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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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내 손을 맡긴 기분이야. 에리히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고, 문지르고, 때로는 꽉 움켜잡는 라얀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그러는 너야말로.’

네 입술이 내 입가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지 않느냐고 라얀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밀어내는 몸짓은 진심이 담기지 않아 금세 찰싹 붙었다.

‘그런데 왜 아까 아일라한테 웃지 말라고 했어?’

짧게 감탄사를 내뱉은 라얀이 조금 전에는 삼켰던 질문을 끄집어냈다. 에리히는 설마 그것이 다시 주제로 거론될 줄 몰랐다는 듯이 난처한 표정으로 라얀의 머리를 살살 만졌다.

‘그걸 꼭 들어야겠어?’

‘응.’

라얀은 눈을 굴리다가 씩 웃으며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에리히가 저렇게까지 난처해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왠지 장난기가 샘솟았다.

‘꼭 들어야겠어. 엘.’

‘하. 진짜…….’

괜한 말을 했다고, 에리히의 후회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그야, 아일라가 한때 너의 반려로 거론되었다고 했잖아.’

라얀은 기억을 되짚었다. 아. 언젠간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정말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였고, 정작 말한 자신은 잊고 있었다. 한데 에리히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에리히. 너는 혹시 천재야?’

‘그게 무슨.’

‘왜 그렇게 기억력이 좋아?’

눈을 반짝거리며 감탄하는 라얀을 보며 에리히는 어딘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그러니까, 거슬린 거야.’

귓불이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라얀은 그것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 좀 봐. 속삭이는 말에 에리히가 내리깐 눈을 들었다. 언제나 제게는 다정하게 휘어졌던 눈이 점점 차갑게 변했다.

‘네가 웃는 게.’

그러니까 웃지 마. 나직하게 말을 뱉는 에리히의 눈동자에는 라얀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

“…헉.”

라얀은 헛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갑작스럽게 뜨인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가슴을 가만히 들썩거렸다. 모자란 호흡을 헐떡이며 실재하는 과거와 악몽 같은 허구가 뒤섞였던 꿈을 천천히 의식 속에서 밀어냈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숨이 진정되고 나자 라얀은 자신이 에리히의 앞에서 쓰러진 것을 기억해 냈다. 어지럽고 영 기운도 없더니. 빈속에 무작스럽게 들이켠 술도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분명 길바닥에서 쓰러졌는데 왜 이렇게 푹신하지.

뒤늦게 자각한 라얀은 두리번거렸다. 그새 해가 진 터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이건 침대다. 이불자락을 움켜쥐며 사방을 경계했다. 누군가가 쓰러져 있던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눈꼬리를 치뜨고 주변을 살피던 라얀의 눈이 차츰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창가에 기대어 앉아 비스듬히 고개를 괴고 있는 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달빛에 부서지는 찬란한 금발도.

라얀의 눈매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그는 조심히 침상에서 발을 디뎌 내렸다. 살금살금. 발소리마저 죽인 라얀은 금세 에리히의 앞에 가 닿았다.

눈을 감고 있어 꿈에서 깨기 전에 보았던 푸른 눈은 볼 수 없었다.

“…….”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숨이 꺼지고 오를 때마다 날갯짓처럼 흔들렸다. 라얀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에리히. 숨소리와 함께 흩어지는 부름은 제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닳겠다.”

“아.”

한데도 그 부름에 반응하듯 어떤 기미도 없이 에리히가 입을 열었다. 서서히 뜨이는 눈은 나른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몇 번 깜빡이고 나자 금세 씻겨 내려갔다.

이 에리히는 기억이 없는 에리히니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됐는데. 라얀은 허둥지둥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헛발질을 했다. 무릎이 순간 꺾였다. 아. 넘어진다……. 그 순간, 그의 팔을 낚아채 끌어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두 번이나 붙잡아 안는 건 사양이라서.”

라얀이 제대로 서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놓아주었다. 떨어지는 온기가 아쉬워 순간 그것을 따라붙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제자리에 가지런히 두었다.

기대어 앉아 있던 창틀에서 훌쩍 몸을 일으킨 에리히는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초를 켜지도 않았는데 빛이 밝아졌다. 과거에도 그는 곧잘 이런 식으로 마법을 썼다. 아티사에서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수정구도 그렇고, 팔찌까지.

“마법에 익숙하군.”

그리고 눈썰미가 좋은 에리히는 익숙해 보이는 라얀의 모습을 금세 짚어냈다.

“보통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하기 마련인데.”

이제라도 놀란 척해야 하나. 고민하는 라얀을 비웃듯 에리히는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훌쩍 앞서가더니 이리 오라는 양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어.”

테이블 위에는 콩소메와 부드러운 밀빵, 구운 생선요리 등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먹어라.”

라얀은 도무지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 가만히 섰다.

“와서 먹으라니까.”

“…….”

“의원이 네 기력이 달려 의식이 소실된 거라고 했으니. 기가 막힌 일이지. 그딴 몸으로 술까지 마셨으니 몸이 축나지 않을 수가 있나.”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라얀은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의원이라니. 이곳은 어디인 걸까. 에리히를 발견하자마자 사라진 궁금증이 다시 고개를 들어 존재감을 드러냈다. 성은 아니다. 그러기엔 침구를 비롯해 이 방을 이룬 모든 것이 남루했다.

