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밤을 까마득히 지새웠다. 거세게 오던 소낙비가 가늘어지고, 거센 풍랑이 잦아들어 고요해질 때까지 에르하르트는 라얀과 함께 있었다. 손을 잡았고,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입을 맞췄다.
맞물리는 입술은 달았고, 목덜미를 감싼 손바닥 아래로는 쿵쿵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종내에는 입술이 따끔거렸다.
‘아파. 그만할래.’
라얀은 퉁퉁 부은 입술을 앙다물며 얼굴을 뒤로 뺐다. 그때엔 어쩔 수 없이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전하. 일어나셨나요?”
해가 뜨기 일보 직전에야 에르하르트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라얀을 내려보냈다. 오늘 밤 다시 오겠다며 기특하게 뺨에 입술을 맞추기까지 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에르하르트는 연신 얼굴을 문질렀다.
“전하?”
답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기색이라 기척을 낸 에르하르트는 로브를 벗어 침대 아래에 숨긴 뒤에야 들어오라고 말했다.
“간밤에 어디 아프지는 않으셨어요?”
레아는 혹시 밤새 앓은 것은 아닐지 염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도 제대로 청하지 못했는지 눈 아래가 거뭇거뭇했다. 라얀과 있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터라 가책이 느껴졌지만 이내 그 감정을 뒤로했다.
“괜찮아.”
“다행히 그래 보이시기는 하는데…….”
꼼꼼히 살피기에 에르하르트는 괜히 뺨을 쓸었다. 혹여 입술이 부어 보이지는 않을지, 쓸데없이 의식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르게 무슨 일로?”
이제 막 해가 떴으니 아직 하루를 시작하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특히나 에르하르트에게는 더욱. 요즈음은 황제와 시간을 맞추긴 했지만 그것을 고려하고도 일렀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폐하께서?”
“아무래도 어제의 일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밤은 에르하르트의 고집으로 잠깐 덮은 것뿐 근원적으로 해결된 것은 없었다. 또한 아들 걱정에 밤새 잠도 못 이룬 모습을 보이고 싶은 거라거나. 우스운 일이 아닌가. 정말로 아들이 걱정되었더라면, 놀란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했다.
“그래.”
못 갈 것 없다. 에르하르트는 설렁줄을 흔들었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시종들이 소셋물과 의복을 갖추고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레아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그녀는 에르하르트가 실수로라도 물에 빠질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어제 그가 누가 뒤에서 민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는 배후로 하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2년 전 시녀로 하여금 에르하르트에게 독차를 먹인 인물. …황금빛 어좌의 주인을.
에르하르트가 대강의 준비를 마치고 황제가 머무르는 침실에 닿았을 때, 그의 옆으로는 올리비아가 보였다. 그녀는 에르하르트를 보고는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도로 앉았다.
“모든 광영이 폐하께 닿기를.”
그는 황제의 손등에 입술을 가볍게 얹었다. 고작해야 경외의 뜻에 불과한 허울뿐인 의례인데도 구역질이 났다. 라얀에게 닿았던 입술에 삿된 것이 닿았다고 인지되자 거부감이 들었다. 에르하르트는 얼른 입술을 뗐다.
“편히 앉으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간밤에는 잘 잤느냐?”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에 달리 불편한 곳은 없었습니다.”
에르하르트는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적당한 말을 골라 대답을 늘어놓았다. 머릿속에는 라얀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반쯤은 의도였다. 이렇게라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황제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다행이로다. 어제 리브가 네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더구나.”
“폐하께서 과장하시는 거란다.”
올리비아는 얼른 그의 말에 부정했다. 혹여 그녀의 근심과 염려가 황제를 걱정시킬까 봐 저어된다는 듯이.
“하면 말씀 나누세요, 폐하. 아이 얼굴을 보았으니 됐습니다. 마리가 저를 찾는다고 보챌 것이니 가봐야겠습니다.”
“그리하라.”
“곧 찾아뵙겠습니다. 어머니.”
고개를 끄덕인 올리비아는 가볍게 에르하르트의 어깨를 짚었다. 쿵. 육중한 문이 여닫혔고, 황제의 얼굴에 어렸던 옅은 웃음은 사라졌다. 가식적인 애정마저 덧대어지지 않은 낯이 차라리 편하게 느껴졌다.
“황자.”
“하문하십시오. 폐하.”
“짐은 밤새 곱씹었다. 누가 너를 민 것이 정녕 사실이냐? 황족을 시해하려 하다니 이는 반역에 준할 만한 죄다. 얼굴은 보았느냐? 확신할 수 있는가?”
냉막한 잿빛 눈동자에 얼핏 빛이 어렸던 것 같기도 했다.
묻는 의도가 너무 훤했다. 그는, 아마도 대강 에르하르트에게 우호적인 귀족들을 추렸을 테고 그중 하나에게 덮어씌울 생각을 했으리라. 그리고 황제에게 가장 거슬릴 만한 가문은 변경백 카나반이었을 터다.
“술에 취해 있던 터라 바람에 떠밀린 것을 착각했습니다. 게다가 간밤에 내내 비가 내려 풍랑이 부쩍 거칠지 않았습니까.”
“…….”
“폐하께서 버젓이 존재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폐하의 아들에게 그런 무도한 짓을 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그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헤셀러스에 속하였음을 영광으로 아는 이들입니다.”
순전히 그의 속을 긁기 위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기야 했으나 에르하르트는 황제의 뜻대로 흘러가게 둘 생각 없었다.
“제 일로 인해 누구에게도 불명예를 안겨주지 마십시오. 부디.”
“황자.”
“모처럼 국정을 잊고 쉬러 오신 길 아닙니까. 저는 이리도 무사하니 제가 폐하의 근심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또한, 아르헨은 제가 건강을 회복한 곳입니다. 모두가 제게 상냥했고, 하여 저는 마음 편하게 정양할 수 있었지요. 이곳에 부디 평화만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매끄럽고 탁월한 언변에 황제의 얇은 입술이 꾹 다물렸다.
에르하르트의 말을 곱씹으며 지난밤 내내 여러 가지의 수를 생각했을 텐데 전부 무산될 판이니 그 심기가 마냥 평화롭지는 않으리라.
“폐하를 근심케 하여 송구합니다.”
“…그럴 거 없다. 네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참담할 뿐이다. 모처럼의 경사가 비극으로 얼룩질 뻔하지 않았는가.”
