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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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이 내리던 폭설이 멎자 제르바는 본래의 계절을 되찾았다. 따뜻한 바람에 소복이 쌓여 있던 눈은 어느새 녹아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초록 잎을 틔웠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적어도 아직 한겨울 같은 이 방 밖을 나간다면.

모두가 찬바람을 폴폴 날리는 에르하르트의 눈치를 봤다.

“그래서.”

탁. 에르하르트는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서류를 던지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신하들은 황급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자기들이 건드리면 잎을 오므리는 미모사도 아니고. 에르하르트는 그들을 날 선 표정으로 노려봤다.

“…아룁니다. 저희 마법사들이 즉시 아르헨으로 향해 마력의 파동을 탐지하였지만 달리 특징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황실의 수석 마법사가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답을 늘어놓았다.

“폭풍우가 몰아친 것도 아니고, 암초에 걸린 것도 아닌데 배가 한 척도 아니고, 다섯 척이 난파한 게 단순히, 우연이다?”

황제는 태양만큼 화사한 낯으로 어둠보다도 음산하게 뇌까렸다.

로만은 정말이지 상황만 허락한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그는 이름뿐인 수석 마법사가 된 지 오래였다. 건국 황제인 알베르 1세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인 마법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 떨치는 황제가 돌아온 이후로.

제 심정은 비단 그만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마음이 비슷하지 않을까. 과연. 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한숨과 침 삼키는 소리가 그를 증명했다.

“로만. 짐이 그런 대답을 바라고 시간을 준 건 아닐 텐데.”

“하나 폐하의 말씀대로 어선부터 군함까지 다섯 척이 난파되었습니다. 이것이 마력이었다면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할 터인데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나이다.”

“해적의 짓 또한 아닙니다.”

아르헨에서 백작을 대신하여 올라온 닐스 카나반 역시 해적이 항에 정박해 있던 군함을 격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며 진중하게 덧붙였다.

닐스 카나반의 보고가 아니더라도 해적의 짓일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에르하르트는 테이블에 펼쳐져 있는 전도를 노려봤다.

[군함 한 척, 어선 네 척, 이유는 불명. 희생자는 없으며 생존자는 기억 불완전.]

아르헨에서 올라온 급보였다. 어선 한 척을 제외한다면 바다에 나갔다가 폭풍우에 휘말린 것도 아니었다. 날은 맑았고 해풍은 고요했으며, 풍랑은 잠잠했다.

그런데도 정박해 닻을 내리고 있던 배들은 갑작스레 뒤집는 물길을 이기지 못하고 떠밀려가 수심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깊은 바다에 처박혔다.

그나마 어망을 내리기 위해 바다에 나갔다가 생존한 자의 기억은 불완전하여 기댈 수 없고, 자연에서 답을 구할 수 없으니 에르하르트는 급보가 닿자마자 마법의 흔적을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당대 그와 견줄 그릇을 지닌 마법사는 없으나 모르는 일이 아닌가. 마탑의 마법사들을 보냈으나 특별한 수확이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면서 대체 며칠째 본궁에 처박혀 있는 건지를 헤아렸다.

천재인지, 인재인지 분별할 수 없는 사안이 발생한 이후로 그는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눈을 붙이는 일조차 이곳에서 했다.

즉위 초만 해도 선황이 저지른 일을 처리할 겸 그의 흔적을 싹 갈아엎을 시간이 필요해 한참을 본궁에 머물렀고, 근래에도 필요에 의해 본궁에 머무르는 일이 잦아 불편하거나 부족한 것은 없는데도, 불만이 쌓였다.

“…….”

다시 시작된 악몽으로 인한 날카로운 피로 또한.

“저, 폐하.”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내려 뻑뻑한 눈을 문지르던 에르하르트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여는 로만에게 시선을 보냈다. 실핏줄이 선 새파란 눈길에 로만은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체면을 생각하고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혹시 몰라 과거의 문헌을 살폈는데 수백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를 발견했습니다.”

“…뭐?”

“다만 아쉽게도 대개의 기록이 소실된 터라서 전후 맥락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습니다만.”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건, 확실히 천재는 아니라는 뜻이다. 에르하르트의 시선은 닐스 카나반에게로 향했다.

“카나반.”

“예, 예.”

“아르헨에 떠도는 무슨 전설이나 소문 같은 건 없나.”

닐스 카나반은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전설. …전설. 머릿속을 헤집어 봤지만 평생 검술이나 승마, 혹은 영지 관리 등에만 관심을 가지던 그가 그런 것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아!”

전혀 모른다고 대답했을 때 황제가 얼마나 차갑고도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까.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던 닐스 카나반은 겨우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 인어에 관련한 전설 정도는 있습니다.”

