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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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포위할 때까지만 해도 다소 조심스러웠던 인간들은 에리히가 떠난 뒤로 금세 변덕을 부렸다. 그들이 막무가내로 다룰 때마다 밧줄에 살갗이 쓸려서 아팠다.

그 과정에서 여미고 있던 로브가 벗겨졌다. 물결처럼 쏟아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라얀의 얼굴이 드러날 때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은 노골적이었다. 차마 삼키지 못한 탄식이 들리기도 했다. 라얀은 얼굴을 가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피하자 라얀을 붙잡고 있던 자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다루는 손길도 마치 민망함을 감추려는 것처럼 더욱 거칠어졌다.

라얀은 그들이 흔드는 대로 움직였다. 저항해야 하는데, 이 자리에서 당장에라도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도저히 그럴 만한 의욕이 없었다.

‘자꾸 입가에 뭘 묻히면서 먹지.’

쿠키를 먹다가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주던 에리히는 이제 없었다. 가끔 이상한 맛이 나는 것을 주고서 장난스럽게 웃던 것이나 반딧불이를 보여주던 모습도, 눈을 마주치다가 입꼬리에 입술을 맞대던 것도, 툭툭거리면서도 결국은 상냥했던 모습 역시 없었다.

3년 만에야 겨우 만난 에리히는 무심한 눈으로 라얀을 대했고, 기어이는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제압하려 들었다. 낯설었다. 상실감에 돌연 마음이 지끈거렸다.

라얀은 시큰거리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데리고 왔습니다.”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던 라얀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라얀이 불편한 몸을 뒤채기 무섭게 제게 겨누어진 창이 어깨를 아프게 눌렀다.

“그만.”

어딘지 언짢은 목소리에 짓누르던 창이 거두어지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포박도 풀어라.”

“폐하. 아직 신원도 알 수 없는데 포박까지 푸는 것은…….”

“짐이 직접 손을 댈까?”

에리히의 으름장에 살갗을 할퀴던 밧줄까지 풀어지자 숨통이 트였다. 라얀은 쓸린 손목을 만지작거리면서 눈만 흘끔 올렸다.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아서 하는 양을 지켜보던 에리히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찰나 손이 제 쪽으로 뻗어질 듯 움찔거리는 것도 같았으나 착각인 양 이내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라얀이 그를 멍하니 보자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기울인 채 발목을 까딱거리며 내려다봤다.

“아까도 그렇고, 왜 내 주위를 서성거리는 것처럼 느껴질까.”

“…….”

“응?”

상실감을 곱씹는 중에도 억울한 감정이 불쑥 치밀었다.

물론 이번에는 에리히가 보고 싶어 기웃거리다가 붙잡힌 게 맞지만, 낮에는 정말로 우연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따지자면 에리히가 자신을 찾아온 것에 가까웠다. 라얀은 계속 거기에 있었으니까.

그를 기다리면서. 혹은 천천히 스러져 가면서.

“나는 인내심이 그렇게 좋진 않아.”

톡톡. 에리히는 리듬감 있게 팔걸이를 두드렸다. 라얀은 반박하는 대신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에리히는 인내심이 좋지 않다고 말한 것치곤 꽤 오래도록 재촉하지 않았다. 침묵은 아주 길게 이어졌다.

그를 보면 자신도 성년이 되었다고 자랑하고 싶었는데. 손을 맞대 얼마나 차이가 줄어들었는지도 보고 싶었고, 더 이상 어떤 제한도 없이 오래오래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며. 어쩌면 너의 세상에서 발붙이고 살아갈 수 있으니 평생 함께하자는 고백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라얀은 그와 할 수 있었던, 혹은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할 수 없었다. 손을 맞댈 수도, 나란히 설 수도, 어디도 갈 수 없었다. 성장한 자신을 보며 진심으로 기뻐해 줄 에리히의 모습조차 지금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무엄하다. 황제 폐하께서 하문하시지 않나.”

라얀이 생각의 파도에 잠겨 허우적거리느라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눈치를 보던 이가 윽박지르듯이 재촉했다. 인간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 나왔을 때, 라얀은 무심코 에리히를 바라봤다. 여기서 제게 질문을 한 이도, 생각해 보면 모두가 서 있는 중에 앉아 있는 이도 에리히가 유일했다.

사내가 이르는 황제가 누구인지 굳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지내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황자가 돌아와 아비와 형제들의 피로 적신 황좌에 앉았다고. 어찌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새하얀 황성이 붉은 피로 물들어 한참을 가시지 않았다고. 하여 황제는 한참 동안 피의 군주라고도 불렸다.

한데 그자가 다름 아닌 에리히였다.

‘나는 아버지의 자리를 탐하려 해.’

라얀은 문득 아비의 자리를 탐하려 한다던 수년 전의 그를 떠올렸다. 기억은 틈 없이 짜 맞춰졌다. …에리히는 기어이 그때의 다짐을 이룬 것이다. 기뻤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그러니까, 그가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슬펐다.

점점 서늘해지던, 때때로 호흡을 멈추던 에리히가 떠올랐다. 무력하기만 했던 자신의 모습도. 이미 아득해진 과거의 기억일 뿐인데도 생생하게 떠올라 라얀을 괴롭게 만들었다.

“경의 인내는 짐보다 짧군.”

라얀이 결국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동시에 사내를 향하는 에리히의 목소리가 돌연 뾰족해졌다.

“…송구합니다, 폐하.”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짐작한 사내는 언제 윽박질렀냐는 양 잔뜩 주눅 들었다.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에리히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기엔 고개가 아프기도 했고, 다정함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서늘한 눈빛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에르하르트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건 역시 익숙하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던 차였다. 에리히가 라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아.”

붙들린 턱이 아팠다. 그가 짤막하게 신음을 흘리자 턱을 쥐고 있던 악력이 약해졌다. 에리히를 보자 그는 거둔 손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3년 새에 다채로웠던 표정은 무표정으로 수렴해 얼굴만 보고서는 그의 기분을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저건 내심 당황했을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습관이었다. 라얀에 대한 기억은 공백이지만 습관만큼 여전했다.

낯섦과 서글픔이 조금 가셨다. 이제야 그가 아는 에리히 같아서.

