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의 난파 3권-14화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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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닿은 입술의 온기가 따뜻했으며, 한편으로는 익숙했다.

라얀은 이 상황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지난 며칠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리엘을 만나러 왔을 뿐이다.

‘혹시 요정이야? 아니면 물의 정령님이야?’

며칠 전, 마리엘과 마주친 날이었다. 그 애는 요정이냐고, 아니면 물의 정령이냐고, 왜 호수에 있는 거냐고, 거기 엄청나게 깊은데 언제부터 있던 거였느냐고, 혹시 내가 우는 것도 봤느냐고 대답할 틈도 없이 거듭해 질문을 쏟아냈다.

이제 그리움에 젖었던 기색은 씻은 듯이 지워낸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끝내는 도망가려고 하자 마리엘은 당장에라도 뛰어들 기세로 석교 난간에 바짝 붙었다. 그를 붙잡기 위해서 정말로 뛰어내린 인간을 하나 알고 있던 라얀은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저기, …아까 그 사람이 오고 있어.’

라얀은 결국 마리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가까워지던 인기척을 일러주었고 아이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손으로 난간을 톡톡 두드리던 아이는 손을 내밀었다.

‘약속해. 내일 이 시간에 오겠다고.’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게 꼭 예전 에리히와 같았다. 아. 그때 에리히가 말하던 마리가 저 아이였을까. 그것은 알고 보니 정말 어린 아이들이나 할 법한 것이었지만, 매정하게 굴고 싶지가 않았다. 저 애를 볼수록 에리히가 떠올라서.

손가락을 엮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기에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내민 라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저녁마다 그 애와 만나고 있었다.

‘마리엘. 나는 사람이야. 봐봐.’

손가락 사이에 갈퀴도 없고, 두 다리도 있고, 또 귀도 인간들처럼 동그랗지 않으냐고 은근히 피력했으나, 마리엘은 한사코 요정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먼저 백기를 흔든 건 자신이었다. 라얀은 체념하며 아이가 착각에 빠져 있게 둘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요정 정도로 생각하는 마리엘이 궁중 예법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그나마 좋았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러려니 두었다. 이곳에 온 뒤로 자로 잰 것처럼 어떤 틀 안에 자신을 맞춰야만 하는 게 갑갑했던 라얀은 마리엘과 함께하며 자유를 누렸다.

여전히 인간을 좋아하는 인어와 아직 동심을 간직한 어린 인간은 친구가 되기에 썩 괜찮은 조합이었다. 또한 라얀은 이 애로부터 종종 과거의 에리히를 들여다보곤 했다.

오늘은 에리히가 무얼 하고 지내느냐고 살짝 떠볼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당사자가 왔다. 그리고 입을 맞추기까지.

“…….”

라얀은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 무심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큰 손이 목덜미를 붙잡아 바짝 끌어당겼다. 옭매는 손은 라얀의 거부를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에리히의 입맞춤은 그때만큼 다정하지 않았다. 조금은 갈급했고, 그보다는 난폭하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그러나 이 입술은, 이 온기는, 닿는 몸은 전부 다 에리히였다.

기억을 잃고야 만 제 연인. 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라얀은 순간 긴장하여 경직되었던 몸을 완만히 하며 에리히에게 기대었다.

라얀에게서 거부의 몸짓이 없자 꽉 움켜쥔 악력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천천히 호흡이 얽혔다. 에리히는 자신이 머금은 숨을 낱낱이 앗아갈 것처럼 탐하며 입술을 빨았다.

입을 맞추는 행위가 원래 이렇게도 격렬하고, 깊으며, 농밀했던가. 단지 입술만 대는 행위가 아니었나. 라얀은 와중에도 의문을 느껴야만 했다.

머리칼을 쥐는 손길은 아까보다 섬세해졌지만 입맞춤은 점점 깊어졌다. 닿은 옷깃이 바스락거리며 소리를 냈다. 라얀은 에리히에게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었다. 이미 닿아 있음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공에 떠 있던 손이 에리히의 옷자락을 살그머니 잡았다. 그것이 기폭제라도 된 것처럼 에리히는 입술을 가르고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입 안의 여린 점막을 간지럽히며 그의 손이 옷을 들치고 들어왔다.

“…흐.”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란 몸이 튀었다. 얽히던 호흡이 순간적으로 불안정해졌다. 라얀은 모자란 숨을 채우려는 듯 헐떡거렸다.

“…….”

헐떡거리는 숨소리에 눈을 뜬 에리히는 라얀을 밀쳤다. 그는 몸을 일으켜 거리를 벌렸다. 커진 눈동자가 적잖이 당황스러워 보였다. 라얀은 에리히가 입술을 문지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기서 대체 무얼 하는 거지?”

라얀이 숨을 다 고르기도 전에, 이미 호흡을 정리한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내려다봤다. 바다보다도 새파란 눈은 조금 전 일렁거림을 완전히 가라앉혔다. 목소리 역시 방금의 열기를 잊은 것처럼 쌀쌀맞았다.

“마리엘을 꾀어낸 게 혹시 너였나?”

“…….”

“황제의 하나뿐인 동생에게 환심이라도 사면 네 궁 생활에 무슨 득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기억이 없는 에리히는 못되게 말하는 솜씨가 썩 좋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다 그가 당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굴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흔적들이 그를 증명해 주었으니. 그와 별개로 마음이 콕콕 아픈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폐하.”

겨우 통증을 삼켜낸 라얀은 며칠 동안 배운 예법을 새기며 그를 불렀다.

에리히는 조금 전까지 가시를 세운 게 무색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무언가 거슬려 보였지만 그 감정의 변화를 짚어낼 만한 단서가 부족했다.

“…됐고, 왜 네가 여기에 있지?”

“그러니까, 그냥 우연히 들어왔사옵니다.”

“대체 그 이상한 경어는 어디서, 분명 배움이 빠르다고… 아니, 됐다. 그보다 르네궁에 우연히? 이곳에? 오브에서 여기까지가 우연히 올 만한 거리는 아닐 텐데. 그것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말이지.”

조금 멀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물의 내음을 감지해 왔고, 그 후로는 길을 익혀서 왔다. 기척이 느껴지면 피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여느 인간보다 청력이 높은 편이니까. 그리고 이 어떤 것도 에리히에게는 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자칫 자객으로 몰렸을지도 모른단 소리다. 그랬으면……!”

에리히는 화를 내고 있었다. 아까와 같이 이번에도 역시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걱정이라기엔 그의 감정은 거칠고 난폭했다. 그리고 기억을 잃은 에리히가 자신을 걱정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왜.”

다만 라얀 또한 어떤 의문이 치밀어 올랐다.

“왜 나한테 입맞춤을 했어, 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러니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분명히 인간은 사랑하는 이에게만 입을 맞추는 거라고 했으면서.

“…….”

라얀의 질문에 에리히는 가만히 침묵했다.

하지만 투명하리만치 푸른 눈은 흔들렸다.

실제로 에르하르트는 지금 이 상황과 행동이 혼란스러웠다. 왜 자신은 이자 앞에서만 이성을 잃는 걸까. 무언가를 인내하며, 자제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얻기 위한 삶이 그랬으므로. 한데 라얀을 앞에 두고는 ‘이성’은 고작 낱말 따위에 지나지 않았다.

너절해졌으며, 무의미해졌다.

“왜. 하면 안 되는 거였나?”

“…입을 맞추는 건 사랑하는 사이여야 한댔으니까.”

