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라얀은 심각하고도 신중한 눈으로 사방을 구석구석 살폈다. 인간들에게는 어떤 게 값어치가 있을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에리히에게는 그가 같이 다닐 테니 그런 건 조금 몰라도 된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으나 곰곰이 생각하다 마음이 바뀌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에리히가 원하는 것 한두 개 정도는 그가 사 주고 싶어졌다.
문제는 인간들이 무언가를 얻고자 할 때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개념까지는 그간의 배움으로 익혔으나, 그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르쳐 준다고 할 때 들을걸.”
그날은 마음이 부쩍 설레 배움이 싫었고, 그 이후로는 그냥 축제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설레고, 알레는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느라 다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뭘 물어봐요?”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그를 덮쳤다.
라얀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유리가 짓궂게 웃었다.
“유리!”
“오랜만이에요, 라얀.”
라얀은 유리를 답삭 끌어안았다. 숨 막혀 죽겠다고 말하면서도 반가움이 더 커서 그를 밀쳐 내지는 않았다. 1년 전, 반려를 맞이한 유리는 돌고래 일족의 영역에 있었다. 그렇게도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던 유리는 짝을 맺자 전에 없이 충실해지더니 아티사 출입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드물게 방문했다. 하지만 라얀은 그를 존중했다. 이제 와 수호자라는 것은 허울뿐, 오히려 그들의 족쇄일 뿐이었으니까.
다만 궁금하긴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이길래 유리마저 변화시켜 놓는지.
“얼굴이 좋아졌어요.”
“내가 할 말을 하네.”
되받아치자 유리는 끌어안은 채 비비적거렸다. 라얀보다 한참 큰 유리가 힘줘서 끌어안으니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고.”
힘겨워지는 호흡을 깨닫지 못한 유리는 오랜만에 보는 라얀을 꽉 안으며 자신만의 감정에 취했다. 처음엔 반갑다가 슬슬 힘에 부치자 라얀은 결국 유리를 밀쳤다.
“뭐야. 이렇게 매정하게 밀쳐 내는 거예요. 라얀?”
“너무 세게 안아서 그런 거잖아.”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거라 반가워서 그런 건데.”
유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저게 뻔히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라얀은 괜히 유리에게 다가가 손으로 쿡쿡 찔렀다.
“다시 안을래?”
“…….”
“유리.”
계속 눈썹을 아래로 쭉 끌어 내리고 있던 유리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것은 금세 웃음으로 번졌다. 하하. 유리의 웃음소리가 크게 퍼졌다. 오죽했으면 주변을 지나가던 이들이 소리에 이끌려 흘끔거리고 지나갈 정도였다.
“너.”
“그래서 뭘, 누구한테 물어보고 싶은데요?”
화를 낼 것 같으니 말을 돌리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까도 뻔히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장단에 맞춰줬던 라얀은 이번에도 혹했다. 그나마 바깥 세계에 관한 지식이 많고, 호의적이기도 하니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 …인간들이 뭘 가치 있게 여기는지, 너한테 물어볼 걸 그랬다고.”
“흐음.”
얼기설기 변명을 꾸며내자 그것이 티 났는지 유리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라얀을 바라봤다. 하지만 라얀이 바깥 세계의 인간과 벌써 2년째 교류를 하고 있을지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유리는 곧 의심을 풀었다.
“잘은 모르지만 대충은 알죠.”
“뭔데?”
“당장 가까이에도 있지만…….”
라고 하면서 유리는 잠깐 라얀을 흘끔 바라봤다.
“아니지. 저랑 나갔다가 올래요?”
“가까이에 있는 건 뭔데?”
“그건 나중에. 다녀오면 라얀도 깨달을걸요.”
“그런데 나가? 어디로?”
“그건 가보면 알아요. 라얀도 분명 흥미로워할 거예요.”
유리가 이렇게 자신만만할 때는 보통 라얀은 만족했다.
“아. 알레한테 말해야 하는데.”
알레가 영역으로 돌아가서 없다면 모를까. 알레가 있을 땐 어지간하면 알레의 눈에 띌 만한 곳에서 머물러야 했다.
“사고 쳤죠?”
“아니.”
“사고 친 게 없으면 이렇게까지 알레 눈치를 볼 리가 없잖아요. 라얀이.”
그의 지적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라얀은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것을 무척 재미있다는 얼굴로 보던 유리는 손바닥을 폈다. 둥실 떠오르는 물방울이 빛나자 그것을 후 불었다. 보통 멀리 있는 상대에게 말을 전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라얀은 성체가 아니라 쓸 수 없지만.
“자. 가요.”
유리에게 통보 아닌 통보를 받고 짜증 낼 알레의 표정이 어쩐지 그려졌지만 라얀은 가지 않겠단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대신 반쯤 기대를 품은 눈으로 유리를 따라갔다.
유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티사 바깥으로 나갔다.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흥미로운 것이 아티사에 있을 리는 없었다. 하물며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나온 장소였다.
가는 동안 라얀은 그간 유리에게 묻고 싶은 것들을 물었다.
“행복해?”
역시 가장 묻고 싶은 거라면 반려와의 생활에 관한 것이다.
<좋아요.>
유리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아티사의 결계를 벗어나자마자 본신으로 돌아온 터라 돌고래의 모습인데도, 돌고래가 저렇게까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처음엔 별로라고 했잖아.”
일족에서 반려를 정했을 때, 유리는 누구 마음대로 성혼이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제 짝은 제가 정할 거라고.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턴 홀딱 빠져서는 먼저 성혼을 재촉하였다.
<그냥.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부터 스며들어서.>
“누군가를 좋아하면 어떤데?”
<심장이 뛰죠.>
“심장은 원래 뛰는 거잖아.”
<내게 심장이 존재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거야 지금도 느낄 수 있지 않나. 라얀은 헤엄치다 말고 가슴에 손을 올렸다. 쿵쿵. 약동치는 심장이 손바닥 아래 느껴졌다.
<그러니까 라얀이 아직 어린 거예요.>
“아니야.”
<잘 새겨들어요. 나중에 자기감정도 자각하지 못한 채 헤매지 말고.>
어리지 않다고 부정하던 라얀은 가다 말고 멈춰선 그를 심각하게 바라보며 입을 여는 유리에게 집중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까지 끄덕이자 유리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여기 없는 누군가를 생각하듯 살짝 초점이 흐려진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계속 보고 싶은 거예요.>
“…….”
<같이 있는데도 더 붙어 있고 싶고.>
“…….”
<없으면 생각나고.>
“아니야.”
홀린 양 집중해 듣던 라얀은 부정했다.
<뭐가요?>
꿈꾸는 눈빛으로 자신이 겪은 감정을 늘어놓던 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얀을 봤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유리에겐 말할 수 없지만 라얀에게도 분명 그런 존재가 있었다. 보고 싶고, 같이 있는데도 더 오래 있었으면 좋겠고, 없으면 생각나고, 헤어짐이 아쉬운. 하지만 에리히는 친구였다. 한 번도 그런 감정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야.”
라얀이 다시 한번 힘없이 부정하자 유리의 눈빛이 변했다.
<누구? 혹시 아일라?>
“아니라니까. 그런 건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야.”
<모르겠으면 입을 맞춰봐요. 아마 아일라는 라얀이라면 기꺼워할 테니.>
이미 상대방을 아일라라고 단정 지은 유리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웃으면서 짓궂은 말을 던졌다. 아일라가 아니라는 말을 더하기에도 입이 아팠다. 라얀은 그것보다는 좀 전에 들은 말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는 결국 의문을 참지 못했다.
“입을 왜 맞춰?”
