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라얀의 고백은 여파가 컸다.
에르하르트는 요즈음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체스를 두다가 말을 이상한 데 둬서 어처구니없이 패배하는가 하면, 답신을 쓰기 위해 깃펜을 들고 멍청하게 있다가 잉크가 죄 번져 양피지를 버리는 일도 많았다.
“전하.”
오늘도 또 멍청한 짓을 하나 경신했군. 에르하르트는 바닥에 떨어트린 검을 보며 생각했다. 검을 놓친 손이 저릿해서 그는 손을 몇 번 쥐락펴락해야만 했다.
“괜찮으십니까? 상처가…….”
내려다보자 날카로운 검에 찢긴 소맷자락 틈으로 살갗이 약간 베였다. 흐르는 피를 대강 훔치자 그와 검을 맞대던 기사가 사색이 돼서는 손수건을 얼른 상처에 덧대고는 무릎을 꿇었다.
“고귀하신 존체에 상처를 입힌 죄를 부디 벌로 다스리십시오.”
“내가 방심한 탓이니 신경 쓰지 마라. 경.”
레아가 이것을 발견하면 사색이 되기는 할 테지만 명백히 자신이 집중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니 책임 소재는 분명했다.
“오늘은 이만하시겠습니까?”
에르하르트가 도통 집중하지 못하는 기색이자 기사는 조심스레 권유했다. 그는 혹여 또 황자의 몸을 상하게 할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아니. 마저 하겠다.”
그의 고집에 기사는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눈치로도 성실하게 검을 주워 그에게 넘겼다.
“부디 집중하셔야 합니다. 검은 눈이 멀어 조금만 방심하면 그 틈을 파고듭니다.”
지금 집중이 될 상황이, 까지 생각했으나 대련을 더 이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쪽은 그였기에 삼켰다. 에르하르트는 애써 생각 한 축을 점령한 얼굴을 떨치며 검날을 세웠다.
2년 전만 해도 다소 어설펐던 자세는 군더더기 없이 완벽해져서 가르치던 기사 로이엄은 자신도 모르게 나오려는 탄성을 겨우 눌렀다.
비단 자세뿐만이 아니다. 검에 실리는 힘도 하루가 다르게 강해져서 밀릴 때도 있었다. 곧게 뻗은 뼈대와 유연한 몸은 검을 다루기엔 적합했지만 이미 배우기에 좋은 시기를 놓쳐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자세는 물론 그리는 검의 궤적은 유려하고 날렵해졌다. 잠깐 시선을 놓치면 빠르면서도 힘 있게 그의 급소를 노려왔다.
로이엄이 여태 가르친 이 중 황자만 한 재능을 가진 자가 없었다. 때로는 그 우수함이 탐이 났다. 설령 평민이라 해도 능히 이름을 떨치고 높은 이의 눈에 띌 만한 소질이었으니.
챙!
여전히 평소보단 집중하지 못한 것 같은데도 황자는 아까보다 날카롭게 검을 다루었다. 맞닿는 검을 부드럽게 흘려내고 재빠른 놀림으로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는 서둘러 검으로 치며 방어했다.
스르릉.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쨍하니 날카로웠다.
황자는 제 공격이 막히자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는 검을 살짝 뒤로 당기듯 무르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는 바람에 생긴 사각지대의 틈을 찾아 그쪽을 찌르듯 짚었다. 감정을 다스려 기어이 흐름을 제 쪽으로 끌어오는 것 역시 강점이었다
“이쪽이 비었습니다. 전하.”
빌어먹을. 에르하르트는 겨우 피해내며 욕설을 짓씹었다. 옆구리에 검날이 닿을 뻔하다가 비켜서 떨어지는 듯한 예리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집중을 하고는 있는데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피해내고 틈을 찾아 반격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요즈음은 종종 기사를 완전히 제압할 때도 있었는데 오늘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영 글렀다. 이 이상 상처를 만들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다.
이래서야 별로 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
어차피 검은 적당히 몸을 단련시키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으로 잡기 시작했을 뿐,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진심이 아닌 것에, 고집을 부려가며 수업을 이어가는 것도 못 할 짓이다. 하물며 이렇게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
당장 그의 몸에 상처를 낸 기사는 은근히 몸을 사리며 에르하르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역시 이만하는 게 좋겠다.”
에르하르트는 맞댄 검을 흘려내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오늘도 훌륭하셨습니다. 전하.”
훌륭하기는. 검을 배우고 조금 손에 익은 이후로 오늘이 제일 엉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르하르트는 대꾸하는 대신 다가온 시종이 건틀렛과 견갑을 벗겨낼 수 있도록 거들어주었다.
“혹, 기분이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바로 물러날 줄 알았던 기사는 그의 기분을 물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에르하르트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곧 잘못 본 것 같다며 허둥지둥 물러났다.
“내가 기분 좋아 보이나?”
“한낱 시종이 어찌 전하의 심정을 속단하겠습니까.”
무구를 거두어가는 시종은 답을 신중히 가렸다. 에르하르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짓했다.
“하면 돌아가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나중에. 레아에게는 알리지 마라. 아. 그리고 따를 거 없으니 돌아가라.”