“…엘.”

반가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무심코 에리히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또 그렇게 부르는군.”

자꾸 이렇게 먼저 티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니까,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내가 누군가와 닮아 착각했다고?”

되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이상하게 가누었다. 끄덕이려다가 멈칫하고, 내저으려다가 다시 끄덕거린다. 우스운 모양새였으나 에르하르트는 그다지 웃음이 나지 않았다.

되레 짜증이 났다. 웬 어린 여자아이의 애칭으로 쓸 법한 애칭으로 불리는 자와 자신을 착각하다니. 자신을 이룬 것 중 착각할 만한 요소가 한 군데라도 있던가.

선황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속되게 이르자면 쓰레기에 가까운 작자였으나 유일하게 얼굴 하나만큼은 흠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데 없는 자였고, 에르하르트는 아비의 생김새를 가장 탁월하게 닮은 아들이었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감히 그를 누구와 착각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자는 대체 누구기에 저토록 애절한 눈빛을 하나.

“너.”

“나는 라얀이야, …요.”

“…….”

에르하르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이 안 나왔다. 엉성한 경어는 굳이 지적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겠고, 그가 불러줄 것도 아니며 궁금해한 것도 아닌데 굳이 이름을 알려준 것까지.

한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심장이 발치로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다. 까닭 모를 황망함이었다. …남자, 아니, 라얀은 에르하르트가 여러 가지 까닭으로 말문을 막힌 틈을 타 조잘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 따라다닌 거 아닌데.”

“…….”

“아니. 지금은 내가 온 거지만 아까는 에리, …폐하가 내가 있는 쪽으로 온 거잖아요.”

아까 길었던 침묵은 착각이었다는 양 말도 많았다. 그렇지 않으냐며 눈을 찡긋거리는 건 또 어찌나 뻔뻔한지. 저건 유혹하는 걸까. 무심코 저러는 걸까. 그에 앞서 살아오며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한 자가 있기는 하던가. 한데도 거슬리는 건 저따위의 것들이 아니었다.

“건방지게 굴기는.”

분명 빗겨 나가도록 쐈는데 파편이라도 튀었는지 붉은 생채기가 난 하얀 뺨이라든가, 흐트러진 차림새, 포박당했을 때 쓸렸는지 발개진 손목, 그리고 또…….

“노예 출신이라 예의를 배우지 못한 건가.”

드러난 발목에 새겨진 노예의 인이 그랬다.

날 선 말을 쏟아낸 에르하르트의 시선이 그리로 향하자 라얀은 낭패감 어린 표정으로 로브를 끌어내려 가는 발목을 감추었지만 늦었다. 그가 본 뒤에야 가려봤자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건 그런 게…….”

라얀은 변명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다.

들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찍힌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쓰임새야 알만했다.

“처음 만난 것은 네 말대로, 너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인정하지.”

에르하르트는 제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새겨둬라. 이후로의 만남에 나의 의도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이자가 제 기억의 여백이 아니라면 굳이 만나야 할 필요는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라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선명한 녹안은 물기라도 머금어진 듯 일렁거렸다. 저 눈에 홀리면 나라 하나를 멸망시켜 달래도 능히 해줄 수 있겠군.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에르하르트는 그것을 급히 털어냈다.

“일러둘 테니 돌아가도록.”

“…….”

“다음에는 이렇게 몸 성히 돌아가지는 못할 테니 서성거릴 생각도 말고.”

에르하르트의 손은 아주 잠깐, 라얀의 뺨 근처를 맴돌았다가 거두어졌다. 꾹 주먹을 움켜쥔 그는 양손으로 문을 밀어 빠져나갔다. 시선이 계속해 따라붙었다.

홀로 남은 라얀은 의기소침해졌다. 가만히 침잠되어 있던 그는 가려서 이제는 보이지 않는 발목을 문질렀다. 이건, 제가 너무 인간들을 선의로만 봤던 결과였다. 그러니까 어리석음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럴 만했다. 그가 알고 있는 인간이란 에리히뿐이었다. 그가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표본이었다. 에리히는 겉과 속이 같은 인간이었고, 제게 단 한 번도 거짓된 적도 없었으며,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에리히 같을 줄 알았다.

‘너는 왜 집도 없이 그러고 있지. 고아인가? 갈 데가 없어?’

바다를 등지고 나자 라얀은 정말이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깥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얕았고, 그나마도 당장은 효용성 없는 것들이 전부였다. 그런 라얀을 눈여겨본 이가 선뜻 호의를 내밀었다. 몸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라얀은 금세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무지함으로부터 발생한 신뢰는 결국 발목의 낙인으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날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주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먹었고, 통증에 눈을 떴을 때는 족쇄로 매인 발목에 붉은 화인이 새겨진 뒤였다.

아픔과 몽롱함 사이에서 경황없는 중에도 벗어나야겠다는 본능에 그치의 얼굴을 주먹을 후려치고 도망쳤다. 족쇄가 매여 있었지만 그것은 라얀이 몇 번 다리를 세게 걷어차자 헐겁게 풀렸다.

그때 피가 흐르는 코를 부여잡고 자신을 보던 얼빠진 표정만이 기억에 선명했다.

그게 물정 모르는 어린애를 꾀어내 납치한 다음 노예로 팔아치우는 수법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제 발목에 아픔과 함께 남겨진 흔적이 노예에게 찍는 것이라는 것 역시도 그때 알게 되었고.

“더 세게 때려주는 건데…….”

이렇게 흔적이 오래가는 건 줄 알았더라면 더 세게 때려줘서 본때를 보여주는 건데. 아니면 상어들에게 던져줄걸. 아니. 그건 조금 잔인하니까, 그냥 바다에만 빠트려도 괜찮을 것 같지만. 어쨌든 그렇게 두고 온 게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후회가 됐다. 그렇다고 다시 찾아 덜 풀린 분을 풀 것도 아니었지만.

“…….”

발목을 툭툭 매만진 라얀은 몸을 일으켰다.

에리히는 떠나버렸고, 다시는 만날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을러댔다. 그것을 곧이곧대로 들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오늘은 여기 있어봐야 아무 소득도 없을 것이다.