<그야 입을 맞출 때 설레면 상대를 좋아하는 거니까.>
“아니. 그러니까… 우리는 꼬리를 얽잖아.”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던 유리의 얼굴은 라얀의 말이 이어질수록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웃음을 참는 듯도 했고, 철모르는 어린것을 보는 듯도 했다. 라얀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얀. 설마 그걸 아직도 믿고 있었어요? 알레나 아일라가, …아, 말할 이들이 아니지.>
되묻다가 또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얀. 유리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자연히 라얀의 귀가 기울여졌다.
<친애의 의미로 쓰이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이와는 입을 맞춰요.>
“…….”
<어린 인어들에게 장난칠 때 할 법한 말을 여태 믿고 있었을 줄이야. 라얀보다 어린 인어들도 이미 다 알고 있을 텐데. 그건 정말 아주 어린 애들이나 속는 거라고요.>
라얀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가 에리히에게 숨을 불어 넣느라 입을 맞춘다고 할 때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알레였다. 알고 있으면서도 여태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속았다는 생각에 억울한 것도 잠시, 유리의 웃겨 죽겠다는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약이 바짝 올랐다.
낄낄거리는 유리에게 웃지 말라며 씩씩거리던 라얀은 진정된 후에야 다시 냉철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유리의 말에 따르면 인어도 인간들처럼 사랑하는 존재에게 입을 맞춘다. 라얀은 에리히에게 숨을 불어 넣기 위해 2년 동안 수십 번 입을 맞췄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조금 설레기는 했지만.
“하여튼 아니야.”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걸 알아요?>
“…됐어.”
<아니, 해보고 말하라니까요.>
“얼른 가기나 해.”
<아일라한테 칭찬 좀 들어보나 했더니.>
라얀은 이 주제로 더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 유리를 손으로 꾹꾹 밀었다. 유리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착실히 다시 길을 잡았다. 유리가 그를 이끄는 곳은 꽤 멀었다. 그렇다고 위로 올라가지 않는 걸 보면 바깥으로 나가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하염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다 왔어요.>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냐고 재촉하자 유리가 다 와간다며 그를 향해 지느러미를 파닥거렸다. 어디 이상한 데 데려가겠나 싶어서 체념하고 그의 뒤를 따르던 라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 봐요.>
라얀의 반응을 살핀 유리는 의기양양해서 으스댔다.
<흥미로울 거랬잖아요.>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아주 큰 배였다.
라얀은 성급히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만져봤다. 단단했다. 이게 떠 있는 것을 아주 멀리서 한 번 정도 본 적 있다. 하지만 바다에 떠 있을 때 이것은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부서져 있지 않았다.
“이게 뭐야?”
<예전에 지나가던 중에 있길래. 보물선이래요. 그래서인지 여태까지 봐왔던 배들이랑 달리 신기한 게 많더라고요. 라얀이 좋아할 것 같아서 언제 말해줘야지 하다가 깜빡해서 그만.>
보물? 라얀은 솔깃해졌다.
<들어가서 보지 그래요?>
유리의 권유에 그제야 라얀은 마지못한 척 배 안으로 들어갔다. 얽히고설킨 줄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이끼가 점령해 있었다. 푸르게 뒤덮인 공간은 뭔가가 무척 많았다. 라얀은 손으로 쓸며 찬찬히 둘러보았다. 두리번거리던 라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이건.”
라얀은 그것을 잡았다. 주르륵 걸리며 미끄러지는 긴 줄 아래로 달랑거리는 보석이 붉었다. 그 외에도 그냥 아티사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그의 궁에 널려 있는 것만 헤아려보려고 해도 손가락이 모자랐다. 보물선이라더니.
“그냥 흔한 거잖아.”
심해에 가라앉은 바깥 세계의 배가 조금쯤은 흥미롭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볼 게 없었다. 아. 인간들이 사용할 법한 물건들이 신기하기는 했다. 제 손바닥만 한 트라이던트 비슷한 게 있었고, 길쭉하게 쭉 뻗은 위로 둥근 게 달린 것도 있었다. 길쭉하게만 생긴 건 만지다가 손가락이 베였다. 살갗이 벌어지며 붉은 피가 몽글몽글 번졌다.
<괜찮아요, 라얀?>
흩어지는 피 냄새에 기민하게 반응한 유리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
“별거 아닌데.”
<별거 아니긴. 상어들이 피 냄새를 얼마나 잘 맡는지 알아요? 떼 지어 덤비면 나 혼자서는 아무래도 버겁단 말이에요.>
그 상어들은 이제 그를 공격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유리가 몰라야 할 진실이었다. 피도 별로 나지 않아서 모를 거라며 얼버무린 라얀은 상처를 꾹 눌렀다. 따끔거렸다. 생긴 건 뭉툭하게 생겨서는 꽤 날카로웠다.
“그보다 여기서 뭐가 인간들에게 가치 있는 건데? 이거야?”
라얀은 조금 전 제가 베였던 것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유리는 짓궂은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자. 봐요.>
“응.”
<여기에 뭐가 많아요?>
“저거.”
라얀은 보석을 가리켰다.
<맞아요.>
“응?”
<인간들은 저런 걸 무척 귀하고 가치 있다고 여겨요.>
“…….”
<당신이 흘리는 눈물도 그렇겠죠. 그러니까 당신이 인간 앞에서 울 리 없겠지만 울지 말아요.>
그는 눈물은커녕 마른 눈가를 가만히 문질렀다.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라얀의 눈에 생기가 어렸다. 제 방에 굴러다니는 것 중 한두 개만 들고 가도 원하는 것을 신나게 살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밝은 표정은 얼마 가지 않았다. 하나가 해결되자 또 다른 난제가 앞에 놓였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무래도 알레가 제일 문제였다.
알레가 있는 이상 나가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어떡하지. 이번 기회를 흘려보내면 또 언제 이런 날이 올지 모르는데. 보름에 축제가 열리는 게 어디 그렇게 흔할까.
조바심이 났다.
그즈음이면 알레는 또 일족에게 다녀올지도 모르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물론 요즈음 그는 이전보다 빈번하게 일족에 다녀오고 있었지만. 이유는 달리 말해주지 않아 알 수 없었다.
<그보다 라얀. 괜찮아요?>
“뭐가?”
골몰하던 라얀에게 유리는 다소 맥락 없는 말을 건넸다. 의문을 표하자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알레가… 음, 아니에요.>
그는 머뭇거리면서 한마디를 꺼냈다가 서둘러 삼켰다. 라얀은 갸웃거리며 천천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전부 파편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단서이기도 했다. 갑자기 괜찮냐고 묻는 유리. 그리고 그것의 주체가 되는 알레. 아. 라얀은 금방 답을 찾아냈다.
오늘의 이 나들이 아닌 나들이도 납득이 갔다. 유리는 제게 바깥의 이야기를 전해주며 종종 환상을 심어주었지만 이런 식으로 아티사의 결계를 벗어나는 일은 잘 만들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만에 오자마자 그의 기분을 환기하려는 듯이 데리고 나오지 않았는가.
“조금만 더 구경하고 가자. 흔하기도 한데, 신기한 것도 많은 것 같아.”
하지만 라얀은 표정을 달리하는 대신 평소와 같이 굴었다. 이건 뭐고, 저건 뭐인지 물어보며 간혹 이건 뭐 같다며 추측했다. 이렇듯 평소와 같으니 그를 살피던 유리의 얼굴에도 비로소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유리와 보물선을 조금 더 탐방하며 그나마 신기해 보이던 것 몇 개만 챙겨 아티사로 돌아가자 이미 알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얀.”
오자마자 라얀을 살핀 알레는 금방 상처가 난 것을 알아채고 손을 낚아채듯이 들었다. 실수였고 별것도 아닌 상처였다. 알레의 과한 반응이 민망해 바르작거리자 놓아준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리를 바라봤다.
“찔리겠어.”
“안전하게 다녀오겠다고 하지 않았나.”
“안전히 다녀왔는데.”
“…….”
“라얀. 그렇죠?”
장단 맞춰달라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등을 쿡쿡 찔렀다.
