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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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윈스턴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그 소식을 듣고 아르헨에서 달려오던 에르하르트 황자의 변고 이후 황제는 성마르고 강퍅해졌다.

별것도 아닌 일로 꼬투리를 잡기 일쑤였고, 궁엔 한숨과 울음이 마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총비와 아들을 연달아 잃은 황제의 상실에 이해하는 분위기였으나 정무를 완전히 등진 황제가 주색을 가까이하니 점차 민심은 흉흉해졌다.

대단한 공도 없지만, 그릇되지도 않던 황제가 국정을 망치는 데는 채 2년이 걸리지 않았다. 바른말을 하는 이는 전부 침묵했고, 아첨하는 이들만이 황제의 귀에 달콤한 말을 속살거리며 그의 총애를 얻었다.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그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지만, 이미 눈과 귀를 막은 황제는 그들의 눈물과 비탄을 어루만져 주지 않았다. 황실에 대한 반발이 열화처럼 번졌다. 가히 그 시간은 암흑기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꼴이 우스워지셨군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핏자국이 번졌다. 돌연한 습격에 무력하게 당한 이는 분노에 차 노려봤다.

“네가 어떻게……!”

“붉은 별 아래 태어난 이는 황좌를 피로 적실 것이다.”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는 말에 황제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어렸다.

“제게 내려진 예언을 따르는 중입니다.”

“그, 그걸 어찌.”

“또, 혼란한 나라도 바로 세울 겸 해서?”

묘하게 늘어지는 말투는 황제의 어리석은 폭정을 조롱하는 것처럼도 들렸다.

“짐의 뒤를 이을 후계가 뻔히 살아 있거늘, 네 이런 짓이 용인될 것 같으냐? 귀족원이 과연 너를 적법한 계승자로 인정할 것 같은가!”

“폐하. 제가 지금 어디를 다녀온 것 같으십니까?”

그는 웃으며 뺨에 묻은 피를 보란 듯이 닦았다.

“당신의 아들 중 살아남은 건 이제 저뿐입니다.”

“에르하르트 헤셀러스!”

황제는 끝내 그의 이름을 불렀다. 2년 전에 도적 떼에게 습격당해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던 황자의 생환을 인정한 것이다.

“짐은 너를 인정하지 않겠다.”

황제는 벌겋게 달아오른 낯빛으로 벽에 걸려 있던 장총을 내려 에르하르트를 겨누었다.

“그때 시신을 찾아 네 죽음을 확실히 해야 했거늘.”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었다.

“늦었으나 이제라도 바로잡으리라.”

이번에는 확실히 죽이겠다며 으름장을 놓은 황제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허공을 찢는 소리가 났다. 반동으로 두 걸음 물러난 황제는 눈을 부릅뜨고 경악했다.

“어떻게…….”

탄환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에르하르트의 아래로 마법진이 너울처럼 울렁거렸다.

“제가 마법사임을 염두에 두셨던 분이 어찌해 놀라십니까?”

“…….”

“아. 혹 황성에 촘촘히 깔렸던 마력제어진을 믿으신 건가.”

“너…….”

“그보다 실력이 형편없으십니다.”

에르하르트는 가슴 한 뼘 위에서 빙글거리는 탄환을 보다가 손으로 그것을 툭 튕겼다. 탄환은 정확히 황제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친애하는 폐하. 당신이 인정하지 못한다 하였으나 귀족들은 이미 제 승계를 승인하였습니다.”

그것이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든, 아니면 경외에서 비롯되었든 간에.

“아. 이제는 듣지 못하실 테지만.”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황제를 무감히 내려다봤다. 한때 그의 목을 옥죄던 절대자의 죽음은 이렇게도 쉽고 허망했다.

탁. 탁.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감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돌리자 완벽하게 군장을 갖춘 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꿇어앉았다.

“다른 곳은?”

“이제 거의 정리되었습니다. 새벽이 걷히기 전에 모두 전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뜻이라니. 아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에르하르트는 입매를 비틀었다. 그는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식어가는 이를 바라보았다. 에르하르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내던지며 등 돌려 나갔다.

불을 밝혔음에도 어둠이 드리운 회랑과 늘어진 시체, 여전히 어딘가에서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까지.

이 밤이 지나면 헤셀러스의 주인은 바뀌어 있을 것이다.

* * *

태양이 첨탑의 꼭대기에 닿을 때면 황제의 집무실엔 햇살이 들이쳤다. 금빛 가루로 부서지는 햇살이 황제의 머리에 닿았다.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에 들어선 닐스 카나반은 예의를 차려야 하는 것도 잊고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황제를 홀린 것처럼 바라봤다. 어릴 적에도 무서울 만큼 잘생겨 어린 아가씨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던 그는 이제 사내조차 넋을 빼게 했다.

뭐가 저렇게…….

“흠.”

시종장이 헛기침을 해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그제야 닐스 카나반은 핏기 가신 낯으로 예를 갖췄다. 과거의 인연으로 시간을 내어줬을 뿐, 그는 ‘그’ 에르하르트였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철혈의 황제. 죽은 줄 알았으나 2년 만에 돌아와 아비와 형제를 모두 무참히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피의 군주. 또한,

“헤셀러스의 모든 영광이 함께하시길.”

백여 년 만에 태어난 위대한 마법사.

“일어나라.”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깊숙이 숙인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알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르헨으로 돌아가나.”

“레이나의 데뷔탕트를 치렀으니 이제 돌아가야지요. 그 애는 더 있고 싶어 하는 눈치이지만요.”

“무도회에서 마음에 드는 이라도 봤나 보지.”

닐스 카나반은 순간 떨떠름한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레이나가 마음에 들어 해서 억지를 부리게 하는 이가 있기는 했다. 예나 지금이나 동생의 눈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조금 더 반짝거리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어디 그 애뿐인가. 무도회가 열리던 날, 레이디들의 시선이 어디로 쏠렸는지 그는 정녕 눈치채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귀찮아 넘긴 걸까. 완전한 청년이 된 황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금발과 그 아래 서늘한 푸른 눈, 섬세한 이목구비까지.

“…예, 일단은.”

“잘됐군. 레이디 카나반이라면 청혼서를 받기에 적당한 나이 아닌가.”