시종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조속히 따르는 것을 멈추고 돌아갔다. 예전엔 어찌 그러느냐며 따라붙은 적 있었으나 그의 까다로운 성격을 호되게 경험한 뒤로는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따르는 짐 없이 홀로 거니는 걸음은 산책로를 지나 성벽에 올라섰다. 성채로 올라가자 아르헨이 한눈에 보였다. 제르바에서 보는 아르헨은 단순히 남부 변두리에 있는 시골 휴양지이지만, 막상 직접 겪어보는 아르헨은 여러모로 괜찮은 곳이었다.
그리 크지는 않은 영지지만 토지는 비옥한 데다가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해 부유했고, 혹여 모를 외적이나 해적에 맞서기 위한 사병이 허락되었다. 반면 이동 마법진을 통하지 않고는 황성에서 내려오기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보니 타 영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황제의 영향력이 덜 미쳤다.
에르하르트는 종종 이곳에 올라와 아래를 굽어살피며 이렇게나 자유로운 곳을 죽을 자리 삼아 쫓아내 준 황제에게 차라리 감사하다는 감상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잘한 실수부터, 상념까지. 라얀의 고백은 비슷하게 돌아가던 단조로운 일상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
에르하르트는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날의 기억은 언제 떠올려도 방금 일어난 일인 양 선명했다. 촉촉하게 닿던 감촉은 생생하고 낯설었다.
‘인어도 사랑하는 이와 입술을 맞춘대.’
지난 2년간 반쯤은 오기로 익숙해진 입맞춤이 실로 낯설어진 것은, 라얀이 만들어낸 분위기와 속삭이던 말 때문이리라.
발그레한 뺨, 습기를 머금은 것처럼 촉촉한 녹색의 눈, 담담하게 말했으나 실은 잔떨림이 묻어나던 목소리까지. 그 기억이 형체를 가지고 선명해지는 순간 에르하르트는 감정을 흩트리려는 듯이 신발의 앞코로 성곽을 툭툭 걷어찼다.
“그런 말을 해놓고 가버리면 대체…….”
건네진 문장이 도저히 한 번에 들어오지 않아 낱말로 하나하나 분해해 다시 조립해 곱씹기도 전에, 라얀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뒤늦게 정신 차려 이름을 불러도 아름다운 인어가 다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사랑이라니.”
라얀은 과연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고는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늘 자신이 에르하르트보다 오래 살았다며 어른인 척 행세하려 했으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라얀이 한참 어려 보였다. 거짓말도 잘하지 못하고, 세상 모든 것이 선의로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감정을 하나 숨기지 않는 게 특히나. 또 2년 내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외양 역시 한몫했다.
혹시 아티사에서 어떤 말을 듣고 제 감정을 착각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인어들 사이에서도 사랑하는 존재에게 입을 맞춘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고? 여태 몰랐다는 건 주변에서 굳이 그것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제 와서.
“…….”
혹시 한때 라얀과 미래를 기약했다던 아일라라는 인어가, …꼬리를 문 가정이 논리 없이 튀었다. 난데없이 불유쾌해졌다. 에르하르트의 이마에 빗금이 그어졌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그가 어떤 노력을 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자였다. 저 드넓은 바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며, 그것을 안다 해도 찾아갈 수 없는 곳에 머물렀다.
기실 지금 당장 라얀을 봐도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갈피는 잡지 못했다. 사랑이란 너무 피상적이었고, 제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과거엔 의미 없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의 옆자리는 가장 정치적인 이유로 채워지게 될 게 분명해서.
그러나 라얀을 볼 수 없는 건 답답했다. 이제 사흘 지났으니 아직도 엿새나 남았다. 열흘이라니. 이렇게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루하루가 더디게 흘렀다.
“…어디에 묶어둘 수 있으면 좋겠는데.”
바람 한 점 없어 파도 없이 잔잔한 망망대해를 보며 중얼거리는 말은 가감 없는 진심이었다.
그 애는 올라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부끄럽다며 숨을까. 그때처럼 창백한 뺨을 발그레 붉힐까. 별빛보다도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까. 또 그때처럼 입술을…….
“…….”
에르하르트는 황급히 생각을 멈추며 옷깃을 잡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별안간 더웠다.
“…하. 전하.”
숨을 고르지 못한 거친 호흡으로 그를 찾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레아였다. 그녀는 급히 성벽을 올라왔는지 흉곽이 들썩거렸다. 에르하르트는 다친 팔을 등 뒤로 숨겼다.
“레아.”
“여기에 계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왔는데. …전하?”
겨우 숨을 고르던 그녀는 에르하르트의 얼굴을 보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이, …그러게 이 땡볕에 왜 여기에 계십니까.”
더위라도 타면 어찌하시려고요. 보세요. 벌써 얼굴이 붉어지셨어요. 레아는 부채를 부쳤다. 미지근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대련을 해서 그런 거지.”
대련을 마치고 올라온 지가 언젠데 그것을 핑계로 대자 레아의 눈매가 가늠하듯 가늘어졌다.
“그래서 무슨 일로?”
“아.”
황급히 말을 돌리자 레아의 안색이 짐짓 어두워졌다. 에르하르트 역시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레아가 굳이 그를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대수롭잖은 일은 아닐 테니.
“폐하의 전령이 왔습니다.”