사방에서 헛웃음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린아이들이 접할 동화에나 나올 법한 소재가 지금 황제의 면전에서 꺼낼 말이냐는 반응에 닐스 카나반은 질책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황제는 혓바닥에 칼을 물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에르하르트 역시 동화 속 존재를 논하는 닐스 카나반을 힐책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석 마법사가 과거의 문헌을 언급한 순간, 아르헨에서 읽었던 고대 문헌이 떠올랐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그는 그곳에서 인어에 관한 고대 문헌을 접한 적 있었다.

“…인어.”

읊조리자 새파란 바다와 하늘거리는 청록색의 무언가가 꿈결처럼 떠올랐다. 어렴풋한 형체가 머릿속에 그려지다가 선명해지기 전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흩어졌다.

“잠깐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에르하르트의 흉곽이 가쁘게 오르내리는 것을 유심히 살피던 위르겐은 적당한 때에 참견했다.

위르겐은 치고 빠지는 걸 잘했다. 요 며칠 침궁에만 머무르던 위르겐이 도로 본궁에 불려와 거드는 것도 부쩍 날 선 에르하르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고 시중드는 법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제 몸 상태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차피 당장 답이 나올 만한 일도 아니었다. 하물며 말도 안 되지만, …진정 인어가 한 짓이라면 해결이 가능하기는 한가. 닿지도 않을 존재와 어떤 수로 대적하여?

“이번에는 그럴싸한 답이라도 가져와 내밀어야 할 것이다.”

옛 문헌을 샅샅이 뒤지고 혹여 필요하다면 황실의 서고까지 열어주겠다고 이른 에르하르트는 다시 한번 세세하게 지시한 뒤에야 나가보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나가라는 손짓에 신하들이 한숨 돌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한심한 눈으로 둘러본 그는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나간 뒤에야 답답하게 얽맨 크라바트를 느슨히 풀면서 의자에 파묻혔다. 에르하르트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감돌았다.

요즈음 또 잠이 부족했다. 아르헨의 일도 어느 정도 까닭일 테지만,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얕은 잠을 자기 일쑤였고 겨우 잠이 들면 불명확한 악몽에 시달렸다. 이거야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치면, 그를 부쩍 예민하게 하는 것은 역시나…….

“참, 폐하. 뵙기를 청하는 분이 계십니다.”

“생각 없으니 물려라.”

가뜩이나 신경이 올올히 올라왔다. 누구를 만날 만한 상황도, 기분 역시도 아니었다. 에르하르트는 침궁으로 공간이동을 할지 잠깐 고민했으나 털어냈다. 아르헨의 일이 아니라도 아직 살펴야 할 일이 쌓여 있는데, 가서 얼굴을 보고 말이라도 섞었다가는 다시 오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위르겐.”

에르하르트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응접실의 곁방이 본궁에 딸린 침실이었다. 그러니까, 응접실은 말이 응접실이지 그가 허락해야만 열리는 곳이다. 본궁에서의 어지간한 알현은 전부 집무실이나 서재 등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위르겐이 독자적으로 응접실을 연 것이다.

“건방을 떠는구나.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누구인지 보신다면 폐하께서는 오히려 이 위르겐을 칭찬하시게 될 겁니다.”

위르겐은 위축되기는커녕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장담했다. 누구를 들여야 위르겐을 칭찬할 수 있다는 건지. 비웃으면서 당장 내치라 을러대려면 에르하르트는 찰나 멈칫했다.

몸을 늘어트려 기대고 있던 그는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에르하르트의 걸음은 금방 응접실에 닿았다. 시종이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손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는 풍경처럼 머물러 있는 존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새까맣고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라얀 역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초록빛 눈이 우습게도 반갑다는 생각이 들기에 앞서, 에르하르트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시종들이 감히 너를 굶기기라도 하는 건 아닐 테고.”

라얀의 안색이 부쩍 파리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부터 기인한 불면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면, 새벽의 끄트머리에 잠들어 있는 그의 옆에 짧게나마 누워 있다가 오기는 했다. 그러나 어둡기도 했고, 에리히 본인도 그런 것을 분별할 여력이 없어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괜찮은데. 다들 잘해줘.”

“그건 당연한 일이다.”

보지 못한 지 고작 며칠이다. 한데 그사이에 이렇게 살이 내릴 수가 있는 건가. 혹시 병이 있나. 황궁의를 보내서, 아니, 지금 당장 대령시켜서 살피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에르하르트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헤아리면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얼마나 기다렸지.”

“조금.”

눈꼬리에 웃음을 머금은 라얀이 손을 뻗었다. 하얗고 섬세한 손이 손등을 감쌌다. 다른 사람이 그랬더라면 쳐냈을 테지만 눈썹만 추켜세울 뿐 잠잠히 있었다.

내심 이 체온이 반가웠으므로.

에르하르트는 천천히 몸을 낮춰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익숙한 체향이 났다. 둔중하게 쿵쿵거리던 두통이 가라앉았다. 누군가를 찌를 것처럼 올올히 서 있던 신경 역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경직되어 있던 표정이 풀렸다.