누가, 엘이라는 그자가? 절로 비집고 나오려는 말을 안간힘을 써서 눌렀다. 그것을 증명하듯 에르하르트는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줘야만 했다.

“개소리군. 키스는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행위지. 아니면 너는 네 주인을 사랑하기라도 했나?”

시선이 발목의 낙인에 가지 않도록, 에르하르트는 부러 오연해 보일 정도로 고개를 더 치켜들었다. 어차피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을 테지만 그것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연한 녹빛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발치로 내려앉는 듯 아뜩해졌으나 에르하르트는 그것이 단순히 불면 때문에 생긴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얼른 이자를 제 시야에서 치워야겠다는 생각도.

자꾸만 어떤 충동이 이자를 볼 때마다 부추겨졌다.

“이후 마리엘과의 만남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곳으로 보내야만 했다.

“르네궁에 오는 일도, 역시나 없어야 하겠지.”

이 정도면 에르하르트치고는 정중한 경고였다. 그래도 생전 올리비아가 머무르던 궁이었으니 최소한의 관리를 위해 관리인은 있으나 거기까지였다. 만약 다른 이가 관리의 목적이 아닌 이유로 르네궁에 들락거렸다면 엄히 처벌했을 것이다.

마리엘조차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 애는 이후 다시 한동안 이곳에 출입하지 못할 것이다. 또 한참 심통을 부리고, 언젠간 다시 그의 눈을 피해 들락거리겠지만 그것은 어쨌든 나중의 일이었다.

“돌아가.”

에르하르트는 오브의 좌표를 계산하며 라얀의 발아래에 마법진을 그렸다. 이 역시 남들에겐 베풀지 않을 배려였으나, 그는 제게 어울리지 않는 관용을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라얀의 몸이 빛의 가루에 삼켜졌다.

눈을 깜빡이고 나면 저 몸은 오브 앞에 서 있을 것이다.

“…….”

에르하르트는 사라진 자취를 잠깐 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거듭되는 거부는 마음에 자잘한 생채기를 남겼다. 쏟아진 못된 말이 그를 할퀴어서. 라얀은 아팠다. 어쩌면 그것을 행한 자가 에리히였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그의 마음에 이만한 흔적을 남길 수는 없을 테니.

그래서 라얀은 과거를 곱씹었다. 가장 찬란했던 기억을 복기하여 현재에 덮어씌우는 것은 자신 나름의 방어 수단이었다. 이렇게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버틸 만해졌다. 덕분에 라얀은 며칠이 지난 뒤에는 어느 정도 괜찮아져 있었다.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을 구경할 수 있을 만큼.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저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손바닥에 닿아서 스러지는 하얗고 차가운 결정은 아르헨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창턱에 하얗게 쌓여 있는 것을 가리키며 저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필립은 황당한 얼굴로 어떻게 눈도 모르느냐고 물었다. 남부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 거냐고.

적어도 자신이 아는 한에서 본 적 없으므로 라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 눈. 다만 처음 듣는 단어만 곱씹었을 뿐이다.

“…네 덕분에 또 새로운 걸 알았네. 엘.”

낮의 세계도, 태양도, 인간들의 음식도, 반딧불이도, 사랑까지도. 그 외의 모든 것을 네 덕분에 알았고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전히 바깥에는 내가 모르는 게 많아. 그리고 너는, 내게 늘 알려주는 유일의 인간이지.

그게 무엇이든.

라얀은 손에 닿는 것을 만졌다. 쌓여 있는 모양은 폭신해 보이는데 막상 만져보면 살이 에일 만큼 차가웠다. 추워서 발개진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그런데도 라얀은 그것을 계속 콕콕 누르고, 다시 손끝을 움츠렸다가, 또 콕콕 눌러가며 이름을 썼다. 예전에 에리히가 알려주었던 그의 이름과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똑똑.

라얀은 노크 소리에 눈에 적은 이름을 지워내며 뒤돌아보았다. 곧 문이 열리고 필립이 들어왔다. 그는 라얀의 얼굴을 보고 잠깐 움찔거렸다. 얼마 전부터 이랬다. 그러니까 라얀이 에리히로 인해 오브의 회랑 한가운데로 보내진 이후로.

‘누, 누구십니까. 무슨 일로 이 밤에 오브에. …혹시?’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가 그 상태로 필립과 마주했다. 처음에는 몰라보며 어리숙하게 굴던 필립은 뒤늦게 라얀이 걸친 로브에 시선을 주고는 어렴풋이 감을 잡은 듯했다. 그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고, 그 후로 내내 이랬다. 로브를 쓰고 다니는 게 좋겠다며 퉁명스럽게 내뱉는 목덜미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깟 눈 뭐가 그렇게 신기하다고.”

“…….”

“물론 이 시기에 눈이 내리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제르바에 있다 보면 겨울마다 지겹게 볼 광경이야. 왜 그리도 자주 내리는지. 눈 치우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알면 썩 반갑지도 않을걸.”

투덜투덜하는 필립을 보며 라얀은 희미하게 웃다가 답했다.

“그런가요.”

이 시기에 내리는 건 드문 일이라니. 이런 걸 보면 운이 아주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마지막이 오기 전 한 번이라도 보게 되었고, 무엇인지 알았으니.

“흠흠!”

라얀의 웃음에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하던 필립은 다시 곁눈질을 한다.

쟤는 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지. 필립은 음침해 보인다면서 뒤집어쓴 로브 좀 어떻게 해보라며 은근히 구박하던 옛날은 깨끗하게 잊은 것처럼, 라얀이 맨얼굴을 드러내는 걸 내심 원망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꼭 빛 한 점 없는 고요한 밤을 흡수한 것처럼 새까만데도 오히려 피부를 더 희어 보이게 했다. 깜빡거릴 때마다 속눈썹이 나붓하게 흔들렸고, 그 안에 가둬진 색소가 옅은 녹색의 눈동자는 마주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궁정에는 아름답고 세련된 자들이 수두룩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황제가 존재했다. 유명한 문장가조차 황제의 외양을 묘사하는 것을 꺼렸다. 한낱 문장 따위에 어찌 황제를 가둘 수 있겠느냐면서. 어떤 미사여구조차 황제의 앞에서는 너절한 쓰레기가 될 뿐이라고.

필립은 먼발치에서 찰나에 황제를 본 적 있고 그에 긍정했다. 황제는 감히 어떤 단어로도 한정 지을 수 없었고, 그랬기에 필립은 그만한 인물은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 장담했다.

고작 1년도 가지 못한 장담이었다.

“필립?”

라얀이 조심스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또 넋을 빼놓고 있었음을 깨달은 필립은 심호흡을 길게 하며 라얀에게서 시선을 물렸다. 동시에 여기까지 온 목적을 상기했다.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 바렌 공자가…….”

필립은 잠시 말을 그쳤다.

바렌 가의 후계는 그제부터 사교계에 등장한 태풍의 눈이었다. 황제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다. 카렐 아이작 이후로 어떤 스캔들도 없던 황제가 새 인물을 가까이하는 것에 사교계는 지금 바렌에게 촉각을 곤두세웠다.

카렐 아이작의 부재를 틈타 황제의 애인이 바뀌는 것은 아닌지. 진득하니 기약 없을 줄 알았던 애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였다면 결국은 언젠가는 바렌의 후계를 지나 제게도 기회가 오지 않겠냐는 등. 갖은 말이 분분했다.

