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낮과 밤이 불분명했다. 어둠 속에서 라얀은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혹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했다.
또 오겠다던 아일라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이곳은 쉬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쩌면 뜻을 굽히지 않는 라얀에게 지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거나. 어차피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라얀은 팔찌를 움켜쥐었다. 지금 놓여 있는 상황에서 이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자 의지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방이 너무 어두워 보석의 색을 살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여 있는 어둠 속에서 라얀은 에리히를 생각했다. 이틀 정도 푹 쉬고 다 나은 모습으로 오랬으니 그때까지는 자신을 찾지 않을 테지만, 그 이후로 오지 않으면 찾을 텐데 그게 걱정이었다.
처음에는 화를 낼 테고, 다음에는 염려할 것이다. 그러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칠 테고, 때가 되면 결국은 이곳을 떠나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
그렇게 라얀은 천천히 잊힐 게 분명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그를 후벼팔 때마다 라얀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을 다독였다. 어차피 언젠가 다가올 이별이었다고. 그게 조금 이르게 왔을 뿐 이것은 언제든 겪어야만 하는 고통이었다고.
“에리히…….”
구석에 주저앉은 라얀은 에리히의 이름을 불렀다. 상대에게 닿지 않을 부름은 허망하게 스러졌다. 에리히. 또 한 번 그의 이름을 속삭인 라얀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한결 나아졌던 몸은 갇힌 직후로 다시 부쩍 늘어졌다.
아일라가 불어 넣어준 기운이 다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모든 의욕을 놔버려서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이곳은 별로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그 흑해보다도 못했다.
그가 숨을 가파르게 내쉴 때마다 숨결이 더웠다.
이대로라면 죽는 것도 금방이지 않을까. 예전까지만 해도 죽음이든, 추방이든 그렇게 무섭진 않았던 것 같은데 정말로 에리히를 영원히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싫었다. 살아 있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또 몰랐다. 기적은 기약 없는 희망만을 주는 허상 같은 것이지만 가끔은 존재하기도 하니까.
라얀은 부러 다른 생각을 했다. 그는 원래 나쁜 일이 있을 때면 그것을 헤쳐내기 위해 즐겁고, 좋았던 기억을 곱씹었다. 예전에는 유년기를 떠올렸다면 이제는 떠올리는 모든 추억에 에리히가 있었다. 선명하고 눈부시게도.
‘이거 만져봐도 되는 건가?’
언제였지. 라얀이 바닥에서 건져온 불가사리를 본 뒤로 수중에서 다른 바다 생물들을 찾아 콕콕 만져보거나 손바닥 위에 올리고 구경하는 걸 취미로 삼은 적이 있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에르하르트는 흐물거리며 바다를 떠도는 것을 손으로 콕 가리키며 제게 물었다.
‘만져봐도 괜찮아.’
라얀은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에르하르트는 한 점 의심도 없이 그것을 만졌고, 곧 손을 움츠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라얀은 즐거이 웃었다.
‘라얀. 지금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너도 나한테 신 거 먹였잖아.’
‘그게 대체 언젯적이야. 그리고 별로 시지도 않았잖아.’
에리히는 부쩍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자기변호를 했다. 흥. 라얀은 콧김을 뿜었다. 그게 얼마나 셨는데. 혀끝이 짜릿짜릿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에리히는 맛을 잘 모르는 바보인 것 같다. 단것도 싫어하고, 신 것도 잘 모르고. 자기도 모르게 동정 어린 표정으로 봤는지 에리히는 울컥했다.
‘그 표정 뭐야. 불쾌한데.’
‘아무것도.’
라얀은 새침을 떨었고, 에리히는 그를 한참 보다가 물을 홱 끼얹었다. 라얀도 이에 질세라 꼬리를 휘둘렀다. 거친 물세례에 에리히는 얼굴을 거듭 쓸어내리며 기침을 했어야만 했다.
“…보고 싶다.”
기억을 곱씹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다.
“에리히.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는…….”
나는, 너를 생각해.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라얀은 차라리 눈을 감아야 했다. 끼이익.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등 돌려 앉아 있던 라얀은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게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아일라라면 실랑이를 할 기력이 없었고, 다른 이들이라면 그에게 말을 붙이지도 않을 것이다.
“아직도 뜻은 여전하냐.”
무시하려 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를 움직이게 했다. 고개를 돌리자 들이차는 빛에 눈이 부셨다. 라얀은 눈을 조금 찌푸려야 했다. 눈이 겨우 빛에 적응하자 왕의 표정이 보였다. 그녀는 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눈으로 라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정 계속 갇혀 있고 싶은 건 아닐 테지.”
“…메르께서.”
라얀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잠시 호흡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
“계속 저를 모르는 척하셨잖아요. 무생물보다 못하게 대하셨잖아요. 왕의 오랜 수치를 치워버릴 심산으로 저를 추방하시면 모두 끝날 일인데. 왜. 대체 왜…….”
메르의 얼굴에선 여전히 어떤 표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게 네 뜻이군.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어.”
벽이랑 대화하는 것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라얀은 저번부터 이어지는 그녀의 관심이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달갑지도 않았다. 애정을 기반으로 한 것일 리는 없으니.
“왕이여. 절대 제 뜻은 꺾이지 않을 거예요.”
“…….”
“그 애는 제 하나뿐인 위로고, 사랑일 테니.”
“어리석은 것.”
건조하게 그를 힐난한 메르는 등을 돌렸다.
틈새로 스미던 희미한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겨우 적응했는데 또 이 새까만 공간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잠깐이나마 빛이 스민 덕에 보석의 색이 변하지 않은 것을, 에리히에게 아무런 일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손목을 그러쥐며 라얀은 모로 누웠다.
그러기 무섭게 돌연 숨이 가빴다. 잔잔하던 열이 그를 살라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몸이 타들어갔다. 끔찍하게 닥쳐오는 고통 속에서 라얀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 * *
아일라는 왕의 궁 앞에서 서성였다. 궁을 지키는 수호 인어들은 내심 돌아가라 눈치를 줬다. 하지만 아일라는 뻔뻔하게 모르는 척했다. 수호 인어로서 서열은 까마득히 아래지만 아일라는 원로의 딸이었다. 언젠가 그 자리를 물려받아 원로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라 어지간한 인어들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함부로 대하는 건 라얀뿐이었다.