“이리도 저를 생각해 주시니, 제르바로 돌아간 이후가 기대됩니다.”
요양을 목적으로 왔으니 때가 되면 돌아가지 않겠느냐며, 에르하르트는 웃는 얼굴로 황제의 심기를 계속 건드렸다. 그는 시선을 내렸다. 팔걸이에 올려놓은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단순히 사고였다니, 불문에 부치겠다. 그리해도 되겠느냐?”
“예. 폐하.”
“또한 과음은 삼가는 게 좋겠다. 정말로 큰일이 날 뻔했다.”
에르하르트는 비뚜름히 웃었다. 그날 술을 강권한 게 누군데. 첫맛은 달았으나 목구멍을 뜨끈뜨끈하게 할퀴던 술은 보통 독주가 아니었다. 물에 빠지고도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해 라얀을 환상으로 착각하기까지 했다.
“이번 일을 교훈 삼겠습니다.”
황제는 손짓했다. 에르하르트는 가볍게 격식을 갖춘 뒤에 돌아 나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던 것도 같다. 에르하르트는 닫힌 문을 굳이 뒤돌아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길게 난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에르하르트는 뻑뻑한 눈을 무겁게 깜빡거렸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날까지 지새웠더니 피곤했다. 조금 눈 붙이고 나면 라얀과 만날 시간이 되려나. 그런데 정말 그 애는 왜 그렇게 체온이 뜨겁지.
오늘 만나면 물어야겠다.
또 입부터 맞추면 정신이 빠져 묻는 것을 잊을지도 모르,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귀 끝이 뜨끈거렸다. 혹시 보는 사람 있을까 봐 에르하르트는 괜히 손부채질을 해 열을 식혔다. 모퉁이를 도는 그의 입가엔 옅은 웃음이 서려 있었다.
* * *
황제는 바닥으로 던져 산산조각 난 찻잔을 냉랭한 눈으로 봤다. 시종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황제의 눈치를 봤다. 황제는 그조차 거슬린다는 양 손짓해 그를 내보냈다.
“황자에게 마력이 느껴지던가.”
한참 숨을 씨근덕거리던 황제는 전무 물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툭 던졌다. 그러자 커튼 안에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한쪽 무릎을 땅에 굽혔다.
“딱히 느껴지는 파동은 없었습니다.”
황제는 눈을 내리깔아 사내의 한쪽 손에 들린 마도구를 보았다. 미동 없이 잠잠했다.
“그렇다면 그 애는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지.”
못내 못마땅하게 찡그려진 낯엔 미미한 신경질이 어렸다. 바다 한복판이었다. 풍랑도 거셌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가. 마정석을 쓴 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또한 마정석이 있다고 해도 이동진을 발동할 수 있는 이는 드뭅니다. 폐하. 그것도 바다 한복판에 잠긴 채로 말이지요.”
그렇다면 에르하르트의 생환이 기적이라고? 운이라고? 황제는 코웃음 쳤다. 팔걸이를 부술 것처럼 내려칠 때마다 마법사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마도구는, 타고난 마력은 세심하게 잡아낼 수 없지.”
“그렇기야 하지만 폐하. …그런 자는 이제 없습니다.”
“모르는 일이지. 그것을 어찌 확신할 수 있단 말이냐.”
날 선 반박에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역시 짐은 그 애가 거슬린다.”
어릴 때야 적당히 넘길 수 있지만 이제 성년이 되기까지 몇 년 남지 않았다. 게다가 그 건방짐과 야욕이라니. 흐르는 시간이 그를 초조하게 했다. 예언은 잊히지 않고 시시각각 신경줄을 갉아 먹었다.
“황자가 살아 돌아온 게 더할 나위 없이 찝찝해. 오래 살려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하르트를 얼마나 더 살려둘 수 있을지 가늠하러 온 것인데 판단은 금방 섰다. 그것은 발톱을 숨긴 맹수였다. 올리비아의 화려한 이목구비를 기본 바탕으로 자신의 얼굴 역시 엿보이는 에르하르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야망과 증오가 일렁거렸다.
와서 그 애를 마주한 날 그런 생각이 들었고, 오늘 확신이 되었다.
“하오나.”
마법사는 말을 흐렸다.
“올리비아 전하께서…….”
올리비아가 그것을 용인하겠느냐는 뜻이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향한 황제의 집착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르하르트가 여태까지 그 얄팍하기 짝이 없는 목숨줄을 연명한 것이다.
“리브는 짐을 용서하지 않겠지. 증오할 것이다.”
그런데도 에르하르트를 죽일 수 있겠느냐는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그러니 증오하지 못하게 해야지.”
“…….”
“원망조차도 하지 못하게 해야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아래 깨진 유리 조각이 밟혀 가루로 부스러졌다. 황제는 그것을 가벼이 털어내며 시종장을 불렀다.
“외유는 이만하면 되었다. 짐은 그새 장성한 황자를 봐서 기꺼웠고, 리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짐이 자리 비운 사이 쌓였을 국정이 지극히 염려되는 바이니 준비되는 대로 즉시 환궁하겠다.”
냉엄하게 떨어지는 음성은, 지고한 명령이었다. 황제는 뒤돌아섰다.
* * *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뛰어오르면 아티사의 결계까지 뚫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라얀은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차마 감출 길이 없었다.
열은 여전하고, 나른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자꾸만 붕 떴다. 괜히 입술을 문지르며 침대에 엎어져 뺨을 문질렀다.
‘눈 감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묘한 열기. 목덜미에 얹어져 머리칼 사이로 미끄러지듯 올라가던 손까지. 전부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했다.
“…….”
라얀은 붉어지는 뺨을 어쩌지 못하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주먹 쥔 손으로 침대를 콩콩 두드리고 지느러미는 목적 없이 흔들렸다.
얼른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 밤이 되어 에리히를 보고 싶었다. 아티사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시간이 부쩍 더디게 흘렀다.
유리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함께 있어도 계속 같이 있고 싶고, 이별은 아쉽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고 웃음이 났다.
이 바다에 사는 모두에게 에리히의 존재를 자랑하고 싶었다.
그의 눈이 얼마만큼 푸른지, 눈을 내리깔 때 길게 뻗은 속눈썹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뺨에 닿던 콧방울이 어찌나 높고 날렵한지. 또한 차가운 인상인 그가 자신을 향해 웃을 때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도.
모두가 에리히를 알았으면 좋겠다.