“…….”

“…….”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침묵이 이어졌지만 그것이 불편하거나 거슬리지 않았다.

“폐하.”

짧은 정적에 파문을 던진 것은 라얀이었다.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드는 대신 살짝 틀어 그를 올려다봤다. 섬세한 턱선이, 거슬러 올라가면 마른 뺨과 하늘거리는 속눈썹이 보였다.

“나는 언제 가?”

내심 반가웠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에르하르트는 잠깐 그의 말을 되짚은 뒤에야 대답을 줄 수 있었다. 목소리가 딱딱했다.

“오브로 돌아가겠는 거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한 걸로 아는데.”

라사드궁(황제의 침궁)에 그를 불편하게 하는 이가 있나. 그럴 리가 없다. 위르겐은 섬세한 자였고, 아마 시종들을 단단히 단속했을 것이다. 그간 너무 위르겐에게 일임하긴 했으니 한 번 정도는 자신이 나서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별개로 황궁 밖에 저택 하나를 얻기는 해야 할 것 같지만 지금은 내보내기보다 옆에 두고 싶었으므로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

“…….”

“아르헨에. 아르헨에 언제 갈 수 있어?”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라얀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 가만히 그를 올려다볼 수만은 없게 되었다. 눈가를 찌푸린 에르하르트는 대고 있던 얼굴을 일으켜 바로 세웠다.

라얀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는 내내 속으로 곱씹으며 다짐한 것과 별개로 목소리가 떨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라얀은 조금 전 들어와 자신을 보자마자 웃었던 게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내려다보는 에리히와 시선을 맞추었다.

에리히를 보고 있으니 아까까지 함께 있던 카렐이 생각났다. 에리히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연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남자. 3년 전 에리히를 구한 것을 계기로 연인이 되었노라, 굳이 할 필요 없는 말까지 늘어놓다가 자신이 별 반응 없자 나간 남자가.

솔직히 라얀은 카렐이 에리히의 이름을 부르는 건 조금―사실은 많이― 싫었지만 마음 아프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고맙기까지 했다.

3년 전, 라얀은 아샤에게 구걸해 에리히의 숨만 겨우 붙여놨을 뿐이었다. 당장 제 몸 챙길 여력도 없어서 죽음에 한 발 담근 이를 건져만 두고 온 게 한참 동안 걱정이었는데, 적어도 에리히는 그때 혼자가 아니었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라얀은 에리히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지를 안다. 그것을 에리히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는 라얀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에리히는 카렐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듯이.

“이제 아르헨에 가고 싶어. 폐하.”

사실은 이제 조금 헷갈렸다. 재회하여 처음 마주했을 때만 해도 온기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던 눈빛이, 아주 약간이지만 따뜻해진 것도 같아서.

“왜.”

싸늘해진 저 눈빛조차도 말이다.

“다시 가서 그 자식을 기다리려고? 기약도 없는, 그 기다림을?”

라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에리히는 혼자 지레짐작했다. 기다리기는커녕, 잊히려 하는 것이었지만 굳이 아무것도 알지 못할 그의 물음에 답을 내어주지 않기로 했다. 되레 에리히의 착각과 오해가 깊어지는 게 달갑기만 했다.

“아직도 잊지 못해서?”

침묵은 결국 긍정이었다.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던 라얀을 보자마자 누그러졌던 마음이 폭풍우를 만난 것처럼 뒤집혔다. 이렇게 마음을 변덕스럽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이 과거 그자를 무엇이라고 일렀는지를 재차 떠올려야만 했다. 구원자. 다정한 사람. 역시나 개소리다. 곱씹어볼 가치조차 없었다.

“네가 간다고 하면 내가 얌전히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나. …저번에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지금 너한테 흥미가 조금 있다고.”

잇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사나웠다. 에르하르트는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같이 가는 뼈대에 무심코 힘을 뺐다.

“흥미는 언제 잃는데?”

빤한 시선으로 묻는 말이 들쑤셔진 속을 헤집어댔다.

“글쎄. 그건 너 스스로한테 물어보는 게 어때.”

에르하르트는 어깨를 움켜쥔 손으로 목 언저리를 문지르며 가까이 붙었다.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사이로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내렸다.

“이 몸이 워낙 달아서 그럴 틈을 주지 않으니.”

“아!”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따끔한 통증에 소리를 내지르느라 무심코 벌어진 틈으로 침입했다. 안으로 바짝 말아 숨긴 살덩이를 찾아 단단히 얽었다.