알레와 유리에겐 각 거북이를 보냈다. 그녀가 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거북이보다 빠른 대신, 한참 동안 아티사를 비워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들을 데려온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괜히 그녀마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라얀의 신변에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인어가 금기를 깨고 인간과 접했으며 심지어 사랑한다고까지 말했다. 원로들은 그를 더 강력하게 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비마저도.
전언을 보내랴, 아비를 말리랴 정신이 없었다. 라얀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아무리 제 1원로의 딸이라고 해도 모두의 출입을 철저히 금한 감옥에 빈번히 출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정신 없는 와중에 왕의 궁정에 온 것은 전부 이유가 있었다.
확신할 수 없지만 메르는 라얀의 처벌에 회의적이었다. 이번 일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처형하거나 영구 추방할 수 있는 사안이었음에도 감옥에 가뒀다. 물론 그 또한 가벼운 형은 아니었지만 수백 년 이어온 율법을 어긴 것치고는 관대한 처사였다.
그러니 메르만 잘 설득한다면.
“디 오노르. 메르.”
멀리서 다가오는 기운을 감지한 아일라는 곧장 다가가 예를 갖췄다.
“자비를 청하러 온 것이라면 물러나라. 나는 이미 충분히 베풀었다.”
메르는 무감하게 그녀를 쫓아냈다. 고작 이 정도로 쫓겨날 것이었다면 찾아오지도 않았다. 쭈뼛쭈뼛 곤두서는 두려움을 애써 외면하며 아일라는 눈을 질끈 감고 청했다.
“라얀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제가 잘 감시하겠습니다. 왕이여. 감옥은 어린 인어에게 너무 혹독합니다. 게다가 라얀은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습니다. 부디…….”
흘끔 곁눈질했는데 메르는 귓등으로도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 또한 예상한 것이지만 막상 그녀의 완고함을 보니 막막해졌다. 그러면 어쩌지. 역시 반려의 인을 새기겠다고 할까. 라얀은 새길 수 없으니 일방적인 것이 될 테지만 어쨌든 그를 빼낼 구실은 될 것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라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녀 역시 라얀을 그런 의미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 안다. 그렇다 해도 아일라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나날을 함께해 온 그의 비극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물론 이 말도 가볍게 무시할 것 같기는 하지만.
아일라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망설임이 충동보다 커지기 전 뱉어내려 입을 달싹이는데 급하게 메르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일라는 몸을 돌려 살폈다가 표정을 굳혔다. 그는 감옥의 간수였다.
“메르. 시 메르께서…….”
간수의 말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심장이 발치로 덜컹 추락했다.
아일라는 왕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를 빠져나가 곧장 감옥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 어둠 속에서, 그 고독 속에서 얼마나 속을 끓였겠는가. 게다가 라얀은 상태도 영 좋지 않았다. 기어이 탈이 난 것이 분명했다. 간다 한들 제힘으로는 장막을 걷어낼 수 없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할 텐데도 아일라는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간수들이 막든 말든 막무가내로 밀치고 들어간 아일라가 발견한 것은,
“…….”
둥근 막에 둘러싸인 채 눈을 감고 있는 라얀의 모습이었다.
* * *
황제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떠들썩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이 아르헨은 다시 고요가 깃들었다. 특히 성은 며칠 전의 북적거림을 잊었다. 혹시 황제가 와 있는 동안 무슨 실수라도 해 경을 칠까 봐 내내 긴장하며 피로를 호소했던 사용인들은 전부 한숨 돌린 낯이었다.
그것은 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아는 황제가 머물렀던 지난 며칠 동안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에르하르트는 아닌 척 슬슬 황제를 자극하는가 하면, 부드러운 말 속에 가시를 숨겨두기도 했다. 트집 잡을 거리는 찾기 힘든 교활한 말장난이라 잘 넘어가기는 했으나 황제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생전 신경 쓴 적도 없던 에르하르트의 생일을 위한답시고 선상 파티를 준비했다가, 에르하르트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하기까지. 정말 하루하루 피 마르는 시간이었다. 이런 고요한 평화가 달갑게 여겨질 만큼.
‘부인. 에리히를 잘 부탁하네.’
떠나기 전, 올리비아의 당부가 왜인지 마음에 걸렸지만 의례적인 말이겠거니 했다. 찝찝함을 털어내고 평화를 만끽하는 그녀의 요즘 소소한 고민거리는 단연 에르하르트였다.
“…….”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는 창가의 난간에 걸터앉은 에르하르트는 저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는 내내 이랬다. 그러니까 황제의 일행이 돌아간 뒤로.
독살 미수 사건 이후로 작정한 듯이 사람들을 성으로 초청하거나 혹은 귀찮은 기색을 팍팍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초청에 응하는 등 바삐 살더니, 황제 일행이 간 뒤로는 초청에 응하지도 않고 사람을 부르지도 않았다. 방문 요청을 알리는 이들 또한 다음을 기약하며 거절했다.
또다시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전하.”
확실히 요즘 조금 기복이 심해 보였다. 손목에 찬 팔찌를 보며 짜증을 내고 또 한편으로는 안도하기도 하는가 하면, 불러도 듣지 못한다는 듯이 대답하지 않았다.
“전하.”
“아.”
지금도 거듭해 불러서야 겨우 반응을 보였다. 예민해서 가까워지는 기척 소리에 금방 반응하곤 하던 에르하르트답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셔요.”
“그냥.”
“식사하셔야 할 때랍니다. 식당에 준비할까요? 아니면 방에 차리라 이를까요?”
“아무 데나 상관없으니 알아서 해.”
“그렇다면 온실에 차려야겠네요. 꽃이 어여쁘게 피었답니다. 기분 전환하기에 그만한 데가 없지요.”
에르하르트는 아쉽게도 꽃을 보며 감상에 젖는 사내로 자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신록 한가운데 있으면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까.
“하면 준비를 마치거든 모시러 올게요. 전하.”
어차피 에르하르트가 레아에게 속내를 드러낼 리 없으니 괜히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기 전에 시종에게 지시를 내릴 겸 바깥으로 나갔다. 그에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탁.
레아가 닫히는 문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에르하르트는 다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생각이 많았다. 사교 활동에 쏟을 만한 기력이 전혀 없을 만큼. 닐스 카나반이 체스를 두자며 징징거리는 서신을 여러 번 보냈지만 미련 없이 벽난로에 태워버렸다.