그 역시 그렇지만. 데뷔탕트도 치르기 전에 밀려오던 청혼서를 생각하면 앞으로의 미래가 그려지긴 했다. 닐스 카나반은 조금 미련이 담은 눈으로 황제를 보다가 상념을 털듯 고개를 저었다.

난관이야 하나하나 헤아려보자면 무수하나, 그것들은 어찌한다고 쳐도 동생은 황제를 감당할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시름시름 말라갈 게 뻔히 보였다. 여느 남매처럼 사이가 썩 도탑지는 않지만 여동생을 지옥 불로 밀어낼 만큼 매정하지도 못했다.

황제는 선황과 달리 꽤 공명정대했으나 그럼에도 닐스 카나반은 그가 두려웠다. 젊은 황제를 내심 우습게 보던 귀족원을 엎어버리고, 보란 듯이 가장 건방지게 굴던 가문 하나를 몰살시켜버린 건 아르헨까지 흘러들어 온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그 후로는 누구도 선뜻 기어오를 생각을 하지 못하니 황제의 권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랬기에 황제를 뵙고 오겠다는 오라비에게 제 이야기도 꼭 해달라며 눈치 주던 동생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보다 제르바는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아 놀랐습니다.”

대신 아르헨은 벌써 꽃이 만발하였는데, 이곳은 영 춥다며 엄살을 부렸다. 황제는 무신경한 낯으로 그의 말을 들을 뿐 별다른 첨언은 하지 않았다.

아르헨은 어떤지. 그곳 사람들은 잘 지내는지 등의 질문은 없었다. 벌써 3년 전의 일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나름대로 2년이나 지냈던 곳인데 황제에게는 그리움이 엿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그때보다 표정도 더 딱딱했다.

실컷 주절거리던 닐스 카나반이 입을 다물자 무거운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는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

기대어 앉아 차를 마시던 황제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피곤해 보였다. 지금 보니 하얀 흰자위에 실핏줄이 서 있었다.

“폐하. 혹 잠을 잘 주무시지 못하십니까?”

“지금 짐의 건강에 대해서 살피는 건가.”

닐스 카나반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의 건강은 극비에 부쳐야 할 사안이었고, 그것을 궁금해하는 것은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신에게 맹세컨대 결코 아닙니다. 폐하. 그것이 아르헨에 방랑하는 음유시인이 있는데, 그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잠을 잘 이룬다고 한 게 생각이 난지라.”

“과장이 심하군. 그깟 노래로 불면을 고친다면 그자는 천금을 벌었을 것이다.”

“실제로 불면에 시달리던 기사가 우연히 노래를 들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그날은 잠을 이뤘다 하여 퍼진 이야기인지라 아주 과장뿐인 소문은 아닐 겁니다.”

흐음. 황제는 짧게 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새파란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래서 경도 들은 적 있고?”

“유감스럽게도 없습니다. 워낙 행적이 묘연한 터라. 듣기로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아는 이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작정하고 공연을 하는 게 아니라 흥얼거리는 것을 들은 이들이 그를 음유시인이라 칭하는 것인지라…….”

구구절절 말이 이어질수록 기울었던 황제의 몸이 다시 늘어졌다. 흥미가 사라진 게 분명했다. 조금쯤 흥미가 깃들었던 눈가는 도로 무심해졌다.

“한번 가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으시겠어요?”

할 말도 떨어지고, 그를 향한 황제의 관심도 사라져가니 언제 작별을 고하는 게 좋을지 적당한 때를 고르고 있는데 말간 목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 시종이 고하는 소리도, 황제의 허락도 없는 방문에 고개를 돌린 닐스 카나반은 확인하곤 아,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사뿐사뿐 걸어온 이는 황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당장 바쁘신 일도 끝나셨으니.”

느슨하게 묶은 어두운 색의 머리. 옅은 색소의 눈.

“내심 한 번쯤은 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상경해서 한 번도 본 적은 없으나 누구인지 대충 짐작은 갔다.

“네?”

황제의 숨겨진 연인이었다.

* * *

사교철이 끝난 뒤 에르하르트의 짧은 외유는 조금은 충동적으로 이루어졌다.

즉위하고 1년 동안 도탄에 빠진 국정을 수습하고, 아직은 어리다는 이유로 건방지게도 그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려두려는 귀족들을 굴종시키는 등 숨 가쁘게 살았다. 카렐의 조언도 있었고, 이런 까닭으로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여긴 끝에 결정했다.

그리고 한 번쯤은 가야지 하면서도 바빠서 아르헨행을 미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닐스 카나반 일행과 함께 아르헨에 도착했다. 제게 사흘의 유예를 둔 터라 아르헨행은 극비로, 또한 최소한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잠시 쉬러 가는 것이니만큼 조용히 머무르고 싶다는 말에 카나반 남매는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레아.”

아르헨에 도착하자마자 에르하르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레아의 묘비였다.

그를 대신해 화살을 맞은 그녀를 수소문하여 찾았을 때는 숨을 거두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 자리에서 기어이 비명횡사한 그녀를 발견한 이가 시신을 수습했고, 당시 그곳에서 전사한 기사들과 함께 장례를 치러주었다. 모든 일을 바로잡고 나서도 에르하르트는 그녀를 굳이 제르바로 옮기지 않았다.

‘저는 이곳이 좋아요. 전하께서는 모처럼 자유로워 보이시고, 저 역시 마음이 편하거든요.’

제르바에 있었던 때보다 아르헨에 있는 동안이 더 평화롭고 행복했다던 그녀의 말을 존중한 탓이다. 또한 실제로도 레아는 아르헨에 있었을 때 더 편해 보였다.

“오랜만이지.”

그녀를 이곳에 두고 단 한 번도 찾지 못했다. 즉위하기 전에도, 즉위하고 나서도 그럴 만한 여유도, 시간 역시 부족했다.

에르하르트는 레아의 묘비를 어루만지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올리비아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가던 길에 습격을 당한 직후, 간신히 살아난 그가 의식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날로부터 석 달이 지나 있었다.

‘정신이 드세요?’