“여기는…….”

라얀은 겨우 입을 뗐다.

“네가 어디 사는지 모르니까.”

에리히의 답은 지극히 간결했다.

“왜. 설마 쓰러진 걸 길바닥에 두고 갔을까 봐.”

라얀은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에리히가 절대 그럴 리 없지만, 지금의 에리히는 기억도 없는데다가 성격도 조금―어쩌면 많이― 나빠 보였다. 물론 주점에서 라얀을 구해주기는 했으나,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혹은 최소한의 자비를 베풀더라도 아무 데나 던져두고 훌쩍 자리를 떠났을 것이라고 여겼다.

가만히 있자 그것을 긍정으로 여긴 에리히가 눈썹을 추켜올렸지만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며 재차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까와 달리 톡톡 치는 손짓이 거칠고 날카로웠다,

라얀은 엉거주춤 의자에 앉아 음식들을 둘러보았다. 꽤 오래 의식이 없었던 것을 증명하듯 음식들은 식어 있었다. 그래도 못 먹을 건 아니라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속이 비었을 테니 이것 먼저 먹어.”

맞은편에 앉은 에리히는 라얀의 손이 생선요리로 향하자 참견했다. 콩소메를 보며 까딱거리는 그를 보며 라얀은 앓는 소리를 냈다. 이게 더 먹고 싶은데. …라얀이 주저하자 에리히는 콩소메가 담긴 그릇을 제 쪽으로 밀어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저기 안 먹어…요?”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네 그 되다 만 경어는 뭐지? 예절에 대해 배운 바가 없나?”

이건 어쩔 수 없는 습관이었다. 고쳐야 하는 건 알지만 에리히의 온기 없는 눈을 봐도 자꾸만 과거의 그가 떠올랐다. 라얀이 답을 회피하자 에리히는 더 힐난하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서 결론을 내리고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뒤로는 라얀에게 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식기가 잘그락거리는 소리 외엔 달리 소음이 없었다. 콩소메가 생각보다 맛있어서 라얀은 내내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에리히를 흘끔거렸다. 조용하지만 열렬한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섬세하게 뻗은 이목구비와 또 아름다운 금발에.

“도통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군. 아무리 보기 힘들다지만, 몇 가닥 잘라줘야 하는 건지.”

에리히는 제게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 툭 내뱉었다. 기시감을 느꼈다.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말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머리카락을 몇 가닥 내어줬으나, 이번에는 그럴 리 없으리라는 것이 달랐다.

“…….”

라얀은 도로 접시에 코를 박았다.

불편한 식사는 라얀이 반절 이상을 비우고 더 이상 먹지 못하겠다는 호소 끝에야 끝이 났다. 에리히는 고작 그만큼 먹고 속이 차는 게 말이 되냐고 미심쩍어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다.

“…혼자 갈 수 있어요.”

에리히는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고집 아닌 고집을 부렸다. 가는 길에 또 쓰러질 생각이냐는 억지와 함께. 라얀은 거듭 사양했지만 에리히가 워낙 강경했다.

라얀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간이 훌쩍 지나서 알레야 이미 갔을 테니 별로 걱정하지 않지만, 그런 것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거처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모름지기 집에 살았으나, 자신은 아니었으니까. 특별히 불편함을 느낀 적 없었지만 에리히에게 보여줄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벌써부터 왜 마을이 아니라 바닷가를 떠도느냐는 눈으로 라얀을 보고 있었다.

“진짜 혼자 갈 수 있는데.”

기력이 없어 쓰러지긴 했지만 오늘이 다소 특별할 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길눈 어두워 제집도 못 찾으면서 혼자 갈 수 있다고?”

설마 동굴이 거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에리히는 코웃음을 치며 라얀의 의견을 간단히 묵살했다. 도저히 저 뜻을 꺾을 재간이 없었다. 내심 어떠한 기대도 싹텄다. 라얀은 한숨을 내쉬며 길을 잡았다. 에리히는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잘 따라왔다.

“여기는, 설마…….”

곧 그들은 동굴 입구에 닿았다. 기억은커녕 눈동자에 미미한 경악이 어렸다. 생활한 흔적을 발견하고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이제 다 왔어, 요.”

싹튼 기대를 잘라낸 라얀은 가보라는 듯이 눈치를 줬지만 에리히는 그를 보는 게 아니라 동굴 안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그에겐 모든 게 경악일 테지만, 라얀에게는 이만큼 편안한 공간이 없었다.

우선 그들의 추억을 간직한 곳이었으며, 바다와 가까웠다.

바다가 그를 거부한다 한들 제 근원은 바다였다.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곧잘 찾아오는 레탄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즐거웠고, 자는 것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진 못했다.

“대체 왜 이런 데서 살고 있지?”

인간 중에서는 길거리를 전전하는 부랑자도 많았다. 그에 비하자면 한 몸 누이고 쉴 곳이 있는데 제법 준수하지 않나. 하지만 에리히의 눈엔 그거나 이거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게 분명했다.