또 제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지도 못한 에리히의 냉랭함을 견디는 일은 상당히 힘들고 버거웠다.

동굴로 가서 에리히와의 과거를 곱씹으며, 그의 흔적을 덧그리다 보면 조금은 나아질 것이다.

아까 에리히가 나갔던 문을 열었다. 붉은 융단이 눈을 아프게 찔렀다. 비척거리며 나가자 바깥에서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이들이 시선을 보냈다. 방 밖으로 나오기 전에 깊게 뒤집어쓴 로브를 꾹 눌러 내리며 그들의 눈길 속에서 온 길을 거슬러 갔다.

기운이 없다. 배도 고팠다. 오늘 에리히를 만난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걸 뒤늦게 자각했다. 하지만 서늘했던 눈빛이 떠올라 또 식욕이 멀리멀리 물러났다.

“…….”

한숨을 삼키며 걷던 라얀은 멈칫했다. 그의 앞으로 누군가의 신발코가 보였다. 혹시 에리히일까. 제게 못된 말을 한 걸 후회하나. 아니면 그새 기억이 일부나마 돌아온 게 아닐까. 반색하며 고개를 번쩍 든 라얀의 얼굴에는 금세 실망의 기색이 번졌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이곳에 처음 보지 않는 얼굴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에리히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이는 라얀을 쭉 훑었다. 그게 집요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대가 혹여 그 음유시인인가?”

부쩍 시선이 불편하여 어쩔 줄 모르던 라얀에게 질문을 가장한 확신이 날아들었다. 라얀은 괜히 고개를 돌려가며 온몸을 살폈다. 티가 나나. 과거의 일 이후로 얼굴이 드러날세라 온몸을 싸맸기에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카나반 경이 이르기를 음유시인은 항상 짙은 색의 로브를 뒤집어쓴다고 하더군.”

“아.”

그렇게도 특정을 지을 수가 있었나. 얼굴만 드러내지 않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 어쩐지. 광장의 과일 가게에 들를 때면 상냥하게 굴더라니. 때로는 금화를 받지도 않고 더 얹어주기도 했다. 그게 다 이유가 있는 호의였다.

“정말 그대의 노래를 들으면.”

사내는 잠깐 주저했다.

“잠을 잘 이룰 수가 있는가?”

하지만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이 궁금한 바를 물었다.

이번에는 라얀이 머뭇거릴 차례였다. 수호석을 잃어 제 원천을 잃었다고 해도 타고나는 고유의 힘이 있다. 아샤가 치유할 수 있듯, 라얀은 평온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원래 인어의 노래엔 인간들을 홀리는 힘이 있기도 했다. 그런 것이 전부 섞인 탓인지 굳이 마력을 담지 않아도 라얀의 노래를 듣고 안정을 찾는 이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긍정하기엔 꺼려졌다.

주저하는 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여긴 사내의 안색이 밝아졌다.

“혹시 이곳에 머무르며 나를 도와줄 수는 없을까.”

“…….”

에리히가 나가라고 했는데. 그리고 에리히가 가장 높은 사람이 아닌가. 그 말을 삼킨 채로 우물쭈물하자 라얀이 주저하는 이유를 파악했는지 사내는 걱정할 것 없다며 손을 저어 웃었다.

“나는 카렐 아이작이다. 어차피 길어봐야 이틀일 테고, 그대가 머무르며 발생하는 일은 내가 책임지지. 폐하께도 내가 직접 설명 드릴 테고.”

“…….”

“언짢아하실 수도 있지만 그대의 노래가 카나반 경의 말대로 정녕 불면에 효과가 있다면, …나는 폐하께서 여기 머무르는 며칠이나마 평온하시길 바라니까.”

마지막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라얀은 똑똑히 들었다. 고작해야 며칠 머무르고 떠난다는 말도 신경 쓰였지만 그것은 일단 뒤로했다. 라얀에겐 당장 다른 말이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카렐의 말은, 꼭 에리히가 쉬이 잠들지 못하는 것처럼 들렸다. 라얀은 에리히를 떠올렸다. 아까는 그를 보고 막연히 반가워하느라, 자란 그를 보느라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 눈가가 조금 거뭇거뭇했던 것도 같다.

왜. 잠을 못 잔다며 투덜거릴 때조차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던 탓인지 에리히의 건강에 부쩍 예민한 라얀은 조바심이 났다.

“어때? 사례를 후하게 치르지.”

“좋아요.”

사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인간들의 화폐는 제게 크게 유의미하지 않았다.

“…….”

라얀이 냉큼 수락하자 카렐은 그를 바라봤다. 라얀의 목소리에 놀란 듯도 했고, 입가에 떠오른 웃음이 한편으로는 비웃음 같기도 했다. 인간의 감정을 파악하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이리로. 머물 곳을 안내하지.”

라얀이 그의 웃음을 헤아리기에 앞서 표정을 갈무리한 카렐이 몸을 돌렸다. 라얀은 그 뒤를 따랐다.

길이 헷갈리는지 한 번씩 멈추던 카렐을 뒤따라 걷던 라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티사의 제 궁전만큼은 아니지만 넓고 아늑했다.

“노래는 발코니에 나가서 부르면 된다. 그러면 폐하께서도 들으실 수 있을 테니.”

“…….”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저기 종을 흔들면 되고. 또, 앞에 경비를 세워둘 테지만 이는 만약을 위함일 뿐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자신이 두리번거리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카렐은 혹시 불편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저 종을 흔들면 된다며 일러준 다음 곧장 나갔다. 그가 나간 뒤 사방을 둘러보던 라얀은 곧장 발코니로 향했다. 넓게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그의 바다엔 달빛이 잔물결에 일렁였다.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사랑하는.

그러나 라얀은 그가 등져야만 했던 바다를 보며 감상에 젖는 대신 고개를 올렸다.

이곳의 풍경은, 익숙하다. 그가 에리히를 기다릴 때마다 머물렀던 바다였으므로. 그렇다는 건 에리히가 머무르는 침실도 이 근처라는 뜻이었고, 어쩌면 이 위에 있을 수도 있었다.

혹시 듣고 있다면, 라얀은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왜 잠을 못 자는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지.