까닭이야 많았고 실타래만큼 복잡하기도 했다. 올리비아의 의미심장한 말도 말이고, 라얀의 일도 그렇고, 그런 와중에 라얀은 또 소식이 없었다. 낫기 전까지는 오지 말라고 엄포 아닌 엄포를 했으니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걱정은 되지만 한편으로는 잘된 일이라고 합리화했다. 그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은 제멋대로 라얀도 떠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을 상정하여 여러 가지 경우를 가정해 봤는데 그를 제르바까지 데려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동부터가 문제였다. 마법진을 이용한다고 해도 세 시간 만에 제르바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가 직접 마력을 운용해도 안 될 말이었다.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추가 기울자 올리비아의 말이 계속 뇌리에 남아 떨쳐지지 않았다.
‘나는 너의 평온한 일생을 바란단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기약 없이 오래될 힘겨운 싸움 따위는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차근차근 세력을 모으고 영향력을 키운들 그가 황제의 자리를 앗으려 하는 것은 일종의 반역이었고,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패배는 염두에 두지 않지만 지리멸렬한 싸움이 될 터였다.
게다가 올리비아는 에르하르트가 그 자리를 원하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탐욕 때문이 아니라 살고 싶어져서. 생을 이어갈 수 있는 가장 확신한 수단은,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라.
그뿐이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그의 뜻을 지지해 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제 생각을 곰곰이 되풀이했다.
삶을 이어갈 방법은 오로지 그 하나뿐인가. 아니. 그것은 아니었다. 보다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었을 뿐이다. 망명이든 뭐든, 그가 살아 있는 한 황제는 계속해 목숨을 노릴 테니. 곁들이자면 오기도 있었다. 당신이 나를 꺾으려 하니, 내가 먼저 당신을 꺾어버려야겠다는.
그렇다면 그가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분노의 불씨를 태우느라, 한편으로는 살고 싶다는 생각에 치중해 파고들지 않았지만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가장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그는 태어나 십수 년 동안 단 한 번도 생을 갈구한 적 없으므로.
왜. 왜 갑자기 살고 싶어졌을까. 아르헨에 처음 발 디딜 때만 해도 절벽 위에서 투신할 만큼 삶에 미련 없었으면서. 옛날이라면 답을 찾는 데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이 명확해진 지금, 답은 아주 명료하고 간결하게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라얀.”
에르하르트는 제 삶의 이유를, 형체로 만들어 한숨 쉬듯 불렀다.
그 애가 삶의 이유였다. 죽고 싶지 않은 원인이었다. 그가 어언 2년 동안 헛짓 아닌 헛짓을 하게 한 생의 근원이었다. 그렇다면 라얀이 없으면 지금 탐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었다. 황제의 자리조차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모호한 것이 명확해지자 며칠간 지루하게 이어지던 생각은 차차 확실한 모양새로 다듬어졌다.
탁탁!
에르하르트가 보통 예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레아는 물론이고 시종들까지도 그의 침실 앞에서는 발소리를 죽이는 편인데 소리가 부쩍 크고 다급한 기색을 띠었다.
고작해야 식사 때문은 아닐 테고. 에르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등을 곧게 세움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부름도, 노크조차도 없었다. 레아는 그만한 경황도 없어 보였다.
그녀가 얼마나 급했는지를 보여주듯 옷은 평소처럼 반듯하지도 않았고, 씨근거리는 숨은 가다듬지도 못했다. 역시나 가장 시선이 가는 것은 붉어진 눈시울이었다.
“전하……!”
“대체 무슨 일이야.”
레아가 나간 지 채 삼십여 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사이에 그녀를 눈물짓게 할 만한 일이 무엇 있다는 말인가. 에르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저러다 쓰러질까 봐 부축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레아가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걸음을 떼는 게 빨랐다.
“제르바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왜였을까. 무슨 일이 생기면 포트로 가라는 말과 손에 몰래 쥐여 주던 작은 쪽지, 하다가 말을 삼키며 희미하게 웃던 올리비아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올리, …올리비아 전하께서 위독하시답니다.”
며칠 넘기지 못하실 수도 있대요. 레아는 서신을 건네며 끝끝내 눈물을 흘렸다. 에르하르트는 구김이 간 서신을 오래도록 살폈다.
* * *
곧장 제르바행이 결정되었다. 라얀에게는 어떤 메모를 남길 여유조차 없었다. 짐도 단출했다. 이동 마법진으로 부랴부랴 향하는 마차는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파리해 보이기는 했지만 위중해 보이시진 않았는데…….”
레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그녀의 눈물샘은 마를 줄을 몰랐다. 정작 올리비아의 아들인 에르하르트는 무덤덤했다. 이 길이 올리비아의 병문안이 아니라 임종을 지키러 가는 것임을 알면서도.
물론 속까지 무덤덤한 것은 아니었다.
레아의 말대로 파리하고 마른 듯도 해 보였지만, 당장 오늘내일할 만큼 위중해 보이진 않았다. 그녀의 병세는 어딘지 일렀으며 불온했다.
“레아.”
한참 바깥 풍경만 묵묵한 시선으로 보던 에르하르트는 계속 훌쩍거리는 레아를 불렀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나면 날 따르지 말고, 마리엘의 궁으로 가.”
“전하. 대체 그게 무슨 소리세요.”
레아는 슬픔에 잠겨 있던 것도 잊고 경악해 그를 불렀다.
“그대는 내 유모이기에 앞서 어머니가 아끼던 자니 마리엘의 궁으로 들어가는 데 별로 어렵지는 않을 거다. 마리엘도 그대를 좋아하고.”
“제게 지금 전하를 떠나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르헨 촌구석에 있는 것보다야 제르바에 있는 게 여러모로 낫잖아.”
“전하!”
“나는.”
아르헨에 가지 않을 거라고. …아니, 라얀 때문에 가기야 하겠지만 금방 그곳을 떠날 거라는 말은 차마 레아에게 하지 못했다.
그는 떠날 것이다.
라얀과 함께. 바다가 닿아 있는 곳으로 어디든. 작은 섬도 나쁘지 않을 테고, 인접한 다른 나라에 정착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제 생의 까닭과 함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그의 초상이 알려진 적 없으니 이 금발만 숨기고 살아가면 그가 헤셀러스의 황자인지 누가 알아챌 수 있겠는가. 그의 머리를 태양 같다며 좋아하는 라얀은 아쉬워하겠지만 그것이야 둘이 있을 때만 마법을 풀면 되니까.