겨우 숨만 붙어 있던 에르하르트는, 그런 그를 발견해 돌보아준 이 덕분에 한 달여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올리비아와 자신의 국장이 모두 치러지고 난 뒤였다.

제 죽음은 올리비아의 임종을 지키러 오던 중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아 호위대가 전부 몰살했고, 황자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포트 성으로 가렴.’

기가 막히는 한편 막막했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이날을 염두에 둔 듯 속삭이던 올리비아의 조언을 기억해 냈다. 그는 곧장 포트성으로 향했고, 올리비아가 남겨둔 작은 함을 받았다. 밀서와 혹시 몰라 챙겨 넣어둔 것처럼 보이는 보석이 있었다.

밀서에 적힌 것은 그를 둘러싼 예언이었다. 그는 비로소 모든 인과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찌하여 황제가 그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는지를.

우스운 일이었다. 고작 그따위 예언이 두려워 그는 평생을 아들을 멀리했고, 기어이 그 아들을 덫에 빠트리기 위해 사랑해 마지않던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아니. 정녕 그런 게 사랑이기는 한가. 황제의 사랑이 과연 사랑이 맞는지조차 의심되었다.

에르하르트는 그 예언대로 움직여주기로 했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예언을 이루어주기 위해.

‘선택해라, 공작. 몰락한 역사의 귀퉁이에 적힐지, 아니면 수백 년 이어온 영광을 이어갈지.’

포트를 거점으로 삼은 그는 황제에게 제 생존을 굳이 알리지 않고 가장 먼저 윈스턴을 포섭했다. 그 후로는 쉬웠다. 다른 대귀족들 역시 그의 뜻에 가담했다.

그즈음에 에르하르트는 숨 쉬는 것보다 쉽게 마력을 다루었다. 마정석의 도움 없이도 작은 영지 하나는 몰살시킬 수 있는 그의 힘은 대귀족들을 굴종시키는 데 충분했다. 와중에도 망설였던 귀족들은 황제가 폭정을 일삼자 결국은 그에게로 돌아섰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뒤 황제와 형제들을 모두 살해하고 황위에 오르기까지 꼬박 2년 정도가 걸렸다. 그는 정말로 숨 가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때때로 치받아 오르는 까닭 모를 상실과 지독한 슬픔에 잠기기도 하면서.

“나는 썩 잘 지냈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군.”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제 한 몸 지킬 여력이 있는 만큼 호위는 전부 물리고 홀로 왔기에 그는 속내를 드러내는 데 가감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거든.”

얕은 수면은 어릴 적부터 일상이었지만 3년 전부터 그는 부쩍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차라리 가장 오래 잠들었던 게 석 달간 의식을 잃었던 시기였다. 깨어난 뒤로 그는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금세 깨곤 했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꿈이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에르하르트는 이파리가 뻗은 가지가 길게 드리운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얕게나마 잠들면 자꾸 이상한 게 보인다.”

나는 물에 잠겨 있지. 이상한 일이야. 헤엄을 잘 치는 것도 아니라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는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바람이 살랑거리며 그의 뺨을 지나갔다. 봄의 따스함을 담은 바람엔 묘한 짠내가 섞여 있었다. 왜인지 익숙한 내음은 날 서 있던 신경을 다소 누그러트렸다. 의식이 곧 가물거렸다.

‘…히.’

홀릴 것처럼 아름다운 미성, 웃음기 머금은 부름.

‘에리히.’

또다시 꿈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사방이 물의 장벽이었다. 푸른 물속에서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이번에 다른 점은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인데 아름답다는 것은 인지할 수 있었지만 돌아서면 잊을 것처럼 희미했다.

마음이 술렁거렸다.

아득했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붙들고 싶어졌다. 잡을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에르하르트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저게 제게 중요했던 것 같아서,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하지만 뻗을수록 그것은 멀어졌다. 아니, 에르하르트의 몸이 점점 뒤로 물러나고 그것은 짙은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하.”

에르하르트는 손을 뻗으며 눈을 떴다. 지독한 상실감이 그를 덮쳤다.

그는 왜 자신이 이런 까닭 모를 꿈과 이 꿈으로 인해 상실감을 느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꿈에 나오는 대상 역시. 무의식의 반영이라기엔 꿈속에 나오는 희끄무레한 자는 식별조차 불가능한 형태였다.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예 자신의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다.

얕게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길이 신경질적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만히 있어봐야 상념만 늘어날 테니 조금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곧 바다 너머로 수평선이 아득히 보였다. 제르바에도 큰 호수가 있고, 황성 내에도 규모는 작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연못이 있는데 둘 다 이곳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쏴아아.

파도가 넘실넘실 흔들린다. 아르헨에 있던 동안에는 발코니의 창가를 열어두면 자주 들리던 소리였다. 암석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는 듣고 있으면 묘하게 사람을 홀렸다.

꼭 이리 오라고 손을 흔드는 것처럼.

예전에 저 소리에 홀려, 혹은 죽을 날을 받아놓고 사는 게 지겨워 뛰어내린 적이 있었다.

“…….”

그런데 어떻게 살아 나왔더라. 파도에 떠밀렸나. 분명 물속 깊이 가라앉았던 기억은 있는데, …에르하르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기억을 헤집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탓에 익숙해진 두통이 오늘따라 부쩍 심했다. 관자놀이를 짚으며 짜증을 내던 에르하르트는 돌아가서 좀 쉴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

어딘가에서 희미한 선율이 들렸다.

불분명하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에르하르트는 홀린 것처럼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그를 이끄는 소리를 따라가자 어느 순간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까 겨우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올올이 곤두선 신경이 다시 가라앉았고, 마음이 고요해졌다. 한편으로는 덜컹거렸으나 편안함이 더 컸다.

하지만 허리에 손을 얹은 그는 모래사장에 궤적을 한참 남긴 뒤에야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에르하르트처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다 보니 얼굴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의 언어는 어딘지 모호해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외국인인가. 아르헨은 무역이 활발한 곳이라 외국인의 출입이 잦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에르하르트는 멀리서 그를 지켜봤다. 조곤조곤한 허밍을 듣고 있으니 몸이 나른해지는 한편 왜인지 초조했고, 어딘지 그리웠다. 한 발이라도 떼면 저자를 붙잡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늘게 이어지던 소리가 어느 순간 끊겼다.