동굴 안을 휘젓던 에리히는 문득 멈춰 섰다.

“아!”

그의 발에 차인 것을 본 라얀은 걸음을 빨리했지만 에리히가 몸을 숙여 줍는 게 더 빨랐다.

“그건…….”

에리히의 손바닥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것은 금 간 팔찌였다.

라얀은 에리히에게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그는 간단히 손을 올리는 동작만으로 라얀을 피했다. 폴짝거렸지만 손에 닿지 않았다.

“그건 내 거야.”

다급해지니 의식적으로 쓰던 경어도 자취를 감췄다. 예의도 배우지 않고 무엇했느냐며 혓바닥에 칼날을 세우고 빈정거렸어야 할 에리히는 그것을 짚어내지 않았다. 에리히도 경황이 없어 보였다. 그의 관심은 온통 팔찌에 쏠려 있었다.

에리히는 팔찌를 허공에 띄우며 중얼거렸다. 빠르게 읊조리는 것은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어의 나열에 가까웠다. 그리고 라얀은 저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에리히는 제게 무언가 신기한 걸 보여주려고 할 때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었다.

과연, 팔찌가 빛나며 문양이 얽어졌다. 둥글게 그려지는 마법진의 수식을 확인한 에리히가 입을 다물자 빛이 시들었다. 둥실거리던 팔찌는 도로 에리히의 손바닥 위에 사뿐 내려앉았다.

“이건 어디서 났지?”

그것을 잡아챈 에리히가 라얀을 내려다보며 추궁했다. 애초에 기대를 한 적도 없지만 에리히는 이것을 자신이 줬을 거라는 가설은 아예 세우지도 않았다.

“누가 이것을 네게 줬나.”

“…….”

“대답해.”

에르하르트는 오늘 하루가 꽤 기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라얀을 찾는 과정이야 말을 더 보탤 필요도 없었다. 어쩐지 아슬아슬해 보이더라니 맥 빠진 인형처럼 쓰러지는 것을 잡아챌 때 철렁거리던 마음이라든가, 그냥 단순히 혼절한 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알아서 깨어나든 말든 두고 가도 상관없을 자를 굳이 의원에게 데려가 보이며 닦달한 것이라든가.

그뿐인가. 깨어날 때까지 옆을 지킨 것으로 모자라 동행하기까지 했다. 오늘 행한 일 중 그다운 일은 정말이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전부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혼자 갈 수 있는데.’

비실거리는 꼴을 보건대 또 가는 길에 쓰러질까 봐 에스코트해 주는 배려를 보였는데도 혼자 갈 수 있다며 계속 그를 보내려는 것을 모르는 척 무시한 것까지도.

집으로 가지 않고 어찌해 바다를 기웃거리나 했더니 동굴이 제 거처라며 대답하는 것에 기가 막힌 것도 잠시였다.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는 중 발치에 걸리는 웬 꾸러미 사이에서 눈에 익은 팔찌를 발견한 순간, 기묘한 하루가 정점을 찍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라얀이 실은 대단한 소매치기라 제 손목에 걸려 있던 팔찌를 탐내 훔쳐 간 게 아닌가,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만큼 제가 지닌 것과 유사했다. 갈라진 모양은 다르지만 여러 가지로.

그러니까. 마력을 품고 있다는 것까지도.

하여 마력을 훑었는데 자신이 짠 수식이 맞았다. 그리고 이것을 어찌하여 라얀이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제게 누군가와 착각했다고 했을 뿐, 자신과 아는 사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받았어. …엘이, 엘이 준 거야.”

그러니까 그건 내 거야. 겨우 하나 남아 있는 흔적인데. 눈가엔 물기가 없었는데 목소리는 마치 울먹거리는 것처럼 떨렸다. 어떻게든 닿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손짓은 차라리 간절하기까지 했다.

“…엘. 엘이라고.”

에르하르트는 애절한 손짓을 무시하며 라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또 그 이름이 나왔다. 그, 거슬리기 짝이 없는 이름이.

“그자는 대체 누구지?”

적어도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추측되는 이상 넘길 수가 없었다. 자신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자에게 당시의 수준으로는 온종일 개고생했을 것을 쉬이 내어줬을 리는 없으니.

“아니, 내가 직접 묻지. 어디에 있나?”

“…….”

“그자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어.”

거듭되는 추궁에 라얀은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에르하르트를 바라봤다. 새순 같은 눈에 순간 옅은 슬픔과 그리움이 어렸던 것도 같았지만 다시 들여다봤을 때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애는, 지금은 없어.”

“뭐?”

“언제 올지 몰라. …어쩌면 아주 안 올 것도 같지만.”

손은 가만히 두지 못하면서 말은 잘했다. 에르하르트는 직감했다. 아니.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게 지금 이 순간 확신이 되었을 뿐. ‘엘’이라고 불린, 감히 자신을 닮았다던 그자는 라얀과 애틋한 관계였다. 쌍방이 아니라면 최소한 일방의 관계는 될 법한.

저런 표정을 짓는데도 모른다면 머저리와 다를 게 없었다.

“…….”