라얀은 턱만 바짝 치켜든 채 난폭한 키스를 받아내야만 했다. 에르하르트는 친절을 베풀어줄 생각이 없었기에 그의 목덜미를 억압하듯 붙들고 사납게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거듭해 라얀의 호흡을 앗아갔다. 코로 숨 쉬는 타이밍마저 놓친 라얀은 숨이 모자라는지 헐떡거렸다. 에르하르트는 그마저도 심술궂게 갈취했다.

“으응…….”

입을 맞출 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비이성적인 노기를 라얀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입술이 맞물리고 호흡이 섞일수록 단순히 행위에 몰입했다.

에르하르트는 고른 치열을 부드럽게 훑듯이 쓸어 올렸다. 예민한 점막을 건드리자 라얀의 몸이 움칠거리며 튀었다. 키스하는 동안 떠밀리다시피 해 반쯤 눕게 된 라얀의 허벅지를 문지르며 벌렸다. 그 사이로 제 허벅지를 밀어 넣으며 더 바짝 붙었다.

“알아? 너를 보고 있으면 내가 머저리가 된 기분이야.”

옷자락을 움켜쥔 라얀의 손에서 힘이 풀릴 때에서야 에르하르트는 입술을 떼며 짓씹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으며, 때로는 감정이 통제되지도 않는다며.

“…….”

어찌나 꽉 움켜쥐고 있었는지 반듯했던 셔츠에 주름이 잡혔으나 그의 시선은 오로지 라얀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원래도 붉었던 입술은 더 새빨갛게 부어 번들거렸고, 창백했던 얼굴에는 홍조가 돌았다.

“아무 생각도 없이 이 몸을 탐하고…….”

다른 개자식에게 가서 움직일 생각 하지 않는 네 마음을 구걸하고 싶어지지. 에르하르트는 겨우 마지막 말은 삼켰다.

“네 다리를 벌리고 파고들고 싶어지지.”

대신해 다른 말로 그를 헤집어놓는다.

에르하르트는 여전히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이 감정이 끔찍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는 결국 인정하기로 했다. 아니, 카렐과의 소문을 정리하려던 그때부터 어렴풋이 깨닫지 않았던가.

이것은 흥미 따위가 아니다. 고작해야 그런 감정 따위일 수가 없다.

어쩌면, 그를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어쩌지. 계속 네게 흥미가 생기는데.”

그럼에도 에르하르트는 이 감정을 라얀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너절한 자존심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자 따위는 기억에서 지워버려.”

“폐하…….”

“에리히.”

“…….”

“내가 저번에도 일러주지 않았나. 단순히 듣고 흘리라고 알려준 게 아니었는데.”

이름을 부르라는 은근한 압박에 라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못 알아들은 눈치는 아니었다. 알아듣고도 침묵한 것이다. 아까의 침묵이 긍정이었다면, 이번의 침묵은 명백한 부정이었다. 속이 꼬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시들지 않는 영광을 네게 안겨주겠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에르하르트는 자꾸만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라얀의 턱을 잡고 오만하게 말했다.

라얀이 원한다면 가장 비옥한 옥토는 물론 귀족의 작위 역시 내릴 수 있었다. 도망 노예 출신의 평민이라는 것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의 신분은 황제인 그가 보증할 테니.

그뿐인가. 소국의 왕 자리를 원한다면 그 또한 전리품처럼 안겨줄 수 있었다. 귀찮아서 두었을 뿐,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국경에 접한 나라의 성벽에 제국의 깃발을 나부끼게 해 헤셀러스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에르하르트가 하지 못할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라얀의 마음조차 그래야만 했다.

“그대, 라얀. …그 개자식 말고 나를 선택해.”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손등에 입술을 얹으며 시선을 맞췄다. 이것은 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지 않았을 뿐, 기실 구애 행위였다.

라얀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호흡은 흐트러졌다. 에르하르트는 답을 기다렸다. 꾹 다물린 입술만 바라보는 시간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라얀이 여전히 손등에 닿아 있던 입술을 밀어내며 에르하르트의 뺨을 감쌌다. 익숙한 체온이 닿아왔다.

“…폐하.”

“에리히.”

고작해야 불렸을 뿐인데 라얀의 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도로 틀어막고 싶은 것을 참으며 호칭을 교정해 주자 라얀은 희미하게 미소 지을 뿐, 말을 고치지 않았다.

“나는, 그럴 수 없어.”

“…….”

“그럴 수가 없어. 난 그 애를 저버릴 수 없어. 그러니까…….”

아르헨으로 보내달라는 말은 언어로 조형될 수 없었다. 채 라얀의 말이 완성되기 전에 에르하르트가 고개를 내려 도로 입술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군.”

“폐하.”

“그 역시 내가 원하는 호칭이 아니고.”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면서 뇌까렸다.

무게감이 잘 느껴지지도 않는 라얀을 잡아당겨 한 손으로 안은 에르하르트는 그를 곁방으로 데려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 위에 눕히고는 그의 손 마디마디를 결박하다시피 그러쥔 채 제 품 안에 가뒀다.