로브를 쓴 자가 불현듯 에르하르트를 돌아봤다.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는 몸을 움찔 떨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낯선 이를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로브로 온몸을 휘감은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 놀랄 필요 있나. 에르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의 경계에 묘한 불쾌함이 번졌다.

노랫소리도 그쳤으니 더 있어야 할 까닭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저깟 게 뭐라고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까지 온 것도 이상했다. 뒤돌려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대강 둘러쓴 후드가 벗겨졌다.

“아.”

마력을 계속 두르고 있기도 번거로워 굳이 머리 색을 바꾸지 않았던 에르하르트는 뒤늦게 로브를 붙잡아 썼지만 이미 그의 금발은 바람결에 부드럽게 흩날린 뒤였다.

“…엘?”

외국인인 줄 알았던 이는 명료한 발음으로 헤셀러스의 언어를 구사했다. 불순물 없이 깨끗한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노래를 부를 때가 매혹적이었더라면 이쪽은 정순했다. 솜털처럼 가볍고, 흐르는 물처럼 청아했다. 에르하르트는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엘…….”

적어도 그가 제 쪽으로 정신없이 달려오기 전까진 그랬다.

바람의 저항에 빈틈없이 가리던 로브가 펄럭이며 흔들렸다. 그 틈으로 얼굴이 살짝살짝 보였다. 티 없이 검은 잉크를 먹인 것처럼 까만 머리와 눈길을 앗아가는 새순 같은 녹색 눈.

그것은 마치 반갑고 그리운 것을 보듯이 반달처럼 휘어져 있었다.

아름답다는 감상은 찰나였다. 에르하르트는 더 생각할 겨를 없이 홀스터에 얹고 있던 손으로 총을 꺼내 상대를 겨눴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은 무감했고,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쏠 수 있을 것처럼 방아쇠에 얹어져 있었다. 웃으며 달려오던 그자는 멈칫하며 걸음을 늦추었다.

“누구지.”

경계하다 그의 로브가 벗겨져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뛰어왔으니 이보다 수상쩍은 일은 없었다. 제국의 누가 황족의 머리가 금빛이 아님을 모르는가.

“그 이상 오면 발포하겠다.”

저런 게 설마 암살자는 아닐 테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할 만큼 녹록지는 않지만 에르하르트는 방심하지 않았다.

“엘.”

에르하르트가 날 선 눈으로 올곧게 사격 자세를 취하자 그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그래.”

목소리까지 떨렸다.

“엘. 나야.”

호소를 흘려들은 에르하르트는 무성의하게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쉬이 잊힐 얼굴로는 보이지 않고. 내 기억에는 전혀 없는 얼굴이군.”

아르헨의 모든 귀족의 면면을 익힌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곳에 있을 적 제법 열심히 사교 활동을 했다. 또래 중 저런 얼굴이 있었더라면 떠올리지 못했을 리 없었다.

“또한, 나는 누구에게도 격의 없음을 허락한 바 없는 터라.”

“…….”

“아는 사이일 리 없지 않나?”

냉랭한 단언에 그는 무심코 한 발 뒤로 물렸다. 아. 삼키려다가 흘러나온 탄식이 흘러나온 듯도 했다. 그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눈가가 반짝거렸다. 꼭 눈물이라도 맺힌 것처럼.

에르하르트는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우습게도 처음 보는 자의 눈물이, 아니, 아직 흐르지도 않은 그것이 제 심장을 덜컹 흔들어대기에.

“그러니까, 나는…….”

얕게 떨리는 목소리는 가냘팠다.

“…나는.”

그는 결국 아무 말도 맺지 못했다. 눈물을 참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로브를 추스르며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갔다. 모래사장에 발자국이 찍혔다. 무심코 쫓아갈 뻔한 에르하르트는 겨우 발을 묶어두었다.

아무 해도 끼치지 않고 달아나는 이를 굳이 추격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

하지만, 어딘지 꼭 붙잡아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지 않으면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왜인지 그런 모호한 막막함이 저기 너울거리는 파도처럼 발치로 수시로 밀려들어서.

이상한 일이다.

쓸데없는 상념을 흩트리듯 가볍게 고개를 턴 에르하르트는 정말로 그를 쫓아가기 전에 홀스터에 총을 도로 꽂으며 등을 돌렸다.

기묘한 만남을 뒤로하고 에르하르트는 성으로 돌아갔다. 고작 사흘의 여정이었지만 어쨌든 황제가 머무르는 일이었다. 시종들은 드리운 커튼을 걷으며 에르하르트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꼼꼼하게 지휘하며 하나하나 살피던 카렐은 에르하르트를 보고는 눈을 휘며 다가왔다.

“폐하. 다녀오셨어요?”

그는 자연스레 로브를 건네받았다.

“폐하께서 머무르실 침실은 정돈했답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고작 며칠 머무르러 온 것이다. 네가 나서서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또 사서 일을 하지.”

“그래도요. 제가 손을 대야 만족스러운걸요.”

카렐은 밉지 않게 웃었다.

“카렐, 넌 시종이 아니다.”

“알아요, 폐하. 그래서 지시만 내렸어요. 입만 조잘거렸지, 손은 편했으니 염려치 마세요.”

에르하르트는 그에게 가벼이 눈짓한 뒤 중앙홀의 계단을 올랐다. 카렐 또한 시종에게 마저 지시를 내리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이곳은 제르바보다 따뜻해서 좋아요. 그곳은 아직 봄이 오지 않아 추웠는데. 참, 잠깐이나마 머무르셨던 곳인데, 오시니 어떠세요?”

“딱히.”

에르하르트는 카렐의 설레는 재잘거림을 단번에 일축했다. 대단히 즐거웠던 기억이 있던 것도, 애틋함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나마 레아가 이곳에 묻혀 있어서 왔을 뿐, 아니었다면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폐하께선 이곳을 그리워하셨던 것 같은데, 제가 잘못 알았나 봐요.”

카렐은 무안해하며 괜히 뺨을 긁적였다.

“짐이 말인가. 이곳을 그리워했다고?”