이제 너를 괴롭히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 평온했을 텐데 왜 너는 그토록 날 서 있는지. 혹시 무언가가 너를 또 힘들게 하는 것인지.

“…….”

라얀은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부풀어 오를 만큼 크게 호흡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어의 언어가 그의 입술 틈에서 선율에 실려진 채 조각조각 흩어졌다. 깨끗하고 풍부한 목소리가 한 음, 한 음에 평온을 실었다.

“ɮהזתעמ…הװשףד…….”

끼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아, 하고 짜증스러운 듯 한숨을 내뱉는 소리 역시도.

내려오려나. 아니면 거슬린다며 위층에서 자신이 있는 쪽으로 또 아까 제게 겨누었던 그것을 다시 겨눌까.

내심 긴장이 됐으나 라얀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끊어질 듯 말 듯한 노랫소리가 완전히 사그라들기 전까지, 위층의 창문이 도로 닫히는 일은 없었다.

라얀은 부디 에리히의 이 밤이 평온하기를 바랐다.

* * *

“건방진 짓을 했던데.”

나직하게 이르는 말에 막 트레이를 들고 오던 카렐이 순간 멈칫했다. 에르하르트는 그것을 흘끔거리다가 무표정한 낯을 했다. 그는 보좌관이 건네는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다시 말을 툭 던졌다.

“허락도 없이.”

“카나반 경이 그가 음유시인인 것 같다기에…….”

몇 발짝 거리를 좁힌 카렐은 곧장 눈썹을 찌푸리며 호소했다. 에르하르트는 대꾸하는 대신 확인하던 서류를 보좌관에게 넘기며 그를 질책했다.

“이딴 식으로 작성해 올릴 거면 차라리 올리지 말라고 해라.”

“예? …예.”

이런 걸 서류라고 봐야 하는 눈이 괴롭다며 신경질을 내는 에르하르트의 모습에 보좌관은 당혹스러운 낯을 했다. 힐난이 날아오기 전 겨우 대답했으나 얼떨떨한 기색이 다분했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나?

자신이 보기에도 엉망인 서류였다. 황제는 업무를 처리하는 데 극도로 결벽적인 성격이었다. 마음에 차지 않으면 외가이자 반정의 공신이나 다름없는 윈스턴 공작이라 할지언정 눈감아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실정이니 올리면서도 쏟아질 독설을 각오하다 못해 심호흡까지 하고 들어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하게 넘어갔다.

“폐하.”

카렐 아이작이 황제를 불렀다. 황제는 그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제 쪽으로 이만 나가라는 듯이 손짓했다. 사랑싸움인가. 아니,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 같긴 하지만. 호기심이 생겼으나 혹여 기분 나빠진 황제가 변덕을 부려 삼킨 독설을 쏟아내기라도 할까 봐 도망치듯이 나갔다.

“저는 단지 폐하의 불면이 염려되어서.”

보좌관이 나서자마자 카렐은 얼른 말을 붙였다.

“혹여 몰라 문 앞에 경비병을 세워 철저히 경계했고, 또… 아니, 아니에요. 제 행동이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거라면 지금 바로 그자를 내보낼게요.”

“왜 짐의 눈치를 살피지? 체류시킨 것도 네 뜻이니, 보내는 것도 네 뜻이어야지. 카렐.”

정작 에르하르트의 말투는 아까와 다를 바 없었다. 되레 평소보다 부드러운 듯도 했다. 하지만 카렐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

“너도 그만 나가봐라. 쉬어야겠으니.”

물러나라는 말에 카렐은 머뭇거리다가 몸을 뒤로 물렸다. 카렐은 아마 이 방을 나서자마자 곧장 아래층에 머물게 한 사내를 성 밖으로 쫓아낼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에르하르트는 굳이 그를 붙잡아 세우지 않았다.

탁.

조용히 문이 닫혔다. 아무도 없는 공간 속, 에르하르트는 의자에 몸을 늘어트렸다. 그의 시선은 조금 전 카렐이 들고 온 찻잔으로 향했다가 금세 흥미를 잃었다는 양 흩어졌다.

에르하르트는 나른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지난밤은 편안했다. 모호한 선율. 저번부터 생각한 거지만 정말 인간이 내는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소름 끼치게 아름다웠다. 분명 성을 빠져나갔어야 했을 자의 목소리가 제 침실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데도 쫓아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한편으로는 심장 어딘가가 저릿해서 에르하르트는 발코니의 창을 열어두고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선율을 하나하나 주워 삼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던 것 같다.

조금의 소음에도 눈을 뜨던 그가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며 어둠을 물리칠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음유시인이라.”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으면 잠을 잘 이루고, 마음이 안정된다더니. 별로 미덥지 못했던 닐스 카나반의 정보는 의외로 틀림이 없었다.

“천금을 벌었겠군.”

아직도 떨치지 못한 나른함 속에서 에르하르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다가 눈을 치떴다. 새파란 눈엔 다소 마땅치 못한 기색이 어렸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행색을 떠올렸다. 그게 어디 천금을 지닌 자의 행색이던가. 로브는 물론이고 그 안에 걸친 것도 값싸 보였다. 개중 가장 값져 보이는 것은 특출하게 잘난 얼굴과 목소리뿐이다.

혹시 사기를 당했거나 아니면 갈취를 당하는 게 아닐까. 어딘가 어리숙한 태도를 보건대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카렐이 빈손으로 내보내지는 않을 테고, 무엇이든 쥐여 보낼 텐데……, 하던 에르하르트는 문득 자신이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자신을 통해 다른 이나 보고 있던 자 따위를.

“…….”

어차피 조만간 그는 제르바로 돌아간다. 아르헨행은 다소 충동적으로 결정한 휴가였고, 레아의 묘를 둘러봤으니 이미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 게다가 며칠 자리를 비웠다고 엉망으로 올라오는 서류를 보니 더 오래 있으려고 해도 있을 수 없었고, 또 이곳은 자꾸만 이상한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에르하르트는 상념을 지우듯 고개를 가벼이 털며 시종을 불렀다. 바깥에 있던 시종장이 곧장 반응했다.

“찾아계십니까. 폐하.”