언제 올지도, 아니 어쩌면 아주 안 올 자를 기다리는 어리석음이라니.

에르하르트는 제 생각의 궤적이 다른 쪽으로 향했다는 걸 자각하며 속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자신이 만든 것을 들고 있는 자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어느새 관심의 추가 라얀에게 기울어 있었다.

“돌려줘.”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다. 왜 자신은 그자에게 이런 것을 줬고, 그자는 이것을 라얀에게 넘긴 것인지. 또한 안 돌아올 수도 있다는 그자는 대체 누구인지도.

“응?”

그런 와중에 라얀은 간절한 표정, 애달픈 목소리로 호소했다. 에르하르트는 팔찌를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순순히 돌려줬다. 어쩌면 비어버린 기억을 채울 단서가 될 수도 있는 것을 버리고 싶었던 것도, 순순히 청을 들어주는 것도 모두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손이 절로 움직였다.

“…고마워.”

라얀은 팔찌를 소중히 움켜쥐며 감싸 안았다. 배알이 꼴렸다.

에르하르트는 도로 팔찌를 낚아채 버리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그의 팔목을 잡았다. 아까 쓰러진 걸 추슬러 안던 중 발갛게 자국이 났던 게 생각나 무심코 힘을 풀었으나 놓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라얀의 눈이 커졌지만 에르하르트는 수식을 읊으며 대기에 떠도는 마력을 마치 호흡하는 것처럼 쉽사리 움켜잡았다.

발아래로 마법진이 둥글게 떠올랐다.

그들의 모습은 빛에 둘러싸이며 가루처럼 부스러졌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는 고작해야 달빛과 그가 만들어낸 빛으로만 의지해야 했던 동굴이 아니라 성안이었다.

“캐번디 부인의 묘비에 …폐하!”

카렐은 희게 질린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시종장도 그와 안색이 다를 바가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오늘 밤 중에라도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고, 그 탓에 성의 사용인들은 혼을 쏙 뺐다. 아무리 단출하더라도 황제의 여장이었다. 빨라야 이틀 뒤에 떠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것이 불시에 당겨졌으니 누군들 정신없지 않을까.

저마다 바쁜 와중에 황제는 서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심기가 썩 좋아 보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시종장은 모두에게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 신신당부했고, 서재는 불가침 구역이 되었다. 적어도, 저녁 시간인데도 도통 기척이 없는 것에 의아해하던 카렐이 황제를 찾으며 문을 열기 전까지.

황제가 사라졌다.

어떠한 기미도 없이. 누구도 황제가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언제, 어디로 나갔는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침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혹시 몰라 찾아가 본 캐번디 백작 부인의 묘에도 없으니 슬슬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황제가, 새하얀 성벽을 혈육의 피로 물들여 피의 군주라 불린 에르하르트 헤셀러스가 어디에서 쉬이 당할 리는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황제라서.

게다가 황제는 모두의 두려움을 사는 한편, 적도 많았다.

황제를 찾기 위해 경비병을 풀어야 할지 의견이 오가던 찰나, 홀의 중앙에 빛기둥이 떠올랐다. 그리고 스러지는 빛 사이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폐하. 대체 말씀도 없이 어디에 다녀오신 건가요. 찾았습니다.”

카렐은 득달같이 다가왔다. 혹시 에르하르트에게 어디 변고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눈길이 분주했다.

“저뿐만 아니라… 폐하?”

에르하르트의 팔에 손을 얹으려던 카렐은 뒤늦게 그의 품에 누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곤 누구인지 짐작하는 양 미간을 좁혔다.

“이자는 그, 음유시인이 아닌가요.”

아침에 에르하르트의 뜻으로 자신이 쫓아낸. 카렐의 말에는 그런 뜻이 함의되어 있었다.

“어찌하여 이자와?”

“카렐.”

에르하르트는 카렐의 말을 가벼이 잡아챘다. 그러곤 여전히 손아귀에 움키고 있던 라얀을 그에게 떠밀었다.

“제르바로 떠날 때 데리고 갈 것이다.”

“…예?”

카렐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라얀 또한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것처럼 눈이 커졌다. 에르하르트는 그쪽으로 아예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마저 말을 이었다.

“폐하. 대체 무슨…….”

“이자에 관한 모든 일을 일임하겠다. 알아서 준비시켜.”

이것은 전부 제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되찾기 위한 일이다. 에르하르트는 불쑥 몸집을 키우는 속내 하나를 짓밟아 누르며 자신이 지금 충동적으로 행한 일에 다른 명분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이니, 고작해야 음유시인 따위의 의사를 중시할 필요 없다는 합리화까지도.

“…….”

라얀의 가늘고 흰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에르하르트의 소매를 붙잡을 것처럼 움찔거렸다. 달싹거리는 입술 틈 사이에 갇힌 말은 과연 가지 않겠다는 말일까. 아니면 따르겠다는 말일까.

어떤 말이든 들을 생각 없었다. 그것이 후자라면 더더욱이나.

“오늘, …늦었으니 내일 아침 제르바로 떠나겠다.”

