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곳은 아르헨보다 낮이 길지 않았다. 조금 더 이르게 찾아온 어둠 속에서 라얀은 손을 폈다. 손바닥에서 둥그런 물방울이 솟아오르더니 통통거리며 움직였다.
어딘가를 가리키듯 삐죽거리는 물방울을 이정표 삼아 라얀은 숨죽여 바깥으로 나갔다. 간혹 누군가를 마주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손을 꼭 움켜쥐고 가만히 있었다.
로브 끄트머리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한 이는 이 시간에 나갔다가 길을 잃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고 참견하다가 라얀이 아무 반응 없자 알아서 하라며 휙 스쳐 지나갔다.
대답을 돌려주지 못한 게 조금은 마음에 걸렸으나 라얀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라얀은 기척을 죽인 채 사뿐사뿐 물방울을 따라갔다. 이슬만큼 작은 물방울은 물에 이끌리듯 자꾸만 라얀을 어디론가 안내했다.
그나마 그새 조금 눈에 익은 풍경을 지나 처음 보는 풍경이 지나쳐 갔다.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조금씩 방향을 틀었기에 라얀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쩌면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느 기점에 이르러서는 귀 기울일 필요도 없을 만큼 기척이 느껴지진 않았으니까.
물방울은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문 앞으로 그를 안내했다. 헐겁게 닫혀 있는 문 너머로 희미하지만 물 내음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바다와는 다르지만 분명.
라얀은 문을 열었다. 단단하게 봉해져 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크게 힘을 주기 전에 수월히 열렸다.
작게 낸 틈으로 쏙 들어간 라얀은 호수가 가까워진 까닭인지 강렬하게 통통 튀는 물방울을 다른 손으로 가볍게 흩어내며 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눈에 다 차고도 넘칠 만큼 무수한 꽃봉오리와 덤불을 헤치고 지나가자, 달빛이 일렁이는 호수가 보였다. 라얀은 앞뒤 할 것 없이 물가로 뛰어들었다. 첨벙. 파동이 일었다가 금세 잠잠해졌다.
라얀은 빨려 들어간 것처럼 호수 깊숙이 파고들었다.
둥글었던 귀는 날렵해지고, 다리에는 청록빛 비늘이 돋으면서 길고 매끄러운 꼬리가 되었다. 바짝 말라가는 것 같던 몸이 물을 머금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라얀은 길게 숨을 쉬며 몸을 늘어트렸다. 새까만 머리가 해초처럼 흔들렸다.
아르헨에서는 바다가 그를 날카롭게 밀어냈는데, 이 호수는 그를 잔잔하게 감싸 안았다. 물론 해수와 담수로 근원 자체가 다르므로 완벽한 해갈이 되지는 않았다. 기실 아르헨이라고 한들 조금 더 낫다 싶을 뿐이겠지만. 어쨌든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들며 잠깐의 여유를 즐기던 라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한 에메랄드빛의 바다와 달리 이곳은 물이 조금 탁했다. 해초는 없지만 식물의 뿌리처럼 보이는 것은 있었다. 라얀은 호기심을 담아 그것을 손으로 톡톡 쳤다.
그 외엔 고요했다. 감지되는 생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멀찍이서 맴돌 뿐 라얀에게 선뜻 다가오지는 않았다.
“안녕?”
인사에도 묵묵부답이다. 오히려 멀어지려고 했다.
레탄들은 물론 바다거북까지 제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이들은 바다에, 메르의 수호를 받으며 인어에게 경외심을 품는 존재들은 아니었으니 인어인 자신이 낯설 것이다. 아쉬움을 삼켰다.
바닥 아래까지 내려가 거슬리는 모래알도 쥐어보고, 움켜쥔 사이로 흘려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뭐 달리 볼 것은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찾던 라얀은 슬그머니 수면 위로 올라갔다. 호수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석교가 라얀의 몸을 감춰주었다.
달빛 아래는 고요하다.
물 흐르는 소리와 간혹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외에는 어떤 소음도 없었다. 라얀은 모처럼의 고요를 만끽했다. 지금 그의 거처는 벽이 얇은 건지 문밖으로 발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 벌써 며칠째 깊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내심 긴장하고 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계속 여기 있고 싶다. 잠도 여기서 잘 수 있으면 좋겠다.”