“응.”
“피 냄새에 상어라도 몰리면 어쩔 뻔했어.”
알레는 라얀의 긍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유리를 질책했다.
“허. 내가 그깟 상어 몇 마리 상대하지 못할까 봐.”
아까는 혼자서는 힘들다고 했으면서.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 꺼낼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입 안으로 삼켰다. 라얀이 둘을 중재하기 위해 양손을 휘저으려는 때였다.
“그래. 너 하나야 빠져나오겠지. 하지만 라얀의 무사는?”
“…….”
“라얀의 안전은. 그것까지 장담할 수 있다고?”
알레의 날 서고 초조한 말은 분명 유리를 향한 것일 텐데 이상하게도 제게 와서 박혔다. 라얀은 손을 도로 내렸다. 그의 행동 변화를 눈치챈 것은 대립각을 세우던 유리였다. 그는 알레를 향해 턱짓했다. 그제야 알레의 시선이 라얀에게로 향했고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어물거렸다.
“나는 메르를 뵈어야 해서 간다.”
유리는 알레의 비난이 꺾인 틈을 타 얼른 도망갔다. 평소였으면 어딜 가느냐며 득달같이 유리를 붙들어 잔소리를 늘어놨을 알레는 여전히 라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들어갈까요. 라얀?”
“응. 가자.”
라얀은 금세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으로 돌아온 라얀은 보물선에서 챙겨온 것들을 잘 보이는 곳에 늘어놓았다. 에리히가 준 수정구는 들키면 이게 어디서 났냐는 말부터, 최악의 경우는 바깥 세계를 드나든다는 게 들킬 수도 있어 숨겨두었지만 이것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라얀의 방에 들어오는 이는 한정되어 있었고, 그들은 전부 그가 바깥 세계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알고 있었으니 수집을 관심의 일환으로 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모으거나 혹은 유리가 가져다주는 등 이미 진열해 둔 게 많았다.
거기에 얹어두고 돌아보자 알레가 그것을 영 마뜩잖은 눈으로 보다가 곧 표정을 수습했다.
“알레. 왜 자꾸 그렇게 내 눈치를 봐?”
“그야.”
“…….”
“아니에요. 어때요. 가보니 신기했어요?”
알레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라얀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알레. 인간들은 저런 걸 무척 귀하게 여긴대. 나중에 인간 세계에 갔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내 눈물을 갖다 팔아도 되겠다. 그치?”
“어차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꿈도 꾸지 말아요. 혹시 그 인간한테 말한 건 아니죠?”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호한 어조였다.
“얼른 대답해요.”
“에리히에겐 아무 말도 안 했어.”
라얀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이내 보물선에서 보았던 것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했다. 날카로운 것을 보여주며 이것 때문에 손이 베였다고 말했을 때는 왜 그런 걸 가져왔냐며 질색을 했다. 알레는 그가 가져온 것에 썩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제법 성의있게 반응을 해주었다. 그다웠다.
“이게 뭔지 나중에 에리히에게 물어볼 거야.”
“아.”
순간 알레의 얼굴에 걱정과 염려의 기색이 어렸다.
“라얀. 당분간 바깥나들이는 힘들 것 같은데.”
“…….”
“다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노력은 하겠지만 그래도 수일은 소요될 거예요.”
라얀이 바깥에 나가는 것도, 에리히를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난 2년 그의 즐거움이 에리히를 만나 보내는 시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알레는 조금 주저하듯이 말했다.
딱 보름과 겹치는 잠깐의 작별이, 평소였다면 즐거웠을 것이다. 에리히와 함께 축제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기뻐 씰룩거리려는 입꼬리를 잡아 누르기 위해서 애를 써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얀은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 올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아니야. 천천히 와.”
“라얀?”
유리는 문장을 완성하지 않았지만 라얀은 그의 말속에 숨은 것을 금세 헤아릴 수 있었다.
“오지 않아도 괜찮아.”
범고래 일족은 그들의 후계자가 반쪽짜리 인어의 수호자인 게 싫은 것이다. 벌써 수년이었다. 그의 또래 중 성체가 된 인어들은 전부 두 번째 성장까지 마치고 고유 능력에 따라 각자 소임을 다했다. 하물며 더 어린 인어들도 성체가 되었는데 라얀만이 정체된 채로 고여 있었다.
그러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라얀.”
“너도 유리처럼 성혼을 해야 할 거고, 언제까지 계속 같이 있을 수도 없잖아.”
수호자는 본래 영원한 동맹과 맹약의 의미에 불과했다. 성체가 되기 전이야 어떤 힘도 없으니 혹시 모를 위험에서 보호해야 하지만, 대개 시 메르가 성장을 마치면 일족의 영역으로 돌아가서 필요할 때만 들렀다. 그러니까 알레는 본래대로라면 진작 돌아가서 성혼하고 후계자로서 계승을 준비해야 했다.
좀 더 일찍 놔줬어야 했다.
알레가 일족에게 압박을 받게 할 게 아니라, 그가 먼저 놓아주었어야만 했다. 그런데 빈번해진 귀환을 의아해할 뿐,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이번에는 기필코 뜻을 꺾고 올 거예요.”
“그러지 마. 알레.”
전에 없이 단호한 투에 알레의 얼굴이 형편없는 모양새로 일그러졌다.
“정말로 그러지 마.”
“…….”
알레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홱 돌아나갔다. 그는 드물게도 화를 냈고 라얀 역시 평소와 달리 그런 그를 쫓아가지 않았다.
나간 자리에 라얀의 시선이 머무르다가 옆으로 비켜 갔다. 그는 구석에 숨겨두었던 수정구를 꺼내 손에 꼭 움켜쥐었다. 희미한 자국처럼 머물렀던 웃음은 어느새 흔적 없이 증발해 있었다.
* * *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라얀은 어떠한 방해나 소요 없이 뭍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여전히 꼬리가 갈라지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에리히가 알게 되는 게 싫어 조금 이르게 물 위로 올라온 라얀은 아샤에게 미리 받아둔 묘약을 마셨다. 한참 끙끙거리다 고통이 잦아들면 땅을 디디며 일어나 비척비척 걸었다. 발바닥에 닿는 낯선 감각을 느끼며 옷을 입고 있으면 에리히가 오곤 했다.
“아직도 입는 게 영 어설픈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라얀은 옷을 여미며 고개를 돌렸다가 뒤로 물러났다.
“…어.”
“낯선가?”
“에리히?”
머리를 새까맣게 물들인 에리히가 괜히 어색한지 머리끝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라얀은 물러난 걸음 수만큼 에리히에게 다가갔다. 그가 비틀거리자 막 지상에 올라오고 잠깐은 걷는 게 서투르다는 사실을 아는 에리히는 부러 보폭을 넓혀 사이를 좁혔다.
무사히 에리히 앞까지 닿은 라얀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휘감겼다.
“머리가 까매졌어.”
“아무래도 금발은 눈에 띄거든.”
“왜?”
“네 표현에 따르면 태양 같아서.”
“아.”
라얀은 이내 받아들였다. 라얀조차 에리히를 처음 봤을 때 그의 머리칼을 보고 태양이 추락하는 것 같아 시선을 빼앗겼었는데 인간은 오죽할까.
하지만 낯설기는 했다.
머리 색이 까매진 탓인지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졌고, 피부는 부쩍 희어 보였다. 그리고 원래도 그렇게 마냥 착해 보이지는 않던 인상이 더욱 서늘해 보였다.
“장난삼아 한 말인데 그렇게 쉽게 납득하지 마.”
“하지만 정말인걸. 엘의 머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태양 같아.”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건지, 내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를 좋아하는 건데.”
에리히는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아. 저건 조금 부끄럽거나 민망하면 나오는 무의식적인 버릇이었다. 별로 쑥스러울 말도 아닌데 쑥스러워하는 걸 보면 에리히가 맞았다. 낯설었던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품처럼 녹아버렸다.