바다에 사는 모든 종은 인간이라면 배척하고 경계했지만 에리히와 알게 된다면 인간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돌연 라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모두가 에리히를 좋아하게 되면 어쩌지?
알레가 알았더라면 그의 앞에서나 꼬리를 말고 순한 척하는 인간이 뭐가 예뻐 좋아하겠느냐며 정신 차리라고 했을 것이다. 물론 알레의 속내 따위 알 리 없는 라얀은 제법 진지했다.
모두가 에리히를 알았으면 좋겠지만, 에리히를 좋아하는 건 나 하나면 좋겠다. 이것은 그의 생에 처음 느껴보는 소유욕이었다.
태어나고 수십 년은 바라는 게 있다면 가지지 못할 게 없었기에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메르의 실패작이 된 이후로는 지레 체념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래서 라얀은 이런 욕구가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게.”
라얀의 앞으로 물방울이 핑그르르 굴러왔다. 메신저였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를 아는 존재 중―지금 아티사에 있는 건 아일라뿐이지만― 제게 메신저를 보낼 이는 없었다. 대체로 불쑥 찾아와 얼굴을 보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조금 언쟁이 있었다고 아일라가 뚱해져 물방울을 보냈나. 하지만 그럴 성격이 아닌데, 하면서 손바닥을 펼쳐 받자 상대방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 * *
“아샤?”
라얀의 기척을 눈치챘을 텐데도 아샤는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고 있었다.
라얀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샤가 제게 이런 식으로 먼저 연락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라얀의 방문은 워낙 들쑥날쑥했고, 때로는 여러 사정으로 한참 흑해의 경계를 넘지 못했지만 아샤는 언제 오든 나른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 있어요?”
“…….”
“혹시 어디 아파요?”
라얀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기웃거리자 그제야 아샤가 턱을 살짝 들었다.
“너와 달리 내가 아플 일은 없고, 무슨 일은.”
“…….”
“내 앞에 있는 어린 인어에게 있지 않을까?”
흐물거리며 힘없이 바깥 세계로 향한 어린 인어가 돌아올 때는 웃음이 만개하였다는 소식이 내 귀에 닿더구나. 속삭이는 말에 라얀은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동시에 풀어지는 표정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게, 에리히가…….”
“네 마음을 받아주기라도 했니?”
라얀은 눈을 위로 굴렸다가, 지느러미를 살랑거리며 흔들었다가, 뺨을 씰룩거렸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맞춤을 했다는 시시콜콜한 말까지 하기엔 왠지 부끄러워서 그것은 삼켰다. 아샤는 얼굴을 살짝 기울여 묘하게 웃었다.
“잘된 일이구나.”
“그렇죠? 저도 에리히랑 같은 마음일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샤. 너무 기뻐요. 살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이 없던 것 같아요.”
라얀은 영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잊을 만큼 잔뜩 들떠 있었다.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샤 가까이 가서 주위를 살랑살랑 맴돌며 그 애가 얼마나 다정했는지, 또 얼마나 행복할지를 재잘거렸다.
아샤는 에리히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만큼 말하는 게 한층 수월했다.
“아주 기뻐 보이는걸.”
“기뻐요.”
“그 전에 몸이나 추스르는 게 어떨까, 라얀. 너의 인간이 슬퍼할 텐데.”
“아. …티 나요?”
“너를 아는 존재라면, 누구나.”
아일라가 기운을 불어 넣어주기도 했고, 열도 조금 내린 것 같은데. 라얀은 이마를 짚다가 뺨을 만졌다. 당연히 그것으로는 자신이 아파 보이는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인간 세계에 밤이 스며야 나갈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 또 한잠 청하면 됐다. 아티사로 돌아가면 곧장 침대에 누워서 잠들어야지. 그래야 묘하게 더디게 가는 시간이 빨리 지나갈 테니까. 또 그래야, 에리히랑 날이 새도록 놀 수 있고.
보름이 얼른 오면 좋겠다. 에리히와 한정된 장소가 아닌 곳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반딧불이를 보러 가자고 할까. 지난해에 이맘때 즈음 에리히가 양손에 반딧불이를 잡아와 보여줬었다.
‘자, 그때 바다에서 본 거랑 비슷하지?’
그것은 밤하늘의 허공을 반짝반짝 수놓았다. 밤바다를 유영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한데 라얀.”
에리히와 입맞춤 말고 무엇을 더 하면 좋을지 이런저런 상상을 펼치던 라얀은 아샤의 부름에 뒤늦게 그의 앞임을 인지했다.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아샤가 더 빨랐다.
“괜찮겠니?”
“뭐가요?”
앞뒤 없는 질문에 라얀은 결국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인간이니 계속, 해를 거듭할수록 자라겠지.”
“아샤.”
“어른이 될 거야.”
“…….”
“견딜 수 있을까.”
아. 후벼 파이는 사실에 라얀은 무심코 탄식을 흘렸다.
이것은 라얀이 반쯤은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처음으로 다리가 생겨 두 발로 걸을 수 있던 2년 전까지만 해도 에리히는 그와 비슷하거나 약간 작았다. 하지만 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에리히는 성큼성큼 자랐다. 그가 고개를 꺾어 올려야 할 정도로.
‘요즘 밤에 잠을 못 자겠다. 뼈가 쑤셔.’
언젠간 에리히가 짜증이 못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 적이 있었다. 이게 레아가 말했던 성장통인가 보더라고. 몸 마디마디가 지끈거려서 견딜 수가 없다고.
그 말을 한 직후로 부쩍 크기 시작했다. 얼추 맞았던 시선은 어느새 그의 뺨쯤에 머물렀고, 목덜미에 머물렀다가 이제는 쇄골 언저리에 머물렀다. 조금 더 지나면 그의 가슴에나 겨우 닿을지도 몰랐다.
“견딜 수 있어요.”
“너는 그렇다 쳐도 그 애는?”
“…….”
“그도 과연 그런 마음일까. 라얀. 생각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허무하단다. 덧없고, 흩어지지. 지금 당장에야 그 감정이 너를 삼킬 것만 같아도, 그것은 이내 퇴색되고는 해.”
아샤는 과거를 헤아리는 듯한 눈을 하다가 곧 라얀을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미워요.”
“그래?”
“왜 그렇게 밉게 말해요? 고백해 보라고 한 건 아샤였잖아요.”
라얀은 제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듯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글쎄. 왜 그럴까.”