나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라얀의 귀가 쫑긋거렸다. 타박타박. 작은 발걸음 소리가 났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도. 라얀은 얼른 머리를 반쯤 물속으로 숨겼다.
“전하. …마리엘 전하. 아이참, 자꾸 이렇게 르네궁에 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라얀이 숨은 채 귀만 기울이는 동안 여인은 어린애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소리는 점점 그가 있는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왜?”
“네?”
“오라버니는 왜 내가 어머니의 궁에 오는 걸 싫어하는 거야?”
“그건…….”
천진난만하게 되받아치는 질문에 여인은 난감해 보였다. 왜인지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옛날에 바깥 세계에 가고 싶어 하던 자신과 만류하던 알레가 떠올라서. 은근히 추억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이었다. 라얀은 그쪽에 계속 귀를 열어두었다.
“오라버니는 어머니를 미워해?”
“그럴 리가요. 올리비아 전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데요. 자꾸 어리신 전하께서 어두운데도 이리 거침없이 돌아다니시니 다치기라도 할까 염려해서 그러시는 거지요.”
“난 이제 어리지 않아. 벌써 열 살인걸!”
제 나이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이는 상당히 어렸다. 라얀의 머릿속에 마리엘이라는 아이는 어느덧 이제 갓 태어난 아주 어린 인어와 동급으로 인식됐다.
“오라버니는 바보야. 멍청이!”
“전하. 어찌 그렇게 품위 없는 말을 하셔요. 누가 들으면 흉을 봅니다.”
“어차피 여긴 유모밖에 없는걸.”
라얀이 있는 걸 알 리 만무한 마리엘은 천진난만하게 계속 제 오라버니 흉을 봤다. 유모라 불린 여인은 난감해하며 말리려고 했지만 그 애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유모. 나 목이 말라.”
“궁으로 돌아갈까요?”
“아니.”
“그럼, …절대 안 됩니다. 어린 전하를 여기 홀로 두고 갔다가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요.”
“누가 나를 건드릴 수 있겠어?”
마리엘은 꽤나 자신만만했다.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방향을 살핀 라얀의 눈이 커졌다. 굽슬굽슬 내려오는 금발, 그리고 뛰었는지 흐트러진 머리 아래로 드러난 섬세한 이목구비는 꼭,
“오라버니에게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딘지 어렸을 적의 에리히와 비슷했다.
“아무리 전하가 폐하의 한 분뿐인 혈육이시라지만, …아니, 그보다 대체 전하께 그런 품위 없는 말을 가르친 게 누군가요? 신께 맹세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아마 폐하께서도 아신다면 그를 엄히 처벌하시겠지요.”
금이야 옥이야, 진주보다도 더 귀하게 모셨는데 누가 우리 꽃 같은 전하에게 거친 말을 가르쳤는지 알 수가 없다며 한참을 하소연했다.
“그만하고, 유모, 나 목말라. 응?”
유모는 목이 마른다는 재촉 아닌 재촉에서야 겨우 한풀 수그러들었다.
“…얌전히 있으셔야 해요.”
“응.”
“호수 가까이는 가지도 마세요. 얼마나 깊은지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요?”
“알아. 유모. 내가 언제 유모 말 듣지 않은 적 있어?”
거듭 신신당부하는 모습까지 알레와 꼭 같지만, 라얀의 신경은 이제 거기에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는 시선으로도 닳을 수 있다면 진작 닳을 만큼 마리엘을 넋 놓고 바라봤다.
유모가 몇 번이고 뒤돌아보다가 차라리 빨리 다녀오는 것을 선택했는지 걸음을 부지런히 했다. 작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배웅해 주던 마리엘은 곧장 석교에 올랐다. 호수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던 당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태도였다.
아이가 석교에 오르자 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터라 잘 보이지 않았다. 라얀은 꾸물꾸물 움직여 아이가 잘 보이는 쪽으로 이동해 눈만 살짝 내밀었다.
에리히의 동생은 그를 닮았다. 정말로.
물론 에리히가 조금 더 선이 굵고 날카롭게 생긴데다가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른 게 더 많았지만 저 애를 보고 있으면 결국 어린 날의 에리히가 떠올랐다.
“…흑…….”
괜한 추억에 잠겨 있는데 기웃기웃 호수를 보던 아이가 난데없이 울상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씩씩하다 못해 철없어 보이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뭐가 저렇게 슬플까.
에리히의 동생이 훌쩍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쓰였다.