그가 이곳을 그리워할 리 없지 않은가. 쫓겨난 곳이었고, 상실만을 안겨준 곳이었다. 적어도 카렐의 앞에서 아르헨에 관련한 이야기를 꺼냈던 기억 역시 없었다.

“네. 그, 의식을 잃으셨을 때 자주 아르헨을… 아니에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폐하.”

천천히 기억을 되짚던 카렐은 에르하르트의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청하지 않았을 텐데.”

카렐은 제 권유로 온 것처럼 굴었다. 평소였더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인데 묘하게 거슬렸다.

에르하르트는 한 발짝 뒤에 서서 걷는 카렐을 흘끗 바라보며 그를 만난 날을 떠올렸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구해져서 깨어난 날일 것이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꼴이었을 텐데도 카렐은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 깨어나기까지 석 달을, 그리고 깨어난 후에도 한 달간을 간병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일엔 대리인으로 나서기도 하는 등 공을 세웠다. 그를 참작해 에르하르트는 황위에 오른 후 그에게 자작의 작위와 작은 영지를 내려주었다.

‘…작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저는, 그러니까, 계속 폐하의 곁에 있고 싶어요. 그러면 안 될까요?’

떠나기 전날 밤, 카렐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간청했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고백에 가까웠다. 카렐의 마음을 대강 짐작하고 있던 에르하르트는 거절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머리가, 에르하르트를 향하는 카렐의 눈동자 색이 그를 침묵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제 곁에 머무르니 사람들은 카렐을 황제의 연인으로 짐작했다. 카렐에겐 나름대로 관대하게 구는 에르하르트의 행동 역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였다. 어느 순간부터 카렐도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에르하르트는 어차피 누가 곁에 있든 간에 딱히 의미 없기에 그가 어떻게 굴든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왜 거슬리지. 카렐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문제라는 건데, 그 역시 특별히 명확한 이유가 짚어지지 않았다.

“피곤하다.”

“그러세요? 그런 거면 어서 쉬셔야지요.”

에르하르트가 피로한 것을 드러내자 그제야 카렐은 아까보다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부쩍 냉랭한 것의 까닭을 찾았다는 양.

침실에 당도한 그는 카렐을 손짓으로 물리려다가 아, 하고 돌아보았다. 그러곤 하려던 말을 잊고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카렐의 눈은 녹빛인 줄 알았는데 원래 저렇게 노랬던가. 머리도 지금 보니 남들보다 짙을 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갈색이었다. 새삼스럽게도 그런 것이 하나하나 보였다.

“…폐하?”

그가 불러놓고 아무 말 없자 카렐이 조심히 에르하르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 그래. 닐스 카나반을 불러야겠다. 물어볼 게 있으니.”

“카나반 경을요?”

“지금 바로.”

“피곤하실, …아니, 아니에요. 곧장 사람을 보낼게요. 폐하.”

곧 떨어지는 대답은 흡족했다. 쉬세요, 폐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굳이 답을 주지 않은 에르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테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그가 이 성을 비운 이후로 이곳에 온 황족은 없으니 그가 머무르던 때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도 그렇고, 발코니로 이어지는 창가에 드리운 커튼마저도 전부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에르하르트는 태피스트리를 보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가 바다를 좋아했었나.”

푸른 바다와 암석이었다. 보통 귀족들이 걸어두는 명화는 아닌 것을 보니 직접 지시를 내려 제작한 것일 텐데, 그는 바다를 대단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보며 죽음을 곱씹지 않았던가.

“…….”

아르헨에서의 기억은 되짚어보면 이가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비어 있었고, 종종 이런 식으로 의문으로 돌아왔다. 해소되지 않는 의문은 찝찝함만 만들어낼 뿐이라 금세 털어냈다. 그는 다른 상념에 잠겼다.

가령, 아까 자신을 향해 엘이라고 부르던 그자.

온몸을 칭칭 휘감은 탓에 제대로 보인 것은 없었다. 그나마 바람에 나부끼던 검은 머리와 그 틈으로 보이던 녹색의 눈뿐. 왜 그자는 자신을 보며 반갑다는 듯이 웃고, 눈시울을 붉히다가, 결국은 달아났을까. 아니 그보다 어디로 간 거지. 그가 달아난 쪽은 마을로 향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왜 이토록 생각에서 떨쳐지지 않는가. 실로 잊으면 그만인 자였다.

홀리기라도 했나.

납득 못 할 것은 없었다. 그럴 만한 얼굴이었다. 암살자는 아닌 것 같았으니, 무엇을 하는 자인지 궁금해지긴 했다. 바닷가에서 노래를 부르던 걸 보면 가수인가. 그만한 얼굴이면 몸을 파는 남창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

가정이었을 뿐인데 난데없이 기묘한 불쾌함이 엄습했다.

부쩍 귀티가 흐르던데 어쩌면 누군가의 사생아일 수도 있다. 이쪽이 그나마 가장 납득이 갔으며, 불쾌감도 없었다. 대체 그자가 뭐라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도통 끝이 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리고 올 걸 그랬지.”

눈앞에 있었더라면 이토록 궁금할 일은 없었을 테니.

하지만 어차피 또 만날 자는 아니었다. 에르하르트는 의자에 몸을 늘어트리고 눈을 감아 그자에 관한 기억을 애써 털어내 버렸다.

* * *

오래간만에 제대로 잠을 이뤘다. 그나마도 바깥 소음이 들리는 얕은 수면이었으나 몇 년 내에 이룬 단잠이었다. 딱히 가혹하게 군 적은 없지만 주인의 기분에 더없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종들은 황제가 풍기는 분위기가 평소보다 느슨해 보이자 한숨 돌린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휴양지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겠냐며 입을 모았다.

시종들이 뒤에서 무슨 말을 나누든 관심 두지 않는 에르하르트는 카렐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미 기다리고 있던 닐스 카나반이 그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폐하. 그리고 자작.”

“카나반 경.”

서로 인사를 나누는 둘을 두고 에르하르트는 상석에 앉았다. 카렐과 닐스 카나반은 각각 자리 잡았고, 그제야 시종들이 하나, 둘 요리를 내왔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딱히 말이 없는 에르하르트와 달리 카렐은 닐스 카나반의 주도로 대화를 잘 이어나갔다.