“그것보다 다행히 오늘의 외출을 방해할 수호자는 없었나 보지.”
“아. …응. 없었어.”
“라얀?”
“얼른 축제 구경하고 싶어. 시간 별로 없잖아. 얼른 가자, 에리히.”
라얀은 그에게 반문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꾹꾹 밀며 얼른 가자고 재촉하자 에리히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떠밀렸다. 라얀은 그를 밀면서 한편으로는 얼른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에르하르트는 못내 미심쩍은 눈으로 라얀을 흘끔흘끔 내려다봤다.
“…….”
축제는, 순전히 그의 입장에서 평해보자면 최악까지는 아니어도 그와 비슷했다. 사방팔방을 화려하게 밝히는 풍등이나 길거리에 늘어진 노점, 그리 이른 시각이 아님에도 북적거리는 거리, 나이를 불문한 무수한 소음까지. 어디 하나 그의 취향에 부합하는 데가 없었다.
애초 에르하르트는 적막이 감도는 고요한 공간을 선호했으며,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요즘엔 어쩔 수 없이 여러 사람과 만나지만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어서였을 뿐이지, 피로가 누적되는 것만큼은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온전히 라얀 때문이었기에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세심히 살폈다. 처음에는 축제 때 사고 싶은 걸 사려고 뭘 가져왔다며 웬 보석들을 내밀면서 부산스럽게 굴기에 곧장 인지하지 못했고, 다음으로는 복작거리는 인파에 시달리느라 잘 몰랐다.
하지만 치솟는 짜증을 누르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부러 라얀에게만 집중하고 있으려니, 그가 생각보다 들뜬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 이제 에리히가 화나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아! 막, 이런 표정을 지어!’
라얀은 흉내를 내면서, 이제 제 감정의 흐름을 알 수 있다며 의기양양했지만 그것은 에르하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얀이 그를 파악한 만큼, 에르하르트 역시 라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대체로 라얀은 겉과 속이 같아 파악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그보다 조금 더 사소한 버릇이나 행동을 보며 그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았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축제에 대한 설렘과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염려로 뒤범벅되어 있었으면서. 혹시 축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인 걸까. 그럴 수도 있었다. 원래 기대가 크면 그에 미치지 못해 실망하는 일이 많지 않던가.
“재미없어?”
돌아가는 게 나은가 싶어서 넌지시 묻자 라얀은 그제야 생각에서 깬 듯 그를 올려다봤다.
“아니. 재미있어. 좋아. 신기한 것도 많이 팔고.”
고개를 가로저은 라얀은 아까 산 솜 인형을 꾹꾹 누르며 답했다.
어린애들이나 관심 가질 법한 것을 들고 다니는 데도 크게 위화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파이어를 겁도 없이 턱턱 내밀었고?”
에르하르트는 아까 저걸 샀을 때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흥미로운 눈으로 보기에 챙겨온 금화 꾸러미를 살필 때였다. 물에 빠지면 젖어 흐물거릴 테지만, 만류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별안간 라얀이 제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해맑게 웃는 게 아닌가. 사파이어였다.
대강 넘겨봐도 손바닥만 한 사파이어를 내미니 상인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에르하르트도 같이 얼이 빠졌다가 철없는 귀족 도련님을 보는 듯한 눈빛에서야 값을 치르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내가 없었으면 물정 모르는 도련님 취급받다가 큰일 당할 수도 있었어.”
반박하려던 라얀은 딱 자르는 말에 콧김을 작게 뿜으며 고개를 홱 돌렸다.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개진하지 못하고 꼬리를 마는 모습이 꼴사나워 보여야 마땅한데 이상하게 귀여웠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겨우 완만하게 다듬은 에르하르트는 그를 다시 살폈다.
조금 나아진 것 같지만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게 적어도 축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는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차근차근 행적을 복기했다.
“저거 보러 가자.”
라얀은 쾌활하게 말했으나 에르하르트는 계속 모르는 척할 생각이 없었다.
“이리 와.”
에르하르트는 라얀을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라얀은 저걸 보고 싶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히 따라왔다. 부러 힘은 주지 않아서 고집을 부리면 일단은 따라줄 생각이었는데 말만 그렇게 했지, 크게 관심은 없었던 게 분명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그나마 사람이 드문 곳을 찾았다.
2년 만에 외국 상단도 찾은 축제이다 보니 어딘들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화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화려하게 밝힌 등과 광장 쪽에서 들려오는 음유시인의 희미한 노랫소리, 눅눅한 여름 공기 속에서 에르하르트를 라얀을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라얀. 말해봐.”
“뭐를?”
“무슨 일인지.”
밝았던 라얀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히고 점차 표정이 허물어졌다.
“아무 일도 없는데…….”
“…….”
“자기도 다 말 안 하면서.”
라얀은 난처한 마음이 앞서 나가 뾰족하게 모난 말을 했다. 에리히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에리히도 말하지 않는 거 많잖아.”
이때다 싶어 라얀은 한마디 했다. 그는 무엇이든 숨겼다. 언제나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뭔가 말을 삼키는 게 보였다. 게다가 요즘 부쩍 바빠졌으면서 그 까닭을 이야기해 주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제게만 말하라고 하다니 억울했다. 자신 역시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있을 수도 있는 건데.
“내가 말하면 너도 말할 거야?”
뜻밖의 말이었다. 라얀은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니라 안 하려고 했는데. 뭐. 좋아.”
그것을 제멋대로 긍정이라고 여긴 에리히가 한 번 길게 호흡을 뱉었다가 들이마셨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나는 원래 살던 곳에서 여기로 쫓겨났어.”
“쫓겨나?”
“응. 황, …아버지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정확히는 얼굴조차 보는 걸 꺼릴 정도로 싫어해. 어쩌면 내 죽음을 바랄 정도로.”
에리히는 감정이 결여된 사람처럼 시종 무덤덤했다. 그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하지만 제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게 당연한 일이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흠이라 해도 메르는 그를 아티사 바깥으로 내쫓지는 않았다. 스스로 보호할 수 없으니까. 죽음까지 바라진 않으므로.
라얀은 미간을 좁혔다.
그를 만나게 된 경위가 떠올랐다. 스스로 뛰어들었던, 삶이 의미 없고 재미없다던 연약한 소년의 모습 역시도. 마음 아팠다.
“주름 생긴다.”
에리히는 움푹 팬 자리를 손으로 살살 쓸었다.
“지금 그게…….”
“어쨌든, 그래서 라얀.”
미간을 살살 쓸어 주름을 펴던 에리히의 목소리가 일순 낮아졌다. 요즘 부쩍 낮고 굵어진 목소리는 더욱 낮아져 심해의 동굴을 연상케 했다. 의식해 본 적 없는데 괜히 귀가 간지러워서 움츠러들었지만 에리히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낮추었다.
“나는 아버지의 자리를 탐하려 해.”
“…….”
“그래서 의도치 않게 바빠진 거고.”
이제 대답이 됐냐며, 에리히는 아무렇지 않게 라얀의 뺨을 꼬집듯 매만지곤 숙인 몸을 곧게 세웠다. 라얀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괜찮아?”
에리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뭐든.”
그게 뭐든. 에리히는 작고 어린 인간이었다. 그가 견뎌내기에 적절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에리히는 그것을 견뎌냈고 아직도 견디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견딜 일이 아닌데도.
에리히는 라얀의 말을 곱씹듯 몇 번 되뇌더니 피식 웃었다.
“나쁠 건 없지. 아니. 좋아.”
그는 길지 않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평소의 금빛 머리가 아닌 새까만 머리는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에서 헤쳐졌다. 손을 내린 그의 시선은 다시 라얀에게로 향했다. 그는 라얀의 손을 가볍게 올려 손등에 제 입술을 붙였다. 뜨거웠다.