“하여튼, 네 노래를 청하는 분이 계시니 다녀오면 된다.”

사교계의 사정을 굳이 라얀에게 말할 필요 있나. 어차피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궁정의 악사답게 노래를 불러 그를 만족시키는 것.

바렌의 후계는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어제부터 귀빈궁에 머물렀고, 온갖 것을 요구했다. 시중으로도 모자라 악사까지 부르는 것이다.

안하무인처럼 구는 바렌의 후계에 대한 소문은 이미 궁내에 퍼져 있었다. 그의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궁중의 악사들은 전부 그의 부름을 꺼리며 다른 이에게 넌지시 넘겼다. 하여 그동안 잊고 있던 라얀에게까지 흘러들어 온 것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물론 바렌의 후계자가 다소, 소문이 좋은 편은 아니긴 했지만.

“공자께서는 성미가 급하시니, 바로 준비해라.”

그, 로브는 꼭 쓰도록 하고. 필립은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중얼거리며 얼른 방 밖으로 나갔다. 라얀의 대답은 들을 겨를조차 없었다.

필립을 따라서 오브를 나섰다.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숨죽여 걸을 때와는 풍경이 퍽 다르게 느껴졌다. 나뭇가지에는 눈이 소복이 내려앉았고, 시야에 닿은 모든 것이 눈부시도록 새하얬다. 라얀은 밟을 때마다 제 발자국이 남는 것을 보며 조금 더 세게 눌러 밟기도 했고, 뽀얀 입김을 호호― 흩트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걸음을 재촉하며 구박하던 필립은 나중에 가서는 체념했는지 라얀이 무얼 하든 그냥 내버려두었다. 덕분에 그들의 걸음은 지체되어 귀빈궁의 문턱에 다다를 때는 일러주었던 시간보다는 늦은 뒤였다.

“늦었잖나!”

라얀이 오자마자 날카로운 음성이 그를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석양처럼 붉은 머리 청년의 신경질에 필립은 얼른 눈치를 보며 굽실거렸다. 라얀에게도 얼른 자신을 따라 하라는 듯이 팔꿈치로 툭 쳤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지만 곁눈질로 필립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자세가 엉거주춤했다.

“한데 저것은 뭐기에 내 앞에서도 로브도 벗지 않는 거냐.”

“이번에 입궁한 악사입니다.”

“이리아도 아니고 막 들어온 걸 내 앞에 데려다 놓는다고?”

덧붙인 필립의 설명에 청년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험악해졌다.

“그것도 나, 마르첼 바렌 앞에 말이지.”

“이 아이의 실력이 뛰어나니 들어보시면 흡족해하실 겁니다.”

필립은 계속 청년에게 맞춰주었다. 하지만 그는 만족스럽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철썩. 날카롭게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라얀이 옆을 돌아보자 필립의 얼굴이 반쯤 돌아가 있었다.

“건방지게 내 말에 일일이 토를 다는 건가, 지금?”

마르첼 바렌은 분을 이기지 못한 듯 목소리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또 한 번 손을 올렸다. 필립의 얼굴이 다시 반대쪽으로 힘없이 돌아갔다.

“고작해야 오브에 있는 시종 따위가? 내가 누구인지 정녕 몰라 그러는 건 아니겠지? 바렌의 후계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영광스러운 별칭이 내 이름 앞을 빛내겠지.”

씩씩거리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라얀의 시선은 내내 필립에게 향해 있었다. 연달아 두 번이나 얻어맞은 그의 뺨은 붉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한마디 하지 못하고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건네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라얀은 대체 필립이 왜 사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한 말 중 잘못된 게 있는가. 라얀은 여전히 인간들에 대해 모르는 게 많지만, 적어도 지금 필립이 잘못한 게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 …그리고 넌 계속 로브를 쓰고 있을 거냐? 건방지게?”

사과하는 필립을 노려보다가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자신에게 화살을 돌렸다. 라얀은 여전히 그를 보는 대신 필립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부당하다.

필립은 대체로 라얀에게 퉁명스러웠으나 그것은 아주 처음 며칠만이었고 다정한 편이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그런 상식을 어떻게 모르느냐고 하면서도 잘 알려주었다.

특히 요 며칠은 자신이 힘 하나 없이 시무룩한 게 보이자 평소처럼 뭐라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쉬라고 등을 떠밀기까지 했다.

라얀은 필립이 나름대로 좋았다. 그냥. 적어도 그에게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고, 세세히 살펴보면 결국 그의 감정은 호의였으므로. 그리고 그것은 마리엘을 제외한다면 자신이 이 낯선 곳에 온 이후로 첫 호의였다.

“벗어.”

자꾸만 로브를 벗겨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싶어 하는 그를 보다가 라얀은 간결하게 대꾸했다.

“싫어.”

라얀이 거절의 의사를 보이자 옆에서 숨죽이고 있던 필립이 헉, 하고 작게 소리를 내질렀다. 라얀. 제발. 필립은 속삭였다. 혹시라도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우려하듯이.

실제로 필립은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오죽하면 따갑게 부풀어 오르는 뺨에서 아무런 통증조차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 라얀에게 바렌 공자에 대해 당부를 해둘 걸 그랬다고 후회하면서도 설마 저럴 줄을 알았나 싶기도 했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눈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기에 제 몸 사릴 줄은 알았다.

고작해야 평민 따위가 귀족에게 대서다니.

그가 아무리 황제가 데리고 왔고, 카렐 아이작이 후견인이라고 해도 결국 신분은 평민에 불과했다. 바렌의 후계자가 죄를 묻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물을 수 있었다, 궁정에 속한 이이니 아무리 귀족이래도 죽일 수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말도 못 할 고초는 겪으리라.

“죄송합니다, 공자님. 이 아이가 아직 입궁한 지 얼마 안 돼 궁중 예법에 미숙합니다.”

필립은 얼른 정신 차리며 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붉으락푸르락해지는 바렌의 후계 얼굴을 보건대 이미 글렀다. 필립에게는 저자의 분노를 잠재울 힘은 없었다.

“미숙하다면 익숙하게 만들어줘야지 않겠나.”

마르첼은 씩씩거리면서 허리춤에 매달았던 마편을 꺼냈다. 이것은 스치기만 하면 옷은커녕 살갗까지 찢어버릴 것이다.

요즘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이만큼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황제가 별안간 그에게 관심을 두었고 그것은 마르첼을 기고만장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황제의 총애로 카렐 아이작이 움켜쥐고 있는 게 대체 몇 개인가. 고작해야 몰락 귀족 따위가, 그렇다고 얼굴이 대단히 잘난 것도 아닌 게 황제의 연인이라는 이유로 자작의 작위를 받고 비옥한 영지까지 하사받았다.

혈육의 피를 불사해 가며 즉위한 지 얼마 안 돼 가문 하나를 역사에서 지워버린 황제는 두려운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매혹적인 권력자였다. 그의 총애를 얻는다는 것은, 결국 그 권력의 한 축이나마 이름을 새긴다는 것이니.

‘잠시 궁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폐하?’

조심스레 당분간 궁에 머무르고 싶다는 청에 황제가 마음대로 하라며 귀빈궁을 내어주었을 때는 카렐 아이작을 완전히 밀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까지 엿보여 환희에 휩싸였다. 그런데 이깟 것들이 감히 제 기분을 추락시킨 것이다.

궁내 최고의 음유시인이 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언짢은데, 그녀를 대신해 온 것이 이제 막 궁에 들어왔다는 음유시인이라니. 그것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건방지기까지 했다.