어쩌면 올리비아 또한 이런 평화를 바랄 것이다. 마리엘이야 올리비아를 쏙 빼닮은 아이고, 황제도 그 애는 퍽 귀여워했으니 걱정할 것 없었다.
“전하. 저는 절대로 전하를 두고 어디 가지 않을 겁니다. 제가 대체 어디를 갈 수 있겠어요.”
제 속내를 모를 레아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에르하르트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강경한 것처럼 에르하르트 역시 뜻을 확고히 했다. 굳이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아까와 다른 의미로 마차 안이 조용해졌다. 숨이 막혔다. 그는 꽉 죈 크라바트를 끌어 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법진이 구동하는 곳까지 반나절은 걸렸다. 게다가 말이 지쳐 쉬기에도 아직은 일렀다.
위화감에 그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과 동시에 창틀을 꿰뚫는 것이 있었다.
“전, 전하!”
새파랗게 날이 선 검이었다.
담담해 보였으나 속은 진탕 휘저어진 게 틀림없었다. 마차가 느려지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다니.
“습격이다! 전하를 보호해!”
바깥에서 비명 소리와 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레아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에르하르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산적인가 봅니다. 기사들이 보호해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라며 진정하라고 하는데 정작 그녀가 불안해 보였다. 산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제대로 된 행렬은 아니었지만 헤셀러스 황가의 문장이 있었다. 그저 그런 귀족도 아니고 황가의 문장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머저리가 있을 수 있나.
“전하. 들리십니까?”
격전 속에서 로이엄이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수가 많고 실력이 심상치 않습니다. 길을 열어드릴 테니 그쪽으로 가십시오. 막고, 엄호하겠습니다. 말을 타고 달리시면 셀런스까지 금방입니다.”
로이엄의 목소리엔 패색이 짙었다. 에르하르트는 방심한 것을 자책하는 대신 이 상황을 가늠했다. 제 실력으로는 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면 마법은? 모든 것을 내려두고 떠나기로 결정한 이상 그것을 드러내는 게 과연 옳은가. 하지만 사실 이는 고민의 여지가 없는 문제였다. 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리고 진실을 아는 입이야 틀어막으면 그만이다. 회유를 하든, 혹은 죽이든.
결정을 내린 에르하르트는 대기의 마력을 끌어모으며 머릿속으로는 마법진을 그리고 수식을 계산했다. 눈 깜빡거릴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구동할 마법의 연산이 끝났다.
“…….”
하지만 마력이 모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의 곁에 머물며 살랑거리던 마력이 체 모이기도 전에 흩어졌다. 마력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숨쉬는 일보다 자연스러웠던 것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빌어먹을. 에르하르트는 욕을 지껄였다.
산적의 습격 따위가 아님이 더욱 명백해졌다.
또한, 황제가 그의 생환을 대단히 여러 방면으로 의심하며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는 것 역시.
“전하. 어서 가셔야 합니다, 어서요!”
그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지 못하는 레아는 재촉하기 바빴다. 에르하르트는 검집을 꾹 움켜쥐며 로이엄이 터주는 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이미 기사 중 몇은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고, 상대방 쪽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쪽의 수가 열세인 탓에 점차 불리한 형국이 되어갔다. 그를 비호하는 로이엄의 옷자락도 죄 찢겨 있었다.
습격을 대비하지 않은 견갑은 검에 금방 꿰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연약했다.
“전하. 가십시오.”
말의 고삐를 에르하르트에게 쥐여 주는 로이엄은 지쳐 보였다.
“저희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어볼 테니.”
“경.”
“…부디 신의 가호가 전하께 깃들기를.”
죽음을 직감한 듯도 했으나 두려움은 엿보이지 않았다.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 위험……!”
발을 동동 구르던 레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에르하르트의 앞을 막아섰다. 푹. 살을 꿰뚫는 소리가, 삼키는 숨소리가 이 난전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레아!”
날갯죽지를 꿰뚫어 관통한 날카로운 촉에 살점이 너덜거렸다.
“…아.”
가슴이 꿰뚫린 레아는 비틀거리면서도 에르하르트의 앞에서 비키지 않았다. 혹여 그녀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다시 눈먼 화살이 에르하르트를 꿰뚫을까 두렵다는 것처럼.
“가, 세요. 전하.”
레아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기침을 했다. 피가 터져 나와 턱선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이미 선혈로 엉망인 드레스를 물들였다.
“어, 어서요. 전하. 저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제발. 레아는 호소했고, 에르하르트는 제 어깨를 꾹 움켜쥔 그녀의 손을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조금만 더 감성적이었다면 죽음이 지척에 놓여 있는 그녀를 두고 어떻게 갈 수 있느냐고 고개를 저었을 테지만, 이성이 그를 움직였다.
그는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레아를 위해서라도. 아니, 어떤 누구를 위해서라도. 이미 많은 이들의 희생을 등가에 놓은 목숨이니. 에르하르트가 말에 올라타자 그새 신형을 무너트린 레아가 그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
걷다가 넘어진 어린 그를 안아 얼러주며 우리 황자님이 언제 자라실까 흥얼거리던 레아의 옛 모습이 선명하면서도 낡은 모습으로 망막에 맺혔다가 스러졌다.
올리비아의 위중마저 그를 의심 없이 불러들이기 위해 황제가 꾸며낸 거짓인가.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날아든 급보에 제대로 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움직여야만 했다. 철저히 방비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
제 패착과 방심, 그리고 겪어야만 했던 상실에 이를 갈던 에르하르트는 로이엄이 알려준 길로 달리다가 방향을 꺾었다.
마력제어진을 펼칠 정도로 오늘의 습격을 철저하게 방비한 황제가 셀런스로 가는 길을 포위하지 않았을 리 없다. 차라리 조금 돌아서라도 아르헨으로 가는 쪽이 현명했다. 올리비아의 소식을 확인한 뒤 라얀과 함께 어디로든 떠날 것이다. 빌어먹을 황제의 영향력이 없는 곳으로.
“하아…….”
고삐를 움켜쥐는 손등에 핏줄이 드러났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꾹꾹 누르고 있는 모든 것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탕! 별안간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말이 고통스럽게 울며 거꾸러졌다. 에르하르트는 부지불식간에 말에서 떨어졌다.
겨우 손으로 땅을 짚어 목이 꺾이는 것은 면했다. 말은 울컥울컥 피를 흘리며 사지를 떨고 있었다. 도저히 소생할 가망이 없어 보였다.