이미 준비가 다 끝났으니 그의 지시 한마디면 당장에라도 마법 이동진을 구현할 수 있는데도 에르하르트는 아직 창백한 낯을 일별하며 일정을 고쳤다. 대답을 구할 필요 없는 통보와 함께 등을 돌려 중앙 계단에 발을 디뎠다.

* * *

수도 제르바.

잠깐이나마 온난했던 아르헨의 기후에 익숙해진 이들은 아직은 꽃봉오리조차 피지 않은 제르바의 추위에 저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제르바에 완연한 봄이 오기까지 아르헨에서 머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며, 겨울에는 황제께서 아르헨으로 휴양을 떠나면 좋겠다는 말까지.

황성의 시종, 시녀들은 예정했던 것보다 빨리 온 황제를 보고 좋은 날 다 갔다며 울상을 했다. 그리고 카렐은 무표정한 낯으로 그런 이들을 헤치며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는 무표정했으나 묘하게 불편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불안해 보였다.

카렐은 지난밤부터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다름 아니라 황제가 그 불면의 원인이었다.

‘이자에 관한 모든 일을 일임하겠다. 알아서 준비시켜.’

불쾌한 눈치라 곧장 내보냈더니 하루도 넘기지 않아 친히 데리고 왔다. 심지어 제르바로 데려가겠다는 말과 함께. 몇 시간을 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황제가 불쑥 돌아와 음유시인을 제게 밀었을 때, 카렐은 그 상황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단순한 변덕으로 넘겨짚기에 황제는 단 한 번도 충동적으로 군 적이 없었다. 황위에 오르는 과정이 다소 과격했을지언정 어떠한 잡음도 나지 않도록 모든 일을 진행한 것은 물론이고, 황위에 오른 뒤에 황권을 틀어쥐는 과정 역시 그랬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탄생한 위대한 마법사였으나 아직 젊고, 수도의 사교계에 경험이 없었다. 하물며 즉위 후 행보가 조용했던 편이라 은연중 무시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황제는 오랜 시간을 두고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썩은 뿌리를 한 번에 도려낼 수 있을 때까지.

이처럼 황제는 어떤 일에도 충동적인 적이 없었다. 전체적인 판을 관조하며 체스의 말을 움직이는 것처럼 냉철하고 빈틈없었다.

“폐하께서는?”

집무실 문 앞에 선 카렐은 길게 호흡하며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아무리 짧은 여정이라 해도 그렇지 여독이 풀리지도 않으셨을 텐데 벌써 국정을 살피시다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들어가시지요, 자작님.”

시종장은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옅은 잉크 냄새가 퍼졌다. 오래된 책 냄새 역시도.

“폐하. 피곤하지도 않으세요?”

카렐은 목소리를 한 음 높였다. 황제는 들고 있던 깃펜을 잠시 멈칫했으나 굳이 눈을 들어 그가 온 것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모든 게 다 신경에 거슬렸다.

“그자는 어찌할까요.”

그러나 가장 거슬리는 것은 역시나 제 말에는 눈짓조차 하지 않던 황제가 음유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고개를 들었을 때.

“제게 모든 것을 일임하셨으나 거처는 여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부드럽게 가다듬은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게 나왔지만 손톱은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카렐은 따끔거리는 통증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황제의 의중을 떠봤다. 그자를 대체 무슨 이유로 데리고 온 것인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어떤 일에도 충동적이지 않고, 변덕 없던 황제가 그자의 일에 한해서 유독 충동적이었으므로.

하여 낯설게 느껴질 만큼. 혹은 무심코 아르헨을 찾던 황제가 기억나 그를 부추긴 것을 후회할 만큼이나.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이를 황성에 들일 수는 없을 테니 역시 제 저택에 두는 것은…….”

그를 구해 구완할 때부터 그랬지만, 황제가 한순간도 가깝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삭풍처럼 마냥 차가운 그가 제게는 덤덤하게 구니 곁을 내어줬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도 냉랭하고 가차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한 번씩 물렀고, 때로는 자신을 존중했다. 카렐이 나긋나긋하게 조르는 것처럼 굴 때. 혹은 어둠 속에서 카렐을 바라보다가…….

카렐은 그 작은 다정함이 좋았다.

한편으로는 황제의 연인이라는 이름이 주는 달콤함을 사랑했다.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궁에 두지. 음유시인이었으니 궁정의 악사로 삼으면 될 테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미간을 찡그리다 편 황제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쾌했다. 불안이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 떠돌며 가시지 않아서 평소라면 쉬이 수긍했을 것을 계속해 말꼬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자는 궁중 예법에 미숙하여 궁에 두기에는 조금…….”

“아하. 그래?”

가벼운 추임새와 되묻는 말에 귓가가 화끈거렸다. 그게 꼭 과거의 너를 생각지 않느냐는 것처럼 들려서.

“…제게 일임하셨으니 잘 가르쳐 볼게요.”

카렐은 겨우 웃음을 그려내며 황제가 원할 대답을 내어놓았다.

황제는 그를 보다가 손을 저었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 왜 성가신 것을 치우는 것처럼 보일까.

“참, 그자가 도통 로브를 벗지 않는데 그것은 어떻게 할까요.”

“그건, …그냥 내키는 대로 하게 둬라.”