“제르바로 돌아간다.”

“예?”

갑작스러운 변덕에 시종장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내일, 아니, 오늘 밤, 바로 떠날 수 있게 준비하라.”

“분부 받들겠습니다.”

잠시 얼빠져 있던 시종장은 곧장 나섰다. 뒷모습이 다급해 보였다. 그에게서 시선을 뗀 에르하르트는 찻잔을 들었다.

어느새 차가 식어 있었다. 떫었다.

* * *

며칠 머물러달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라얀은 쫓겨나다시피 성을 나와야만 했다. 그의 손에는 금화가 한가득 담긴 주머니가 달랑거리며 힘없이 들려 있었다.

며칠이나마 에리히와 한 공간에 있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오며 가며 마주치면 에리히가 자신에 관한 기억을 되찾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었다.

‘폐하께서 네 체류를 원치 않으신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고 단호한 거부였다. 라얀은 풀이 죽었다. 그는 흐느적거리며 성을 한 번 보고 한 걸음 걷고, 다시 성을 한 번 보고 한 걸음 걷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성에서 한참 전에 나오고도 열 걸음을 채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얼른 가라는 듯이 손을 내젓던 문지기들은 나중엔 그냥 포기했다. 어차피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 뭘 하든 성안으로 들여보내 달라 억지를 부리지만 않으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는 양.

라얀은 무관심 속에서 그 앞을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에리히.”

부른다고 그가 모습을 드러낼 것도 아닌데 이름을 한 번 불러보기도 했다. 굳건하게 닫힌 성문은 다시 열리는 일이 없었다. 한 걸음 가까이 가볼까 망설이던 라얀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몸을 돌렸다.

어차피 그를 향해 열리지도 않을 성문에 내내 미련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다른 방안-과연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도 마련해야 했고, 조금 쉬어야 했다. 밤새 노래를 부른 터라 몸이 피로를 호소했다.

며칠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장 떠나는 건 아니니까. 우리가 만약 운명이라면, 그런 거라면 에리히가 앞으로 만날 일 없다고 단언했음에도 결국은 만나게 될 것이다. 자신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없는 에르하르트가 이렇게 아르헨으로 와서 기어이 마주한 것처럼.

레탄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봐야지. 고작해야 연안이나 나도는 열대어와 여전히 물정에 어두운 인어가 머리를 맞대봐야 얼마나 기발한 발상이 떠오를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라얀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에리히가 지난밤은 편안하게 보냈을지를, 조금의 거슬림조차 없는 고요한 밤이 되었을지를 궁금해하고 염려하면서.

터벅터벅. 힘이 빠진 걸음은 천천히 모래사장을 지나 동굴로 향했다. 가는 내내 허기진 속이 요란하게 존재감을 드러냈으나 여전히 무언가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동굴에 도착하자마자 로브를 훌렁 벗은 라얀은 레탄을 찾았다.

이름을 부르면 곧잘 듣고 머리를 빼꼼 드러내는데 오늘은 몇 번을 불러도 보이지 않는다.

“라얀.”

하지만 정작 라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제 손바닥만 레탄이 아니라 다른 존재였다. 라얀은 불쑥 튀어나온 존재를 보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레.”

알레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괴로워 보였다. 볼 수 없지만 자신의 표정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라얀은 뒷걸음질 쳤다.

“가지 말아요.”

도망가려는 기미를 읽은 알레가 간절함을 담았다. 라얀은 차마 수호자를 두고 더는 도망갈 수가 없었다. 결국 무겁게 떨어지는 발을 끌어 잡았다.

“…….”

“…….”

라얀도, 알레도 아무 말 없었다.

알레가 라얀을 찾아오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처음 만난 건 라얀이 흑해를 벗어나 지상에 올라오고도 한참 뒤였다. 알레는 라얀의 소식을 듣자마자 그를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사무친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재회는 했으나 마주치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알레가 그를 찾아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라얀은 마주침을 원하지 않았다. 인어와 달리 바다생물은 육지에 발 디디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으므로, 라얀이 피하면 알레는 그를 쫓아올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했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맞닥트린 건 어느덧 1년 전이었다.

“…얼굴은 또 왜 그래요.”

공백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알레였다. 알레의 시선이 제 뺨으로 향한 것을 안 라얀은 무심코 뺨을 쓸었다. 아물지 않은 뺨은 쓸어내리자 여전히 따끔거렸다.

“그냥 조금, 실수로 다쳤어.”

정확한 까닭을 말할 수는 없어 라얀은 대충 얼버무렸다. 한숨 소리가 들렸다.

“라얀.”

“…….”

“라얀. 조금만 더 가까이 와요.”

“그러면 네가 끌고 갈 것 같아.”

손 닿는 데까지 다가가면 바다로 이끌어 그대로 아티사로 데려갈 것만 같았다.

“…그건. …안 그럴게요.”

알레는 조금의 머뭇거림 끝에야 약속했다. 라얀은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알레가 자신을 아티사로 데려간다 한들 어차피 그곳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정말 얼굴이…….”

알레는 라얀이 가까이 다가가기 무섭게 걱정 어린 표정을 했다.

“이건 실수로 다친 거라니까.”

“아니. 그거 말고요. 얼굴이 너무 안 좋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항상 비슷하지.”

무슨 일이라. 에리히를 만난 게, 아니, 겨우 만난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무슨 일이라면 무슨 일일 테지만 삼켰다.

레탄에게는 말할 수 있지만 알레에게는 할 수 없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에리히를 만난 일에 관해 이야기해 봤자, 들을 말이야 뻔했다.

“…우리, 돌아가요.”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알레는 결국 눈에 그린 듯 뻔한 이야기를 했다. 라얀은 1년 전,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식이었다.

뭍으로 올라온 라얀은 알레를 피했고, 알레는 라얀을 설득하려고 들었다. 돌아가자고. 늦지 않았다고. 아일라도, 유리도 당신의 귀환만을 바란다면서. 어쩌면 메르 역시도.

앞의 두 명이면 모를까, 메르가 그럴 리 없다는 건 알레 또한 알 텐데도 설득의 요인으로 쓰려 했다.

“내가 어떤 답을 할지 알잖아. 알레.”

