 원래 그런 취향인가?”

둘 다 낯빛 한 번 굳히지 않았으나 빈정거리며 주고받는 언쟁은 아슬아슬하게 수위를 넘나들었다. 언제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누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속에서 에르하르트는 사납게 웃었다. 그의 손엔 마력이 응집되었다 흩어지길 반복했다.

“이상한 일이지.”

“…….”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또 아주 대단치도 않은 것도 아니라.”

“그게 무슨 소리지.”

인간은 아샤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물론 아샤는 친절하게 일러줄 생각은 없었다. 서약을 맺을 때 라얀에 대한 기억을 만지면서 약간의 장난을 쳤다는 걸,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말해봐야 어차피 아무 의미 없기도 했다.

기억을 되찾으려 하거나, 라얀을 보면 반발감이 들게 건드렸다. 어찌 그것을 이겨냈는지는 몰라도, 인간은 라얀을 곁에 두고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애를 기억해 내지 못하는 인간의 사랑은 대단한 듯, 보잘것없었다.

라얀이 저 인간에게 보이는 애정에 비한다면, 대단히도.

초라했다.

그 애는 대체 왜 고작해야 저런 것을 잊지 못하는 걸까. 살 방도를 일러줬을 때는 그것을 미련 없는 표정으로 포기하고, 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더니 저것이 느낄 절망은 어찌하여 그토록 두려워하나. 조금만 더 살아간다면 사랑이란 게 얼마나 덧없으며 부질없는 감정인지를 알 수 있을 텐데.

“좋아. 그래. 네게 한 번쯤 자비를 베풀어주지 못할 것 없겠지.”

인간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아샤는 엄습하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물었다.

“인간이여. 너는 그 애를 사랑하니?”

“개소리.”

“혹시 마음에 담았어?”

“궤를 달리하는 소리는 그만하고, 내가 묻는 말에나 답해라. 여기가 네게 내 감정을 설명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지 않나? 그리고 설령 어떻든 내가 왜 네게 그것을 답해야 하지? 네가 뭐라고?”

인간은 성마른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왈칵 성을 냈다. 아샤는 흔들리는 감정의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 애가 불안해하는 게, 과연 나 때문일까.”

“그게 무슨 뜻이지.”

“그 애를 흔들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하나라는 뜻이란다.”

눈을 휘어 웃는 아샤와 달리 인간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동요했다.

“…엘?”

탄식하듯 뱉어내는 목소리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감정이 스며 있었다. 질투, 증오…,

혹은,

“아. 그래. 때로는 그렇게 부르기도 하더구나.”

부러움.

“…그 이름을 알고 있나?”

그자가 바로 자기인 줄도 모르고.

“어찌 모를까.”

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 인간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라얀의 생에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이름이라 자주 들었지.”

엘, 엘. …엘과 오늘은 뭘 했고, 그 애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었고, 걔가 자기를 화나게 했다며 말싸움을 하고 또 어떻게 화해했는지까지 내게 낱낱이 말하곤 했는데. 라얀이 제게 했던 말을 하나하나 떠올려서 천천히, 세심하게 일러주자 인간의 표정은 처참히 일그러졌다.

“그 애가 아티사와 영광마저 전부 등진 채 이곳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면 인어족의 후계자가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아갈 리가 없지 않니.”

아샤는 제 감정에 압사되어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보면서 기이한 즐거움을 느꼈다.

“인간의 왕. 너는 그자를 참 닮았다.”

“…….”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 흔적을, 그림자를 이길 수 있을까? 라얀이, 제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사랑한 그 존재를?”

라얀은 이것을 사랑한다. 동시에 완전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자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지만 결국은 모든 시간과 추억을 공유한 과거의 ‘그’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제 어쩔까. 이자는 스스로의 감정에 좀먹히다가 결국은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라얀을 할퀴어댈까. 결코 본인의 손에 넣지 못할 라얀을 눈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버릴까.

라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내주면 좋으련만. 그 애가 더는 마음 붙일 데 없어서 결국은 제게 기대도록. 아니면 마음이 부서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왕은 아샤의 헤아릴 수 없는 힘을 경계해 그를 흑해로 추방했다. 혹여 그 힘이 후계를 위협할까 봐. 결국은 살아남아 그곳의 지배자가 되어 수백 년간 군림한 아샤에게 있어 라얀은 흥미를 이끌어낸 존재였다.

‘…저는 하자예요.’

죽음을 목전에 둔 두려움에 젖은 눈만이 즐거움이었던 그에게, 어쩌면 살아 있는데도 흥미를 끌어내는 여전하고도, 유일한 존재.

“결코.”

그랬기에 아샤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온전한 형태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인간에게 한 발짝 다가간 아샤는 요사스럽게 웃었다.

“개소리.”

절망과 분노에 잠겨 있는 줄 알았던 인간은 살벌한 표정으로 짓씹었다. 그것은 라얀에게 향한 것이라기보단 오히려 아샤를 향한 것에 가까웠다. 얌전히 갈무리 중이었을 마력이 파지직 튀며 금빛 기류로 번졌다.

“제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온 존재 하나 제대로 건사 못 하는 개자식의 그림자 하나를, 설마 못 떨쳐 낼까.”

“…….”

“라얀은 결국 그자를 잊게 될 거다. 내가, 짐이 그렇게 만들 테니.”

코웃음을 치면서 다짐하는 목소리는 퍽 오만했다.

“궁금증은 풀었으니 더 이상 볼 일이 없겠군. …참. 그리고 새겨둬.”

아샤가 그를 향해 걸음을 좁혔듯, 인간 역시 한 걸음을 좁혀왔다. 시선이 맞부딪쳤다. 불순물 하나 없이 새파란 눈동자에는 확연한 적의가 새겨져 있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샤는 빙글거렸다. 그것도 잠시, 옷깃을 틀어쥐는 손길에는 웃음을 굳혔다.

“내 땅을 헤집어놓은 너를 굳이 살려두는 것은, 쓰임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너야말로 이런 건방진 짓을 하고도 죽지 않는 건, 결코 내 호의가 아니라는 걸 알아두렴.”

은은한 살기가 넘실거렸으나 인간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코웃음 치며 한 걸음 멀어졌다. 그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사라졌다.

아샤는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는 대신 마력이 남아 잔상처럼 부유하는 금빛 가루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어찌할까.”

네 기대와 달리 너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허락되지는 않을 텐데.

그게 어떤 식으로든.

“…….”

묘하게 웃은 아샤는 잔상을 털어내며 뒤돌아 어둠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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