“엄마…….”
흩어내는 단어에는 차마 가리지 못한 진득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라얀은 저 아이처럼 어머니를 그리워한 적은 없으나 그래도 누군가를 저만큼 그리워해 본 적은 있었다.
때때로 흘렸던 눈물은 하얀 진주가 되어 동굴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녔고, 그것은 휩쓸리는 파도에 삼켜져 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라얀은 그 모든 날을, 외로움을, 그리움을 전부 끌어안았고 하여 잊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홀로 남아서야 훌쩍거리는 저 아이가 눈에 밟혔다.
이제는 그 기다림과 그 나날들에 쌓여 있던 감정은 옛것이 되었는데도 라얀은 쉬이 저 감정에 동화되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니 달래줄 수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훌쩍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살짝 살펴보자 울음의 흔적을 지워보려는 듯이 눈가를 손으로 비볐다. 그래 봐야 코가 빨개졌는데. 에리히의 동생이 마실 음료를 가지러 간 여인이 오기 전에 저 붉은기가 가시기는 할까.
“…….”
“…….”
순간 눈이 마주쳤다. 속으로 온갖 참견하던 라얀은 이파리 사이에 숨어 있던 자신과 정확히 마주치는 옅은 노란색의 눈에 사고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마주친 건 그의 착각이 아닐까. 라얀은 살금살금 몸을 뒤로 물렸다.
“…뭐야. 누구야?”
그러나 또렷한 질문은 그를 향해 있었다.
* * *
며칠 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더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에르하르트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런다고 통증이 가시는 것도 아니지만 통증이 분산되니 그나마 나았다.
에르하르트의 냉랭한 표정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더 들을 말도 없어 보이는데 오늘은 이만하지.”
“예. 폐하.”
그 분위기가 전해지지 않을 리 없다. 에르하르트는 바짝바짝 날 서는 신경을 애써 무디게 잠재우며 일어났다. 회의실을 나서는 에르하르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다시 시작된 불면과 희끄무레한 악몽 탓이지만 궁정 사람들은 에르하르트가 요즘 부쩍 날을 세우는 이유가 카렐 아이작이 자리를 비운 탓이라고 추측했다.
말도 되지 않는 가정이었으나 그냥 두었다. 어차피 의미 없이 지껄이는,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다.
왜 다시 불면이지. 아니, 그보다는 고작해야 불면 따위로 이렇게 날 설 까닭이 없는데 며칠 잠자리가 편했다고, 간사한 몸은 그새 편한 감각에 익숙해진 것이다.
회랑을 거침없이 거닐어 집무실로 향한 에르하르트는 집무실 문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그녀는 마리엘의 유모였다. 에르하르트를 발견한 여인이 정중히 예를 갖췄다.
“존귀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여기는 무슨 일인가, 부인. 마리엘의 곁에 있지는 않고.”
“마리엘 전하께서는 오수 중이십니다.”
“마리엘이?”
동생과 교류가 많은 것도, 서로 애틋한 남매 사이도 아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에게 하나 남은 혈육이기에 들려오는 말이 많았다.
일단, 마리엘은 활동성이 남달라 낮잠을 자는 쪽은 아니었다. 선황은 물론이고, 어머니 올리비아 윈스턴도 그리 활동적인 성격들은 아니었는데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활발했다. 낮에 잠깐 자는 시간도 아까워할 만큼. 내심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고작해야 마리가 낮잠을 잔다는 걸 고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그것은 아니오나, 전하께서 며칠 전부터 이상하셔서.”
그렇다면 짐보다는 어의를 부르는 게 더 나을 텐데. 에르하르트는 속내에 맴도는 말을 일단은 삼키며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관자놀이를 짚으며 마저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 흔들었다.
“전하께서 며칠 전부터 부쩍 낮잠을 청하십니다.”
“마리야 궁정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을 만큼 활발하니, 기력이 소진하여 낮잠을 청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전하의 양상은 전과 다를 바 없이 비슷합니다. 되레 피곤하다며 일찍 잠드시는걸요. 달라진 것은 낮에 주무시는 시간이 늘어나신 것이지요.”
“자랄 때가 되었나 보지.”
또래보다도 조금 작은 축에 속하니 이제 키가 클 때도 됐다. 얼른 커야 파트너로 데리고 다닐 때 조금이나마 그럴싸해 보일 텐데. 향후 몇 년간은 황후궁을 채울 생각이 없었기에 에르하르트는 마리엘의 성장이 적잖이 달가웠다.