라얀은 눈을 내리깔고 속삭였다.

“그 인간이 그렇게 좋아요?”

“…….”

“모든 것을 버릴 만큼이나?”

알레의 얼굴엔 다양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리움, 옅은 원망, 혹은 짙은 걱정까지도.

“라얀.”

조금 기민하게 굴었더라면 알레가 온 것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어젯밤부터 자꾸 에리히 생각을 하는 탓인지 주변을 경계하는 데 허술해졌다.

“…그러게 오지 말라니까.”

제 방심을 후회하며 라얀은 알레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었다. 청색에 가까운 잿빛 눈동자에 서글픔이 어렸다.

하지만 라얀은 정말이지 알레가 일상을 살았으면 했다. 소멸을 지척에 둔 자신 역시 과거에 매여 있는 게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고, 미래를 보는데 알레만이 3년 전에 멈춰 있는 것 같아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했잖아요.”

“…….”

“그러니 당신이 살아가야 할 세계로 돌아와요. 메르도 기꺼이 이해하며 받아들일 거예요.”

알레는 침묵하는 그를 두고 계속 억지를 부렸다. 이렇게 마주친 게 정말로 우연이며, 이번 기회를 흘려보내면 또 언제 라얀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양 절박하기도 했다.

“글쎄.”

라얀은 씁쓸하게 웃었다.

갈 생각도 없지만, 설령 모든 걸 체념하고 간다 한들 수호석을 잃은 그를 과연 메르가 받아줄까. 왕은 그가 성체가 되지 못했을 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번 역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기적적으로 받아준다고 해도 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유한했다.

라얀은 그를 아끼는 수호자들과 친우들에게 제 끝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모쪼록 율법을 어겨가면서라도 함께하고 싶었던 인간과의 행복한 모습이, 그들이 기억하는 제 마지막이기를 원했다.

“알레. 내 수호자.”

그러니 이제 슬슬 마지막을 준비할 때가 됐다. 알레가 다시는 그를 찾지 못하도록. 여전히 그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유리와 아일라가 더 이상 그를 떠올리지 않고 과거의 잔재로 흘려보낼 수 있도록.

“네 세계로 돌아가.”

“…그곳은 당신의 세계이기도 해요.”

“그리고 가거든 다신 여기 오지 마.”

“라얀!”

“온다고 해도, 날 보지 못할 테니까.”

“왜요. 떠날 거예요? 저 때문에? 자꾸 찾아와서 라얀에게 돌아가자고 해서 귀찮게 하니까?”

거듭해 묻는 말에 라얀은 고개를 가벼이 흔들어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널 어떻게 귀찮아할 수 있겠어.”

“그러면 왜요.”

“에리히를 만났어.”

알레가 눈을 치떴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쏟아내고 싶은 무수한 말 중 무엇을 우선으로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자를 따라갈 거예요?”

“…….”

“기어이?”

알레는 한참이 흐른 뒤에야 당신이 평생 살아온, 그토록 사랑해 온 아티사를 등지고 인간을 따라갈 생각이냐는 식으로 호소했다. 라얀은 그에 아무런 답도 없이 그의 뺨을 매만졌다.

다행이다. 알레가 캐묻지 않아서.

만약 알레가 보다 이성적이어서 더 깊이 파고들었더라면 라얀은 거짓을 수월하게 꾸며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금방 말과 행동에서 맹점을 눈치챘겠지. 바깥에서 살아가는 지금도 여전히 라얀은 거짓말에는 영 능숙하지 못했다.

“네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내게 그런 말을 했었어.”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막 성장에 실패하여 의기소침해진 라얀이 자는 줄 알고 제게 중얼거리던 말이다. 알레 역시 그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이게 내 행복이야.”

라얀은 속삭이며 그의 둥근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마에 입을 맞출 때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눈을 접던 범고래는 웃지 않았다.

알레를 달래는 데 꽤 오랜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알레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며, 그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게 가장 큰 잘못이었던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크게 흩어내는 한숨 속엔 비탄과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섞여 있었다.

다시는 듣지 못할 제 소중한 이들의 이야기―아일라의 걱정은 협박에 가까웠지만―까지 들은 뒤에야 알레를 돌려보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려보낸 게 아니라 라얀이 그 자리를 떴다. 자신이 먼저 나서지 않는다면 알레는 영영 그 자리를 뜰 것 같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

레탄에게 조금 하소연을 하고 쉬려고 했던 라얀은 졸지에 도로 시가로 나서야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라얀이 자리 잡은 곳은 구석진 위치에 자리한 선술집이었다. 후미진 자리에 앉은 라얀은 주문한 술을 홀짝거렸다.

혓바닥에 닿기 무섭게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쓰다. 그동안 접해본 게 열 손가락을 꼽고도 남을 지경인데도 여전히 쓴맛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마셨다가 뱉었지만 이제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마셨다. 그리고 인간들이 왜 이 쓰디쓴 걸 마시는지 그 이유에 대한 것도 이제는 어렴풋이 알았다.

시름을 잊기에 좋았다.

묘하게 기분이 붕 뜨면서, 고민거리들이 뭉뚱그려 희미해졌다. 괜히 잘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샘솟기도 했다. 물론 다음 날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어쨌든 라얀은 계속해 술을 들이켰다. 이미 그의 앞엔 비어 있는 병이 몇 개 늘어져 있었다.

“…….”

또 한 잔 비우던 라얀은 손바닥을 펼쳤다. 새파란 비늘조각이 둥실거렸다. 아까 알레를 떼어놓고 오기 전 그가 건넨 것이었다. 당연히 알레의 것은 아니고, 인어의 지느러미 비늘이었다.

아일라의 것일까. 그녀의 것이라기엔 색이 짙은 듯도 했지만, 그녀가 아니고서야 제게 비늘을 줄 이가 있을 리 없다. 비늘을 주는 것은 친애의 표현임과 동시에 어떤 위협이 닥쳤을 때 도움을 청한다면 너를 도우러 가겠다는 어떠한 증표이기도 했으므로.

어차피 율법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를 찾아올 수는 없겠고, 라얀 역시 부를 리도 없을 테지만.