“쫓겨난 바람에 이토록 신비로운 존재와 만날 수 있게 됐잖아.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별안간 그의 온기를 의식한 라얀은 화들짝 손을 빼서 등 뒤로 숨기려 했다. 하지만 에리히에게 붙잡히는 게 더 빨랐다. 달빛에 반사되는 파란 눈이 오늘따라 유독 짙고 새파랗게 보였다. 빼려고 손을 비틀어도 에리히는 놓지 않았다.
“자.”
“응?”
“나도 다 말했는데, 너도 말해야 공평하지.”
말할 때까지 놓지 않겠다는 듯이 잡은 손은 부쩍 단단했다.
라얀은 잡힌 손을 보면서 머릿속에 뱅뱅 도는 생각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해야 했다.
인간들의 축제는 신기했다. 세이렌의 노래만큼 아름답지는 않아도 어디선가 끊이지 않는 선율 소리가 들려왔고, 자주 볼 수 없는 다른 인간들이 오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거기다가 볼거리는 얼마나 많은지 라얀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을 사기 위해 아티사에서 챙겨온 보석을 내밀었다가 에리히에게서 웬 동글동글하게 생긴 금화를 받기도 했다. 깨물어봤다가 그의 한숨 소리를 듣기도 했고.
나름대로 라얀은 그토록 고대하던 축제를 즐겼다. 하지만 한편으로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알레는, 어제 결국 그들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돌아올 거예요. 조금 걸리더라도 반드시. …그러니까 오지 말라곤 하지 말아요.’
라얀은 알레가 마음 잡을 수 있도록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런 그를 기어이 붙들어 세운 알레는 마치 맹세하듯 속삭였다. 돌아올 거라고. 당신이 성체가 되기 전까지는 내가 수호자라고. 그것은 태초의 서약이라며.
‘괜히 말썽 피우지 말고. 혼자 겁도 없이 바깥 세계에 나가지 말고. …아예 나가지 말라곤 안 해요. 들을 것도 아니고. 다만 조심해서, 신중히, 지금보다 더 자주 나가지 말라는 뜻이에요. 인간은 적당히만 믿고. 알았어요?’
떠나면서도 영 못 미더워 길게 당부하는 말은 간절하기까지 했다.
인어와 수호자의 관계가 이토록 애틋한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당장 메르만 해도 그녀가 시 메르일 적 수호자는 현재 범고래족의 수장이지만 둘은 이 정도로 관계가 돈독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우호적이긴 했으나 대체로 건조했고, 오로지 필요에 의해서만 교류했다.
라얀은 알레가 좋았지만, 알레가 제게 이토록 애틋함을 느끼는 게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만약 라얀이 몇 년 전 그날 어떤 문제 없이 성체가 되었더라면 이토록 알레가 제 걱정을 하며, 일족의 뜻에 반할 일은 없었을 테니.
“…알레가 일족으로 돌아갔어.”
“원래도 가지 않았나?”
그간 알레가 영역을 오가느라 함께 오지 못한 것도 잘 알고 있는 에리히는 라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곧 깨달은 듯 아, 하고 탄식을 토해냈다.
“영원히 돌아갔다고?”
알레의 말에 따르면 영원히, 는 아닐 것이다. 고개를 젓자 에리히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지금까지처럼 돌아온다는 거잖아.”
“달라.”
“…….”
“아주 오래 걸릴 테니까.”
영원히는 아니어도, 라얀은 몇 년은 각오했다. 알레는 일족의 수장이나 장로들을 전부 설득할 셈으로 떠난 것이고, 라얀 역시 그러지 않는 이상 돌아오지 말라는 뜻을 간접적으로나마 내비쳤다. 알레는 그들을 완전히 설득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네 수호자라며. 수호자가 그렇게 오랜 시간 소임을 팽개칠 수 있어?”
그건 태업이라며 중얼거리는 에리히를 보면서 라얀은 슬며시 웃었다. 이쪽의 생태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니까. 한편으로 라얀은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진작 돌아가서 제 영역을 돌봐야 했는걸.”
하지만 이내 털어놓는 쪽으로 결정했다. 에리히도 전부 털어놓았으니 라얀 역시 전부 말하는 게 이치에 맞았다. 제 말이 이어질수록 그는 점점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수호자인데 왜 진작 돌아가 영역을 돌보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수호자는 인어가 성체가 되면 그 소임을 다하고 돌아가.”
“그런데?”
너는 아직 성체가 아니지 않냐고, 그의 짤막한 질문엔 그 말이 담겨 있었다. 라얀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자신이 하자라는 말을 꺼낸 것은 2년 전 아샤의 앞에서가 처음이었다. 아샤는 그가 흠이라는 것에 대단히 흥미로워하며 웃었다. 죽이려던 것마저 보류할 만큼. 그때는 살아남았다는 것에 안도하였으나 오래 곱씹어보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상처였다.
그러므로 에리히의 반응도 두려웠다.
동정이나 연민은 싫었고, 실망은 더욱 싫었다. 한심하게 보는 것 역시… 조금은 아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라얀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거듭하며 주저했다.
에리히는 재촉하는 대신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려주었다. 한 점의 풍랑 없는 푸른 눈을 보고 있으니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었다.
“내가 모자라서 그래. …흠이라서.”
라얀은 한 줌 용기와 결심을 한데 그러모아 뭉쳐서 툭 던졌다.
“그래서 성체가 되지 못했어. 나랑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일라는 벌써 수호 인어가 되고, 늦게 태어난 인어들도 모두 하나, 둘 성장을 하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멈춰 있어서.”
망설이는 시간은 길었지만 막상 전부 말하고 나니 후련했다. 라얀은 속에 고인 말을 모두 퍼내고 난 뒤 옅게 고인 숨을 흘렸다.
“라얀.”
에리히가 그를 불렀다.
“왜 나를 안 보지?”
“응?”
그제야 라얀은 제 눈길이 아래로 고꾸라진 것을 깨달았다.
“날 봐.”
“…….”
“어서.”
라얀은 고개를 들었다. 에리히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비웃지도 않았고, 한심해하지도 않았으며,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의 에리히였다. 아니, 평소보다는 약간의 의문을 담고 있기야 했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그야.”
“너는 모자라지 않아. 그냥 남들보다 조금 느린 것뿐인데 그게 대단한 흠이 되나?”
“아니. 인어는 성장을 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고, 나는…….”
“때로는 예외도 있는 법이야. 어쩌면 남보다 위대해지기 위해 늦는 걸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니 할 수 있는 소리임에도 라얀은 우습게도 그의 말에 보듬어졌다.
“그리고 아무려면 어떻지?”
“…….”
“라얀. 너는 너잖아.”
그의 잔잔한 말은 풍랑으로 뒤엉키던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항상 기억해. 라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 에리히가 라얀을 끌어당겨 안았다. 에리히의 품에 안긴 라얀은 턱만 그의 어깨에 간신히 걸친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의 문장을 들어야 했다.
“너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내게 완벽하다는걸. 그러니 네 가치를 함부로 낮추지 마.”
아니. 다시 마음이 풍랑으로 흔들렸다. 그러니까, 심장이 뛰었다.
심장은 원래 뛰는 건데. 이토록 맹렬히 맥박치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상어에게 쫓겨 숨었던 때조차도 이렇게까지 선명한 심장의 맥동을 느끼지 못했다.
‘심장이 뛰죠. 내게 심장이 존재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뜻이에요.’
왜 하필 이때 유리의 말이 떠오르는 걸까.
라얀은 혹시라도 제 심장 소리가 그에게 느껴질까 봐 신경이 쓰이는 한편 제 감정을 의식했다.
‘모르겠으면 입을 맞춰봐요.’
그동안은 정말로 입을 맞춰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의 비유에 따르자면 설렘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그런 느낌이 들면 어쩌지. 그런 느낌이 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
라얀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생기가 도는 붉은 입술을 멍하니 바라봤다.