눈썹을 까딱거리며 잠시 생각에 골몰한 황제는 어울리지도 않는 관용을 베푼다. 카렐은 웃음을 잃지 않기 위해 입가를 바짝 당기며 나가야 했다.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카렐의 입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 * *

허공에 맴도는 공기는 서늘하고도 건조했다. 언제나 익숙했던 내음이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건 조금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르헨은 어디를 둘러봐도 푸르른 바다가 보였는데 낯선 이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라얀은 살갗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몸을 살짝 떨었다.

‘제르바로 떠날 때 데리고 갈 것이다.’

에리히의 그 말이 아마도 이 영문 모를 일의 시작이었다.

계단을 올라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기에 여념 없는데 누군가가 라얀을 이끌었다. 카렐이라고 불렸던, 자신을 성에 머물게 했으며 또한 다음 날 에리히가 원치 않는다며 내보냈던 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이 역시 폐하의 뜻이니, 따라오렴.’

그 역시 갑작스러운 일에 얼떨떨하고 한편으로는 불유쾌해 보였으나 곧 표정을 말끔히 정리하며 라얀을 전날 머물렀던 방으로 안내했다. 라얀은 그곳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밤을 꼬박 새웠다. 머리를 맹렬히 굴리며 상황 파악에 안간힘을 쓰다가 곧 결론에 도달했다.

에리히는 자신을 데리고 가려고 한다.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 무섭게 하늘의 어둠이 걷혔다. 라얀은 등 떠밀리듯 방을 나서야 했다. 대강 짐작은 했어도 막상 현실로 닥치니 행동이 굼떴다. 빛의 가루에 둘러싸인 채 눈을 깜빡이고 나니 모든 게 낯설어졌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라얀의 행동이 느리자 성가셔하며 재촉했다.

이리 오시오. 이리 오라니까. 자작께서, 저자는, …등등. 자신을 둘러싼 성화에 라얀은 떠밀리듯이 엉겁결에 움직여야만 했다. 정신 차리니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홀로 남아 있었다.

라얀은 생소함 속에서 난데없는 외로움을 곱씹어야만 했다. 정작 이 상황에 그를 내던져 둔 에리히는 보이지 않았기에 더더욱이나.

“알레한테 말한 것처럼 정말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됐네.”

알레가 더 이상 자신을 보러 오지 못하게 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말이 씨가 됐다. 잘된 일이다. 자신의 당부에도 알레는 믿지 못해 꿋꿋하게 올라왔을 테고, 그러다 보면 또 우연으로라도 한 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

라얀의 생각은 다시 에리히에게로 돌아갔다. 대체 왜 에리히는 자신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면서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일까. 또한 이후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아르헨은 어딘가 제 몸 누일 곳이 있었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공기부터가 낯선 이곳은 모든 게 생경했다.

라얀은 공기 중 부유하는 먼지만 보다가 몸을 벌떡 일으켜 창가 쪽으로 가서 바깥을 살폈다.

“…….”

역시 낯설기 짝이 없는 곳이다. 바다를 볼 수 없음에 더더욱.

삭막했다.

에리히라도 있으면 괜찮을 텐데. 어제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망설이다가 에리히의 행방을 묻자 그들은 이상한 것을 보는 눈으로 라얀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곧 무시했다.

라얀은 차마 삼키지 못한 한숨을 흘리며 낯섦을 밀어냈다.

대신에 좋은 점을 꼽아봤다.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에리히와 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이니 아샤와 맺은 태초의 서약을 어긴 것도 아니었다. 또한, 기억이 없는데도 자신을 데리고 온 이유가 있을 테니 언제고 볼 수 있으리라.

“…….”

라얀은 손을 움직이다가 흘러내리는 팔찌에 시선을 두었다. 보석에 금이 간 팔찌.

에리히의 마지막을 예고해 주었던 이것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에리히가 주었던 것들은 모두 다 아티사에 두고 왔기에 이것만이 유일하여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하여 버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소중히 여길 수도 없어 대충 눈에 보이는 곳에 두었다가 종종 에리히가 그리울 때면 한 번씩 꺼내 기억들을 곱씹었다. 한데 그것을 에리히에게 들킬 줄은 몰랐다.

이 팔찌를 노려보며 추궁하던 에리히가 꼭 바다에 내던져 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바다에 삼켜진다면 쓸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 아무리 라얀이라고 한들 찾지 못했으리라.

라얀은 팔찌를 꼭 쥐며 에리히가 손목에 매달고 있던 팔찌를 떠올리기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랬으면서도 팔찌를 차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 죽어가던 라얀을 상기시키듯이 보석에 반쯤 금이 간 그 팔찌를. 라얀이야말로 그것을 낚아채 바닷물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유예되었을 뿐, 언젠가 그것은 금이 가 산산조각으로 깨질 테니.

라얀은 에리히와의 추억을 손으로 꽉 움켜쥐다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고개를 휙 돌렸다. 과연. 얼마 후에 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났고, 이어 문이 열렸다.

카렐이었다.