라얀은 도로 손을 움켜 그것을 사그라트리며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거듭해 쌓여가는 술병에도 거의 흔들림 없는 기색에 주인은 다소 질린 기색이었다. 아직 태양이 환한데 벌써 틀어박혀 술병을 비우는 그를 한심하게 보는 듯도 했다.

나가는 게 좋을까.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턱을 괸 채로 창의 틈새로 들어오는 빛을 쳐다봤다. 빛 사이로 먼지가 너울거렸다. 라얀은 창을 열면 보일 태양을 상상했다. 한때는 동경하며 궁금하던 것은 이제 가로막혀 있어도 쉬이 상상할 수 있는 일상의 것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언젠가부터 태양은 그렇게 특별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태양을 닮은, 어쩌면 태양보다도 더 반짝거리며 빛나는 에리히를 만난 그 순간부터.

“…아.”

흩어지는 빛가루를 보다가 라얀은 짧게 탄식을 삼켰다.

어지러웠다. 숨이 모자라는 듯도 했고, 몸에 기운이 빠졌다. 벌써 이틀 꼬박 끼니도 거르고 밤새 노래까지 불렀으니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라얀은 겨우 숨을 골랐다. 현기증이 가라앉으면 나갈 생각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데 맞은편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던 이와 부딪혔다. 졸지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나게 된 사내는 험악한 표정으로 라얀을 노려봤다. 그러다가 흐트러진 로브 사이로 드러난 얼굴을 내려다보곤 비죽 웃었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은 적나라하고 집요했으며 또한 음습하기까지 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봐.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지.”

앉아 있다가 봉변을 당한 것은 오히려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트집을 잡았다. 라얀은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않고 아까보다는 어지러움이 가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딜 가려고.”

일어나자 이번에는 사내가 팔목을 움켜잡는다. 뿌리칠까. 라얀은 잡힌 손목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기운이 없대도 이 정도 뿌리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의 완력은 어지간한 인간의 힘을 웃도는 편이다 보니 되레 자신의 손을 잡아챈 사내의 팔이 상할까 갈등했다.

“…놔.”

갈등은 결국 작은 저항으로 표출되었다.

“싫은데?”

당연하게도 자신보다 체구가 가늘어 보이는 라얀의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사내는 라얀의 저항을 앙탈 정도로만 생각하며 깐죽거렸다.

역시 뿌리칠까. 힘을 살살 주면 별로 안 다칠 것 같은데. 아니면 일단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 적당한 틈을 타 도망가는 건 어떨까.

라얀은 고민에 빠져 있느라 사내의 등 뒤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다가온 그림자는 라얀을 대신해 사내의 손을 내쳐 주었다.

“싫다고 하잖아.”

부지불식간에 팔목이 붙들린 사내의 신음 사이로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

익숙했다. 라얀이 놀라 퍼뜩 고개를 들자 여기서 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이가 담겼다.

에리히. 라얀은 차마 소리 내어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삼켰다.

“너는 왜 얼빠진 표정이나 짓고 있고.”

놀라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에리히는 붙잡고 있던 사내의 손을 내친 뒤에 라얀을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라얀은 에리히의 뒤에 섰다. 성체가 되면서 부쩍 자랐는데, 에리히는 그새 더 자랐는지 살짝 올려다봐야 했다.

라얀이 빤한 시선으로 에리히만 좇는 사이 정신 차린 사내 무리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에리히는 그들을 가뿐히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양아치.”

“뭐?”

“무뢰한.”

그것도 아니면 날건달인가? 에리히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잘도 그들의 속을 들쑤셨다. 빈정거리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혹시 얻어맞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에리히가 그들보다 큰 키로 내려다볼지는 몰라도 그들이 에리히보다 옆으로 훨씬 넓었다. 괜히 에리히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라얀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뒤에서 잡아채는 것에 에리히는 성가신지 흘끔거리면서도 라얀의 손을 뿌리쳐서 털어내지는 않았다.

“이 새끼가!”

사내는 모멸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금방이라도 에리히의 얼굴을 후려칠 것처럼 주먹을 꾹 쥐고 부르르 떨었다. 라얀은 여차하면 그를 막을 심산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뭘 하려고.”

라얀의 속내를 짐작하기라도 한 양 에리히는 다소 황당해하며 그를 내려다봤다.

“감히 나를 무시해?”

저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라얀에게 집중한 모습에 사내는 결국 폭발했다. 그는 움켜쥔 주먹을 거칠게 내질렀다. 라얀이 곧장 튀어나갔다. 에리히의 예쁜 얼굴에 생채기가 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에리히가 사내의 팔목을 잡아채며 그대로 꺾는 게 더 빨랐다.

에리히는 팔이 꺾여 중심을 잃은 몸을 무너트리며 동시에 발로 등을 세게 짓눌렀다. 헉.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고통으로 숨을 들이켜는 소리 역시 들렸지만 에리히는 사내의 팔을 놓지 않았다. 뒤돌려 꺾어진 팔은 기괴한 모양으로 삐뚤어져 있었다.

“차라리 무시당한 게 나았을 텐데.”

“허, 헉……!”

“그렇지?”

사내는 빠져나오기 위해 거칠게 버둥거렸지만 그의 몸을 억압한 에리히는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무심했고, 호흡은 평온했다. 보란 듯이 다른 일행에게 눈썹을 까딱이기까지 하는 여유를 부렸다. 마치 와보라는 양.

그러나 그들은 에리히의 기백에 눌려서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또, 감히라는 말은 함부로 사용하는 게 아니야. 그대.”

“으, 으…….”

“그것은 아무래도 내가 사용해야 어울릴 만한 말이라.”

“겨, 경비대…….”

숨을 헐떡거리던 사내가 경비대를 찾았다.

“경비대?”

“겨, 경비대를 불러서.”

“그래. 불러서, 누가 잡혀가는지 한번 지켜볼까?”

에리히는 코웃음을 치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는 인간 중 가장 높은 사람이니 그런 반응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경비대도 높은 사람임은 틀림없지만, 에리히만은 못할 테니까.

“저기.”

다만, 라얀은 에리히가 이러는 걸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잡고 있던 옷자락을 흔들어 당겼다. 에리히의 시선이 라얀에게 향했다.