“부디 그대가, 내 인내가 다하기 전에 바라는 답을 주면 좋겠는데.”

라얀의 뺨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인 에르하르트는 귓불을 깨물었다. 라얀이 몸을 움츠리다가 결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속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었다.

사방이 짙은 푸른빛으로 일렁거렸다. 유일한 빛은 옅게 반짝거리는 이름 모를 생물체뿐이었다. 반딧불이? 아니. 그것은 아니다. 반딧불이는 저렇게 생기지도, 빛나지도 않았다. 그것을 한 손으로 낚아채 볼지 말지 고민할 때 옆에서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때?’

청량하고 몽롱한 목소리는 아득한 그리움이었다.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옆으로 꺾었으나 형체는 짙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이곳이 나의 세계야.’

이것은 허구인가. 아니면 조각난 기억의 파편인가.

에르하르트는 상상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후자에 가까우리라. 그렇다면 새까만 어둠에 머물러 있는 저 이가 제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일 텐데.

‘…아름다워.’

제 의지가 아닌 말이 툭 튀어 나갔다. 웃음이 들렸다. 짙은 갈증을 느끼며 손을 뻗었지만 닿는 것은 없었다. 그의 형체는 손가락 사이로 그림자처럼 흩어지며 동시에 사방의 풍경 역시 뒤집혔다.

‘에리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가늘게 떨리며 그를 불렀다. 에리히라고.

‘에리히. 일어나.’

에르하르트는 이번에도 역시 상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눈이 뜨이지 않았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너는 누구일까. 대체 누구기에 그렇게 절박하게, 간절하게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 왜 그 부름에 내 마음이 사무치는지. 네 울음이 아니라, 웃음이 보고 싶은데.

‘제발…….’

간절하게 그를 바라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의 의식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것은 죽음과 가까운 감각이었다.

‘이 애를 살려주세요.’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을 때, 울기만 하던 그 애는 결연하게 말했다. 살려달라고. 그것은 마치 그 어떤 것이든, 설령 제 존재를 걸 수도 있다는 담담함이었다. 에르하르트는 그 애절한 간구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의식은 그의 통제를 잃고 가라앉았다.

‘괜찮으세요?’

부유하는 의식 속 쇳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운 눈을 겨우 떴을 때, 어두운 머리 색이 보였다. 옅은 노란빛의 눈동자도. 햇살을 등진 아득한 실루엣을 보면서 에르하르트는 누구의 이름을 무심코 속삭였던가.

“…하.”

에르하르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을 떴다.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파른 호흡을 고르게 가다듬는 데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평소의 흐름을 되찾았을 때에서야 에르하르트는 꿈을 생각했다. 3년 내내 추상적인 형태였던 꿈이 처음으로 선명한 모양새로 구현되었다. 그래 봐야 단편적이었고, 그마저도 의식이 선명해질수록 희미해졌다.

하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잊히지 않았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들으면서, 에르하르트는 분명 상대방이 서글퍼하지 않기를 바랐었다.

“대체, 이게 무슨…….”

꼭 엉망진창인 제 감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려고 애썼지만, 그 노력을 비웃는 것처럼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 꿈의 파편조차 붙드는 데 실패한 그는 짧게 욕을 짓씹으며 마른 얼굴을 성마르게 쓸어내렸다.

한참의 다스림 끝에 격랑 치는 마음이 고요해졌다. 에르하르트는 눈가를 누르던 손을 내렸다. 그제야 꿈의 잔상에 매몰되어 느끼지 못했던 찌뿌둥한 감각이 살아났다. 선황에게 미움받아 감금당하다시피 하던 시절은 물론, 제 생존을 감추기 위해 조심히 살던 시절에도 경험해 본 적 없던 짓을 한 탓이다.

에르하르트는 소파에 구겨져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영 무지근했다. 기지개도 켜보고, 몸을 길게 뻗어보기도 했지만 묵직한 느낌은 쉽사리 떨쳐지지 않았다.

“…….”

천천히 걸어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날이 저물면서 서늘해진 공기가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에르하르트는 발코니 아래 펼쳐진 정원을 바라봤다. 얼굴엔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평소였더라면 부스러기처럼 흩어진 기억의 잔해를, 너울 속에 가려진 상대방을 어떻게든 떠올리려고 했을 테지만, 금세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웠다.

가령, 라얀이었다.

그를 생각하니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에르하르트는 습관적으로 셔츠를 느슨히 풀려고 손을 올렸다가 이미 헐거워져 있는 목깃만 잡아 뜯어야 했다.

“폐하. 그렇게 서 계시기에는 밤공기가 아직 서늘합니다.”

조심히 다가온 위르겐이 망토를 내밀었다.

“시종장인지, 아니면 자객인지 모르겠군.”