“라얀, …라얀?”
에르하르트는 부쩍 잠잠한 라얀을 유심히 관찰했다. 목 뒤가 화끈거릴 정도로 낯 뜨거운 말을 지껄였으나 거짓은 없었다.
게다가 성장이 조금 느린 게 어떻다고? 자신은 인간이고, 인어에 관한 모든 정보는 소실된 지 오래이니 그들의 생과 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라얀이 기가 죽어 있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그 자체만으로도 제게 지극히도 충분해 넘치는 존재였으므로.
“라.”
아직도 기분이 가라앉았다면 달래줄 요량으로 라얀의 이름을 부를 때였다. 가만히 안겨 있던 라얀이 돌연 그를 밀쳤다. 밀쳐도 밀리지 않을 수야 있었으나 에리히는 순순히 거리를 넓혀주었다.
“라얀?”
“어, 나 갑자기 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이 시간에?”
시선을 한데 두지 못하는 라얀은 그만큼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게다가 이 시간에 일이 생긴 것도 말도 안 됐다. 아주 길지는 않지만 조금 더 구경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은 남아 있었다.
“응.”
그런데도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인형은 한 손에 꼭 쥔 채로. 왜인지 뺨이 발그스레해 보였다.
“무슨 일이기에.”
“그게, 그건…….”
거짓말에는 별로 소질이랄 게 없는 라얀은 그럴싸한 말조차 꾸며내지 못했다. 뻔히 도망가려는 게 보이니 더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비밀을 만들지 말라고 할 셈이었다.
“전, 아니, 에, …공, 자님?”
에르하르트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돌리는 한편, 본능적으로 라얀을 제 뒤로 밀며 가렸다.
“카나반?”
“혹시나 하였는데, 축제에 오신 겁니까? 그분은…….”
닐스 카나반은 말끝을 흐렸다. 흘끔거리며 살피는 눈은 에르하르트의 뒤쪽으로 향했다.
“그대가 신경 쓸 것 없는 일이다. 카나반.”
그의 관심을 냉정하게 자르자 닐스 카나반은 별 반응 없이 수긍하는데 정작 제 손에 잡힌 채 뒤로 물러나 있는 라얀이 놀라 몸을 떨었다.
“기왕 축제를 나오셨다면 명소를 가보셔야지요. 나오실 줄 알았다면 제가 진작 일러드리는 건데.”
“그 또한 필요 없으니 가던 길이나 마저 가라.”
냉랭하기는 해도 어지간하면 청하는 모든 것에 응낙하는 에르하르트가 내치자 닐스는 조금 주저하다가 가볍게 작별의 예를 갖춘 뒤 물러났다. 그제야 에르하르트는 라얀의 손을 놓고 돌아보았다. 그의 귀 끝은 여전히 불그스름했다.
“놀랐어?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아니. …그런데 그,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친해? 친구야?”
“친구는. 그냥 귀찮은 자다.”
에르하르트는 라얀이 닐스 카나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혹시 호의라도 품으면 어떡하나. 생각만으로도 불쾌해서 에르하르트는 단호하게 쳐냈다. 그런 뒤에 목에 걸려 있던 회중시계를 들었다. 시간을 확인한 그는 못마땅한 마음을 혀를 차며 표현했다.
“곧 돌아가야 할 시간이네.”
원래도 그다지 남아 있지 않던 시간이 닐스와의 소요로 날아갔다. 이제는 정말로 라얀을 보내야 할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보고 가자.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 응?”
“…응.”
그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대한 답은 나중으로 미루며 살살 달래자 라얀은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하르트는 그를 향해 웃었고, 라얀은 그를 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 * *
라얀은 아티사 광장의 큰 조개 한가운데에 엎드리듯 누워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사방에서 노랫소리가 들렸지만 전부 귀에 닿기도 전에 부서졌다. 그러다가 언제 가만히 널브러져 있었냐는 듯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미 오늘 내내 수십 번은 반복한 과정에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엉클어져 있었지만, 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그런 것은 애초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지금 라얀의 머릿속은 온통 에리히로 가득 차 있었다.
라얀은 그날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었다. 그와 마지막에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도 희미했다. 심장이 뛰는 걸 자각하고, 유리의 말이 떠오른 순간부터 경황이 없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야.”
라얀은 이미 수일째 반복하는 말을 다짐하듯 뱉었으나 목소리에는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에리히를 사랑한다고?
그럴 리 없다. 에리히는 친구였다. 아일라나 알레, 유리처럼 그가 곁을 내어주고 가까이하는 친구. 종종 짓궂게 장난을 칠 때도 있지만 함께 있는 게 좋고, 헤어짐은 아쉬운 그런 친구였다.
심장이 뛴 것은, 그러니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래 심장은 뛰는 것이고 꽉 안기는 바람에 가슴이 압박된 게 분명했다. 어쩌면 에리히의 심장 소리일 수도 있었다. 라얀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를 떠올릴 때마다 동요하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에리히. …화내겠다.”
머리를 헝클이다가, 입술을 물어뜯다가 꼬리로 바닥을 탕탕 내려치다가 지친 라얀은 널브러져서 중얼거렸다.
축제 이후로 라얀은 그를 보러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만나기로 약속한 날 전날에 올라가서 못 온다고 적어두고 돌아오기를 두어 번 정도 반복했다. 한 번이야 사정이 있는 것이지만, 두 번은 의도적이라 볼 수 있으니 에리히 또한 그가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손가락 걸고 약속도 했는데.”
라얀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며 바닥에 뺨을 대고 문질렀다. 하지만 에리히를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 정확히 무엇이 무서운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았다. 모순적이지만 이만큼 그의 심정을 정의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엉망으로 헝클어진 낱말들이 정제되어 하나의 문장이 되지 않을까.
“아.”
물론 말하기엔 적합한 존재가 아니긴 했으나 알레는 없고, 유리와 아일라는 당연히 안 되고. 하나씩 쳐내다 보니 남는 이는 아샤뿐이었다. 아샤를 떠올린 라얀은 몸을 일으켰다. 눈이 반짝거렸다.
아샤라면 제게 답을 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 감정을 정확히 읽어줄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을 더 오래 산 존재이며, 현명하니까. 그리고 마침 아샤에게 갈 무렵이 되기도 했다. 원래 진작 가야 했으나 알레의 일이 있고 난 이후 울적해져서 제 궁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었다.
결심하자 행동은 빨랐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라얀은 흑해에 갈 때 이용하는 곳으로 향했다. 아티사를 벗어날 때의 감각은 언제나 이상했다. 온몸을 따스하게 보듬어 안아주는 온기가 순식간에 살갗에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맨살을 문지르며 라얀은 익숙하게 길을 잡았다.
흑해의 경계를 넘어서자 푸르러진 물은 더욱 차갑게 피부를 감싸 안았다. 근처를 유영하던 어떤 상어의 길게 찢어진 노란 동공이 라얀에게 향했다. 그것은 아가리를 벌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다가 다분히 악의를 담아 라얀을 툭 치고 지나쳤다. 확 밀쳐진 라얀은 몸을 경직시킨 채 떨다가 떠밀린 아픔을 자각할 새도 없이 얼른 도망치듯 움직였다.
매번 가던 곳으로 갔는데 정작 주인은 평소와 같이 그곳에 있지 않았다.
어디 갔나. 라얀은 두리번거리며 살피다 자주 앉는 의자에 앉아서 몸을 기울여 엎드렸다. 멍하니 있으니 또 에리히 생각이 났다.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라얀은 그날을 다시 떠올렸다. 며칠 동안 내내 떠올렸더니 굳이 곰곰이 집중하지 않아도 아주 선명한 형태로 그날이 그려졌다.
‘아무려면 어때. 너는 너잖아.’
라얀은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너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내게 완벽하다는걸.’