하지만 아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린, 그것도 하자가 있는 인어에게 겁을 먹고 사과할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아샤의 손이 뺨에 닿았다. 아직 잔열이 있는 탓인지 그의 손이 부쩍 서늘하게 느껴졌다.
“다른 감정도 엿보고 싶었나.”
알쏭달쏭했다. 어쨌든 좋은 뜻은 아닐 테니 라얀은 뺨을 만지는 손길을 피해 몸을 물렸다.
“이제 안 올 거예요.”
“그래. 얼마나?”
“…몰라요. 아주 오랫동안이요. 아샤가 저한테 사과할 때까지요.”
아주 오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상어나 그 밖의 위협적인 존재로 인해 그의 비호를 받지 않고서는 바닷길을 편히 오갈 수 없다는 걱정도 아니었다. 물론, 그가 만들어주는 약이 있어야만 인간의 다리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 역시도 아니었고.
그저 저렇게 미운 말을 해도 아샤는 제 선 안에 들어왔다. 정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한 권태에 놓여 있는 그가 가엽기도 했다. 한낱 하자 따위가 흑해의 지배자를 동정한다는 걸 안다면 모두가 비웃을 테지만 일단은 그랬다.
“저런. 지금 당장 사과하면 가지 않을 거니. 라얀?”
“놀리지 마세요.”
라얀은 붙잡기라도 할세라 얼른 돌아 나갔다. 등 뒤로 언뜻 아샤의 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 *
마음이 심란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바깥으로 가고 싶었지만 바깥은 낮일 게 분명했고, 잘못했다간 가는 길에 다른 인어들의 눈에 띌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봐야 에리히도 없을 게 분명했다.
‘지금 성에 누가 와 있어. 퍽 귀찮게도.’
그는 분명히 누군가 와 있어서 자신이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으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침대에 누워서 이리저리 뒹굴거리며 뒤척이던 라얀은 에리히와 약속한 시각 즈음이 되자마자 쏜살같이 나갔다.
아직 에리히는 보이지 않았다. 빨리 나오기는 했다. 동굴 너머 틈으로 보이는 달이 중앙까지 오려면 아직 기다려야 했다.
라얀은 바위에 팔을 걸친 채 그 사이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뻔하다면 뻔하게도 에리히에 관한 것이었다. 아까는 설렘에 잠겨 있었다면 지금은 고심에 절여져 있다는 게 다르지만. 라얀의 낯빛이 우울해졌다.
“왜 또 울상이야.”
그래서 에리히가 발걸음 소리마저 죽이고 제 코앞까지 와서 몸을 숙여 시선을 맞출 때까지도 몰랐다. 라얀이 고개를 들자 에리히가 당연하다는 듯이 입꼬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에리히.”
라얀은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에리히는 순순히 손을 내어주었다. 주먹 쥔 손을 펼친 뒤 그 위에 제 손바닥을 맞댔다. 한 마디 넘게 차이가 났다. 말랑한 제 손과 달리 굳은살이 박여 단단하기까지 했다. 그는 정말로, 무력하게 추락하던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에리히.”
“말해, 라얀.”
“…너는, 결국 떠날 거지?”
그는 이제 더 이상 라얀의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뺨에 입을 맞추기 위해 얼굴을 붙이던 에리히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하지만 라얀은 나름대로 진지했다. 그는 내내 에리히가 예전에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에리히는 이곳에 쫓겨난 것이라고 했고, 제 아버지의 자리를 탐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결국 에리히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때는 담담한 그를 대신해 슬퍼하고 화내느라, 한편으로는 그의 말에 널뛰던 감정을 다스리느라 그것을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아샤와의 대화가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에리히는 앞으로 나아갈 사람이다. 이미 그보다 손가락 한 마디 반이 더 차이 날 정도로 자랐고, 더 자랄 것이다.
반면 라얀은 여기에 고여 있는 자였다. 그가 떠나버린다면 만나러 갈 수 없는. 에리히는 매번 자신이 기다려야 한다고 했으나 라얀이야말로 그가 제 세계에 머무르며 영영 오지 않으면 먼저 찾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성장하지 못한 채. 나아가지 못한 채.
“라얀.”
가지 않으면 안 돼? 마음에서 치솟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라얀?”
“그게, 지금 살짝 졸았는데 네가 혼자 어디로 가는 꿈을 꿨어.”
하지만 삼켰다. 라얀은 자신의 이기심으로 에리히가 뜻을 꺾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뜻대로 할 권리가 있었다.
“시답잖은 꿈이네. 무슨 그런 꿈을 꿔.”
“그러게.”
눈치가 빠르기도 하고, 그의 표정을 워낙 잘 읽어서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잠깐.”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불투명한 보석이 하나 박힌 동그란 팔찌였다.
“이게 뭐야?”
“네가 사는 곳에서 잘 작동할지는 모르겠는데, 일종의 아티팩트야.”
에리히는 라얀의 손을 가볍게 움켜잡은 뒤 팔찌를 채웠다. 제 피부만큼이나 창백한 은빛의 팔찌는 손목에 딱 맞았다.
“서로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이 보석의 색이 변하거나 갈라지도록.”
“…….”
“그렇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냥 정표 같은 거다, 내가 너한테 주는.”
만들기 까다로워서 오늘 내내 이것에 몰두했다며 생색을 부렸지만 그게 밉지는 않았다. 라얀은 제 손에 걸린 것과 에리히의 팔목에 채워진 것을 한참 보다가 몸을 올려 그를 꽉 끌어안았다.
순간 중심을 잃은 에리히가 무너지며 바닷속으로 풍덩 빠졌다.
“…너.”
에리히는 바다에 빠져 젖은 얼굴과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좋아해.”
“…….”
“아주 많이.”
그래서 언젠간 다가올 헤어짐이 싫어 묶어두고 싶을 정도로. 알레를 보냈을 때와 기분이 달랐다. 알레를 일족으로 돌려보낼 때는 자신이 하자라는 것을 새삼스레 마주해야 했지만, 그래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리히는 영원히 곁에 두고 싶었다.
“너는 그런 말은 좀…, 예고하고 해.”
체구 차이 탓에 불편한 자세로 안긴 에리히는 그의 정수리에 턱을 얹은 채 중얼거렸다. 꼭 화난 말투 같아서 에리히를 올려다보자 목이 발그스름했다.
“왜?”