역시나.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얼마간 들떠 있던 마음이 공기 빠진 양 푹 꺼졌다. 에르하르트는 표정을 달리하며 몸을 반듯하게 일으켰다.
“전령은 어디에 있지?”
에르하르트는 느슨하게 풀어헤친 목깃을 단단히 채웠다. 그의 목소리가 딱딱했다.
* * *
몸이 무겁고 나른했다. 라얀은 겨우 눈만 깜빡거리며 열에 달 뜬 숨을 뱉었다. 바깥에 다녀온 뒤로 영 좋지 않은 것 같더니 기어이 다음 날부터 드러누웠다. 그의 상태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해마였다. 그는 곧장 아일라를 데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녀는 생전 앓지도 않던 애가 왜 갑자기 열병에 걸리느냐고 혀를 차면서도 바쁜 시간을 틈틈이 쪼개가면서 들여다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혹시 알레가 돌아간 일로 라얀이 상심하지 않을지 마음 쓰는 게 보였다.
“하아.”
라얀은 끙끙거리며 열에 달뜬 숨을 뱉었다.
왜 이러지. 그는 잘 아프지 않았다. 아니, 자잘하게 생채기가 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아픈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래서 나른한 이 느낌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에리히를 보러 가야 하는데. 에리히에겐 열흘 뒤에 만나자고 했지만 멀리서나마 그의 자취를 훔쳐볼 생각이었다. 당장 그를 마주할 용기는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보고 싶었으니까.
그것보다 에리히는 뭘 하고 있을까.
제 고백을 곱씹기는 할까.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황당해하는 건 아닐까. …고민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할까.
그는 인간이고, 같은 인간과 짝짓고 싶어 할 테니. 아샤도 그러지 않았나. 그는 인간이니, 인어보다야 인간을 더 편하게 여기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생각하니 몸이 더 아픈 것만 같았다. 라얀은 손으로 하나하나 꼽아가며 열흘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렸다. 시간이 얼른 갔으면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영원히 흐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에리히를 볼 수 없게 된다.
라얀은 갈등 속에서 끙끙거리며 몸을 둘둘 말듯이 웅크렸다. 지느러미가 부드럽게 손에 감겼다. 단 한 번도 이것이 거슬린 적 없는데 오늘따라 왜인지 서글펐다. 곧 겪어야 할 실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니 다 잊을 셈으로 눈을 감은 라얀은 다가오는 기척을 들었다. 뻔했다. 아일라겠지. 유리도, 알레도 없으니 이제 그를 챙길 이는 아일라뿐이었다.
하지만 라얀은 지금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아프다고.”
메마르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라얀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시선을 거슬러 올라갔다. 하늘하늘하게 늘어지는 숄로 몸을 두른 여인이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메르.”
뒤늦게 예를 갖추며 왕을 부르는 라얀의 목소리가 떨렸다. 메르는 아래위로 훑더니 혀를 찼다.
“잠깐이나마 기대를 했지.”
되물을 필요 없었다. 라얀은 금세 헤아렸다. 보통 첫 번째 성장은 열을 동반하며 시작했으므로. 그는 드물게 아팠을 뿐 잘못한 게 없었다. 어디까지나 왕의 착각이었으며, 기대였다. 그런데도 입을 달싹이지 못했다. 라얀은 고개를 떨구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숨이 막혔다. 당장에라도 메르의 시선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성장의 전조가 아님을 알고 바로 떠날 줄 알았던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시선으로 라얀을 보았다.
왜 가지 않지.
“…….”
라얀은 이제 불편하다 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헤집어져서 따끔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앞뒤 없이 그녀를 두고 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무렵이었다. 멀리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아프다고 나름대로 얌전히 오는 것 같은데 공간이 워낙 적막한 탓인지 기척이 선명했다.
그녀가 와서 이 분위기를 흩트려 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메르의 기운을 눈치채고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 사이에서 그가 갈등하는 동안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기어이 문이 열렸다.
“라, …메르.”
여느 때처럼 대강의 일을 끝내고 들어오던 아일라는 왕을 발견하고 표정이 굳었다. 냉막한 눈동자가 그쪽으로 향했다.
“디 오노르. 메르.”
얼른 정신을 수습한 아일라는 몸을 깊숙이 낮추며 왕을 찬미했다.
“아일라.”
“예.”
평소 긴장하는 법 없던 아일라 역시 잔뜩 경직된 게 보였다. 그녀는 아티사의 인어들이 그러듯 진심으로 왕을 경애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
“슬슬 너도 네 반려를 찾아야지.”
메르의 언어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성장의 기미조차 없는 하자품 따위에게 계속 신경 써야 하겠느냐고. 아일라는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그것은 그녀가 불합리하다 여기는 일에 저항하려 할 때 보이는 습관이었다.
메르를 상대로, 미친 게 아니고서야.
라얀은 기겁했다. 왕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라얀은 얼른 그녀 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제 뒤로 밀었다.
“제가 조심하겠습니다.”
“지금 뭐 하는.”
라얀은 아일라의 손을 꽉 쥐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뿌리칠 것처럼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왕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정확히는 라얀의 손에.
그것을 말없이 보던 메르는 곧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나가려는 듯 몸을 틀었다.
“…….”
라얀은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숨을 들이켰다.
“메르.”