“저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싶사오나…….”
에르하르트가 내내 무성의한 태도를 견지하자 유모는 속이 바짝 타들어가는지 말끝을 늘렸다.
“낮잠이 늘기 전에, 조금 이상하셨습니다. 몇 번이고 여쭸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시는 듯하다가도 꾹 누르시고…….”
유모의 걱정이 아주 과한 것만은 아니었다.
올리비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마리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거기다가 친하지는 않았어도 친동기인 에르하르트의 부고까지. 고작해야 일곱 살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차후 전해 들은 거지만 마리엘은 두 달여간 말문을 닫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긋방긋 웃지도 않으며. 그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것이 유모였으니 혹시라도 그때의 우울함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지 염려하는 것은 당연했다.
“…마리엘이 설마 또 르네궁에 갔나?”
“송구합니다. 전하께서 워낙 완강하신 탓에 차마 말리지 못했습니다.”
에르하르트는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말렸어야지. 다른 쪽으로 흥미를 돌렸어야지. 그게 그대의 존재 이유인데.”
짓씹듯 내뱉는 책망에 유모는 고개만 숙였다.
에르하르트는 르네궁이라면 질색을 했다. 올리비아의 생전 거처였으니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나 싶을 테지만, 그곳에 남아 있는 선황의 흔적들에 구역질이 났다.
올리비아가 십수 년을 머물렀던 거처이다. 소소하게는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며, 회랑 곳곳에 놓여 있는 장식품, 크게는 제르바 서부에 있는 아름다운 칼레아를 그대로 모방한 작은 호수까지.
전부 다 선황의 흔적이었다.
올리비아를 그토록 아껴놓고도 결국은 그 여인을 죽였으며, 기어이는 본인조차 망치고야 만 선황의 망령이 어떻게 마음에 들 수 있겠는가. 조만간 갈아엎을까도 했다.
에르하르트를 죽을 자리로 꾀어내기 위해 황제가 올리비아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마리엘이 알기엔 너무 가혹한 진실이었다. 하여 숨기고 르네궁의 출입을 자제시켰는데, 명확한 이유를 모르는 마리엘의 원망은 피할 수 없었다.
“송구합니다.”
“…….”
“아. 그러고 보니 그날 전하께서 조금 이상한 말씀을 하시기는 했습니다.”
“어떤?”
“다시 여쭈니 말씀하지 않으셔서 자세히 알지 못하오나, 요정, 정령, 이라고.”
하나같이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단어들이다.
“그런 게 나오는 동화책이라도 읽고 싶었나 보지.”
대수롭잖게 대꾸하면서도 에르하르트는 유모가 한 말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르네궁. 요정. 그곳을 다녀온 이후 부쩍 많아진 낮잠. 또 일러진 밤잠. 어딘지 익숙했다. 그러니까 익숙할 리 없는 것인데도.
“…마리엘은 혼자 자던가.”
“지난해부터 더 이상 어리지 않으니 혼자 침소에 드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습니다.”
“오늘은 그 애와 함께 자라.”
“예?”
“마리가 한사코 되었다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겠나이다.”
유모는 의아한 표정으로도 얼른 대답했다. 그 애가 영 비실거려 보이면 어의를 부르라는 말을 덧붙인 뒤에야 에르하르트는 그녀를 내보냈다. 홀로 남은 에르하르트가 다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자 시종장이 눈치를 보며 그의 앞에 브랜디를 놓았다.
“왜. 이걸 마시고 마리엘처럼 낮잠이라도 자라고?”
“폐하께 조금 여유가 필요해 보이셨습니다.”
“여유라니. 기분만 나쁘지.”
술을 대체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건지 모르겠다. 취하기만 하고 불쾌하지 않은가. 브랜디로 입술을 축이는 대신 술잔만 쥐고 가볍게 흔들던 에리히는 우습게도 라얀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연관이 없는데.
물론 세세히 따져보면 아예 연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술을 보고 술집에서 한 손으로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술병을 비웠던 그자를 생각한 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아니, 정말로 이상한가. 애초 자신이 데려와 놓고 그자에 대한 소식으로부터 아예 귀 막고, 눈 감았다는 것부터가 전부 생각하고, 의식한다는 증거였는데.