사랑하면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유리가 그랬고, 반려가 있는 모든 인어가 그랬다. 아니, 바다에 사는 모든 종은 제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라얀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싫은지 바로 표현했다. 에리히가 달콤한 과자를 주거나 신기한 것을 보여주면 열렬히 손뼉 치며 눈을 빛냈고, 짓궂은 장난을 칠 때는 물을 끼얹거나 흘겨봤다. 고작해야 좋고 싫음도 숨김없이 표현했는데 사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부끄러워?”
“그게.”
“에리히는 너무 부끄러움이 많아. 그렇게 부끄러움이 많아서 어떻게 해? 아니면 원래 인간들은 다 부끄러움이 많아?”
라얀은 연신 재잘거렸다. 어쩌면 입을 다물 때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서글픈 생각을 외면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라얀은 고개를 쳐들어 에리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 바다에서의 호흡을 불어 넣기 위해 입맞춤할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눌리는 뺨의 감촉도 좋았다.
새 부리로 쪼듯 쪽쪽거리자 에리히가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밀어 넣고 불쑥 들어 바위에 앉혔다. 라얀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체 누가 부끄러움이 많다는 거야.”
에리히는 맹랑한 것을 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목을 감쌌다. 냉기가 서린 손길이 아닌데도 목의 솜털이 오스스 섰다. 에리히는 그의 목에 손을 얹고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숨결이 닿아 속눈썹이 흔들렸다. 라얀은 눈을 감았다.
“…….”
하지만 기다려도 입술에 닿는 감각은 없었다. 뭐지. 실눈을 뜨자 에리히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라얀. 너, 어디 아프지.”
아픈 건 맞지만 이게 지금 할 소리인가. 그리고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었다. 라얀은 입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긴. 어제도 그렇고 몸이 분명히 평소보다 뜨거운데. 표정도 별로고. 아픈데도 지금 티 안 내고 멀쩡한 척하고 있는 거잖아. 너.”
왜 아까 제 어설픈 변명에도 에리히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고 넘어갔는지 조금은 궁금하고 한편으로 안도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그냥 가볍게, 조금?”
에리히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봐. 이거 색이 변한댔는데 멀쩡하잖아.”
라얀은 그가 채워준 팔찌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진주만큼 희면서 불투명한 보석은 아까와 색이 다르지 않았다.
“그 정도로 변하지는 않아.”
에리히는 보석을 손으로 톡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라얀이 그것을 멀뚱멀뚱 보고 있으니 그는 라얀의 뺨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아프지 마.”
“괜찮은데.”
잠깐 앓고 지나가는 열병에 불과하다. 걱정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라얀이 웃자 에리히는 멍하니 보다가 돌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웃지 마.”
“뭐?”
“아니. 다른 이들에게 웃지 마. 특히, 아일라한테.”
“아일라는 왜?”
갑자기 왜 여기서 아일라의 이름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지 말라는 건 둘째치고, 사이가 별로 좋은 편이 아닌 알레도 아니고 가끔 아티사에서의 이야기를 해주다가 지나가듯이 몇 번 언급한 게 전부인 아일라라니.
그가 아일라를 싫어할 만한 계기가 있었나. 기껏해야 유년 시절 소소하게 다투던 이야기를 한 게 전부였다. 머릿속을 뒤적거렸으나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니야. …그냥 잊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라얀이 골몰한 사이 에리히는 혀를 차며 정정했다. 툴툴거리는 모습이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라얀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 에리히의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이 맞닿자 에리히도 턱을 추켜올렸다. 늘어진 새까만 머리가 그의 어깨에까지 흘러내려 태양 같은 금발은 꽁꽁 가려졌다.
이렇게 가려지는 것처럼 에리히를 가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드물게 그런 충동에 사로잡혔다.
골반에 얹어져 있던 손이 미끄러지듯 올라가 등을 감쌌다.
연인보다는 친구에 가깝고, 친구라기엔 묘한 기류가 흘렀지만 그래도 긴밀한 호흡을 나누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처럼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입을 맞췄고, 손가락을 얽었다. 그는 손가락 사이의 갈퀴를 살살 문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키스했다.
그러다 보니 어두웠던 바다 수평선 너머로 불그스름한 해가 빼꼼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또 밤을 지새운 것에 놀란 한편, 허락된 짧은 시간이 야속하고 아쉬웠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무거웠지만 라얀은 웃으면서 다음을 기약했다. 에리히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으나 그래도 아직은 연약한 제 인간이니까. 이별은 멀리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슬렀다.
라얀은 가면서 팔찌를 톡톡 두드렸다. 심해 속에서 보석은 조금 푸르게도 보였다. 이건 잘 작동할까. 예전에 에리히는 아무래도 연락이 안 되어 답답하다며 웬 작은 구슬을 공단에 매달아준 적이 있었다.
당연히 바깥 세계의 연락은 아득한 아래에 잠겨 있는 아티사에 닿을 리 없었다. 아티사에 있을 때도 에리히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지 내심 기대했던 라얀은 아쉬움을 느껴야 했다.
그때는 안 됐지만 이건 되면 좋겠다. 혹시 에리히와 헤어지게 되더라도 이것을 보면서 그의 안부를 챙기면 될 테니.
라얀은 그를 대하듯 보석에 입술을 얹었다. 서늘한 보석에 입술의 온기가 옮겨갔다.
짧은 입맞춤 뒤에 라얀은 보다 느릿느릿 움직였다. 조금만 더 가면 아티사였다. 혹 수호 인어의 눈에 띄면 곤란했다.
주변을 바짝 살피던 라얀은 위화감을 느꼈다.
아티사에 가까워질수록 다른 종족이나 혹은 한둘쯤, 수호 인어가 있어야 하는데 부쩍 한산했다. 경비가 허술한 결계 쪽으로 빙 돌긴 했지만 다른 종족조차 마주치지 못한다는 건 이상했다.
혹시 몰라 살폈으나 아티사의 수호 결계는 늘 그러했듯이 단단해 침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왠지 모를 묘한 불안이 그를 휘감았다. 빨리 자리로 돌아가 있어야 할 것만 같기도 했고, 영영 들어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성이다 결국 결계를 넘었다.
아티사가 고요했다.
어린 인어들이 부르는 달콤한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라얀.”
그가 불안해하며 아티사의 광장에 들어설 즈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일라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봤다.
“…아니지?”
“뭐가.”
“정말로 인간을 만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어?”