라얀은 생소한 풍경 사이에서 그나마 익숙한 얼굴을 보자 반가움이 치밀었다. 다가갈 듯 말 듯 몸을 움직이자 멀찍이서 바라보던 카렐은 곧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다가왔다.

“도착해서는 정신이 없어 바로 챙겨주지 못했다. 불편한 곳은 없고?”

모든 게 불편하지만, 그래도 에리히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언제든 그를 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견디지 못할 것도 없어서 라얀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대는 이곳에 머물러야 할 테니 불편하더라도 참았어야 했을 텐데, 어디 불편한 곳은 없다니 그나마 다행이로군.”

카렐은 상냥한 듯 쌀쌀했다. 아티사에 있을 적엔 이나마도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바깥에서 몇 년 살았다고 미묘한 뉘앙스를 짚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아래에 깔린 의미까지야 결국 알아채지 못했지만.

“폐하께서 그대에게 궁정의 악사라는 지엄한 책무를 주셨다.”

“…….”

“내색지 않으시더니 그대의 노래에 감명을 받으신 모양이야.”

“…악사?”

라얀의 대답에 카렐은 찰나 멈칫했다.

그때도 생각한 거지만 음침하게 뒤집어쓴 로브 아래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정말 사람의 정신을 쥐어뜯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매혹적이었다. 황제는 저 목소리에 반하기라도 한 걸까. 잠깐 든 생각에 카렐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곳에서처럼 네 노래를 파는 거지.”

어차피 잠깐의 흥미에 불과하다. 황제는 그 무엇에도 관심 가지며 애착을 준 적이 없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유일한 핏줄인 마리엘마저도, 황제의 온전한 애정을 받아본 적 없지 않은가.

하물며 무엇이 그렇게도 자신 없는지 한사코 얼굴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고집부리는 자에게 황제가 오래 눈길을 줄 리 없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그대의 후원자가 될 거야.”

황제가 이자에게 흥미가 식으면 그때는 도로 아르헨으로 돌려보내면 그만이다. 환송을 원치 않으면 적당한 재화를 쥐여 주어 쫓아내면 되리라. 재물에 썩 관심이 많아 보였으니 그것으로 어디서든 자리 잡겠지. 그러니 더 이상 그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거든 나를 찾으면 된다.”

카렐은 이곳에 오면서 내내 중얼거리던 말로 마음을 다시 다스렸다.

“저기…….”

“카렐 아이작. 아이작이라고 불러라.”

“응. 아이작.”

부르라는 대로 불렀는데 카렐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대체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하는 거지, 하고 중얼거렸다. 자기 딴에는 들리지 않겠다고 하는 것 같은데 다 들렸다.

“그러니까…….”

“라얀.”

“뭐?”

“나는 라얀이야.”

“…그래. 라얀.”

이름을 몰라 머뭇거리는 것 같아 알려줬더니 그는 당황한 낯을 하다가 마지못해 이름을 불렀다.

“내일부터 시종들이 네게 궁중의 예법을 알려줄 거다.”

그것을 꼭 알아야만 되는 걸까. 하지만 그가 바깥에 머무른 3년 동안 깨달은 게 있다면, 인간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얻고자 할 때는 내어줘야 했고 지켜야 할 것도 많았다. 때로는 불편했지만 어찌 보면 아티사에 있을 때와 결은 같았다.

율법이나 흑해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묵시적인 약속을 지켜야 했듯, 이곳도 지켜야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에리히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또한 그렇게 말을 편하게 해서는 안 되겠지.”

아. 라얀은 깨달음을 담아 탄식했다. 관찰해 본 결과 또래로 보이는 인간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편이라 그런지 곧잘 말이 편하게 나갔다. 그래서 막 뭍에 올라온 후로는 그로 인한 곤란도 겪어 나아졌는데 무심코 이럴 때가 있었다.

“응. 아니, 네.”

라얀은 얼른 말을 고쳤다. 카렐은 그 또한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했지만 금세 갈무리했다.

“그러면 너도 정신없을 텐데 쉬렴.”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등 돌려서 나갔다.

“…….”

닫히는 문을 사이로 라얀 홀로 남았다.

* * *

바다가 아무리 그를 허락하지 않고 밀어냈어도, 라얀은 결국 태생을 바다에 두는 인어였다.

그는 연안에 둥실둥실 떠다니며 레탄과 재잘거렸고, 종종 산호 사이에 몸을 비집어 해초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에리히는 동굴에서 생활하는 라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자신에게 있어 그곳만큼 편한 공간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다. 모든 것이 다 낯설게 구성되었다. 낯선 사람, 낯선 공간, 낯선 공기까지.

거기다가 난데없이 익히게 된 궁중 예법은 어려웠다. 하지 말라는 것도 많으면서, 해야 할 것 역시도 모래알처럼 많았다. 눈치껏 익힌 인간들의 규범이 구체화되어 그를 짓눌렀다. 아니, 어쩌면 더 까다로운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이 정도만 익혀도 되겠군.”

카렐은 후원자이니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한 게 무색하게도 몇 번 보지 못했다.

‘잠시 영지에 일이 생겨서. 내가 없어도 어려울 건 없겠지?’