닐스 카나반이 워낙 넉살도 좋고 사교적이긴 했지만, 카렐이 저토록 위축되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처음으로 봤다. 몰락한 귀족 출신이나 평민에 가깝게 산 카렐은 좀처럼 수도의 사교계에 적응하지 못했다. 에르하르트는 그것을 돕지 않았다.

“너무 저희만 떠들었군요.”

닐스 카나반은 말없이 식사를 하며 와인잔을 기울이는 에르하르트를 화두에 올렸다.

“짐이 유령이 된 건가 했지.”

“폐하께서도 참.”

뾰족하기는 해도 대답에 달리 가시가 없음을 눈치챈 닐스 카나반은 능글맞게 답을 받아쳤다. 반면 카렐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동그랗게 눈만 깜빡거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참. 카나반.”

카렐의 당황을 풀어주며 보듬어주는 대신 와인잔을 가볍게 내려놓은 에르하르트는 닐스 카나반을 불렀다.

“혹시 아르헨에 까만 머리에 녹안을 가진 청년이 있나.”

“예?”

“어둠에 잠긴 것 같은 흑발에, 새순보다도 연했던 녹빛의 눈이었다. 마치 에메랄드 같았지. 그런 자가 있나? 혹시 아르헨에 있는 동안 짐이 그런 자를 알고 있었던가?”

닐스 카나반은 잠깐 귀를 의심해야 했다. 워낙 덤덤해서 그냥 들을 때는 깨달을 수 없었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서 헤아려보면 이만한 극찬이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카렐을 곁눈질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황제의 질문을 짚어냈다.

“그, 흑발은 워낙 드무니 아마 있었더라면 제 귀에 들려오지 않았을 리 없는데 그런 용모를 가진 이에 대한 것은 여태 한 번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런가.”

황제는 묘하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어찌해서 그런 걸 여쭈시는지요?”

“그렇게 생긴 자가 짐을 알고 있는 듯한 기색을 보이기에.”

에르하르트는 대꾸하면서도 애초 그가 귀족이었더라면 그렇게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예의를 갖췄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정말 남창이라도 되나. 하지만 자신이 한낱 남창 따위와 인연이 닿았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아!”

닐스 카나반이라면 무언가 알지 않을까 싶어 불렀는데 헛짚었다. 괜한 시간 낭비였다. 적당히 식사만 마치고 돌려보낼 생각으로 도로 와인잔을 움켜쥐는데, 닐스 카나반이 별안간 탄성을 내질렀다.

“혹시 그분이 아니십니까?”

“그분이라니?”

“폐하께서 여름 축제에 참석하실 때 동행하셨던 그 레이디 말입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레이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때는 여인이라고 단정 지었지만 현재 황제의 애인이 사내인 것을 보면 그자 역시 사내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 점을 짚어서 고하자 황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축제?”

“예?”

“짐이 축제에 갔다고?”

에르하르트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 많은 데라면 질색했다. 즉위한 후 어쩔 수 없이 무도회에 참석해야 할 때면 마리엘을 동행했다. 이제 열 살 된 마리엘과 참석해 첫 춤을 추는 건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였지만 황실에서 그와 동행할 수 있을 만한 서열의 여성은 그 애밖에 없던 터라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우스꽝스럽게 첫 춤만 추고 적당히 자리만 지키다가 돌아가기 바쁜 자신이 여름 축제에 참석한 적이 있다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아무리 아르헨에서의 기억이 불완전하다고 해도 그런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예.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 폐하의 생일연이 있을 즈음이었는데. 그…….”

닐스 카나반은 머뭇거렸다.

“짐이 대단히 운이 좋았을 그때로군.”

그 망망대해에 빠져서도 살아 나온 날. 술에 취했던 탓인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대체로 기억나는 편이었다. 그즈음에 여름 축제를 누군가와 갔었다면 떠오르지 않을 리 없었다.

“맞습니다. 그때 여름 축제에서 저와 잠깐 마주치지 않으셨습니까.”

“…….”

“폐.”

“참, 카나반 경. 아까 말씀하셨던 것 중 여쭐 게 있는데, 폐하께서 정말 사냥에 미숙하신 적도 있으신가요?”

에르하르트가 계속 없는 기억을 헤집다 못해 못내 불편해 보이자 카렐은 얼른 주제를 돌렸다. 그제야 닐스 카나반도 무언가 눈치챈 듯 보였다. 에르하르트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예? 예. 하지만 못하신 건 아닙니다. 아르헨에서 건강을 회복하신 뒤에 승마를 배우시고 사냥을 나가신 것을 고려해 본다면 폐하께서는 대단히 잘하신 것이지요. 나중엔 제가 아예 뒤처져서 폐하와는 사냥을 하고 싶지 않다며 아버지께 떼를 쓴 적도 있는걸요.”

“그러신가요. 지금도 폐하께서는 사냥을 나가시면 단연 가장 뛰어나시답니다. 작년에도 우승자로 이름을 올리셨어요. 올봄에 날이 풀리면 사냥 대회가 열릴 텐데 그때 또 우승하시겠지요.”

분위기를 풀어보겠답시고 서로 맞장구를 치는 둘을 보다가 에르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카렐은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에르하르트에게 몸을 돌렸다. 그는 일어날 듯 말 듯 몸을 들썩였다.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마저 이야기를 나눠라. 모처럼 즐거워 보이니.”

“그게…….”

카렐은 입을 달싹거렸지만 에르하르트는 그가 머뭇거리는 말을 기다려주는 대신 곧장 식당을 나섰다. 회랑을 걸으며 그는 크라바트를 느슨히 풀었다. 그의 얼굴엔 해소되지 않은 답답함이 얼룩져 있었다.

성큼성큼 내딛던 걸음은 발코니로 향했다. 그는 난간을 짚고서야 고여 있던 숨을 툭 뱉어냈다. 미간엔 깊은 골이 생겼다. 모처럼 단잠을 자서 풀어졌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기억을 되짚었다.