에르하르트는 망설임 없이 검으로 말의 목을 꿰뚫었다. 그제야 고통 어린 떨림이 멈췄다.
깊게 박힌 칼을 뽑아내며 에르하르트는 시선을 돌렸다. 따라온 사내의 손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들려 있었다. 활도, 그렇다고 석궁도 아닌 것의 구멍은 하얀 연기를 폴폴 뿜어냈다.
“아직 실력이 형편없는지라 잘못 맞혔소. 쯧.”
저것은 처음 보는 무기였다. 생긴 건 언제 보았던 대포를 축소한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황제의 뜻인가?”
“황자께서는 오시는 길에 절벽에서 굴러 사고를 당한 것이오. 저런. 아쉽게도 시신을 찾을 수도 없었지.”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것을 제게 겨누었다.
“아…….”
탕! 허공을 찢을 듯 날카롭고 사나운 소리에 새들이 푸드덕 날아갔다. 에르하르트는 시선을 내렸다. 옆구리에서 울컥울컥 피가 솟았다. 손으로 짚었지만 그 틈으로 비질비질 새어 나왔다.
피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제 쪽으로 겨누고 손을 움직이는 것까지 분명 보았는데. 검도, 화살도 아닌 것은 눈에 잡히지 않았다. 귀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에르하르트의 몸을 뚫었을 뿐이다.
“거. 정말 실력이 형편없다니까.”
뻔히 의도한 거면서. 하지만 그에 어떤 반응을 할 여력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출혈에 시야가 어질거렸다. 땅이 흔들렸다. 에르하르트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육신에서 생이 한 움큼씩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사내는 갑작스러운 패닉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에르하르트를 겨누었고,
탕!
다시 걸쇠에 건 손가락을 당겼다.
“이번에는 얼추 명중인 건가.”
가슴을 중심으로, 선혈이 번졌다. 에르하르트는 결국 몸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었다. 땅이 그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사내는 반쯤 무너진 채 숨을 거듭해 몰아쉬는 에르하르트를 향해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에르하르트와 시선을 맞추던 사내는 웃으며 에르하르트의 손에 검을 쥐여 주었다. 에르하르트는 자꾸만 힘없이 까라지는 눈으로도 그를 노려봤다.
“미물의 고통을 헤아리며 절명시켜주던 관대함이 본인에게도 필요하지 않을지.”
“…….”
에르하르트는 입 안이 찢어질 정도로 깨물었다. 유리되어 있던 감각이 한결 현실로 당겨졌다. 그리고 지금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글, 쎄.”
말할 때마다 피가 울컥 치솟았다. 솟는 덩어리를 삼키자 비린내가 났다.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방법만 알아서.”
사내가 어떤 반응을 하기 전에 에르하르트는 손에 걸리는 것을 잡았다. 단검은 정확하게 사내의 목을 꿰뚫었다. 그가 제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쓸 틈조차 없이 순식간이었다.
“다가올 때 물어뜯길 각오 정도는 했었어야지.”
절명한 말처럼 순식간에 생을 앗긴 사내를 향해 닿지 않는 충고를 중얼거린 에르하르트는 몸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이 사내만 그를 추격할 리 없으니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아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몸은 제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아.
침잠하는 의식 속에서 그가 떠올린 것은 두고 온 자들도, 그를 위해 희생한 레아조차도 아니었다. 오로지 라얀이 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아무런 인사도 하고 오지 못했는데 그 애가 자신을 계속 기다리면 어떡하지. 그러다가 전처럼 성에 가면. 그때야 그가 있어 어떻게 잘 넘어갔으나, 자칫 경을 칠지도 모르는데.
에르하르트는 손에 걸리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면서 마치 실명이라도 한 것처럼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그래서 제 모습이 빛으로 둘러싸이는 것도,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동굴인 것도 몰랐다. 짠내와 바닷바람을 느끼기엔 이미 그의 오감은 전부 무뎌져 있었고, 환상이라고만 생각했다.
“…라얀.”
그러고 보니 그 애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나. 하지 못한 것 같다. 평생 같이하자는 말 역시 하지 못했다. 진작 라얀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의 불안을 잠재워줘야 했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 그 말이 내게 어떤 기쁨과 벅참을 주었는지를 알려줘야만 했는데.
그게 너무 가슴에 응어리처럼 맺혔다.
“라얀…….”
네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
볼 수 없겠지만.
그는 가라앉는 의식 속 부디 이 팔찌가 예전의 브로치처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 * *
쿵. 쿵. 쿵―!
소리가 시끄러웠다. 포근한 온기에 파묻혀 있던 라얀은 거슬리는 소리에 미간을 좁히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소리는 작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졌다. 그러다가 이것이 외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제 심장 박동임을 자각했다.
“…아.”
흐릿했던 의식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몽롱했지만 백지처럼 새하얀 머릿속에 기억이 하나씩 새겨졌다. 가쁘던 숨, 불태울 것처럼 맹렬하던 열기, 지느러미가 갈라져 다리가 되었던 순간보다도 더 끔찍했던 통증 속에서 라얀은 분명 정신을 잃었었다.
“라얀?”
라얀의 신음을 들은 이가 확인하듯 조심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신이 들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겨우 눈을 뜨자 아일라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눈빛에 어린 감정은 안도이기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기도 했다.
“…아일라.”
갈라지는 목소리는 금방 꺼질 듯 희미했다.
“어떻게.”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아일라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어둡지가 않았다. 감옥은 분명히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이었는데. 라얀은 천천히 눈을 굴렸고 곧 이곳이 제 침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으려는데 아일라가 북받친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그를 확 끌어안았다. 동시에 그는 재차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가 파고들면 결국은 그가 끌어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그녀를 끌어안았다는 점이다.
“아. 그래. 참, 네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여전히 몽롱한 정신으로 정보를 헤아리던 라얀을 눈치챈 아일라가 뒤늦게 감정을 수습하며 손을 둥글게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 맺힌 수경에 남성체 인어의 얼굴이 보였다.
어둠을 머금은 것처럼 새까만 머리에, 조금 옅은 색채의 녹빛 눈은 그러니까…….
“…….”
꼭, 자신을 닮아 있었다. 무심결에 손을 뻗자 그 역시 뻗는다. 라얀은 그제야 수경 속 청년의 모습을 제대로 살폈다.
“이게…….”