“그래. 궁정의 악사이니 노래라도 불러봐라.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내가 깊은 감명을 받아 네 처벌을 면해줄지도.”

“…….”

“싫다는 소리는 잘만 하더니. 그새 말 못 하는 병신이라도 된 건가?”

마르첼은 마편으로 라얀의 가슴을 쿡쿡 밀었다. 라얀은 미는 힘에 한 걸음, 두 걸음 밀려나는 한편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악의에 가득 찬 인간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아까는 충동이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저런 인간에게 제 노래를 들려줄 생각은 없었다.

“고, 공자님. 이자의 후견인은 아이작 자작님이십니다.”

정말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는지 필립은 카렐의 이름을 댔다.

“카렐 아이작 자작의 피후견인 게 뭐?”

“그, 그것이…….”

“그게 내가 이것을 건드리지 못할 이유라도 되나?”

그리고 오히려 그것은 상대방을 자극하는 게 되었다. 쿡쿡 찌르며 살살 자극하던 마르첼은 라얀의 몸을 세게 밀쳤다. 필립에게 잠시 신경이 쏠렸던 라얀은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일어나려고 하자 마르첼이 발로 라얀을 밟아 억압했다.

“또한, 그자는 폐하께서 친히 궁정의 악사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자비를 베푸십시오.”

카렐의 이름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던 마르첼이 이번에는 반응을 보였다. 라얀을 밟는 힘이 조금이지만 덜해졌다.

“…폐하께서?”

이걸? 마르첼은 라얀을 내려다봤다. 불신과 의혹의 눈길이었다. 한참 라얀을 노려보던 그는 허리를 굽혔다. 마치 로브를 억지로 벗기기라도 할 양 손을 뻗었다. 어떻게 해서든 라얀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집착이었다. 라얀이 미처 고개를 돌려 저항하기 전 그의 손이 로브에 닿아 후드가 뒤로 넘어갔다.

“그만.”

여미고 있던 얼굴이 드러남과 동시에 영원히 녹지 않을 빙설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라얀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손을 보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에리히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의 몸에 둘린 황금빛이 넘실거렸다.

“이따위 건방을 떨라고 귀빈궁을 내어준 건 아니었는데.”

“크흡!”

에리히가 손을 까딱거리자 마르첼은 신음을 토해내며 뒤로 넘어갔다. 에리히는 한 발, 한 발 다가와서 마르첼의 앞에 섰다. 마르첼은 작게 떨면서 제 앞에 늘어진 그림자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그는 라얀에게 했던 것처럼 발로 미르첼의 위축된 몸을 밟아 짓눌렀다.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고통 어린 신음 소리도.

“바렌. 짐이 네게 허락한 건 귀빈궁에서의 숙식뿐이었다.”

“으윽. …폐, 폐하.”

“그렇지?”

“잘못, 잘못했습니다.”

“짐이 지금 네게 듣고자 하는 게 그따위 말이라고 생각해서 지껄이는 것은 아니겠지?”

조곤조곤 되묻는 어투는 고요했지만 저변에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그 서늘한 분노가 라얀에게 향하는 것도 아닌데 머릿속까지 쭈뼛거릴 만큼. 라얀이 위축되어 무심코 뒤로 물러나자 푸른 눈길이 닿았다.

“위르겐.”

라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는 누군가를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그제야 에리히만 있던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에리히의 뒤로는 그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데려가.”

데려가라는 게 누구인지, 어디인지 일러주지 않았으나 위르겐은 라얀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리로.”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라얀을 정중하게 에스코트했다. 라얀은 에리히에게 고개를 기울였으나 그의 눈길은 이미 다른 쪽으로 향한 지 오래였다.

“어서요.”

위르겐은 하염없이 에리히만 올려다보는 라얀을 은근히 재촉했다. 라얀은 결국 그를 이기지 못해 따라 나갈 수밖에 없었다.

라얀은 여기 온 뒤로 머물렀던 곳보다 몇 배는 더 큰 침실을 서성거렸다. 그나마 아는 얼굴인 필립도 없고, 그를 여기 데려온 위르겐이라는 남자도 잠시 기다리라면서 라얀을 이곳에 두고는 나갔다. 바깥으로 바짝 귀를 기울여봤지만 특별히 건질 만한 정보는 없었다.

왜 이리로 데려온 거지.

아니, 에리히는 대체 왜 거기에 온 걸까. 재회한 이후로 에리히는 꼭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도와주었다. 이내 못된 말로 가슴을 후벼 파서 그렇지.

에리히의 속은 알 듯, 알 수가 없었다.

라얀은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와 동시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꼭 내가 오고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고 있군.”

에리히는 툭 내뱉었다. 아까는 경황없어서 맡지 못했던 옅은 술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그것은 달콤한 듯 강렬했다. 에리히는 라얀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라얀은 물러날 것 없는데도 그의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아래 넘실거리는 감정에 압사되듯 뒤로 물러났다.

“아!”

다리가 무언가에 걸리며 뒤로 넘어갔다. 등에 닿는 것이 푹신했다. 라얀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곧 다가온 에리히에게 가둬졌다.

“너는 왜 보이지 않을 때마다 위태로운 걸까.”

에리히는 라얀의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밀어 넣고 양손을 뻗어 가둔 채 사납게 짓씹었다.

“거슬리게.”

“에, …그러니까, 폐하.”

“또, 그 새끼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

당황해서 꺼내려다가 삼킨 게 자신의 이름인 줄도 모르고 잘도 ‘그 새끼’라고 한다. 라얀은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며 에리히와 시선을 맞췄다.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오로지 들리는 것이라곤 허공에 얽히는 옅은 숨소리뿐이었다.

그뿐인데도 떠도는 공기에는 묘한 열기가 머무르기 시작했다.

“…아.”

먼저 움직인 것은 에리히였다. 그는 고개를 살짝 틀며 숙였다. 입술에 까슬한 온기가 닿았다. 따끔거리는 통증도. 입을 벌리자 침입자는 점막을 섬세하게 문질렀다가 떨어졌다.

“키스는…….”

떨어진 입술 사이에는 종잇장 하나 겨우 들어갈 만큼의 좁은 틈밖에 없었다. 라얀이 뱉어내는 말의 호흡이 저 자신에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라고?”

에리히는 겨우 내뱉은 말을 가로챘다. 그의 더운 숨이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에리히는 다시 한번 제 입술을 찍어 눌렀다가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랑 하는 법을 배우는 게 어때.”

배우기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중얼거린 에리히는 라얀의 반문을 틀어막을 것처럼 다시 입을 맞추며 점막을 헤집었다. 아까의 가벼운 키스는 어린애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깊고, 집요했다. 격렬하기까지 한 키스는 라얀의 숨을 샅샅이 앗아가고 정신을 녹진하게 만들었다.

라얀은 숨을 헐떡거렸다.

“뭐, 곧 익숙해지겠지.”

“…….”

“그게 무엇이든 간에.”

지탱하고 있던 에리히의 큰 손이 라얀의 몸을 헤집었다. 곧 침대 아래로 그들이 걸치고 있던 것들이 허물처럼 쌓였다.

* * *

에르하르트는 좀처럼 통제되지 않는 마음이나 닳아 없어지는 인내 따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이름의 스펠링조차 기억에 희미한 바렌의 후계에게 관대를 베푸는 충동을 행한 것은.