그의 수호자들과 아일라는 라얀을 여전히 아끼고 소중히 여겼지만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흠으로 잡지도 않았으나 얼른 언제든 성장해야만 하는, 지금 당장은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여겼지, 불완전한 형태 역시 괜찮다는 말은 한 적 없었다.
보물선에서의 일 때문에 알게 모르게 주눅 들어 있던 라얀에게 에리히가 건네는 말은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라얀이 내내 듣고 싶었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주었으니.
“아.”
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라얀은 손으로 왼쪽 가슴을 꾹 누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도저히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이 감정은 그를 덜컥덜컥 무섭게 만들었다.
“라얀.”
제 심장의 박동에 정신 팔려 있는데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샤가 보였다.
“아샤. 어디 다쳤어요?”
옅은 피 냄새가 났던 것 같은데. 라얀은 그를 살폈다. 하지만 달리 상처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흑해에만 있는데 다칠 리가 없잖니.”
그런가. 라얀의 머릿속엔 흑해에 사는 괴수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애써 털어냈다. 아샤는 그들을 형제라 불렀고, 실제로 그들 또한 아샤와 그의 보호를 받는 라얀에게 해도 끼치지 않았으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세요.”
다친 곳도 없는 데다가, 희미한 피 냄새도 마치 그의 착각이었다는 양 금방 흩어져 라얀은 한 마디만 더 참견했다. 아샤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보다 오랜만이구나.”
“네.”
“인간들의 축제를 보러 갈 수도 있다며 신이 난 이후로 한참을 못 봤는데, 왜. 혹 수호자의 방해로 보러 가지 못하기라도 했나.”
“아니에요. 잘 다녀왔어요.”
“그렇다면 우리 어린 인어의 얼굴엔 왜 이렇게 근심이 서렸지.”
아샤의 서늘한 손이 이마를 짚었다가 곧 멀어졌다.
“그건…….”
분명 제 감정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려고 온 건데 막상 말하려니 선뜻 잘 나오지 않았다.
“내게 속내를 읽을 능력까진 없는데.”
“아샤는, 혹시 사랑해 본 적 있어요?”
“사랑?”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아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되물었다.
“왜.”
“…….”
“그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니?”
아샤는 유리처럼 상대를 아일라로 착각하지도, 혹은 그 상대가 누구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는 제 감정이 에리히에게 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라얀은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유리가 이상한 말을 해서 그래요. 심장이야 원래 뛰는 거잖아요.”
조금, 두근거릴 수도 있는 거고. …라얀은 혼자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축제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심장이 뛰었는지, 에리히가 제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래서 느낀 감정까지. 아티사에 있는 동안에는 속으로만 곱씹으며 삭였던 것이 문장으로 풀어 헤쳐지자 그 감정들에 하나하나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아샤?”
꿈결을 헤매듯 중얼거리던 라얀은 아샤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곤 그를 봤다. 아샤의 입꼬리는 살짝 틀어 올려져 있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한편으로는 무표정을 숨기는 것 같기도 했고, 달리 보면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인어가, 인간을.”
“그.”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흥미로울 뿐이지. 알고 있니?”
“무엇을요?”
“우리 어린 인어께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를 즐겁게 만들어준다는 걸.”
아샤의 서늘한 손이 뺨을 문질렀다.
“이리 재미있는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권태를 떨치기 위해 굳이 나갔다 오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아샤. 제가 오래 오지 않아서 심심했어요?”
“상냥하기도 하지. 혼잣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렴.”
그는 곧 뺨에서 손을 뗐다.
“확인해 보지 그러니.”
“어떻게요?”
“글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우리 어린 인어께서 더 잘 알지 않을까.”
알 리가 있겠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게 있어 못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맞춰봐요, 라얀. 라얀은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입을 맞춰보라며 부추기던 유리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아샤. 그런데요.”
“그런데?”
아샤는 나른한 어조로 말끝을 길게 늘이며 라얀의 말에 반응했다.
“만약, 확인해 봤는데 진짜로 좋아하는 거면, 그때는 어떡해요?”
온갖 게 걱정이었다. 이미 인간과 교류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티사의 금기를 어긴 것이지만 사랑에 빠진 것은 또 달랐다. 메르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라얀을 벌할 것이다.
그것은 상관없었다. 당장 라얀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에리히의 감정과 반응이었다.
만약 에리히가 자신을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런 마음으로는 앞으로 볼 수 없겠다고 하면.
라얀은 에리히를 떠올렸다. 그는 귀찮게 굴면 싫어하는 것 같았다. 축제 날 밤은 제 심장의 박동과 감정의 향방으로 경황이 없어서 잘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에리히가 그를 알아보며 알은척하던 인간에게 퍽 냉정하게 굴었던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제게도 그런다면 라얀은 아주 오랜 날을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확인하지 않을 거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속에 묻어두고 삼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성미에 맞지도 않았고, 제 성격에 숨기고선 에리히를 평소처럼 대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설령 숨긴다 해도 에리히는 금방 이상함을 알아챌 것이다. 그날처럼.
잠깐 생각하던 라얀은 고개를 저었다. 그에 웃은 아샤는 그를 향해 손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라얀이 가까이 다가가자 아샤는 그의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으며 당겼다. 새까만 머리칼이 엉켰다. 물살에 흩날리는 것이 누구의 것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날 계속 재미있게 해주렴.”
너를 위해서라도. 라얀의 뺨에 속삭이는 입술이 닿았다. 깊은 어둠처럼 가라앉은 보랏빛 눈에 라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 * *
에르하르트는 동굴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삐딱한 시선으로 흰 포말이 부서지는 바다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날카로움과 신경질이 어려 있었다.
두 번이다. 두 번. 약속한 날에 라얀을 만나기는커녕 해석하는 데 한참 걸릴 꼬물거리는 글씨체로 그날 오지 못하겠다는 말이나 적힌 석판을 마주한 게. 차라리 그런 흔적조차 없으면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라도 할 텐데, 뻔히 라얀이 만남을 피하는 게 보이니 예민해졌다.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곰곰이 생각해도 짚이는 것은 없었다. 에르하르트의 입장에서는 방해꾼이나 다름없던 존재를 한참 보지 않게 되었으니 기꺼웠지만 라얀이 워낙 침울해 있기에 내색하지 않고 잘 달래줬다.
그러고 보면 그날 라얀의 반응도 영 이상했다. 갑자기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고 부쩍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제 정체를 들키고도 그런 반응을 보인 적 없었는데.
“이번에는 단단히 말해둬야지.”
에르하르트는 동굴 바깥으로 빼꼼 모습을 드러내는 달을 보다가, 라얀이 들고 갈 수 없어 졸지에 자신이 보관하게 된 인형으로 시선을 옮기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그들이 만나기로 한 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늘 그는 와서 자리를 지켰다. 오늘뿐만이 아니다. 어제도, 그제도 계속 와서 소식도 없는 이를 기다렸다. 또 만남을 미룰 작정이라면 한 번쯤은 들러 무슨 말이든 남겨두고 갈 테니까 그 현장을 잡을 셈이었다.
덕분에 요즘 사교 활동은 진척이 없었다. 에르하르트가 부쩍 날 서자 다들 슬슬 눈치를 봤다. 원래도 그다지 겁이 없는 닐스 카나반 하나만 빼고는.
‘그런데 전하, 그날 동행하신 레이디는 누구십니까?’
에르하르트가 바로 가려버린 탓에 제대로 보지 못한 닐스는 길게 늘어트린 머리와 얼핏 보기엔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운 체형이나 외모를 보고 레이디로 단정 지었다. 그가 손을 잡고 뒤로 잡아끈 것도 착각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레이나가 알면 또 베갯잇을 적시겠습니다.’
닐스 카나반은 에르하르트에게 첫눈에 반해 여태 그를 체념 못 한 게 뻔히 보이는 제 여동생을 언급했다.