“축하해, 라얀. 아니, 아니지. 내 미래의 왕이라고 불러야 하니?”
이제는 진정으로 메르의 후계이니 경어도 써야 해? 그건 조금 낯간지러운데. 아일라는 자란 라얀을 보면서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며칠 전, 수정체에 감싸인 라얀을 보면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저것은 성장의 전조였다. 그를 둘러싼 수정체엔 강대한 마력이 흘러서 아티사의 기류가 그의 호흡을 따라 흔들릴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라얀을 벌해야 한다는 말은 들어갔다. 율법을 어겼다는 사실조차 결국은 묻히고야 말 게 분명했다. 벌써 드러나는 힘은 그런 의미였다. 라얀은 즉시 궁으로 옮겨졌고, 아일라는 그의 곁을 지키며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 수정체가 깨졌다. 라얀은 역시나 완연한 청년의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어릴 적의 모습과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으나 이목구비의 굴곡은 조금 더 화려하고 섬세해져 있었다.
“아.”
라얀은 낯설기만 한 제 모습을 보다가 결국 탄성을 터트렸다. 얼빠진 표정의 청년이 제 뺨을 더듬더듬 훑는다.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하자로, 메르의 수치로 살게 될 줄 알았다.
“이게, 이게 나야?”
“너야.”
“…….”
놀라움이 스러지자, 환희가 번졌다. 라얀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이 소식을 전해 들었더라면 누구보다도 기뻐할 알레나 유리도, 더 이상 그를 수치로 여기지 않을 메르도 아니었다.
그는 감옥에서 내내 애타게 그리던 존재를 떠올렸다.
‘라얀. 축하해.’
에리히는 자란 라얀을 보면서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전해줄 것이다. 손바닥을 맞대면 더 이상 한 마디가 차이 나지 않을 테고, 어쩌면 자신이 그를 끌어안을 수도 있으리라.
그뿐일까. 에리히가 떠나려고 한다면, 그가 원한다면 함께 갈 수 있었다. 언제나, 어쩌면 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
라얀은 그와의 미래를 그려보며 제 팔목을 보다가 감전당한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아직 여파가 가시지 않은 탓에 몸이 흔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리히.”
팔찌의 보석이 갈라져 있었다. 작동할지는 모르겠지만, 일종의 아티팩트야. 서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색이 변하거나 갈라지도록. 팔찌를 채워주며 속삭이던 말이 생각났다.
성장의 여파로 보석에 금이 간 것일 수도 있었다. 연락 통신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니 이것 역시 멀쩡히 기능했을 리 없다. 그러나 해소되지 않는 불안이 그를 휘감았다. 초조했다.
“안 돼.”
아일라가 표정을 잔뜩 굳히며 라얀을 가로막았다.
“라얀. 겨우 원로들을 꺾었어. 두 번은 안 돼.”
“비켜.”
“안 된다니까!”
“비켜. 아일라.”
더 이상은 말하지 않을 거야. 라얀은 전에 없이 차분하고 단호했다.
“비키지 못하겠다면?”
“부디 내가 너와 맞서지 않게 해줘.”
라얀의 손아래 작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만큼 위력적인 기백이었다. 아일라는 라얀이 성장과 동시에 능력까지 발현했다는 사실에 놀란 한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를 이길 수 없다.
“난 네가 불행해지는 걸 볼 수 없어.”
그럼에도 아일라는 라얀을 막아야 했다. 친구가 그릇된 길로 간다면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하지 않는가. 설령 원망을 받더라도 말이다.
아일라는 전투 태세를 갖췄다. 라얀의 힘이 제 우위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깨달았으나 갓 발현한 애송이보다야 그래도 수호 인어로 몇 년 구른 자신이 낫지 않겠나.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라얀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지만 그뿐이었다. 라얀의 손이 움직였다.
“아일라. 그건 내 불행이 아니야.”
“…아.”
찰나에 그녀의 몸이 허물어졌다.
“미안해.”
이미 의식이 까라지는 아일라를 보면서 라얀은 닿지 않을 사과를 했다. 그녀를 침대에 조심히 눕히고 어디 크게 다치진 않았는지 살핀 라얀은 단순히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하곤 곧장 궁을 빠져나갔다.
에리히에게 갈 생각이었다. 힘차게 물을 헤집는데도 마음이 초조했다. 라얀을 좇는 시선들도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 메르.”
결계를 벗어나려는 찰나, 나른하지만 위압적인 목소리가 라얀의 발길을 묶었다. 메르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두 번은 용납하지 않겠다.”
“…….”
“네 본분을 자각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라.”
“메르. 나의 왕.”
라얀은 수호 결계에 손을 얹으며 왕을 불렀다.
“이게 제 선택이에요.”
그의 일탈을 허락하지 않을 양 단단했던 결계가 흔들렸다.
“인간 따위가, 그깟 게 너의 선택이라?”
“그 애가 제 전부니까요. 저는 신성한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니 절 추방해 아티사에 다시는 제 존재를 허락하지 마세요.”
“…….”
“그러면 부디, 건강하세요. …어머니.”
메르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 생각해 보면 아주 어릴 때 이후로 그녀를 어머니라고 칭한 건 처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어머니가 아니라 제 왕이었으므로.
라얀은 그것을 보다가 결계의 일부를 깨트렸다. 왕의 주변에서 경계하던 수호 인어들의 낯빛에 경악이 서렸다. 결계를 단단히 하며 수호해야 할 지엄한 책무가 있는 후계자가 친히 일부를 훼손했다. 이것은 라얀의 뜻이었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메르가 혹시라도 그를 제압하기 전에 라얀은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찌릿한 손을 꾹 움켜쥐는 그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라얀은 기도했다.
제발, 이 팔찌가 제힘을 이기지 못해 훼손된 것이기를. 올라가면 자신의 자란 모습을 본 에리히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그리고 그와 영원을 맹세하는 사랑의 서약을 나눌 수 있기를. 지금 이 근원 모를 불안이 그저 제 착각이기를.
속도를 낼수록 까라지는 것 같던 몸엔 힘이 붙었다. 라얀은 성장하기 전의 자신이, 아무 능력도 없던 자신이 얼마나 겁이 없었던 건지를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하물며 알레가 왜 그토록 자신의 일탈을 걱정했는지도.