그러곤 메르를 불렀다. 무시할 줄 알았던 그녀는 고개를 반쯤 틀었다. 한 점의 온기도 헤아려볼 수 없는 서늘한 녹안이 라얀에게로 궤적을 틀었다.
“…그렇게, 싫으세요?”
그것이 무엇인지 라얀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라얀은 평소였더라면 메르가 한시라도 빨리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며 그녀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늘 메르의 앞에서 주눅 들었고, 그녀가 어려웠다. 한때는 애정을 바랐으나 어느 순간 그런 기대가 마르자 오로지 두려움만이 남았고, 자괴감을 느꼈다.
그녀를 마주할 때면 실망한 눈으로 보던 기억이 선명했고, 라얀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꽤 오래 힘들어야 했다.
‘기억해, 라얀. 너는 존재만으로 이미 완벽하다는걸. 그러니 네 가치를 함부로 낮추지 마.’
하지만 에리히의 말이 생각났다. 제게 더할 나위 없이 위로가 되어주던. 그리하여 라얀은 그날 이후 처음으로 메르에게 먼저 말을 붙일 수 있었다.
라얀은 긴장으로 떨리는 입술을 겨우 다물었다. 라얀의 행동을 예측했을 리 만무한 아일라는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눈으로 라얀을 쳐다봤다. 만약 메르의 앞이 아니었더라면 제정신이냐고 물었으리라. 물론 아까 겁도 없이 맞서려고 했던 그녀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
메르는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였다.
“싫으냐고.”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가치를 논했더라면 답을 하기 어렵잖았을 터인데.”
“…….”
“그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질문이로구나.”
대답하는 내내 제대로 라얀을 마주하지 않고 고개만 비틀어 시선을 보냈던 메르는 더 이상 말 섞기 싫다는 듯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한 뼘만 더 나아가면 문이 여닫힐 것이다. 왕은 다시 제게 없는 존재가 될 것이었다.
“저는.”
라얀은 나가는 메르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아일라가 그의 손을 꽉 쥐었지만 라얀은 멈추지 않았다.
“저는 가치가 없지 않아요.”
메르 역시 이번에는 멈춰서 돌아보지 않았다. 쾅. 문이 닫혔다. 갈무리를 했는데도 형형했던 기운에 긴장한 몸이 늘어졌다. 라얀이 힘을 잃고 비틀거리자 아일라가 부축했다.
“라얀.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니까 몸이 더 아팠다. 열도 다시 오르는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이럴 거면서 대체 무슨 무모한 짓을 한 거야.”
“네가 하려던 것보다는.”
자신이야 그래도 신분상 시 메르였고, 메르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반면 아일라는 고작해야 솔리저스다.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들 자칫 왕에게 불손하였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거나 근신 처분을 받을 수도 있었다.
“내가 설마 못 참았겠어?”
“응. 그래 보였어.”
알아온 세월이 있는데 설마 성격 하나 모를까. 말리지 않았다면 아일라는 앞뒤 없이 달려들었을 것이다. 라얀의 단언에 아일라는 끄응, 앓는 소리를 흘리면서도 반박하지는 않았다.
라얀은 그녀를 살짝 밀어내며 도로 조개 침대에 누웠다.
“아직도 많이 아파?”
“괜찮아졌어.”
아까보다 더 아팠지만 견디다 보면 괜찮아질 것이다. 몸은 아파도 속은 후련했다. 메르가 여전히 저를 무가치하다고 볼지언정, 라얀은 그녀에게 스스로 가치 있노라 말 한마디는 하였으니. 이는 전부 에리히 덕분이었다. 에리히를 보러 갈 수 있다면 오늘의 일을 자랑스럽게 말했을 텐데.
“괜찮아지기는.”
“아일라.”
열에 들뜬 숨을 가볍게 내쉰 라얀은 아일라를 불렀다. 그녀는 부름에 응하듯 시선을 맞췄다. 눈동자에 어린 걱정이 아주 선명했다.
“너도 어서 반려를 찾도록 해.”
“내 반려는.”
“너의 반려는 내가 아니니까.”
아일라는 눈매를 미미하게 찡그렸다. 그러나 라얀은 메르의 말에 일부분 동의했다. 가령, 아일라가 얼른 반려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그건 내가 선택할 문제야. 라얀.”
아일라는 단호했다. 서로의 반려가 될 줄 알고 살았던 시간이 수십 년이고, 최근까지도 완강했으니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성혼은 유리처럼 사랑하는 존재와 해야 하는 거야.”
“…….”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고.”
수십 년 동안 그들은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가족이었고, 혹은 암묵적인 반려자였다. 싸우는 일도 없잖아 있었으나 기저에는 항상 애정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라얀은 적어도 그것이 자신이 에리히를 사랑하는 것 같은, 그런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에리히를 향한 마음을 깨닫고 나니 명확하게 보였다.
“우리는, 친구지.”
“…라얀 맞아?”
라얀이 이런 말을 할 리 없는데. 아일라는 여전히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 봐. 내 말에도 너는 마음 아프지 않잖아.”
에리히가 자신을 거절할 것이란 상상만 해도 이렇게나 마음이 지끈거리는데. 굳이 가슴에 손을 얹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조차 깜빡하곤 하던 심장의 존재감이 요즈음 부쩍 뚜렷했다.