역시 아무리 거슬러 내려가도 여름 축제에 관련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닐스 카나반의 착오일 수도 있으나 이것이 또 다른 사람과 헷갈린 거라고 하기에는 모호했다. 그는 퍽 확신을 하고 있었고, 그의 되물음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또한 기실 에르하르트를 누구와 헷갈릴 수 있단 말인가. 닐스 카나반이 여름 축제에서 그를 본 것은 거짓도, 그의 착각도 아닐 터였다.

“…….”

에르하르트의 기억은 대체로 빈틈없이 이어져 있는데 종종 이런 식으로 공백이 있었다. 가령, 기억에도 없는 이 팔찌가 그랬다. 그는 보석이 반쯤 갈라진 팔찌를 들어 올렸다.

올리비아가 준 아티팩트는 아니었다.

이 팔찌는 그가 만든 것이다. 빼곡하게 새겨진 수식이 그 증거였다. 시전자만이 확인할 수 있는 고유한 흔적이 그것을 증명케 했다.

우스운 건, 에르하르트는 이것을 만든 기억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이토록 방대한 마력을 담으려면 당시에 제법 고생했을 테니 떠올리지 못할 수가 없는데. 의문과 찝찝함만을 안겨줄 뿐이라 버리려고 했다가도 이상하게 내키지 않아서 그냥 두었다.

“…….”

석 달간 의식이 소실되었을 때 기억조차 일부분 날아간 것일까. 그렇다면 그자는 자신의 과거에 새겨진 자인가. 하지만 그런 것이 맞다면 그렇게 달아날 게 아니라 본인이 누구인지를 소명해야 하지 않는가. 여러모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자를 떨치려 했는데, 자꾸 머릿속에 엉겨 붙는다.

“폐하.”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모처럼 즐거워 보이던데.”

“그럴 리가요.”

“카나반은 짐이 초대한 손님이다. 두고 오는 건 실로 무례한 일이야. 카렐.”

“하지만 폐하가 마음에 걸리는걸요.”

“…….”

“에리…,”

“카렐 아이작.”

에르하르트는 몸을 돌렸다. 느릿한 걸음은 카렐을 앞두고야 멈추었다.

“짐이 그 이름을 네게 허락한 적이 있던가?”

“폐하.”

“응? 아이작.”

“실수, …실언을 했습니다.”

카렐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온화한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폐하.”

바깥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쨍한 기류를 깨트렸다. 에르하르트는 시선을 거두며 카렐을 지나쳐 발코니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지.”

병사는 뒤따라 나온 카렐을 보고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자신이 혹여 황제의 밀회를 방해한 것일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게 거슬려서 에르하르트의 어조엔 가시가 돋았다.

“짐이 두 번 물어야 하나?”

“성 밖을 서성이는 수상쩍은 자가 있어 처결을 여쭈러 왔습니다.”

“그런 것마저 하나하나 답을 일러줘야 하는지 몰랐군.”

“송구합니다. 그, 예전에 머무르실 적 폐하께서 누군가가 서성거리거든 바로 쫓아내지 말고 꼭 고하라 당부하셨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게 어렴풋이 기억나서. …바로 쫓아내겠습니다.”

또다. 또 제게는 없는 기억이었다.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치밀어오르는 것은 잠시였다. 에르하르트의 머릿속엔 문득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아까 제게서 달아났던 그 녹안의 남자.

“아니.”

에르하르트는 경을 칠까 황급히 나서는 경비병을 붙잡아 세웠다.

“짐의 앞으로 데리고 와.”

카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지금 당장.”

에르하르트는 그 시선에 화답해 주는 대신 그를 지나쳐 걸었다.

* * *

‘내가 불어 넣어준 생이 다하기 전, 너에 대한 기억을 잃은 인간이 다시 너를 기억해 내고, 사랑하게 된다면 네 수호석을 내어주마. 어떠니, 라얀? 너와 그 아이의 사랑이 그토록 대단한 것이라면, 혹은 그게 운명이라면 어려울 것도 없지 않을까. 오히려 내가 밑지는 내기가 될 테지.’

속삭이는 말에 라얀은 거부할 재간이 없었다. 그것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어쩌면 에리히는 그를 기억해 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만약’이라는 희망이 마음 한구석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수호석을 잃었으나 아샤로 인해 겨우 연명하게 된 라얀은 한참을 앓아야 했다. 그는 백여 일 가까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샤가 돕지 않았더라면 라얀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겨우 추스르고 나니 바다가 그를 거부했다. 아티사를 벗어난 대가였다.

메르는 그를 아티사뿐만 아니라 엘레브 해 어디에도 허락하지 않았다. 헤엄을 치면 언제나 친숙하게 감겨오던 물은 이제 그를 밀쳐냈다. 라얀은 아샤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나서는 지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를 밀쳐내는 곳에서 버티기엔 그만한 기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떠나서 라얀은 그곳에 더 오래 있을 수 없었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던 이들에게 나약해진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혹은 그들이 자신을 설득하려 들까 봐 두려웠다.

“…에리히가 왔어.”

하지만 인간들이라고 그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땅에서 솟았는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신원이 불분명한 외지인을 경계했다. 라얀은 동굴에 터를 잡고 때때로 제 눈물을 가져다 팔았고, 인간 세계에 조금 적응하고 나서는 제 노랫소리를 좋아하는 걸 알고 그것을 팔았다.

뭣도 모르고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다가 큰일을 당할 뻔한 뒤에는 로브를 꼭꼭 여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얀은 이곳에서 버티면서 인간들이 마냥 선량하지만은 않으며, 인어들이 설명한 대로 교활하고, 나쁜 이들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라얀 님이 사랑하시는 그 인간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싫어졌느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바다에 터를 잡은 것들이 모두 착한 것만은 아니듯이, 인간들 또한 그런 것일 테니까. 그리고 종종 착한 사람들도 봤다.

그가 부르는 노래가 좋다며 칭찬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그가 바다에서 건져오는 보석을 헐값에 파는 것을 보다 못한 이가 혀를 차며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도 했다.

라얀은 인간들의 호의와 악의 속에서 버티며 기다렸다.

에리히가 오기를.

에리히가 그를, 찾아오기를.

“응.”