통보하듯 한마디를 던지곤 이후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얀의 궁중 예법을 봐준다며 들락거리는 필립은 퍽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는 양 까칠하게 굴었다.

라얀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의 말을 새겼다. 인간들은 조금, 복잡하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며칠 사이 좋아졌어.”

처음 받는 칭찬에 라얀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필립은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손이나 꼼지락거리는 남자를 바라봤다. 가뜩이나 바쁜데 웬 출신도 알 수 없는 평민 하나가 궁중의 음유시인 자리를 꿰차더니 제게 일을 더 얹어주어 짜증 났는데 며칠 지나니 수그러들었다. 이상한 데서 상식이 없지만 배움은 빨라서 생각보다 성가시진 않은 탓이다.

그 사이로 비집어 들어온 것은 호기심이었다.

이자는 과연 누구인가. 황제가 아르헨에서 데려오고, 후원자가 그의 연인인 아이작 자작이라기에 어떤 대단한 배경이 있나 했으나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황제는 그를 음유시인으로 들여놓고 며칠 동안 찾지 않았고, 자작은 자신이 잠시 자리 비운 사이 잘 살펴달란 당부 한마디 없이 영지로 떠났다.

“그런데 꼭 로브는 계속 뒤집어쓰고 있어야겠어? 음침해 보이게.”

또 마냥 아무것도 아니기엔 특혜도 받았다.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궁에서는 얼굴을 가리지 않는 게 법도인데도 자작은 폐하의 뜻이니 본인이 정 원치 않아 하면 굳이 탈의를 강제하지 말라고 했다. 얼굴에 무슨 치명적인 결함이라도 있나. 혹시 눈 뜨고 보지도 못할 만큼 못생겼나.

하지만 로브 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희고 섬세한 손가락은…….

“…정말 음침해 보여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에 시선을 빼앗겼던 필립은 풀 죽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처럼 깨끗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혹적이다. 노래 부를 때가 궁금할 만큼.

오브1)의 시종, 시녀들은 저자의 목소리를 들은 뒤로는 아닌 척하면서 관심을 표하며 호의를 품었다. 낯을 가리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호의적이고 말랑거리는 성격 탓일 수도 있지만. 궁중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성격이었으니까.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지레 찔려서 그냥 너 알아서 하라며 확 내지른 필립은 황급하게 나섰다.

라얀은 필립이 나간 쪽엔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생각에 골몰하며 로브를 살폈다. 자신이 로브를 고집하자 카렐이 준비한 것으로 이전에 입었던 것보단 밝은색이었다. 얼굴을 가린 터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로브에는 그의 신분을 보증할 수 있는 문장까지 수놓여 있었다.

혹시 에리히도 자신을 음침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재회할 때부터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달리 어떤 내색은 없었다.

“…….”

습관은 과거와 비슷하지만 낯선 면도 많다. 어쩌면 그는 숨기는 것에 능숙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라얀이 예전보다 아주 조금이지만―그래서 티도 안 나지만― 거짓에 능숙해진 것처럼.

“에리히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싫은데.”

라얀은 로브를 만지작거렸다. 망설이던 손길이 머뭇거리며 머리에서 로브를 걷어냈다. 하나로 묶지 않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듯이 삐져나왔다.

혼자 있을 때야 로브를 입고 있진 않지만, 이곳에 온 이후로는 새까만 어둠이 드리워져 아무도 저 방문을 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을 때만 벗었다. 그새 습관이 들었는지 목덜미에 휑하니 닿는 공기가 어색했다.

로브를 의자에 걸쳐둔 라얀은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아.”

겨우 의자의 등받이를 붙들어 넘어지는 것을 모면했지만 방금까지도 혈색이 돌았던 얼굴은 금세 핏기가 가셔 창백해졌다.

그러니까, 원천인 수호석을 잃고, 아티사에서 추방당했어도 라얀은 결국 인어였다. 물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 편하다고 했지만 라얀이 동굴을 거처로 삼은 것은 이런 이유였다. 바다가 그를 밀어낸다 한들 때때로 본신으로 있을 시간이 필요해서.

며칠 내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려니 힘든데 수백 년 전 지상의 인간들과 인연을 맺어 추방당했다던 인어들은 대체 어떻게 견뎠는지 궁금했다가 금세 깨달았다.

수호석의 유무. 그 차이다.

그것이 없어 라얀은 더 이상 제 권능을 완전하게 행사할 수 없는 반쪽짜리가 되었다.

“여기는 바다가 없다고 했는데…….”

라얀은 끙끙 앓으며 중얼거렸다. 저번에 살짝 떠봤을 때 카렐의 황당한 표정이라니. 그는 헤셀러스인이라면 당연한 상식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며 되받아쳤고 라얀은 졸지에 인간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상식이 없는 인어가 되었다.

‘대신 황성엔 아주 아름다운 호수가 있지. 그대나 나나 갈 수는 없는 곳일 테지만.’

대체 아는 게 있느냐는 묘한 뉘앙스 뒤에 흘러나온 말을 기억한다. 호수. 호수. …라얀은 그것을 곱씹으며 가빠지는 숨을 골랐다. 라얀의 눈이 흘끔 창문 너머로 향했다.

아직은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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