그는 일부러 라얀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을 만한 붉은 머리의 청년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마르첼 바렌이 바렌 백작의 후계라는 것은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고, 성격이 꽤 괴팍하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제 앞에서만큼은 순종적으로 굴었으므로.

에르하르트가 카렐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사적으로 가까이 두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사교계에서 이를 주목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일시적으로나마 황성의 체류를 허락하자 황제의 연인이 카렐 아이작에서 마르첼 바렌으로 바뀐 게 분명하다는 헛소문까지도 나돌았다.

여하간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 느끼는 비이상적인 감정을 지우려고 했다. 이 충동과 알 수 없는 집착이 깨끗하게 눌러지거든 그때 그에게서 ‘엘’이라는 자에 대해서, 또 그자가 자신이 만든 팔찌를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 알아내리라.

그렇게 잃은 기억의 파편을 메꾸거나, 메꿔야 할 기억이 썩 가치 없는 것이라면 전부 과거 속에 두고 뒤돌아설 것이다.

또한, 모든 게 해소되고 나면 라얀을 제 일상의 바깥으로 몰아내 버릴 생각이었다. 에르하르트의 일상이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 어떤 불안정함 속에 놓여 있더라도. 이 이상 그는 특정한 누군가에게 흔들릴 생각이 없었다.

‘바렌 공자께서 악사를 청하시어 폐하께서 아르헨에서 데리고 온 악사가 조금 전 귀빈궁으로 갔다고 합니다.’

분명 그랬는데 시종장 위르겐이 고하는 말에 정신 차렸을 때, 그는 이미 귀빈궁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상황에 이르렀다.

“하아…….”

눈이 내리는 탓인지 벽난로의 장작이 온종일 불에 살라져도 서늘하기만 했던 침실 안은 진득한 열기가 머물렀다. 물기 어린 호흡이 고요한 정적을 채웠다.

바깥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중간중간 식사 때가 되었는지 바깥에서 몇 번쯤 시종이 문을 두드리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며 라얀의 몸을 탐했다. 아니, 돌이켜보면 정말로 듣지 못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내내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얼마 안 가서는 에르하르트를 찾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 재촉도 들려오지 않는 공간 속에서 에르하르트는 제 이성을 잡아채 뒤흔드는 것을 잡아먹듯이 탐닉했다. 그간 어떤 누구에게도 욕망이 느껴지지 않기에 스스로의 성향이 담백하다고 짐작했던 게 우습게도 그는 라얀이 뱉어내는 조그마한 숨소리에도 반응하며, 그 작은 호흡마저 잡아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사춘기를 막 지난 소년조차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제가 되지 않는 것에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에르하르트는 멈출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자신을 다스리려고 한 게 무색했다. 에르하르트의 생에 이토록 파괴적인 충동과 욕망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나중에는 왜 자신이 참으려 했는지조차 희미해졌다.

원래 누군가와 결합을 하는 것은, 살을 맞대고 몸을 겹치는 일이 이토록 머리 한쪽을 타들어가게 하는 것이었던가.

자유롭고 관대한 풍토의 궁정에는 난잡한 스캔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웬 귀부인이 기사와 밀회를 즐기다가 들켰다는 것은 개중 가장 가벼운 소문이었다.

에르하르트는 그런 스캔들에 엮인 적은 없지만, 시종들의 눈과 귀를 통해 알고 있는 것은 많았다. 이성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듯한 야만적인 행태를 한심스럽게 여기며 비웃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자신이 그들을 비웃었던 과거가 당황스러울 지경으로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

“…….”

에르하르트는 제 아래에 흐트러져 있는 라얀을 내려다봤다.

하얀 침구에 흘러내린 새까만 머리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나비의 날갯짓보다도 연약한 눈꺼풀은 감긴 채로도 파르르 떨렸다. 눈가는 발긋했다. 하지만 쓸어보면 물기는 묻어나지 않았다.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에 에르하르트의 흔적이 빼곡하게 남겨지는 내내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축축하고, 눈매는 쾌락으로 일그러졌지만 눈동자에 일렁이는 물기는 끝내 흘러내리지 않았다. 흘릴 것 같으면 눈을 감아 그것을 털어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더욱 집요하게 굴었는데도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꼭 울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눈가를 가만가만 문질렀다.

이미 발긋해져 있던 눈가는 문지르는 자극에 조금 더 발개졌다.

우습게도, 또다시 아래에서 반응이 왔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상대방에게서 그만하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또 탐닉하고 탐닉했는데도 에르하르트는 여전히 해갈되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할까.

거의 혼절하다시피 한 라얀이 들으면 사색이 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가는데, 그때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위르겐의 목소리였다. 라얀을 흘끔 보던 에르하르트는 그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운을 걸치며 위르겐을 안으로 부르는 대신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은 안과 달리 서늘했다. 위르겐은 설마 황제가 직접 나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능숙하게 수습했다.

“무슨 일이냐.”

“바렌 공자가.”

“쉿.”

에르하르트는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이 눈가를 찡그렸다. 위르겐은 영문 모를 얼굴을 하다가 침실 안을 흘끔거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바렌 공자가 쓰러졌다고 합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여쭈러 왔습니다.”

“대체 얼마나 허약한 거지.”

위르겐은 할 말이 많았으나 참았다. 곧 봄이라지만, 날이 부쩍 추워지더니 어제부터 전에 없던 눈이 내리는 중이었다. 이런 날, 기사 서임을 받지도 않은 바렌 가의 후계자가 바깥에서 수 시간 내내 눈을 맞으며 서 있었는데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모멸감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하는 척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대로 두면 동사할 겁니다.”

어쨌든 진짜로 쓰러진 것인데 방치하면 어쩌면 궁에서 송장을 치워야 할지도 모른다.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무감하기 짝이 없었다.

바렌백의 후계이니 말이 나올 것이라 말을 올릴까. 위르겐은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궁중에 소문이 퍼졌다. 마르첼 바렌이 황제에게 밉보여 벌을 받고 있다는. 바렌 백작은 후계자 걱정에 애가 타서 벌써 몇 번이고 들렀다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후계를 아끼는 그가 과연 마르첼이 당한 모욕을 가만히 두고 볼 것인가.

“…….”

하지만 황제가 그것을 신경 쓸 만한 성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렌이 역심을 품었노라 몰아서 가문 하나를 하루아침에 귀족 계보에서 지워버릴지도 몰랐다.

“폐하.”

위르겐은 황제의 속을 들쑤시느니 그의 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에르하르트는 마르첼 바렌을 떠올렸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아까의 장면이 그려졌다. 라얀을 한낱 미물 대하듯이 밟아 누르며 로브를 벗길 것처럼 손을 뻗어 내리던.

얼굴을 가리는 것은 그가 허락한 일이었다. 감히 강제하려는 꼴이 거슬렸다. 하나 그것은 부차적인 일일 뿐, 에르하르트의 동요를 이끌어낸 것은 라얀을 짓밟은 더러운 발이었다. 그 발에 치여서 바르작거리던 모습까지도.

술집에서 뭇 건달에게 시비 걸리던 때도 퍽 거슬렸는데, 이번엔 그것과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결국은 벗겨진 로브 사이로 드러나는 얼굴에 마르첼의 눈빛에 어떤 감정이 스쳐 지나갔을 때, 에르하르트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눈을 도려내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야 했다.

“내일 아침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보내라. 그리고 바렌 백작에게 함께 전하도록.”

“하명하십시오.”