라얀은 한숨을 푹 내쉬며 피곤하다며 돌아누웠다.
“나는, …그래. 아픈 애를 두고 무슨 말을 하겠니. 오늘은 그만하자.”
돌아누운 라얀을 팔짱 낀 채 한참을 노려보던 아일라는 고개를 저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런 뒤에 그의 이마를 짚었다. 청량한 기운이 머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제 기운을 불어 넣어준 그녀는 휙 뒤돌아 나갔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있던 라얀은 멀어지는 인기척에 다시 눈을 떴다. 하. 고여 있던 숨을 애써 흘려냈지만 여전히 속은 갑갑했다. 결국 라얀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일라가 기운을 불어 넣어줘서 한결 나아졌지만 몸은 여전히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긴장이 풀린 게 좀처럼 회복되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라얀은 다시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는 길이 길게 느껴졌다.
더디게 올라가는데 평소와 같이 빛이 새어들지 않았다. 보통 이쯤 되면 빛이 드는데. 살짝 머리만 내밀자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뿌연 구름이 반짝이는 별을 전부 삼켜 가렸다.
비가 오려는 걸까. 비가 내리는 것은 제게 그다지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평소보다 거친 물살도 역시 그랬다. 라얀은 손쉽게 물살을 헤집어 가르며 성이 보이는 쪽에 자리를 잡았다.
여느 때처럼 성은 밝았다.
그것을 빤히 바라볼 뿐, 동굴에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혹시 또 에리히가 지키고 서 있기라도 할까 봐.
오늘은 아니다. 적어도 아파 보이는 낯으로 마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그럴싸해 보여야 에리히도 흔들려서 제게 마음을 내줄 수 있을 테니까.
멍하니 성만 바라보던 라얀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거리가 꽤 있으니 성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다. 라얀은 귀를 기울이며 음악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정박한 배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물선?”
아니다. 그는 생각을 정정했다. 난파되어 심해 저 아래에 가라앉은 보물선과 비슷했지만 조금은 달랐다. 그것보단 솟아오른 기둥이 더 높고 뾰족했고, 붉은 비단 천이 매달린 채 바람 따라 펄럭펄럭 흔들렸다. 아. 예전에 유리가 말한 적이 있었다. 인간들은 바다에 배를 띄우고 논다고.
몇 년간 종종 나왔으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터라 평소였더라면 호기심에 슬금슬금 다가가 구경했을 텐데 눈길은 한 번 가고 거두어졌다. 흥미를 잃은 시선은 도로 성으로 향했다.
“…….”
돌아가야 하는데. 몸이 마음 따라 움직이지를 않았다.
멀리서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막상 눈 닿는 데 없자 그리웠다. 차라리 아티사에 있을 때가 나았다. 그때는 아예 눈에 보이지 않아 견딜 만했는데, 보이니 원래도 얕았던 인내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라얀은 갈등이 그를 부추기기 전에 고개를 저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결국 라얀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열. 딱 열까지만 세고 돌아갈 셈으로.
하나, 둘, …라얀은 속으로 아주 느릿느릿 숫자를 헤아렸다. 손으로 하나하나 꼽기도 했다. 다섯쯤 세자 손 하나가 곱게 접혔다. 여섯. 이어서 숫자를 짚어내며 손가락을 하나 더 접는데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응?”
고개를 올린 순간 눈에 톡 떨어져 라얀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비?”
올 것 같더라니.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는 금방 거세졌다. 바람이 불었고, 파도가 너울거렸다. 원래 바다는 한 치 앞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변덕스러운 존재였다. 온화하다가도 금방 난폭해졌다. 그러니 저들은 운이 좋지 못했다. 하필 이런 날 바다에 나와 놀았으니까.
음악 소리는 끊기고 금세 비명 소리가 빈자리를 채웠다.
풍랑이 이니 거대한 범선도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늘어져 있던 천은 바람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라얀은 저들의 무사함을 바랄 뿐, 도울 수는 없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그러면…….”
빠진 사람만 몰래 구해줄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관여하지 말아야 했다. 에리히를 구할 때가 드문 경우였다.
무사를 바라던 그의 간절함이 닿았을까. 배는 출렁출렁 흔들리면서도 뭍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게다가 풍랑은 여전히 거센데 흔들림이 한결 잦아들었다,
어떻게 한 거지.
생각해 보면, 에리히도 종종 신기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아무런 힘도 없었더라면 그들이 수백 년 전 인어들을 살해하고 메르를 죽일 수도 없었으리라.
라얀은 눈만 겨우 드러날 정도로 숨어 지켜보다가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했다. 손가락은 여전히 접히지 않았으나 열은 지난 지 오래였다.
<라얀 님.>
돌아가려던 라얀을 붙잡은 것은 레탄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그를 어려워하던 그들은 어느새 라얀을 편히 대하며 종종 먼저 말을 붙여오곤 했다.
<저기 사람이 빠져 있어요.>
“사람?”
<저대로 두면 죽을 거예요.>
바다 한복판이다. 게다가 풍랑조차 이렇게 거세니 인간이 살아남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함부로 구하다가 정체라도 들키면 큰일이다. 옛날에 에리히를 구해주었을 때, 그가 자신을 기억해 좇는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라고 경계하였던가.
<인어님의 그 인간 같은데.>
“뭐?”