순간 숨이 멎었다. 라얀은 무심코 에리히가 준 팔찌가 보이지 않게 다른 손으로 가렸다. 그의 행동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 아일라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달싹이는 찰나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수호 인어가 냉엄한 낯으로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위대한 메르께서 찾으십니다.”
수호 인어들에게 둘러싸여 왕의 홀로 향하는 길은 그리 가깝지 않았다. 아일라의 곁눈질이 느껴졌지만 라얀은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지도 못했다.
메르가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완전한 비밀은 없었고, 2년이면 정말 오래도록 왕을 기만한 거였으니.
그는 절망을 느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이어서는 안 됐다. 몇 년만 더. 에리히가 자신의 자리를 가지러 떠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더 버틸 수 있으면 됐는데.
“라얀.”
아일라가 소리 죽여 그를 불렀다. 수호 인어 중 하나가 아일라를 흘겨봤으나 그녀는 눈치를 보면서도 라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그, 잘못 알려진 거잖아. 그렇지?”
아일라가 진정시키려는 게 라얀인지, 아니면 본인인지 모르겠다.
라얀은 대답을 하는 대신 침묵했다. 아치형의 백색 문이 열렸다. 라얀은 들어가기 직전 곧게 편 등을 더욱 꼿꼿하게 했다. 한숨을 내쉬는 대신 삼키며 느릿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양옆으로 원로들이 서 있었고, 정중앙의 왕좌에는 트라이던트를 한 손에 쥔 왕이 서늘한 낯으로 측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는 물결에 흩날렸다. 그녀는 라얀이 오고도 한참 뒤에야 무감한 시선을 내렸다.
“사실이냐?”
“…….”
“성스러운 율법을 어기고 인간에게 너의 정체를 들켰나?”
라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은 시인이었다. 문득 아일라의 탄식이 들렸던 것도 같다.
“수백 년 전의 전쟁은, 아주 지루하고 피비린내 나는 역사이지. 우리의 선조들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속아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잃어야만 했다. 율법은 상실을 쌓아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 않아요.”
“…….”
“그 애는 교활하지 않아요. 왕이여. 아니, 모든 인간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건 아니에요.”
라얀은 주먹을 움켜쥐며 목소리를 냈다. 그의 눈은 왕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마치 며칠 전처럼. 그녀에게 자신은 가치 없지 않다고 선언했을 때처럼.
“왕이시여. 위대한 메르여. 들어주세요. …그 애는, 에리히는 때로는 심술 궂어도 제게 나쁜 짓은 하지 않았어요. 소문처럼 제 살점을 탐하지도 않았고, 노래를 부르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감히 왕의 앞에서 인간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지켜보던 원로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혹은 율법을 어겼으니 본보기로 강력히 벌해야 한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에리히의 존재를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이렇게 알려져서는 안 됐는데. 목 뒤로 삼켜지는 침이 유독 썼다.
“가여워라. 교활하고 탐욕적인 인간에게 현혹되었구나.”
“메르!”
“스스로 혐의를 인정하였으니 이 이상 논할 게 있는가?”
메르는 왕좌에서 일어났다. 차갑고 위협적인 기운이 홀을 둘러쌌다. 혀를 차거나, 라얀을 비난하는 원로들마저도 모두 입을 꾹 다물며 왕의 분노에 굴종했다.
“감옥에 가둬라.”
왕의 판결은 지극히 간결했다.
“인간과 사랑에 빠져 지상으로 올라간 그 인어들처럼 저를 차라리 추방시켜 주세요.”
성체 인어조차 아티사의 가호가 없으면 저 바깥에서 살아남기 요원했다. 하물며 어떤 능력조차 없는 어린 인어라니. 추방당하면 그 끝이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라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지만 메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한 점의 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너의 죄를 곱씹어라.”
다시 한번 뜻을 확고히 했을 뿐이다. 메르가 손을 가볍게 휘젓자 보이지 않은 밧줄이 그의 몸을 결박했다. 라얀이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자 수호 인어들이 다가와 부축했다.
“저는 그 애를 사랑해요.”
“…….”
“메르. 제발…….”
라얀은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뒤채며 다시 한번 추방해 달라고 간절히 외쳤으나 그것은 왕에게 닿지 않는 메아리였다.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겠구나.”
잔인하기 짝이 없는 말을 끝으로 왕은 매정히 몸을 돌렸다.
* * *
한시도 빛이 시들지 않는 아티사에도 그림자처럼 어두운 곳이 있었다. 빙벽으로 에워싼 감옥은 어두컴컴했다. 떠밀리다시피 안으로 들어가자 단단한 결계가 그를 가로막았다. 그를 속박한 무형의 기운은 감옥에 들어간 뒤부터 풀어진 지 오래였다.
라얀은 구석진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쓸데없이 반항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힘으로 부술 수 없고, 그런 식으로 기운을 소모해서는 안 됐다. 뾰족한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뭐든 생각해야 했다. 그래야만 이 끔찍한 상황을 버틸 수가 있었다.
“…라얀.”
라얀은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결계 저편으로 아일라가 보였다.
“대체 이게 무슨.”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라얀 못지않게 이 상황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냥 아티사 근처만 돌아다닌 게 아니었어? 바깥에 나간 거였어? 인간을 보러? 그따위 것들이 궁금해서?”
“…….”
“알레는 알고 있었지?”
화가 난 것도 같았다.
“그래. 모를 리가 없지. 항상 너와 붙어 있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어쩐지 요사이에 너를 부쩍 과보호했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일족에게 돌아갈 때는 너를 잘 부탁한다고 하고. 말리지는 못할망정. 제정신이야?”
“그러지 마.”
“알레가 진작 말렸으면, 아니, 유리가 헛바람만 넣지 않았으면 네가 이 꼴을 당했을 리 없으니 하는 말이잖아!”
“아일라.”
“…둘 다 내가 어디 가만둘까 봐서.”
아일라의 분노를 대변하듯 손에 작은 소용돌이가 쳤다.
“아일라. 알잖아. 전부 내 고집이었어.”
“아니. 걔네 잘못이야. 나였더라면 네가 그런 호기심을 키우다 결국 바깥에 나가게 하지는 않았어. 인간을 만나게 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나는, 조용히 시들어갔을 거고.”