‘왜. 동생이 나 때문에 눈물이라도 흘릴까 염려되나.’
‘그럴 리가요. 언제든 전하의 의사가 가장 중요합니다. 전 때론 떼만 쓰면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애가 한 번쯤은 가지지 못하는 것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인지라.’
동생을 떠올리며 하는 것치곤 다소 매정한 말에는 황자의 환심을 사겠답시고 알량한 거짓을 고하는 흔적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나 닐 카나반.
변경백을 온전한 우호 세력으로 두려면 카나반 백작이 어여뻐하는 그녀와 혼인을 서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그의 혼약은 황실과 연을 맺고 싶어 하는 귀족들을 군침 돌게 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유효한 패였다. 그런 만큼 아직 쓸 데가 많아 아직까진 구체적으로 말이 오간 적은 없었다. 하지만 향후 1년 안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결판날 것이다.
레이나든 아니면 다른 영애든 누군가가 베일을 곱게 내리고 제 옆에 설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의 혼사는 가장 계산적으로 이용해야 할 테고, 그럴 예정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에르하르트는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에 모든 생각을 멈췄다.
에르하르트는 숨을 죽인 채 유심히 지켜봤다. 바로 다가가 붙잡는 방법도 있으나 그가 혹시라도 도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린다면 따라갈 방법이 없었다. 이제 물에 빠진 척 허우적거려도 소용없을 것이다.
라얀은 고개만 빼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에르하르트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으므로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그가 자신을 발견하기엔 힘들 것이다.
그보다는 오늘 만날 날이 아닌데도 두리번거리는 건 대체 뭐지. 혹시라도 자신이 있을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건가. 얼굴 마주치기 싫어서? 그렇게 생각하자 이미 빈정이 상해 있던 에르하르트의 인내심이 뚝 끊겼다.
“또 꼼질꼼질 뭘 남겨두고 가려고?”
어둠 속에서 사납게 말을 던졌더니 라얀이 퍼뜩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에르하르트는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에리히. 오늘 약속한 날 아닌데.”
“그러는 너도 왔으면서.”
“어, 어, 약속한 날 온다고 써두려고.”
라얀은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겨우 다짐하고 온 건데, 물론 오늘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 마음의 준비는 전혀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혹시라도 뿔이 난 에리히가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으면 곤란했으니까.
“그, 안녕.”
“…안녕?”
오랜만이니까, 경황없는 와중에도 반가워서 인사를 건넸는데 그게 에리히의 심기를 더 언짢게 한 게 분명했다. 에리히의 눈썹이 위로 쓱 치켜 올려졌다.
“여태 피하더니 안녕 소리가 잘도 나오지.”
일방적인 회피는 제 잘못이라서 라얀은 배시시 웃었다. 어물어물 웃자 에리히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쪽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땅에 대며 몸을 낮추었다.
“…….”
라얀은 그가 가까워지자 마른침을 삼켰다. 자꾸 입술에만 시선이 갔다. 쟤 입술이 저렇게 예쁘게 생겼나. 아랫입술은 왜 또 저렇게 도톰하고. 입술만 뚫어져라 보다 보니 그의 생김새에도 시선이 절로 갔다.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보고 그를 태양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것은 단지 말로만 전해지던 존재를 실제로 접했을 때의 경외와 비슷한 감상이었다. 똑같이 눈코입이 달려 있으니 달리 그의 외양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비교할 만한 대상을 볼 일도 거의 없으니 그런 면도 있었다.
“대체 그동안 왜 피한 거야.”
“너…….”
“응?”
“왜 이렇게, 예쁘게 생겼어?”
“뭐?”
에리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반문했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조금의 거짓도, 과장도 보태지 않고 진짜였다. 금발이야 말하기에도 입이 아프고, 머리 색보다 조금 짙은 눈썹은 가지런했으며 시원하게 뻗은 큰 눈은 새파란 바다를 품은 채 별처럼 빛났다.
살결은 희고, 턱선은 유려했다. 아티사에서 에리히만 한 인물을 곰곰이 떠올려봤지만 손가락 세 개도 간신히 접었다.
“지금 대체,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하는 거야.”
에리히는 여전히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반박했다.
“예쁜 건 너, …아니, 이게 아니라 라얀. 대답하기 싫어서 지금 수 쓰는 건 아니겠지?”
의심을 하기까지 했다. 라얀은 억울했다. 인어인 자신을 홀리게 할 정도로 아름답게 생겨서 그렇다고 말했을 뿐인데 이런 반응이라니.
“말 돌리지 말고 말해. 왜 안 왔어.”
“안 온 건 아닌데…….”
에리히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그러면 왜 날 피해?”
“그건.”
라얀은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라얀.”
라얀이 또 입을 꾹 다물자 에리히는 한숨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얀은 그를 빤한 눈으로 바라봤다. 굳이 유리가 조언한 대로 입을 맞추지 않아도 알겠다. 단지 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갈피 못 잡던 마음에 가닥이 잡혔다.
에리히가 좋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래로 꺼졌다가 튀어 오르기를 반복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조차 아쉬웠다. 닿고 싶었고,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었다. 그는 인간이고 자신은 인어라는 장벽조차 하잘것없이 느껴졌다.
“어딜 가려고.”
라얀은 달아오르는 뺨을 식히기 위해 잠깐만 수면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그것을 또 피한다고 착각한 에리히가 손목을 붙들었다. 최대한 면적은 닿지 않도록 공간을 벌리면서.
“라얀. 말을 해야 알지.”
그러고는 금방 손을 거두며 달랬다.
“응?”
“…….”
“혹시 내가 너한테 뭘 더 잘못했어?”
그럴 리가. 에리히는 2년간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잘못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최근엔 어쩌면 라얀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건네며 다독여주지 않았던가. 그는 다정했다. 눈물이 날 만큼.
“…라얀?”
그래서 제 이런 감정이 다정한 에리히를 돌아서게 할까 봐 무서웠다. 그저 깊게, 아주 오래 슬플 줄로만 알았는데 겨우 그 정도에 국한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원래 이토록 근원 모를 두려움과 불안을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것인지 진작 알았다면, 라얀은 에리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 아니다. 라얀은 결국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말하기 싫은 거면 말하지 않아도.”
“에리히.”
라얀은 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잡아 제 가까이 끌어당겼다. 에리히는 순순히 따라주었다.
“엘.”
또 부르는 말에 에리히는 대답하는 대신 라얀을 바라봤다. 푸른 눈을 감싼 금색의 속눈썹이 달빛을 받아 부서질 것처럼 가늘게 흔들렸다.
“말해. 뭐든 다 괜찮으니까.”
속삭이는 숨결이 뺨에 닿아 보듬어 안았다. 라얀은 입을 맞추었다. 에리히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에리히. 그거 알아?”
“지금 무슨.”
그들은 자주 입을 맞췄으나 그것들은 전부 호흡을 불어 넣기 위한 행위였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마치 마음을 나누듯이 입술을 머금은 적은 없었다. 에리히는 적잖이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몰랐는데 인어들도 입술을 맞춘대.”
“…….”
“사랑하는 존재에게.”
라얀은 당혹스러운 표정인 그를 향해 속삭인 뒤 다시 한번 담백하게 입술을 맞추고 뺨을 놓았다. 그러곤 거리를 벌렸다. 그가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한 절대 붙잡히지 않을 만한 거리였다.
하지만 에리히는 거리를 벌린 것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빠져 있었다.
“에리히. 우리, 어, 열 밤 자고 만나! 안녕!”
라얀은 그런 그를 가만 보다가 통보하듯 약속 날짜를 정하고 물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라얀!”
도망가려던 건 아니었는데 지금은 에리히를 볼 각오가 되지 않았다. 약속한 날에 오면, 그때는 도망치지 않고 어떤 말이든 온전히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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