“바렌의 마르첼은 이후 제르바에 발 디디지 못할 것이다.”

“…….”

“또한 짐은 후계자의 작위 승계를 허락하지 않겠다고도.”

에르하르트는 바렌에 선택지를 주었다. 마르첼 바렌을 계속 후계로 둬서 백여 년 넘게 이어온 작위를 끊어낼 것인지, 아니면 새로이 후계를 세움으로써 가문을 지킬 것인지.

“전부 다 내일 아침까지 숨이 붙어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가볍게 덧붙이는 말에서는 조금의 관대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명하신 바대로 받잡아 행하겠습니다.”

위르겐의 말을 흘려들으며 에르하르트는 닫힌 문을 흘끔거렸다.

“참, 침실의 그분은…….”

곁눈질하는 눈길을 의식한 위르겐은 조심히 황제의 의중을 여쭈었다. 그리 대단한 가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귀족 출신인 그가 고작해야 평민 음유시인에 지나지 않는 청년에게 경칭을 쓰는 것에 어색해하지도,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전부 다 그를 향한 황제의 태도 때문이었다.

황제는 그를 제르바로 데려온 이후로 내내 본체만체했지만, 그럼에도 은연중 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느껴졌다. 황제의 시종장으로 그를 섬긴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소문 자자한 카렐 아이작에게도 데면데면하게 굴지 않는가.

그것을 눈치챈 위르겐은 그의 행동 반경을 확인하면서 한두 번씩 의중을 떠보듯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다. 오늘의 일로 제 판단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건 알았지만 그 이상은 긴가민가했다. 스쳐 지나갈 호기심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인가.

“위르겐.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다.”

하여 이후의 일을 묻자 황제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위르겐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비껴냈다.

에르하르트는 그의 뒤통수를 보다가 도로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늘하지만 바깥보다는 뜨끈했다. 이불에 파묻힌 존재는 아까 언제 뒤척거렸냐는 양 숨을 쌕쌕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반나절 내내 난잡하게 뒹군 흔적이 적나라해 찝찝할 법도 한데 여념 없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내려다봤다.

“…….”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더니 곧 시야가 뻑뻑해졌다. 눈가를 누르던 에르하르트는 그 옆자리에 누우며 잠든 라얀을 품에 끌어안았다. 눅눅한 몸이 제 품 안에 채워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그런 예감이 문득 들었다.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르헨의 싸구려 여관방에서 라얀이 깨어나길 기다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들었던 것처럼.

* * *

몸이 제 것 같지가 않았다. 구석구석이 둔중하게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른했다. 라얀은 끙끙 앓으면서 무겁게 가라앉은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시야가 밝았다. 잠들었을 때―그것이 잠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두웠던 것 같은데, 하늘이 다시 밝아져 있었다.

라얀은 손을 까딱거리며 옆을 더듬었다.

“…….”

아무도 없는 옆자리는 서늘하기만 했다. 텅텅 빈 냉기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면서 어제의 기억을 곱씹었다.

에리히는 단 한 순간도 라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입을 맞추며 손으로는 몸 구석구석을 헤집었다. 간지러워 움츠러들면서 밀어내면 그곳을 더 집요하게 탐했다. 라얀은 처음 느끼는 자극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우적거리며 간간이 신음을 흘렸다.

‘강아지 같군.’

낑낑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리히는 목에서 입술을 떼며 말을 툭 던졌다. 더운 숨이 솜털을 간지럽혔다. 그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자 그대로 손깍지가 끼워졌다.

“으음…….”

생생하지만 한편으로는 흐릿한 지난밤을 떠올리자 열이 올랐다. 베개에 뺨을 문질렀다. 새하얀 침구에는 포근하고 바삭한 햇살 냄새가 났다. 그렇게 한참을 비비적거리며 열을 식힌 라얀은 폭신한 이불을 양껏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

조금 발긋했던 귓불은 본연의 색을 찾았다.

그가 어제 에리히와 한 것은 교미였다. 지난 3년, 길거리에서 인간들의 교미에 대해 알음알음 들었을 때, 아니, 어쩌면 성체가 되기 전, 그러니까 막 연인이 되었을 때부터 라얀은 에리히와 교미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난밤, 라얀은 수년간 바랐던 것을 행했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로맨틱하거나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뒤엉키는 몸짓은 날것처럼 적나라했고, 주고받는 호흡은 여유가 없었다. 침입자를 받아들이는 과정마저 수월하지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예전에 아샤의 도움을 받아 꼬리가 다리로 갈라질 때와 비슷했다.

생리적으로 나오려는 눈물을 떨쳐내면서 에리히가 제 몸을 가득 채운 순간 라얀은 지독히 아팠고, 그럼에도 그를 끝내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기뻤다.

하지만 결국은 서글펐다.

어제의 에리히는 에리히였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아니었으니까. 또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하는 법도 익숙해져야 한다던 그의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라얀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었다.

“일어나셨는지요.”

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생각인지. 살아서 존재하는 에리히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야 하는데 자꾸만 바라는 것이 많아진다. 라얀은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느라 문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이불 사이로 고개를 내밀자 어제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의 얼굴이 보였다. 이름이 위르겐이라고 했던 것 같다. 어제는 경황이 없던 만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네.”

제르바로 온 뒤로는 내킬 때 일어나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라얀이 조금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필립이 귀찮게 굴면서 깨웠다.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 살짝 몸을 일으키자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시장하지는 않으신가요?”

깐깐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다정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말을 높였다. 인간이 제게 공대를 쓰는 건 조금 신기한 일이었다.

“네. 조금.”

조심스러운 대답에 비웃듯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라얀이 머쓱해 웃자 위르겐은 얼른 준비해 오겠다며 바삐 걸음을 나섰다.

위르겐이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허리를 쥐고 끙끙거리는 사이에 돌아온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뒤따라온 이들은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라얀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사이 할 일을 마친 이들은 곧장 나가고 남은 이는 라얀과 위르겐뿐이었다.

“이리로.”

위르겐이 라얀을 부축해 일으키는 과정에서 이불이 흘러내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드러났다. 그는 촘촘히 새겨진 지난밤의 흔적에 당황하는 대신 침의를 걸쳐 주었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콩소메였다.

“그것을 좋아한다기에.”

“누가요?”

되묻자 위르겐은 아무런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라얀은 도로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콩소메는 물론이고 다양한 해산물 요리까지. 대체로 자신이 즐겨 먹는 것들이었다. 특히 잼이 가득 든 파이와 쿠키에 시선이 갔다.

“디저트는 식사 후에 드셔야 합니다.”

손이 갈 듯 말 듯 꼼지락거리자 그것을 눈치챈 위르겐이 곧장 단속했다. 라얀이 채 어떤 반응을 보이기 전에 행여나 다른 생각 말라는 듯이 바로 앞으로 콩소메가 밀어졌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라얀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잼파이와 쿠키를 보다가 결국 수저를 들었다. 한 입 삼킨 라얀의 눈이 반짝거렸다. 지금까지 접한 것도 맛있었는데 이건 도저히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가 없었다.

라얀의 반응이 긍정적이자 위르겐은 옆에서 부연 설명을 했다. 채소와 닭고기를 우려서, 주방장이, …등등. 라얀은 한 귀로 흘리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감각은 전부 혀에 쏠려 있었다.

한편으로는 기대감도 들었다. 콩소메가 이렇게나 맛있는데 저 디저트들은 어떨까. 어쩌면 혀가 아릴 정도로 달지도 모르겠다.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라얀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왜 그렇게 단것을 좋아하지.”