“…….”

라얀의 표정을 살핀 에리히는 등을 짓밟고 있던 발을 뗐다. 그제야 사내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팔은 이미 제구실을 못 하고 이상한 모양새로 늘어져 있었다. 그것을 서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일별한 에리히는 라얀의 손을 붙잡아 나갔다.

이번에는 그들을 붙잡는 말 따위는 없었다.

어제 포박당해 쓸린 탓에 붙들린 손목이 욱신거렸다. 그러나 혹시 그가 손을 놓을까 봐 라얀은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에히리는 한 번 뒤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길목에서야 차차 걸음이 느려졌다. 파도치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에리히가 라얀 쪽으로 등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까맸던 머리가 본래의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너는.”

억누른 목소리에 미미한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라얀은 그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금세 에리히를 바라봤다.

“곤란을 겪고 있으면 경비대라도 불러달라고 요청해야지. 그렇게 멀뚱멀뚱 있어?”

“…….”

“어린 게 발랑 까져서는 낮부터 술집에 들어가 술이나 마시고.”

까닭 모를 짜증은 금세 잔소리가 되었다.

에르하르트는 스스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패밀리어(마법사의 소환수)를 통해 라얀의 자취를 훑은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행방을 파악하자마자 성을 빠져나와 그를 보러 갔다. 게다가 그를 발견하자마자 곤란을 겪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 못한 것까지. 그 와중에 뼈대를 감싼 게 거죽뿐이라 붙들면 헛도는 손목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카렐의 입을 빌려 내친 것은 자신이다.

이후의 만남에 제 뜻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것 역시 에르하르트였다. 그런데 자꾸만 여러 가지로 거슬렸다. 손톱 아래 거스러미도 이처럼 신경이 쓰이지는 않을 터였다.

“나 나이 많아, …요.”

손을 뒤로 숨기며 라얀이 중얼거렸다. 그게 꼭 자신이 또 손목을 잡아챌까 염려하는 것처럼 보여서 불쾌했지만 겨우 시선을 떼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퍽이나.”

“진짠데.”

에르하르트가 코웃음을 치자 라얀은 발끈해서 부정했지만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저 얼굴을 보고, 아니, 저토록 물정 모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 말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폴폴 풍기는 술 냄새가 부조화를 이뤘다.

“나이가 많아서 그 돈을 들고도 싸구려 럼이나 마시고 있었군. 아니면 향이 달아 맛도 달겠거니 생각되어 마셨나?”

그럴싸한 의심이었다. 그런 것치고 아까 얼핏 본 라얀이 앉은 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던 술병의 수가 심상찮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이젠 써도 잘 먹는데.”

라얀은 계속 항변했다.

다시 만난 에리히는 그를 억울하게 만드는 재주가 아주 탁월해졌다. 우선, 멀뚱멀뚱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덜 다치게 하고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조금 머뭇거렸을 뿐이다. 그리고 라얀은 에리히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다.

‘…인어의 수명이 인간보다 기니 그것을 치환하면 네가 나보다 많다고 볼 순 없지. 라얀.’

물론 에리히는 기억이 있을 적에도 인간과 인어는 나이에 대한 관념이 조금 다른 것 같다며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라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에리히 또한 그런 라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둘의 의견 차이는 한 번도 좁혀진 적은 없었다.

“됐고.”

역시나 화제는 금세 돌아갔다.

“음유시인이라던데.”

라얀은 자신을 향한 호칭이 영 낯간지러웠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말이 부풀어 찼다. 지난밤 평온했는지, 잠은 잘 이루었는지, 내 노래가 네 마음에 위안 한 자락이라도 되었는지.

“그래. 노래 부르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더군.”

“…….”

“닐스 카나반의 과장 섞인 허풍이 아니었지.”

라얀의 얼굴이 밝게 폈다. 에리히의 말을 세세히 따져보면 결국 칭찬이었다. 재주가 있다는 말은 그의 지난밤이 평온했다는 거니까. 하긴. 어제는 없는 마력까지 긁어모아 인어의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효과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왜.”

에르하르트는 내심 당황했다. 비난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칭찬도 아니었는데 라얀이 너무 밝게 웃었다. 티끌 없이 새하얀 웃음엔 어떠한 뜻도 없이 오로지 기쁨만이 담겨 있었다.

“…….”

당황도 잠시였다. 에르하르트는 마치 머저리라도 된 것처럼 라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말을 툭 던졌다.

“왜 웃지.”

그렇게, 이상하리만치 눈길을 떼지 못하게.

“그냥, 좋아서.”

좋아서.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예상치 못한 답에 에르하르트의 얼굴에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찰나였다.

“웃지 마라.”

라얀이 웃는 모습을 다소 집요하게 보던 에리히는 떠오른 표정을 지우며 짓씹듯이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라얀이 순간 웃음을 흐리자 또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혀를 찼다.

“그런 표정도 짓지 말고.”

“그러면?”

“…나한테 묻지도 마.”

대체 어쩌라는 거지. 팍 인상을 찌푸릴까. 아니면 무시하고 웃을까. 라얀은 답을 요구하듯 그를 빤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이렇게 보면 보지 말라고 할 것 같았지만. 이쯤 되면 라얀 역시 오기가 생겼다.

“이건 왜 낫지를 않지?”

예상외로 에리히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뺨에 난 생채기였다. 지난밤의 상처가 하루 만에 나을 리가. 회복력이 좋은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옛말이었다.

라얀은 뺨을 감싸며 고개를 약간 비꼈다. 에리히에게 그로 인해 생긴 상처 따위를 기억에 남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기억을 찾게 되면 자기 자신을 원망할 테니까.

“…아.”

생채기를 가리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나려던 라얀은 갑자기 까맣게 점멸하는 시야에 멈칫대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까 어지러웠던 것을 비웃는 것처럼 땅이 요동치듯이 널뛰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

“이봐. 그대?”

짧게 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몸을 지탱하던 힘이 빠졌다. 라얀은 까라지듯 무거운 눈을 감기 전 에리히에게 한 번 시선을 던졌다. 무너지는 몸을 감싸 안는 손길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라얀, …그러니까 제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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