지상에 닿기까지 평소의 반도 걸리지 않았다. 수면 위로 몸을 내민 라얀은 젖은 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기는 한편 에리히를 어떻게 보러 가야 할지 막막해했다. 그러다가 자신은 더 이상 불완전하기 짝이 없던 인어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아샤의 도움 없이도 뭍에 발 디딜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예민한 후각에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그쪽으로 고개 돌리자 어둠에 가려진 무언가가 보였다.
“…….”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에, 리히?”
아닐 것이다. 에리히일 리 없다. 그가 이런 불온한 냄새를 풍기며 여기 있을 리 없지 않나. 라얀은 애써 부정했다. 빛이 스밀 때마다 희끗희끗 드러나는 머리칼의 색을 보았으면서도.
“에리히?”
떨리는 목소리로 거듭해 불렀지만 그것은 미동이 없었다. 손가락 끝이 차게 식었다.
“아니지? 너, 아니지?”
라얀은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계속 말을 걸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을 어쩔 줄 몰라 하던 라얀은 반응 없는 것에 결국 참지 못하고 뭍 위로 발을 디뎠다.
꺾여 휘청이는 다리를 이끌어 겨우 나아간 그는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끝내 주저앉았다.
“아니야.”
아니야. 라얀은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게 너일 리 없잖아.”
찬란한 금발은 빛을 잃었고, 그의 옷은 검붉은 피가 낭자했다. 바다만큼 새파란 눈동자는 눈꺼풀에 덮여 찾아볼 수 없었다.
“에리히. 일어나.”
“…….”
“그만 장난쳐. 엘. 내가 너무 늦게 와서 그래? 미안해. 이제는 너랑 계속 같이 있을 거야. 이것 봐. 내가 자랐어. 자랐어. 엘.”
라얀은 그의 손을 잡았다. 늘 뜨겁게 느껴졌던 손은 차디찼다. 그의 옆구리에선 피가 비집어져 나왔다. 낯은 또 어찌나 창백한지.
아. 숨이 턱턱 막혔다. 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 숨이 막히다가 가빠졌다. 호흡을 어찌하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라얀은 두려웠다.
풍랑이 이는 바닷속에서 에리히를 찾아 헤맬 때와는 다른 막막함이 엄습했다.
“아. 아…….”
언어가 되지 못한 모양새로 신음이 흘렀다.
꺽꺽거리던 라얀이 겨우 정신을 붙든 것은 희미한 숨결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제 사그라들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살아 있었다.
희열은 잠시였다. 그의 혼이 아직 지상에 매여 있는 것은 알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불렀다. 치유의 힘 따위 담기지 않은 목소리는 허공에 부질없이 흩어졌다.
아직 세상 모든 것에 무지한 라얀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연인을 살리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에리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에리히의 몸은 차게 식었다. 미약한 숨은 때때로 멈추기도 했다.
라얀이 내내 무력하게 앉아만 있던 것은 아니다. 맨 처음엔 에리히가 살던 성으로 뛰어갔다. 그곳은 에리히의 집이니까. 하지만 라얀은 근처에도 닿을 수 없었다. 그때와 달리 성벽에 새까만 깃발을 세운 성문 앞에는 사납고 흉흉한 기색의 사내들이 서서 인간들의 출입을 막았다.
‘신분을 밝혀라.’
‘잡아!’
라얀은 괜히 주변을 서성이다가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한차례 붙잡힐 뻔하기도 했다. 예전이었다면 붙잡혔을 테지만 성장을 한 뒤로 신체적인 능력은 보통 인간을 훌쩍 웃돌았다.
그들을 따돌리고 동굴로 돌아온 라얀은 제 무력함을 새삼스럽게 절감했다.
자신이 인간이었더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인어였다. 인간 세계의 지식이란 에리히가 전해준 단편적인 것들이 전부였고, 그것들은 지금 당장에 쓸모가 없었다.
에리히는 제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쳤을지언정 다 죽어가는 인간을 어떻게 살려야 하는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으니.
그나마 아티사에는 그를 살릴 방도가 있을 것도 같았으나 데려갈 수 없다. 그는 스스로 죄를 짓고 이 자리로 왔고, 다 떠나서 그들이 에리히를 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물속에 그를 수장시키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였다.
“나는 바깥 세계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라얀은 어쩌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놓아버릴 수 있는 존재에게 손을 뻗었다.
“그보다, 훌륭한 성체가 되었구나. 라얀.”
축하한다고 해야 할까? 아샤는 라얀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제야 라얀은 에리히에게서 떼지 않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아샤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이 애를 살릴 수 있나요?”
부스러기 같은 희망이 깃들어 있기도 했다.
“왜 내게 그런 것을 묻지?”
“봤으니까.”
“…….”
“봤어요, 예전에. 아샤가 노래를 부를 때 생명이 회복되는 걸.”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샤가 그와 대화 중 무심코 흥얼거리자 비실거리던 산호가 서서히 생기를 찾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모르는 척 넘어갔다. 왠지 입을 열면 겨우 살아나던 산호가 다시 죽을 것 같다는 까닭 모를 예감이 들어서.
“살려주세요.”
“…….”
“에리히를 살려주세요. 제발.”
“나를 믿지 않는 눈으로 잘도 제발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구나.”
아샤의 손이 부드럽게 눈가 아래를 짚었다. 손톱이 스칠 때마다 눈 아래가 따끔거렸다.
“…….”
그렇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자신이 아티사에 발 묶여 있어야 했던 이유가 다름 아닌 아샤일지도 모르는데.
기만이 영원할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뿐, 그의 일탈이 발각된 건 너무 의도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티사로 돌아가는 길에 스쳐 지나가던 상어들의 눈빛을 기억했다.
노란 눈은 마치 준비된 그의 비극을 즐기겠다는 양 빛나고 있었다. 그것들이 수군거리는 말이 수호 인어들의 귀로 전해지고, 메르에게 옮겨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왜 인간을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니. 가여운 라얀. 나 역시 인어인걸. 어쩌면, 수 세기 전의 역사를 직접 겪었을 수도 있지.”
아샤는 여전히 웃는 낯을 지우지 않으며 라얀의 희망을 한 점, 한 점 헤집어놨다.
“하지만…….”
라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가로 차오른 눈물이 끝내 방울져 떨어졌다. 그 눈물 따라 시선을 내리던 아샤는 그의 주위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흩어진 진주 중 하나를 주웠다.
“친구, 친구잖아요. …우리는.”
“나는 그 말에 긍정한 적 없지.”