문이 열리는 소리와 다가오는 기척까지 느꼈으면서도 싸늘하게 빈정거렸다. 위르겐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서 망토를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심지어 짐이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들어왔지.”

“정말로 제가 들어오는 게 내키지 않으셨더라면 진작 제 걸음을 막으셨을 테지요.”

되레 한마디, 한마디에 조심스레 덧붙인다. 그의 기분을 살피며 적당히 추임새를 넣는 솜씨는 꼭 레아를 닮았다. 그것을 알아보고 시종장으로 임명한 것이지만.

“…라얀은?”

신경질적으로 망토를 건네받은 에르하르트는 그것을 두르기에 앞서 라얀에 관한 것부터 물었다.

“달리 기척이 없는 것을 보니 여태 잠을 청하는 게 아니겠는지요.”

“잠이라.”

과연 그것을 잠이라 할 수 있나. 에르하르트의 입가에 비웃음이 머물렀다. 라얀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향한 조소에 가까웠다.

뼈만 남은 것처럼 마른 몸을 끝없이 탐했다. 꽃이 핀 것도 아닌데 라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잇자국이 꽃잎처럼 남았다. 에르하르트는 그를 발라먹을 것처럼 안았다.

라얀은 제 품에서 쥐어짜이다 못해 나중에는 제대로 된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그만하라는 말조차 전부 조각나서 귀를 기울여야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라얀은 그가 원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에르하르트를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았으며, 그 개자식을 잊어보려 노력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아르헨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 역시 없었다.

‘…엘.’

라얀은, 희미한 의식을 꺼트리면서도 그 이름을 불렀다.

잠결에라도 한 번 더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게 된다면 정말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서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침실에 둔 채 도망치듯이 집무실로 왔다.

“사람 하나 찾고 싶은데 가능할까.”

“특정해 주신다면 알아보겠나이다.”

“그자는…….”

막상 말을 하려고 하자 특정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라얀은 그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말한 적 없었다. 항상 그자가 어떤 자였는지,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만 재잘거렸다.

“…짐을 닮았다더군.”

“예?”

그나마 유일한 힌트는, 라얀이 에르하르트를 보자마자 ‘그’와 착각했다는 것뿐이다.

그것을 다시 상기시키자 기분이 더러웠다. 라얀이 자신을 잘 따른 것이, 잘 때면 종종 품에 꾸물거리며 기어들어 온 게 전부 그자와 닮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어지럽혔다.

“그, …찾아보겠습니다.”

차게 굳은 얼굴에 대고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하지 못한 위르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를 닮은 얼굴이라니. 세상에 두 명이나 존재할 리가 없었다.

“반드시 찾아라.”

찾으면 기필코 죽여버릴 것이다. 그토록 맹목적인 애정을 받으면서 대체 왜 곁에 있어주지 않는단 말인가. 어디로 사라져서 아득한 기다림과 간절한 그리움을 알게 했단 말인가.

난간을 부술 것처럼 두드리던 에르하르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라얀의 곁에 있으면, 그가 또 다른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들을 자신이 없어서 박차고 나왔는데 막상 생각나니 갈증이 났다. 난데없는 초조함이 치밀어 오른 탓이기도 했다.

사라졌을까 봐. 기실 말 같지도 않은 상상이었다.

응접실은 시종과 근위병이 지키고 있었고, 3층이라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설령 이런 장애물이 없더라도 라얀은 지금 뛰기는커녕, 오래 걷는 것도 힘겨울 것이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닿지 못할 곳에 가버릴까 봐. 다시는 손 닿지 않는 곳으로 숨을까 봐. 에르하르트의 눈을 피해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것은 기이하게도 익숙한 불안이었다. 무엇 하나 간절히 바란 적 없고, 기다려본 적 없는 자신이 무언가가 사라질까 초조해 본 경험이 있을 리 없었을 텐데도.

“…….”

망토를 도로 잡아끌어 내려서 위르겐에게 던지다시피 내어준 에르하르트는 그를 지나쳐 발코니를 나갔다. 이미 밤의 끝자락에 접어든 회랑은 새까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벽에 걸린 횃불만이 유일한 길잡이였다.

성큼성큼 걷는 뒤로 위르겐이 따랐다. 그의 보폭을 따라잡느라 거칠어진 숨소리가 고요한 회랑에 울려 퍼졌다. 에르하르트는 그의 거친 호흡이 잘 들리지 않았다. 응접실에 가까워질수록 쿵쿵거리는 제 심장 소리가 더 시끄러웠다.

계단을 올라 응접실에 가까워지자 곧은 자세로 서 있던 근위병이 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기 전 에르하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라얀이 그를 경멸 어린 표정으로 보지 않을까. 그런 우습지도 않은 두려움 때문에. 에르하르트는 겨우 망설임을 이기고 문을 열었다.