어떻게 할지 갈등하던 라얀은 순간 사고를 멈추었다. 제 인간. 에리히와 바닷속에서 어울리고 놀 때 가끔 레탄도 함께했었다.
잘못 본 게 아니냐는 말은 할 필요 없었다. 라얀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그쪽으로 헤엄쳤다. 나른하고 무거웠던 몸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조바심에 다급해졌다.
라얀은 금세 아까 배가 있던 자리에 갔다. 너울 치는 파도만이 있을 뿐, 인간은 없었다.
“…히.”
어디에 있지. 혹시 떠밀려 간 건 아닐까.
“에리히?”
바다는 길이 없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라얀이 탐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라얀은 물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안을 살폈다. 빛에 가려진 바다는 새까맣기만 했다.
“에리히!”
거세게 쏟아붓는 빗방울에 외침이 흩어졌다. 라얀의 눈이 바삐 굴렀다. 손을 쥐락펴락하며 울컥울컥 치솟는 초조함을 다스렸다.
그 애는 태양보다도 빛나는 금발을 지녔다. 어둠 속에 잠겨 있어도 반짝반짝 빛이 날 것이다. 라얀은 숨을 가다듬으며 아까보다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그의 주위를 맴도는 레탄에게 에리히를 찾으면 바로 제게 일러달라는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
그의 간절함에 응한 듯이 반짝이는 게 보였던 것도 같다. 제 간절함이 빚어낸 착각일 수도 있을 테지만 라얀은 날래게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에리히!”
에리히였다. 그는 잠깐씩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물살에 삼켜지기를 반복했다. 라얀은 얼른 그에게 숨을 불어 넣은 뒤 육지로 데려갔다.
그들이 만나는 동굴로 돌아간 라얀은 그를 땅으로 올려보냈다. 인상을 찡그린 에리히는 한참을 쿨럭거리며 삼킨 물을 토해냈다. 라얀은 그것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괜찮아?”
“…짜.”
라얀은 혀를 살짝 내밀어 젖은 입술을 핥았다. 이게 짠가. 역시 인간의 입맛이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케이크나 쿠키처럼 훌륭한 역작이 있다는 것이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
어쨌든,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놀란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며칠 내내 꿈으로만 그리던 에리히를 실제로 보니 좋았다. 동시에 아차 싶은 마음도 들었다. 보고 싶은 건 맞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볼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사한 걸 봤으니 에리히가 아직 정신없어 보이는 틈에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라얀은 눈을 굴리며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어딜 가려고.”
하지만 금세 에리히로 인해 틀어막혔다. 라얀은 아까보다 한결 진정되어 보이는 에리히와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그는 혹시라도 라얀이 도망갈 게 염려되었는지 손목을 붙들었다.
“오는 것도 마음대로, 가는 것도 마음대로지. 너는.”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또렷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생소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몸은 또 왜 이렇게 뜨겁고.”
“네가 찬 거야.”
여전히 열 오른 상태이니 틀린 짐작은 아니지만 에리히의 체온이 평소보다 낮은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만 더 오래 바다에 표류했더라면 그와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선뜩해졌다.
“아니. 네가 뜨거운 거야.”
“…….”
“이마도 뜨거워.”
에리히와 이마가 닿았다. 라얀은 화들짝 놀라서 피하려고 했지만 그가 목덜미를 감싸듯 잡고 있는 통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놔줘.”
“싫어. 너도 네 마음대로 하잖아.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다.”
이 정도면 숫제 억지였다. 낑낑거리면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완력에서 밀렸다. 꼬리로 칠까. …잠깐 극단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갈등하듯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지만 라얀은 결국 몸에 힘을 풀고 그가 하는 대로 두었다.
“에리히한테 냄새나.”
저항을 포기하자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냄새가 났다. 보통 시원한 냄새가 났는데 오늘은 조금 달콤했다. 살짝 화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싫어?”
라얀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든 에리히니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와 이렇게 붙어 있어 혹시라도 심장 뛰는 게 들키진 않을지 그게 염려되었을 뿐이다. 그걸 의식하니 또 불편해졌다.
“놔주면 안 돼?”
“싫어.”
“왜.”
“도망갈 것 같아.”
“안 갈게.”
약속할 수 있는데, 하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흔들자 에리히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이내 미간을 좁혔다. 움푹 패는 계곡을 라얀은 손으로 가만가만 쓸었다.
“…머리 아파.”
에리히는 라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깨질 것 같아.”
머리가 깨지면 큰일 나는데. 라얀은 아까보다 더 세게 그를 밀쳤다. 에리히는 이번엔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자유로워진 틈으로 라얀은 에리히의 이마를 짚었다. 아까와 비슷하다. 조금은 열 오른 제 체온과 다를 게 없었다.
“계속 아파?”
“…….”
“에리히?”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애만 태우던 라얀은 곧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선율을 담은 모호한 목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고요하게 울렸다. 에리히의 미간이 점점 제 모습을 찾았다. 그는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내려 라얀을 바라봤다.
“…라얀?”
왜 꼭 처음 보는 것처럼 부르는지. 라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리히는 혼자 무엇을 생각하는 양 입매를 만지다가 탄식을 흘리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별로 어감이 좋지는 않았다.