유리가 바깥을 알려준 덕분에, 알레가 그를 데리고 바깥에 나가준 덕분에 라얀은 버틸 수 있었다. 만일 그런 낙이라도 없었더라면 스스로 메르의 하자라는 족쇄에 짓눌려 괴로워하다가 성장에 실패한 다른 인어들과 같은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탓하지 마. 알레는 많이 말렸어. …유리는, 내가 인간과 만났는지도 몰라.”
“멍청아. 지금 네가 누굴 감싸줄 때야?”
“…….”
“영원히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 네가 좋아하는 어떤 것도 못 하게 될 거라고.”
아일라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못된 말을 했는데 걱정해 주네.”
“또 헛소리한다.”
금방 화를 내고. 그녀는 지금 감정의 기복이 뚜렷한 데다가 낙폭이 컸다. 이 장막이 그들을 가로막지 않는다면 어깨를 쥐고 세차게 흔들어주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께 잘못했다고 빌어.”
“…….”
“다시는 바깥에 나가 인간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해. 네가 그렇게 전하라고 했다고 내가 메르께 고할까? 어쩌면 메르는 자비를 베풀어주실지도 몰라. …그래도 너는 메르의 아들이잖아.”
“메르의 수치지.”
라얀이 정정하자 아일라는 한숨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나는 그럴 수 없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일단 여기는 벗어나고 봐야지. 응?”
“율법대로 추방시켜 달라고 전해줘.”
다시는 바깥에 나가지 않겠노라는 맹세로 이 감옥을 벗어난다 한들, 그것은 서약이 되어 그를 아티사에 매어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약속은 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라얀, 제발 좀!”
라얀은 아일라의 설득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에리히를 사랑해. …나간다 한들 보지 못한다면 이곳에 있는 거랑 다를 게 뭐야.”
라얀의 뜻은 확고했다. 드물게 고집을 부릴 때면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일라는 정말이지, 저 뒤통수를 한 번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다.
나름대로 실연이라면 실연을 당하고 그것을 곱씹으며 떨쳐낼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하루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라얀이 인간과 만난다는.
워낙 호기심도 많고, 알레나 유리를 따라 바깥을 돌아다니니 도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밤새 궁을 비웠다가 돌아온 라얀은 메르의 추궁에 부정하지 않았다. 속 터지게도 인간을 옹호하고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까지 했다.
속이 터지면서도 마음은 초조했다.
라얀이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로 죽을 때까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조개 침대에 누워서 뺨을 비비적거리며 뒹굴거리지도 못할 테고, 광장의 큰 조개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음악을 들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지도 못할 것이다.
“…좋아. 그래. 알았어.”
아일라는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계속 언쟁해 봐야 라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테고, 그녀는 여기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일단 나가서 빌어먹을 알레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라얀은 알레를 잘 따르고 의지했다. 제 손으로 등 떠밀어 보냈으면서도 울적해했을 정도로. 어쩌면 그의 말은 듣는 시늉이라도 할지 모른다.
“몸은 괜찮은 거지?”
“…….”
“그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잖아. 라얀.”
“괜찮아.”
괜찮기는. 아까 살갗을 스쳤을 때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저렇게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야. 장막 사이로 기운을 불어 넣어줄 수도 없으니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밖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눈감아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저것을 무시하고 나가지 않는다면 다시 들어오기 힘들 것이다. 아일라는 결계를 손바닥으로 매만지다가 거두며 물러났다. 그녀가 나가자 문이 닫혔다. 감옥은 어둠으로 드리워졌다.
* * *
“―아.”
조용한 방에 별안간 터진 탄성이었다. 꾸벅꾸벅 조는 마리엘을 안고 등을 가만가만 다독이던 올리비아의 시선이 에르하르트에게 쏠렸다.
“에리히?”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냥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만.”
“책을 읽는 줄 알았더니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구나.”
에르하르트는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책을 도로 덮었다. 어차피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죄 흩어질 테니 아무런 의미 없었다.
“그만 읽을 셈이니?”
“돌아가시는 날인데 아쉬워하긴커녕 옆에서 책이나 들추고 있으니 무정하다 돌려 탓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어머니.”
“그럴 리가.”
올리비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이 시간이 좋구나. 제르바에 있을 때는 언제나 쫓기듯 널 보고 떠나야만 했는데 이토록 여유를 부릴 수 있다니. 내겐 허락되지 않을 일이라고 지레 체념했거늘.”
올리비아의 말에서 거짓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이 단조로운 평화를 진심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또 언제 이런 여유가 우리에게 허락될까.”
에르하르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다. 그녀의 아쉬움을 달래는 게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단지 방금 탄성을 터트린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한동안 어딘지 이상했던 라얀을 곱씹었다.
아픈 탓이라고 여겼으나 되짚어보면 이상했던 점이 많았다. 특히나 너는 결국 떠날 것이냐던 그 말이. 꿈을 꿔서 그랬다고 답했고, 당시에는 그의 수호자가 떠난 여파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제게 그런 말을 할 만한 당위성이 부족했다.
해결되지 않는 묘한 찝찝함에 에르하르트는 틈날 때마다 그날의 시간을, 기억을, 대화를, 라얀의 행동을 곱씹었다. 마침내 제 언행까지도.
‘나는 원래 살던 곳에서 여기로 쫓겨났어.’
그의 속내를 엿듣기 위해 에르하르트는 제 과거를 풀어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탐하겠다는 말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 말은 결국 이곳을 떠나겠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라얀은, 지상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존재였다.
마주 대고 있던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라얀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슬금슬금 손을 올려 손가락 키를 맞추려 들었다가 이내 움켜쥔 것까지도. 그래. 그 애는 자랄 수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에르하르트는 돌연 심각해졌다. 세 시간 내에 제르바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떠나 그곳은 바다를 낀 도시가 아니었다. 호수 정도는 있었던 것도 같지만, 인어가 바다 아닌 곳에서 살 수 있을지를 알지 못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라얀이 떠나려고 하겠냐는 것이었다.
“에리히?”
“…….”
“에리히.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니?”
“아니, 아닙니다. 아무것도.”
거듭 부르는 말에야 에르하르트는 겨우 대답했다. 여전히 생각은 다른 데에 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내가 네게 어미 노릇을 잘못해 주었지만, 그래도 열 달을 품었다. 네게 고민거리가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어. 왜. 연인이 네 속이라도 썩이니?”
“…그게 무슨.”
에르하르트는 차마 당황을 지우지 못했다. 연인이라는 낯간지러운 말 때문이 아니라 어찌하여 그녀가 그런 것을 알고 있는지 때문에.