촛불 하나도 밝히지 않은 실내는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익숙하게 헤집으며 응접실을 지나 침실로 향하던 그는 옅은 두려움이 새겨져 있던 표정을 굳혔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언제 망설였냐는 듯이 거침없이 침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침대에는 누가 누워 있던 흔적만 구깃거리는 모양새로 남아 있을 뿐, 그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라얀.”

에르하르트는 이를 갈며 사라진 이의 이름을 짓씹었다.

“위르겐!”

찾는 소리에 응접실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위르겐이 곧장 들어왔다. 스치듯 주위를 살핀 그는 에르하르트가 왜 자신을 찾았는지 금세 알아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바깥을 지키는 근위병들은 혹시 눈이 멀었나?”

그게 아니면 이 방 안에 있어야 할 이가 왜 없느냐며 살벌하게 쏘아보면서 다그치자 위르겐 역시 당황한 낯으로 고개를 거듭해 조아렸다.

“그것이, 분명 나간 적이 없는데…….”

“변명은 필요 없다. 당장 찾아. 라얀을 찾지 못한다면 그 목숨으로도 죄를 다 묻지 못할 것이다.”

에르하르트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긋나긋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위르겐이라면 충분히 그 안에 녹아든 살기와 노여움을 헤아렸을 것이다. 실제로 위르겐은 솜털이 바짝 선 팔뚝을 괜히 문지르며 들어왔을 때보다도 더 재빠르게 나섰다. 그가 나선 자리를 노려보던 에르하르트는 곧장 마력을 일으켰다.

가만히 넋 놓은 채로 그들이 라얀을 찾기를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얼마나 걸릴 줄 알고. 믿지 못한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몸이 달았다. 에르하르트는 패밀리어를 불러냈다.

금빛 나비가 가벼운 날갯짓을 하며 허공을 유영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패밀리어에게 라얀의 행방을 찾으라 지시를 내리려던 에르하르트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욕실에서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침대 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에 당황해서 욕실은 생각지도 못했다. 돌아가. 에르하르트는 패밀리어를 도로 흩어냈다. 허공에서 포르르 날며 춤을 추던 패밀리어는 그가 마력을 끊어내자 형체를 잃고 바스러졌다.

에르하르트는 금빛 가루를 헤치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욕실의 문틈은 열려 있었다. 톡, 토옥. 가까워질수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라얀.”

에르하르트는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을 밀었다.

하려는 말은 많았다. 늘 그랬듯이 잠들었을 때 다 씻겨놓았는데 왜 욕실로 갔는지, 그리고 굳이 욕조에 몸을 담글 생각이었다면 바깥의 시종을 불러 물을 받아달라고 하지, 왜 굳이 네가 손수 수고를 들이고 있는지.

“…라얀?”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욕실에는 확실히 낯익은 이가 있었다. 물이 흘러넘치는 흰 욕조에는 마치 대비되듯 까만색의 긴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늘어져 있었고, 그 머리칼의 주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서 그가 잇자국을 남겨둔 상반신을 지나면 다리가,

“…….”

아니 저것을 다리라고 할 수 있을까. …청록색의 꼬리가 보였다. 힘없이 축 늘어진 꼬리는 청록색의 윤기 나는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이 상황을 금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시야 가득 채운 광경은 현실감이 없었다.

인어.

왜인지 아까 회의 중 나왔던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르헨에서 책이 해질 정도로 읽었던 내용 역시도.

인어. 고대의 존재. 광활한 바다의 지배자.

동시에 둔중한 두통이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것처럼 쿵쿵 때렸다. 송곳으로 후벼 파는 통증에 에르하르트는 머리를 감싸 쥐며 한쪽 무릎을 굽혔다.

“폐하. 여기에 계십니까?”

“들어오지 마라!”

고통을 삭이던 에르하르트는 자신을 찾는 위르겐의 목소리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갈했다.

위르겐이 욕실에 들어온다면 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다. 아니, 보이고 싶지 않았다.

“폐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위르겐은 고통을 삼키느라 갈라진 목소리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아니다. …그리고 라얀은 찾았으니 수색은 하지 않아도 좋다.”

“예?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물러나. 짐이 찾기 전까지는 들지 말라.”

에르하르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위르겐은 마지못해 물러났다. 탁.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에르하르트는 응접실에 가벼운 결계를 쳤다.

여전히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로 통증을 삭인 후에야 라얀에게 다가갔다.

“라얀. …그대?”

에르하르트가 다가갔는데도 라얀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제야 파르라니 질린 눈두덩이가 보였다. 창백한 피부나, 불규칙적으로 내쉬는 미약한 호흡도.

마음이 급해졌다.

라얀이 인간이든 아니든 그건 지금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다. 큰 수건으로 라얀의 몸을 둘러 욕조에 잠겨 있던 그를 안아 들었다.