<그렇다면 드디어 나쁜 저주에서 벗어나실 수 있는 거지요?>

라얀이 추방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멀리하긴커녕 곧잘 그의 말 상대가 되어주었던 레탄은 신나서 재잘거렸다. 물고기의 모습이라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는데 파닥거리는 지느러미에서 얼마나 흥겨워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저주라니.”

<저주죠. 라얀 님은 점점…….>

레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안다. 그의 죽음은 유예되었을 뿐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남들보다 느린 성장을 했지만 잔병치레는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무리한다 싶으면 곧잘 앓았다.

그러다 보니 이번 해는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어차피 진작 소멸했어야 할 목숨을 이어간 것이라 죽는 게 억울하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에리히를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아샤와 맺은 태초의 서약은 제약이 많았다. 라얀이 먼저 정체를 드러내서도, 찾아가서도 안 됐다. 하여 에리히를 찾으러 갈 수 없음이 안타까웠고, 그 애가 자신을 기억해 내지 못한 것도 슬펐다. 혹여 소멸 이후에 기억해 낼까 봐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 살 수 있잖아요. 라얀 님이 사랑하는 그 인간과 함께.>

“그런데, 날 기억을 못 해.”

<네?>

“에리히가 날 기억 못 해.”

라얀은 아까를 떠올렸다.

로브가 벗겨지며 바람결에 흩날리던 찬란한 금빛의 머리, 새파란 눈. 부쩍 자랐지만 알 수 있었다. 에리히다. 그의 엘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환희가 번졌고, 기쁨이 늘 슬픔으로 차 있던 속을 채웠다.

‘누구지?’

그리고 그런 라얀이 맞닥트려야 했던 건 온기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새파란 눈이었다.

“나를 찾아온 게 아닌가 봐.”

라얀은 누구냐고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아샤와 맺은 서약에 반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라얀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에리히에게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날 기억하지 못해…….”

라얀은 재차 중얼거리며 교차한 팔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오늘 달아난 직후로 내내 이 상태였다. 서늘한 눈으로 제게 누구냐고 묻던, 또 무언가를 겨누며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던 에리히가 머릿속을 점령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 기억하게 만들어야죠!>

레탄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분개했다. 라얀은 도로 고개를 들었다. 레탄은 어떻게 라얀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느냐며 화를 냈다. 아까는 기뻐서 파닥이던 지느러미가 이번에는 노여워서 파닥거렸다.

레탄은 에리히가 앞에 있다면 꼬리로 에리히의 뺨을 후려치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그래 봐야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몸통이라 아프기야 하겠느냐마는.

“…그치?”

내내 가라앉아 있던 라얀도 덩달아 근거 없는 용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매몰되어 있었지만, 몇 번 보다 보면 에리히는 기억할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그 나날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인데. 라얀이 그로 인해 공허를 채웠듯, 에리히 또한 라얀과 함께하며 즐거웠다고 말했다.

조금 성격이 나빠진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지만. 그래도 원래 상냥한 본성이 바뀔 리는 없으니까. 라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다녀올게!”

걱정을 털어내려는 듯 큰소리로 외치며 레탄에게 팔랑팔랑 손을 흔든 라얀은 뛰어갔다. 용기가 사그라들기 전에 움직여야만 했다. 아니, 에리히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 * *

큰소리를 치기는 했는데, 막상 성 근처로 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불이 켜진 것을 보면 에리히가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분명한데,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니 어떻게 그를 만나러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예전에는 성문 앞에 주저앉아서 열을 셌을 때 에리히가 그를 찾아왔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에르하르트가 언제 떠날지 알 수 없으니 더 조바심이 났다. 아주 오랜 후에 떠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일 떠날 수도 있으니까. 라얀은 계속 근처를 서성거렸다.

“…….”

에리히를 어떻게 만나야 할지, 막상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골몰하느라 라얀은 제게 다가오는 기척을 뒤늦게 인지했다. 그것을 깨달은 뒤에는 이미 틈 없이 포위되었다.

어떡하지. 라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리 수호석도 없다지만 인간 몇 상대하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여러 명을 상대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느냐면 확신할 수는 없었다. 라얀은 이리저리 틈을 살폈으나 녹록지 않았다.

“무슨 까닭으로 성을 살피고 있었지?”

“…….”

“그것도 로브로 온몸을 가려놓고서. 폐하께서 머무르시는 곳에 그런 불온한 차림이라니.”

폐하? 라얀은 사내가 이르는 호칭을 가만히 헤아렸다. 그건 바깥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 아닌가. 에리히가 왜 그런 자와 같이 온 거지. 그도 높은 사람이 된 걸까. 아니, 원래 높은 사람이었나. 그랬을지도 모른다.

“다치기 싫으면 순순히 투항해라.”

라얀의 고민은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

라얀도 이제는 나름대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았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해도 믿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굴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라얀은 예전에 뭣도 모르고 꼬임에 넘어가 곤욕을 치를 뻔한 일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얼굴을 꼭꼭 숨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

물론 에리히의 성을 서성거리다가 붙들리는 것은 그때의 일과 결이 다르니 비교할 것은 아니었지만, 에리히에게 괜히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라얀은 제게 드리운 검을 하나하나 살폈다. 동시에 그나마 빠져나갈 만한 구석이 있는지도. 라얀이 조금씩 움직이자 그들 역시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그에 라얀은 몸을 굽혔다가 유연하게 뛰어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이었는지 당황한 이들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게다가 그들은 검을 드리울 뿐 그것으로 제게 해를 끼치려곤 하지 않았다. 그러니 틈이 생겼다. 유일한 기회일 게 분명해 발돋움하려던 찰나였다.

탕―!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날카롭고 난폭한 소리가 대기를 휘감고 지나갔다.

“고작 하나를 상대로 애를 먹나.”

웅웅거리는 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긴장해 얼어붙은 와중에도 자연히 반응했다. 라얀은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렸다. 에리히의 손에는 아까 마주쳤을 때 제게 겨누던 것이 들려 있었다.

“…….”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던 에리히는 홱 돌아섰다. 라얀은 돌아서는 그를 보다가 왠지 따끔거리는 뺨을 만졌다. 옅은 핏자국이 묻어나왔다. 아. 라얀은 탄식을 터트렸다. 동시에 정신을 차린 자들이 라얀을 결박했다.

그의 뒤로 성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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