“그자는 어찌 지내지.”
“궁중의 예법을 익히고 있지요. 전해 듣기로는 익힘이 빠르다고 합니다.”
워낙 미묘한 데서 예의가 바르고, 생각지도 못한 데서 무례하여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그냥 물어본 건데 잘도 알고 있군.”
다만 의외라는 것을 떠나서 줄줄 흘러나오는 대답은 꼭 언제고 자신이 물을 것을 대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점을 지적하자 시종장은 시정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시종장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스민 것을 봤다.
“이제 예법을 어느 정도 익혔다 하니 소임을 다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시종장은 요 며칠 사이 부쩍 심해진 그의 불면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애초 그러기 위해 데리고 오신 게 아닙니까. 폐하.”
그것은 단순히 명분이었을 뿐이다. 스스로의 결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그냥. 그때 라얀을 데리고 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따져보면 라얀이 제 기억의 공백을 채울 자를 알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며칠을 거듭한 뒤에야 에르하르트는 그날의 결정이 본능에 가까웠다고 인정했다.
“…오늘 밤은 잠시 다녀올 데가 있고.”
내일이나 모레가 좋겠어. 모호하게 날을 일러주며 시종장에게도 이만 물러나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리고 그 손을 올려 그대로 얼굴을 쓸었다. 얼룩진 피로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집무를 살피다 보니 금방 해가 졌다. 보좌관에게 퇴궁을 명하고, 침실에서 잠깐 시간을 보내던 에르하르트는 어느 정도 날이 어두워졌을 때 궁을 나섰다.
따를 것 없다며 시종들을 물린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르네궁이었다.
에르하르트는 르네궁이 보이기 무섭게 눈을 찡그렸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선황이 에르하르트의 손에 최후를 맞이한 곳이 바로 이 르네궁이었다. 역겨운 일이었다. 본인이 살해한 여인을 그리워하며, 그 여인의 자취를 좇는 꼴은. 아마도 에르하르트는 이러한 까닭으로 르네궁을 더 멀리하는 것이리라.
아비의 역겨운 마지막이 떠올라서.
마리엘만 아니라면 이런 곳에 발 디딜 일도 없었을 텐데. 에르하르트는 혀를 찼다.
하지만 이곳에 마리엘을 홀린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 애는 제법 깜찍한 구석이 있으니 일찍 자는 척 침실로 가 비밀공간을 통해 궁을 빠져나왔을 테고, 그리하여 모자란 잠을 낮에 채우는 것이다. 이런 짓을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어찌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짐작하나 싶기는 했지만, 그냥 자연히 가정되었다.
어쨌든 에르하르트는 그 애의 보호자로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혹 위협적인 거라면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르네궁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마력을 끌어 올려 제 자취를 감추었다. 들어가자마자 옅은 풀냄새가 났다. 아마 완연한 봄이 와 꽃망울이 하나같이 꽃잎을 틔우면 향긋한 냄새도 한데 섞일 게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불태워 버리고 싶군.
치미는 충동을 누르며 에르하르트는 슬슬 주변의 기척을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 마리엘을 매혹시킨 무언가가 있을 텐데. 그게 인간이든, 그 애의 혼잣말대로 요정이든.
둘러보다가 결국 호수가 있는 정원까지 걸음을 옮기게 된 에르하르트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작게 흥얼거리는 허밍. 허리까지 내려오는 굽실거리는 긴 머리카락. 측면으로 보이는 얼굴은 달빛에 비쳐 창백할 정도로 희었지만, 붉게 물든 입술만이 선명했다.
“…….”
그러니까, 라얀이었다.
설마 여기서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
그는 기슭에 앉아 호숫가에 발을 담그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툭. 앞에 있던 돌부리를 피하지 못하고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라얀은 발장구를 멈췄다.
“왔어?”
아름다운 목소리는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그가 뒤도는 순간, 어떤 흐릿한 형상이 겹쳐졌다. 봐. 나 약속 지켰어. 까닭을 알 수 없는 목소리도. 그와 동시에 어떤 충동이 그의 머릿속 이성을 잡아채 뒤흔들었다. 에르하르트는 그 충동을 누르는 대신 자신을 보고 입술을 달싹거리는 라얀을 향해 다가갔다.
다소 성마르기까지 한 걸음이 라얀의 앞에 도달했을 때, 그의 입술은 라얀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