“재미있다고, 재미있게 해달라고 하셨잖아요.”
“이거는 그리 재미있지는 않고.”
라얀은 점점 절박해졌다. 아샤가 아니라면 에리히는 살릴 수 없다. 그는 에리히의 숨이 멎어가는 걸 내내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 후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은 살아갈 수 있을까.
에리히를 알고 지낸 시간보다, 알지 못하고 살아간 시간이 많다. 하지만 감정에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얀은 그를 사랑했다. 어쩌면 자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렇다면 제게 무엇을 바라세요.”
“무엇이든 내가 흥미로워할 만한 걸 내어줘야지. 가령…….”
아샤의 손이 라얀의 심장 부근을 짚었다.
“네 수호석을 걸 수 있겠니?”
수호석은 그들의 원천이었다.
“제가. 그걸, …수호석을 드리면 에리히를 살려주실 건가요?”
그것을 잃게 되면 생 역시 곧 끝에 다다를 것이다. 그러니까 아샤는 라얀과 에리히의 목숨을 서로 맞바꿀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네 사랑을 증명하면, 못 해줄 것도 없지. 살려주마.”
“…….”
“어찌하겠니?”
너는 어떤 걸 선택할래? 아샤는 고혹적으로 웃으며 극단적인 선택을 요구했다.
선택에 오래 소모할 시간은 없었다. 에리히는 이제 정말로 한계였다. 깔딱거리는 숨이 곧 넘어갈 것 같았다. 꿀렁거리며 나오던 피는 더 이상 쏟아낼 것도 없다는 듯이 언젠가부터 나오지 않았다. 라얀이 고민하느라 시간을 소요한다면 그는 죽고야 말 것이다.
“너무 쉬운 선택이에요.”
하지만 애초 이것은 오랜 시간을 소요할 만한 고민이 아니었다. 라얀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곧장 결론을 내렸다.
“기꺼이 내어드릴게요.”
어차피 라얀은 에리히가 죽으면 살지 못할 것이다. 시름시름 앓다가, 이 드넓은 바다를 전전하며 조금씩 죽어가리라. 그럴 바에는 제 목숨을 내어 에리히를 살리는 게 옳았다.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또한 있었다.
“그러니 이 애를 살려주세요.”
“…….”
“아샤.”
아샤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묘하게 비틀려 보였다. 그는 라얀의 턱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라얀. 그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니?”
라얀은 그의 손길을 털어내며 에리히를 바라봤다.
피가 묻어 얼룩덜룩하지만 여전히 찬연한 금발, 그 아래 핏기를 잃어 창백한 낯, 평소보다 서늘한 체온. …에리히를 목숨 내어 살릴 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저는 언제나 바깥 세계가, 그들의 낮이 궁금했어요.”
아름다운 태양, 바다보다도 푸른 하늘, 하얀 구름, 살랑거리는 바람, 그리고 인간들까지도.
“이 애 덕분에 처음으로 낮의 세계를 볼 수 있었고.”
“…….”
“또 많은 걸 알고, 배웠어요.”
자신이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알았고, 사랑을 배웠다. 태어나 수십 년을 넘게 알아오지 못한 것을 모두 에리히가 일러주었다. 2년은 고작이 아니라, 어쩌면 그의 전부였다.
라얀은 에리히를 만난 그날 밤에 감사했다. 우연히 구한 것도, 그의 부름에 응한 것도, 그에게 이름을 알려준 것 역시도.
“그러면 된 거 아닌가요.”
그를 살릴 만한 가치 같은 건.
결정을 내린 라얀은 혹시라도 아샤의 마음이 바뀔까 봐 망설임 없이 에리히의 피로 굳은 손을 제 가슴에 얹었다. 투명한 푸른 보석이 손바닥 위에 둥실둥실 떠올랐다. 라얀은 힘이 빠져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아샤에게 내밀었다.
“…….”
아샤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그림처럼 걸려 있던 웃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샤.”
“…….”
“아, 샤…….”
거듭해 부르던 라얀의 손은 부들거리다가 기어이 기력을 잃고 미끄러졌다. 그제야 아샤가 입을 열었다.
나른하지만 매혹적인 목소리는 빛의 알갱이가 되어서 에리히의 몸을 덮었다. 라얀은 빛에 둘러싸인 에리히의 옆으로 쓰러지듯이 누워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에리히의 창백한 낯빛에 혈색이 도는 만큼 라얀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이 무섭지는 않았다. 걱정이 있다면 단 하나뿐이었다.
“…아샤. 나는 바다로 흘려보내 주세요.”
에리히가 내 소멸 같은 건 영원히 모르도록. 그냥 이대로 잊힐 수 있도록.
아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라얀에게는 그의 대답을 재촉할 만한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저 에리히의 손만 꼭 잡았다.
네 손이 늘 온기로 따뜻하기를.
라얀은 흩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 다른 인간과는 아주 조금만 행복하면 좋겠다고도. 치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에게 해준 것만큼 해주면 질투가 날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만한 욕심이야 사소하게 부릴 수 있지 않나.
“라얀. 네 사랑에 경의를 표하마.”
라얀이 내어준 수호석과 그가 흘린 눈물을 손 위에 띄워놓고 보던 아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내기를 해보지 않겠니.”
인간을 향해 있던 올곧은 녹색의 눈이 그를 향했다. 아샤는 별로 웃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저토록 자기 파괴적인 애정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행동이,
그리고 왜인지 죽어가는 것이 못내 거슬리고야 마는 자신의 모습 역시도.
“네 대단한 사랑을 걸고. 나와.”
그래서였다, 충동적으로 말이 튀어 나간 것은.
라얀은 우스운 말을 듣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죽어가는 자신이 무슨 힘이 있어 내기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처럼. 아샤는 몸을 조금 낮추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 자신조차 듣기 힘들 만큼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녹빛 눈이 파르르 떨렸다. 생각하듯 눈을 양옆으로 굴리던 라얀은 인간을 한 번 보고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라얀은 결국 흩어지는 기력을 어찌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샤는 라얀이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는 인간의 몸에 손을 얹었다. 푸른빛을 띠는 수호석이 인간의 몸에 스며들었다.
“…네 사랑은 과연 얼마나 대단할까.”
비틀린 웃음을 지은 아샤는 늘어지는 라얀을 추슬러 안아 동굴을 빠져나갔다.
동굴에 남은 것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린 인간과 그의 주위를 에워싼 무수한 진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