에리히의 시선이 라얀에게 기울었다.
“너.”
“응?”
“금방 돌아올 테니까 가지 마. 여기 있어.”
간다고 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 눈으로 말해서 라얀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거려졌다. 그조차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에리히는 제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어?”
“기다리고 있어. 제발.”
애절하기까지 한 부탁을 마지막으로 에리히는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동굴을 벗어났다. 라얀은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 *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더운 여름인데도 젖은 옷이 살갗에 달라붙으니 뼛골로 추위가 스몄다. 간헐적으로 몸이 떨렸다. 게다가 술도 아직 덜 깨서 에르하르트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폐하께서 황자 전하를 그리워하시어…….]
라는 말도 되지 않을 개소리로 시작된 전언은 황제의 방문 소식으로 매듭지으며 끝났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전령을 보내고 이틀 만에 근처 성에 있는 마법진이 구동되었다.
‘황자를 예까지 요양 보낸 보람이 있도다. 건강하게 자랐구나.’
아르헨에 도착한 황제는 에르하르트를 아래위로 훑다가 평했다.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그에게 병약하다는 허울을 덧씌워 궁에서 한 발도 떼지 못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모두 다 폐하의 살핌 덕분입니다. 저는 좋아졌으니 이제는 부디 근심 놓으시길.’
당신이 손아귀에서 놓아준 덕에 꺾인 날개를 펼쳐 도약할 수 있었노라고, 비꼬는 말이었다. 그의 행보를 아느니만큼 속뜻을 짐작했을 황제는 한쪽 입매를 비뚜름히 올렸고, 미묘한 신경전에 올리비아는 잘게 떨리는 손을 감추지 못해서 마리엘을 끌어안았다.
황제의 방문은 아르헨을 요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로지 황자를 보기 위한 비공식적인 방문일 뿐이라 행렬은 성대하지 않았으나, 아르헨의 귀족이나 영지민은 황제가 왔다는 사실 하나에 들떴다. 며칠 전에 열린 여름 축제 때의 열기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곧 네 생일이니 그 즐거움을 모두와 나누고 싶구나.’
그리고 이어진 황제의 말로 카나반 영애의 생일 파티를 준비 중이던 선상은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무대로 탈바꿈되었다.
그렇게 특별히 여기지 않지만, 어쨌든 사람들을 불러모을 구실로 적당하게 계획했던 생일 파티는 황제로 인하여 때아닌 날 성대하게 열리게 되었다. 확실히 총애하는 차비의 아들이라 황제가 생각하는 바가 무척 애틋하다며 떠도는 사교계의 뒷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 많은 건 질색이었다. 황제를 향한 찬양을 듣는 것은 역겨웠고, 거짓된 감정에 속는 모습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성에서 파티가 열렸다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잠시 어디로든 피할 수 있는데 선상은 달리 숨기 적당한 곳이 없었다.
갑판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선실은 눈 맞은 귀족 남녀들의 밀회 장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정열적으로 몸을 얽는 이들을 보며 뒷걸음친 게 몇 번이던가. 게다가 황제는 어찌나 술을 권하던지.
‘폐하. 황자는 아직 어려서 술을 마시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리브. 짐은 황자보다 더 어릴 때 부황에게 주도를 배웠다. 원래 술은 아비에게 배워야 하는 법. 황자.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올리비아가 아직 에르하르트는 성년이 되지 않아 적절치 않다며 만류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술 마시는 게 대수도 아니었고, 설마 올리비아의 앞에서 독을 탄 술을 권하지는 않을 테니 에르하르트는 거듭해 술잔을 비워야 했다. 나중엔 주위를 둘러싼 귀족들까지 그에게 술을 권했다.
어느 순간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쉬어야겠다며 사람과 음악을 뒤로하고 그나마 후미진 곳으로 가서 바닷바람을 쐬었다. 며칠째 정말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라얀을 생각하면서.
거듭해 올라오는 취기로 몽롱한 데다가 가뜩이나 배가 흔들려 난간을 짚고 있었는데.
“에리히!”
누군가 떠미는 힘에 몸이 아래로 거꾸러졌다.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에르하르트가 성에 들어서자 앞서 경비병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올리비아는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한달음에 뛰어와 끌어안았다. 에르하르트가 그새 부쩍 큰 바람에 그녀가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그녀는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어디 다치지 않았는지를 살피기 바빴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머니.”
“어떻게 된 일이야. 네가 보이지 않아서 내가 얼마나,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올리비아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갑작스럽게 날이 궂어지면서 세차진 풍랑을 피해 정박했는데 멀쩡히 있던 아들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으리라.
“황자.”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귀족들은 혼이 쏙 빠져 있었고, 마리엘은 제 유모에게 안긴 채 연신 딸꾹질만 하고 있었고, 레아는 올리비아만큼은 아니 혹은 그보다도 더 창백해진 표정으로 입술만 파르르 떨었다.
“무사해 다행이로구나.”
“천운이 아니겠습니까.”
“날이 궂어 수색하러 나갈 수도 없어 어찌해야 할지 격론을 하던 차다.”
같잖지도 않았다. 저 거짓된 염려가.
“어찌 된 일이냐?”