미끄러질 것 같은 몸을 추슬러 품에 끌어안아 곧장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햇볕에 말려 바스락거리는 시트는 채 닦지 못한 물기에 젖어서 이내 눅눅해졌다.

물기가 마르자 반짝거리던 비늘이 급속도로 빛을 잃는다. 곧 아름다운 청록색의 꼬리지느러미는 반으로 갈라지면서 인간의 다리로 변했다. 그가 종종 사용하던 대규모 단위의 마법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에 시선을 빼앗길 법도 했지만 에르하르트의 시선은 오로지 라얀에게만 향해 있었다.

안색은 파리하고, 입술 색은 핏기를 잃었다. 누가 봐도 목욕하다가 깜빡 잠든 모양새가 아니었다. 오늘 봤을 때부터 별로 표정이 좋지 못했는데. 밀어내는 손의 힘도 평소보다 약했었다.

후회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라얀이 앓는 소리를 희미하게 흘린다. 이마에는 금세 식은땀이 맺혔다. 에르하르트는 그의 이마에 손을 얹다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열이 들끓었다.

“…르겐, 위르겐!”

에르하르트는 결계를 해제하면서 동시에 위르겐을 불렀다. 물러나라는 말에 바깥에 서 있던 위르겐은 다급한 부름에 바삐 들어왔다.

“당장, 의원을 불러라. 어서!”

제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 * *

늦은 밤이었다. 당직이라 황궁에 매여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단잠을 청할 만한 시간이었다. 달게 자고 있었을 의원은 아직 잠이 덜 깨서 퉁퉁 부은 눈으로 위르겐의 손에 이끌려 왔다. 그의 차림새는 썩 단정치 못해 핀잔을 줄 법도 했으나 에르하르트는 그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살펴라.”

에르하르트는 의원을 무작정 라얀의 옆에 끌어다 앉혔다.

“대체 뭐가 문제지?”

자다가 끌려 나온 의원은 죽을 맛이었다. 아직 환자의 상태도 살피기 전인데 황제는 매서운 낯으로 다그치기 바빴다. 지금 당장 답을 주지 않으면 목이라도 자를 형형함이었다.

“아까는 열이 나더니 지금은 또 몸이 차갑다.”

“소신이 살펴보겠습니다. 폐하.”

속내가 어떻든 초조해서 어찌할 바 모르는 황제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 차분히 어르고 달랜 의원은 의식을 잃은 이를 살폈다.

―이걸 정부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괜히 황제의 정부가 된 게 아니다.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은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살에 닿는 것조차 내심 의식하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환자였다. 그리고 제 뒤에는 무서운 낯으로 그를 노려보는 황제가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며 사내의 상태를 살폈다. 빼곡하게 새겨진 순흔에 한숨이 새어 나올 뻔도 했으나 겨우 참아낸 그는 뛰는 맥과 호흡을 살피고 몸을 살짝살짝 짚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때? 큰 병이냐? 불러도 뒤척거리지조차 않는다.”

“기력이 조금 미약하기는 하오나 그것 외에는 그리 문제 될 만한 게 없습니다. 달리 열이 펄펄 끓는 것도 아니고, 체온도 저만하면 정상의 범주입니다. 폐하.”

“치면 부러질 것처럼 야위었는데도 이게 심각한 게 아니라고?”

“그, …예. 아마도 지쳐서 그런 것이니 조금 쉬고 나면 금방 의식을 찾을 겁니다.”

에르하르트는 의원의 장담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명색이 황궁의다. 돌팔이는 아닐 것이나, 에르하르트는 그가 영 미덥지 못했다. 왜인지 라얀이 이대로 눈을 뜨지 않을 것만 같아서. 게다가 라얀은,

“…….”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인어는 인간과 신체 구조가 달라서 문제를 짚어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알았으니 나가 있어라.”

에르하르트는 그것을 털어놓는 대신 의원은 물론 위르겐까지 전부 내보냈다. 이윽고 침실에는 둘만 남았다. 에르하르트는 새파란 핏줄이 돋은 눈두덩이에 시선을 두었다.

“인간이 아니라고.”

내가 인간이 아니면 어떨 것 같으냐면서 묻던 목소리와 표정이 생각났다. 그때는 마냥 장난이거나 떠보는 줄 알았는데.

“아니어도, …나쁘지는 않았다.”

다른 종족이면 어떤가. 문제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르헨에서 있었던 일이 정말로 인어의 짓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그것은 라얀이 한 짓도 아니었고, 연좌를 물어 그에게 어떤 굴레를 뒤집어씌울 생각 역시 없었다.

에르하르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러니까 일어나. 라얀.”

그가 눈을 뜨는 것.

눈을 떠서 반짝거리는 초록색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 일단 그러면 이 숨 막힐 것만 같은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 같아서.

에르하르트는 늘어져 있는 손을 꽉 잡았다.

손을 쥐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배시시 웃으며 마주 잡아주던 손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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