정수리로 불쑥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라얀은 디저트를 바라보던 눈을 그대로 위로 올렸다. 겨우 침의나 걸친 자신과 달리 에리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정돈한 차림이었다.

늘 그러했듯 찬란한 금발, 그리고 눈동자 색과 맞춘 것처럼 짙푸른 색의 의복까지.

“폐하.”

문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눈치채지 못한 것이 라얀뿐만은 아니었는지 위르겐 또한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불렀다. 자세히 보니 에리히의 몸에 빛이 잔재처럼 감돌았다.

“나가봐라, 위르겐.”

에리히는 오자마자 위르겐을 쫓아냈다. 고작 한마디에 불과했는데 위르겐은 순순히 물러났다. 탁. 문이 닫혔다. 남아 있는 것은 라얀과 에리히뿐이었다. 달리기를 해도 충분하다 못해 남을 만큼 널찍한 공간이었는데 둘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어색함이 치고 올라왔다.

게다가 지난밤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조각조각 난 것들이 차마 눈 뜨고 보기 부끄러운 장면으로 엮였다. 라얀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콩소메를 뜨기 위해 손을 움직였지만 헛손질이었다.

“그, 왜 왔어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라얀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일어나니 옆에 없던 에리히를 향한 옅은 원망이 묻어날 뻔했지만 그것은 겨우 눌러서 티 내지 않았다.

“내 침실 내가 오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아. 그러고 보니 라얀은 이곳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었다. 그런데 무슨 주인인 양 에리히에게 방문의 목적을 물은 것이다.

“그러면 제가 나갈…….”

“앉아.”

라얀이 주춤주춤 몸을 일으켜 세우기 무섭게 에리히는 간결한 말로 그를 도로 앉혔다. 고집을 부리면 잡아끌어다가 억지로 앉힐 것 같은 단호함에 라얀은 결국 다시 엉덩이를 갖다 붙였다.

“또, 어제는 잘도 말을 낮추더니 오늘은 어설픈 예법을 보이는군.”

라얀은 뺨을 씰룩거렸다.

그나마 낯선 인간들과 달리 에리히는 제 연인이었고, 원래도 말을 편히 하던 습관이 남아 있던 만큼 의식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제는 그동안 배운 예법을 상기할 정신조차 없어 무심코 옛날처럼 굴었다. 그나마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이 라얀이 할 수 있던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편히 해.”

“네?”

“그따위로 보는 사람도 이상해지는 괴상한 예법은 때려치우라는 뜻이다.”

“응.”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된 일이다. 에리히가 인간 중 가장 높은 권좌에 앉은 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그리 와닿지 않았기에. 잠깐의 고민도 없이 쉬이 나오는 낮춤말에 에리히의 얼굴에 황당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찰나였다.

“마저 먹어라. 남기지 말고.”

같이 안 먹을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라얀은 꾹 눌렀다.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으나 그를 볼 때마다 자꾸 불쑥불쑥 가장한 평정이 깨졌다.

에르하르트는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저번에 부쩍 몇 번이고 식기가 향하던 것 위주로 준비하라 이른 게 무색하지 않았는지 뜨는 둥 마는 둥 했던 그때보다는 잘 먹었다. 그래 봐야 만지면 거죽뿐인 몸에 살이 붙으려면 저것보다 더 곱절로 먹여야 할 테지만.

“…….”

수저를 쥐는 모양부터, 잡는 순서까지 하나같이 예절에 어긋난다. 체면이라면 목숨 거는 이들과 비교하자면 에르하르트는 예법 따위를 깐깐하게 따지는 편은 아닌데도 엉성한 게 훤히 보였다. 그런데도 저것을 일일이 지적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꼴 보기 싫어 외면할 생각도.

에르하르트가 아닌 척 흘끔거리는 동안 대충 식사를 끝냈는지 눈이 쿠키와 잼파이가 담긴 트레이에 향해 있었다. 그것을 그의 앞으로 가볍게 밀어주자 냉큼 잡아 베어 물었다.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었다.

“자꾸 묻히고 먹지. 지저분하게.”

무심코 손을 뻗어 라얀의 입가에 남아 있던 부스러기를 털어주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그는 제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깔끔하다 못해 때로는 결벽적이기까지 한 자신이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 따위를 털어주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보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턱을 내미는 라얀의 태도였다. 에르하르트는 그 모습에 속이 뒤집혔다.

누구일까. 아니, 굳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대강 짐작은 갔다. 어쩌면 확신이었다.

‘엘.’ 그자일 게 분명했다.

에르하르트는 혀를 차며 손을 물렸다. 라얀 또한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한껏 빼고 있던 고개를 뒤로 물렸다. 살금살금 눈치를 보는 꼴이 속을 더 할퀴었지만 에르하르트는 삼켰다. 대화가 오가며 조금 가벼워졌던 분위기가 바깥 날씨처럼 얼어붙었다.

“그대.”

라얀인데. …그는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듯이 자그맣게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렸지만 에르하르트는 적어도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엘은…….”

“…….”

“어떤 사람이지.”

엘은 어떤 사람이냐고. 그게 자신인 것도 모르고 본인이 묻는다. 라얀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답은 금방 나왔다. 생각해 보면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다.

세상 무엇을 안겨준들 결코 내어줄 수 없는 연인. 영원히 사랑해야 할 태양. 하지만 머릿속에 둥실거리는 문장들은 에리히에게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다정한 사람. 내 구원자.”

그래서 라얀은 제 감정의 일부만 헐어내 그를 표현했다. 때로는 짓궂은 장난을 쳤어도 다정했다. 놀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르는 척 져줬다. 그리고 성장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하자라고 여기며 내심 스스로를 어떤 벽 속에 가둬두었던 라얀을 거기서 꺼내준 구원자였다.

너는 그냥 조금 늦을 뿐이라던 그 말은 아직도 선명한 형태로 기억났다. 그날 바람이 어떻게 불었는지, 에리히가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았는지, 또한 그때 쿵 떨어져 내리던 심장까지도.

오로지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라얀은 에리히를 영원히 저버리지 못할 것이다.

“웬 개소리를 잘도 포장해서 순진한 걸 꾀어내기라도 했나 보군.”

벌써 몇 년 전의 기억인데도 추억에 잠겨 있던 라얀을 끄집어낸 것은 신랄하고 박한 평이었다.

“몹쓸 놈이 아닌가.”

라얀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게 너인데. …차마 할 수 없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받아 올라왔다. 에리히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폐하.”

그 행동을 한참 지켜보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겨우 그를 불렀다. 에리히는 눈썹만 올렸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또 오므렸다가 결국 한숨을 탁 내쉬며 말해보라는 듯이 손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말해.”

“…나는 언제 가?”

여기 와서 머무르던 침실에 두고 온 게 있었다. 가령 팔찌를 담아 둔 함이라든가. 또 필립이 걱정하던 눈빛도 생각나고. …이것들은 전부 핑계일 뿐이다. 에리히가 그를 또 밀어내기 전에 라얀이 먼저 선수를 치고 싶었다. 내가 네 시선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겠다고. 그러면 조금은 덜 아플지도 모르니까.

“어디를 말하는 거지? 아르헨?”