“난간에 기대어 있었는데 배가 흔들려 떨어졌습니다. 누가 밀었던 것도 같고.”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비아의 푸른 눈도 사정없이 떨렸다. 그녀는 정말로 아들을 잃을 뻔했다는 것을 실감했는지 눈가가 붉어졌다.
“정녕 누가 황자, 너를 밀었다고?”
“그는 확실치 않습니다. 당시에 술기운이 올라 있던 터라.”
“…….”
“어쨌든 연안에 떨어져서. …수영을 배워둔 터라 어찌 헤치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폐하.”
황제는 못내 미심쩍어 보였다.
당연한 말이다. 에르하르트는 연안이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 떨어졌다. 물살이 잔잔했어도 가망 없는데 이런 날이라면 아무리 운이 따라줘도 살아 나오기 요원했다. 그런데도 에르하르트가 물에 쫄딱 젖은 모양새긴 해도 무사히 귀환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우며 유감일지.
“어머니. 제가 환복 전인지라 혹여 몸 상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에르하르트는 적당한 말로 치레하며 올리비아를 밀어냈다.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지 젖은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으나 다시 끌어안지는 않았다.
“올라가 쉬어도 될까요?”
“에리히. 의원에게 보여야지. 너는 괜찮다 하였지만 어디 다쳤을 수도 있고, 많이 놀랐을 텐데. 게다가 누가 민 것 같다고 하지 않았니. 확실히 전후 사정을 따져야만 한다.”
“내일이요.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습니다.”
어차피 범인을 밝힐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런데도 굳이 누군가 밀었다는 말을 덧붙인 것은 황제의 심기를 긁기 위함이었다. 에르하르트가 눈을 내리깔며 힘없이 말하자 그제야 올리비아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일은 꼭 의원에게 보여야 한다. 그리고 떨어지던 당시의 정황을 이야기해 다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황자. 놀랐을 테니 올라가 보라.”
황제도 마지못해 에르하르트가 물러나는 것을 허락했다. 관용에 감사드린다고 대답한 그는 등을 돌렸다. 레아가 뒤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전하.”
2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지났다. 그제야 레아가 그를 불렀다. 목소리에는 잔떨림이 묻어났다.
“나는 괜찮으니 마음 추스르도록 해.”
“정말 잘못되셨으면.”
“하지만 이리 무사하지 않나.”
라얀이 아니었더라면 죽었을 테지만. 생각보다 취해 있었고, 물에 빠진 와중에 마력을 운용할 만큼 마법이 익숙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좌표도 정하지 않은 이동진은, 아직 그의 실력으론 무리였다. 이번에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무사하므로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레아의 염려 어린 한탄을 오래도록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쉬어야겠다. 알아서 할 테니 시종도 필요 없다. 아무도 들이지 마. 설령 어머니라고 해도.”
올리비아는 쉬겠다는 아들 방에 들어설 만큼 막무가내는 아니었지만, 이번은 사안이 사안이었다. 레아는 그리하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간 에르하르트는 서둘러 움직였다. 그는 대충 옷을 말릴까 하다가 황제가 마법사를 대동한 걸 기억해 내며 가볍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조금 조급한 표정을 지은 에르하르트는 그대로 비밀통로로 뛰어들어 가다시피 했다.
라얀에게 신신당부했지만 또 모른다. 애초 열흘 후에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 메모를 남겨두고 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 * *
숨이 턱 끝까지 달릴 정도로 다급하게 길을 헤친 에르하르트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다가 멈췄다. 대충 암석 위에 걸터앉은 라얀의 뒷모습이 보였다. 굽슬굽슬하게 늘어진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곧게 편 하얀 등이,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릴 때마다 언뜻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
에르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 디뎠다. 돌조각이 신발에 밟혀 바스락 소리를 냈다. 라얀은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쳐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동굴은 이토록 어두운데도, 그의 얼굴은 빛에 비친 양 반짝거렸다.
“…에리히.”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라얀이 조용히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에르하르트는 그게 신호인 것처럼 성큼성큼 보폭을 넓혀 그들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좁혔다.
“봐. 나 약속 지켰어.”
라얀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라얀은 모를 것이다. 아까 그는 라얀이 꿈인 줄로만 알았다. 불어넣는 숨도, 제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목소리도, 끌어안기는 촉감도. 전부 죽기 전에 보고 싶은 환상인가 했다.
하지만 정신을 일깨우는 선율이 잠깐 머릿속을 휘감아 지나간 뒤 그가 사실은 실재하며, 또 한 번 자신을 구해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에르하르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황제가 그를 다시 한번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한 분노는 아니었다.
살아남은 것에 대한 안도도, 죽을 뻔한 것에 대한 공포 또한 아니었다.
“에리히?”
그는, 라얀에게 입술을 맞추고 싶었다.
“라얀.”
닿고 싶었다. 닿아 있었는데도 더, 더.
“라얀.”
“응.”
재차 속삭이듯 부르자 라얀은 몸을 배배 꼬면서도 대답했다. 하얀 뺨이 불그스름했다.
“입 맞춰도 돼?”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 그의 뺨을 감싸듯 쥐었다. 평소보다 미지근한 온기가 의아해 인상을 찡그린 것도 잠시 고개를 숙였다. 라얀의 속눈썹이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눈 감아.”
녹빛 눈이 사라졌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턱을 살짝 추켜올리며 입술을 맞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