비밀통로로 나갔으니 눈치챘을 리 없을 텐데. 만약 그가 나간 사이에 올리비아가 왔더라면 그것을 여태까지 몰랐을 리 없다. 게다가 라얀이 아픈 몸으로 계속 오가는 게 걸려서 이틀 정도는 꼼짝도 말고 쉬고 오라고 한 터라 그 후로는 나간 적도 없었다.
“요 며칠 사이 네 눈빛이 꼭 과거의 나를 닮아갔거든.”
아리송한 말을 중얼거린 올리비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왜인지 슬퍼 보이기도,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한참 감정을 곱씹어 삼킨 그녀는 다시 시선을 올렸다. 웃고 있었다.
“그래. 들어보자. 대체 어떤 아가씨가 우리 황자의 속을 썩이는지.”
“아가씨라니.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내인 거니?”
에르하르트는 차를 넘기다 말고 사레가 들려 쿨럭거렸다. 그 소리에 올리비아의 품에 안겨 있던 마리엘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혹 카나반 경인가.”
“어머니 대체. …아니 그보다 누구를 갖다 대시는 겁니까.”
겨우 진정한 그는 예상치도 못한 이름에 다시 기가 막혔다.
“제르바에선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란다. 숨길 필요 없어. 얼마 전 라펠 후작의 막내아들이 제 사내 연인을 데리고 야회에 참석하기도 했었고. 아주 없는 일은 아니니까. 물론 너는 후사 문제도 생각은 해야 할 테지만.”
“…그자는 아닙니다.”
에르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다른 이라고 말하면 누구인지 물을 테고, 라얀의 정체를 밝힐 수 없어 불가피하게 침묵해야 하지만 하필 닐스 카나반이라니. 엮인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가 진저리를 치자 올리비아는 웃었다.
“어머니. 왜 웃어요?”
웃음소리에 마리엘은 잠이 덜 깼으면서도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내 작은 보석. 아무것도 아니란다.”
올리비아는 속삭이면서 마리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마리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싫지 않은지 올리비아의 품에 폭 파묻혀 뺨을 문질렀다.
“그래서 에리히. 네 고민은 말해주지 않을 거니?”
“…그냥.”
“…….”
“아르헨에 오래 있고 싶어져서요.”
적어도 라얀과 함께 있을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두고 갈 생각 없었다. 그들이 연인, 하여튼, 그런 사이가 된 건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것을 떠나서 에르하르트는 라얀이 없는 생을 상상할 수 없었다. 2년 전부터, 그 애는 제게 그런 존재였다.
그 애는 그의 삶에 유일한 색채였다.
그가 살고 싶은 이유도.
“…그렇다면.”
“올리비아 전하.”
올리비아가 운을 떼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평화를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떠날 준비를 마쳤으니 이만 내려오라는 뜻이었다. 올리비아의 안색이 흐려졌지만 두 아이를 의식하는 양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올리비아는 마리엘을 땅에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에르하르트 역시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가야 할 시간이구나.”
“예.”
“안아봐도 되겠니?”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에르하르트는 몸을 낮추며 순순하게 그녀에게 안겼다. 졸지에 치마폭에 휘감긴 마리엘이 바둥거리다가 빠져나왔다.
“생각했던 거지만 정말 많이 자랐구나.”
“…….”
“에리히.”
올리비아는 에르하르트의 이름을 부른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포트 성으로 가렴.”
포트는 올리비아의 고향이었다. 게다가 무슨 일은 또 뭐고. 에르하르트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보자 그녀는 제 손에 작은 쪽지를 쥐여 주었다.
“여기에 적힌 자를 찾아가서 내가 맡긴 것을 달라고 해.”
“어머니.”
“내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단다. 그리고 왠지…….”
그녀는 말을 삼켰다.
“아니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어쩌면 너를 오래 볼 시간이 허락될 수도 있겠지. 나는 모두가 알다시피 헤셀러스에서 가장 운이 좋은 여인이니까. 올리비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에르하르트가 입술을 달싹이기 전 그녀는 한발 물러났다.
“그럼 내려가자. 나를 배웅해 줘야 하잖니.”
“…네.”
“참.”
올리비아는 뒤돌아서기 전 그의 손을 잡았다.
“네가 어떤 까닭으로 아르헨을 떠나기 싫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제르바로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디에 있든 괜찮아. 볼 수 없음에 아쉽겠지만 그보다 너의 평온한 일생을 바란단다.”
“…….”
“그게 아까 미처 주지 못한 대답이다.”
에르하르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등 위에 제 입술을 얹는 것으로 대신했다. 똑똑. 밖에서 기다리다 못한 이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비아는 그제야 한 손으로 마리엘의 손을 붙들고 나갔다. 에르하르트 역시 그녀를 뒤따라 나섰다.
1층의 홀로 내려가자 이미 황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올리비아를 향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웃으며 황제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완벽하기 짝이 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리브. 아들과 이야기는 잘 나누었소?”
“폐하의 배려 덕분이지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였고?”
“오늘이 마지막이 아닐 터이니 못다 한 말이 있다 한들 그때를 기약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또한 그렇군.”
황제는 쉬이 수긍하며 그녀를 에스코트해 바깥으로 나갔다.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붉은 매와 교차하는 두 검이 새겨져 휘날리는 깃발은 황실의 상징이었다. 마차에 오르기 전, 올리비아가 문득 멈춰서 에르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에리히. 내 말을 명심하렴.”
“…그리하겠습니다.”
“황자가 새겨야 할 말이 있나 보지.”
황제는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올리비아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황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연인, 첫사랑, …등의 말이 들렸던 것도 같지만 듣지 못한 척했다.
“그렇군. 사랑이라. 아름다운 것이지.”
“…….”
“부디 네 사랑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를 바라마. 황자.”
에르하르트는 못내 짜증 났지만 삼켰다. 아니라고 부정해 봐야 올리비아를 곤란하게 할 뿐이다. 그들이 나눈 말은 방문이 열린 순간 마음속에 묻어둬야만 하는 것이었으니.
“…….”
올리비아는 꼭 영영 보지 못할 것을 담을 듯이 에르하르트를 오래오래 보다가 마리엘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 뒤로 황제가 따라 올라서며 문이 닫혔다. 사두마차가 움직였다.
에르하르트는 저것을 멈춰 세우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며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는 마차의 형상을 오래도록 지켜봐야 했다.
성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