아르헨일 리가. 그의 바다는 더할 나위 없이 그리웠지만, 영원히 사랑할 테지만 에리히의 옆에 있는 게 더 좋았다. 어차피 길게 남지도 않은 시간이니 더욱더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라얀이 고개를 젓자 주름이 잡혀 있던 미간이 다소나마 펴졌다.

“침소 이야기였다면 여기 있어.”

“왜?”

순수한 의문이었다.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것 역시도 아니면서. 밀어내려고 했으면서 이번에는 곁에 두려고 한다.

“어째서?”

“그러고 싶은데 이유가 필요한가.”

간결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에리히는 늘어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다소 방만했던 자세를 바로 세우자 위압감이 느껴졌다. 저 단정한 예복 속의 몸을 알고 있기에 더욱. 일어나서 성큼 다가온 에리히는 팔걸이를 짚으며 라얀을 내려다봤다.

그는 익숙하게 고개를 비틀어 숙이며 라얀에게 가볍게 입 맞춘 뒤 틈을 벌렸다.

“인정하지. 내가 너에게 흥미가 있어.”

“…….”

“어느 정도의 건방은 용인해 줄 만큼.”

“…….”

“그리고 적어도 흥미가 가시기 전까지는 너를 곁에 둘 생각이야. 어제 말하지 않았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랑도 무엇이든, 하는 법을 배우라고.”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길게 부연하고는 있지만 에르하르트의 말은 결국, 결론을 내리자면 이것이 사랑 아닌 흥미라고 단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언젠간, 유한한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사라지고야 말 흥미일 뿐이라고.

“왜. 그곳에 가야 할 이유라도 있나?”

오브는 아직 소속 없는 궁정의 사용인들이 머무는 곳이기에 열악하고 비합리적인 구석이 많았다. 동굴에서 살던 것도 그렇고, 혹 그런 좋지 않은 환경이 취향인 건가. 어쨌든 에르하르트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또 악사라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불려갈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것은 기실 라얀에게 달리 양해를 구해야 할 사안은 아니었다. 그는 황제였고, 라얀은 자신에게 소속된 자였다. 궁에 머무르는 이상 그의 소관은 자신이 정할 일이었다.

곱씹듯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던 라얀이 고개를 저었다.

묘한 만족감이 번졌다. 에르하르트는 떨어져 있던 입술의 틈을 다시 붙였다. 연약한 점막을 긁자 라얀이 몸을 살짝 떨었다. 어제 수십 번 입술을 맞대고 호흡을 얽었더니 어디가 약한지 금방 파악이 되었다.

에르하르트는 입을 맞추며 라얀의 목덜미를 가볍게 감싸 쥐듯 덮었다. 쿵쿵. 손바닥에 그의 맥박이 느껴졌다. 그것은 희미한 듯 빨랐다.

“…폐하. 여기 계십니까?”

삼켜도, 삼켜도 단 것 같은 타액을 마시며 집요하게 입을 맞추는 에르하르트를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시면…….”

보좌관의 애타는 목소리가 침실 문을 뚫고 들어왔다.

죽은 듯이 잠들었던 라얀이 일어나 식사를 한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그는 급히 결재를 바라는 서류도 내버려두고 공간 이동했다. 집무를 보는 본궁에서 이곳까지 오가는 시간도 왜인지 낭비 같아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를 찾아 헤매느라 보좌관들이 요란하게 난리를 부렸으리라.

“이만 가셔야 합니다.”

안에 있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거듭해 재촉이었다. 에르하르트도 슬슬 가야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곧 귀족원 회의도 있었다.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새가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언제 집요하게 달라붙었냐는 양 틈 없이 닿아 있던 몸을 한 발 뒤로 물렸다. 라얀은 키스하는 동안 빼앗긴 호흡을 가다듬느라 숨을 들썩거렸다. 그의 연록빛 눈동자가 올곧게 그를 향했다. 아래가 뻐근해졌다.

“조금 더 자는 게 어때.”

밤에 못 잘 텐데. 나긋하게 속삭이는 말의 뜻을 헤아린 라얀은 고개를 숙였다. 정수리 아래로,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목덜미가 살짝 발긋했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뒤로하며 재차 간절하게 그를 부르는 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뒤에서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문을 열었다가, 닫는 순간까지도.

* * *

검은색에 가까운 암녹색의 바다가 넘실거리는 흑해.

미끄러지듯 제 영역으로 돌아오는 아샤의 몸에서는 지워지지 않은 짙은 피 냄새가 묻어났다. 상어들이며, 크라켄까지. 흑해에 터를 잡아서 피를 보는 것도,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들은 아샤를 조금은 두렵고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아샤가 이따금 이기지 못하는 권태를 다른 존재의 피로나마 씻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요즈음은 그의 흑해 출입이 빈번한 탓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가시지 않는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왔다. 제 몸에는 손톱만 한 상처조차 내지 않으면서.

“따분해.”

오로지 그에게만 허락된 왕좌에 몸을 기댄 채 아샤는 무료하게 중얼거렸다. 몇 년 사이 부쩍 지겨웠다. 생을 앗는 것도, 그 찰나의 순간 엿볼 수 있는 고통과 절망에도 이제는 썩 즐겁지 않았다.

“불가침을 깨고 아티사의 결계를 찢으면 조금 나아질까.”

<왕이여.>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던 켈피가 만류하듯이 그를 부른다. 아샤는 턱을 괸 채 고혹적으로 웃었다. 아마 흑해에 존재하는 것 중에 말리는 건 저것뿐일 것이다. 흑해에 도사린 모든 것들은 호전적이니 그의 지시 하나면 아티사에 속한 것들을 물어뜯으려 할 테니. 그렇게 된다면 이 깊은 심해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으리라.

아티사를 언급하자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그를 두려워하는 듯하면서도 서슴없이 다가오던 작고 어린 존재. 친구잖아요. 겁도 없이 그에게 친구라고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고작해야 인간에게 목숨 따위 하잘것없다는 듯이 내걸던 모습이 선명하다. 수호석을 잃고 겨우 목숨이나 연명 중인 주제에 지상으로 올라가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파리한 낯도.

떠올리니 문득 궁금해졌다.

몸을 추스른 라얀이 흑해에서 떠난 뒤 그를 찾지 않았듯, 아샤 역시 라얀을 찾지 않았다. 자연스레 기억 속에서 밀어낸 줄 알았지만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고집스러운 외면이었다.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도 인간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때때로 그를 거슬리게 해서.

“가엽고 애틋한 어린 인어는 어찌 지내고 있을까.”

사랑을 찾았을까. 아니면 찾지 못했을까.

뇌까리는 얼굴에 웃음이 스몄다. 이제 그 애의 생은 얼마 남지 않았을 터였다. 그가 부여한 생은 긴 듯이 짧았다. 그들 사이에 쌓여 있는 세월 위에 약간의 시간을 조금 더 얹어주었으니.

순간순간을 살아가면서, 그 애는 삶에 미련이 생겼을까.

궁금해졌다. 파괴적인 충동으로 그를 이끌었던 권태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씻겨서 사라졌다.

<알아볼까요. 왕이여.>

“아니.”

그 애의 마지막이 자신의 생을 위한 구걸이라면, 그 역시 나쁘지만은 않을 텐데.

“이건 내가 직접 가야지 않겠니.”

어둠을 머금은 것처럼 짙은 색의 꼬리를 무료하게 흔들던 아샤는 몸을 일으켰다. 켈피가 눈을 깜빡였을 때, 볼 수 있는 것은 불길하게 넘실거리는 검은색 머리의 궤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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